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은 사계절 만년설이 있는 산도 아닌데 이름은 ‘설악(雪岳)’이다. 국내에 산은 많아도 이렇게 ‘설자(雪字)’가 붙은 산은 유일하다. 대청(大靑), 공룡능선(恐龍稜線), 용아장성(龍牙長城), 천불동(千佛洞 ) 등 멋진 이름들이 있다. 누가 언제 이토록 멋진 이름들을 붙였을까. 그저 감탄할 뿐이다.
설악산 능선 중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공룡능선으로 향한다. 용대리에서 백담사까지 이어지는 포장도로의 백담사에서 출발해 중청대피소에서 1박한 다음 이튿날 공룡능선을 일주한 뒤 소공원으로 하산하기로 했다.
백담사 경내는 스님들의 동안거로 쥐죽은 듯 고요했다. 오전 11시, 일행은 백담사 마당을 말없이 한 바퀴 돈 뒤 봉정암으로 향했다. 오늘의 목적지는 중청대피소. 백담사에서 중청대피소까지는 약 12km. 해가 지기 전까지 그곳에 도착하는 것이 임무다.
기자는 1년 전 무더웠던 여름날 소공원을 기점으로 공룡능선 일주를 한 적은 있지만 눈 쌓인 공룡능선을 오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서 더욱 기대가 됐고 그만큼 불안했다.
백담사에서 봉정암까지는 약 10km. 오후 3시 봉정암에 도착했다. 백담사에서 영시암을 거쳐 봉정암까지는 불자들 사이에서 유명한 성지순례길이다. 걷다 보면 스페인의 산티아고 트레일에 버금가는 지극한 성정(性情)과 마주할 수 있다. 봉정암으로 이어지는 돌너덜 된비알을 오르는 길에 문득 숙연해졌다. 머리 허옇게 새고 허리는 활처럼 굽은 보살들의 간절한 마음을 떠올리며 지금 이 세상의 고통, 나와 우리의 아픔을 위해 기도했다. 아직까지 절 인심이 살아 있는 까닭에 밥때가 훌쩍 지난 시간이었음에도 일행은 미역국에 밥을 말아 공양했다. 자판기 커피도 무료로 제공하고 있어 불자가 아닌 등산객들도 오며가며 두루 신세를 지는 산방(山房)이 바로 이곳 봉정암이다.
봉정암에서 소청을 지나 중청대피소까지는 1.7km. 소청대피소에서 바라본 설악의 전경은 여전히 할 말을 잃게 했다. 공룡능선을 중심으로 용아장성, 천화대, 울산바위가 비경을 선사했다. 그리고 저 멀리서 멈춘 듯 흐르는 동해의 푸른 물빛.
중청대피소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5시였다. 배낭을 풀고 요깃거리를 챙겨 취사장으로 내려가니 어느덧 해가 다 저물어 있다.
다음 날 아침 7시, 중청대피소에서 빈 몸으로 대청까지 올라갔지만 안타깝게도 일출의 찰나는 잡을 수 없었다. 켜켜이 밀려 있던 안개와 구름이 걷히니 어느새 여명이 온 세상을 데웠다. 흡사 냉동고에 들어 있던 고기처럼 얼어붙은 대청의 비석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서둘러 희운각대피소로 향했다. 그곳에서 아침식사를 할 계획이었다. 스패츠와 아이젠을 차고 새하얀 눈을 저벅저벅 밟으며 길을 냈다. 중청대피소에서 희운각대피소까지는 2.1km. 경사가 제법 있는 내리막이라 특히 더 조심해야 했다. 희운각대피소에 도착했을 때는 9시 30분. 여전히 우리뿐인 취사장에서 라면을 끓여 먹었다.
1년 전 여름의 내 기억 속 공룡능선은 도통 그 거리가 줄어들지 않았다. 능선상 거리는 5km에 불과하지만 신선대, 1275봉, 큰새봉, 나한봉 등 1000m 이상의 봉우리를 오르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과연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눈길이라 걸음에 속도가 붙질 않았다. 일행은 말없이 이동했다. 무너미고개를 넘자 바람은 더 차고 거세졌다. 신선대 위에 서니 천화대 일원이 장관이다. 장군봉, 유선대, 범봉, 세존봉, 마등령이 한 줄로 이어졌다. 그리고 뒤돌아 우리가 올랐던 대청, 중청, 소청 능선을 바라봤다. 저 멀리 외따로 떨어져 솟은 귀때기청봉이 아련하다. 대청 아래로 흐르다가 지금은 하얗게 얼어붙은 죽음의 계곡에 시선이 멈췄다. 우리가 아침에 지났던 희운각대피소와 관련이 있다. 1969년 2월 14일 한국산악회 소속 제1기 에베레스트 원정대가 히말라야 원정을 위해 죽음의 계곡(옛 지명 반내피)에서 등반 훈련 중 눈사태를 당해 전원 10명이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현재 위치에 지어졌다. 대피소 이름이 ‘희운각’인 이유는 희운(喜雲) 최태묵 선생이 ‘이 자리에 산장이 있다면 이러한 사고를 미연에 막을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본인의 사재를 들여 지었기 때문이다.
희운각대피소에서 200m 떨어져 있는 곳에 솟은 무너미고개는 공룡능선의 관문과 같다. 전신재 저 에 따르면 무너미고개는 가야동계곡과 천불동계곡, 그러니까 내설악과 외설악의 분기점인 곳이다. 이름 그대로 물이 넘는 고개[水踰峴]. 물이 전에는 외설악으로 넘어갔는데 지금은 내설악으로 넘어간다고 한다. 무너미에 관한 또 다른 설은 ‘산 너머’의 고어(古語)라는 추측이다. 순우리말로 뫼너머, 메너머, 무너머를 거쳐 무너미로 정착했다는 설. 공룡능선을 기준으로 내설악과 외설악이 갈라지므로 물 넘어, 산 너머 모두 설득력 있는 이야기로 들린다.
“오래전에는 누가 어디서 공룡능선 일주했다 하면 정말 대단하다는 소리 나왔어. 지금은 그 어려움과 명성이 그때 같지는 않지. 그래도 빡세긴 여전히 빡세!”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06년 국지성호우로 설악산에 산사태가 나면서 모든 등산로를 재정비했고, 그 결과 공룡능선에도 난간이나 밧줄 등이 설치돼 산행이 훨씬 수월해진 덕이다.
가까스로 도착한 마등령 삼거리. 이곳에서 오세암을 거쳐 다시 백담사로 내려서는 길, 그리고 비선대를 거쳐 소공원으로 내려서는 길이 나뉘는데 오세암에 이르는 1.4km 구간은 산사태 발생 및 추가붕괴 위험을 이유로 올해 5월 15일까지 통제된다. 시간은 오후 3시, 소공원까지 남은 거리는 6.5km. 배낭 깊숙이 들어 있던 헤드랜턴을 꺼내 바람막이 주머니에 넣고 소공원을 향해 속도를 낸다.
이내가 가득 고인 시골길을 걷노라면, 산비둘기 소리도 베이스로 가라앉는다. 늦사리가 한창인 밭머리에, 부룩소 한 마리 잠자리 따라 뛰놀고, 건듯 바람이 지나가면 잠시 마른 풀 먼지가 일어난다. 소루쟁이 금빛 씨알도 후루루 흩어져 발등을 덮는다. 미루나무 잎에 어느새 가을빛이 스며들어 가지 끝은 설핏 채색이 시작되었다.
이제 산과 들에 가을을 거역하는 것은 그 아무것도 없다.
이내가 걷히고 달이 떠오르면, 풍경은 점멸되고 보랏빛 침잠의 장막 속에 작은 시냇물 소리만 밤을 지새우리. 그래도 소소한 풍경들은 그 잔영(殘影)이 머릿속에 남아 여러 공간에 자국을 남긴다.
화가들은 그 한순간의 풍경을 화폭에 옮기려 한다. 시인들이 가슴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생각을 절제된 언어로 표현하듯, 화가들은 색칠로, 응축된 감성을 풀어낸다. 우리들은 비록 좁은 그들의 화폭에서도 눈 가득 넘실대던 풍경을 떠올리며 기꺼이 그림과 하나가 된다.
이동훈(李東勳, 1903~1984) 화백의 그림 속에서 우리들은 언제나 현재 진행형의 맑고 그윽한 풍경을 만난다. 그는 평북 태천에서 태어나 의주농업학교를 졸업, ‘평북사범학교 강습과’ 수료 후 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한다. 미술 공부는 이미 훨씬 전부터 이루어져, 1928년에 선전(鮮展)에 입선함으로써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1935년에 서울로 이사, 교직에 있으면서 4년간 도다 시게오(遠田運雄, 1891~1955)라는 유명한 일본 화가를 사사(師事)하여 그림 그리기의 확고한 틀을 구축하였다. 1945년에 대전으로 이사해 대전공업학교, 1947년부터 1963년까지 16년간 대전 사범학교, 학교 이름은 충남고등학교로 바뀌었지만 정년퇴임까지 6년간 더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면서 미술문화의 불모지였던 대전지방에 빛나는 미술중흥을 이룩하였다.
1969년부터는 다시 서울의 수도여자사범대학(현 세종대학교)에서 12년간 강의하며 활발한 동인전, 개인전을 통해 진솔한 화업을 이어갔다. 1984년 잔설이 깔린 새벽 산책길에서 낙상, 골절상의 후유증으로 그해 5월 서거하였다. 이듬해 유족들은 유작 171점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하였다. 하여 그의 작품을 수집하기가 어려웠다.
이 그림 는 대구의 동원화랑에서 구입한 것이다. 이 작가의 풍경화 두 점이 있었는데, 돈이 모자라 이 그림만 수집하고 머뭇거리는 사이 다른 한 점은 유명한 도예가가 얼른 가져가버려, 오랫동안 가슴앓이를 해야 했다. 아직도 그 그림 이 눈에 어린다. 한순간의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그 작품을 수집할 기회가 닿지 않는다.
이 그림을 볼 때마다 어린 시절 어머니 손을 잡고 동구 밖으로 걷던 가을날이 아련하다. 이동훈의 그림은 풍경화가 주류이지만 그는 키우던 꽃을 소재로 한 정물 소품도 많이 그렸다. 어쩌면 이 화가의 그림 속에는 숭고한 신앙의 성스러움까지 느끼게 하는 매력이 있다. 역사의 격랑을 겪어오면서도 성실하고 벗어남이 없는 자기 수양이 그대로 화폭에 녹아들었기 때문일 터이다.
대전사범학교 시절의 제자 최종태(崔鍾泰, 1932~ )조각가는 인생 진로의 사표(師表)였다며 늘 존경의 념(念)을 말하였다. “이동훈 선생의 생애야말로 큰 수도자의 삶이었으며, 그림이 깨끗하고 즐겁고, 밝고 튼튼하여 1세대 화가 중 가장 큰 예술가였다.”고 ‘탄생 100주년 기념 이동훈 회고전’ 도록에 쓰고 있다. 많은 제자들이 ‘이동훈 미술상’을 제정하여 해마다 후배 미술가들을 격려하고 있다.
늘봄 전영택(田榮澤, 1894~1968)은 소설가이며 목사로 소설 등으로, 김동인(金東仁, 1900~1951 소설가) 주요한(朱耀翰, 1900~1979 시인)과 우리나라 최초의 문학동인지 를 만들어 문학사에 큰 자취를 남긴 분이다.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는데, 장남 전상범(田相範, 1926~1999)은 서울대 미대 조소과를 졸업한 유명한 조각가로, 차남 전상수(田相秀, 1929~ )는 서울대 미대 회화과를 졸업한 서양화가로 예술인 가족이 되었다.
전상수 화백은 1968년 첫 개인전 이래 22회의 전시회와 구순(九旬)에 가까운 현재도 꾸준히 과슈(gouache 불투명 수채화) 작업을 하고 있는 분이다. 1978년부터 1981년까지 프랑스 몽파르나스(Montparnasse)의 아카데미 드 라 그랑 쇼미에르(Academie de la Grande-Chaumiere)에서 미술 공부를 하며 유럽 풍경을 화폭 가득 담았다.
후배 화가 김정(金正, 1940~ )은 “전상수 화백은 보헤미안처럼 항구와 부두와, 강변의 물결과, 구름과, 숲의 바람과, 산 너머로 한없이 뻗는, 포물선 같은 그리움의 정을 화폭에 담는다”고 평한다. 또한 그는 성악에 천부적인 재질이 있어 모임을 격조 높고 즐겁게 한다고 일컫는다. 스페인 여행 중 어느 카페에서 ‘베사메 무초(besame mucho; kiss me much)’를 무대에 나가 열창하자 전속 여가수가 아예 자리를 내주어 열화와 같은 박수세례를 받았다는 일화가 있다. 요즈음 인사동 화가들 모임에서도 오페라 아리아 곡들을 열창한다니 그 자리 끝에 앉아볼 궁량을 해본다.
이 그림 는 4호(33.4cm×24.2cm)의 작은 캔버스에 유화 물감으로 그린 가을 풍경인데, 여느 작가의 대작에 견주어도 될, 깊은 밀도로 가슴 벅차오르게 한다. 경매회사의 온라인 경매에서 17대 1의 치열한 경쟁을 뚫고 낙찰 받은 작품이다.
그리 높지 않은 산자락 아래 둔덕 위에 시골집 두 채가 있고 그 앞으로는 논밭 같은 농지와 작은 개울과 물가를 따라 수초들이 듬성하다. 노을을 앞둔 저녁 무렵의 구름이 산의 능선을 빗기고 둑길에 선 서너 그루 나무는 잎이 바람에 날려 일순간 긴장감이 풀리며 스산하다. 산등성이 바위에도 가을빛이 번져 있다. 원숙한 붓 터치 사이에서 풍경에 실린 마음을 읽는다.
초등학교 1학년 늦가을, 황토의 좁은 운동장 둘레로, 미루나무 긴 그림자가 붉은 노을빛에 스밀 때, 초가의 교실에서 울려오는 풍금소리, 어느새 다가가 창틈으로 들여다본 우리 교실, 흰 저고리 검정치마의 담임선생님이 건반 위에 엎드려 있던 그 처연한 뒷모습, 육십 년이 흐른 지금도 선연히 떠오르는데, 북녘에서 부모를 잃고 두 동생과 남하했다는 가족사가 짓누르던, 그 야윈 어깨 들먹이던 정경을, 어떻게 그릴 수는 없을까?
어느덧 그림자도 사라진 빈 길 위, 발자국마다 애달픔만 쌓이는데....
>>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리뷰어.
‘외레순’ 해협을 사이에 두고 스웨덴 헬싱보리와 덴마크 헬싱괴르가 인접해 있다. 뱃길로 고작 7km. 해협을 통과하는 모든 배들에게서 선박 통행세를 거둬들이던 황금의 도시. 서로 차지하기 위해 호시탐탐 싸움을 벌이던 곳. 손바닥만큼이나 작은 도시이지만 매력은 폴폴 넘친다.
이신화 여행작가 ('on the camino'의 저자, www.sinhwada.com)
북스테후데가 처음 오르간 연주를 했던 성모교회
스웨덴 남서부 말뫼후스 주 북부의 항구도시인 헬싱보리. 느릿느릿 여유롭게 쿨라가탄(Kullagatan) 쇼핑가를 배회한다. 골목은 넓지만 길지 않고 골목 숫자도 많지 않아 길 헷갈릴 일도 없다. 다행히 하늘은 맑고 햇살도 따뜻하다.
붉은 벽돌로 지은 고딕양식의 멋진 생마리 교회(St. Mary)에서 발길을 멈춘다. 100년(1350~1450년경)에 걸쳐 만들어진 이 교회는 단아하면서도 멋스럽다. 경내에는 아름다운 제단이 있고 바닥에는 16~17세기의 무덤 석판이 흩어져 있다. 스테인드글라스가 아름다운 창문으로는 옅은 햇살이 스며든다. 2층 발코니에 걸친 듯한 두 개의 오르간 파이프가 시야에 들어온다. 17세기, 청년 디트리히 북스테후데(Dietrich Buxtehude, 1637~1707)가 자유롭게 연주하는 모습이 아련히 스쳐간다.
청년 때는 헬싱보리(1657~1658), 그 후에는 헬싱괴르(1660~1668), 31세부터는 독일 뤼벡에서 40년 넘게 오르간 연주자로 활동했다. 북스테후데는 헨델, 바흐 등 후기 바로크 거장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1705년, 20세 청년 바흐는 북스테후데의 곡에 매료당해 아른슈타인에서 뤼벡까지 400마일을 걸어 그를 만나러 갔고 그곳에서 3개월간 머무른다. 당시 북스테후데는 68세의 고령으로 후임자를 찾고 있었다. 단, 자신의 딸과 결혼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북스테후데의 딸을 본 바흐는 쉽사리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북스테후데의 딸은 엄청난 박색이었다고 한다.
헬싱보리의 위대한 영웅 ‘망누스 스텐보크’
중앙광장으로 나가 이 도시에서 가장 화려한 시 청사를 본다. 네오-고딕 형식으로 지은 시 청사 건물엔 63m의 탑이 있고 매일 차임벨이 연주된다. 1967년에 유네스코에 등재된 건축물이다. 시 청사 앞에는 헬싱보리의 전쟁 영웅인 망누스 스텐보크(Magnus Stenbock, 1665~1717)의 말 탄 동상이 있다.
보기만 해도 위상이 느껴지는 스텐보크는 헬싱보리 전투(1710년 2월 28일~3월 5일)에서 덴마크를 물리치고 승리를 이끈 인물이다. 중앙거리를 벗어나 체르난(Ka˙˙rnan) 요새를 향해 오른다. 오르는 길목에 거인 골리앗의 목을 잘라 짓누르고 있는 다윗상이 있다. 헬싱괴르를 째려보면서 ‘넘보면 죽는다’고 위협하는 느낌의 모습이다. 성벽 계단을 따라 올라서면 짙은 가을색이 내린 요새에 탑 한 기(높이 35m, 폭 15m)가 우뚝 서 있다. 원래 14개였으나 전투 때 다 부서졌다고 한다. 체르난 요새는 덴마크령일 때인 1310년에 짓기 시작해 1320년에 완성된 감시탑, 방어탑이다. 19세기에 개·보수해 원형을 복원했고 1967년에 역사적인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둔커 기업가, 웃손 건축가, 잉그마르 베르히만 감독을 만나다
요새를 비껴나 외레순 해협 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방파제처럼 길게 이어지는 위티 다리의 이름이 재미있다. 세계적인 조각가 칼 밀레스(Carl MIlles, 1875~1955)가 만든 긴 석조물 꼭대기의 천사 조각상을 고개를 외로 꼬고, 눈을 치켜뜨고 쳐다본다. 마치 파도가 일렁이는 듯한 둔커문화센터(Dunkerskulturhus, www.dunkerskulturhus.se)도 기웃거린다.
이 문화센터는 전시, 공연, 연주회 등이 열리는 종합예술센터다.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를 건축한 요른 웃손(Jorn Utzon, 1918~2008)의 아들인 킴 웃손(Kim Utzon, 1957~현재)의 작품. 웃손 집안은 3대가 유명한 건축가로 활동 중이다. 둔커하우스는 헬싱보리의 기업가이자 사업가인 헨리 둔커(1870~1962) 가의 소유다. 둔커 일가는 고무공장을 1981년에 짓고 고무장화를 만들어 세계적인 기업이 되었다. 헬싱보리 대극장(1921년 개장) 앞에서 만난, 해학이 넘치는 햄릿 돌조각 표정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길 건너의 대극장을 바라보면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잉그마르 베르히만(Ingmar Bergman, 1918~2007) 감독을 생각한다. 1944년, 26세의 잉그마르 베르히만은 이 극장의 전임 연출가가 된다. 그의 첫 직장이었다. 당시 말뫼후스에 새 극장이 생기면서 헬싱보리 극장은 존폐위기 상황. 그는 부임해서 시나리오 을 썼는데 영화화됐다. 다음해(1945년)는 라는 작품을 첫 연출했다. 2년간 머무르는 동안 그의 역량은 충분히 인정받았다. 보조금은 되돌아왔고 그는 본격 영화감독이 되었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영화인들의 교과서로 일컬어지는 잉그마르 베르히만 감독의 작품들. 그가 머물렀던 집, 담벼락 사진 속의 젊은 감독은 예리한 눈빛이었다.
◇ Travel Tip!
가는 방법 스웨덴 스톡홀름까지 운항하는 직항이 없다. 핀란드 헬싱키와 서울 간 직항노선은 있다. 헬싱키를 경유해 페리 여객선을 타고 스톡홀름을 기점으로 헬싱보리까지 이동하면 된다. 헬싱보리에서 스칸드라인을 타면 5분 만에 덴마크 헬싱괴르에 도착한다. 스칸드라인은 매시간 20분 운항된다.
현지 교통 도시가 작아서 도보로 다니면 된다.
통화 정보: 스웨덴은 유럽연합의 회원국이지만, 유로화가 아닌 스웨덴 크로나(SEK)를 공식 통화로 사용한다. 현지 은행이나 ATM을 이용하면 된다.
맛집과 주류 헬싱괴르 마리 성당 주변이나 쿨라가탄 거리의 식당을 이용하면 된다. 스웨덴은 주류 숍이 따로 있는 것도 특색. 코파르베리(Kopparberg, 사과맥주, 7%)가 맛있다.
언어 공용어는 스페인어지만 대부분의 국민들이 영어를 잘한다.
헬싱괴르 여행 정보사이트 www.helsingborg.se
주변 연계 여행지 구스타프 아돌프(Gustav Adolf, 1882~1973) 6세와 첫 번째 왕비인 ‘코넛 공녀 마거릿(Princess Margaret of Connaught, 1882~1920)’이 사랑한 여름 궁전인 소피에로 궁전이 있다. 소피에로 궁전은 오스카르(Oscar, 1829~1907) 2세 부부에게 결혼 선물로 받았다. 아돌프 6세와 마거릿은 식물에 관심이 많아 궁전을 영국식 정원으로 가꿔 ‘스웨덴 정원 꾸미기’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소피에로 궁전은 현재 카페로 이용되고 있으며 헬싱보리에서 한 시간 정도 거리에 있다.
글 신명철 스포티비뉴스 편집위원. 전 스포츠서울 편집국장 smc6404@naver.com
한국은 지난 8월 열린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남자 축구 8강전에서 온두라스에 일방적인 공격을 퍼붓고도 0-1로 져 2연속 메달 획득에 실패했다. 한국은 2012년 런던 대회 3위 결정전에서 숙적 일본을 2-0으로 꺾고 꿈에도 그리던 올림픽 축구 메달을 거머쥐었다. 1948년 런던 대회에 처음 출전한 지 64년 만에 이룬 대업이었다. 이때 기쁨이 워낙 컸기 때문인지 올림픽 2회 연속 조별 리그 통과(8강)라는 쉽지 않은 성적을 올렸지만 적지 않은 축구 팬이 한국의 주전 공격수 손흥민을 비롯한 대표 선수들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조금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올림픽에 출전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축구 팬들은 행복해 했는데.
8월호에 소개한 김호와 ‘바늘과 실’ 사이인 김정남이 축구 국가대표로 활약하던 1960~70년대 초반에는 축구 선수로 올림픽에 출전하는 게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다. 그런 가운데 김정남은 평생의 축구 파트너인 김호보다는 약간의 행운이 있었다. 김정남은 1943년생으로 김호보다 한 살 위다. 이 차이로 김정남은 21살 때인 1964년 도쿄 올림픽에 함흥철(GK) 김정석 차태성(이상 FB) 우상권 차경복(이상 HB) 이이우(FW) 등 선배들과 함께 출전하는, 그 무렵 축구 선수로서는 흔치 않은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1964년 도쿄 올림픽 성적을 살펴보면 그건 꼭 기회이자 행운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바로 알 수 있다. 한국은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에서 월남(남베트남)을 3-0(서울), 2-2(사이공, 오늘날의 호치민) 합계 5-2로 누르고 도쿄행 티켓을 손에 넣었다. 뒤에 대회를 보이콧하지만 북한은 태국을 7-0(5-0 2-0)이란은 인도를 6-1(3-0 3-1)로 제치고 올림픽 출전권을 차지했다. 개최국 일본은 이탈리아가 불참한 D조에서 1승1패를 기록해 조별 리그를 통과했지만 8강전에서 체코슬로바키아에 0-4로 져 탈락했다. 이란은 A조에서 1무 2패를 기록해 8강 진출에 실패했다. 이란은 그나마 멕시코와 1-1로 비겨 승점을 1을 건지기라도 했다.
한국은 C조에서 체코슬로바키아에 1-6, 브라질에 0-4, 아랍공화국연합(이집트+시리아)에 0-10으로 대패했다. 좀 거칠게 말하면, 묵사발이 된 것이다. 이 무렵 한국 축구는 암흑기였다. 이전 출전 올림픽인 1948년 런던 대회는 자유 참가제로 나선 것이고 8강전에서 스웨덴에 0-12로 크게 졌다. 1회전에서 멕시코를 5-3으로 누른 게 그나마 위안이었다.
막내로 도쿄 올림픽에 출전했던 김정남은 그 대회에 어떤 기억을 갖고 있을까. 김정남은 “경기 내용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참패한 게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그의 축구 인생에서 아프고 부끄러운 대목 가운데 하나지만 이를 계기로 더욱 분발하고 발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듬해인 1965년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제 9회 메르데카컵 대회에서 자유중국(오늘날의 대만)과 공동 우승하면서 국가대표 선수들은 조금이나마 자신감을 되찾게 됐다. 아시아 지역 친선 대회이긴 했지만.
김정남은 스포츠계에서 찾아보기가 쉽지 않은 서울 토박이다. 서울 동작구 흑석동에 있는 은로초등학교 6학년 때 골목길에서 축구공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 그 무렵 운동선수가 되는 일반적인 과정이다. 축구인인 외삼촌의 지도 덕분에 남들보다 축구를 잘했고 서울 보성중학교에 진학한 뒤 축구 선수 출신인 체육 교사의 권유로 본격적으로 축구를 하게 했다. 어머니는 5남 3녀 가운데 장남인 김정남에게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했지만 축구가 재미있어 몰래몰래 공을 찼다. 큰형의 영향으로 쌍둥이 형제인 김강남-김성남이 실력 있는 선수로 활약한 내용은 중·장년 축구 팬이면 누구나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김호 편에서 소개했듯이 김정남은 1960~70년대 한국 최고의 최종 수비수였다. 그러나 선수 생활 초기에 김정남의 포지션은 미드필더였다. 김정남이 다닌 보성고는 축구 실력이 그리 높지 않았다. 그래서 그 무렵 서울에서 동북고와 쌍벽을 이루고 있던 축구 명문 한양공고로 전학했지만 이른바 초고교급 선수들이 즐비한 그곳에서 그가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있을 리 없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공을 좀 찬다고 하면 가는 곳이 공격수 또는 미드필더다. 김정남은 경기에 나가기 위해 포지션을 수비수로 바꿨고 이 결정이 요즘 유행하는 표현인 ‘신의 한 수’가 됐다. 김정남이 끝까지 미드필더를 고집했다면 한국 축구대표팀 주전 수비수, 월드컵 대표팀 사령탑 김정남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수비수로 자리를 옮긴 김정남은 한양공고 3학년 때인 1962년 국가대표에 처음 뽑혀 메르데카배컵 대회에 출전했다. 요즘은 종목별로 고교 선수들이 심심찮게 국가대표로 선발되지만 그 무렵 고교생이 태극 마크를 다는 건,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웠다. 김정남의 경기력이 그만큼 뛰어났다는 증거다.
김정남은 고려대에 진학해서 미드필더 포지션을 되찾았다. 그러나 국가대표팀에 들어가면 수비수로 위치가 바뀌었고 한 살 밑이지만 평생의 친구가 되는 김호와 호흡을 맞추기 시작했다. 둘이 함께 출전한 1960년대 중반 최고의 대회가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아시아 지역 예선이다. 둘에게, 그리고 한국 축구가 땅을 칠 만큼 아쉬움이 남는 대회였다. 김정남 김호 외에 이세연(GK) 서윤찬(HB) 이회택 정병탁(이상FW) 등 신세대 팬들도 알 만한 선수들이 이 예선을 통과하지 못해 올림픽 그라운드를 밟지 못했다. 당시 경기 상황을 복기하면 이들이 가슴에 지니고 있는 올림픽 출전 불발의 한(恨)이 어느 정도일지 대충 짐작할 수 있다.
1965년 9월 24일 도쿄에서 막을 올린 멕시코시티 올림픽 아시아 지역 A조 예선에서 한국은 자유중국을 4-2, 레바논을 2-0, 월남을 3-0으로 물리치고 같은 3승의 일본과 맞붙었다. 일진일퇴의 숨 막히는 접전 끝에 두 나라는 3-3으로 승패를 가르지 못했다. 한국은 필리핀, 일본은 월남과 경기를 남겨 놓고 있는 가운데 한국은 골 득실차에서 +7로 +21의 일본에 크게 뒤져 있었다. 일본이 필리핀을 15-0이라는 기록적인 스코어로 이겼기 때문이다. 15골 이상으로 이겨야 한다는 부담 속에 한국은 필리핀을 5-0으로 이긴 반면 일본은 월남을 1-0으로 누르고 본선 티켓을 손에 넣었다.
한국 축구가 이 예선 결과를 두고두고 아쉬워한 이유는 한국을 아슬아슬하게 따돌리고 본선에 오른 일본이 아시아 나라로는 처음으로 동메달을 땄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태국과 함께 멕시코시티 올림픽 축구 종목에 출전한 일본은 조별 리그 B조에서 나이지리아를 3-1로 꺾고 브라질과 1-1, 스페인과 0-0으로 비겨 조 2위로 8강에 올랐다. 8강전에서 프랑스를 3-1로 잡은 일본은 준결승에서 우승국 헝가리에 0-5로 대패했으나 3위 결정전에서 홈그라운드의 멕시코를 2-0으로 누르고 아시아 나라로는 처음으로 올림픽 축구 메달을 획득했다. 이 대회 득점왕이 중년 이상 축구 팬이라면 잘 알고 있는 가마모토 구니시게다. 공격수 가마모토는 이회택, 수비수 야마구치 요시타다, 가타야마 히로시는 김정남, 김호와 여러 대회에서 마주쳤는데 한국 선수들이 이들보다 조금 더 나은 경기력을 갖고 있었다. 김정남은 메달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올림픽에도 출전했고 지도자로서는 1986년 멕시코 월드컵 감독이라는 영예를 누렸다. 1954년 스위스 대회 이후 32년 만에 출전한 월드컵이었기에 축구인 김정남의 긍지는 더욱 컸다. 김정남은 50년 지기 김호와 함께 존경받는 축구계 선배로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승부 기질이 있다. 상대와 겨뤄 이기고 싶은 것이다. 내기골프, 내기당구, 내기바둑 등이 성행하는 이유도 승부욕 때문이다. 이긴 결과는 대부분 돈으로 계산된다. 그런데 번거로운 골프, 당구, 바둑 말고 대놓고 하는 돈 내기도 있다. 성질 급한 사람에게 딱 맞는 게임이다. 그래서 생긴 것이 카지노다. 카지노는 사람들에게 슬롯머신, 룰렛, 바카라, 블랙잭 등 다양한 종류의 도박을 할 수 있도록 해주고 돈을 벌어들인다. 그러나 도박은 확률상 카지노가 이기게 되어 있다. 그것도 훨씬 유리한 확률로 사람들의 주머니를 턴다. 어쩌다 돈을 딴 사람도 있지만 아주 극소수다. 그런데도 극소수의 행운을 바라고 도박장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있다.
카지노를 상대로 거액의 돈을 딴 사람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있다. 스페인 영화 다. 펠라요(Pelayo) 가족이 전 세계 카지노를 상대로 수천만 달러를 딴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영화로 제작된 것이다. 에두아르드 코르테스 감독이 만들고 다니엘 브륄, 루이스 호마르 등이 주연으로 나온다. 카지노 측과 펠라요 가족 간의 머리싸움이 끝까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재미있는 영화다.
영화에서는 룰렛을 집중 공략한다. 룰렛은 둥근 수레바퀴 위에 구슬이 멈추는 숫자가 맞으면 배당률에 따라 돈을 따는 방식의 도박이다. 최고 35배의 배당률에 도전할 수 있으니 거액을 배팅했다가 맞으면 그야말로 대박이다. 그러나 그 많은 숫자 중에 자신이 찍은 숫자가 맞을 확률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펠라요(Pelayo) 가족이 기계를 상대로 합법적으로 거액의 돈을 땄기 때문에 인간승리로 보는 것이다.
펠라요 가족의 아버지는 인간이 만든 기계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간파한다. 미세한 불량으로 인해 룰렛 기계에서도 자주 나오는 숫자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런 계산으로 그는 배팅을 하고 전 세계 카지노를 상대로 돈을 챙긴다. 당황한 카지노 측은 기계 위치도 바꿔보지만 이들 전문가들은 테이블의 미세한 특징을 어떻게든 잡아내고 이 기계에서 자주 나오는 숫자에 배팅한다. 이 원리로 로또복권 당첨 숫자를 예상해 돈을 버는 사이트도 있다. 매주 같은 기계를 사용하고 기계가 완벽하지 않을 경우 자주 나오는 숫자는 있게 마련이다. 따라서 이런 사이트의 숫자 장사는 일리가 있다고 본다.
펠라요 가족은 가족 단위로 몰려가 배팅을 한다. 카지노 측에서는 이를 수상히 여겨 뒷조사를 하고 이들의 행태를 알아낸다. 그러나 기계 위치를 바꿔구 출입금지 조치를 내려도 팀원을 바꿔 같은 작전으로 공략하는 것은 막지 못한다. 게다가 소문을 듣고 일반 손님들도 이들을 따라 배팅을 시작하자 상황은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도박은 자기 소신이 뚜렷해야 한다. 돈을 잃어도 절대 흥분하면 안 되고, 돈을 조금 땄다고 무모하게 배팅을 해도 절대 안 된다. 패가망신하는 지름길이다. 오죽하면 술, 노름, 바람 세 가지를 컨트롤하지 못하는 남자를 조심하라고 했겠는가. 도박은 스스로 한도액을 정해놓고 즐기는 수준에서 해야 한다. 그 이상이 되면 위험하다. 물론 돈을 따면 좋다. 공돈이기 때문이다. 도박을 잘하는 요령은 돈을 땄을 때 일어나는 것이다. 물론 고스톱 같은 것을 치다가 그러면 욕먹는다. 그러나 카지노에서는 그래도 된다.
전설처럼 남아 있는 펠라요 가족의 이야기는 인간의 머리가 얼마나 비상한가를 잘 보여준다. 라스베이거스에 갈 때마다 큰돈은 아니지만, 늘 잃고 온 것을 생각하면 통쾌하기까지 한 영화다.
경계의 떨림이 느껴지는 눈빛이 입을 열었다. 머리에 두 가지 생각이 공존한다며 가벼운 질문에도 얼음 위를 걷는 듯 조심스럽고 신중하다. 누군가 알아봐 주는 것도, 맞서는 것도 이제는 ‘정신 사납다’고 표현하는 이 사람,
코디 최(최현주 崔玄周·55).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다. 대나무 위 무림고수를 만나고 온 기분이 바로 이런 느낌인가 보다.
코디 최란 이름을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됐다. 그를 꼭 만나야 하는 이유 세 가지가 생겼다. 어려운 문화이론을 귀에 쏙쏙 들어오게 하는 강의실력자. 현재 유럽에서 회고전을 열 정도로 유명한 미술 작가. 마지막으로 내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가 됐다는 점이다. 문화이론을 가르치는 미술 작가. 이론과 실기를 엄연히 다른 분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에서 그런 게 가능한 능력자가 궁금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대외적으로 직업이 두 가지입니다. 미술 작가 겸 문화이론가 아니면 교수. 학교를 졸업하고 작품 활동과 강의를 거의 동시에 시작했어요. 학교에서는 이론 강의를 주로 하고 밖에서는 미술 작품 활동과 전시회 하면서요. 작가로 한 30년, 강의는 27년째 하고 있어요. 1994년부터 2004년까지 뉴욕대학교(NYU)에서 강의했습니다.”
미국에서는 줄곧 미술대학 교수였던 코디 최. 한국에서는 문화이론을 가르치다 보니 언론정보대학이나 언론학부, 건축디자인학과, 공대, 국제대학 등에서 강의 요청이 많다고 한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그곳에서 재능을 발견하다
코디 최는 미술 세계에 첫발을 디딜 때만 해도 한국계 미국인이었다. 20대 초반까지 한국인이던 코디 최는 고려대학교 사회학과 재학 시절 집안 사정으로 이민 길에 올랐다.
“그때 저는 80학번 어린 대학생이었습니다. 모든 게 불안한 시대였죠. 광주민주항쟁, 학교도 오랫동안 휴교하고요. 1학년 내내 서너 달 수업했을까요. 2학년에 올라갔어도 상황은 바뀌지 않았어요. 한국에 있는 것도, 그렇다고 미국에 가는 것도 그렇게 좋은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미국에 가자마자 막노동 같은 어려운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는 코디 최. 그러면서 그곳에서 살기 위해서는 공부밖에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한국에서는 공부하기 싫어서 도망 다녔는데(웃음) 미국에서는 그것밖에 없었습니다. 먼저 야간대학에 다녔어요. 한 학기 등록금 몇 십만 원만 내면 수업이 거의 무료였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사회학을 계속하겠다는 마음이었죠.”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주경야독의 삶. 그때 조금이라도 피곤을 달래주는 것이 바로 일반교양으로 듣게 된 미술 과목이었다.
“전공과목 외에 일반교양수업 중에서 미술 과목 하나를 들었어요. 너무 피곤해서 숨 좀 쉬려고요. 수업시간에 들어가서 낭만을 좀 느끼고 싶었나 봐요.”
그렇게 공부하다 보니 관심 갖고 바라봐 주는 교수들이 생겨났다. 제대로 된 대학교에 입학하겠다는 목표가 뚜렷해졌을 때 코디 최를 유심히 봐 왔던 상담 교수가 미술대학을 권유했다. 한국에서 붓 한 번 잡아 보지 않은 사람에게 미술이라니.
“미술이요? 저는 돈이 필요합니다. 돈 버는 전공을 선택하고 싶다고 교수에게 말했더니 요즘 디자인 분야가 돈을 많이 번다고 말해 주더군요. 그러면서 예술대학으로 유명한 LA 아트센터 칼리지(Art Center College of Design, Pasadena)에 추천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본격적으로 디자인과 순수미술을 공부하게 됐습니다.”
국제무대가 주목하다
입학 초기 디자인을 전공한 코티 최는 점점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뭔가 불편했어요. 잘 안 맞고 힘들었어요. 우선 언어가 자유롭지 않았고 이해하기도 어려웠어요. 그리고 또 내 나라가 아니니까. 모르는 곳에 가 있으면 불안하잖아요. 눈치도 보게 되고요.”
그 불편함은 위장병으로 나타났다. 심리적인 불안과 불편함, 한국과 미국의 음식 차이 등 여러 가지가 요인이 합쳐지면서 먹기만 하면 체했다. 책가방에 넣고 다니며 수시로 꺼내 먹던 분홍색의 현탁액 소화제 펩토비스몰을 이용해 문화 정체성의 혼동과 불안을 작품으로 표현하게 됐고 그 신선한 충격은 국제무대에 코디 최를 알리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90년대는 초 뉴욕에서 꽤 많이 주목받는 작가였고, 한국에도 이름을 좀 알리던 시기였어요. 한국의 국제화랑 전속 작가로 10년 동안 활동했어요. 2, 3년에 한 번 정도는 한국에서 전시했습니다.”
미국에서 다시 한국으로
뉴욕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던 1990년대 초 NYU에서 강의 제의가 왔다. 강의에 대한 학생들 반응도 좋았다. 그러다보니 ‘Adjunct professor’ 즉, 강의만 전문으로 하는 교수로 10년 넘게 있었다.
“2002년 이화여대에서 NYU 미술대 학과장한테 한 학기 초빙교수를 보내 달라는 연락이 왔어요. 제가 한국 출신이니까 가 보지 않겠냐며 권유하더군요.”
자연스럽게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가 시작됐다. 뉴욕과 유럽을 돌며 활동하다가 2000년대 들어서면서 뭔가 복잡해졌다. 개인사정이 생겼고, 50대를 바라보던 상황에 미국생활이 외롭고 모든 게 지루해진 시점이었다.
“2002년에 이화여대에 초빙교수로 와서 한 한기 동안 외국인 교수 기숙사에서 생활하다가 뉴욕으로 돌아갔어요. 그때 내가 더 늙기 전에 한국으로 돌아가서 강의를 하며 사는 것도 내 인생에 큰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2004년 한국에 들어온 코디 최는 2년 전 한국 국적을 회복했다. 미국 사회에 적응하느라 20년여 고생했는데 또 다시 한국 사회에 적응해야 했다.
“미국과 한국의 대학 시스템이 달라서 힘들었어요. 저도 어렵고 한국의 대학도 저를 받아들이기 어려웠고요. 문화 차이였던 거죠. 제가 한국에 살다가 미국에서 겪었던 문화적 충돌이 한국에 오니까 다시 또 시작됐습니다. 그리고 요즘 들어 이해가 돼요. 한국에 돌아왔을 당시 30대도 아니고 50대를 바라보고 있었어요. 학과장이나 주임교수쯤 할 나이에 강의만 하는 교수를 하겠다고 온 거죠. 근데 이제는 괜찮아요. 마음은 자유로워졌는데 최근 몇 년 동안 그 부분이 좀 억울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건지. 세상에 바랄 것도 없고 욕심을 버려야 하는 시간이 온 거 같아요.”
코디 최, 유럽 회고전은 순항 중
현재 그의 작품은 유럽 각지를 돌며 ‘코디 최 컬처 컷(CODY CHOI Culture Cuts)’이라는 이름으로 전시되고 있다. 작년 5월부터 독일 뒤셀도르프 쿤스트 할레(미술관)에서 시작해 프랑스 마르세유현대미술관 전시도 8월에 끝났다.
“올해 12월에는 스페인 렉토레이트 대학 미술관과 살라 모레노 빌라 전시관 두 곳에서 동시에 회고전이 있을 거예요. 내년 4월엔 독일 켐니츠 국립 미술관으로 가요. 제가 1986년부터 했던 작품과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90점 정도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이 얘기를 듣는 동안 변신 안 한 슈퍼맨과 대화하는 느낌이었다. 한국에 돌아온 이후 문화이론을 가르치고 이런 저런 편견 때문에 피곤하다는 얘기를 듣고 있었다. 그런데 비행기 타고 저 멀리에 가면 화려한 망토 두른 코디 최가 살고 있을 것만 같다.
“나이 들어서 조용히 있고 싶었는데 한 3~4년 전 쯤 뒤셀도르프 미술관 관장이 다른 일로 한국에 왔다가 미술계에 수소문했다더군요. 최근 서구 미술 시장에 동양 작가, 특히 중국 작가의 활동이 활발한데 그런 관점에서 쭉 거슬러 올라가면 1980년대부터 뉴욕에서 활동하던 아시아 작가 코디 최라는 사람이 있었고 재조명해 보고 싶다고 했어요. 고마운 마음으로만 생각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저와 함께 작업하던 마이크 켈리 파운데이션의 평론가 존 워시맨과 프랑스의 퐁피두센터에서 큐레이터로 활동하는 마리드 부르졸라가 합세했습니다. 그렇게 2,3년 준비해서 유럽 순회 회고전이 기획된 것이죠.”
현재 그의 순회 회고전은 미국과 중국에서도 전시 일정을 조율하고 있지만 한국에서 계획은 아직 없다고 했다.
베니스 비엔날레, 100% 안 될 거라 믿었다
코디 최 이름을 인터넷에 검색해 보면 내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이완이라는 젊은 작가와 함께 대표 작가가 됐다는 기사를 확인할 수 있다.
“이대형이라는 큐레이터가 저에게 차 한 잔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어요. 만나 보니 20년 전쯤 제 강의를 들었던 학생이라더군요.”
이대형씨는 ‘2017 베니스 비엔날레’ 예술감독으로 발탁돼 한창 작가 찾기에 골몰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대형씨가 나에게 와서 지금 베니스 비엔날레에 원서를 제출해야 하는데 이완이라는 젊은 작가와 함께 이 프로젝트를 함께하면 어떻겠느냐고 묻더군요.”
입으로는 감사하다 말하면서도 100% 안 될 거라고 생각했다. 국제 행사에 나가기엔 이완씨가 어렸고 무엇보다 한국 미술계에서 코디 최 자신에게 손들어 줄 사람이 거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됐다는 겁니다. 안 될 줄 알고 주위에 알리지도 않았어요.”
최근에 와서 이대형씨가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한다. 작가 선정 작업을 하면서 젊은 작가와 함께할 연배 있는 작가를 찾아 조언을 구하기 위해 영국까지 날아가 사람을 만났다고 말이다.
“본인 생각에 구세대와 신세대 사이에 밀려서 한 번도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한 코디 최가 적격이라고 생각했대요. 그런데 10명 중 6명은 말리더라는 거죠. 그럼에도 본인 의지를 믿었다는 말에 정말 많이 고마웠습니다.”
코디 최가 베니스 비엔날레 대표 작가가 됐다는 소식에 유럽 미술계도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원래 내년 4월로 잡혀 있던 독일의 한 미술관에서 베니스 비엔날레 딱 끝나기 일주일 전에 전시를 시작하겠다고 연락이 왔다. 또 다른 독일 화랑에서는 베니스 비엔날레 시작하고 한 달 후인 6월 24일 코디 최의 전시를 열겠다고 날짜까지 못을 박았다. 사실 코디 최의 작은 바람이라면 아내와 함께 평화롭고 조용히 사는 것. 그런데 베니스 비엔날레 덕(?)에 당분간 그 바람은 잠시 묻어두어야 할 것 같다.
미술은 눈으로 보고 온몸으로 느끼는 예술이다. 그것이 코디 최의 직업 중 큰 영역을 차지한다면 피곤하지만 즐기는 것이 순리 아닐까? 내년 베니스 비엔날레, 쌍심지를 켜고 지켜보는 이들에게 시원하게 뭔가 보여주시길. 부탁해요, 코디 최!
‘펩토비스몰(소화제)’ 수만 통으로 적신 화장지를 뭉쳐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패러디한 . 세계가 코디 최를 주목하게 된 대표작 중 하나다.
>>코디 최(최현주)
LA 아트센터 칼리지 학사,
1994~2004년 뉴욕대학교
Adjunct professor
(강의전문교수), 2002년 이화여자대학교 초빙교수, 前문화창조아카데미 지식융합 감독, 연세대학교와 성균관대학교에서 강의,
2017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 대표 작가,
저서
가족용 어드벤처 판타지 영화이다. 영국, 스페인, 벨기에가 무대로 나오고 조나단 뉴먼 감독이 만들었다. 주연에 아뉴린 바나드(머라이어 역), 마이클 쉰(채리티 역), 레나 헤디(모니카 역), 샘 닐(루거 역)이 나온다
무엇이든지 손에 닿기만 하면 금이 된다는 신화처럼, 무엇이든 상자 안에 담기만 하면 황금으로 만든다는 전설의 마이더스 박스를 찾아 모험한다는 줄거리이다. 원제는 '마이더스 상자의 저주'라고 번역된다.
이 상자가 악당의 손에 들어가면 단순히 그 악당만 부자가 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무제한으로 금을 만들어 낼 것이기 때문에 경제학적으로 금의 희소가치가 떨어지면 전 세계 금융 질서가 무너져 대 혼란이 온다. 각국 은행이 보유한 금이 무용지물이 되어 금 본위 경제 질서가 무너지는 것이다. 금을 보유한 것에 바탕을 두고 화폐를 찍어내야 화폐 가치가 유지되는데 금 보유 없이 화폐를 찍어 내면 화폐 가치를 잃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상자는 공신력 아래 엄격히 통제 되어야 한다.
희소 광물인 금은 희소하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 용도도 많다. 광물에서 채취해야 하지만, 만들어낸다면 그야말로 대박이다. 그것도 화수분처럼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면 당사자에게는 엄청난 복인 것이다. 그래서 인간들은 금을 만들어 내는 방법은 없을까 고민해 왔다. 그러나 여전히 금은 희소 광물이다. 금을 만들어 내는 방법이 없으니 이렇게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악당 루거는 박스를 열 열쇠를 차지하기 위해 머라이어의 부모와 동생을 납치한다. 부모님의 오랜 친구 채리티 대위가 부모와 동생이 있는 곳에 가려면 배를 타고 섬에 있는 호화 호텔에 잠입하여 박스를 찾아내야 한다며 머라이어가 가라고 한다. 머라이어는 섬에 도달하자마자 호텔 짐꾼으로 취업한다. 호텔은 온천이 여러 가지 질병에 효험이 있다 하여 손님들로 북적인다. 일손이 부족한 것이다. 머라이어는 호텔 짐꾼으로 일하면서 호텔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한다. 머리이어의 제복을 만들어준 여자 모니카에게 협조를 요청하지만, 일자리를 잃고 싶지 않다며 거절한다. 그러나 결국 머라이어의 요청을 들어 준다. 부모를 찾겠다는 절실함도 읽었지만, 머라이어에게 호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젊은 사람들은 이성간에 끌리는 힘이 있어 그 사람이 좋으면 조건 없이 같은 편이 된다.
그렇게 시작한 모험은 머라이어가 가진 부적으로 문이 열리고 비밀 통로 등이 나타난다. 비밀의 방을 뒤지다 보니 호텔 전 주인이 살해당했다는 사실도 알아낸다. 지하에서 강제 노동에 시달리는 동생 펠릭스도 찾아낸다. 드디어 마이더스의 상자도 발견한다. 악당 루거는 머라이어를 추적하고 아버지 친구 채리티가 나타나 이들을 구해 낸다. 호텔에 오래 전부터 잠입해 있던 왕실 비밀요원들도 합세하여 드디어 악당 루거 일행을 처단한다. 마이더스 상자는 왕실에 바친다. 장차 원하면 왕실 비밀요원 자리는 추천해준다고 한다. 머라이어를 도왔던 여자 모니카는 아버지를 잃었지만 머라이어가 같이 살자고 권한다. 사랑으로 결실을 맺는 것이다.
마이더스 상자를 찾았으니 머라이어도 부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장면은 없다. 돈이 다가 아니라는 것이다. 돈은 오히려 충분하기보다는 알맞게 관리되어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마이더스 상자를 들춘 순간 재앙이 시작된다.
요즘 추세로 볼 때 이 영화는 유치하다. 스토리 전개가 뻔하다. 거대한 기계실, 비밀의 방, 마이더스의 상자 등이 등장하지만, 다른 데서 그 이상의 자극적인 소재를 많이 접하다 보니 그 정도는 만화 수준이다. 그러나 가족이 같이 보는 영화로는 그런대로 볼 만하다. 가족애가 있다. 상상이 있고 모험이 있다. 그리고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금의 가치에 대한 경제학적 분석도 아이들 교육에 도움이 될 것 같다.
두 질문의 답은 우리 민족 고유의 운동인 씨름과 씨름 선수다.
최근 급격하게 인기가 떨어졌지만 1980~90년대, 장충체육관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 있는 체육관은 연중 열리는 민속 씨름 경기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짧은 시간에 불꽃같이 피어오른 민속 씨름 인기의 중심에 ‘만 가지 기술’을 구사한다는 이만기가 있었다.
민속 씨름이라는 이름은 1983년 씨름이 프로화되면서 기존의 아마추어 씨름과 구분하기 위해 만든 명칭이다. 씨름은 모두가 알고 있듯이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 민족이 즐긴 전통의 스포츠다. 전 세계적으로 볼 때 몽골 스페인 스위스 일본 등지에 씨름과 비슷한 운동이 있고 민속 씨름 전성기에는 몽골 스페인 등과 교류하기도 했다.
근대적 스포츠로서 씨름은 일제 강점기인 1910년대에 나타난다. 이 무렵 단성사의 소유주 박승필(朴承弼, 1875~1932)이 조직한 ‘유각권투구락부’에서 회원들에게 씨름과 유도, 복싱을 익히도록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912년 10월 7일 단성사에서 씨름과 유도, 복싱 3개 종목 경기가 열려 점수제에 의해 우열을 가리고 상품을 줬다는 기록도 있다.
야구 농구 배구 등을 보급하며 한국 근대 스포츠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서울YMCA는 민족 스포츠인 씨름을 장려하기 위해 1928년부터 1936년까지 전조선씨름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의 스타는 김윤근(金潤根)이었다. 1930년대의 이만기인 셈이다. 김윤근은 이 대회를 비롯해 선수 시절 200여 차례 씨름대회에서 황소 200여 마리, 우승기 88개를 차지한 스타플레이어였다. 김윤근은 1945년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난 뒤에는 대한씨름협회 회장을 지냈고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국민방위군 사령관을 맡았으나 방위군 비리와 관련해 사형됐다. 씨름계로서는 큰 인물이었지만 역사에 오점을 남기고 말았다.
1927년 12월 27일 창립한 조선씨름협회는 농구 축구와 함께 일제 강점기에 우리 힘으로 만든 몇 안 되는 경기 단체 가운데 하나다. 그 시기 거의 모든 종목은 조선체육회가 대회를 주관하고 주최했다. 서울YMCA가 전조선씨름대회를 개최한 1년 뒤인 1929년 9월 28일 조선체육회는 휘문고보 운동장에서 조선씨름협회와 공동 주최로 제 1회 전조선씨름대회를 열었다. 경신학교와 휘문고보, 중동학교, 양정고보, 중앙고보, 협성실업, 보성고보, 숭인상업 등 8개 팀이 출전한 단체전 결승에서 경신학교는 보성고보를 접전 끝에 7-6으로 누르고 첫 우승의 영예를 안았다. 개인전 결승에서는 이도남이 최재빈을 물리치고 첫 패권을 차지했다.
조선체육회는 제 16회 전조선종합경기대회를 1935년 10월 22일부터 나흘 동안 경성운동장을 중심으로 열었다. 이 대회는 지난 대회의 육상과 축구, 농구, 야구, 정구 등 5개 종목에 씨름, 유도, 역기(역도), 검도 등 4개 종목을 추가했다. 씨름이 오늘날 전국체육대회의 정식 종목이 된 것이다.
이런 역사 속에 씨름은 우리 민족의 혼을 이어 주는 운동으로 꾸준히 발전했고 프로화된 민속 씨름 직전의 스타플레이어로는 이만기의 직계 선배라고 할 수 있는 김성률 장사를 꼽을 수 있다. 김성률 장사는 1970년대 최고의 씨름 선수였고 운동 능력이 뛰어나 레슬링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1974년 제 55회 대회부터 1976년 제 57회 대회까지 전국체육대회 레슬링 슈퍼헤비급 자유형과 그레코로만형 2관왕을 3년 연속 차지한 것을 비롯해 1983년 제 63회 대회까지 전국체육대회에서 금메달 12개와 은메달 2개, 동메달 3개를 목에 걸었다. 쉽게 믿기 어려운 성적이다. 하형주가 씨름 기술을 응용해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유도 95kg급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것은 씨름과 레슬링, 유도로 이어지는 연계성 그리고 씨름 기술의 우수성을 입증한다.
1983년 4월 17일 장충체육관, 약관의 이만기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날이고 장소다. 초등학교 때 씨름을 배운 지 10년 만에 이룬 첫 개인전 우승이자 프로화된 씨름 사상 첫 천하장사 타이틀을 딴 날이고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후 1990년 27세의 나이로 은퇴하기 전까지 천하장사 10번, 한라장사 7번, 백두장사 19번 그리고 11차례의 번외 경기까지 이만기는 길지 않은 선수 생활 동안 47차례 우승의 놀라운 성적을 올렸다. 상금이 아니고 예전처럼 황소를 줬으면 큰 농장을 차려도 됐을 것이다.
초대 천하장사 이만기의 빛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적지 않은 스포츠팬들이 잊고 있지만 1980년대 초반 씨름판에는 내로라하는 장사들이 군웅할거했다. ‘모래판의 신사’ 이준희, ‘인간 기중기’ 이봉걸, ‘털보' 이승삼 그리고 홍현욱, 최욱진 등이 유력한 초대 천하장사 후보들이었다. 지방대회든 전국대회든 우승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이만기는 경력도 그렇고 나이도 어려 우승 후보군에 들 수가 없었다. 그때 이만기는 지방에 있는 대학(경남대학교 2학년)에서 씨름을 하는 무명의 선수였을 뿐이다.
천하장사 경기가 열리기 하루 전인 4월 16일 펼쳐진 한라장사 결승전은 약관의 천하장사 탄생 예고편이었다. 그 무렵 최고 수준의 기술 씨름을 자랑하던 최욱진(경상대학교 3학년)은 이만기를 3-2로 누르고 한라장사 꽃가마에 올랐다. “나는 우승과는 인연이 없는가 보다.” 이만기는 그날 밤 한숨도 자지 못했다. 게다가 체격이 이만기보다 작은 최욱진이 자세를 낮추며 파고드는 바람에 가슴에 약간의 부상까지 있었다.
민속 씨름의 성공적인 출발을 알리는 초대 천하장사 결승전 카드는 절묘하게 이뤄졌다. 키 172cm의 최욱진이 준결승에서 182cm의 홍현욱을 누르고 결승에 올랐다. 한라장사와 천하장사 두 개의 타이틀이 눈앞에 다가왔다. 8강을 목표로 했던 이만기(182cm)는 준결승에서 ‘한 번만 이겨 봤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 수없이 생각했던 이준희(195cm)를 꺾고 결승에 진출했다. 몸무게에 관계없이 겨루는 천하장사 경기에서 기술 씨름의 두 달인이 한 체급 위인 백두급 장사들을 모조리 쓰러뜨리고 결승전 모래판에서 마주 서게 된 것이다.
기술 씨름 달인들의 팽팽한 접전이 이어지는 동안 장충체육관의 열기는 최고조에 이르렀다. 컬러 TV 방송이 시작된 지 2년여가 지난 그때 전국 방방곡곡의 가정에서는 총천연색으로 중계되는 씨름 경기를 보는 이들이 넘쳐 났다. 요즘처럼 시청률 자료가 나왔다면 ‘국민 드라마’의 수치를 가볍게 넘어섰을 것이다.
2-2로 맞선 가운데 이룰 만큼 이룬 이만기로서는 심적 부담이 상대적으로 적었고 최욱진은 한 판만 잡으면 한라장사에 이어 천하장사까지 차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니 상대적으로 심적 부담이 더했을 것이다. 이때 이만기는 평소 연습을 거의 해 보지 않았던 호미걸이를 승부수로 던졌다. 씨름계에서 쓰는 표현인, ‘뽑아 드는’ 들배지기가 이만기의 상징적인 기술이고 이외 밭다리, 잡채기, 뒤집기 등 다양한 기술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이후 7년여 동안 모래판을 평정하게 되는 이만기지만 이날 구사한 호미걸이 기술은 이제 와 생각해도 ‘왜 그때 그 기술을 썼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유도 기술과 비슷한 호미걸이 기술로 이만기는 자신의 선수 생활 첫 개인전 우승이자 천하장사 우승을 이뤘다.
천하장사 이만기하면 떠오르는 첫 번째 이미지가 모래판에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모래를 흩뿌리며 포효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 장면을 찍은 수많은 사진에는 비밀이 숨어 있다. 이만기는 1980년대 스포츠 전문 사진기자로 활동한 R씨와 매우 친했다. 이만기는 승리 세리머니를 할 때마다 R 기자가 카메라를 들고 있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봇물처럼 터진 프로화의 물결
8월을 스포츠 열기로 뜨겁게 달군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 출전한 한국 선수단 가운데에는 적지 않은 프로 선수들이 있었다. 24세 이상 와일드카드 3명의 선수를 포함한 18명의 남자 축구 대표팀과 여자 배구 대표팀은 전원이 프로 선수였다. 축구는 잉글랜드 독일 포르투갈 오스트리아 중국 일본 등 외국 리그에서 활동하고 있는 선수가 7명이나 됐다.
한국 스포츠로서는 1982년을 아마추어와 프로 양대 축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원년으로 기록할 만하다. 물론 이때 이전에도 프로 종목은 있었다. WBA(세계복싱협회) 주니어 미들급 챔피언 김기수가 대표하는 프로 복싱과 1960~70년대 최고 선수였던 한장상으로 대표되는 골프가 1980년대 이전의 몇 안 되는 프로 종목이었다. 그러나 이들 종목은 개인 종목으로 시장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다.
1982년 단체 종목인 야구가 프로화하면서 국내 스포츠계는 본격적인 프로화 시대를 맞게 됐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3년 아마추어 팀을 포함한 축구 프로 리그인 슈퍼리그(K리그의 전신)가 출범했다. 민속 경기인 씨름도 같은 해 프로화가 돼 이만기 등 신예의 등장과 함께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굳이 순서를 따지면 1982년 3월 프로 야구, 1983년 4월 민속 씨름, 1983년 5월 프로 축구다. 이들 종목은 앞서기니 뒤서거니 프로화 물결에 합류했다.
잠시 끊겼던 프로화 물결은 1990년대 중반 농구대잔치를 무대로 펼쳐진 대학 농구의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 1997년 남자 농구가 프로화되고 이어 여자 농구, 그리고 2000년대 들어서 남녀 배구가 프로화가 되면서 국내 인기 종목 대부분이 프로로 재탄생했다.
프로화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었다. 또 프로화가 되면서 해당 종목의 경기력이 크게 향상돼 축구는 숙원이었던 월드컵 본선 진출을 1986년 멕시코 대회에서 이룰 수 있었고 이후 2014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회까지 8회 연속 월드컵 본선에 나서는 기록을 세웠다. 올림픽에서도 자동 출전한 1988년 서울 대회를 시작으로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대회까지 8회 연속 본선에 올랐다. 이 사이 2012년 런던 대회에서는 동메달을 차지했다.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 때 뒤늦게 올림픽 정식 종목이 된 야구는 프로화를 기반으로 끌어올린 경기력으로 2000년 시드니 대회 동메달, 2008년 베이징 대회 금메달의 성과를 이뤘다. 한국 야구는 정식 종목 재진입이 확실시되는 2020년 도쿄 올림픽에서 다시 한번 메달에 도전할 만한 경기력을 유지하고 있다.
1980년대 프로화 3총사 가운데 씨름은 2000년대 들어 급격한 인기 하락과 함께 프로 종목으로서 내세울 만한 콘텐츠 없이 암흑기를 겪고 있어 스포츠 팬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글 신명철 편집위원, 전 편집국장 smc6404@naver.com
나는 1952년 경남 합천군 초계면의 한 시골 마을 방앗간 집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우리 집은 아들만 여섯인 아들 부자 집이다. 원래 어머니는 아들만 일곱을 나으셨는데 첫 째는 돌도 못 넘기고 잃었다고 한다. 그 후 집안의 귀한 첫 아들로 태어난 나는 태어난 후 사흘 동안 눈을 뜨지 않아 부모님의 애를 태웠고, 어릴 때 비행기만 떠도 놀라서 경기가 드는 아이였다고 한다.
우리형제들은 모두 호적 나이가 실제 나이보다 일 년 씩 어리게 되어있다. 돌까지 살아남으면 호적에 올려주었다. 아마 첫째를 돌전에 잃었기 때문인 듯하다. 이 덕분에 나는 퇴직 시 명퇴금을 1년 치나 더 받을 수 있었다.
어머님과 아버님은 고향 마을에서 한집 사이를 두고 결혼을 하셨는데 그 중간 집에 사시는 분이 중매를 하셨다고 한다. 우리 부모님은 동네에서 잉꼬부부로 소문난 금슬이 좋으신 분이셨다. 아버님은 엄격하시고 강직한 분이셨다. 반면 어머님은 따뜻하고 정이 많으신 분이셨다. 아들들을 한없이 칭찬하고 격려하시고 보듬어 주신분이다. 우리 형제들은 우리집안의 유일한 여자 분인 어머님을 무척 좋아했다. 지금도 우리 형제들은 돌아가신 지가 15년이 지났지만 모이면 어머니 애기를 자주하고 다섯째는 대기업의 임원이지만 술 한 잔 되면 보고 싶다고 울곤 한다.
할아버지의 손자 사랑은 지극하셨다. 손자들이 많았기에 우리는 돌만 지나면 사랑방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잤다. 할아버지는 손자들 이불을 덮어주시고 음식도 챙겨주셨다. 손자들에 대한 자랑과 자부심이 대단하셨다. 친구 분들이 오실 때면 언제나 불러 인사를 시키셨다. 우리형제들은 그 당시 초등학교에서 형제들 모두가 급장을 다 하던 때라 자랑이 대단하셨다. 내가 나중에 취직이 되어 첫 월급을 새 돈으로 할아버지께 용돈을 드렸는데 돌아가실 때까지 그 돈을 보관하고 계셨던 분이다.
우리 할머니는 연약하신 분이지만 우리 형제들은 모두 할머니 등에 업혀 자랐다. 낳아주신 분은 어머니이고 키워주신 분은 할머니이다. 할머니 등은 손자들의 코 때가 지워지는 날이 없었다. 서울에서 방학 때 내려가면 맨발로 뛰어 나오시던 분이다. 나는 첫 손자로서 조부모님의 사랑을 한없이 받고 자랐다.
우리 집의 가훈은 우애(友愛)이다. 할아버지는 손자들에게 어릴 때 귀가 닿도록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하셨다. ‘조선팔도 다 다녀도 형제같이 화합할까’ 할아버지께서 항상 우리에게 하시던 말씀이다. 우리 형제들은 이 말씀을 어머님 돌아가신 15주기 때 고향 우리 집 정원에 비석으로 새겼다.
나는 초등학교에서 모범생 이었다. 한 학년에 두 반인 작은 시골 학교였지만 나는 입학해서 졸업할 때까지 6년간 급장을 했고 선생님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부모님도 아들을 자랑스러워했다. 소먹이기, 풀베기, 나무하기 등 집안일도 잘 도와드렸고 어머니가 가지 오이 등을 장에 갖다 팔아야 할 때는 리어카에 실어다 드리는 착한 아들이었다.
나는 1968년 무장공비 김신조가 청와대 담을 넘어 공격하던 해 서울 경기상업고등학교로 유학을 왔다. 경기상고는 시골에서 올라온 가난하지만 우수한 아이들이 많았다. 청운중학교와 같은 교정이어서 청운 중학교 출신도 많았다. 고향 초계중학교에서는 서울로 두 명이 유학을 왔는데, 친구는 배제고등학교를 가고 난 경기상고에 입학했다. 친구는 고모 집에서 다니고 나는 삼촌 집에서 다녔다. 그 후 세월이 흘러 나는 은행원이 되었고 친구는 고대의대를 나와 강릉의 유명한 외과의사가 되었다.
경기상고는 일제 강점기에는 경기도립상업고등학교로 도상이라 불렸던 학교로 일제 때부터 훌륭한 선배들이 많았다. 당시 정·재계에는 태완선 총리, 김종희 한국화약 회장님 등을 비롯한 분들이 포진해계셨고 특히 금융권에는 임원들이 많았다.
내가 경기상고를 선택한 것도 유연이다. 아버지와 서울에 올라와 어떤 학교를 가야할지 고심할 때 삼촌 이웃에 양정고등학교 선생님으로 퇴직한 분이 계셨는데, 이분이 도상을 추천해주셨다. 아버님은 대구상고를 나와 제일은행에 취직한 고향의 내 친구 형으로부터 ‘은행에 취직을 하니 당장 선생님의 월급보다 많더라’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아들을 은행에 취직시키고 싶어 하셨다. 양정고 퇴직 선생님은 상고 중에는 도상이 최고라며 당장 도상을 추천해 연희동에서 청운동까지 버스를 갈아타면서 먼 길을 삼년을 다녔다.
상고에서 은행에 취직하는 것은 인문계학교에서 대학에 진학하는 것과 같았다. 매년 어느 은행에 몇 명이 합격했는지 통계를 내고 홍보하던 때였다. 우리학교는 한 학년이 7개 반으로 6개 반이 취직반이고 마지막 7반이 진학 반이었다. 취업반은 은행 취직을 위한 전략을 세워 공부했다. 가장 공부 잘하는 학생은 한국은행, 산업은행, 외환은행 순으로 가고 다음 조흥, 상업, 제일, 한일, 서울은행 등을 갔다. 나는 신설된 한국신탁은행을 지원 했다. 신설된 은행이 향후 전망이 나을 거라고 선생님이 추천해 주셨다. 그해 경쟁률이 높아 우리학교에서는 나를 포함해 두 명 만이 합격했다. 대졸 중견 30명, 상고 졸 초급 60명을 모집했는데, 대졸 중견은 서울 대 출신이 반이 넘고, 나머지는 연대, 고대 등 대부분 명문대 출신이 전부였다. 71년 당시는 지금처럼 삼성, 현대, 엘지 같은 대기업이 성장하기 이전 이어서 공무원, 한전, 은행 등으로 인재들이 몰리던 시기였다.
그 당시 은행의 대우는 좋았다. 복지제도가 좋고 각종 수당이 수시로 나왔다. 그러나 입행을 하고나니 아무래도 대학을 가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건국대학교 경영학과 야간 학부에 시험을 봐 합격했다. 그러나 말단 직원이 대학 수업시간에 맞추는 것이 어려워 포기하고 다시 이듬해 야간 전문대학인 서대문에 위치한 국제대학을 지원 해 입학했다. 이 학교는 야간만 있는 대학으로 저녁 6시에 수업을 시작해 그 당시 인기가 있었다. 나는 경영학과에 입학했는데 정원이 30명으로 우수한 인재가 많았다. 한국은행, 산업은행 등 상고출신이 많았다. 적은 인원의 대학이지만 그 당시 매년 사법, 행정고시, 공인 회계사 등의 합격자들을 배출했던 시기이다. 내 친구도 산업은행에 다니면서 공인회계사 전국 수석 합격했다.
그때는 그야 말로 주경야독을 했던 시기이다. 은행의 업무는 최대한 빨리 끝내고 대학 수업시간에 맞추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동료들의 도움을 많이 받아야만 했다. 상사들의 눈치도 봐야 했다. 저녁은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라면으로 때우기가 일수였다. 4년을 그렇게 생활하니 위장병이 생길 것 같았다. 토요일도 근무하던 때라 일요일은 도서관에서 공부해야했다. 그래서 나의 이 시기는 다른 애들처럼 취미생활을 하거나 연애를 할 틈이 없었다.
그 당시 나에게는 큰 짐이 있었다. 둘째 동생이 서울로 올라와 중대 앞에서 자취를 하면서 같이 공부했다. 얼마 후에는 막내를 제외한 세 명의 동생들이 모두 서울로 올라와 동생들과 힘든 시기를 보냈다. 아버지는 학비와 쌀을 올려 보내주시지만 아들들이 공부하기엔 턱없이 부족하기에 나는 힘을 보텔 수밖에 없었다. 나는 75년 2월에 대학을 졸업하고 그해 12월에 군에 입대를 했다. 나 혼자 만의 일이라면 대학 2학년 정도 마치고 군대를 다녀오는 것이 좋겠지만 동생들을 남겨놓고 입대할 수가 없어 4학년을 마치고 친구들이 다 제대를 할 즈음 입대를 해야만 했다. 내가 입대를 해도 은행은 본봉의 월급이 나오는 때라 그 돈으로 동생들은 학교를 다녔다. 지금도 이야기 한다. 동생들이 형의 월급을 받으려 은행에 갔던 시절을…
둘째 동생은 중앙대 법대에 나왔다. 졸업 후 삼성생명에 입사해 항상 전국에서 일등의 업적을 내는 유능한 직원이 되었다. 신한생명 초기에 스카우트되어 신한그룹 최연소 임원이 되어 부사장 까지 승진해 8년이나 임원생활을 하고 지금도 퇴직해서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그 때 동양중학교 학생으로 다니던 다섯째 동생은 한양대 경영학과를 나와 지금은 롯데 칠성의 임원으로 재직 중이다. 필리핀 펩시콜라 사장을 5년 동안 역임했고 우리 동생 중 아직도 떠오르는 별이다. 나머지 두 동생도 대구에서 사업을 잘하고 있다. 힘든 시기를 넘겨 좋은 결과가 있어 보람은 있는 일이었다.
79년 제대를 앞두고 아버지의 권유로 첫선을 보았다. 휴가 중 서울의 작은 다방에서 맞선을 보았는데 단 한 번의 만남으로 결혼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그렇게 쉽게 평생의 배필을 선택 했는지 신기하다. 서로의 가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고, 부모님께서 미리 선을 봐 합격점을 준 상태라 하지만 개인적으로 서로에 대해 전혀 알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아내는 면장님의 둘째 딸이라 자라면서 큰 힘든 일은 해본 적 없이 곱게 자란 규수였다. 그 당시 나는 장남으로서 결혼 후에도 동생들을 데리고 있어야 할 형편이어서 아내를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대학에서 나를 따르는 여자도 있었고, 은행에서 자취집에까지 찾아온 여자도 있었지만 결혼을 쉽게 결정할 수는 없었다.
79년 6월 제대를 하고 11월에 결혼을 했다. 아버지는 내가 장남이라 전통혼례식을 올리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신부 집에서 아내는 족두리를 쓰고, 난 사모관대를 쓰고 혼례를 올렸다. 동네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멍석을 펴놓고 상위에는 살아있는 닭이 퍼덕 거렸다. 첫날밤은 신부 집에서 보내기로 하는데, 그 날 밤 신랑을 짓궂게 장난을 거는 사람 들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어 나와 아내는 저녁에 해인사로 피신하는 신혼여행을 떠났다. 밤중에 택시를 타고 해인사로 향하던 신혼 여행길에 노루가 튀어 나와 놀라던 추억이 새롭다.
내가 아내를 단한번의 선을 보고 선택한 것은 일종의 모험이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 보니 내 일생의 가장 잘 한 선택이었다. 아내는 검소하고 강하고 현명한 사람이었다. 지금 형제들이 성공하여 화목하게 잘 지내는 것은 대부분 아내의 공로인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후회스런 일을 꼽으라면 신혼초기 아내가 힘들 때 너무 도와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동생들 뒷바라지에 아이들 키우기 힘들 때 연탄불 한번 갈아준 적이 없고, 아이들 한번 제대로 봐준 적이 없다. 아내는 밤중에 아이가 깨어 울면 남편 잠 못 자 직장생활에 지장을 줄 까봐 아이를 다른 방으로 대려나가 밤새 혼자 방을 새우곤 했다. 아내는 그렇게 자신을 희생하고 오직 나를 위해 정성을 쏟은 그런 여자였다. 그 당시에는 왜 그리 철이 없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은행에 입행해 퇴직을 하기까지 만 38년을 다녔다. 지나고 보니 나는 직장 운은 좋았고 축복을 받은 사람이었다. 은행이란 직장은 안정되고 복지가 훌륭하고 좋은 직장이었다. 아이들 대학까지 등록금을 주고 집을 마련하도록 사원주택 아파트를 주고, 월급날 하루도 늦은 적이 없고 지점장 시절 억대가 넘는 연봉에 퇴직금도 적지 않은 직장이다. 재직 시에도 지점장 명함이면 누구나 신뢰하고 인정을 해주는 곳이다.
나는 초년 시절부터 성실했고 열심히 노력했다. 언제나 상사의 인정을 받았고 지점에서 언제나 대부계 같은 요직을 담당했다. 자기계발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주경야독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88년에는 해외 OJT연수를 미국 시애틀 은행으로 다녀왔다. 그 후 은행의 중요 부서인 종합기획부에 과장으로 근무하고, 카드 사업부, 개인금융부 등에서 차장으로 근무했다. 1998년 지점장으로 나갈 때 까지 황금기의 시절을 보냈다.
카드사업부에 근무할 때는 해외여행의 기회가 많았다. 일본 JCB카드사, 미국 비자사, 마스터 카드사, 유럽 유로페이 등 카드사를 매년 연수를 다니면서 여행할 수 있었다. 특히 시애틀 연수 후 미주, 유럽, 하와이, 동남아, 핀란드, 스페인, 지중해 해협 등 유럽 전역을 장기간 여행한 경험은 좋은 기회였다.
은행 승진도 남보다 늦지 않게 진급했다. 지점장 진급은 아이러니컬하게도 IMF 덕분에 빨랐다. 선배들이 명퇴를 하고 서울은행, 제일은 행이 매스컴에서 회자될 때 오히려 해택을 보았던 셈이다. 하나은행과의 합병 시에도 많은 직원이 퇴직을 했지만 그때도 살아남아 십년이 넘도록 지점장 생활을 하고 임금피크제 까지 일 년을 하고 퇴직할 수 있었다. 당시의 상황으로는 은행원의 천수를 다한 셈이다.
지점장 생활은 10년 동안 시흥남, 관양동, 수원, 서빙고, 부천, 성남 등 6개 점포를 거쳤다. 그러나 가장 기억에 남는 점포는 처음으로 부임한 석수역 앞에 위치한 시흥남지점 이다. 첫 지점장 발령을 받고 휴일 혼자 점포를 찾아가 어떤 전략을 구사할 것인가 많이 고심을 했던 기억이 새롭다. 아내는 많은 걱정을 했다. 사교성도 없는 고지식한 사람이 점포영업을 잘 할 수 있을 까 걱정을 많이 해, 지점장으로 승진을 했는데도 그렇게 좋아하지 않은 듯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지점 실적이 부진하여 평가에 하위 성적을 받으면 명퇴의 우선대상자가 되어 퇴사해야 할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내의 예상외로 난 지점장으로서의 점포경영을 십년이상 훌륭히 잘 수행했다. 내가 부임한 점포는 전임 점포장이 실적 부진으로 불명예 퇴진한 곳이 많았지만 나는 훌륭히 점포를 잘 부활시켰다. 나는 점포 경영의 핵심은 직원들의 관리와 경영 전략에 있다고 믿는다. 점포장의 철학과 의사결정이 중요하다. 그 핵심은 사람의 관리에 있다고 확신한다.
2009년 1월 은행을 퇴직했다. 재직 시에 시간이 없어 못했던 골프를 학교친구들이나 동생들과 같이할 수 있어 좋았다. 5월에는 홀인원을 하는 행운도 누렸다.
양재천과 대공원을 몇 년을 걸으면서 나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퇴직 1년 전에 과천어울림 남성합창단에 입단했다. 매주 화요일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연습해서 매년 연말에 시민회관에서 정기공연을 한다. 벌써 정기 공연을 일곱 번을 넘겼다. 7년이 지난 셈이다. 단원이 30명이 넘어 지역사회에서 새로운 친구를 많이 알게 되었다. 플루트는 퇴직 후 시작해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다. 아들결혼식 때 연주하고 퇴직직원 모임 등에서도 연주했다. 지금은 동호회를 만들어 매주 목요일 부림동 문회센터에서 연습하고 레슨도 받는다.
퇴직 후 5년을 쉬고 나니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2014년 새로운 준비를 해보기로 결심을 했다. 자격증을 취득하고 공부를 시작하기로 했다. 유통관리사를 3개월 동안 과천도서관에 다니면서 공부해 합격을 했다. 그리고 경영지도사 공부를 시작해 지난해 1차 시험에 합격하고 2차 시험을 준비 중이다. 그리고 이듬해 3월 호서대글로벌창업대학원에 입학해 이제 졸업을 위해 논문 준비 중이다
2014년에는 건국대학교 미래지식교육원에서 시니어플래너 과정을 공부하고 같이 공부한 동료들 5명이 KSP교육협동조합을 만들고 나는 이사장직을 맡았다.
다음해는 도심권이모작센터의 열린강사에 선정되어 평생 처음 강사로서 강의를 3차례 해보았다.
2015년에는 KDB 시니어브리지 아카데미 과정을 공부하고 시니어블로거협회에 참여하게 되어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머니투데이 방송에 시니어 악기배우기라는 주제로 방송에도 출연했다. KBS 시니어토크쇼 ‘황금연못’의 패널로도 출연하고 한겨레신문 시니어통신에 기고도 했다. 2016년 3월에는 공무원연금공단 미래설계교육 여가 주거부문 강사로 선정되었다. 매달 2회 제주, 설악산, 수안보, 천안 등에서 퇴직을 앞둔 공무원들 대상으로 강의를 하고 있다.
대학원 동문들과는 석사 박사과정을 마친 24명의 동문들이 참여해 컨설팅프렌즈라는 컨설팅회사를 창업했다. 졸업을 하면 이 멤버들과 할 일이 많아질 것 같다.
퇴직 후 만 7년의 세월이 지났다. 앞으로 얼마나 시간이 남아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시간의 속도는 더 빨라지는 것 같다. 내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조금은 알 것 같고, 인생이란 직접 경험해보아야만 알게 되는 것이 많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지금부터는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가치 있는 일들을 하고 싶다. 아내와 내가 건강하고 아들과 딸은 독립하여 제 몫을 잘하고 있다. 손녀의 재롱이 귀엽고 한 때 어려웠던 시절을 보냈던 동생들과 할아버지의 가훈처럼 화목하게 지낸다. 이러한 가족 간의 사랑이 무엇보다 소중하다. 그리고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면서 주변의 사람들도 돌아보고 작은 재능이지만 나누는 삶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 것이라 믿는다.
말이 씨가 된다고 8년 전에 친구들과 지나가는 말로 이야기한 크루즈 여행을 친구 3가족과 같이 6월 초에 다녀왔다. 8년 이상 적금을 들어 준비한 것이 중도에 포기하지 않은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처음에는 알래스카로 가기로 했다가 우여곡절 끝에 서지중해로 변경되어 10일 동안 이탈리아의 밀라노로 비행기로 가서 배로 제노아, 로마, 시칠리아섬, 몰타, 스페인의 팔마 드 마요르카, 발렌시아, 프랑스 마르세이유를 여행했다. 하나 여행사를 통해 갔는데 10명이상이 안 되면 어렵다는 것을 힘들게 부탁해서 6명이 갔다. 돌아와서 만난 지인에 의하면 현지로 가서 크루즈 선박사와 직접 거래하면 좀 저렴할 것이라고 하니 의향이 있는 분은 알아보기 바란다. 승객과 승무원을 합쳐 5,000명이 탑승한 14만톤급 배 프리지오사는 아파트 17층 높이로 거의 움직임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럽게 운행되었다. 전날 과제를 처리한다고 밤을 새웠고 6월 초에 있는 많은 약속과 행사를 포기했다. 다른 일정과 겹쳐 많은 대가를 치르며 다녀 온 셈이다.
배에는 숙박시설, 식당, 공연장, 수영장 등 모든 시설이 있어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배에 있을 때는 잠을 줄이고 시간을 최대로 활용하여 춤 배우고 공연 보며 수영하고 헬쓰하며 수시로 식사하고 차 마시는 등 세상일을 잊고 자유롭게 보내는 호사를 즐겼다. 그러다 보니 돌아 올 때가 되니 너무 힘들어 병이 날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10일 이상 크루즈 여행은 무리라는 이야기도 나왔다. 밤새 배로 가다가 기항지에 도착하면 현지 투어를 다녔다.
크루즈 여행은 배에서 숙식이 가능하고 시간을 경제적으로 활용하여 여행하는 것이 가능하여 미국과 유럽에서는 많이 이용한다고 한다. 같이 간 친구들도 일정조정으로 힘들어 했지만 다들 잘 다녀왔다고 이야기한다. 그동안 열심히 살아온 자신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하며 즐겼다. 어느새 회갑을 맞이한 친구들과 남은 삶은 여유롭고 품위있게 살자는 것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70세까지 5년마다 다른 곳으로 크루즈 여행을 가기로 약속했다. 목표를 정하면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한다. 두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