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고화 전시장에서 ‘이 잡는 노승’이란 제목의 그림 앞에 섰다. 조선시대 후기에 관아재(觀我齋) 또는 종포(宗圃)라는 호를 쓰던 조영석(趙榮祏, 1686~1761)이 그렸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지만, 어딘지 ‘기지(humor)’가 전해지는 작품이 아닌가 싶어 한동안 눈을 뗄 수 없었다.
특히 피부과를 전공한 필자의 머릿속엔 여러 가지 기억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한국전쟁을 전후해 ‘행길’을 지나는 사람들은 남녀노소 예외 없이 누구나 ‘하얀 바람 폭탄’을 옷 속으로 쏘아대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장발의 숙녀와 신사도 예외 없이 흰 가루를 머리에 뒤집어썼다. 이름하여 ‘DDT 소독 세례’가 그것이다. 바로 ‘이’를 박멸하기 위함이었다. 그런가 하면 거리의 걸인들이 햇볕 잘 드는 곳에 앉아 옷을 벗고 ‘이’를 잡아 손톱으로 죽이던 모습도 떠올랐다. 어려웠던 시절의 씁쓸한 기억이다.
이처럼 당시에는 DDT가 ‘이’ 따위의 해충을 박멸하는 살충제로만 여겼는데, 의대생 시절 이것이 여러 농약의 형태로 광범하게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연구자에게 1948년 노벨의학상을 안긴 이 발명품은 훗날 생태계를 교란시키는 ‘반(反)환경 제품’일 뿐만 아니라 무서운 ‘발암 물질’로 밝혀졌다. ‘과학의 진리’는 오래가지 못한다는 속설을 입증한 사례다.
필자는 조영석의 ‘이를 잡는 노승’을 보면서 아날로그 시대의 장점을 되새겨본다. 그림 옆에는 행서체로 다음과 같은 발문(跋文)이 있다.
“지금 우거진 편백나무[蒼檜] 아래서 흰 가사를 풀어헤치고 이를 잡는 사람은 어쩌면 선가삼매(禪家三昧)의 경지에 들어 염주 알 세는 일과 같지 않겠는가.”
노승이 ‘이’를 죽이지 않고 ‘털어’내기 위해 손가락을 가볍게 움직이는 모습에서, ‘이’조차도 ‘살생’하지 않겠다는 메시지가 전해져 마음이 짠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