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나들이하기 좋은 5월, 이달의 추천 전시·공연·행사를 소개한다.
제20회 담양대나무축제
일정 5월 2~7일 장소 죽녹원 및 관방제림 일원
대한민국 대나무 주산지로 알려진 전라남도 담양. 가족 나들이를 계획 중이라면 담양을 주목해보자. 이곳에서는 매년 대나무 심는 날(죽취일)의 의미를 되살리고자 축제를 연다. 바로 올해로 20회를 맞이한 담양대나무축제. 6일간 진행되는 이번 축제에서는 대나무를 주제로 한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대나무 활쏘기, 대나무 뗏목타기, 대나무 액세서리 만들기, 대나무 부채 만들기 등)이 운영된다.
Weather: 오늘, 당신의 날씨는 어떤가요?
일정 5월 3일~10월 28일 장소 디뮤지엄
디뮤지엄이 2018년 첫 전시를 공개한다.
날씨를 주제로 한 이번 전시는 총 3개의 챕터(‘날씨가 말을 걸다’, ‘날씨와 대화하다’, ‘날씨를 기억하다’)로 구성된다. 25명의 아티스트가 참여해 햇살, 눈, 비, 안개, 뇌우와 같은 날씨에 담긴 이야기를 사진, 영상, 사운드, 설치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 작품으로 재조명했다. ‘오늘, 당신의 날씨는 어떤가요?’ 당신의 날씨에 관한 기억을 새로 추억해보자.
레슬러
개봉 5월 9일 장르 드라마, 코미디 감독 김대웅 출연 유해진, 나문희, 성동일, 김민재 등
포스터에 한 손에는 금메달을, 다른 한 손에는 프라이팬을 든 배우 유해진의 익살스러운 모습이 보인다. 전직 레슬러에서 프로 살림꾼으로 변신한 살림 9단이자 아들 바보인 유해진은 영화 ‘레슬러’에서 ‘귀보’ 역할을 맡았다. 그가 예기치 않은 사건들과 엮이기 시작하면서 평범했던 일상이 유쾌하게 바뀌는 이야기를 그렸다. 또 나문희, 김민재, 성동일 등 세대를 어우르는 베테랑 연기파 배우들이 만나 호흡을 맞췄다.
얼굴도둑
일정 5월 11일~6월 3일 장소 백성희장민호극장 출연 성여진, 신안진, 주인영, 황선화 등
연극 ‘얼굴도둑’은 개인의 자아와 내면을 비추는 ‘얼굴’이라는 소재를 사용해 진실한 감정을 놓치며 살고 있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담아냈다.
트립 투 스페인
개봉 5월 17일 장르 드라마, 코미디 감독 마이클 윈터바텀 출연 스티브 쿠건, 롭 브라이든 등
열정의 나라 영화 ‘트립 투 스페인’은 산탄데르에서 말라가까지 스페인 전역을 여행하며 음식과 인생, 사랑에 대한 수다를 펼치는 미식 여행기다. 영국의 대표 배우 스티브 쿠건과 롭 브라이든이 출연해 유쾌한 입담을 보여준다.
시카고
일정 5월 22일~8월 5일 장소 디큐브아트센터 출연 최정원, 박칼린, 남경주, 아이비 등
한국에서의 공연은 열네 번째. 최정원, 아이비, 남경주, 박칼린 등이 참여해 어느 때보다 강력한 라인업으로 돌아왔다. 섹시하고 뜨거운 뮤지컬을 찾고 있다면 농염한 재즈 선율과 관능적인 춤이 매력적인 ‘시카고’를 추천한다.
탁 트인 전망과 갯내음이 물씬 풍기는 ‘무의바다누리길’ 걷기는 사람들에게 환상적인 코스로 환영받고 있다. 인천시 중구에 위치해 서울에서 접근성이 좋고 대중교통 이용이 용이하며 당일치기로 다녀올 수 있는 곳이다. 시니어에게는 무리가 되지 않는 길이어서 더욱 좋다.
대중교통을 이용해도 된다. 공항철도는 모든 역에 정차하는 일반열차와 서울역~인천공항역을 논스톱으로 운행하는 1인 좌석제의 직통열차가 있다. 공항철도를 이용해 인천공항역에 도착하면 용유역까지 운행하는 자기부상열차가 기다리고 있다.
자기부상열차는 인천공항역~용유역을 오전 7시 30분부터 오후 8시까지 15분 간격으로 무료로 운행하는 열차다. 승용차로 갈 경우에는 배에 승용차를 실을 수 있어 무의도 광명항까지 곧장 갈 수 있다. 30분 간격으로 운행되는 무의도행 뱃삯은 성인 1인 왕복 기준 3800원이다. 승용차 승선요금은 한 대당 2만 원이이다.
잠진도에서 배를 타면 무의도까지 약 5분 정도 걸린다. 배 주변으로 날아드는 갈매기 떼에 새우깡을 던져주다 보면 어느새 무의도에 도착한다. 배 도착 시간에 맞춰 대기하고 있는 마을버스를 타고 구불구불 언덕길을 15분 정도 달리면 소무의도가 바라보이는 광명항에 닿는다. 소무의도 옛 이름은 ‘떼무리섬’. 무의도에서 따로 떨어져나간 작은 섬이란 뜻이다.
소무의도는 면적 1.22㎢, 해안선 길이 2.5㎞의 섬으로 대무의도와 함께 무의도(舞衣島)라 불린다. 과거에 어부들이 짙은 안개를 뚫고 근처를 지나가다 이 섬을 바라보면, 섬이 마치 말 탄 장군이 옷깃을 휘날리면서 달리는 모습 같기도 하고 선녀가 춤추는 모습 같기도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소무의도가 ‘떼무리섬’으로 불린 것은 조선 말기에 간행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기록되어 있다.
소무의도 여행은 무의도와 연결된 414m의 ‘소무의 인도교’ 앞에서 시작된다. 이곳이 2.5km, 1시간 코스의 둘레길 ‘무의바다누리길’ 출발점이다. 둘레길은 총 8개 구간으로 나눠 소무의도 8경을 스토리텔링화해놓았다.
섬에 들어서면 동편마을 쪽으로 갈 것을 추천한다. 바로 앞 가파른 계단길을 하산 코스로 잡아 전망을 즐기며 내려오는 것이 좋다. 작은 섬이지만 둘레길을 따라 마을길, 숲길, 벼랑길, 밭길, 해변길, 깔딱고개길 등 다양한 길들이 있다. 이 길들을 걸으면 스치는 바람소리, 파도소리에 번잡한 상념들이 하나둘 사라진다. 특히 몽여해변길에서 동촌마을과 등을 맞대고 있는 서촌마을 앞 작은 해변이 정겹다.
몽여해변길은 쌍여로 나가는 길목이라는 뜻의 목여가 변해 몽여라 불렸다 한다. 쌍여란 물밑에 있는 두 개의 바윗돌이라는 의미의 순수 우리말로 바닷물이 빠지면 두 개의 바윗돌이 드러난다 한다. 또 안개가 낀 날 섬으로 쳐들어오던 왜구들이 거구의 장군으로 착각해 도망을 치게 했다는 장군바위가 명물이다. 전복을 따던 옛날 해녀들이 휴식을 취하던 섬이라 해서 해녀섬(해리도)이라고 불리는 작은 섬은 소무의도 남쪽을 바라보며 우뚝 서 있다.
바다를 조망하며 계단길과 숲길을 걸어 섬에서 가장 높은 안산전망대 하도정에 오르면 신선한 바람과 따스한 햇살이 반겨준다. 쉬엄쉬엄 올라 산과 바다를 둘러볼 수 있는 무의바다누리길 트레킹은 시니어가 당일로 다녀올 수 있는 최상의 길이다.
요즘은 훌쩍 여행을 떠나면서 그곳에 걷기 좋은 길이 있는지 먼저 살핀다. 멋진 풍광과 맛난 먹거리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걸으면서 힐링이 되는 여행지를 너도나도 챙기는 추세다.
흐르는 강물이 내려다보이는 울창한 숲길을 따라 걸으며 자연 속에 파묻혀볼 수 있는 걷기 좋은 길이 있다. 육지 안에 있는 아름다운 섬마을 경북 예천의 회룡포(回龍浦) 길은 손 타지 않은 수수함이 매력이다. 이 길을 걸으면 자연에 푹 안기는 맛을 느낄 수 있다.
혹시 액티비티한 놀이를 즐기는 분이라면 근처의 문경에 잠깐 들러 짚라인(zipline)을 타보는 것도 좋다. 공중으로 신나게 미끄러져가는 짚라인을 체험하는 순간의 짜릿함을 추천한다. 아울러 문경 예천의 유명한 순대국밥집에서 점심을 먹은 후 산에 오르면 배도 든든하다.
회룡포는 예천에 속하는 아늑한 섬마을이다. 낙동강 지류로 강이 돌아나가는 지형이 마치 용틀임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이곳을 볼 수 있는 전망대는 한적한 고찰 장안사 뒤편으로 올라가야 한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 느릿느릿 숲길을 걷다 보면 드디어 회룡포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나오고, 강으로 둘러싸인 마을이 내려다보인다. 물길이 마을을 감싸면서 유유히 흐르고 있다. KBS2 드라마 ‘가을동화’의 배경지이기도 하다. 멀리 마을을 이어주는 뿅뿅다리도 길게 보인다. 다리를 건널 때 발판 구멍으로 물이 퐁퐁 솟는다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KBS2 프로그램 ‘1박 2일’ 촬영으로 더 유명해진 다리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일출도 아름답다. 특히 물안개 낀 날은 몽환적인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이어지는 숲길은 4~5Km의 트레킹 코스다. 가을날 수북하게 쌓인 낙엽을 푹푹 밟으며 걸으면 세속의 걱정거리들이 다 사라진다.
아무리 천천히 걸어도 어느덧 그 산을 벗어나 비룡교가 시원하게 눈앞에 펼쳐진다. 다리 중간 전망대에 오르니 바람이 세차다. 상쾌한 공기를 원 없이 들이마신다. 다리 아래 넓은 갈대밭도 풍성하게 반짝인다. 얕고 푸른 강물은 유유히 흐른다.
세찬 바람을 맞으며 강둑을 걸으면 어느새 삼강주막이다. 이 시대 마지막 남은 주막이라 하여 유지 보존하고 있는 곳인데 1900년경에 생겨 2006년 주모 유옥련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영업을 했다고 한다. 그 후 다시 지자체의 노력으로 각종 축제를 열어 오래전의 우리네 삶의 한 풍경을 지켜내고 있다.
낙동강 나루터를 건너온 보부상들이나 과거를 보러 가던 유생들이 주막에 걸터앉아 막걸리 한 잔 마시는 풍경을 혼자서 그려본다. 그리고 양은 주전자 기울여 막걸리 한 사발 마시며 배추전과 도토리묵으로 회룡포의 바람 속을 걸어온 몸을 달래본다. 행복한 여행의 마무리다.
짚라인
경상북도 문경시 불정동 336-3 불정자연휴양림(1588-5219)
www.ziplinemungyeong.co.kr
용궁단골식당(용궁순대, 오징어불고기)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읍부리 299-2 (054-653-6126)
회룡포 숲길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대은리 회룡포(장안사 주차장(0.5km)→회룡포전망대(0.7km)→용포마을(0.5km)→사림재(1km)→비룡교(1.2km)→삼강주막(1km))
삼강주막
경상북도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길 27 (054-650-6395)
1960~70년대 신민요의 기수로 불리며 가요계의 정상에서 활동했던 가수가 있다.
바로 김부자(金富子·70)다. 그 시절은 어느덧 이미 반세기 전의 얘기이지만, ‘달타령’을 비롯한 그녀의 대표곡들은 지금도 여전히 이곳저곳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놀라운 생명력을 갖고 있다. 이번에 만난 김부자는 과거에 묻힌 가수가 아니라 현재를 개척하는 가수로서의 모습이 더 어울리는 에너지가 있었다. 그녀가 털어놓는 롤러코스터와도 같았던 삶을 뒤돌아보며 젊은 날의 봄을 맞이하듯 김부자와의 즐거운 만남을 가졌다.
12가지 달의 모습을 묘사한 민요풍의 노래 ‘달타령’을 모르는 대한민국 국민은 드물 것이다. 명절이면 어김없이 어디선가 듣게 되는 ‘달타령’은 1972년에 발표된 이래 수많은 가수들의 리메이크와 수많은 인용으로 반세기가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생명력을 가진 국민적 아우라의 노래가 되었다. 그 노래를 부른 가수가 바로 김부자. 1965년에 아마추어 여고생 가수로 가수생활을 시작한 그녀는 자신이 가요계에 들어와서 이렇게 오랫동안 활동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회고했다.
궁핍했던 시대의 위로와 희망, 그 힘겨운 시대를 노래와 함께한 가수 김부자. 반세기를 돌아 지금은 비록 혼자이지만 음악으로 인해 결코 외롭지 않은 삶을 살았다며 이제는 더욱 원숙해진 기량을 펼치며 관객들과 만나고 싶단다.
시간을 잊고 살 정도로 꿈같은 세월 보내다
“동아방송의 ‘가요백일장’에 입상하면서 가수생활을 시작했죠. 그리고 1968년에 ‘팔도 기생’이라는 영화의 주제곡을 통해서 이름이 알려졌어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가수로서의 공연을 했어요.”
올해는 김부자가 프로 가수로서 5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어느새 칠순. 그러나 누가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칠순이라고 할까. 인터뷰 내내 유쾌하게 웃으며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자신의 얘기를 풀어내는 그녀의 모습은 여전히 젊은 에너지로 가득했다.
“꿈같은 세월이었어요. 시간을 잊고 살 정도로.”
‘달러 박스’ 김부자의 시대
트로트, 신민요 등등 전성기 당대 최고의 가수였던 김부자는 장르를 가리지 않고 전통 가요의 세계를 추구했다. 또 한 명의 당대 슈퍼스타였던 김세레나와는 유명한 라이벌 구도를 이뤘다.
“요즘도 사람들이 제가 지나가는 걸 보면 김세레나로 헷갈려 해요.(웃음) 하나도 안 닮았는데! 김세레나와는 친하죠. 조민희, 김세레나, 김아정 등 돼지클럽 모임이 있어요. 돼지해이던 1971년에 클럽을 만들어서 ‘돼지클럽’이라 부르죠.”
그녀는 대략 2000여 곡의 노래를 불렀다. 오아시스레코드에 몸담고 있던 시절, 한 달에 한 번씩 음반 취입을 했다. ‘김부자가 부르면 팔린다’, ‘달러 박스가 왔다’는 소리를 들을 때였다. ‘일자상서’, ‘당신은 철새’, ‘카츄샤’ 등이 연속적으로 성공했고 ‘사랑은 이제 그만’은 발매 3개월 만에 판매량 10만 장을 돌파하기도 했다.
거듭된 성공, 그녀를 사로잡은 오만과 독선
김부자 하면 무조건 히트를 쳤다. 그리고 그런 시절이 오래 이어졌다. 그러나 그 와중에 그녀에게선 이상신호들이 나오고 있었다.
“통금이 12시였고 극장식 캬바레가 성행하던 시절이었죠. ‘하루에 내가 얼마를 불렀지?’ 계산하면 50곡을 부르고 그랬어요. 목이 아프고 잠긴 상태에서 또 나가야 했고…. 이게 즐거운 생활만은 아니고, 뭔가에 매달린 느낌이었죠. 내 삶이 아니고 남을 위해 사는 듯한 기분이었어요.”
분명 스타가 됐다는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그만큼 몸이 힘들었다. 정신적으로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주변의 쏟아지는 무조건적인 칭찬 세례들도 그녀의 마음을 둔하게, 그리고 왜곡되게 만든 요인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오만과 독선에 빠지기 시작했다.
“후회되는 일이 많죠. 철모르게 내가 이 세상 최고라고 생각했어요, 주위에서 나를 너무 떠받들어주니까, ‘이 정도면 최고지’라는 자만심이 생겼죠. 그때를 뒤돌아보면 부끄러워요. 그때 남들이 나를 보며 뭐라 했을까….”
김부자는 자신의 오만이 무엇이었는지 구체적으로 얘기하지 않았다. 안개처럼 나타났다 사라져버리는 인기와 대중의 관심에 매달려 살아가는 연예인에게 그런 오만은 어떤 종류의 성장통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김부자는 그러한 성장통을 겪고도 좌초하지 않고 여전히 현역으로 살고 있다. 말하자면 고통의 강을 건넜다는 의미다.
한때 전성기를 누려본 사람으로서 바닥부터 올라가는 것보다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 더 절박하고 뼈저린 고통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녀의 내면의 힘은 자신과 마주하기에 충분했다.
믿었던 지인에게 30억 원을 사기당하다
“어찌 보면 인기도 다 헛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그런 사랑이 없었다면 내가 존재하지 않았겠죠. 그때는 사랑을 받는 줄만 알았지 줄 줄 몰랐어요. 이제야 나눠주면서 행복을 느껴요. 몸도 좋아지고 마음도 편해지고 모든 것이 지금 삶이 더 행복해요.”
어떻게 김부자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지금의 삶에 안착할 수 있었을까. 그녀의 인생을 격변하게 만든 커다란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누가 하라고 해서 한 게 아니라 제가 집안의 가장 역할을 했는데, 그걸 20년 가까이 하니 스트레스와 책임감 때문에 너무 힘들었어요. 그때가 1990년대 초반, 1992년이네요. 심적으로 버거울 때였는데, 이혼한 뒤 주위 사람을 잘못 만나 큰돈을 잃었지요. 복구하기 힘들 정도로까지 내려갔어요. 그때 당시 돈 30억 원이면 굉장히 큰 거죠? 지인이라 믿었는데 그게 완전히 잘못된 믿음이었죠.”
처절하게 자기반성의 시간을 갖다
믿었던 사람 때문에 엄청난 돈을 탕진하고 하루아침에 밑바닥으로 내려앉으며 느낀 좌절의 깊이는 그만한 돈의 액수를 경험해보지 않는 한,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지금 기준으로 봐도 엄청난 금액인데 1990년대 초에 30억 원은 그야말로 천문학적 액수였다. 김부자는 하루아침에 엄청난 돈을 탕진했고, 한 달에 이자만 400만~500만 원을 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됐다. 말도 안 나오는 불운과 배신감과 고통에 그녀는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 그녀에게 구원이 내려왔다.
“너무 힘든 시절을 보내다가 교회를 가게 됐어요. 저희 아들과 딸이 먼저 교회에 다니면서 자꾸 교회에 가자고 권유하더라고요. 아이들이 자라면서 바른길을 가야 한다고 생각해 교회에 다니도록 했는데 정작 저는 안 갔거든요. 그런데 아이들이 저를 위해 많이 기도를 했어요. 거기에 감동받아서 교회를 나가게 됐죠. 그리고 신앙을 만나면서 생활이 많이 바뀌었어요. 지난날의 나를 되돌아보게 된 게 그때부터였죠. 살면서 내 딴에는 잘했다, 나름대로 착하게 살았다 싶은 것이 실은 아니었던 거예요.”
꽃이 봄에 저절로 피듯 절망 끝에 부활하다
김부자는 신앙을 갖고, 자기반성을 했다. 그녀의 생활이 달라지기 시작한 건 사건 이후 10여 년이 지난 2000년 즈음부터라고 한다. 그때 모든 문제들이 회복되면서 어려웠던 것도 해결되고 마음의 안정도 되찾게 됐다.
“‘어떻게 이럴 수가’ 할 정도로 생활이 확 달라졌어요. 울면서 기도했던 것을 들어주셨구나 싶었죠.”
그녀의 생활은 이제 안정적이다. 자신이 모든 것을 조절할 수 있고, 철저한 건강관리도 뒷받침되고 있는 삶이다.
“운동은 유산소, 스트레칭, 걷기를 꾸준하게 하고 있어요. 생활에 무리하지 않고 규칙적으로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그게 참 좋고, 거기에 즐거움이 있더라고요.”
약은 전혀 먹지 않고 강화에서 보내주는 홍삼 원액만을 먹고 있다는 그녀는 몸이 쑤시거나 관절에 이상이 있는 부분이 전혀 없다고 말했다. 그 말대로 그녀의 모습에서 활기가 넘쳤다. 마음이 건강해지니 몸도 자연스럽게 건강해진 것이리라. 계속 건강을 유지하고 있는 그녀에게는 할 일이 많았다.
소소한 행복이 가장 소중하다
“사람의 욕망은 끝이 없는 거 같아요. 내 나이에 뭘… 하다가도 이거 정도는 하고 싶다는 게 있죠.”
작년부터 지나온 시간이 새삼스럽게 느껴진다는 김부자는 그동안 꾸준히 쉬지 않고 디너쇼 중심의 공연을 해왔다. 올해는 50주년 공연을 5월로 계획하고 있고 외국 초청 공연도 있다. LA와 뉴욕 쪽에서 연락이 온 상태다. 작사가 겸 작곡가 조운파 선생과도 협의 중이다.
“새로운 음반에는, 지금까지 여러 노래들을 많이 불렀으니 이제는 조금 더 재밌고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노래를 싣고 싶어요. ‘달타령’보다 좀 더 신나면서 현실적인 풍자가 있는 그런 인생 노래를 하고 싶죠. 지금까지는 주로 한복을 입고 불렀는데, 이제는 좀 망가지는(웃음) 노래를 하고 싶어요. 그러나 예전보다 좀 더 진한 정서가 있는 그런 노래를요.”
‘노래란 나를 지켜주는 것이며 나의 생명이고 삶의 모든 것’이라고 말하는 그녀는 삶의 담금질을 통해 더 단단해진 가수다. 그녀는 사람들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아는 그대로 기억해주면 좋겠다 말한다. 그런데 그 말 뒤에 ‘그러나’라는 단서가 붙었다. ‘그러나’ 아직 그녀는 여전히 펄펄 뛸 수 있는 가수로서의 미래를 꿈꾸고 있다.
“굳이 욕심을 부린다면 그래도 팬들이 사랑해서 여기까지 왔기에 보답하고 싶어요. 지금 나이를 생각하면 그냥 무조건 잘하고 싶죠. 그리고 옛날에 나를 알았던 모든 사람들에게 기회가 있으면 잘해주고 싶어요. ‘잘 보이고 싶다가 아니라 진심으로 잘해주고 싶다’ 그런 생각들이 새록새록 드는 거 보면 내가 나이 들면서 철이 드나 싶기도 하고.(웃음) 나쁜 건 아닌 거 같아요.”
백수가 과로사 했다는 말을 들으며 멋진 농담이라고 했는데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요즘은 든다. 직장에 나갈 때는 직장이란 조직이 개인의 역량보다 조직의 힘으로 움직이는 집단이었다. 정해진 회사의 작업스케줄 대로 업무에 종사하면 되었다. 지나고 보니 그때가 단순해서 좋았다. 출근하고 일상 업무보고 퇴근하면 끝이었다. 집안일이나 어느 모임에 참석을 하지 못해도 회사 출근하는 날이라고 하면 모든 것이 이해되고 용서되었다. 또박또박 급여도 나오고 건강검진까지 회사에서 알아서 다 해주니 별 신경 쓸 일이 없었다.
퇴직하고 집에 있으면 지금껏 가족부양에 고생했으니 휴식중이라고 말해야 옳지만 빈둥빈둥 놀고 있다고 말한다. 누가 오라고 부르는데 가지 않으면 노는 놈이 뭐가 바쁘다고 그 모양이냐며 핀잔부터 들어야 했다. 여기저기 불려 다니고 참가하다보면 백수가 과로사 했다는 말이 맞는구나하고 고개를 끄덕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집에 놀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마음이 편할지 알았는데 딱히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안개처럼 늘 몸 주위를 감싼다. 밥을 먹을 때도 진짜 식충(食蟲)에 오물제조기로 변해가는 것이 아닌가! 겁이 덜컥 날 때가 있다. 집에 가만히 있으면 불안해서 집밖으로 탈출하고 싶다. 콧바람 쏘이러 외출한다는 말이 이해가 간다. 하다못해 은행에 가서 통장정리라도 하는 일거리를 만들어 집에서 나와야 뭔가 밥값 하는 것 같아 마음에 부담이 덜하다.
스스로 살이 있다는 행동을 하고 싶고 보이고 싶다. 배낭 속에 물통을 넣고 산에라도 올라가야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도서관에 가서 신문이라도 읽어야 시대에 뒤처진다는 강박관념에서 조금 진정된다. 한가로운 소설책보다는 생활 에세이 같은 글을 읽어야 ‘그렇지!’하는 공감과 마음속이 뿌듯해진다. 놀 수는 없다는 비장한 각오로 이곳저곳의 무료강좌에 눈독을 들이고 참가한다. 공짜커피라도 주는 곳은 고맙고 좋은 곳이다
한 번도 퇴직이나 은퇴자의 삶을 살아보지 않은 새파란 젊은 사람이 강사로 나와서 70세에 유엔군 사령관이 된 맥아더 장군 이야기를 들먹이며 막연하게 힘내라고 할 때는 ‘내가 맥아더냐?’하는 반발 질문을 하고 싶다. 한 번도 퇴직을 해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 통계자료 몇 개 들고 나와 세상물정 다 아는 것처럼 말 할 때는 헛웃음이 절로 나온다.
삼십년 이상을 가족과 국가를 위해 일한 당신들 이제 몸과 마음의 휴식이 필요하다고 주위에서 격려를 받고 싶지만 국가도 사회도 가족도 퇴직자에게는 인사치례 말뿐이고 실질적인 배려나 관심이 없다. 일만하다 죽을 수 없고 지금껏 잘해왔다고 격려의 박수를 받고 싶다. 이제 숨차게 달려온 몸보다 마음 휴식이 필요한 때다. 어떤 사람이 어떨 때 마음 휴식이 필요한가를 도서관에 가서 이런저런 책을 뒤져 보았다. ‘마음휴식 자가진단 체크리스트’를 찾았다. 책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보편적인 것을 추려 적어본다.
1,매사에 자신감이 없고 아무것도 하기 싫다.
2,불면증에 시달리고 정신적으로 불안하다.
3,사람 만나는 게 두렵고 싫다.
4,휴가 때도 어디 가는 것보다 집에서 쉬고 싶다.
5,다 내 잘못 같은, 죄책감을 느낀다.
6,일하는 것에 보람보다 심적 부담과 긴장을 많이 느낀다.
7,맡은 일을 하는데 소극적이고 냉소적이다.
8,스트레스를 풀기위해 술, 담배를 즐긴다.
9,최근 짜증과 화가 늘었다.
10,세상이 원망스럽다.
11,미래를 생각하면 불안하고 암울하다.
12,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진다.
이중에서 6개 이상 해당되면 절대적으로 마음의 휴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딱히 퇴직자가 아니더라도 자신감이 떨어지는 사람은 일단 마음휴식을 고려해 보자. 넘어진 김에 쉬었다 간다고 100년을 사는 세상에 몇 년 쉰다고 크게 달라질 일도 없다. 길고 오랜 인생길에 쉬엄쉬엄 쉬었다 가자. 크게 숨 한번 들이마시고 하늘한번 바라보고 천천히 가고 싶다.
A라는 사람은 “될 대로 돼라.”
B라는 사람은 “아무렇게나 살 수는 없다.”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겨우 열넷, 열다섯 살이었던 우리들에게 이따금씩 이런 물음을 넌지시 던지면서 조용히 자신을 성찰해볼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주시던 분이 있다. 바로 통신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계신 박순직 선생님이다. 필자가 정신적으로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은사님 중 한 분인데 그 후 ‘아무렇게나 살 수는 없다’가 필자 생활의 지표가 되었다.
“사과 반쪽이 남아 있으면 A라는 사람은 ‘겨우 요것밖에 안 남았어?’ 하고 B라는 사람은 ’아직도 이만큼이나 남았네' 합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떤 방식으로 생각하겠어요? 이왕이면 부정적인 시각보다는 긍정적으로 보면서 살아가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또 거울을 볼 때는 얼굴만 보지 말고 마음도 비춰보도록 하세요. 혹시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은 없는지, 터무니없는 욕심을 담고 있지는 않은지 하면서요.”
야학교 동급생 석순이는 부모님을 일찍 여윈 가엾은 아이였으나 어려운 세월을 살아낸 사람 특유의 원숙함과 포용력이 몸에 배어 있다. 필자에게 그녀는 눈 쌓인 고향집이고 품 넉넉한 어머니다. 야학 시절 석순이네 집은 우리들의 아지트였다. 건넌방 책꽂이에는 당시 한창 낙양의 지가를 올리던 ‘설국’, ‘양 치는 언덕’, ‘빙점’ 등의 책들이 꽂혀 있었다.
그러나 필자는 끝끝내 그 책들을 모른 척했다. 그때만 해도 지독한 국수주의자였고 그래서 손해 보는 것은 필자였지만 어쨌든 너무 싫어했던 일본인들의 문화는 접하고 싶지는 않았다. 정신적인 지도자의 일거수일투족은 그대로 추종자에게 투영되게 마련인데 당시 박 선생님은 배일사상이 아주 투철하신 분이었다.
일본인을 가리켜 ‘쪽바리놈들’이라고 하실 정도로 극도로 싫어했던 박 선생님은 우리 민족의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한 민족의 시인 김소월을 좋아했다. 그 덕에 필자도 김소월의 시를 좋아하게 됐다. ‘진달래꽃’, ‘산유화’, ‘가는 길’,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등을 외우고 다녔는데 처음에는 누구나 알고 있는 김소월의 시가 시시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우리 민족의 정서를 너무도 곱게 그리고 섬세하게 그린 그분의 시야말로 진짜 시라는 결론을 얻게 됐다. 특히 ‘진달래꽃’은 어려운 세월을 내색하지 않고 자신을 희생하며 살아가는 이 땅의 여인들의 고우면서도 강인한 심성을 너무도 잘 그려낸 시다.
“우리는 홀로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이른 아침이면 홀로 깨어 평원에 어리는 안개와 지평의 한 틈을 뚫고 비쳐오는 햇살 줄기와 만나야 한다. 가만히 마음을 열고 한 그루 나무가 되어보거나 꿈꾸는 돌이 되어봐야 한다. 그래서 자기가 대지의 한 부분이며, 대지는 곧 오래전부터 자기의 한 부분이었음을 깨달아야 한다. 자연 속에서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약한 자가 될 수 없으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을 이용하지 않는다. 그는 자연 속에서 세상의 근본이 무엇인가를 배워 나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대지 전체가 어머니의 품이고, 그곳이 곧 학교이며 교회라고 믿는다. 대지 위의 모든 것이 책이며 스승이고 서로를 선한 세계로 인도하는 성직자들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교회와 책과 스승을 알지 못한다.”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중에서
얼마나 철학적이고 시적인가! 인디언들의 생각을 적어놓은 이 책을 읽은 후 필자 가슴에는 감동의 물결이 잔잔하게 일었다. 그리고 부끄러웠다. 서부극에 그려진 대로 그들을 잔인하고도 호전적으로만 알고 있었던 편견이(평화롭게 살고 있는 인디언들을 침략하고 학살한 것은 미국인들이었다). 필자가 이 책을 알게 된 것은 박 선생님을 통해서였다. 얼마 전 안부전화를 드렸는데 필자에게 읽어보라고 권하셨다.
박 선생님은 야학 시절부터 늘 좋은 책을 선정해서 팔자에게 권유해주시곤 했다. 그러면 그 책을 어떻게든 구해서 보곤 했다. 박 선생님은 시간을 최대한 쪼개 쓰는 방법을 가르쳐주신 분이기도 하다.
“영어 단어를 외울 때 책상머리에서만 외우려 하지 말고 몇 개 적어서 화장실에도 붙여놓고 몇 개는 부엌에도 붙여놓고 설거지할 때마다 한 번씩 들여다보세요. 버스 타고 갈 때도 영어 단어를 외우기에 좋은 시간입니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주신 분들이 우리 선생님들이었다.
특히 박 선생님은 학구적이고 의지가 남달랐다. 새우젓 장사를 하시며 어렵게 선생님을 공부시킨 어머님의 기대가 헛되지 않게 부단히 노력하셔서 교수님이 되었다. 선생님에게 야학 활동은 단순히 감상적 차원이 아니라 생활의 한 부분이었다. 필자가 농대에 있어봐서 안다. 연구, 실험, 거기에다 학부 학생들 강의까지 대학원 시절이 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것을.
그런데 선생님은 시간, 경제적인 면 어느 것 하나 여유가 없는 가운데서도 학부 시절은 물론이고 대학원 시절까지도 야학 활동을 하셨다.
1985년 봄, 통신대학교 국문학과 1학년에 입학한 필자는 수원시 고등동에 살고 계시던 박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들쳐 업고 간 세 살 난 아들을 방바닥에 뉘어놓은 후 선생님께 마음을 다해 큰절을 드렸다. 진심으로 존경하는 은사님께 고마운 마음을 조금이라도 표시하고 싶어서였다.
일본 열도를 구성하는 4대 섬 중 가장 남쪽에 위치한 규슈(九州) 지방. 그중 오이타 현의 벳푸(別府) 시는 예로부터 온천 여관, 온천 욕장으로 번창해 1950년 국제관광온천문화도시로 지정되었다. 한마디로 온천 천국의 도시. 현재 300여 개의 온천이 있다. 시영온천에서는 단돈 1000원의 입장료만 내면 전통 온천을 즐길 수 있다. 매일 온천욕으로 건강 다지고 심심하면 인근 유후인 시로 나들이 떠나는 재미. 한 달이 후딱 지나간다.
글·사진 이신화 여행작가 (‘On the Camino’ 저자, www.sinhwada.com)
국제 온천관광도시, 벳푸 시
부산 국제여객터미널에서 배로 이동하는 일본 여행은 특별하다. 좁은 의자에 앉아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비행기 안보다 백번 낫다. 후쿠오카 하카타 항에 내려 텐진에서 점심만 먹고 바로 벳푸 시로 가는 버스에 오른다. 두 시간 정도 달려 가파른 고갯길을 넘어서면 벳푸 시내에 이른다. 뜨거운 온천 열기로 모락모락 솟아오르는 연기가 가득하다. 벳푸에 온 이유는 단 한 가지, 실컷 온천욕을 하기 위함이다. 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온천은 츠루미다케 산(1375m)과 약 4km 북쪽에 떨어져 있는 가란다케 산(또는 유황산, 1045m)의 화산 동쪽에 집중되어 있다. 2800개 이상의 원천수가 자연용출되며, 용출량은 일본에서 1위다. 처음부터 온천도시로서 명성이 높았던 것은 아니다. 100℃가 넘는 고온의 용출수에 목욕은커녕 빨래도 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화탕지옥(火湯地獄)’의 땅이었다. 이 재앙의 도시를 명품 온천도시로 만든 이가 아부라야 쿠마하치(油屋熊八, 1863~1935)다. 그는 ‘산은 후지, 바다는 세토나이, 온천은 벳푸’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벳푸를 온천도시로 부상시켰다. 벳푸 역 앞 광장에는 ‘벳푸 관광의 아버지’라 불리는 그의 동상이 있다.
300여 개의 온천 천국, 10분 온천욕으로 힐링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목욕용품부터 챙겨 다케가와라 온천(竹瓦温泉)으로 향한다. 벳푸의 300여 개 온천 중에서 내로라하는 시영온천이다. 벳푸 만에서 멀지 않은, 한적한 주택가에 있는 온천은 건물부터 예사롭지 않다.
메이지 시대인 1879년, 한 어부는 해안 근처에서 솟아나는 자연용출장에 간소한 오두막을 지었다. 지붕에 대나무를 얹었다 해서 ‘다케가와라’라는 이름이 붙었다. 1938년에는 중국의 호화로운 기와지붕으로 장식해 재건립했다. 이 건축물은 2004년 유형문화재로 등록되었고, 2009년에는 근대화 산업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온천이 생긴 지는 139년의 세월이 흘렀다. 건축물도 80년 동안 한자리를 지키고 있어 전통의 향기가 폴폴 난다. 입장료는 단 100엔. 간드러지는 목소리의 여자 스태프는 일본식 영어를 구사하면서 이것저것 알려준다. 수건이 필요하냐? 모래찜질은 안 하냐? 신발보관장 코인은 나중에 돌려받는다 등등. 린스 하나만 달랑 사 들고 안으로 들어선다. 세월의 연륜이 느껴지는 실내 인테리어다. 윤기 나는 나무 바닥과 목욕 후 앉아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나무 테이블. 로비는 천장이 높아 시원하다.
탕 입구는 두 곳으로 구분되어 있다. 한쪽은 모래, 한쪽은 40℃가 넘는 뜨거운 물이 용출되는 자연탕이다. 2층에서 탈의하고 돌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옴팍한 곳에 우물보다 약간 큰 탕이 있다. 찬물을 쓸 수 있는 수도꼭지도 있다. 온천욕 하는 사람들 중에 한국인은 없고 대부분 일본 관광객 또는 동네 할머니들이다. 그들의 목욕 방법을 슬쩍 눈여겨본다. 일단 뜨거운 물에 들어가기 전, 바가지로 물을 퍼서 머리를 감고 몸을 씻는다. 그리고 두어 번 탕 속에 몸을 담근 후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나간다. 길어야 10여 분 정도. 일본 목욕 문화는 10분씩 3회를 하는 것이 건강에 유익하다고 널리 알려져 있다. 한국식 목욕법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일본의 온천욕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하는 법. 그래도 온천수가 좋아서인지, 아니면 온도가 높아서인지 몸이 금방 개운해진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목에서 옛 유곽 거리를 만난다. 옛날 옛적 전국의 한량들을 불러 모았던 분위기가 그대로 느껴지는 곳. 일본의 속살을 들여다보기 위해 작은 선술집에 들러 구운 닭요리를 안주 삼아 사케를 마신다. 그 재미가 묘하다.
이색 순례, 간나와 지옥 온천
벳푸 여행 코스에 지옥 온천 순례를 빼면 안 된다. 벳푸 핫토(別府 八湯) 중에서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간나와(鉄輪) 온천 단지. ‘지옥 온천’이라는 이름으로 통칭되는 그곳을 찾은 날 주룩주룩 비가 많이도 내렸다. 여러 형태의 ‘지옥’ 중 일본 국가 지정명소로 채택된 세 곳(바다지옥, 백야지옥, 소용돌이지옥)이 있다.
가장 인기 있다는 바다지옥만 둘러본다. 지옥 온천 중에서 가장 큰 열탕을 갖고 있는 곳이다. 약 1200년 전부터 지하 300m에서 뜨거운 증기와 흙탕물이 분출되고 있다. 200℃라니 말만 들어도 지옥에 온 느낌이다. 그저 구경하고 산책하는 것이 전부. 체험할 수 있는 곳은 족욕장뿐이다. 탁한 물에 양말을 벗고 물속에 발을 집어넣는다. 생각보다 뜨겁지 않다. 비가 내려 운치는 좋다. 관광객 특수를 누리기 위해 만들어진 특산품 코너로 간다. 수많은 제품들이 진열되어 있는 곳에서 온천 증기로 만든 간장을 넣어 맛을 낸 푸딩을 사 먹는다. 흑설탕 맛이 나는 푸딩이 별미다.
‘오래된 마을’로 꾸민 ‘새 마을’
벳푸에서 유후인(由布院)으로 간다. 25km 떨어져 있고 버스로 한 시간 정도 소요된다. 일본인들이 가장 가고 싶은 여행지 1위이고 60% 이상이 한국인 관광객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대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유후인을 배경으로 ‘이웃집 토토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등을 제작했다. 유후인 기차역 앞으로 난 유노쓰보 거리(湯の坪街道)의 첫 느낌이 참 좋다. 아기자기한 숍들이 길 양쪽으로 이어진다. 마치 유럽의 소도시에 온 듯하다.
유후인을 명물로 만든 사람은 1955년 유후인 초대 정장(町長, 우리나라의 면장)을 지낸 이와오 히데카즈(岩男額一). 당시 36세였던 그는 마을재건위원회를 결성해 본격적인 온천 개발을 시작했다. 마을에 들어서는 건물 높이는 11m를 넘지 못하게 했다. 마을 어디에서나 유후다케 산(1584m)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호텔, 골프장 같은 대형 레저시설은 불허했고 60실 이하의 료칸(旅館)만 허가했다. 음식도 유후인에서 생산한 재료로만 만들어 판매하도록 했다. 단체 관광객도 받지 않았다. 그 후 ‘오래된 마을’처럼 꾸민 ‘새 마을’은 엄청난 관광 특수를 누리고 있다.
긴린코 호수도 보고 온천욕도 하고
유후인 역에서 긴린코 호수(金鱗湖)까지는 약 1.5km. 호수까지 걷는 동안 ‘재즈 카페’에서 맛있는 컬럼비아 산 커피를 마신다. 금상을 받았다는 크로켓도 너무 맛있어 두 개나 사먹는다. 크지 않은 긴린코 호수는 차가운 물, 뜨거운 물이 용출되어 만들어졌다. 호수는 아침이면 안개와 이슬을 만든다. 호수 앞쪽으로는 아름다운 미술관 건물이 들어앉아 있다. 하지만 단체 관광객 때문에 어수선하다.
호수를 빨리 벗어나 누루카와 온천(ぬるかわ溫泉)으로 간다. 유후인은 벳푸, 구사쓰에 이어 일본에서 세 번째로 용출량이 많은 도시다. 누루카와 온천은 벳푸의 시영온천보다는 비싸지만 유후인에서는 가장 저렴하다. 샴푸와 보디용품도 있다. 남탕과 여탕은 나누어져 있지만 말이 들릴 정도로 가깝다. 야외 온천탕 중간에 돌이 놓여 있고 칸막이도 만들었다. 울창한 숲은 담 역할을 한다. 온천욕을 즐기는 사람들은 거의 한국인. 료칸에서 머물지 못한 여행객들은 이것만으로 일본식 전통 온천을 체험한다. 훌륭한 일본 가정식까지 먹고 벳푸 시로 되돌아온다. 벳푸나 유후인이나 훌륭한 여행지다. 벳푸 시에서 장기숙박하면서 원 없이 온천욕을 하고 심심해지면 유후인으로 나들이나 하면서 푹 쉴 날은 언제 또 올까?
이른 아침이다. 간밤에 내린 눈이 소복소복 쌓여 세상이 하얗다. 나뭇잎이 다 떨어진 나뭇가지에도, 들녘을 구비 도는 길에도 빈틈없이 내렸다. 평평한 대지 위에는 하얀 종이를 깔아놓은 듯하다. 아침마다 산책하는 들판 길옆 꽁꽁 얼음이 얼어붙은 농수로(農水路) 위에도 하얗게 내려 마치 화선지 두루마리를 펼쳐놓은 듯하다. 수로의 중간쯤 얼음 사이로 뚫린 숨구멍이 마치 글자의 한 획을 그은 듯하다. 화선지 위에 붓으로 힘차게 내려쓴 글씨를 빼닮았다. 눈이 부실 듯 하얀 종이 위에 단숨에 쓴 일필휘지(一筆揮之)의 처음 한 획, 삐칠 ‘별(丿)’이 확연하다. 명상하는 고승처럼 고요히 앉아 붓끝에 집중하는 대 서예가가 눈에 보이는 듯하다.
신비로운 형상을 발견한 필자는 카메라 렌즈로 초점을 맞추기 시작한다. 무슨 이야기를 이 사진 속에 담을 수 있을지 고민한다. 상상의 나래를 편다. 무지개 저편의 행복을 찾아 떠나는 동심이 된다. 누가 썼을까? 찬바람이 쌩쌩 일었을 새벽녘에 어느 누가 붓을 잡고 획을 그었을까? 새해를 맞아 고귀한 휘호 하나를 남기려 하였을까? 왜, 한 획만 긋고 멈추었을까? 쓰려던 글자는 무엇일까? 또 다른 가르침을 스스로 깨닫게 하려 함인가? 어둠을 타고 펑펑 내리던 눈이 그친 자정이 지나고 어둠이 더 짙어지는 동틀 무렵의 새벽이었을 테다. 수만 리 하늘 저만치서 바람을 타고 선인이 선녀와 함께 내려와 눈(雪)으로 만든 화선지를 앞에 놓고 휘호를 쓰다 떠난 흔적이 아닐까? 치마폭 고이 접고 선비 곁에 앉은 선녀가 반들반들 고색창연한 벼루 한쪽에 정화수 조심스레 따르고 섬섬옥수로 까만 먹을 잡아 작은 동그라미 서서히 그리듯 짙은 먹물을 만들었다. 선인은 조심스레 붓에 먹물을 묻혀 휘호 한 줄을 쓰기 시작했음이 분명하다. 삐칠 별(丿) 변이 들어가는 어떤 첫음절로 시작하려 했을까? 시간 가는 줄 모르던 그들은 새벽닭 울음 울 기척 보이자 황급히 천상으로 떠났나 보다. 쓰려던 일필휘지 한 줄의 한 획, “별(丿)”만 남기고서. 오늘 밤에 다시 내려와 쓰려던 글을 마저 쓰고 갈까? 내일 아침은 어떤 모습이 필자를 기다릴까? 삶을 설렘으로 만드는 일상이 있어서 즐겁다. 우리가 살아가는 작은 희망의 씨앗인지 모른다.
“오늘은 무엇을 찍으세요?” 필자가 촬영에 몰입해 있는 곁을 지나던 길손이 다가와 말을 건넨다. 그제야 카메라에서 시선을 돌리고 펼쳤던 상상의 나래를 접는다. 가끔 만나는 산책길의 이웃이다. 소소한 피사체에 몰입해 있는 모습이 늘 궁금하였나 보다. 촬영한 영상을 보여주며 카메라로 쓴 한 편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해가 될 듯 말 듯 한 지 고개를 갸우뚱하며 가던 길을 재촉한다. 짙게 내려앉은 안개 속으로 사라진다. 필자는 조금 전에 찍은 영상을 다시 띄워보며 빙그레 웃는다. 사진 한 장에 한 편의 이야기를 쓴 만족감의 표현일 테다. 무언가 이루었다는 쾌감에 오늘 아침도 행복하다. 저 하늘을 향하여 소리쳐 본다. “세상은 아름답다! 보기 나름이다. 내 인생의 행복은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지!”
새벽에 차 시동을 걸었다. 한탄강이 흐르는 전곡 원불교 교당을 찾아가는 길. 가는 내내 40년 전 초등학교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추수가 끝난 논에는 서리가 하얗게 내려앉아 있었다. 거대한 독수리들이 검은 무리를 이루고 있는 모습이 생소하고 두려웠다. 논길을 지나고 작은 마을의 고불고불한 길을 빠져나와 언덕을 넘으니 옅은 안개 속에 아담한 교당이 나타났다.
필자는 경주 인근 산골에서 살다가 초등학교 2학년 2학기 때 서울 제기동으로 이사 왔다. 그 친구는 초등학교 3학년 때 만났다. 4학년이 되어 또 이사를 했으므로 친구와 사귄 것은 1년 정도에 불과하다.
시골에서 학교 다닐 때는 성적도 좋았고 반장도 했다. 그러나 서울에 와서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경상도 사투리가 심했기 때문에 아이들 놀림감이 되었다. 심지어 담임선생님도 자꾸 책읽기를 시켰다. 자신감이 없어지고 더 내성적으로 바뀌었다.
한옥 집 문간방에서 온 가족이 살았다. 텔레비전이 동네에 몇 대 없을 때였다. 시골 촌뜨기에게 그들은 텔레비전도 보여주지 않았다. 필자는 언제나 그들 주위를 맴도는 외톨이였다.
그 친구와 어떻게 가까워졌는지는 기억에 없다. 어느 날 집에 놀러가자고 했다. 마당 한가운데 펌프와 꽃이 가득한 네모난 정원이 있었다. 정원을 둘러싸고 미음자로 지어진 큰 한옥집이었다. 유리알처럼 반들반들했던 마루의 감촉이 지금도 생생하다. 학교가 끝나면 늘 친구 집에 가서 어머님께서 내주신 과자와 과일을 먹으며 둘이서 텔레비전을 봤다. 친구는 바둑을 잘 두었다. 필자의 바둑 실력은 8급 정도인데 그때 배운 그대로다. 검은색 자가용도 있었는데 그 시절에 기사도 있었다. 잘사는 집이었다. 광나루로 가족 물놀이를 갈 땐 필자도 데려갔다. 그러나 4학년 때 우리 집이 면목동으로 이사하면서 친구와 연락이 끊어졌다.
그리고 40년이 흘러 필자가 오십이 되던 해에 문득 그 친구가 간절히 보고 싶어졌다. 세상을 좀 살아보니 남을 배려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되었다. 갈빗대가 다 드러날 정도로 몸이 약했고 내성적이며 사투리를 쓰는 시골 촌뜨기를 챙겨준 친구도 고마웠고 늘 다정하게 대해주셨던 친구 어머님도 보고 싶었다.
다행히 친구 이름을 잊지 않았다. 친구가 어느 중학교로 진학했는지 겨우 알아냈다. 그 중학교에서는 개인정보를 지켜야 한다면서 친구에 대한 정보를 일절 알려줄 수 없다고 했다. 여러 번 사정했지만 허사였다.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인터넷에 친구의 이름을 입력해보았다. 눈에 익은 한 사람의 얼굴이 검색되었다. 눈이 번쩍 뜨였다. 40년이 지났지만 그 친구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는 원불교 스님이 되어 있었다.
교당 주차장에 이르자 가슴이 뛰었다. 그도 나를 알아볼까. 잠시 후 우리는 손을 맞잡았다. 시간이 되돌려진 듯 40년 전으로 돌아갔다. 마당 한가운데 네모난 정원과 펌프의 위치, 집의 구조와 마루에 있던 텔레비전, 바둑판이 놓인 자리를 종이 위에 그리는 필자를 그는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다. 하늘 아래 누군가 수십 년간 자기를 잊지 않고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고맙다고 했다.
그의 시집 안에서 어머님의 마지막 모습을 확인했다. 너무 늦게 그를 찾았다.
정유년인 올해는 정유재란(1597.1~1598.12) 발발 420주년이다. 임진왜란으로부터는 427주년.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에 게재하기로 한다.
임진·정유 국란의 왜군 출진기지는 규슈(九州) 서북 해안 나고야(名護屋) 성이다. 일본 중부의 중심도시 나고야(名古屋)와 구별하려고 히젠(肥前)이란 옛 지명을 붙여 ‘히젠 나고야’라 불리는 곳이다. 사가(佐賀) 현 가라쓰(唐津) 시에서 버스를 타고 해안선을 따라 40여 분 달리면 닿는 요부코(呼子) 포구 언덕 위에 있다.
굴곡이 심한 해안선 깊숙한 만(灣)에 얼마든지 배를 숨길 수 있고, 조선과의 거리가 제일 가까운 지리(地利)를 고루 갖추어 옛날부터 왜구의 소굴로 유명했던 곳이다.
26년 만에 다시 찾아본 나고야 성은 그때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흘러간 옛 노래 ‘황성옛터’를 연상시키는 무너진 성벽이 옛날 그대로였다. 일본이 군신으로 떠받드는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의 글씨로 ‘名護屋城址’라고 쓴 비석도 같은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헛꿈을 조롱한 쇼와(昭和) 시대 하이쿠 시인 아오키 겟토(靑木月斗)의 시비도 같은 자리에 있었다.
수십 년이 걸린 성터 발굴·복원사업이 끝났다지만 겉보기에 변한 것은 없었다. 주말 낮인데도 탐방객 발길이 뜸해 적막하기만 했다. 성터 입구에 자리 잡은 박물관과 그 앞에 조성된 상가만이 옛날에 없었던 건물이다.
도고 헤이하치로 글씨로 된 성적(城跡·성터) 비는 1930년, 겟토의 시비는 1940년에 세워졌다. 그러나 두 돌의 언어는 사뭇 다르다. 도고의 비에는 옛 성터라는 글자뿐이지만, 그것이 세워진 시대와 세운 자의 뜻에 히데요시의 대륙 정복 야망을 그리는 마음이 오롯이 드러나 보인다.
1930년이라면 일본의 만주 침략 야욕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대다. 내무성이 그 돌을 세우면서 러일전쟁 영웅에게 글씨를 부탁한 가슴 밑바닥에는 일본인들이 ‘역사상 최고의 영웅’으로 추앙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존숭하는 뜻이 꿈틀거렸으리라.
1940년에 세워진 겟토 시비는 히데요시의 망상을 비웃는 것 같다. “다이코가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지만 바다에는 안개만 자욱해.” ‘다이코(太閤)’란 천황을 대신해 나라를 다스리는 관백(關白) 자리를 아랫사람에게 물려주고 상왕처럼 물러앉은 이를 말한다. 히데요시는 조카(秀次·히데쓰구)에게 양위한 뒤에도 만사를 제멋대로 한 사람이다.
그런 권력자가 아무리 대륙 진출 야망으로 용을 써도 그 꿈은 안갯속에 가물가물하다는 뜻으로 읽히지 않는가. 실제로 성터에서 바라본 현해탄 바다에는 쓰시마의(對馬島) 모습조차 어렴풋했다.
26년 만의 탐방객을 놀라게 한 것은 성터에 우거진 고목나무 가지에 달려 있는 올레길 리본이었다. 처음 눈에 띈 것은 천수각 가는 길가 나뭇가지에 달린 것이었다. 반가워 카메라를 들이대니 일본인 탐방객이 “그게 무엇이기에 사진을 찍느냐”고 물었다. 한국 제주도 올레길 표시라는 말에 그들은 “천수대 터에도 많다”고 알려줬다. ‘제주 올레가 일본과 몽골에 수출되었다더니 여기까지 왔구나’ 싶어 너무 반가웠다.
그의 말이 맞았다. 금빛 찬란한 천수각이 있었다는 천수대 터에는 쇠막대기로 만들어 세운 올레 표지물도 있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가라쓰에서 규슈 서북단 히라도(平戶) 섬에 이르는 해안선 구간에 올레길이 조성되어 한국인 여행객에게 인기가 있다 한다. 나고야 성을 찾아가는 도로표지판마다 한글이 병기된 것도 그래서구나 싶었다. 7년 동안 나라를 풍전등화처럼 위태롭게 했던 왜란 출진기지가 평화의 길이 된 것을 400여 년 세월의 작용이라고만 보아 넘기기에는 좀 미진한 뒷맛이 남았다.
임진왜란 400주년 기획 시리즈 취재 차 나고야 성에 갔던 1991년에는 유적지 발굴사업이 한창이었다. 옛 성터를 정비해 관광자원으로 삼기 시작한 때여서 일본인 관광객 발길이 잦았다. 그 르포기사가 신문에 보도된 것을 계기로 국내에서도 차츰 관심을 갖는 사람이 늘어 규슈 관광의 인기 코스가 되었으니, 세월의 두께를 새삼 음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모습 그대로 두는 것이 역사의 참뜻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무너진 성을 보존하기로 했습니다.” 그때 특파원을 안내해준 진제이(鎭西) 초(町·일본의 행정구역 단위) 직원은 복원사업이 현상을 그대로 두고 발굴만 하는 것이라 했다. 히데요시 이후 염전·반전사상의 결과로 폐허가 된 성을 그대로 두는 것도 역사의 뜻이라는 것이었다.
정작 옛 자취를 찾게 된 것은 나고야 성 주변에 촘촘히 자리 잡았던 130여 개 번국(藩國)의 진터다. 독재자 히데요시는 휘하 영주[大名]들에게 전쟁기간 중 출진 병사들을 거느리고 성 아래 대기하도록 요구했다. 출진 후의 병력보충 병참 등 임무를 강제했기 때문에 전국의 영주들은 수많은 예비 병력을 거느리고 눌러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진터들은 전후 폐허가 되었다가 사유지로 바뀌어 흔적마저 감추었다. 1970년대부터 시작된 복원사업의 큰 틀은 그 땅을 사들여 옛 모습의 윤곽을 복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박물관을 지어 전쟁의 배경과 경과, 그리고 양국 평화의 지향점을 모색하고 홍보하자는 것이었다.
나고야 성은 축성과 폐성이 모두 전광석화 같았다. 인구 20~30만 명의 거대한 병영도시 나고야 성은 번개같이 건설되어, 또 그렇게 해체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최고 권력자가 사라지고 세상이 바뀌면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건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그처럼 철저하게 무참하게 파괴된 일은 흔하지 않으리라.
일본 통일의 꿈을 이룬 히데요시는 조선과 명나라를 손아귀에 넣어 동아시아 패권을 잡겠다는 망상으로 1590년부터 대륙 침략을 꿈꾸기 시작한다. 중국은 물론 인도까지 영토를 넓혀 부하들에게 봉토를 나눠주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그 계획에 비판적이던 동생 히데나가(秀長)가 죽고, 천금보다 귀히 여기던 외아들 쓰루마쓰(鶴松)마저 잃어 심신이 극도로 피폐했던 1591년 8월, 그는 규슈 지방 영주들에게 ‘대륙 경영 사업’ 개시를 선언하고 적지에 출진기지를 건설하라고 명령한다.
당시 일본에 와 있던 포르투갈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의 에는 그때 일을 이렇게 묘사했다. “관백(히데요시)이 조선으로 가장 쉽게 건너갈 수 있는 항구가 어디인지를 묻자 가신들은 나고야로 불리는 아름다운 항구가 있는데, 수천 척의 선박이 안전하게 출입할 수 있는 곳이라고 대답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전국의 영주들을 나고야에 집결시키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각자의 부담으로 궁전과 해자와 저택으로 꾸려진 화려하고 넓은 성채들을 조속히 축조하되, 교토에 지은 것보다 뒤떨어지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문장에서 주목할 것은 교토에 뒤지지 않는 화려한 궁전과 성채를 영주들 각자의 부담으로 건설하라는 ‘후신(普請) 명령’이다. 후신이란 불교에서 민간에 널리 시주를 청해 불당이나 탑을 짓거나 수선하는 사업이란 뜻이지만, 절대 권력자가 영주들에게 갖가지 토목·건축사업을 시킨 일을 뜻했다. 나랏돈은 10원도 쓰지 않고 국책사업의 돈과 인력을 영주들에게 부담시켰으니, 아무리 봉건시대이라지만 어떻게 그런 횡포와 전제가 있었는지 흥미롭다.
프로이스는 영주들이 꼼짝 못하고 명령을 수행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다른 영주들에게 뒤지지 않으려는 경쟁심이었다. 작업 중 사소한 부주의를 저지르면 감독들에게 공개적으로 질책을 당하게 되고, 그것이 관백에게 무능력자로 낙인찍혀 추방당하거나 재산을 몰수당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축성 책임자는 히데요시의 오른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공사 책임자는 뒷날 이 지역 영주가 된 데라자와 히로타카(寺澤廣高)였다. 원래 있었던 가키조에(垣添) 성을 헐어 규모를 크게 확장하고, 사방 3km 이내에 130여 번국 영주들의 진영(陣營)을 건설하는 일본 역사상 초유의 대토목 공사였다. 성 공사는 착공 6개월 만에 완공되었고, 영주들의 진영이 완성되는 데는 8개월이 걸렸다니 얼마나 공사를 서둘렀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본성 공사는 규슈 지역 20여 명의 영주들이 비용과 공력을 분담했고, 나머지 공사는 각 영주들 책임 아래 시행되었다. 해발 89m 나지막한 구릉 꼭대기에 혼마루(本丸)를 짓고,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5층 규모의 천수각을 세웠다. 그 아래로 니노마루, 산노마루 등 부속시설과 병사를 배치하고, 주변에 견고한 석축을 쌓아올려 난공불락의 요새를 만들었다. 외성은 주변에 해자를 둘러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 전형적인 왜성이었다. 성의 총면적 50만 평은 일본 최대의 오사카 성에 버금가는 규모였다.
성의 크기만 그런 게 아니었다. 그 시대 인구 30만을 가진 도시는 오사카 말고는 없었다. 성내에는 히데요시의 측실(廁室)을 위한 사찰과 다실, 전통 가무극 ‘노(能)’ 공연장까지 있었다. 그 시대에 그려진 병풍도에는 성내의 건물 약 70여 동, 그 아래 조카마치(城下町)의 일반 백성 주택과 점포 260여 동, 진영 시설 70여 동 등 400여 동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나고야는 외국인 왕래가 잦은 국제도시이기도 했다. 병풍도에는 명나라 사절단 40여 명과 포르투갈인 등 260여 명의 통행인이 그려져 있는데, 이 가운데는 조선에서 잡혀온 포로들을 사들여 해외로 팔아넘기는 노예 상인들도 있다.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정희득(鄭希得)은 실기(實記) 에 “나고야 거리에서 마주친 사람의 반 이상이 조선인”이라고 썼다. 그들 대다수가 붙잡혀간 사람들이었다.
통행인 가운데는 남자들 소매를 잡아끄는 유녀(遊女)의 모습도 보인다. 해안 거리에는 유곽과 술집이 줄지어 있고, 각 번의 진에서는 수많은 사졸이 할 일 없이 소일하고 있었다. 노예장사로 재미를 본 외국인들도 돈을 풀어 즐거움을 샀을 것이다.
발굴 작업 중 천수각 주변에서는 금박기와편이 많이 출토되었다. 벽면뿐 아니라 기와에도 금박을 입혀 금빛으로 번쩍이는 건물이었던 것이다. 이런 성의 건설과 전쟁 수행에 시달린 일본 민중의 고난이 기록으로 남았다. 병력 1만5000명을 할당받은 사쓰마(薩摩) 번(藩·제후가 통치하는 영지)의 경우 7000명이 넘는 아시가루(足輕·보병)와 6000명이 넘는 인부를 징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은 모두 농·어업에 종사하는 백성들이었다. 갖가지 무기와 장비, 병량과 말먹이, 군수품 및 병선 조달과 운용도 백성들 몫이었다.
백성들 고난은 그것으로도 모자랐다. 히데요시는 곧 조선으로 건너가겠다면서 중간에 머물 이키(壹岐) 섬과 쓰시마(對馬島)에도 성을 쌓고 궁을 지으라는 명령을 내려 부하들과 백성들을 괴롭혔다. 이키 섬에는 아직도 그때의 성터가 뚜렷이 남아 있다. 백성들의 피땀을 짜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을 ‘아방궁’을 지은 것이다.
침략군 출진은 1592년 3월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1번 대부터 하시바 히데카쓰(羽柴秀勝)의 9번 대까지 총출진 병력 15만8800명, 출진을 도운 예비부대와 병참요원 등을 합친 총인원은 30만5300명으로 기록돼 있다(역사군상 시리즈 ). 비탈진 구릉 도시에 인파가 북적거렸을 날에 비해 오늘의 정적(靜寂)과 정일(靜逸)은 너무 대조적이다.
히데요시는 침략군이 떠난 3월 26일 교토를 떠나 4월 25일 나고야에 착진(着陣), 1년을 머물며 전쟁을 지휘했다. 그 기간 협상 사절로 온 명나라 유격 심유경(沈維敬)을 접견하기도 하고, 여러 장수들이 조선에서 보내오는 보고서와 진귀한 전리품을 받아들고 천하를 얻은 듯 기고만장했다. 심유경의 거소는 명군 유격이 머물던 곳이라 ‘유게키마루(遊撃丸)’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런 영화의 무대였던 나고야 성은 전후 곧바로 참담하게 해체되었다. 히데요시가 죽고 가스미가세키 패권 전쟁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전투에 공을 세운 데라자와 히로타카에게 히젠 나고야 땅을 영지로 주었다. 성을 축조할 때 공사 총감독으로 기여하고 조선에 출병한 공로까지 인정한 것이다.
데라자와는 1602년 나고야 성을 허물고 가라쓰 해변에 자신의 성을 축조했다. 조선 침략의 상징물인 그 성을 허문 것은 일개 영주의 결정이 아니었다. 조선과의 무역 재개와 친선관계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이에야스는 성을 허물어 전쟁에 반대했던 자신의 뜻을 널리 알릴 필요가 있었다. 전쟁 기간에 아버지와 남편을 잃었거나 오래 빼앗겼던 민중은 전쟁에 치를 떨었다. 7년 동안 헐벗고 굶주린 것이 모두 전쟁 탓이라 여겼던 민중의 염전사상(厭戰思想)은 하늘을 찔렀다. 반전사상과 염전사상은 지금 허물어진 성터 위에 아기 불상의 모습으로 남았다.
데라자와는 그렇게 허문 성석과 건물의 자재를 고스란히 자신의 성 쌓기에 사용했다. 마쓰우라(松浦) 강이 바다로 흘러드는 나지막한 구릉 위에 한껏 멋을 부려 쌓아올린 가라쓰 성은 멀리서 보면 학이 나래를 펴고 춤을 추는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무학성(舞鶴城)이라 불린다.
그렇게 헐린 나고야 성은 얼마 후 일반 민중의 공격으로 또 한 번 상처를 입는다. 1637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기독교 탄압과 가혹한 조세가 원인이었던 시마바라(島原) 민란 때였다.
성터 입구 ‘나고야 성 박물관’ 현관 앞에는 제주도 돌하르방 부자가 서서 탐방객을 맞아준다. 일본인들은 이 낯선 ‘수문장’ 앞에서 반드시 발길을 멈추고, 더러는 기념사진을 찍기도 한다. 이 박물관의 성격이 ‘일본열도와 조선반도의 교류사’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출입문을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전시물이 한국 고미술의 상징인 반가사유상 복제품이다. 7세기 중국과 조선반도 문명의 영향을 받아 일본에 처음 율령 국가가 세워졌다는 설명문이 그 아래 붙어 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이 거북선 모형이다. 실물보다 많이 축소된 것이지만 여수나 통영에서 본 것과 다르지 않다. 문을 들어서 처음 맞닥뜨리는 공간에 자리한 거북선 옆에는 당시의 일본 전함 아타케부네(安宅船) 모형과 두 나라 병기, 무복, 전황도 등이 전시되어 있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전쟁을 조명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