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이 돌고 돌아 올가을에 호피무늬가 대유행이라고 한다.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치타 여사(라미란 역)가 즐겨 입던 호피무늬 옷을 거리에서 종종 보게 될 줄이야. 몇 해 전부터 불기 시작한 복고 열풍은 스치는 바람이 아니라 문화로 자리 잡아가는 것 같다. 학자들은 이 현상을 ‘삶이 고달파서’라고 해석한다. 사람들이 옛것을 통해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위안을 얻는다는 것이다. 세월은 고생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미화시키는 힘이 있으니. 세월을 비껴간 곳을 찾아 추억 여행을 떠나보자.
빈티지의 끝판왕, 을지로 인쇄소 골목
한국전쟁 이후 도시 재건에 필요한 모든 업종이 서울 을지로3가와 4가 일대에 자리 잡았다. 공구 골목, 도기·타일 골목, 재봉틀 골목, 조명 골목, 인쇄 골목 등이 거미줄 치듯 모여 거대한 산업단지를 이뤘다. 주변으로 고층 빌딩이 우후죽순 들어서도 을지로는 여전히 예전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일과를 마친 노동자들이 ‘동원집’의 감잣국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1000원짜리 노가리 안주에 시원한 생맥주를 마시며 회포를 풀던 노가리 골목도 여전하다. 노가리 골목은 오히려 지금이 더 전성기인 것 같다.
후미진 인쇄소 골목에는 임대료가 저렴한 건물을 찾아 들어온 예술가와 젊은 창업자들이 정착하고 있다. 카페, 술집, 음식점도 많이 생겼다. 대부분 을지로 특유의 허름한 분위기를 부각해 건물을 꾸몄다. 카페 ‘커피한약방’과 양과자점 ‘혜민당’이 대표적이다. 이곳은 개화기 때 차림으로 입장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다. 촌스러운 색유리 창문, 100년 된 자개장, 페인트칠이 벗겨진 나무 문, 전깃줄이 뒤엉켜 있는 골목 풍경이 내다보이는 2층 테라스마저 멋스럽게 보이니, 내 눈이 ‘복고깍지’를 쓴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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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 일대에 오구반점, 을지면옥, 통일집, 안성집, 양미옥, 을지다방 등 개점한 지 최소 30년 이상 된 노포들이 즐비하다. 노포 순례를 하며 추억을 곱씹어보는 것도 좋겠다.
세월의 사각지대 익선동 한옥마을
북촌과 서촌에 이어 익선동 한옥마을도 인기를 끌고 있다. 익선동은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에 조성된 이후 재개발이 이뤄지지 않아 한옥이 잘 보존돼왔다. 전철 1·3·5호선이 교차하는 종로3가역과 인사동, 운현궁, 창덕궁, 종묘 등 서울 명소가 코 닿을 거리에 있는데도 이 동네 시간만 1970~80년대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 미로처럼 좁고 복잡한 골목 안에 오래된 식당과 한복집, 점집, 가정집 등 한옥 100여 채가 고요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요즘 익선동에 가보면, 상전벽해를 실감한다. 주택이 대부분 트렌디한 상가로 바뀌었다. 다행히 한옥 형태를 유지하고 내부만 개조해 익선동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한옥인 ‘열두달’, ‘이태리총각’, ‘익선디미방’ 등에서 파스타와 스테이크를 먹는 모습이 낯설지 않다. 가장 인기 있는 곳은 수플레팬케이크를 파는 복고풍 카페 ‘동백양과자점’이다. 평일에도 가게 앞으로 늘어선 줄이 엄청나다. 신생 가게들이 속속 들어서는 중에도 익선동에서 가장 처음 문을 연 전통찻집 ‘뜰안’, 익선동이 인기를 끄는 데 일조한 빈티지 카페 ‘식물’, 착한 맛집 ‘익선동121’, 담장 허문 가맥(가게 맥주)집 ‘거북이슈퍼’ 등이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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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선동에서는 흥선대원군이 살았던 운현궁이 가깝다. 운현궁을 둘러보고, 고즈넉한 서순라길(종묘의 서쪽 담장길)을 산책한 뒤 종묘까지 둘러보면 알찬 도보 코스가 완성된다.
서울의 사교육 일번지였던 돈의문박물관마을
돈의문(서대문) 터 근처에 있던 새문안 동네는 몇 해 전 돈의문 뉴타운을 조성할 때 근린공원이 될 뻔한 동네였다. 서울시에서 헐지 않고, 도시 재생해 동네를 통째로 박물관으로 조성했다. 조선시대 한옥, 1930년대 일본식 주택, 1960년대 도시 한옥, 1970~80년대 슬래브집 등 각 시대상을 반영한 건축물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보존 가치가 있었던 것. 동네 역사도 흥미롭다. 1960년대에는 명문 중고등학교에 가기 위해 집마다 과외방이 있었다. 1980년 과외 금지법이 시행된 뒤로는 동네의 90%가 식당으로 바뀌기도 했는데 당시 ‘문화칼국수’, ‘풍미추어탕’집이 유명했다.
돈의문박물관마을에는 당시의 가옥 구조를 복원한 집 40채가 있으며 전시관, 연구실, 공예작가의 작업실 및 체험 공방으로 활용 중이다. 방문객은 그림 그리기, 와인 강좌, 쿠킹 클래스 등 40여 가지 프로그램을 선택해 체험해볼 수 있다. 이 중 마을 투어 프로그램을 강력 추천하고 싶다. 도슨트와 마을 골목길을 함께 돌면서 우리나라 근현대사와 건축 양식의 변화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하루 두 차례, 무료로 30분 동안 진행되며, 신청은 돈의문박물관마을 홈페이지(www.dmvillage.info)에서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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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문박물관마을 맞은편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였던 경교장이 있다. 서울 성곽 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홍난파 가옥, 권율 장군이 심었다는 은행나무와 3·1운동을 세계에 처음으로 알린 미국 특파원 앨버트 테일러가 살았던 딜쿠샤를 만날 수 있다.
‘그땐 그랬지’ 국립민속박물관 추억의 거리
국립민속박물관 야외에 ‘추억의 거리’가 조성돼 있다. 1960~70년대 거리 풍경을 실감나게 재현해놓았다. 마치 촬영장 같은 분위기다. 창신사장(사진관), 근대화연쇄점, 장미의상실, 고향식당, 약속다방, 화개이발관, 고바우만화방, 인쇄소, 좋은소리사(레코드점) 등을 실물 크기로 짓고, 소품을 구색 맞춰 비치했다. 구멍가게 안에 진열된 과자, 음료수, 과일, 달걀, 아이스크림을 보며 아련한 기억을 떠올린다. 그 시절의 아이들은 부모님이 구멍가게를 하는 친구를 가장 부러워했다. 화개이발관에는 종로구 소격동에서 2007년까지 약 50년 동안 영업한 이발관의 자료가 전시돼 있다.
창신사장, 약속다방, 북촌국민학교는 내부 입장이 가능한 체험 공간으로 꾸몄다. 창신사장에서는 옛날 교복을 빌려 입고 옛날 사진관에서 사진 찍듯 기념 촬영을 할 수 있다. 추억의 거리가 기성세대에게는 추억을 소환하는 공간으로, 젊은 세대에게는 이색 체험 공간으로, 재미를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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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민속박물관과 경복궁은 연결돼 있다. 단풍 고운 날, 고궁 산책과 더불어 추억의 거리를 거닐어보자.
어떤 나이에는 인간이 만든 문명들을 보며 지식을 키우는 시기가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인간이 만든 미술관이나 박물관은 그것이 아무리 대작이라 할지라도 별 감흥이 일어나지 않았다. 아마도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있는 에너지 없는 에너지를 다 끌어모아 대자연 탐험을 시작한 것은…. 힘든 만큼 더 단단해지고, 땀흘린 만큼 충전이 되는 여행이 바로 트레킹 여행이었다. 알프스의 대자연을 온몸으로 느끼는 1200km의 돌로미티 트레킹! 겨울에는 스키 천국으로, 여름엔 트레킹 천국으로 변신한다. 지구라는 이름의 건축가가 만들어낸 웅장한 조각품에 감탄하는 시간 속으로 떠나보자.
이탈리아가 숨겨놓은 천상의 트레일, 돌로미티 알타비아 넘버원
북부 이탈리아 알프스의 동쪽 끝자락에 솟아오른 바위 산맥 돌로미티(Dolomite)는 해발 3000m 이상의 봉우리를 18개나 품고 있는 웅장한 산악지대로 2009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곳이다. 기묘한 바위 봉우리들과 에메랄드빛 빙하 호수, 울창한 숲과 계곡, 산상화원을 보는 듯 군락을 이룬 야생화가 어우러져 알피니스트들의 요람이자 암벽 등반가들의 성지가 된 돌로미티는 제1차 세계대전 때 오스트리아군과 이탈리아군이 치열한 접전을 펼친 역사적인 의미가 깊은 곳이기도 하다. 돌로미티를 가기 위해 베네치아로 들어가 ‘알타비아 넘버원(AV1)’의 관문도시 격인 코르티나담페초에서 짐을 풀었다. 아웃도어 매장과 레스토랑이 아기자기 모여 있는 마을이 너무 청량하고 예뻐서 굳이 어딜 가지 않고 그곳에 머물러만 있어도 행복할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 마을은 여배우 오드리 헵번이 자주 와 머물렀고, 헤밍웨이도 집필활동을 한 곳이라고 했다. 다음 날 드디어 ‘높은 길’이라는 뜻의 ‘알타비아’ 트레킹을 시작했다. 해발 2000~3000m의 고원을 걷는 길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첫날 오르막길이 계속되는 것을 제외하곤 난이도가 아주 높진 않아서 천천히 음미하며 걸었다.
니체가 사랑하고 르코르뷔지에가 극찬한 아름다움
니체는 돌로미티를 두고 “등산의 기쁨은 정상에 올랐을 때 가장 크다. 그러나 나의 최상의 기쁨은 험악한 산을 기어 올라가는 순간에 있다. 길이 험하면 험할수록 가슴이 뛴다. 인생에서 모든 고난이 자취를 감췄을 때를 생각해보라. 그 이상 삭막한 것이 없으리라”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어떤 이는 다시 내려올 산을 뭐하러 힘들게 오르느냐고 묻지만 인생에서 아무 어려움도 없고 그것을 이겨냈을 때의 희열도 없다면 니체가 말한 대로 삭막하고 의미 없는 삶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세계적인 건축가 르코르뷔지에 또한 돌로미티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연 건축물이라고 말할 정도로 독보적인 풍광을 지닌 돌로미티는 14좌를 알파인 스타일로 오른, 현존하는 최고의 등반가 라인폴트 매스너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며, 그가 고작 다섯 살일 때 이곳 3000m급 암봉을 올랐다고 전해지는 곳이기도 하다. 실제로 트레킹을 하다 보면 세 살도 안 된 아이를 목마 태우고 마치 동네 공원 산책하듯 가벼운 차림으로 험준한 산을 오르는 가족들이 있다. 또 주말에 친구들과 그룹을 짜서 걷다 쉬다 하면서 놀이하듯 등반하는 모습도 흔히 볼 수 있다. 이곳 사람들에게 알프스 트레킹이나 암벽등반은 마치 우리가 매일 동네 산책을 하는 것과 같은 일상적인 일로 보였다.
트레커의 로망, 알타비아 넘버원
히말라야, 로키와 함께 세계 3대 명산에 속하는 알프스 산맥, 그중에서도 돌로미티는 트레킹 코스만 해도 수백 개에 이른다. 가장 유명한 3개의 봉우리 “트레치메(Tre Cime)”는 돌로미티를 말할 때 늘 대표 사진으로 등장한다. 가장 높은 치마그란데(Cima Grande) 봉우리의 높이는 무려 3003m에 이른다. 해가 지는 기울기에 따라 갖가지 색으로 변신하는 바위의 장관은 눈부시게 아름다워서 유명 사진작가들로부터 한결같은 사랑을 받고 있다. 세체다(Seceda) 봉우리를 비롯한 거대한 암봉들이 압도적 풍광을 선사하는 알타비아 넘버원은 돌로미티에서도 가장 클래식한 트레킹 루트다. 거대한 암봉군 사이를 걸으며 만나게 되는 풍경들은 그동안 수없이 유럽을 들락거렸지만 단 한 번도 체험해보지 못했던 유럽 문화의 진수를 맛보게 해줬다. “여행의 백미는 트레킹”이라는 어느 트레커의 말이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눈이 녹아 싱그러운 빛깔을 뽐내는 알프스 산자락의 맨살은 가는 곳곳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고, 그늘이 많지 않은 돌산이지만 첫날과 마지막 날을 제외하고는 너른 평지를 걷는 코스라 생각만큼 힘들지는 않았다.
길을 잃기 쉬운 돌로미티 트레킹은 현지 이탈리아 산악 가이드와 함께 했는데 이들의 스틱 사용법이 우리네와 달라 참으로 신기했다. 그가 등산 스틱을 쓰는 모습은 마치 스키를 타는 것처럼 보였다. 이곳 산장 사람들이 겨울이면 스키를 교통수단으로 삼아 이 산장에서 저 산장으로 다닌다고 하니 이해가 되었다. 해가 뜨면 걷기 시작해 다음 산장까지 걷다가 경치 좋은 곳에 자리를 깔고 알프스 품에 안겨 도시락을 먹을 때의 기분을 잊지 못한다. 오후 서너 시가 되면 다음 산장에 도착해 짐을 풀고 휴식을 취했다. 그 막간의 시간에도 산악 가이드는 산장집 어린 아들과 암벽등반을 하러 갔다. 그 모습을 보며 이들에겐 정말이지 산악 스포츠가 밥 먹는 것 같은 일상이구나 싶었다.
산악 가이드는 그늘 하나 없는 길을 긴 등산 바지를 입고 걷는 나를 보더니 왜 반바지를 입지 않느냐고 물었다. 한국에서는 풀독이라도 오를까봐 늘 긴 바지를 입었던 나는 내리쬐는 햇살 속에서도 긴 바지 차림이었던 것이다. 돌로미티는 한국의 산과 다르고 바위산이라 풀독이 오를 일도 없다. 다음 날 반바지를 입었더니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웠다. 유러피언들은 햇살을 즐긴다. 내 긴 바지가 당연히 이상하게 보였을 것이다.
그림 같은 알프스 산장, 그리고 이탈리아 음식의 진수
돌로미티 트레킹은 겨울이면 스키어들의 성지인 산장과 산장 사이를 걷는 것이다. 눈이 없는 알프스의 아름다움을 이보다 더 잘 느끼는 방법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없을 듯하다. 케이블카도 있어 걷기 싫은 곳에선 이용할 수 있다. 눈뜨면 알프스의 압도적인 풍광들 사이를 걷다가 휴게소에서 최고의 이탈리아 코스요리를 먹고, 해가 지면 해발 2000m가 넘는 드라마틱한 풍경 속에 위치한 최고급 전망을 자랑하는 산장에서 잠을 자고 알프스의 일출을 날마다 맞이하는 일은 호사롭다. 이탈리아 음식이라면 피자와 파스타, 후식이라면 고작 카푸치노와 에스프레소만을 떠올린다면 이탈리아 음식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이번 여행에서 알았다. 트레킹 여행이니 다이어트가 좀 될 거라는 희망은 무궁무진 미각을 자극하는 이탈리아 코스요리 앞에서 물 건너 가버렸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정말 많이 먹는다. 보름 동안 매일 맛본 요리의 순서를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우선 스프리츠 같은 식전주로 입맛을 예열한다.
② 프리미라는 일종의 전체요리다. 주로 덤플링(완자탕), 굴라시, 라비올리, 야채스프, 마카로니, 파스타 중 선택하는데 양이 메인디시 수준이다.
③ 세콘디 피아티라는 메인 요리를 먹는데 스테이크 종류, 감자 요리, 폴렌타, 스파게티 등이 나왔다.
④ 디저트로 팬케이크, 브라우니, 푸딩, 젤라토(아이스크림)를 먹는다.
⑤ 식후주로 그라파같이 향이 좋은 술이나 에스프레소를 마신다.
트레치메 앞 산장에서 먹었던 라비올리의 맛과 트레킹이 끝나던 날 마지막 산장에서 마신 스프리츠의 황홀함을 잊을 수 없다. 환상적인 풍경을 벗 삼아 한 번도 맛보지 못했던 이탈리아 정찬의 세계를 느껴보는 일, 전통주 그라파 한 잔에 피로를 풀고 밤이 되면 쏟아지는 별빛 아래 대자연과 하나 되는 일, 모두가 잠든 새벽 알프스 정상에서 고요한 일출을 맞이하는 일. 이것이 바로 알타비아 트레킹의 진수다.
귀농·귀촌을 결심하기 전, 원하는 마을을 미리 둘러보게 될 것이다. 이왕 방문을 계획했다면 휴가를 겸해 마을의 명소와 맛집도 두루 즐기고, 다양한 농촌 체험도 맛보기로 해보자. 마을의 자연과 전통문화를 활용해 체험과 휴양 공간을 제공하는 ‘농촌체험휴양마을’에서라면 가능하다. 지 단편적인 사례를 통해 귀촌·귀농의 성패 요인을 살펴보고자 한다.
사진 제공 및 도움말 웰촌
◇ 전북 고창군
‘구시포 해수욕장’은 해변이 넓고 완만해 아이부터 노인까지 안전하게 즐기기 좋은 피서지다. 이곳에서 차로 5분 남짓 거리의 ‘상하농원’은 이국적인 풍광과 더불어 다양한 체험을 즐길 수 있어 인기가 높다. 최근 tvN 드라마 ‘도깨비’의 촬영지로 알려지며 주목받고 있는 ‘고창 학원농장’은 한여름이면 해바라기가 만개해 절경을 이룬다. ‘미당시문학관’, ‘선운사’, ‘고창 고인돌유적지’ 역시 역사와 문화를 동시에 즐길 수 있는 고창 여행 필수 코스 중 하나다.
체험 포인트>> 상하농원 상하농원에는 우유 제조공장 견학을 비롯해 머핀 만들기, 아이스크림 만들기 등 다양한 먹거리 체험 프로그램이 있다. 또 올해 7월부터 ‘파머스빌리지’를 열어 운영 중이다. 농원 식당과 테라스 룸, 패밀리 룸 등 숙박 공간도 마련돼 있으니 여행 일정에 참고하자.
◇ 경북 예천군
‘삼강주막마을’에서는 두부, 묵, 배추전 등과 곁들여 먹는 막걸리 한 상을 저렴한 가격에 맛볼 수 있다. 내성천이 휘감아 돌아나가는 ‘회룡포마을’은 육지 속 섬처럼 독특한 모습이다. 인근 ‘예천진호국제양궁장’은 예약을 통해 무료로 양궁체험 기회를 제공한다. ‘출렁다리마을’은 시골 인심 가득한 밥도 먹고, 다양한 농산물 수확 체험까지 즐기기 제격이다. 여행을 끝내기 아쉽다면, 마을에서 차로 15~20분 거리에 있는 ‘문경주조’에서 오미자막걸리 한잔 어떨까?
체험 포인트>> 삼강주막마을 500년 수령의 회화나무가 지키고 있는 삼강주막마을에서는 떡메치기, 팥죽 끓이기, 양반 자전거 타기, 양반 과거길 체험 등을 경험할 수 있다. 하루 묵어갈 계획이라면 황토찜질을 겸하는 황토방과 한옥 스타일의 민박, 체험관에서 숙박도 가능하다.
◇ 경남 하동군
화개천 계곡을 따라 4.2km 이어지는 ‘서산대사길’은 실제 서산대사가 걸었던 길이다. 걷다 보면 그 끝자락에 ‘지리산역사관’이 보인다. 지리산 반달가슴곰이 사는 마을로 유명해진 ‘의신마을’에서는 계절마다 다양한 야생화가 지천으로 피어난다. 이곳에서 하루 묵은 뒤 다음 날에는 ‘화개장터’로 향하자. 끝으로 ‘박경리문학관’과 소설 ‘토지’의 배경인 ‘최참판댁’에 들러 수시로 열리는 문화행사에도 참여해보자.
체험 포인트>> 의신마을(베어빌리지) 멸종위기종인 반달가슴곰을 만나는 탐방 해설과 야생화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지리산 청정 지역에서 나는 산약초, 산나물 등을 직접 채취해볼 수 있다. 베어빌리지와 도서관, 놀이터, 캠핑장 등도 이용 가능해 손주와 함께라면 더욱 유익하다.
◇ 경기도 파주시
임진강과 감악산이 둘러싼 ‘산머루마을’은 계절에 따라 산나물 캐기, 요리체험, 문화답사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이곳에서 1979년부터 머루 재배를 시작한 ‘산머루농원’에서는 머루 관련 체험뿐만 아니라 와인숙성터널 관람 및 머루와인 시음까지 즐길 수 있다. 파주 일대에서 가장 높은 감악산(675m)에는 국내에서 최장 길이의 출렁다리가 있다. 높이 45m, 길이 150m에 이르는 출렁다리를 건너다 보면 운계폭포가 보이고, 그 끝자락에 법륜사가 나온다.
체험 포인트>> 산머루농원 ‘산머루 와이너리 투어’, ‘머루 수확 체험’, ‘나만의 와인’을 비롯해 ‘패키지체험’(머루 초콜릿, 머루 잼, 머루 비누 만들기, 와이너리 투어 및 시음)을 예약제로 운영한다. 와인을 즐기는 어른부터 달콤한 초콜릿을 좋아하는 아이까지 두루두루 유익하다.
◇ 충남 금산군
‘대둔산 자연휴양림’은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러시아 대통령이 다녀가며 잘 알려졌다. 편백 숙소, 피톤치드 치유의 방을 비롯해 집라인과 글램핑장 등 레저 시설도 마련돼 있다. 휴양림 산책을 마친 뒤에는 ‘금산인삼약령시장’에 들러보자. 전국 인삼 생산량의 80%가 거래되는 곳으로, 각종 인삼류와 약초를 20~50% 할인한다. ‘조팝꽃피는마을’은 그 이름처럼 조팝꽃 자생 군락지가 유명하다. 대표 특산물 인삼과 각종 농산물 체험 프로그램이 있다.
체험 포인트>> 조팝꽃피는마을 희망센터캠핑장, 농촌인성학교 등을 운영하고, 여름에는 들깨 모종, 깻잎 따기, 매현천 물고기 잡이 등 다양한 체험을 즐길 수 있다. 볏짚 공예, 풍등 날리기 등 전통문화체험과 인삼 수확체험, 인삼콩 두부 만들기 등 인삼을 활용한 프로그램도 인기다.
◇ 강원도 횡성군
‘풍수원성당’은 빨간 벽돌과 뾰족한 종탑이 어우러진 클래식한 분위기가 인상적이다. 영화 속 한 장면 같은 풍수원성당을 둘러본 후에는 ‘오마이갤러리’에 방문해 명화를 감상해보자. 트릭아트, 3D 입체 명화 등을 즐길 수 있다. 맛집과 체험을 모두 겸비한 오음산캠프는 산골 부녀회가 직접 나선 농가 맛집 ‘오음산 산야초밥상’과 농촌체험학교 ‘꿈꾸는풍뎅이’를 운영한다. 농촌의 계절 음식과 문화를 경험한다는 점에서 귀농·귀촌을 염두에 둔 중장년층이 즐겨 찾는다.
체험 포인트>> 오음산캠프 오음산 산야초밥상은 계절에 따라 각기 다른 밥상을 즐길 수 있다. 해바라기 씨가 들어간 도토리묵과 매일 아침 만드는 손두부를 등 시골건강밥상을 내놓는다. 꿈꾸는풍뎅이 학교에서는 향토절기문화교육, 친환경 제품 만들기, 숲속교실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365일 즐기는 농촌체험관광 포털 ‘웰촌’
'웰촌' 웹사이트에서는 전국 농촌체험휴양마을이 등록돼 각종 정보 및 서비스를 살펴볼 수 있다. 특정마을 소개 및 체험 프로그램, 숙박·캠핑, 음식·특산물 등은 물론 인근 관광지와 맛집까지 소개한다. 사이트 내 추천 여행코스와 네티즌 여행코스를 참고하면 일정을 잡는 데 수월할 것이다. 나만의 색다른 여행코스를 만드는 서비스와 농촌여행 스탬프 투어 등 이벤트 소식도 제공한다.
백십 년 만의 무더위라고 하는 폭염이 계속되는 요즘이다. 한여름이니 아이들도 방학을 맞았다. 유치원생인 손녀와 어린이집에 다니는 손자도 일주일간 집에서 쉬게 되었다.
얼마 전까지 전업주부였던 며느리가 직장에 나가고 있다. 다행히 아침에 큰아이를 유치원 통원버스에 태우고 작은아이는 어린이집에 보낸 후 출근하고 아이들 끝나는 시간 전인 4시에 퇴근하는 직장이라 무리 없이 지내고 있었는데 이제 문제가 생겼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 미술 하는 날과 발레 하는 날만 유치원에서 손녀를 픽업하여 학원에 보내는 임무를 갖고 있었는데 이제 방학을 맞아 유치원과 어린이집에 안 가는 아이들을 며느리가 퇴근해 올 때까지 돌봐야만 하게 되었다.
물론 예쁜 손녀 손자를 매일 볼 수 있는 건 행복하지만, 시니어가 된 이후 내 일정도 만만치 않게 바빠서 걱정이었다. 그래도 무엇보다 중요한 건 우리 손녀 손자 봐주는 일이므로 다른 일정은 당분간 모두 보류되었다.
생각해 보니 여태까지 아이들에게 음식을 만들어 준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제 어미가 알아서 했기 때문에 나는 그냥 예뻐하기만 하면 되었는데 이제 방학 일주일 동안 먹이고 씻기는 일이 다 내 차례가 되어서 난감했다. 아들이 어릴 땐 좋은 음식만 먹인다고 요리 연구도 꽤 했는데 너무 오랫동안 아기들을 위한 음식을 해보지 않아 서툴렀고 먹지 않으려는 작은아이 밥 먹이는 일도 큰 난관이었다.
두 아이 돌보기가 매우 힘들 거라는 며느리의 조언대로 아침 식사 후에 키즈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아이들이 좋아한다는 키즈카페의 실상을 알고 나는 좀 놀랐다. 우리 어릴 땐 방학이 되면 골목길에 친구들이 모여서 소꿉놀이도 하고 술래잡기 등을 하며 하루를 보냈는데 요즘 아이들이 좋아한다는 키즈카페는 비용이 만만치 않게 들었다.
두 아이를 데리고 모 백화점 키즈카페에 갔다. 요 녀석들은 이전에도 와봤는지 무척 신났고 즐거워했다. 먼저 입장료는 한 시간에 8.000원이고 십분 초과마다 1.000원씩 추가된다고 한다. 보통 아이들이 두세 시간은 뛰어노니 두 아이의 놀이 비용이 꽤 나갔다.
물론 쾌적한 환경에 퍼즐이나 블록 등 장난감도 구비되어있고 볼 풀이나 안전하게 뛰어놀 수 있는 시설이 되어 있으므로 아이들도 좋아하고 엄마에게도 휴식을 줄 수 있다고 한다.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뛰어놀던 내 어릴 적과는 매우 다른 놀이문화다. 점심을 사 먹이고 아이스크림까지 먹은 후 집에 돌아오는 과정이 며칠 계속되었다.
온종일 아이들과 놀아주는 것도 힘에 부치니 역시 나이는 못 속인다는 말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래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녀 손자이니 기쁜 마음으로 돌보지만 이렇게 방학 동안 봐줄 사람 없는 맞벌이 부부의 경우 어찌하는지 걱정스러워 며느리에게 물었더니 다 방법은 있었다.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 방학이라도 선생님들이 순번을 정해 맞벌이 자녀를 위해 출근하는 제도가 있다는 것이다. 천만다행이라는 생각과 이런 복지제도를 정부 차원에서 잘 운영해서 걱정 없이 아기들을 낳아 기를 수 있는 제도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돌 봐줄 사람 없는 맞벌이 가정 아이들도 안심하고 유치원에서 보호받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월요일부터 닷새 동안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이런 북새통을 며느리는 매일 겪고 있을 테니 참 대견하고 고맙다. 피곤하기도 했지만, 오롯이 내 것이었던 아이들과의 시간이 행복했다. 이제 방학이 끝나 아이들도 일상으로 돌아갔다. 유치원과 어린이집에서 친구들과 반갑게 만나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 아기들을 생각하니 즐거워서 미소가 계속 피어난다.
얼마 전 드디어 매미의 노랫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조용하던 동네에 갑자기 여름이 왔다고 알려주는 듯 매미가 일제히 소리를 냈다. 우리 동네는 산 밑이어선지 뒷동네 숲속에 여름이면 매미의 노랫소리로 가득했고 아파트 마당에도 시끄러울 정도로 많은 매미가 노래를 불렀다.
아들이 어릴 적, 친구들과 매미채를 들고 매미를 잡으며 뛰어노는 모습을 보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언젠가는 지인이 자기네 동네에는 매미가 없는데 아이의 여름방학 숙제로 곤충채집이 있다며 우리 아파트에 와서 아이들이 잡은 매미를 가져가기도 했다. 지인은 숙제를 무사히 마칠 수 있어 좋았고 동네 아이들은 아줌마가 사준 아이스크림에 즐거웠던 추억이 있다.
매미가 지천이니 그렇게 잡는 걸 개의치 않았는데 사실 매미의 일생을 알면 함부로 할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매미는 알에서 애벌레로 변한 후 땅속에 들어가 나무즙을 빨아 먹으며 7년을 기다린다고 한다. 7년이나 땅속에서 지내다 드디어 지상에 나오면 2주나 한 달 정도 살다가 생을 마감한다니 참 안쓰럽고 함부로 대하면 안 될 것 같은 곤충이다.
소리를 내는 매미는 수컷으로 7년 동안의 보상이라도 받을 듯 짝짓기할 암컷을 찾으려 그렇게 노래를 부른 후 짝짓기 후 죽는 운명이다. 암매미는 산란관이 있어 소리 내지는 못하고 짝짓기 후 많은 알을 나무에 낳고 죽는다고 한다. 그렇게 그들의 종족 보존의 의무는 지켜지는 것이다.
7년을 기다려 세상에 나와 두어 주를 살고 죽는다니 애처롭기도 하고 얼마나 치열하게 매미의 본분을 다하려고 노력할지 안타깝기도 하다. 저렇게 시끄러울 정도로 소리를 내는 건 아직 짝을 찾지 못해서라니 매미 소리를 즐기긴 하지만 마음 아픈 일이다.
잘 들어보면 매미의 소리엔 패턴이 있다. ‘맴맴맴맴 매에에에~’를 반복한다. 소리는 청량하고 울림이 크다. 거실에 앉아 차 한 잔을 마시며 듣는 매미의 노랫소리는 여름이 왔음을 알려주는 한편의 세레나데 같다. 멀리서 울어도 그 소리는 정확하게 귓가에 머문다.
집안일을 하던 중이었다. 갑자기 너무나 큰 매미 소리에 깜짝 놀랐다. 살펴보니 거실 방충망에 매미 한 마리가 붙어서 큰 소리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다. 라디오 볼륨을 크게 한 것처럼 집안이 울렸다. 건너편 숲에서 우리 집 창 방충망까지 날아온 매미가 반가웠다. 살포시 마주 보고 앉아 날카롭기도 하고 청량하기도 한 매미의 세레나데를 들었다. 내가 마주 보고 있는데도 계속 울어대서 여기는 암매미가 없는데 어쩌지? 하며 방충망을 톡 건드리니 포르르 날아가 버렸다. 여름 소식을 좀 더 들을 걸 조금 후회하며 여름이 왔음을 알려주는 전령사 매미의 존재가 고맙게 느껴졌다.
정해진 운명에 순응하며 사는 곤충의 일생처럼 사람도 사는 동안 후회 없는 아름다운 삶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용산 미 8군이 평택 캠프 험프리로 완전히 이전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주둔한 지 64년 만의 일이라고 한다. 2003년 故 노무현 대통령이 9조 원에 달하는 이전 비용을 조건으로 미8군 평택 이전을 요구한지 15년 만이다.
필자는 미8군이 있던 용산에서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을 보냈다. 그 후에도 근무지는 달랐지만, 미군과 같이 근무하는 한국군인 카투사로 근무했기 때문에 미8군과는 인연이 깊다.
지금은 한국군 부대로 이관한 지역이 많지만, 용산에는 미8군 총사령부 부지 외에도 미군이 주둔한 부대가 여기저기 산재해 있었다. 필자가 살던 주택가에도 있었다. 미군 부대는 특유의 높은 시멘트 블록 담으로 둘러쳐 있었다. 안쪽은 안 보이지만, 가끔 미군들이 인근에 사는 어린아이들에게 미8군 마크가 들어간 팩의 우유며 초콜릿, 과자 등을 나눠주기도 했다. 그래서 빨간색과 하연색의 팔각 마크는 친숙한 미8군의 상징이었다. 인근에 사는 사람 중에는 미8군 식당이나 군무원으로 근무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친구 아버지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식당에서 근무한 덕에 그 집에 가면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었다.
필자는 군에 입대하여 증평 훈련소 6주 과정을 마치고 자대 배치를 받을 때 카투사로 발령이 났다. 대부분의 훈련병은 새 옷으로 갈아입고 무거운 장비를 담은 더플 백을 메고 나왔는데 카투사로 발령받은 사람들은 맨손으로 훈련소를 걸어 나왔다. 미군이 새 옷과 장비를 지급해주기 때문이다. 훈련소에서 바로 간 곳이 평택 캠프 험프리이다. 미군들이 주둔하고 있는 군부대이다. 여기서 다시 4주간 기초 영어와 교육 훈련을 받는 것이다. 지금의 캠프 험프리는 여의도 5배 규모로 확장하고 건물도 다시 지어 마치 소도시 정도가 되는 모양이다. 전 세계 미군기지 중에 가장 훌륭한 시설을 자랑한다. 북한의 장사정포 사거리에서 벗어나 용산보다 안전하고 인근 오산 공군기지와 더불어 작전 효율도 높아졌다.
제대 후 대학교를 졸업하고 야간 대학원을 다닐 때 정시에 퇴근하는 회사를 찾다 보니 미국 국방성 소속 기관에 잠시 근무한 적이 있다. 카투사에서 익힌 영어 실력 덕분에 USO, 미국 문화원 등 이력서만 내면 합격이었다. 그때만 해도 미8군 드래곤호텔에 드나드는 것만으로도 신분을 자랑하던 때였다. 현직에 있던 고위직 관료들이 드나들었다. 패티킴, 조용필, 신중현 등 우리나라 대중음악인들도 그곳에서 경력을 쌓았다.
용산은 미군기지 때문에 발전이 느렸다. 한강을 건너 남산까지 가는 길에 삼각지부터 미8군이 긴 담을 하고 있어 상권이 끊어진 것이다. 이태원으로 가는 길도 마찬가지이다. 아버지는 용산은 북한이 다시 도발하게 되면 용산은 미8군 사령부와 국방부 등이 있어 가장 먼저 불바다가 될 수 있으므로 멀리 떨어져 살라는 말씀을 종종 하셨다. 국방부가 이전했고 이제 미8군이 떠났으니 용산은 다시 태어날 것이다.
시집간 딸이 친정 부모를 생각해서 삼척으로 놀러 가자고 한다. ‘아니 웬 삼척!’ 삼척 하면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내게는 탄광이다. 삼척, 정선, 사북, 고환 일대의 탄광 지역 벨트라인이다. 업무차 여러 번 가 본 곳이다. 뒤이어 파노라마처럼 연상되는 기억들의 바탕에는 석탄이 있다. 수십 년 전의 기억이지만 어제처럼 또렷하다. 기차역 주위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던 석탄무더기 하며 시커먼 도랑물, 검은 길바닥 그리고 지하 600m 수직갱도 내에서 석탄을 캐내던 광부를 직접 만났던 일들이다. 광부라는 직업이 얼마나 고되고 위험한 직업인지 뼈저리게 느꼈다. 한마디로 삼척의 기억은 관광지로서는 ‘아니올시다’였다. 어디 갈 곳이 없어서 탄광촌에 놀러 가나! 선 듯 내키지 않았다. 딸이 시큰둥해 있는 내 표정을 재빠르게 읽었다.
“아빠, 거기에서 해양레일바이크를 타고 바다가 보이는 해변 옆으로 달리는데 경치가 아주 좋대요. 멋진 추억이 될 거예요.”
우리나라 석탄 광산은 거의 문을 닫았다. 탄광 관련으로 살던 사람들이 대부분 살기 위해 떠나 인구는 절반으로 반 토막이 나고 지역경제는 바닥을 치고 있다는 뉴스는 오래전에 접했다. 정부나 지자체에서 새로운 생존 산업으로 관광산업을 부양하고 있다는 희망찬 이야기도 물론 들은 적은 있었다. ‘그래! 예전과 많이 달라졌을 거야. 예전의 고정관념에 젖어 변화된 오늘을 외면하는 것도 외눈박이 사람이지. 딸이 가자고 할 때 따라나서야지 자꾸 손사래만 치다가는 영영 어디 가자는 소리를 안 할지도 모르지.’ 얼굴에 환한 표정을 억지라도 지으며 좋다고 가자고 했다.
사실 레일바이크는 경북 문경에서 타 본 적이 있는데 아주 좋은 인상으로 남아있다. 돈을 내고도 돈이 아깝지 않을 때가 있고 본전 생각 날 정도로 돈이 아깝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다. 그런데 문경의 레일바이크는 언제 집안 식구들을 데리고 다시 와 봐야겠다는 생각을 한 곳으로 좋은 기억이 남아있다. 아마 집에 와서 아이들한테도 자랑을 여러 번 했던 것 같다.
해양레일바이크를 타는 날은 25~28도 정도로 약간 더웠지만, 맑고 청명했다. 한여름에 휴가를 떠나지 말고 지금이 돌아다니기 참 좋은 날이구나 하는 걸 새삼 느꼈다. 레일바이크는 총길이 5.4km로 복선으로 설치되어있었다. 한쪽은 삼척시 근덕면 궁촌정거장에서 출발하고 반대편에서는 용화정거장에서 출발한다. 궁촌정거장에서 오후 1시에 출발하는 것으로 예약을 하고 갔다. 예약자 우선이라는 팻말에 힘입어 줄지어 기다리는 사람들을 제치고 앞으로 갈 때는 예약문화에 힘입어 끗발이라도 있는 것처럼 우쭐했다.
레일바이크의 길은 약간의 경사가 있어야 오르막에는 힘도 들고 내리막에는 관성의 힘으로 달리는 스릴이 있다. 궁촌정거장 쪽이 높아서 수월하게 용화정거장 쪽으로 가기 쉽다고 인터넷에서 정보를 검색한 딸이 궁촌정거장을 택했다. 역시 이런 것까지 계산하는 젊은이들이 한 수 위다. 출발 전에 안전벨트를 매고 브레이크 작동법과 페달 밟는 법을 알려준다. 행인과 다른 차들이 들어올 수 없는 정해진 레일 위로만 달리니 핸들 조작은 아예 필요 없고 알려주는 주의사항만 잘 지키면 노인이나 아이들도 탈 수 있고 위험성도 없다.
사위와 딸 그리고 우리 둘 부부가 페달을 밟으니 레일 바이크는 앞으로 씩씩하게 잘 나간다. 브레이크는 유압으로 작동되는데 아주 말을 잘 듣는다. 솔밭 사이로 레일바이크가 달린다. 눈을 돌려 좌측을 보니 푸른 바다는 하얀 파도를 연실 토해내고 모래 백사장 위에는 상인들이 여름 한 철 피서객을 맞을 준비에 바쁘다. 오른쪽은 육지 쪽이다. 논밭과 집들이 보이고 도로에는 차들이 씽씽 우리와 함께 내달린다.
중간쯤에 정거장이라는 이름의 휴게소가 있다. 화장실도 다녀오고 주위경치를 배경삼아 사진도 찍으라고 자유 시간을 주는 곳이다. 아이스크림이 동이 나게 팔리고 출출한 손님들을 유혹하는 핫도그와 달달한 과자가 가격이 비싼데도 잘 팔린다. 이렇게 잘 팔리는 가게 처음 보겠다고 다들 한마디씩 한다. 역시 장사는 잘 팔리는 목이 으뜸이다.
20여 분 쉬고 나면 출발하라는 신호가 떨어진다. 타고 온 레일바이크에 올라야 한다. 또 한참을 달리면 터널이 보인다. 이 지역의 영웅 황영조 선수를 터널 입구에 크게 내걸었다. 터널 내부는 해양도시의 특성을 살린 물고기 종류의 루미나리에와 각종 레이저 쇼가 연출된다. 다른 레일바이크 코스에는 없는 독특함이다. 동굴 안이라 서늘한 감이 있는 데다가 레일바이크 바퀴와 레일이 마찰하는 쇠가 부딪히는 기계음이 동굴 속이라 제법 커서 무서움마저 든다.
중간중간의 포토존에는 카메라가 설치되어 자동으로 사진을 찍는다. 도착해서 내가 타고 온 바이크의 번호만 말하면 촬영된 사진을 보여준다. 사진이 마음에 들면 찾고 아니면 말면 된다. 처음이라 몰랐는데 포토존이라고 표시된 곳에서는 폼을 좀 잡을 걸 하고 후회했다.
1시간의 해양레일바이크의 탑승이 끝났다. 옛날 향수를 자극하는 기차, 레일, 바다, 솔밭에다가 쇠가 부딪치는 소리. 아이들의 재잘거림과 손뼉 소리, 맞은편에서 오는 이름 모르는 나와 같은 관광객끼리 손 흔드는 인사 모두가 좋았다. 2014년 ‘한국관광의 별’에 선정된 관광 상품이란다. 삼척은 이제 탄광 도시가 아니고 해양관광의 도시로 탈바꿈에 성공했다. 열심히 일한 사람 떠나라고 한다. 해외여행도 좋지만 국내 여행도 좋은 곳이 많다. 관광객과 지역민들이 서로 도움이 되고 하고 나아가 해외 관광객도 불러 모았으면 좋겠다.
1970년대, 육상 투척 종목 불모지인 우리나라에서 깜짝 스타가 등장했다. 1970년 방콕 아시안게임,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 투포환 종목에서 금메달을 휩쓴 ‘아시아의 마녀’ 백옥자(68)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어쩌다 그에게 마녀라는 수식어가 붙었을까? 현재 대한육상연맹 부회장으로 있는 그를 만나 답을 들을 수 있었다.
부모님 몰래 시작한 투포환
남들보다 큰 키와 순발력, 어렸을 때부터 남다른 운동신경과 체격을 갖춘 백옥자는 중학생 때부터 농구와 배구를 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구기 종목도 꾸준히 했으면 좋은 성적을 거뒀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왜 농구와 배구에서 손을 떼고 투포환을 시작했을까. 그 이유가 궁금했다.
“처음에는 투포환이 뭔지도 몰랐어요. 어린 마음에 올림픽에는 나가고 싶은데 팀 운동보단 개인 운동을 해서 나가는 게 빠르겠다 싶어서 도전한 거죠. 때마침 인천 지역 신인발굴대회가 있었는데 체육 선생님이 투포환을 해보라며 권유하더라고요.”
그렇게 중학생 소녀의 손에 4kg의 둥근 쇳덩이가 쥐어졌다. 첫 만남이 썩 좋지는 않았다. 하필 해도 괴팍해 보이는 종목이라니… 집에서도 ‘이상한 운동’ 하지 말라며 반대했다.
“처음엔 도시락도 안 싸줬어요. 그래서 용돈으로 자장면, 우동을 사 먹으며 끼니를 해결했죠. 또 훈련하느라 늦는 날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집으로 전력 질주했어요. 1분이라도 일찍 들어가서 운동 안 했다고 거짓말하려고요.”
몰래 운동을 이어가던 그는 중학교 3학년, 신인발굴대회에서 신인선수로 발탁됐다. 한국신기록이었다. 언론은 그를 육상 유망주로 소개하며 보도하기 바빴다. 다행히도 이 사건은 부모님의 마음을 돌려놓는 계기가 됐다. 부모의 인정을 받은 그는 곧바로 태릉선수촌에 들어갔다. 1968년 멕시코올림픽 출전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세계의 벽은 높았다. 별다른 성과 없이 귀국했지만, 육상연맹은 그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놓아주지 않았다. 결국, 또다시 선수촌행이었다.
“집이 인천이었기 때문에 태릉선수촌이 곧 제 집이었죠. 그 당시만 해도 교통이 안 좋아서 왔다 갔다 하기가 힘들었거든요. 그래서 경기가 잡히면 전화로 ‘엄마 나 지금 중국 가’, ‘지금 싱가포르 가’ 하면서 당일 통보했죠.”
아시안게임 2연패, 전성기를 맞이하다
1970년대는 그야말로 백옥자의 전성기였다. 1970년 방콕 아시안게임 땐 14m 57cm를 던져 금메달을 땄다. 이뿐만 아니라 재미 삼아 출전했던 투원반 종목에서도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동인천역 광장에서 인천시장의 영접을 받았어요. 검은 지프를 타고 시청(현 중구청)까지 카퍼레이드를 했죠.” 매번 경신되는 기록과 메달 행진에 세계도 그를 주목했다. 하지만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을 땐 ‘연애 중이라 성적이 안 좋다’, ‘백옥자의 시대는 지났다’ 등 그에게 쏠린 기대만큼 억측성 보도도 함께 쏟아졌다.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 백옥자는 그동안의 설움을 떨쳐내듯 또 한 번 신기록을 세우는 데 성공했다. 당시 그는 신우염을 앓고 있었고 무릎 부상으로 인해 컨디션이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심지어 중화인민공화국(현 중국)이 출전을 알리면서 체격이 좋은 선수들을 대거 내보냈다. 자연스럽게 언론도 백옥자의 2연패냐, 처음 출전한 중국의 메달이냐를 놓고 저울질을 했다.
“다들 180cm가 넘었어요. 거기에 체격까지 엄청나니까 거인 같았죠. 안 그래도 긴장해 있는데 더 무서운 소문까지 돌았어요. 북한도 그 당시 처음 출전했는데 잘하는 남한 선수들을 납치해가니 조심하라고요.(웃음)”
‘삐빅’ 하는 호각소리에 백옥자가 있는 힘껏 포환을 던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진 지점은 16m 28cm. 아시아 신기록이었다. 테헤란 아시안게임은 아시아 신기록을 세웠다는 점에서도 특별하지만, 자신의 별명 ‘아시아의 마녀’가 탄생한 대회이기 때문에 더욱 각별하다고 그는 말한다.
“싱가포르 기자가 처음 쓰기 시작한 단어예요. 경기 끝나고 저한테 오더니 ‘마녀’라고 써도 되겠냐고 물어보더라고요. 마녀는 좀 그렇지 않나… 했더니 자기 나라에선 마녀가 무서운 이미지가 아니라 마법을 부리는, 멋있는 존재라고 괜찮다는 거예요.(웃음) 에라 모르겠다, 그래라 한 거죠. 그렇게 ‘아시아의 마녀’가 탄생했어요.”
그에게 ‘아시아의 마녀’라는 호칭이 마음에 드는지 물어봤다.
“처음엔 어색했는데 차라리 여신이니 미녀니 하는 것보단 마녀가 나은 것 같아요.(웃음) 그 기자 덕분에 지금까지 불리는 멋있는 호칭이 생겼으니 오히려 고맙죠.”
2연패를 하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청와대 초청을 받았다. 만찬회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딸 박근혜가 ‘결혼은 한국 남자와 하고 미국으로 이민 가지 말고 꼭 한국에 살라’고 당부했단다. 당시 잘나가던 스포츠 스타는 거의 미국으로 이민을 가는 추세였기 때문에 한국 투척 종목의 일인자이던 백옥자마저 빼앗기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아니었을까.
꿈의 광장이자 지옥이었던 선수촌
아시안게임 2연패는 그의 엄청난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태릉선수촌에서도 그는 이미 유명한 연습벌레였다. 비가 오는 날에도, 눈이 쌓인 날에도 쉬지 않았다. 그가 연습했던 자리엔 포탄을 맞은 것처럼 움푹 패인 자국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 자리를 ‘백옥자 자리’라고 불렀다 한다.
“겨울엔 정말 고통스러웠어요. 투포환이라는 게 포환을 턱 아래에 대고 던져야 하거든요. 꽁꽁 언 모래들이 포환에 묻어서 던질 때마다 턱을 쓸고 갔죠. 그럼 턱이 다 찢어져서 피가 나고 그랬어요.”
인터뷰 도중 그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손이 엄청 크기도 했지만, 오른손과 왼손이 좀 달라 보였기 때문이다.
“손 한번 보여주실 수 있으세요?”
“전 누가 손 보여 달라 그러면 왼쪽 손을 보여줘요. 오른손은 못생겼으니깐.(웃음)”
그의 오른손엔 당시 노력한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검지, 중지, 약지는 4kg 포환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듯 옆으로 휘어져 있었다. 말 못할 고통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맞기도 많이 맞았다. 체벌을 받아 엉덩이엔 피멍이 들었고 뺨도 맞아가며 연습했다.
“지금은 인권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 당시만 해도 ‘누구한테 말해야겠다’, ‘신고해야겠다’ 이런 생각은 하지도 못했어요. 그냥 더 좋은 성적을 거두라고 그러나보다 이렇게 생각했죠.”
힘들 땐 몰래 선수촌을 탈출하기도 했다. 들어오는 길엔 후배를 위해 쭈쭈바를 품에 안고 들어왔다.
“외출하려면 도장으로 허락을 받아야 했어요. 근데 못 받았을 땐 경비 아저씨한테 살짝 윙크 한번 날리는 거죠. 그럼 아저씨가 이해해주시고 슬쩍 내보내주셨어요.(웃음) 지금은 선수촌 안에서도 아이스크림이니 우유니 자유롭게 먹을 수 있는데 그때만 해도 그럴 수 없었거든요. 우유 하나 더 먹으려면 아주머니께 인사를 100번은 해야 얻을 수 있었어요.”
선수촌의 규율은 까다롭기로 유명했다. 특히 남자와 여자가 같이 있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남자와 여자의 점심시간이 달랐고 휴게실에 있는 텔레비전을 볼 때도 함께 있을 수 없었다. 만약 같이 있는 장면이 목격되는 날에는 풍기문란이라는 명목하에 퇴촌이라는 무시무시한 벌을 받아야 했다. 그렇게 감시가 빡빡한 일상생활에서도 그의 유일한 해방구가 있었으니, 바로 국제대회를 나가는 날이었다.
“국제대회를 나가면 경기장 주변에 항상 클럽이 있었어요. 경기가 끝나면 할 것도 없고 혼자 심심하니까 클럽에 가서 노래도 듣고 했죠. 같이 대회 나간 선배들이 ‘백옥자 어디 있냐’ 하면서 찾으면 후배들이 ‘시끄러운 곳 가면 찾을 수 있다’ 이렇게 말하곤 했대요.”
인생 3막은 지금부터
20대 중반 건국대학교 체육과 동기인 김진도 씨와 결혼한 그는 은퇴 이후 남편을 따라 교직생활을 했다. 더불어 여자 농구선수인 딸 김계령 씨를 돌보느라 여러모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고. 근데 이제는 더 바빠졌단다. 얼마 전 부천대학교에서 은퇴한 그는 대한육상연맹 부회장으로 선출돼 새로운 출발을 했다.
“옛날 아시안게임 때 만났던 선수들도 이제는 임원이 돼서 한국을 방문하는데 감회가 색다르더라고요. 저도 더 늙기 전에 연맹에 보탬이 되는 부분은 돕고 그래야지요. 또 새로운 육상 인재를 발굴하는 게 목표예요. 우리나라 육상도 어서 부흥기를 맞이했으면 좋겠어요.”
채우기보다 비우기가 더 어렵다. 채우는 쪽으로 발육한 욕망의 관성 때문이다. 채우면 채울수록 더 허기지는 게 욕심이지 않던가. 지긋이 나이 들어서도 사람은 때로 갈피없이 흔들린다. ‘비우기’에 능하지 않아서다.
귀촌은 흔히 이 ‘비우기’를 구현할 찬스로 쓰인다. 욕망의 경기장인 도시를 벗어나 시골에서 가급적 빈 마음으로 생활을 운영해 한결 만족스런 여생을 누리겠다는 의도, 귀촌한 시니어의 내심엔 대체로 그런 게 들어 있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게 인생. 시간의 골목골목을 통과하는 사이에 그려지는 굴곡의 궤적들. 남들 눈엔 평범해 보이는 인생에도 고유의 행적이라는 게 있으며, 기복과 부침의 과거사가 서려 있게 마련이다. 예순의 나이에 접어든 임미숙 씨의 행장도 예외가 아니다.
대학에서 의상학을 전공한 그녀는 엉뚱하게도 건설업에 뛰어들어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사업은 순풍을 만나 쾌속 질주! 이 야무진 여자는 진로를 바꿔 쇼핑몰 사업에 자금을 투자했다. 이 역시 순항. 50명의 직원을 거느릴 정도로 규모를 키웠더란다. 그러다가 빙벽을 만나 한순간에 추락했다. IMF의 파랑에 침몰했던 것. 파도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엔 부채만 산더미처럼 남았다지. 간신히 부채를 정리한 그녀는 오랜 거점이었던 대구를 떠나 서울로 이주, 친구와 함께 커피숍을 차렸다. 그러나 그마저 신통치 않았다. 어이 하나? 고심이 첩첩 겹쳤을 테지.
“사업을 키워나갈 땐 남들의 칭찬도 많이 들었어요. 체구도 조그마한 게 통도 크고 간도 크다고. 자부심도 넘쳤죠. 하지만 추락하고 보니 심하게 주눅이 들더라고요. 지나온 세월을 찬찬히 돌아보게 됐어요. 사업상의 성취가 있을 때 누렸던 만족감, 행복감, 이런 것들이 사실은 근거가 부실한 자부심에 불과했다는 걸 알겠더라고요. 남들의 찬사도, 행복감도 단순히 돈의 힘에서 나온 거라는 걸 깨닫고 우울했어요. 본질적인 가치를 생각하기 시작했던 거죠. 물질적 조건에 매이지 않고 제대로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 했어요. 그 결론이 귀촌이었죠.”
물적 토대를 잃은 뒤, 임미숙 씨는 삶이라는 숙제를 새로운 방식으로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조리를 따져 맹점을 찾아냈던 것 같다. 그동안 나를 기쁘게 했던 건 나 자신이 아니라 돈이었구나, 내가 나를 행복하게 해준 게 아니라 돈이 나를 행복하게 해줬구나, 미련한 나여! 보라! 모래 위에 지은 가건물처럼, 이토록 빈약한 행복은 종단엔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게 아니겠느냐? 그런 인식이 머릿속을 환하게 흘렀던 모양이다. 그게 터닝 포인트였다. 그녀가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후미진 산골로 내려온 건 2011년의 일. 당시 나이 53세.
“시골의 그 무엇에 끌렸죠?”
“조용한 시골 풍경, 울퉁불퉁한 돌담장, 담장 아래 피어나는 봉숭아며 채송화, 그런 게 좋았어요. 한적한 시골에 근사한 집을 짓고 살아보고 싶었어요. 노래 가사처럼,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음, 그런 꿈이었죠. 절실하게 꿈꾸면 언젠가는 이루어진다죠? 이 산골에 들어오며 드디어 원했던 삶이 시작된다는 생각으로 즐거웠어요.”
“경제활동에 한계가 있는 게 시골이죠. 생계 대책도 미리 세워둔 귀촌이었겠죠?”
“미리? 그건 아니었고 내려가서 부닥쳐보자, 까짓것 도시에서 이미 실패했는데, 더 이상 잃을 게 뭐람! 그쯤의 생각뿐이었죠.”
“비에 젖은 사람은 더 이상 비가 두렵지 않은 법이죠.”
“결심은 굳었어요. 귀촌을 계기로 싹 비우고 살자는 것. 좋다, 이젠 가늘게 먹고 가늘게 살자! 그 생각 외 별 고민도 궁리도 하질 않았어요.”
외양간을 개조한 사랑채 안 풍경
거참, 두둑한 배짱이렷다. 가녀린 식물을 닮은 외양이지만 내부엔 깡이 서려 있는 모양이다. 천성의 산물이거나 세파를 거치며 단련된 근성이겠지. 물론 그녀가 철부지처럼 엄벙덤벙 무작정 산골에 덤벼든 건 아니었다. 믿을 만한 근거 하나가 있었으니 말이다. 선친이 남겨둔 1500평 규모의 땅과 집이 그것. 생시에 젖소 목장을 하려고 사두었던 부지로 오랫동안 방치된 상태였다. 그녀는 부친이 작고하기 전까지의 25년 세월을 심청이처럼 홀아버지를 모시고 살며 알뜰히 봉양했단다. 갸륵한 행장에 응분의 선물이 주어진 셈이다.
산등성이 외딴 곳에 있는 임미숙 씨의 거처는 수려하다. 갖가지 초목이 들어찬 터전은 널찍하다. 집의 외벽엔 흰 칠을 해 흐린 날에도 태깔이 밝다. 돌덩이와 흙, 목재, 통유리를 적재적소에 옹골차게 도입한 센스도 예사롭지 않다. 집 내부에도 미학과 리듬이 생동한다. 외양간을 개조한 사랑채 안 풍경은 특히나 멋스럽게 튄다. 골방의 절반을 침대처럼 높이 띄워 구들을 놓은 정경은 이색이며, 1인용 간이식 사우나탕은 성냥갑처럼 비좁지만 기발하다. 공간을 기능적으로 분할한 하얀 벽들은 이국정서를 야기한다.
햐, 한마디로 매력적인 집이다. 재활용 자재나 자연에서 무상으로 얻어온 재료를 적극 끌어들였다는 점에서는 참신하며 창의적이다. 별반 큰돈을 들이지 않은 대신 공은 잔뜩 들였다지. 이 집은 원래 금방이라도 와르르 허물어질 듯 퇴락한 고가였다. 어떻게든 손을 봐야 거주가 가능할 상황이었다. 개축을 할까, 자그마하게 신축을 할까, 그녀는 양자를 놓고 고민하다 귀농 관련 인터넷 카페 회원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허름하게 기울어진 시골집 사진과 함께 글을 올려 조언을 구했어요. 용케 목수 한 분과 연결이 됐죠. 시골집을 철거하는 건 너무도 아깝다, 리모델링이 좋지 않겠는가? 그분의 얘기가 그랬어요. 바로 의기투합해 공사에 착수했죠. 제가 원래 인복이 많은데요, 저랑 코드가 맞는 유능한 목수를 만난 것도 행운이었죠. 비용은 3000만 원이 채 들지 않았지만 저의 취향이 충실하게 반영된 집, 예쁘고 실용적인 집이 한 달 만에 완성됐던 거예요.”
“시골집을 개축하느니 신축이 낫다는 경험담들도 많아요. 비용이나 편의성, 완성도를 따질 때 그렇다는 거죠.”
“귀촌 희망자들에게 집짓기에 관한 조언을 한다면?”
“동네 사람들에게 기죽지 않으려고 크고 화려한 집을 짓는 경우가 흔하지만, 반드시 후회해요. 유지와 관리에 진절머리를 내게 돼 있어요. 시골에서의 집이란 주로 잠자는 공간으로 쓰여요. 마당에서 활동하는 시간이 많으니까. 가급적 작게 짓는 게 요령이죠.”
귀촌으로 얻은 값진 선물들
예쁜 집에 사는 된장녀. 주변 사람들은 임 씨를 흔히 그렇게 일컫는다. 그녀의 전공이 된장 사업이기 때문이다. 귀촌 이듬해부터 된장을 담갔으니 꽤 많은 세월이 흘렀다. 된장을 만드는 기술도 판로도 평판도 이젠 탄탄한 수준에 올라섰다.
된장은 일용할 양식이다. 아이스크림을 많이 먹으면 뚱뚱해져 식인종에게 잡혀 먹힐 수 있다. 된장은 탈날 게 없다. 누구나 좋아하며 누구나 먹는다. 비교적 수월하게 제조 기술을 익힐 수도 있다. 해서, 귀촌·귀농을 한 이들이 쉬 된장 사업에 뛰어든다. 하지만 경쟁이 치열하다. 흑자를 보는 된장 농가가 드물다. 사정이 이러하지만 임 씨는 기세를 돋우고 있다. 지난해엔 번듯한 된장 공장도 지었다. 현재의 연 매출은 5000만 원 정도. 김천 관내에 널리 알려진 강소농이다. 알찬 행진이다. 이건 단박에 쌓아진 탑이 아니다.
“어디에 갖다놔도 살아갈 여자, 제가 바로 그런 사람이에요.(웃음) 비록 돈 없이 귀촌했지만 이 시골에서 무엇을 해서건 밥은 먹을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어요. 저에게 없었던 건 돈만은 아니었어요. 농사 경험 없지, 시골 물정 모르지, 아는 사람 없지, 한마디로 무지막지한 귀촌이었죠. 그렇다면 부지런하게 배우는 게 지름길. 귀촌·귀농 교육장을 찾아다니거나 밤새워 인터넷에서 필요한 정보를 수집해 익혔어요. 주경야독식으로 부지런히 공부했어요.”
“된장 사업은 교육장에서 권장한 종목?”
“아뇨. 이미 포화상태라며 뜯어말리던데요.(웃음) 그러나 저는 된장이 적격이라 판단했죠. 처음 한동안은 남들이 비웃을까봐 몰래 혼자 된장을 만들어 지인들과 나눠 먹었어요. 그런 수련기가 길었어요. 덕분에 실력이 늘면서 작년부터는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고 있어요. 초기의 막막했던 기분은 어디론가 사라졌어요. 이제부터 본격적인 출발을 해야죠.”
“어디를 향한 출발?”
“흠. 일단은 된장 사업을 안정적 궤도에 올려놔야죠. 그렇다고 얄팍한 장사치가 되긴 싫어요. 된장을 통한 공감과 소통이 전 참 즐거워요. 저의 시골생활과 된장 이야기를 올리는 블로그로 맺어진 인연들이 많이 생겼거든요. 지역 귀농교육기관에서 가끔 강의도 하고, 견학차 찾아오는 방문자들도 많아요. ‘마음씨 예쁜 여자들’이 모인 ‘마녀 7인방’, 이 모임의 아줌마들과는 친자매 같은 정을 나누고 삽니다. 모두 귀촌한 분들이죠. 아차! 어디를 향한 출발이냐 물으셨죠? 궁극적인 목적은 여행입니다. 맘껏 여행의 자유를 누리며 살고 싶다는 것, 그럴 수 있는 기반을 빨리 다지자는 것, 이게 현재의 목표예요.”
귀촌을 통해 맺어진 믿음직한 인연들에 그녀는 기쁘다. 그건 귀촌으로 얻게 된 가장 값진 선물 아닌가. 그렇다 하더라도 외기러기처럼 일쑤 외롭지 않을까? 그녀는 독신이다.
“어서 빨리 똘똘한 마당쇠를 구하라는 성화가 빗발쳐요. 은근히 다가오는 분들도 있어요. 그러나 필이 통하는 사람이 없으니 이를 어쩌나. 일에 묻혀 사는 바람에 다른 생각을 할 겨를조차 없는 것도 사실이고요. 게다가 저에겐 병이 하나 있어요. 외로움이 없다는 것, 이건 지병일까? 외로워야 사랑의 갈증도 생길 텐데, 이거 참 문제죠?(웃음)”
“세상에 유일한 진실은 이성을 잃은 사랑에 있다. 뮈세의 말에요. 명심하시라.(웃음) 그런데 말이죠, 독신 여성의 귀촌, 이거 권장할 만한 거예요?”
“저를 보세요. 끄떡없이 잘 살고 있잖아요. 물론 표적이 될 수도 있어요.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저는 CCTV를 설치했지만, 처신을 똑떨어지게 잘하면 그만이에요. 사고가 나려면 명동 한복판에서도 나는 거 아니겠어요? 접시 물에 빠져 죽는 수도 있고 말이죠. 정 힘들면 짐 싸서 나가면 되지 뭐, 난 어디서건 잘 살 수 있어! 제게 그런 깡은 있어요.(웃음)”
시골생활의 새로운 문법과 맥락을 익히는 일. 이건 오솔길을 거니는 일과 달리 손쉬운 여정이 아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가듯, 시련도 불안도 나그네처럼 다 지나가게 마련이다. 길은 늘 그렇게 열린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어렸을 적 TV에서 본 사람이 맞나 싶다. 기억 속 그는 리듬을 타는 정도의 율동과 함께 수줍은 미소를 머금고 노래를 불렀다. 옆집 오빠면 딱 좋을 것 같았던 그가 오십이 넘어 대중 앞에 다시 나타났다. 중후한 매력을 내심 기대했지만 흥폭발은 기본이고 재치 넘치는 입담을 막기가 어려울 정도다. 1980년대 중반 ‘볼리비아發 염소 창법’으로 아이돌 인기를 구가했던 가수 임병수(林炳秀·57)를 만났다. 보다 더한 실제 상황 정글생활 달인 이야기도 있으니 기대하시라!
시대를 대표하던 아이콘, 다시 돌아오다
1980년대 중반 ‘아이스크림 사랑’, ‘사랑이란 말은 너무너무 흔해’ 등으로 소녀 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가수 임병수. 그는 요즘 말로 강제 소환됐다는 표현으로 꾸준히 회자되고 있다. 잊혔던 그의 노래가 톱스타의 입을 타고 방송 전파를 탄 것. 제2의 전성기로 갈 기회가 찾아왔다.
“참 그게 운명인 것 같아요. (SBS)에서 배우 김수현씨가 제 노래 ‘약속’을 불렀어요. 그리고 (tvN)에서는 덕선이(혜리 분)와 동룡이(이동휘 분)가 ‘아이스크림 사랑’을 불렀어요. 이게 뭐지? 제 노래와 이름이 다시 나오니까요. 그때쯤 제 새 노래가 나오면 괜찮겠다고 생각은 했죠.”
밝은 웃음으로 마주한 임병수였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임병수의 목소리는 여전히 신선하고 특별했다. 타고난 음색에 볼리비아 교포 출신이라는 이국적 색채를 덧입히니 궁금증을 넘어 관심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말 그대로 혜성처럼 나타난 신인이었다. 지금으로 따지면 임병수가 딱 아이돌 스타였다.
“확 뜰 거라는 생각은 전혀 안 했죠. 가수 될 거라는 생각도, 되고 싶지도 않았어요. 깜짝 놀랐어요. 내가 노래를 좋아하고 큰 무대에 한 번 서면 좋겠다. 그렇게 막연한 꿈으로 끝날 줄 알았는데 여기까지 왔어요. 무명가수들한테 항상 미안한 이야기지만 저는 얼떨결에 가수가 된 거예요.”
아버지, 막내아들을 가수로 만들다
임병수가 아메리카 대륙을 떠나 고국에서 가수가 된 데에는 아버지의 강력한 추진력이 뒤따랐다.
“우리 아버지의 행복이 제가 사람들 앞에서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는 거였어요. 사람들이 ‘막내, 노래 잘하네요’라고 하면 아주 좋아하시고요. 저도 음악을 좋아했어요. 고등학교 축제 때 공연했던 뮤지컬 에서 주인공을 맡기도 했었거든요. 아버지는 그냥 제가 TV에 나오고 사람들이 손뼉 쳐주는 것까지만 생각하시고 한국으로 저를 보내신 것 같아요.”
뉴욕에서 대학 생활을 하고 있던 임병수에게 아버지는 LA에 사는 지인이 조만간 한국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 사람과 함께 한국으로 가서 가수가 되라는 것이 아버지의 권유였다. 임병수는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미국 동부에서 서부로 날아갔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했던가. 우여곡절 끝에 한국으로 들어왔고 임병수는 한 시대를 제대로 풍미한 가수가 됐다. 대단한 의지라기보다는 운명처럼 빨려 들어갔다. 딱 3년, 임병수의 쇼 타임. 조금은 짧았지만 말이다. 화려한 시간도 잠시. 대중 앞에 서는 시간이 줄었다. 사람들의 마음은 빠르게 변했다.
“84년, 85년, 86년에 제일 반짝거렸던 거죠. 그러니까 1집, 2집, 3집. ‘약속’, ‘아이스크림 사랑’, ‘난 어지러워요’로 활동했어요. 바쁘고 스케줄도 너무 많았는데 3년이 애매하게 그냥 지나갔어요. 왜 이렇게 됐을까 생각은 했죠. 연말 시상식을 보다가 문득 ‘내가 저기 있어야 하는데…’ 살짝 그런 생각도 했어요. 괴로웠겠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렇게까지 힘들지는 않았어요. 약간의 혼란스러움 정도였어요.”
그래도 스스로 질문을 던지곤 했다. 내가 계속 노래를 해야 하나? 그만둘까?
“내 기타랑 모든 카세트테이프, 레코드판 등등 음악이랑 관계되는 모든 것을 태우고 지나간 거 다 잊어버리자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정작 태워본 적은 없어요. 상상만 해봤죠(웃음).”
혹 생각처럼 모든 것을 태웠더라면 다시 사 모으기에 바빴을 거라고. 시대의 아이콘으로 지금도 회자될 정도로 인기 스타였지만 마음을 추스르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단다.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다 인기가 떨어지면 순간 우울증에 걸리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연예인들이 있잖아요. 그 정도는 아니었어요. 굉장히 편안하게 상황을 받아들인 것 같아요. 물론 몇 년은 이게 뭐지 했지만 죽을 만큼 괴롭지는 않았어요.”
눈에 띄는 활동을 한 것은 아니지만 꾸준하게 음반을 발표했고 본업인 가수로서의 삶과 생활을 이어나갔다. 그사이 결혼도 했고, 장성한 딸이 있으며, 가족의 생계를 위해 다양한 일을 접하며 살았다고. 지난 7월에는 ‘이름’이라는 신곡을 발표해 활발하게 팬들과 만나고 있다.
“10년 만에 신곡을 냈어요. 나름대로 많이 뛰어다니고 있어요. 트로트의 색깔이 있는 노래예요. 그런데 정통 트로트는 제가 아무리 불러도 그 맛이 안 나요. 트로트 같기는 한데 ‘어, 임병수가 부르니까 그냥 발라든데?’ 그런 분위기가 되는 것 같아요.”
나이와 인기를 좇아서 색깔을 바꾼 것 아니냐는 말들이 들리지만, 임병수의 생각은 다르다.
“10명보다는 100명이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는 것도 괜찮은 거 같아요. 진짜 나만의 색깔로 부를 수 있는 노래를 부를 기회가 생기는 거잖아요. 신곡도 부르고 제 히트곡도 부르려고요. 그리고 저는 또 라틴 음악으로 메들리도 준비해놓았습니다. 아무래도 그쪽 노래는 제가 부르는 게 훨씬 나을 거니까요(웃음).”
불모지 볼리비아를 개척하다
문득 이야기하다 보니 하고많은 나라 중에 왜 볼리비아로 이민을 갔는지 궁금해졌다. 외국을 나가기가 쉽지 않았던 시절, 볼리비아에서 날아온 청년은 신기할 따름이었다. 외국에서 왔다고 하니 부자려니 지레짐작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다.
“부모님이 모두 황해도 분들이셨어요. 우리 아버지 생각에 대한민국은 좁으니까 좀 넓은 나라로 가자, 그렇게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아버지가 브라질, 칠레, 아르헨티나, 볼리비아에 이민 신청을 했는데 볼리비아에서 먼저 연락이 왔대요. 그때는 볼리비아가 한국보다 더 잘살았어요. 제가 다섯 살이던 1965년도에 볼리비아로 떠났습니다. 부모님과 7남 3녀, 12명의 가족이 모두요.”
한국에서 떠날 때만 해도 부모님이 목욕탕과 생선 냉동 창고를 운영해 집안은 넉넉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이북 출신으로 전쟁을 겪은 부모님이 전쟁 없는 나라에서 살고 싶은 생각을 한 것 같다고 회상했다. 그렇게 떠난 임병수의 집안은 한국에서 볼리비아로 간 첫 이민 가족. 우리 교포들 사이에서는 조상으로 불린다. 그래서 한국 사람이 볼리비아로 이민을 가면 임병수의 집으로 인사를 하러 가기도 한다.
“전쟁의 두려움도 있었지만, 아버지가 모험을 좋아하셨어요. 말 한마디도 못하는 상태로 볼리비아에 가셨는데 그때 아버지가 쉰다섯이셨어요. 당시 500달러 정도를 가지고 가셨답니다.”
이민 떠난 그곳은 말 그대로 정글이었다
아버지를 따라간 볼리비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정글만이 눈앞에 펼쳐졌다.
“우리 가족은 산속으로 들어가 제재소를 했어요. 카라나비라는 지역이었어요. 한 5~6년은 산에서 살았어요. 화장실도 없고, 신발도 없었어요. 집도 그냥 원두막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벽도 없었고요. 뱀도 지나가고 개미도 지나가고 각종 생명체가 주변을 지나다녔어요. 내가 다섯 살 때부터 살았는데 열 살 무렵까지 있었어요.”
맨발로 다니는 게 익숙했던 어린 시절. 한국에서 온 이민자들이 어린 임병수에게 선물로 신발을 안겼지만 불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잘사는 교포 출신일 줄만 알았는데 타잔의 삶을 살았다고 고백했다.
“타잔한테 신발 한 번 줘봐요. 얼마나 불편하겠어요. 신발을 신고 나가도 학교에서는 벗고 돌아다니다가 집에 들어올 때쯤 다시 신고 집으로 들어갔어요. 혼날까봐요. 지금도 불편해요(웃음).”
(SBS)이 우스워 보이지 않냐며 넌지시 물었다.
“웃기죠(웃음). 냇가에 다이너마이트 하나 던져 터뜨려서 물고기는 그냥 건져 올리기만 하면 됐어요. 새도 잡아서 불에다 구워 먹고요. 에이, 저는 5년 동안 정글에서 살았잖아요. 가끔 이야기할 때마다 사람들이 저를 신기한 듯 바라봐요. 방송은 아무리 힘들어 보여도 주위에 카메라 있고 사람들도 있고 일단 조명도 있잖아요.”
정글 삶에 대한 얘기는 끝이 없었다. 키가 큰 아보카도 나무를 타고 올라가 열매를 따먹던 일, 뱀이 몸 주위를 지나간 사건, 개미 밥으로 개구리를 던져준 일 등 상상할 수 없는 정글 이야기가 무용담처럼 펼쳐졌다. 이야기할 때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한지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며 몸으로 표현하면서 이해를 도왔다.
“하여튼 좋았어요. 아쉬운 게 있다면 그때 너무 어렸다는 거죠. 우리 형들은 재밌었다고 해요. 즐긴다는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힘들어도 재밌었거든요. 그런데 거기서 제일 무서운 게 뭔지 알아요? 사람이 사람 만나는 거요. 밤에 산길 가고 있는데 빨간 불빛이 보여요. 얼마나 무서워요. 담배 피우면서 일(?) 보고 있는 거예요.”
혹시나 에서 섭외가 온다면 갈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고개를 갸우뚱한다.
“가면 본능적으로 할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못할 것도 같아요. 그때는 벌레 같은 거 손으로 막 잡고 그랬는데 이제는 무섭거든요(웃음).”
프로레슬링 선수들 의상실을 열다
5년이 흘러 12명의 대가족은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스로 떠났다. 볼리비아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스포츠는 바로 프로레슬링. 이곳에서 임병수의 가족은 레슬링 선수의 옷을 만드는 의상실을 열었다.
“볼리비아에서는 레슬링 선수들이 니트 옷감으로 된 선수복을 입어요. 우리 누나들이 옷을 잘 만든다는 소문이 나서 선수들이 옷을 맞추러 많이 왔어요.”
정글에서 내려와 도시로 이주했으나 고단한 삶은 계속됐다.
“이런 거 보면 누나들 울겠다. 왜냐면 누나들이 고생 많이 했거든요. 그러다가 의상실이 잘되니까 아버지가 여덟째 형을 독일로 보내서 섬유 기계를 사오라고 하셨어요. 섬유 관련 사업에 필요한 것인데 볼리비아에 처음으로 들어온 기계였어요.”
정글을 벗어났지만, 여전히 화장실은 없었고 방도 작아서 잠을 잘 때면 식구들이 몸을 바짝 붙이고 칼잠을 자야 했다. 누나들은 재단이 끝나면 탁상 위에 요를 깔고 잠을 청했다. 그렇게 가족들이 매달려 열심히 사업을 일궜다. 가업이 생긴 것이다. 임병수의 집에서 만들어진 원단은 인접 국가인 아르헨티나, 칠레로 팔려나갔다.
“볼리비아에서 얼마나 놀랐겠어요. 한국 사람이니까 그렇게 할 수 있는 거잖아요. 마침 그러다 볼리비아에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국가적인 제압도 있고 탄압받는 느낌? 경제 사정이 안 좋아지니까 외국 사람들을 반기지 않게 됐죠. 지금은 가업은 다 접고 각자 다른 나라에서 다른 일 하고 살아요. 저만 지금 한국에 있고요. 큰형님 세 분은 돌아가셨습니다.”
형님과 누나들은 가끔 보고 싶은 정도다. 이젠 가족이 다 떨어져 살기 때문에 다 같이 모이는 일은 더 기대하지 않는다.
“오래전에 부모님 금혼식 때 10형제들이 모두 모였어요. 농담 반 진담 반이지만 사진을 찍는 데 한 시간 걸렸다니까요. 사진을 찍으려 하면 한 명이 화장실 가고, 화장실에서 돌아오면 누가 또 잠깐 넥타이를 고쳐 매고 그래서요.”
어렸을 때 정글에서 살았던 추억 때문일까? 기회가 되면 볼리비아 나무를 수입해 사업을 해보고 싶은데 쉽지 않은 일이라고 한다. 대신 조카가 추진하고 있는 커피 사업에 도움을 주고 싶다고 했다.
“저는 되게 밝게 보이잖아요. 나쁜 것은 옆으로 밀어놓고 좋은 생각만 하려고 해요. 내가 여기 혼자 있어도 잘 버텨온 힘이에요. 이런저런 고민이 있어도 결국은 늘 음악 생각뿐이에요. 10곡, 15곡 발표할 필요 없잖아요. 한 곡 내고 노래 부르고 다시 또 만들면 되죠. 음악은 계속할 거니까요.”
그의 노래와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 보니 평생이 나그네 인생이다. 예전에 수줍었던 모습에 힘이 들어가고 더 밝아진 이유는 마음 깊이 숨겨놓은 가족에 대한 사랑과 노래를 향한 열정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