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년 전 육군 소위로 임관했던 동기들이 성삼재에서 뭉쳤다. 대부분은 연고지가 서울이었지만 대구와 구미에서도 각각 한 명씩 합류했다. 총 13명의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곧 성삼재를 들머리로 지리산 종주 등반이 시작됐다. 전날, 서울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구례역에 내린 시간은 새벽 3시 15분경. 구례버스터미널에서 성삼재까지는 버스로 올라갔다. 성삼재에 올라서자 세찬 바람이 불었다. 갑자기 한기가 몰려왔다. 그때 대구에서 온 동기가 따끈한 커피와 간식거리를 내놓았다. 칼바람 속에서 마시는 커피 한 잔은 그야말로 감동이었다.
성삼재에서 만난 13인의 용사들
노고단(1507m)은 천왕봉, 반야봉과 함께 지리산의 3대 주봉으로 손꼽힌다. 새벽을 깨우는 새소리와 오락가락하는 구름이 동기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가파른 돌계단과 우거진 숲을 헤치며 가다 보니 현역 시절 펼치던 특수작전이 떠올랐다. 장마가 시작되는 한여름에 무모하게 시작한 종주였지만, 모두의 간절한 바람 덕분인지 날씨는 최상이었다. 가끔 햇볕을 가려주는 구름까지 있어 걷기에도 좋았다.
그러나 일행들은 얼마 안 있어 끝없는 오르막과 내리막길에 서서히 지쳐갔다. 점점 거칠어지는 숨소리는 천둥소리처럼 들렸다. 3박 4일간 먹고 마실 것들로 꽉 채운 배낭 무게가 덜컥 겁이 났다.
다리에 힘이 빠져갈 무렵 13인의 용사들은 삼도봉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해발 1501m의 삼도봉은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도의 경계를 이루는 지점이다. 배낭을 풀고 서너 명씩 편성된 조별로 식사를 준비했다. 우리 조는 ‘핫쿡’이라는 비상식량을 준비해갔다. 군대에서나 먹어봄직한 일종의 전투식량인 셈인데, 발열체에 찬물을 부으면 100℃ 이상의 고온 증기가 발생하면서 물이 뜨거워지고, 가공된 봉지쌀에 이 물을 부으면 밥이 된다. 그런데 우리는 사용법을 자세히 읽어보지도 않고 찬물을 덜컥 쌀에 부어놓고 기다렸다. 한참이 돼도 소식이 없어 들여다보니 그 모양이었다. 마주 보고 웃을 수밖에. 어쨌거나 밥도 아니고 죽도 아닌 점심을 먹고 다시 이동을 했다.
까마득하게 보이는 토끼봉을 넘고 명선봉을 굽이굽이 돌아야만 연하천 대피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발바닥이 화끈거리고 어깨는 말 그대로 천근만근이었다. 직업군인 시절에 메고 달리던 배낭의 무게는 이제 버거웠다. 그 이유는 세월 탓이겠지만 마음은 이 여정을 반드시 완수해내리라는 굳은 결의에 가득 차 있었다. 오후가 되니 점차 하늘이 맑아지고 멀리 보이던 봉우리들이 얼핏얼핏 시야로 들어왔다. 봉우리 사이로 펼쳐진 운해(雲海)는 장관이었다.
첫 번째 숙소, 연하천 대피소
천신만고 끝에 연하천 대피소에 도착했다. 젖은 솜처럼 무거워진 몸과 하중을 견디지 못한 발이 화끈거리고 무릎도 아팠지만 대피소에 도착했다는 기쁨이 더 컸다. 부지런히 쌀을 씻어 안치고 합동으로 반찬을 준비했다. 요즘은 참 편리한 세상. 인스턴트 북엇국은 뜨거운 물만 넣으면 맛있는 국으로 변했고 볶은 김치에 참치를 넣어 끓이니 칼칼한 김치찌개가 금세 탄생했다. 각자 가져온 반찬과 먹거리들은 칠첩반상 부럽지 않았다. 단백질 보충하자며 고기까지 굽자 일행들이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운다.
연하천 대피소는 최근 리모델링을 해서 그런지 겉모양도 예뻤고 내부도 많이 개선됐다. 여장을 풀고 뻐근한 몸을 뉘었으나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창밖으로 빗방울 소리가 들려왔다. ‘아! 장마가 시작되려나?’ 내일 아침엔 비가 멎어주기를 기도하며 꿈나라로 빠져들었다.
밤새 내리던 비는 아침이 되자 뚝 그쳤다. 지리산 새벽을 깨우는 새소리를 녹음한다고 일찍부터 일어나 설쳐댔다. 아침을 간단히 먹은 뒤 다시 배낭을 멨다. 그런데 무게가 여전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에서는 쓰레기를 버릴 수 없다. 먹은 만큼 발생한 쓰레기를 다시 배낭에 넣으니 부피도 거의 그대로다. 걱정했던 몸과 다리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시련 속에서 맞이한 천왕봉 일출
너럭바위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오르면 또 나타나는 봉우리를 돌아가는데 몸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온몸에 식은땀이 나고 어질어질했다. 옆 사람에게 누가 될까봐 말도 못하고 견디며 걸어가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사무총장에게 소화제를 청해 복용했다. 그런데도 나아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서서히 행렬 뒤로 처지기 시작했다. 땀이 비 오듯 흘러 잠시 앉아 쉬는데 동기가 소금을 건네며 먹어보라고 했다. 하지만 먹자마자 모든 것을 토하고 말았다. 그때부터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다. 벽소령 대피소를 지나 세석산장까지 가는 길은 험하고 멀었다. 기운이 없어도 무엇 하나 넘길 수 없었다. 한 번 고장 난 속은 모든 음식을 거부했다. 속에서 불이 난 듯 갈증이 일어나 찬물만 들이켰다. 먹은 물까지 다 토해내 기운이 다 떨어져 갈 무렵 드디어 세석산장에 도착했다. 동기들이 점심을 준비해서 먹을 때 양해를 구하고 잠시 실내에 들어가 누웠다.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추웠다. ‘아! 지리산 종주는 여기서 끝인가보다’ 했다. “조금이라도 뭘 넘겨야 할 텐데” 하며 걱정하는 동기들의 시선도 부담스러웠다. 꼭 종주하고 말겠다는 신념과 일행들에게 피해를 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수시로 충돌했다.
둘째 날, 배낭 속 물건을 나누어 지겠다는 동기들의 호의를 마다하고 배낭을 다시 멘 뒤 장터목으로 향했다. 장터목에 도착해 물 한 모금 넘기지 못한 채 누워 있으니 일행이 북엇국이라도 먹으라며 권했다. 지리산 종주의 마지막 코스인 천왕봉을 올라야 하는 여정이 남아 있어 기운을 차리려면 억지로라도 먹어야 했다.
다음 날 새벽 2시 30분. 여기저기서 부스럭대며 배낭 꾸리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일어나 어둠 속에서 배낭을 찾았다. 헤드랜턴을 준비해왔는데, 막상 쓰려고 보니 배터리가 다 방전되어 쓰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할 수 없이 일행의 도움을 받았다. 새벽 산행인데도 가파른 돌계단을 연속으로 올라야 했다. 산을 오르기 전, 동기가 건네준 홍삼진액을 마시고 나니 그런대로 힘이 났다. 깎아지른 절벽을 한 시간 남짓 올랐을까? 드디어 통천문이 보였다. “아, 이제 천왕봉에 다 왔구나” 하고 안내 표지판을 보니 아직 400여 m가 남았다. 희끄무레하게 동이 터오는 산 아래 쪽으로 아련한 불빛이 보였다. 진주시였다. 오락가락하던 구름은 이제 산 중턱으로 밀려나 푹신한 솜이불을 깔았다. 쏟아지는 별빛이 가슴을 뻥 뚫어줬다.
멀리 운해 위로 펼쳐진 하늘 색깔이 변하기 시작했다. 천왕봉으로 몰려오는 바람이 살을 에듯 파고들었다. 준비해간 패딩을 황급히 꺼내 입었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동쪽 하늘 운해 위로 붉은 손톱 모양의 해가 살짝 걸쳐지자 모두가 “와!” 하며 탄성을 질렀다. 솟아오르는 해의 모습은 정말 신비로웠다.
3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천왕봉 일출을 보고 있자니 그동안 힘들었던 여정은 눈 녹듯 사라져버리고 감동만 밀려왔다. 장엄하게 솟아오르는 태양을 보고 있자니 “45년 전 동기들과 함께할 수 있어서 감사하고, 힘든 상황 극복하고 여기 서 있게 해줘서 감사합니다”라는 기도가 저절로 나왔다. 가족과 건강하게 열심히 잘 살아준 나 자신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법계사 스님들
천왕봉 일출의 감동을 뒤로하고 하산하기 시작했다. 다리가 아파 진통제까지 복용하면서 올라간 동기는 너무 고통스러워했다. 나는 서서히 원기를 회복해갔다. 로터리 대피소 쪽으로 내려오다 법계사 일주문과 마주했다. 지리산 천왕봉 아래 자리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해발 1450m)에 위치한 법계사는 544년(신라 진흥왕 5년)에 인도에서 온 고승 연기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면서 창건한 적멸보궁 도량이다. 법계사를 돌아보다 만난 스님 두 분은 뜰에서 열심히 풀을 뜯고 있었다. 그런데 모두 겨울에나 신을 법한 털신을 신고 있다. “스님, 어찌하여 한여름에 털신을 신고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여기서는 이 신발이 딱 맞습니다. 여름이어도 아침저녁 기온은 초겨울과 비슷하니까요” 고개를 끄덕이다 일주문 밑에서 일본인이 지리산과 법계사의 혈맥을 누르려 박아둔 쇠말뚝을 봤다. 이 깊은 곳까지 간교한 음모를 뻗쳤다니… 충격적이었다.
구례에서 출발한 지리산 종주는 천왕봉에서 정점을 찍고 경남 함안군 대산면 중산리에서 막을 내렸다. 3박 4일간의 짧지 않은 여정 속에서 35㎞의 산행을 완주했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랐다. 지치고 힘들 때 옆에서 지켜준 동기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종주였으리라. 변함없는 배려와 우정이 고맙다. 육십 고개를 넘어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도전한 지리산 종주 등반. 내 삶에서 잊히지 않을 이 길은 남아 있는 또 다른 인생 여정에 이정표가 될 것이다.
저무는 놀빛 앞에선 허허롭다. 서산 너머로 사라진 해는 이제 어느 숙소를 찾아가는가. 인생 황혼에 접어든 사람은 어디로 가나. 만족은 없고 갈증은 자글거린다. 요즘 말로 ‘심쿵’은 멀고, 딱딱한 가슴에 먼지만 폴폴 날린다. 이건 겁나게 먹은 나이에 보답하는 정경이 아니다. 어이하나. ‘나, 물처럼 살래! 흐르는 물이 돌부리에 걸리거나 진땀 빼는 법이 있던가, 물이 답이자 선생이다!’ 문순우(73) 화백은 그리 생각한다. “너, 나를 물로 보니?”라 할 때의 그 물이다. 옳다구나, 가급적 만만하게 살자는 얘기일 게다. 그게 잘 사는 길이라는 소식이다. 노자가 설한 ‘상선약수(上善若水)’의 그 물이니 문순우 기자, 아니 문순우 도사가 취재한 ‘도(道) 뉴스’일 수 있다.
못 믿을 게 도인이다. 나는 그렇게 본다. 그러하니 문순우를 도사로 읽는 건 결례이거니와, 그는 ‘도’라는 거룩한 단어 자체를 아예 입에 올리지 않는다. 그는 그저 물이 좋아 물을 닮고자 한다. 물처럼 거침없이 흘러가는 노경(老境)을 선망한다. 그렇기에 나는 그를 물로 봐야 한다. 그게 예의에 맞다. 이 물은 오늘 숲속의 잠잠한 초록호수처럼 평온하다.
“나 요즘 편안하거든. 만족스럽지 않은 게 하나도 없다고. 여기에서 더 바랄 게 없는 것이에요.”
문순우의 올해 나이 일흔셋. 이미 볼 것, 못 볼 것 다 본 연치(年齒). 이젠 귀신조차 바라보일 시절이다. 그러나 그가 요새 주로 뚫어지게 바라보는 건 캔버스다. 죽자사자 그리는 것 같다. 창작이란 방울방울 피를 뿜는 일. 흔히 산고(産苦)에 견준다. 이 힘든 일을 왜 용을 쓰고 하나, 싶지만 문순우는 힘 안 들이고 대꾸한다.
“힘은 무슨 힘? 영감(靈感)이 나를 데려가는 것을.”
‘영감’이라는 물건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디에서 후루룩 내려오는지 난 모르겠다. 그러나 매사를 힘들이지 않고 시원하게 해치우는 문순우의 내공이랄까, 그런 게 영감님을 모셔다주는 모양이다.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지만, 문순우는 그림만 그리진 않는다. 그는 사진으로 예술에 입문했다. 도예도 주 종목이다. 목수이자 오디오 평론가이기도 하다. 와인과 재즈에 통달한 전문가다. 아마도 둘째가라면 서러워 남몰래 눈물을 훔칠 요리의 달인이기도 하다. 이 기똥찬 다재를 일컬어 ‘전방위 예술가’라 한다. 어찌 보자면 이도 저도 아니다. 찰거머리처럼 들러붙어 하나를 들입다 파더라도 도로아미타불에 그치기 쉬운 게 예술이다. 하나에 쉬 질리거나 옹골차게 돋우지 못해 여럿을 동시에 신나게 파 젖히는가? 딴엔 그게 자연스럽다. 물에 무슨 경계가 있던가. 열에 열 골 물이 하나로 통하고 모이는 게 물의 생태 아니던가.
나부터 사랑하기
문순우가 점심 요리를 한다. 아내 박미광(64)이 조수로 나서 묵은 김치를 물에 헹궈 숭숭 잘게 썬다. 그 사이 그는 양파와 토마토 등 갖가지 재료를 올리브유에 지지고 볶아 소스를 만들고 국수를 삶는다. 이름은 묵은지 파스타. 작은 꽃송이와 향신채소 잎 두어 개를 파스타 위에 살짝 얹고 요리 끝! 그러나 진정한 마무리는 아니다. 촛불을 켜고 글라스에 레드와인을 채우고서야 식사가 시작되니까. 나는 한낮의 식탁에서 제 몸을 사르는 촛불에 황송하다. 생일 밥상을 받은 기분이다. 촛불 보시를 한 이여, 복되도다.
“웬 촛불이냐고? 이게 격(格)이라는 것이지. 우린 항상 촛불을 켜고 식사를 해요. 라면을 먹더라도 초를 켠다고. 하하핫. 이왕이면 소소한 일상이더라도 축제처럼 사는 게 좋지 않겠어요? 내가 나를 기쁘게 하기, 내가 나를 소중하게 대하기, 내가 나부터 사랑하기, 그런 게 돼야 남을 즐겁게 할 수 있지 않겠어? 그게 생활의 격이라 보는 것이지.”
“요리는 언제 배우셨지?”
“마흔 살 넘어 사진 공부를 위해 파리에서 유학했는데, 그때 요리를 배웠어요. 내겐 특이한 성향이 하나 있어요. 왕성한 호기심, 그거! 중학생 땐 전축에 호기심이 불붙어 진공관식 앰프를 직접 만들었다고. 남들은 어떻게 사나, 그런 호기심을 누를 길 없어 유목민처럼 평생 곳곳을 떠돌기도 했어요. 파리 유학 시절엔 프랑스 요리에 호기심이 들끓더라고. 그 무엇보다 파리의 살롱 문화에 반해버렸고.”
“궁정과 귀족의 저택을 무대로 성행한 프랑스의 사교 모임, 그게 살롱의 유래죠? 사르트르나 피카소가 즐겨 드나들었던 몽마르트의 카페들이 그 후신일 테고.”
“한마디로 문화 사랑방이라 해야겠지. 프랑스 문화의 기저, 단순히 예술가들의 집합소가 아니라 논쟁과 소통이 다반사로 벌어져 당대 문화와 예술을 주도해나간 공간, 다종다양한 보헤미안들이 몰려들어 생을 즐긴 아지트. 꼭 필요한 그게 한국엔 드물다는 걸 알고 귀국하자마자 살롱을 차렸어요. 재즈 클럽 ‘라 끌레’라고 삼청동에 있었다고. 너무도 빨리 망하고 말았지만.(웃음)”
나에겐 삼사 년 전 문순우의 거처에서 한나절을 놀았던 추억이 있다. 당시 그의 집은 시골 숲속에 있었다. 그의 집이랄 것도 없다. 그는 돈이라는 게 당최 없다. 남의 헌털뱅이 대형 창고를 빌려 집으로 개조해 부부가 살았다. 그게 집이라고 할 수도 없다. 오만가지 진기한 사물들이 절묘한 미학으로 어울린 예술적 파빌리온. 작업실과 와인 바와 집채만 한 오디오 장비가 혼융된 그 창고 건물은 그가 그토록 높이 평가하는 살롱 용도로 쓰였다. 수많은 예술 동네 종족들이 물방개처럼 부산히 드나들었다.
현재 그의 거처는 안성시 외곽 대로변에 있다. 큼직한 신축 건물에 산다. ‘제네시스 미술관’이라 쓴 손바닥만 한 팻말이 붙어 있다. 이 집도 그의 것이 아니다. 갸륵한 후배들이 지어 내준 건물이다. 내부는 전에 살았던 창고 건물 풍경과 거의 이하 동문이다. 고스란히 옮겨 적절히 반죽해 치장했다. 별개의 사물과 사물들이 뫼비우스 띠처럼 이어져 공감각적 코러스를 자아낸다. 오디오를 켜면 그의 귀는 칡넝쿨처럼 뻗어 선율을 빨아들일 게다. 와인 병이 즐비하니 취하고 싶을 때 취할 테지. 이 집의 모티브 역시 살롱이다. 사적으로는 미술 작업실이고 공적으로는 재즈 클럽이다. 그는 재즈에 홀려 산다. 재즈의 무엇에 심취하지?
“재즈 가수 빌리 홀리데이 얘길 해볼까. 그녀의 대표곡 ‘이상한 과일(strange fruit)’은 백인 인종주의자들에게 살해된 흑인들의 억울함과 슬픔을 노래했어요. 자유와 해방, 그걸 노래로 외쳤다고. 그게 재즈 정신이에요. 재즈를 듣다가 인생이 변한 사람도 있는 걸 보면, 재즈란 고도의 매혹적 예술이겠고.”
“이곳에서 매월 한 차례씩 재즈 공연이 펼쳐진다죠? 재즈 전도사로 나선 거예요?”
“한국의 암 발생률이 세계적으로 최고 수준이라더군.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난 문화의 열악함에도 원인이 있다고 봐. 예술이란 어디에 쓰이느냐, 남들에게 이바지하는 거, 즉 사회적 공헌에 목적이 있다고 난 봐요. 내 그림도, 재즈 공연 기획도 문화 토양을 비옥하게 하는 데에 일조하길 바라며 하는 짓들이지. 공연 때 놀러오라고. 1세대 재즈 밴드를 비롯해 국내 최고 수준의 재즈 뮤지션들이 오거든.”
“비쌀 텐데, 개런티!”
“기름값밖에 못 주지만 부르면 다들 기꺼이 달려와요. 자유로운 영혼들이거든. 게다가 내가 일찍이 한국 재즈 발전에 기여한 바가 있어서.”
집문서 없어도 잘 산다
인생이란 희로애락을 다탄두로 매단 럭비공을 닮았다. 문순우의 삶이 그걸 알게 한다. 젊은 날의 그는 날품팔이나 구두닦이로 밥을 벌며 세상이라는 정글을 배웠다. 공수부대원으로 3년간 월남전에 참전하기도 했다. 가진 거라곤 돈뿐이던 시절도 있었다지. 디자인 분야 사업을 해 17명의 직원들을 거느렸고, 스포츠카를 몰았더란다. 그러다 회의가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돈에 덜미 잡힌 삶이 원숭이를 껴안고 블루스를 추는 것처럼 요상하고 우스웠던 모양이다. 해서, 사업을 접었다. 돈벌이의 노예로 사느니 천성인 방랑벽을 고이 살려 유목민으로 살자, 늦깎이로나마 예술과 한판 붙어보자, 그런 작심을 야무지게 하고 프랑스 유학에 나섰던 것. 이후 오늘날까지 예술이라는 참호 속에 들어앉아 세상을 겨눈다.
돌아다닌 세상, 겪은 세사가 많아 일화도 숱하다. 누적된 연기(緣起) 속에서 명멸한 기억들…. 아프기론 월남전에서 목도한 참상이다. 곱살하기론 걸레스님 중광의 해맑은 심혼이 남긴 잔상으로, 일테면 그건 문순우가 보유한 정신적 체력을 북돋운 한 가지 양분이었던 것 같다. 들어볼까.
“언젠가 용산역 앞에서 어느 스님이 건달들에게 호되게 당하고 있더라고. 그걸 내가 뛰어들어 수습했어요. 알고 보니 중광 스님이더라고. 묘한 인연이었지만 이후 가족처럼 지냈지. 내 삶으로 육박해온 가장 청명한 성좌였다 할까. 때로 파격의 괴물이었으나 근본은 순진무구의 화신이었어요.”
“사람이 새벽이슬도 아닌 것을, 순진무구를 유지하며 이 난잡한 속세를 견딜 수 있을까요? 때 묻히고 살 수밖에 없는 게 사람이지 않나?”
“그렇기에 용케도 순수한 사람들이 그립고 좋고 사랑스러운 게 아니겠어? 이 순수란 증류수와도 같은 무균 상태가 아니라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품성과 실천을 말하는 것이라고.”
“당신 역시 봄바람처럼 따사로워 인간적이지만, 일면 자학적이기도 해요. 그 독한 파이프담배 아니면 시가만을 피우다니, 그거 자학 아닌가?(웃음)”
“애연가 등소평은 아흔네 살까지 살다 간 것을.(웃음) 그가 말했지. 흡연은 젊은이에겐 낭만을, 늙은이에겐 위엄을 부여한다고. 와인은 또 얼마나 좋은가. 내가 아
술타령으로 죽을 쑨 인생이 많지만, 술이 건진 고통과, 술이 익힌 시와 노래는 또 얼마나 많은가. 그는 와인과 노닐어 멋과 낭만을, 작업의 효율을 구가하는 것 같다. 버선목이 아니라서 문순우의 속을 뒤집어볼 순 없지만, 그의 내부에도 고독과 불안이 고여 있을 테지. 그 어찌할 수 없는 생의 우수를 술과 음악으로, 또는 창작으로 청소하길 능란하게 하는 사람. 해서, 태연하고 평온하게 노년을 영위하는 사람. 그게 문순우이며, 이런 그에게 부족한 정도가 아니라 전혀 없는 건 돈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우리가 모두 그 앞에서 절을 하는 물신(物神)의 가호를 받지 못한 채로 영일(寧日)을 누리다니. 늙어서도, 심지어 죽어가면서도 돈이라는 감옥에 갇히기 십상인 게 삶이지만, 그는 감옥 밖에서 말짱하다. 비결이 뭘까? 그를 물로 보면 답이 나온다. 어디든 흘러가 채워주는 물! 목마른 자에게 흘러들어 한 잔의 샘물이 되는 삶! 그는 그런 지향으로 살아왔다는 게 아닌가. 그 결과 집문서는 없으나 사람문서를 쥐게 됐다.
“나를 부르주아라 오해하기 십상이지. 시가에 와인에, 고급 음악에, 모든 호사를 누리는 걸로 보일 테니까. 그러나 난 가진 게 없어요. 옷가지도 30년째 입는 것들이 대부분이라고. 작품 재료도 모두 폐품을 활용한다고. 전화기도 오래된 폴더 폰이야. 식재료도 텃밭에서 손수 길러 쓰고 말이지. 딱히 잡기라는 것도 없어요. 돈 들어갈 게 뭐란 말인가.”
“날마다 한두 병씩 마시는 와인은 어디서 오죠?”
“작품이 팔리면 와인부터 비축하지만, 작품이 팔리는 일은 드물지. 그걸 잘 아는 제자나 후배들이 와인이며 시가며, 심지어 거처까지 마련해주더라고. 차후 ‘문순우 기념관’을 만들겠다고 하더군. 아아, 내가 헛되이 살진 않았구나. 그런 생각 자주하는 것이여.”
“반대급부 없는 도네이션은 없는 법. 사람들에게 무엇을 주었기에 그토록 받으시지?”
“좌우명을 말해볼까? ‘남을 대하기를 나를 대하듯이 하자.’ 이기심을 버리는 게 자유롭게 사는 지름길이라 여기며 살았어요. 주변과 타인을 채우는 샘물로 살아야겠다, 언제 어디서든 남을 소중하게 아끼면 그게 메아리로 돌아온다, 그게 나를 채우는 길이다, 그런 신념을 잊지 않고 실천했어. 사실, 우리는 모두 빚쟁이 아닐까? 남들에게, 세상에게 신세지지 않고 존재할 수 있던가? 그렇다면 날마다 빚을 갚는다는 심정으로 사는 게 옳지 않나?”
이 악물고 살 거 없다, 계산 없는 물로 돌아가 세상 빚을 갚으면 빛난다! 그게 문순우의 비결이다. 윽! 난 오늘 한 방 맞았다. 허울 좋은 처신과는 격이 다른 고수(高手)의 이타(利他), 그 실천적 뉴스에.
도심의 오래된 상가나 공장, 창고 건물을 리노베이션해 새로운 공간으로 만드는 ‘구도심 재생 사업’이 성공한 사례가 여럿 있다.
국내의 경우 인천시의 아트 플랫폼이 대표적이다. 구한말 쌀, 소금 등을 보관하는 해운사의 창고로 사용되다가 이후 줄곧 폐허로 남아있던 이 곳이 2009년에 복합 문화예술공간으로 새롭게 태어나 관광 명소가 되었다.
일본 홋카이도의 경우에는 오타루, 하코다테에 있는 창고 건물들을 상업 시설로 변화시켜 ‘오타루 운하’ ‘베이 에어리어’라는 이름을 붙이고 수많은 관광객을 끌어모으고 있다.
조지아 트빌리시의 경우에는 시내에 있는 봉제 공장을 호스텔 숙소로 개조해 관광객들이 묵고 싶어 하는 명소로 만들었다.
위 사례들처럼 고유의 상징을 잃지 않은 채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기 위해 변화를 시도 중인 서울의 낙원상가에 갔다.
낙원 악기 상가 4층 ‘아트라운지’에서 열리는 ‘서울시 교육청’과 ‘우리들의 낙원상가’, ‘아름다운 재단’이 공동으로 주최하는 ‘악기 나눔 행사’. 올해 2년째인 이 행사는 각 가정에서 안 쓰거나 고장 난 악기를 기증 받아 낙원상가 악기 상인들이 수리해 어려운 가정의 어린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사업이다.
학생들에게 1인 1악기 교육을 하기 위한 방법일 뿐 아니라 아이들에게는 기부 경험 자체가 좋은 교육의 기회다. 행사 첫해인 2018년에는 900여 점의 악기가 기증되었다. 지난 4월 15일부터 6월 15일까지 진행되고 있는 올해의 경우 기타, 드럼, 피아노, 플루트, 클라리넷 등의 악기가 6월 1일 기준 600여 점 기증되었다.1000여 명의 인원이 참가한 행사는 악기 기증 외에도 악기 관련 퀴즈 풀이, 미션 수행, 악기수사대 이벤트와 초청 가수 공연 등 다채롭게 진행된다.
남은 행사 기간에 악기 기증을 하려면 ‘아름다운 가게’, ‘우리들의 낙원상가’를 방문하여 직접 기증하거나 온라인 신청 후 택배 배송으로 하면 된다.
이날 아이들과 함께 행사에 참여해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베푸는 가정들의 모습에서 더불어 사는 사람들의 진정한 행복을 보았다.
아울러 미래의 낙원상가는 악기, 음악이라는 주제 아래 복합문화의 명소로 재탄생될 것이라는 희망도 보았다. 실버 문화 공간과 ‘아트라운지 멋진 하늘’의 공존에서 구분과 단절이 아닌 통합과 소통이 이루어지는 문화 공간 낙원상가가 그려졌다.
낙원상가를 나와 오른쪽 옆으로 가니 요즘 핫 플레이스라는 ‘익선동 한옥마을’로 들어가는 골목길이 보였다.
어느 땅은 닿는 순간 전혀 다른 행성에 도달한 느낌이 든다. “사람의 손을 타지 않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아이슬란드야말로 이렇게 불러 마땅한 야생의 땅임에 틀림없다. 빙하에서 내려온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고, 온종일 생명체 하나 보이지 않는 텅 빈 도로를 달리다가 잠시 멈춰 선 목장에서 꼬물꼬물 뛰어노는 양떼라도 만나게 되면 새삼 생명의 강인함에 절로 감탄이 터져 나오는 곳. 다시 차를 몰다가 시원하게 내리꽂는 폭포 옆으로 러브마크라도 날리듯 선명한 무지개를 보노라면 살아서 이곳에 닿은 사실만으로도 커다란 축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낯선 행성을 여행하는 최적의 방법
아이슬란드를 여행하는 최적의 방법은 자동차를 빌려 1번 링로드(ring road)를 따라 섬을 둥글게 한 바퀴 도는 것이지만, 시간이 여의치 않다면 일주일 정도의 짧은 시간만으로도 수도 레이캬비크에 숙소를 두고 핵심 여행지가 몰려 있는, 이른바 골든 서클(golden circle)을 편리하게 여행할 수 있다. 겨울엔 많은 눈 때문에 길이 끊기는 일이 잦지만 상대적으로 날씨가 온화한 7~8월에는 링로드 자동차 여행은 물론 다양한 버스 투어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빙하가 떠다니는 요쿨살론(Jokulsarlon)과 간헐천 게이시르(Geysir), 황금폭포라는 의미를 지닌 굴포스(Gullfoss), 폭포 뒤를 트레킹할 수 있는 셀랴란드스포스(Seljalandsfoss), 선명한 무지개를 볼 수 있는 스코가포스(Skogafoss)까지 남서쪽에 주요 명소가 집중되어 있다.
빙하가 떠다니는 신비로운 풍경 요쿨살론
겨울이면 온통 흰색 세상이 되는 아이슬란드는 여름엔 한 번도 세상에 내보인 적 없는 듯 순수한 모습을 드러낸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프로메테우스’, ‘왕좌의 게임’, ‘인터스텔라’ 등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의 배경이 된 아이슬란드는 “지구의 심장부로 통하는 현관”, “신이 세상을 만들기 전에 연습 삼아 만들어본 곳”이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신비함을 자아내는 나라다. 여름인데도 거친 바람과 낮은 온도는 패딩을 입고도 옷깃을 여미게 했다.
검은 모래 해변과 처음 보는 땅들, 붉은 첨탑의 교회들까지 눈에 들어오는 것 하나하나가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하얗다 못해 차라리 푸른빛이 도는 빙하들 사이로 샤프란색 승복을 입은 승려가 유유히 사라져간 요쿨살론은 꿈속인 듯 아련했다. 빙하에서의 의식 중 하나인, 위스키에 빙하 조각을 넣어 마시는 맛은 상상 그 이상으로 짜릿했다. 그래서일까? 영국 시인 위스턴 오든(Wystan Hugh Auden)은 “아주 적은 수의 사람들만이 아이슬란드에 관심을 갖는다. 그 적은 수의 사람들은 매우 열정적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인구수 10만의 힙한 수도, 레이캬비크
총인구 34만 명 중 약 10만 명이 모여 사는 레이캬비크는 예쁜 기념품 가게와 레스토랑, 서점, 레코드 가게가 정갈하게 모여 있는 아티스틱하고 힙한 도시다. 아이슬란드에서 유일하게 도시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레이캬비크조차 한산하기 짝이 없어서 이 나라 말에 ‘북적인다’라는 단어가 있기나 한 건지 궁금할 정도였다. 중세의 성처럼 우뚝 솟은 할그림스키르캬(Hallgrmskirkja) 교회는 레이캬비크의 상징으로 건축물도 아름답지만 전망대에 올라 내려다보는 형형색색의 집과 푸른 바다의 조화로움은 잠시나마 시력이 좋아진 듯한 착각을 하게 만들었다.
하루 종일 쏘다닌 탓에 문득 시장기가 돌아 들어간 현지 음식점 카페 로키(Loki)에서 용기를 내어 이 나라 음식을 먹어보기로 했다. 말린 생선포와 버터 바른 딱딱한 호밀빵, 삭힌 생선요리는 실패한 모험으로 끝났지만 그래도 도전해봤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으며 배고픔을 안고 숙소로 향했다. 레이캬비크의 숙소들은 쾌적함을 자랑하는데
8명이 자는 게스트하우스마저 조용했다. 이곳에선 자는 사람 또는 책 읽는 사람뿐이어서 발걸음 소리가 안 들리도록 걸어야 했다. 교류를 원한다면 로비를 이용하라고 안내 문구가 있었다. 성수기인 여름엔 비싼 물가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 여행자들이 몰려오므로 예약하는 것이 좋다.
천국에 온 듯한 온천 체험, 블루라군
아이슬란드에 왔다면 아무리 비싸도 꼭 가봐야 할 곳이 있다. 신선의 경지를 체험할 수 있다는 야외 온천 블루라군이 그곳이다. 5000㎡에 달하는 이 거대한 야외 온천은 구름인 양 뽀얗게 피어오르는 수증기로 뒤덮여 있어 마치 천국에 온 듯한 환상을 일으키게 했다. 평소 인증 숏을 우습게 여기는 여행자들도 핸드폰과 카메라를 손에 들고 일생일대의 추억을 저장하느라 바쁘다.
발바닥에 닿는 하얀 진흙 실리카 머드는 천연 무기염이 풍부해 피부병에 탁월한 효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온종일 머물러도 지루하지 않을 것 같은 곳에서 마지막 시간을 보내니 추위에 웅크렸던 몸이 새털처럼 가벼워지고 지구의 근원에서 올라오는 야생의 기운까지 듬뿍 받는 듯하다. 돌아오는 길에 검은 하늘 위로 피어오르는 북극광 오로라까지 만난다면 행운은 당신 것임이 틀림없다.
전남 고흥 반도 남쪽 끝자락에 있는 연홍도(連洪島)는 아주 작은 섬이다. 100명 남짓한 주민이 조용히 지키고 있는 이 섬은 섬 전체가 미술관이다.
고흥의 거금도 신양 선착장에서 작은 배를 타고 3분쯤 지나면 연홍도 마을 전경이 눈앞으로 다가온다. 선착장 입구부터 미술 전시회를 알리는 포스터가 기다린다. 그리고 어디든 가고 싶은 쪽으로 갈 수 있도록 친절한 방향 표시가 안내한다.
축구선수 박지성과 왕년의 프로레슬러 김일 선수의 벽화가 초입에 보인다. 이 지역 출신의 유명인 외에도 주민들의 옛 모습이 담긴 흑백사진들이 200여 개의 타일 벽화로 벽면 가득 채워져 있다. 과거와 현재의 사람들이 연결고리가 되어 소통하듯 함께 모여 있는 마을사진관이 따뜻하다.
벽화는 섬마을 곳곳에서 계속 이어진다. 추억의 놀이나 전래동화 그림이 걸음걸음마다 즐겁게 해준다. 모두 떠나고 없는 아이들이 마을 담장에 그림으로 남아있다.
입체적인 야외 조형물들이 바닷가 마을에 잘 어우러져 있고 연홍공방이 있으며 또 어촌마을의 버려지는 재료들이 도처에 작품으로 돼 있다.
동화 속을 거닐듯 마을 골목을 따라가면 우리나라 최초의 섬 미술관인 연홍미술관이 나온다. 아이들이 모두 떠나간 폐교를 리모델링하여 미술관으로 만들었다.
화가 선호남 관장이 2005년 폐교를 만나 마을 주민들과 손을 잡고 섬 속의 섬 미술관으로 거듭나게 한 것이다. 전시회가 계속 이어지고 있고 미술관 앞으로 푸른 바다가 탁 트여 쉼터로도 좋다. 차를 마실 수 있는 갤러리 카페가 있고 미술관 별채엔 숙소가 있어서 이곳에 머물 수도 있다.
세상과 단절된 듯 오디오가 꺼진 듯 조용히 지내고 싶을 때 이렇게 마치 숨어있는 듯한 작은 외딴 섬 여행은 어떨까 싶다.
▷전남 고흥군 금산면 연홍길 49-9
▷고흥 녹동신항 여객선터미널에서 금당행 배편 1일 2회 연홍도 경유(20분 소요)
▷신양 선착장에서는 1일 7회 운항(2~3분 소요)
한국 육상 단거리 최초 아시안게임 금메달, 최초의 아시안게임 2연패, 아시아 육상 최초 유니버시아드대회 메달 수상 등 그의 이름 앞에는 유독 ‘최초’라는 수식어가 많이 붙는다. 1980년대, 육상 불모지인 한국에서 오롯이 두 다리로 최초의 기록들을 세운 장재근(張在槿·58) 서울시청 육상 감독을 만났다.
무관심 속 탄생한 한국 스프린터
장재근은 스스로 자신을 ‘육상계의 깜짝 스타’라고 표현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배구로 운동을 시작했지만, 배구부가 없어지면서 어쩔 수 없이 발을 들이게 된 종목이 육상이었다. 그때의 선택이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을 줄 누가 알았을까. 그는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만 해도 크게 두각을 나타내는 선수가 아니었다고 털어놨다.
“그 당시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 잘하는 선수가 한 명 가면 기량이 떨어지는 선수 한 명이 같이 가는, 일종의 ‘원 플러스 원’ 같은 관행이 있었어요. 그렇게 껴서 간 선수가 저였죠. 제 딴엔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쉽지 않더라고요. 못해서 맞기도 많이 맞았죠.”
3000m 장거리도, 허들도 해봤지만 성적이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결국 마지막 카드로 뽑아 든 게 단거리였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출전한 전국체전에서 200m 3위를 하면서 그는 본격적으로 단거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스프린터로 주목을 받게 된 건 1982년부터다. 그해 뉴델리 아시안게임에 출전한 장재근은 뜻밖의 메달 소식을 전했다. 놀랍게도 한국 최초로 아시안게임 단거리 종목에서 200m 금메달과 100m 은메달을 거머쥔 것이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대회를 며칠 앞두고 메달 유력 후보 이름이 나왔는데 제 이름은 없었어요. 경기를 응원하러 온 사람도 없었고요. 저도 메달을 딸 거라고는 생각 못했죠. 그야말로 ‘우당탕탕’ 하고 보니 제가 메달을 땄더라고요. 한순간에 스타가 됐죠.”
‘최초’라는 단어가 가진 힘은 대단했다. 그의 말처럼 하루아침에 명예와 부, 인기를 모두 얻은 한국 육상계의 깜짝 스타가 됐다. 당시 뛰어난 스포츠 선수만 후원하기로 유명한 스포츠용품 브랜드 ‘나이키’가 그를 선택한 일화는 그가 얼마나 영향력 있는 선수였는지를 잘 보여준 사례다.
“나이키 멤버라는 사실만으로도 자부심이 컸죠. 용품 지원은 물론이고 엄청난 대우를 받았거든요. 해외 투어를 가면 공항에서 숙소까지 데려다주고, 더 큰 대회에 나가면 나이키 멤버만 사용할 수 있는 호텔을 따로 마련해주기도 했죠. 그리고 대회에 나가면 은근히 나이키는 나이키 멤버끼리, 아디다스는 아디다스 멤버끼리 모이는 분위기가 있었어요.(웃음)”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이후에도 그의 기록 행진은 멈추지 않았다. 1985년 고베 유니버시아드대회에선 아시아 선수 최초로 3위를 기록했고, 1985년 자카르타 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에선 200m 한국 신기록을 세웠다. 이뿐만 아니라 이듬해 열린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는 한국 육상 단거리 최초로 아시안게임 2연패에 성공했다.
인생의 큰 깨달음을 얻은 순간
그러나 순탄할 것만 같았던 그의 육상 인생에도 암흑의 시기가 찾아왔다.
“아시안게임 3연패를 목표로 하고 나간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에서 예선전을 뛰는데 직감이 오더라고요. ‘아, 안 되겠구나’ 하고요. 결국 결승에서 7위를 하고 그날 저녁 감독님과 상의도 없이 바로 은퇴선언을 했어요. 주위에서 말렸지만 제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더라고요. 그때만 해도 정말 건방졌어요. 은퇴 후 한전에 입사하고 나니 현실이 보이더군요.”
평생을 트랙에서 보낸 사람에게 회사는 감옥이었다. 큰 고민에 빠져 있던 그에게 때마침 SBS에서 에어로빅 강사 요청 섭외가 들어왔다.
“제 한 달 월급이 50만 원이었는데 출연하면 하루에 10만 원을 준다는 거예요. 그때 든 생각이 ‘그럼 1년만 하고 돈을 모아 유학을 가자. 그리고 골프를 배워서 다시 복귀하자’는 거였어요. 근데 견물생심이라고, 돈이 들어오니까 그만두질 못하겠더라고요. 저 때문에 에어로빅센터는 정말 많이 생겼어요. 그만큼 전 욕을 먹었고요.(웃음) 돈에 미쳐서 옷 홀딱 벗고 저 짓 한다고요.”
유학에 대한 목표 하나로 욕쯤이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순 있었지만 이마저도 어느 순간 한계가 오기 시작했다.
“순전히 돈 때문에 시작한 에어로빅은 더 이상 하기 싫었고, 체육계로 돌아가자니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에 문득 겁이 났어요. 그때 쇼핑호스트 제의가 들어왔죠. 홈쇼핑 방송에서 러닝머신 한 번 뛰니까 또 잘 팔리더라고요. 졸지에 이번엔 물건 파는 놈이 됐죠.”
육상 선수에서 에어로빅 강사로, 그리고 홈쇼핑 판매자로, 웬만한 사람들은 도전할 수 없는 분야에서 손만 대면 대박을 터뜨렸다. 그를 만능 재주꾼이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단했던’ 육상 선수 장재근을 ‘돈에 환장한’ 장재근으로 바꿔 불렀다. 결국 그는 홈쇼핑에서 발을 뗐다. 그 후 한국 육상 국가대표 코치로 자리를 잡는가 싶더니 또 한 번의 고비를 맞는다. IMF가 터지면서 모든 재산을 잃고 빚더미에 앉게 된 것이다.
“토요일 오전까지는 선수촌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고 오후엔 방송국에 가서 홈쇼핑 촬영을 했어요. 밤엔 방송국 지하주차장에서 잠을 자고 그다음 날 새벽에 또 촬영을 했고요. 그렇게 하루도 안 쉬고 2년을 일하면서 빚을 다 갚았어요. 어른들이 그러잖아요, 돈은 쫓아다니면 도망간다고요. 근데 어린 시절의 저는 너무 돈만 바라봤던 것 같아요. 모든 걸 다 내려놓으니까 깨닫게 되더라고요.”
33년 만에 깨진 한국 신기록
2018년, 장재근이 1985년 자카르타 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에서 기록한 200m 20초41 한국 신기록이 0.01초 차이로 무려 33년 만에 깨졌다. 서운할 법도 할 텐데 그는 오히려 홀가분하다는 반응이다.
“몇 년 못 가서 깨졌으면 섭섭했을 텐데 30년 넘게 가지고 있었으면 오래 해먹은 거죠.(웃음) 사실 그날 밤은 잠을 좀 설쳤는데 하루 지나니까 괜찮아지더라고요.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이왕 깨진 기록, 차이라도 크게 났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점이죠.”
30년 넘게 기록 방어자로 살아온 장재근. 그는 요즘 도전자로서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며 너무 행복하다고 말한다.
“0.01초를 당기기 위해서 33년이란 시간이 걸렸잖아요. 이 기록이 또 오랫동안 정체될까봐 그게 걱정돼요.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도 20초 초반까지는 계속 선수들끼리 경쟁하고 새로운 기록을 만들어내면 좋겠어요. 물론 제가 지도한 선수가 기록을 깨면 더 바랄게 없겠지요.(웃음)”
그는 마지막으로 초등학교 육상 코치를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아이들에게 큰 성적을 바랄 수 있는 나이가 아니잖아요. 기본기부터 제가 가지고 있는 노하우를 전수해주면서 꿈과 희망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렇게 아이들을 가르치고 점심 먹고, 퇴근하는 길에 헬스장에 가서 운동 좀 하고. 그러면 제 노년 생활이 참 행복하겠단 생각이 들어요.”
파리까지 12시간. 리스본까지 다시 2시간 반. 살던 도시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갈 때 가장 궁금한 것은 언제나 ‘돌아올 때의 나’였다. 알파마 지구의 예약된 숙소로 가는 차 안에서 내다본 차창 밖의 리스본은 어둠이 내려 인적조차 뜸했고 꾸미지 않은 벽에선 ‘낡은 도시’의 냄새가 났다. 생각해보면 살면서 그곳에 가기 딱 좋은 날씨에 딱 맞는 상황, 딱 좋은 사람이 있는 경우란 단 한 번도 없었으며 오직 나를 북돋운 건 단 하나 “갈까? 가자!”라는 두 단어였다.
이쯤 되면 (내 책 제목처럼) ‘여행에 미쳤다’는 표현이 과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디테일이 살아 있는 도시
유럽의 서쪽 끝, 스페인 옆에 붙어 있는 이 작은 나라는 일반적으로 스페인에 왔다가 잠시 스쳐 지나거나 건너뛰기 일쑤다. 그러나 몇 년 전, 세계적으로 히트한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 주인공 제레미 아이언스(그레고리우스)가 자아를 찾아 충동적으로 찾아 나선 리스본의 아름다움은, 언젠가는 제대로 다시 가보고 싶다던 리스본행을 결행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유럽이지만 유럽이 아닌 느낌. 겉멋이라고는 없는 소박한 사람들과 인고의 세월을 겪어낸 초연함은 나로 하여금 이 빈티지한 도시에 빠져들게 했다. 바스쿠 다 가마와 엔리케 왕의 대항해 시대에 세계 최대 제국을 거느리는 영광을 누렸던 이 나라는 서서히 쇠락을 거듭하다가 1755년 리스본 대지진으로 다시 한 번 크나큰 재앙을 겪게 된다.
리스본 인구의 3분의 1이 죽고 건물 대부분이 파괴되는 절망 속에서 1934년부터 이어진 살라자르 독재정권은 순박한 사람들을 괴롭혔으나 마침내 1974년 무혈 카네이션 혁명(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배경)으로 끝을 맺게 된다. 갖은 풍랑을 겪어낸 이들의 표정엔 평온함이 서려 있다.
붉은 테라코타 지붕과 아줄레주 벽화
골목 가득 울려 퍼지는 파두 선율과 포트와인까지 눈과 귀와 입이 호강하는 곳. 아랍 문명이 이베리아 반도에 전해준 가장 아름다운 흔적인 푸른 아줄레주 타일과 위트 넘치는 그라피티 벽화들, 아말리아 로드리게스로 대표되는 파두 음악과 에그타르트, 포트와인에 이르기까지 볼거리, 들을거리, 먹거리가 넘쳐나는 리스본이야말로 눈과 귀와 코가 다 만족스러운 곳이다. 심지어 밟고 다니는 보도블록조차 아름답다. 갖가지 색의 석회석을 일일이 손으로 쪼개어 문양을 만든 칼사다 포르투게사는 오랜 시간에 걸쳐 마모되면서 석양 무렵이면 눈부신 황금빛으로 빛난다. 돌이켜보니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코파카바나 해변이나 마카오의 세나두 광장에서도 비슷한 것을 본 듯하다. 한때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이유다. 이렇게 여행은 어쩔 수 없이 세계사에 대한 이해를 가져다준다.
리스본의 상징 노란색 트램
리스본에는 툭툭에서 페리까지 다양한 교통수단을 경험하는 재미가 있다. 일곱 개의 언덕으로 되어 있는 리스본을 구석구석 걸으며 탐험하는 즐거움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지만 리스본의 상징인 28번 트램을 타보지 않으면 이곳을 제대로 여행했다 할 수 없다. 언제나 줄이 길게 늘어서 있는 28번 트램은 마치 콧대 높은 여인 같다. 한참을 기다리게 하고, 인내심 없는 사람들은 돌아서게 한다. 그래도 북적이는 트램에 올라 얼굴이라도 닿을 듯 건물 안 사람을 스쳐갈 때의 스릴은 이곳이 아니면 경험하기 힘들다. 리스본에서 가장 높은 상 조르제 성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 테주 강과 알파마 지구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포르타스 두 솔 전망대에서 점심을 먹는다. 골목골목 걷는 재미로 가득한 알파마 지구는 아치와 계단, 목재 발코니, 사람들이 사는 모습 하나하나까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과거로의 여행을 선물해준다.
도시 전체가 살아 있는 박물관
대항해 시대의 영광이 남아 있는 벨렝 탑과 제로니무스 수도원, 해양박물관이 있는 벨렝 지구와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의 무덤이 있는 내셔널 판테온은 결코 빼놓아선 안 될 곳이다. 웅장한 돔으로 된 내셔널 판테온에 들어서니 높은 천장 가득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의 파두가 가슴을 파고든다. 국민 시인 페르난두 페소아가 포르투갈의 눈물이라 칭한 테주(타호) 강은 거친 대서양과 이어져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에겐 더없이 좋은 사색의 장소다. 페리로 20분이면 닿을 수 있는 반대편 카샬랴스 지역에서 벌거벗은 듯 온몸을 드러내고 있는 리스본의 전경을 감상해보자.
코메르시우 광장을 울리던 선율과 포트와인
리스보아. 매혹적인 항구. 이름마저도 이토록 사랑스런 도시를 떠나야 하다니 울적해진다. 리스본의 샹젤리제라 불리는 코메르시우 광장에서 마지막으로 이곳 특산물 바칼라우(대구)를 먹으며 첼리스트의 선율에 센티해진다. 자세히 볼수록, 가만히 볼수록 매혹적인 리스본. 와인과 브랜디를 섞어 만들어 달짝지근하지만 알코올 도수가 높은 포트와인은 두어 잔만 마셔도 취기가 돈다. 젊은 시절 최고의 영광을 누리고 이젠 늙고 나이 들었지만, 세상의 풍랑을 주름에 간직한 채 성형하지 않은 아름다움을 지닌 이 도시가 전해주는 묵직한 푸근함에 안겨버린 날들을 오랫동안 그리워할 것이다. 숙소로 가는 길에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주인공이 잠시 쉬던 상 페드루 드 알칸다라 전망대 벤치에 앉아 책 속의 한 구절을 떠올려본다.
“자기 영혼의 떨림을 따르지 않는 자는 불행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어느 곳을 간다고 할 때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간다는 것이다.”
3월의 첫 주말, 삼총사가 계획했던 부산 여행을 떠났다. 한 친구가 아직 KTX를 못 타봤다고 해 교통편은 기차로 정했다. 그런데 올해부터 친구들 모두 초등학교에 입학한 손주를 돌보게 되어 평일 여행은 할 수 없어 주말을 이용해야 했다. 평일엔 KTX가 30% 할인인데 주말이라 그 혜택을 받을 수 없어 아쉬웠다. 부산까지는 5만9800원, 왕복으로는 거의 12만 원이니 좀 비싸긴 했다. 그러나 일반 열차를 타면 대전까지 두 시간, 대구까지 네 시간, 부산까지는 여섯 시간 정도 걸리는데 두 시간 사십 분 만에 도착해 모두들 정말 빠르고 편리한 교통수단임을 실감했다.
1박인 이번 여행의 숙소는 광안대교의 멋진 야경이 한눈에 들어온다는 유명 찜질방이었다. 누군가는 나이 들수록 잠자리가 편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우리는 조금 불편해도 젊은이들이 하는 방법을 따라 해보기로 했다. 찜질방 비용은 12시간 기준으로 1만5000원, 한 시간씩 더 사용할 때마다 1000원이 추가됐다. 시니어는 할인이 되어 1만2000원을 받았다.
인터넷으로 부산 즐기기를 검색해 꼼꼼하게 메모해온 대로 우리는 부산역에 내리자마자 길 건너 돼지국밥집을 찾았다.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음식이 아니지만, 친구들이 일단 부산에 도착하면 꼭 먹어봐야 할 음식이라고 해 따르기로 했다. 유명한 식당이라서 그런지 아침인데도 사람들이 북적였다.
부산역 앞은 큰 공사를 하는 듯 펜스가 쳐져 있었고 좀 어수선해 보였다. 그래도 우리나라 제2의 도시인 만큼 활기가 느껴졌다. 부산시티투어 버스를 이용해 다녀볼까 했지만 말도 다 통하는 국내 여행이니 가고 싶은 곳을 직접 찾아다니는 게 재미있을 것 같아 그렇게 하기로 했다. 먼저 버스를 이용해 15분간 열린다는 영도다리로 향했다. 그 옛날 피난민들이 물밀듯 들어오면서 헤어지면 영도다리에서 만나자 했다는 가슴 아픈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 곳이다.
도로는 물길 따라 깔끔하게 단장돼 있었고 그 길을 따라 내려가니 바로 자갈치시장이 보였다. 서울 올라갈 때 사가지고 갈 것들 구경도 하고 물어물어 국제시장 거리로 접어들었다. 마침 주말이라서 여행을 온 듯한 젊은이들로 넘쳐났다. 영화 ‘국제시장’에 나왔던 꽃분이네 상점도 찾아보고 깡통시장 거리도 돌아보았다. 걷다 보니 용두산공원이 있어 전망대에 올라 화사한 봄꽃을 배경으로 한가롭게 커피도 마셨다.
그다음으로는 해안도로가 아름답다는 영도구의 흰여울마을을 찾았다. 버스에서 내려 까마득히 아래로 난 길을 내려가니 가슴이 탁 트이는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바닷가 간이음식점에서는 해녀가 직접 잡아온 해산물을 팔았다. 돗자리에 앉아 바다를 한가득 눈에 담고 내가 좋아하는 해삼을 실컷 맛보았다. 날씨도 선선하고 좋았다. 긴 시간 동안 해삼을 먹으며 "음, 여행은 바로 이 맛이야!" 하면서 우리는 까르르 웃었다. 저녁 식사는 자갈치시장에서 유명하다는 꼼장어구이 집에서 하기로 했다. 매콤한 양념으로 버무린 꼼장어 구이가 내 입맛엔 별로였는데 부산여행 중 꼭 먹어봐야 할 음식이라 했다.
저녁을 먹은 후에는 숙소인 찜질방을 찾았다. 듣던 대로 바깥 풍경이 매우 근사했다. 온천도 하고 하루 쉬기엔 아주 좋은 곳이었다. 다음 날 아침에는 계획대로 근처에 있는 생대구탕 집에서 식사를 했는데 이 또한 부산 여행의 코스 중 하나라고 한다.
기상청 예보대로 아침부터 비바람이 세게 불었다. 해운대 바닷가를 걸어보고 싶었는데 강풍이 불어 산책하기에 적당하지 않다는 택시기사님 말을 듣고 시내 백화점에 가서 아이스크림과 케이크를 먹으며 놀았다. 서울로 돌아갈 시간이 오후 5시라 우리는 다시 자갈치시장을 찾아 커다란 대합과 각종 해산물, 유명 상표 어묵을 샀다. 그리고 부산에 가면 꼭 먹어봐야 한다는 밀면 집으로 향했다.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선 밀면 집을 찾아 맛본 밀면은 새콤달콤했다.
1박 2일의 짧은 여행 동안 가보고 싶은 곳과 먹고 싶은 음식을 모두 섭렵하며 여행을 완성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우리 삼총사는 앞으로 해외보다 우리나라 곳곳을 둘러보자고 약속했다.
평범한 직장인 출신의 1963년생 정재경이라는 사람이 쓴 책이다. ‘은퇴자로서 제주에서 살아보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2015년 제주도에 내려가 한 달 살기 숙소로 가장 규모가 크다는 자연하우스를 운영하는 사람이다.
은퇴자, 환갑을 앞둔 나이, 제주, 낯선 땅 경작하기, 한 달 살기 등 요즘 시니어가 가장 큰 관심을 보이는 키워드를 다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나도 한때는 제주도에 관심이 많았다. 육지에서 떨어져 있는 섬이라는 묘한 신비감도 있어 신혼여행도 제주도로 갔다. 남한에서 가장 높다는 한라산도 있지만 수많은 오름, 올레길, 바닷가 등 이국적인 분위기가 낭만적인 은퇴 생활을 꿈꾸는 사람들을 유혹하는 곳이다.
아주 내려가 살지는 못하는 형편 때문에 ‘제주도 한 달 살기’는 요즘 인기 여행 품목이 됐다. 지인 중에도 제주도에서 한 달 살고 온 사람이 있다. 몇 년 전 롱 스테이라는 말을 들어보기는 했으나 그때는 동남아, 뉴질랜드 등 그 대상 지역이 외국이었다. 인건비가 싼 동남아에서 살면 서울 생활비 정도로 여러 도우미를 거느리며 왕처럼 살 수 있다고 했다. 또 뉴질랜드로 가면 천혜의 자연 덕분에 매일 골프를 치며 꿈같은 생활을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서울에서 할 일이 많아 한 달씩 자리를 비우기는 무리다. 모임도 많고 멀쩡한 내 집을 한 달씩 비워둔다는 것도 마음에 걸린다. 이런 상황에서 제주 한 달 살기 정도의 롱 스테이는 내게 맞는 조건이다. 그러나 아직도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 혼자 가면 너무 외로울 것 같고 15일 이상 집을 비워본 경우가 없어서다.
이 책은 이런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해 저자가 먼저 겪은 이야기를 해주고 있다. 이 책 말고도 제주도에 대한 여러 서적을 소개했다. 이어도, 강정마을, 제주도 특산물 등 제주도와 관련한 정보도 들어 있다. 정착 과정에 체크할 사항 등도 꼼꼼히 기록되어 있다. 제주도가 아니더라도 은퇴 후 타지에 정착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가이드북이 될 것 같다.
제주도는 그동안 땅값이 너무 올랐다. 관광객들이 몰려오고 2015년 신공항 발표로 가격이 *천정부지로 솟은 것이다. 은퇴 후 노후보장 대책으로 제주도에 투자하기에는 이제 늦었다. 관심을 갖고 몇 년 지켜본 바로는 바람도 많고 *눈비 오는 날도 많아 기상 상황이 좋지 않다. 신혼여행 때 본 날씨 좋은 제주도의 풍광을 기대하면 안 된다. 어쩌면 방구석에 쳐 박혀 좋은 날씨를 기다려야 하는 신세가 될 수도 있다.
저자는 적당한 나이, 가격이 오르기 전의 땅 구입 등 절묘한 타이밍에 제주도에서 인생의 변곡점을 맞이했다. 나는 저자를 따라 하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한다. 인생의 변곡점이라는 심오한 시간 흐름도 깨닫지 못하고 나이가 들어버렸다.
한강 변의 궁전 같은 별장을 가진 친구가 있다. 부럽기는 했지만, 그 별장을 편법으로 사고 유지하기 위해 골머리를 썩는 것을 봤다. 그 친구보다 가끔 놀러갈 수 있는 내 처지가 더 나아 보인다. 인생을 즐기는 방법은 다양하다.
봄이 오면 생각나는 여인이 있다. 문학기행에서 만난 그녀가 한 이야기가 꽤 세월이 흐른 오늘날에도 뚜렷하게 기억난다.
“여성은 여성다워야 한다. 예쁘고 아름답게 보여야 한다. 보이지 않는 속옷에서도 여성의 향내가 나야 한다. 나는 속옷은 세숫비누로 세탁한다. 자신의 아름다움을 스스로 지켜야 한다.”
당시 일흔 살을 넘긴 나이였지만, 음성과 행동이 우아했다. 젊은 시절에는 신세대 여성으로 사교계 모임에 초대를 받곤 했다는 그녀는 여성의 본성과 고고한 성품을 지키려는 마음이 강했다. 그녀는 시인이었고, 동요도 지었고, 시조도 읊었다. 직접 그린 그림을 곁들인 시화집도 여러 권 냈다. 예전에 썼던 자신의 동요를 한 글자도 틀림없이 줄줄 외곤 했다.
한 문학지 동호인들이 함께 떠난 문학기행에서 그녀를 만났는데 벌써 10여 년이 흘렀다. 그날 산속의 숙소 뜰 작은 연못에 핀 수련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 있던 그녀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았다. 카메라 렌즈가 다가가자 그녀는 나비처럼 사뿐히 자세를 취했다. 사진을 인화해 우송했더니 감사의 쪽지와 함께 자작 시집 한 권을 보내줬다. 고운 난을 친 삽화와 함께 온갖 정성을 다해 쓴 헌정 친필 사인에 감동했던 기억이 새롭다.
최근 책장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그 책을 발견했다. 제목은 ‘버섯의 향기’. 100가지 버섯에 대한 각각의 시와 직접 그린 버섯 삽화가 실려 있다. 듣도 보도 못한 버섯 이름이 많았다. 붉은 사슴뿔 버섯, 파상 땅 해파리 버섯, 송편 버섯, 푸른 손등 버섯, 주름안장버섯, 꾀꼬리버섯, 접시 껄껄이그물 버섯, 넓적 콩나물 버섯, 연지버섯, 고무 버섯, 독우산 광대버섯, 아교뿔버섯, 질산무명버섯, 꽃 흰 목이버섯, 치마버섯, 부채 버섯, 주걱 간 버섯, 금 버섯, 장미주걱 목이버섯, 혓바늘 목이버섯, 흰목이 버섯, 화 병무 버섯, 깔때기버섯, 붉은 목이버섯, 참 버섯, 한입버섯, 투구버섯, 노란달걀 버섯, 주발버섯, 독송이, 할미송이, 긴대안장버섯, 말똥버섯, 벚꽃 버섯, 꽃 접시 버섯, 볏짚 버섯 등등.
그 많은 버섯을 관찰해 시를 쓰고 각각의 버섯을 직접 세심하게 그렸다. 그것도 색감을 이용해서 말이다. 한 권의 시집이지만, 그 노력과 정성은 태산을 덮고도 남을 듯싶다. 나뭇등걸이나 오솔길 후미진 곳을 더듬는 버릇이 취미라고 서문에 쓰고 있을 정도로 버섯에 대한 그녀의 호기심은 대단해 보였다. 2007년 8월에 출간된 신순애 제3시화집이다. 강산이 한 번 변한다는 세월이 흘렀다. 그녀는 지금도 공주 같은 미소를 띠며 오솔길에서 버섯을 찾고 있을까. 속옷은 세숫비누로 손수 빤다고 했던 그분에게서는 특별한 향기가 있었다. 나도 그 후로는 속옷을 세숫비누로 빠는 버릇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