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스가 다르다는 기분이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 느리고 즉흥적인데 자유로우면서도 절제미가 있다. 라틴댄스인 살사, 바차타와는 태생부터 다르다. ‘키좀바’란 이름의 춤. 너무 생소해 이름이 귀에 잘 붙지 않지만, 유럽에서는 세대 불문 사랑받는 대중적인 춤이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마음이 이런 것일까. 키좀바를 통해 삶의 활력도 찾고 중년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모인다는 ‘일산 보니따’를 찾아가 봤다.
키좀바라는 춤을 조금이라도 출 수 있다거나 이름이라도 안다는 사람은 무도장에서 살사나 바차타 등 라틴 리듬 좀 타본 사람이다. 요 몇 년 사이 한국에서도 춤을 추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제 막 알려지고 퍼지는 새로운 춤이 키좀바다. 아프리카 앙골라의 전통 춤 셈바(Semba)가 이 춤의 바탕이 됐다는 게 정설이다.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앙골라의 춤이 유럽으로 넘어가 주크라는 음악 장르와 만나면서 도시적이고 세련된 형태의 춤이 됐다. 라틴댄스인 살사에 탱고의 느낌을 입힌, 주로 남녀가 짝을 이뤄 추는 춤이라고 하면 될까. 한국은 여전히 태동기이지만 옆 나라 일본에서는 최근 키좀바 페스티벌이 열렸다. 유럽에서 열리는 키좀바 페스티벌에는 수천 명이 몰려 성황을 이룬다. 춤을 좀 아는 사람들의 얘기를 빌리자면 키좀바는 음악이 빠르지 않아 무릎 관절에 큰 무리가 없다. 작게 걸으면서 편안하게 추는 춤이 키좀바다. 국내에서는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한 단계라서 살사나 탱고에 비해 키좀바만 추는 동호회는 흔치 않다. 지난 1월 일산 서구 대화동에 문을 연 라틴댄스 바(bar) ‘일산 보니따’에 키좀바 동호회가 생긴 것도 이 춤이 서서히 스며들고 있다는 의미. ‘일산 보니따’의 이원근 대표가 특별히 우리나라의 키좀바 대부로 불리는 성태진 강사를 모시면서 자연스럽게 동호회가 만들어졌다.
‘키좀바’에 빠진 사람들
매주 일요일 저녁 6시는 동호회의 정기모임이자 키좀바 수업이 있는 날이다. 넓은 무도장 안. 성태진 강사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린다. 구령에 맞춰 동작을 연습하는 사람들의 눈빛이 사뭇 진지하다. 큰 동작 없이 서서 무릎을 살짝 내리거나 올리고 허리를 돌리기도 한다. 혼자 거울을 보고 자세 교정을 하고 나면, 둘씩 짝지어서 배운 자세를 파트너와 실습해본다. 뭔가 꼬이는지 웃음과 깊은 한숨이 교차되기를 반복하고 또 반복한다. 송골송골 이마에 땀이 맺히는 것을 보니 만만치 않은 운동인 듯하다. 수업이 끝날 무렵에는 이날 배운 동작을 성태진, 이지영 강사가 커플 댄스로 보여주면서 마무리한다.
회원들이 이곳에서 만나기 시작한 것은 이제 두 달가량이지만 모두들 어디서 춤 좀 추다 왔기에 이미 안면이 있다. 같은 춤을 배우면서 더욱 돈독해졌다. 취재를 갔던 날에는 수업을 마치고 난 뒤 다 함께 모여 준비해 온 음식들을 먹었다. 매번 있는 일은 아니지만 서로 친해지면서 만들어진 문화가 됐다고 정수진 씨가 말했다.
“이런 시간은 또 다른 즐거움입니다. 강사이자 이곳 매니저인 젤리(이지영) 님이 음식 솜씨가 좋아요. 그러다 보니 다른 분들도 맛있는 거 있으면 가지고 옵니다. 분위기가 가족적이에요. 밥도 먹고 마음도 편해요.”
사무직으로 일하는 직장맘 정수진 씨가 키좀바를 배운 지는 5개월째라고.
“살사가 들어왔던 초창기부터 관심은 있었는데 추지는 않았어요. 직장생활하며 가정도 돌보던 중에 ‘내가 못해본 게 뭐지?’ 생각하다가 그제서야 배우기 시작했어요. 키좀바를 하고 나서는 다른 춤은 안 춰요. 5개월 췄는데 다양한 분들과 춤을 춰보면서 경험치를 많이 올렸습니다. 남들 보기에는 남녀가 붙어서 추는 거처럼 보이지만 배울 게 많아요. 스트레스도 풀고 좋습니다.”
중년들도 출 수 있는 춤
‘일산 보니따’의 키좀바 동호회 회원들은 대부분 50대 꽃중년이다. 50대라고만 밝힌 박지은 씨가 발산하는 에너지에는 중년의 깊이에 젊은 쾌활함이 있다. 중학교 때까지 발레를 배워서 춤과는 늘 친근했다. 재즈댄스를 오래하다가 라틴댄스로 몸매가 아름다워지는 친구를 보고 종목 변경(?)을 시도했다. 결국 키좀바에까지 발이 닿았다.
“키좀바는 여자를 200% 예쁘게 만들어주는 춤이라고 생각해요.
3년 전에 스콜(성태진 강사) 선생님이 수업을 들어보라고 해서 인연이 됐어요. 두 달 해봤는데 힙업이 되더라고요.(웃음) 복근에 힘을 주고 허리를 앞뒤로 움직이는 동작이 있는데 그게 도움이 됐나봐요. 지금도 살사를 열심히 추지만 나이가 드니까 리듬이나 몸 쓰는 모든 것을 생각했을 때 키좀바가 더 맞는 거 같아요. 키좀바를 추고 나서 살사와 바차타를 추는 몸의 선도 굉장히 예뻐졌어요.”
동호회 회원 중에는 ‘일산 보니따’에 술을 납품하러 왔다가 들어온 이도 있다. 키좀바 배운 지 한 달 차인 태형석 씨다.
“동호회에 들어온 이유 중 하나는 음악이 좋아서예요. 춤이 인기를 얻고 성장하면서 새로운 음악도 많이 만들어지더군요. 남미에서 22년을 살아서 아르헨티나 탱고를 비롯해 라틴댄스는 출 수 있어요. 한국 와서 남미 주류상을 하게 됐고 여기 와서 키좀바를 알게 됐어요. 이 춤은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습니다.”
‘일산 보니따’ 이원근 대표의 동생인 이현경 씨는 대학 시절 에어로빅 강사 경험이 있다고. 오빠가 클럽을 열면서 자연스럽게 동화돼 춤을 추고 있단다.
“춤은 늘 즐겁고 행복해요. 더 중요한 것은 춤추는 사람들은 치매나 노인병에 걸릴 확률이 낮대요. 요즘은 사람들 관심사가 건강이잖아요. 건강하게 나이 먹으면서 몸도 예쁘게 가꿀 수 있거든요. 내가 나를 사랑하니까 춥니다. 이 춤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나를 깨워주는 느낌을 줘요. 그게 키좀바를 하는 이유입니다.”
취재 이후 유튜브를 통해 세계 각국 키좀바 영상을 보면서 어떤 춤일까 나름 연구했다. 격한 춤을 더 이상 출 수 없는 시점이 왔을 때 연륜으로 녹여 오래도록 출 수 있는 춤이 키좀바라는 생각이 들었다. 춤에 조예가 깊은 독자가 있다면 키좀바의 매력에도 빠져보시길.
※ 라이프@이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소개하고 싶은 동창회, 동호회 등이 있다면 bravo@etoday.co.kr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2017년 4월 4일 MBN의 토크 프로인 황금알에 '고수'로 출연했다. 주제가 '인생에 정년은 없다'였다. '밑줄 쫙 긋고'란 말로 유명한 국어강사 서한샘 씨를 포함해 유명인사 총 아홉명 '고수'들이 녹화에 참여했는데 그 중 하나가 나였다. 저녁 4시 반부터 녹화를 시작해서 밤 9시 반에 끝났다. 저녁까지 굶으며 녹화했는데 어찌나 재밌는지 몰랐다. 녹화 내내 즐거웠고 기운이 펄펄 났다.
'하루를 살아도 재미있게’
이 말은 오랫동안 추구해온 내 삶의 모토이다. 자식들을 다 키웠으니 이젠 내 시간이니 이제부터는 하고 싶은 일을 적극적으로 하며 즐기며 살면 된다. 그래서 노는 것도 연습이 필요하다. 교사 시절부터 퇴근 후 인근 대학교의 평생교육 프로그램인 왈츠를 수강했고, 주말에는 상경하여 압구정동에서 놀았다. 그리하여 MBN에서 고수로 출연했던 당시 내 콘셉트는 압구정 날라리였다. 금요일에는 2번 출구로 나가서 클래식 음악감상실 무지크 바움에 가서 오페라 감상을 했다. 토요일 일요일에는 압구정역 4번 출구에 있는 탱고 동호회 '땅게리아'에 가서 아르헨티나 탱고를 배웠다. 운동 차원에서 왈츠와 탱고를 춘 것이다. 음악에 맞춰서 한 시간 춤을 추다 보면 땀이 날 정도로 운동이 되고 분위기 있는 음악을 들으며 춤을 추니 마음 또한 힐링됐다. 다른 시니어에게도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싶다.
시니어 미디어 일인자를 꿈꾼다
퇴직 후 제일 불행한 사람은 집에 우두커니 있는 사람이다. 일본의 통계에 의하면 첫 번째 행복한 사람은 새로운 공부를 시작한 사람이고, 두 번째 행복한 사람이 취미활동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다.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이 세 번째로 행복하다고 했다. 전반생인 퇴직 전의 삶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고,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며 살 수 있는 기간이 후반생인 퇴직 후의 삶이다. 요즘 트렌드인 일인 미디어의 주역을 꿈꾸며 올해는 한국방송대학교 미디어영상학과 3학년에 편입해 공부하고 있다. 시니어도 하고 싶은 일을 차례차례 다 해보겠다는 목표를 세워놓고 차근차근 실천해 나가다 보면 삶의 질이 높아진다. 모르는 것을 아는 기쁨이 크니 그 과정을 그냥 즐기면 된다. 공부하고 글쓰기를 하며 책을 읽는 것이 지금 나의 일상이다.
시니어 생활 이렇게 하자
즐기자 삶은 즐기는 것이다. 부부가 같이 왈츠와 탱고를 추자. 서로 교감하며 춤추는 동안 기분은 좋아지고 충분한 운동이 된다. 더불어 심드렁하던 부부간의 애정도 높아진다.
공부하자 우리나라는 교육인프라가 너무 잘돼있다. 지자체의 프로그램도 우수한 콘텐츠가 많다. 한국방송대 강의 또한 훌륭하니 방송대에 편입해서 질좋은 강의를 들어보자.
하고 싶은 일을 이루자 글쓰기, 독서, 사진작가 등 그동안 하고 싶어도 전반생에서는 여건상 못했던 일들을 차근차근 시작해보자. 목표를 설정하는 것도 좋겠지만 그냥 그 과정을 즐긴다는 마음가짐이면 된다.
문화를 즐기자 오페라 감상, 음악회, 그림 전시회 등 인간만이 향유할 수 있는 문화생활을 골고루 누려보자. 진동하는 예술의 향기를 외면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다. 나를 몇단계 업그레이드시켜주는 것이 예술의 향기이다.
여행여건이 되면 지구촌 곳곳을 누비며 다른 문화권 사람들의 삶과 색다른 풍광, 이색적인 문화를 체험해보자.
감사하자나는 내 마음의 주인이다. 더 갖고 싶은 욕망은 나를 불행하게 하는 지름길이다. 마음에서 욕심을 내려놓고 비우고 덜어내며 하루하루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하며 살자.
김형석 교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은 학습하고 성장하는 동안은 늙지 않는다"라고.
후반생의 삶은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하며 될 수 있으면 나누며 살자. '오늘은 어제 죽어간 이가 그렇게도 살고 싶은 내일이다' 하루하루 선물이라고 생각하며 흥미, 재미, 의미를 추구하며 살도록 하자.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엔 불가능한 꿈을 지니자” - 체 게바라
집을 아름답게 하는 건 그 안에 사는 사람이듯, 한 나라를 아름답게 하는 것 또한 사람이다. 아름다운 사람에게서 나는 향기, 아름다운 사람이 만든 역사. 살사, 시가,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캐리비언 바다…. 쿠바를 수식하는 단어는 무수히 많지만 누가 뭐라 해도 쿠바는 체 게바라와 헤밍웨이의 나라다. 아바나, 산타클라라, 바라데로, 트리니다드에 이르기까지, 쿠바 전역을 덮고 있는 순수한 열정과 문학적 향기를 찾아 떠나보자.
낡은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빈티지 도시, 아바나!
전 세계 어디를 가도 비슷한 모습이 되어가는 지구라는 행성에서 마치 타임머신을 탄 듯 1950년대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곳이 있으니 바로 쿠바, 그중에서도 아바나다. 페인트칠이 벗겨진 낡은 건물들과 빨래가 나풀대는 발코니, 혁명가들의 얼굴이 그려진 벽화들과 영화 속 한 장면처럼 거리를 누비는 클래식 카가 어우러진 아바나는 세상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는 빈티지한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사진작가들로부터 열렬한 러브콜을 받고 있는 쿠바는 아이러니하게도 미국과의 화해 무드가 일면서 고유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리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가봐야겠다는 숙제를 안겨준 나라이기도 하다. 주름진 세월이 그대로 내려앉은 올드 아바나 거리와 카리브 해안을 따라 가슴이 탁 트일 듯 시원하게 뻗어 있는 말레콘 방파제는 오늘도 변함없이 자유와 풍요를 꿈꾸는 쿠바인의 안식처가 되어주고 있다.
쿠바의 상징, 체 게바라
본명 에르네스토 라파엘 게바라 데 라 세르나(Ernesto Rafael Guevara de la Serna). 훗날 체 게바라(Che Guevara)로 불린 그가 고향 아르헨티나가 아닌 쿠바에서 더 유명해진 것은 11년 동안 쿠바혁명을 위해 싸웠기 때문이다. 혁명이 성공한 후 카스트로에게 명예시민권을 받은 그는 한동안 각종 요직을 수행하며 세계를 향해 제국주의의 문제점과 자유에 대한 연설을 했다. 그러나 그러한 영화로움도 잠시, 편안함에 결코 안주할 수 없었던 진정한 혁명가는 모든 영예를 뒤로 하고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을 찾아 고난의 길을 택했고, 결국 이국땅에서 처참한 죽음을 맞았다. 39년의 짧고 굵었던 그의 생애는 많은 사람에게 거대한 영향을 끼쳤다.
체 게바라 묘지가 있는 산타클라라
혁명의 도시 산타클라라로 가는 길. 끝없이 넓은 사탕수수밭과 길게 뻗은 길 위로 마차와 쿠바를 상징하는 올드 카, 현대 차, 그리고 모터사이클이 뒤섞여 달린다. 젊은 시절, 체 게바라의 삶을 바꿔버린 여행을 그린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가 오버랩된다. 그는 이 길을 달리며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꿈을 꾸었을까. “고대 전사와 같은 품위 있는 죽음”을 맞기를 원했던 그는 소망대로 산타클라라에 있는 묘지에 묻혔다. 묘지 앞의 흰 꽃다발은 오늘도 생생하게 그를 기리고 있다. 진정한 혁명은 자신을 위한 혁명이며, 어떠한 물질적 보상도 기대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던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쿠바를 가장 쿠바답게 해주는 시가와 커피
전 세계가 지탄해마지 않는 담배도 쿠바에서는 매력 덩어리다. 체 게바라의 상징과도 같은 시가. 화보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시가를 입에 문 쿠바인을 어디서나 만날 수 있다. 쿠바 산 에스프레소의 맛도 빼놓을 수 없다. 에스프레소 마니아라면 1달러(현지 화폐로 1CUC)로 네다섯 잔의 에스프레소를 마실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쿠바엔 관광객들이 가는 카페와 쿠바인들이 가는 카페가 따로 있다. 관광객들이 가는 카페는 깔끔하지만 아무런 풍미도 느껴지지 않는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건 역시 허름하지만 진한 삶의 향기가 묻어나는 현지인 카페다. 의자도, 커피머신도 없는 작은 공간에서 주인장이 막걸리 주전자처럼 생긴 용기에 커피가루를 넣고 끓인 뒤 평범한 유리잔에 주르륵 따라주면 끝이다. 묘지에서 돌아와 체 게바라의 진한 삶을 되새기며 쿠바인들과 섞여 마신 에스프레소의 맛을 잊을 수 없다. 무례한 카메라 세례에도 친절로 응대해준 묵묵한 쿠바인들에게 1쿡으로 다섯 잔의 커피를 선물했다.
문학도 미술도 혁명
쿠바에서 만날 수 있는 또 한 명의 인물은 바로 헤밍웨이다. 아르헨티나 태생이지만 쿠바에서 더 많은 계기를 맞았던 체 게바라처럼, 미국 태생인 헤밍웨이도 쿠바에서 삶의 전환을 맞는다. 그는 군사독재자 프랑코를 반대하며, 스페인 내전에 직접 참가한 행동파이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도 적극 참여했고, 당시의 경험을 바탕으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무기여 잘 있거라’ 등 주옥같은 작품을 썼다. 그 때문일까. 헤밍웨이도 쿠바를 좋아했다. 문학도, 미술도 혁명과 다름 아니니까. 태어난 나라에 국한되기엔 너무나 자유롭고 광대한 영혼들이었다. 자신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비굴하게 뒤로 숨지 않고, 초라한 삶에 연연해하지 않고, 열정을 다해 생명을 불태우는 것. 이것이 바로 혁명가들의 공통점이니까 말이다.
아바나에서 한 시간 거리, 헤밍웨이가 만난 코히마르
헤밍웨이는 키 웨스트에서 배를 타고 가다가 우연히 들른 쿠바의 한 바닷가 마을에 매혹된다. 그 후 무려 20년을 그곳에서 살며 낚시를 하고, 어부들과 친구가 되고, 친구를 모델 삼아 ‘노인과 바다’를 썼다. 이 작품으로 노벨상을 받은 그는 어부들에게 상을 바쳤다. 어부들은 그를 기리며 바다가 잘 보이는 곳에 그의 동상을 세워줬다. 헤밍웨이가 즐겨 찾았다는 라 테라사(La Terraza)에 들러 모히토 한 잔을 마셔본다. 1928년 헤밍웨이가 머물며 ‘노인과 바다’를 썼다고 전해지는 ‘핀카 라 비히아(Finca La Vigía)’는 현재 헤밍웨이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아바나 시내도 헤밍웨이의 자취로 가득하다. 그가 머물며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나’를 썼다는 암보스 문도스 호텔(Hotel Ambos Mundos) 551호실과 라 플로리디타(La Floridita) 칵테일 바, 라 보데기타 델 메디오(La Bodeguita del Medio)까지 보고 나면, 당신의 삶에도 혁명 같은 바람이 불어올지 모르겠다.
파스텔 톤의 동화마을에서 배우는 춤 ‘살사’
17세기 스페인 통치 시절의 풍경이 가장 잘 남아 있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아름다운 도시 트리니다드. 아르마스 광장을 중심으로 교회와 건물, 돌로 포장된 길이 고풍스런 멋을 더하는 트리니다드는 쿠바에서도 살사의 본고장으로 불린다. 전기를 아껴야 하기에 해가 지면 쿠바의 도시들은 온통 깜깜해진다. 특별히 할 일도 없어 잠이나 청하려던 차에 갑자기 온 동네가 떠나갈듯 살사음악이 울려퍼진다. 시간을 보니 밤 11시 무렵. 도저히 그냥 잠들기에는 아까운 장면이라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역사박물관과 산티시마 교회가 있는 중앙 광장엔 하바나 클럽이 있다. 밤마다 현지인과 여행자가 어우러져 한바탕 살사 파티가 벌어지는 곳이다. 프로 뺨치는 쿠바인도, 태어나 처음 리듬에 몸을 맡긴 여행자도 흥겨움에 가득 취하는 밤이다. 스페인어로 ‘소스’라는 뜻의 살사는 맛깔스런 음식에서 빠질 수 없는 소스처럼 격렬하고 화끈하며 율동감이 넘치는 춤이다. 동네 여기저기 붙어 있는 살사 레슨 안내지는 지금 아니면 언제 살사를 배워보겠냐고 말을 걸어오는 듯했다. 망설이던 끝에 결국 살사를 배워보기로 했다. 레슨 장소인 카사 데 라 무시카(Casa de la Musica)로 가서 근사한 춤 선생을 기다렸다. 그러나 탄탄한 구릿빛 몸매의 섹시남을 기다리던 내 앞에 나타난 사람은…? 그렇지! 이상과 현실은 다르기 마련이니까.
travel info.
항공한국에서 쿠바까지의 직항은 없으므로, 토론토나 멕시코시티를 경유해야 한다.
여행코스 수도인 아바나에서 시작해서→바라데로→산타클라라→트리니다드→산티아고데쿠바가 일반적이다.
언어스페인어를 사용한다.
여행적기11월부터 2월까지로 낮에도 무덥지 않으며 밤엔 선선하기까지 해서 관광객이 가장 많이 몰리는 때이다.
치안 사회주의국가라 위험하냐고 묻는 사람이 많은데 이런 나라일수록 관광수익이 중요하므로 관광객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는 중대범죄로 취급되어 오히려 매우 안전하다.
화폐 CUC과 CUP이라는 이중화폐를 사용하고 있어 좀 불편한 점이 있다. 1CUC(쎄우쎄)=1USD, 1CUC(쎄우쎄)=24CUP(쎄우뻬)이며, 외국인이 주로 가는 곳에서는 CUC을, 현지인이 가는 곳은 CUP을 사용한다. 외국인이 CUC으로 계산해도 거스름돈은 CUP(혹은 모네다라고도 함)으로 주는 경우가 많다.
인터넷 무선인터넷망이 깔려있는 공원/호텔/건물등에서 접속가능하며, 인터넷카드비용은 1시간에 1달러정도이다.
숙소호텔도 좋지만 민박집 까사에 머물기를 권한다. 인심좋은 아침상을 받으며 때묻지 않은 현지인들을 만나는 일은 쿠바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이다.
*여행전 보고가면 좋은 영화모터사이클 다이어리, 치코와 리타,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
*여행전 보고가면 좋은 책 체게바라 평전, 쿠바의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해마다 추석 연휴 즈음엔 가을의 정취가 절정으로 무르익는다. 무더위에 지치는 여름날보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이때 즐기는 휴식은 더욱 알짜라 하겠다. 고향에도 내려가고 가족여행을 떠나는 등 저마다 연휴 계획이 있겠지만, 특별한 일정이 없는 이들이라면 호텔 패키지를 활용해보는 것도 좋겠다.
파크하얏트서울 더라운지 ‘라이츠아웃’ 프로모션
파크하얏트서울 더라운지에서 반짝이는 가을 야경을 감상하며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는 ‘라이츠아웃(Lights Out)’ 프로모션을 11월 30일까지 진행한다. 매일 오후 9시 30분부터 오후 11시 30분까지 콜드컷, 치즈플래터와 와인, 맥주 등의 무제한 주류를 즐길 수 있다(가격 1인 6만9000원, 부가세 포함, 봉사료 없음). 호텔 24층에 위치한 더라운지는 전면 유리창을 통해 낮에는 풍부한 자연 채광을, 밤에는 아름다운 도심의 야경을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이다. 가을밤을 더욱 낭만적으로 만들어줄 무제한 주류로 스파클링, 레드, 화이트 등 종류별 와인과 플래티넘 화이트에일 생맥주가 제공된다. 영동대로와 코엑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연인석은 좌석이 한정돼 있으므로, 둘만의 시간을 계획하고 있다면 예약을 서둘러야 한다. 추석 시즌에는 아르헨티나 말벡 와인에 고급 육류 요리를 맛볼 수 있는 ‘미트말벡’ 프로모션(10월 7일까지)과 쌀쌀한 가을 날씨에 잘 어울리는 ‘스키야키와 사케’ 프로모션(10월 31일까지)도 진행하니 참고하자.
여의도 메리어트 호텔 ‘시네마 홀리데이 패키지’
여의도 메리어트 호텔은 추석 연휴가 시작되는 9월 22일부터 10월 8일까지 넉넉히 즐길 수 있는 ‘시네마 홀리데이 패키지’를 내놓았다. 스위트형의 객실 1박 이용권을 비롯해 파크카페 내에서 추석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전, 송편, 식혜 등 명절 음식이 포함된 조식 2인 이용권을 제공한다. 더불어 젠가, 미니 사커 게임, 흔들흔들 해적 등 보드게임 이용(택 1) 혜택으로 아이들과 함께라도 즐겁다. 8만 원 추가 시에는 수 스파 페이셜&보디 60분 트리트먼트 혜택으로 명절로 지친 피로를 풀어줄 뿐만 아니라, ‘CGV 영화 티켓 2매’가 증정돼 바빠서 누리지 못했던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다. 2박 투숙 시 10% 할인, 3박 투숙 시 15% 할인 혜택이 제공되며, 스튜디오와 1베드룸 아파트먼트 객실이 문으로 연결돼 가족 또는 친구와 함께 투숙하는 고객들이 보다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커넥팅 룸 선택도 가능하다. 이 밖에 실내 수영장, 피트니스센터, 사우나, 키즈풀&키즈룸 등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가격 스튜디오 23만6000원, 1베드룸 아파트먼트 26만6000원, 1베드룸 스위트 28만8000원, 커넥팅 룸 50만8000원, 10% 봉사료 및 10% 세금 별도).
해비치호텔앤드리조트 제주 ‘스태리 나이트 & 해피투게더’
해비치호텔앤드리조트 제주는 추석을 맞아 9월 21일부터 30일까지 ‘스태리 나이트(Starry Night)’와 ‘해피투게더(Happy Together)’ 패키지를 선보인다. 스태리 나이트 패키지에는 제주 경관을 품은 호텔 슈페리어 객실 1박과 조식 뷔페 2인, 바다를 바라보며 늦은 저녁까지 수영을 즐길 수 있는 실내외 온수풀 이용권이 포함된다. 명절의 피로를 풀어줄 사우나 이용권 2매와 카페 디저트(커피 2잔 및 쿠키 세트)도 제공한다. 2박을 이용하는 고객에게는 가을밤의 낭만을 만끽할 수 있는 별비치 가든과 칵테일 2잔 이용권을, 3박 투숙객에게는 보다 넓고 편안하게 머물도록 스위트 객실 업그레이드 혜택을 준다(가격 23만9000원부터, 세금 및 봉사료 별도). 해피투게더 패키지는 3인 가족이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는 리조트프리미어 트윈 객실 1박과 조식 뷔페 3인, 실내외 수영장 이용권으로 구성된다. 보드게임 ‘모드락’ 1시간 무료 이용과 사우나 3인 이용 혜택도 누릴 수 있다. 2박을 할 경우 해비치만의 노하우로 숙성시킨 흑돼지와 식사 메뉴로 구성된 ‘하노루 디너 세트’를 1회 제공하며, 3박에는 스위트 객실로 업그레이드 가능하다(가격 27만9000원부터, 세금 별도).
지구 끝이라니 생각만 해도 멀고 먼 땅으로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라는 말도 있듯이 막상 가보면 그리 멀기만 한 곳도 아니다. 남극 바로위 남아메리카의 칠레와 아르헨티나에 걸친 일부지역을 칭하는 파타고니아라는 명칭은 등산복 브랜드로 더 많이 알려져 있지만, 마젤란과 그의 원정대가 거인족이라고 묘사했던 원주민들을 가리키는 파타곤(patagón)이라는 말에서 비롯됐다. 남반구에 위치하여 우리와 계절이 정반대인 이곳은 연중 기온이 낮아 11월에서 3월이 여행적기이며, 이때 간다 하더라도 사람을 지구 밖으로 날려버릴 기세로 불어대는 토레스 델파이네의 바람을 피할 방법은 없다. 자연은 냉혹하여 불평을 허락하지 않는다던가? 절대적 힘 앞에서 작은 불평 따위는 내동댕이쳐버리게 되는 곳이 파타고니아가 주는 힐링의 힘이다. 그러니 이곳에서라면 바람을 피하기보다는 바람을 기꺼이 마주하는 쪽으로 마음을 먹는 쪽이 낫다. 사람은 40m/s를 넘으면 날아갈 수도 있다는데, 이곳은 최대 풍속이 60m/s를 넘는 일도 많아서 영국 탐험가 에릭 시프턴(Eric Shipton)은 '폭풍우의 대지'라 불렀다는 곳. 그렇다면 우린 왜 이렇게 혹독한 곳에 가려하는 것일까?
나만의 이야기를 쓰기 위한 결행
1989년 1월, 48세로 요절한 브루스 채트윈은 의 기자로 일하던 어느 날, 93세의 디자이너 아일린 그레이를 인터뷰하러 갔다가 그녀가 그린 파타고니아 지도를 보고 깊은 감동을 받는다. 아일란은 자신은 이미 늙어 갈 수 없다며 브루스 채트윈이 대신 그곳에 가줄 것을 부탁했다. 얼마 후 브루스는 다니던 신문사에 ‘파타고니아로 떠남’이라는 짤막한 한 을 남긴 채 지구 반대편 파타고니아로 사라져 버렸다. 그가 쓴 책 의 서문에는 이렇게 쓰였다.
“제가 늘 저지르겠다고 협박했던 일을 드디어 결행했습니다. 오늘밤엔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떠납니다. 거기에 살면서 저 자신만을 위한 이야기를 쓰려고 합니다.”
문명의 이기는 거리감각을 바꿔놓았다
우린 이제 단 두 시간에 비행기로 목적지에 갈수도 있고, 수 십 시간을 버스를 달려 육로를 통해 목적지에 닿을 수도 있다. 효율성과 비효율성사이에서. 속도와 비속도 사이에서. 빠름과 느림 사이에서. 우린 어느 쪽이든 선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비행기로 단 두시간만에 갈 수 있는 길을 버스로 온종일 달려서 간다. 느린 것에 익숙하지 않은 탓에 30시간의 버스여행이 쉽지 않다. 그래도 칠레와 아르헨티나를 가로지르는 파타고니아 땅만은 꼭 육로로 달려보고 싶었다.
그래야 지도로서가 아니라 온몸으로 이 땅덩어리가 얼마나 거대한지 알 수 있을 테니까. 30시간을 달려도 피곤함보다는 오랜 상상이 실현되는 기쁨에 잠을 이룰 수 없어 창밖의 변화를 지켜본다. 그 길이만큼이나 버라이어티한 땅덩어리. 사막에서 툰드라로, 와이너리가 펼쳐진 녹색의 땅으로, 그리고 바다와 산맥, 파타고니아 빙하에 이르기까지.
이름 모를 도시에 사람들이 내리고 타고, 내리고 또 타고 손님을 끝없이 바꾸며 TUR 버스는 달려간다. 일직선으로 뻗은 도로. 직진으로 난 길. 고속도로 휴게소엔 먹을게 별로 없고, 떡복이와 오뎅, 우동 생각이 간절하지만 그저 커피한잔과 웨하스 과자로 허기를 달랜다. 간간이 노점상이 차에 오르기도 하는데 먹을게 없기는 마찬가지다. 파타고니아만 하더라도 대한민국의 다섯배 크기. 우리나라 북쪽끝에서 남쪽 끝까지 달려봐야 고작 5시간인 곳에 살던 나는 그저 한도시에서 옆 도시로 가는데 30시간이 걸리는 이 나라에 와서야 우리나라 땅덩어리가 얼마나 작은지를 실감한다.
파타고니아의 비경을 잇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루트 40!
이곳에 오면 마음을 방해하거나 어지럽게 하는 것이 하나도 없는 땅. 오로지 자신의 마음만을 명징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거울같은 자연을 마주할 수 있다. 왜곡되지 않은 정직한 선.
가다가 얽히거나 꼬임이 없이 그저 올곧게 이어지는 선을 보며 굽혀진 마음을 조금은 펼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이 없어 무엇이 더 아름답다는 것이 왠지 모를 슬픔을 자아내지만 땅보다 더 큰 면적으로 다가오는 광활한 하늘은 늘 빌딩에 가려져 그 모양을 알 수 없었던 구름의 존재를 각인시켜준다.
토레스델파이네국립공원과 페리토모레노 빙하!
파타고니아를 대표하는 곳을 꼽는다면 칠레의 토레스델파이네 국립공원과 아르헨티나의 페리토모레노를 비롯한 약 50개의 빙하국립공원이다. 3개의 화강암 봉우리를 비롯해 해발 2천5백미터의 설봉들이 하늘을 찌를 듯 서있는 토레스델파이네는 남미 최고의 풍광으로 눈이 닿는 곳마다 광고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봉우리를 지나 길고긴 잿빛 모래를 한참을 걸어가서야 만난 그레이 빙하(Grey glacier)는 이름처럼 짙은 회색빛을 띠고 있다. 거대한 빙하를 마주보며 다가가는 길, 어디선가 우루루쾅쾅 땅이 갈라지는 듯한 들리더니 바로 눈앞에서 거대한 빙하 한조각이 떨어져 내린다. 지구의 한끝이 닳아 없어지는 듯 가슴속이 철렁해져 온다.
아르헨티나 빙하 국립공원의 북쪽 입구라 할 수 있는 엘찰텐에서는 모든 등반가들의 꿈이라 일컬어지는 피츠로이산(3,405미터)을 등반할 수도 있다. 모레노빙하의 관문이라할 수 있는 엘칼라파테 마을은 가장 번화한 곳으로 오랜만에 쇼핑도 하고, 레스토랑에서 아르헨티나산 말벡 와인한잔에 스테이크의 호사를 누리며 쌓인 피로를 씻어보는 것도 좋다. 30킬로미터 길이에 5킬로미터의 폭, 60미터 높이의 얼음덩어리 펠리토모레노 빙하는 남극과 북극을 제외하고 인간이 접근할 수 있는 빙하 중 가장 아름다운 빙하로 꼽힌다. 아이젠을 착용하고 수천년된 빙하위에서 빙하조각을 넣은 위스키한잔을 마셔보자! 그 감동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빙하를 보는 또 다른 방법중 하나는 배를 타고 돌아보는 것으로 웁살라(Upsala)빙하크루즈는 세계최대의 빙하와 수많은 빙산을 크루즈로 돌아볼 수 있다. 빙하라고 하면 무척 추울 것 같지만 맑은 날씨엔 후드티 하나만으로 충분할만큼 그곳 여름의 날씨는 그리 춥진 않다.
파타고니아엔 크고 작은 빙하가 50개 이상이 있으며, 남극과 그랜란드 다음으로 양이 많다. 안데스 산맥에 내리는 많은 비가 빙하를 만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온난빙하에 속하는 이 지역의 빙하는 빠르게 순환하는 것이 특징인데, 여름과 겨울의 이동 속도는 다르지만, 연간 평균 100m에서 200m 사이의 속도로 움직여서 육안으로도 빙하의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빙하크루즈나 트레킹 중에 천둥 같은 소리와 함께 찾아오는 빙하붕괴현상을 목도할 가능성이 높은 곳이기도 있다.
지구 최남단마을, 우수아이아(Ushuaia)
파타고니아 여행은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국경을 몇 번씩 오가는 여행이다. 아르헨티나의 엘찰텐, 엘칼라파테, 모레노빙하를 만나고 칠레의 토레스델파이네국립공원을 왔다가 다시 아르헨티나의 땅끝 마을을 향해 달려간다. 12시간 버스를 타고 국경을 넘고, 마젤란 해협을 웅장한 크기의 배, 파타고니아호를 타고 건넜다. 심한 바람엔 장사 없는 듯 그 큰 배도 휘청대고 약간의 배 멀미도 났다. 말 그대로 산 넘고 바다건너서 도착한 우수아이아. 우수에 찬 듯 보이던 그 곳. 사람들이 왜 이곳을 지구의 끝. 핀 델 문도(FIN DEL MUNDO)라 했는지 몸으로 와 닿는다. 남극을 제외하고 인간이 모여 사는 최남단 마을인 우수아이아는 거대한 아메리카 대륙의 가장 아래쪽에 설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항구마을이다. 먼옛날 대항해시대엔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건너가는 많은 배들이 대자연의 재앙 앞에 침몰했다고 전해지는 곳. 마젤란 해협을 바라보며 경사진 언덕에 자리 잡은 이 마을은 1년 내내 세상의 끝을 느끼고 싶어 하는 여행자들로 붐빈다. 남극으로부터 불과 1000km 떨어진 곳. 핀델문도(땅끝)박물관에는 찰스다윈이 비글 해협을 항해할 때의 항해일지와 작품들도 전시되어 있으며, 이곳까지 온 수고로움을 치하해주듯 여권에 스탬프도 찍어주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특별한 엽서를 보낼 수 있는 파란 우체통도 마련되어 있다. 장거리버스와 배 멀미로 지쳐있던 나는 한글로 주소를 써서 우체통에 넣어버리고 말았는데, 오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그 엽서를 친구가 받았단다. 대한민국 만세라는 문자가 왔다. 정말 대한민국 만세다.
Travel tip
◆가는 법: 파타고니아를 여행하는 방법은 항공으로 편하게 가는 방법(란항공(http://www.lan.com)과 버스를 타고 육로나 배로 이동하는 방법이 있다. 시간과 체력을 절약하고자 한다면 항공이 좋겠지만 남미의 어마어마한 대지의 맛을 제대로 즐기고 싶다면 2층침대 버스가 의외로 편리하므로 육로이동도 고려해볼만 하다.
◆꼭 방문해야할 주요도시 및 장소: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엘칼라파데. 엘찰텐, 피츠로이, 페리토모레노빙하, 마젤란해협. 우수아이아, 핀델문도박물관. 칠레 산티아고, 토레스델파이네국립공원.
◆여행적기 및 기온: 파타고니아는 우리와 정반대로 우리가 겨울일때가 그곳의 여름이다. 2월에 방문하면 그곳의 여름에 해당하지만 빙하라고 해서 생각한만큼 춥진 않고 18도 정도의 기온이지만 바람이 부는 토레스델파이네는 파카가 필요할만큼 춥기 때문에 사계절 옷이 다 필요하다.
자연을 마주하는 일은 거울을 보는 일과 같다. 자연이 거대하고 단순할수록 내 안의 껍데기는 사라지고 알맹이만 투명하게 드러난다. 그곳에서 느끼는 나는 아주 작고 또한 아주 크며 힘없고 미약한 존재다. 동시에 우주를 포함한 자연이다. 그것을 느끼는 순간의 강렬함을 잊을 수 없다. 여행이란 교실에서 배운 지식들을 현장에서 직접 느끼고 체험하는 시간이 아닐까. 많은 이의 버킷리스트인 우유니(Uyuni). 잘 알려진 소금사막과 바람이 만들어낸 놀라운 기암괴석,
붉은 빛깔의 호수, 안데스의 희귀동물 라마까지 신비함이 가득한 곳이다. 새롭고 아름다운 그 세계로 떠나보자.
해발 3660m, 세계에서 가장 높은 도시 ‘라파스’
볼리비아는 남미의 가장 가난한 나라이지만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불가사의한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모험심 많은 전 세계의 사람들이 살아 있는 동안 꼭 한 번 가보고 싶어 하는 꿈의 여행지이기도 하다. 우유니 사막에 가려면 먼저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스로 들어가야 한다. 볼리비아의 헌법상 수도는 수크레이지만 실질적인 행정수도는 라파스로 ‘평화’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멀리서 해발 3660m에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모습을 보면 오색 성냥갑으로 만든 산처럼 보인다. 대표적인 사가르나가 거리 골목에는 안데스 특유의 패브릭과 장신구들을 파는 가게가 즐비하다. 재래시장은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긴다. 안데스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모자를 사서 쓰고 나니 금방이라도 빗자루를 타고 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부풀린 치마에 중절모를 쓰고 등짐을 진 컬러풀한 의상의 인디오 여성들 모습에서는 이국적인 향기가 느껴진다. 높은 지대라서 모든 길이 언덕처럼 되어 있어 오르내리기가 쉽지 않지만 거리마다 가득한 상점들과 사람들 보는 재미에 힘든 줄도 모른다.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신비한 ‘마녀시장’
사가르나가에서도 가장 유명한 골목은 ‘마녀시장(Witch Market)’이다. 이곳엔 말린 라마의 태아와 향료들이 기묘한 냄새를 풍기며 진열되어 있다. 온갖 색상의 돌과 장식품을 작은 병에 담아 행운의 상징으로 팔기도 한다. 남미 대부분의 나라가 그러하듯 이곳 또한 스페인이 전파한 천주교가 안데스의 전통적 제의와 만나 독특한 형태로 발전되었다. 하지만 토속신앙도 여전히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천주교도인 인디오들은 하나님께 중요한 소원을 빌 때 살아 있는 라마를 잡아 바치는데, 이때 말린 라마 태아를 올리기도 한다. 온갖 허브와 목각, 희귀한 진열품을 보고 있자니 금방이라도 빗자루를 탄 마녀가 나타나 마법을 부릴 것 같다. 이곳 골목은 뭔가 음험하면서도 삶의 비밀을 들킬 것 같은 으스스함이 함께 느껴져 색다른 감흥이 일어난다. 1549년에 지어진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 산 프란시스코 성당과 레스토랑, 전통 공예품을 파는 상점들, 여행사들이 즐비한 좁은 골목들은 여행자들에게 다양한 볼거리와 먹거리를 제공해준다. 라파스에 머무는 동안 시간이 허락된다면 달의 계곡(Valle de la luna) 투어를 떠나보자. 달 모양과 흡사하다고 해서 달의 계곡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곳은 마치 화성에 온 듯한 느낌을 갖게 해줄 것이다.
푸른 하늘과 맞닿은 소금사막 ‘우유니’
볼리비아 남서쪽, 해발 약 3600m에 자리 잡은 우유니 사막(Salar de Uyuni)은 남미를 대표하는 매혹적인 여행지다. 원래 바다의 땅이었던 우유니는 대륙붕의 충돌로 바다 아래의 땅이 하늘 가까이 솟구쳐 오르면서 만들어졌다. 고지대의 공기가 건조해 시간이 흐르면서 바닷물이 증발되었고 이로 인해 생겨난 소금평원 우유니는 언제 가도 아름답지만 특히 12~2월의 우기 때 가면 비가 고인 물에 푸른 하늘이 반사되어 마치 천국에 온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나기도 한다. 서울과 경기도를 합친 것보다 넓은 면적의 거대한 소금사막을 사륜구동차를 타고 가로질러가다가 다른 행성에 착륙이라도 한 듯 소금사막 한가운데 발을 내딛었다. 선글라스를 끼지 않으면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사막의 풍경 앞에서 모두들 카메라 셔터를 눌러가며 인생샷 한 장이라도 건져보기 위해 바쁘다. 소금사막의 광활한 풍경 앞에 서면 삶의 가장 소중한 것들이 떠오른다.
2박 3일의 우유니 사막 투어가 가장 인기
우유니 사막 투어는 초입의 작은 광산마을 포토시에서 시작한다. 이곳에서 사람을 모아 1일 투어, 2박 3일 투어 등 다양한 투어를 한다. 시내에는 많은 여행사가 있다. 경쟁이 심한 만큼 몇 곳을 비교해서 선택하는 것이 좋다. 길이 험해 사륜구동차를 이용해야 하며 투어 비용은 한 대를 기준으로 책정되므로 함께 투어 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비용은 낮아진다. 우유니 사막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느끼려면 2박 3일 투어가 좋다. ‘우유니’ 하면 대부분 하얀 소금사막만 생각하는데, 기암괴석으로 가득한 사막 지대와 플랑크톤 작용으로 인해 붉은 빛을 띠는 신비로운 호수, 눈 덮인 산, 수많은 플라밍고를 볼 수 있는 호수까지 희귀한 풍경이 가득하다. 또 소금호텔을 둘러본 후 눈부신 사막 한가운데 앉아서 맛보는 라마 스테이크의 맛은 잊을 수 없다. 조금 전 귀엽다고 쓰다듬어주었던 라마가 입속으로 들어가는 상황은 조금 께름칙하지만 그토록 부드러운 고기는 태어나 처음 맛보는 진미였다.
피로를 말끔히 씻어주는 온천욕
덜컹거리는 지프를 타고 뜨거운 태양 아래를 달리는 동안 바라보는 창밖 풍경은 그야말로 드라마틱하다. 바람이 깎은 예술조각들이 가득한 협곡과 붉은 빛깔의 신비로운 호수를 지나 무리지어 날아오르는 플라밍고를 만날 때까지….
이토록 짧은 기간에 신비로운 풍광을 흠뻑 경험할 수 있는 곳도 드물다. 변화무쌍하고 이국적인 향기를 열린 마음으로 느낄 수 있도록 해준 건 함께 차를 타고 2박 3일 동고동락한, 칠레와 독일에서 온 친구들이다. 아름다운 풍경에 감탄할 때는 국경이나 언어 장벽이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칠레에서 온 친구는 어디선가 커다란 타조 알을 주워와 우리를 또 한 번 놀라게 했다. 여행 마지막 날, 칠레 국경을 넘기 전에 만난 노천 온천은 축복이었다. 전기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고 물도 잘 나오지 않는 곳에서 씻지도 못한 채 다니다가 대자연 속에 거짓말처럼 준비되어 있던 따스한 온천을 만나자 모두들 앞뒤 재지 않고 옷을 벗어던지며 뛰어들었다.
볼리비아의 자연은 거칠고 투박하지만 곳곳에 반짝이는 풍경이 많다. 팀 케일은 ‘나를 유혹한 낭만적인 곳들’이라는 책에서 “젊은 시절에는 누구나 먼 곳까지 가는 색다른 모험을 꿈꾸었다. 이런 꿈은 가슴 설레게 하는 꿈 아니었는가?” 하고 묻는다. 그의 말처럼 그 시절처럼 상상의 나래를 활짝 펴고 있다면 지금 당장 떠나야 한다. 안 그러면 영원히 떠나지 못할 테니까. 그리고 이루지 못한 꿈을 아쉬워하며 자신에게 큰 죄를 저질렀다며 안타까워할지도 모르니까.
travel tip
항공>> 한국에서 볼리비아 라파스로 가는 항공편은 미국과 페루를 경유한다. 라파스에서 우유니는 국내선 항공이나 버스를 이용한다. 우유니 마을에 있는 여행사를 통해 다양한 사막투어에 참여할 수 있다. 당일치기로 소금사막을 즐기는 1일투어와 우유니를 출발해 칠레 북쪽의 사막도시 산페드로데 아타카마로 가는 2박3일의 투어가 인기가 좋다.
비자>>
볼리비아는 여행시 비자가 필요한 나라다. 여행비자의 경우 30일 단수비자가 발급된다. 한국에서 볼리비아 영사관에서 비자를 발급받아 출국할 수도 잇지만 비용이 비싼 편이다. 라파스 국제공항으로 입국시 한국에서 준비하는 것보다 저렴하고 간편하게 비자를 받을 수 있다. 남미의 다른 나라를 거쳐서 볼리비아로 들어간다면 페루 쿠스코영사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영사관, 브라질 상파울루 영사관, 칠레 산태아고 영사관 등에서 무료로 발급이 가능하다.
고산병>>
해발3600미터에 위치하고 있어 간혹 고산증을 호소하는 사람도 있지만 라파즈에서부터 오는동안 어느정도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우유니에서 고산증을 호소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고산병은 낮은 지대에서 해발 2000-3000미터 이상의 고지대로 이동했을 때 산소가 희박해지면서 생기는 신체반응으로 피로, 두통, 호흡곤란, 체온저하 등이 있다. 대처방법은 낮은 지대로 이동하는 가장 좋으며, 물을 충분히 마시고, 천천히 걷는 것도 도움이 된다.
어렸을 적 TV에서 본 사람이 맞나 싶다. 기억 속 그는 리듬을 타는 정도의 율동과 함께 수줍은 미소를 머금고 노래를 불렀다. 옆집 오빠면 딱 좋을 것 같았던 그가 오십이 넘어 대중 앞에 다시 나타났다. 중후한 매력을 내심 기대했지만 흥폭발은 기본이고 재치 넘치는 입담을 막기가 어려울 정도다. 1980년대 중반 ‘볼리비아發 염소 창법’으로 아이돌 인기를 구가했던 가수 임병수(林炳秀·57)를 만났다. 보다 더한 실제 상황 정글생활 달인 이야기도 있으니 기대하시라!
시대를 대표하던 아이콘, 다시 돌아오다
1980년대 중반 ‘아이스크림 사랑’, ‘사랑이란 말은 너무너무 흔해’ 등으로 소녀 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가수 임병수. 그는 요즘 말로 강제 소환됐다는 표현으로 꾸준히 회자되고 있다. 잊혔던 그의 노래가 톱스타의 입을 타고 방송 전파를 탄 것. 제2의 전성기로 갈 기회가 찾아왔다.
“참 그게 운명인 것 같아요. (SBS)에서 배우 김수현씨가 제 노래 ‘약속’을 불렀어요. 그리고 (tvN)에서는 덕선이(혜리 분)와 동룡이(이동휘 분)가 ‘아이스크림 사랑’을 불렀어요. 이게 뭐지? 제 노래와 이름이 다시 나오니까요. 그때쯤 제 새 노래가 나오면 괜찮겠다고 생각은 했죠.”
밝은 웃음으로 마주한 임병수였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임병수의 목소리는 여전히 신선하고 특별했다. 타고난 음색에 볼리비아 교포 출신이라는 이국적 색채를 덧입히니 궁금증을 넘어 관심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말 그대로 혜성처럼 나타난 신인이었다. 지금으로 따지면 임병수가 딱 아이돌 스타였다.
“확 뜰 거라는 생각은 전혀 안 했죠. 가수 될 거라는 생각도, 되고 싶지도 않았어요. 깜짝 놀랐어요. 내가 노래를 좋아하고 큰 무대에 한 번 서면 좋겠다. 그렇게 막연한 꿈으로 끝날 줄 알았는데 여기까지 왔어요. 무명가수들한테 항상 미안한 이야기지만 저는 얼떨결에 가수가 된 거예요.”
아버지, 막내아들을 가수로 만들다
임병수가 아메리카 대륙을 떠나 고국에서 가수가 된 데에는 아버지의 강력한 추진력이 뒤따랐다.
“우리 아버지의 행복이 제가 사람들 앞에서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는 거였어요. 사람들이 ‘막내, 노래 잘하네요’라고 하면 아주 좋아하시고요. 저도 음악을 좋아했어요. 고등학교 축제 때 공연했던 뮤지컬 에서 주인공을 맡기도 했었거든요. 아버지는 그냥 제가 TV에 나오고 사람들이 손뼉 쳐주는 것까지만 생각하시고 한국으로 저를 보내신 것 같아요.”
뉴욕에서 대학 생활을 하고 있던 임병수에게 아버지는 LA에 사는 지인이 조만간 한국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 사람과 함께 한국으로 가서 가수가 되라는 것이 아버지의 권유였다. 임병수는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미국 동부에서 서부로 날아갔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했던가. 우여곡절 끝에 한국으로 들어왔고 임병수는 한 시대를 제대로 풍미한 가수가 됐다. 대단한 의지라기보다는 운명처럼 빨려 들어갔다. 딱 3년, 임병수의 쇼 타임. 조금은 짧았지만 말이다. 화려한 시간도 잠시. 대중 앞에 서는 시간이 줄었다. 사람들의 마음은 빠르게 변했다.
“84년, 85년, 86년에 제일 반짝거렸던 거죠. 그러니까 1집, 2집, 3집. ‘약속’, ‘아이스크림 사랑’, ‘난 어지러워요’로 활동했어요. 바쁘고 스케줄도 너무 많았는데 3년이 애매하게 그냥 지나갔어요. 왜 이렇게 됐을까 생각은 했죠. 연말 시상식을 보다가 문득 ‘내가 저기 있어야 하는데…’ 살짝 그런 생각도 했어요. 괴로웠겠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렇게까지 힘들지는 않았어요. 약간의 혼란스러움 정도였어요.”
그래도 스스로 질문을 던지곤 했다. 내가 계속 노래를 해야 하나? 그만둘까?
“내 기타랑 모든 카세트테이프, 레코드판 등등 음악이랑 관계되는 모든 것을 태우고 지나간 거 다 잊어버리자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정작 태워본 적은 없어요. 상상만 해봤죠(웃음).”
혹 생각처럼 모든 것을 태웠더라면 다시 사 모으기에 바빴을 거라고. 시대의 아이콘으로 지금도 회자될 정도로 인기 스타였지만 마음을 추스르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단다.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다 인기가 떨어지면 순간 우울증에 걸리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연예인들이 있잖아요. 그 정도는 아니었어요. 굉장히 편안하게 상황을 받아들인 것 같아요. 물론 몇 년은 이게 뭐지 했지만 죽을 만큼 괴롭지는 않았어요.”
눈에 띄는 활동을 한 것은 아니지만 꾸준하게 음반을 발표했고 본업인 가수로서의 삶과 생활을 이어나갔다. 그사이 결혼도 했고, 장성한 딸이 있으며, 가족의 생계를 위해 다양한 일을 접하며 살았다고. 지난 7월에는 ‘이름’이라는 신곡을 발표해 활발하게 팬들과 만나고 있다.
“10년 만에 신곡을 냈어요. 나름대로 많이 뛰어다니고 있어요. 트로트의 색깔이 있는 노래예요. 그런데 정통 트로트는 제가 아무리 불러도 그 맛이 안 나요. 트로트 같기는 한데 ‘어, 임병수가 부르니까 그냥 발라든데?’ 그런 분위기가 되는 것 같아요.”
나이와 인기를 좇아서 색깔을 바꾼 것 아니냐는 말들이 들리지만, 임병수의 생각은 다르다.
“10명보다는 100명이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는 것도 괜찮은 거 같아요. 진짜 나만의 색깔로 부를 수 있는 노래를 부를 기회가 생기는 거잖아요. 신곡도 부르고 제 히트곡도 부르려고요. 그리고 저는 또 라틴 음악으로 메들리도 준비해놓았습니다. 아무래도 그쪽 노래는 제가 부르는 게 훨씬 나을 거니까요(웃음).”
불모지 볼리비아를 개척하다
문득 이야기하다 보니 하고많은 나라 중에 왜 볼리비아로 이민을 갔는지 궁금해졌다. 외국을 나가기가 쉽지 않았던 시절, 볼리비아에서 날아온 청년은 신기할 따름이었다. 외국에서 왔다고 하니 부자려니 지레짐작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다.
“부모님이 모두 황해도 분들이셨어요. 우리 아버지 생각에 대한민국은 좁으니까 좀 넓은 나라로 가자, 그렇게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아버지가 브라질, 칠레, 아르헨티나, 볼리비아에 이민 신청을 했는데 볼리비아에서 먼저 연락이 왔대요. 그때는 볼리비아가 한국보다 더 잘살았어요. 제가 다섯 살이던 1965년도에 볼리비아로 떠났습니다. 부모님과 7남 3녀, 12명의 가족이 모두요.”
한국에서 떠날 때만 해도 부모님이 목욕탕과 생선 냉동 창고를 운영해 집안은 넉넉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이북 출신으로 전쟁을 겪은 부모님이 전쟁 없는 나라에서 살고 싶은 생각을 한 것 같다고 회상했다. 그렇게 떠난 임병수의 집안은 한국에서 볼리비아로 간 첫 이민 가족. 우리 교포들 사이에서는 조상으로 불린다. 그래서 한국 사람이 볼리비아로 이민을 가면 임병수의 집으로 인사를 하러 가기도 한다.
“전쟁의 두려움도 있었지만, 아버지가 모험을 좋아하셨어요. 말 한마디도 못하는 상태로 볼리비아에 가셨는데 그때 아버지가 쉰다섯이셨어요. 당시 500달러 정도를 가지고 가셨답니다.”
이민 떠난 그곳은 말 그대로 정글이었다
아버지를 따라간 볼리비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정글만이 눈앞에 펼쳐졌다.
“우리 가족은 산속으로 들어가 제재소를 했어요. 카라나비라는 지역이었어요. 한 5~6년은 산에서 살았어요. 화장실도 없고, 신발도 없었어요. 집도 그냥 원두막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벽도 없었고요. 뱀도 지나가고 개미도 지나가고 각종 생명체가 주변을 지나다녔어요. 내가 다섯 살 때부터 살았는데 열 살 무렵까지 있었어요.”
맨발로 다니는 게 익숙했던 어린 시절. 한국에서 온 이민자들이 어린 임병수에게 선물로 신발을 안겼지만 불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잘사는 교포 출신일 줄만 알았는데 타잔의 삶을 살았다고 고백했다.
“타잔한테 신발 한 번 줘봐요. 얼마나 불편하겠어요. 신발을 신고 나가도 학교에서는 벗고 돌아다니다가 집에 들어올 때쯤 다시 신고 집으로 들어갔어요. 혼날까봐요. 지금도 불편해요(웃음).”
(SBS)이 우스워 보이지 않냐며 넌지시 물었다.
“웃기죠(웃음). 냇가에 다이너마이트 하나 던져 터뜨려서 물고기는 그냥 건져 올리기만 하면 됐어요. 새도 잡아서 불에다 구워 먹고요. 에이, 저는 5년 동안 정글에서 살았잖아요. 가끔 이야기할 때마다 사람들이 저를 신기한 듯 바라봐요. 방송은 아무리 힘들어 보여도 주위에 카메라 있고 사람들도 있고 일단 조명도 있잖아요.”
정글 삶에 대한 얘기는 끝이 없었다. 키가 큰 아보카도 나무를 타고 올라가 열매를 따먹던 일, 뱀이 몸 주위를 지나간 사건, 개미 밥으로 개구리를 던져준 일 등 상상할 수 없는 정글 이야기가 무용담처럼 펼쳐졌다. 이야기할 때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한지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며 몸으로 표현하면서 이해를 도왔다.
“하여튼 좋았어요. 아쉬운 게 있다면 그때 너무 어렸다는 거죠. 우리 형들은 재밌었다고 해요. 즐긴다는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힘들어도 재밌었거든요. 그런데 거기서 제일 무서운 게 뭔지 알아요? 사람이 사람 만나는 거요. 밤에 산길 가고 있는데 빨간 불빛이 보여요. 얼마나 무서워요. 담배 피우면서 일(?) 보고 있는 거예요.”
혹시나 에서 섭외가 온다면 갈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고개를 갸우뚱한다.
“가면 본능적으로 할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못할 것도 같아요. 그때는 벌레 같은 거 손으로 막 잡고 그랬는데 이제는 무섭거든요(웃음).”
프로레슬링 선수들 의상실을 열다
5년이 흘러 12명의 대가족은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스로 떠났다. 볼리비아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스포츠는 바로 프로레슬링. 이곳에서 임병수의 가족은 레슬링 선수의 옷을 만드는 의상실을 열었다.
“볼리비아에서는 레슬링 선수들이 니트 옷감으로 된 선수복을 입어요. 우리 누나들이 옷을 잘 만든다는 소문이 나서 선수들이 옷을 맞추러 많이 왔어요.”
정글에서 내려와 도시로 이주했으나 고단한 삶은 계속됐다.
“이런 거 보면 누나들 울겠다. 왜냐면 누나들이 고생 많이 했거든요. 그러다가 의상실이 잘되니까 아버지가 여덟째 형을 독일로 보내서 섬유 기계를 사오라고 하셨어요. 섬유 관련 사업에 필요한 것인데 볼리비아에 처음으로 들어온 기계였어요.”
정글을 벗어났지만, 여전히 화장실은 없었고 방도 작아서 잠을 잘 때면 식구들이 몸을 바짝 붙이고 칼잠을 자야 했다. 누나들은 재단이 끝나면 탁상 위에 요를 깔고 잠을 청했다. 그렇게 가족들이 매달려 열심히 사업을 일궜다. 가업이 생긴 것이다. 임병수의 집에서 만들어진 원단은 인접 국가인 아르헨티나, 칠레로 팔려나갔다.
“볼리비아에서 얼마나 놀랐겠어요. 한국 사람이니까 그렇게 할 수 있는 거잖아요. 마침 그러다 볼리비아에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국가적인 제압도 있고 탄압받는 느낌? 경제 사정이 안 좋아지니까 외국 사람들을 반기지 않게 됐죠. 지금은 가업은 다 접고 각자 다른 나라에서 다른 일 하고 살아요. 저만 지금 한국에 있고요. 큰형님 세 분은 돌아가셨습니다.”
형님과 누나들은 가끔 보고 싶은 정도다. 이젠 가족이 다 떨어져 살기 때문에 다 같이 모이는 일은 더 기대하지 않는다.
“오래전에 부모님 금혼식 때 10형제들이 모두 모였어요. 농담 반 진담 반이지만 사진을 찍는 데 한 시간 걸렸다니까요. 사진을 찍으려 하면 한 명이 화장실 가고, 화장실에서 돌아오면 누가 또 잠깐 넥타이를 고쳐 매고 그래서요.”
어렸을 때 정글에서 살았던 추억 때문일까? 기회가 되면 볼리비아 나무를 수입해 사업을 해보고 싶은데 쉽지 않은 일이라고 한다. 대신 조카가 추진하고 있는 커피 사업에 도움을 주고 싶다고 했다.
“저는 되게 밝게 보이잖아요. 나쁜 것은 옆으로 밀어놓고 좋은 생각만 하려고 해요. 내가 여기 혼자 있어도 잘 버텨온 힘이에요. 이런저런 고민이 있어도 결국은 늘 음악 생각뿐이에요. 10곡, 15곡 발표할 필요 없잖아요. 한 곡 내고 노래 부르고 다시 또 만들면 되죠. 음악은 계속할 거니까요.”
그의 노래와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 보니 평생이 나그네 인생이다. 예전에 수줍었던 모습에 힘이 들어가고 더 밝아진 이유는 마음 깊이 숨겨놓은 가족에 대한 사랑과 노래를 향한 열정 때문이다.
휴가를 바닷가나 계곡으로만 가는 것은 아니다. 가치 있는 일을 해도 좋다. 그중 ‘댄스 여름 캠프’라는 것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한 번도 열린 적 없지만, 외국에서는 해마다 열리며 해가 갈수록 성황이다.
이탈리아의 댄스 여름 캠프는 베니스에서 열린다. 세계 각국에서 왕년의 챔피언, 선수들이 모인다. 캠프 기간 동안 스케줄이 잘 짜여 있다. 한국에서 가려면 비행기 값이 비싸서 그렇지 캠프 참가비용은 숙소를 포함해 그리 비싸지 않다. 이 캠프에서 댄스를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서로 얼굴을 익혀놓는 게 큰 도움이 된다.
몇 해 전 호주에서도 댄스 캠프가 열려 참여 계획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호주의 댄스 강사 수준이 그리 매력을 끌지 못했는지, 또 며칠씩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직장인들도 있었고 경비도 꽤 드는 편이라 부담이 됐는지 성사되지 못했다.
이런 행사는 그야말로 부가가치가 높은 문화 사업이고, 관광 사업이기도 하다. 영국은 댄스스포츠를 체계화해 지금도 수많은 관계자들을 먹여 살린다. 국가적으로도 도움이 된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댄스 캠프를 기획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국가대표 선수들의 단체 합숙 훈련은 있지만, 그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댄스스포츠 10종목을 전문 선수나 강사들이 가르치고 그 외에 아르헨티나 탱고, 살사, 지터버그, 블루스까지 포함해 그야말로 댄스로 날을 지새우도록 하는 것이다.
동호인들은 누구나 이런 꿈을 꿔봤을 것이다. 댄스 캠프를 열려면 좋은 지도자들이 많이 호응해줘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기획을 할 수 있는 댄스 단체가 많지 않다는 것이다. 학원별로 보유한 선수 몇 명만으로는 프로그램이 빈약할 수밖에 없다. 큰 단체가 기획해 추진하든지 작은 단체끼리 연합해서 추진하는 방법도 있다. 여건도 만만치 않다. 평소 유대 관계 및 일정 인원의 회원들을 동원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초창기에 댄스스포츠를 보급한 공로가 있는 동아문화센터나 중앙문화센터 같은 언론기관, 그리고 참신한 기획력이 있는 잡지사 등이 나서는 방법도 있겠다.
장소도 만만치 않다. 우선 춤출 수 있는 마루가 깔린 큰 방이 있어야 한다.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움직여야 하므로 숙소 문제, 식사 문제 등도 잘 기획되어야 한다. 콘도가 좋기는 한데 성수기에는 방 구하기가 어렵다. 마을회관이나 지방 공공건물, 문화센터, 방학한 학교나 폐교된 학교를 빌리는 방법도 생각해봄직하다.
이런 행사가 우리나라에서도 열리면 동호인들에게는 평생의 추억이 될 것이고, 지도자로 참여한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회원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10여 년 전부터 압구정에서 놀았다. 3호선 압구정역 2번 출구로 나가면 오페라 동호회 '무지크 바움'이 있다. 4번 출구로 나가면 탱고 동호회 '땅게리아'가 있다. 필자는 어려서부터 가무를 즐겼다. 초등학교 때부터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고 동생 연희와 함께 비좁은 방에서 노래하며 춤추곤 했다.
'진달래 피었구나. 눈 녹은 산에…'
물론 안무도 필자가 했다. 그런데 50대가 되면서 탱고와 왈츠에 필이 꽂혔다. '그래 탱고와 왈츠를 열심히 익혀서 춤추며 즐겁게 살자.' 탱고를 배우겠다고 작정을 한 뒤 수소문하여 찾아간 곳이 땅게리아였다. 땅게리아는 연대 출신의 여성분이 운영하는 곳이다. 탱고의 본고장 아르헨티나 현지에서 탱고를 배우고 온 이분은 탱고 관련 영화에도 여러 번 출연한 ‘탱고의 고수’다.
" 나 초보걸랑, 접근 금지!"
10년 전 어느 토요일 밤이었다.
남자들이 젊으나 늙으나 필자하고 탱고를 추겠다고 한바탕 난리가 났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파트너가 된 남자는 이제 막 중년이 된 듯 보였다. 당시 남자들은 소위 필자 옷빨에 넘어가 필자를 탱고의 달인으로 생각하지 않았나 싶다. 그때 입은 옷은 프랑스 디자이너 임마누엘 웅가로가 디자인한 원피스였다(물론 동대문표 짝퉁이다). 몸의 실루엣이 그대로 드러나는 착 달라붙는 55사이즈의 검은색 비로드 천으로 만들어진 옷이었다. 옷 길이는 발목까지 내려왔고 가슴과 허리선은 드레이프로 자연스럽게 늘어졌으며, 어깨는 끈나시, 왼쪽 치마폭은 허벅지에서부터 길게 슬릿이 들어간 아주 엣지 있는 디자인의 옷이었다. 여기에 기다란 검은색 비로드 장갑까지 끼었다.
필자의 파트너는 춤을 추는 동안 땀을 뻘뻘 흘렸다. 춤을 못 춰도 너무 못 추는 필자를 만나 생고생을 했던 것이다. 이튿날이었다. 필자 곁에는 남자들이 얼씬도 하지 않았다. '저 여자 선천적 몸치야 절대 접근 금지!'
그새 동네방네 소문이 쫙 나버린 결과일 터였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15년 여름날, 서초동을 걷고 있는데 한 남자가 문득 서 있었다. 오매! 놀래라! 바로 그였다. 멀리서부터 아우라가 느껴져 쳐다봤더니 문제의 그녀가 서 있더란다. 이런 우연이 있나!' 우린 오래전, 그것도 단 한 번 탱고 파트너였을 뿐인 서로를 선명히 기억했다. 참 재미있는 것은 인간의 기억이다. 필자는 그때 파트너를 너무 힘들게 한 것이 너무 미안해서 잊히지 않았다. 그리고 그 파트너도 자신을 힘들게 한 여자로 기억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를 다시 만나면 '그때 미안했어요. 제가 너무 못 춰서요. 많이 힘 드셨죠?' 할 참이었다. 뜻밖에도 그는 "그때 그 모습이 너무 이뻤어요! 그래서 어디론가 데려가고 싶었어요" 했다. 'ㅋㅋ 그랬구나!' 필자를 처음 만났을 때 카이스트 연구원이었던 그는 요즘 가산 디지털단지에서 자그마한 IT 회사를 운영하고 있단다.
오늘날 세계정세는 이른바 G2에 의해 좌우되는 시대다. 내우외환의 위기에 봉착한 나라의 현실이 너무 답답해 이 글을 쓴다.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다 함께 모색해보는 시간이 되면 좋겠다.
트럼프는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America First!”를 선언했다. 자국의 이익 창출을 위한 보호무역주의 등의 정책을 펼치겠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한미 간에 체결된 FTA 추가 협상 등 앞으로 예상되는 미국과의 많은 문제를 해결해나가기 위한 대책들을 차근차근 준비해야 할 시점이다. 현재 미국은 한국의 정세를 지켜보면서 대통령 선거 이전까지는 시간을 주고 있는 것 같다.
이에 맞선 중국의 시진핑은 사드 문제로 우리나라를 괴롭히고 있다. 한중 간 FTA가 체결되었지만 교묘하게 합의사항에 저촉되지 않는 방법을 찾아 경제적 불이익을 주면서 사드와 관련한 압박을 계속하고 있다. 사드 문제는 북핵 개발에 따른 국가안보 차원의 군사적 문제로 재고가 불가한 상황이다. 미국이든 중국이든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한 행동은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우리 정부는 당연히 WTO에 제소해 1차적으로 대응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중국의 시장경제지위(MES, Market Economy Status-교역 상대국의 경제활동이 정부가 아닌 시장원리에 따라 결정되고 있다고 인정할 때 부여하는 지위로 우리나라는 2015년 중국을 인정한 바 있으나 지금 중국이 취하는 행동을 보면 이를 취소해야 할 것 같다)도 취소해 중국 정부가 얼마 전 세계경제포럼에서 언급한 시 주석의 공언과 달리 무역자유화에 역행하는 나라임을 전 세계에 알림으로써 압력에 굴하지 말고 당당히 대처해나가야 할 것이다.
강대국끼리 서로 싸우면 서로 큰 상처를 입게 되니까 결국 중국은 만만한 나라를 괴롭히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싸움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고래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처지가 된 것이다. 그런데도 정치권은 무책임한 발언으로 일관하면서 국가안보를 위협하고 있으니 이것이 내우외환의 위기가 아니고 무엇일까.
대통령이 되고 싶은 사람들은 경제를 망치고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경제학 족보에도 없는 경제민주화로 어리석은 국민들의 표를 얻기 위한 행보를 계속하고 있다. 이런 나라의 정치인들을 보며 미국과 중국은 과연 어떤 생각을 할까? 각 정당의 대통령 후보자는 지금부터라도 엉터리 사탕발림의 복지정책으로 표를 얻으려 하지 말고 ‘위기의 대한민국을 어떻게 구할 것인가?’라는 이슈를 제시하면서 당당하게 도전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미국과 중국이 지금처럼 우리나라를 무시하는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다. 남미의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을 보라. 사회주의 체제의 복지정책으로 대통령이 된 사람들이 나라를 망하기 일보 직전까지 몰아가고 있다. 모든 정치인들, 특히 대선 후보는 이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위기는 기회라고 했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 국회는 법인세 인상 등 기업을 옥죄는 법안 만드는 것을 당장 중지하고, 검찰 당국은 기업인들에게 구속영장을 남발하는 행위를 즉각 중지하고 이들이 기업가 정신을 갖고 국가 경제를 살릴 수 있도록 기회를 줘야 할 것이다. 거국적으로 보면 대기업의 재산은 오랜 세월이 흐른 뒤 결과적으로 국가의 재산이 될 것이다. 따라서 국민들도 대국적으로 기업인들을 격려하고 지원해야 한다. 경제가 살아야 그 구성원들이 받는 분배의 몫도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경제를 활성화해야 비로소 진정한 분배의 정의가 실현될 수 있다. 정치인들은 경제는 경제인들에게 맡기고 최소한의 법질서를 유지해나가야 할 것이다.
오늘날의 대기업들은 한강의 기적을 일궈온 국가적 기업들이 아닌가? 불확실성의 시대임에도 삼성전자는 중국 사드의 보복에도 불구하고 경제를 발전시켜나가고 있지 않은가? 한국은 이러한 저력이 있는 나라다. 정치인들이여, 제발 악법을 만들지 말고 규제를 철폐하고 노동혁신 등 4대 혁신을 일구어 비록 그 길이 힘들고 험난한 길이라 해도 국가가 발전해나갈 수 있는 틀을 만들어주기 바란다.
정치인들은 과도한 대통령 권한을 축소하고 입법, 행정, 사법이 서로 균형을 이루고 견제하도록 해서 국가가 제대로 운영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필요하면 헌법을 바꿔서라도 부정부패를 일소하고 국가가 발전할 수 있는 틀을 마련하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사법부는 좌파와 우파가 어떤 압력을 가하고 위협을 한다 하더라도 사법부의 판단과 결정을 믿고 준수할 수 있도록 정직하고 소신 있는 판결로 국가의 법 질서를 사명감을 갖고 세워주기 바란다. 국회는 입법부로서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 진정으로 국가 경제와 발전을 위한 법과 정책을 만들어야지 국민의 표를 얻기 위한 사탕발림의 경제민주화법을 만드는 것을 당장 중지해야 한다.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한 뒤 독배를 마신 소크라테스처럼 국민들은 헌재의 판결 결과를 존중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노사는 서로 손을 잡고 함께 이 어려운 난국을 함께 돌파할 수 있도록 협력하는 시스템을 구축해나가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하면 아무리 초불확실성의 시대가 도래하고 중국과 미국이 압력을 하고 힘들게 해도 우리의 조상인 고구려인의 기상으로 이를 극복하고 나아가 언젠가는 G3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와 같은 무지한 사람이 이렇게 읍소를 하는데 지성인들이고 선량한 사람들이 가만히 있어서야 되겠는가? 알고 행하지 않으면 무지요, 아는 것을 행하면 지식인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 모두 사명감을 갖고 아는 것을 소신껏 행하는 용기 있는 국민이 되자. 그리고 함께 국난을 타개하자. 이런 힘과 자세를 보여줄 때 일본은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우기는 것을 포기하고 중국은 지금과 같은 행태를 보일 수 없을 것이다. 미국도 이미 합의된 FTA를 재협상하자고 하지 않을 것이다. 마치 반미운동으로 전개될까 염려되어 한국에 대해 일체의 제재조치를 취하지 않고 지켜보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에게는 그럴 힘과 지혜가 축적되어 있는 반만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국민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