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도대체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나 이혼한 거 맞아? 이혼 후 어라? 남편이 둘이 되었네. 두 사람과 재혼했냐고? 에그, 그 무슨 망측한 소리. 일부일처 현행법에 걸릴 일 있나? 더구나 내가 무슨 팜파탈이라고.
내 나이는 60세. 5년 전 이혼했다. 이혼 사유? 그걸 밝힐라치면 내 자신도 움츠러든다. 이럴 때는 남편의 폭력, 외도, 도박 등 누가 들어도 “이혼할 만하네, 그동안 함께 사느라 고생 많았겠네, 왜 그렇게 오래 참고 살았어? 진작에 이혼할 일이지” 등등 공감과 위로가 쏟아지는 이혼 사유가 부럽기조차 하다. 그런 선명하고 명백한 사유가 있다면 남들 앞에서 떳떳하고, 무엇보다 내 자신에게 확신이 들면서 그간의 상처를 훌훌 털고 새 길을 갈 수 있을 것 같다.
내 경우는 남편이 마마보이라서 이혼했다. 어떤가? 20~30대 젊은 부부도 아니고 30년을 함께 산 사람이 마마보이든 파파보이든 그게 왜 새삼 이혼의 빌미가 될까 싶은가? 그냥 남편이 싫증 나서 헤어졌다고 하면 사람들한테 비난받을까 두려워서 이유 같지도 않은 이유를 갖다 붙이는 거 아니냐고?
거봐, 그렇다니까. 이러니 내가 이혼하고도 뭐 보고 뒤 안 닦은 것처럼 개운치 않고 상황에 질질 끌려다니는 기분이라니까. 내가 이러려고 이혼했나….
전남편은 영원한 피터팬
전남편은 가정에 무책임했다. 아니 책임이란 개념조차 없었다. 그 사람 눈에는 처자식의 존재가 보이지도 않는 듯 제멋대로 행동하고 기름처럼 겉돌았다. ‘피터팬 신드롬’이란 게 내 전남편을 두고 하는 말이지 싶다. 몸만 어른이었지 심리적 퇴행 상태에 빠져 어린아이로 머문 채 현 상황에서 주어진 책임과 역할을 거부하는 어른 말이다. 그렇게 영원한 피터팬이었던 남자.
남편은 위로 누나 네 명 둔 5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부모님의 극진한 사랑(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그 이상을 받은 사람이다. 지독한 편애를 받으며 자란 탓에 세상을 배울 새가 없었다. 땅에 발을 디딘 적 없는 사람이랄까. 말만 하면, 아니 말도 하기 전에 원하는 것을 눈앞에 대령하는 ‘마술세계’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그런 남편에게 결혼은 엄마의 손에서 아내라는 또 다른 엄마의 손으로 이양되는 절차에 불과했다. 여전히 땅을 디딜 필요가 없는 뽀얀 버선발을 한 채로. 더구나 나는 5남매의 맞이. 밑으로 남동생만 넷을 둔. 남편과는 완전 거꾸로였다. 이거야 원, 오목하고 볼록한 요철처럼 두 사람이 만나도 제대로 만났다고 할지.
어쩌면 나니까 남편과 30년을 함께 살았을지 모른다. 생색 내려는 게 아니라 보살핌을 무조건 받는 사람과 무조건 주는 사람, 우리는 원가족에서부터 그렇게 길들여지며 성장했고, 그래서 남편은 받는 것에, 나는 주는 것에 익숙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내 인내심은 30년 만에 바닥을 드러냈다.
남편을 결혼이란 올가미(실상 올가미인 적도 없었지만)에서 벗어나게 해주려고, 그렇게 해서 맘껏 제멋대로 살게 해주려고 이혼했다. 아니, 내가 살기 위해 그와 헤어졌다. 과장을 섞어 말한다면 태어나서 배변 훈련 외에는 그 어떤 훈련도 되지 않은 사람과 함께 살면서 돈 버는 것부터 두 남매 키우는 것까지 모두 내가 도맡아 했다. 그런 생활이 몇 십 년 지속되니 몸은 이미 탈진한 지 오래고, 마치 유령과 사는 것처럼 마침내 영혼까지 묽어지는 느낌이었다. 영, 혼, 육이 탈탈 털려버리는 상황에서 나는 이혼을 택했다. 이혼이라는 매듭이라도 지어야 숨을 쉴 것 같았다.
멀리하기엔 너무 가까운 당신
남편을 두고 아내들은 아들 하나 더 키우는 거라고 우스갯소리로 말하곤 하지만, 내 경우에는 끊어낸 남편이 진짜 아들이 되어 나타날 줄이야! 이혼을 했음에도 그는 여전히 내 곁을 맴돌고 있다. 그것도 본격적으로.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혈연처럼. 그 사람 마음엔 서류상으로만 이혼한 거였을까? 결혼 생활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혼 생활에서도 그는 무책임했던 것이다.
이혼 초기에는 이런 식이었다. 하나뿐인 아들이 이혼한 줄 알면 100살 노모의 충격이 이만저만 아닐 테니 노모를 비롯해 가족들에게는 비밀로 해달라고 했다. 어차피 치매 노인이다. 알면 어떻고 모르면 어떠랴. 다른 가족이라야 만나는 일도 거의 없으니 역시 상관없었다. 나이 50대 중반에(그와 나는 동갑) 이혼을 당했으니 창피하기도 했을 거고.
아이들 생일에 함께 만나자고 하는 것까진 나도 흔쾌히 동의하는 바였다. 부모가 헤어졌다고 아이들에게까지 상처 줄 필요는 없으니. 함께 사는 동안에는 없었던 일이라 고맙기까지 했다. 이 사람이 드디어 철 드는 건가 의아해하면서도 반가웠다. 자기 생일에도 역시 아이들과 함께 만나줄 수 있냐고 해서 매몰차게 거절하지 못했고, 그 보답으로 내 생일을 챙겨주고 싶다기에 얼결에 또 얼굴을 보게 되었다.
이혼 후 더 자주 만나고 더 자주 대화하는 황당하고 당황스런 상황이라니.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그러면 다시 합치면 되지 않냐고, 남편도 이제 정신 차린 모양이니 앞으로 서로 의지하며 재미있게 살면 되지 않냐고. 나도 처음에는 그런 줄 알았다. 이혼이 그에게 의외의 강처방이 되었을까 하는 의구심 섞인 기대감. 그러나 그건 나의 착각이었다. 잠자리만 요구 안 했지, 속된 말로 빈대처럼 달라붙었다. 툭하면 이건 어떻게, 저건 어떻게 처리하냐며 시도 때도 없이 연락이 왔다. 생일 만남이니 뭐니는 자기 신변과 생활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전처럼 내게 떠넘기기 위한 사탕발림이었을 뿐. 나 이혼한 거 맞아?
상담사가 재혼 남편이 되다
문제는 내가 재혼을 한 상태라는 것이다. 나는 이혼 후 1년 만에 재혼했다. 평생 어린아이 같은 남편과 살다 내가 좀 어린아이 짓을 할 수 있는 사람, 나도 좀 어리광을 피울 수 있는, 그렇게 품이 큰 사람 안에서 쉬고 싶다는 마음이 늘 있었다. 나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결혼 생활도 아니고, 무엇보다 그런 사람은 없다는 것을 모를 나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처럼 환상 없는 냉혹한 현실 인식 덕분에 오히려 나는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지금 남편은 나의 상담사였다. 내가 ‘피터팬 남편’으로 인해 힘들어할 때 내담자와 상담자 관계로 만났다. 나는 그가 사별했다는 것을 상담받는 동안엔 몰랐다. 상담은 내가 받는 거지, 그가 내게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을 일이 없으니. 내가 3년을 상담실에서 고통을 토하는 동안 전남편은 한 번도 상담에 응하지 않았기에 부부 상담을 받은 적이 없어 그는 내 전남편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
그가 내 이혼에 어떤 입김을 불어넣었다든가 간접적으로라도 부추긴 적은 전혀 없다. 물론 상담이 이혼 결정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그렇다 해도 그건 상담의 일반적인 결과이지 그와 나 사이에 특별한 그 무엇이 작용한 건 아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현재의 남편을 변호하는 이유는 그가 참 좋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내 남편으로서 좋은 그 이상으로, 그는 인간으로서 누구에게나 넓은 가슴을 내줄 수 있는 사람이다.
이혼하고 나서야 그가 사별남이라는 걸 알았고, 3년 남짓 상담하는 동안 내 사정을 깊이 알고 있는 사람이었으니 새삼스럽게 서로에 대해 알아갈 시간도 필요 없었다. 물론 나는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지만 지금까지 보조를 맞춰 잘 살아가고 있으니 그의 성품, 인간 됨됨이는 입증되고도 남는다.
어린아이 같은 전남편이 아직 내 치마꼬리를 잡고 있는 것에 대해 오히려 나를 위로하고 공감해주는 남편. 이상한 삼각관계, 난감한 그림이지만 이 또한 남편이 상담사이기에 수용 가능한 일인 것 같다. 전문가로서 전남편의 심리 역동을 잘 알기 때문에 나의 어쩌지 못하는 모습을 너그럽게 보아주고 있는 것이다.
집안에 암환자가 있으면 가족 모두 암박사가 되는 것처럼 나는 피터팬 남편으로 인해 반 상담사가 되어갔다. 심리학 공부를 꾸준히 하고 틈틈이 상담을 받으면서 그 유체이탈적 결혼 생활을 그나마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결혼 초에 헤어졌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더 현명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다 지난 일이고 결과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그때 그렇게 했다고 해서 더 잘한 선택이라고 누가 단정할 수 있으랴. 다만 이제는 전남편을 놓아야 함에도 아직 그를 완전히 떠나보내지 못하는 것은 확실히 문제다. 30년간 서로에게 길들여진 습관을 하루아침에 바꾸지 못하기 때문인 것 같다.
솔직히 나는 현재 남편이 둘인 것 같다. 물론 지금 남편에게 너무나 미안하다. 훌륭한 성품을 지닌 그가 상담사라는 특별한 위치에 있기에 남들과는 다른 시선으로 나를 이해하는 거지만, 그도 사람인데 왜 마음이 상하지 않으랴. 어쩌면 그는 나와 결혼한 후에도 내 심리 치료를 계속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 내 행동은 분명 정상이 아니기에. 엉거주춤한 내 태도가 전남편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적당히 햇볕 좋았던 지난 10월 마지막 주 금요일과 토요일. 서울 여의도공원 문화의마당은 유난히 많은 인파로 북적였다. 경연 아닌 축제로 펼쳐진 ‘2023 실버문화페스티벌’에는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여기는 어떤 부스예요?”
“스탬프 찍어주나요?”
‘2023 실버문화페스티벌’ 비즈로드 한켠에 자리 잡은 ‘브라보 마이 라이프’를 찾은 이들의 질문이다. 매거진을 살펴보고 살가운 눈인사를 건넨 이들은 리플릿(전단)을 들고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지역 명소를 그린 작품을 구경하고, 지역 특산물로 공예품을 만들고, 파크골프와 실버마불(야외 보드게임)을 체험하고, 공연 무대에 오르고, 또 공연을 객석에서 응원했다. 체험·전시, 공연, 포럼까지 전국 어르신 문화예술을 제대로 즐긴 시니어 2만 2126명(부스 참여 인원 포함)은 ‘2023 실버문화페스티벌’의 진정한 주인공이었다.
경쟁 빼고 재미 더하고
어르신의 대표 축제 ‘실버문화페스티벌’이 10월 27일부터 이틀간 치러졌다. 한국문화원연합회 주관으로 2015년부터 시작된 ‘실버문화페스티벌’은 8년 동안 총 2203팀, 14만 2387명이 참여해 주체적인 실버 세대의 문화예술 활동을 알렸다.
‘2023 실버문화페스티벌’은 ‘실버 두잇: 꿈을 잇다! 문화를 잇다! 세대를 잇다!’라는 주제로 펼쳐졌다. 4년 만에 현장으로 돌아온 실버문화페스티벌은 말 그대로 축제였다. 기존 경연 대회 형식에서 벗어나 지역별로 다양한 어르신 문화예술 활동 성과를 공유하고 서로를 응원했다.
경쟁을 뺀 현장은 공기부터 달랐다. 한국문화원연합회 관계자는 27일부터 이틀간 참여자 5000여 명 모두가 축제를 즐겼다고 했다. “그동안 경연에 지나치게 경도된 경향이 있었어요. 성적에 매몰되고 상을 못 받으면 실망하고요. 그런데 이번엔 정말 축제였어요. 다들 편안한 마음으로 즐겼습니다.”
‘2023 실버문화페스티벌’ 참가팀은 성적순이 아니었다. 그동안 ‘잘하는 팀’을 선발했다면 올해는 ‘해당 지역 문화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팀’을 최우선으로 꼽았다. 그렇게 ‘샤이니스타한마당’이라 불린 무대에서 양일간 전국 16개 시·도 대표 어르신 단체가 무용, 패션쇼, 연극, 음악 등 다채로운 공연을 선보였다. ‘2022 실버문화페스티벌’ 준우승 팀 ‘소리울’과 ‘다움’의 세대공감 오프닝 공연을 시작으로 각 지역 어르신 단체의 공연이 이어졌고, 트로트 가수 김수찬의 축하 공연, ‘2022 실버문화페스티벌’ 우승 팀 ‘연제춤사랑’의 부채춤 공연까지 풍성했다.
한국문화원연합회 관계자는 대표성을 가진 각 지역 활동을 볼 수 있는 장이었다고 돌아봤다. “강원도 팀은 평창아라리로 무대를 꾸몄고, 전남 팀은 호남좌도농악을 선보였습니다. 경북 팀은 삼국유사 향가와 민요를 불렀어요. 제주도 팀은 감물 염색한 옷을 입고 패션쇼를 했고요. 이전까진 각자 무대 준비에 바빴는데 이번엔 다른 지역 무대도 즐길 수 있었어요. 경쟁하지 않으니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긴 것 같아요.”
진정한 축제의 주인공으로
무대 밖은 한층 더 자유로웠다. ‘문화교류한마당’에서는 전국 각지 어르신이 직접 참여한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대표하는 전시·체험·이벤트 부스 60여 개가 이틀간 쉴 새 없이 손님을 맞았다. 산책 나온 인근 주민부터 여의도 2030 직장인, 주변 어린이집 교사와 원생까지 폭넓은 세대가 부스에 관심을 보였다. 단연 주인공은 시니어였다. 그들은 부스 운영과 참여 주체로 축제를 만끽했다. 한 70대 어르신의 말이다. “축제의 구경꾼이 아닌 주인공이 된 뜻깊은 행사였습니다. 앞으로도 실버 세대를 위한 더 많은 축제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한국문화원연합회 관계자는 참여자가 주체가 된 축제였다고 평했다. “기존에는 만들어진 축제에 어르신들이 참여했다면, 이번에는 축제를 직접 만든 것 같다”고 말이다.
경기도 파주에서 온 이도 참여자로 왔다가 주인공이 되어 돌아간다며 활짝 웃었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몰랐네요. 내 또래들이 다양하게 문화를 즐기는 모습이 정말 보기 좋았어요. 실버 세대의 문화예술 활동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 가져주는 것도 정말 보람되고, 이런 활동을 하는 스스로에게도 괜히 뿌듯해지네요. 기분이 좋습니다!”
‘모두 위한 내 꿈, 다시 뛰는 4050’ 캠페인
‘브라보 마이 라이프’와 ‘서울시50플러스재단’은 서울시 보람일자리사업을 통해 인생의 재도약을 꿈꾸는 4050 세대를 응원하기 위해, ‘모두 위한 내 꿈, 다시 뛰는 4050’ 캠페인을 펼칩니다. 본지는 서울시와 서울시50플러스재단이 함께한 보람일자리 사업을 통해 사회 곳곳에서 공공에 기여하고 있는 중장년들을 소개합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작은 연못에 물고기들이 헤엄치고 있는 등양초등학교 운동장 한편에서 수박・가지・참외・고추 등이 자라고 있었다. 38년 군 장교 복무를 마치고 귀농・귀촌을 꿈꾸다 도시농부 텃밭지원단에 참여한 정수완 씨의 작품이다.
농촌에서 자란 정수완 씨는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해 38년 동안 군인으로 복무하고 육군 대령으로 보국훈장 삼일장을 받으며 제대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56세. 아직 할 일이 많은 때였다. 인생 2막을 위해 평소 꿈꾸던 귀농・귀촌 교육을 받다가 사단법인 육군협회에 취업해 4년 동안 사무국장으로 일했고, 60세에 다시 정년을 맞아 퇴직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일이 고팠다.
“국가보훈처에서 재취업을 도와주는데, 마침 보람일자리를 소개해주더군요. 군에서 오랜 시간 일하다 사회로 나오면 선뜻 다른 직업을 가지기가 쉽지 않습니다. 마침 귀농・귀촌에 관심이 있던 터라 보람일자리 중에서도 도시농부 텃밭지원단이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어느덧 등양초등학교(강서구 등촌동)로 등교한지 4년째. 정수완씨는 이맘때면 해가 고개를 내밀기 전 아무도 없는 학교 문을 열고 노지 텃밭 50여 평과 상자 텃밭 20여 개를 가꾼다. 여름 끝자락에 애플수박・참외 등은 수확을 마쳤고, 가을을 맞이하며 배추・상추・쪽파・고구마를 심었다. 그 외에도 가지・고추・깻잎・메리골드・허브 등 다양한 작물을 키우고 있다.
일・운동・힐링・사회공헌 일석다조를 얻다
정수완 씨는 보람일자리가 60세 넘어서도 사회에 참여할 기회라고 생각했다. 특히 도시농업이 귀농・귀촌이라는 새 삶을 모색할 발판이 되기를 기대했다. 그의 기대대로 보람일자리는 많은 것을 얻게 해줬다. 은퇴 후 전원생활을 꿈꾸는 사람은 많지만 이를 실행에 옮기기는 쉽지 않다. 여름이면 하루만 지나도 잡초가 무성해져 어지간한 노력과 정성 없이는 쉽지 않은 게 텃밭 관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회에 기여하면서 50평 규모의 텃밭을 가꿔볼 수 있다는 건 전원생활을 꿈꾸는 이에게 무척 좋은 경험이 된다. 정수완 씨 역시 귀농・귀촌 교육보다 노지 텃밭을 직접 가꾸면서 농사에 관해 더 많은 것을 배웠다.
“농사는 보통 해가 뜨기 전 일과를 마쳐야 합니다. 아침 일찍 나와 땀 흘리며 밭을 개간하고 나면 체력적으로 도움이 됩니다. 또 농사 지식도 활용할 수 있어요. 토마토와 허브를 섞어 심으면 허브가 물기를 빨아들여 토마토가 더 잘 자랍니다. 토마토는 물이 많으면 열과 현상이 생겨 터질 수 있거든요. 벌써 일거양득이 되죠. 그런데 밭을 일구는 일 자체가 내가 좋아하는 일이니 하면서 즐겁기도 합니다. 1석 3조예요.”
밭을 일구다 보면 어느새 아이들이 하나둘 등교한다. 등양초 노지 텃밭에는 학년별 구역이 있다. 아이들은 이곳에 자신의 작물을 하나씩 심은 뒤 관찰하고 수확하는 체험학습을 한다. 아침에 등교하면서 내가 심은 작물이 잘 자라고 있나 보고, 체육 시간에 이동하면서 헐레벌떡 뛰어와 오늘은 얼마나 자랐나 보고 가는 아이들을 보면 뿌듯하다고 한다.
“친환경으로 작물을 키우기 때문에 땅이 무척 기름집니다. 구더기・굼벵이・지렁이 같은 벌레도 많거든요. 처음에는 아이들이 벌레를 보고 놀라는데, 이 벌레들이 작물이나 흙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알려주면 신기해하면서 나중에는 익숙해집니다. 도심에서 이런 친환경 교육을 어릴 때부터 경험하면 정서적으로도 좋을 거예요. 고추 수확할 때 더 가져가면 안 되냐고 묻는 아이들을 보며 순수한 감정을 느끼기도 합니다.”
텃밭 뒤편에는 학교 뒤 아파트 단지 주민들이 다니는 통로가 있다. 일하다 보면 주민들이 그곳에 서서 텃밭 구경하는 걸 심심치 않게 본다. 특히 70~80대 노인은 1960~70년대 시골 생활을 한 사람이 많아, 텃밭에서 나는 작물을 보며 과거를 회상하기도 한단다. 주민들이 텃밭이 잘 가꿔지고 있다 칭찬하고, 인근 학교에서도 학교 텃밭을 견학 오기도 하니 자부심도 느낄 수 있었다고. 교직원과 아이들, 주민들이 텃밭을 보며 힐링하도록 사회공헌도 하면서 용돈도 벌어갈 수 있으니 일석다조라 할 만하다.
사심을 버리면 신뢰를 얻는다
오랜 시간 사회에서 일했어도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는 어려움이 있다. 정수완 씨는 은퇴 후 사회에 나왔을 때 가장 어려움을 느끼는 게 대인관계라고 했다. 또 새로운 환경에 적응도 해야 한다. 정수완 씨도 처음 도시농부 텃밭지원단으로 왔을 때 어려움을 겪었다. 교내에서 역할이 정확히 정해져 있지 않아 환경미화 영역까지 다양한 업무 요청을 받았다. 군에서 경험한 시스템을 떠올려 학교 담당자, 서울시50플러스재단 담당자와 함께 도시농부 텃밭지원단의 교내 역할을 정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건 ‘신뢰’를 쌓는 일이었다.
“50대가 넘어 새로운 일자리에 가면 사람들과 어떻게 소통해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겁내는 사람도 많습니다. 신뢰를 쌓는 데 가장 중요한 건 정직입니다. 사심이 없어야 한다는 의미예요. 여기서 내가 돈을 좀 벌어야겠다든지, 편하게 일하다 가겠다든지 하는 개인적인 욕심을 가지면 티가 납니다. 진심을 다해 정직하게 일하면 사람들과의 신뢰를 바탕으로 교감할 수 있습니다. 특히 농사는 한 만큼 결과가 나오는 일이기 때문에, 절대 시간만 보내고 가겠다는 마음으로 일하면 안 됩니다.”
정직한 마음으로 묵묵히 일했기 때문일까. 정수완 씨는 보람일자리 참여자 중에서 가장 우수한 평가를 받았고, 학교 측의 요청으로 4년째 일을 이어가고 있다. 할 수만 있다면 보람일자리 정년인 67세까지 계속하고 싶단다. 집에서 가까운 학교로 신청해도 되지만, 4년 동안 등양초등학교에서 일하며 학교와 합을 맞추고 시스템을 만들고 정도 들어 고민이다. 우스갯소리지만 등양초등학교에서 보람일자리 정년을 마치게 된다면, 아이들이 학교를 졸업하듯이 “명예 졸업장을 받고 싶다”고 했다.
“한 달에 57시간, 이틀에 한 번 나와 일하고, 일 끝나면 친구들도 만나고, 일하면서 사회 참여 기회도 얻고, 체력도 증진하고, 마음의 여유도 가질 수 있는 데다, 사회공헌으로 보람도 챙길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 경험과 취미를 가진 중장년 세대가 보람일자리로 지속적인 사회 참여 기회를 얻고, 새로운 삶을 모색하며 활력 있는 생활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웃음이 없는 하루는 낭비한 하루다.”
- 찰리 채플린(1889~1977)
우하하하하하하하!
한 번 더!
우하하하하하하하!
독자 여러분, 일단 웃고 이야기 시작하겠습니다.
웃을 일이 없다고요?
속 편한 소리 하지 말라고요?
걱정이 태산인데 웃음이 나오냐고요?
그러니까 웃어야 합니다.
그럴수록 웃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웃어야 합니다.
웃지 않으면 병이 옵니다.
웃음에는 삶의 통찰과 지혜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소고기 사주는 사람을 주의하세요.
대가 없는 소고기는 없습니다.
순수한 마음은 돼지고기까지예요.”
허리가 꺾어질 만큼 웃었던 게 언제인지 떠올려봅시다. 흉도 허물도 없이 마냥 좋은 친구, 내 사정 속속들이 알고 있는 친구를 만나러 가는 날, 저만치 사거리 횡단보도에서 구부정한 어깨에 팔자걸음 딛는 사람을 보는 순간, 한눈에 알아보고 실실 웃기 시작합니다. 시간은 훌쩍 열아홉 나이로 미끄러져 들어갑니다. 그러다 도로 앞까지 마중 나가 얼굴 마주하자마자 입꼬리가 귀에 걸리도록 웃습니다. 말 한마디 없이 보기만 해도 웃깁니다. 웃는 나를 보고 친구는 더 크게 웃습니다.
사랑하면 예뻐지는 이유
카페에서 혹은 거리에서 사랑에 빠진 사람은 한눈에 티가 납니다. 옆에서 듣기에 말 같지도 않은 말에도 활짝 웃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도 깔깔거리고, 별것 아닌 걸 보면서도 키득키득합니다. 두 눈을 반짝이며 상대가 하는 말에 귀를 쫑긋 세우고, 시답지 않은 얘기에 손뼉을 치며 웃음이 떠나지 않습니다. 그 순간엔 정말 세상 부럽지 않을 만큼 아름답고 잘생겨 보이기까지 합니다. ‘좋을 때다’ 이러고 지나가는 독자 여러분, 당신도 그렇게 예쁘고 멋진 순간이 있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다시 사랑하고 다시 웃고 다시 아름다워집시다.
완벽한 커뮤니케이션 수단
‘소가 웃을 일이다.’ 기가 막히고 어이없는 일을 당했을 때 흔히 쓰는 표현입니다. 이 말은 소는 웃지 못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동물도 감정을 느끼고 밖으로 드러내지만 기쁨을 웃음으로 표현하지는 못합니다. 필자도 ‘벼리’라는 반려견과 16년째 같이 살고 있지만 단 한 번도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으니까요. 동물은 사람과 달리 안면 근육이 웃을 수 있게 발달되지 않은 데다 생존에 웃음이 필수적이지도 않습니다. 웃음은 인간이 지닌 심리적 반응이며, 문화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복잡한 감정과 생각을 웃음 속에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눈웃음, 코웃음, 너털웃음, 헛웃음, 비웃음, 박장대소, 파안대소, 포복절도, 요절복통 등 갖가지 웃음으로 우리 마음 상태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우리 몸에는 완벽한 약국이 있다.
우리는 어떤 병도 고칠 수 있는 강력한 약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웃음이다.”
– 노먼 커즌스(1915~1990)
만병통치 명약이 공짜
컬럼비아대학교 졸업 후 ‘뉴욕 이브닝 포스트’ 기자로 활동하다 ‘새터데이 리뷰’로 옮긴 뒤 30년을 편집장 겸 발행인으로 활동한 노먼 커즌스(Norman Cousins)는 50대 초반 강직성 척추염이라는 희귀병에 걸려 침대에서 옴짝달싹 못 한 채 통증에 시달렸습니다. 병원에서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깨달은 그는 근처 호텔에 방을 잡고 코미디 비디오를 빌려 보며 실컷 웃었습니다. 한참을 웃고 나니 극심한 고통이 사라지고 염증 수치가 줄어들었으며, 어느새 진통제 없이도 편히 잠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웃음 치료 효과를 몸으로 입증한 그는 6개월 만에 다시 걷게 되었고, 두 해 뒤 직장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노먼 커즌스는 한 발 나아가 의과대학과 병원 관계자들을 설득하고 웃음이 가진 의학적 효과를 집중적으로 연구해 75세 되던 해 ‘웃음의 치유력’(원제 Anatomy of an Illness)이라는 책을 펴냅니다. 출간되자마자 엄청난 반응을 얻으며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됩니다. 그는 유효기간이 없어 부패하지도 않는 최고의 명약이 바로 웃음이며, 만병을 막아주는 방탄조끼가 웃음이라고 역설합니다. 게다가 웃음은 공짜입니다.
웃음이 주는 백만 가지 효능
‘웃음학’을 개척한 노먼 커즌스의 ‘웃음의 치유력’을 비롯해 리 버크와 스탠리 탠 의대 교수가 발표한 논문 ‘웃음과 면역체계’, 40년 가까이 웃음을 연구해온 스탠퍼드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프라이 박사 등의 연구를 종합해 대표적인 웃음 효능을 정리해보았습니다. 매일 아침 큰 소리로 읽어보고 한바탕 웃으며 하루를 시작하면 건강과 행복이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라 믿습니다. 웃음으로 불치병을 이겨낸 노먼 커즌스는 웃음이야말로 참으로 놀랍고 긍정적인 최고의 약이자,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라 고백했습니다.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아야 할 이유를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 증명해냈으니까요.
▶웃으면 통증을 줄이는 호르몬이 200~300배 많이 나옵니다.
▶웃다 보면 면역력이 증가하고 감기를 예방합니다.
▶웃음은 천연 혈액순환 개선제입니다.
▶웃으면 화난 사람이 아니라 환한 사람이 됩니다.
▶웃을 때 제일 예쁘고 가장 멋있습니다.
▶웃으면 어려 보입니다.
▶웃음은 조직의 유대감을 높여주고, 창의적인 사고를 가능하게 합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지면 관계상 이하 생략합니다.
가장 빨리 웃는 방법 : 까꿍 인사
숨 막히는 긴장 상황에서 누군가 터뜨린 웃음이 관계를 탁 풀어줄 때가 있습니다. 막힘을 뚫어주고 관계를 되살려주는 웃음이란 선물을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까요. 아이 같은 마음, 동심을 회복하는 것이 웃을 수 있는 지름길입니다. 억지로 웃기도 힘든 당신께 가장 쉽고 빨리 웃는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바로 까꿍 인사입니다. 필자가 강의 초반에 객석을 돌아다니며 나누는 절차입니다. 까꿍 하면서 화내는 사람은 여태 보지 못했습니다. 독자 여러분도 저와 같이 해보겠습니다. 두 사람이 짝을 지어 먼저 오른손으로 악수하며 “반갑습니다” 하고 인사합니다. 이번에는 악수한 오른손 위로 왼손을 마주 잡고 악수하며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합니다. 이제 가장 중요한 순간입니다. 악수로 교차한 양손을 머리 위로 들어 상대와 눈을 맞춘 채 ‘까꿍’ 하고 인사합니다. 백이면 백 반드시 웃음이 터집니다. 꼭 해보셔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는 게 까꿍 인사입니다. 20대 젊은이부터 70~80대 어른까지 직접 같이 해보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누구와도, 어떤 자리에서도, 공적이든 사적인 모임이든 관계없이 ‘까꿍 인사’를 하는 순간 웃음이 빵 터집니다. 아이를 보듯 마음이 무장해제되면서 한순간에 활짝 열립니다. 웃을 수 있는 마음의 상태가 됩니다. 지름길이 맞으니 꼭 자주 해보시기 바랍니다. 당장 남편, 아내와 해보시면 압니다.
공자 맹자 노자 대신 웃자 살자 놀자
어떨 때는 웃음이 백 마디 말보다 훨씬 효과가 크고 반응도 즉각적입니다. 나라마다 언어, 문자는 달라도 웃음은 만국 공용어로 만인 소통 수단이 됩니다. 특히 함께 웃을 때 상대에게 호감을 느끼고, 같은 생각이라는 맞장구, 같은 편이라는 신호를 나타내는 관계의 척도가 바로 웃음입니다. 미국의 뇌과학자이자 심리학 교수인 로버트 프로바인은 연구를 통해 인간은 혼자 있을 때보다 다른 사람과 같이 있을 때 30배 더 많이 웃는다고 밝혔습니다.
웃음이라는 신이 주신 선물을 마다해서야 되겠습니까. 얼른 받아서 잘 써먹어야 합니다. 공자도 맹자도 노자도 좋지만 성인 말씀 그대로 실천하기 무척 힘듭니다. 하지만 웃으며 살고 재밌게 노는 건 우리가 해볼 만합니다. 웃자, 살자, 놀자, 그리고 지화자! 웃으면 복이 와요.(笑門萬福來) 한 번 웃으면 한 번 젊어지고, 한 번 화내면 한 번 늙어지니까요.(一笑一少 一怒一老) 우하하하!
민족 대명절 추석이 지났다. 이번 추석은 10월 2일이 임시공휴일로 지정되면서 적게는 6일, 길게는 12일까지 연휴를 보냈다. 이에 국내외로 여행을 떠나거나 여유롭게 고향을 방문하는 이들이 많았던 반면, 고물가 기조와 교통난 등을 고려해 집에서 휴식을 취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긴 연휴 동안 집에서 쉰다는 것은 가사노동을 주로 전담하는 시니어 여성들의 입장에서 할 일이 그만큼 증가했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 차례상 준비뿐만 아니라 가족의 삼시세끼를 차리고 집 안 정리정돈까지 챙겨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연휴에 어깨를 평소보다 많이 사용해 통증이 느껴진다면 자신의 어깨 건강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어깨는 우리 몸의 관절 중 유일하게 360도 회전이 가능한 만큼 그 구조가 복잡하고 불안정하므로 사용량이 많아질 경우 근골격계 질환으로 이어지기 쉽다.
대표적인 어깨 질환으로는 ‘어깨충돌증후군’이 꼽힌다. 어깨충돌증후군은 어깨 관절을 지붕처럼 덮고 있는 견봉뼈와 팔 위쪽 뼈인 상완골 사이가 좁아져 관절을 움직일 때마다 마찰이 발생해 염증과 통증이 나타나는 질환이다. 초기에는 가벼운 통증과 뻐근함 정도에 그치지만, 이후 점점 통증이 심해져 팔을 들어 올리기 어려울 정도로 운동 범위가 제한된다. 어깨를 특정 각도로 움직일 때 ‘툭’ 하며 소리가 나기도 한다.
신체 노화가 가속화되는 40~50대 시니어 여성을 중심으로 질환이 다발한다는 점도 어깨충돌증후군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지난해 40~50대 여성 어깨충돌증후군 환자 수는 12만 3522명으로 전체 여성 환자(24만 7016명)의 절반이 넘는 51.1%에 달했다.
이러한 어깨충돌증후군을 방치하면 어깨 힘줄이 찢어지는 ‘회전근개파열’이나 어깨 힘줄 조직에 석회가 침착되는 ‘석회화건염’ 등 추가적인 질환으로 이어질 수 있고, 궁극적으로는 ‘유착성관절낭염’(오십견)까지 발전할 수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따라서 추석 이후 어깨 통증이 나타났다면 어깨충돌증후군을 의심해 조속히 정확한 진단을 받는 것이 좋다.
한방에서는 추나요법과 침·약침 치료, 한약 처방 등 한방 통합 치료를 통해 어깨충돌증후군을 치료한다. 먼저 추나요법으로 제자리를 벗어난 어깨 관절 주변 조직들의 위치를 바로잡고 특정 근육과 힘줄에 걸리는 부담을 줄인다. 이후 약침 치료로 염증을 해소해 통증을 줄이고 침 치료를 병행함으로써 근육과 인대의 긴장을 완화한다.
극심한 어깨 통증과 가동 제한이 동반되는 경우 응급 침술인 동작침법(MSAT)이 가장 효과적이다. 동작침법이란 환자의 주요 혈자리에 침을 놓은 상태에서 한의사의 지도 아래 능동·수동적으로 어깨를 움직여 치료하는 방법으로, 빠른 통증 경감과 어깨 가동 범위 회복에 효과적이다. 더불어 환자의 증상에 맞는 한약을 처방해 손상된 근육 및 인대 조직을 회복시키고 재발을 방지한다.
특히 어깨충돌증후군을 비롯한 어깨 질환에 대한 동작침법의 치료 유효성은 자생한방병원 척추관절연구소가 게재한 SCI(E)급 국제학술지 ‘탐구’(EXPLORE)에서 객관적인 연구 결과로 입증된 바 있다. 연구팀은 어깨 통증 환자 80명을 40명씩 동작침법군과 대조군으로 나누고 한방 통합 치료를 진행한 결과, 동작침법과 한방 통합 치료를 병행할 경우 한방 통합 치료를 단독으로 진행했을 때보다 어깨의 가동 범위와 통증 및 장애 개선 속도가 빠른 것으로 확인됐다.
어깨충돌증후군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어깨 사용량을 줄여 어깨 관절에 휴식 시간을 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또한 온수 샤워나 따뜻한 수건으로 찜질하는 것도 긴장된 어깨 근육을 풀어주고 관절의 가동 범위를 넓혀주는 데 효과적이다.
견고한 기계도 자주 쓰면 고장이 나기 마련이다. 이는 우리 몸의 관절 건강에도 적용된다. 추석 연휴 중 가사노동량이 늘어 몸에 부담으로 쌓였다면 어깨 관절 건강도 악화될 위험이 크다. 어깨 부상은 식사를 하거나 씻을 때, 옷을 갈아입을 때 등 일상생활 전반에 불편을 준다. 따라서 조기에 병원을 찾아 해결하는 것이 건강을 지키는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도록 하자.
글쓰기 입문자는 궁금한 것이 참 많다. 소재는 어디서 찾고, 퇴고는 어떻게 하는지 차근차근 알아보자.
무엇을 써야 하죠?
나, 가족, 일 등 가까운 소재를 찾는 것이 우선. 사진 한 장을 골라 하나의 이야기를 쓰는 방법부터 시도하자.
도입부가 부담이에요
느닷없이 들어가는 것이 방법이다. “글을 반으로 접어 잘라라. 그리고 앞에는 버려라”라는 말을 기억하자.
마무리가 어려워요
희망과 화해, 긍정의 메시지로 끝내야 한다는 강박을 버리자. 반드시 ‘착한 글’일 필요는 없다.
쉽게 퇴고하고 싶어요
소리내 읽으며 어색한 부분을 고치자. 냉정한 피드백을 들으면 애정이 식을 수 있으니 글을 응원하는 이에게 요청하자.
투고는 어떻게 해요?
‘결이 맞는’ 출판사에 출간기획서, 샘플 원고를 보내자. 책의 필요성, 예상 독자 및 유사 경쟁 도서와의 차별점이 중요하다.
경남 진주시는 예로부터 인재 배출이 잦았던 고장이다. ‘영남 인물의 절반이 진주에서 나왔다’는 얘기까지 있을 정도다. 특히 충신이 많았다. 고려조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구국의 화신이라 일컬을 만한 이들의 비범한 행장이 이 고장에 잇따랐다. 그래 ‘충절의 고장’이다. 오늘날 충의(忠義)의 얼로 빛나는 진주의 각별한 역사성을 웅변하는 명소를 꼽자면? 단연 진주성이 아이콘이다. 임진왜란 때의 전사(戰史)와 의용의 서사를 고이 간직한 진주성을 둘러보지 않고 진주를 얘기한다는 건 어불성설일 수 있다.
진주성은 진주시내 강변에 있다. 성의 남벽 아래로 남강이 굽이쳐 수려한 풍광을 빚어낸다. 강물과 벼랑이 지닌 전략적 가치에 착안해 성을 구축했다. 본래 내성과 외성으로 짜인 이중구조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내성보다 규모가 컸던 외성은 스러지고 내성만 남았다. 성곽의 길이는 1790m, 높이는 5~8m에 달한다. 삼국시대 때 토성(土城)으로 축조됐던 진주성이 석성(石城)으로 거듭난 건 고려 말 우왕 때였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도 몇 차례 고쳐 지었다. 따라서 축성의 변천사와 기법을 들여다볼 수 있는 중요 유적으로 평가된다.
공북문을 통해 성 안으로 들어선다. 널찍하고 훤칠한 성내 공간 곳곳마다 잘 단장돼 생경한 기분을 자아낸다. 천년 고성이되 마치 신축한 것처럼 매우 미끈한 게 아닌가. 근래의 복원작업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걸 알 만하다. 한때는 고즈넉한 폐허와 잔해 사이에 간신히 존재했겠지만 고칠 것 고치고, 다듬을 것 다듬고, 보탤 것 보태어 회생했다. 복원사업 이전의 성내엔 민가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고 한다. 그걸 다 철거해야 했다. 그러니 대대적인 복원사업이 필연이었겠다. 작업자들은 진주성의 본연과 본질에 부합하는 복원을 완수하기 위해 실력을 쏟아부었을 것이다.
성내의 지형은 리듬이 있다. 평지와 경사지, 야트막한 언덕과 구릉지, 그리고 구불구불 이어지며 거대한 타원을 그리는 성곽이 자연스러운 조화를 이루었다. 너른 잔디밭과 다양한 수목들이 초록을 뿜어 소풍과 산책을 즐길 만한 공원으로도 손색이 없다. 그러나 진주성은 어디까지나 역사의 곳집이다. 일쑤 전쟁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친 곳이다. 수성(守城)과 승전을 꾀하기 위한 갖가지 구조물이 즐비한 곳이다. 전투 지휘소로 쓰인 서장대와 북장대, 포를 쏘았던 포루, 전공을 새긴 사적비와 순절의 넋을 기리는 사당 등이 있다. 임진왜란 전문 박물관인 국립진주박물관까지 성내에 있어 답사객들의 호감을 산다.
진주성은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인 진주성대첩이 벌어진 곳으로 역사에 불멸의 이름을 새겼다. 당시 장수는 진주목사였던 김시민 장군. 1592년 10월 김시민은 전라도와 이어지는 전략 요충이었던 진주를 삼키기 위해 쳐들어온 2만여 명의 왜군을 물리쳤다. 김시민이 거느린 병력은 관군과 의병을 합쳐 3800여 명에 불과했다지. 중과부적 상황이었지만 통쾌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건 김시민의 명민한 지략이 작동해서였다. 이를테면 그는 성 밖에 주둔한 의병들에게 왜군을 교란할 수 있는 교묘한 작전을 전개하게 했다. 성내의 부녀자들에게 남자 옷을 입혀 군사가 많아 보이게 했다. 야간엔 악공들의 피리 소리로 왜군의 심리를 교란시켰다.
지략뿐인가, 김시민은 개혁적 성향의 무장이라서 휘하를 다루는 방법에서도 관행을 타파했으니 매사 솔선수범으로 군대의 사기를 북돋웠다. 신식 병기 동원에도 신경을 썼다. 이래저래 승전은 애당초 떼어놓은 당상 같은 것이었을지도. 하지만 김시민은 전투 막판에 왜군의 총탄을 맞고 순절했다. 그때 나이 38세였다. 그가 숨을 거두자 하늘은 핏빛으로 물들었고, 성내 백성들의 곡소리가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던가. 비단 김시민을 애도하는 호곡뿐이었으랴. 대첩이 끝난 자리에선 죽은 자들을 끌어안은 산 자들의 오열이 터져 나왔으리라. ‘조선왕조실록’은 당시의 참혹한 정경을 적치여산(積置如山), 즉 ‘시체가 쌓인 모습이 산과 같다’고 기록했다. 서애 류성룡은 ‘징비록’을 통해 ‘사방 30리 안에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해 가까이 가기 어려웠다’고 했다. 진주성은 일종의 성지(聖地)다.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킨 선인들의 역사가 선연한 게 아닌가. 전쟁에 따르게 마련인 지옥의 묵시록을 술회하는 성이라는 점에서는 반전(反戰) 메타포가 응축된 곳으로 읽을 수도 있겠다. 여하튼 전쟁이란 야만의 얼굴을 하고 있다. 수시로 전쟁에 휘말릴 수밖에 없는 게 인간의 슬픈 숙명이지만.
다산 정약용이 극찬한 ‘진주검무’
진주성 남쪽 기슭, 성곽에 인접한 곳엔 촉석루(矗石樓)가 있다. 크고 당당하고 수려한 누각이다. 한때 국보로 지정됐으나 한국전쟁 때 불에 타 지정을 해제했다. 지금의 모습은 1960년의 보수작업을 통해 얻었다. 진주성 아래로 굽이치는 남강과, 저 멀리 산야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진주성 최고의 전망대다. 조선 선비들이 풍류와 사색을 즐겼던 영남 제일의 정자다. 전투 지휘소이기도 했다. 따라서 촉석루 역시 전쟁이라는 부조리극이 낳은 상처의 전시장이기도 하다. 촉석루 아래 강변에선 진주성대첩 즈음 한 여인이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 자결, 영원히 남을 충절의 화신이 됐다. 바로 논개다. 진주 관기(官妓)였던 그의 재능은 미색으로 향기를 뿜는 데에만 그치지 않았음인가. 시대를 읽는 냉철한 눈까지 겸비했나? 그는 기꺼이 한 몸 바쳐 한 시대의 참화에 빛을 흩뿌렸다. 촉석루 아래 강변엔 논개가 왜장과 함께 투신한 바위 ‘의암’(義庵)이 있다.
다산 정약용은 어느 날 촉석루에 유람을 왔다가 ‘일개 작은 여인이 왜적의 우두머리를 섬멸하다니 이 얼마나 통쾌한가?’로 시작되는 ‘진주의기사기’(晋州義妓祠記)를 썼다. 논개의 거룩한 행장을 기리는 글이다. 다산이 진주에 와서 탄복한 게 하나 더 있다. 바로 진주에 전승돼 오늘날까지 맥이 이어지고 있는 ‘진주검무’를 보고 찬탄했던 것. 검무는 여성 무용수들이 무사 복장을 하고 칼을 휘저으며 추는 춤이다. 촉석루에 앉아 이 춤을 감상한 다산은 참을 수 없는 흥에 겨웠나? 그는 ‘무검편증미인’(舞劍篇贈美人, 검무를 추는 미인에게 드림)이라는 제목의 시를 지었다. 검무를 추는 여인의 매력적인 자태와 춤사위의 삼엄한 격정을 생생하게 묘사한 명편이다. 무불통지(無不通知)의 석학이었던 다산은 음악과 춤에도 조예가 깊었다. 음악과 악기를 연구해 ‘악서고존’(樂書孤存)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이런 다산이 진주검무를 시로 써서 극찬했다. 진주검무는 1967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초대 예능보유자는 ‘진주권번 출신의 마지막 예인’ 고(故) 김수악이다. 김수악이 소리를 하고 춤을 추면 목석도 들썩였단다. 춤으로 도가 튼 달인이었다. 진주검무의 맥은 오늘날 예능보유자 유영희에 의해 이어지고 있다. 그는 70대에 접어들었지만 예인다운 열정은 여전히 뜨겁다. 춤사위는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었고.
김길수 진주문화원장
“일제강점기 때 기생 단체도 독립운동에 나섰다”
진주의 자연지리 가운데 빼어나기론 단연 남강이다. 시내를 가로지르며 굽이치는 남강의 폭은 넓고 물살은 유유해 아름답다. 예로부터 진주 사람들이 기대어 살아온 생명의 젖줄이다. 진주의 보배에 해당하는 진주성이 남강가에 있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진주의 역사와 문화는 남강과 함께 흘러왔다. 그렇다면 진주의 문화답사 1번지는? 김길수 문화원장은 진주성과 진주성 안에 있는 촉석루를 꼽는다.
“진주성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실로 많다. 그러나 진주성을 찬찬하게 답사하는 이는 드물어 아쉽다. 대체로 촉석루와 논개 유적인 의암만 훑어보고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진주성을 한 바퀴 도는 온전한 답사 방식을 채택하면 좋겠다. 성 안에 있는 국립진주박물관 관람과 남강변에 조성된 성 밖 산책로를 통해서도 역사의 숨결을 음미할 수 있다.”
‘의기 논개’ 역시 진주의 대표 캐릭터다. 논개의 행장이 지역 정서에 미친 영향엔 어떤 게 있을까?
“일개 기녀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건 세계 역사상으로도 논개가 유일무이하다. 나라를 위하는 일엔 신분의 귀천이 따로 없다는 걸 실천한 인물이 논개이자 논개 정신이다. 따라서 지역 정서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를테면 3.1만세 운동 때 진주에선 기생 독립운동 단체가 조직돼 국권 회복에 앞장섰다.”
‘진주검무’는 물론 가무악(歌舞樂)의 대가였던 고 김수악 선생의 예술은 현재 어떤 식으로 전수되고 있는지?
“김수악 선생이 양성한 제자들이 뒤를 잇고 있다. 진주에서 교방예술의 맥이 면면히 이어지는 셈이다. 우리 문화원은 선생의 제자들을 문화학교 강사로 영입해 강의를 맡기고 있다. 향후 ‘김수악 기념관’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도 한다.”
전통 민속이 흔히 현대의 풍속에 밀려 퇴색하고 있다. 반면 진주에선 ‘진주 소싸움’의 명맥이 이어져 흥미롭다.
“농업이 번성했던 과거부터 진주 사람들은 농한기에 소싸움을 즐겼다. 일설엔 진주가 신라와 백제의 경계지역이라 신라와 백제 편으로 나눠 소싸움을 벌였다는 얘기도 있다. 한편 소싸움 무대로 적격인 남강 백사장이 있어 명맥 유지가 가능했던 측면도 있다.”
주요 문화원 사업을 소개해달라.
“외람된 얘기지만 진주문화원은 전국 문화원 중 으뜸이라 자부한다. 지역 문화에 대한 시민들의 식견과 애착을 토대로 인화단결을 꾀해온 결과라고 본다. 중점 사업은 진주의 ‘의로운 정신’을 선양하기 위한 콘텐츠 개발이다. 지속적으로 순절 의병들을 발굴, 연구해왔다.”
타지의 문화원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해 사업을 추진한다지? 이는 매우 인상적이다.
“순절 의병들을 찾아내고 조명하기 위해 의병 활동이 많았던 전라도의 여러 문화원들과 손잡고 다양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 어떻게든 의병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아울러 우리 문화원은 전국 각지의 문화원과 자매결연을 맺어 문화예술 교류사업을 하고 있다. 이건 앞으로 더 확대해나갈 방침이다.”
언제부턴가 마을에서 아이 울음소리가 귀해졌다. 우리나라 합계 출산율은 0.78%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10년째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다. 우리나라 소멸위험 지역은 총 119개로 전체 시·군·구의 52%에 이른다. 태어나는 아이는 줄고, 고령자는 늘고 있다. 지역 소멸을 해결하려면 인구를 다른 관점으로 봐야 한다.
“인구 감소는 정해진 미래입니다.”
조영태 인구정책연구센터장(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의 말이다. 100년 역사를 지닌 공주기독교박물관 공간에서 미래가 정해졌다는 말을 들으니, 마치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을 보는 느낌이었다.
8월 31일 퍼즐랩과 써드에이지가 주관하고 행정안전부가 후원한 ‘2023 제민천 포럼X재도전프로젝트’에서는 다양한 영역의 전문가가 모여 인구 감소라는 정해진 미래를 지역이 바꿀 수 있을지에 대한 열띤 논의가 이뤄졌다.
국내 인구학 분야 최고 권위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조영태 센터장이 이날 행사에 참여한 건 큰 의미가 있다. 지역에서 인구 감소에 대응할 실마리를 봤다는 뜻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조 센터장은 ‘인구’의 개념을 새롭게 정의하고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질을 높여간다면 지역 소멸이라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로컬’이라는 지역 공간과 ‘생활 인구’라는 사람이 중요하다고.
생활 인구는 서울시가 2018년 제시한 새로운 인구 모델로, 출퇴근·관광·의료·등하교 등을 목적으로 지역에 오고 가는 인구를 모두 아우르는 개념이다. 행사가 열린 공주는 생활 인구와 정주 인구가 점차 늘어나는 지역이다. 공주는 2022년부터 전입자 수가 전출자 수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2023년(8월 기준)에는 청년 인구수가 감소에서 증가로 돌아섰다. 공주 원도심에서 커뮤니티 기반 지역관리회사 퍼즐랩을 운영하는 권오상 대표는 “아주 적은 숫자이긴 하지만, 전입자가 늘어나고 청년 인구가 증가세로 돌아섰다는 건 매우 의미 있는 실마리”라고 했다.
권 대표는 더 많은 사람들이 지역을 경험할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행정안전부의 ‘청년마을 만들기’ 사업에 선정돼 2021~2022년 2년 동안 1212명의 청년이 공주를 경험했다. 올해는 행정안전부 ‘2023 재도전프로젝트’ 사업에 선정돼 ‘마을생활 튜토리얼’을 진행하고 있다. 중장년과 청년을 대상으로 하는 지역 살이 프로그램이다. 특히 중장년은 귀농·귀촌에 관심이 많다. 하지만 정작 지역에 내려와 마을에서 이웃들과 어울려 지내는 경험을 할 기회는 거의 없다고 입을 모은다. ‘마을생활 튜토리얼’은 지역과의 관계 맺음을 경험해볼 수 있도록 ‘내가 이 지역에 와서 산다면 어떤 생활이 이어질까’ 상상해보고 실험해보는 기회를 제공한다.
권 대표는 “중장년의 경우 커리어, 취향, 경험을 가지고 지역을 이동하기 때문에 한 사람이 지역에 온다는 건 마치 하나의 세계가 이동하는 것과 같았다”며 “지역에 필요한 전문성과 경험을 가진 분들이 실제로 자신의 네트워크를 가지고 지역만 이동하고자 하는 수요가 많았다”고 말했다. 반드시 지역에 정착하지 않더라도 도시와 지역을 오가며 그들의 경험과 네트워크를 연결하는 데 중장년의 연륜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권오상 대표는 “다른 지역에서 새로운 삶을 꿈꾼다는 건 엄청난 도전”이라면서 “현업에서 전문성을 쌓았지만 반복되는 업무가 지루하신 분, 여러 분야의 사람들과 팀으로 일할 수 있는 분, 은퇴 후 나의 재능으로 봉사하고 싶은 분들은 지역에서의 삶에 잘 적응할 수 있을 것”이라며 중장년의 지역 생활을 응원했다.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작고 허술한 나뭇잎 배가 시냇물의 작은 소용돌이에서 맴돌듯이 그와 나의 관계도 좀체 진전되지 않는 상황이 위태롭고 답답했다. 나뭇잎 배처럼 가볍고 부서지기 쉬운 관계였던가, 우리 사이가. 나는 사별, 그는 이혼(을 전제로 한 별거 상태), 서로의 공감대가 달라서일까. 아니 그건 이유가 될 수 없다. 두 사람이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런 조건 따위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더구나 우리는 고교 시절을 오롯이 함께 지냈던 사이인데… 그렇게 조마조마 위태롭던 나뭇잎 배가 내 바람과 달리 순풍을 타기는 고사하고 기어이 뒤집어지고 말았으니….
동창 장례식에서 재회한 그와 나
지방 소도시의 남녀공학 고등학교를 함께 졸업한 그와 내가 다시 만난 것은 공교롭게도 1년 전 동창의 장례식장이었다. 세상을 떠난 친구가 남자 동창이었으니 나보다는 그와 더 가깝다고 할 수 있겠지만 어차피 동창들은 학교를 같이 다닌 사이다. 게다가 고작 3개 반이었으니 학년이 바뀌고 반이 달라져도 서로 낯선 얼굴은 없었다.
교통사고라고 했다. 서울에 거주하던 그는 추석을 맞아 어머니를 뵈러 고향에 오던 중 고속도로에서 졸음운전을 한 것 같다고. 동창은 즉사했고 옆자리 아내는 중상을 입고 입원 중이라 썰렁한 빈소는 바로 밑의 동생이 지키고 있었다. 충격을 받으실까 노모한테는 알리지 않았다고. 어차피 90세 넘은 고령에다 치매로 정신이 오락가락한다니 굳이 사실대로 말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 장남이 죽은 것도 모르고 목 빼고 기다리는 노모에게는 내려오기로 한 아들이 갑자기 일이 생겨 못 오게 되었다고 적당히 얼버무렸다고 들었다.
급하게 사람이 간 데다 사고가 난 지점이 고향 가까운 곳이라 구태여 거주지 서울에서 장례를 치르지 않기로 했다지만, 되도록이면 노모 곁에서 마지막을 보내게 하고 싶었던 형제자매, 고향 친척들의 마음도 작용했다. 아무리 다 큰 자식이라 해도 집에 다 와서, 엄마 곁에서 죽고 싶었던 것 같다는 말을 보태며.
나는 마침 추석을 쇠러 3일 전부터 고향에 머물고 있었다. 내게도 고령의 어머니가 계시니. 남편이 7년 전 떠난 후부터는 명절에 고향 친정을 찾는다. 시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는 당연히 시댁에서 지냈지만 남편에 이어 시부모님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돌아가신 후에는 친정엄마와 오롯하게 보내고 있다.
비보는 작은 마을에 삽시간에 퍼졌다. 나뿐 아니라 명절 맞아 고향을 찾은 동창생들이 더러 있었기에 뜻하지 않게 모두 장례식장에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식당이나 슈퍼마켓 등 자영업을 하면서 고향을 지켜온 동창들을 제외하고 타지에 나가 사는 동창 중에 몇 년에 한 번이나마 얼굴 보는 이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얼굴도 있었다. 그는 후자에 속했다. 그가 고향을 찾은 것은 20년 만이라고 했다. 결혼 후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다가 가족은 그대로 있고 본인만 사업 관계로 한국에 다시 돌아온 게 3년 전이라고. 재정착하느라고 나름 바빠서 고향을 찾은 것은 그해가 처음이라고 했다. 마치 나를 만나기 위해 20년 만에 발걸음을 한 것 같다며 농담을 진담처럼 해서 내 가슴을 뛰게 했다.
나는 사별녀, 그는 엄연한 유부남
그와 나는 2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 우리는 30분 거리를 걸어 통학했는데 집 방향이 거의 같아서 함께 등하교하는 날이 많았다. 그렇다고 둘만의 내밀한 추억이나 은밀한 기억이 있지는 않다. 나는 선머슴 같은 기질이라 사춘기 이성에게 야릇한 감정을 느끼기엔 뭘 한참 몰랐고, 그는 그대로 그 나이의 보통 남학생이었을 뿐 여학생의 마음을 섬세히 읽을 줄 안다거나 감수성이 예민한 편은 아니었다. 그랬다 하더라도 무엇이 달라졌을까? 그때 좀 특별한 관계였더라면 하는 것은 지금의 내 마음이 빚어낸 환상이자 뒤늦은 달뜸 탓이 아닌가. 그때 그랬기에 그와 내가 운명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었다는 식의 중년 아줌마의 소녀적 감성이 빚어낸 통속적 로맨스라도.
그럼에도 나는 그가 반가웠고 그도 나를 반겼다. 특별한 관계는 이제부터면 되지 않나. 그렇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금 첫눈에 서로를 알아본 것이다. 20년이나 지난 후에야 비로소.
“동창 녀석의 죽음이 우리를 연결해줬다고 하면 이기적이고 잔인한 말 같지만 사실은 사실이니까. 우리가 좀 더 일찍, 아니 아주 많이 일찍 같은 학교, 같은 반이었을 때 사귀기 시작하고 그 인연을 따라 맺어졌다면 너도 나도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지 않았을 텐데….”
그의 말에 내 가슴은 또 콩닥이며 설레었다. 죽은 남편만 불쌍하지. 단언컨대 내 결혼 생활은 불행하지 않았다. 오히려 행복했다. 남편은 나를 많이 아껴주던 사람이었다. 개인택시를 운전하며 큰돈을 벌어오진 못했지만 성실하게 가족을 챙겼다. 그러고 보니 남편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운전을 하다 보니 사고 위험에 늘 노출될 수밖에 없었고, 어느 날 음주운전 차량과 충돌하여 의식을 잃고 3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남편과 금슬이 좋았기에 혼자 살아온 지난 세월이 더 외로웠고, 누군가를 만나 빈자리를 메우고 싶은 마음이 점점 더 간절하던 때에 그를 만난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엄연히 아내가 있고 대학생 두 자녀가 있다. 유부남인 그와 나는 처지가 다른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사귐은 깊어지고 있었다. 차 한잔이 밥이 되고, 밥자리가 밤자리, 잠자리로 이어졌다. 한번 열린 마음과 몸은 거침이 없었다. 7년간 굳게 닫혀 있었으니 더.
뻔한 레퍼토리라 해도 그 말을 믿고 싶었다. 그러니까 그는 아내와 곧 이혼할 거라고 했다. 그래서 사업을 핑계 삼아 한국과 캐나다에서 별거 중이라고 했다. 사람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존재라지 않나. 나는 그의 말을 그대로 믿고 싶었다.
삼각관계 질투의 덫에 걸린 나
그러나 정작 일은 엉뚱한 데서 불거졌다. 세상 떠난 동창의 아내와 그가 자주 만난다는 게 아닌가. 내가 그와 사귀는 줄 알 리 없는 내 친구가 가십 삼아 한 말이 나한테까지 들려온 것이다.
“장례 마치고 그 아내의 문병을 갔던 모양이야. 좀 어색한 그림이지만 뭐 그럴 수도 있지. 남편을 창졸간에 잃은 데다 아내도 많이 다쳤으니 위로차 문병할 수도 있겠지. 근데 병원 출입이 너무 잦은 게 수상한 거지. 서울 사는 가족들이 간호하기 힘들다며 서울 병원으로 옮기자고 하는데도 본인이 마다했다잖아. 남편 고향이지 본인은 아무 연고도 없으면서 말이야. 아마도 두 사람이 자유롭게 만나려고 그런 것 같아.”
명치쯤이 타는 듯 아리면서 가슴에 쿵 소리가 났다. 머릿속에서는 ‘웅~’ 하고 사이렌이 울렸다. 그야말로 멘붕이었다. 그렇다면 나와 만나면서 동시에 그 여자도 만났다는 건가. 캐나다에 있는 그의 아내가 아닌 연적(戀敵)이 따로 있었다니! 이 무슨 전혀 예상치 않은 삼각관계인가!
“죽은 동창의 아내를 돌보는 야릇한 상황이라니, 소설 쓰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그 사람 캐나다에 가족이 있다지? 근데 그 여자한테는 돌싱이라고 속였다나 봐. 그 여자가 그렇게 말하는 걸 들은 사람이 있어. 그 말을 하는데 그 여자 얼굴이 한껏 달떠 보이더래. 남편 죽은 여자 낯빛이 아니더라나. 사랑에 빠진 얼굴이 그런 얼굴이라지 아마?”
이어지는 친구의 말이 귓전에서 웅웅대며 가슴에서 홧홧한 질투의 불길이 솟아올랐다.
‘어떻게 해야 하나. 그가 정말로 그 여자와 만나는 사이라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건가? 어떡하긴 뭘 어떡해? 어차피 싱글도 아닌 놈이니 한바탕 잘 놀았다 생각하고 잊어버리면 그만이지. 굶주려 있던 차에 그렇다고 아무 놈하고나 할 수는 없고 그래도 좋아하는 놈하고 한 게 어디야? 좋아. 까짓 거 헤어질 결심을 하는 거야. 그 여자의 존재에 대해선 아는 척할 것도, 거론할 것도 없이 조용히 물러나주는 거야. 그게 그나마 구겨진 자존심을 챙기는 길이고. 어차피 유부남이잖아. 여기서 끝내는 게 뒤탈이 없을 거야. 오히려 잘됐어.’
진심도 아니고 위로도 되지 않는 말을 마음속으로 지껄이고 있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결국 양다리 걸친 놈한테 속았다는 생각이 차오를 무렵, 그러고도 한참을 망설이고 망설이다 떨리는 마음을 억누른 채 그러나 떨리는 손가락으로 그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아니나 다를까 노모를 뵈러 고향에 내려가 있다는 게 아닌가. 뜨거운 것이 목구멍을 타고 흘렀다.
“자주 가네.”
“연로하시니까. 언제 또 캐나다로 불쑥 가게 될지도 모르고. 있을 때라도 자주 뵈러 와야지.”
“근데 지금 자기 혼자 있어?”
“혼자 있지 그럼 누구랑 있어? 아, 우리 어머니? 잠깐 텃밭에 나가셨어. 왜 인사드리고 싶어서? 장래 새 며느리 될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싶어서? 하하.”
전화기 너머로 부스럭 소리가 난 것도 같다. 그 여자를 향해 “쉬” 하며 입술에 손가락 대는 모습도 보이는 듯하다. 아, 나는 꼼짝없는 덫에 걸린 것이다. 바야흐로 질투에 뼈와 살이 타들어가는 삼류 영화의 여주인공이 되어가고 있다.
▷ 고객의 상황과 고민
제조업 공장에서 오랫동안 근무하고 퇴직하신 엄마와 이런저런 일로 통화를 하다가 엄마가 계속 ‘잘 안 들려. 크게 좀 이야기해봐’ 라고 할 때는 잘 몰랐습니다. 본가에 내려갈 때마다 거실에 있는 TV 볼륨을 너무 크게 틀어 놓으셔서 줄이면 좋겠다고 말씀드릴 때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뒤늦게 아버지께서 알려주셨습니다. 퇴직 후 엄마가 이명(耳鳴) 때문에 고생하셨고, 그 이후부터 청력이 많이 떨어진 것 같은데 워낙 자존심이 강해서 저한테 말씀을 하지 않으신 거라고 말입니다.
저는 엄마한테 말씀을 드렸습니다. 청력검사 등을 받아보고 치료를 해야 한다면 적절한 치료를 받고, 보청기를 껴야 한다면 보청기를 꼈으면 좋겠다고 말이지요. 며칠 뒤 검사를 받았는데 검사 결과가 좋지 않게 나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장애인복지법에 따라 청각장애인으로 정부에 등록되는 경우 보청기를 구입할 때 보조금 지원 등이 나오므로 제반 절차를 제가 챙기겠다고 설명해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엄마는 저한테 ‘나 장애인 아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라며 화를 내셨습니다.
▷ 등록장애인과 장애인 신탁
2022년 말 기준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등록장애인은 약 265만 3000명입니다. 그리고 등록장애인 중에서 절반 이상이 만 65세 이상의 시니어입니다. 여기서 등록장애인이란 장애인복지법 및 보건복지부 고시에 따라 요건 및 절차(신청, 심사, 등록) 등을 통해 정부에 장애인으로 등록된 분들을 말합니다.
즉, 장애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정부에 등록되지 않은 분들은 등록장애인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고령자분들 중에서는 등록을 원치 않는 분들도 있기 때문에 실제로 장애인 인원은 이보다 훨씬 많을 것입니다.
과거에는 등록장애인을 획일화된 기준으로 장애 정도를 1급부터 6급으로 나누기도 하였습니다. 장애인들의 개별적인 사정은 고려하지 않고, 장애 등급에 따라 사회복지서비스를 차별화하거나 낙인효과를 발생시키는 등 부작용들이 누적됨에 따라 정부는 2019년 7월부터 장애 등급제를 폐지하였습니다. 현재는 ‘등록장애인 중에 장애의 정도가 심한 장애인(중증)’과 ‘등록장애인 중에 장애의 정도가 심하지 않은 장애인(경증)’으로만 구분하고 있습니다.
북유럽 등 복지형 국가보다 우리나라가 장애인분들이 살아가는 데 있어 좋은 환경에 놓여있다고는 말씀을 못 드릴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금 적인 측면에서 보면 장애인분들을 위한 여러 세제 지원 제도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소득세 계산 시 소득공제 금액을 추가해주고 있고, 장애인 전용 보장성보험을 통해 추가로 보험료 세액공제를 더 받을 수도 있으며, 차량을 구입할 때 일정 요건을 충족할 경우 개별소비세 등 세액을 감면받을 수도 있습니다.
특히, 부모 등 타인으로부터 재산을 증여받은 장애인이 장애인 신탁을 설정한 뒤 증여세를 신고하면 증여받은 재산가액에서 최대 5억 원까지는 증여세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 사례를 통한 장애인 신탁
김00 씨에게는 딸이 한 명 있습니다. 이 딸은 소아마비로 지체 장애(등록장애인으로서 중증)를 갖고 있으나 본인과 가족들의 각고의 노력 끝에 잘 자랐고, 최근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였습니다. 김00 씨는 본인이 가지고 있던 15평대 소형 아파트(시가 4억 원)를 딸이 오랫동안 이 집에서 거주할 수 있도록 증여하였고 딸은 장애인 신탁을 설정하였습니다.
장애인 신탁을 설정하면 증여재산가액(4억 원)에서 최대 5억 원이 차감되기 때문에 증여세는 발생하지 않았습니다(단, 부동산 증여에 따른 증여 취득세 등과 신탁보수, 법무사 등기대행수수료는 발생함).
장애인 신탁은 상속세 및 증여세법 제52조의 2에 따라 ① 장애인 딸이 김00 씨로부터 아파트를 증여받고, ② 신탁업 인가를 받은 신탁회사와 장애인 신탁을 설정하며(장애인 딸이 사망할 때까지 신탁계약을 유지하는 조건), ③ 증여일 속하는 달의 말일로부터 3개월 이내 증여계약서, 신탁계약서, 장애인증명서 등을 첨부하여 증여세 신고를 마친다면 ④ 증여받은 아파트의 가액에서 최대 5억 원을 차감하여 증여세가 계산되는 등 장점(증여세 과세가액 불산입)이 많은 신탁입니다.
신관식 세무사
•우리은행 신탁부가족신탁팀 차장
• 저서 :「장애인 금융 세금 가이드(2023년불멸의 가업승계 &미래를 여는 신탁(조세금융신문, 2023년)」, 「사례와 함께하는 자산승계신탁·서비스(삼일인포마인, 2022년)」, 「내 재산을 물려줄 때 자산승계신탁·서비스(삼일인포마인,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