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꼭 명품 옷이나 백을 들어야 한다고 고집하는 사람은 아니다. 디자인이 마음에 들거나 좋아하는 색상이면 싸구려라도 즐겨 가지고 다닌다. 때로는 필자가 입은 옷이나 가방이 비싼 게 아닌데도 명품으로 오해해주는 친구가 있어 즐거울 때도 있다.
우리 집 옷장 안에는 내 핸드백이 10여 개 들어 있다. 최근엔 핸드백을 구매하지 않지만 젊었을 때는 명품을 몇 개 사기도 했다. 그래도 대부분은 선물 받은 상품권으로 구매한 금강, 에스콰이어, 엘칸토 등 우리나라 유명 브랜드의 제품이다. 마음에 들긴 해도 내게 너무 부담스러운 가격의 핸드백을 장만한 날에는 며칠 동안 끙끙대며 후회하기도 했다. 매스컴을 통해 명품만 선호하는 여성들에 대한 비난과 아무 거리낌 없이 비싼 물건을 산다는 일명 된장녀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한심하기도 하고 기분이 나쁘기도 했다.
물론 여유가 있어 고가의 물건을 살 수 있으면 괜찮겠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형편인데도 비싼 명품을 장만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보면 솔직히 곱게 보이지 않는다. 생각하기 나름인데 들기 편하고 마음에 들면 되지 꼭 그렇게 비싼 명품을 선호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다. 막냇동생이 사는 동부이촌동에는 가끔 가짜 명품 가방을 파는 트럭이 온다고 한다. 비록 짝퉁이지만 동네 멋쟁이 여자들이 벌떼처럼 모여들어 구경한다고 하니 A급, B급부터 특A급까지 진짜 명품과 똑같은 모양으로 사람들을 유혹하는가보다. 진품이면 몇백만 원을 호가하지만 비슷한 제품을 이삼십 만 원에 살 수 있으니 불티나게 팔려나간다는 것이다.
막냇동생도 구경하다가 가짜 고급 브랜드 제품을 하나 샀는데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다며 내게 주었다. 디자인이 세련되고 좋아서 얼른 받아왔다. 그리고 어느 날 동창 모임에 그 핸드백을 들고 나갔더니 옆자리에 앉은 친구가 백화점 매장에서 보았다면서 아는 체하며 예쁘다고 했다. 필자는 그냥 “으응.” 하며 어색하게 웃고 말았는데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영 가볍지 않았다. 진품이 아니라고 말했어야 했는데 아닌 척하고 온 게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집에 돌아와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아까는 말 못했는데 그거 가짜야.”라고 말했더니 “어쩜 매장에서 보았던 것과 그렇게나 똑같니.” 하면서 자기도 사고 싶어 한참을 봤지만 너무 비싸서 눈요기만 했다고 깔깔대며 웃었다.
우리나라 짝퉁 제품 생산 규모가 매우 크다고 한다. 뉴스를 보다가 엄청난 물량의 가짜 명품을 폐기하는 장면도 심심치 않게 보았는데 끊이지 않고 적발되는 걸 보면 그 규모가 상상을 초월하는 것 같다. 짝퉁이란 가짜, 모조품, 유사품, 이미테이션의 의미를 가진 신조어로 너무 비싼 가격, 한정된 공급 등의 문제와 공급 면에서 이익에만 몰두하는 얄팍한 상인들의 상술, 그리고 정교한 이미테이션의 기술이 어울려 탄생한 가짜 상품을 말한다. 특히 최근에는 위조기술이 더욱 정교해지면서 전문가조차 진위를 가리기 어려울 정도라고 한다.
남이 어렵게 이루어낸 업적을 손쉽게 베껴 싼 가격에 파는 행위는 도둑질과 다름없다. 그래도 여전히 짝퉁 제품이 유통되는 건 우리나라 사람들이 체면과 겉치레를 중요시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나는 결코 명품에 집착하지 않는다. 명품이 싫은 사람이야 없겠지만 분수에 맞는 소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명품을 가지려고 무리해서 빚까지 내는 여성들도 있다 하니 걱정스럽고 부끄러운 일이다.
TV를 통해 어마어마한 물량의 짝퉁 제품을 소각 폐기하는 장면을 보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저 물건들을 다른 방법으로 활용할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언젠가 관세청에서 진품과 가짜를 구별하는 전시회를 연 적이 있는데 짝퉁 의류와 신발 등에 그림을 직접 그려 넣어 다른 나라에 기증하는 재활용 행사도 있었다고 하니 좀 더 생각해볼 일이다. 위조 상품은 폐기가 원칙이지만 자원 낭비와 오염 유발의 문제점이 있어 상표를 제거한 후 원래 상품권자의 동의를 얻어 국내 사회복지시설에 나누기도 했고 새롭게 디자인해서 캄보디아나 리비아 등 도움이 필요한 어려운 나라에 보내주기도 한단다. 그냥 태워서 없애는 것보다는 나은 방법이지만 아예 위조품이 없다면 고민하지 않아도 될 문제다.
그래도 기왕 공짜로 얻었으니 오늘 외출에 이 짝퉁 핸드백을 들고 나가려 한다. 꼭 명품을 좋아해서가 아니니 괜찮지 않을까? 나 자신에게 변명해본다.
필자와 친한 지인이 30여 년 넘게 직장생활을 하다가 은퇴를 했다. 마음씨 좋은 부인이 그간 가족들 먹여 살리느라고 고생했다면서 좋은 차 한 대 사서 여행을 다니자는 말을 꺼냈다. 기왕이면 우리도 BMW 한 대 사 가지고 신나게 다녀 보자며 맞장구를 쳤다. 그런데 이를 옆에서 듣고 있던 아들 녀석 왈, “아니, 아버지가 BMW 사서 뭐 하시게요? 그냥 작은 국산차 하나 사서 다니면 안 돼요?” “아니, 뭐라고라?~~~” 지인은 그때 생각만 하면 분이 풀리지 않는지 “참 내, 말이 안 나오더라고요”라면서 얼굴을 붉혔다.
요즘 자녀를 결혼시킨 부모들이 처음 겪는 갈등은 자녀들이 구입하고자 하는 차종이라고 한다. 그래도 남들 하는 만큼은 해줘야지 하면서 주택 구입이나 전세 자금은 물론 결혼 비용까지도 보태줬다. 당장에 가진 돈이 없어서 무리해서 대출까지 받은 부모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 신혼부부가 대뜸 외제차를 사겠다는 것이다. 결혼 전에 타고 다니던 차를 계속 타도 될 것 같은데 차부터 근사(?)하게 바꾸겠다는 것이다. 아니 왜 하필이면 비싼 외제차냐고 물을라치면 연비 등을 생각하면 국산차보다 비싸지 않다면서 비교표를 들이민단다.
결론 ① 저네들은 외제차 타면서 부모에게는 무슨 외제차 타령이냐고 들이대는 요즘의 젊은 것들?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내 일이면 내 일로 다가올 수 있다.
결론 ② 아~~~! 결국은 자식도 내 품을 떠나고 나면 남이구나. 남은 것은 내 아내, 내 남편, 우리 둘밖에 없구나. 이제 둘이서 오순도순 사는 게 인생 최고의 목표구나. 그럼 뭘 해야지?
결론 ③ 자식놈들이 뭐라 하든, 주위에서 뭐라 하든 내 살 길 내가 찾아야겠다. 그래, 차제에 BMW나 2대 마련하자. 아니 BMW를 1대도 아니고 2대씩이나?
첫 번째 BMW는 눈치 챘겠지만 바로 ‘버스, 지하철, 걷기(Bus, Metro, Walk)’이다. 사람은 직립인간이 된 이후 걸어 다녀야 뇌가 살아 있다는 신호를 받는다고 한다. 먼 곳으로 여러 날 여행을 가거나 생필품을 많이 살 때는 차를 이용해야겠지만 웬만하면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걸어 다니는 게 건강에도 좋다. 근교의 산이나 유적지는 물론 연극 또는 영화 등을 보러 다닐 때도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다니면 그 재미도 쏠쏠하다. 가다가 아무데서나 맛있는 것도 사 먹고 구경도 하면서 다닐 수 있다. 특히 지하철에다 기차를 포함시키면 전국구가 되어 방방곡곡을 유람할 수 있다.
그런데 요즘 대도시에서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고 다니려면 사전에 고민을 꽤 많이 해야 한다. 버스 번호가 세 자리를 넘어 네 자리까지 있어서 예전처럼 행선지가 머릿속에 선뜻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두 번 갈아타려면 스마트폰의 대중교통 앱을 이용해야 한다. 지하철에서 버스로 갈아탈 경우 출구를 제대로 찾아 나오지 않으면 다시 내려가거나 길을 건너는 불편을 겪어야 한다. 나름 요령과 노하우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만큼 생각도 하고 나름 전략을 짜게 만들어 치매를 예방하는 효과까지도 가져다 줄 것이다.
두 번째 BMW는 뭘까 하는 분들이 많을 것 같다. 필자가 만든 신조어이기 때문인데 별 거 아니다. 다름 아니라 ‘맥주, 막걸리, 와인(Beer, Makgeolli, Wine)’이다. 술을 안 마시는 분들께는 대단히(?) 죄송하지만 술을 좀 하는 사람은 적절한 음주만큼 인생을 즐겁게 하는 윤활유도 없다는 걸 잘 알 것이다.
그런데 그냥 술이면 술이지 왜 하필 BMW냐고 물을 수도 있다. 사실 위스키나 고량주, 소주처럼 도수가 높은 증류주, 도수가 낮은 맥주와 막걸리, 와인과 같은 양조주에다 칵테일까지 곁들이면 정말 다양하게 마실 수 있는 게 술이다. 그중에 BMW를 고른 이유는 나이 들수록 주량도 줄어들므로 도수가 약한 술을 조금씩 즐기면서 마시면 시간도 잘 가고 재미도 있기 때문이다. 와인의 원산지라고 할 수 있는 유럽에서는 점심에도 저녁에도 와인을 마신다. 하지만 그리 많이 마시지는 않으면서도 즐겁게들 식사를 한다. 술을 술술 마시면서 인생을 술술 풀어가는 것이다.
여기서 질문 하나. 만약 BMW, 즉 맥주와 막걸리, 와인을 조금씩 맛보기로 한다면 마시는 순서는? 필자가 몇 년 전 유럽에 갔을 때의 일이다. 여기까지 왔는데 맥주도 와인도 다 마셔 봐야겠다면서 무엇부터 먼저 마셔야 하냐고 물었더니 당연히 맥주부터 마셔야 한다고 했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영어 알파벳 순(B → W)인 데다 도수가 약한 술부터 마시는 게 좋기 때문이라고 했다. 도수가 약한 술부터 마셔야 순하게 취한다는 주당(酒黨)들의 주도(酒道)는 어디나 같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기억이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BMW를 마시는 순서도 영어 알파벳 순서로 보나 도수 순서로 보나 B → M → W가 된다. 도수 또한 맥주가 4~5도, 막걸리가 6도, 와인이 11~14도 아닌가. 지하철을 오르내리기 싫다면서 버스타기를 선호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시간에 맞춰 다니기에는 지하철이 최고라면서 지하철만 고집하는 사람도 있다. 반면 버스건 지하철이건 편한 대로 타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 마찬가지로 BMW 중에서도 맥주나 막걸리, 와인 어느 한 가지만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또한 이것저것 다양하게 마시길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맥주와 막걸리, 와인도 메이커에 따라 조금씩 향과 맛이 다르니 더더욱 그럴 것이다. 각자의 취향에 따라 주머니 사정에 따라 적당히 마시고 적당히 즐긴다면, 또 가끔씩 순서를 바꿔 마시면 그보다 좋은 재미가 있으랴.
요즘 다양한 국내 여행 패키지가 나와 있다. 차를 가지고 가면 술을 마실 수 없기 때문에라도 패키지여행을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출발 장소까지만 가면 그 다음엔 다 알아서 데리고 다닌다. 2박 3일이면 두어 번 정도는 자유 시간을 주면서 식사도 알아서 해결하도록 한다. 이때 그 지역의 막걸리 등 토속주를 맛볼 수 있다. BMW 2대를 가지면 더없이 자유롭고 행복한 이유다.
“한 잔 먹세 그려, 또 한 잔 먹세 그려. 꽃 꺾어 술잔 수를 세며 한없이 먹세 그려. 이 몸이 죽은 후에 ~~~ 차갑고 매서운 바람 불 때 그 누가 한 잔 먹자고 할 것인가? ~~~” 술을 좋아하기로 유명한 송강 정철 선생의 ‘장진주사(將進酒辭)’의 일부분이다. 아무리 약한 술이라고도 해도 한없이 마실 수야 없지만 ‘적중이지(適中而止)’, 즉 적당한 선에서 그칠 줄 아는 주당이라면 그 아니 즐거울소냐. 에헤야디야, 한 잔 먹세 그려, 또 한 잔 먹세 그려.
△ 최성환(崔聖煥) 한화생명 은퇴연구소장·고려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한국은행 과장, 조선일보 경제 전문기자, 고려대 국제전문대학원/경영대학원 겸임교수, 한화생명 경제연구원 상무, 은퇴연구소장 등 역임.
성인이 된 자녀가 부모 집에 얹혀살면서 어린이처럼 처신하는 현상이 미국에서도 새로운 문화로 자리를 잡았다. 캥거루족, 키덜트(Kidult), 어덜테슨트(Adultescent) 같은 신조어에도 익숙해졌다. 제 앞가림을 못하는 자녀 때문에 베이비붐 세대의 속앓이가 심해지고 있지만 여전히 애지중지하는 부모도 적지 않다. 이런 현상에 대한 학계의 연구와 언론 보도가 봇물을 이루고 전문가들의 논쟁도 끊이지 않고 있다. AARP(미국은퇴자협회)가 5월호에 게재한 ‘끔찍한 22세들(The Terrible 22s)’이란 제목의 특집 내용을 소개한다.
베이비붐 세대의 시각 : 우리가 그렇게 만들었다
요즘 20~30대인 밀레니얼 세대는 애지중지 키웠더니 제 구실을 못한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하지만 그건 한쪽에 치우친 말이다. 정말 문제는 부모인 베이비붐 세대다. 원인을 제공했고 날개까지 달아줬다. 줄리 리스코트-하임스 스탠포드대학 교수는 그의 저서 에서 “많은 부모가 자녀를 지나치게 보호하고 간섭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힘든 경험을 해보지 않은 밀레니얼 세대는 온실의 난처럼 현실 적응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베이비붐 세대가 20대일 때는 해외여행이나 연수를 가도 부모가 일정을 세세히 알려고 하지 않았다. 해외에서 엽서나 편지 한 장 보내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 당시 부모는 자녀가 20세가 되면 성인으로 인정하고 자신의 일을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뒀다. 자녀가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해 첫 봉급을 받을 때까지 생필품과 방값을 지원해 주면 부모의 책임을 다했다고 여겼다.
이런 경험을 한 베이비붐 세대가 자신들의 자녀를 대하는 태도는 전혀 딴판이다. 성인이 된 자녀를 여전히 품안에 끼고 있다. 자녀와 함께 지내면서 내밀한 생활까지 공유하려는 욕심 때문일 수도 있다. 소셜미디어와 같은 현대기술 덕분에 이런 현상은 더 심해지고 있다. 베이비부머는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트위터 등을 이용해 자녀의 일상생활과 고민을 낱낱이 파악하고 간여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자녀의 연예나 결혼에도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 결혼할 생각이 없는 청년과 몇 년째 교제를 하고 있는 딸에게 시간 낭비니 단교하라고 종용하는가 하면 중매 사이트에 자녀의 세세한 이력과 취향까지 올려 배필을 물색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자녀의 직장 생활에까지 발 벗고 나서는 부모도 적지 않다. 회사에 전화를 걸어 자녀의 취업인터뷰 절차를 알아보는 것은 기본이고 연봉 계약과 승진 문제로 직장 상사와 직접 상담을 하고, 자녀의 업무 성과까지 평가하는 웃지 못할 상황도 벌어지고 있다. 자녀가 어린이일 때보다 부모의 역할이 더 커진 셈이다.
미국 부모의 과보호 현상은 지난 1979년, 당시 여섯 살이던 에단 파츠가 학교버스를 타러 가다가 행방불명되면서 미국 전체가 공포에 빠진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여기에 1980년대 초 미국 어린이의 학력이 세계 수준에 못 미쳐 국가의 미래가 암울하다는 내용의 대통령 보고서가 발간되면서 ‘헬리콥터 맘’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대학생 6명 중 1명이 불안증세로 진단을 받았거나 치료를 받은 경력이 있을 정도로 정신력이 약해졌다.
부모가 병원 예약에서부터 선물 구입에 이르기까지 일상의 일을 대신해주니 자녀는 성인이 되어도 사소한 일조차도 제대로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부모는 아들딸이 도움 없이도 잘 지내게 되면 자신은 쓸모없는 늙은이가 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듯한 분위기다.
네브래스카의 임상심리학자 제인 워렌은 “좋은 가정에서 곱게 자란 자녀들의 자립심이 더 낮은 것은 아이러니한 현상”이라고 지적했다. 부모와 함께 있을 때 심리적 안정감을 느끼니 독립할 이유가 없어진다. 부모들도 고분고분 잘 따라주는 자녀와 함께 살고 싶으니 독립이 반가울 리 없다. 맨해튼의 심리치료사 제리 애게이트는 “자녀가 독립하면 부모는 책임을 다했다는 생각이 우선 들지만 자녀로부터 소외된 느낌도 들기 때문에 균형을 잡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오리건주립대학 리처드 세터스턴 교수와 작가인 바바라 레이는 공동 저서 에서 “요즘 젊은이들은 부모, 특히 어머니에게 조언과 자문을 받을 뿐 아니라 동료애와 위안도 느끼고 있다”고 밝혔다. 이 덕분에 세대 차이가 많이 좁혀지고 있다. 1970년대나 1980년대와는 달리 자녀의 생각이 부모와 닮아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베이비붐 세대는 자녀의 주위를 빙빙 돌면서 스스로 자유로운 생활을 접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러 가지 면을 감안할 때 이제는 자녀들이 21세기에 직면할 문제를 스스로 해결토록 하는 공동 목표를 세우고 최선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다음 세대가 번영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다.
자녀인 밀레니얼 세대의 시각 : 부모님은 몰라요
베이비붐 세대는 헌신적인 노력에도 자녀들이 무기력하고 생활을 꾸려갈 준비도 안 됐다고 낙담하고 있는 것 같다. 공포와 수치심이 뒤섞인 숨 막힐듯한 태도로 자녀를 대하는 느낌마저 준다. 밀레니얼 세대를 평가절하하는 근거없는 이야기도 많이 나돈다.
입사 면접에까지 부모와 함께 간다는 소문이 단적인 예다. 이 이야기는 2013년 9월 월스트리트저널에 ‘면접장까지 부모와 함께 가야 하나?’라는 제목의 기사로 소개됐다. 인력관리회사인 아데코가 대학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를 근거로 한 이 기사는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응답자의 8%가 입사 면접에 부모와 함께 갔고 3%는 자리를 같이했다는 내용이다. 사실을 제대로 파악해 보면 황당해진다. 차가 없는 자녀를 면접장까지 차로 데려다 주고 면접장 주위에 앉아 기다린 부모의 비율을 집계한 통계를 왜곡해 큰 제목으로 기사화한 것이다. 대중교통이 불편한 미국에서는 부모가 어디든 차로 데려다 주는 것은 자연스런 일상이다.
밀레니얼 세대는 경제력이 떨어진다는 분석도 왜곡된 점이 없지 않다. 2013년, 25~34세인 남성의 수입은 1980년 그 또래의 남성에 비해 물가상승률을 감안했을 때 18.5%나 감소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기간 젊은 여성의 수입은 40.5%나 증가해 전체적으로 보면 그 전 세대와 수입 차이가 별로 없다.
경제정책연구센터(CEPR)에 따르면 밀레니얼 세대의 하위 60%는 부모세대 때보다 재정상태가 훨씬 열악하다. 1989년, 18~34세의 젊은 성인들은 평균 3300달러의 순자산을 보유했으나 2013년의 그 또래는 7700달러의 빚을 지고 있다. 학자금 융자가 빚 증가의 주요인이다.
그렇다면 밀레니얼 세대가 과거 부모세대에 비해 더 많이 파산했냐 하면 그건 상황에 따라 다르다. 대학을 졸업한 경우 베이비붐 세대보다 형편이 더 낫고 고등학교 이하 학력의 경우는 부모세대 때보다 수입이 훨씬 떨어지는 상반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베이비붐 세대는 이런 자녀를 위해 옹호자, 친구, 상담사 등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다. 더 나아가 소셜미디어를 통해 자녀와 좀 더 가까워지려 하고 있다. 하지만 자녀의 생각은 좀 다르다. 부모가 자신만의 소셜미디어 영역에 깊숙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안전장치를 하고 있다. 부모 집에 같이 사는 것도 밀레니얼 세대만의 현상은 아니다. 1911~1924년에 태어난 가장 위대한 세대 때는 대공항의 여파로 직업을 구하지 못해 부모와 함께 지낸 캥거루족이 더 많았다. 고용여건이 악화되고 임대료 부담이 가중되면 언제라도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다.
요즘 직장 상사들은 “밀레니얼 세대들이 문자를 주고받느라 근무를 태만히 하지만 일일이 나무랄 수 없어 포기하고 만다”고 말한다. 하지만 근무 태만은 밀레니얼 세대만의 문제가 아니다. 징계를 하거나 해고를 하면 될 일을 밀레니얼 세대의 특성으로 치부하는 것은 옳지 않다. 밀레니얼 세대는 아직 젊다. 앞으로 수십 년을 살아가면서 미흡한 생활능력을 키우고 재산도 모으며 자녀도 낳아 기를 것이다. 균형 잡힌 시각에서 보면 밀레니얼 세대도 다른 세대와 별 차이가 없다. 더 예민한 부모가 있을 뿐이다.
히 식스(He 6). 1960~1970년대 미8군 무대와 이태원·명동 일대 음악 살롱을 격렬한 록 음악으로 장악하던 여섯 명의 청년(권용남, 김용중, 김홍탁, 유상윤, 이영덕, 조용남)이 있었다. 당시 젊은이들의 우상이자 거울과 같았던 그들은 40여 년의 세월이 흘러 또 다른 세대의 거울 앞에 섰다. 중·장년의 답답한 마음을 달래주고, 낭만을 추억하는 그들의 새로운 이름은 ‘파파스(PAPAS)’ 밴드다. 그 이름처럼 아버지의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음악만 있다면 언제나 20대로 돌아간다는 그들을 만나봤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히 식스 원년 멤버였던 조용남(曹龍男·69), 유상윤(兪尙潤·68), 김용중(金用中·68)을 주축으로 조용필 밴드 ‘위대한 탄생’의 이건태(李建泰·63), 변성용(卞成鏞·63), 와이키키브라더스의 리더 최훈(崔薰·59)이 합세한 파파스 밴드. (다른 히 식스 멤버들은 건강이 좋지 않거나 해외에 거주해 함께하지 못했다고) 히 식스 2기로 함께 활동했던 고(故) 최헌(1948~2012)을 추모하기 위해 다시 모인 것이 밴드 결성의 계기가 됐다.
“(조용남)보컬이었던 최헌씨가 작고한 후, ‘2013년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에서 대통령표창을 받았어요. 고인이 되어 그 영광스러운 자리에 올 수 없으니 같은 팀이던 우리가 그를 위해 연주하면 어떨까 생각했죠. 그렇게 잠시 모여 공연을 했었는데, 김용중씨가 못내 아쉬웠는지 ‘우리 다시 뭉쳐야 하는 것 아니냐’라고 하더라고요. 그때 그 친구가 건강이 좋지 않았는데, 정말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뜻을 모았죠.”
당시 간암을 앓고 있던 김용중씨는 자신을 가장 활력 넘치게 했던 젊은 날의 그 음악이 간절했다. 그렇게 다시 시작한 음악으로 삶의 즐거움을 만끽하며 몸과 마음의 건강을 되찾았다.
“(김용중)다 같이 모여 연습하는 것은 일주일에 하루뿐이지만, 그 하루를 위해 6일 동안 열심히 준비해야 해요. 내가 좋아하는 음악에 푹 빠져 지낼 수 있으니 참 행복하고 재밌어요.”
파파스 음악, 중장년 마음의 ‘사이다’
보컬그룹사운드라는 것을 강점으로 내세운 그들은 각자의 포지션(베이스-조용남, 색소폰·건반-유상윤, 리듬기타-김용중, 건반-변성용, 드럼-이건태, 리드기타-최훈)과 더불어 모두 보컬을 겸하고 있다. 그들이 주로 연주하고 부르는 음악은 1970년대를 풍미하던 올드 팝과 로큰롤이다. 젊은 시절 손끝이 닳도록 기타를 치고, 목청이 나갈 정도로 불렀던 노래들이다. 부른다기보다는 부르짖는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당시 나온 기사들만 보아도 그들의 모습을 ‘폭발하는 젊음의 절규’, ‘화려한 조명 아래 정글에 가까운 노래’ 등이라 표현했으니 말이다.
파파스 밴드의 맏형인 조용남씨는 히 식스 시절 한 인터뷰에서 “젊은 세대의 음악인 우리의 울부짖음을 통해 위안을 얻는 거죠. 청량음료 역할을 하고 있는 우리의 참 마음을 (어른들이) 알아달라고 하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요즘 젊은이들이 쓰는 언어 중에 ‘사이다’라는 말이 있다. 사이다(탄산음료)처럼 시원하게 마음이 뻥 뚫리는 기분을 표현할 때 쓰는 신조어다. 그 시절에 그들의 음악이 바로 ‘사이다’ 같은 존재였던 것. 위축되고 권태에 짓눌린 젊은 세대의 마음을 톡톡 쏘는 음악으로 시원하게 만들어준 그들이다. 그리고 현재, 그들이 그때의 곡들을 다시 연주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유상윤)젊은 사람들이 요즘 중·장년은 트로트나 뽕짝 같은 것만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러나 당시 우리에겐 그룹사운드의 음악이 가장 세련되고 인기 있었죠. 밴드 간 경쟁도 대단했어요. 그 치열하던 시절에 심취한 음악을 연주하다 보면 꼭 20대로 돌아간 것 같아요. 패기와 열정으로 함께한 친구들도 같이 있으니 철없던 시절 추억들도 새록새록 떠오르고요.”
뭉클한 옛 기억에 잠기는 것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파파스의 음악을 듣는 관객 역시 혈기왕성했던 시절의 추억 한 자락을 곱씹어 본다.
“(최훈)얼마 전에 우리 공연을 보고 간 한 관객이 자기 블로그에 ‘팬들과 함께 나이 들어가는 음악을 하고 싶다는 말에 울컥했다’고 썼더라고요. 젊은 친구들은 경험하기 어려운 오랜 팬과의 음악적 교감을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었죠. 우리의 음악을 통해 그런 짙은 감정을 공유할 때가 참 뿌듯하고 흐뭇해요.”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순간의 감동과 즐거움일 수도 있지만, 파파스 세대에게 음악이란 과거의 리듬을 되살아나게 하는 촉매제와도 같다. 조용남씨는 “음악이 그래서 좋은 거잖아. 내가 고등학생 때 좋아했던 음악이 나오면 그 시절로 확 돌아가는 거야!”라며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보였다. 그의 말에 “맞아! 맞아!”라며 맞장구치는 파파스 멤버들의 모습에서 그들이 간직하고 있을 뜨거운 추억의 온도를 가늠할 수 있었다.
‘배려’로 다져지는 파파스 음악
그룹 ‘와이키키브라더스’와 ‘믿음소망사랑’의 핵심 멤버였던 기타리스트 최훈. 사실 그도 웬만한 공연에 나서면 대선배 대우를 받지만 파파스에서는 귀염둥이 막내다.
“(최훈)히 식스의 팬이었는데 그들과 함께 연주하는 지금 이 순간이 무척 영광스럽고 소중해요. 형님들의 완벽한 소리를 들을 때면 지금도 전율이 느껴지곤 하죠. 다른 데서는 저도 긴장을 안 하는데 선배들과 함께하기 때문에 늘 신경 쓰고 풀어지지 않으려 해요. 그러면서 음악에 더 집중하고 완성도를 높일 수 있어 좋더라고요.”
그만큼 록 밴드 사이에서는 전설로 통하는 그들이지만, 원로(元老) 대우는 사양한다. 왜일까? 그 이유는 간단했다.
“(유상윤)음악 하는 그 순간만큼은 스무 살이라니까. 나는 젊고 싱싱한 기분으로 연주하는데 극진한 원로 대접을 받으면 어쩐지 팍 늙어버린 기분이 들잖아요. 무대에 올랐을 때의 마음가짐은 몇십 년이 지나도 한결같은 걸요.”
인생의 절반 이상을 음악과 함께해 온 그들에게 무대는 편안한 놀이터와 같을 것이다. 하지만 무대에 오르기 전 긴장과 설렘으로 여전히 손에 땀이 난다.
“(이건태)연주하며 표현하는 퍼포먼스나 스킬은 능숙해졌을지 모르지만, 무대에 임하는 자세는 거의 변함이 없어요. 열심히 애정을 가지고 준비한 음악을 관객들에게 좋은 모습으로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늘 떨리고 신중하죠. 경력에 상관없이 청중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당연하고요. 오히려 명성 때문에 책임감과 부담이 더 커졌다고 볼 수 있어요. 그러니 더 신경 쓰이고 가슴이 뛰죠.”
그런 그들이 오랜 밴드 생활을 하며 터득한 삶의 지혜는 ‘배려’와 ‘양보’다. 밴드 음악은 무엇보다 팀워크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파파스는 리더를 따로 두지 않았다. 모두 각 분야의 리더인 만큼 솔선수범하되, 서로를 존중하자는 의미에서다.
“(이건태)혼자 너무 튀려고 하거나 자기만 잘하려고 하면 좋은 음악을 만들 수 없어요. 젊은 시절에는 그게 얼마나 중요한지 몰랐죠. 연습하다가 치고받고, 그러다 팀이 깨지는 경우도 많았어요. 지금 파파스 멤버들은 그 세월을 지나왔기 때문에 배려하고 양보하는 것을 가장 우선으로 생각해요. 밴드뿐만 아니라 인생에서도 그게 옳다는 것을 아는 거죠. 그러다 보니 공연의 완성도가 높아지고, 세련되고 성숙한 음악을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인터뷰 동안 변성용씨는 유독 말이 없었다. 하지만 틈틈이 멤버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호응하고, 따뜻한 미소를 짓는 모습에서 그들이 말하는 팀워크를 발견할 수 있었다. 팀 내 건반을 맡아 부드러운 멜로디로 멤버들의 개성을 살려주고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그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들이 작게만 보여…
그들의 무대는 ‘Can’t take my eyes off you’, ‘Boxer’, ‘Hotel California’ 등 팝을 비롯해 ‘초원의 빛’, ‘물새의 노래’ 등 히 식스 시절의 음악을 주요 레퍼토리로 구성한다. 대부분 30~40년 전 노래이지만, 가장 최근 만들어진 ‘사랑은 무슨 사랑’을 타이틀곡으로 선정했다. 이 곡은 1997년 조용남씨가 속해 있던 ‘2040 밴드’의 멤버인 김기표가 작곡했다. 20년 가까이 된 노래이지만, 당시 이미 중년이었던 그들의 마음을 담아 만든 곡이다. 가사는 이러하다.
‘왜 이럴까/ 내가 왜 이러는 걸까/ 음악 속에 묻혀 산 나날/ 어느덧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들이 작게만 보여/ 그날의 꿈은 어디에/ 내 열정은 어디에/ 뒤돌아보면/ 못 견디게 그리워/ 가거라 아주 가거라/ 사랑은 무슨 사랑/ 내 나이 몇이더냐/ 이제부터인 것을…’
전반부는 담담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열정을 토해내는 듯한 보컬이 인상적인 곡이다. 특히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들이 작게만 보인다는 노랫말이 묵직하게 다가왔다. 조금은 씁쓸하게도 느껴지는 가사이지만, 그들은 “그거야 (나이가 들었으니) 당연한 것”이라고 말한다. 음악과 동고동락한 지금까지의 삶이 살아갈 인생의 가장 큰 기쁨이자 가치가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파파스 멤버들이다.
나이가 몇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무대 앞에서는 늘 새로 태어나기 때문. 타이틀곡의 마지막 구절을 힘 모아 불러보는 그들이다.
“이제부터인 것을!”
반려동물 인구가 1000만명을 넘었다. 사랑을 주며 함께 놀아주던 ‘애완동물’의 시대가 가고 삶을 함께하는 동반자 ‘반려동물’의 시대가 왔다. 시대를 반영하듯 신조어도 생겨났다. 바로 펫팸족, 즉 반려동물을 뜻하는 ‘펫(pet)’과 가족이란 뜻의 패밀리(family)를 합쳐 ‘가족만큼 소중한 존재로 반려동물을 생각하고 함께 사는 사람들’을 말한다. 혼자 사는 인구의 증가가 불러온 문화현상. 시니어들도 예외는 아니다. 자식과 가족들이 떠난 자리, 반려동물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의 ‘혼남’ 신중년 주병진
펫팸족의 위상은 요즘 TV를 틀어 봐도 알 수 있다. 비슷한 시기에 방송을 타기 시작한 JTBC , 채널A 는 최근 펫팸족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하고 있다. 특히 의 출연자 중 주병진(56)은 혼남(혼자 사는 남자의 준말) 신중년 펫팸족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혼자 살기에는 너무 큰 주병진의 200평대 펜트하우스에 웰시코기 세 마리가 입양해 들어오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주병진은 신중년 나이답게 서툴지만, 정성껏 반려견들을 돌본다. 입양에서부터 배변 운동, 강아지 발톱 깎기, 목욕하기 등 소소한 펫팸족의 일상이 지나간다. 무엇보다 관심가는 부분은 회가 거듭할수록 주병진과 집의 표정이 훈훈하게 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대화 없이 사람 혼자 살던 집에 반려동물이 가족으로 들어와 서로 교감하는 방법을 알아가고 배운다’는 설정이 펫팸족을 원하는 이들에게는 환상을, 펫팸족에게는 공감을 주고 있다.
시니어 펫팸족을 찾아서
서울 서초구 양재동에 거주하는 박성천씨(朴性天·78)는 말 그대로 펫팸족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젊은 시절 개를 무척이나 좋아해 100평 단독주택의 방 하나를 개집으로 쓸 정도였다. 일본과 부산에 족보 좋은 미니어처 핀서가 있다기에 쫓아가 구매했다고. 유명한 명견대회에서 기르던 개가 챔피언을 해 전국에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부업으로 강아지 분양도 하고 명견대회에도 틈틈이 참여하면서 개 없이는 못 사는 인생(?)을 살아왔다.
박성천씨는 작년 말 지금까지 개들을 키워온 실력을 바탕으로 양재동 노인종합복지관에서 반려동물 관리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최연장자 반려동물 관리사 1호’로 이름을 올린 것이다. 반려동물관리사는 집을 비우는 반려인들(반려견과 생활하는 사람)을 대신해 반려동물을 대신 돌봐주는 ‘반려동물 돌봄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때도 박성천씨는 반려견을 관리하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박성천씨는 지금도 역시 반려견과 함께 산다. 이른바 시니어 펫팸족. 아내와 함께 15살 된 푸들 다다를 키우며 살고 있다. 아들, 딸들을 시집장가 보내고, 교수 만들고 나니 집에는 아내와 다다 그리고 박성천씨만 남았다. 그래도 집에 들어올 때마다 반갑게 맞아주고 혹시나 아프면 안부를 물어오듯 핥고 바라봐주는 다다가 있어 즐겁고 행복할 따름이다. 박성천씨는 반려견을 키우고자 하는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예전에는 애완견이었지만 지금은 반려견이라고 불러요. 보살핌보다는 같이 사는 가족의 의미를 부여한 거죠. 그러니까 반려견과 함께 살려면 무조건 사랑하고 인내해야 해요. 그리고 끝까지 책임져야 합니다. 유행이라고 마구 사고 그러는 거 아니에요.”
박성천씨는 반려동물을 괴롭히는 사람을 보면 왜 같이 사는지 묻고 싶다. 반려동물을 가족으로 들이기 전, 자기와 가족 모두가 한 생명체를 책임질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 먼저 판단하기를 당부했다.
최근 들어 성인이 된 자녀와 함께 살아가는 황혼의 사례가 많아지고 있다. 함께 사는 이유는 다양하다. 두 세대 이상의 더부살이는 우선 경제적으로 지출을 줄여준다. 자녀가 맞벌이를 한다면 양육에도 커다란 도움이 된다. 하지만 대신 크고 작은 갈등도 함께 많아진다는 점은 주의해야 한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현명한 ‘더부살이 방법론’이 중요해진다는 얘기다.
최근남(64세·남)씨 부부는 서울 구로구의 아파트에서 지난해 10월부터 아들 최현웅(36세·가명)씨와 다시 함께 살고 있다. 아들이 스무 살이 된 이후 16년 만이다. 은퇴 이후 부쩍 외로움을 느끼던 부부였다. 전세금을 피해 도망친 아들의 ‘귀향’이 반가웠다. 아들 내외가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화장실이 달린 큰 방을 비워주고 도배도 새로 했다. 사람 소리가 나는 것이 좋았다. 최씨 부부에게도 활기가 돌았다. 장을 보러 나서는 일이 많아졌고 식사도 식사다워졌다.
하지만 얼마 뒤부터 갈등이 시작됐다. 아들의 생활습관을 두고 “애도 아니고 뭐니?” 한마디 했던 것이 시작이었다. 얼마간 말이 오갔다. 기억나는 아들의 대답은 “나갈게요, 나가면 되잖아요!” 였다. 이후 아들과의 충돌은 점차 많아졌다.
한 지붕 2~3대 가구 늘어가는 추세
그동안 우리사회에서는 ‘핵가족화’가 진행돼 왔다. 산업화, 도시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독립한 뒤에 다시 집으로 들어오거나 성인이 된 후에도 아예 독립하지 않는 자녀들이 늘고 있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함께 사는 자녀를 ‘캥거루족’, 독립한 뒤 다시 집에 들어오는 자녀를 ‘연어족’으로 부르는 신조어도 생겨났다.
부모와 성인이 된 자녀가 한 지붕에서 사는 사례는 점점 늘어가는 추세다. 서울시가 2000~2010년 통계를 분석해 발표한 ‘서울가족구조통계’에 따르면 30~40대 성인 자녀가 가구주인 부모와 동거하는 수가 10년 새 91%나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가장 최근 자료인 지난해 통계에서는 60세 이상 서울시민의 45.2%가 자녀와 함께 살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비단 한국뿐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나타난다. 독립정서가 강한 미국조차도 18~34세 10명 중 3명(29.9%) 가량이 부모의 집에서 살고 있다는 조사가 나온다. 이 비율은 1990년 26.8%, 2000년 27.7% 등 지속적인 증가세를 보이고 있는데, 현지 언론은 지속된 주택가격 급등을 원인으로 보고 있다. 일본에서는 20~30대 부모의 집에서 살아가는 30~40대가 약 300만 명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자녀와 함께 사는 60대, 생활만족도 높아
두 세대가 함께 살면 가족의 삶이 풍성해진다. 다수의 학술연구 결과는 60대 이상 부부들이 자녀와 함께 사는 경우 생활에 대한 만족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 자녀 역시 부모와 함께 사는 경우 생활 만족도가 높아진다. 이는 주로 주거·육아 등의 부분에서 경제적인 여유가 생기면서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일부에서는 아예 두 세대가 각각 살아가기에 용이하도록 설계된 집을 짓고 살기도 한다. 각자의 생활을 최대한 존중한 것이다. 경기 용인시에 거주하는 정순이(59세·여)씨는 전원주택으로의 이사를 계획하면서 아예 아들 내외와 살기 위한 집을 지었다. 두 세대가 한 지붕 아래에 거주하며 가깝게 소통하며 지내면서도 자잘한 간섭이 생길 여지를 없앴다. 정씨는 “주말 낮 북적대는 소리에 우리 부부도 활기를 얻게 됐다”면서 “아들 내외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니 며느리도 큰 불편이 없다고 했다”고 말했다.
이처럼 아예 두 세대가 함께 사는 것을 고려해 집을 짓는 경우도 늘어가는 추세다. 특히 서울 등 대도시에서 출퇴근이 가능한 거리의 경우 성인자녀와 살기에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다. 주택시공업체 H사 관계자는 “두 세대가 함께 살 수 있는 집을 짓고 싶다는 문의가 늘어가는 편”이라며 “최근에는 대형 건설사 아파트 중에서도 세대가 분리된 형태가 나온다”고 말했다.
자녀와 한 집서 살아가려면 갈등관리 중요
다만 예기치 못한 부분에서 갈등을 겪을 수도 있다. 김태현 성신여대 교수(여성학)는 “성인이 된 자녀라고 해도 생각, 관심사, 생활방식은 크게 다를 수 있다”며 “성인자녀들은 부모보다는 배우자나 자식들과 더 밀접함을 느끼고 있어 이러한 세대차이가 갈등을 심화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성인이 된 자녀의 생활과 가치관 등을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조언이다.
특히 자녀가 어린 시절을 생각하고 권위적인 방식으로 소통에 나서는 경우 갈등이 커지기도 한다. 앞선 최씨의 경우 아들의 생활방식에 대한 아버지의 언급 이후 다툼이 잦아졌다. 최씨의 의도와 달리 아들에게는 권위적인 간섭이 됐을 수 있다는 얘기다.
때로는 경제적인 부분도 갈등의 불씨가 된다. 미래에셋은퇴연구소의 ‘은퇴리포트’에 따르면 성인 자녀 1명과 함께 살 때 추가로 필요한 생활비는 월 98만원이다. 보고서는 60대 부부가 중산층 수준의 생활을 하는 데 월 258만원이 필요한 반면, 자녀 2명과 3년가량 함께 사는 경우라면 총 7056만원의 생활비가 추가로 필요하다고 분석했다.
‘걸크러시(Girl’s Crush)’. 여자가 여자에게 반하거나 동경하는 행위를 의미하는 신조어다. ‘여자의 적(敵)은 여자’라는 옛 말이 무색하게 요즘의 젊은 여성들이 같은 여자를 동경한다. 특히 사회적으로 성공한 중년 여성부호들에게서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찾는 젊은 여성들이 많이 늘었다. 전보다 많은 여성들이 사회생활을 하는 와중에, 권위적이고 남성적인 조직문화에 좌절하지 않고 성공을 이뤄내는 이들의 모습에 반하는 것이다.
김유준 프리랜서 기자 dongbackproject@gmail.com
장르 영화에는 관습이라는 개념이 존재한다. ‘영화 유형에서 보편화된 극적 요소나 제재 또는 양식화된 표현방법’으로, 영어로는 컨벤션(convention)이라고 한다. 이를테면 서부영화에는 정의감 넘치는 주인공이 황야에서 말을 달려 추격을 펼치고 마지막에 결투를 벌여 악당을 물리치고는 고독한 모습으로 떠나는 모습이 종종 그려진다. 주인공이 못나게도 악당 짓을 하거나 “그리하여 스티브는 가족들과 함께 오순도순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하고 끝나는 서부영화를 보기는 쉽지 않다. 그러므로 말, 질주, 추격, 결투, 고독한 주인공 등은 서부 영화의 대표적인 관습이라고 할 수 있다.
말을 타고 달리는 모습이 멋지다는 이유로 벤 존슨이라는 마부가 서부 영화에 기용되어 일약 영화계의 스타가 된 것은 그 덕분이다. 영원한 청춘스타라는 제임스 딘이 남긴 세 작품은 모두 현대극이지만, 그 작품들은 서부 영화의 전통에 따라 젊은 주인공을 고독하고 투쟁적으로 그림으로써 영화의 역사에 이름을 새겼다. 의 이른바 ‘치킨 런’ 장면이 오래도록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청바지를 입었거나 카우보이모자를 쓴 제임스 딘의 스냅 사진이 유독 기억에 남는 것은 그 때문이다.
여성, 과연 걸림돌이었나?
역설적으로,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은 에 등 뒤에서 총 쏘는 것은 예사에다 심지어 화장실에서 일 보는 상대에게 총격을 가하는 등의 비열한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내세움으로써 ‘관습을 뒤집어 서부극을 사실적으로 승화했다’는 평단의 찬사를 받으며 골든 글로브와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작품상을 석권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관습은 액션이나 스릴러 같은 장르 영화에도 뚜렷이 존재한다. 여성이나 어린아이가 맡는 역할은 대표적인 예. 그들은 불꽃 튀기는 영화에서 자랑스러운 배역들을 맡지 못해왔다. 그들은 언제나 남성 주인공들의 질주를 가로막는다. 주인공이 파죽지세로 적들을 물리치려는 순간, 주인공이 사랑하는 여성은 약속이나 했다는 듯 적에게 인질로 잡힌다.
악당은 여성의 목을 팔로 휘어 감고 여성의 정수리에 총을 겨누고 있다. 그 광경을 남성 주인공은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다. 어떤가? 어디서 많이 본 장면 같지 않은가?
카우보이 영화의 전통을 고스란히 현대에 이어받아 전 세계적으로 크게 히트한 액션 영화 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형사 존 매클레인(브루스 윌리스)의 부인인 홀리(보니 베델리아)는 마지막 장면에서 한스 그루버(앨런 릭맨)에게 인질로 잡힌다. 매클레인은 등 뒤에 숨겨둔 권총으로 악당을 처치하고 총구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입김으로 훅 분다. 전형적인 서부 영화의 컨벤션이다.
구태여 옛날 작품들을 예로 들 것도 없다. 의 이정범 감독이 장동건을 주연으로 내세운 신작 에서도 이런 장면은 여지없이 등장한다.
지금껏 장르 영화에서 여성은 ‘걸림돌’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은,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가 그 정도에 머물렀음을 우회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속 여성, 스토리라인 끌어가고 있다
이제 영화 교과서의 이런 예들은 수정되어야 할 것 같다. 최근 영화들에서는 더 이상 여성이 나약하게 그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영화에서 여성들은 스토리라인을 적극적으로 끌어나가고 있다.
액션 영화 장르의 대표주자 격인 시리즈부터 변화가 뚜렷이 감지된다. 최근작 에서 여주인공 일사(레베카 퍼거슨)는 기존의 여성 배역과 다르다. 누구 못지않은 역량의 소유자로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남자 주인공 에단 헌트(톰 크루즈)를 들었다 놨다 한다. 2000년도에 오우삼 감독이 연출했던 작품과 비교하면 차이는 확연하다. 2편의 니아(탠디 뉴턴)가 헌트에 종속돼 있는 캐릭터라면 일사는 단연 독립적인 존재. 나아가 헌트의 목숨을 몇 번이나 구해내기도 한다.
조지 밀러 감독의 에서는 숫제 캐릭터의 비중이 뒤바뀌었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최근작 에 이르러 타이틀롤인 맥스(톰 하디)보다 여성 캐릭터 퓨리오사(샤를리즈 테론)가 더 두드러진다.
외국 영화만 그런 것도 아니다. 우리나라 영화는 오히려 한발 더 앞서 나간다. 일찍이 박찬욱 감독은 라는 완전무결한 ‘여성 주인공의 영화’를 발표한 바 있다. 박찬욱 감독은 제작 발표회에서 “우리나라에서 감독은 두 가지로 나뉜다”며 그 두 종류가 “배우 이영애와 작업해본 감독과 그렇지 못한 감독”이라고 말했다. 그가 얼마나 여성 배우와 캐릭터에 공을 들이는지 알 수 있는 대목. 신작인 또한 제목에서 눈치 챌 수 있듯 여성 중심의 영화가 분명하다. 정확한 구성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귀족 여성과 소매치기 여성이 전체 이야기를 이끌어나간다고 알려졌다.
그와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또 한 명의 거장 봉준호 감독은 라는 걸출한 영화에서 강인한(또는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어머니 상을 표현했다. 신작 에서는 10대 소녀인 여성 주인공이 그 역할을 떠맡는다.
신작을 발표할 때마다 1000만 관객을 불러들이는 최동훈 감독 역시 여성을 보는 시각이 전향적이다. 그의 초기 대표작인 이나 에서부터 여성들이 맡은 배역이 범상치 않았지만, 대단한 흥행을 기록한 에 이르러서는 안옥윤(전지현)이 맡은 비중이 다른 어떤 영화보다 크다. 어떤 평론가는 “전지현에 의한, 전지현을 위한, 전지현의 영화”라고까지 말했을 정도.
할리우드에서 돌아온 김지운 감독 역시 예외는 아니다. 지금 준비하고 있는 작품의 제목은 . 송강호와 공유라는 두 배우가 주연을 맡아 항일무장투쟁 운동을 펼치는데, ‘밀정’이라는 제목 캐릭터가 다름 아닌 여성이라는 후문이다.
여성이 당당히 주역
이런 현상은 영화뿐 아니라 대중문화의 다양한 장르에서 폭 넓게 드러나고 있다. 같은 뮤지컬, 등의 TV 드라마, 같은 게임에서 강인한 여성이 주역을 맡고 있다. 무엇보다 상업성에 민감한 대중예술 제작자들이 여성을 주인공을 내세우는 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그러한 여성 캐릭터가 지금의 대중에게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20세기에는 남성 대중이 혀를 끌끌 찼을 여성 캐릭터들을 요즘 사람들은 바람직하게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알파걸’이니 ‘걸크러시’니 하는 낯선 용어들이 언론과 인터넷을 중심으로 심심찮게 돌아다니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렇게 된 이유에 관해서는 비교적 분석이 완료된 느낌이다. 서울대 배은경 교수(여성학 협동과정)는 대학 저널에 기고한 글에서 ‘20세기 중반 이후 전 세계를 휩쓴 신자유주의적 변화가 이런 현상을 낳았다. 경제적 능력을 통해서만 안정적 자아실현을 이룰 수 있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경제적 지위가 높은 전문직· 고연봉 여성들이 칭송받게 되었다’고 분석했다. 이와 같은 사회적 현상이 대중문화에까지 영향을 끼쳤다고 보는 것이다.
비슷한 맥락으로 경제 불황과 연관 지어 설명하는 분석도 많다. 이런 시기라면 남성들이 사회에서 경제력을 잃어가는 대신 여성의 경제활동이 활발해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이런 현상이 ‘과거에 비하면 바람직한 편이지만 여성의 활약만 강조되었을 뿐 불평등한 사회 구조는 여전하며 이에 대한 비판도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흥미로운 점은 최근에는 이런 지적에 대한 반성까지 대중문화에 투영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른바 ‘성난 엄마’의 출현이다. 여성 중에서도 어머니들이 나서서 사회 부조리를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 발표된 같은 영화들은 모두 어머니가 가족을 잃고 복수에 나선다. 영화뿐만 아니다. 지난해 방영된 서울방송의 을 비롯해 올해 문화방송이 공개한 과 서울방송 등은 아예 제목에서부터 어머니가 주인공임을 드러내고 있다. 더불어 그들은 하나같이 여성이나 어린이 같은 약자에 대한 차별과 폭력, 권력층의 부패 커넥션 등을 신랄하게 고발하고 있다.
의 주인공 조강자(김희선)는 자녀와 관련된 사회문제에 분노하고, 그 해결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우리 시대의 ‘앵그리 맘’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이다. 은 아예 어머니로서의 주인공보다는 여형사로서의 캐릭터에 더 집중한다. 강력계 형사인 주인공 최영진(김희애)은 누가 봐도 ‘나쁜 아빠’인 강태유(손병호)가 상징하는 남성 중심적 권력의 부조리와 강력히 맞붙어 싸운다. 단지 여성의 몫이 늘어난 정도가 아니라 과거의 투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사회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게 된 것이다. 남성들과 경쟁해 성공한 여성들의 모습은 같은 여성들에게 당연히 쾌감을 준다. ‘롤모델’이 된 여성 리더들은 자신의 경험에 근거한 여권(女權) 문제를 공식석상에서 거론하면서 여성들의 대변인이 돼주기도 한다.
여성의 목소리가 높아지게 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여성의 몫이 늘어나기 시작한 20세기 중반부터 그런 양상은 꾸준히 있어왔다. 그러나 최근의 현상들은 지난날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폭발적이며 더불어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과거의 힘센 여성들이 단지 자신들을 핍박하는 남성에게 대항했다면, 요즘 여성들은 사회라는 시스템 자체에 저항하고 있다. 21세기 들어 여성들의 활약은 수준과 차원을 드높이고 있다. 지금의 여성들은 더 이상 무기력하지 않다.
# 알파걸 Alpha Girl 공부, 운동, 대인관계 등 모든 분야에서 또래 남학생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성과를 보이는 엘리트 계층의 여성을 일컫는다. 그리스 알파벳의 첫 자모인 알파(α)에서 유래됐다. ‘첫째가는 여성’이라는 의미에서 이 같은 이름이 붙었다. 미국 하버드 대학의 아동 심리학자인 댄 킨들런 교수가 북미지역에 거주하는 113명의 소녀를 인터뷰하고 남녀학생 900여 명에게 편지로 설문한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만든 개념으로 2006년 그의 저서 <알파걸, 새로운 여성의 탄생>을 통해 사회에 널리 알려졌다.
# 걸 크러시 Girl Crush 어떤 여성이 다른 여성에게 느끼는, 일반적으론 섹슈얼한 감정이 동반되지 않은 강렬한 호감 혹은 감탄을 뜻한다. 남성들이 스포츠 스타들에게 느끼는 감정과 비슷하다. 케이블 방송에서 방영된 의 여성 래퍼들이 여성 팬들에게 강력하게 지지받은 것은 대표적인 걸 크러시 현상으로 꼽힌다.
지난해 연극성과 작품성을 모두 인정받으며 극공작소 마방진의 신파극 레퍼토리 중 대표작으로 자리 잡은 연극 가 돌아왔다. 화류비련극 는 1930년대 젊은이들의 사랑과 삶의 모습을 다룬 신파극 를 재해석한 작품으로, 기생 홍도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미련해 보일 정도로 의리와 순정을 지켜내는 홍도를 통해 진정한 사랑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한다. 지난해 연극 를 통해 2014 동아연극상 여자 연기상을 받은 배우 양영미를 비롯해 배우 예지원 등 초연에 참여했던 배우들이 올해에도 합류해 극의 완성도를 더했다.
일정 8월 5일부터 23일까지 장소 예술의전당 CJ토월 극장 연출 고선웅 출연 양영미, 예지원, 김철리, 최주연 등
INTERVIEW:: 연극 의 주인공 홍도役 양영미 배우
비련의 여주인공 홍도를 연기하면서 가장 고민했던 점은 무엇인가요?
(지난해) 초연 때는 대사와 동선을 외우는 데 온통 정신이 팔려 있었어요. 제가 늦게 투입되는 바람에 시간에 쫓겼거든요. 이번엔 더욱 신경 써서 잘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그 생각과 부담이 오히려 독이 된다는 걸 깨달았죠. 그래서 다시 비웠어요. 다른 배우들을 믿고 더 사랑하기로 마음먹었죠. 홍도를 연기하면서 무엇보다 가장 깊이 고민한 것은 사랑이에요. 오빠를 사랑하고 광호와 가족을 사랑했던, 그리고 그 사랑에 당당했고 모든 걸 던졌던 홍도처럼 저 역시 사랑에 대해 고민하고 있어요.
‘홍도’는 어떤 인물인가요? 자신과 비슷한 점이 있나요?
앞서 말했지만 극 중 홍도는 사랑에 당당한 인물이에요. 물론 ‘화류비련극’이라는 타이틀처럼 슬프고 가련한 모습으로 비치지만 사실은 오빠를 위해 기생이 되고 사랑을 지키기 위해 갖은 수모를 당당히 참아내죠. 그런 모습을 보면 저와는 굉장히 달라요. 저는 아직 철부지에 욕심쟁이예요. 요즘은 네살짜리 아들과도 매일 말다툼을 하는 걸요.
연극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많은 관객이 마지막에 붉은 꽃잎이 흩날리는 장면을 기억하고 좋아하세요. 하지만 저는 짧지만, 어찌 보면 짧아서 더욱 애틋하게 느껴지는 극 초반의 한 장면을 가장 좋아해요. 홍도가 오빠 철수와 애인 광호가 친구인 사실을 알게 되고 사랑하는 두 남자의 팔짱을 끼고 나가는 장면이죠. 100분짜리 공연 중 그 장면은 겨우 20~30초 정도예요. 1분도 채 되지 않지만, 그 장면은 홍도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남게 되죠. 홍도의 행복이 그렇게나 짧아요. 그래서일까요? 저는 그 장면이 가장 안타깝고 기억에 남아요.
관객들이 이 연극에서 얻어갈 수 있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연극 는 거창한 메시지를 얻어가는 공연이 아니에요. 그저 연극을 보며 함께 느끼고 공감하는 공연이지요. 요즘 말로 ‘시월드(시댁을 이르는 신조어)’라고 하죠? 시어머니 입장에서는 홍도 같지 않은 며느리를 흉보기도 하고, 며느리는 시어머니나 시누이 흉을 보기도 하면서 함께 울고 웃고 공감할 수 있는 공연이에요. 그게 화류비련극 홍도가 바라는 대중과의 소통이 아닐까 생각해요.
연극 의 관람 포인트에 대해 조언 부탁드립니다.
극중에 홍도가 무대 바깥을 계속 도는 장면이 있어요. 지인(할머니)께서 공연을 보러 오셨는데 “왜 저렇게 계속 뺑뺑 도냐?”고 질문하시고는 본인 무릎을 탁 치시며 “아이고, 그래, 시집살이가 저렇다”고 하셨대요. 홍도는 텅 빈 하얀 무대예요. 모던한 무대이지만 이야기의 흐름과 함께 어우러지는 조명과 음악뿐만 아니라, 연출 기법을 적극 발휘해 배우들의 대사나 동선 곳곳에 상징적인 요소들을 숨겨놓았죠. 공연을 보시면서 숨겨진 것들을 찾아내고 그것에 상상력을 더한다면 더 풍성하고 재미있게 관람하실 수 있을 거예요.
침대 모서리에 무릎이라도 찧어 보면 알 일이다. 쓸쓸함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아침에 눈 비비며 일어나, 아무렇게나 던져둔 트레이닝복을 집어 들었다가, 바짓가랑이에 발을 잘못 끼운 탓에, 외발로 몇 걸음 콩콩거리고는, 볼썽사납게 풀썩 쓰러진다. 얼굴을 찡그리고 두 손으로 무릎이 닳도록 비비다 보면 어느새 진면목을 내밀고 있다. 외로움이라는 불청객. 곁에서 누군가 위로만 해줬어도 이렇게 아플까. 아니, 깔깔거리며 비웃기만 했어도 이처럼 서러울까. 일상에서 고독은 으레 고통과 더불어 사무친다.
글 김유준 프리랜서 dongbackproject@gmail.com
20년 넘도록 그렇게 살고 있다. 대학 졸업 후 직장에 들어가면서 시작했으니, 네 자리 숫자에 네 자리 숫자를 빼는 나름대로 힘겨운 작업을 마쳐보면, 올해로 정확히 25년째 혼자 살고 있음을 깨닫는다. 7000일이 넘는 짧지 않은 세월이다. 그 많은 나날 동안 대부분 홀로 잤고, 홀로 깨어났다.
주위 사람들은 부러워한다. 대학 졸업반인 딸아이가 연인에게 버림받고 일주일째 방에서 두문불출하고 있다고 말하는 친구도, 고 3인 아들이 그 유명한 ‘PC방 폐인’이라면서 땅이 꺼져라 한숨 쉬는 이웃도, 잘난 부인이 인사동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갖는다면서 초대장을 건네는 후배도…. 혼자라서 편하겠다고, 자유로워서 좋겠다고. 그때마다 씁쓸히 웃었다. 시퍼렇게 멍든 양 무릎을 보고도 그런 소릴 할까.
인생의 좌우명이 ‘무엇이든 물어보세요’이지만, 왜 혼자 사느냐는 질문만은 질색이다. 대답할 말이 없다. 어차피 그러고 싶어 그러는 것도 아닐진대 까닭이 어디 있고 곡절이 어디 있겠는가. 살다 보니 그리 됐다. 딴에는 최선을 다한 답변에도 집요한 누군가는 재차 묻는다. 달리 살 수 있었다면 그랬겠느냐고. 역사에 가정은 부질없다 했지, 아마. 개인사 또한 다르지 않다.
“살면서 점을 세 번 봤거든요. 첫 번째 점쟁이는 ‘마흔 이전에 결혼하면 이혼한다’고 하더라고요. 두 번째는 ‘횃불처럼 홀로 타오르는 사주’라고 하고, 마지막 한 명은 ‘일생이 낙목공산’이라던가. 나뭇잎 다 떨어져 텅 빈 민둥산 팔자라는 거 아니겠습니까. 자, 뭐 더 있으세요?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팔자소관으로 돌려버리는 편이 차라리 낫다. 그쯤 되면 더 이상 내 삶의 방식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지 않는다. 안타까움의 한마디로 대화는 종결된다.
“여자라면 그나마 좀 나았을 텐데….”
곰곰 생각해보니 그런 듯도 하다. 실제로 여자들은 혀를 끌끌 찬다. 세탁기가 고장 나 손빨래를 하다가 스며드는 창문 햇살에 저도 모르게 울고 말았다는, 나의 구질구질한 경험담을 듣고 나면 말이다. 이야기 상대가 처지 비슷한 독신 여성이어도 안쓰러워하기는 마찬가지다. 자기 신세도 자랑스럽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 정도는 아니라면서 숫제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린다. 가만 듣다 보면 위로하려는 것인지, 자신의 덜 불행함에 안도하는 것인지 구분도 가지 않는다.
인류학이나 동물학 전공자는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수컷이 혼자 살기에 적합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 않을까 싶다. 무엇보다, 수컷이 하고 싶어 하는 것 가운데에는 홀로서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것이 끼어 있다. 옛날이야 돈으로 어찌어찌 무마할 수 있었다고 쳐도, 요즘은 그조차 쉽지 않다. 그러고 싶지도 않고. 그러고 보면 세상에서 가장 외롭고 구저분하게 사는지 모른다.
자괴감에 잔뜩 빠져들었을 즈음, 고등학교 선배와 술을 한잔하다가 생애 가장 큰 격려를 들었다. 그날은 무릎 대신 입술을 다친 터였다. 칫솔질 도중 잠시 딴 생각에 빠졌다가 그만 오른손에 힘을 너무 줘버렸다. 살짝 부운 입술을 혀로 매만지며 쓰라리기보다 처량하다고 툴툴거렸더니 선배는 엄살떨지 말라면서 나무랐다.
너만 그런 줄 아느냐고. 여섯 가족이 모여 살아도 아픈 건 아프다고. 어여쁜 마누라가 연고에 밴드까지 발라줘도, 입술을 동그랗게 말고서 후후 불어줘도 쓰라리긴 매한가지라고. 그러면 저절로 또 서럽다고…. 하나부터 열까지 행복하기만 한 줄 알았던 선배의 신세타령이 하도 뜻밖이어서 아예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
“진짜로?”
남의 불행은 진정 나의 행복이었다. 얻다 대고 반말이냐는 핀잔도 듣기 싫지 않을 만큼 위로가 됐다. 선배는 어느 책에서 읽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삶은 완벽히 홀로 떠나는 여행이다.”
그리 참신하지는 않았지만 세상 어떤 비유보다 가슴에 와 닿았다. 흡사 머리에 띠 두른 응원단이 곁에서 큰북을 둥둥 울리며 지옥에서 천당까지 반동이라도 해주는 듯했다. ‘어느 책’이 무엇인지 인터넷과 서점을 뒤지기까지 했다. 읽고 싶어서였다. 나중에 사라 밴 브레스낙의 임을 알아내고는 문득 궁금해졌다. 어여쁜 부인에 토끼 같은 두 딸로 모자라 맏아들 부부까지 품에 끼고 살면서 제목이 그 모양(?)인 책을 왜 읽었을까? 전화라도 걸어 묻고 싶었지만 그냥 꾹 참았다.
나름대로 사정이 있겠지, 싶어서.
그럼에도 못내 선배가 부러운 것은, 그에게 있는 것이 내게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뻔하다. 사람이라는 존재 자체. 쉽게 말해, 나는 이야기 상대가 그립다. 텔레비전 뉴스나 오락프로그램을 보다 보면, 순간순간 떠오르는 저널리스트 특유의 유머러스하면서 예리하기까지 한 비평을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어 미칠 지경이다. 상대가 “그게 지금 웃으라고 하는 소리냐?” 하고 비웃어도 상관없다. 어쨌든 그러고 싶다.
때마다 휴대전화 버튼을 누르거나 새삼스레 주위를 둘러보는 것은 그 때문이다. 물론 휴대전화는 한결같은 바탕화면이요, 곁에는 아무도 없다. 오직 나 하나라 크지도 않은 방이 그처럼 적막하고 휑뎅그렁할 수 없다.
마흔 넘어 혼자라는 어느 방송진행자는 방송프로그램에서 “오래간만에 사람들과 어울리니 정말 즐겁다”고 말하곤 했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어쩌다 사람들 속에 뒤섞였다면 자리를 파하기가 그리도 싫다.
“어디 가?”, “언제 와?”, “밥은?”
이 세 가지가 이른바 ‘나도족’ 또는 ‘젖은낙엽족’이 입에 달고 사는 3대 질문이라고 한다. ‘나도족’이나 ‘젖은낙엽족’은 젖은 낙엽이 빗자루에 엉겨 붙듯 “나도” “나도” 하면서 부인 뒤만 졸졸 따라다니는 남편들을 싸잡아 일컫는 신조어란다. 엉겨 붙을 부인은 없지만, 사람들과 만나면 엇비슷한 질문 세 가지를 자주 하기는 한다.
“벌써 가려고?”, “한 잔만 더 하고 가지?”, “에이, 내가 낸다니까 왜 그래?”
극구 가려는 사람을 주저앉히려 안달이다.
옛날에는 그런 스스로가 창피했다. 요즘은 그렇지 않다. 되레 어엿하다. 같이 있자고 조른다고 해서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하나를 얻으면 다른 하나를 잃어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어느 친구가 일깨워준 덕분이다.
“말상대가 그립다고? 곁에 붙어 있어도 괴롭기는 똑같다. 너는 없어서 괴롭고 나는 있어서 괴롭고, 그 차이다.”
원효대사가 동굴에서 해골 물을 마셨을 때 정도는 아니어도, 그 말에 느낀 바가 자못 크다. 블레즈 파스칼이 에서 “끝없는 공간의 영원한 침묵은 공포를 가져다준다”고 했다가 다른 페이지에서는 “사람은 외톨이로 죽으므로 외톨이처럼 살아야 한다”고 적어놓은 것을 읽고 ‘이 사람, 거의 이랬다저랬다 장난꾸러기 수준이 아닌가?’ 하고 고개를 갸웃한 적이 있는데, 친구의 말을 듣고서야 그분이 왜 그랬는지 깨달았다.
고독이 비록 두려울망정 인간으로서 어쩌지 못할 운명인 동시에 평생 따라야 할 행동강령이라는 뜻 아니겠는가. 그러니 친구는 ‘있어도 괴롭다’고 투덜거리고, 선배는 ‘삶이란 홀로 떠나는 여행’이라고 주장하는 것 아니겠는가.
우주의 섭리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배배 꼬여 있다면,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떤가. 남들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 어떻고, 그 작업에 실패해 홀로 덩그러니 남으면 또 어떤가. 어딘가의 결핍은 다른 어딘가의 풍요로움을 잉태하는 법이니, 내 외로움이 남들의 단란함만 못하다고 낙망할 필요는 없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사는 게 인생이다. 그들도 힘들다지 않는가. 어차피 똑같다면 두려워도 괴로워도 말자.
나는 혼자 산다. 25년째 그러고 있다. 그 사실이 자랑스럽지 않지만 부끄럽지도 않다. 그렇게 살아서 때때로 외롭지만 마냥 불행하지만도 않다. 어떨 때는 더없이 좋다. 영화가 보고 싶으면 툭 털고 일어나 보러 가면 된다. 느닷없이 꽃구경이 당기더라도 문제없다. 훌쩍 떠나면 그뿐이다. 친구들이 모처럼 술 고플 때 가장 먼저 찾는 사람이 누구겠는가. 바로 나다. 자랑삼아 말하면 친구들 사이에서 요즘 내 별명이 ‘알비데’다. 부르기만 하면 언제든 “곧 갈게” 한다고 해서 그리 부른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절대 자유. 혼자 살지 않는 사람이 들었다면 혀를 내두르며 부러워할 삶을 나는 지금 한껏 누리며 살고 있다.
그런 생각도 한다. 아주 옛날 영화 ‘벤허’에서 노예 신세가 된 주인공이 그러는 것처럼, 삶이란 상심의 바다를 노 저어 가는 거친 뱃길이 아닐까. 천둥 치고 벼락 치는 와중에 주위를 둘러보면 노 젓는 이들이 수두룩 눈에 띈다. 대부분 나와 달리 한 배에 여럿이 타고 있다. 적게는 둘, 많게는 여섯. 그들이 노를 서로 나눠 저으며 파도를 헤치는 모습을 보면 흐뭇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나룻배에 홀로 탄 신세라 그만큼 쓸쓸하기도 하다.
그럼에도 만족하려 한다.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남들이 사람을 태우려 내던져야 했던 기쁨과 행복이 내 배에는 제법 실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홀로 노 젓는 고달픔이나 외로움 따위는 감내하려 한다. 공간의 침묵이 괴롭더라도, 크지도 않은 방이 무섭도록 휑해도 견디려 한다. 호강에 겨워서 어딘가에 뭐 싸는 놈이라는 비난을 듣지 않으려면, 나는 마땅히 그래야 한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다. 하나를 잃었다면 다시 하나를 얻는다. 그것은 삶의 철옹성 같은 진리다. 누가 그랬던가. 목표의 7할만 이루는 것이 가장 좋다고. 다만 외톨박이일 뿐, 그것도 모를 만큼 바보는 아니다.
세대 공감의 특별한 어린이날 선물, ‘스노우쇼’
글 이유리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뮤지컬스쿨 교수
미국의 사회학자 마크 프리드먼(Mark Freedman) 박사가 만든 ‘앙코르 커리어’(Encore Career)라는 환상적인 신조어가 있다. 은퇴 후의 고령자가 지속적인 수입을 보장받으며 가치 실현의 정신적인 충족도 누리고 사회적인 영향력도 잃지 않는 일자리 창출로 제2의 인생을 다시 산다는 의미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에 한국국학진흥원이 ‘아름다운 이야기 할머니’라는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면접을 통해 선발돼 일정 교육을 마친 할머니들이 유아교육기관을 방문해 동화를 들려주는 프로그램으로 한국판 앙코르 커리어일 수 있다. 참여한 할머니들의 가장 큰 만족도는 손자 같은 어린이들과의 교감이고 스스로의 사회적인 자아실현이었다.
공연을 보면서도 그런 행복감을 느껴보는 건 어떨까? 특히 5월 가족의 달에는 더 그렇다.
마침 한국에 찰리 채플린, 마르셀 마르소의 뒤를 잇는 세계적인 광대 슬라바 폴루닌이 내한 공연한다. 런던타임스가 ‘이 시대 최고의 광대’라고 극찬한 그의 대표작 ‘스노우쇼’는 지난 20년간 세계 100여개 도시에서 관객 수천만 명을 행복하게 만든 공연으로 올리비에상, 골든마스크상 등 세계적인 연극상을 받았다. 그는 올해 나이 65세의 시니어 예술가이다.
‘스노우쇼’는 아름다운 영혼을 지닌 사람만이 만들 수 있을 법한 무대로 남녀노소 누구라도 어린 시절 동화 속으로 여행시켜 주는 환상적인 무언극이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는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엄청난 눈 폭풍이 무대에 휘몰아쳐 객석까지 뒤덮는 판타지가 펼쳐지고 배우와 관객이 천진한 눈싸움으로 어우러져 세대를 뛰어넘는 원초적인 동심으로 하나가 될 수 있다.
할아버지 할머니에게는 손자 손녀의 손을 잡고 어린이날 선물로, 부모님께는 동반 데이트 어버이날 선물로 최적의 공연이다. 사랑하는 가족에게 사랑뿐만 아니라 인생을 바꿀 수도 있는 감동적인 문화 체험까지 안겨줄 수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된다면 진정으로 성공한 인생이 아닐까?
일정 5월 14일~30일
장소 LG아트센터
출연 Ivan Polunin, Artem Zhimolokhov, Aelita West, Dmytro Merashchi 등
주최 LG아트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