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 서종면에서 요리를 재미로 시작한 ‘요리하는 남자’ 방수형(45)교수는 아내를 위해 텃밭에 다양한 허브식물과 케일을 가꾸기 시작했다. “요리는 해보지 않으면 전혀 알 수 없어요. 시도하는 게 더 중요해요. 맛이 있든 없든 그 사람을 위해 정성을 다하고 싶어지거든요.” 그가 내놓은 음식 앞에 고요한 평화를 느꼈다. 요리를 통한 나눔의 기쁨이 이것인가 보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장소 협찬 송스키친
남성미 넘치는 외모와 색깔 강한 연기로 익숙한 방수형 호서예술전문학교 연기예술학부 교수는 그 모습에서는 상상하기 어렵게도 ‘앞치마 두른 남자’들의 세계에 그 누구보다도 일찌감치 발을 담근 사람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요리를 한다는 그의 요리 세계에는 어떤 레시피가 숨어 있을까.
“어렸을 때부터 저희 어머니가 음식 간을 볼 때면 저에게 맡기곤 했어요. 왜 저에게 맡겼느냐면, 본인이 간 보는 게 귀찮으셨을 테니까(웃음). 하지만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네가 그래도 가족들 중에서 제일 정확하게 맛을 볼 줄 알아.’”
무사, 살인자, 조직폭력배 등등 선 굵은 연기로 자신만의 영역을 개척한 방수형 교수는 ‘센’ 인상과는 달리 웃음기 섞인 목소리와 농담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가 좋아하는 요리,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의 얘기가 아니던가.
어머니의 나물 조기교육(?)을 받으며 자라다
방 교수는 4년 전 호서예술전문학교 식품조리학과에서 본격적으로 요리를 배웠다. 당시만 해도 남자가 요리를 배운다는 게 식당이라도 차린다는 생각 없이는 그리 익숙하지 않은 때였다. 그러나 방 교수에게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외할머니도 그렇고 어머니께서도 워낙 음식을 잘하셨어요. 특히 나물에 관해 잘 아셨습니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자라니 자연스럽게 맛있는 음식, 좋은 음식을 알게 됐죠.”
방 교수의 어린 시절은 부유하진 않았지만 행복한 집안이었다. 어머니는 일요일이 되면 나물을 캤고 그럴 때면 꼭 방 교수를 데리고 다녔다. 그가 자연스럽게 요리와 친숙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요리에 대한 그의 경험과 생각은 이라는 에세이집으로 다듬어져 나오기도 했다.
아직도 만들 수 없는 그 시절 무밥의 맛
방 교수의 어머니는 나물을 잘 알다 보니 자연스럽게 약초에 관해서도 도통했다. 그런 지식은 외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 그는 어렸을 때 ‘쓴 물’을 자주 먹었던 걸 기억하고 있다. 외할머니가 봄에 쑥을 캐서 쑥물을 우려내 그에게만 줬던 것이다. 쑥은 지혈 작용과 함께 염증을 완화하는 역할을 한다. 그는 어린 시절 쓴 물을 자주 먹었던 것이 자신의 미각을 발달시킨 것 같다고 말한다.
“외갓집에서 가장 싫었던 음식이 무밥이었어요. 그런데 그 맛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그때는 왜 그렇게 먹기 싫었는지 모르겠는데(웃음). 제가 만들면 그때 그 시절의 무밥 맛이 안 나와요.”
그가 요리를 배운 것은 어머니의 손맛과 가까워지기 위한 노력이기도 하다.
“어머니가 가장 잘하는 게 시래기 된장국입니다. 제가 워낙 좋아해서 요즘도 어머니 집에 가면 두 그릇씩 먹게 돼요. 어머니가 수많은 요리들을 많이 해줬어요. 그중에서 간단하게 만드는 것들이 최고인 듯합니다. 저는 어머니가 해주었던 맛에 연구를 통해 접근하는 중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요리한다는 즐거움
방 교수는 어렸을 때는 생존을 위해 먹었다고 말했다. 그에게는 시골 소년답게 산 밑 물가에 가서 수영하고 오는 길에 기찻길 옆에서 무를 뽑아 먹고 산딸기나 으름을 따먹었던 즐거운 추억들이 있다. 그러나 맛 자체를 느끼지는 못했다. 서울에 올라와 배우로 일하며 혼자 살게 되면서는 더욱 맛을 위해 먹지 않게 됐다. 하지만 그런 시절에도 요리해 먹을 때 어머니가 해준 맛과 비슷해야 성에 찼다고 한다.
“나이가 마흔을 넘어가면서는 단순히 생존을 위해서가 아닌 맛을 위해, 사랑하는 이를 위해 요리하게 되더군요.”
그는 사랑하는 이를 위해 맛있는 걸 만든다는 것. 즉 정성의 중요함을 강조했다.
“사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가 요리에 대한 의욕을 다소 잃은 것 같아요. 음식의 맛도 시간이 지나니 미세하게 변하더군요. 아마 사랑을 줄 대상이 없어져서일 겁니다.”
방 교수가 가장 사랑을 주는 대상이라면 아내일 것이다. 그의 아내는 1990년대 ‘광고계의 퀸’으로 불리며 대한항공, 삼성전자, LG화학의 전속모델이었던 박리디아 씨.
“아내가 러시아에서 3년 반, 뉴욕에서 4년 반 동안 유학 생활을 했어요. 그런 데다 선천적으로 유럽식이나 미국식을 좋아해요. 그래서 처음 만났을 때. 음식 취향이 너무 달랐습니다. 아내는 유럽식이지만 저는 토속 음식을 좋아했으니까요.”
두 사람은 공통의 맛을 찾아냄으로써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아내가 아침에 일찍 학교를 가거나 출근해 저보다 항상 바빠요. 그래서 그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계란말이와 계란탕을 준비하죠. 케일, 쪽파, 마늘 다진 거를 섞어서 새우젓으로 간을 해 만든 간단한 계란탕이면 그 사람도 저도 아침으로는 충분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오이소박이도 좋아하게 됐어요. 주말에는 약백숙으로 식사를 함께 하죠.”
깐깐한 방 교수가 만든 오이소박이 한입 베어 물면 그가 고민하는 삶, 자연, 사회, 문화, 영화가 입안에서 알싸하게 씹힐 것 같다.
요리는 타이밍과 과정이 중요
방 교수의 요리는 철저한 자연식을 추구한다. 그는 현대인의 대표적인 피부 질환인 아토피가 현대 문명이 만들어낸 병이라고 비판했다.
“저희 때만 해도 피부질환으로 고생했던 사람이 별로 없었어요. 아토피는 면역 질환 때문에 생기는 거거든요. 영양학에서는 인 성분이 부족하면 피부질환이 생긴다고 설명합니다. 현대문명의 대량생산체제로 만든 대형 마트의 농산물에는 인 성분이 부족해요. 채소가 땅에서 스스로 영양을 흡수하면서 자라야 하는데, 그냥 비료를 뿌려서 만드니까요.”
그는 비료나 농약을 주지 않은 재료로 만든 제품을 골라서 먹는 게 몸에 유익하다고 재차 강조했다.
“나이가 들면서 중요해지는 건 무엇보다도 건강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식재료에 대해 그렇게까지 신경 쓰지 않고 살아요.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자연에 가까워져야 합니다. 자연으로 돌아가면 돌아갈수록 회복이 쉬워집니다. 그러니 최대한 자연에 가까이 접근해야 해요. 음식도 생활도 생각도.”
방 교수가 중요하게 여기는 요리의 포인트는 크게 ‘타이밍’과 ‘과정’으로 나눌 수 있다.
“열심히 만든 음식이 있는데, 그 타이밍에 먹어야 맛있는데 안 먹으면 화나죠(웃음). 그리고 김치찌개를 제가 참 잘 해요. 그런데 특별한 재료라는 건 없어요. 다만 과정이 중요해요. 똑같은 재료라도 어떤 순서로 조리하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지죠. 예를 들어 콩나물국밥을 잘하는 집에서는 밥을 국 안에 넣어 끓이지 않고 따로 둡니다. 흔히 서울의 콩나물국밥집에서는 밥을 끓여버리는데, 끓이면 밥의 전분이 다 풀어져서 콩나물국의 육수 맛이 안 나게 돼요. 생각해보세요. 옛날 드라마를 보면 ‘주모 국밥 하나 말아주쇼’라고 하지 ‘끓여주쇼’라고는 안 하잖아요.”
그는 ‘수저로 몇 큰 술’ 같은 레시피는 자신의 스타일이 아니라고 밝혔다.
“저는 재료를 퉁퉁 넣어줍니다. 어머니가 그렇게 가르쳤어요. 그리고 화학조미료는 아예 안 넣어요.”
자신이 요리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환경을 만들어 보라
“여성의 사회 진출과 맞벌이가 많아지고 캠핑문화가 발달하면서 최근의 남자의 요리 현상이 일어났다고 봅니다. 저는 좋은 현상이라고 봐요. 부부라면 서로를 도울 줄 알아야죠.”
어머니의 손맛을 찾기 위한 의지, 그리고 건강을 위한 철저한 자연식의 추구는, 요리가 사랑하는 사람, 지인, 세상과의 소통이기에 가능한 법도일 것이다. 그에게 요리를 하고 싶어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남자들을 위한 조언을 구했다.
“우선 함께 캠핑을 자주 다니는 방법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남자인 자신이 요리를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게 좋다는 거죠. 캠핑을 가서 스스로 음식을 하려고 노력해야 해요. 그리고 그 지방의 향토 음식들을 많이 먹고 다니면서 그 재료나 만드는 방법을 가볍게 물으면 나중에 자신이 충분히 만들 수 있습니다. 그렇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앨빈 토플러는 돈이 많다고 해서 부자인 게 아니라 조금을 갖고 있더라도 누릴 수 있어야 부자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걸 어떻게 활용하며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중요한 거죠. 내가 술을 흥청망청 마시는 삶을 살면 그런 분위기를 계속 이끌어갈 수밖에 없는 거 같아요. 그러니까 자제하면서 좋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누구에게서 받는 것보다는 내가 직접 해서 나눌 수 있는 것 자체가 행복이라고 봅니다.”
요리를 통한 나눔의 기쁨. 이는 소통보다 좀 더 나아간 자족적인 기쁨이다. 그래서 부자에 대한 개념도 그는 남달랐다.
“제가 부러운 게, 예쁜 기와집에 10년, 50년 된 장이 담긴 항아리 쫙 깔아놓고 사는 분들이에요. 그게 진짜 부자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부러워요.” 마지막으로 그에게 집밥의 매력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그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먹어도 먹어도 물리지 않는 것.’
“집에 있을 때는 열무김치, 오이, 김치, 계란 프라이 등등 간단하게 먹게 됩니다. 부유한 집안이라도 매일 어마어마하게 차려놓고 먹지는 않아요. 그렇게 하면 병이 나지 않을까요?”
울퉁불퉁한 비포장과 포장 길이 4㎞ 정도. 하늘 향해 쑥쑥 뻗어나간 소나무 숲길을 지나고 몇 개의 개울을 잇는 다리를 건너고 시원한 계곡 길을 따라 지루할 정도로 한참을 가야만 민가 한 채가 모습을 드러낸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띄엄띄엄 텃밭 주변으로 민가가 둥지를 틀고 있는 모습에서야 겨우 사람 사는 곳이라는 곳을 알게 되는 곳. 바로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응곡마을(일명 통바람골)이다.
글 이신화 여행작가
마을 사람들은 뒷산에 매가 사는 골짜기라는 뜻을 지닌 ‘응곡산(鷹谷山)’이 있어서 ‘응곡마을’이라고 하는데, 지도상에는 응복산(1359.6m)으로 표기되어 있다. 현재 이 마을에는 10~11가구가 있다. 토박이들은 아니고, 10~20여 년 전부터 이곳에 둥지를 튼 사람들이다. 대부분 겨울에는 마을을 떠나 있다가 봄철 산나물이 나올 즈음에 모여든다. 4월 말에서 5월 초순경이면 얼레지 나물로 초문을 연다. 얼레지는 일명 ‘가제 무릇’이라 불리기도 하며 고산지대의 숲속 음지에 자라는 백합과의 다년생 초본이다. 높이가 25㎝ 정도 자라고 4월에서 6월에 자주색(흰색 변이도 있다) 꽃이 핀다. 잎이 얼룩덜룩하여 얼레지라 이름 붙였다고 하며 꽃말은 ‘질투’ 또는 ‘바람난 여인’이라고 한다. 얼레지는 씨앗이 발아하여 꽃을 피우기까지 7년 이상이 걸린다고 한다.
산나물을 뜯으러 산으로 오르는 동네사람들을 따라 함께 나서본다. 임도가 끝나는 지점에서 1시간 정도는 걸어야 한다. 나무들은 아직도 썰렁한 겨울 분위기를 내지만 산행 길에 간간이 피어난 야생화가 반갑다. 노랗게 피어난 ‘괭이눈’과 ‘꿩의 바람꽃’, ‘댓잎 현호색’ 노랗게 종 모양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백두대간 능선이 아니면 볼 수 없는 ‘한계령 풀’이 눈 속에 들어온다.
특히 한계령 풀은 무지 희귀한 꽃으로, 지리산 모데미골에서 처음 발견된 모데미풀처럼 한계령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산죽 길을 지나고 능선 참나무 군락지 밑으로 귀하디귀한 야생화가 눈에 띄더니만 능선을 넘어 고갯길에 이를 즈음에는 완전히 야생화 화원이 펼쳐진다. 일부러 누가 이렇게 아름다운 화원을 만들어낼 수 있단 말인가. 노란 꽃 사이로 이미 나물꾼들이 뜯어가 버린 얼레지의 보랏빛 꽃까지 합세해 더욱 빛이 난다. 생계가 아니라면 그냥 피고 지는 얼레지꽃 군락지까지 합세했다면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야생화 화원이었을 것이다. 주민들은 나물이나 뜯어가라고 하지만 보랏빛 꽃이 너무나 처연해, 가늘게 봄바람 한 줌에도 부들부들 떨고 있는 꽃잎이 가련해서 차마 뜯어버릴 수가 없다.
◇약수산에서 만난 신비한 철분 약수, 명계 약수터
그렇게 한참이나 야생화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새싹 움트는 몸짓을 느끼면서 돌아오기 싫은 길을 되돌아 나온다. 나물꾼들이 얼레지를 채취해 내려와 나물 삶는 데까지는 몇 시간의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마을을 비켜 임도길 중간 즈음에서 계곡 물을 건너가면 소로가 나온다. 계곡 옆길로 난 길이라 산책하기에 아주 좋다. 가래나물, 팥고비, 풀고비, 당귀싹, 화살나물, 골담초 등 나물 새순이 뾰족하게 올라오고 애기 괭이눈과 꽃잎에 점이 박혀 보기 쉽지 않다는 ‘긴 개별꽃’도 눈에 띈다. 산나물과 야생화를 관찰하면서 10분 남짓 올랐을까? 자그마한 폭포를 앞두고 약초꾼이 지어놓은 천막이 나선다. 켜켜이 장작을 싸놓고 부엌과 방을 들여놓고 뒤편에는 연통도 있다. 분명히 사람이 살았음직한 나물꾼의 천막은 당시에도 이곳에 있었는데, 여전히 사람은 만날 수 없다. 자그마한 폭포를 끼고 계곡을 건너면 암반 주변이 철분 빛으로 벌겋게 변해 있다. 누군가 계곡물과 섞이지 말라고 돌을 쌓아 막아 두었다.
자연은 참으로 신비한 일이다. 계곡 옆에 어떻게 이런 철분 약수터가 생겼는지 생각할수록 오묘하다. 붉은 물 사이로 뽀르르 기포가 올라온다. 물위에 떨어진 낙엽을 걷어내고 손으로 물을 마신다. 강한 철분 맛보다 톡 쏘는 탄산 맛이 느껴져 설탕만 넣으면 사이다와 같다. 이 약수를 통상 명계약수라고 하는데 통바람 약수라고도 부른다. 그래서 산 이름도 약수산이다. 약수산을 둘러싸고 남으로는 명계약수, 서쪽으로는 삼봉약수, 북으로는 갈천약수, 동으로는 불바라기약수가 있다. 약수가 여러 곳에서 나온다고 하여 부른 듯하다.
◇직접 만든 아궁지에 산나물 삶아 말리고, 지친 몸에 술 한잔
두어 시간이 지난 후, 필자가 이 마을에서 맨 처음 만났던 노부부가 사는 집을 찾는다. 자루에 나물이 가득 차면 집으로 와서 곧바로 나물을 삶는다.
시멘트로 네모진 통을 만들고 뒤에 연통을 단 아궁이가 있다. 장작불을 지피고 다듬지 않은 얼레지를 넣고 뚜껑을 닿고 5분 정도 삶아주고 양철통 위에 꺼내 말리면 되는 일이다. 할아버지가 나물을 삶는 동안 할머니는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한다.
커다란 무쇠솥이 두 개, 고기도 구워 먹고 화로로 쓰는 널찍한 양철통이 한편에 놓여 있다. 깊은 산 물을 끌어다 쓰기 때문에 수도꼭지는 잠그지 않은 채로 졸졸 물이 흘러내린다. 무쇠솥에 물을 한가득 넣고 군불을 지핀다. 자그마한 풀무를 돌려가면서. 가스렌지 위에서는 구수한 된장국이 부글부글 끓는다. 하루 종일 나물 뜯느라 지친 몸을 얼레지 된장국에 찬밥을 넣고 김치 한 가지로 때우는 것이다.
“하루 정도만 우려내면 돼. 미역국처럼 맛이 좋아서 꼭꼭 얼려 두었다가 자식들에게 주지.” 겨울이면 춘천에 살다가 봄철 나물 뜯으러 온다는 할머니는 인심 좋게 된장국 한 그릇을 퍼준다. 그 맛이 얼레지 묵나물보다 훨씬 좋아서, 슬그머니 욕심이 생긴다. 뜯어오지 못한 것을 후회할 판이다.
그때 이웃 할아버지가 됫병을 들고 나타나 술잔을 돌린다. 자그마한 부엌에 옹기종기 앉아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 화기애애하다. “얼레지는 귀한 나물이라서 호텔이 아니고서는 먹기가 힘들지. 말려 팔면 제법 비싸게 팔리는 산나물이야. 얼레지는 1주일 정도 후면 끝이 나고 그 다음에도 참나물, 곰취, 전우치 등 두 달 반 정도는 나물 작업을 해야 해.”
힘겨운 산나물 뜯기 작업 후에, 푸성귀로 배를 채우면 얼마나 허기질까 할 즈음 아랫집에서 전화를 한다. 이 집은 더 풍성하다. 고기에 직접 재배했다는 표고버섯과 막 뜯어 낸 곰취와 참나물, 산마늘 쌈이 차려져 있고, 여름까지 먹는다는 묵은 김치와 된장, 굵은 소금장이 있다. 막 지은 밥과 꽁치조림까지 곁들여지는 동안 마을 사람들은 계속 찾아든다. 할일 없는 겨우내 모여 술잔치를 벌였다는 사람들. 매캐한 연기를 뿜어내면서 밤이 이슥할 때까지 술판을 벌인다.
이 지역에서 나물은 이들의 생계수단이고, 나물 철이 끝날 때까지 산길 오르락내리락 하는 일을 반복할 것이다.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사람은 이제 지긋지긋한 작업이 되지만 어쩌다 한 번 들르는 여행객의 눈에는 행복하기만 하다. 아직까지 이런 곳이 남아 있다니. 이것을 관광상품화한다면 덜 힘겹게 살 텐데 말이다. 돌아오는 길, 유난히 하늘에 떠 있는 달빛이 환하다.
주소 홍천군 내면 통바람길
찾아가는 방법 영동고속도로 → 속사IC → 운두령 넘어 창촌 방면으로 난 56번국도 이용 → 창촌 → 구룡령 가는 길에 우측 명계리로 들어가는 446번 지방도로 우회전. 다리 앞에서 왼편 비포장 길로 좌회전 → 응곡마을
맛집과 숙박정보 응곡마을 통바람 산장(011~9795~1684)에서는 식사와 민박이 가능하다. 또 가는 길목인, 이승복 기념관 주변에 운두령횟집(033~332~1943, 송어회, 용평면 운두령로 825), 장수촌(033~332~7419, 토종닭, 용평면 운두령로 286)이 괜찮다. 삼봉 자연휴양림(033~435~8535~6, 홍천군 내면 삼봉휴양길 276)이나 자연속으로(033~334~0770, www.naturalpension.com, 용평면 운두령로 109-49)와 같은 펜션에서는 와인을 시음할 수 있다.
여행포인트 얼레지 채취는 올해 끝이 났고 계절에 맞는, 또 다른 산나물이 싹을 틔울 것이다. 여행객들은 필요하다면
주민들에게서 사오면 될 일이다.
△글ㆍ사진 이신화 여행작가
이립(而立)에 여행작가로 시작해 어언 지천명(知天命)에 다다랐다. 그동안 ‘걸어서 상쾌한 사계절 트레킹’, ‘대한민국 100배 즐기기’, ‘on the camino’ 등 여행서 총 14권을 출간했다. ‘인생이 짧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 지난해 홀로 197일간 30개국의 유럽 배낭 여행을 했다. ‘살아 있을 때 떠나자’가 삶의 모토다.
돈은 중요하지 않다. 일자리가 나를 움직인다. 대기업 임원에서 숲 해설가가 된 김용환씨를 만났다. 많은 돈을 받지 않지만, 퇴근하면 다시 출근할 생각에 설렌단다.
두 번째 직장에서 퇴직한 후 약 4년이 흘렀다. CJ 제일제당 상무, 스파클 CEO. 화려했던 시절을 상징하는 명함들은 집안 한구석에 켜켜이 쌓여 있다. 이 명함의 주인공 김용환씨는 이제 화려한 직함이 새겨진 명함 대신 ‘국립수목원 숲 해설가’라고 써진 명함을 내민다.
“회사라는 울타리를 벗어나니 더 큰 세상이 보이더라고요. 그것 중 하나가 숲입니다.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무궁무진한데 그것을 모르고 살았지요. 저는 그것을 많은 사람에게 알려주는 일을 하고 있어요. 이렇게 보람된 일도 하니 그야말로 일이 힐링이지요.”
김씨의 얼굴에는 이제 여유가 넘친다. 어깨를 무겁게 했던 직장생활의 고달픔과 긴장감은 이제 얼굴에 남아 있지 않다. 부드러운 말투와 편안한 미소가 김씨의 현재를 알려줄 뿐이다. 대기업 임원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벼워진 월급봉투는 새로운 일을 하는 데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남에게 도움을 주고, 보람이 있고, 나이가 더 들어서도 할 수 있는 일을 가질 수 있다는 것. 오직 그것만이 김씨를 광릉 숲으로 인도했다.
◇ 재취업 준비 늦을수록 적극적으로
김씨의 퇴직 준비는 오래전부터 이뤄진 게 아니었다. 아니 그럴 여유가 없었다. 사실 그는 오랫동안 몸담아 온 CJ 제일제당에서 퇴직했을 때 새로운 일을 하며 은퇴준비를 하려고 했다. 그가 그렸던 청사진은 전원생활이었다. 산에서 약초도 캐 팔기도 하고, 펜션 사업을 하면서 유유자적하며 살기를 원했다. 그러나 상황이 녹록지 않았다.
당시 그의 나이 49세. 아내와 대학생인 두 아들을 부양하기에 전원생활은 위험부담이 컸다. 때마침 들어온 후배들의 간곡한 청도 거절할 수 없었다. 생수 제조업체 스파클의 경영을 맡아달라는 것.
당분간 휴식을 취하며 미래를 구체적으로 설계하고 싶었지만, 첫 직장 퇴직 후 반년도 안돼 스파클의 CEO로 새 출발을 하게 된다. “49세였던 당시 회사에서 퇴직해서 은퇴준비를 하려고 했어요. 상황이 안 도와주더라고요. 그러면서 은퇴 준비는 자연스럽게 소홀하게 됐죠.” 그 후 8년이 흘렀다. 그가 스파클의 경영을 맡은 사이에 연 매출도 80억원에서 150억원으로 껑충 뛰었다. 물론 더 그 자리에 머무를 수도 있었다. 마흔 끝자락이 었던 나이도 어느새 이순을 바라보고 있었다. 더 이상 미련이 없었다. 기업을 경영한다는 것은 꿈꿔 온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때 나이 57세. 그가 생각한 은퇴 준비의 마지노선이었다.
그는 두 번째 퇴직 후에 대한 생각을 가장 많이 한 때가 이때라고 말한다. 이런 생각을 미리 해뒀어야 한다는 조급함 때문이었다. 전원생활과 같은 새로운 것을 찾고 싶었다. 더 이상 공적인 이해관계가 얽혀진 자리는 있고 싶지 않았다.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을까? 휴식을 취하기 위해 아내와 찾은 국립수목원. 그때 김씨는 ‘아! 이거다’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김씨는 숲 해설가와의 첫만남을 이렇게 회상 한다.
“아내와 휴식도 할 겸 국립수목원에 간 적 있어요. 그게 약 4년 전쯤이에요. 70세는 돼 보이는 숲 해설가가 관람객들에게 숲에 대해 설명하는데 무척 감동이었어요. ‘저 나이에도 저렇게 해박한 지식을 전달할 수 있구나’ 하고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숲 해설가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찾아보게 됐죠.”
의외로 정보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인터넷에는 숲 해설가가 되는 방법과 절차, 교육 기관까지 상세하게 나와 있었다. 산림청 인증 숲 연구소, 숲 해설가 협회, 국민대 숲 해설가 양성 교육과정이 있다는 정보를 접한 김씨는 한달음에 달려가 산림청 인증 숲 해설가 양성 교육에 등록한다. 입문 1개월, 전문가 과정 8개월의 장기간 교육이지만, 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숲 해설가라는 목표가 9개월간의 교육을 즐겁게 해주는 요소가 되기 충분했기 때문이다.
일주일 2회의 교육에 수강료 총 160만원. 그는 자신의 미래를 위한 투자였기 때문에 전혀 아깝지 않았다고 얘기한다. 그러나 숲 해설가가 되는 길은 의외로 많은 노력을 필요로 했다. 생각보다 많은 분야를 공부해야 하는 것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돈과 시간을 투자하는 것은 전혀 아깝지 않았어요.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분야를 공부하는 것이 조금 힘에 부쳤죠. 원래 책을 읽고 공부하는 것은 좋아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수목, 생태, 교육학, 심리학 등 다양한 분야를 소화하기 힘들었을 것 같아요.”
◇ 숲 해설가
숲 해설가 양성과정 9개월. 국립수목원에서의 실습 30시간. 숲 해설가 자격증을 취득하기까지 꼬박 10개월이 걸렸다. 그러나 자격증을 땄다고 해서 모두가 수목원에서 숲 해설가로 활약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국립수목원에서 일하기 위해 몇 가지 관문을 더 넘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때도 김씨의 철저한 준비가 빛을 발했다.
“숲 해설가 자격증을 취득한 후에도 국립수목원에서 면접과 해설 시험에 합격해야 비로소 숲 해설가로 활약할 수 있었어요. 원고를 쓰고 시연하는 것까지 있었죠.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하는 만큼 준비를 철저히 했어요. 밤새 원고를 쓰고 연습해 결국 합격하게 됐죠.”
김씨는 어느새 4년차 베테랑 숲 해설가가 됐다. 그 사이 관람객에게 해설할 때 자신의 노하우도 생겼다. 그러나 첫 걸음은 그리 쉽지 않았다. 숲 해설가 교육과정에서 배운 이론과 실전은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배운 것과 실전이 많이 다르더라고요. 그때는 꽤 애를 먹었는데 경험이 늘어나니까 노하우도 생기고 저만의 해설 방식도 생기더라고요.”
그는 이제 숲 해설에 감성을 담으려 한다. 관람객에게 숲과 나무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거기에서 오는 감성이나 감동을 고스란히 전달하는 것도 숲 해설가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서다. 김씨가 수목원의 숲길을 걸으며 차근차근 숲과 나무에 대한 자신의 감회를 설명한다. 나무에 대한 알짜배기 정보도 담겨 있지만, 그것에 자신의 생각과 철학도 녹아 있다. 설명을 듣지 않았으면 쉽게 지나쳤을 수도 있는 자연의 신비로움. 4년차 숲 해설가답게 그는 그것을 끄집어낸다.
“저기 전나무 숲 보이시죠? 전나무는 더 높게 자라기 위해서 나무 상단의 가지가 자라나면 그 밑에 있는 가지들은 자체적으로 모두 쳐내요. 울창한 숲에서 살아가기 위한 자기만의 생존 방식이죠. 사람도 그런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가져간다고 좋은 것은 아닌 것 같아요. 포기할 줄도 알아야 더 큰 미래를 도모할 수 있을 겁니다.”
◇ 일이 곧 삶의 엔진이어라
이제는 김씨에게 일 그 자체가 삶의 활력소다. 출근시간보다 한 시간 일찍 나와 숲 속을 거닐고, 숲의 향기를 느끼며 감상에 잠기는 것. 그것이 일이고 일상이자 삶의 낙이 됐다. 일이 곧 삶의 엔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김씨답게 새로운 일에 대한 준비도 수월하게 진행 중이다. 지난 여름 산림 치유 지도사 2급 자격증을 취득한 것. 알코올 중독, 주의력 결핍 장애(ADHD), 게임 중독자, 주부 우울증 대상자 등을 치료하는 데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하고 싶다는 것이다.
“숲 해설가만 4년 했어요. 앞으로 일의 성격을 달리해 새로운 일을 하고 싶어요. 물론 그 일의 중심에는 산림이 있죠. 자연 자체가 제 일이고 삶의 낙인데, 그것으로 다른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면 그것만큼 보람 있는 것이 어디 있겠어요. 그래서 산림 치유 지도사는 제 삶의 새로운 엔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투데이PNC가 운영하는 시니어 전문 미니어 '브라보 마이 라이프' (www.bravo-mylife.co.kr)는 회원수 16만명인 귀농사모와 다양한 사업을 전개하기로 했습니다.
우선 오는 7월 18일부터 8월 17일까지 강원도 고성군 삼포2리 해변에서 열리는 '제14차 귀농사모 여름로하스캠프 및 2014 삼포2리해변 귀농귀어캠프' 행사를 공식 후원하기로 했습니다.
또 장기적으로 귀농사모 회원들의 유기농산물 직거래사업도 공동으로 진행할 예정입니다.
◇ 행사 개요
1. 개최일시 : 2014년 07월 18일(토) ∼ 08월 17(일)
2. 장 소 : 삼포2리해변
3. 주 최 : 귀농사모/한국귀농인협회/2014 삼포2리해변 귀농귀어캠프조직위원회
4. 후 원 : 강원도/고성군/속초경실연/양양귀농지원센터/고성군번영회/삼포2리해변어촌계/설악헬스케어귀농귀어타운/영농법인한백/국립한경대학교 평생교육원/강원관광대학/강원귀농인협회
5. 주 제 : 제14차 귀농사모 여름로하스캠프 및 삼포2리해변 오토캠핑 귀농귀촌창업학교
6. 강 사 : 첨부서류 참조
7. 참가 예상 인원 : 연 6만명
◇ 행사 소개
제14차 귀농사모 여름로하스캠프 및 2014 삼포2리해변 귀농귀어캠프운영 계획
1. 목 적
◦ 귀농사모회원 16만명에게 귀농귀어체험 기회 제공.
◦ 강원출신 출향인인 지역 공동체로서의 연착륙 할 수 있게 일체감과 자긍심을 고취.
◦ 강원도와 고성의 문화를 이해하고 느낄 수 있는 귀농 귀어 창업체험학습 프로그램을 통해 지역귀농인구 유치 및 지역경제 활성화.
2. 방 침
◦ 전국 및 도내 예비 귀농 귀촌 귀어인 및 도민을 대상으로 16만 회원의 Daum우수카페 귀농사모 홈페이지에서 신청을 받아 선정.
◦ 30일간의 가족이 동행하는 귀농 귀촌 귀어 체험 워크숍활동 중심 프로그램 운영.
◦ 건강하고 화목한 귀농과 지역민과 융화하는 행복한 귀농 만들기 프로그램 운영.
3. 세부 운영계획
◦ 일시 : 2014. 7. 19.(토) ∼ 8. 17.(일) 30일간.
◦ 장소 : 삼포2리해변
◦ 대상 : 귀농사모 회원 및 전국민
◦ 인원 : 30일간 연 6만명
◦ 숙식 : 오토캠핑 및 삼포2리해변 주변 팬션/민박/식당
◦ 프로그램 : 속초고성양양지역귀농체험워크숍/수산물 이용 치유식품개발 워크숍/힐링쿠킹쉐프전문과정/어린이귀농학교/애견해수욕리조트/소상공인해수욕장/여성귀농인워크숍/싱글귀농인워크숍/귀농귀촌아이디어클럽워크숍/귀농복덕방워크숍/지붕개량워크숍/DIY CCTV/귀농인의3D프린터워크숍/경원대학교총동문회워크숍/한경대학교귀농귀촌특화과정동문회워크숍/귀농귀촌인무료오토캠핑장/황토건축워크숍/목조주택워크숍/조입식주택워크숍/농막워크숍/원두막워크숍/원목구워크숍/용접워크숍/비닐하우스워크숍/칡소사육자워크숍/MBC예비귀농인워크숍/한국일보귀농동호회워크숍/KBS귀농동호회워크숍/한국노총귀농동호회워크숍/국방부귀농동호회워크숍/농협중앙회귀농동호회워크숍
◦ 숙박은 자부담 입장료 및 사용료는 유료
4. 운영 일정표
운영 일정표는 참가농가들 일정 조율 중으로 6월 30일 확정.
*프로그램은 기상변화 또는 일정에 따라 다소 변경될 수 있음
5. 준비사항
가. 행사장확보(삼포2리해변 일대)
나. 행사 사무국: 강원귀농귀촌학교내
사무총장 : 조재근(박사)
고문 : 최진규(약초전문가)
자문 : 정성근(한경대학교 교수)
다. 착안사항
• 안전중심의 안락 한 캠프
• 귀농사모+고성군민+전국민+지역경제 상생 프로그램
• 이 문건과 관련 문의사항은 010-7345-3344(정성근교수)로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나라의 산과 들에는 300여종의 특산식물을 포함해 5000여종의 식물이 자생하고 있습니다. 풀이든 나무든 거의 모두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니, 일 년 365일 매일같이 평균 10종 이상의 색다른 야생화를 만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휴일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산과 들, 계곡에 들어 무위자연을 즐기는 것도 좋지만, 고개 숙여 매일매일 새롭게 피어나는 야생화를 마주할 때 위험하면서도 황홀한 색다른 세계로 빠져 들게 됩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상처 입고 병 든 마음과 영혼이 위안 받고 치유되는, 특별한 힐링(healing)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풀밭에 엎드려서 담은 한 장의 꽃 사진은 두고두고 ‘나만의 멋진 화첩’으로 남을 것입니다. 우리 땅에 자라는 풀과 나무는 이미 유구한 세월 동안 질병을 치유해왔으며, 미래에도 무궁무진한 개발가능성을 가진 약초이자 천연의 먹거리이기도 합니다. 꽃이기도 하고, 약초이기도 하고 먹거리이기도 한 우리의 자생식물과의 만남을 시작합니다.
야생화 포토 기행-①석곡
학명 Dendrobium moniliforme (L.) Sw.
높은 산 깊은 골짜기 깎아지른 절벽에서 모셔온 석곡(石斛)입니다. 모두 77종에 불과한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종 1급(9종)과 2급(68종) 식물의 하나인데서 알 수 있듯 귀하기 이를 데 없는 야생난초입니다. 손이 닿는 곳에선 단 한 포기도 만날 수 없으니, 그 옛날 안개 속에 길을 잃은 뱃사람들이 그윽한 향기를 쫓아 섬으로 돌아오곤 했다는 석곡의 진한 향을 단 한모금도 음미할 수 없는 아쉬움이 컸지만, 오히려 어떻게든 멀리 멀리서 살아남으라는 마음이 더 간절했습니다. 가까이 할 수 없는 석곡이 야속하기보다는, 그럴 수 밖에 없는 석곡의 처지가 너무도 안타까웠던 것입니다. 척박한 바위 절벽이나 고목 등에 달라붙어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착생종 난초라 해서 석란(石蘭)이라
고도 부릅니다. 난초과의 늘푸른 여러해살이 식물로 줄기가 마디마디 구별되는 대나무를 닮았다고 해서 죽란(竹蘭)이라고도 합니다.
꽃은 2년 된 원줄기 끝에 1-2개씩 달리며 5~6월 사이에 흰색이나 연분홍색 등으로 피는데 향이 매우 진하고 좋은 것으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중앙부의 꽃받침 잎은 길이 2cm 안팎, 너비 5mm 정도로 피침형 예두이고 측열편은 옆으로 퍼집니다. 꽃잎은 중앙부의 꽃받침과 길이가 엇비슷합니다. 순판은 약간 짧고, 뒤쪽에 짧은 거(距·꿀주머니)가 있습니다. 줄기는 뿌리줄기로부터 여러 대가 나와 20cm 정도까지 곧게 자라며 줄기 마디마다에 잎이 돌아가며 납니다. 피침형의 잎은 길이 5cm 안팎, 폭 1cm 안팎으로 진한 녹색을 띠며 2~3년이 지나면 떨어지고 줄기는 녹갈색으로 변합니다.
예로부터 뿌리를 제외한 식물체 전체가 해열 진통에 효과가 있고 건위강장제로도 유용한 귀한 약재로서 대접을 받아온 데다 최근 꽃도 예쁘고 향기도 좋은 관상용 난초로도 인기를 끌면서 갈수록 야생 상태의 석곡을 만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차로 마시면 오래 산다고 해서 일본에서는 장생란(長生蘭)이라고 불립니다.
우리나라 외에는 일본, 대만, 중국 등지에 분포합니다.
Where is it?
제주도와 서남 해안 및 섬 지역에 자생한다. 동백꽃으로 유명한 사찰 선운사를 품은 전북
고창 선운산 정상 부근 암벽이 석곡이 자생하는 북방한계선으로 추정된다. 일주문을 지나 약 3km 정도 숲길을 오르면 도솔암에 이르는데 거기서부터 머리 위 깎아지른 바위절벽 곳곳을 살피면 된다. 제주도의 용암과 나무, 덩굴식물이 뒤섞인 원시림(곶자왈)에서는 팽나무 등 고목에 착생한 석곡을 만날 수 있다. 경남 남해 금산 곳곳 바위절벽에도 자생한다.
김인철 전문위원/야생화 칼럼니스트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를 나와 서울신문사에 들어가 환경부 출입기자, 한국환경기자클럽 회장, 행정뉴스부장, 논설위원, 제작국장 등을 지내는 등 기자로 만 29년 일했다.
‘김인철의 야생화산책’(http://ickim.blog.seoul.co.kr)이란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야생화의 생태 및 사진 촬영을 공부하고 있다.
농촌진흥청은 산약초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면서 독초와 약초를 구분하지 못하고 먹는 사고가 늘고 있다며 '약초와 독초 구별법'을 소개했다.
헷갈리기 쉬운 대표적인 약초와 독초로는 곰취나물과 동의나물, 산마늘과 박새, 비비추와 은방울꽃 등이 있다.
유독 잎이 크고 둥근 곰취는 향이 그윽하고 맛이 좋아 쌈 요리로 인기가 많다. 곰취와 비슷한 동의나물은 뿌리는 약용으로도 사용하지만 독성이 강해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된다.곰취와 동의나물을 쉽게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은 잎의 크기를 살펴보는 것이다. 곰취 잎은 길이가 32㎝, 폭이 40㎝가량인 반면 동의나물은 길이와 폭이 5∼10㎝ 정도로 작다. 또 곰취는 잎이 부드럽고 가는 털이 있지만 동의나물은 잎이 두꺼우며 털이 없고 광택이 난다.
명이나물로 알려진 산마늘과 독초인 박새도 헷갈리기 쉽다. 산마늘은 항암은 물론 소화 및 식욕 촉진, 콜레스테롤 감소 등에 효과가 있는 반면, 박새는 약용으로 쓰이는 뿌리와 뿌리줄기를 제외하고는 과거 사약의 재료였을 정도로 독성이 강하다. 잘못 먹으면 구토, 복통, 어지럼증, 혈압 및 맥박저하, 마비 증세가 나타난다.
산마늘과 박새는 한줄기에 매달리는 잎의 개수로 구분하면 된다. 산마늘은 타원형의 잎 2∼3장이 달리지만 박새는 곧은 잎이 줄기를 감싸듯 여러 장이 촘촘히 어긋나게 달린다. 박새는 잎 가장자리에 털이 많고 주름이 뚜렷한 것이 특징이다.
백합과의 비비추는 잎이 아름다워 식용은 물론 장식용으로도 많이 사용된다. 비비추와 닮은 은방울꽃 역시 그 생김새가 아름다워 관상용으로 많이 심지만 잎을 잘못 먹으면 심부전증을 일으켜 사망에 이를 수 있다. 두 식물의 경우 비비추 잎 가장자리에 가늘게 잎 주름이 나 있는 것으로 구분하면 되지만 쉽지 않으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식감이 부드럽고 맛이 좋아 데쳐 먹는 원추리는 어린잎이 아니면 먹지 않아야 한다. 털이나 주름이 없이 미끈한 원추리와 달리 잎에 털이 많고 잎맥 사이에 주름이 나 있는 독초인 여로도 구분해 피해야 한다.
이밖에 기본적인 독초 감별법은 식물의 잎이나 줄기를 꺾어 냄새를 맡아보는 것이다. 냄새가 역하다면 일단 독초라고 의심해야 한다. 벌레가 갉아먹은 흔적이 있다면 독초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
독초를 잘못 먹고 복통과 구토, 어지럼증, 경련 등의 증세가 나타났을 때는 음식물을 토해낸 뒤 서둘러 응급실에 가야한다. 이때 먹은 식물을 가져가면 원인과 해독방법을 찾는 데 도움이 된다.
농촌진흥청 약용작물과 이정훈 박사는 "확신할 수 있는 산약초가 아니라면 야생식물을 함부로 채취해 먹는 걸 자제하는 것이 좋고 필요할 때는 전문가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지리산이 좋아 귀농을 마음먹은 젊은 부부. 어렵게 마련한 생활 터전이 산사태에 쓸려 나갔지만 좌절하지 않았다. 불편함을 감수하고 나서 얻게 된 새로운 행복. 해야할 일이 무수히 많고, 할 일이 끊이지 않으며, 내 땅이 없다 해도 서글프지 않아서 행복하다.
◇지리산 여름휴가 왔다가 마음먹게 된 귀농
2012년 9월 17일 새벽3시, ‘뚜뚜, 뚜뚜, 뚜뚜 알람소리에 눈을 떴다. “어…. 아직도 비가 오네?” 부스스 일어나 어두운 작업장에 불을 켠 후 여느 때와 같은 일상을 시작하려는 순간. 왜일까? 오늘따라 얼굴과 몸 주위로 정전기가 일듯 기분 나쁜 전율이 느껴진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두드리며 내 몸을 맴도는 정전기들을 날리고서 제빵작업을 시작했다. 먼저 계량을 하고, 반죽기를 돌리고, 1차 발효…. 성형을 한 후, 다시금 2차 발효에 들어갈 준비를 마친 후, 커피를 준비한다. 요 며칠 쉴 새 없이 내리는 비 때문에 눈을 뜨고 있는 이순간이 저녁인지, 아니 새벽이던가? 가끔 헷갈릴 정도다. 뭐 어찌됐던, 지리산에서 느끼는, 하루 중 가장 평온한 시간임은 분명하다.
2011년 4월 남편과 지리산으로 휴가를 왔다가 휴양림에 텐트를 치고 2박3일 야영을 하며, 둘레길을 돌았다.
“와, 이런데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요?”
“정말?”
이 한마디가 발단이 되어 3개월간 산청, 하동, 유림, 함양, 남원, 산내를 돌아다니며, 우리에게 모든 조건이 적당히 들어맞는 빈집을 찾아 나섰고, 우연한 인연으로 ‘동네 대소사는 나를 통해 움직인다’라며 스스로를 ‘할매이장’이라고 칭하시던 할머니 한분을 뵙게 되었다.
그분이 소개해준 허허벌판 그리고 싸리나무밭. “아뇨, 할머니 저런 벌판 말고, 기왕이면 빈집에 조그마한 마당도 있었으면 하는데요. 그런 곳 없을까요?
순간, 화색이 만연한 할머니에 미소를 보았다. “오호라, 그런데~ 있어, 있어. 난 또 집 짓는 줄 알았지. 이리와 봐, 여기” 이렇게 소개받은 이곳. 흡사 폐가를 연상시키는 첫인상에 과연 이집을 고칠 수 있을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렇게 시작된 빈집 수리는 10여개월여의 공사기간 동안 1주일에 3일씩 공을 들였다. 직장 생활을 병행하면서 왕복 4시간의 여정을 마다하지 않고 집수리에 열정을 쏟았다.
먼저, 쥐가 뛰어다니던 천장을 빠루(지렛대)와 삽으로 뜯어내고, 콘크리트 드릴로 벽에 구멍을 촘촘히 뚫어 벽 하나를 허물어냈다. 고무대야와 삽만으로 시멘트 50포를 반죽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열 겹짜리 벽지를 떼어내고, 스크레퍼로 벽면을 고른 후 얼룩진 벽에 퍼티를 발랐다. 파벽으로 포인트도 주고, 자꾸만 떨어지는 천장지를 붙잡으려 겹치는 부분마다 얇은 몰딩을 대어주니 마치 일본 다다미 느낌이 물씬 풍겼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공사에 연속 뒤집어쓴 먼지를 씻어낼 곳도, 피곤한 몸뚱이를 잠시나마 누울 한 평 공간도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은 추억이 된다더니, 그렇게 힘들기만 했던 시간이 지나고 2012년 2월 10일 완전 전입과 함께 ‘경축, 귀농생활’을 시작한지도 6개월이 지났다.
◇산사태로 쓸려간 보금자리 보고 ‘헛웃음만’
2012년 9월 17일 오전 7시. 빵 굽기 완료. 남편이 빵 배달을 간다. 우산을 쓰고, 한손엔 빵 바구니를 들었다. 그 뒷모습이 오늘따라 측은해 보인다. 여전히 몸 전체에 정전기가 맴돌고 있다. “왜 이러지?” 아마도 비 때문일 거야 하고 넘겼다.
이후 시간이 지나 오후 12시 10분. 점심 준비를 해야 하는데 주방에 들어가기가 싫다. 계속 졸리고 춥다. 잠시 고민에 빠졌다가 거실에서 인터넷 서핑 중인 남편 옆에 누웠다.
비몽사몽, 잠이 들었다 깨다를 반복하는데, 오늘따라 물소리가 참 크다. ‘안방에 들어가서 잘까?’ 생각하는 순간 “우르릉 쾅…….와지직 우당탕, 쿵쿵. 와장창.”
일순간 유리파편이 얼굴로 날아들고, 차가운 빗물이 머리위로 쏟아졌다. 그랬다 바위가 벽을 치고 거실 안까지 들어왔다. 아니다. 이미 우리 집 창고와 안방, 화장실은 쓸려가고 없었다.
무너진 천장사이로 하늘이 보인다. 벽과 지붕도 없어졌다. 우리가 누워있던 거실 빼곤 모든 곳이 산에서 흘러내린 바위, 나무와 함께 휩쓸려 사라졌다. 1초, 2초, 3초…. 흙탕물이 밀려들어온다. 이건분명 현실이다. 거실 창문으로 간신히 빠져나오는 그 순간에 느낀 공포란 뭐라고 설명할 수가 없다.
집 앞 도로는 이미 계곡으로 변해있었고, 산에 박혀있던 중대형 사이즈의 바위들이 도로를 점령했으며, 우리 집은 앞 틀만 남고 옆과 뒤쪽은 모두 쓸려간 후였다. 떨리는 손을 꼭 잡고, 남편과 몸만 빠져나왔다. 그때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
살았다. 남편과 서로 마주보며 웃었다.
우리 집 뒷산의 자랑이었던 30년 된 호두나무와 밤나무가 시뻘건 흙탕물에 엉켜 있었다. 눈물은 커녕 웃음만 나왔다. 하지만 웃음도 잠시. 살았다는 안도감보다. 앞으로의 일이 막막하게 밀려들었다.
“거의 1년을 고치고, 딱 6개월 살았는데…….”
“화목보일러에(기름겸용) 기름 200리터 채워놨는데…….”
현실을 무시한 바보 같은 미련들만이 머리에서 맴돌았다. 산사태가 나고 2시간 정도 지나니 비가 그쳤다. 어떻게 알았는지 마을 분들 모두 우리 집 앞에 모여 걱정이 많으시다.
“어떻게 저산에서 산사태가 나지?”
“산사태가 날 산이 아닌데….”
“사람 몸 안 상한 게 어디냐, 젊으니까 다시 시작하면 된다”하시며 모두 응원에 말씀을 해주신다. 그래, 생각하면 할수록 당혹스러우나 그래 젊지 않은가!
“역시 이래서 귀농할 거면 젊을 때 해야 해!! 그치?”
“응, 응, 그러네요.….”
처음 빈집을 찾아 돌아다닐 때 소개받았던 그 허허벌판 땅에 재해협회(수재민 구호단체)에서 빌린 임시주택과 작은 컨테이너에서 2012년 9월 17일 낮 12시 10분, 3번째 태풍 ‘산바’로 인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산사태 1주일 후 제빵용 오븐과 소모품을 다시 사 모았고, 전기도 물도 없는 곳에서 50여 일을 보내야만 했다. 다행히 면사무소의 도움으로 수도가 들어왔다. 두달 후 전기가 들어오면서, 2012년 겨울 컨테이너에서 다시 빵을 굽기 시작했다.
한겨울 밖과 안에 온도 차이를 느낄 수 없는 그 서늘한 공간에서 발가락에 동상이 걸려가는 것도 모른 채 무조건 빵을 만들었다. 한 달 수입 단돈 3만1000원.
“이런 시골에서 빵집이라니 그것도 우리 밀빵?”
“유기농 설탕? 100% 우유버터는 뭐야? 뭐가 다른데?”
“국산이나 중국산이나 먹어보면 차이도 모르겠는데 비싸기만 하고 에이, 장사가 되겠어?”
처음 빵집을 하겠다고 하니 모든 귀농인과 주민들에게 우려에 소리를 많이도 들었다. 역시나 쉬운 일도 없고 세상에 공짜도 없었다.
◇단조롭지 않고 할 일 많아서 즐거운 인생
새벽 3시에 일어나 반죽을 하고 빵을 굽고 포장까지 하려면 6∼7시간이 걸린다. 시장 빵과 프렌차이즈 빵집과의 차별화를 위해 매일 반죽을 하고 굽고, 정확한 시간에 배달했다. 그렇게 3개월쯤이 지나자 입소문이 나기 시작하고 반품이 줄어들었다. 비록 10평 남짓한 작은 북카페이고, 1억5000만원이 넘는 빛을 안고, 매달 내야하는 이자에 허덕이며 살지라도 우린 힘들지 않았다.
우리가 꿈꾸는 삶이 허무한 요행과 단조로운 일상보다는 매일매일 새로운 많은 일이 기다리고 있고, 또 해야 할 일이 있는 이런 현실을 즐길 수 있기에 누구보다 열심히 살고, 어떠한 환경에서도 우린 웃을 수 있었다.
산사태가 나기 전, 운영하고 있던 북카페. 그곳에 들렸던 대다수에 손님들은 자신들도 귀농을 꿈꾼다 했다. 하지만 막연히 시골생활은 평화롭고 안락하리라는 동경 속에서 환상과 헛된 꿈만이 가득해 보였다. 그들에게 말하고 싶다. 당신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시련 속에서 견뎌낼 수 있을 지부터 상상해 보라고, 우선 온갖 벌레(지네, 나방, 거미, 개미 등)들과 집안에서
함께 생활 할 수 있는지, 한여름 뙤약볕에 썬크림 없이 서있을 수는 있을까? 그로인해 주근깨와 얇아진 표피층에 자외선이 닿아 검은 점들을 만든다면? 내가 산사태를 겪게 된다면 어떨까?
그 상황 안에서 잘할 수 있는 자신감이 넘친다면 귀농생활 성공확률 50%이다. 남은 50%는 근면, 성실함 등이 채워줄 것이다. 시골은 부지런해야 살 수 있고, 부지런하면 행복할 수 있는 곳이다. 해야 할 일이 무수히 많고, 할 일이 끊이지 않으며, 내 땅이 없다 해도 서글프지 않다.
이른 봄. 눈 녹기가 무섭게 산을 오르면서 산나물(다래순, 취나물, 곰취 등)을 뜯어 발효액도 만들고, 고로쇠 수액도 받는다. 여름엔 이른 새벽부터 늦은 저녁까지 농사일로 바빠진다. 낮엔 더위를 피해 계곡에서 다슬기도 따고, 물고기를 잡기도 한다.
가을엔 호두, 밤, 감 등을 따고, 곶감, 고추도 말리고, 버섯, 오미자, 산머루 등 여러 약초들을 캐러 다니며, 그것으로 수입을 창출한다. 겨울엔 겨우살이 채취 또는 메주, 된장, 고추장, 김장김치(절임배추)를 담아 판매하는 사람도 많다.
무엇보다 귀농에 있어 기본적인 마음가짐은 자연과의 동화인 듯싶다. 물질적인 풍요로움은 확실히 부족하나 풀, 벌레, 새, 나무 등 자체의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느끼고, 또 즐긴다면 시골살이가 단지 고단함과 무료함의 연속이진 않을 것이다.
·귀농 전 거주 지역: 서울, 창원(주말부부)
·귀농 전 직업: 직장생활
·귀농 결심동기: 시골생활에 대한 꿈
·귀농 선택작목: 지역 특산품
·귀농귀촌 교육이수 실적: 없음
·귀농연도: 2011년
·귀농 시 나이: 39세
·귀농지 선택사유: 지리산을 좋아해서
·귀농시 영농기반: 없음
·귀농 초기자금: 2억 2000여만원
·현재 영농규모 : 고사리 1000평
·연간 수익: 아직 없음(유기농 빵 판매로 연간 2500만원 정도)
·향후 계획: 다양한 많은 일들을 도전하고 싶다
…
요즘 토끼풀이 한창이다. 토끼가 좋아해서라고 한다. 서로 기대어 바람 따라 군무를 추듯 춤추는 토끼풀꽃을 보고 있으니 어릴 적 기억이 떠오른다.
토끼풀꽃으로는 시계, 반지, 화관, 목걸이와 꽃다발을 만들었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시계와 반지도 만들어 주면서 ‘넌 내꺼야’ 하던 때도 생각난다. 그 고백을 듣고 토끼풀꽃 시계를 차게 됐는데, 토끼풀 줄기가 워낙 약하니까 시계 줄이 끊어질까봐 잠잘 때도 차고 잤던 기억을 하노라면 푸훗, 하고 웃음이 절로 난다.
토끼풀에는 나폴레옹과 관련된 역사적인 이야기가 있다. 포병 장교였던 시절 전쟁터에서 우연히 발치에 나 있는 네잎 클로버를 보게 된 나폴레옹은 신기하다 느껴 클로버를 따기 위해 몸을 숙인 순간 적의 총알이 머리를 스쳐지나갔다고 한다. 그 덕에 나폴레옹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고 그때부터 네잎 클로버는 행운의 상징이 되었다고 한다.
소풍이나 야유회를 가면 토끼풀 속에 난 ‘행운의 상징’ 네잎 클로버를 찾는다고 열심히도 뒤지고 다녔다, 네잎 클로버를 찾아서 코팅해서 책갈피로 쓰기도 하고, 코팅한 네잎 클로버와 함께 사랑한다는 손글씨도 써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수줍게 건낸 적도 있었다. 그리고 네잎 클로버와 토끼풀을 함께 말려서 좋아하는 친구에게 우정의 징표로 선물하기도 했다. 행운을 찾고 싶고,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행운을 선물하고 싶었던 어릴 적 그 순수한 마음은 정말 맑고 예뻤던 것 같다.
한강 공원이나 근교 공원 잔디, 산책길 등 자연에서 가장 흔하게 만날 수 있는 풀이 바로 토끼풀이다. 그러나 흔한 풀이라 하여 업신여기는 토끼풀은 긴요한 약초와 식품으로 쓰인다.
토끼풀꽃과 잎을 밝은 그늘에 말렸다가 뭉근히 달여 마시면 폐결핵, 천식, 감기, 황달, 이뇨와 해열에 효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신선한 생잎은 지혈, 염증 해소의 성질이 있으므로 피가 흐르는 상처, 생손앓이, 화상에 생잎을 짓찧어 붙이면 응급조치가 된다. 유방암 등에 짓찧어 붙이기도 했다는 기록도 있다. 고기를 먹을 때에는 채소를 곁들여야 한다는 것이 상식인데, 토끼풀에 파나 양파를 잘게 썰어 겉절이를 해서 큰 상추에 담은 다음 고기를 싸 먹으면 뛰어난 건강식이 된다.
토끼풀은 흔한 식물이다. 그런데 흔하다는 것은 번식력이 강하다는 뜻이며, 이 왕성한 번식력은 그만큼 넘치는 생명력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지천에 자라고 있는 토끼풀은 척박한 땅에서 찰진 땅을 만드는 식물로도 알려져 있다.
오늘은 토끼풀 꽃반지를 만들어 가까운 가족, 직장동료, 친구, 선후배에게 끼워주는 건 어떨지, 살짝 오글거리겠지만….
전라남도 한 섬마을에 자리한 깊숙한 여귀산 자락에는 5월의 따사로운 봄을 닮은 어느 부부가 살고 있다.
지천에 널린 야생초들을 서슴없이 따먹는 자칭 ‘염소’ 김순양씨 (60) 와 그런 그녀를 다정하게 바라보며 지켜주는 남편 박성식 씨(48)는 12살 차이가 나는 연상녀·연하남 커플이다.
이 부부가 산자락을 찾아 들어온 지도 벌써 16년. 단돈 8만7천 원을 들고 산으로 들어온 부부는 옷가지며 생필품을 보내주는 고마운 지인들에게 보답할 마음으로 장과 식초를 담그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한 일이 이제는 철마다 새로운 발효 음식들을 만드는 데까지 왔다.
KBS 1TV ‘인간극장’은 5월 19일부터 23일까지 오전 7시50분 ‘찔레꽃 필 때’를 통해 이들 부부의 사는 모습을 전한다.
자연 속에서 평화롭게만 살아가는 것 같지만 순양 씨에게는 가슴 아픈 상처가 많다. 일곱 살 아들을 하늘로 떠나보내야 했고 이혼을 겪었다. 성식 씨를 만나 새 삶을 그리던 차 이번에는 유방암이라는 불청객이 찾아왔다.
항암치료비를 감당할 수 없었던 이들은 자연 치료를 한다는 핑계로 산으로 들어왔다. 자연에 몸을 맡긴 순양 씨는 산속 나무들 사이를 걷고, 곳곳에 약초처럼 돋아난 나물들을 서슴없이 뜯어 먹으며 항암치료를 대신했다.
몸이 약해져 음식을 제대로 소화시킬 수 없을 때 소화를 촉진할 요량으로 만들기 시작한 것이 발효 음식. 각종 산야초를 누룩과 함께 오랜 시간 숙성시켜 만든 순양 씨의 발효식초가 그 하나다.
다시 병원을 찾지 않았으니 병이 완치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에게 암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지 이미 오래다.
삶이 나에게는 왜 이렇게 가혹한가..원망하며 폭설 속에 누워 조용히 눈을 감고 싶었던 순양 씨. 하지만 가만히 손 내밀어 흔쾌히 동행을 하겠다는 성식씨를 만나 그녀는 굴곡진 삶과 마주하며 느리게 걸어가고 있다.
신선한 봄을 재료로 부부가 정성껏 차린 건강한 발효밥상의 세상으로 초대한다.
경남 산청 약초시장 개장 1주년을 맞아 8일부터 26일까지 다양한 할인행사가 펼쳐진다.
산청 세계전통의약엑스포 행사장 인근에 조성된 이번 행사에는 산삼부터 감초까지 다양한 약초를 비롯해 한방가공상품과 약초 모종 등을 시중보다 10~50% 저렴하게 판매한다.
산청 세계전통의약엑스포 행사장 인근에 조성된 이번 행사에는 산삼부터 감초까지 다양한 약초를 비롯해 한방가공상품과 약초 모종 등을 시중보다 10~50% 저렴하게 판매한다.
행사 기간 약초 경매행사와 약초를 이용한 각종 먹거리도 선보일 예정이다.
산청 약초시장은 산청엑스포 개최를 앞두고 지난해 6월 산청군 금서면 매촌리 일대 연면적 950㎡(부지 2560㎡)에 20억원을 들여 완공됐다. 현재 13곳의 약초 업체가 입점해 산청군에서 생산되는 각종 약초를 판매하고 있다.
약초시장번영회 측은 산청군이 약초 고장이라는 이미지를 알리려고 이번 행사를 준비했지만 세월호 참사에 따른 국가적인 애도 기간인 만큼 조용하고 차분하게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