세계 곳곳에 불고 있는 도시화(Urbanization, Citification) 바람은 꺾일 줄 모르고 진화하는 추세가 뚜렷하다. 물론 대형 빌딩이 지닌 물리적 인구 흡입력과 첨단 IT 융합 현상이 도시화를 가속시키는 데 큰 몫을 하고 있지만, 도시 속 대형 빌딩들이 숲을 이루면서 나름대로 뿜어내는 예술성도 배제할 수 없는 원인일 것이다. 그것은 빌딩 건축물을 예술적 감각이 배어 있는 대형 조형물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계 각지에 널려 있는 건축예술품만을 찾아나서는 전문 관광객 그룹이 얼마나 많은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3년 전에 건축가 중심의 동호인 25명이 독일에서 서울을 찾아오더니, 금년에도 45명이 찾아오겠다는 전갈을 받았다. 서울에 산재한 도시 빌딩이 지닌 조형적 아름다움을 보기 위함이다. 당시 서울을 찾은 독일 건축가들은 한결같이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를 보는 것만으로도 서울을 찾은 보람이 있다고 입을 모았다. 하기야 ‘DDP’는 세계적 건축가 ‘자하 하디드(Zaha Hadid, 1950~2016)’의 마지막 작품이기도 하지만, 세계 각 도시에 산재한 그녀의 작품 중에서도 최우수 작품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평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2020년 도쿄올림픽조직위원회가 메인스타디움 디자인 공모를 하면서, 건축설계자로 ‘자하 하디드’를 선정했다. 그러나 일본 내 강한 반대 여론에 봉착하고 말았다. 막대한 건축비를 반대한다는 이유를 내걸었지만, 일본 건축계가 자존심이 많이 상해서라는 게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세계적인 건축가 ‘자하 하디드’의 명성을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래서 우리는 세계적인 건축가 ‘자하 하디드’의 생애 마지막 작품인, 대형 조각품 같은 건축물이 서울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에 더욱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가 아끼고 가꿔가야 할 새로운 개념의 문화재가 아닌가 싶어서다.
이성낙 현대미술관회 前 회장
독일 뮌헨의대 졸업(1966), 연세대학교 의대 피부과 교수, 아주대학교 의무부총장, 가천의과대학교 총장, 가천의과학대학교 명예총장(현), 한국의약평론가회 前 회장, 간송미술재단 이사.
남자들이 퇴직 하면서 꾸는 꿈이 있다. 그동안 일벌레처럼 직장에 충성하며 소홀히 했던 가정에 이제 봉사하는 삶을 살겠다는 거다. 새벽같이 출근하고 별을 보고 퇴근하느라 아내에게도 자녀들에게도 신경을 제대로 쓰지 못한 미안함 때문이다. 그래서 남은 인생은 적어도 아내에게만은 그 역할을 다하겠다고 다짐한다. 아내와 많은 시간도 갖고 시장도 보고 여행도 하면서 지내려는 소박한 꿈을 갖는다. 그 소박한 꿈이 소원대로 이루어질까?
얼마 전 교육공무원인 남편을 둔 어느 부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남편이 퇴직하고 집에 있다는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래서 끝까지 다니라 했는데 명예퇴직을 신청했다고 불만이 대단했다. 남편이 퇴직하고 집에 있다면 숨이 막혀 버릴지도 모른다고 했다.
남편의 명예퇴직 신청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퇴직이 3년 더 남았지만 남은 월급도 미리 다 받게 되고 연금법이 바뀌면 유리할 게 없다는 판단이었다. 명퇴금도 받고 금전적으로도 손해 볼 것도 아니고, 이제 더 있을 이유도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학교가 옛날처럼 선생님들의 권위가 살아 있는 것도 아니고, 아이들을 다루기도 힘들다고 했다. 아이들에게 시달리는 것도 힘들고, 옆에서 너도나도 명퇴한다고 하는데 자신만 버티는 것도 견디기 어렵다고도 했다.
남편의 논리도 일리가 있다. 문제는 갑작스럽게 닥칠 환경의 변화를 부인이 받아들이기 버거운 상황이었다. 이제 자기 나름대로 생활에 익숙해졌는데 미리부터 다른 환경에 적응하려니 달갑지 않은 것이다. 부인은 나름 바쁘게 생활하고 있었다. 취미 활동도 열심이고 친구들과 모임도 많았다. 언제든지 갈 데가 있었고 자유롭게 다녔다.
남편은 밥상 한 번 차리는 법이 없었다. 오직 차려주는 것만 먹을 줄 알았다. 남자는 밖의 일만 열심히 하면 되지 부엌에 들어가면 안 된다고 배운 권위적인 집안이었다. 여자는 남자를 부엌에 들어오게 해서는 안 된다는 고정관념도 그 집안의 가풍이었다. 여행을 가면 늘 부부가 싸웠다고 했다. 가족 넷이 주로 다녔는데 아마 둘이 가면 더하면 더 했지 덜하지 않을 거라고도 했다. 그러니 부인은 남편의 퇴직이 두려운 것이다. 이 상황을 어찌 정리해야 할까?
요즘은 부부의 위기 시대라고도 한다. 평균 수명도 길어져 앞으로 살날도 많은데 부부가 이렇게 달라서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미리부터 함께 지내는 연습이 필요하다. 갑작스러운 퇴직으로 집에 있는 것이 아니라 뭔가 서로의 접점을 찾아야 한다. 남편은 퇴직했다고 아내에게만 의지하지 말고 새로운 일을 찾고 취미 활동 등을 통해 이 상황을 극복하려 노력해야 한다.
새로운 환경의 부부생활은 ‘따로 또 같이’라는 관계설정이 중요하다. 무엇보다 상대를 배려하고 이해하려는 마음이 필요하다. 그동안 가정을 위해 열심히 살았으니 이제 천천히 쉬면서 하고 싶은 일을 찾아보라는 인정도 중요하다. 일해 왔던 사람들은 그렇게 놀기가 쉬운 것이 아니다. 심심해서 죽는다는 말도 그래서 나왔다. 평생 몸에 일하는 유전자가 형성되어 있는데 꼼짝 않고 있는 것이 더 고역이다. 두려워하지 말고 오리려 좀 쉬라고 위로해 주는 것이 훨씬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부부간의 공동취미 생활을 찾는 것도 중요하다. 탁구나 배드민턴같이 쉽게 할 수 있는 운동도 좋고 등산도 좋다. 영화를 함께 보거나 음악회를 찾아 문화 활동을 하는 것도 좋다. 퇴직 후에도 몇십 년을 함께 살아야 한다. 미리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 우리의 삶도 가끔은 출구전략이 필요한 것 같다. 안전하게 제2의 삶을 위해 안착하는 일이다.
아내도 남편도 서로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아내가 해왔던 생활을 존중하면서 나 자신의 삶도 사는 ‘따로 또 같이’하는 삶이다. 부부가 서로 의지하고 노후를 살아가는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거기에는 부부 서로 간의 이해와 관심과 미리 함께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은퇴한 국제 분쟁 전문기자 연옥과 저명한 역사학자 정민. 두 중년 남녀가 매주 목요일 각기 다른 주제로 토론을 이어간다는 독특한 설정이 돋보이는 연극 . 작품을 창작한 황재헌 연출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중년을 주인공으로, 목요일마다 토론을 한다는 설정을 연극으로 구상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몇 해 전, 알베르 카뮈의 무덤 앞에서 시시포스(Sisyphus) 신화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남녀관계의 본질이 그 안에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더불어 오래전에 읽었던 프랑스 소설 한 편이 떠올랐습니다. 황혼을 바라보는 남녀의 이야기였습니다. 신화와 소설을 내용과 형식으로 삼아 작품을 구상했습니다.
초연 또는 지난 공연과 비교해 달라진 점이 있다면요?
극장 구조에 맞게, 관객과의 직접적인 교감을 강화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주인공의 개성과 매력에 설득력을 더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전체적으로는 좀 더 여유롭고 부드럽게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저 역시 나이를 먹었기 때문에, 세상과 작품을 바라보는 시야가 조금 달라졌습니다.
연출뿐만 아니라 직접 극본도 작업했는데요. 주인공의 대사 중 가장 공감하는 대목은 무엇인가요?
극 중에서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한 연옥의 모습을 바라보며 정민은 이렇게 말합니다. “제발, 너한테 거짓말 좀 하지 마”라고요.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 그리고 받아들인다는 것. 모든 불행과 행복의 근원이 거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젊은 배우가 주인공인 연극과 비교해 중견 배우들을 중심으로 하는 연극에서 얻는 시너지가 남다를 것으로 보입니다.
우선 소재의 다양성을 담보할 수 있습니다. 요즘은 젊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니까요. 더불어 중견 배우들의 연기에는 삶의 경륜이 묻어나옵니다. 그 연륜과 내공만큼 관객에게도 훨씬 더 깊은 울림을 전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고민을 안고 있는 중장년이 보았을 때 위로받을 수 있는 연극인가요?
애인, 부부, 부모 자식 등등. 남자와 여자가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형태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입니다. 관계에 대한 고민에 빠진 모든 분들에게 권하고 싶습니다. 새로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 황재헌 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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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
대학로 드림아트센터, 6월 27일~8월 20일, 윤유선, 진경, 성기윤, 조한철, 김수량 등 출연
풍경소리도 잠이 덜 깬 조용한 아침.
바늘 끝 하나 박을 수 없을 것 같이 꽉 찬 세상을 뚫고 넓은 대웅전을 빠져나온 독경소리처럼 일주일에 두 번 거실에 울려 퍼지는 인터넷 영어방송.
기저귀 차고 출발해 수의라는 마지막 패션 쑈로 끝내는 게 인생인데, 젊음, 결혼, 고생자체가 마냥 즐거움이었고 재미였던 아이 키우기도 끝내고 이제 단 두 식구만 남았다.
우리는 장수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 누구나 안다.
그만큼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것도 누구나 안다.
해야 할 일이 많으니 공부도 많이 해야 한다는 것도 누구나 안다
단지 무엇을 할지 모를 뿐인 때 둘만이 남겨진 지금도 뭔가 또 해 보겠다며 뛰고 또 뛰는 일상에서 찾은 게 외국어 배우기라는 아내.
차를 타고 어딘가를 갈 때면 네비게이션이 친절하게 안내해준다
새로운 경로를 탐색합니다.
5km 이상 직진하십시오. 800m 앞에서 유턴하십시오.
누군가 우리네 인생길도 이렇게 알려주면 얼마나 좋겠는가.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은 내가 가고자 한 길인지, 다시 돌아가야 하는 길인지는 누구도 모른다. 네비게이션 같은 인연이 우연이란 이름으로 알려주는 내 인생이 마무리 될 때 장식할 것 중 하나가 무엇인가 배우는 것이라면 그 중 하나를 영어라 생각하고 싶다는 아내.
피터팬의 작가 제임스 벨은 행복이란 내가 좋아서하는 일보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나 내가 해야 하는 일에서 재미와 즐거움을 찾는 것이다라고 했다.
아마도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란 내 한 사람의 생각의 한계가 있으니 행복의 양이 적을 것이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이나 해야 할 일에서 재미와 즐거움을 찾는 것은 누군가 자신의 일에서 신나고 재미있게 일을 하면 곁에서 보는 사람도 흥미와 호기심이 생겨 그 일에 관심을 갖게 되어 가까이 오게 될 것이다. 그때 오는 한 사람 한 사람은 무엇이든 내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갖고 있을 것이니 그런 사람들이 모이면 시너지 효과가 생겨 행복의 양은 무한대가 될 것이라고 해석해본다.
그러나 나이 먹고 세월이 흐르면 젊은이와 달리 확률적으로 남은 시간이 적으니 얼마 남았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먼저 해야 된다는 생각으로 나는 나를 위해 영어 공부 하겠다는 아내.
그렇다 보니 가장 행복한 사람은 모든 것 훌훌 털고 내가 행복이라 생각한 길을 가는 사람이란 생각이 점점 설득력이 생기는 것 같다.
군대에 있을 때 적을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 하는 방법 중 하나는 내가 적군의 입장에서 나를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총 동원하여 나를 공격해 보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적의 취약점과 나의 허점을 찾아 내 허점은 보강하고 적군의 취약점을 나도 수단과 방법을 총 동원해 효과적으로 공격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얼마 남았는지 모르는 인생이지만 삶의 끝에서 후회하지 않는 방법 중 하나는 내가 좋아하고 잘 하는 것을 찾아 효과적으로 공격해 보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정작 영어공부하는 당사자보다 곁에서 침묵하고 도와주는 자의 고통도 만만치 않게 크다는 것을 과연 본인은 알까.
요즘처럼 청개구리 동화가 실감나는 때도 없었던 것 같다.
인생 황혼기에 맞은 손님
감독 토마스 맥카시
주연 리차드 젠킨스, 히암 압바스
제작연도 2007년
상영시간 104분
20년째 코네티컷의 한 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는 장년의 교수 월터 베일(리차드 젠킨스). 단조롭고 열의 없는 나날을 무기력하게 이어가던 월터는 논문 발표를 위해 뉴욕 출장을 갔다가, 오랫동안 비워두었던 자신의 아파트에서 불법 체류자인 타렉 칼릴(하즈 슬레이만)과 자이납(다나이 거라이라) 커플과 마주친다. 월터가 갈 곳 없는 젊은 커플에게 잠자리를 제공하자, 타렉은 감사의 뜻으로 월터에게 자신의 생계 수단인 젬베(Djembe 혹은 jembe; 아프리카에서 기원한 원추형 모양의 가죽 드럼) 연주를 가르쳐준다.
타렉과 함께 센트럴 파크에서 젬베를 연주하면서 이따금 미소를 짓게 된 월터는 타렉이 불법 이민자 단속에 걸려 수용소에 들어가자 타렉과 자이납, 그리고 소식 없는 아들을 찾아온 타렉의 어머니 모나 칼릴(히암 압바스 Hiam Abbass)의 운명과 얽히게 된다.
모든 좋은 영화가 그러하듯 의 초반부는 주인공 월터의 무뚝뚝한 캐릭터와 잿빛 삶을 이렇다 할 대사 없이 간결하게 전한다. 무거운 짐을 들고 밤거리를 걷는 월터의 처진 어깨, 귀가하여 홀로 와인을 마시는 월터의 쓸쓸한 표정. 얽은 얼굴에 안경을 걸친 반대머리 월터는 먼저 말을 걸어보고 싶을 만큼 호감 가는 인물이 아니다. 개인 사정으로 리포트가 늦었다고 사정하는 학생을 냉정하게 내쫓는 그의 유일한 관심은 피아니스트였던, 그러나 세상을 떠난 지 오래된 아내와 함께 듣던 클래식 음악 감상뿐. 아내의 피아노로 교습을 받아보기도 하지만 선생들 잔소리가 듣기 싫어 번번이 내쫓고, 마침내 네 번째 선생 바바라(마리안 셀데스)로부터 “당신은 재능을 타고 나지 못한 사람이다. 그 좋은 피아노를 팔려거든 내게 팔아라”는 말을 듣기에 이른다.
월터가 학회에서 발표한 논문마저 공동저자가 아닌, 단지 이름을 빌려준 것뿐이고 새 책을 거의 다 써가고 있다고 했지만 아직 손도 대지 못했고, 한 과목뿐인 강의도 성의 없이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월터의 지루하고 무기력한 삶이 전제로 묘사되었기에, 자신의 집을 점거한 불법 체류 외국인 커플을 다시 불러들여 잠자리를 제공하는 설정은 설득력을 갖는다. 또 타렉과 자이납이 채 챙겨가지 못한, 그들의 다정한 한때를 담은 사진, 그리고 월터가 창밖으로 내려다본 밤거리에서 초조하게 잠자리 구걸 전화를 거는 커플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관객의 공감을 얻어내는 세심한 연출력을 발휘했다.
월터가 젬베 연주에 금방 빠져드는 장면 또한 월터가 클래식 음악을 즐겨 듣던 음악 애호가라는 초반의 설정 덕분에 쉽게 이해가 된다. 월터를 경계하는 진중한 자이납과 달리 낙천적이고 영리한 타렉은 월터에게 차근차근 연주의 기쁨을 가르치며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똑똑한 사람이지만 젬베 연주 때는 생각하지 말고 두드려야 한다. 4박자 클래식에 익숙하겠지만 아프리카 리듬은 3박자다.”
시리아에서 왔다는 타렉이 아프리카 타악기인 젬베를 연주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건 자이납과 젬베뿐이다”라고 설명하는 대사에서 짐작되듯 타렉은 세네갈 출신인 자이납을 깊이 사랑한다. 이처럼 음악이 중동인 타렉과 아프리카인 자이납을 연결시켜주었듯, 백인 월터와 중동인 모나의 내적 교류에도 큰 몫을 한다.
학사 일정 때문에 코네티컷으로 돌아간 월터가 바바라에게 피아노를 주는 장면은 과거의 아내 혹은 그녀의 음악과 이제 거리를 두기로 했다는 결심으로 읽힌다. 반면 그가 뉴욕 집으로 돌아왔을 때 모나가 청소를 하며 월터 아내가 연주한 클래식 CD를 듣고 있는 장면은, 음악이 이들을 연결시켜주고 있다는 은유로 읽힌다. 월터는 CD를 하도 많이 들어 거의 외우다시피 했다는 모나를 위해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브로드웨이의 마제스틱 극장에서 장기공연 중인 을 예매한다. 타렉이 수용소에 갇혀 있는 절박한 시점에 만난 낯선 장년 남녀가 뮤지컬 감상을 통해 웃음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학교 수업에 관해 이야기하기를 꺼리는 월터는 “책을 안 써본 사람과는 말이 쉽지 않다”며 모나의 관심을 일언지하에 끊어버리지만, 결국엔 자신이 “바쁜 척, 책을 쓰는 척했지만 일에서 손 놓은 지 오래다. 남의 논문만 읽고 똑같은 과목을 20년 강의했을 뿐이다”라고 고백한다. 모나는 진심을 말해줘 고맙다며 “교수가 아니면 뭐가 되고 싶었냐?”고 묻는다. 모르겠다는 월터에게 모나는 ”그래서 더 신나지 않나요?“라며 웃는다. 낙천적인 타렉의 어머니답게 모나 또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강인한 여성임을 드러내주는 대사다.
런던에 사는 아들이 있다는 대사만 있을 뿐, 월터 아들의 존재는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아들과 살갑게 지내지 않는 듯해 보이는 그가 타렉에 대한 관심과 보살핌은 아들에 대한 속죄의 마음일 수 있고 이는 아들을 위해 자신의 행복을 기꺼이 포기하는 모나의 깊은 모성과도 연결된다.
는 아무런 사건도 인연도 없이 생의 끝점에 이를 것 같던 월터의 삶에서, 음악을 매개로 한 이국인들과의 만남이 얼마나 큰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9·11 사건 후의 미국 정부(는 2007년 작품이다) 태도가 다인종 국가인 미국의 정체성을 얼마나 훼손하고 있는지를 간접, 직설적으로 지적하기도 한다.
타렉이 지하철에서 경찰의 불심 검문을 받고 끌려갈 때 월터가 경찰에게 진정하라며 신음하듯 내뱉던 외침, 퀸즈의 불법 체류자 수용소 외관을 창고처럼 보이게 의도했다는 월터와 모나의 대화, 모르겠다고만 하는 수용소 직원들에 대해 “시리아와 똑같다”(저널리스트였던 모나의 남편은 반정부 글 때문에 7년을 징역살이하다 죽었고, 그 때문에 모나는 아들 타렉을 데리고 미국으로 왔으며, 본국 귀환 명령서를 받고도 이를 무시한 채 타렉을 키웠다고, 시리아로 떠나기 전 날 밤 월터의 품에 안겨 고백한다)고 하는 모나의 탄식, 타렉이 강제 송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월터가 외치는 절규 등이 그러하다.
거리, 관공서, 공항에서 인물 뒤로 보이는 거대한 성조기. 수용소 벽에 쓰여 있던 구호 ‘미국의 힘은 이민자들로부터’도 그렇고, 자유의 여신상 그림도 마찬가지다. 모나는 “까매도 너무 까맣다”며 놀랐던 아들의 연인 자이납을 만나 아들이 좋아했던 장소로 데려가 달라고 한다. 자이납, 모나, 월터가 자유의 여신상을 바라볼 수 있는 페리를 타게 된 연유다. 그때 모나는 월터에게 묻는다. 자유의 여신상에 올라가본 적 있냐고. 월터는 한 번도 꼭대기에 올라가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미국을 대표하는 주인공 월터는 이민자들이 미국의 상징으로 여기는 것들, 즉 자유의 여신상이나 브로드웨이 뮤지컬에 전혀 관심 갖지 않고 살아온 것이다. 그랬던 월터가 세 사람과 만나면서 국가를 대신해 사과까지 하게 된다. “저들이 나를 테러범 취급한다”며 불안해하는 타렉에게도, 추방된 타렉을 따라 시리아로 돌아가기로 한 모나에게도 미안하다고 중얼거리는 월터(하필 그의 세미나 발표 주제는 ‘개발도상국 경제’란다). 국가를 대신한 월터의 사과는 통상적인 할리우드 영화처럼 해피엔딩에 이르지 못한다.
수용소로 면회 갔을 때 유리벽을 마주하고 탁자와 가슴을 두드리며 협연을 할 만큼 음악을 사랑하고 마음이 통했던 월터와 타렉. 타렉이 “손님이 많은 저기서 연주하고 싶다”던 지하철 바로 그 공간에서 월터는 홀로 젬베를 연주한다. 이 마지막 장면은 여운과 기대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인정케 한다. “월터가 우리를 경찰에 고발할 거야”라며 두려워했던 자이납의 경계심은 우려로 그쳤지만, 그 불안의 정체는 월터 개인이 아닌 미국이라는 국가였음을 알게 해준다.
엄혹한 현실을 인정하며 절제된 감정으로 긴 여운을 남기는 는 뉴욕대학의 케보키안 센터, 킴벨 센터, 헌드레드 에이커스 레스토랑, 그리고 타렉이 연주하는 이스트 빌리지의 뱀부 하우스와 줄스 비스트로, 자이납이 직접 만든 액세서리를 파는 소호의 길거리 시장 등을 뉴욕의 명소가 아닌, 시민권자도 불법 체류자도 함께 살아가는 공간으로 묘사한다.
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안정적인 카메라(올리버 보켈버그), 음악, 그리고 연기다. 클라식과 젬베 연주가 화답하는 영화답게 베토벤의 ‘Sonata No. 21 in C Major’가 흐르는가 하면, 타렉으로 분한 하즈 슬레이만이 직접 협연에 참여한 ‘Darius Blues’와 ‘In Memory of the Dead’와 같은 재즈풍 연주가 청각을 만족시킨다.
연기 앙상블이 빼어난 것은 감독 토마스 맥카시가 배우 출신이라는 것과 무관해 보이진 않는다. (2005), (2005), (2006) 등에 출연해온 조연 배우 토마스 맥카시는 2003년 직접 각본을 쓴 독립 영화 로 선댄스, 산세바스티안, 스톡홀름 등의 영화제에 초대되었다. 역시 직접 각본을 쓴 와 (2011)도 데뷔작과 마찬가지로, 소외된 중장년층의 소통을 담백하게 그려내 잔잔한 감동을 안겨줬다. 세 작품 모두 톱스타가 아닌, 그러나 연기력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배우들을 캐스팅하여 아카펠라 화음을 이끌어냈는데 그 솜씨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전 세계 영화제에서 18개의 트로피와 17번의 후보 지명을 받은 는 로버트 젠킨스에게 2009년 아카데미영화제 남우주연상 후보와 2008년 모스크바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안겨주는 등 네 명의 주연 배우와 조연 배우들의 연기 앙상블이 각본과 연출보다 더 많은 주목을 받았다.
1953년생 리차드 젠킨스를 주연으로 캐스팅한 건 미국판 리메이크 실패작인 (2004) 촬영장에서, 젠킨스의 부드러운 음성과 눈빛을 확인한 후라고 한다. 리차드 젠킨스는 “나를 주연으로 하면 제작비 조달이 어려울 텐데”라고 우려했다고 한다. 토마스 멕카시 감독은 "의 아이디어는 베이루트를 여행했던 나의 경험에서 가져왔으며, 한 사람의 삶이 우연한 짧은 만남으로도 영향받을 수 있음을 그리고 싶었다"고 인터뷰한 바 있다.
21세에 미국으로 이민 온 레바논 출신의 하즈 슬레이만과 미국으로 이민 온 짐바브웨 출신 부모에게서 태어난 다나이 거라이라 모두 로 연기력을 인정받았지만 아직은 TV가 주 무대다.
이 두 젊은이보다 더 오래 시선을 사로잡는 기품 넘치는 여배우들이 있으니 히암 압바스와 마리안 셀데스다. 1960년, 이스라엘 나사렛 출신인 히암 압바스는 에란 리클리스의 (2004)와 (2008), 아모스 기타이의 (2005) 등에 출연해온 이스라엘 대표 여배우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2005) 등에도 출연하며 반경을 넓히는 한편, 연기 지도까지 병행하고 있는 재원이다. 단 두 장면 출연으로 위엄을 보인 마리안 셀데스는 1928년생. 토니상 수상에 빛나는 ‘브로드웨이의 디바’로 무대와 브라운관, 스크린을 넘나들며 멋있게 늙어가고 있다. 히암 압바스가 더 나이 들면 마리안 셀데스처럼 따뜻한 위엄이 더해지지 않을까 싶다.
나이가 들수록 더 바빠지는 사람이 있다. 백승우(白承雨·59) 그랜드하얏트 서울 상무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하루 24시간도 부족할 것 같은 백 상무는 자신만의 시간관리로 호텔리어, 사진가, 교수, 궁궐문화역사 해설가, 작가 등 다양한 활동을 즐겁게 하고 있다. 최근 클래식 오케스트라 활동을 하고 싶다며 취미로 콘트라베이스를 배우고 있으며 그에 더해 오디오 수집에도 도전 중이다. 놀라운 것은 이 모든 활동이 단순한 아마추어 수준을 넘어서 프로의 경지로 인정받고 있다는 점. 그가 취미의 고수로 삶의 활력을 얻고 있는 비결을 들어보자.
백승우 그랜드하얏트 서울 상무는 자신의 사진 작업을 ‘취미’라고 부르자 무슨 소리냐고 반문했다. 하긴 그럴 만도 하다. 지난 2016년 7월 파리 ‘La Capital Gallery’ 초청의 사진전 에서 그의 전 작품이 솔드아웃됐다. 뿐만 아니라 2017년 4월에 파리 샹젤리제 ‘The Gallery Boa’ 초청으로 아시아 최초 개인 사진전이, 11월에는 ‘La Capital Gallery’ 특별 초청으로 개인전이 예정되어 있다. 도저히 취미라고 할 수 없는 완전한 프로 작가. 전시할 때마다 작품이 매진될 정도로 그것도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원숙한 작가의 모습이다.
파리 ‘The Gallery Boa’ 초청 아시아 최초 개인 사진전
“파리 샹젤리제나 뉴욕에 초대받는 건 극히 드문 일이죠. 지난번 전시에서 18점을 전시했는데 첫날에 모두 솔드아웃됐습니다. 그리고 계속적으로 탑 갤러리에서 초청 전시가 열리고 있는 중이죠.”
그는 이미 2009년에 ‘The Window 시리즈’를 강남의 일반 상업 갤러리에서 전시한 바 있으며 그때도 대규모로 판매가 이뤄졌다고 한다. 당시 작품은 포스코와 호텔 등지에서 주로 구매가 이뤄졌다고. 그렇다면 사진으로 얻는 수익도 꽤 되겠다 싶어 물었더니 그는 손사래를 쳤다.
“다음 작품 준비하고 카메라 살 정도 들어와요. 제가 기자재비가 많이 들어가는 편이라. 이번 전시는 프랑스 쪽 은행과 정부 기관에서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해요.”
10여 년에 걸친 사진 프로젝트들 진행 중
프로 작가답게 그는 사진 작품의 제작을 특정한 테마를 잡고 장기간에 걸쳐 진행하고 있다.
“‘The Window 시리즈’를 10년, ‘My Korea’ 시리즈를 12년 동안에 걸쳐 만들었습니다. The Window 시리즈를 하면서 두세 가지 전시를 준비 중에 있어요. 당장 6월부터는 유럽의 아트 퍼니처(예술과 가구 디자인을 접목한 개념으로 예술적 디자인이 자연스럽게 가미된 일상 속 가구) 작가와 제 작품을 컬래버한 전시가 1년 동안 잡혀 있습니다. 제 작품의 테마는 나무가 될 거예요.”
그의 말에는 유난히 힘과 자신감이 실려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그가 ‘제대로 한국을 소개하고 싶다’는 생각에 12년 동안 진행한 ‘My Korea’ 사진 작업은 같은 제목의 책 로 정리되어 그에게 작가라는 직함을 하나 더 달아줬다. 텍스트가 모두 영어인 이 책은 반응이 좋아 속편을 발행하기로 했다. 책을 쓰는 작가로서의 성과 또한 성실히 거두고 있는 중이라는 얘기다.
일하는 데서 작품의 소재 찾아
사진작가 외 백 상무의 다채로운 취미활동들을 살펴보자. 그는 교수이기도 하다. 본업인 호텔리어로서의 역량은 대학원과 석·박사 과정에서 호텔경영학과 경제학 등을 가르치는 자리를 마련하게 했다. 또 궁궐문화역사 해설가이기도 하다. 문화재에 관한 사진을 찍으려면 알아야 할 지식이기도 했거니와, 가장 큰 문제는 일반인의 신분으로서는 문화재를 마음대로 찍을 수가 없었다. 그 순간 그는 발상의 전환을 했다.
‘그럼 내가 문화재청 해설가를 하면 자유롭게 드나들면서 작품을 만드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 1년에 걸친 공부 끝에 그는 해설가 자격증을 땄다. 그의 사진 작품 세계가 더욱 점프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이러한 활동은 철저히 호텔리어로서의 본업을 지키면서 진행하고 있다. 그는 일하면서 작품의 소재를 찾는 게 어렵지 않냐는 질문에 전혀 어렵지 않다고 대답했다.
“저는 일하는 데서 사진을 찍을 소재를 찾아요. 그러니까 백 퍼센트 호텔이 배경이죠. 출장 가서 남는 시간에 촬영을 하는 거예요. 주말에 일부러 어딘가를 가서 찍은 적은 없어요. 직장에서 일하는데 시간이 어딨어요?”
60대 이후의 인생은 40대부터 준비하라
마치 물 흐르는 것처럼, 은퇴를 맞이하면서 동시에 제2의 삶을 시작하고 있는 그의 성공에는 거침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닌 법. 그는 자신의 성공이 결코 운이 따라줘서 된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렇게 되기까지 그가 투자해야 했던 시간과 노력은 결코 만만치 않은 것이라는 설명이다.
“은퇴하면 모두 해외여행을 떠나요. 갔다 와서 돈이 떨어지면 자전거 타고 색소폰 불고 산에 가 있어요. 이게 (은퇴 후 삶의) 다예요. 그 세 가지를 하다가 그것들마저 안 되면 근처 친구들과 소주를 마시죠. 그러다 몸이 아프면 집에 있게 되고 가족들과 싸우게 돼요. 결과적으론 남들이 입어본 옷이 멋있으니까 자신도 입어보는데 자기한테 맞지 않는 거죠. 왜 그런가 하면 준비를 안 해서 그래요.”
그는 60대 이후의 인생은 40대부터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제적인 준비를 하면서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여러 가지 시도를 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자전거도 타보고 교육도 받고 사진도 찍고 등산도 하고…. 다양한 걸 하면서 실패를 겪어야 합니다. 실패하다 보면 그중에 자신이 좋아하는 게 걸리게 돼 있어요. 저도 사진을 좋아한 건 아니에요. 그런데 동료였던 일본인 아다치씨가 나보고 일만 한다고 취미를 가지라면서 저에게 카메라를 줬어요. 그러면서 시작된 거죠. 저는 세상에 태어나서 이런 걸 하게 될 줄은 전혀 몰랐어요.”
적어도 10년은 투자해야 고수가 된다
그는 그렇게 해서 자신에게 맞는 게 걸리면 그것에 10년은 투자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그래야 은퇴할 때가 되면 남을 가르치면서 즐기는 게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그게 안 되면 돈만 많이 쓴다는 게 그의 일침이다.
“40대 넘어가면 앞으로 20년은 짧아요. 저는 2007년에 처음으로 개인전을 했어요. 그게 10년 전이죠. 그때부터 했으니까 이제 파리에서 전시도 하는 거지 갑자기 파리에서 전시회를 연다는 게 말이 되나요.”
그는 또한 취미를 익히는 노하우로 전문가를 꼽았다. 자신은 뭔가를 한다고 하면 최고의 고수를 찾아간다는 것이다. 그가 사진을 배울 때는 진동선 광주비엔날레 총감독을 만났다. 두 사람 사이는 나중에 함께 미학 논문을 쓸 정도로 발전하게 됐다.
최고의 전문가에게 배워라
그가 최근에 열중하고 있는 취미 중 하나는 오디오다. 마치 사진을 처음 접했을 때처럼 그는 그냥 시작하면 안 될 거 같아 오디오 책으로 유명한 파워 블로거이자 건축가인 박준씨에게 메일을 보내 오디오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고수라고 불리는 오디오 파일(오디오 마니아를 가리키는 말)들과 3년을 함께 다녔다. 또한 클래식을 배우기 위해 음대 교수들에게 3년 동안 지도를 받기도 했다. 그 결과 이제는 오디오를 들으면 오디오 너머의 악기 위치가 보인다고 한다. 듣는 게 아니라 음악이 보인다고.
그가 요즘 배우고 있는 콘트라베이스도 전문가를 찾는 그의 취미 철학이 적용된 경우다.
“전주에 사진에 관해 5년간 강의할 일이 있었어요. 그때 그룹 중에 한 명이 정형외과 의사였는데 기타를 칠 줄 알았죠. 그가 제게 콘트라베이스가 잘 어울리고 잘할 것 같다고 추천했어요. 그 얘기를 듣고 2년을 고민하다가 바로 악기를 샀죠. 지금 2년 반째 독일 마인츠 국립교향악단 단원에게 개인지도를 받고 있어요. 어려워요(웃음).”
최고의 고수를 만나 학습하고 훈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는 고수를 만난다고 해도 노하우 전수가 잘 안 될 수도 있다는 걸 인정했다. 그래서 그는 고수를 만나면 무엇보다도 정직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에티튜드가 중요해요. 배우는 일에 있어선 학생이 되어야 하는 거죠. 스승이 나보다 어리다고 무시하면 안 됩니다.”
제대로 된 공부로 거듭난 제2의 인생
무엇을 해도 주저하지 않고 정직하게 접근하는 그에게 그렇게 공부하고 배우는 취미의 ‘참맛’이 무엇인지 물어봤다.
“사람은 40대, 50대가 되면 가족, 회사, 미래에 대한 불만이 쌓이죠. 그런데 그것을 작품에 쏟으면 나도 행복해지고 주변도 행복해져요. 저는 평생 카메라를 잡아본 일이 없었어요. 오디오를 들은 일도 없죠. 클래식도 배운 일 없어요. 제가 한 일은 평생 회계학과 호텔경영밖에 없었어요. 그것 외에는 가진 게 없었던 거죠. 그런데 해보니까, 그리고 제대로 공부를 하니까 굉장히 재밌어져요.”
그는 보람이 단순한 감정의 승화를 넘어서 직업 수준으로까지 발전한 몇 안 되는 케이스다. 그래서 그의 도전이 이룬 성과는 그 희귀함에도 불구하고 강한 설득력을 가진다.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자신감 말이다. 그 결과, 그의 미래는 어쩌면 지금까지의 삶보다 훨씬 바빠질지도 모르겠다.
“퇴임 후요? 강의는 계속할 거 같고, 펀드 컨설턴트를 하게 될 것 같아요. 그리고 격주로 궁궐 해설을 하고 사진 작업도 해야죠. 책도 써야 하고 오디오 수집도 해야 하고. 콘트라베이스도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에 들어갈 정도로는 해야겠고. 바빠요(웃음).”
고대 그리스 비극의 정수 가 명동예술극장 무대에서 재탄생한다.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여자 메디아, 그녀의 조력자 아이게우스 역을 연기한 중견배우 남명렬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작품에 참여한 계기는 무엇인가?
그리스 비극은 연극의 시원(始原)입니다. 인간의 감정들이 정수(精髓)만 모여 극대화되어 있습니다. 국립극단으로부터 출연 제안을 받고 거절할 이유를 찾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메디아를 이혜영이라는 매력적인 배우가 연기한다니 더욱 첫눈에 사랑하게 되고, 그 격정에 휘말리는 아이게우스라면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습니다.
‘아이게우스’를 연기하며 가장 고민한 부분은?
아이게우스는 메디아를 보자마자 격정에 휘말립니다. 메디아의 유혹도 느끼고요. 기승전결 없이 메디아를 향한 욕망이 시키는 대로 직진하는 존재죠. 앞뒤 설명 없는 욕망의 발화(發火)를 어떻게 하면 관객에게 설득력 있게 보여줄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왕의 품위를 유지하며 유혹에 몸을 떠는 존재를 연기한다는 게 쉽지 않네요.
중견배우 이혜영(메디아 役)과의 호흡은 어땠는지
이혜영 배우와는 처음으로 연기하는데요, 지금까지 보여준 카리스마만큼이나 연습에 열정적이고 열심입니다. 연기하는 그 눈만 바라봐도 내가 할 연기의 감정이 활활 타오릅니다. 말이 필요 없이 눈빛만으로도 교감할 수 있으니 환상적 호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연습장에는 후배들, 특히 젊은 여배우들이 많습니다. 젊은 에너지를 맘껏 충전하는 것 같아 행복합니다.
애서(愛書)가로 알고 있는데, 이번 작품에 임하며 읽은 책이 있다면?
그리스 비극을 책으로 읽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함축하고 있는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들의 관계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죠. 등장인물 간의 관계, 그들은 어떤 역사적 시공간을 배경으로 존재하는가를 정리하기 위해 여러 자료를 찾아보았습니다. 어떤 책이라고 특정할 수는 없고 인터넷과 가능한 책 자료를 두루 참고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얘기가 아니어선지 자꾸 잊게 되네요. 난감합니다. 작품과 관계없이 지금 읽고 있는 책은 유시민 작가의 입니다.
어떤 중·장년에게 권할 수 있겠는가?
연극은 해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개인과 사회에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청년 시절의 선택과 결정은 때론 무모하기도 하고 좌충우돌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그것은 청년의 특권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중·장년의 선택과 결정은 청년 시절의 그것과는 사뭇 달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메디아의 비극을 보며 ‘나는 어떤 결정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무겁게 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질문의 기회를 갖는다는 것, 매우 의미 있는 순간일 겁니다.
>>배우 남명렬
제50회 동아연극상 남자 연기상, 제6회 대한민국 연극대상 남자 최우수 연기상 수상. 연극 , , 영화 , , 드라마 , 외 다수 출연.
연극
장소 명동예술극장
일정 4월 2일까지
연출 로버트 알폴디
출연 남명렬, 이혜영, 하동준, 박완규, 손상규 등
요즘 당구를 배우는 중.장년층이 많아졌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비용을 적게 들이고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가 첫 번째 이유다. 당구대 하나를 쓰는데 1시간에 1만 원 정도면 된다. 네 사람이 경기를 할 경우 1인당 분담금은 2,500원꼴이기에 당구를 2시간 하고 막걸리 한두 잔을 곁들인 저녁을 먹어도 2만 원 안쪽을 부담하면 된다. 둘째는 당구 게임 자체가 머리를 써야 하고 생각보다 운동이 꽤 된다. 셋째는 혼자서도 연습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도 있고 두 사람 또는 그 이상의 다른 사람과 함께 할 수도 있는 스포츠여서 시니어들에 환영을 받고 있다. 다음 약속과의 시간이 많이 남아 있을 때 무료하지 않게 자투리 시간을 당구장에서 연습하며 보낼 수도 있다.
필자도 그런 이유로 근래에 당구를 신경 써서 배우기 시작했다. 직장을 그만둔 동창 한 사람이 당구장을 운영하면서부터 그곳에서 모임을 하면서 시작하게 되었다. 필자는 그때까지 당구봉을 잡아본 경험이 없었다. 옆에서 구경하다 보니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고 어울리기 위하여 게임을 하면서 배우기 시작했다. 배운다고는 하나 전문 지도자를 통한 것이 아니고 함께 당구를 치는 동창들이 한두 마디 해주는 교습이었다. 어떤 경우는 당구공을 치려고 자세를 취하면 옆에 다가와 자신이 직접 채를 잡아 방법을 시범을 보여주기도 한다. 다시 비슷한 위치에 공이 배치되어도 잘 맞추지 못한다. 그 이유는 당구의 기본 원리를 바탕으로 하지 않은 순간의 지도이기에 그렇다. 수구와 제1 목적구가 맞고 분리되는 각도 등에 대한 이해가 없어서 그렇게 된다. 똑같은 상황이 왔을 때엔 지도 받았던 기억을 살려 그대로 공을 치게 된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분위기나 몸의 상태, 당구봉의 밀고 치는 힘의 강도 등에 가르치는 친구의 당구 수준이 차이가 나기에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밖에 없다.
사람은 누구나 가르치는 것을 좋아한다. 골프 연습장에 가보면 잘 알 수 있다. 배운지 얼마 되지 않는 골퍼도 새로 배우러 온 초보자에게 한 마디 해주기를 좋아한다. 당구장에서도 비일비재한 경우다. 체계적으로 당구를 배운 경우는 많지 않고 당구장에서 몸으로 익힌 사람들이 많아 보인다. 이론적 배경에서 출발하지 않고 이렇게 치면 된다 한다. 그렇기에 설득력이 없게 된다. 또한, 초보자에게 한 마디 교습하는 당사자는 교습방법을 배우지 않아 늘 자기 기준에서 알려주기 때문에 초보자는 이해가 잘 안 되게 된다. 그 점을 간과하고 있어서 시키는 대로 한 경우에도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는 경우가 빈번하다.
경험으로 보았을 때 경기 중에는 교습을 하지 않음이 좋다. 진정 알려주고 싶으면 게임이 끝난 후나 별도의 시간을 내어 개별 교습을 함이 바람직하다. 그뿐만 아니라 이 사람 저 사람이 한마디씩 하게 되면 피교습자는 오히려 더 헷갈리게 된다. 각자 내용이 조금씩 차이가 나기에 마련이다. 어느 당구 지도자가 당구를 배우려면 한 사람에게 꾸준히 배우라고 한 말에 동감이다. 필자의 경우는 텔레비전 당구 방송을 시청하고 당구 서적을 읽는 등 나름으로 열심히 독학한다. 당구장에서는 다른 사람이 치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본다. 게임을 할 때 친구들이 감 놔라 배 놔라 하지 않고 지켜 보고 있으면 그동안 스스로 익힌 방법으로 괜찮은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나 동반자들이 참지 못하고 이렇게 쳐라, 저렇게 쳐라 하면 그 순간부터 흐름이 깨어져 공을 잘 맞히지 못한다. 자기제어가 되지 않는 점이 더 큰 문제지만, 진정한 가르침은 상대를 깊이 이해하는 측면에서 출발해야 한다.
친구에게 당구를 가르치려면 눈높이에 맞게 할 필요가 있다. “시작이 반이다”란 말이 있다. 골프나 당구를 비롯한 모든 운동도 그 시작을 제대로 하여야 성장할 수 있다. 그렇기에 섣부른 교습은 오히려 당사자에게 걸림돌이 됨을 기억해두자. “충고”는 돈을 받지 않으면 하지 말라고 조언해준 어느 상담사의 이야기가 가슴에 와 닿는다.
설악산은 사계절 만년설이 있는 산도 아닌데 이름은 ‘설악(雪岳)’이다. 국내에 산은 많아도 이렇게 ‘설자(雪字)’가 붙은 산은 유일하다. 대청(大靑), 공룡능선(恐龍稜線), 용아장성(龍牙長城), 천불동(千佛洞 ) 등 멋진 이름들이 있다. 누가 언제 이토록 멋진 이름들을 붙였을까. 그저 감탄할 뿐이다.
설악산 능선 중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공룡능선으로 향한다. 용대리에서 백담사까지 이어지는 포장도로의 백담사에서 출발해 중청대피소에서 1박한 다음 이튿날 공룡능선을 일주한 뒤 소공원으로 하산하기로 했다.
백담사 경내는 스님들의 동안거로 쥐죽은 듯 고요했다. 오전 11시, 일행은 백담사 마당을 말없이 한 바퀴 돈 뒤 봉정암으로 향했다. 오늘의 목적지는 중청대피소. 백담사에서 중청대피소까지는 약 12km. 해가 지기 전까지 그곳에 도착하는 것이 임무다.
기자는 1년 전 무더웠던 여름날 소공원을 기점으로 공룡능선 일주를 한 적은 있지만 눈 쌓인 공룡능선을 오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서 더욱 기대가 됐고 그만큼 불안했다.
백담사에서 봉정암까지는 약 10km. 오후 3시 봉정암에 도착했다. 백담사에서 영시암을 거쳐 봉정암까지는 불자들 사이에서 유명한 성지순례길이다. 걷다 보면 스페인의 산티아고 트레일에 버금가는 지극한 성정(性情)과 마주할 수 있다. 봉정암으로 이어지는 돌너덜 된비알을 오르는 길에 문득 숙연해졌다. 머리 허옇게 새고 허리는 활처럼 굽은 보살들의 간절한 마음을 떠올리며 지금 이 세상의 고통, 나와 우리의 아픔을 위해 기도했다. 아직까지 절 인심이 살아 있는 까닭에 밥때가 훌쩍 지난 시간이었음에도 일행은 미역국에 밥을 말아 공양했다. 자판기 커피도 무료로 제공하고 있어 불자가 아닌 등산객들도 오며가며 두루 신세를 지는 산방(山房)이 바로 이곳 봉정암이다.
봉정암에서 소청을 지나 중청대피소까지는 1.7km. 소청대피소에서 바라본 설악의 전경은 여전히 할 말을 잃게 했다. 공룡능선을 중심으로 용아장성, 천화대, 울산바위가 비경을 선사했다. 그리고 저 멀리서 멈춘 듯 흐르는 동해의 푸른 물빛.
중청대피소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5시였다. 배낭을 풀고 요깃거리를 챙겨 취사장으로 내려가니 어느덧 해가 다 저물어 있다.
다음 날 아침 7시, 중청대피소에서 빈 몸으로 대청까지 올라갔지만 안타깝게도 일출의 찰나는 잡을 수 없었다. 켜켜이 밀려 있던 안개와 구름이 걷히니 어느새 여명이 온 세상을 데웠다. 흡사 냉동고에 들어 있던 고기처럼 얼어붙은 대청의 비석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서둘러 희운각대피소로 향했다. 그곳에서 아침식사를 할 계획이었다. 스패츠와 아이젠을 차고 새하얀 눈을 저벅저벅 밟으며 길을 냈다. 중청대피소에서 희운각대피소까지는 2.1km. 경사가 제법 있는 내리막이라 특히 더 조심해야 했다. 희운각대피소에 도착했을 때는 9시 30분. 여전히 우리뿐인 취사장에서 라면을 끓여 먹었다.
1년 전 여름의 내 기억 속 공룡능선은 도통 그 거리가 줄어들지 않았다. 능선상 거리는 5km에 불과하지만 신선대, 1275봉, 큰새봉, 나한봉 등 1000m 이상의 봉우리를 오르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과연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눈길이라 걸음에 속도가 붙질 않았다. 일행은 말없이 이동했다. 무너미고개를 넘자 바람은 더 차고 거세졌다. 신선대 위에 서니 천화대 일원이 장관이다. 장군봉, 유선대, 범봉, 세존봉, 마등령이 한 줄로 이어졌다. 그리고 뒤돌아 우리가 올랐던 대청, 중청, 소청 능선을 바라봤다. 저 멀리 외따로 떨어져 솟은 귀때기청봉이 아련하다. 대청 아래로 흐르다가 지금은 하얗게 얼어붙은 죽음의 계곡에 시선이 멈췄다. 우리가 아침에 지났던 희운각대피소와 관련이 있다. 1969년 2월 14일 한국산악회 소속 제1기 에베레스트 원정대가 히말라야 원정을 위해 죽음의 계곡(옛 지명 반내피)에서 등반 훈련 중 눈사태를 당해 전원 10명이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현재 위치에 지어졌다. 대피소 이름이 ‘희운각’인 이유는 희운(喜雲) 최태묵 선생이 ‘이 자리에 산장이 있다면 이러한 사고를 미연에 막을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본인의 사재를 들여 지었기 때문이다.
희운각대피소에서 200m 떨어져 있는 곳에 솟은 무너미고개는 공룡능선의 관문과 같다. 전신재 저 에 따르면 무너미고개는 가야동계곡과 천불동계곡, 그러니까 내설악과 외설악의 분기점인 곳이다. 이름 그대로 물이 넘는 고개[水踰峴]. 물이 전에는 외설악으로 넘어갔는데 지금은 내설악으로 넘어간다고 한다. 무너미에 관한 또 다른 설은 ‘산 너머’의 고어(古語)라는 추측이다. 순우리말로 뫼너머, 메너머, 무너머를 거쳐 무너미로 정착했다는 설. 공룡능선을 기준으로 내설악과 외설악이 갈라지므로 물 넘어, 산 너머 모두 설득력 있는 이야기로 들린다.
“오래전에는 누가 어디서 공룡능선 일주했다 하면 정말 대단하다는 소리 나왔어. 지금은 그 어려움과 명성이 그때 같지는 않지. 그래도 빡세긴 여전히 빡세!”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06년 국지성호우로 설악산에 산사태가 나면서 모든 등산로를 재정비했고, 그 결과 공룡능선에도 난간이나 밧줄 등이 설치돼 산행이 훨씬 수월해진 덕이다.
가까스로 도착한 마등령 삼거리. 이곳에서 오세암을 거쳐 다시 백담사로 내려서는 길, 그리고 비선대를 거쳐 소공원으로 내려서는 길이 나뉘는데 오세암에 이르는 1.4km 구간은 산사태 발생 및 추가붕괴 위험을 이유로 올해 5월 15일까지 통제된다. 시간은 오후 3시, 소공원까지 남은 거리는 6.5km. 배낭 깊숙이 들어 있던 헤드랜턴을 꺼내 바람막이 주머니에 넣고 소공원을 향해 속도를 낸다.
우리 시니어들이 결혼 하던 시절인 1970년대 말에는 남자 27세, 여자 25세 정도에 결혼하는 사람이 많았다. ‘둘만 낳아 잘 기르자’란 가족계획 시대였으므로 보통 여자 30세 이전에 자녀 둘을 가진 가정이 많았다. 그러므로 여자가 30세를 넘으면 ‘노처녀’라며 시선이 곱지 않았다.
요즘은 풍속도가 많이 달라졌다. 여자 30세까지 결혼하지 않은 여자들이 많다. 30세 정도는 노처녀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심지어 결혼도 40% 정도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한다.
내가 갓 결혼했을 때는 가족계획이 따로 없었다. 결혼했으니 아이가 생기면 낳고 둘째까지는 그렇게 유지했다. 그 당시만 해도 맞벌이는 흔치 않았으나 맞벌이를 하게 되면 사람을 두고 애를 보게 했다. 처음에는 애 봐주는 할머니 봉급이나 직장에서 받는 봉급이나 별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세월이 가면서 직장은 승진이 있으니 그 격차가 벌어지면서 애 봐주는 할머니 봉급을 감당할 수 있었다. 문제는 애 봐주는 할머니를 더 이상 구하기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요즘은 아이들 맡길 시설이 많이 생겨 사정은 나아졌다.
요즘 30대 여성들은 20대에 결혼한 사람과 30대에 결혼 사람의 예에서 큰 차이가 있다고 들었다. 20대에 결혼한 사람은 20대에 아이가 생기면 곧바로 퇴직하고 집에 눌러 앉아 경단녀가 된다. 직장 봉급이 아직 초급 사원 때이기 때문에 많지 않아서 포기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예 결혼을 포기하거나 연기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30대에 아이를 갖게 되면 이미 직장에서 과장 급 정도의 관리자가 되어 있을 때라는 것이다. 직급도 높아져 그동안 쌓아 온 경력을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이가 생겨도 육아 휴직을 일찍 끝내고 회사로 복귀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 하나도 버겁다. 둘째는 아예 꿈도 못 꾼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녀가 결합하여 둘을 낳아야 인구가 유지되는데 하나만 낳으니 인구가 감소하게 되는 것이다.
양육비용도 만만치 않다. 우리 때처럼 학교만 다니던 시절이 아니라 각종 과외 수업을 필수적으로 받아야 하는 시대이다. 남들도 다 그렇게 하니 안 할 수도 없다. 감당이 안 된다는 것이다.
30대 중반에 첫 아이를 낳으면 그 아니가 제 밥벌이를 하려면 25년 이상이 필요하다. 퇴직연령이 점점 빨라지는 세태를 보면 아이에게 한창 돈이 들어갈 나이에 직장을 그만둬야 하는 것이다.
인구 감소에 대한 정부의 대책은 많이 낳으라는 구호뿐이다. 여건이 많이 나을 형편이 아닌데 말로만 많이 낳으라는 것은 설득력도 없고 실효성도 떨어지는 것이다.
20대에 결혼해서 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사회 모든 여건이 바뀌어야 한다. 머리가 더 커지면 배우자를 고르는 눈높이도 높아져 점점 더 결혼이 어려워진다. 굳이 대학교를 나와야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지금의 교육제도도 고등학교나 전문대학 만 졸업하면 취업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대학교를 나와도 취업이 안 되니 대학원에 가다 보니 결혼이 점점 늦어지는 것이다. 청년 취업은 그래서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