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한땀 한땀 바느질해 곱디고운 옷을 지어 인형에게 입혔던 기억이 생생하다. 종이옷 만들어 입힐 때는 예쁜 무늬를 그려 넣고 색칠해가며 한껏 재주를 피워댔다, 특히 헝겊으로 인형 옷을 지을 때는 어머니가 모아 놓은 일본 잡지들을 꺼내 신식 스타일의 원피스를 만드느라 고심했었다. 길에 다니다가 바람에 굴러다니는 잡지 쪼가리가 패션에 관한 거라면 무조건 집으로 가져와 깨끗하게 걸레로 닦아서 모았다. 그 지저분한 것들을 결혼해서도 이사할 적마다 가지고 다니면서 고이 모셔 뒀는데 잡지 모델같이 변신하는 건 단지 꿈이란 사실을 자각하고 60세 되었을 때 죄다 태워버렸다. 이 잡지 태우면서 얼마나 아까웠던지 모른다. 마음 비우기는 그리 어려운 것이다.
결혼하고서도 눈은 묘한 것들을 찾으려 반짝였다. 외국에라도 나가면 발발거리며 여자들의 차림에서 뭔가를 찾아내려고 애썼다.
그런데 1970년대에 영국에 갔다가 알아낸 것은 호호 할머니가 돼도 매니큐어 짙게 칠하고, 엘리자베스 여왕이나 다이애나비처럼 하늘하늘한 꽃무늬 원피스에 예쁜 꽃 모자를 쓸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필자가 시니어가 됐을 때 차림을 그려가면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그 뒤 1980년대 일본에서는 아무리 나이 먹어도 긴 머리를 늘어뜨릴 수 있다는 걸 배웠다. 이런 시니어의 모습을 교훈 삼아 발목 걸이까지 자신 있게 걸고 다녔다. 요즘 가끔 젊은 여성들이 하고 다니는 발목걸이를 무척 오래전부터 즐겼던 것이다.
그리고 1995년 아르헨티나에서는 탱고를 어디에서나 즐길 수 있는 할랑대는 원피스를 입은 시니어들에게 꽂혔다. 이어 1996년엔 스페인에서 한 달 보름을 지냈는데 얇은 블라우스를 입고 모피를 걸친 채 앞을 트고 다니는 멋쟁이 시니어들에 반했다. 그리고 획기적인 쫄바지에 푹 빠져 귀여운 판다 곰 무늬가 들어간 쫄과 검은색 쫄을 두 개나 사게 되었고 지금까지 즐겨 입는다. 한국에는 언젠가 대유행했지만 그 당시엔 쫄 바지가 없었다. 필자가 쫄바지의 원조였던 셈이다.
일본에서 1년간 일할 기회가 있었던 어느 아줌마가 필자와 만난 자리에서 큰 소리로 “일본 여성은 늙어도 얼마나 귀엽고 예쁜지 모른다. 보는 내 눈이 황홀해질 정도다”라고 했다. 필자는 동의의 의미로 깔깔 웃었다. 그가 일본 시니어 여성이 예쁘다고 한 것은 진짜 겉모습이 예뻐서가 아니다. 그들의 패션이 그들을 눈부시게 만든 것이다. 필자도 이 아줌마처럼 일본에서 시니어 여성들의 패션에 눈이 갔다. 시니어가 되면 아이들과 같이 마음이 순진하고 귀여워진다니까 차림새도 밝고 깔끔하게 챙겨야 한다는 게 지론이다. 아주 눈에 나지 않는 한 인형처럼 곱상하게 차려입는 편이 낫다고 믿는다.
한국 아줌마의 전형처럼 돼버린 뽀글파마는 거부하는 대신 긴 생머리를 한다. 너무나도 파마를 안 해서 길이 안 든 탓에 이젠 파마도 안 나온다. 다만 긴 생머리는 바람 부는 날에는 흩어져 산발이 돼 버리니 모자도 꼭 가지고 다니며 쓴다.
프랑스 파리 거리에서 자주 만나는 바게트 한 봉지를 끼고도 끼리낌 없게 걷는 자신만만함을 시니어들도 배워야 한다.
7월 20일 예술의 전당에서 ‘피아니스트 오윤아의 재즈, 탱고, 클래식의 만남’ 공연이 있어 갔다 왔다. 프로그램에 아스토르 피아젤라의 누에보 탱고가 클래식과 융합하여 연주된다 하여 벼르던 공연이었다. 탱고는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지구 반대편 아르헨티나의 전통 음악인데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난히 좋아하는 음악이다. 우리 가요 중에도 탱고 풍의 가요가 많다.
춤도 그렇다. 스탠더드 댄스 5종목에 탱고가 들어가는데 왜 라틴아메리카 지역에서 태동한 댄스인 탱고가 라틴댄스에 안 들어가고 왈츠, 폭스트로트 퀵스텝 등과 함께 스탠더드 댄스에 들어가는지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탱고의 문화사를 알아야 이것을 이해할 수 있다. 탱고는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인 1900년대 초에 유럽에서 아르헨티나의 항구 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민 간 사람들이 처음 췄다고 한다. 주로 이민 간 노동자들이 사창가 등 빈민가에서 추던 춤이라 관능적이었다. 이 춤이 유럽에 건너갔을 때 추기경들을 비롯해서 귀족들이 반대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20년에 런던에서 몇 가지 동작을 스탠더드 댄스 동작에 맞춰 표준화해 오늘날의 컨티넨탈 탱고, 또는 인터내셔널 탱고가 되었다. 기존의 탱고는 그대로 아르헨티나 탱고로 불린다.
초기의 탱고는 춤을 위한 음악이었다. 아르헨티나 전통음악이 된 것이다. 그러다가 이를 클래식이나 재즈처럼 별도의 음악 장르로 승격시킨 사람이 바로 아스토르 피아졸라이다. 그러므로 탱고는 피아졸라 이전의 탱고와 이후의 탱고로 나눠 피아졸라가 만든 탱고는 ‘'새로운 탱고(Nuevo Tango)'라 부른다.
피아졸라는 탱고 춤이 유럽에서 한창 수난을 당하고 있을 1921년에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났다. 4세 때 부모를 따라 뉴욕으로 이민 간 덕분에 여러 장르의 음악을 공부할 수 있었다. 피아졸라가 16세이던 1937년, 그의 가족은 다시 아르헨티나로 돌아 와서 반도네온 연주자로 활동했다. 아르헨티나에서 음악공부를 계속했던 그는 배움에 대한 갈증으로 1954년 프랑스로 유학 가서 세계적인 음악 스승인 나디아 블랑제를 만났다. 나디아 블랑제가 피아졸라의 탱고 연주를 듣고 탱고를 버리지 말고 승화시키라는 말을 들었다. 다음 해인 1955년에 귀국하고부터 누에보 탱고를 만들기 시작했다.
아르헨티나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지 200년 정도 밖에 안 된 나라이다. 나라는 큰 데 일할 사람이 없으니 유럽 이민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차 대전 덕분에 고기, 낙농 제품, 광물 등을 수출하며 세계 5대 경제 대국에 들어갔다. 그러나 1940년대 페론 정부가 들어서면서 실업자들에게도 직장인 평균임금보다 1.5배나 더 많은 수당을 주는 포퓰리즘 정책을 펴 나라가 망했다. 그리고 망한 나라에서 모든 피해는 온전히 노동자에게 돌아갔다. 이렇게 소외된 노동자들은 탈출구가 필요했다. 그 탈출구는 바로 밀롱가를 찾는 것이었다. 말롱가에 오는 노동자에 맞춰 탱고가 탄생했다. 그리고 이 탱고를 클래식이나 재즈에 버금가는 음악 장르로 수준을 올려 놓은 사람이 바로 피아졸라이다.
이날 연주는 피아졸라의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4계’ 피아노 3중주로 시작했다. 이 곡은 이탈리아 작곡가 안토니오 비발디의 ‘사계’처럼 각기 다른 시점에 만들어졌으나 나중에 4계로 묶었다. 인터미션 후에는 피아졸라의 명곡 ‘Tangata’, ‘Milonga Del Angel’, ‘Oblivion’, ‘Libertango’가 연주되어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특히 ‘자유의 탱고’라는 ‘Libertango’는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외에도 드럼, 다양한 아르헨티나 타악기가 합주되면서 최고의 무대를 선보였다.
이날 연주에서 미국의 팝 클래식 대가 폴 쉔필드의 ‘Cafe Music for Piano Trio’도 눈길을 끌었다.
2016년 1월 지구촌에 10억 달러(약 1조1천억 원)이상을 가진 ‘억만장자’는 1810명이다. 그중에 한국인 억만장자는 총 31명이다.
세계 최고 부호는 마이크로소프트 빌 게이츠’ 750억 달러(약 82조 원)로 1위이고, 스페인 패션업체 자라의 오르테가가 670억 달러로 2위, 워런 버핏이 608억 달러로 3위이다. 멕시코의 재벌 카를로스 슬림은 500억 달러로 4위,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는 452억 달러, 페이스북 마크 저커버그는 446억 달러, 오라클의 래리 앨리슨는 436억 달러로 나란히 5∼7위에 랭크됐다.
미국 대통령 공화당 경선 후보 도널드 트럼프는 45억 달러의 자산가로 세계부자순위 324위에 올랐다. 한국에선 상성그룹 이건희 회장 96억 달러로 112위, 아모레퍼시픽 서경배 회장 77억 달러로 148위, 현대자동차 정몽구 회장 3억 달러로 351위, 스마일게이트 권혁빈 회장 37억 달러로 421위다. 한미약품의 임성기 회장은 22억 달러로 810위에 새롭게 이름을 올렸다.
재벌 이야기로 서론이 길었는데 각설하고.직업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일상적으로 종사하는 일을 말한다.
쉽게 이야기 하면 생계를 꾸리기 위해 직장(취업. 창업)을 갖는데 그때 직업을 가졌다고 이야기 하며, 직업이 두 개가 있으면 투잡이라고 한다.
직업은 신성하고 존엄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직업은 그 일을 통해 물질적 생활을 유지해 나갈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안정을 얻는 주축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사회 비평가 러스킨은 ‘모든 사람은 다 같이 일하고, 또 생계를 세울 권리를 갖는다. 법률가도 이발사도 일의 가치에 있어서는 아무 차이가 없다.’고 했다. 오늘날 직업은 사농공상 관념은 없어지고 그 대신 모든 직업의 사회적 가치가 강조되고 있다. 직업은 우리의 모든 삶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빌게이츠, 주크 버그, 마윈, 손정의’를 성공한 기업가라고 하지만 끈임없이 성장하지 않으면 그들도 불안하기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 누구보다 자기 직업에 충실한다.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새로운 기술에 대규모 투자를 한다. 엄청난 연봉으로 인재를 스카웃하기도 하고, 사업 비전이 없으면 과감히 정리를 한다. 보통사람들보다 머리 아픈 일이 수백 배는 될 것이다. 소송, 노동조합, 종업원 복지, 상속과 사회기여 등 어디 쉬운 것이 하나도 없다.
직업의 목적은 생계유지를 위한 돈벌이 뿐만이 아니고, 자아실현을 하고, 사회적 구성원으로 사회적 역할수행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세계적인 재벌도 모두 똑같다.
노후 준비에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경제력을 갖추고 있거나, 충분한 재테크를 해서 먹고사는 걱정은 없더라도 집밖에 나갈 일이 없거나, 어느 단체나 조직의 일원으로 함께 밥 먹고, 차 마시고, 소맥 한잔을 할 수 없다면 삶이 무기력해 지고 건강도 나빠진다. 노후는 이런 일상적인 것을 전제로 해서 재무적인 문제를 접근하는 것이 좋다.
일을 통해 자존감이나 정체성이 확립되고 타인과 상호작용하면서 사회적 관계가 유지될 때 삶의 만족도는 올라갈 것이다.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이 선망하는 여행지 중에 한곳이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 일 것이다. 한번 쯤 살아온 길을 되돌아보고 싶은 시니어들에게는 특히 더 가고 싶은 곳으로 버킷리스트로 까지 꼽는 사람을 자주 볼 수 있다.
스페인 순례길 산티아고를 다녀온 사람들 중에는 간혹 ‘카미노 블루’ 라는 일종의 산티아고 향수병을 앓고 있음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있다. 순례길을 다 걷고 일상으로 돌아와서 그곳에 다시 가고 싶은 마음이 그리움을 넘어 우울하기 까지 하다 해서 생긴 말이다. 약 800키로의 아름다운 길을 매일 20 내지 30 킬로 로 나눠서 한 달 넘게 걸으며 길에서 아름다운 풍경, 그리고 세계 각국의 친구 들 그리고 또 다른 ‘나’ 를 만날 수 있으니 고단한 일상 속에서 어찌 그 길이 그립지 않겠는가? 4년 전 그 길을 걸은 필자 또한 남들처럼 대단한 감정 격량 없이 다소 덤덤하게 걸었음에도 매해 5월 이면 가벼운 카미노 블루 증세가 나타나서 핸드폰 바탕화면과 SNS 프로필 사진을 산티아고 사진으로 바꿔 놓고 그리움에 빠져들곤 한다.
이런 필자에게 영화 ‘나의 산티에고’ 의 국내 상영 소식은 무언가 함께 큰 어려움을 이겨내고 대단한 것을 같이 얻어 낸 마치 동지를 만난 거 같은 반가움으로 한달음에 극장으로 달려갔다. 영화 속에서라도 다시 한 번 산티아고를 걸어 보리라 마음먹고 그 때 산티아고를 홀로 걸었을 때와 똑같이 혼자 극장을 찾아 관객들과 뚝 떨어진 호젓한 자리에 홀로 앉아 영화를 감상했다.
영화 ‘나의 산티에고’는 독일의 유명한 코미디언 하페 케르켈링이 ‘그 길에서 나를 만나다’ 라는 책을 영화화 한 영화다. 영화는 독일의 유명한 코미디언이 갑자기 건강에 이상이 생겨 일을 쉬게 되면서 번아웃(Burn out) 증후군으로 무기력 하게 시간을 보내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게 되고 거기서 지난날을 돌아보며 자신만의 화두에 계속 질문을 던지며 서서히 자신을 찾아가는 이야기 이다.
영화를 보면서 필자 생각과는 조금 다르게 펼쳐지는 순례길 풍경에 고개가 갸우뚱거려졌다. 산티에고의 시작인 피레네 산맥이 피레네 산맥의 아름다움과는 전혀 다른 지중해의 어느 돌산 같은 풍경을 보며 보는 의아해 하였고 영화를 보는 내내 산티아고의 풍경에 이해가 가지 않는 풍경들에 당혹스럽기 까지 하였다.
그리고 도대체 이 주인공은 어디서 잠을 자고 무엇을 먹은 것인지. 황망하게 쳐다보던 음식과 알베르게(순례자 전용 숙소)를 너무 끔찍해 하며 일반 순례자들과 떨어져 호텔에서만 잠을 자는 모습을 보면서 호텔을 이용하지 않고 알베르게 에서만 잠을 자고도 별로 불편하지 않았고 가는 곳마다 가격 대비 제법 근사한 ‘메뉴 데 디아(순례자의 메뉴)’를 먹었던 필자로서는 너무 놀랍고 이해가 가지 않는 장면들이었다.
산티에고를 꿈꾸며 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산티에고 순례길에 대해서 괜한 오해와 두려움을 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어 씁쓸하기 까지 했다.
비록 아름다운 산티아고의 풍경과 세계 여러 나라 순례객 들이 그 길을 걸으며 얼마나 서로 다정하게 위하고 나누며 친밀하게 지내는지 등을 담아내지 못해 아쉬움이 많이 남았지만 주인공이 자신을 돌아보는 과정, 길에서 만난 친구의 상처에 함께 연민하고 위로하며 함께 치유하는 과정의 장면 등에서는 나의 산티에고 와 오버랩 되면서 주인공과 함께 울고 함께 가슴이 뻐근함을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순례를 마치는 장면에서는 마치 모든 길을 같이 걸은 듯이 함께 가슴이 벅차 오르며 눈물이 났다.
이 영화를 보고 필자는 5월도 지났건만 그때의 사진을 꺼내 보면서 다시 한 번 심하게 카미노 블루를 앓을 것 같다.
제주도에는 가끔 갔지만 한라산에 올라 백록담을 못보고 내려오기를 여러 번, 기어코 이번에는 백록담을 보고 오기로 하고 2박3일의 제주도 여행을 계획했다. 인생이라는 게 다 그렇 듯, 다람쥐 채바퀴 돌 듯 돌아가는 세상에 늘 퍽퍽하고 지루하기만 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고자 군 시절의 동기인 3부부가 의기 투합하여 꽃향기가 그윽한 5월의 어느 날 제주도로 떠났다. 2박3일 중, 한라산 등반은 두 번 쨋날로 정했다.
상판악에서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한라산 등반!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잠속으로 빠졌들었는데…. 또드락 뚝딱! 또드락 뚝딱… 고요한 아침공기를 깨고 거실 쪽에서 도마에 칼질하는 소리가 아련하게 귓전을 울렸다. 눈을 번쩍 떠보니 창문너머로 환하게 동이 터오고 아직은 어둠이 채 가시지도 않은 주방에서 식사준비를 하는 아낙들의 조용하면서도 부지런한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덕분에 아침식사는 걸쭉한 전복죽으로 영양을 보충하였는데, 각자가 한라산 등반을 대비하여 두세 그릇씩을 뚝딱 비워 든든하게 속을 채웠다.
해발 1950m의 한라산 정상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는지 걱정은 태산이면서도 웬 먹을거리를 그리도 많이 준비하였는지? 돼지고기 수육에 홍어회와 양념장류, 각종 나물류, 그리고 금세 지은 밥을 바리바리 배낭에 넣고 그것도 모자라 막걸리에 물까지 챙겨 넣고 보니 배낭무게만 해도 어깨가 묵직하기 그지없었는데, 설상가상 무거운 카메라까지 목에 걸고 보니 아득하기만 했다. 하지만 우리가 누구랴! 한창 젊은 시절에는 웬만한 고지는 단숨에 뛰어오르던 역전의 용사들이 아니던가?
한라산 백록담까지 오르기 위해서 성판악코스를 택했는데 성판악코스는 편도 9.6km 이며 보통 걷는 시간만 4.5시간을 잡아 왕복 19.2km로 총 9시간을 걸어야만 하는 험난한 코스였다. 다행히 코스자체가 완만하다고 하여 한결 마음은 놓였지만 그래도 마음은 놓이지를 않았다. 그렇게 시작한 한라산 등반길, 다행히도 비가 그친 산길에는 시원한 나무그늘과 신선함이 묻어났고 싱그러운 숲속에서 산들산들 바람이 불어와 상쾌하게 발걸음을 시작하였다. 완만한 등산로라고 하지만 제주도 특유의 울퉁불퉁 돌계단으로 이어져 걷기가 만만하지가 않았다.
일행 중, 최 박사는 무릎이 좋지 않아 전 날부터 걱정을 했다. 한라산 등반을 하기 위해 두어 달 전부터 시간이 날 때마다 집근처 야트막한 산을 연습 삼아 오르곤 했다는데 딱 2시간만 걸으면 무릎에 신호가 와서 걱정이 태산이라고 했다. 그런데 막상 등반이 시작되자 제일 앞에서 씩씩하게 오르기 시작하였다. 이름 모를 산새들의 지저귐, 산비둘기 소리가 산중에 울려 퍼지고 가끔은 까마귀가 머리 위를 빙빙 돌면서 환영을 해주었는데, 일행과 뒤질세라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아낙들의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거친 숨소리를 내면서 제주도 특유의 돌계단을 오르다 보면 삼나무 숲이 나오는데 삼나무 숲을 지나니, 해발 1,140m에 위치한 속밭대피소가 나왔다. 세 부부가 조금씩 떨어져 오르고 있었으니 숨도 고를 겸 선두에서 오르던 팀이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일행들과 합류하기로 하였다.
1차 휴식! 달콤한 휴식이었다. 물도 마시고 간식도 먹으면서 재충전을 하였다.
진달래밭 대피소까지
속박대피소에서 1차 휴식을 취한 후 본격적인 오름이 시작되었다. 끝없이 이어진 돌계단과 중간 중간을 이어주는 데크… 그래도 싱그러운 숲내음과 선들 한 바람, 그리고 환영이라도 하 듯 울어주는 산새소리를 동무삼아 꾸역꾸역 오르고 있었다.
이 시기에 한라산에서는 무엇을 볼 수 있을까? 진달래를 볼 수 있다고 하는 소리를 반신반의 하면서 혹, 멋진 진달래꽃밭을 볼 수도 있겠다는 상상을 하기도 하였다.
육지에서는 이미 져버린 진달래꽃을 정말 볼 수 있을까? 강화도 고려산 진달래 능선에서 보았던 붉고 화려한 꽃잎을 상상하면서 오르다 보니 드디어 진달래 밭에 도착하게 되었다. 진달래 밭 대피소 앞에 배낭을 내려놓고 2차 휴식을 취했다.
데크에 다리를 쭉뻗고 털썩 주저앉아 초콜릿을 먹고 있는 최박사의 모습은 마치 몇날며칠 전투를 하다가 지쳐서 휴식을 취하는 곤궁한 병사의 그 모습이라면 과장일까? 물한모금 마시고 다시 기운을 내서 배낭을 짊어지고 올라선 길에서 저 멀리 옅은 구름에 둘러싸인 한라산의 모습이 드러났다. 아스라이 구름에 닿은 길에는 울긋불긋 등산객들이 행렬을 지어 올라가고 있었는데, 평일임에도 산을 찾는 이들이 이토록 많을 줄은 몰랐다.
어쩔 수 없는 60대의 시니어들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오르다가 잠시 뒤돌아보면 짙푸른 녹음이 길게 드리워진 산자락 밑, 서귀포시내가 한 눈에 들어오고 그 끝에는 일렁이는 검푸른 바다가 아찔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수령(壽齡)을 짐작할 수 없는 주목(朱木)이 등산로 양옆으로 이어져 있고 그 중에는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채 폐목(廢木)이 되어 고고하게 바람을 견디어 내는 주목도 있었다. 한라산 정상에 가까워오자 가파른 등산로는 테크로 계속 이어졌고 물밀 듯 불어오는 바람이 심상치 않았다. 아! 드디어 백록담이 지척에 보인다.
아! 한라산 백록담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 미리 백록담에 도착한 필자는 속속 도착하는 동료들을 촬영하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입구 쪽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곤한 몸을 이끌고 만면에 미소를 가득 띤 채 드디어 해냈다는 기쁨으로 두 손을 번쩍 치켜들고 마지막 계단에 올라서는 동료들을 일일이 환영하며 사진을 찍었다.
인증 샷을 위해 백록담 표지석 아래로 길게 줄이 이어졌는데, 어찌나 바람이 세게 불던지 황급히 배낭에서 바람막이 옷을 꺼내 입었다. 5월임에도 불구하고 변화무쌍한 날씨가 필자 일행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허둥지둥 인증 샷을 마치고 말로만 듣던 백록담을 보러 조금 위로 올라섰다. 초겨울의 싸늘한 바람이 천둥치듯 불어대는 가운데 백록담을 조망(眺望)할 수 있었으니 역시 변화무쌍한 한라산은 그 높이가 백두산 다음가는 산중의 산인가보다.
바로 밑 양지바른 테크에 배낭을 풀고 가져간 음식들을 꺼내놓으니 이보다 더한 진수성찬이 있으랴! 돼지고기 수육에 홍어, 그리고 막걸리를 곁들인 삼합이 갈증 나고 허기진 배를 채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올라오면서 고생담을 비롯한 온갖 이야기꽃을 피우며 맛있는 점심식사를 하던 중에 홀로 쓸쓸하게 앉아서 비스킷을 먹고 있는 외국인 청년을 보게 되었다.
세 남자들은 모두 그를 데려다가 음식을 좀 나누어먹이자고 의견을 모으니 마님들께서는 먹던 음식을 어떻게 권하느냐고 반대의 의사를 분명히 했지만 언어구사가 무난한 최용호박사가 다가가서 몇 마디 나누고는 그를 우리 자리로 데리고 왔다. 이번 여행을 계획하고 주도해 온 우리들의 캡틴 海松 김금섭 대장의 사위가 미국인이기도 하거니와 우리의 아이들도 미국의 콜로라도주 덴버에 살고 있기에 혹여 마음이 더 쓰였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자신의 이름을 ‘마이클’이라고 소개한 그 외국인은 아직도 결혼을 하지 않은 스페인 청년이었다. 이것저것 챙겨주니 먹기도 잘하였는데, 아마도 몹시 시장했던 모양이었다. 헌데 그 녀석, 막걸리는 물론 돼지고기 수육을 된장에 꾹 찍어 잘도 먹어댔다.
막걸리 한 잔 쭉 들이키던 마이클이 갑자기 다리에 쥐가 났다며 데크에 벌렁 나가 자빠졌는데, 어찌하랴! 모두가 달려들어 털이 북슬북슬한 그 녀석의 다리를 붙잡고 마구마구 주물러 주었더니 괜찮아 졌다고 하였다. 입식문화에 익숙한 그가 데크에 다리를 포개고 앉아서 음식을 먹다보니 쥐가 난 모양새다. 어쨌거나 밥과 반찬은 물론이고 이것저것 잘 먹으면서 여간 고마워하던 그가 기념사진을 찍겠다고 하면서 두 엄지손가락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 친구를 데려다가 음식을 나누어 먹인 것은 어찌 보면 보잘 것 없는 작은 배려이지만 참 잘한 일인 듯싶었다.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으로 우리가 낮선 외국에 여행을 갔을 때를 생각하면서 작은 관심과 배려의 차원에서 나눔은 역시 모두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었다. 몇 번이고 고맙다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는 그 스페인 청년을 보내고 나니 내려올 일이 꿈만같았다.
드디어 해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일 터, 육십 고개를 넘어 이제 내리막길에 가속을 붙일 시기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한라산 등반. 그 하산 길에서는 피로가 온 몸을 엄습했다. 아침 여덟시에 시작한 한라산 등반은 오후 6시 30분에 모든 동료들이 성판악 주차장으로 되돌아오므로 써 장장 10시간 30분의 고단한 여정이 끝났다. 고단한 가운데서도 모두가 해냈다는 뿌듯함이 마음을 가볍게 해주었다. 언제 또다시 이 곳을 찾을까마는 명산중의 명산 제주도 한라산을 당당하게 정복했다는 은근한 자부심이 샘솟았다. 거기에다가 날씨까지 좋아서 멋진 백록담을 볼 수 있었으니 얼마나 상쾌한지 모르겠다.
우리 인생에 있어 더 이상 젊은 시절은 돌아올 수 없으나 늘 긍정적인 사고로 생동감 넘치는 삶을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세종문화회관 세종 M 씨어터에서 한 특별한 무대를 감상할 기회가 있었다. 이 프로그램은 원래 문화 마케팅 전문 ‘엔터엠’이라는 공연기획사에서 주최하여 세계 각국의 문화 도시를 돌아가며 문화를 소개하는 방식이다. 이번에 코앞에 닥친 브라질 리우올림픽에 대비하여 리우데자네이로 편으로 기획하여 브라질의 문화를 소개하는 자리였다.
공연의 형식은 세 명의 토크 출연진이 나와서 문화를 설명하고 주자와 가수가 나와 노래를 하는 형식이었다. 1, 2부 공히 같은 형식이다. 토크 출연진으로는 피아니스트 박현주, 아나운서 황인용, KBS 축구 해설위원 한준희씨가 나왔다. 연주는 피아노에 조윤성, 퍼커션에 파코 데 진, 보컬에 써니킴이 나왔다.
1부는 ‘리듬의 보고, 삼바에서 보사노바’라는 테마로 ‘Triste’, ‘Brazil’, ‘Maro mar’, ‘No more Blues & If you never come to me' 곡을 들려주었다.
브라질 춤인 삼바와 보사노바를 이해하려면 흑인들의 춤과 음악인 ‘캉동블레’를 알아야 한다. 1440년 경부터 노예제도가 사라진 19세기 중반까지 아프리카에서 라틴아메리카로 끌려온 노예의 숫자는 1,500만 명~3,00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라틴 아메리카란 라틴 민족의 지배를 받았던 나라로 북쪽은 멕시코에서부터 남쪽 아르헨티나까지 중남미 모든 나라를 말한다. 스페인, 포르투갈 어를 사용한다. 브라질이 유일하게 포르투갈 어를 사용하는 나라이다.
리우데자네이로는 브라질의 유명한 도시이다. ‘1월의 강’이라는 뜻이란다. 수도는 브라질리아로 옮겼지만, 여전히 브라질을 대표하는 도시이다. 시드니, 나폴리 항과 함께 세계 3대 미항으로 꼽힌다. 코파카바나와 이파네마 해변으로 아름다운 해변으로 이름 높다. 포르투갈 어로 Rio의 R은 ‘ㄹ’이 아니라 ‘ㅎ'으로 발음되어 ’히우데자네이로‘로 발음되는데 유명한 축구 선수 'Ronaldo'를 ’호나우도‘로 발음하는 것과 같다.
노예들은 힘든 노동에 동원되면서도 아프리카의 춤과 음악을 잊지 않았다. ‘캉동블레’는 온갖 신을 불러 모으는 종교 의식이었다. 거기에 아프리카 전통의 춤과 음악이 동원된 것이다. 여기서 발전 된 것이 삼바이다. 리우의 삼바 카니발은 원래는 포르투갈 군대의 퍼레이드에서 시작되었는데 지금은 세계적인 춤 축제로 발전했다.
브라질은 백인인구의 90%가 카톨릭 계로 예수의 고난을 묵상하는 40일간 즉 사순절 동안은 고기도 안 먹고 단식을 하기도 한다. 이 사순절이 시작되기 전 4일 동안에 실컷 먹고 놀자는 것이 카니발이다. 여기에 삼바를 도입해 삼바 카니발이 된 것이다. 삼바는 다른 음악 장르에서 사용하는 123, Quick & Slow, 등 카운트가 거의 다 동원되는 복잡한 음악이다.
그러나 노예문화에서 출발한 삼바는 ‘배꼽 춤’이라 하여 백인들 정서에는 저속하고 경박스러워 보여 경시되었다. 그래서 발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보사노바이다. ‘노바’는 ‘누에보’에서 ‘New'라는 뜻이다. 보사노바는 이파네마 해변을 사뿐사뿐 걷는 예쁜 아가씨의 발걸음을 보고 시인이자 작사자인 비니시우스 지 모라이스가 그 자리에서 시를 만들고 안토니우 카를로스 조빔이라는 사람이 물 잔을 두드리며 처음 ‘이파네마의 아가씨’라는 노래를 처음으로 보사노바로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이 두 사람은 현재 브라질의 영웅으로 불린다. 조빔은 리우데자네이로 공항 이름으로 사용될 정도로 영웅이다. 삼바 리듬에 모던재즈의 감각을 얹은 새로운 음악 장르가 된 것이다. 우리나라 노래에도 조덕배의 ‘그대 내맘에 들어오면’, 장필순의 ‘어느 새’처럼 박자 사이에 잔잔하면서도 가볍게 동동 뛰는 리듬이 특징이다.
2부에서는 삼바 축구 얘기가 주제였다. 브라질 축구가 어떻게 발전했고 지금 쇠퇴한 이유에 대해 한준희 해설위원의 토크가 있었다. 브라질은 펠레라는 걸출한 스타가 활동했을 때 공격축구가 세계적인 추세에 맞춰 실리적인 축구로 변했고 다시 공격 축구로 변모하면서 영욕을 겪는다. 5번이나 월드컵에서 우승한 나라라서 축구는 곧 종교인 나라이다. 어릴 때부터 축구를 하던 과거와 달리 브라질도 축구 외에 여러 가지로 관심이 분산되면서 축구 실력이나 인프라가 그전 같지 않다는 것이다.
시니어들의 ‘손주 사랑’은 세계 공용어다. 영화 의 할머니는
“이 나이에 기다리는 것은 손주와 죽음이다”라는 대사를 내뱉는다.
또 “난 죽으면 손주의 애완 고양이로 태어날 거야”라는 대사도 나온다.
이 영화 말고도 손주를 통해 ‘웬수’가 된 아들과 화해하는 장면은 부지기수다.
올 여름, 빈센트 반 고흐가 희망과 꿈을 갖고 떠난 ‘아를’로 손주와 함께 떠나보자.
손주와 ‘론’ 강변을 걸으며 ‘별 헤는 밤’의 그림 이야기를 꽃피우면서
그곳에 추억을 남겨놓자.
손주의 여행 경험은 향후 엄청난 학습효과를 갖게 될 것이다.
수많은 예술가가 사랑한 남부 프랑스
프랑스 남부지역의 프로방스는 세계 여행자들의 로망이다. 특히 프로방스는 많은 시인, 화가, 영화 예술가가 사랑한 도시다. 프로방스의 매력에 빠진 예술가들은 평생 그곳을 그리워하면서 소설, 시, 그림 등으로 남겼다. 엑상프로방스(Aix-en-Provence)가 고향인 폴 세잔, 코트다쥐르의 생폴 드 방스(Saint-Paul de Vence)는 샤갈, 피카소도 좋아했고 6개월간 안티베(Antibes)에 머물기도 했다. 르누아르가 노년을 보냈던 르누아르의 집, 레 콜레트(Renoir’s House, Les Collettes)는 카뉴 쉬르 메르(Cagnes Sur Mer)에 있다. 모딜리아니는 니스를 무척 사랑했다.
또 주옥같이 아름다운 소설인 , 의 저자인 알퐁스 도데(Alphonse Daudet, 1840~1897)는 아를과 가까운 님(Nimes)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향을 일찍 떠나 파리에 살면서도 프로방스에 대한 애정을 평생 안고 살았다. 그의 작품 속에는 고향 프로방스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프랑스의 극작가 겸 영화제작자 겸 영화감독인 마르셀 파뇰(Marcel Pagnol)의 작품에도 어김없이 프로방스가 등장한다. , 등 영화 속에 프로방스가 담겨 있다. 독일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 (Rainer Maria Rilke)는 “가장 아름다운 곳은 프로방스였다. 당신도 언젠가 꼭 한번 그리로 가봐야 한다”라는 편지를 썼고 그는 마지막 거처를 프로방스에 마련할 수 있기를 염원하면서 죽었다.
특히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는 프로방스의 아를(Arles)에 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겼다. 그래서 아를은 ‘고흐의 마을’로 불린다. 많은 관광객이 아를로 몰려 드는 이유는 고흐를 만나기 위함이다.
로마 유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2000년 古都
아를은 테제베 고속열차가 멈추지 않는 작은 역이다. 역에서 1km 떨어져 있는 마을로 들어서면서 놀라게 되는 것은 부서진 로마의 유적 때문이다. 고흐의 그림 스타일을 아는 사람들은 이 생경한 문화 유적에 놀랄 수밖에 없다. 그때도 분명히 이 자리에 있었을 문화 유적이지만 그의 작품 속에는 건축물을 찾을 수는 없다. 그저 투우 장면을 그린 그림이 있을 뿐이다.
아를은 2000년의 역사를 지닌 고도(古都)다. 그리스의 식민지였다가 시저(Julius Caesar)에 의해 로마령이 되었다. 긴 세월동안 사람들의 발자국으로 반질거리고, 울퉁불퉁한 조약돌로 된 골목길과 부서진 성벽 등이 온 마을을 장식하고 있다. 마을 제일 높은 곳에는 거대한 원형 경기장인 아레나(Arenes)와 기둥만 남아 있는 원형 극장이 있다. 아레나에서는 매년 투우 축제(4, 9월)가 열린다. 또 이 마을은 초기 기독교 시기의 중요한 거점도시였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가는 순례자의 길을 시작하는 곳 중 하나로 중세 건축물인 생 트로핌(Saint-Trophime) 대성당이 남아 있다. 11세기에 창건된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에서는 ‘최후의 심판’ 장면을 새겨 놓은 부조와 조각을 볼 수 있다. 구시가지 한가운데 자리한 리퍼블릭 광장에 삼색기가 휘날리는 아를시청사가 있다. 그 앞에는 아를에서 제일 높은 시계탑과 2000년 전 로마 황제가 이집트에서 가져왔다는 오벨리스크(obelisk)가 솟아 있다. 이 도시의 로마 유적지는 198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아를 골목에서 고흐의 작품 현장 찾아내기
오래된 가옥과 골목을 헤집다 보면 포룸 광장에서 ‘고흐 카페’를 만나게 된다. 고흐가 즐겨 썼던 노란색으로 칠한 카페는 ‘고흐’란 화가의 이름을 파는 상술을 펼치고 있다. 그가 그린 ‘밤의 카페 테라스(The Night Cafe in Arles)’ 그림을 안내대처럼 세워 놓았다. 유독 그 카페만 관광객들로 북적댄다. 카페 주변에는 피카소, 장 콕토 등이 자주 묵었던 낡은 호텔이 있다.
고흐는 이 카페 근처에 일명 ‘노란집’을 얻어 놓고 이곳을 매일 밤 찾았다. 카페에 앉아 늘 ‘녹색요정 압생트’를 마시면서 얘기를 나누고 그림을 그렸다. 고흐는 친구 고갱이 오길 기다리면서, ‘아를의 여인-지누부인’(1888년)을 그렸다. ‘아를의 여인’이라는 제목은 고흐 이전에 알퐁스 도데가 첫 단편집에 쓴 ‘아를의 여인(L' Arlesienne, 1872년 작)’이 있다. 이 작품을 다시 각색해 3막 5장의 희곡을 발표했는데 당대 잘 나가던 프랑스의 작곡가 조르주 비제(Georges Bizet, 1838~1875)가 극장 상연에 쓰일 부수음악 27곡(관현악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같은 제목의 글, 그림, 음악이 만들어진 곳이 아를이다.
또 에스파스 반 고흐(Espace Van Gogh)에는 ‘아를 병원의 정원’이라는 그림이 있다. 고흐가 1888년 12월, 자신의 귀를 자르는 발작 이후 머물기를 반복했던 병원으로 현재는 문화센터로 바뀌었다.
어둠이 내릴 무렵엔 론 강으로 가서 ‘론 강의 별이 빛나는 밤’을 그려보자. 고흐가 생레미 드프로방스의 한 요양원으로 옮겨진 후에 그린 그림으로, 아름다웠던 아를의 기억을 되살렸을 것이다. 지금 고흐 그림처럼 아름답지 않은 론강의 어둠 속 끝에서 희미하게 불빛이 새어난다. 그 외에도 ‘열두송이의 해바라기’와 ‘아를의 다리(도개교로 링클루아 다리)’ 등도 모두 아를에서 그렸다.
현재 아를에는 ‘반 고흐 파운데이션’이 있다. 하지만 기대는 말아야 한다. 고흐의 작품은 거의 볼 수가 없고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과 어릴 적 고흐와 동생 테오의 사진 등 몇 점만 볼 수 있다. 고흐의 고국인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고흐 박물관’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하다.
예술촌을 꿈꾸던 화가는 고갱을 만나 미쳐 버리고
고흐는 1888년 2월, 아를에 예술촌을 만들겠다는 부푼 꿈을 꾸고 이곳에 방을 얻는다. 파리에서 뜻이 잘 통했던 고갱이 오기를 기다렸고 오기 전까지 방을 꾸미고 마음이 들뜬 채로 지냈다. 하지만 같이 살면서 극단적인 성격 차이로 싸우게 된다. 결정적으로 화를 돋구게 된 것은 고갱이 그린 자화상이었다. 고흐와 고갱은 서로 자화상을 그리기로 했는데 고갱이 그린 그림 속에는 고흐는 없고 고갱이 앉아 있었다. 그림 속 고갱의 콧수염은 고흐의 붉은 콧수염이었다. 고흐와 고갱은 크게 싸웠고 분에 겨운 고흐는 집으로 돌아가 한쪽 귀를 잘라 버린다. 자른 귀를 싸들고 술집 여자에게 갖다 주었고 그녀가 경찰에 신고를 해서 시립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고흐가 꿈꿨던 예술촌의 꿈은 그렇게 두 달 만에 끝났다. 고흐의 발작은 더 심해져 근처 생레미 정신병원(1889년 5월)에 입원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발작이 없을 때면 그 동안의 공백을 메우기라도 하려는 듯 마구 그려댔다. 병원에서 약 15개월간 머물면서 187점에 이르는 그림을 남겼다. 분명히, 고흐가 아를을 사랑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가 아를을 얼마나 좋아했는지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도 나타난다. “예전에는 이런 행운을 누려 본 적이 없다. 하늘은 믿을 수 없을 만큼 파랗고 태양은 유황빛으로 반짝인다. 천상에서나 볼 수 있을 듯한 푸른색과 노란색의 조합은 얼마나 부드럽고 매혹적인지…”라고 보냈다.
고흐는 1890년 봄, 파리 근교의 오베르 쉬르 우아즈(Auvers sur Oise)에서 자살한다. 고흐는 테오의 가족이 찾아온 이후 밀밭에 가서 총을 쏘고 집으로 겨우 기어 들어와 이틀 만에 동생 테오가 지켜보는 가운데 죽었다. 테오가 형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이 무엇이었을까? 테오는 “조카도 생기고 가정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더는 형의 생활비를 대어 줄 수 없다”고 했다. 그동안 고흐는 그림들을 테오에게 보냈고 그 대신 생활비를 받았다. 살아생전 단 한 점밖에 못 판, 생활 능력 없는 그가 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었을까? 사랑을 주고 싶지만 줄 사람도 없고 정신병을 앓고 있는, 희망없는 삶.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죽음’ 밖에 없었을 수도 있다. 고흐 나이 37세였다. 오베르에 머문 지 두 달 되던 때였다. 이후 동생 테오도 6개월 뒤 매독에 걸려 죽는다. 두 사람의 묘지는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집 앞에 있다.
고흐의 삶은 그 어느 창작자가 일부러 만들어 내기도 어려울 만큼 드라마틱하다. 여행을 떠나기 전, 고흐에 대한 영화나 책 등을 미리 보고 가는 것도 도움이 된다.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열연한 영화 과 BBC 다큐인 폴 고갱의 이라는 작품을 추천한다. 아를에서의 고흐와 고갱의 생전의 삶을 알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 이신화 여행작가
이립(而立)에 여행작가로 시작해 어언 지천명(知天命)에 다다랐다.
그동안 ‘걸어서 상쾌한 사계절 트레킹’, ‘대한민국 100배 즐기기’, ‘on the camino’ 등
여행서 총 14권을 출간했다. ‘인생이 짧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 2014년 홀로 197일간 30개국의 유럽 배낭 여행을 했다. ‘살아 있을 때 떠나자’가 삶의 모토다.
오늘날 글로벌 스탠더드는 많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적인 스탠더드(표준)라고 무조건 믿지 말아야 한다. 즉 병원에 가면 의사가 처방을 환자에 따라 달리 처방을 하는 것처럼 정확하게 그 나라의 경제상황을 알고 그에 맞는 처방을 내려 경제를 살려야지 세계적인 IMF의 표준이라는 것이 우리나라 경제 현실에 꼭 어울리는 것이 아닐 수도 있음을 항시 생각하라는 이야기다.
여기서 우리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코드와 스탠더드(표준)의 차이점이다.
코드는 당위적이고 반드시 지켜야 하는 규정이다. 그러나 스탠더드(표준)는 참조사항이지 꼭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미국의 ASME 코드에 나와 있는 사항은 반드시 지켜야하는 규정이다.
1997년 우리나라는 외환위기 당시 IMF가 요구한 처방을 무조건 받아드린 적이 있고 모범 졸업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우리나라의 경제사정은 탄탄하다고 할 수 없다는 사실은 그 처방전이 선진국의 표준이 될 수 있었을지 몰라도 우리나라에 맞는 표준이 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지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철저한 검증 없이 무조건 받아들인 순간 국익을 지킬 힘도 유연성 사라지게 될 것이다. 세계적인 불경기라 꼭 그렇게 탓할 수 없지만 IMF 사태 이후 우리나라 경제 성장률은 사태 이전과 달리 저 성장을 지속하고 있다.
오늘날 공익이 아니라 사익 때문에 기술 표준을 놓고 사투가 벌어진다. 컴퓨터 운영체제만 하더라도 윈도우즈 애플, 선(Sun), 리눅스, 구글이 서로의 표준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것과 같다. 우리에게 가장 맞는 스탠더드를 선택하고 이를 정책화하여 실행하는 능력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그렇다면 글로벌 표준처럼 되어 있는 기술표준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 만일 우리가 윈도우즈 시스템만 따라서 가게 되면 우리는 반드시 윈도우진영이 돈 벌기 쉬운 방향으로 따라가게 되어있다. 따라서 우리 입장에는 어떤 네트워크가 좋은지를 선택해야 만 한다. 나의 경우는 윈도우즈를 사용하지만 요즘은 대부분 구글의 크롬을 활용하고 있고 크롬에서 처리되지 않는 것만 윈도우즈를 활용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경제운영 시스템도 스탠더드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우리 실정에 맞게 사용할 수 있도록 유연하고 상대적으로 유리한 방향으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예를 들면 IMF 사태를 맞아 우리가 무조건 받아들인 ' 자본자유화'는 논리도 실증도 명확하지 않은 시스템이다.
즉 선진국에 유리하게 적용되는 시스템을 중진국 정도의 나라에 적용하는 것은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만일 IMF 처방이 글로벌 스탠더드고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라면 이러한 사태가 발생된 후 다시 재발되지 않아야 하는데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수많은 나라들이 반복되는 사태가 발생되고 있음은 이론 자체에 문제가 있고 그 나라 실정에 맞지 않는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개발 도상국가들이 처한 외환이나 경제위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력들의 양털 깎기 작업이라는 말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이런 논리에서 본다면 미래학자들의 2017년~2018년 한국에 또 다른 형태의 외환위기 가능성이 올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1994년 미국의 금리인상이 시작되었고 멕시코가 외환위기 들어갔다. 1997년 국제헤지펀드는 홍콩을 겨냥했다. 97년 1월 1일은 ‘홍콩반환일’이다. 이후 국제헤지펀드는 태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을 거쳐 한국으로 향했다.
2011~13년 유럽의 재정위기는 2008년 미국발 모기지(MBS, 주택저당증권) 사태에서 시작되었다. 국제헤지펀드는 유럽으로 향했다. 조지 소로스 등 국제헤지펀드는 유로 존 국가의 바스켓으로 형성되어 움직임이 둔한 유로화보다는 그리스,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 등 고수익이 가능한 국채를 투자했다. 물론 여러분들이 상상할 수 없는 거액의 차익을 챙겼다.
2015년 미국의 금리인상이 시작되었다. 우크라이나가 이미 디폴트(채무불이행) 상태에 들어갔고, 세계 곳곳에서 분쟁 등 불확실성이 확산되고 있다. 2008년 국제금융 위기인 유로 존 재정위기는 아직 진행 중이며 중국 또한 GDP 성장률이 둔화되고 있다. 미국의 부동산 가격이 하락으로 전환하고 중국의 둔화가 빨라지면 국제헤지펀드는 아세안 등 동남아시아를 겨냥하여 공략하게 될 것이다. 2010년대 동남아시아 금융 및 외환위기가 과거 역사를 보면 시작될 수도 있는 것이다.
미국의 긴축은 이미 시작되었고 US달러는 상승(강세)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신흥국 등 글로벌자금은 미국으로 향하고 글로벌경기는 침체로 빠져든다. 당연히 유가(금/은/동 등 원자재)는 하락하고 원자재에서 이탈한 자금도 미국으로 향하게 된다. 글로벌 모든 자금이 미국으로 ‘쏠림현상’이 나타나면서 US달러는 급등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미국 셰일가스의 생산원가에 대해 많은 추측들이 난무하고 있다. 미국 셰일가스의 생산원가는 엑슨 모빌 등 석유메이저 기준으로 3~5달러이다. 그리고 에탄과 셰일 오일은 덤이다.
2014년 상반기 천연가스 가격은 아시아는 13~14달러이고, 유럽은 8~10달러 선이다. 저장/물류비용 등 추가비용을 감안하더라도 큰 이익을 낼 수 있다. 미국의 셰일가스 수출이 본격화되면 무역수지 개선으로 US달러는 상승(강세)하게 된다. 더욱 많은 자금들이 US달러를 매수하기 위해 미국으로 쏠리게 된다. 2010년대 ‘슈퍼달러시대’를 예고하는 것이다.
최근 이란의 경제 제재가 풀리면서 세계경제는 다소 활기를 찾을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유비무환의 진리를 항상 염두에 두면서 국가적으로 국회, 사법, 행정 및 기업, 노동계가 부가가치를 창출하여 경제를 우리 스스로 활성화시킨다면 세계경제가 아무리 어렵다 하더라도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사회에서 가장 시급한 일자리 확보, 복지, 안보는 성장에서 가능한 것이므로 규제혁파와 기술혁신 및 구조조정을 위해 국민모두가 힘을 모아 전력투구해야 할 것이다.
만일 우리 국민모두가 일치단결하여 현재의 난관을 극복할 수 있다면 대외적으로 브렉시트, 유럽문제, 중국의 경제난이 닥쳐온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를 극복해 나갈 수 있는 힘을 기를 수가 있을 것이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은 우리에게 좋은 타산지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를 따라 갈 것인가? 창의적으로 극복하여 일본을 추월해 나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아주 중차대한 시점에 와 있는 것 같다. 일본이 구조조정을 적기에 하지 못해 현재 L자형 경기침체 형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임을 감안할 시 우리는 위기이자 기회를 맞고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국제 표준을 개발하여 우리나라에 가장 적합한 표준을 만들어 새로운 경제도약의 전기를 마련해야 하는 시점에 와 있다고 할 수 있다.
순국순열과 호국영령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며, 국민의 호국‧보훈의식 및 애국정신을 함양하기 위해 6월을 “호국보훈의 달”로 정하고 현충일, 6.25, 제2연평해전의 정부기념식을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개최하고 있다.
인류와 역사는 전쟁으로 점철 되었고, 전쟁은 시대와 장소 교리와 전투방법에 따라 그리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에 따라서 승패의 요인을 달리하여 왔다. 그러나 총칼을 들고 전장에 나가 싸우는 사람은 군인이며 승패는 그 군인의 전통이 어떠하냐에 좌우된다.
또한 군인의 능력은 그 나라 군의 전통 속에 살아있어야 한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인 스파르타의 어머니들은 전장에 나가 죽어서 돌아온 자식을 묻으면서 나는 스파르타를 위하여 죽은 자식을 낳았다. 라고 하며 자랑스러워했다. 자식을 전사로 키우는 스파르타의 전통으로 이어졌다.
중동전에서 작은 나라 이스라엘이 아랍제국과 싸우면서 연전연승 할 수 있었던 것은 우연히 아니다. 로마군단에 멸망당한 예루살렘에서 도망 나온 960명의 유태인은 마사다 요새에 몸을 숨겼다. 로마 군인에게 포위당한지 수개월 후에 지도자인 엘리아잘의 최후연설을 들은 후에 전원 사살했다. 장교들은 임관식 때에 요새에서 엄숙히 임관선서를 하면서 조상의 얼을 읽는다. 6일 전쟁 시 미국의 이스라엘 유학생들은 귀국하여 전선으로 달려갔고 아랍 유학생들은 귀국명령이 두려워 애인과 휴양지로 도망을 갔다. 이것이 대국 아랍제국과 싸워 이긴 저력이고 전통이다.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은 2차 대전시 16살의 나이로 군용트럭 운전사로 근무 했고, 부군인 필립공은 해군대위로 바다에서 싸웠다. 엔드류 왕자는 포크랜드 전쟁 시 헬기 조종사로 참전하여 동료들과 같이 싸웠다. 넬슨 제독은 트라팔카 해전에서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고 전사 했다. 처칠은 1차 세계대전 시 해군장관 시절 다다넬스 전역의 실패를 자인하고 장관직을 사임하고 전선으로 달려가 육군소령으로 참전하여 대대장과 여단장으로 솜무 및 베르당 전투에서 싸웠다. 전선의 전투경험이 그가 수상이 되고난 후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원동력이 되었다. 배운자와 있는자의 솔선수범이 영국군의 전통이다.
한국전쟁 시 미군장성 아들 142명이 참전하여 35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유엔군 총사령관인 크르크대장의 아들은 저격능선 전투에서 중대장으로 싸우다 중상을 입었고 미8군사령관 벤프리트 장군의 아들은 B-26 폭격기를 몰고 출격했다가 전사했다. 해병 1항공사단장은 부자가 참전하여 아들 해리스 중령은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했다. 상하 계층이나 특권이 없이 전장에서 평등한 전사라는 의식이 미군의 전통이다.
우리나라는 외세의 침략을 많이 받은 나라로 타국에 비해 훌륭한 군인이 많이 있었다. 고구려의 을지문덕, 신라의 품일과 아들 관창, 가족을 먼저 죽이고 전장으로 나간 황산벌의 계백, 성웅 이순신 장군, 이등박문을 쏜 안중근의사, 6.25전쟁 때는 육탄 10용사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우리의 조상과 선배들에게서 군인의 성스러운 전통이 살아 숨 쉬고 있다. 군인의 의무인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목숨을 걸고 지키는 것 보다 더 숭고한 가치는 없다. 그러므로 군인의 전통은 국가보위의 주춧돌이라 할 수 있다. 이 전통은 묻혀지지 말고 살아서 우리의 맥박과 피 속에서 살아 있어야 한다.
“자네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1994년 1월, 현대건설 이사였던 최동수(崔東秀·77)씨가 사직서를 내밀자 고(故) 박재면 회장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삼성이나 롯데에 가려고 그만두는 거냐?”는 물음에 “기타를 만들겠다”고 대답하자 더욱 황당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당시 현대건설은 국내 건설업계 1위 업체였고, 잘 나가는 건축담당 이사였던 최씨의 갑작스러운 은퇴를 쉽게 받아들이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최씨의 선택은 하루아침에 결정된 것이 아니다. 기타를 만들고자 한 것은 학창시절부터 고이 간직해온 그의 꿈이었고, 20여 년에 걸친 아내와의 약속이었다.
아내와 애인(?)을 위한 선택 ‘은퇴’
최동수씨가 아내인 수필가 허숭실(필명)씨와 연애하던 시절의 일이다. 덕수궁 후원을 걷던 최씨는 허씨에게 엉뚱한 고백을 했다. “당신과 데이트하느라 내 애인을 돌보지 않았더니 그녀가 병들었소. 오늘 당신에게 그 애인을 소개해 주리다.” 허씨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애써 태연한 척하며 그의 애인을 만나러 가자고 했다.
그러자 최씨는 들고 있던 기타를 무릎 위에 척 올려놓고는 “기타가 바로 내 애인”이라고 털어놨다. 그가 말한 애인이 사람이 아닌 기타라는 사실에 그녀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마음이 복잡하기만 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허씨 앞에서 최씨는 “그동안 데이트 자금을 마련하느라 애인을 전당포에 맡겨두었더니 습기가 차 피부가 트고 몸도 틀어져 속상하다”며 기타를 쓰다듬었다고 한다. 그 모습을 본 허씨는 ‘풋내기 예술가’를 발견한 듯 반가움에 가슴이 뛰었고, 그날의 감동이 결국 그녀를 ‘기타 만드는 남자의 아내’로 만들었다.
최씨의 기타 사랑은 고등학생 시절 읽은 한 소설을 통해 시작됐다. 지금은 책 제목도 가물가물한 일본 소설이지만, 당시 전쟁터에서 다리 불구가 된 주인공이 창녀가 된 아내의 집 근처 전봇대 아래에서 기타 연주를 하는 장면만은 또렷하게 기억한다.
그 이후 기타에 매료돼 아버지를 졸라 기타를 하나 샀지만, 아무리 연습해도 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결국 직접 취향에 맞는 기타를 손수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한다. 마땅한 재료가 없어 집안의 오동나무 장롱 서랍을 뜯어가며 기타를 제작하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결혼해서 얼마 동안은 틈틈이 기타를 만들었다. 하지만 건축설계 사무소를 운영하면서 밤낮으로 기타 만들기에 몰두하는 그의 모습을 본 아내는 견디다 못해 한 가지 제안을 한다.
“아이들 교육을 다 마치고 난 뒤에 기타를 만들면 그때는 전폭적으로 지지하겠어요.” 아내의 말에 그는 본업에 충실하기로 마음먹고 1975년 현대건설에 입사한다. 입사 후, 18년을 바레인,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등 타국에서 지내며 아침 6시부터 자정까지 밥벌이에 몰두했다. 그러던 어느 날, 1993년 그가 싱가포르에서 근무하던 때, 아내는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외로움도 암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의사의 말에 그는 조기 은퇴를 결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남은 인생은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다 가겠다고 다짐하던 최씨에게 한 가지 꿈이 피어올랐다.
“사표를 내기 전 아내에게 ‘나 기타 만들까?’라고 물어봤죠.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계산기를 가져와 탁탁 두드리더니 ‘앞으로 삼시 세끼 먹는 데는 문제없겠네요. 인생 1막은 아이들을 위해 물질에 투자했으니, 2막은 당신의 정신적 자유에 투자하도록 해요’라며 흔쾌히 제 결정을 받아들이더군요. 20년 전, 아이들을 키우고 나면 기타를 만들어도 좋다고 했던 그 약속을 지킨 거죠.”
그렇게 그는 아내와의 여생을 위해, 그리고 애인과의 재회를 위해 은퇴를 결심했다.
‘소리가 나는 작은 집’을 건축하다
기타 제작을 결심한 그는 그동안 지내던 서울의 아파트를 정리하고 경기도 고양시 일산으로 이사했다. 31년간의 건축가 경험을 살려, 마당이 딸린 집을 직접 지었다. 아늑한 그의 집은 ‘행운의 열쇠’ 모양을 따서 설계한 1층을 지나면, 기타 제작 공간인 지하실 ‘목운(木韻: 나무에서 소리가 난다는 뜻) 공방’이 나온다. 최씨의 꿈과 애정이 깃든 이곳에서는 1년에 단 2대의 기타만이 세상 밖으로 나온다. 딸을 키운다는 생각으로 기타를 만들고, 시집보내는 마음으로 기타를 파는 그다. 이 때문에 최씨는 기타를 파는 게 아니라 “백마 탄 기사에게 시집보낸다”라고 말한다. 딸을 키우는 심정으로 정성을 다하는 그이지만, 아무래도 기타를 만드는 데는 숙련된 솜씨가 뒷받침돼야 할 터. 기타 제작을 위한 그의 노력도 대단했다.
“은퇴한 첫해에는 미국 힐즈버그(Healdsburg)에 있는 아메리칸 기타스쿨에 입학했어요. 이듬해에는 스페인 코르도바(Cordoba)의 기타페스티벌에서 마에스트로 호세 로마니요스(Jose Romanillos)에게 제작 마스터 클래스를 지도받았죠. 두 과정 모두 한국인으로는 처음이라고 해요. 현재는 미국 현악기 제작가 협회(GAL: Guild of American Luthiers)의 유일한 한국인 회원이기도 하고요.”
기타를 만들지는 않았지만 18년간의 해외생활은 그의 꿈을 실현하는 디딤돌 역할을 했다. 해외 근무라는 이점을 활용해 외국의 공방과 자재상들을 찾아다니며 제작에 필요한 공구를 수집한 것. 그렇게 오랜 시간 기타를 만들기 위해 준비해온 만큼 그는 욕심을 내거나 서두르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시계는 꼬박꼬박 기타를 위한 시간으로 쉼 없이 달려가고 있었다. 집 지하실의 기타 공방으로 매일 아침 9시에 출근하고 오후 6시에 퇴근한다. 야근도 마다치 않는다. 그렇게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드는 기타는 1년에 2대 남짓이다. 기타 제작 과정은 단번에 결과물을 내기보다는 완성까지 꼼꼼한 설계와 인내가 바탕이 돼야 하는 건축일과 닮은 점이 있었다.
“기타는 ‘소리가 나는 작은 집’과 같아요. 제 인생 전반전을 장식한 싱가포르 선텍 시티(Suntec City), 카타르 국립대학 건물, 이라크 북부역사 등을 짓는 것처럼 기타를 만드는 일도 미학적 판단과 설계가 필요한 종합 예술이죠.”
세상에 단 하나뿐인 ‘최동수표 악기’
오랜 꿈, 아내의 내조를 밑천 삼아 시작한 기타 제작은 꾸준히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처음에는 친구나 동료 등 지인에게 주기 위해 만들었는데, 근래에는 서정실, 변보경, 배장흠 등 유명 기타리스트에게 기타를 헌정했다. 대개 유명 기타리스트의 경우 독일이나 프랑스 등 해외 장인이 만든 것을 사용하는데, 그런 이들이 그가 만든 기타를 쓴다는 것은 이미 실력이 아마추어 수준을 넘어섰음을 증명한 것이다. 그의 기타는 보통 1대당 1000만원 가량이다. 예상한 가격보다 비싼 값을 받을 때도 많지만, 그가 공짜로 주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필요한 사람에게 자신의 기타를 주는 것은 결코 공짜 거래가 아니라고 말한다.
“어떻게 돈으로 그 가치를 표현하겠어요? 대부분 손님이 알아서 가격을 정해서 지급하죠. 조금 손해 보는 경우가 있을지 몰라도, 결코 손해가 아니랍니다. 내가 공짜로 기타를 주면 어떤 이는 나에게 훌륭한 그림을 주기도 하고, 좋은 책을 보내기도 하니까요. 악기는 파는 게 아니라 인연을 만드는 과정이라 생각해요. 악기는 내 딸인데, 내 딸을 데려갔으면 그도 사위처럼 내 자식이 되는 거지요.”
그는 팔기 위해 만드는 것은 단순히 ‘기타’라 하겠지만, 아름다운 소리를 내기 위한 단 하나의 ‘악기’를 만들고 있다고 설명한다. 판매나 주문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이 상상했던 모습의 기타를 하나둘씩 실물로 탄생시키는 최씨다.
온도와 습도가 적당한 봄철이면 기타를 만들기 적합하다. 이 시기에 결의 방향과 울림이 좋은 나무를 골라 온도를 맞춘 작업실에 한 달가량 둔다. 그다음 색을 입히는데, 그는 붓 대신 천으로 만든 솜방망이로 문질러 칠하는 방식을 고수한다. 한 번 칠할 때마다 100~150번을 문지르고, 이 과정을 100번 정도 반복해야 한다. 여기까지만 해도 서너 달이 걸리기 때문에, 기타 한 대를 만들고 나면 3~5kg씩 체중이 줄곤 한다.
하지만, 이러한 고통에도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작업은 튜닝이다. 아무리 독특하고 멋진 기타라도 그 감탄은 오래가지 못한다. 결국 기타도 악기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은 소리다. 나무마다 고유한 진동이 있는데, 이를 조화롭게 맞추기 위해 일일이 손으로 나무 두께를 가늠해 조율한다. 기타의 모양이 나오면 제대로 된 소리를 얻기 위해 대전의 음향 전문가에게 보내 진동 실험을 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다시 튜닝을 한다. 튜닝은 한 달이 걸리기도 하고 반년이 걸리기도 하는데 하다가 안 되면 다시 뜯어서 처음부터 만들어야 한다.
“기타리스트 배장흠씨의 기타도 앞판을 세 번, 뒤판을 두 번 바꿔가며 튜닝을 마친 작품이에요. 그는 기타가 만족스러웠는지 고맙게도 그 이후에 제가 만든 기타를 두 대 더 구입했죠. 2014년 7월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공연 무대에서도 제가 만든 기타로 연주했어요. 딸을 시집보낸 입장에서는 참 뿌듯하고 기분 좋은 일이죠.”
요즘 그는 리라(lyre: 고대에 사용한 발현악기) 모양의 기타 제작에 몰입하고 있다. 원래는 일흔넷까지만 기타를 만들려고 했지만, 여전히 46번째 기타 만들기에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그는 그동안의 기타와의 인연을 모아 만든 책 (가제)를 준비하고 있다. 기타를 통해 천상의 소리를 선사하고, 책을 통해 기타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는 게 목표다.
“어언 나이가 차서 손을 거둘 날이 가까워져 오잖아요. 그전에 꿈속에서 상상만 하던 리라 기타와 같은 작품을 몇 가지 만들어 보고 싶어요. 또, 책이 출간되어 많은 분이 제 이야기를 읽어준다면 기타 제작 생애의 목표의 반은 성취한 셈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