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춘분(春分), 24절기의 네 번째 절기로 낮과 밤의 길이가 같다. 춥지도 덥지도 않아 이 절기를 전후하여, 한 해 농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춘분 무렵은 기온 변동이 가장 큰 시기이기도 하다. 오늘도 오후부터 찬바람과 함께 꽃샘추위가 찾아온다고 하니 건강에 유의해야 한다. 아직 쌀쌀하지만 말그대로 봄을 나누는 춘분, 가족 혹은 지인과 함께 춘분에 먹는 음식을 먹으며 따뜻한 봄 기운을 나눠보는 건 어떨까?
머슴떡(나이떡)
양력 3월 21일(음력 2월 1일)은 흔히 '머슴날'로 불렸다. 본격적으로 농사를 시작하기 전 쉬고 있던 머슴들을 불러서 한 해 농사를 잘 부탁한다며 음식과 술을 푸짐하게 대접하는 행사를 치렀기 때문이다. 이때 먹었던 음식이 바로 ‘머슴떡’이다. 모양은 송편과 비슷하고, 그해 무병과 소원성취를 위해 머슴뿐만 아니라 온 식구가 제 나이만큼 떡을 먹는다고 해서 ‘나이떡’이라고도 했다.
볶은 콩
옛날에는 춘분에 집마다 꼭 콩을 볶아 먹었다고 한다. 이날 볶은 콩을 먹으면 새와 쥐가 사라져 곡식을 축내는 일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속설을 차치하고도 콩은 저지방 고단백 식품으로 건강에 좋다. 콩의 ‘사포닌’ 성분이 비만 체질을 개선하고, ‘레시틴’ 성분이 뇌세포의 활동에 관여하는 ‘아세틸콜린’이라는 신경전달 물질의 원료가 되어 치매도 예방할 수 있다. 또 항암 작용과 골다공증 예방에도 효과적이다. 특히 쥐눈이콩에는 항암효과가 있는 ‘아이소플라본’ 성분이 일반 콩보다 5~6배 많이 함유돼있다.
냉이, 달래
춘분 무렵에는 온화한 날씨로 산과 들에서 파릇파릇하게 움튼 봄나물을 많이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냉이와 달래는 비타민C가 풍부해 식욕부진과 춘곤증을 해소하는데 도움이 된다.
냉이는 단백질 함량이 높고 무기질이 많이 함유되어 있기 때문에 특히 소화기관이 약한 사람에게 좋다. 잎에는 베타카로틴이 다량 함유돼있고, 뿌리에는 알싸한 향의 콜린 성분이 있어 간 질환 예방에 도움을 준다. 또 생리불순 등 부인병 완화에 효과가 있다. 냉이는 잎과 줄기가 작은 어린 냉이가 맛있다. 전체적으로 수분감이 있으며 뿌리가 너무 단단하지 않고 잔털이 적은 것, 잎의 색이 짙은 녹색인 것을 고르는 게 좋다. 대로변, 강변, 공원 등에 있는 냉이는 중금속이 있을 확률이 높기 때문에 직접 캐는 것은 주의해야 한다.
달래는 작은 마늘이라고도 불린다. 맛이 유사한 파, 마늘은 산성식품이지만 달래는 다량의 칼슘을 함유한 알칼리성 식품이다. 매운맛을 내는 ‘알리신’ 성분을 갖고 있어 원기회복과 자양강장 효과가 크다. 특히 철분을 많이 포함하고 있어 여성 질환과 빈혈을 예방해준다. 비타민, 무기질, 칼슘이 풍부해 육류의 콜레스테롤 저하에 효과가 있어 돼지고기와 궁합이 잘 맞는다. 달래는 잎이 진한 녹색이며 알뿌리가 둥글고 가지런한 것, 그리고 향이 강한 것을 고르는 것이 좋다.
조선시대 고화 전시장에서 ‘이 잡는 노승’이란 제목의 그림 앞에 섰다. 조선시대 후기에 관아재(觀我齋) 또는 종포(宗圃)라는 호를 쓰던 조영석(趙榮祏, 1686~1761)이 그렸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지만, 어딘지 ‘기지(humor)’가 전해지는 작품이 아닌가 싶어 한동안 눈을 뗄 수 없었다.
특히 피부과를 전공한 필자의 머릿속엔 여러 가지 기억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한국전쟁을 전후해 ‘행길’을 지나는 사람들은 남녀노소 예외 없이 누구나 ‘하얀 바람 폭탄’을 옷 속으로 쏘아대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장발의 숙녀와 신사도 예외 없이 흰 가루를 머리에 뒤집어썼다. 이름하여 ‘DDT 소독 세례’가 그것이다. 바로 ‘이’를 박멸하기 위함이었다. 그런가 하면 거리의 걸인들이 햇볕 잘 드는 곳에 앉아 옷을 벗고 ‘이’를 잡아 손톱으로 죽이던 모습도 떠올랐다. 어려웠던 시절의 씁쓸한 기억이다.
이처럼 당시에는 DDT가 ‘이’ 따위의 해충을 박멸하는 살충제로만 여겼는데, 의대생 시절 이것이 여러 농약의 형태로 광범하게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연구자에게 1948년 노벨의학상을 안긴 이 발명품은 훗날 생태계를 교란시키는 ‘반(反)환경 제품’일 뿐만 아니라 무서운 ‘발암 물질’로 밝혀졌다. ‘과학의 진리’는 오래가지 못한다는 속설을 입증한 사례다.
필자는 조영석의 ‘이를 잡는 노승’을 보면서 아날로그 시대의 장점을 되새겨본다. 그림 옆에는 행서체로 다음과 같은 발문(跋文)이 있다.
“지금 우거진 편백나무[蒼檜] 아래서 흰 가사를 풀어헤치고 이를 잡는 사람은 어쩌면 선가삼매(禪家三昧)의 경지에 들어 염주 알 세는 일과 같지 않겠는가.”
노승이 ‘이’를 죽이지 않고 ‘털어’내기 위해 손가락을 가볍게 움직이는 모습에서, ‘이’조차도 ‘살생’하지 않겠다는 메시지가 전해져 마음이 짠해진다.
흔히 여성암이라고 하면 유방암이나 자궁경부암 등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실제로 발생되는 암의 순위를 매겨보면 어떨까? 국가암정보센터 2015년 기록을 보면 예상과 달리 유방암은 2위에 불과하다. 자궁경부암 순위는 대장암이나 위암 등에 밀려 더 아래로 내려간 7위다. 그렇다면 1위는? 바로 갑상선암이다. 여성에게 발생되는 전체 암 중 19.4%가 갑상선암이다. 주요 의료기관에서 갑상선암을 대표적 여성암으로 지정 관리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갑상선암에 잘 대비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이대여성암병원 권형주(權炯周·40) 교수에게 알아봤다.
의학 분야나 의료제도에 대해 오랫동안 기사를 써온 기자라면 갑상선암과 관련한 취재에서 빠뜨릴 수 없는 질문이 있다. 바로 과잉 진단 관련 질문이다. 2000년대 초반 이후 국내에서 갑상선암 진단이 비정상적으로 증가하면서 의료계에선 갑상선암 과잉 진단에 대한 논쟁이 일었다. 지금은 일단락된 걸까?
‘무조건 수술’ 지양하며 논란 줄어
권형주 교수는 갑상선암이 증가한 것은 사실이지만, 모두 수술이 필요한 상태는 아니라고 말한다.
“진단법이 개선되고 장비가 좋아지면서 과거보다 많이 발견되고 있어요. 예전엔 검진 과정에서 나타나면 대부분 조직검사를 한 뒤 수술로 제거했는데 최근에는 이전보다 보수적으로 치료하고 있습니다. 우리 병원에서는 5mm 이하의 종양은 조직검사와 수술을 하지 않고 좀 더 지켜봅니다. 종류에 따라 성장이 빠른 암도 있지만, 대부분 ‘거북이’처럼 진행 속도가 느려 관찰할 수 있는 여유가 있거든요.”
이렇게 치료 여부를 결정하는 요소에는 암의 크기 이외에 환자 나이와 종양 발생 위치도 포함된다. 환자의 나이가 젊은 경우 진행 속도가 중장년에 비해 빠르기 때문에 적극적인 치료를 하게 된다. 암의 크기가 5mm에서 1cm 정도일 때 경과를 지켜보는 경우도 있지만, 경동맥이나 식도, 기도, 성대신경 등과 가까워 수술할 때 합병증이 걱정되거나, 림프절 전이가 의심될 때, 그리고 어렸을 때 방사선 치료를 받은 경험이 있어 암 성장이 빠를 것으로 예상될 때는 수술을 적극 고려한다.
갑상선암 진단이나 치료에 대한 ‘신중론’이 의료계 전반에서 논의되면서 다양한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병원마다 이러한 기준이 세워졌고, 이로 인해 과잉 논란은 일단락된 분위기다.
방사능에 노출되면 발병 늘어
갑상선이라 하면 보통 혈관처럼 생긴 기다란 선(線)을 연상하지만 실제로는 기도를 감싼 나비모양의 덩치가 꽤 큰 신체기관이다. 성인의 갑상선은 한쪽 길이가 5cm 정도에 이르고 두께도 3cm가량 된다. 한자로는 ‘甲狀腺’이라 표기한다.
이곳에 암이 생기는 이유는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다른 여성암과 마찬가지로 골치 아픈 부분. 권 교수는 의학계에선 여성호르몬과의 연관성에 주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8대 2 정도로 여성에게서 발병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아 여성호르몬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죠. 또 갑상선암을 앓은 환자에게 유방암이 발병할 확률은 2~3배, 자궁내막암이 생길 가능성도 5배 정도 높아요. 여성암을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의료기관들이 각각의 암을 별도로 바라보지 않고, 통합적으로 관리하려는 것은 이 때문이에요. 다른 암도 생길 수 있으니 조심하는 거죠.”
갑상선암의 원인으로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방사능이다. 방사능에 노출된 적이 있거나 어렸을 때 방사선 치료를 받았을 경우 발병 가능성이 높아진다. 갑상선암도 모든 암과 마찬가지로 노화와 관련이 있다. 55세 이후 발병하면 경과가 좋지 않은 사례가 많다고 권 교수는 말한다.
“잘 알려진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나 후쿠시마 원전 사고 후 인근 지역 주민의 갑상선암 발병이 증가했다는 사실이 증명됐어요. 이 밖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은 소아·청소년 비만이나 당뇨, 유방암, 폭음 등이에요. 또 갑상선암의 한 종류인 수질암은 20% 정도가 유전과 관련이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전체 갑상선암 중 유전과 관련이 있는 경우는 매우 낮은 편이에요.”
발견 늦으면 평생 호르몬제 먹어야
갑상선암을 발견하는 최선의 방법은 초음파 검사다. 아주 작은 조직도 일찍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목 주변에서 종양이 만져지거나 물을 마실 때 목에 걸리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목소리가 변하기도 한다. 이런 자각증상이 있을 땐 암이 상당히 진행된 상태라 치료 상황이 좋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검사 과정이 복잡하지 않으니 미리 검사해두는 것이 좋다.
고령 등의 이유로 수술이 어려운 환자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치료는 갑상선을 절제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권 교수는 수술 방식이 의료기술이 발전하면서 변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2009년 이전만 하더라도 갑상선에 암이 생기면 거의 대부분 전절제 방식을 선택했어요. 재발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죠. 하지만 최근에는 수술 후 환자의 삶을 고려해서 수술 범위를 줄이려는 노력들을 많이 하고 있어요. 종양의 크기가 4cm 이하로 작을 경우 암 발생 부위만 제거하는 반절제술도 많이 시도되고 있습니다.”
전체를 제거하는 수술과 반만 제거하는 수술은 단순히 난이도의 문제로만 볼 것은 아니다. 모두 절제해버릴 때는 방사선 요오드 치료가 뒤따르고 평생 호르몬제를 복용해야 한다. 호르몬을 분비할 기관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반절제술을 할 경우는 수술 후 일정 기간만 호르몬제를 복용하다 점차 줄여나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경과가 좋으면 약을 끊기도 한다. 방사선 요오드 치료를 생략하는 경우 많다. 치료 후 환자의 삶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암의 조기발견은 매우 중요하다.
암 성질 변하면 1년 이내 사망할 수도
조기발견이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암의 성질에 있다. 갑상선암의 종류는 유두암, 여포암, 수질암, 미분화암, 역형성암 등으로 구분하는데 대부분은 유두암이다. 유두암은 성장이 느려 가장 온순한 암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는데, 생존율도 95~100%라서 치료도 쉽다. 문제는 유두암을 치료하지 않고 방치할 경우 어느 순간 역형성암으로 변한다는 데 있다. 역형성암의 평균수명은 6개월 정도이고 대부분 1년 이내에 환자가 사망한다.
권 교수는 조기발견이 중요한 이유 중 전이도 있다고 말한다.
“치료를 제때 하지 않으면 다른 기관으로 전이되는데, 절반 정도는 폐로 갑니다. 뼈로 전이되는 경우는 20%, 뇌에 발생하는 사례도 15% 정도 됩니다. 일반 유두암은 대부분 생존할 수 있지만 폐로 전이되면 생존율이 50% 정도로 떨어져요. 쉽게 치료할 수 있는 시기를 놓치면 안 되는 이유죠.”
최근에는 로봇을 활용한 수술이 적극적으로 시도되고 있다. ‘다빈치’로 대표되는 로봇 수술기는 전립선암과 같이 사람 손이 닿기 어려운 장기가 모여 있는 복잡한 부위를 수술하는 데 활용한다. 갑상선은 그런 부위는 아니지만 수술 도중 주위의 신경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해 합병증을 줄일 수 있고, 작은 흉터만 남겨 호응도가 높다.
흔히 알고 있는 갑상선암에 대한 상식 중 하나는 요오드 섭취를 위해 다시마를 많이 먹어야 한다는 속설이다. 권 교수는 “틀린 말은 아니지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한국인은 이미 요오드 섭취량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김치만 먹어도 요오드 섭취량은 차고 넘쳐요. 요오드 섭취량이 부족한 이들은 바다가 없는 내륙 국가의 일부 사람들 정도로 보면 됩니다. 최근에는 요오드를 너무 많이 먹어도 갑상선암의 발병에 영향을 준다는 연구 결과도 있으니 다시마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거두셔도 됩니다.(웃음)”
나는 매일 쌀밥을 먹으며 조상의 은덕과 농부의 수고에 고마움을 느낀다. 쌀에 영혼이 있다는 도령(稻靈)께 무언의 기도를 올리며, 쌀밥을 맛있게 먹고 소중한 쌀 한 톨도 버리지 않고 귀중하게 여기려 한다.
이렇듯 소중한 쌀과 인간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우리는 매일 쌀밥을 먹고 성장하였으며 일상을 살아간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은 ‘쌀’에 대한 고마움이나 그 의미에 대해 잘 인식하지 못하게 마련이다.
쌀은 벼의 열매껍질을 벗긴 알맹이다. 쌀겨는 쌀을 씻을 때 나오는 고운 속겨이며, 쌀을 씻은 뜨물이 쌀뜨물인 것을 누가 모르랴? 그러나 도시 학생들에게 벼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답을 잘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쌀을 얻는 농작물로 익은 열매를 '벼'라 하고 그것을 찧은 것을 '쌀'이라고 해야 알게 된다. 쌀나무(?)라고 일러줘야 할까? 벼를 재배하여 거두는 일을 벼농사라 하는데, 도심에서는 쉽게 볼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곡식을 익힌 음식을 끼니때마다 먹는다. 하루에도 세끼씩 꼬박꼬박 먹으며 생활하지 아니하는가? 아침밥을 시작으로 음식을 차려 놓은 소반인 밥상은 참으로 고마운 존재다. 그렇다면, 세계 3대 곡물은 무엇일까? 바로 쌀, 밀, 옥수수다. 세계 5대 주에서 쌀을 재배하여 식용으로 쓴다. 쌀이 서양에 전해진 것은 실크로드의 아랍인에 의해서였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쌀은 의식주 중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래서 나는 쌀의 기원에 대한 문헌을 찾아보았다.
학명은 '오리자(oryza)'로 라틴어이고 'riso'는 이탈리아에서 쓴다. 영국에서는 'rys'에서 'rice'로 됐다. 고대 인도어 'sari'가 곧 우리말의 '쌀'의 어원이다. 즉 살[肉]에서 왔으며, 식물의 살(쌀)과 동물의 살(고기)을 먹고 사는 게 '살암'(사람)이란 속설도 있다. 이러한 뜻을 알면 참 흥미롭다.
쌀미(米)자는 농부가 팔십팔(八十八)번 손이 닿아야 할 만큼 수고해야만 수확할 수 있다는 뜻이다. 매일 밥을 먹으며 건강을 지키고 행복한 마음으로 인생을 즐기며, 쌀처럼 가치 있는 인간으로서 미수(米壽)인 88세까지 잘 살아야겠다.
1981년. 어렵게 마련한 임대료를 손에 쥐고 며칠 영동(지금의 강남)을 헤맨 김옥란(80) 씨의 마음은 다급했다. 실패하면 더 이상의 기회는 없을 것 같았다. “한 달만 참으면 평생 먹고산다”고 호언장담하던 점쟁이 말도 큰 위안이 되진 못했다. 몫이 좋은 가게 터는 가진 돈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복덕방에서 추천해준 곳은 번화가와는 거리가 있었다. 그래도 몇 년의 고생과 실패로 날이 선 직감은 ‘이만하면 됐다’고 말하고 있었다. 지금은 강남 빌딩숲 속 명물이 된 교보타워사거리 ‘원주추어탕’의 시작이었다.
원주추어탕의 경영을 책임지고 있는 막내아들 이남수(49) 사장은 지금 자리에서의 개업일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원주를 떠나 서울로 올라왔을 때 첫 3년은 가족의 기대와는 거리가 있었다. 미아리에 첫 번째 가게를 차렸지만 가게 자리를 고르는 일도, 식당을 운영하는 일도, 모두 처음이었던 이들 가족에게 손님들의 반응은 냉정했다. 때문에 강남에서의 새로운 시작은 온 가족의 관심사일 수밖에 없었다.
“학교를 마치자마자 집으로 헐레벌떡 뛰어왔죠. 아직도 생생합니다. 가게 문을 급하게 열었는데 식탁 바닥에 입 닦은 휴지와 나무젓가락 등이 수북이 쌓여 있었습니다. 첫날부터 손님이 밀려들어 부모님이 그것들을 치울 겨를이 없었던 거죠. 미아리에서 가게를 차렸을 때 3년간 그렇게 많은 손님을 대해본 적 없었어요. 그날 부모님은 꽤 지쳐 보였어요. 하지만 입가의 미소는 떠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해요. 그날부터 손님은 점점 더 늘어났어요.”
원주식 추어탕 서울에 보급한 원조
원주에서 온 이 가족의 가업이 식당이 된 사유는 그리 특별하지 않다. 전후 경제발전 과정에서 많은 가족의 선택처럼 이들도 가난을 피하기 위해 1977년 서울행을 결정했다. 아직도 매일같이 출근해 재료를 살피고, 맛을 확인하는 김옥란 씨는 원주추어탕의 시작을 이렇게 설명한다.
“동네 앞집 아저씨가 미꾸라지 잡는 데 선수였어. 양재기 한가득 잡아온 날이면 고추장을 휘휘 풀어 야채와 함께 끓여 동네잔치를 벌였거든. 미꾸라지도 잘 잡고 음식도 맛있으니 주변에서 식당을 해봐라 했는데, 차리고 나서 꽤 잘됐어. 손님이 많은 날이면 가끔 나도 가서 돕곤 했는데, 한 손님이 서울에서도 해봐라 하는 얘기에 내가 차려봐야겠다 싶었어. 식당 주인도 돕겠다 하고. 그래서 미아리에 자릴 잡았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초짜가 엉뚱한 데 식당을 냈으니 잘될 리 없었지.”
당시 이웃이었던 원주의 추어탕 집은 현재까지도 성업 중이다. 물론 서울의 원주추어탕과의 교류도 여전해서 이남수 사장은 그곳을 아직까지 ‘큰집’이라고 부른다.
“미아리에서 장사를 시작했을 때 추어탕 한 그릇에 1200원이었어. 처음엔 재래식 요리법을 고집해서 식탁 앞에서 살아 있는 미꾸라지를 냄비에 넣었는데, 손님 옷에 국물이 튀고 난리도 아니었지. 3년간 고군분투하다 안 되고 빚낸 돈 다 떨어지기 전에 다시 원주로 내려가야겠다 싶었는데, 이대로 내려가기엔 그간의 고생이 너무 아까웠어. 그러다 그 시기에 영동에 가게들이 들어선다는 얘기에 거기서 다시 시작해보자 했던 거지.”
강남 개발 광풍 속에서 지켜온 전통
모자는 가게가 자리 잡았던 1981년 강남의 모습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했다. 1976년 준공된, 길 건너 제일생명 건물은 당시 그 지역이 ‘제일생명 사거리’로 불릴 정도로 존재감이 대단했고, 그 옆에는 영흥자동차학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사거리에서 영동시장까지는 목재상, 골재상 등 건축과 관련한 각종 장비와 자재를 파는 가게들이 줄지어 있었다. 강남은 정부 주도 개발의 핵심에 있었고, 그 시기는 강남의 개발이 막 시작된 참이었다.
이제 당시의 흔적은 찾기 어려워졌다. 위용을 자랑하던 제일생명 빌딩이 철거되고 2003년 교보타워가 들어섰으니 다른 건물들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도 고집스레 당시 모습을 간직한 곳이 있다. 바로 원주추어탕이 운영 중인 건물이다. 1974년에 지어진 이 건물은 돌아보면 당시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이제는 더 이상 돌아오지 않는 ‘강남 제비’의 제비집도 여전히 처마 밑에 그대로다.
그중 모자가 가장 아끼는 것 중 하나는 여전히 현역으로 가게 앞을 지키고 있는 간판이다. ‘원조 고유의 음식’이라고 씌어 있는 간판은 이 사장의 선대가 직접 다듬어 제작한 것이다. 지금 위치에 자리 잡고 나서 2년쯤 지난 어느 날이었다.
식당은 잘 운영됐다. 당시 건물에 4개의 점포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는데, 하나씩 인수하면서 조금씩 자리를 넓혀갔다. 그런데 한창 장사가 잘될 무렵 건물주가 부도가 나 건물이 은행에 넘어갈 위기에 처했다. 결국 무리를 해서 건물을 샀고, 원래 1층이었던 건물은 증축을 통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누구도 못 말린 재료 고집
이남수 사장이 경영을 맡게 된 과정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원래 볼링선수였던 그는 서울시 대표로도 활약했고 실업팀에 입단할 정도의 실력을 자랑했다. 하지만 어머니 김옥란 씨에게는 배부른 직업으로 보이지 않았다.
“할 만큼 했으니 이제 가게로 와 도와달라고 했지. 식당일이 워낙 힘드니까. 처음엔 대를 이어 식당을 맡기겠다는 생각은 없었어. 하지만 손님도 늘고 할 일이 많아지면서 의지하게 되더라고.”
그렇게 아들 셋은 모두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첫째는 성남시 서현동에 ‘원주추어탕’을 차리면서 독립했고, 둘째는 인근에서 번듯한 주점을 차렸다. 그리고 자연스레 막내인 이 사장이 원주추어탕을 이어받게 됐다. 어머니 김 씨는 이 사장이 가게에 합류했을 때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았다고 기억했다.
“의욕이 넘쳤어. 나는 그동안 잘해왔으니까 잘해온 방식을 고수하고 싶은데, 자꾸 이것저것 새로운 것을 시도해보자는 거야. 처음엔 불안해서 혼내기도 하고 말리기도 했는데, 지내다 보니 제대로 된 의견이었다는 걸 깨닫게 된 거지. 그래서 지금은 뭘 하자고 하면 잘 듣는 편이야.”
새로운 시도를 한 메뉴 중 가장 대표적인 음식이 메기불고기. 한 가지 메뉴로 사랑받는 맛집이 메뉴를 추가한다는 것은 꽤 부담스런 일이었다. 하지만 이 사장의 고집으로 탄생한 메기불고기는 이제 대표 메뉴가 됐다.
이 사장의 또 다른 고집은 추어탕의 가장 기본이 되는 미꾸라지와 고추장에 관한 것. 특히 손님에게 좋은 미꾸라지를 내놓는 일은 그의 평생 숙제 중 하나다.
“원래 미꾸리로 불리는 토종 미꾸라지를 썼어요. 몸통이 동그란 모양이라 동글이라고도 불리는데 성장 속도가 느려 양식에 적합하지 않아요. 또 자연산은 당연히 수급이 어렵죠. 그러다 보니 넙죽이라 불리는 중국산 미꾸라지가 대세가 됐죠. 저희도 어쩔 수 없이 그걸 쓰지만, 지금 동글이 양식을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어요. 성공해서 더 맛있는 추어탕을 손님에게 내놓는 것이 꿈이에요.”
구할 길이 없어 자연산 미꾸라지를 1년 내내 재료로 쓸 수는 없지만 소량이라도 매수가 가능한 매년 7월과 8월에는 자연산을 확보해 특별 메뉴로 내놓는다. 단골들은 절대 놓치지 않는 연례행사다.
“다른 지역 추어탕과 가장 큰 차이가 나는 고추장 역시 제가 신경 쓰는 재료예요. 3~4년에 한 번씩 담그던 고추장을 이젠 매년 만들고 있어요. 많이 만들어놔 여유가 있지만 그래도 제가 욕심을 부려요(요즘 손님용으로 사용 중인 고추장은 16년이나 묵은 것이다). 고추장 담글 때 어머니는 쉬셔도 된다 할 정도로 이제는 자신 있어요. 간장은 씨간장을 다양하게 만들어가면서 이런저런 실험을 하고 있어요. 고객들 입맛을 완벽하게 만족시켜줄 간장을 찾기 위해 계속 시도를 해보는 거죠.”
자리를 잘 잡아서 맛집이 되고 노포(老鋪)가 될 수 있었다고 오해할 수 있지만, 강남은 수많은 식당이 생겼다 사라지는 중심 상권의 대표 지역이다. 원주추어탕이 지금까지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맛에 대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최근에는 미꾸라지가 난임부부에게 좋다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포장해가는 고객도 늘었다. 난임시술로 유명한 주변 병원의 환자들 사이에서 퍼진 속설 탓인지 ‘목적을 갖고’ 찾아오는 손님들이 많다고. 실제로 쌍둥이 유모차를 끌고 간증과 함께 감사인사를 전하는 부부가 찾아오는 일도 심심치 않게 있다고 한다.
3대로 이어진 ‘고유의 음식’
이 사장에게는 최근 가슴 벅찬 사건이 하나 있었다. 올해 아들이 원주추어탕 3대 사장이 되겠다며 식품공학과를 선택해 대학을 갔기 때문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기에 그에게는 ‘사건’으로 기억된다.
“제게는 그런 뜻을 내비친 적 없었거든요. 그런데 여동생하고 아이들끼리는 자주 이야기했던 모양이에요. 식당일을 하고 싶다고 말이죠. 어릴 때부터 식당에 자주 와 일을 돕곤 했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랐어요. 요즘엔 셰프에 대한 인식이 많이 좋아졌고, 또 대견하기도 해서 반대하진 않았습니다.”
입학원서 내는 날 할머니와 아버지, 아들 3대는 특별한 사진을 찍었다. 장소는 학교가 아니었다. 할아버지가 식당에 내건 ‘원조 고유의 음식’ 간판 앞에서였다. 이 사장은 이 사진을 계산대 앞 잘 보이는 곳에 세워뒀다.
“아이가 대를 이어준다고 하니 저도 꿈이 생겼어요. 좋은 식당 주인을 만들기 위해 제가 알아놓은 주변 식품기업, 제조시설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게 해주고 싶어요. 본인은 힘들겠지만.(웃음) 저희 부모님은 가족을 위해 이 식당을 만드셨고, 제가 물려받은 다음부터는 모든 일을 손님을 위해서만 해왔어요. 하지만 아이가 이 식당을 3대째 운영하게 될 땐 사회를 위한 주인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주변과 세상을 보살필 수 있는 원주추어탕이 되길 바랍니다.”
파릇파릇 돋아나 꽃보다 더 예뻤던 새순들이 아스라한 연두색으로 빛나더니 어느덧 짙은 초록으로 무르익어갑니다. 5월 인적이 드문 신록의 숲에서 산객 혼자 겨우 지나갈 수 있는 호젓한 오솔길을 걷다가 아무런 예고 없이 귀한 꽃 한 송이 만나길 빌었습니다. 복주머니란 한 송이 만나는 큰 운이 찾아오길 간절히 바랐습니다. 이때 필요한 건, 오복(五福)을 내리는 다섯 송이도 아니고, 만복을 기원하는 열 송이, 수십 송이도 아닌 단 한 송이의 개불알꽃이면 족할 것입니다. 이런 간절한 바람에 하늘이 답한 것일까. 일당백(一當百) 기상으로, 저 홀로 핀 단 한 송이 복주머니란을 만났습니다. 한참 동안 만났습니다. 산그늘에 잠겼던 복주머니란에 석양빛이 들어올 때까지 홀로 오랫동안 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숲이 아직은 건강하다는 사실을 실감했습니다. 그때의 감격이 참 오래가더군요.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이 날 정도입니다.
야생의 꽃 한 송이에 무에 그리 호들갑을 떨까 의아하겠지만, 복주머니란의 매력을 알면 고개를 끄덕일 만합니다. 우선 화려함이 국내에서 자생하는 그 어떤 야생화에 비해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유난스럽습니다. 나무가 아닌 풀꽃인데도 큰 것은 50cm에 이를 만큼 키가 껑충한 데다 꽃 색도 붉어 초록의 풀밭 사이에 한 송이만 피어 있어도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어긋나기로 달리는 3~5개의 타원형 잎도 너비 6~8㎝에 길이가 10~20㎝로 시원스럽습니다. 특히 홍자색 꽃은 곁꽃잎 2개과 입술꽃잎(순판·脣瓣) 1개로 이뤄진 독특한 형태인데, 주머니 또는 항아리 모양의 크기 4~6cm의 입술꽃잎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각기 그 이름이 달라집니다. 우선 학명 중 속명 시프리페디움(Cypripedium)은 ‘비너스’를 의미하는 시프리스(cypris)와 ‘슬리퍼’라는 뜻의 페딜론(pedilon)의 합성어인데, 항아리 모양의 입술꽃잎이 마치 미의 여신 비너스가 신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신발처럼 생겼다는 뜻을 담았습니다. 영어 이름도 ‘숙녀의 슬리퍼’(Lady´s slipper)로 같은 의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선조들은 타원형으로 길게 늘어진 입술꽃잎을 보고 굳이 다른 설명을 붙이지 않아도 ‘아하 맞다’ 하고 고개를 끄떡일 만한 다른 이름을 지었습니다. 바로 개불알꽃으로, 일제강점기인 1937년 현대적 식물분류학에 따라 처음 발간된 ‘조선식물향명집’에 올라 있는 명칭입니다. 이외에도 요강꽃, 까치오줌통, 오종개꽃, 작란화 등 지역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왔는데, 식물명을 정하는 ‘국가표준식물목록위원회’는 1996년 입술꽃잎의 모양이 전통 복주머니를 닮은 데 착안해 복주머니란으로 통일했습니다. 이에 단번에 식물의 특징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옛 이름을 민망하거나 망측하다고 해서 ‘우아한 이름’으로 바꾸는 게 과연 옳은지 생각해볼 일이란 주장도 있습니다.
Where is it?
각종 도감에 전국 어디서나 볼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실제로 야생에서 자생하는 복주머니란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색이나 모양이 화려하고 예쁜 탓에 보이는 대로 남획당해 자생지가 파괴되고 있다는 뜻인데 결국 2012년 멸종위기 야생식물 2급, 즉 특별한 보호관리 대상으로 지정됐다. 때문에 다소 거북하긴 해도 만개한 꽃의 특성을 가장 설명하는 개불알꽃이니 요강꽃이니 하는 원래 이름을 복주머니란이라고 바꿔 부른 뒤 ‘복’에 환장한 손을 타는 수난을 겪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는 말이 나온다. 영아사망률이 높았던 옛날, 이름이 예쁘면 저승사자가 일찍 데려간다는 속설이 있어 귀한 집 자손일수록 개똥이니 쇠똥이니 하는 천한 이름을 붙였는데, 일례로 고종 황제도 아기 때는 ‘개똥이’로 불렸다고 하는 이야기가 의미심장하다. 어쨌든 볕이 좋은 5월 중순 태백산과 지리산, 소백산, 보현산 등 한라산을 제외한 전국의 높은 산 중턱쯤에서 만날 수 있다. 그중 ‘천상의 화원’으로 불리는 강원도 태백의 두문동재~금대봉~분주령~대덕산 코스가 운이 좋으면 그런대로 자연 상태의 복주머니란을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자생지로 꼽힌다.
문명의 역사를 파헤친 명저 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최근작 를 통해 현생인류를 대체해 신이 되고 싶은 새로운 인류의 미래상을 그려내 충격을 안긴 바 있다. 오늘날 4차 산업혁명의 키워드로 일컬어지는 인공지능(AI), 유전자조작 등의 신기술을 통해 그동안 신의 영역이었던 생명체 창조를 인간도 해낼 수 있기에 호모 사피엔스는 새로운 신적 인류로 진화해 갈 것이라는 예언이다.
사실 그러한 징조는 이미 곳곳에서 확인되고 있다. 작년도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대결에서 우리는 인공지능의 놀라운 능력에 경악했다. 유전자가위라는 신기술은 인류의 유전병을 미리 차단하여 생명 연장에 기여할 것이고, 우리가 먹는 식재료도 유전자변이(GMO)를 통해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늘려 인류의 기아해방에 기여하리란다. 인류는 생명체를 조작하고 궁극적으로 창조하는 데까지 나아갈 것이다.
인간이 창조하는 인공지능에 대해서는 낙관과 비관이 교차하고 있다. 낙관주의자들은 인공지능은 어차피 인간의 보조 수단에 불과하다고 하고, 비관주의자들은 언젠가 인간을 넘어서는 순간이 오고 그 이후는 통제가 어렵다고 걱정한다. 스티븐 호킹 박사 같은 이는 “AI는 인간의 파멸을 가져올 것”이라고 단언한다. 미래를 상상하는 많은 SF 영화들도 대부분 비관주의에 가세한다.
그런데 이와는 전혀 다른 시각의 영화가 있다. 바로 다. 이 영화는 1982년 그러니까 무려 35년 전에 나왔던 의 속편 격인데 인간이 창조한 인조인간 리플리컨트를 통해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꽤 진지한 영화다. 놀라운 것은 지금이야 인공지능이 실제로 실현되고 있어서 어느 정도 공감이 가지만, 1982년에 이런 상상을 했다니 리들리 스콧 감독은 천재다.
드니 빌뇌브 감독은 이 영화 곳곳에 전편에 대한 오마주를 심어 리들리 스콧 감독에 대한 존경을 표한다. 스토리도 상당 부분이 이어지기 때문에 전편을 보지 않은 관객은 이해하는 데 불편이 따른다. 보통 영화계에 ‘형만 한 아우 없다.’는 속설이 있을 정도로 성공하는 속편이 드문데 이 영화에 대한 평가는 그리 박하지 않다. 다만 너무 길어 중간에 졸 수도 있다는 점이 약점이다.
리플리컨트 K(라이언 고슬링)는 도망친 리플리컨트를 색출해 사살하거나 붙잡아 오는 것이 임무인 블레이드러너다. 본래 전편에서 ‘넥서스6’ 모델은 수명이 4년으로 설정되어 있어서 그들의 수명 연장의 꿈과 좌절을 다루었다면, 이 영화에서는 만약 만들어진 ‘인조인간이 생식능력을 갖게 된다면 그들을 인간으로 볼 수 있는가?’ 하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러니까 역으로 인간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인 셈이다.
K는 수사 중 임신의 흔적이 있는 리플리컨트의 유골을 발견하면서 격랑에 휩쓸린다. 만약 이 사실이 퍼지면 그들을 자극해 폭동이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비밀리에 수사를 진행할수록 자신이 그 아이라는 심증을 굳혀간다. 마침내 아버지로 추측되는 늙은 데커드(해리슨 포드)를 만나 자식이 아님을 알았다. 데커드를 처치하라는 임무였지만, 그를 살려주고 딸을 만나게 한 후 눈을 맞으며 숨진다.
너무 길어 짧은 지면에 요약하기 불가능해 큰 줄거리만 소개했지만, 사실 스토리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이 영화에서 주목할 것은 지구를 황폐하게 만든 인간들은 별로 보이지 않고 온통 리플리컨트로 의심되는 존재들이 등장하여 인간적인 고뇌를 드러낸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보여주는 혈육의 문제, 정서적 공감, 역경에 처한 상대에 대한 도움과 배려 등 따지고 보면 모두 우리 인간이 잃어버린 가치가 아닌가.
인류는 이제까지 자연 속의 상대들은 대부분 정복했고 더 이상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이 만든 인조인간 때문에 고뇌하고 그들을 통해 잃어버린 가치를 이야기하는 설정이 흥미롭다. 말하자면 인간은 창조주가 되고 싶어 했으나 창조한다는 일이 얼마나 고단한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고나 할까. 인공지능의 미래도 그러하리라. 역시 피조물로 사는 게 마음 편하다.
12년 만에 최고로 길었던 추석 연휴가 지났다. 긴 연휴는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수많은 며느리들에게 육체적인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늘어난 휴일만큼 더 많은 가사에 시달리면서 허리와 손목, 어깨 등에 통증을 호소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실제로 정형외과는 명절 연휴 직후가 성수기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연세에이스정형외과에서 만난 이순옥(李純玉·64)씨도 명절이 고달픈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보통의 며느리들과 다른 부분이 있다면, 그녀가 겪은 질환은 파스 몇 장으로 끝낼 수 있는 병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처음엔 뒤늦게 시작한 취미가 문제라고 생각했죠.”
이순옥씨는 남편을 통해 알게 된 노래 모임을 통해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6년 전 일이다. 처음 배우는 악기라 당연히 쉽지 않았고, 코드를 잡는 손부터 허리까지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래도 기타를 다루는 것이 익숙해지면서 통증은 점점 사라져갔다. 연주로 인한 즐거움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유독 왼쪽 어깨에 남아 있는 통증은 그대로였다. 이러다 말겠지 했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특히 명절이 지나면 통증은 더 심해졌다. 그러다 남편의 무릎 치료를 위해 들른 병원이 믿을 만해서 자신의 어깨도 검사해봤다. 진단 결과 석회성건염이었다.
원인 모를 석회화가 통증 불러와
석회성건염은 어깨에 돌덩이 같은 것이 생기는 병이다. 관절에 석회 물질이 저절로 발생한다는 것이 쉽게 상상이 되질 않는다. 치료를 담당한 정형외과 전문의 윤홍기(尹洪基·46) 원장은 석회성건염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석회성건염은 말 그대로 어깨 힘줄 부위에 석회 침착물이 생기면서 염증을 일으키는 병이에요. 이 염증이 통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죠. 사실 이 병의 정확한 원인은 밝혀진 바가 없어요. 힘줄의 노화 과정에서 석회화가 일어난다는 가설과 힘줄 세포의 변성으로 석회가 생긴다는 이론이 지지를 받고 있지만 확인되진 않았어요.”
우리가 흔히 오십견으로 알고 있는 유착성관절낭염과는 완전히 다른 병이다. 어깨에 통증이 발생하는 병이기 때문에 비슷하다 여길 수 있지만, 오십견은 어깨 관절의 운동 범위가 직접적으로 감소되는 점이 가장 다른 부분이다. 석회성건염도 어깨가 움직일 수 있는 범위에 영향을 주기도 하지만 증상의 정도에 따라 다르다. 주의해야 할 점은 치료를 받지 않아도 나을 수 있다는 오십견에 대한 속설이다. 어깨통증을 모두 오십견이라도 단정 짓고 병을 키울 경우 응급실 신세를 질 수도 있다.
“아팠을 텐데 지금까지 어떻게 참으셨어요?” 윤 원장이 이씨를 만나자마자 건넨 말이다. 윤 원장은 일반 환자보다 커다란 석회덩어리를 보고 걱정이 많았다고 기억했다. 다행히 덩어리 크기에 비해 환자가 느끼는 통증은 비교적 적었다. 석회성건염은 생성기, 휴지기, 흡수기의 3단계를 거치는데, 흡수기에 접어들었을 때는 극심한 통증이 나타난다. 만약 어깨가 너무 아파 응급실을 찾을 정도라면 대부분 석회성건염일 가능성이 많다.
윤 원장은 환자의 통증이 심하지 않아 일단 보전적 치료를 선택했다고 설명했다. 함부로 어깨에 칼을 대기보다는 수술을 하지 않고 치료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심한 통증이 없다면 비수술적 치료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에요. 석회를 없애기 위해 보통 두 가지 방법이 쓰입니다. 석회물이 부드러운 상태라면 주사기로 빨아들여 크기를 줄이고, 딱딱하면 체외충격파 치료로 부순 다음 분산시켜요. 이순옥씨의 경우 체외충격파를 몇 차례 시도했지만 효과가 없어 결국 수술을 결정하게 됐죠.”
제사를 모셔야 하는 며느리의 숙명
올해로 결혼생활 28년째. 집안에선 둘째 며느리이지만 내 손으로 하지 않으면 만족하지 않는 성격 탓에 시어머니로부터 모든 제사를 물려받았다. 제사만 1년에 4차례. 설과 추석의 차례상 준비도 그녀 몫이다. 단 한 번도 빼먹은 적도, 소홀히 넘긴 적도 없다.
이순옥씨가 처음 병원을 찾은 것은 설 명절 직후인 지난 2월이다. 집안의 연이은 행사 때문에 어깨 질환이 생긴 거라고 지목하지 않았어도, 대소사를 챙겨야 하는 중압감은 그때마다 어깨 위로 쌓이지 않았을까?
“워낙에 내 일로 남 일로 바빠요. 가만히 있질 못하는 성향이니까. 한때는 백화점에서 일도 했고, 부대찌개 식당도 했어요. 그래도 다행인 건 올해부터는 제사를 한 번에 지내기로 했어요. 부담이 좀 줄어들었죠.”
그녀의 활달한 성격은 여가생활에서도 나타난다. 남편을 통해 알게 된 노래 모임 ‘관악산 통사모(통기타 사랑 모임)’는 활동한 지 10년째다. 이제는 보컬을 담당하는 남편보다 그녀가 ‘핵심 멤버’로 꼽힐 정도다. 이 노래 모임은 ‘관악산 통사모 7080 음악회’라는 제목으로 매달 2, 4번째 일요일에 관악산 제2광장에서 정기공연을 갖는다.
관악산 통사모를 통해 알게 된 티뷰크사회복지재단을 통해 봉사활동도 해왔다. 민원으로 인해 중단될 때까지 신대방동 인근에서 저소득층 노인들에게 간식을 나눠주는 ‘빵 봉사’를 6년이나 했다. 많을 때는 1000명 이상의 사람이 몰렸다. 말 그대로 쉴 틈이 없는 나날들이었다.
어깨를 많이 쓰는 야구선수 사이에서는 “어깨는 쓸수록 강해진다”는 속설이 떠돈다. 그러나 이씨에게도 적용되는 말일까? 윤 원장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강조한다.
“모든 관절은 과부하가 걸리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에요. 많이 쓸수록 좋아지고 건강해진다는 말은 잘못된 것입니다. 나이 들면 어깨 관절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요. 배드민턴이나 탁구 같은 운동 역시 질환의 원인이 될 수 있어요. 전기나 배관과 같은 팔을 올리고 작업하는 직업군 역시 어깨 질환이 자주 발생합니다.”
석회성건염의 불편한 특징 중 하나는 여성들의 발병이 남자에 비해 두 배가량 높다는 것. 연령을 기준으로 하면 30대에서 50대에 가장 많이 발생한다. 발병 원인이 아직 정확히 파악되지 않았기 때문에 왜 여성이 더 많이 걸리는지, 나이와는 어떤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통증보다 더 무서웠던 것
지난 7월 결국 이씨는 수술대에 올랐다. 사실 수술은 그녀에게 그렇게 두려운 일은 아니었다. 이미 대장암 수술을 통해 투병 과정을 겪었기 때문에 어깨 수술은 겁나지 않았다. 대장암은 이미 제거되었고 완치 직전에 있다. 문제는 엉뚱한 곳에 있었다.
“제가 폐쇄공포증이 좀 있어요. 아주 심한 편은 아니지만 생활하는 데 불편함이 있을 때가 있어요. TV 장식장 안처럼 좁은 공간은 보는 것만으로도 힘들어요. 그래서 찜질방도 못 가요. 수술 전 MRI 촬영을 위해 관처럼 좁은 공간에서 30분 정도 움직이지 않고 있어야 했는데 너무 힘들었어요. 다 때려치우고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죠. 눈 질끈 감고 노래를 부르면서 버텼어요. 그때 아는 노래 모두 불러버린 것 같아요(웃음).”
수술 과정은 그리 복잡하지 않다. 얇은 튜브 모양의 관절경이 들어갈 수 있도록 어깨의 앞, 뒤, 옆에 작은 구멍을 내 수술을 하는 방식이다. 관절경에 달린 카메라를 통해 석회물이 생성된 부위를 직접 들여다보면서 힘줄이 다치지 않도록 제거해낸다.
윤 원장은 “간혹 수술을 해도 석회물이 남는 경우가 있어요. 이순옥씨의 석회화 부위는 넓은 편이었지만 다행히 모두 제거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수술 후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10일 입원 지시를 받았지만, 몸이 들썩거려 6일 만에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퇴원했다. 어깨는 그래도 괜찮을 정도로 빠르게 좋아졌다.
“수술 후 첫날부터 어깨가 잘 움직여 물리치료사가 깜짝 놀랄 정도였으니까요. 운동 치료도 잘되고 몸 상태도 빨리 좋아지자 병원에 계속 누워 있기가 싫더라고요. 일반 사람들보다 회복이 빨랐던 이유는 아마 요가 때문인 것 같아요. 10년 정도 요가를 꾸준히 해왔거든요.”
그녀는 자신의 부지런한 성격과 평소에 해왔던 운동이 몸이 회복하는 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말한다. 그리고 병원에서 가장 말을 잘 듣는 환자는 자신일 거라며 웃었다. 병원 방문날짜를 어긴 적도 없고, 운동도 빼먹지 않고 했다. 시키는 동작은 통증이 느껴져도 모두 다 해냈다.
이씨는 부지런한 성격이지만, 석회성건염 환자들 대부분은 게으르다. 윤 원장은 석회성건염 환자들은 합병증도 조심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일부 환자들은 병세가 호전되지 않는다고 치료를 포기해버리는 경우가 있어요. 치료가 지겹기 때문일 거예요. 운이 좋으면 석회물이 자연 흡수되는 경우도 있어 통증이 사라지고 힘줄이 회복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운이 나쁘면 움직일 수 있는 범위가 줄어들어 일상생활이 더 불편해집니다. 그래서 환자들에게 당장 좋아지지 않아도 성실하게 치료를 받으시라고 권합니다. 아무리 느려도 그것이 가장 빨리 낫게 하는 방법입니다.”
2개월 만에 거의 회복된 몸
수술 후 변화를 묻는 질문에 그녀는 재미있는 답변을 했다.
“이제 차 앞자리에서 뒷자리 물건을 집을 수 있어요. 수술 전에는 뒷자리에 있는 물건을 전혀 집을 수 없었거든요. 기타 연주를 마음놓고 할 만큼 회복되진 않았어요. 통기타는 쇠줄을 잡아야 해서 힘이 필요한데, 아직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아요. 요가도 비슷해요. 그러나 정상일 때에 비하면 90% 정도는 회복됐다고 봐요. 더 건강해지기를 기대하지만, 수술 후 두 달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 정도면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자상한 남편은 일등 공신 역할을 했다. 그녀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수술이 끝나고 남편 얼굴만 보였다며 당시를 기억했다. 치료 후 어깨에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 최근 걷기에 집중하고 있다고 이씨는 말했다. 많이 걸으면 두 시간도 너끈히 걷는다고 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걸으려고 노력해요. 주위를 둘러보며 걷는 걸 좋아해요. 지하철 계단도 열심히 걷고. 걷는 속도도 꽤 빨라서 젊은 사람들과 함께 걸어도 앞장서서 가요.”
수술 후 하고 싶은 것이 있을까. 그녀에게 묻자 또 의외의 답을 내놓는다.
“요즘 유행하는 플라잉 요가를 해보고 싶어요. 물론 어깨가 완전히 나은 후에 해야겠죠. TV에서 연예인들이 하는 것을 봤는데 멋져 보이더라고요. 남들 눈에는 이상하게 보일 수 있겠지만, 제게는 일종의 도전 같은 것이에요. 나를 위한 도전을 계속 하고 싶어요. 플라잉 요가를 위해서라도 빨리 완치되고 싶어요.”
가수 진미령은 한 설문조사에서 재혼하고 싶은 여자 1위에 뽑힌 적이 있을 정도로 매력적인 여성이다. 아직도 소녀 같은 진미령이 내 나이와 비슷하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그 나이에 이토록 섹시한 스타는 가요계 통틀어서도 드물다. 아직도 잘록한 허리에 조막만 한 얼굴과 긴 머리가 잘 어울리는 섹시하면서도 청순한 소녀와 마주하고 가을 냄새를 느꼈다.
가수는 “히트곡에 따라 인생이 결정된다”는 속설이 있다. 그 때문일까? 불행하게도 요절가수들의 히트곡은 대부분 엄청 슬프다.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을 부른 차중락, ‘마지막 잎새’를 부른 배호, ‘슬픈 노래’와 ‘안녕 친구여’를 부른 김광석, ‘슬퍼하지 말아요’와 ‘이별의 종착역’을 부른 김현식 등 요절가수 대부분의 노래 가사가 슬프다. 그에 반해 진미령은 ‘소녀와 가로등’으로 히트를 쳐서 그런지 아직도 청순한 소녀 같다. 5년 전에 발표한 ‘미운 사랑’이 중장년층에 큰 호응을 받고 있는데 그 가사도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녀의 인생과 닮아 있다.
남몰래 기다리다가 가슴만 태우는 사랑 어제는 기다림에 오늘은 외로움 그리움에 적셔진 긴 세월 이렇게 살라고 인연을 맺었나 차라리 저 멀리 둘걸 미워졌다고 갈 수 있나요 행여나 찾아올까봐 가슴이 사랑을 잊지 못해 이별로 끝난다 해도 그 끈을 놓을 순 없어 너와 난 운명인 거야
-‘미운사랑’ 1절 가사
진미령이 가사를 직접 쓴 이 노래가 실제로 전유성과의 이별과는 상관이 없겠지만, 한량 이봉규가 듣기에는 아픈 이혼의 경험이 절절히 묻어나오는 듯하다. 진미령은 전유성과의 이혼에 대해 더 이상 말하기를 꺼렸다. 그러나 나와 술 마시다가 불쑥 뱉어낸 적이 있다. 냉면을 먹다가 이혼을 결정했다는 것.
냉면 먹다가 이혼을 결심했다
진미령은 “냉면이 먹고 싶어 전유성과 단골식당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도착해보니 전유성은 이미 냉면을 다 먹고 난 후였다”며 “자신이 냉면을 먹는 동안 함께 있어주겠다고 한 전유성이 갑자기 지루한지 먼저 가겠다고 일어섰다”는 것. 당시 서운한 감정을 떠올리며 “냉면을 먹는 이 짧은 순간도 기다려주지 못하는 남자인데 앞으로 함께 살아가기는 어려울 것 같아 이혼을 결심하게 됐다"고 실토한 적이 있다. “전유성과 헤어지고 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또 다른 사랑이 있었나?” 물었더니 먼저 한숨부터 튀어나오더니 “남자들이 입이 가벼워 그들의 무용담에 내 이름이 오르내리기 싫어서”라며 말문을 막는다. 급히 화제를 돌리려 하기에 이에 질세라 나도 물고 늘어졌다.
“그동안 육체적 욕망은 어떻게 참을 수가 있었나?” 도발했더니,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 여자는 성적인 충동을 잘 조절할 수 있고 혼자 어느 정도 기간이 흐르면 성적으로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고 진지하게 대답한다. 각종 행사 등 바쁘게 가수 활동을 하면 엔도르핀이 돌아서 나름 행복하고 또 요즘은 골프 삼매경에 빠져 시간 날 때마다 골프를 치니 외로움 따위는 없단다.
자유로운 사랑이 좋아
“앞으로 남은 평생을 이렇게 계속 혼자 살 작정인가?”라며 또 파고들었다. 그녀는 “좋은 남자 생기면 결혼하고 싶다. 그런데 따로 살면서 각자의 생활에 충실하고, 보고 싶을 때만 만나 데이트하면서 살고 싶다”며 한술 더 뜬다. 보통 우리네 평범한 여인네들의 생각과는 너무나 달랐다. 마치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사랑과 철학을 엿보는 듯했다.
진미령은 사실 전유성과도 혼인신고를 하지 않고 계약결혼 비슷하게 살았다. “왜 그랬냐?”고 물었더니, “전유성의 전처 밑으로 호적이 올라가는 게 싫어서”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작고 귀여운 외모와는 다르게 남자에게 의존적이지 않고 독립심이 강하고 사랑도 주체적으로 끌고 가려는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이 대목에서 갑자기 진미령과는 정반대 스타일의 내 아내의 엉뚱함이 떠올라 혼자 피식 웃었다. 내 아내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나의 전처를 ‘형님’이라고 호칭하면서 가끔 나를 놀리곤 한다. 내 아내의 그런 놀림에 당황스러울 때도 있지만 유머 코드로 치부하고 넘어가곤 한다. 정신 차리고 다시 진미령과의 인터뷰에 탄력을 붙였다.
“어떤 남자와 결혼하고 싶나?”라는 질문에 그녀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진다. “아침에 남편보다 먼저 일어나서 화장하고 싶지 않아서 연하는 곤란하고, 그렇다고 다섯 살 이상 많은 할아버지랑 사는 것도 썩 내키지 않고 내 나이와 시추에이션이 난처하다”는 것.
다시 말하면 나이가 비슷하고 친구였던 사람이면 좋겠다는 뜻이다. 맥 라이언과 빌리 크리스탈 주연의 영화 의 주인공 커플처럼 되고 싶다는 고백으로 이해했다.
故 김동석 영웅의 딸
화제는 진미령의 아버님 얘기로 이어졌다. 사실 진미령과 내가 알기 시작한 것은 그녀의 아버님 때문이었다. 진미령의 아버지 김동석 대령은 미국이 선정한 ‘6·25전쟁 4대 영웅’ 중 한 사람이다. 미국 측의 맥아더 장군과 리즈웨이 장군, 그리고 한국 측의 백선엽 장군과 김동석 대령이 그들이다. 의정부 미2사단 전쟁박물관 내에 마련된 김동석 영웅실에는 훈장을 비롯한 유품과 각종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미국도 김동석 대령을 영웅으로 선정해 극진히 대접하는데 모국인 대한민국이 그를 푸대접하는 것이 안타까워 내가 방송에서 여러 번 다룬 적이 있다. 그때 진미령이 내 전화번호를 방송국에서 수배해 연락을 해왔다. “아버님을 제대로 평가해줘서 너무 고맙다”고 울먹이며 통화한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후로 나이도 비슷해서 가끔 만나 술도 한잔하면서 친구처럼 지낸다.
김동석 대령은 육사 8기 출신으로 한국전쟁에 참여해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북한군 15사단을 전멸시키기도 했고 맨몸으로 정보참모부 소속 미군 연락장교로서 적진에 침투해 결정적인 첩보를 수집했고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는 데 1등 공신이 되었다. 당시 맥아더는 김동석 사진을 가리키며 ‘This man!’이 준 첩보는 믿을 만하다고 결론을 내리고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다. 사실 인천은 조수간만의 차도 크고 여러 가지 여건상 상륙작전을 하기에는 부적절했지만 김동석의 결정적인 첩보가 맥아더 장군의 선택에 용기를 부여했던 것이다. 김동석 대령은 이때부터 맥아더 장군에게 ‘This man’이라는 별칭을 받았다. 그러나 아버지의 눈을 무서워했던 진미령은 아버지 같은 사람하고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하기야 목숨을 내놓고 북파 공작원으로 살았기에 보통 사람의 눈매를 가졌을 리 만무하다. 아버지는 칠십이 넘어 눈이 부드러워졌고 그때부터 아버지가 좋아졌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어눌한 말투의 부드러운 눈매를 지닌 전유성과 살았는지 모를 일이다.
요리도, 노래도 잘하는 다재다능한 가수
진미령은 요리 프로그램 진행을 맡을 정도로 요리를 잘한다. 프랑스의 유명 요리학교인 르 코르동 블루(Le Cordon Bleu)에서 정식 디그리(degree) 과정을 마쳤다. 이 때문에 그녀는 요리와 관련해 가장 많은 섭외를 받는 연예인으로 유명하다. 뿐만 아니라 중국어, 일본어, 영어 등 외국어도 능통하다.
다재다능한 재주를 지녔기에 “다시 태어난다면 어떤 직업을 갖길 원하나?”라고 물었더니 그녀는 “골프를 아주 잘 치는 가수로 태어나고 싶다”고 말한다. 가수가 천직이라는 말.
솔직히 말해 한량 이봉규도 다시 태어나면 평론가보다는 가수가 되고 싶다. 그만큼 가수라는 직업은 참 매력적이다.
가수로서 진미령은 스스로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만족한다. 그런 점에서는 참으로 복 받은 여인이다. 하느님은 공평해서 모든 걸 다 주지 않는가보다. 본인은 그 나이에 혼자 살아도 행복하다고 주장하지만(나의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완벽한 부부생활을 즐기고 있는 이봉규가 보기에는 진미령이 다소 외롭게 보인다. 다재다능한 재주에 가수로서도 성공해 만족스러운데 거기에 완벽한 부부생활까지 누린다면 시샘을 받을 수도 있다. 그래서 하느님이 진미령에게 사랑의 여백만은 남겨두신 걸까? 아니면 조만간 그 여백을 채워주실까? 누군가 어렵다면 주머니 털어서 다 주고 재능기부를 하도 많이 해서 ‘진 봉사’라는 별명을 가진 그녀이기에 후자에 기대를 걸어본다.
5년 전 겨울이었다. 30대 후반으로 접어든 아들의 결혼식 날짜가 정해져서인지 하루하루가 더디게 갔다. 12월 30일에 하는 결혼식 초청장은 다 보낸 상태였다. 사돈댁과의 혼사에 관한 모든 절차와 격식도 예법에 따라 잘 타협이 되었다.
그 해 크리스마스이브에는 가족이 모이는 자리에 예비 신부인 며늘아기도 참석했다. 새 식구가 곧 가족이 됨을 확인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그런데 함께 즐겁게 시간을 잘 보내고 돌아온 그날 밤, 필자에게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밤새 복부 통증에 시달렸던 것이다.
다행히 크리스마스에도 진료를 하는 동네 병원이 있어 진찰을 받았다. 의사는 가벼운 장염쯤으로 여겨 간단한 약만 처방해줬다. 하지만 회복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응급으로 찾아간 큰 병원에서 ‘대장파열’ 확진 판정을 받았다. 의사는 조금만 더 늦었으면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었다면서 수술을 서둘렀다.
갑자기 장 파열이라니 믿기지 않았지만 그보다 더 신경이 쓰인 것은 아들의 결혼식이었다. 혼주가 될 사람이 결혼 날짜를 코앞에 두고 큰 수술에 입원까지 해야 하는 환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인륜지대사인 아들 결혼식을 앞에 두고 벌어진 일이라 상심이 컸다.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할 것을 생각하니 천추의 한이 될 것 같은 죄의식이 밀려왔다.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결혼식장에는 꼭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수술과 입원, 치료를 받는 동안 결혼식 당일이 되었고, 필자는 비장한 각오로 담당 주치의를 찾아가 사정 얘기를 했다. 당연히 외출이 불가하다고 했다. 할 수 없이 최후의 카드를 썼다. 필자가 의사에게 제시한 것은 각서였다. 어떠한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병원 측과 담당 의사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겨우 허락을 받고 휠체어에 의지해 예식장엘 갔다. 아들 결혼식에 참석한 하객들은 휠체어를 타고 나타난 필자의 모습에 깜짝 놀라며 걱정을 했다. 즐거운 잔치 분위기가 되어야 할 결혼식에서 누구보다 아들과 며늘아기에게 미안했다.
필자의 친구들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며칠 전만 해도 인라인을 타고 함께 둘레길을 트레킹하던 사람이 휠체어를 타고 아들 결혼식장에 나타났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구동성으로 “도대체 어찌된 일이야?” 하고 물었다. 필자는 그저 웃기만 했다. 사돈댁에도 죄송스러워 몸 둘 바를 몰랐다. 훗날 며늘아기를 통해 들은 얘기이지만 “그만하시길 다행이다”라고들 했단다.
옛날엔 새 식구가 들어와 우환이 생기면 불행을 예고하는 것이라는 속설이 있었다. 아마도 사돈댁에서는 혹여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걱정을 한 듯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새 식구가 잘 들어와 더 나쁜 상황으로 가지 않고 수술도 잘되었다고 입을 모아 얘기했다.
필자가 수술한 다음 해에 손주가 태어났고, 아들 식구는 필자 부부와 가까운 곳에서 화목하게 잘 살고 있다. 손주 재롱은 온 집안의 청량제가 되었다. 수술 이후 필자에게는 큰 변화가 찾아왔다. 대장파열의 원인이 술과도 연관이 있다고 해서 그렇게 좋아하던 술을 끊은 것이다. 가족들도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단주였다.
이젠 손주바보 할아버지로 매일매일 즐겁게 지내고 있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상황이었지만 이렇게 웃으며 말할 수 있으니 시간이 흐르긴 흐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