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에 대기업에서 퇴직하고 서울에 거주 중인 손병수(58세)씨가 재무상담을 의뢰해왔다. 손병수씨가 재무상담을 통해 도움 받고자 하는 내용은 매월 생활비를 충당할 수 있는 현금흐름 확보 방안이다.
1. 현재 상황
손병수씨의 가족으로는 전업주부인 배우자(56세)와 출가한 딸(33세)과 작년에 취업을 하고 회사 기숙사에 거주하고 있는 아들(29세)이 있다. 퇴직 후 2년 동안 손병수씨는 재직 당시 거래처였던 중소기업에서 일을 하며 매월 200만원 정도의 수입이 있었다. 하지만 1년 전 두 번째 퇴직을 한 이후 지금까지는 별다른 수입이 없다. 첫 번째 퇴직으로 인해 발생했던 퇴직금은 일시금으로 수령해 딸 결혼자금과 아들 대학등록금으로 대부분 썼기 때문에 퇴직연금은 없는 상태다. 매월 200만원 전후로 소요되는 생활비는 1년 전부터는 실업급여와 가지고 있던 현금으로 충당해오고 있는 상황이다. 향후 아들 결혼자금으로 1억원 정도의 지원을 예상하고 있다.
2. 재무진단
3. 제안
손병수씨가 의뢰한 매월 200만원 전후의 생활비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5층 연금체계를 활용해야 한다. 5층 연금체계는 다음과 같다.
국민연금 1958년생인 손병수씨의 완전노령연금 수급가능연령은 4년 뒤인 62세부터다. 연금액은 현재 가치로 매월 110만원 정도 예상된다. 손병수씨는 조기노령연금수급이 가능한 상태이지만 여유자금이 있기 때문에 완전노령연금에 비해 12%까지 연금수령액이 삭감되는 조기노령연금을 미리 받은 받을 필요는 없다.
퇴직연금 손병수씨는 퇴직연금이 없다.
개인연금 현재 가입 중인 개인연금도 없다. 정기예금 중 1억원을 배우자 명의로 하여 일시납 연금보험에 가입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전업주부로 살아온 손병수씨의 부인은 본인 명의의 국민연금이 없다. 남편인 손병수씨가 사망한 후에는 유족연금 명목으로 손병수씨 명의로 받던 노령연금액의 60%를 수령하게 된다. 나이가 들면 의료비가 생활비가 될 정도로 의료비 지출이 많아진다. 특히 여성의 경우는 평균수명과 건강수명의 차이가 약 12년 정도인 점을 고려해야 한다. 손범수씨가 부인을 피보험자로 한 연금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일시납연금보험을 가입한다고 해서 반드시 가입 즉시 연금을 실행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연금지급 시기를 충분히 여유 있게 설정해두고 그 이전에 자금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다시 찾아갈 수 있다. 현재 56세 여성이 1억원의 연금보험에 가입해 10년 뒤인 66세부터 연금을 개시한다면 매월 60만원 정도의 연금수령을 기대할 수 있다. 단 연금이 개시된 후 피보험자가 사망하게 되면 최초 가입금액에서 사망할 때까지 지급한 연금총액을 차감한 금액만 상속인에게 지급하는 조건이다.
주택연금 주택연금은 주택 소유자나 그 배우자가 만 60세 이상일 때 신청할 수 있다. 현재 손병수씨는 만 58세이기 때문에 주택연금에 가입하려면 2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 2017년 기준으로 7억원의 주택을 종신연금 수령조건으로 주택연금에 가입하면 60세 기준으로 매월 146만원 정도의 금액이 지급된다.
손병수씨 부부는 주택연금 가입이 가능한 2년 후까지 현재 거주 주택을 보증금 1억원에 매월 120만원의 월세를 받는 조건으로 임대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전세 보증금 1억원과 현금 1억원을 합해 집의 규모를 줄여 서울 외곽 지역에 2년간 전세를 임차해서 살기로 했다.
직업 중장년층이 퇴직 후에 입맛에 맞는 일자리를 구하기는 쉽지 않다. 가장 큰 걸림돌은 일자리에 대한 눈높이다. 눈높이를 낮춰야 할 수 있는 일들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명함이 나를 설명하던 시절의 기억으로부터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 손병수씨는 우선 자신의 경력을 살려 고용노동부에서 추진하는 사회공헌 일자리 사업에 지원하기로 했다. 여기서 매월 30만원 정도의 소득을 기대한다. 동시에 편의점 아르바이트 등을 하며 요즘 수요가 늘어나고 있는 남자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기로 했다.
4. 실행
퇴직한 지 3년이 지난 손병수씨는 최근에 와서야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훈련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손병수씨는 국민연금 수령 전까지는 정부지원사업 중심의 일자리와 아르바이트 등을 통해 매월 100만원의 근로소득을 목표로 일하기로 했다. 그리고 국민연금이 나오는 시기에서 부인 명의의 개인연금을 받기 시작할 때까지는 근로시간을 줄여 매월 50만원 정도의 수입을 목표로 일을 하기로 계획을 짰다.
집값이 오를까? 내릴까?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한다. 전문가들이 주택시장을 전망할 때는 어떤 재료와 근거로 이야기하는 것일까? 주택시장은 주택 공급 물량, 금리, 산업경기, 부동산 정책에 따라 변한다. 이 네 가지는 주택시장에 큰 영향을 주는 요소들이다. 여기에 수요자의 심리까지 더해져 주택시장의 모습과 흐름이 완성된다.
주택 수요와 공급 물량 어떤 기준으로 판단할까?
주택 수요는 실질소득과 관련된 구매력, 재개발·재건축사업 추진에 따른 이주수요, 전세에서 매매로의 전환수요 등이 해당된다. 주택 공급 물량은 건설인허가 실적, 신규 택지 공급, 지역개발재료 등에 따른 지역별 가격변동 가능성, 미분양 물량, 입주예정 물량 등을 기준으로 판단한다. 주택 수요와 공급 물량의 변화와 추이는, 수요의 증가가 있으면 가격이 상승하고 공급의 증가가 있으면 가격이 하락하는 수요공급의 법칙에 따라 부동산시장을 예측하는 주요한 기준이다.
정부의 주택종합계획상 연간 적정 공급 물량 규모는 1980년대 말에는 약 50만 가구였고, 2000년대 이후는 약 40만 가구다. 20년 사이에 10만 가구가 줄었듯이 연간 적정 공급 물량은 대체로 줄어드는 추세다. 참고로 2017년 입주예정 물량은 65만 가구이고, 2018년에는 약 70만 가구로 보고 있다. 적정 공급 물량 기준보다 물량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실질적 공급 과부족 여부는 지역별 수요자의 선호도 특성과 미분양 물량 누적 추이, 재건축으로 인한 멸실주택의 수 등에 따라 다소간 차이가 있다.
금리가 오르면 주택시장에 얼마만큼 영향을 줄까?
금리가 오르면 부동산시장은 그만큼 침체된다. 금리가 오르는 만큼 부동산 임대수익률은 상대적으로 낮아지고 주택 구매 수요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미국 금리 상승을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미국 금리 상승은 곧 국내 기준금리 인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주택시장의 경우, 주택 매입가구 중 60% 이상이 금융권에서 대출을 받고 있다. 통상 기준금리 0.5∼1%P 올라가면 주택 가격은 0.6% 하락 요인이 발생한다. 시중 은행금리가 3%P 오르면 대출받은 가계 28%가 상환 능력을 초과하는 부담이 생긴다. 또한 임대수익을 위한 투자도 위축된다. 이처럼 금리 변화는 부동산시장 전반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부동산 정책의 핵심은 ‘세금과 금융’
부동산 정책의 핵심은 세제와 금융이다. 주택담보대출과 가계부채와 관련된 LTV(Loan To Value ratio)와 DTI(Debt To Income ratio) 규제, 전매제한 등 투기수요억제 정책, 대출 규제심사 강화, 공공임대주택공급 정책 등을 포함한다. 세금은 제도 변경과 시행에 시일이 걸리지만 금융 부문은 상대적으로 빠르게 정책적 처방을 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주택 공급 물량 조절도 일부 정부 정책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택지개발의 한계, 개발기간 등을 고려할 때 주택 공급은 단기처방이 불가능하다는 특징이 있다. 한편 부동산 건설경기와 산업경기는 상호 영향을 준다. 정부는 부동산 건설경기를 통해 산업경기 침체를 살리는 역할까지 감안한 안정적인 주택시장 유지, 국민복지를 위한 임대주택 공급을 위해 고심하고 있다.
시장을 읽는 정확한 눈 필요
주택시장은 산업경기의 흐름에 의해 분위기가 잡히고 정부 정책으로 다듬고 조절해가는 양상이다. 정부가 빠르게 조치할 수 있는 것은 금융 부문이고 다음이 세금과 공급 물량 조절이다. 입지가 좋은 택지 공급과 재정 확보 및 배분 문제, 경기침체에 따른 구매력 감소는 한계가 분명하기에 정부 정책은 많은 고민과 숙제로 남는다. 또한 주택시장은 소득별 지역별로도 온도 차이가 크기에 이에 따른 세밀한 조치를 준비해야 한다.
결국 이러한 모든 것이 다시 정부의 여러 정책으로 나타난다. 산업경기는 경제성장률·소비자물가상승률, 유가변동 등 해외 경제환경, 실업률 등을 통해 알 수 있으며 산업경기의 흐름과 부동산시장의 흐름은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일반적으로 부동산시장은 산업경기의 흐름과 맥락을 같이한다. 과거에는 부동산시장을 산업경기의 뒤를 따르는 후행 시장으로 보았으나 지금은 거의 같이 움직이는 시장으로 이해한다. 현재의 부동산시장 흐름에 큰 영향을 주는 것은 경제 그 자체다. 경제가 죽으면 앞으로의 부동산시장도 활력을 잃을 확률이 높다.
한편 1인 가족의 증가와 핵가족화, 경기침체는 실속형 주택을 선호하는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실용성이 높은 소형 고급형 주택을 선호하는 분위기다. 경제는 어려워도 주택에 대한 수요자의 눈높이는 더 올라갔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또 하나 생각해볼 요인이 교통 여건이다. 최근 수요자들은 환경보다는 교통이 좋은 주택을 선호한다. 경기가 호황일 때는 환경 여건을 중시하고 불황일 때는 생활이 불편하지 않고 시간과 비용이 절감되는 교통에 대한 중요도가 더 높아진다. 도심형 주택에 대한 관심이 늘어난 이유다. 앞으로 경기가 회복되고 부동산시장이 활황일 때는 환경 여건이 중시될 것이다. 환경 여건에 해당하는 것들은 용적률, 자연환경, 조망, 소음, 프라이버시 등이다. 경제형편이 좋아지고 여유가 생기면 자연적으로 환경이 주요 선택 요소가 될 수밖에 없다.
부동산시장은 이렇게 흘러가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부동산시장을 읽는 정확한 눈이 필요하며 각자에게 맞는 맞춤식 투자 전략을 세워야 한다. 과거처럼 많은 사람들이 기계적으로 부동산에 투자해 성공할 확률은 높지 않다. 또한 자신이 갖고 있는 부동산도 종합진단해봐야 한다. 강한 것인지 약한 것인지 제대로 진단해 과감하게 구조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 부동산도 강한 것이 아름다운 시대다.
주택수요와 구매력은 어떤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일까?
해설과 답 내 소득으로 내 집 마련이 쉬운지 어려운지를 알 수 있는 것을 주택구매력지수라고 하는데 국가 간 주택 가격 비교가 가능한 PIR(Price to Income Ratio)과 주택구입능력을 판단하는 HAI(House Affordability Index)가 있다. PIR은 연평균소득을 반영한 특정 지역 또는 국가 평균 수준의 주택을 구입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의미한다. 이는 가구소득 수준을 반영해 주택 가격의 적정성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지수다. 예컨대 PIR이 10이라는 것은 10년 동안의 소득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두 모아야 집 한 채를 살 수 있다는 의미다. 서울의 경우 2016년 PIR은 그동안의 최고치인 9.0을 기록했다. HAI는 소득이 중간 정도인 가구가 금융기관의 대출을 받아 중간 가격 정도의 주택을 구입한다고 가정할 때, 현재 소득으로 대출원리금 상환에 필요한 금액을 부담할 수 있는 능력을 나타내는 지수다. HAI가 100보다 크면 중간 정도 소득을 가진 가구가 중간 가격 정도 주택을 무리 없이 구입할 수 있다는 뜻이다. HAI가 상승하면 주택구매력이 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울의 경우 2016년 HAI는 60.2로 조사됐다. 그만큼 서울에서는 내 집 마련이 어렵다는 얘기다.
LTV와 DTI는 무엇일까?
해설과 답 LTV는 Loan To Value ratio의 머리글자로 ‘주택담보대출비율’을 의미하며, DTI는 Debt To Income ratio의 머리글자로 ‘총부채상환비율’을 뜻한다. 예를 들어, LTV가 70%라면 시가 5억원짜리 아파트는 최대 3억5000만원까지 빌릴 수 있다. 반면에 DTI는 연간 총소득에서 주택담보대출의 연간 원리금 상환액과 기타 부채의 연간 이자 상환액을 합한 금액이 차지하는 비율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LTV처럼 주택 가격에 비례해 대출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돈을 얼마나 잘 갚을 수 있는지를 따져 대출 한도를 정한다는 의미다. DTI 규제가 적용되면 기본적으로 소득이 있어야 대출이 가능하고 소득이 많을수록 많은 돈을 빌릴 수 있다.
과거 관심을 끌었던 아파트 공급 정책의 대표적인 사례는?
해설과 답 과거 정부가 88서울올림픽 이후인 1980년대 말 부동산 투기가 극심해지자 ‘아파트 200만 호 공급계획’을 수립해 시행한 적이 있다. 당시 연간 적정 공급 물량은 50만 가구였다. 그 결과 2년여의 공사기간 이후 입주가 시작되면서 주택시장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관련 인력과 자재 부족으로 일부에서는 바닷모래를 사용해 공사를 감행하는 등 여러 가지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했다.
>> 김정렬(金淨烈) 한국일반행정사협회 전임교수
국내 최초로 부동산 전문가들로 네트워크를 구성, RE멤버스를 설립하고 부동산써브 대표를 역임했다. 한국자산관리공사, 한국자산신탁, 기업체, 금융기관 등에 부동산 자문을 꾸준히 하고 있다. 저서로는 , , 등이 있다.
1977년 10월 24일 김포공항. 자유로운 해외여행이 어려웠던 시기. 하지만 이날은 달랐다. 생이별을 앞둔 인파로 가득했다. 한 사람을 배웅하기 위해 형제, 자매와 조카까지 모두 공항에 자리를 잡았다. 곳곳에서 울음이 터져 나왔고, 힘줘 잡은 두 손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곧 먼 이국의 땅으로 떠날 파독(派獨)광부들을 환송하는 자리. 그 자리에는 만삭의 아내와 두 아이를 끌어안고 이별을 고하는 민석기(閔錫基·66)씨도 있었다. 그리고 39년이 흘러, 그는 이날의 이야기를 자서전에 기록해 세상에 내놓았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오병돈 프리랜서(Studio Pic) obdlife@gmail.com 장소협조 Frenchie B
1960년대 초 대한민국. 당시 경제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박정희 군사정권 초반 시행한 경공업 위주의 수출 지향 정책은 되레 실업자 양산과 외화 부족 현상을 증가시켰다. 대책이 필요했다. 그래서 선택된 방안 중 하나가 바로 ‘인력 수출’이다.
당시 독일은 ‘라인 강의 기적’이 완성돼가고 있었다. 경제는 가파르게 성장했고, 일자리는 많았지만 사람이 없었다. 일자리를 고를 수 있는 상황에서 거친 일을 하려는 사람이 부족했다. 당연히 육체노동이 요구되는 일자리는 외면당했다. 독일 정부 역시 비슷한 선택을 했다. ‘인력 수입’이다.
양쪽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1963년부터 1980년까지 약 7900여 명의 광부가 독일에서 근무했다. 500명을 모집했던 첫해, 첫 번째 모집에는 4만6000여 명이 몰릴 만큼 좋은 일자리는 절실했다. 민석기씨도 그중 한 명이었다.
독일에서 찾던 ‘경력 광부’
한때 광부만 2000명이 넘었던 함태광업소. 사촌누나와 매형 덕분에 광부로 자리 잡을 수 있었고, 그곳에서 2년을 일했다. 독일로 갈 사람을 뽑는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도 그때였다.
“독일로 갈 광부를 뽑는다네.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났어.” 동료 광부의 전언이 계기가 됐다. 그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민석기씨는 새로운 꿈이 생겼다고 했다. 당시 독일 광부들의 월급은 600마르크(약 160달러) 정도로 한국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제가 독일에 지원했던 시기는 파독광부제도 시행 후반이었어요. 초기에는 해외생활에 적응할 수 있을 만한 머리 좋은 사람들을 주로 뽑았죠. 처음에는 대학생들이 많이 갔는데, 일을 안 하고 요령 피우는 친구들이 많았나봐요. 그래서 힘쓸 만한 사람들 위주로 뽑았더니 이번엔 폭력사건이 골치를 썩였죠. 그래서 독일 측에서 요구했대요. ‘진짜 광부’를 보내달라고. 이때 탄광일에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우대해줬고, 저도 되겠다 싶어 지원하게 됐죠.”
들어 올리지 못했던 가마니
영화 에는 파독광부를 지원했던 주인공 ‘덕수(황정민 분)’가 체력시험을 보는 유명한 장면이 나온다. 반드시 합격하겠다는 일념으로 쌀가마니를 힘겹게 머리 위로 들어올리는 장면. 1977년에는 그 체력시험이 서강대학교에서 있었다. 독일인 심사관도 통역을 받으며 지원자들을 지켜봤다. 하지만 현실은 영화와 달랐다. 번쩍 들 필요도 없이 어깨 위에 들쳐 매기만 하면 됐는데 그것조차 되질 않았다. 쌀 대신 모래가 들어 있던 60kg짜리 가마니는 꼼짝도 하질 않았다.
“시원하게 떨어졌죠. 이해할 수 없었어요. 평소 같으면 쉽게 들 수 있었을 텐데 안되더라고요. 요령이 없었나봐요. 그렇게 풀이 죽어 태백으로 돌아갔는데, 후에 연락이 왔어요. 다시 시험을 보라고. 그래서 서울로 향하기 전에 열심히 모래가마니를 들어올리는 연습을 했어요. 그것도 열심히 하니까 요령이 생기더라고요.”
두 번째 도전에서는 필기시험까지 일사천리로 합격했다. 합격하고 나서도 독일로 가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본인이 부담해야 하는 경비가 30만원이나 됐다.
“당시에 대구에서 집 한 채 사는 데 150만원이었으니 엄청나게 큰돈이었죠. 하지만 돈을 빌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어요. 그 시절에는 ‘독일 가는 데 돈 좀 빌려달라’고 하면 잘 모르는 사람도 선뜻 빌려줬어요. 그만큼 파독광부는 선망의 대상이었고 신용도 높았어요. 어떤 기수는 한국에서 한 달짜리 사전교육까지 다 마쳐놓고도 떠날 날짜가 자꾸 미뤄져 빚이 늘어나는 경우도 있었어요. 곧 독일에서 큰돈을 벌 테니까 하는 마음에 빚으로 흥청망청 생활했던 거지요. 다행히 저는 사전교육을 제대로 마칠 수 없을 정도로 출국일이 급하게 잡혀 별일 없이 독일로 향할 수 있었어요.”
3년 후 돌아오겠다는 약속 못 지켜
“3년만 꼭 참아. 3년만 참고 일하면 한국에서 잘살 수 있을 거야.”
출국심사를 하기 전 눈물을 흘리는 아내에게 민석기씨는 이렇게 말했다. 기본 계약이 3년이었으니 그 시간만 채우고 돌아오면 한국에서 무엇을 시작해도 쉽게 할 수 있는 밑천을 만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그때는 자신의 귀국이 훨씬 늦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상상도 못했다.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과 곧 대구의 시댁으로 내려가야 하는 아내를 뒤로 한 채 그는 루프트한자 항공기에 올랐다.
“당시엔 비행기 자체가 신기했던 시대였으니까요. 타고 있던 커다란 것이 두둥실 떠오르면서 진짜 떠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젠 내릴 수도 없고, 도망갈 곳도 없다는 현실이 체감됐어요.”
버스는 어둠 속을 5시간을 넘게 달렸고, 잔뜩 겁먹은 얼굴의 한국인 무리가 낯선 향기의 공기를 들이마시며 차에서 내렸을 때 그들은 딘슬라켄의 땅을 밟고 있었다. 이들이 독일의 광부로서 생활을 시작한 로벡 광산이 있는, 먼 훗날 이들을 기억하기 위해 ‘아리랑파크’가 건립된 장소였다.
“처음엔 말도 못하게 고생했어요. 말이 안 통했으니까요. 이걸 들라는 건지 내리라는 건지 당기라는 건지 밀라는 건지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죠. 멍하니 들고 서 있을 때가 태반이었어요. 망치, 톱, 정 같은 공구 이름도 전혀 몰랐고요. 갱도 내에서는 무전으로 지시를 받는 경우가 많아 더 알아듣기 힘들었어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저녁에는 괜한 군기를 잡겠다는 선배들의 괴롭힘도 있었다. 하지만 가장 힘든 것은 역시 지옥 같은 갱도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000m쯤 갱도를 내려가면 작은 터미널 같은 것이 나와요. 개미굴같이 여러 소규모 갱도들로 연결되는 철로들이 집결되는 곳이죠. 거기서 열차를 타고 10분 넘게 들어가면 다시 지하로 내려가야 하고, 내려가서 실제 작업하는 곳까지 다시 수백m를 더 들어가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어요. 내려가고 들어가기를 여러 번 반복하기도 했고요. 석탄을 찾아 따라다니는 것이죠. 공기가 공급되는 환풍기 근처는 찬바람 때문에 서늘했지만, 바람이 통하지 않는 곳은 지열 때문에 40℃가 넘기 일쑤였죠. 거기서 독일인들의 고함을 들어가며 일했어요. 죽을 고비도 많이 넘겼고.”
그래도 말이 들리고 일이 익숙해지자 독일은 지옥에서 천국으로 변했다. 한국에선 쉬는 날도 없이 작업시간이 길었지만 독일은 달랐다. 주 5일 근무에 공휴일도 꼬박꼬박 쉬었고, 하루에 8시간만 근무하면 그만이었다. 막장에 들어가는 데 1시간, 나오는 데 1시간, 점심시간 1시간을 제외하면 실제로 일하는 시간은 5시간에 불과했다.
독일에서 나 홀로 이름 지어본 ‘새마을협동농장’
처음에는 3년만 있자 하고 온 독일이었지만, 첫 휴가는 그보다 훨씬 뒤인 7년 만에 이뤄졌다. 한 달 휴가 동안 도로공사나 다른 일을 하면 큰돈을 쥘 수 있었고, 더 돈을 모아 금의환향하고 싶은 마음도 컸다.
한국에 도착했을 땐 집에서 잔치가 벌어졌다. 8남매가 모두 모여 민석기씨를 환영했다. 형제 대부분이 직·간접적으로 독일에서 큰돈을 벌고 있는 민석기씨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빨갛고 파란 테두리가 그려진 아빠의 국제우편을 늘 기다리던 막내는, 막상 난생 처음 아빠를 만나자 낯설음에 뒷걸음쳤다가 곧 아빠 품에 안겼다. 그렇게 가족들은 그동안 쌓인 회포를 풀었다.
휴가 때 그의 마음을 흔든 것 중 하나는 ‘새마을운동’이었다. 한국을 떠나 있는 동안 조국은 많이 변해 있었고, 그 변화의 중심에 새마을운동이 있다고 믿었다.
“당시에 전 기숙사를 나와 인근 마을의 농장에서 일하고 있었어요. 농장에서 지내는 것이 훨씬 편했고, 주말에도 쉬지 않고 일할 수 있었으니까요. 주말에 시간이 남는 한국인 광부들을 유혹하는 것들은 너무나 많았어요. 전 아예 나와 있어서 이런 유혹을 피할 수 있었고 농장일로 가욋돈까지 벌었죠. 그때 농장 주인의 제안으로 빈 땅에 직접 배추와 무, 갓 등을 심으며 농사를 짓기 시작했는데, 새마을협동농장이라고 이름을 지었죠.”
후에 그의 이 농장은 현지 신문에 소개되면서 지역에서 화제가 되었는데, 그의 ‘외도(?)’가 회사에까지 알려져 곤란을 겪기도 했다.
외로운 말년의 파독광부 많아
한때 아이들을 독일로 불러 완전한 정착도 꿈꿔봤지만, 아이들이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자 1989년 민석기씨는 한국으로 완전히 돌아왔다. 휴일도 없이 일해서 모은 목돈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되리라 기대했지만 돌아와서 보니 그것과는 먼 삶이었다. 다른 파독광부들처럼 남의 손에 관리가 부탁된 돈들은 형제들에게 그리고 처가로 스며들었고, 되찾기 어려운 상황이 돼 있었다.
“잘된다는 말만 믿고 형님 건설회사에 계손 돈을 보탰지만, 실제로는 까먹기만 했어요. 또 처가 쪽으로도 돈이 흘러가 수중에 남는 게 없었죠. 결국 가기 싫다는 아이들을 설득해서 독일에서 엄마와 살게 했고, 전 딸아이와 한국에 남았어요. 그 후 식당일부터 안 해본 일이 없었죠. 건강이 나빠졌을 때는 간이식을 받으러 중국까지 갔었어요. 굴곡이 많은 삶이었지만 그래도 남에게 폐는 끼치지 않고 잘 살아온 것 같아요.”
독일로 가 인생의 대박을 맞이한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어려움이 많았던 민석기씨. 그렇다면 다른 광부들의 사정은 어땠을까.
“파독광부들이 잘산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아요. 독일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 300명 정도의 사람들은 돌아오고 싶어도 못 돌아오는 상황인 거죠. 한국에 돌아온 사람들 중 주변 사람들에게 속아 빈털터리가 된 경우도 적지 않아요. 심지어 재산권 때문에 ‘오지 말라’고 하는 친척들도 있죠.”
마침 그를 만난 12월 9일은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발의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날이었다. 민씨와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가결 소식이 들려왔는데 그 소식을 듣는 그의 표정에서 많은 이야기들이 읽혔다. 현 대통령의 아버지에 의해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었고, 또 평생을 지지했는데, 이제는 상당수 국민이 그의 딸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로서는 명쾌하게 답을 낼 수 없는 상황일 것이다.
“그래도 독일에 다녀온 것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많은 광부들이 한국인의 성실함을 몸으로 증명했기 때문에 경제성장의 동력이 된 차관도 독일로부터 빌려올 수 있었죠. 또 조국과 민족, 가족을 위한다는 마음이 있어 막장에서도 그렇게 열심히 일할 수 있었고요.”
민씨의 이야기는 가족과 부모 이야기를 자서전으로 엮는 회사 ‘뭉클스토리’의 기획 행사에 선정돼 함께 독일에 다녀온 간호사 노금희, 황보수자씨의 이야기와 함께 책으로 만들어져 지난 10월 정식 출간됐다.
대한민국은 2016년은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를 앞두고 경제가 역주행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장기 불경기와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으로 국정이 마비되어 세상 밖을 내다보기 보다는 우리는 자꾸 안으로, 안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시야가 좁아진 탓에 몇 달째 기업 활동이 위축되고 서민 경제가 어려워지고 있어 안타까울 뿐이다. 이 상황은 고용시장 한파로 이어지고 있으며, 일자리 씨가 말라가고 있어 금년 겨울은 더 추울 분위기이다.
일자리가 늘어나도 시원치 않은 판에 끝없이 이어지는 내수경기 침체로 인해 일자리는 한없이 줄어들고 있고, 자영업자는 매출이 줄어 아우성이다. 이 여파는 바로 서민들에게 직격탄을 날리고 있다.
중소기업중앙회 지난 12월 19일 자료에 의하면 273개 중소기업을 대상으로‘하반기 현장 동향’을 점검한 결과 상반기에 비해 전반적인 경영 상황이‘악화됐다’는 중소기업이 44.6%로 조사됐고, 그 원인으로‘내수불황 장기화’를 가장 많이 꼽았다. 80% 이상이 이런 경영위기 상황이 2년 이상 지속될 것으로 예상했다. 우리나라는 전체 근로자의 87.7%가 중소기업에 근무하고 있어 이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인데 어떻게 2년을 참아야 할지 답답하다.
고용의 중심인 중소기업의 일자리 불꽃을 어떻게 다시 지필 수 있을까? 일자리를 이어줄 주체가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언제쯤 일자리가 다시 활성화될 수 있을까?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국가에 질문을 하고 싶다.
먼저 일자리에 있어 가장 심각한 부분이 청년 일자리이다. 왜냐하면 청년의 미래가 대한민국의 미래니까... 청년실업률(15세~29세)은 11월 기준으로 8.2%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 이후 17년 만에 가장 높은 실업률이다.
지난 12월 21일 열린 '2017 경제위기 극복 대토론회'에서 방하남 한국노동연구원 원장은 "노동시장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어느 정도 격차가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밝혔다. 아울러 방 원장은 "그나마 상호 간에 이동이 활발하다면 괜찮은데 한국은 없는 것이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등의 차이가 크다 보니 대기업, 공기업, 정규직에 취업하기 위한 대기 행렬만 길어져 청년 실업을 심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는 해석이라는것이다.
한편 50대 이상의 중장년층 일자리 문제도 전반적인 제고가 요구된다. 이는 단순히 일자리 지표로만으로 해석할 수 없다. 왜냐하면 고령사회로 접어들면서 사회복지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것을 국가 세금으로 메우는 것은 한계가 있고, 어느 시점에는 국가 운영의 발목을 잡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2017 정유년은 대기업 보다는 고용, 일자리 문제를 중소기업에서 찾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선 중소기업을 살려야 한다. 중소기업으로 크며, 일자리(취업, 창업)의 불씨가 되는‘벤처, 스타트업, 1인창업, 여성창업’성공률도 획기적으로 올라가야 한다.
IMF 금융위기의 여파로 졸지에 실업자가 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내가 이혼 얘기를 꺼냈다. 20년 직장생활에서 밀려난 것 하나만으로도 충격이 큰데 너무하다 싶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벗는 김에 다 벗어버리자 생각했다. 아내의 이혼 요구에 응했다. 그리고 완전히 혼자가 됐다.
아내가 이혼 때 들이민 재산 분할 제안서를 보니 나는 빈손이었다. 단칸 전세 얻을 돈 정도밖에 없었다. 아내의 내역서는 그럴싸했다. 혼자 벌었어도 안살림을 한 사람의 공로가 절반이다. 그러나 우리 부부는 맞벌이를 했으니 당연히 아내 몫으로 절반을 줘야 했다. 나머지 재산에서 아들딸 결혼비용을 또 떼어야 했다. 나중에 필자가 더 어려워지면 그 몫도 없어질지 모르고 재혼을 한다든지 하면 마음이 변할지도 모른다는 게 이유였다. 당시 내게는 퇴직금과 약간의 주식이 있었고 내 재산으로 분류돼 있었다. 그런데 IMF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휴지조각이 돼버렸다.
그렇게 빈털터리 홀아비 인생이 시작됐다. 막막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필자는 정신력이 강했다. 체력도 좋은 편이었다. 아직 젊으니 설마 굶어죽기야 하겠냐 했다. 가진 돈이 없으니 사업을 할 수도 없었다. 재취업을 하자니 또다시 남 밑에 들어가 언제 잘릴지도 모르는 불안한 직장생활을 하기는 싫었다. 여생은 나를 위해 즐기며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다행히 현직에 있을 때 가깝게 지냈던 외국 바이어들에게 안부를 전하니 도와주겠다고 했다. 회사에서는 소량 주문은 받기 어려운 경우도 있었다. 게다가 가격에 관리비까지 얹으면 가격경쟁력이 없었다. 그러나 혼자 하니 관리비도 절감되고 오히려 소량 주문이 더 취급하기 적당했다. 때마침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 특수를 타고 주문이 폭주했고, 꽤 큰돈을 모았다. 그 돈으로 집도 사고 평생 노후 걱정은 할 필요 없을 만큼 금융자산도 모았다.
그러나 건강이 문제였다. 필자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꽤 있었다. 혹자는 사업을 하다가 망했고 혹자는 사기를 당해 주저앉았다. 그 여파로 건강이 나빠져 세상을 뜨는 사람도 있었다. 건강을 최우선 순위에 놓고 선택한 것이 댄스스포츠였다. 그동안에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취미로 해왔는데 혼자가 된 뒤로는 더 자유롭게 집중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탁월한 선택이었다. 필자는 평소 건강은 신체적 건강뿐 아니라 정신적 건강, 사회적 건강까지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댄스스포츠는 이 세 가지를 동시에 충족시켜줬다.
댄스스포츠 덕분에 보람 있고 즐거웠던 추억을 많이 가질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거금을 들여 댄스스포츠의 본고장인 영국으로 유학을 다녀온 것이 가장 잘한 일이다. 덕분에 능력을 발휘할 무대가 생겼고 댄스계에서 유명해졌다. 입문에서 선수생활까지 해본 사람은 아주 드물다. 후회 없을 만큼 만끽했다.
그 사이에 여러 사람을 만났다. 필자에게 접근한 여성도 몇 있었다. 여성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사랑이다. 나이가 들어도 마찬가지다. 아니 오히려 더 사랑이 필요한 나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성들은 필자에게 ‘자신만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자신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뚫고 들어갈 여지가 없어 보인다고 해서 충격을 받았다. 또 너무 바쁘게 사는 모습을 보며 한가하게 테이트나 할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고 거절당할 것도 같아 아예 말도 꺼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는 그렇게 바쁘게 사는 사람이 아니다. 다만 승산 없는 연애질에 정신적, 시간적 낭비를 하고 싶은 마음이 없을 뿐이다.
혼자 사는 사람이 자신을 돌보는 방법은 의식주 중에 먹는 것이 으뜸이다. 집은 있으니 해결되었고, 사고 싶은 옷을 보면 내 마음대로 산다. 두 가지는 해결되었으니 당연히 먹는 것을 중요시한다. 필자는 ‘내 몸은 보배이고 음식은 보약’이라고 생각한다.
정신적 풍요로움을 위해 독서도 자주 하고 영화도 많이 본다. 스트레스 받을 일은 아예 피한다. 사회적 건강을 위해 여러 사람과 어울린다.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피부과에 가서 얼굴의 점도 빼고 맑은 피부 톤을 위해 레이저 시술도 받았다. 나를 돌볼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비장한 생각으로 산다.
우리 사회가 평균수명이 늘어 100세 시대로 진입하면서 기나긴 은퇴 후의 시간관리가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사실 이런 사태가 인류 초유의 일인데다 미처 대비할 시간도 없이 들이닥쳐 대부분 허둥지둥 갈피를 잡지 못하고 살고 있다. 계속 일을 해야 하는지, 아니면 놀고먹어도 괜찮은 것인지 쉽게 판단이 안 선다.
우리보다 고령사회에 먼저 들어선 일본은 이미 적응기간을 거쳐 60~70대 노동 인구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한다. 일본의 사례를 보면 역시 계속 일을 하는 게 맞는 방향인 것 같은데 우리나라는 아직 고령사회에 대한 대책이 많이 부족한 느낌이다. 우선 일자리도 턱없이 부족하고 청년실업 문제 때문에 일자리 구하러 다니기도 왠지 눈치가 보이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조기은퇴하고 아직 건강한 몸인 시니어들은 틈새 일거리인 재능기부를 많이 하고 있다. 필자가 취재하고 있는 서울시나 기타 지자체 혹은 복지 관련 단체들에 소속된 재능기부 모임은 한둘이 아니다. 이런 모임에 참여하는 시니어들은 대체로 즐거워하고 하는 일에 만족해한다. 그러나 문제는 재능기부는 ‘일거리’일 뿐이지 ‘일자리’가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재능기부는 매우 아름다운 일이며 칭찬받을 일이지 비난받을 일은 아니라는 점 때문에 더욱 그렇다. 최근에 출간된 저널리스트 크레이그 램버트의 은 이와 유사한 ‘무보수 노동’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시니어들의 생존 문제와 결부되어 우리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림자 노동’이란 오스트리아의 사회사상가 이반 일리치가 주장한 개념으로 현대인들이 ‘아무런 보수도 받지 않고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에 내몰리고 있는 상황을 표현한 말이다. 예컨대 ‘셀프’라는 미명하에 매장 곳곳에서 유행하는 노동을 이른다. IT의 발달로 이런 식의 노동 봉사는 갈수록 확대되는 추세다.
대형 레스토랑의 샐러드 바에서 직접 음식을 담고, 공항의 터치스크린 키오스크에서 셀프 탑승 수속을 밟고, 극장에선 티켓 자동발매기 앞에 줄을 선다. 이전에는 매장이나 창구 직원이 처리했던 일들을 소비자에게 떠넘기는 셈이다. 마치 생활이 더욱 편리해지고 소비자에게 자율을 선사하는 듯 포장하지만, 결국은 기업의 인건비 절감이 목표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햄버거 먹고 스스로 치우는 순간 일자리 하나가 날아간다는 뜻이다.
오늘날 일자리가 줄어들고 많은 젊은이가 실업으로 고통받는 이면에는 이런 보이지 않는 구조적 문제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물론 재능기부가 ‘그림자 노동’이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아주 선한 마음으로 베푸는 행위가 비슷한 일로 생계를 이어가야 하는 어느 누군가의 일자리를 뺏을 수도 있다는 의미다.
그러고 보면 세상일이 그리 단순하지 않다. 뉴욕의 작은 나비 날갯짓이 북경의 태풍을 몰아오듯 모든 사회 현상은 촘촘한 인과관계로 얽혀 있다. 나이 들었다는 게 뭔가. 이런 세상사를 폭넓게 보는 지혜가 아닌가. 즐겁게 재능기부를 하면서도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해 보인다.
여기 몽골은 하늘을 잘 볼 수 있는 나라입니다. 몽골 인구의 반이 모여 살고 있는 도시 울란바토르를 조금만 벗어나면 우리 눈 가득 하늘을 담아 볼 수 있는 특별한 곳입니다. 그래서 하늘빛의 변화도, 그 하늘에 펼쳐지는 갖가지 구름의 형태나 색도 잘 관찰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바람이라도 불면 땅 내음과 풀을 스치는 소리까지 느끼는 호사가가 됩니다.
어스름에 땅거미가 지면 동편에선 다른 곳에선 쉽게 볼 수 없는 커다란 달을 각 모양대로 만나게 됩니다. 휘영청한 온달, 짜릿한 그믐달, 다신 못 만날 지난 시절 같은 초승달, 정겨운 상현달, 그리운 사람이 떠오르는 하현달…. 고국을 떠나 만나고 있는 몽골 달들도여기 몽골은 하늘을 잘 볼 수 있는 나라입니다. 몽골 인구의 반이 모여 살고 있는 도시 울란바타르를 조금만 벗어나면 우리 눈 가득 하늘을 담아 볼 수 있는 특별한 곳입니다. 그래서 하늘빛의 변화도, 그 하늘에 펼쳐지는 갖가지 구름의 형태나 색도 잘 관찰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바람이라도 불면 땅 내음과 풀을 스치는 소리까지 느끼는 호사가가 됩니다.
어스름에 땅거미가 지면 동편에선 다른 곳에선 쉽게 볼 수 없는 커다란 달을 각 모양대로 만나게 됩니다. 휘영청한 온달, 짜릿한 그믐달, 다신 못 만날 지난 시절 같은 초승달, 정겨운 상현달, 그리운 사람이 떠오르는 하현달…. 고국을 떠나 만나고 있는 몽골 달들도 어렸을 적 기억처럼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산과 고개를 넘어 강을 건너다보면, 정말 사방이 모두 지평선으로 둘러싸인 너른 들을 만나게도 됩니다. 거기서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라는 어른들의 말이 떠오르고 고개가 끄떡여집니다. 제자리에 서서 한 바퀴 뺑 돌아봐도 실감이 나지 않아 다시 돌아보지만 그래도 멈출 자리가 구분되지 않아 계속 돌게 되는 그런 몽골 땅에 정이 푹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몽골에 사람들이 만들어 낸 먹구름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그 깊이가 가늠되지 않는 먹구름과 푸른 하늘에 대한 얘기입니다. 그렇게 사랑스러운 몽골에 깊은 골이 겹쳐 하늘의 아름다움을 더 많이 기리며 쳐다보고 있습니다.
먼저 얼마 전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 정권이 민주당에서 인민당으로 바뀌어 정책의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그동안 쌓여온 외국인 투자법에 대한 실정(失政)과 광물 원자재와 에너지 가격의 하락으로 몽골의 외환 보유액이 텅 비어 나라 전체가 빚에 쪼들리게 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아셈(ASEM)을 치러냈습니다. 행사를 위해 도로를 내고 건물을 새로 짓고 꽃과 나무로 단장해 생기가 넘쳤던 거리 여기저기에 중단된 공사현장이 즐비합니다.
그리고 혹독하기로 유명한 몽골의 겨울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경제 위기 상태에 내몰린 몽골 국민의 대다수에겐 내일에 대한 불안함이 하루하루 가중되고 그래서 정치인들은 서로의 책임을 상대에게 전가하며 불신이 조성되어 분열되고 있습니다. 갑자기 디플레이션의 기미마저 보이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가진 자와 가난에 내몰린 자의 간극이 자꾸 더 벌어져 실업자가 많아지며, 인건비는 낮아지고 있습니다. 경제와 정세에 대해 아는 게 없는 제 까막눈에도 몽골의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정치인들과 내로라하는 경제학자들은 날마다 특단의 조치와 처방을 신문 라디오 티비 인터넷 등 언론을 통해 내놓고 있습니다. 그래도 저는 잘 이해되지 않고 해결책이 제기될수록 오히려 마음이 더욱 복잡해지기만 합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 제가 믿는 것이 있습니다. 끝이 좋으면 그 과정이 어려워도 견딜 만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하늘을 믿고 의지해 여기 몽골 학생들과 교수들에게 ‘사진으로 만나는 인문학’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살아본 경험에 의하면 우리의 생각과 다르게 하늘은 반전의 명수입니다.
그래서 지금 눈에 보이는 몽골의 상황은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희망을 찾을 수 없는 막막함뿐이지만, 이 어려운 위기가 당장은 가엾은 몽골 국민에게 채찍이지만, 길게 보면 이 나라를 더 단단히 세우기 위한 과정이 되기를 바라며 가늠되지 않는 어두움 속에서 몽골사람들과 함께 빛을 간절히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 국가적 어려움 중에 여러 가지 말이 분분하지만 헛된 거짓말들과 자기의 이익을 위해 국민을 소모품처럼 이용하는 잘못된 지도자들을 구분해 낼 수 있는 눈이 몽골 국민들에게 이 기회에 생기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유럽에서 가장 지위와 자존감이 낮았던 독일이 16세기 초에 기적같이 깨어났듯이, 이어 17세기 초에 영국이 바뀌고 덴마크가 일어났듯이….
미국이 새로 태어나고, 우리나라가 깨어났듯이….
이런 어려움 가운데서도 여기선 몽골을 돕는 많은 손길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몽골에 어두움이 짙을수록 밝은 빛들 또한 강하게 볼 수 있습니다.
몽골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공산정권이 세워진 나라입니다. 그런 몽골을 묶고 있던 허황된 굵은 쇠사슬에서는 풀려났지만, 시장 경제에 서툰 몽골이 이렇게 경제적 위기를 겪게 된 것은 더 큰 앞날로 발전하기 위한 과정임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의 총체적 위기가 오히려 몽골이 세계와 자유롭게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 한 단계 장애를 넘는 중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 어려움이 겉으로 보기엔 정치나 경제가 빚어낸 것으로 보이지만 그 근본 원인이 정의와 진리가 이 나라에 세워지기 위한 과정에 생기고 있는 성장통임을 몽골 국민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관심을 갖고 응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미 이런 과정을 겪어 국가적으로 놀라운 성취를 경험한 우리나라도 다시 세계적인 경제 불황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이런 과정을 딛고 더 튼튼히 서기를 바랍니다.
나를 몽골로 보낸 우리 대한민국이 먼저 탄탄히 서야 이 일들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박원식 소설가
구불구불 휘며 아슬아슬 이어지는 가파른 비탈길의 끝, 된통 후미진 고샅에 준수한 한옥 한 채가 있다. 집 뒤편으로 세상의 어미로 통하는 지리산 준령이 출렁거리고, 시야의 전면 저 아래로는 너른 들이 굼실거린다. 경남 하동군의 곡창인 악양면 평사리 들판이다. 광활한 들 너머에선 섬진강의 푸른 물살이 생선처럼 퍼덕거린다. 호방하고 수려한 산수 풍광을 한눈에 쓸어 담을 수 있는 요지(要地)에 터를 잡은 셈이렷다.
증권사 지점장 출신인 조동진씨(58)가 동갑내기 아내 고미선씨를 대동하고 이곳 지리산 자락으로 귀촌을 한 건 9년 전의 일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지리산을 애호한다. 지리산의 너그러운 품에 병아리처럼 포근하게 안겨 오순도순 오붓하게 살아갈 꿈을 꾸기도 한다. 조동진씨가 그랬다. 서울에서, 분당에서, 증권맨으로 뛰었던 그는 휴가철이면 매번 지리산을 찾았다. 그렇게 지리산과 교제를 하는 사이 담뿍 정이 들었다.
그 대상이 사람이건 자연이건, 정 들어 사무치게 그리우면 투신하게 마련이다. 나, 퇴직하면 지리산에 살래! 그는 그렇게 안으로 다지고 밖으로는 광고를 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마침내 일을 저질렀다. 인생의 항해를 결정하는 것은 바람이 아니라 돛이다. 대양의 바람은 한 곳에서 불어오지만 돛의 향방에 따라 어떤 배는 동쪽으로 가고, 어떤 배는 서쪽으로 간다. 조동진은 의지의 돛, 지향의 눈을 돋워 지리산 산골을 겨누었던 것이다. 사연의 보따리를 헤쳐 볼까.
“악양의 산자락에 있는 감나무 과수원 3306㎡(1000평)를 미리 사들이는 것으로 거사를 도모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은 대충 다 컸겠다, 아내만 끌고 내려가면 되는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아내가 손사래를 치더라고요. 집사람이 원래 도회적 성향이라서 시골살이에 아무런 매력을 느끼질 못했던 겁니다. 세뇌교육에 들어갔죠.(웃음) 그러던 중 아내가 원인 미상의 중한 폐질환에 걸렸습니다. 의사들이 말하길 현대의학으로는 고칠 수 없는 병이라 하더군요. 그렇다면 이걸 어떡하나. 그래, 자연요법으로 고쳐보자. 이왕지사 땅도 사놨으니까 산골로 가자. 그렇게 아내와 합의를 보고 드디어 시골살이를 시작하게 되었던 겁니다.”
“지리산의 그 무엇이 그렇게도 좋았을까?”
“제가 실은 대학을 다닐 때부터 지리산에 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었는데요, 그 웅장한 풍경에 사로잡혔던 것 같아요. 게다가 저는 바닷가에 가면 힘이 쭉 빠지는 반면, 산에 가면, 특히나 지리산에 가면 힘이 난다는 걸 자주 느꼈어요. 체질적으로 기질적으로 잘 맞는 거겠죠.”
“한옥이 매우 근사해요. 저토록 야무진 한옥을 지은 특별한 이유가 있겠죠?”
“아내의 폐질환을 다스리기엔 한옥이 유리하다는 생각이었어요. 황토와 목재를 재료로 한 한옥은 숨 쉬는 집이라 하죠. 그러나 남들에겐 권하고 싶지 않습니다. 건축비가 너무 많이 들고, 공기(工期)도 길고, 관리도 힘드니까.”
“저는 말이죠, 이왕에 산골의 자연과 야생을 벗 삼아 살 거라면 작고 소박한 집을 짓는 게 마땅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왜 아니랴. 동감입니다. 그저 값싸고 편리한 현대식 집을 짓는 게 좋을 겁니다. 다만, 사랑채 정도는 제법 운치를 풍기는 작은 흙집을 짓는 것도 재미날 거예요.”
조동진씨의 거처 한편엔 나무로 골격을 세우고 흙으로 벽을 쌓아 지은 사랑채가 있다. 누각이 딸려 있는 소담한 별채로 조씨가 손수 설계해 지었다. 여자로 치면 음전하면서도 은근히 요염한 멋을 풍기는 가인을 닮은 집이다. 부부가 수시로 눈을 맞추며 단란하게 속닥이는 데에 사랑채의 용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멀고 가까운 곳에서 찾아드는 벗들과 마주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일에도 쓸모가 많겠지만 말이다.
농사일은 노동이 아니라 축제
조씨의 섬세한 조력과 자연의 협찬 덕분일 테지. 다행스럽게도 아내의 병증은 현저하게 개선되었다. 난생 처음 경험하는 시골 생활이지만 마을 주민들과의 관계에도 아무런 흠결이 없다고 한다. 감 농사도 순항이다. 한적한 산골에 입장했으니 그저 한가하게 노닥거리며 자연을 즐기면 그만일 성 싶지만, 조동진씨는 농사일이 오히려 구미에 맞다. 애초에 사들인 땅이 감 과수원이었기에 자연스럽게 감 농사에 뛰어들 수 있었다.
“노후의 직업으로 농사처럼 이상적인 게 없습니다. 정년퇴직 없지, 누가 간섭하지를 않지, 적당한 육체노동으로 건강을 챙길 수 있지, 정직하게 땀 흘리는 농사일은 단순히 노동이 아닌 축제에 가까워요.”
“세상에서 가장 못 믿을 직업이 농사라고들 해요. 벌이가 되질 않는다는 거죠.”
“저도 경제적인 면에 관한 두려움이 많았지만 적절히 극복해 왔어요. 2314㎡(700평) 규모의 감 농사를 지어 곶감이나 감식초를 만들어 판매를 하는데 연간 1200만원에서 1500만원 정도의 수익을 올립니다. 그 정도면 무난해요. 시골에선 말이죠, 골프 할 일 없지, 노래방에 가서 도우미를 부를 일 없지, 수입이 적더라도 지출을 줄일 수 있어 생각보다는 여유를 부릴 여지가 많습니다.”
흔히 귀촌과 귀농을 구분해서 선택을 하거나 판단을 한다. 조동진씨는 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성공한 귀농인 사례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고 농사에 목을 걸다시피 들입다 땅을 파는 인물은 아니다. 농사에 생활의 한 자락을 걸침으로써 한결 뿌듯한 실속과 실리를 구할 수 있다는 이치를 터득했을 뿐이다. 그의 시골살이 촉이 이렇게 살아 있다.
“제 경우는 귀농을 가장한 귀촌인이라 봐야 정확할 겁니다. 그저 작은 텃밭을 일궈 소소한 먹거리를 거두는 귀촌 생활도 즐겁겠지만, 농사를 통해 수익을 창출하는 것도 신나는 일입니다. 남자는 퇴직을 했더라도 명함이 있어야 해요. 992㎡(300평) 이상의 농사를 지을 경우엔 누구나 명함을 만들 수 있어요. 일테면 ‘지리산 농원 대표이사’라거나, 그런 식으로 떠억 명함을 새길 수 있는 거예요(웃음). 992㎡(300평) 정도의 농사만 지으면 농업인 등록을 할 수가 있으며, 온갖 지원을 받을 수도 있는데, 그걸 왜 마다할까? 가급적 농업인 자격을 획득하라고 권장하고 싶습니다. 한 달에 하루만 일해도 폼 잡을 수 있는 게 농사에요. 시골에선 말이죠, 하는 일 없이 늘 술이나 마시고 돌아다니면 욕먹습니다. 그러나 농업인으로서 일을 할 경우엔 술을 퍼마셔도 욕먹을 일이 없어져요.”
“사전에 열심히 귀농교육을 받고 입촌한 사람들마저 실패하는 경우가 많은 게 현실 아녜요?”
“도시 인구를 분산하고, 실업을 해소하고, 도농격차 해결을 위해 정부에서 농촌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려는 갖가지 지원 정책을 펼치지만, 사실 허점이 아주 많습니다. 귀농교육이랍시고 억대 수입이니, 특작물이나 유기농을 운운하며 과도하게 분위기를 띄우지만 사실 허황한 얘기들에 불과해요. 가령, 농사 경험이 없는 사람이 유기농에 도전하는 건 독립운동을 하는 것처럼이나 어렵고 위험합니다. 제가 힌트를 하나 드리죠. 특수작물이나 유기농을 요란하게 하려 하지 말고, 그 지역의 특산물을 하라는 것! 그래야 생산이나 유통의 이점을 누릴 수 있으며, 원주민들과의 소통도 빨라져요.”
“빈손으로 귀촌할 경우엔 어떤 재주를 발휘해야 하죠?”
“도시에서는 움직이면 돈이 나가지만 시골에선 움직일수록 돈이 들어옵니다. 극단적으로 말해 양육할 자녀가 없이 부부만 귀농할 경우, 빈손으로 시작해도 무방해요. 퇴직을 한 시니어라 할지라도, 어느 정도의 건강만 있다면, 자세를 낮출 수 있다면, 늘 일손이 부족한 농촌에서 일당 10만원짜리 일감을 찾는 건 일도 아니니까. 한 달에 열흘만 날품을 팔아도 그럭저럭 먹고살 수 있는 겁니다. 문제는 겸손한 마음, 열린 태도이겠죠. 퇴직을 뜻하는 리타이어(retire)는 ‘타이어를 교체한다’는 의미 아니겠어요? 은퇴 뒤 시골에서 살고자 한다면 마음 자체를 싹 바꿔야 합니다. 돈보다는 마음의 행복과 즐거움을 구하는 쪽으로 삶의 잣대가 변해야 하는 거죠.”
시골에서 오히려 진정한 문화생활 누려
사람들은 흔히 시골의 문화적 환경이 열악할 것으로 믿는다. 갖가지 공연과 전시회 따위가 펼쳐지는 도시를 벗어나 시골에 살다 보면, 그저 주야간에 앞산만 멍하니 바라보다가 자칫 우울증에 빠지지나 않을까 걱정한다. 조동진씨에 따르면 이는 미신에 가깝다.
“서울에서 공연 구경을 가는 건 어쩌다 한번 아닐까? 공연물이 많다지만 막상 향유하긴 어려운 게 도시살이에요. 요즘의 시골엔 지역축제나 산사음악회 같은 문화 행사가 잦습니다. 아이돌 가수에 밀린 7080 가수들까지 대거 참여해요. 저는 이곳 공연장에서 소찬휘라거나 김재동 같은 연예인들을 처음 봤어요. 게다가 관람료는 전적으로 무료에요. 뒤풀이엔 술과 음식이 푸짐하게 나오고요.”
“풍부한 상상력으로 바라본다면 산야 자체가 뮤지엄이겠죠.”
“제가 도시에 살며 열네 번이나 이사를 했어요. 이사 때마다 고려한 게 창밖으로 달을 볼 수 있느냐는 점이었어요. 여기 산골의 달밤은 얼마나 좋은지요. 사랑채 정자에 앉아 달빛 흥건한 마당을 바라보며 술 한 잔을 하는 일은 최상의 낙입니다. 달 없는 밤엔 별들이 허공에 모이죠. 때로 반딧불이가 공연을 하고, 빗소리가 악곡을 연주하고, 사시사철 모든 풍경이 장관입니다. 뒷산의 야생화들이 뿜는 향기의 잔치는 또 얼마나 행복한지요. 이 다양한 자연 현상들이 명약이자 보약입니다. 시골엔 의료시설이 빈약하다는 소리들이 있지만, 제 아내가 병을 다스린 걸 보면, 저 산야 자체가 하나의 병원이라는 실감을 할 수밖에 없어요.”
“앗! 시골 예찬이 극에 달하셨다(웃음). 도대체 아무런 불만이 없는 거예요?”
“제가 외환위기 때 쫄딱 망해 시장에서 전을 벌리고 옷을 팔기도 했어요. 박수를 치며, 싸요, 싸요! 외치면서요. 그런 고통의 시절을 겪은 게 인생의 디딤돌이었습니다.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행복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걸 나름 깨달았어요. 그러하니, 제가 원해서 들어온 산골에서 무슨 불만이 있겠어요? 이제 제가 해야 할 일 하나가 남았는데요, 귀촌을 희망하는 은퇴자들에게 뭔가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해서, 최근 지리산웰빙귀농학교라는 걸 세웠어요. 대차게 밀어붙일 참입니다(웃음).”
10년 가까이 흐른 시골 생활을 통해 조씨는 어언 선수에 이르렀나? 귀촌에 관한 낙관과 긍정에 경계가 없구나.
>> 박원식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등의 저서가 있다.
막연히 생각하는 은퇴 후 삶의 조건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평소와 다른 환경에서 살아보고 싶고, 이왕이면 내 경험을 살리고 싶다. 여기에 남을 돕는 보람까지 있다면 금상첨화가 아닐까. 불가능할 것 같지만, 그런 기회는 있다. 대한민국을 대표해 세계인을 돕는 코이카가 그것. 세계에서 활약한 다양한 시니어를 만나, 코이카를 통해 어떻게 보람 있는 삶을 찾을 수 있는지 알아보았다.
글·사진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한국국제협력단은 일반적으로 영문명의 약자인 코이카(KOICA, Korea International Cooperation Agency)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991년 4월 정부출연기관으로 설립된 코이카는, 우리 정부의 대외무상원조 전담기관 역할을 담당해 왔다. 미국 정부가 1961년 설립한 평화봉사단(Peace Corps)과 일본의 일본국제협력기구(日本國際協力機構, JICA)가 이와 유사한 기관으로 볼 수 있다. 정부가 미국의 평화봉사단을 모델로 1989년 설립한 한국청년봉사단이 코이카의 전신이다.
역할은 말 그대로 개발도상국 원조사업이다. 봉사단은 개발도상국 주민과 함께 생활하며, 우리의 경험과 기술을 전수함으로써 경제적, 사회적 발전을 지원하는 것이다.
코이카에서 운영하는 봉사단은 크게 3가지로, 마이스터 고등학교나 특성화 고등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드림봉사단과 코이카 봉사단과 중장기 자문단이 있다. 드림봉사단을 제외하면, 자격조건에 ‘나이’라는 단어는 없다.
시니어 향한 문호 ‘활짝’ 열려 있어
하지만 구직난이 심해진 요즘 젊은이들이 취업을 대비하기 위한 ‘스펙 쌓기’용으로, 때로는 정부가 청년실업 문제 대책용으로 활용하면서 ‘청년들이 주인공인 사업’이란 색깔이 덧입혀졌다.
그러나 실상은 다르다. 코이카는 시니어들에게 문호를 활짝 개방하고 있고, 실제로 전 세계에서 활약하고 있는 단원 중 시니어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적지 않다. 2015년 12월 기준으로 전체 파견인원 1350명 중에서 50대 이상이 365명으로 27%를 차지한다. 적지 않은 수치다. 여기에 40대 113명을 더하면 중·장년층이 35%까지 증가한다. 70대도 5명이나 활동 중이다.
이에 대해 코이카 월드프렌즈 모집팀의 송희수 팀장은 이렇게 설명한다.
“최근 사회적으로 은퇴 후의 삶에 대해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데, 코이카에서는 이런 분들의 도전을 환영하고 있습니다. 그분들이 사회에서 쌓았던 지식과 경험을 개발도상국을 위해 베풀 수 있다면 가치 있는 일이 될 테니까요. 각국에서 요청하는 대부분의 자원도 이런 지식과 경험이 있는 인재들입니다.”
봉사단과 자문단 두 갈래 길
시니어가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은 크게 두 가지. 하나는 코이카 봉사단, 다른 하나는 코이카 자문단이다. 봉사단은 쉽게 말해 실질적인 기술전수의 성격이 짙다. 교육과 보건, 공공행정, 산업에너지, 농림수산 5개 분야에서 세부 직종을 모집해 현장에서 교육이나 이와 관련한 사업을 실시한다. 5개로 나눠진 분야가 거창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현실적이다. 예를 들어 산업에너지 분야는 자동차 정비나 용접, 전기 설비가 포함되어 있고, 농림수산에는 농업과 어업 인력을 모집한다. 대부분 특정 분야의 기술직이다. 최근 현대자동차에선 직원들의 퇴직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코이카와 협력 방안이 논의되고 있을 정도다. 대부분 전문직종이기 때문에 전문성 없이는 활동이 불가능해, 외국어 능력보다는 모집직종에 대한 전문성을 우선시한다. 기술이 먼저라는 이야기다.
이 중 만 50세 이상, 해당 직종 10년 이상 경력자는 시니어 단원으로 분류돼 배우자와 동반도 가능하다. 기본적으로 코이카 봉사단은 혼자 가는 것이 원칙이다. 봉사단의 임기는 2년이 기본. 현지에 파견되면 최대 3년까지 연장이 가능하고, 귀국 후 재지원도 할 수 있다. 재지원의 경우 횟수 제한은 없지만, 심사 과정에서 가산점이 없어 다른 지원자들과 동등한 조건에서 경쟁해야 한다.
코이카 자문단은 봉사단과는 조금 다르다. 교육과 보건, 공공행정, 산업에너지, 농림수산이라는 5개 분야는 같지만, 정책적이고 거시적인 차원에서 접근한다. 코이카 봉사단이 조직의 말단, 그러니까 각 도시의 읍면 단위에서 실무를 처리하는 역할이라면, 코이카 자문단은 각 국가의 정책 결정자들이 올바른 의사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자문하는 역할을 한다. 임기는 6개월에서 1년이다.
당연히 자격요건도 다르다. 해당 직종에서 10년 이상 실무 경력이 있고, 영어나 현지어로 강의나 보고서 작성이 가능해야 한다. 행정적인 업무가 대부분인 탓이다.
때문에 지원자들도 차이가 있다. 코이카 자문단의 경우 대학교수나 대기업 임원, 공공기관이나 정부부처의 고위공무원 출신들이 많다. 오세훈 前 서울시장이 시장직에서 물러나자마자 르완다와 페루에서 6개월씩 자문단으로 활동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봉사활동이라는 책임감 있어야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경험자들은 코이카를 통해 다른 국가에서 활동한다는 것은 국가를 대표하기 때문에 단순히 노후에 시간을 보낸다는 개념으로 접근해선 안 된다.
직업군인 출신으로 2013년부터 2년간 몽골에서 체육교육 활동과 지역개발 사업을 진행했던 류진현씨는 이렇게 조언한다.
“노후의 삶을 계획하는 방안 중 하나로 코이카를 고려할 때는 봉사활동임을 확실히 인식해야 해요. 국민의 세금으로 활동하는 것인 만큼 사명감을 가지고 일을 해야 합니다. 노후를 해외에서 즐긴다는 생각으로 도전한다면 본인도 불행해지고, 예산도 낭비될 수 있어요.”
실제로 ‘가벼운 마음’으로 지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모집을 담당하는 코이카 월드프렌즈 모집팀의 김혜원씨는 많은 지원자들을 만나다 보면 다양한 사례를 접할 수 있다고 한다.
“코이카를 종교기관으로 착각하고 선교활동의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경우가 있어요. 하지만 이런 종교활동은 코이카에서 엄격하게 제한하는 분야 중 하나입니다. 또 이민의 개념으로 가족과 함께 이주하려는 경우도 있는데 불가합니다.”
코이카 측에서 원하는 인재상도 류진현씨의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전문지식과 현지 적응력, 봉사정신 이 3가지를 가진 인물이 코이카가 바라는 인재의 모습이다.
해외체류 위한 생활비, 거주비 등 지원
코이카 봉사단이나 자문단의 파견은 기본적으로 해당 국가에서 필요한 분야에 대해 한국 외교부로 요청이 들어오면, 코이카에서 원조 인원이나 범위를 결정해 파견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언제 어느 국가에 수요가 발생할 지 예측하기는 어렵다.
코이카 봉사단이 횟수를 정해 놓지 않고 수시로 모집하는 것도, 특별한 희망국가가 있다고 해도 그 바람이 이뤄지기 힘든 것도 이러한 특성 때문이다. 자문단의 경우에는 1년에 두 차례 모집한다. 자세한 일정이나 모집분야, 자격을 알고 싶다면 홈페이지(kov.koica.go.kr)를 확인하는 것이 제일 확실하다.
경쟁률은 보통 3대1에서 5대1 수준. 그러나 봉사단에선 한국어 교육분야, 자문단에서 공공행정 중 경제분야는 10대1 이상을 기록하기도 한다. 농림수산 분야는 치열하지 않다.
이렇게 선발이 되면 한국과 현지에서 적응을 위한 별도의 교육을 받고, 전 세계 40여 개국으로 파견된다. 파견국은 주로 아시아 국가가 꾸준한 수요를 보였으나 최근에는 중남미나 아프리카에서 지원을 요청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고 한다.
봉사단원이 받는 금전적 지원은 얼마나 될까? 일단 많은 금액은 아니다. 코이카 봉사단의 경우 현지 생활비, 주거비 등이 지원되는데 각 국가의 물가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난다. 실무자들의 설명으로는 시니어 단원들에게 대략 한화로 월 150만~200만원이 지원된다고 한다. 여기에 2년간의 활동을 마치면 귀국하면 국내 정착지원금을 지원하는데, 월 50만원씩 총 1200만원이 지급된다. 봉사단의 시니어 단원은 일반 단원에 비해 생활비는 2배, 주거비는 1.5배 더 받고 있다. 코이카 자문단의 경우에는 별도의 정착지원금이 없다. 대신 현지 정착비, 생활비 명목으로 월 4000달러 정도가 지급된다.
인생의 후반기 돌아보는 기회
아무래도 해외생활에서 걱정하는 부분은 건강과 안전이다. 특히 시니어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이는 코이카 입장에서도 마찬가지. 현지에서 활동을 해야 할 단원들이기 때문에 건강관리 부분은 가장 신경 쓰는 부분 중 하나. 건강검진이나 의료비, 의료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
안전도 마찬가지다. 최근 테러 위협이 증가하는 국가들이 많아지면서 문제가 되는 나라들은 아예 지원 대상 국가에서 제외하고 있다. 또한 현지에 파견되어 있는 코디네이터를 통해 단원들 안전관리를 위한 보호·철수 계획을 수립해 놓고 비상시를 대비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파견되는 국가는 기초적인 안전은 보장되어 있다고 보면 된다.
코이카의 전신인 한국청년봉사단부터 각종 자문역할로 인연을 맺고 많은 봉사단을 만나 온 이태주 한성대 교수는 유의해야 할 점과 코이카 활동이 갖는 장점을 이렇게 이야기 한다.
“특히 시니어들은 정신적인 건강관리도 중요해요. 한국 남성들, 시니어들은 혼자 서기 힘든 존재인 경우가 많아요. 그랬던 사람들이 현지에선 밥 먹는 거, 양말 빠는 것까지 혼자 해결해야 하니까요. 그 과정에서 겪는 고독이나 정신적인 건강을 주의해야 해요. 하지만 시니어들이 그 난관을 딛고 다녀오면 다른 인생이 열리는 경우가 많아요. 뒤늦게 인생의 전환점이 될 수도 있고, 시각도 열리고 유연해져요. 국가적으로도 기여할 수 있고요. 그렇게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려는 시니어들을 보면 되레 제가 감동 받기도 해요.”
두 질문의 답은 우리 민족 고유의 운동인 씨름과 씨름 선수다.
최근 급격하게 인기가 떨어졌지만 1980~90년대, 장충체육관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 있는 체육관은 연중 열리는 민속 씨름 경기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짧은 시간에 불꽃같이 피어오른 민속 씨름 인기의 중심에 ‘만 가지 기술’을 구사한다는 이만기가 있었다.
민속 씨름이라는 이름은 1983년 씨름이 프로화되면서 기존의 아마추어 씨름과 구분하기 위해 만든 명칭이다. 씨름은 모두가 알고 있듯이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 민족이 즐긴 전통의 스포츠다. 전 세계적으로 볼 때 몽골 스페인 스위스 일본 등지에 씨름과 비슷한 운동이 있고 민속 씨름 전성기에는 몽골 스페인 등과 교류하기도 했다.
근대적 스포츠로서 씨름은 일제 강점기인 1910년대에 나타난다. 이 무렵 단성사의 소유주 박승필(朴承弼, 1875~1932)이 조직한 ‘유각권투구락부’에서 회원들에게 씨름과 유도, 복싱을 익히도록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912년 10월 7일 단성사에서 씨름과 유도, 복싱 3개 종목 경기가 열려 점수제에 의해 우열을 가리고 상품을 줬다는 기록도 있다.
야구 농구 배구 등을 보급하며 한국 근대 스포츠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서울YMCA는 민족 스포츠인 씨름을 장려하기 위해 1928년부터 1936년까지 전조선씨름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의 스타는 김윤근(金潤根)이었다. 1930년대의 이만기인 셈이다. 김윤근은 이 대회를 비롯해 선수 시절 200여 차례 씨름대회에서 황소 200여 마리, 우승기 88개를 차지한 스타플레이어였다. 김윤근은 1945년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난 뒤에는 대한씨름협회 회장을 지냈고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국민방위군 사령관을 맡았으나 방위군 비리와 관련해 사형됐다. 씨름계로서는 큰 인물이었지만 역사에 오점을 남기고 말았다.
1927년 12월 27일 창립한 조선씨름협회는 농구 축구와 함께 일제 강점기에 우리 힘으로 만든 몇 안 되는 경기 단체 가운데 하나다. 그 시기 거의 모든 종목은 조선체육회가 대회를 주관하고 주최했다. 서울YMCA가 전조선씨름대회를 개최한 1년 뒤인 1929년 9월 28일 조선체육회는 휘문고보 운동장에서 조선씨름협회와 공동 주최로 제 1회 전조선씨름대회를 열었다. 경신학교와 휘문고보, 중동학교, 양정고보, 중앙고보, 협성실업, 보성고보, 숭인상업 등 8개 팀이 출전한 단체전 결승에서 경신학교는 보성고보를 접전 끝에 7-6으로 누르고 첫 우승의 영예를 안았다. 개인전 결승에서는 이도남이 최재빈을 물리치고 첫 패권을 차지했다.
조선체육회는 제 16회 전조선종합경기대회를 1935년 10월 22일부터 나흘 동안 경성운동장을 중심으로 열었다. 이 대회는 지난 대회의 육상과 축구, 농구, 야구, 정구 등 5개 종목에 씨름, 유도, 역기(역도), 검도 등 4개 종목을 추가했다. 씨름이 오늘날 전국체육대회의 정식 종목이 된 것이다.
이런 역사 속에 씨름은 우리 민족의 혼을 이어 주는 운동으로 꾸준히 발전했고 프로화된 민속 씨름 직전의 스타플레이어로는 이만기의 직계 선배라고 할 수 있는 김성률 장사를 꼽을 수 있다. 김성률 장사는 1970년대 최고의 씨름 선수였고 운동 능력이 뛰어나 레슬링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1974년 제 55회 대회부터 1976년 제 57회 대회까지 전국체육대회 레슬링 슈퍼헤비급 자유형과 그레코로만형 2관왕을 3년 연속 차지한 것을 비롯해 1983년 제 63회 대회까지 전국체육대회에서 금메달 12개와 은메달 2개, 동메달 3개를 목에 걸었다. 쉽게 믿기 어려운 성적이다. 하형주가 씨름 기술을 응용해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유도 95kg급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것은 씨름과 레슬링, 유도로 이어지는 연계성 그리고 씨름 기술의 우수성을 입증한다.
1983년 4월 17일 장충체육관, 약관의 이만기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날이고 장소다. 초등학교 때 씨름을 배운 지 10년 만에 이룬 첫 개인전 우승이자 프로화된 씨름 사상 첫 천하장사 타이틀을 딴 날이고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후 1990년 27세의 나이로 은퇴하기 전까지 천하장사 10번, 한라장사 7번, 백두장사 19번 그리고 11차례의 번외 경기까지 이만기는 길지 않은 선수 생활 동안 47차례 우승의 놀라운 성적을 올렸다. 상금이 아니고 예전처럼 황소를 줬으면 큰 농장을 차려도 됐을 것이다.
초대 천하장사 이만기의 빛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적지 않은 스포츠팬들이 잊고 있지만 1980년대 초반 씨름판에는 내로라하는 장사들이 군웅할거했다. ‘모래판의 신사’ 이준희, ‘인간 기중기’ 이봉걸, ‘털보' 이승삼 그리고 홍현욱, 최욱진 등이 유력한 초대 천하장사 후보들이었다. 지방대회든 전국대회든 우승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이만기는 경력도 그렇고 나이도 어려 우승 후보군에 들 수가 없었다. 그때 이만기는 지방에 있는 대학(경남대학교 2학년)에서 씨름을 하는 무명의 선수였을 뿐이다.
천하장사 경기가 열리기 하루 전인 4월 16일 펼쳐진 한라장사 결승전은 약관의 천하장사 탄생 예고편이었다. 그 무렵 최고 수준의 기술 씨름을 자랑하던 최욱진(경상대학교 3학년)은 이만기를 3-2로 누르고 한라장사 꽃가마에 올랐다. “나는 우승과는 인연이 없는가 보다.” 이만기는 그날 밤 한숨도 자지 못했다. 게다가 체격이 이만기보다 작은 최욱진이 자세를 낮추며 파고드는 바람에 가슴에 약간의 부상까지 있었다.
민속 씨름의 성공적인 출발을 알리는 초대 천하장사 결승전 카드는 절묘하게 이뤄졌다. 키 172cm의 최욱진이 준결승에서 182cm의 홍현욱을 누르고 결승에 올랐다. 한라장사와 천하장사 두 개의 타이틀이 눈앞에 다가왔다. 8강을 목표로 했던 이만기(182cm)는 준결승에서 ‘한 번만 이겨 봤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 수없이 생각했던 이준희(195cm)를 꺾고 결승에 진출했다. 몸무게에 관계없이 겨루는 천하장사 경기에서 기술 씨름의 두 달인이 한 체급 위인 백두급 장사들을 모조리 쓰러뜨리고 결승전 모래판에서 마주 서게 된 것이다.
기술 씨름 달인들의 팽팽한 접전이 이어지는 동안 장충체육관의 열기는 최고조에 이르렀다. 컬러 TV 방송이 시작된 지 2년여가 지난 그때 전국 방방곡곡의 가정에서는 총천연색으로 중계되는 씨름 경기를 보는 이들이 넘쳐 났다. 요즘처럼 시청률 자료가 나왔다면 ‘국민 드라마’의 수치를 가볍게 넘어섰을 것이다.
2-2로 맞선 가운데 이룰 만큼 이룬 이만기로서는 심적 부담이 상대적으로 적었고 최욱진은 한 판만 잡으면 한라장사에 이어 천하장사까지 차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니 상대적으로 심적 부담이 더했을 것이다. 이때 이만기는 평소 연습을 거의 해 보지 않았던 호미걸이를 승부수로 던졌다. 씨름계에서 쓰는 표현인, ‘뽑아 드는’ 들배지기가 이만기의 상징적인 기술이고 이외 밭다리, 잡채기, 뒤집기 등 다양한 기술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이후 7년여 동안 모래판을 평정하게 되는 이만기지만 이날 구사한 호미걸이 기술은 이제 와 생각해도 ‘왜 그때 그 기술을 썼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유도 기술과 비슷한 호미걸이 기술로 이만기는 자신의 선수 생활 첫 개인전 우승이자 천하장사 우승을 이뤘다.
천하장사 이만기하면 떠오르는 첫 번째 이미지가 모래판에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모래를 흩뿌리며 포효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 장면을 찍은 수많은 사진에는 비밀이 숨어 있다. 이만기는 1980년대 스포츠 전문 사진기자로 활동한 R씨와 매우 친했다. 이만기는 승리 세리머니를 할 때마다 R 기자가 카메라를 들고 있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봇물처럼 터진 프로화의 물결
8월을 스포츠 열기로 뜨겁게 달군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 출전한 한국 선수단 가운데에는 적지 않은 프로 선수들이 있었다. 24세 이상 와일드카드 3명의 선수를 포함한 18명의 남자 축구 대표팀과 여자 배구 대표팀은 전원이 프로 선수였다. 축구는 잉글랜드 독일 포르투갈 오스트리아 중국 일본 등 외국 리그에서 활동하고 있는 선수가 7명이나 됐다.
한국 스포츠로서는 1982년을 아마추어와 프로 양대 축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원년으로 기록할 만하다. 물론 이때 이전에도 프로 종목은 있었다. WBA(세계복싱협회) 주니어 미들급 챔피언 김기수가 대표하는 프로 복싱과 1960~70년대 최고 선수였던 한장상으로 대표되는 골프가 1980년대 이전의 몇 안 되는 프로 종목이었다. 그러나 이들 종목은 개인 종목으로 시장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다.
1982년 단체 종목인 야구가 프로화하면서 국내 스포츠계는 본격적인 프로화 시대를 맞게 됐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3년 아마추어 팀을 포함한 축구 프로 리그인 슈퍼리그(K리그의 전신)가 출범했다. 민속 경기인 씨름도 같은 해 프로화가 돼 이만기 등 신예의 등장과 함께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굳이 순서를 따지면 1982년 3월 프로 야구, 1983년 4월 민속 씨름, 1983년 5월 프로 축구다. 이들 종목은 앞서기니 뒤서거니 프로화 물결에 합류했다.
잠시 끊겼던 프로화 물결은 1990년대 중반 농구대잔치를 무대로 펼쳐진 대학 농구의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 1997년 남자 농구가 프로화되고 이어 여자 농구, 그리고 2000년대 들어서 남녀 배구가 프로화가 되면서 국내 인기 종목 대부분이 프로로 재탄생했다.
프로화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었다. 또 프로화가 되면서 해당 종목의 경기력이 크게 향상돼 축구는 숙원이었던 월드컵 본선 진출을 1986년 멕시코 대회에서 이룰 수 있었고 이후 2014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회까지 8회 연속 월드컵 본선에 나서는 기록을 세웠다. 올림픽에서도 자동 출전한 1988년 서울 대회를 시작으로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대회까지 8회 연속 본선에 올랐다. 이 사이 2012년 런던 대회에서는 동메달을 차지했다.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 때 뒤늦게 올림픽 정식 종목이 된 야구는 프로화를 기반으로 끌어올린 경기력으로 2000년 시드니 대회 동메달, 2008년 베이징 대회 금메달의 성과를 이뤘다. 한국 야구는 정식 종목 재진입이 확실시되는 2020년 도쿄 올림픽에서 다시 한번 메달에 도전할 만한 경기력을 유지하고 있다.
1980년대 프로화 3총사 가운데 씨름은 2000년대 들어 급격한 인기 하락과 함께 프로 종목으로서 내세울 만한 콘텐츠 없이 암흑기를 겪고 있어 스포츠 팬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글 신명철 편집위원, 전 편집국장 smc6404@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