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몸 곳곳에서 발생하는 암의 종류는 무척 다양하다. 그중 식도암은 특히 고령일수록 주의가 필요한 암. 최근에는 식도암 환자의 64%가 65세 이상이란 통계 발표도 있었다. 식도암이 흔한 병은 아니지만 무서운 암으로 손꼽히는 이유는 발병 이후의 삶이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식도암이 어떤 병인지 이종목(李鍾穆·52) 국립암센터 폐암센터장을 통해 알아봤다.
식도는 인두와 위 사이를 연결하는 기다란 튜브 형태의 장기다. 잘 아는 것처럼 입에서 삼킨 음식물이 위로 넘어가는 통로 역할을 한다. 식도암 파악을 위해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식도암의 종류다. 식도암은 크게 편평상피암과 선암으로 나누는데 각각의 특징이 다르다고 이 교수는 설명한다.
“편평상피암과 선암은 그 원인부터 잘 걸리는 인종까지 완전히 달라요. 선암은 서양인에게서 많이 발견됩니다. 가장 큰 원인으로는 비만이나 역류성 질환이 지목되고 있죠. 이에 반해 편평상피암은 유독 동양인에게서 많이 나타납니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원인인데, 많은 연구에서 술과 담배를 발병 이유로 의심하고 있습니다. 지금 몸이 건강하더라도 술과 담배를 끊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국내 식도암 환자 중 편평상피암이 90%에 육박할 정도로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고 이 교수는 설명한다. 그러나 음식문화나 생활습관이 서구화하면서 선암 환자도 점차 늘어나고 있는 추세라고. 2015년 기준 국내에서 발병한 식도암 환자는 2420명이다. 전체 암 중 1.1%를 차지하고 있어 흔한 암이라고는 할 수 없다.
가장 큰 적은 술·담배
술이나 담배가 암의 원인이 된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 됐다. 하지만 둘 다 원인으로 지목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그 이유에 대해 이 교수는 ‘접촉기간’이 핵심이라고 설명한다.
“식도암은 단순히 노화로 인해 발생한다기보다, 술과 담배가 식도에 물리적으로 닿는 기간이 길수록 더 잘 발생하는 게 아닌가 의심하고 있어요. 아직 발병 원인이 정확히 파악된 것은 아니지만 술과 담배를 오래 가까이 한 사람 중 식도암 환자가 많다는 조사 결과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이에요. 그래서 다른 무엇보다 술, 담배는 꼭 끊으시라고 말씀드립니다.”
하루에 한 잔쯤은 괜찮겠지 하고 방심할 수 있지만, 그것도 좋지 않다고 이 교수는 단언한다. 술과 담배가 원인이다 보니 아무래도 남성의 발생 비율이 높다. 실제로 발생 환자의 성비를 따지면 10대 1이 될 정도로 남성 발병이 압도적이다. 이외에 뜨거운 음료도 식도암을 유발한다는 보고가 있다. 세계보건기구가 65°C 이상의 음료를 ‘암을 유발할 것으로 생각되는 것’으로 지정한 것도 이 때문이다.
식도암이 발생한다고 해서 특별한 자각증상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식도 자체가 딱딱한 통로가 아니라 늘어나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암이 어느 정도 진행되고 나서야 삼킬 때 목에 무언가 걸리는 느낌이 들거나, 아예 음식을 삼키기 어려운 경우도 생긴다. 또 목에서 무언가 만져지기도 한다. 그러나 식도암이 발생해 이런 상황이 되었다면 치료가 시급한 상태일 가능성이 높다. 정기적인 식도·위 내시경 검진이 필요한 이유다.
“그래도 과거보다는 초기에 발견하고 치료를 받으시는 환자가 점차 늘어나고 있어요. 국가암검진사업을 통해 식도·위 내시경 검사를 하다 식도암을 발견하는 경우도 있거든요. 내시경 검진이 일반적이지 않던 1990년대만 하더라도 조기 식도암 환자는 거의 볼 수 없었어요. 손쓰기 어려운 상황이 되어 병원에 오시는 분이 대부분이었으니까요. 만약 식도암을 1기에 발견할 수 있다면 내시경 수술로 간단하게 떼어낼 수 있어요. 하지만 그 시기를 놓치면 치료가 간단치 않습니다.”
수술 전후의 삶, 하늘과 땅 차이
식도암을 발견했을 때 가장 기본적인 치료 방법은 수술이다. 식도는 신체 장기 중 단순한 파이프 모양에다 크기도 크지 않아 만만하게 볼 수 있지만, 실제 식도암 치료 수술은 간단하지 않다.
“수술은 암이 존재하는 부위를 포함해 위아래 식도를 길게 절제해요. 수술할 때 식도 조직을 남기는 것은 큰 의미가 없고, 재발 확률만 높이기 때문에 거의 모든 식도를 절제하게 됩니다. 남아 있는 식도는 식도 역할을 대신할 위나 대장과 문합해 음식이 정상적으로 소화될 수 있도록 만들어줍니다. 이때 재발을 최소화하기 위해 식도 주위의 림프절을 함께 제거합니다.”
수술을 통해 위와 대장이 식도 역할을 맡게 되지만, 대신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눕거나 물구나무섰을 때 위의 음식이나 위산이 입으로 역류하지 못하게 만드는 식도의 조임근 근육 역할이다.
“식도암 수술을 하고 난 뒤에 물구나무를 서거나 등목할 때처럼 엎드린 자세를 하면 위에 들어 있던 음식물이 역류합니다. 평평한 곳에 똑바로 눕는 것도 위험할 수 있어요. 역류가 일어나면 음식물이 기도를 통해 폐로 들어가 흡인성 폐렴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수술 후에는 잘 때도 높은 베개를 사용해 머리와 상체가 어느 정도 높이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합니다. 또 음식을 많이 먹을 수도 없고, 음식을 삼킬 때 어려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위의 위치가 바뀌어 호흡할 때 위가 눌리거나, 과식하면 음식물이 넘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조금씩 자주 먹는 습관을 길러야 하는데 아무래도 환자분들이 많이 불편해하시죠. 제산제 같은 약을 오래 먹어야 하는 환자도 있습니다. 수술 이후에는 아무래도 삶이 많이 바뀝니다. 적응을 각오하셔야 해요.”
이런 생활의 불편함 때문에 수술을 거부하는 환자도 종종 있다고 이 교수는 말한다. 그러나 방사선 치료 등 다른 방법으로는 암을 없앨 수 있는 가능성이 낮기 때문에 수술이 가능하다면 수술을 권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주변 장기로의 침범이 있거나 가까운 림프절로 전이가 된 경우에는 수술 외에도 항암 방사선 치료가 추가로 필요할 수도 있다. 암이 대동맥이나 기관지, 성대 등으로 퍼져 있다면 수술의 난이도는 그만큼 더 높아진다.
정기적인 식도·위 내시경 필요
수술 전후의 방사선 치료 과정에선 국립암센터가 자랑하는 양성자 치료가 유용하게 쓰이기도 한다. 양성자 치료는 방사선이 지나는 주변 장기에까지 악영향을 주는 일반적인 방사선 치료와는 달리 암세포에만 에너지가 집중되기 때문에 후유증이 적은 장점이 있다. 다만 이러한 장비를 갖추기 위해서는 장비를 설치하는 정도가 아니라 ‘짓는다’는 표현을 쓸 만큼 큰 시설이 필요하기 때문에 모든 의료기관에서 받을 수 있는 치료 방법은 아니다. 현재 국내에선 국립암센터와 삼성서울병원 정도가 운용 중이고 몇몇 의료기관에서 도입을 준비하고 있다.
그렇다면 예방은 어떻게 해야 할까? 이 교수는 “술과 담배를 끊는 것이 답”이라고 말한다. 또 지나치게 뜨거운 음료를 자주 마시는 것도 좋지 않다고 말한다. 그 외에는 정기적인 식도·위 내시경 검사를 통해 발병 여부를 확인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단다.
“일반적으로 위암 조기 발견을 위해 2년에 한 번씩 정기검진을 받으라 하지만 식도암의 경우는 조금 달라요. 발생한 지 6개월 만에 암 조직이 식도뿐만 아니라 주변에 퍼져나가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술과 담배를 오래 즐겼다는 생각이 들면 1년에 한 번쯤 검사를 받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설명한 것처럼 작은 암이 발생해도 수술로 인해 따라오는 대가가 너무 큰 병입니다. 조기발견의 차이는 극명해요. 꼭 정기적인 검진을 받길 당부드립니다.”
종근당의 미백, 주름개선 기능성 화장품 ‘비타브리드 듀얼세럼’이 화장품 시장에서 소비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비타브리드 듀얼세럼’은 바이오 융합기술로 개발한 신물질인 비타브리드와 펩타이드 복합체가 피부 속에서 작용하고 미백, 주름개선, 수분 및 영양공급 등의 효능을 가진 천연유래추출물이 피부 겉에서 이중으로 작용해 종합적으로 피부 관리가 가능한 제품이다.
비타브리드는 세계 3대 소비재 품평회인 벨기에 몽드 셀렉션에서 2년 연속 그랜드 골드상을 수상한 브랜드다. 국내 화장품 브랜드 최초로 미국 명품백화점 ‘바니스 뉴욕’에 입점했으며, 런칭 이틀만에 주력제품이 매진되는 기록을 세운 바 있다.
이 제품의 주성분은 비타브리드와 펩타이드 복합체로 비타민C와 미네랄, 피부속에서 콜라겐을 형성하는 펩타이드를 결합시켜 외부 자극에 파괴되지 않고 피부 속에 전달될 수 있도록 안정화시킨 물질이다. 피부에 사용 시 이온 교환방식을 통해 피부 속 노폐물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비타민C와 펩타이드를 깊숙이 공급한다. 특히 원료가 인체에 안전하게 전달되도록 돕는 LDH(Layered Double Hydroxide) 기술을 적용해 비타민C가 피부 내부에 12시간 이상 지속적으로 공급되는 것이 특징이다.
비타브리드 듀얼세럼은 피부 임상 전문 기관에서 피부주름개선, 탄력개선, 저자극 테스트 등을 완료해 효능과 안전성이 입증됐으며 민감한 피부에도 사용이 가능하다. 성분의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비타브리드와 천연유래추출물이 용기 내에서 분리되었다가 사용시 바로 혼합될 수 있도록 특수 용기를 적용했다.
종근당 관계자는 “비타민C는 피부톤을 밝게 하고 피부 항산화 작용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기존 비타민C 제품들은 외부 자극에 산화되고 피부 안쪽에 공급되지 못해 효능을 보기 어려웠다”며 “첨단 바이오 기술이 적용된 비타브리드가 피부 속까지 비타민C의 효능을 전달해 종합적인 피부관리를 도울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필자는 오카리나에는 문외한이다. 가끔 다른 사람들이 오카리나를 연주하는 것을 보거나 들은 적은 있다. 손안에 들어오는 작은 악기인데 청명한 소리가 나는 것을 보고, 일단 휴대가 간편해서 좋겠다는 생각은 했다. 악기가 간단하게 생겼으니 배우기도 어렵지 않겠다는 추측도 했다.
필자가 사는 동네에 ‘한국 오카리나 박물관’이 있다. 거여역 2번 출구에서 첫 골목 50m 정도 들어가면 간판이 있다. 지나다닐 때마다 간판은 봤지만, 허름한 상가 건물 2층이라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러다 이번에 마음먹고 방문해봤다.
2층 입구에 ‘한국 오카리나 박물관’이라는 간판이 나무 벤치에 걸쳐져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조명이 꺼져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그제야 원장이 인사를 하며 반겼다. 조명을 밝혀준 후 박물관을 돌아보니 허투루 생각했던 것과 달리 오카리나가 큰 방, 작은 방에 종류별로 빽빽하게 잘 정리되어 있었다. 이탈리아 부드리오에 있는 오카리나 박물관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 오카리나 박물관이라고 했다.
오카리나는 원래 흙으로 만든 악기인데 입으로 불어 소리를 낸다. 기원전 3000~4000년 전에도 이런 악기 형태가 출토되었지만, 본격적으로 개발된 것은 1853년 이탈리아의 17세 소년 주세페 도나티(Giuseppe Donati)가 흙으로 거위 몸통 모양으로 만들었던 시기로 본다고 한다. 오카리나는 도나티가 지은 이름으로 이탈리아 말로 ‘어린 거위’라는 뜻이란다. 이어서 1876년 오스트리아의 피엔(H. Fiehn)이라는 사람이 오카리나를 제작은 물론, 1879년에는 호주 시드니 세계 박람회에 출품해 그때부터 미국으로 대량 수출하면서 대중화했다고 한다.
‘한국 오카리나 박물관’에는 오카리나가 약 2000점 전시되어 있다. 2007년, 관장이 직접 외국에 나가 오카리나를 사 모았고, 40여 명의 우리나라 오카리나 제작자들을 찾아가 오카리나를 기증받아 이 박물관을 세웠다고 한다. 현재는 관장의 사비와 딸이 오카리나 강습으로 번 돈으로 임대료를 내가며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또 거여동을 문화 지역으로 만들고자 오카리나 외에도 카메라, 인형 등을 수집하고 있다고 했다. 박물관 관람은 무료이고 구청 등에 지원 요청을 해놓았으나 성사 여부는 미지수라는 설명도 있었다.
오카리나는 가장 배우기 쉬운 악기라고 한다. 보통 알토 C 오카리나는 라에서 파까지 음계가 나오는데 이보다 한 옥타브 높은 소프라노 C, 한 옥타브 낮은 베이스 C, 더 낮은 콘트라베이스 C, 그리고 G, F 키의 오카리나도 있다고 한다. 악기 가격은 보통 10만 원 정도 하며 비싼 것은 몇백만 원 짜리도 있다. 흙으로 만든 것이 기본이고, 한 번 더 구워 유약을 바른 것도 있다. 금속, 플라스틱, 나무, 대나무 등 다양한 재료로 만들어진 것도 있다.
오카리나는 유일하게 흙으로 만든 관악기이며 구멍의 크기로 다른 음계의 소리가 난다. 색소폰과 같이 연주하면 색소폰 소리에 묻혀 소리가 안 들리지만 오히려 먼 거리에서 들리는 소리는 오카리나란다. 파장의 차이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배울 때는 다른 악기처럼 이웃 주민들의 민원이 있을 수 있어 연습실을 개방한다. 강좌는 12주 과정으로 12만원을 받는데 12주가 지나면 개인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몇 가지 대중가요 정도는 연주가 가능하다고 한다. 거여동 주민을 위해 65세 이상 몇 명이 그룹을 만들어 오면 관장이 직접 무료 강좌를 해준다고 홍보했는데도 인원이 모이지 않는다고 했다. 관장은 오카리나는 노인들에게 적당한 악기라며 직접 이은미의 ‘녹턴'을 연주해줬다. 일요일은 휴관이고 단체 관광이나 해설을 듣고 싶으면 사전 예약을 해달라고 했다. 오카리나에 관심이 있거나 배우고 있는 사람은 관람할 가치가 있는 박물관으로 추천하고 싶다.
“이제 제 라이벌은 나훈아씨예요. 한동안은 라이벌이 없었어요. 없는 동안에 저 혼자서 누나들을 많이 행복하게 해줬는데, 이번에 새 노래가 나온답니다(웃음).” 자신의 팬층이 가수 나훈아와 완벽하게 겹친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가수’ 이동준은 원래 운동선수였다. 그것도 1979년부터 태권도 국가대표였으며 1983년부터 1985년까지 3년 연속으로 세계선수권에서 미들급 금메달을 놓치지 않았던 톱클래스였다. 그러한 운동선수로서의 삶이 인생 1막이었다면 2막은 연기자였다. 30년의 2막을 내리고 이제 그가 선택한 인생 3막의 삶은 가수다. 지금이 가장 편하고 행복하다는 이동준(60)을 만나 그의 새로운 도전에 대해 들어봤다.
“이제는 배우 이동준보다는 가수 이동준으로 불러주는 게 좋아요. 늦깎이 가수지만(웃음). 큰 꿈을 꿔야 중간 정도라도 가지 않겠어요?”
나훈아를 라이벌로 삼은 ‘가수’ 이동준은 사실 2000년에 이미 자신의 이름을 건 음반을 하나 냈었다. 그러나 그때는 가수와 배우를 쉽게 넘나들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방송국에서도 ‘이동준씨는 배우인데…’ 하는 반응이었다. 그래서 더 이상의 가수활동은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시대가 바뀌었고, 이제 이동준은 가수로서 본격적인 인생 3막의 무대에 올랐다.
“더 나이 먹기 전에 가수하길 잘했어요.”
노래 ‘누나야’가 워낙 잘나가고 있어서일까? ‘늦깎이 가수’의 얼굴은 밝았다. 차라리 후련하다는 심정마저 느껴진다 해도 좋을 것이다. 영화와 드라마에서 강인한 남성상의 대표적 이미지로 활약하던 그가 갑자기 가수를 선언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가수를 해야 하는 속깊은 이유들이 있었다.
노래는 나를 그 자리에서 행복하게 만든다
“우선 제 아들이 연기자니까 연기자 아버지로선 한발 물러나줘야겠다는 생각이 있었죠. 그리고 젊었을 때는 주인공을 했지만 나이를 먹었으니 이제 주인공을 못하는 것도 있고. 드라마 을 하면서 ‘이제는 내가 아버지 역할을 할 나이가 됐구나’ 싶었죠.”
그는 또한 워낙 노래를 잘 부른다고 소문난 연기자였다. 그 자신이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하고 부산, 미사리, 남양주 등 라이브 카페를 운영하며 직접 노래를 한 지 벌써 24년이 넘었다. ‘누나야’를 설운도가 곡을 써서 준 것도 그의 그러한 실력과 인맥을 반증하고 있다.
“그리고 연기는 불러줄 때까지 기다려야 하잖아요. 가수는 내가 일을 찾아서 할 수 있어요. 콘서트를 열어도 되고,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곳도 많고. 연기는 단체활동이라 개인활동을 하기에는 제한적인 데다 제작기간이 6개월이면 6개월 동안 한 팀이 되어 움직여야 하니 왠지 모를 심적 부담감이 있었죠. 그런데 노래를 하면 피드백이 빨리 와요. 관객과의 스킨십도 있고, 그 자리에서 즐거움과 행복을 느낄 수 있죠.”
가수 이동준으로 자리매김할 터
연기는 연기의 역할에 자신을 맞춰야 한다. 그 안에서 인간 이동준은 자신의 전부를 보여줄 수가 없다. 그러나 가수 이동준은 이동준의 원래 모습 그대로다.
“가수들이 저를 보고는 저러다가 말겠지 하더군요. 하지만 저는 그만둘 생각 안 했어요. 이제 연기는 접고 가수의 길만 가야겠다 생각할 정도예요. 내 인생인데 즐겁게 살아야 하잖아요? 노래를 하니 즐거워서 내 갈 길은 이거다 싶고, 연기할 때보다 가수로 전향해서 더 바빠요.”
그는 노래를 통해 자신을 자유롭게 만든다. 그의 노래에 대한 애정에 진정성이 느껴지는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성인 발라드 곡인 ‘미안해요’가 제 첫 번째 노래예요. ‘남행열차’를 만든 김진용씨가 작곡한 노래죠. 사실 제가 정말 좋아하는 노래예요. ‘미안해요’가 롱런을 위한 노래라면 설운도가 준 ‘누나야’는 ‘팍 뜰 수 있는 노래를 만들어줄게’ 해서 받은 것이죠. 또 김동찬 선생이 저에게 맞춰주신다고 해서 주신 곡이 ‘그날그날’이에요. 이 세 곡이 요즘 제가 공연장이나 행사장에서 주로 부르는 노래들이죠. 부지런히 공연을 하고 다니니까, 이렇게 좋은 노래들이 들어오네요.”
“이제는 베풀고 살아야지”
그는 요즘 가수로서의 삶뿐만 아니라 건축업자로서의 삶도 살고 있다. 경기도 남양주 수석동에 한강 조망권을 갖춘 고급 빌리지 ‘카스텔로 씨마’가 그것이다. 단지는 A, B, C 3개동으로 지하 3층~지상 4층 규모의 12가구다. 우아하고 세련된 외관과 차별화된 공간·구조로 설계해 입주민의 품격을 높이겠다고 한다.
“서울 압구정동에서 15분 걸리는 거리예요. 남한강 근교에 이런 풍광이 있는 곳은 없어요. 앞에 도로가 없어서 공기도 맑고. 모든 것을 최고급으로 제작 중입니다.”
가수 일을 하면서 혼자서 주택까지 짓는 중이라니, 힘들지 않느냐는 물음에 그는 자신이 밀어붙이는 타입이라고 설명했다.
“그래도 시행착오 없게 하려고 차근차근 진행 중입니다. 지난 세월 동안 나와 관계된 후배, 친구, 선배들이 많아요. 다들 고맙잖아요. 이제는 베풀고 살아야지. 이걸 지어서 자금이 모이면 베풀려고 해요. 지금까지는 내 장사를 하면서 베풀 시간이 없었으니까요.”
아들이 나보다 더 바빠졌으면
이동준의 아들 이일민은 아버지와 같은 연기자의 길을 걷고 있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재학 중인 아들에게 그는 ‘서두를 필요 없다’고 말한다.
“나도 스물여덟 살이 돼서야 데뷔를 했으니까. 그에 비하면 아들은 이제 스물여섯 살이니까요. 기회를 보고 있는 중이죠.”
겉보기에는 화려하지만, 연예인은 기본적으로 자유계약직이기에 불안하고 힘들 수밖에 없는 직업이다. 잘되면 좋지만, 잘되기까지는 남모를 아픔과 시련이 많다.
“나는 그나마 순탄하게 연예인 삶을 살아온 케이스고 다른 사람들을 보면 진짜 생계형이 있어요. 종합예술인으로서 이 세계가 좋아서 일하는 게 아니라 가장으로서 먹고 살기 위해 일하는 걸 보면 안타깝죠. 그래서 아들에게 바라는 건 정말 정통 연기자로서 살아봤으면 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미국에서 공부하고, 해병대 갔다 오고 해서 스펙이 훌륭하죠, 기다려줘야죠. 그런데 아들에게 미안한 게, 제가 더 바쁘잖아요. 아들은 나만큼 바쁘지 않으니까 그게 좀 미안하죠. 아들이 나보다 더 바빠졌으면 해요.”
대나무 매듭짓듯이 살다
어쩌면 인생의 세 번째 시기를 열어가고 있기에 갖게 된 여유일지도 모른다. 그에게도 여러 가지 삶의 굴곡이 있었다. 그의 삶을 소재로 한 영화 에 수십억 원의 제작비를 들였지만 흥행에서 실패한 일은 특히 큰 타격이었다. 그러나 그와 인터뷰하면서 마치 대나무 매듭을 짓듯이 살고 있는 것 같은 그의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남들이 생각할 때는 제가 영화에서 망했고, 인터넷에는 똥꼬쇼를 했네 뭐네 하지만 저는 돈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변한 게 없어요. 망하기 전에는 돈이 끊임없이 들어왔어요. 그런데 힘들어졌을 때도 돈에 쫓겨본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일을 열심히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더군요. 영화에 실패하고 나서도 한 달 준비해서 부산에서 일하며 바로 수익 창출해서 나머지 빚을 갚았으니까, 어려움은 없었어요. 이제는 돈이야 뭐 많이 갖고 있으면 뭐해요. 노래 부르면 되는데(웃음).”
남자답게, 정의롭게 산다
“스케줄이 비면 주로 골프를 해요. 지방에 지인들이 워낙 많으니까 만나서 공 치고 노래하고. 운동은 계속하는 중이에요. 지금도 한 시간 반 정도 운동하고 왔어요.”
운동선수로서 자기관리도 철저하게 하는 그는 젊은 시절 11대 1로 상대했다는 무용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2년 전에는 이종격투기 대회에 참가해서 자신보다 29세나 어린 선수와 상대해 이긴 적도 있다.
“감량은 음식과 운동으로 해야지 먹을 거 다 먹으면 안 빠져요. 건강은 자신하기보다 지켜야 해요. 소금은 줄이고 야채나 샐러드로 배를 채우고, 탄수화물은 차단하고 단백질을 먹어주며 물을 많이 먹어야죠. 그러면서 운동도 해야 하고요. ‘초기당뇨’ 징후를 발견했어요. 당화혈색소 수치가 6.0% 이상 나온 뒤부터 집사람이 음식에 신경을 많이 써주고 있죠.”
부산, 대구, 수원, 순천 등 전국 공연을 마치고 10월 청주에서 콘서트를 준비하고 있는 그는 요즘이 인생에서 가장 편하고 여유 있는 시기라고 말한다.
“전 이제 시작이에요. 3막이 시작됐으니까. 일단 내가 행복하고 상대가 행복해야죠.”
여백의 에너지가 넘치는 상남자
그에게 가수 이동준으로서의 미래를 물어봤다.
“토털 엔터테이너 이동준. 사실 제가 악기를 조금씩이지만 여러 가지를 다룰 줄 알아요. 그리고 ‘이동준’ 하면 라이브라고 각인이 됐어요. 라이브 카페를 운영하면서 거짓말 좀 보태자면 50만 명 정도는 제가 노래하는 모습을 봤을 거예요(웃음). 나중에는 어딘가에 들르고 싶은 장소를 만들어서 거기서 팬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인터뷰를 하는 동안 느낄 수 있었던 털털한 이미지처럼, 천생 남자인 그는 남자답게, 정의롭게 살자는 마음가짐만큼은 지금까지 지키면서 살아왔다고 자부했다.
“지금까지 살면서 주변에서 욕 안 하고 선배들이 인정해주니까 고맙죠. 그렇게 살았어요.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야죠.”
이동준의 인간미는 호쾌하다. 그의 인생 3막을 응원하게 되는 이유는 호쾌한 인간미가 전해주는 여백의 에너지 덕분일 것이다. 그것은 나이듦의 아름다움을 믿게 만드는 힘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비주류 의학계의 연구로만 그치고 발표되지 않았던 비타민C의 효능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동안 비타민C는 항암 효과가 있다고 끊임없이 발표됐으나 주류의학계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항암제로 인정받거나 사용되지 못했습니다. 주류의학계가 비타민C의 항암효과를 외면한 것은 왜일까요? 물론 경제적 이익 때문입니다.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거대자본 다국적제약업체의 이익을 유지하기 위해 값싸고 쉽게 구입할 수 있는 비타민C는 외면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비타민C의 항암효과를 적극적으로 밝힌 사람은 하병근 박사입니다. 하병근 박사는 1966년에 태어나 1990년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후, 미국 오하이오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신경과학 박사학위를 받고 의사와 교수로 활동했습니다. 하병근 박사는 어린시절부터 호흡기 계통의 난치병에 시달리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병을 치료하지 못하는 현대 서양의학에 한계를 느껴 스스로 의사가 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난치병 환자인 하박사는 불굴의 의지와 노력으로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의사가 되었습니다. 하박사는 비타민C메가도스 요법으로 삶의 희망을 찾고 비타민C 전도사가 되었으나 안타깝게 병마가 아닌 의료사고로 인해 2012년 47살의 젊은 나이로 끝내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습니다. 하병근 박사의 투병기에는 항암제로서 비타민C의 효능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이유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때껏 의과대학에서 배운 비타민C 지식은 껍데기에 지나지 않았다. 광활한 대자연처럼 펼쳐지는 비타민C의 세계는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것에 견줄 만했다. 그 신대륙은 미래의 세계에 있는 게 아니라 오랜 세월 먼지를 뒤집어쓴 채 창고에서 잠자고 있었다. 비타민C를 이용한 치료법을 찾던 나는 ‘비타민C 치료법으로 소아마비를 고쳤다’는 논문이 인용된 한 저술을 보게 됐다. 그런데 그 논문의 발표시점은 1948년. 이미 반세기가 지나 있었다. 논문을 찾으러 한달음에 오하이오주립대 의대 도서실을 찾았지만 워낙 오래 전 것이라 바로 찾을 수 없었다. “창고에 보관 중”이라는 사서에게 “그래도 꼭 찾아 달라”며 신신당부를 했다.
얼마 후 드디어 내 손에 들어온 고전들. 반세기 전의 저널에 실린 논문들을 살펴보면서 나는 의학의 뒤안길을 따라갈 수 있었고, 주류의학이 전하지 않고 물려버린 의학의 단면을 마주하게 됐다. 소아마비 치료에서 간염을 비롯한 여러 바이러스 질환 치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비타민C 치료법이 논문으로 소개돼 있었다. 왜 이런 사실을 의사가 될 때까지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비타민C를 이용해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들이 있는데 왜 그들이 전하는 치료 효과는 알려지지 않은 걸까, 주류 의학이 받아들이기에 충분할 만큼의 임상례를 확보하고 있는데 왜 그동안 임상시험조차 시도하지 않은 것일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병근 박사의 투병기 중에서)
이처럼 주류의학은 항암제로서 또는 희귀난치성질환의 치료제로서 비타민C를 외면했습니다. 그러나 하병근 박사는 비타민C를 만나 끝없이 자신을 괴롭히는 병을 극복할 수 있는 희망을 찾았으며, 난치성질환을 앓고 있는 또 다른 많은 환자들에게도 커다란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비타민C가 암 재발과 전이의 원인인 암 줄기세포를 죽일 수 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습니다. 암 줄기세포는 항암 치료 등을 받고 암을 치료한 후에도
일부가 몸속에 남아있어 암을 재발시키거나 전이를 일으키는 세포입니다. 암 줄기세포가 자라나기 위해서는 당을 분해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비타민C는 이 과정을 억제하는 억제제로서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비타민C는 암 세포만을 골라 공격하기 때문에 기존의 항암 치료처럼 신체에 부담이 없고 구토나 피로 등의 부작용도 없으며 몸 스스로의 자연치유력도 높여준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또, 영국 데일리메일은 최근 국제 의학전문지 ‘온코타깃’ 최신호에 실린 영국 샐퍼드대학 마이클 리산티 교수팀의 최근 암세포 제거 실험 결과를 소개했습니다. 이 팀은 실험실에서 배양된 암세포에 여드름 치료제로 쓰이는 항생제 독시사이클린을 투입했습니다. 3개월간 투입량을 점진적으로 늘렸고, 그 뒤에 비타민C를 추가 투입했습니다. 비타민C는 암세포가 체내에서 흡수하는 여러 영양소 가운데 포도당 한 가지만을 흡수하도록 제한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 후 영양소 중 포도당을 들어냈더니 포도당만 먹는 데 익숙해져 있던 암세포가 굶어 죽었습니다. 기존 항암제에 비해 100배 이상의 항암효과를 보인 것입니다.
리산티 교수팀은 지난 3월에도 비타민C를 효율적으로 투입할 경우 항암제보다 암세포 제거에 최대 10배까지도 도움이 된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은 적이 있습니다. 리산티 교수는 이번 결과에 대해 “비타민C와 항생제의 결합제가 암세포 제거에 탁월하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 연구결과는 싸고 쉽게 구할 수 있는 비타민이 암치료에 효과적일 수 있다는 것으로 앞으로 많은 난치병 환자들에게 큰 희망을 전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연구결과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오래도록 비타민C의 항암효과를 연구했던 하병근 박사와 같은 비주류 의학자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동안 냉소주의로 가득했던 다국적제약업체를 중심으로 한 주류의학계에서 비타민C의 항암효과를 인정하고 대대적인 투자와 함께 지속적으로 연구를 이끌어 간다면 인류의 건강문제를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계기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더 많은 시니어들이 건강하고 행복한 100세 시대를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생 황혼기에 맞은 손님
감독 토마스 맥카시
주연 리차드 젠킨스, 히암 압바스
제작연도 2007년
상영시간 104분
20년째 코네티컷의 한 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는 장년의 교수 월터 베일(리차드 젠킨스). 단조롭고 열의 없는 나날을 무기력하게 이어가던 월터는 논문 발표를 위해 뉴욕 출장을 갔다가, 오랫동안 비워두었던 자신의 아파트에서 불법 체류자인 타렉 칼릴(하즈 슬레이만)과 자이납(다나이 거라이라) 커플과 마주친다. 월터가 갈 곳 없는 젊은 커플에게 잠자리를 제공하자, 타렉은 감사의 뜻으로 월터에게 자신의 생계 수단인 젬베(Djembe 혹은 jembe; 아프리카에서 기원한 원추형 모양의 가죽 드럼) 연주를 가르쳐준다.
타렉과 함께 센트럴 파크에서 젬베를 연주하면서 이따금 미소를 짓게 된 월터는 타렉이 불법 이민자 단속에 걸려 수용소에 들어가자 타렉과 자이납, 그리고 소식 없는 아들을 찾아온 타렉의 어머니 모나 칼릴(히암 압바스 Hiam Abbass)의 운명과 얽히게 된다.
모든 좋은 영화가 그러하듯 의 초반부는 주인공 월터의 무뚝뚝한 캐릭터와 잿빛 삶을 이렇다 할 대사 없이 간결하게 전한다. 무거운 짐을 들고 밤거리를 걷는 월터의 처진 어깨, 귀가하여 홀로 와인을 마시는 월터의 쓸쓸한 표정. 얽은 얼굴에 안경을 걸친 반대머리 월터는 먼저 말을 걸어보고 싶을 만큼 호감 가는 인물이 아니다. 개인 사정으로 리포트가 늦었다고 사정하는 학생을 냉정하게 내쫓는 그의 유일한 관심은 피아니스트였던, 그러나 세상을 떠난 지 오래된 아내와 함께 듣던 클래식 음악 감상뿐. 아내의 피아노로 교습을 받아보기도 하지만 선생들 잔소리가 듣기 싫어 번번이 내쫓고, 마침내 네 번째 선생 바바라(마리안 셀데스)로부터 “당신은 재능을 타고 나지 못한 사람이다. 그 좋은 피아노를 팔려거든 내게 팔아라”는 말을 듣기에 이른다.
월터가 학회에서 발표한 논문마저 공동저자가 아닌, 단지 이름을 빌려준 것뿐이고 새 책을 거의 다 써가고 있다고 했지만 아직 손도 대지 못했고, 한 과목뿐인 강의도 성의 없이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월터의 지루하고 무기력한 삶이 전제로 묘사되었기에, 자신의 집을 점거한 불법 체류 외국인 커플을 다시 불러들여 잠자리를 제공하는 설정은 설득력을 갖는다. 또 타렉과 자이납이 채 챙겨가지 못한, 그들의 다정한 한때를 담은 사진, 그리고 월터가 창밖으로 내려다본 밤거리에서 초조하게 잠자리 구걸 전화를 거는 커플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관객의 공감을 얻어내는 세심한 연출력을 발휘했다.
월터가 젬베 연주에 금방 빠져드는 장면 또한 월터가 클래식 음악을 즐겨 듣던 음악 애호가라는 초반의 설정 덕분에 쉽게 이해가 된다. 월터를 경계하는 진중한 자이납과 달리 낙천적이고 영리한 타렉은 월터에게 차근차근 연주의 기쁨을 가르치며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똑똑한 사람이지만 젬베 연주 때는 생각하지 말고 두드려야 한다. 4박자 클래식에 익숙하겠지만 아프리카 리듬은 3박자다.”
시리아에서 왔다는 타렉이 아프리카 타악기인 젬베를 연주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건 자이납과 젬베뿐이다”라고 설명하는 대사에서 짐작되듯 타렉은 세네갈 출신인 자이납을 깊이 사랑한다. 이처럼 음악이 중동인 타렉과 아프리카인 자이납을 연결시켜주었듯, 백인 월터와 중동인 모나의 내적 교류에도 큰 몫을 한다.
학사 일정 때문에 코네티컷으로 돌아간 월터가 바바라에게 피아노를 주는 장면은 과거의 아내 혹은 그녀의 음악과 이제 거리를 두기로 했다는 결심으로 읽힌다. 반면 그가 뉴욕 집으로 돌아왔을 때 모나가 청소를 하며 월터 아내가 연주한 클래식 CD를 듣고 있는 장면은, 음악이 이들을 연결시켜주고 있다는 은유로 읽힌다. 월터는 CD를 하도 많이 들어 거의 외우다시피 했다는 모나를 위해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브로드웨이의 마제스틱 극장에서 장기공연 중인 을 예매한다. 타렉이 수용소에 갇혀 있는 절박한 시점에 만난 낯선 장년 남녀가 뮤지컬 감상을 통해 웃음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학교 수업에 관해 이야기하기를 꺼리는 월터는 “책을 안 써본 사람과는 말이 쉽지 않다”며 모나의 관심을 일언지하에 끊어버리지만, 결국엔 자신이 “바쁜 척, 책을 쓰는 척했지만 일에서 손 놓은 지 오래다. 남의 논문만 읽고 똑같은 과목을 20년 강의했을 뿐이다”라고 고백한다. 모나는 진심을 말해줘 고맙다며 “교수가 아니면 뭐가 되고 싶었냐?”고 묻는다. 모르겠다는 월터에게 모나는 ”그래서 더 신나지 않나요?“라며 웃는다. 낙천적인 타렉의 어머니답게 모나 또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강인한 여성임을 드러내주는 대사다.
런던에 사는 아들이 있다는 대사만 있을 뿐, 월터 아들의 존재는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아들과 살갑게 지내지 않는 듯해 보이는 그가 타렉에 대한 관심과 보살핌은 아들에 대한 속죄의 마음일 수 있고 이는 아들을 위해 자신의 행복을 기꺼이 포기하는 모나의 깊은 모성과도 연결된다.
는 아무런 사건도 인연도 없이 생의 끝점에 이를 것 같던 월터의 삶에서, 음악을 매개로 한 이국인들과의 만남이 얼마나 큰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9·11 사건 후의 미국 정부(는 2007년 작품이다) 태도가 다인종 국가인 미국의 정체성을 얼마나 훼손하고 있는지를 간접, 직설적으로 지적하기도 한다.
타렉이 지하철에서 경찰의 불심 검문을 받고 끌려갈 때 월터가 경찰에게 진정하라며 신음하듯 내뱉던 외침, 퀸즈의 불법 체류자 수용소 외관을 창고처럼 보이게 의도했다는 월터와 모나의 대화, 모르겠다고만 하는 수용소 직원들에 대해 “시리아와 똑같다”(저널리스트였던 모나의 남편은 반정부 글 때문에 7년을 징역살이하다 죽었고, 그 때문에 모나는 아들 타렉을 데리고 미국으로 왔으며, 본국 귀환 명령서를 받고도 이를 무시한 채 타렉을 키웠다고, 시리아로 떠나기 전 날 밤 월터의 품에 안겨 고백한다)고 하는 모나의 탄식, 타렉이 강제 송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월터가 외치는 절규 등이 그러하다.
거리, 관공서, 공항에서 인물 뒤로 보이는 거대한 성조기. 수용소 벽에 쓰여 있던 구호 ‘미국의 힘은 이민자들로부터’도 그렇고, 자유의 여신상 그림도 마찬가지다. 모나는 “까매도 너무 까맣다”며 놀랐던 아들의 연인 자이납을 만나 아들이 좋아했던 장소로 데려가 달라고 한다. 자이납, 모나, 월터가 자유의 여신상을 바라볼 수 있는 페리를 타게 된 연유다. 그때 모나는 월터에게 묻는다. 자유의 여신상에 올라가본 적 있냐고. 월터는 한 번도 꼭대기에 올라가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미국을 대표하는 주인공 월터는 이민자들이 미국의 상징으로 여기는 것들, 즉 자유의 여신상이나 브로드웨이 뮤지컬에 전혀 관심 갖지 않고 살아온 것이다. 그랬던 월터가 세 사람과 만나면서 국가를 대신해 사과까지 하게 된다. “저들이 나를 테러범 취급한다”며 불안해하는 타렉에게도, 추방된 타렉을 따라 시리아로 돌아가기로 한 모나에게도 미안하다고 중얼거리는 월터(하필 그의 세미나 발표 주제는 ‘개발도상국 경제’란다). 국가를 대신한 월터의 사과는 통상적인 할리우드 영화처럼 해피엔딩에 이르지 못한다.
수용소로 면회 갔을 때 유리벽을 마주하고 탁자와 가슴을 두드리며 협연을 할 만큼 음악을 사랑하고 마음이 통했던 월터와 타렉. 타렉이 “손님이 많은 저기서 연주하고 싶다”던 지하철 바로 그 공간에서 월터는 홀로 젬베를 연주한다. 이 마지막 장면은 여운과 기대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인정케 한다. “월터가 우리를 경찰에 고발할 거야”라며 두려워했던 자이납의 경계심은 우려로 그쳤지만, 그 불안의 정체는 월터 개인이 아닌 미국이라는 국가였음을 알게 해준다.
엄혹한 현실을 인정하며 절제된 감정으로 긴 여운을 남기는 는 뉴욕대학의 케보키안 센터, 킴벨 센터, 헌드레드 에이커스 레스토랑, 그리고 타렉이 연주하는 이스트 빌리지의 뱀부 하우스와 줄스 비스트로, 자이납이 직접 만든 액세서리를 파는 소호의 길거리 시장 등을 뉴욕의 명소가 아닌, 시민권자도 불법 체류자도 함께 살아가는 공간으로 묘사한다.
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안정적인 카메라(올리버 보켈버그), 음악, 그리고 연기다. 클라식과 젬베 연주가 화답하는 영화답게 베토벤의 ‘Sonata No. 21 in C Major’가 흐르는가 하면, 타렉으로 분한 하즈 슬레이만이 직접 협연에 참여한 ‘Darius Blues’와 ‘In Memory of the Dead’와 같은 재즈풍 연주가 청각을 만족시킨다.
연기 앙상블이 빼어난 것은 감독 토마스 맥카시가 배우 출신이라는 것과 무관해 보이진 않는다. (2005), (2005), (2006) 등에 출연해온 조연 배우 토마스 맥카시는 2003년 직접 각본을 쓴 독립 영화 로 선댄스, 산세바스티안, 스톡홀름 등의 영화제에 초대되었다. 역시 직접 각본을 쓴 와 (2011)도 데뷔작과 마찬가지로, 소외된 중장년층의 소통을 담백하게 그려내 잔잔한 감동을 안겨줬다. 세 작품 모두 톱스타가 아닌, 그러나 연기력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배우들을 캐스팅하여 아카펠라 화음을 이끌어냈는데 그 솜씨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전 세계 영화제에서 18개의 트로피와 17번의 후보 지명을 받은 는 로버트 젠킨스에게 2009년 아카데미영화제 남우주연상 후보와 2008년 모스크바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안겨주는 등 네 명의 주연 배우와 조연 배우들의 연기 앙상블이 각본과 연출보다 더 많은 주목을 받았다.
1953년생 리차드 젠킨스를 주연으로 캐스팅한 건 미국판 리메이크 실패작인 (2004) 촬영장에서, 젠킨스의 부드러운 음성과 눈빛을 확인한 후라고 한다. 리차드 젠킨스는 “나를 주연으로 하면 제작비 조달이 어려울 텐데”라고 우려했다고 한다. 토마스 멕카시 감독은 "의 아이디어는 베이루트를 여행했던 나의 경험에서 가져왔으며, 한 사람의 삶이 우연한 짧은 만남으로도 영향받을 수 있음을 그리고 싶었다"고 인터뷰한 바 있다.
21세에 미국으로 이민 온 레바논 출신의 하즈 슬레이만과 미국으로 이민 온 짐바브웨 출신 부모에게서 태어난 다나이 거라이라 모두 로 연기력을 인정받았지만 아직은 TV가 주 무대다.
이 두 젊은이보다 더 오래 시선을 사로잡는 기품 넘치는 여배우들이 있으니 히암 압바스와 마리안 셀데스다. 1960년, 이스라엘 나사렛 출신인 히암 압바스는 에란 리클리스의 (2004)와 (2008), 아모스 기타이의 (2005) 등에 출연해온 이스라엘 대표 여배우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2005) 등에도 출연하며 반경을 넓히는 한편, 연기 지도까지 병행하고 있는 재원이다. 단 두 장면 출연으로 위엄을 보인 마리안 셀데스는 1928년생. 토니상 수상에 빛나는 ‘브로드웨이의 디바’로 무대와 브라운관, 스크린을 넘나들며 멋있게 늙어가고 있다. 히암 압바스가 더 나이 들면 마리안 셀데스처럼 따뜻한 위엄이 더해지지 않을까 싶다.
물은 상황에 따라 모든 것을 전사하여 기록하는 기능이 있다. 물은 그 결정체가 상황에 따라 변화한다.
지난 추석에 서울공대 대학원 졸업반인 조카로부터 책을 한 권 선물로 받았다.
한 번 집에 다니려 왔을 때 물에 대한 이야기를 했더니 내가 마침 읽어 보려고 했던 책을 이심전심으로 보내온 것이다. 부인이 한국인인 일본인 저자 에모토 마사루가 지은 책으로 이 책의 대부분은 물의 결정을 찍은 사진으로 되어 있다.
현대는 경제마찰, 종교, 환경, 전쟁, 인종 문제 등으로 인한 혼돈의 시대다.
조화가 아닌 분열로 가기 때문이다. 이를 하나로 통합할 수는 있는 것은 물이다.
그래서 동양에서도 상선약수라는 말이 나온 것을 보면 우연의 일치인가?
인간이 수정란 단계 99%, 성인 70%, 노인 50%가 물로 되어있는 존재다.
물은 피처럼 끊임없이 순환해야 하며 멈추면 죽는다. 따라서 물은 생명력의 원천으로 에너지를 운반하고 수많은 정보를 전사하고 기억한다.
물은 21 세기를 대표하는 이슈중 하나라 생각되어 에모토 마사루의 저서 의 내용을 중심으로 물에 대한 이야기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 우주는 무엇으로 되어 있을까?
우주는 물로서 이루어져 있고 소우주인 인간도 물이다. 따라서 드라마는 물이 비추어 낸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물은 정화작용 외 만물을 생성하고 키우는 작용을 하며 이는 진동에 의해 주파수를 타고 나타난다. 물은 사물의 주파수를 감지하고 전사한다. 인간의 몸도 다양한 주파수로 이루어진 하나의 우주다.
물은 정화작용을 할 뿐 아니라 만물을 생성하고 키우는 역할을 한다.
인간도 물이다. 인간의 모든 역사는 물이 전사하고 만들어 낸 것이다.
물은 글을 읽을 수 있기 때문에 ‘감사 합니다.’ 라는 말은 각국이 서로 달라도
같은 결정체로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타난다.
세상의 모든 존재 삼라만상은 진동하며 고유한 주파수를 갖고 있다.
이러한 진동의 측정단위는 헤르츠인데 인간은 15헤르츠에서 2만 헤르츠의 진동 만 들을 수 있다. 그런데 물은 다양한 물체의 주파수를 전사하여 어떤 형태를 보여준다.
인간의 몸은 다양한 주파수로 이루어진 하나의 우주다. 즉 대우주 교향곡을 연주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대자연 우주는 도레미파솔라시도의 주파수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완전히 똑 같은 주파수는 서로 공명한다. 낮은 주파수도 공명하면 높아져서 사랑을 이룰 수가 있다. 높은 주파수를 갖고 있는 사람에게 끌리기 때문이다.
자연계 대부분의 생물은 한 가지 주파수만을 갖고 있으나 인간은 다양한 주파수와 공명을 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은 의지에 따라 사랑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기에 행복한 삶을 살수도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화원 선생님의 저서 웰다잉이 많이 생각났다. 화원 선생은 백상논단의 공동필진의 일원이면서 우리나라 선비학회 회장으로 필자가 속한 말경회의 거석이다. 그도 삶의 목적은 삶의 주파수 레벨을 업그레이드시키기 위해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그의 저서 에서 역설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2. 물은 다른 차원으로 가는 입구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 즉 물의 비중이 가장 커지는 것은 물의 온도가 4도C 일 때이며 얼음이 물에 뜨는 이유다. 아무리 추워도 호수 아래 온도가 4도C를 유지하고 있어 모든 생물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물은 지구 마그마가 식는 과정에 수소원자를 만나서 물이 생겨났다는 설과 프랭크 박사의 소혜성설 즉 물과 얼음이 외계에서 왔다는 설로 그 기원을 요약할 수 있다. 인간은 불과 2백만 년 전에 출현했으며 물은 지구상의 미네랄과 합성하여 38억 년 전에 생명체를 탄생시켰으며 땅위로 출현한 것은 산소가스와 오존층이 만들어진 4억2천만 년 전이다.
물이 가진 생명의 정보를 해독하는 방법 중 하나가 결정을 관찰하는 것이다.
물은 사랑 감사를 나타내는 결정체는 장엄한 광채이며 물은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그 형태를 바꾼다.
3. 의식이 모든 것을 바꾼다
신은 인간에게 창조력을 주시고 그 힘을 사용하는 것은 자유의지에 맡겼다. 20세기가 석유 쟁탈전이었다면 21세기는 물의 쟁탈전으로 시작될 것이다. 현재 확인된 원소는 108가지이며 인간은 약 90개의 원소로 이루어졌다고 본다. 고등생물 일수록 원소의 수가 늘어난다.
초조한 감정은 수은과 파동이 같고, 분노는 납, 근심불안은 카드늄, 망설임은 철과 관계가 깊으며 스트레스는 아연(Zn) 과 관계가 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태양계 행성의 수는 9개며 여기에 12를 곱하면 108이 된다. 즉 주기율표를 보면 행성과 대응하는 원소를 찾을 수 있다.
물은 마음의 거울이며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려준다.
외과 수술은 파괴된 파동을 강렬한 파동으로 치료하는 행위이다. 상반되는 두 감정이 같은 파형을 갖는다. 프랑스 루르드의 샘물은 감사의 물이므로 원한이 많은 사람이 마시면 좋아진다. 물의 원소가 H2O라면 H는 감사이고 O는 사랑이다. 사랑이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에너지라면 감사는 수동적인 에너지다. 사랑과 감사는 양과 음의 관계에 있다.
4. 한 순간에 세상이 달라질 수 있을까?
한 순간의 생각에 따라 세상은 달라 질 수도 있다. 따라서 항상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고로 살아야 한다. 사람 안에 우주의 정보가 들어있고 세포 하나에도 우주의 정보가 들어 있어 세계는 한 순간에 바뀔 수 있다.
세계는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고 그 변화를 가장 먼저 지각하는 것이 물이다.
가또 승려의 기도전과 기도 후에 물의 변화가 이를 이야기 해준다.
일이 반복되면 형태의 장이 만들어 지고 여기에 공명하면 똑 같은 현상이 계속 일어난다. (영국 셀 드레이크 박사의 이론)
생명은 보이지 않는 에너지의 작용으로 살아가고 있다. 인간의 의식이 주위의 사물에 영향을 미친다. 신으로부터 받은 창조력을 발휘하면 엄청난 변화를 도무할 수 있다.
5. 미소는 잔물결이 되어
물은 우주로부터 날아서 지구로 왔다가 또 다른 우주로 날아간다.
역사가 반복된다면 수천, 수만 년 후 물이 계속 지구로 날아온다면 지구는 노아의 대홍수와 같은 대 재난을 다시 맞이할 수도 있을 것이다. 화학물질로 오염된 물을 초음파로 분해 후에 오염된 것과 정 반대의 파동을 통과시켜 정화시킨다면
체내의 유해물질도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
수중 다이옥신을 초음파로 분해하다는 기사 즉 주파수 200 킬로헤르츠 초음파를 물속으로 보내면 기포가 생겨 다이옥신을 분해한다.
물의 결정 사진을 5도C 이하에서 찍는 것을 상온에서도 찍을 수 있다면 물과의 관계를 밝히는데 한 단계 더 진 일보하게 될 것이다.
혼, 윤회, 영의 존재는 물을 연구하다보면 해결될 수도 있을 것이다. 혼은 물을 타고 왔다가 물을 타고 떠난다. 저 우주로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안고.
사랑과 감사는 자연의 섭리요 이는 물속에 있다.
6. 물에 대한 에필로그
21세기가 물의 시대라면 물의 단순한 기능 이외 물에 대한 연구가 더 본격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어쩌면 물을 통하여 우리는 인간에 대하여 보다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고 과학의 역사를 새로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의 결정과 전사를 알면 우리는 인간 연구에 한 발짝 더 근접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건강한 삶을 위해 좋은 물에 대한 많은 관심과 연구가 많이 이루어 졌으면 좋겠다.
글배국남 대중문화 평론가(knbae24@hanmail.net)
2017년 정유년(丁酉年)의 새해가 밝았다. ‘새해’라는 단어가 풍기는 희망을 느끼기보다는 높아지고 있는 대내외적 불확실성, 정치 불안 등으로 어려운 현실을 체감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힘차게 첫발을 내디디며 2017년을 시작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2017년 올해는 어떤 새로운 문화 트렌드가 유행할까.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 KT경제경영연구소, 코트라, 다음소프트, BC카드 등 수많은 기관이 2017년 다양한 분야의 트렌드를 전망했다.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아동학부 교수 외 5명의 저자가 쓴 는 10대 트렌드 중 하나로 ‘C’mon, YOLO!’(인생은 한 번뿐 순간에 충실하자, 욜로 라이프)를 전망했다. 2017년 올해는 욜로(YOLO)가 문화의 주요 트렌드를 이끌 키워드가 될 것으로 내다본 것이다.‘욜로(YOLO, You Only Live Once)’란 ‘한 번뿐인 인생’현재를 즐기며 행복하게 잘 살자는 의미의 신조어다.
욜로 트렌드의 부상으로 장기적인 미래에 대한 계획보다는 현재의 ‘즉시적 행복’을 중요시하는 문화가 더욱 관심을 끌면서 ‘데일리 디톡스(일상에서 찾는 휴식)’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 ‘맞춤형 휴가’, ‘이터테인먼트(eatertainment·식사 그 이상)’등 일상에서 소소한 만족을 지향하는 문화가 강력한 트렌드로 부각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tvN의 , 등과 같은 예능 프로그램처럼 대중문화 역시 일상 속에서 즉시적인 행복과 소소한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것을 담는 콘텐츠가 주요한 흐름을 이끌 것으로 예상된다.
수많은 연구소와 기관이 한결같이 2017년의 강력한 문화 트렌드로 꼽는 것이 바로 1인 가구 문화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15년 현재 1인 가구는 520만 가구로 전체 가구(1911만 가구) 중 27.2%로 가장 많았고, 그다음은 2인 가구(26.1%), 3인 가구(21.5%), 4인 가구(18.8%), 5인 이상 가구(6.4%) 순이다. 경기침체와 저성장, 이혼과 여성의 경제활동 증가, 고령화 등으로 급증하고 있는 1인 가구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혼술, 혼밥, 혼영, 혼행’ 등 1인 가구 문화를 등장시켰다. 식당과 극장에서 1인 고객을 위한 1인 좌석을 만드는가 하면 여행사에서도 1인 여행자를 위해 다양한 상품을 내놓고 있다.
대중문화 역시 대세로 떠오른 1인 가구를 반영하는 콘텐츠를 집중적으로 제작하고 있다. 드라마 , 예능 프로그램 ···, 교양 프로그램 · 등이 1인 가구를 소재로 한 대표적인 콘텐츠들이다. 최근에는 1인 가구의 라이프스타일은 물론 1인 가구의 증가로 초래될 수 있는 인간관계의 결핍을 보완할 수 있는 것들까지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등 다양한 문화 콘텐츠가 속속 사람들과 만나고 있다.
개성 강한 X세대가 신중년에 진입하면서 이전의 중년과는 다른 그들만의 새로운 표준을 만들어가는 ‘뉴노멀 중년’의 등장도 2017년 새로운 문화의 부상을 예고하고 있다. 중년층에 편입한 X세대들은 변해가는 세상에 맞춰 새로운 가치 수용에 적극적이기 때문에 기존의 소비 영역 외에 게임, 완구 등에 대한 관심도 많다.
의무감이 아닌 재미에 따라 ‘덕질’을 하는 뉴노멀 중년들은 어린 시절에 경험했던 갖가지 향수들을 여전히 잊지 못하고 완구 등 그 경험들을 다시 소비하는 키덜트(kidult·어린이를 뜻하는 ‘키드’(Kid)와 어른을 의미하는 ‘어덜트’(Adult)의 합성어로 ‘아이들 같은 감성과 취향을 지닌 어른’을 지칭한다) 문화에 열광하고 있다. 백화점들은 키덜트 상품 코너를 따로 운영하고 있으며 영화, 소설, 패션, 애니메이션, 광고 등 문화의 전 영역에서 키덜트 문화가 새로운 신드롬으로 확산되고 있다.
지난해에는 가상현실(VR)과 증강현실(AR)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모바일 증강현실게임 ‘포켓몬 고’신드롬이 대표적인 사례다. 2017년 올해는 VR과 AR에서 한발 더 나아가 혼합현실(MR)이 강세를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KT경제경영연구소와 한국인터넷진흥원이 공동으로 발표한‘2017년 ICT(Information and Communications Technologies)’ 10대 주목 이슈’ 중 하나가 MR의 대중화다. MR는 현실 배경 위에 현실과 가상의 정보를 혼합해 기존보다 진화된 가상세계를 구현하는 기술이다. KT경제경영연구소는 “MR 시장은 VR과 AR에 비해 늦게 주목받았으나, 향후 69.7%의 연평균 성장률을 기록하며 지속 성장할 것이다. 글로벌 MR 시장은 2015년 4580억원에서 2021년 1조980억원으로 약 두 배 이상 성장할 것으로 예측된다”고 밝혔다. MR의 부상으로 영화, 방송 등 MR를 활용한 다양한 문화 콘텐츠도 대중과 만날 것으로 보인다.
대외적인 불확실성이 높아지고 경기침체가 장기화하고 취업난까지 가중되면서 사람들은 각자 살아나갈 방법을 꾀할 수밖에 없게 됐다. 각자도생의 절박함은 2017년 주요 트렌드 중 하나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국가도, 사회도, 가족도 나를 보호해줄 수 없어 어떻게든 혼자 알아서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지난해 흥행에 성공한 영화 과 은 각자도생해야 하는 대한민국 현실과 사람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반영해서 보여줬다. 이들 영화처럼 대중문화 콘텐츠나 고단한 삶을 잠시라도 잊게 해주는 판타지물, 복고물들이 2017년에도 문화의 흐름을 주도할 것으로 보인다.
2017년 올해는 대통령 선거 등 정치적 이슈들이 전 국민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부각될 것이다. 또한 급변하는 정치적 상황은 방송을 비롯한 문화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동시에 문화의 주요 트렌드를 이끌 키워드로 부상할 것이다. 이 밖에 지난해 이루어진 정부의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결정과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체결에 대한 중국의 반발로 한류를 제한하는 한한령이 한류 콘텐츠를 전면 금지하는 금한령으로 확대돼 문화산업 위축이 불 보듯 뻔하다. 그리고 이러한 한류 위축은 2017년 문화계의 지형도를 변화시킬 변수로 작용할 것이다.
공자가 강조한 중용의 세계는 어떤 것일까? 우리는 생활 중 중용의 중요성에 대하여 수없이 듣고 배어왔다. 중용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중용을 흔히 쉽게 A+B/2=C정도로 생각한다.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중용은 수학적 평균의미를 넘어 심오한 의미가 담겨져 있다.
즉 집합 A와 집합 B의 교집합 C와 같은 것이다.
A도 B도 아니면서 A와 B를 함께 수용하는 A+B+C의 의미가 있다.
아니 A도 되고 B도 되면서 그 둘만이 아닌 제 3의 세계가 중용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선과 악의 중용은 선과 악을 다 수용하여 나아가는 길에 중용의 도가 있는 것이다.
여당과 야당을 함께 수용하는 당이 있다면 그 당이 바로 중용의 도를 행하는 당이 될 것이다.
즉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으면서 그 양쪽을 모두 다 똑 같이 바라볼 수 있는 세계가 중용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좀 더 쉽게 이야기하면 이 세상 자체는 중용이다.
공산주의 체제가 존재하면서 자본주의 체제가 존재하는 세상과 같이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중용이 아니고 둘 다를 수용하면서 어느 한 쪽이 지배해서는 안 되게끔 균형을 제공하는 것이 중용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성경말씀에도 나온다. 벼를 심는데 피가 있으면 이를 뽑아 버리지 말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선과 악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둘 다를 포용하면서 어느 한 쪽이 지배해서는 안 되게끔 균형을 제공하는 것이 중용이다. 왜냐하면 어느 한 쪽을 중히 여기면 객관성을 잃고 편견에 치우칠 수 있으므로 가만히 두더라도 다른 사람과 공존을 생각할 때 악은 점점 그 모습을 줄여가게 될 것이다.
삶 중에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있기 마련이다.
나쁜 일이 닥쳤을 때 좌절하지 않고 이를 극복해 나간다면 그 방어하는 세계 안에서 즐거움과 행복을 느낄 수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생활 중에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중용을 얻어야 한다. 좋은 것이라고 함부로 심취해서도 안 되고 나쁜 것이라고 해서 등을 돌려서도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세상을 다 등지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기타를 칠 줄 모른다. 젊어서 기타를 가르치던 학원 선생이 젊은 제자와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보고 배우는 것을 중단해 버렸기 때문이다. 중용의 도를 당시에 터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배우지 못했던 것이다.
논어에 공자의 말씀 중에 낙역재기중(樂亦在其中)이라는 말이 있다.
어렵고 힘든 일을 맡아서 일을 피하지 않고 도전하면 그 일에서도 재미를 느낄 수 있다는 의미다. 즉 내가 그 일을 선택하지 말고 자신을 그 일에 맞추면 그 사람은 발전하고 성공에 이를 수 있다. 따라서 중용은 번영의 길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도 발전하기 위해서는 당파 내지 패거리 문화를 청산하고 중용의 문화를 형성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자연과 우주 삼라만상이 중용의 도를 요구하는데 너무 한 쪽으로 치우치는 생활을 하게 되면 문제가 생길 수가 있다. 악인을 당장 처벌하지 않더라도 우주의 섭리는 선의 방향으로 조정을 서서히 해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도 오랫동안 진심을 주고받으면 그 사람의 훌륭한 면도 우리는 발견할 수가 있을 것이다. 나도 과거 나와 앙숙인 직장동료와 관계를 개선하다보니 그렇게 그 사람의 장점이 크게 보일 수가 있었던 적이 있다.
파당은 중용이 될 수 없고 결코 번영에로 이끌 수가 없음을 유의하면서 삶을 살아야 하겠다.
고금석 연극연출가
허망한 소싯적 꿈~
나의 원래 꿈은 외교관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독문학과로 대학 진학을 했던 것이고 1학년 때부터 경제원론이니 법학통론, 정치외교사 등을 두루 청강하였다. 5개 국어를 마스터할 계획도 세우고 첫 방학부터 중국어, 프랑스어 학원을 찾았다. 당시 독일문화원에는 독일 문학이나 시사 문제에 대해 토론하는 대학생 모임이 있었는데, 모든 의사소통을 독일어로 하였다. 그 모임의 성격이 나의 구미를 자극하였다. 그래서 독일어 정복의 꿈을 구체화하기 위해 2학년이 되자마자 그 모임을 찾았다. 이때가 1971년 4월!
잘못 찾은 방
문을 열고 들어가니 30여 명이 둘러앉아 있었다. 여학생도 많았는데 몇몇은 가슴이 설렐 정도로 예뻤다. 웬 늙수그레한 학생이 발표를 하고 있었다. 프랑스대혁명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소문과 달리 우리말로 발표를 했다. ‘너무 어려운 내용이어서 그러나?’ 기나긴 발표가 끝난 후 웬 책자를 나누어 주더니 윤독을 하자고 했다. 제목을 보니 ‘당통의 죽음’. 연극 대본이었다.
그때서야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옆 사람에게 물으니 ‘프라이에 뷔네’(Freie Bühne-독일문화원에 소속된 연극단체로 독문학과 학생들이 주축을 이룸)란다.
대본이란 걸 처음 봐서 그런지, 내 차례만 되면 긴장되어 눈앞이 핑핑 돌고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혀는 꼬여 버벅거리기 일쑤였다. 그렇게 천당과 지옥을 오가며 첫 연습을 마쳤고, 시(始)파티 자리까지 가서 막걸리를 진창 얻어 마셨다. 그러나 다시 그 연습장을 찾지는 않았다. 난 원래 연극은 꿈도 꾼 적이 없으니까~.
왜 그랬을까?
그로부터 1주 후. 집으로 낯선 전화가 걸려 왔다. ‘프라이에 뷔네’란다. 왜 그랬을까? 방을 잘못 찾던 날, 자기도 2학년이라고 유난히 친절하게 굴며 집 전화번호를 묻던 그놈, 얼굴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왜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던가? 오늘이 캐스팅하는 날이라고, 연출자가 나를 꼭 보고 싶어 한다고. 왜 나갔을까? 캐스팅 자리에 나가지만 않았어도 난 계속 외교관의 꿈을 꿀 수 있었을 텐데…. 연출자는 꼭 보고 싶다던 나에게 대사 여덟 마디짜리 단역을 주었다. 그러나 여덟 마디도 버거울 정도로 난 연기에 문외한이었다. 읽기는 그럭저럭 견뎌냈는데, 블로킹(동작선 긋기 연습) 때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영광스럽게도 난 연극의 첫 장면에 출연하게 되었다. 그건 첫 장면 출연자를 빼고 나머지 45명의 배우가 한꺼번에 내 연기를 보는 끔찍한 사태를 의미했다.
여덟 마디였지만, 첫 대사는 엄청나게 길었다. 대본의 반쪽 페이지가 넘게 길게 이어졌다. 창녀들이 골목길에서 교미하는 개들을 보고 깔깔거리는 모습을 묘사한 내용이었는데, 리딩할 때는 그럭저럭 잘나가던 대사가, 90개의 눈알이 주시하는 가운데 갑자기 하려니 맥락도 잡히질 않고, 얼굴 근육이 떨려 도무지 웃음도 나오질 않았다.
몇 날을 고민하다 한 가지 방법을 고안해 냈다. ‘아무래도 간덩이가 너무 작아 그러는 거 같으니, 연습 전에 술을 마시자.’ 당시엔 왕대포라고, 막걸리를 큰 대접으로도 팔았다. 이 방법은 기가 막히게 통했다. 그렇게 난 매일 음주연습을 했다. 이 습관은 공연 당일까지 이어졌다. 공연장에서 막걸리를 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공연 당일, 분장하기 전에 구멍가게에서 미리 매실주 한 병을 구입했다. 병이 납작해서 윗저고리 속주머니에 들어가기 딱 좋았다. 그래도 도수도 높고 500㎖는 족히 되는 사이즈였다.
아니나 다를까, 공연 시간이 임박할수록 가슴이 뛰고 숨이 가빠졌다. 그때마다 몰래 한 모금씩 홀짝이다 결국 공연 직전엔 한 병을 다 마셔 버렸다. 내 데뷔 연기는 성공적이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 술자리에서, 선배 한 분이 무대에서 술냄새가 진동하더라며 음주공연한 사람을 색출하려 했다. 난 기겁하여 다음 날 공연 땐 술을 준비하지 않았다. 그 덕에 난 예의 창녀촌 장면 도중 대사를 까먹고 말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는 대사! 5초가 지나 10초, 15초~ 결국 나는 머리를 감싸고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관객석에서 격려 박수 소리가 터지며 다음 배우가 등장하여 연극을 진행시켰다. 난 하릴없이 무대를 퇴장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연기 데뷔 무대가 이리 허무하게 끝나다니~.
힘없이 무대를 나오는데 갑자기 눈앞에 불이 번쩍 튀었다. 초장부터 연극을 망쳤다며, 누군가가 내 뺨을 후려친 것이었다. 난 그 사람이 연출자인 줄 알았다. 최근 그 연출자에게 내 뺨을 후려친 사람이 당신이냐고 물었더니, 아니라고 했다. 자기 작품을 망친 배우를 응징하지 않는 연출자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 난 아직도 의문이다. 그렇게 2학년의 1학기를 온통 연극에 허비하는 바람에, 1학년 때 올 A에 평점 4를 넘던 학점이 그만 C·D투성이에 평점도 3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왜 또 그랬을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자마자, 외교관의 꿈을 이루어줄 책들을 싸 메고 연극과 인연이 닿지 않는 외딴 세계로 기어 들어갔다. 고향에 있는 ‘옥천사’라는 절이었다. 고시생들에게 알려진 명문 절답게 옥천사에는 예닐곱 명의 고시생이 있었다. 나의 꿈 재도전 계획은 성공적이었다. 가져간 책과 참고서적, 문제집 들을 죄다 독파하고 한 달 반 만에 의기양양 하산하였다.
그러나 개학을 열흘도 채 남기지 않은 날, 다시 그놈한테서 운명의 전화가 걸려왔다. 공연이 얼마 안 남았는데 주인공 자리가 비어 있다고, 이번에는 독일어 원어극이라고, 발음은 독일 사람이 봐준다고~. 그래서 생각했다. 독일어로 공연 한 번 하면 회화는 저절로 되지 않겠는가, 더군다나 원어민이 가르쳐 주면 독일어 발음이 얼마나 정확하고 좋아지겠는가?
왜 또 그랬을까? 난 또 반갑게 독일문화원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판단 미스였다. 발음은 좀 나아졌는지 몰라도, 난 지금까지 독일어는 입도 뻥긋하지 못한다. 2학년 말, 극단을 빠져나오려고, 연극을 접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내 동기와 선배들이 모두 군대를 가거나 유학을 떠나 버린 후였다. 극단엔 1학년 신입생과 예쁜 여학생들만 남아 있었다. 이때를 즈음해 외교관의 꿈은 완전히 접혔다.
관객모독
엇나가긴 했지만, 이후 나의 연극인생은 비교적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계속 배우로 활동했으면 내 인생은 더 달라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선배들이 없는 상황에서 난 연출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 1977년, 난 독일의 걸출한 작가, 페터 한트케를 만나 연출로서의 역량을 발휘한다. 나중에 기국서라는 연출가가 재공연을 해서 더욱 유명해진 . 관객들은 욕먹고 수모를 당하고 모독당하기 위해 줄지어 세실극장을 찾았다. 모독을 당하다 겁을 집어먹고 실신한 나머지 극장 밖으로 실려나간 관객도 있었다.
공연을 마친 다음 날, 단원들이 예매처를 돌며 수금을 해왔다. 여관방에 모여 결산을 하는데 모두들 주머니에서 만 원짜리를 꾸역꾸역 기어냈다. 연극을 해서 처음으로 돈 버는 경험을 했다. 연극에 입문한 지 6년 만의 일이다.
카스파
난 계속 페터 한트케에 매달렸다. 1978년엔 를 선보였다. 16년 동안 갇혀 살다 세상에 나온 소년이 언어를 배우며 겪는 고통을 언어고문극이라는 독특한 형식으로 표현한 작품이었다. 이 작품 역시 충격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는 1983년에 재공연되어 극비평가그룹으로부터 작품상을 받고, 1996년에 앙코르 공연을 가지면서 500회 가까운 공연기록을 남겼다. 다음 해엔 고려대 극예술연구회에서 을 연출하여 전국대학연극축전에서 최우수상을 받고, 그해 국립극단에 입단하였다. 엇나간 꿈은 힘을 받아 탄탄대로를 질주했다.
광대학교
나의 대표작으로는, 1987년 ‘우리극장’이 만든 를 들 수 있겠다. 아마추어 극단을 고수하던 프라이에 뷔네는 1979년 전문 직업극단으로 탈바꿈, ‘우리극장’이라는 명패를 내걸었다. 는 배우를 길러내는 학교에서 훈장과 학생들이 벌이는 코미디극인데, 고리타분한 훈장이 자유분방한 학생들한테 백전백패를 당한다.
는 춘천으로 살러 가 만든 극단 ‘춘천앙상블’의 창단공연으로도 제작되었으며, 1992년 재공연된 후 현대백화점, 서울우유 등 기업체와 학교 순회공연을 다녔다. 1994년에는 LA교민 위문공연을 다녀오고, 2000년엔 전주시립극단 상임연출로 부임하면서 다시 업그레이드되었다. 는 전주 동네 구석구석에 초청 공연된 후 중국 수저우(蘇州)까지 다녀오며, 1000회 이상의 공연 기록을 남겼다.
산너울패
2008년, 아내의 암 투병을 위해 충남 서천에 새 집을 짓고 아예 눌러 앉았다. 아내가 저세상 사람이 되고 바로 ‘산너울패’라는 극단을 만들었다. 2013년의 일이다. 산너울마을 동네 주민들로 이루어진 작은 극단이다. 동네 아이들 7~8명도 따로 모여 연극놀이를 하며 어울린다.
첫 작품으로 어른 팀은 를 공동 창작하였고, 어린이 팀은 고(故) 임길택 시인의 시를 모아 이라는 이름으로 재구성, 공연하였다.
창단 2년째에 산너울패는 의미 있는 행사를 가졌다. 송년공연으로 동네잔치 한마당을 벌인 것이다. 단원들은 낭독공연()을 하고, 초청가수들이 내려와 노래 불러주고, 국립창극단 박성환 배우가 판소리도 들려주고, 서천 토박이 박광배 시인이 자작시 낭송도 했다. 동네 주민들은 막걸리를 사오고 삼겹살을 구웠다. 막판에는 초대가수와 춤꾼 구별 없이 노래 부르고 한데 어우러졌다.
이문재 시인이 옵서버로 이 구경을 하다가 곧장 경향신문 정동칼럼에 이 멋진 광경을 그대로 옮겼다. 시골 극단이 가야 할 길의 모범을 보인 것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 고금석(高金錫)
1951년 광주 출생. 서울 배재고·고려대 독문과 졸. 극회 프라이에 뷔네 단원. 전국대학연극축전 최우수상. 국립극단 단원. 극단 우리극장 창단. 올해의 작품상(연극비평가그룹 제정) 수상. 전주시립극단 상임연출. 전주대 영상학부 강사 역임. 서천극단 산너울패 창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