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에서 은퇴하고 재미있는 제2 인생설계를 위하여 많은 평생교육에 참여하였다. 한두 달 동안의 단기 교육동기들은 학창시절 동창과 전혀 다르게 20년 나이 차이가 나는 경우도 많다. 새 친구 사귀기도 전에 교육을 마치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교육 중 수업이 끝나면 막걸리 잔을 나누면서 지속가능한 모임이 되도록 노력한다.
몇 년 전, KDB 시니어브리지센터 제8기 사회공헌 아카데미 과정을 수료하면서 교육동기 친목모임 ‘두레월회’를 결성하였다. 매달 둘째 월요일에 정기적으로 모여서 친목을 도모한다. 봄과 가을에는 둘레길 도보여행ㆍ문화유적 탐방 등 야외활동을 주로하고, 여름과 겨울에는 영화감상ㆍ소양강좌ㆍ독서토론 등 실내모임을 한다.
지난 몇 년 동안 도보여행을 많이 하였다. 첫 행사는 젊은 시절 즐겨 걸었던 단풍이 곱게 물든 남산에서 시작하였다. 영화 속 주인공처럼 즐거웠던 그때가 그리워졌다. 둘레길을 돌아 장충동 족발골목에서 걷기를 마무리하였다. 막걸리잔 높이 들고 메아리를 남산으로 날렸다. 고양시 한북누리길, 사당역에서 양재역에 이르는 우면산 둘레길 새해맞이 도보여행을 하였고, 원당역에서 왕복 행주누리길 산책을 하였다.
회원 간의 교양강좌도 보람이 있었다. 사진전문가 조영대 회원의 강의와 SNS 전문가 오경순 회원의 지도로 스마트폰 동영상 촬영기법 강좌를 진행하였다. 동영상의 기능부터 촬영, 저장, 편집과 보내기까지 전반에 걸쳐 강의가 진행되었다. 전문지식과 체험을 갖춘 강사의 열강으로 동영상을 직접 만들어서 회원끼리 공유하는 실습까지 완료하였다.
문화해설이 곁들인 창덕궁, 덕수궁 고궁산책은 소양을 기르는데 큰 힘이 되었다. 한 바퀴 휙 돌아보는 구경이 아닌 살아있는 보물이었다. 추운 겨울에는 영화 ‘히말라야’를 감상을 하였다. 저명한 산악인의 실화를 배경으로 인간의 숭고한 도전을 그리고 있었다. 그동안 알려졌던 히말라야 이야기를 정리할 수 있었고, 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사랑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올해는 양평 물소리길, 삼남길 걷기로 친목을 도모하고 체력을 증진하는 활동을 많이 하였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6월 둘째 월요일에 전철을 타고 양수역에 갔다. 나지막한 부용산은 걷기 좋은 호젓한 산길이다. 한강변 신원역으로 내려가면 서울로 가는 길이다. 복잡한 전철은 오후 4시가 넘으면 썰물 빠지듯 매우 여유가 있다.
친구모임은 재미가 있어야 활성화 된다. 수십 년 학교동창 모임도 주제가 있어야 한다. 막걸리 사발 돌리는 음식점 회동은 이미 사라지고 있다. 사회에서 늦게 만난 친구일수록 재미있게 사귀는 방법을 더 생각하여야 한다.
지난 5월 20일, 서울시 낭송협회 '시음'의 창립총회가 양평의 황순원문학관에서 열렸다. , 등 그의 소설을 읽고 좋아하게 된 소설가 황순원은 평생 잡문을 쓰지 않기로 유명했으며 순수 소설만 썼다고 한다. 시음의 창립총회가 필자가 존경하는 그분의 문학관에서 열리는 것은 아주 뜻깊은 일이었다. 꼭 가보고 싶던 곳이었기에 장소를 알았을 때 무척 기뻤다.
단편소설 는 이제 막 이성에 눈떠가는 사춘기 소년․소녀의 애틋한 첫사랑을 아름답고도 서정적으로 잘 그려냈다. 야학 시절 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분은 열여덟 살 소년인 조 선생님이었고, 그 선생님께 마음을 빼앗겼던 필자는 열일곱 살 소녀였다. 극과 현실을 구별 못해 비극이 벌어지는 오페라는 네온 카발로의 베리스모 오페라 다. 의 주인공 소년은 조 선생님으로, 소녀는 필자로 설정해놓고 이 소설을 배웠으니 그 시간이 필자에게 얼마나 각별했을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으련다.
조 선생님은 당시 필자 눈에는 가장 멋진 국어 선생님이었다. 영화배우같이 잘생긴데다가 목소리까지 좋았다. 그 목소리로 수업을 하면 필자 가슴은 마냥 두근거렸다. 이렇게 멋진 조 선생님에게 필자가 좋아하는 소설, 를 배운 것은 큰 행운이었다. 필자에게 는 마치 10대의 상징 같은 소설이었다.
소설가 김동리, 황순원은 우리 문학계의 거목이다. 황순원은 평생 선비 같은 올곧음으로, 한 치의 부끄럼 없이 살다 가셨다. 그분의 아들인 황동규는 서울대 교수이자 시인으로 대를 이어 독자들에게 좋은 작품을 선물했다. 그의 대표 시 '즐거운 편지'는 못지않게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친일 행적이 있는 김동리의 아들 김평우 변호사는 이번 촛불집회 때 그의 인성을 그대로 드러냈다. 도무지 지성미라곤 찾아볼 수 없는 무개념의 막말로 국민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혔다. 그가 변호사라는 게 의심스러울 정도의 막말이었다. 그가 처음에 언론을 시끄럽게 했을 때 ‘웬 듣보잡이 떠들고 있나?’ 했다. 그리고 필자는 세 번이나 경악했다. 첫 번째는 우리 문학계의 거목. 김동리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두 번째는 서울대 법대 수석 졸업생이라는 사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늙으신 자신의 아버지를 마지막까지 살뜰히 보살펴드린 소설가 서영은에게 한 막말 때문이다. 김평우는 김동리의 사망 후 재산분배 과정에서 아버지의 세 번째 부인이었던 서영은을 무일푼으로 쫓아내면서 “너는 내 아버지의 배설물을 받아내는 요강에 불과하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일반 사람들이 왜 똑똑하고 공부 잘하는 사람들을 좋아할까? 그것은 기대치가 있기 때문이다. 뭔가 사회를 위해 한몫 해낼 거라는 희망 같은 것 말이다.
"억울하게 착취당하는 약자들을 위해 나 자신의 삶을 바치겠다. 아무리 대단한 하버드대의 교육과 졸업장도 실제로 인류를 위해 훌륭한 일에 쓰이지 못한다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만다."
나이지리아의 전쟁고아 출신으로 많은 어려움 끝에 하버드대를 수석으로 졸업하게 된 한 여성이 하버드대의 졸업식에서 '약자를 보호하라'는 제목으로 한 말이다.
양질의 서울대 교육이 약자를 괴롭히는 데 쓰이면, 삶의 도구인 지식이 악의 칼날이 되면 그것은 아니 배우니만 못하다. 더구나 이젠 70이 넘은 사람이 어쩌자고 철학부재의 삶을 살아 자신의 이름을 더럽히고 있는지 참으로 딱하고 또 딱해 보였다.
"인생은 짧고 오명은 길다" 찰나의 삶을 사는 이승에서의 잘못된 판단으로 후세에 길이길이 오명으로 남게 됨을 그는 정녕 모른다는 말인가? 아들의 잘못된 행동거지로 인해 조용히 잠들어 있던, 아버지 김동리의 잘못된 과거 행적까지 들춰졌다. 급기야는 국민들이 아버지와 아들을 싸잡아서 비난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잠깐 살다 가는 인생길에 되새기고 또 되새겨야 할 말이 있다. "재산을 잃으면 조금 잃는 것이요, 명예를 잃으면 많이 잃는 것이다"
즐거운 편지
황동규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그와는 지금으로부터 50여 년 전, 그러니까 초등학교 5학년 때 친한 사이가 되었다. 학교로부터 집이 더 멀었던 필자는 등굣길에 그 친구 집에 들러서 같이 가고 하굣길에도 친구 집에 먼저 들렀다가 귀가하곤 했다. 둘 중 하나가 청소당번에 걸리는 날에는 서로 기다려줬다. 중학교도 같은 학교로 가게 되어
3년 내내 또 그렇게 붙어 다녔다.
고등학교는 서로 다른 곳으로 진학하게 되어 친구와 필자는 그때부터 만나지 못했고 소식도 나누지 못했다. 필자가 대학생이 되어서야 친구를 찾아 나섰다. 그가 살던 집으로 찾아갔더니 어디론가 이사를 가버리고 없었다. 필자는 건축과 동기들 중 친구가 다니던 고등학교 출신을 찾아내 그의 소식을 물었다. 놀랍게도 동기는 필자가 찾고 있는 친구와 3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며 주소를 알려줬다.
며칠 뒤 필자가 탄 버스는 상계동 허허벌판을 지났다. 여기저기 벽돌공장이 들어서 있는 벌판이었다. 종점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은 산비탈에 판잣집이 빽빽하게 모여 있는 마을이었다. 중학교 다닐 때까지 친구는 큰 기와집에서 살았다. 그의 아버님이 김종필씨와 육사 동기라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좁고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걸으며 그가 왜 이런 곳에서 살게 됐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무섭기도 했다.
얼마 후 어느 집 앞에서 필자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곳엔 골목에 면한 미세기 문, 사각 틀에 간유리가 끼워진 낡은 집이 있었다. 목재 문을 몇 차례 두드리자 몰골이 말이 아닌 친구가 문을 열고 나왔다. 길 쪽으로 나 있는 주방 안쪽 어둡고 작은 방에는 돌아가신 어머님의 빈소가 작은 상에 차려져 있었다. 그는 어머님의 영정 앞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동안 집이 몰락하고 가족이 흩어진 사연을 털어놓았다.
그는 군대를 다녀온 후 늦깎이 미대생이 되었다. 그림에 소질이 있어서 광고 디자인 회사를 차린 뒤에는 돈도 꽤 벌었다. 건축을 전공한 필자와는 서로 협업할 일도 더러 있어서 사업상으로도 자주 교류했다. 그는 언제나 필자의 일을 우선으로 처리해줬다.
그 후 그는 번듯한 전원주택을 지어 양평으로 이주했는데 그해에 IMF가 터졌다. 기업체들은 광고 외주부터 중단하기 시작했다. 한순간에 그의 사업은 기울기 시작했다. 광고와 더불어 건축 일도 거의 중단되었으므로 필자의 사업도 한순간에 내려앉았다. 우리는 그 혹독한 시기에 서로가 망가져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필자가 공황장애에 시달리다가 겨우 회복을 했을 때 그는 알코올 중독에 빠져들고 있었다. 몇 차례 정신병원과 중환자실을 들락거렸다. 그의 아내가 울면서 전화를 하면 필자는 양평으로 달려가곤 했다.
그는 몇 차례 자살 기도도 했다. 연예인을 했어도 손색이 없었을 외모, 어릴 때부터 태권도로 다져진 다부진 몸매였지만 IMF의 수렁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술과 우울증, 그리고 절망으로 40대를 보내야 했다. 그렇게 자기 몸을 가누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그는 어느 날 필자에게 선물이라며 CD 하나를 손에 쥐어줬다. 필자를 생각하면서 다운받은 음악이라고 했다. 거기에는 7080 가요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몇 해 전 어느 날, 그의 부고 소식이 날아왔다. 허무하게 떠난 친구를 생각하며 필자의 가슴은 한없이 무너져 내렸다. 긴 겨울이 지나고 산수유가 산야를 노랗게 물들이는 봄은 올해도 어김없이 우리 곁에 찾아왔다. 많은 꽃들이 다투어 피어나고 한겨울을 이겨낸 나무들은 새 잎을 밀어내고 있는데 친구의 모습은 더는 볼 수가 없다. 해가 갈수록 그가 더 보고 싶다. 그가 살던 집 뒷산의 산수유는 지금쯤 활짝 피었을 텐데….
어린 시절, 소설을 읽다 사랑에 빠져버린 첫 작품이 바로 다. 푸르른 무밭하며 실개천 돌다리길, 소년과 소녀의 사랑 이야기는 소나기처럼 온몸에 녹아들었다. 애잔하지만 환상적인 사랑의 기억으로 남아 있는 소설 . 의 작가 황순원의 따뜻함을 간직한 그곳에 찾아갔다.
황순원 문학관은 황순원 문학촌 소나기마을의 2009년 개관과 함께 문을 열었다. 경기도 양평군에 조성된 황순원 문학촌은 소설 를 소재로 문학 테마 공원으로 꾸며졌다. 황순원의 장편소설 을 주제로 한 ‘해와 달의 숲’과 단편소설 의 분위기를 빌린 ‘너와 나만의 길’, ‘고백의 길’, ‘소나기 광장’ 등이 조성돼 있다. 개관 이후 우리나라 문학관 중 유료입장객이 가장 많은 문학관으로도 꼽힐 만큼 관람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윤초시네가 이사 간 곳에 황순원 문학관
그렇다면 왜 경기도 양평군에 황순원 문학관이 생긴 것일까? 소설가 황순원은 1915년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은 평양과 오산에서 짧게 보낸 뒤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교에서 공부했다. 그 후 한국전쟁 발발 전에 온 가족이 서울로 이사와 서울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경희대학교 국문과에서 23년 6개월 동안 교수생활을 할 때까지 실질적으로 양평에 적을 둔 적이 없다. 양평이 황순원 문학관의 최적지가 된 이유는 바로 소설 때문이다. 2000년 9월 14일, 세상을 떠나 고향도 연고도 없이 병천 공원묘지에 유택을 마련한 황순원. 경희대학교 제자들은 황순원 문학관을 짓기 위해 뜻을 모았다. 소설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내일 소녀네가 양평읍으로 이사 간다는 것이었다”라는 내용과 소설 속 주인공인 소년과 소녀가 만난 징검다리 등 소설의 배경과 닮은 곳이 바로 양평이었기에 문학관 자리로 낙점됐다.
황순원 부부, 문학촌 안에서 잠들다
문학관 개관과 함께 황순원의 유골은 이장돼왔다. 2014년 한국 나이 100세로 숨진 동갑내기 부인 양정길씨도 이곳에 함께 안장됐다. 두 사람은 당시로는 보기 드물게 자유연애로 만나 결혼했다. 평양에 살 때부터 교제한 사이로 알려졌는데 황순원은 숭의중학교, 부인 양정길씨는 숭의여중에서 문예반장을 했단다. 1935년 둘은 일본 유학 중에 결혼해 1938년 장남 황동규를 낳았다. 이후 차남 남규, 딸 선혜, 3남 진규를 차례로 얻어 다복한 가정을 꾸렸다. 장남인 황동규는 서울대학교 영문과를 나와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성장했다.
황순원 문단 데뷔는 소설이 아닌 시
황순원이 쓴 작품은 단편소설 104편, 중편소설 1편, 장편소설 7편이다. 놀랍게 시도 104편이나 된다. 사실 황순원은 시로 문단에 발을 들여놓았다. 17세 때 문학잡지 에 ‘나의 꿈’이라는 작품으로 데뷔를 했다. 이 작품은 일제 강점기에 나라 잃은 17세 소년의 꿈을 잘 드러냈다는 평을 들었다. 많은 독자가 그를 소설가로만 기억하지만 70세 이후로는 그는 다시 시의 세계로 돌아갔다. 간결하고 단단한 문체를 구사하면서도 순수와 서정미가 돋보이는 글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던 황순원. 깔끔하고 잡문을 일절 쓰지 않는 군더더기 없는 성격과 등단 초기 시작(詩作)의 영향이 역작에 그대로 배인 것이다.
황순원은 한국 근대소설의 대가다. 사람들은 그가 일필휘지하듯 글을 썼을 거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한 작품을 완성할 때마다 공책을 열 권, 스무 권, 백 권 가까이 쓰면서 교정을 보고 글을 고쳐 완성했다. 교정도 절대 제자들한테 맡기지 않았다. 문학관에 전시돼 있는 그의 초고 공책을 보면 그가 얼마나 자신의 글을 엄격하게 대했는지를 알 수 있다. 황순원은 라는 수상집을 제외하고는 시와 소설만 썼다. 신문 기고문 하나 남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순원의 작품은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한국전쟁, 4·19, 5·16 등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질곡을 작품 하나하나에 녹여낸 결과다. 그의 작품들은 영화, 드라마, 연극 등으로 제작돼 다양한 계층의 공감을 샀다.
서양화가 김환기는 황순원의 작품 , , 의 책 표지 그림을 그려주었는데, 그가 표지 그림을 그려준 작가는 황순원이 유일하다.
소박한 일상이 엿보이는 황순원의 서재
황순원이 마지막까지 작업을 했던 서재를 문학관에 옮겨놓았다. 책상 뒤 병풍은 서예가 평보 서희환(1934∼1998)이 황순원 선생의 작품 제목을 써서 만들었다. 황순원의 문학전집 4권의 글씨도 그가 썼다. 황순원 선생의 제자 황재국(76)이 쓴 미도거진(味道居真)이라는 서예 작품도 눈에 띈다. 이 글에는 ‘도를 맛보게 하고 진실되게 가르쳐주신 것에 감사합니다’란 뜻이 담겨 있는데 스승에게 고희 기념으로 선물한 것이다. 경희대학교에 학생들을 가르치러 갈 때마다 트레이드 마크처럼 입고 다녔던 트렌치코트와 베레모가 서재 왼편에 전시돼 있다. 살아생전에 쓰던 낡은 시계와 면도기 등도 전시돼 있는데 특히 면도기는 1934년부터 사용했던 것이라고 한다. 작품에서 드러나는 절제의 미학은 바로 군더더기 없는 그의 소박한 삶에서 비롯된 것임이 느껴진다.
☞관람 정보
관람시간 오전 9시 30분~오후 5시(11월~2월), 오전 9시 30분~오후 6시(3월~10월)
요금 어른 2000원, 청소년·군경 1500원. 유치원생 무료 주소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수능리 산 74(소나기마을길 24)
※가능한 한 자가용을 이용하는 것이 편리함.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 꼭 필요한 것 중 하나가 물이다. 우리 몸의 70%를 이루고 있는 물은 세포의 형태를 유지시켜주고, 대사 작용을 높이고, 혈액과 조직액의 순환을 원활하게 해주는 등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물을 섭취하지 못할 경우 1~3% 부족하면 심한 갈증을 느끼고 5% 부족하면 혼수상태에 이르며 12% 부족하면 사망한다고 한다. 그러니 깨끗한 물을 마시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다들 잘 알고 있다.
우리 집은 일 년에 한두 번 서울시에서 담당 직원이 방문해 수질검사를 해주고 있다. 그때마다 여러 가지 시약을 준비해 실험한 뒤 우리 집 수돗물은 매우 깨끗하고 필요한 영양소가 함유된 좋은 물이니 그냥 마셔도 좋다는 결론을 내주었다. 하지만 이런 결과에도 필자는 수돗물을 그대로 마시지 않는다. 깨끗해서 그냥 마셔도 된다지만 더럽게 오염된 한강을 본 뒤로는 그냥 마실 생각이 들지 않는다.
며칠 전 ‘한강물환경연구소’를 견학한 후 생태학습선을 타고 팔당호 주변을 돌아보는 기회가 있었다. 팔당호는 서울 시민의 수돗물이 되는 근원지이므로 물과 환경을 어떻게 관리하는지 관심이 컸다. 아직 단풍놀이도 못 했는데 이미 초겨울로 들어선 듯 날씨가 매우 추웠다. 서울역에서 만난 탐사단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소풍 가듯 팔당호로 출발했다. 한 시간쯤 달려 도착한 양평의 ‘한강물환경연구소’는 팔당호를 끼고 그림같이 아름다운 곳에 있었다.
우리 생명의 물줄기가 흐르는 한강을 깨끗하게 보존하기 위해 ‘한강물환경연구소’가 앞장서고 있다고 했다. 한강은 강원도 태백시 금대산 북쪽 계곡인 검룡소에서 발원해 북한강과 팔당호에서 합류하고 다시 한강 하구에서 강원도 두류산에서 발원한 임진강과 만나 서해로 흘러간다. ‘한강물환경연구소’는 2500만 수도권 인구의 상수원인 팔당호와 한강수계의 물 환경생태 연구를 위한 국가 연구기관으로 팔당호 등 한강수계 물 환경개선 및 수생생태계 건강성 확보를 위한 실용화 연구에 앞장서고 있으며, 과학적 유역 환경조사 및 미래지향적인 물 관리 연구기반 구축을 통해 건강한 수중 생태계 보전과 복원을 위한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로비 옆에 있는 회의실에서 팔당호 유역에 관한 브리핑이 있었다. 상수원 보호를 위해 강변에 공장이나 축사, 음식점 규제를 하고 있고 생활 오수가 생기는 아파트 건립도 규제 대상이라고 한다. 이곳에서는 과학적 수질관리와 자료를 구축하고 유역 환경조사평가와 담수 생태계 기능 해석 연구를 하고 있다. 또한 어린이, 유아를 포함한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방문해 상수원 보호에 대해 알아보는 환경교육 현장이기도 하다. 그날도 우리 탐사단 외에 중·고교생처럼 보이는 많은 학생들이 탐방을 하고 있었다.
전시실에는 다양한 전시물이 있었다. 팔당호 및 한강의 수중 생태관인 이곳에서 천연기념물은 물론 상류, 중류, 하류에 따라 서식하는 물고기 종류가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고 플랑크톤 양서류, 파충류, 갑각류 생물들까지 볼 수 있어서 물속 생태계가 경이로웠다. 다른 한쪽에는 물에 관해 꼭 알아야 할 정보들이 가득했다. 물 아끼는 방법과 함께 물길을 조절하고 물분수를 연주해보면서 물의 성질과 상식을 배울 수 있는 재미있는 체험관도 마련되어있어 아이들이 매우 좋아한다고 한다.
다음으로 우리 탐사단은 생태학습선을 타고 팔당호를 돌아보기로 했다. 선체 주변으로는 가을의 정취가 무르익고 있어 덤으로 멋진 풍경까지 감상할 수 있었다. 해설사의 설명으로 팔당의 상수원을 보호하려는 노력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어 감사했다. 넓은 연꽃 밭이 수질 정화에 한몫을 하고 물가의 버드나무도 살리실산으로 수변에 자라면서 수초와 함께 수질 정화 역할을 한다고 한다.
팔당호는 팔당댐이 만들어지면서 생긴 인공호수로 여의도 면적의 약 70배나 되며 연간 2억5000kw의 전력 생산이 되고 서울과 수도권에 하루 260만여 톤의 물을 공급하고 있다고 한다. 생태학습선 안에서는 인상 깊은 실험도 이루어졌다. 직접 팔당호 물을 채취해 실험 키트를 이용해 물의 COD(화학적 산소요구량)을 알아보았는데, 가장 깨끗한 상태라는 핑크빛으로 물의 색이 변했다. 참으로 다행스러웠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곳에 있는 족자도는 정말 아름다웠다. 예전엔 토끼가 많아 토끼섬이라 불리기도 했다는데 지금은 가마우지가 철새가 아닌 텃세가 되어 많이 살고 있다고 한다. 때마침 날아오른 가마우지 떼의 군무가 멋졌다.
직접 상수원을 돌아보고 나니 우리 집 수돗물도 수질검사 결과대로 안심하고 믿고 마셔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물을 관리하기 위해 열심히 연구하고 노력하는 ‘한강물환경연구소’가 고마웠고 앞으로도 한강 수자원 보호를 위해 힘써주시라고 당부하고 싶다.
요즘은 지방에서도 축제가 많이 열리고 전통시장도 많다. 필자는 직업상 지방 행사나 축제를 많이 다니는데 이런 행사를 보면서 나름대로 내린 결론이 있다. 어디를 가나 별 차이가 없고 재미도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행사 관계자들이 관광객보다 더 많은 경우도 있다.
언제부터인가 아내는 두물머리 인근 강변에서 열리는 무슨 마켓이 좋다면서 같이 가자고 채근했다. 뭐가 특별하냐고 물었더니 고구마튀김이 특별해서 꼭 그곳에서 사와야 한단다. ‘아니 얼마나 형편없는 마켓이면 고구마튀김이 특별하지?’ 하며 아내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었다. 튀김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서 흥미도 없었고 귀찮기도 했다. 그러나 아내는 주기적으로 고구마튀김 이야기를 하면서 압박을 해왔다. 쇼핑의 여왕인 아내가 고구마튀김에 집착하는 것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생각을 바꿨다. 집에서 그리 멀지도 않은데 계속 버티는 건 거의 자폭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토요일, 필자와 아내는 차를 몰았다. 그러나 양평 방향으로 나가는 차량들이 팔당 댐 훨씬 이전부터 밀려 있었다. 구불구불한 구도로로 나가봐도 마찬가지였다. 차를 홱 돌려버리고 싶은 욕구를 간신히 참고 후환을 걱정하며 버티고 또 버텼다. 평소 30~40분이면 될 거리를 두 시간이 더 걸려서 도착했다. 오전인데도 강변의 넓은 주차장에는 차가 빼곡했다. 북한강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오는 강변에는 텐트가 두 줄로 길게 늘어서 있었다. 그런데 처음 마주친 사인 판이 멋졌다. 목재로 만든 사인 판에 정감이 가는 글씨체로 마켓을 소개하는 글이 써져 있었다. 디자인에 예민한 필자의 눈에 당연히 그 사인 판이 들어왔다. 첫 번째 마켓은 풋고추, 애호박, 버섯, 피망 등을 진열해두었는데 디스플레이가 아주 예술적이었다. 나무판에 연두색 페인트를 바르고 가게 이름을 멋지게 쓴 게 보였다. 필자는 첫 번째 가게에서 이미 마음을 빼앗겼다.
산책로를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는 텐트 가게가 죽 늘어서 있었다. 농민들이 직접 재배한 각종 농산물, 식품, 도자기, 목공예품, 천연염색 의류, 각종 소품 등 다양한 상품이 판매되고 있었다. 가게마다 특색 있는 이름을 예쁘게 디자인해서 가게 앞에 세워두었고 상품 진열도 아주 예술적이었다. 무엇보다 가게 주인들이 단골을 맞이하듯 친근하게 손님들을 대했다. 아내와 필자는 거의 마지막 가게에서 고구마튀김 세 봉지와 감자튀김 한 봉지를 샀다. 풋고추, 파김치, 토마토, 작은 지갑을 사고 떡볶이, 오뎅, 스테이크 한 조각이 들어간 햄버거도 먹었다. 오랜만에 축제다운 행사를 본 기분이었다.
건축을 전공한 필자는 지속가능한 전원주택단지 모델을 연구 중이다. 이곳 리버마켓에서 전원주택 단지에 디자인해야 할 지속가능성을 보장하는 몇 가지 아이디어를 얻게 됐다. 놀이동산에 온 것처럼 가게마다 돌아다니며 구경을 하고 사진을 찍고 주인들과 얘기를 주고받았다. 그런 필자를 보고 아내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필자는 아내에게 익살스럽게 말했다. “다음 장날에 또 오자!”
어릴 적부터의 친구 셋이 오랜만에 만났다. 한 친구가 치킨집을 운영하고 있어 자리를 못 비워 두 사람이 가게로 갔다. 저녁시간은 치킨 배달이 많아 바쁘니 점심시간에 만났다.
치킨 집 친구는 올해 말까지만 치킨집을 하다가 은퇴하겠다고 했다. 그동안 부부가 같이 장사하느라고 너무 고생을 많이 했고 돈도 벌 만큼 벌어 노후자금은 확보해놨다는 것이다. 이제 그 친구를 치킨집에서 볼 날도 얼마 안 남았다. 친구도 그만 둘 날이 며칠 남았다며 손가락으로 세고 있었다. 그만둘 생각을 하니 주문에도 더 적극적이고 친절해졌다고 한다. 그동안 쓰던 주문 전화번호도 꽤 알려져 있는데 프리미엄을 받고 넘겨줄 생각도 하고 있었다. 문제는 적당한 권리금을 갖고 들어올 작자가 아직 없다는 것이다. 수년간 자리를 지켰을 만큼 어느 정도의 매출은 보장이 되는 가게인데도 그 동네가 곧 재건축에 들어가게 되면 재입주하기 전까지는 매출이 부진할 것이라는 약점이 있다. 결국 권리금을 좀 깎아주겠다는 당근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치킨집이 팔리면 양평에 전원주택을 하나 사서 노년을 텃밭이나 가꾸며 살겠다고 했다. 마침 먼저 자리 잡은 친구가 있어 마음을 굳힌 것 같다. 농사지어 수익을 낸다는 것은 또다시 노동을 요구하니 어렵고 과일나무 심어 과일이나 따 먹고 즐기는 수준으로 하겠다는 것이다. 전철로도 갈 수 있으니 앞으로 자주 가게 될 것 같다.
또 한 친구는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파는 사업을 하는 친구다. 비서 한 명 두고 몇 명 안 되는 직원들과 일하는데 지식을 파는 사업이기 때문에 자신이 은퇴하면 회사가 문을 닫아야 한다는 것이다. 노인복지의 최고 좋은 방법이 일하는 거라는데 하는 데까지 할 생각이라고 했다. 늘 바쁘게 살아 자주 볼 수 없어서 원망을 많이 했다. 전성기만큼은 아니더라도 차츰 일을 줄이고 스트레스 덜 받는 방향으로 회사를 유지하겠다고 했다.
어릴 적 어울리던 친구 세 명은 일찌감치 미국으로 이민 가서 살고 있다. 최근 카톡으로 자주 연락하고 산다. 그러다 보니 이제야 자주 만나자는 스케줄을 짜게 된다. 일단 그 친구들이 한국에 와서 보내는 스케줄을 짠다. 당일 만남은 물론 일박으로 단풍여행 계획도 짜본다. 당일이면 계룡산 정도를 행선지로 잡고 일박이면 경상도의 우장산이나 전라도의 내장산까지도 가보자는 계획을 짜본다. 내년 3월에는 한국 친구들이 미국에 부부동반으로 열흘간 놀러간다는 계획도 잡아본다. 미국 친구 한 명은 벌써 캠핑카를 알아보고 있다고 한다.
이제 내년부터는 우리 친구들이 65세가 된다. 각자 다른 길에서 바쁘게 살았다. 다시 모여 풀냄새 난초 냄새나는 우정의 지란지교로 돌아가야 한다. 딸린 식구도 생겼다. 모두의 공통점은 여행이나 자주 다니자는 것이다. 어딜 가나 경로우대를 받을 수 있으니 더 좋다. 그러자니 내 주변의 스케줄을 줄여야 한다. 고정적으로 시간을 내야 하는 일부터 정리해야 한다. 놀 준비를 하자는 것이다. 여행을 감당할 체력도 다져야 한다. 의상이나 신발 등 장비도 점검해야 한다. 여행 갈 때 새 신을 신었다가 곤욕을 치른 경우가 많으니 신발도 지금부터 길을 들여놓아야겠다.
펜션 문화가 넘쳐흐른다. 구석구석 경치가 좋다는 곳에는 멋들어진 유럽풍의 집들이 여기저기 들어서 있다. 비싼 값에도 불구하고 휴가를 즐기는 사람들로 예약하기도 힘들다고 한다.
사람들의 바캉스 문화도 많이 달라졌다. 물론 한강변에 텐트를 치는 캠핑 족들을 비롯하여 산과 들로 캠핑 문화도 변화를 거듭한다. 젊은 사람들의 앞서가는 생각들이 선진국 문화를 창출한다. 답답한 아파트 생활 속에서 탈피하여, 모처럼 온 가족이 야외에서 바베큐를 구어 가며 오손 도 손 이야기꽃을 피우는 것이 삶의 여유처럼 보인다.
필자는 이번 휴가를 맞이하여 양평의 한 멋진 펜션에서 또 하나의 문화생활을 맛보았다. 그것들은 삶의 또 다른 에너지를 불러일으키는 것 같아 새로운 휴식처 그 자체였다. 사실 늘 시간이 많으니 휴가라 할 것도 없었지만 가족들의 시간들이 안 맞으니 대충 그렇게 때우기로 했다.
토요일 오후 2시, 거리는 차들의 전쟁이었다. 막히는 거리를 뚫고 북한강을 거슬러 양평으로 향했다. 강변을 따라 달리다가 오른쪽으로 향해 산길로 들어섰다. 산꼭대기 쪽에 다 와서야 예약을 한 '힐 펜션'이 나왔다. 삼면이 모두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나무들이 울창했다. 강가 쪽은 모두가 예약이 끝나서 그곳도 겨우 잡았다는 것이다.
차에서 내려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그 산꼭대기에도 몇 채의 펜션들이 더 있었다. 안내원이 미리 준비한 곳으로 안내를 했다. 이층의 한가운데 집이었다. 총 아홉 채의 고급스러운 펜션이 있었다. 실내로 따라 들어갔다. 겉모습보다 많이 달라 필자는 깜짝 놀랐다. 복 층 구조로 되어있는 실내가 미국의 스튜디오를 그대로 연출해내고 있었다.
1층에는 부엌과 화장실이 있고 2층에는 잠을 잘 수 있는 침실이 있다. 침실의 바로 앞에는 미국식 스파인 4인용 자쿠지가 보글보글 물 소리를 내며 준비되어있었다. 다시 1층으로 내려오니 부엌 바로 옆으로 자그마한 수영장이 파랗게 보인다. 가족용 수영장이 아담하게 물을 퐁퐁 뿜어내며 순환을 하고 있었다.
필자는 찌는 무더위에 우선 수영복을 갈아입고 수영장으로 뛰어 들어갔다. 물이 너무 차가워 소름이 끼쳤다. 몇 번을 휘저어대다가 다시 2층으로 올라가 따뜻한 자쿠지 물속에 몸을 담갔다. 세차게 따뜻한 물을 쏟아내어 마사지를 해주는 스파의 물줄기가 온몸을 나근나근하게 덥혀주었다. 오랜만에 맛보는 기분이었다.
저녁시간이 되어 안내원은 시뻘건 숯불을 가져다주었다. 미리 준비해 간 고기로 바베큐를 하면서 온 가족은 모처럼 미국적인 생활을 다시 맛보고 있었다. 바로 수영장 옆에 숯불 그릴이 준비되어있었다. 한국의 모든 것들이 선진국의 문화를 앞서가며 그 현실을 직접 체험하며 즐기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또 한번 수영장과 필자가 좋아하는 자쿠지 스파를 흠뻑 즐겼다.
만만치 않은 가격이 아까워서 후회 없이 실컷 '1박2일'을 즐기고 싶었다. 필자 가족은 깨끗하게 뒤 정리를 하고 대 만족감으로 고급스러운 펜션을 나섰다. 참으로 놀라운 발전이다. 여기저기 가는 곳마다 아기자기하고 고급스러운 카페가 즐비하다. 각양각색의 음식점과 멋들어진 펜션의 모습으로 길거리에는 젊음의 활기가 넘친다.
양평의 북한강 주변에는 마치 유럽의 궁전 같은 웅장한 집들도 많이 있었다. 과연 모든 곳들이 1년 내내 성업이 되는지는 의문이 들었다. 한 계절의 휴가 문화에도 이제 찬바람이 불어온다. 잘 지어진 럭셔리한 펜션들이 곧 썰렁해질 것이라는 생각에 아까운 마음이 들었다.
1년 내내 여유로운 휴가가 많이 있으면 좋겠다는 엉뚱한 생각이 몰려왔다..
“오늘만 해도 태안군 안면도, 양평·가평을 갔다가 내일은 대구로 갑니다.”
여유가 없어 보인다는 질문을 건네자 덤인 정경자(鄭京子·50) 대표의 카랑카랑 애교 섞였던 목소리가 풀이 죽으며 답한다.
바빠서 달리 할 말이 없다는 표정이다. 집안일로만 여겼던 ‘정리하고 수납하는 일’을 전문 분야로 끌어올린 주인공 정경자 대표. 무모한 도전이었지만 스며들 듯 부드러운 방법으로 시장을 넓혀갔다. 쇄도하는 강의 요청과 방송 출연에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 취재가 있던 날에는 한 아파트의 광고 모델로 발탁돼 촬영을 마쳤다. 그렇다 쳐도 여전히 생소한 정리수납 컨설팅. 우리 생활에 어떤 의미가 있고 또 왜 필요한지 들어봤다.
“저를 납득시켜 주세요, 정리수납에 왜 돈을 쓰죠?”
정경자 대표가 정리수납 컨설턴트를 알게 된 것은 200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캐나다 주재 한국 물류회사의 법인 대표로 일하고 있었다.
“저는 캐나다에서 정리수납 전문가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이미 캐나다나 유럽에는 20~30년 전부터 있던 직업이더라고요. 자기 물건을 자기가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정리해주기도 하는구나. 막연하게 나중에 한국에 가면 이걸 꼭 직업으로 만들어야지 했습니다.”
막연하게 생각만 해보겠다는 것도 잠시. 회사에서 캐나다 법인의 철수 결정이 갑작스럽게 났고 2002년 한 달 만에 그곳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정경자 대표는 회사 대신 창업을 선택했다.
“처음에는 물어보는 사람마다 직업으로는 될 수 없을 것 같다고 했어요. 어찌됐건 아무리 아이템이 좋아도 아직 우리나라에선 인식이 안 돼 있어 사업성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업을 바로 정리수납으로 시작하지 않았어요. 베이비시터와 가정관리사를 교육하고 양성해서 파견하는 일을 했어요.”
당시 맞벌이 부부가 많아져 아이를 자기가 키우지 못한다는 인식이 있던 때였다. 사업을 하면서도 정리수납에 관한 준비를 꾸준히 했다.
“5년 정도 준비 끝에 정리수납 교재와 매뉴얼을 만들고 베이비시터와 가정관리사 교육을 할 때 가르쳤어요. 1대 1서비스를 잘 하기 위해서 정리수납교육을 한 거죠. 그런데 베이비시터가 아이 옷을 잘 정리하니까 고객들 반응이 좋았습니다. 가정관리사도 옷을 세탁하고 개는 것을 달리해주니까 고객 만족도도 좋고 일 하는 사람들 또한 좋아했습니다.”
2010년부터 방송 프로그램에도 얼굴을 보이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정리하는 방법을 알려주다 보니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저런 거 배웠으면’하는 사람이 점차 늘어났다. 드디어 2011년 11월, 한국정리수납협회를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정리수납 컨설팅 활동을 시작했다.
“협회를 만들고 3개월 정도 됐을 때 여성능력개발원에서 여성유망직종으로 정리수납 관리사를 선정했더라고요. 아이템 자체를 보고 한 것 같아요. 경력단절 여성 일자리 창출에서부터, 2015년에는 신직업지원 육성정책에도 정리수납이 들어갔습니다. 여성가족부, 노동부 등 정부기관이 육성한다고 하니 이와 관련한 일자리가 많이 늘어났어요. 사람들 관심도 높아졌고요. 저희만 봐도 정리수납 컨설팅을 교육받고 있는 회원이 전국에 3만9000명 정도입니다.”
정리수납, 한국 사람에게 절실하다
정리수납에 있어 전문성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심어지기까지 10년이 넘게 걸렸다. 베이비시터와 가정관리사 교육에 정리수납을 접목해 이용자들에게 미래 사업을 노출시켰다.
“저는 포기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외국에서 이것을 매우 당연하다고 봤고, 우리나라에서 더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우리나라 사람은 어렵게 살아온 시절이 있기 때문에 돈만 생기면 집이랑 차 넓히고 물건 사고 그래요. 자신이 어렸을 때 옷을 잘 사 입지 못해서 아이한테만큼은 옷을 잘 입혀야 한다고 생각해요. 책과 장난감도 그렇고요. 그런데 이제 한계가 왔고, 물건을 버릴 때도 돈을 지불하는 사회가 된 거죠.”
시니어, 정리습관을 기르자
정경자 대표의 말에 의하면 시니어들의 정리 습관은 참으로 심각하다.
“지금 제가 잘 버리는지 엄마가 잘 버리는지를 비교하면 우리 엄마가 더 잘 못 버려요. 나이가 들수록 더 못 버리게 돼요.”
시니어 세대가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정경자 대표는 ‘애정결핍’의 문제라고 했다. 젊었을 때는 관심 가질 것도, 행동할 것도 많아서 물건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이거는 어디서 산 거고, 누가 준 선물이며, 의미를 사람이나 관계에서 찾으려고 하지 않고 물건에서 찾으려 한다고.
“나이가 들면 자식이 분가하거나 배우자가 죽을 수도 있죠. 결국 자기 혼자 남기도 해요. 자식들과 자주 만나 생활한다면 선물해준 것들이 중요하지 않아요. 그런데 요즘은 혹시 온다 해도 아주 잠깐만 있다 가죠. 그러니 이거는 큰아이가 사준 거였고, 이건 누가 사준 거고 말입니다.”
버리는 습관과 정리하는 습관은 젊었을 때부터 길러야 한다.
“80세에 갑자기 잘 버릴 수 있느냐? 그렇지 않아요. 어머니가 85세신데 제가 뭘 버리라고 말하지 않아요. 어머니 집에 가서 저는 정리 안 해요.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있기 때문에 제가 하루아침에 바꿔줄 수 없습니다. 오히려 더 상처가 될 수 있어서 삶을 이해하려 하지 바꾸려고 들지는 않아요.”
시니어 고객에게 하는 조언은?
“제가 시니어를 만났을 때 하는 얘기가 딱 그거예요. 만약에 여러분이 죽었을 때 가지고 있던 물건들이 어떻게 될 것 같은가? 죽는 순간 가지고 있던 물건들은 다 버려지게 된다. 돈 혹은 대단한 가치가 있는 것들이 아니면 다 버려진다.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물건을 정리하는 자식들은 무슨 얘기를 할까?
“왜 엄마는 아직까지 이걸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었냐고 합니다. 좋은 얘기 안 하죠. 물건을 보며 엄마를 추억하지 않아요. 내가 살아 있을 때 쓰레기들을 남에게 버리게 하는 수고로움은 덜어주고 가야죠. 그게 시니어가 돼가는 것이고 내 삶을 정리하는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정경자 대표는 시니어에게 정리수납 교육이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혹시라도 주방 싱크대 상부장 맨 위에 의자를 받치고 올라갔다가 떨어져 허리 다치고 병원에 입원하면 기력이 쇠하고 점점 더 빨리 늙는 것을 봐왔다는 것.
“왜 거길 올라가는 거죠? 10년에 한 번 쓸까 말까 하면서요. 본인이 그렇게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인식시켜드려야 합니다.”
한국의 여성 CEO, 일하는 여성을 말하다
사업을 시작한 지 이제 5년째. 여성 CEO로서의 고충을 물어보자 고충보다는 이 분야 선구자로서 할 일이 태산이라고 했다. 벤치마킹할 곳도 없고, 슬로건 교재도 만들어야 해서 바쁘다는 말이 모자랄 정도라고.
“그리고 좋은 건 정리수납은 여자들의 섬세함이 필요하잖아요. 남자들이 경쟁상대로 생각하지 않는 것도 장점이라고나 할까요(웃음)?”
경력단절 여성들과 작업에 대해서도 흥미 있다고 설명했다.
“사실 전업주부들이 사회적응을 잘 못한다고들 하죠. 그런데 정리수납을 가르치고 기본 원칙을 알려줬더니 이만큼의 전문가가 없는 거예요. 생소한 분야가 아닌 거죠. 자기 삶의 가치가 바뀌었죠. 정리를 못하는 사람에서 정리 전문가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보람을 많이 느낍니다. 자신감이 생기니까 제가 생각하지 못했던 아이디어도 내고요.”
바쁘게 사는 그녀, 복지관 예쁜이 할머니 꿈꾸다
올해 딱 50세가 된 정경자 대표. 그런데 누가 봐도 50대로 볼 수 없는 그녀는 지금 일이 아니면 뭘 하고 싶은지 궁금했다.
“일이 우선 많아요. 결혼도 연애도 시간이 없어서 못 했거든요. 20대 때부터 세계여행도 하고 뭐든 다해봐서 혹시 시간이 좀 생긴다면 운동을 해야겠어요. 얼마 전에 면역력 저하로 세균이 번식을 해서 병원에 입원했었는데 반성을 많이 했죠. 그런데 퇴원하는 날 방송사 가서 10시간 촬영했어요. 책 읽는 것도 좋아했는데 도무지 시간이 안 나요.”
그리고 그녀에게는 원대한 꿈이 하나 있다. 복지관에서 인기 있는 예쁜 할머니가 되는 것이라고.
“돈을 많이 벌어서 기회가 되면 지금 우리 직원들과 함께 살 수 있는 직원 전용 실버타운을 짓고 싶어요. 이분들이 나이 들어서 정리수납 강의도 하셔서 강사료도 받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100만원 정도의 수입만 있으면 시니어가 되어서도 잘 살 수 있을 거 같아요. 여기서 나이 먹었을 때 할 수 있는 일들을 만들어주고 싶어요. 그리고 90세가 됐을 때 목표는 제가 다니는 복지관에서 가장 예쁜 할머니가 돼 있는 거예요. 그럼 거기서 내가 가장 인기 있는 할머니가 된다면 무척 바쁠 것 같아요. 밥 사준다는 할아버지들도 많을 거 같고요. 내가 아파 복지관 못 나가면 우리 가족이 나한테 전화해 주는 것이 아니라 복지관에 있는 분들이 어디 아프냐고 죽이라도 사가겠다고 하겠죠? 늘 만나고 있는 사람이 가족이라는 거죠.”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닌 함께 잘 살아가는 세상 꿈꾸는 정경자 대표의 멋진 미래가 궁금해진다. 무엇보다 복지관 퀸카 할머니가 꼭 되길 바란다.
대한민국은 급성장했다. 바야흐로 선진국 대열에 우뚝 서섰다. 가장 하찮게 여기던 화장실 문화가 세계 1위 급이다. 그러나 어딘가 어색해 보인다. 주축 대가 흔들리는 기둥에 이상한 지붕을 얹힌 듯한 불균형이 보인다. 국민 국고가 낭비되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오래간만에 돌아온 고국은 엄청 많이 변해있었다. 그중에 하나가 화려하게 단장하고 곳곳에 설치되어있는 고급스러운 화장실의 모습이다. 20여 년 전, 지방의 한 정치인으로부터 시작된 깨끗하고 아름다운 화장실 가꾸기가 전국으로 파생되었다. 예전에는 뒷방 문화로 하찮게 여기고 뒤쪽에 위치하여 뒷간으로 불리던 것이 새롭게 탄생되기 시작한 것이다.
예전에 뒷간이란 사람들의 배설물 처리장으로 냄새가 많이 나고 지저분한 곳이라 사람 사는 생활공간과는 격리되어있었다. 요즈음의 화장실은 용변뿐만 아니라 깨끗하게 손을 씻고 화장하는 다양한 기능으로 어느덧 한나라의 문화 수준 평가의 잣대로 인식되기도 한다. 최근에는 각지방 자체 별로 막대한 국고 거금을 경쟁적으로 고급 화장실 만들기에 쏟아붓는 느낌이 들었다.
필자는 지난겨울, 동네마다 잘 꾸며진 둘레 길을 따라 걷다가 예쁘게 지어진 작은 건물로 들어갔다. 달라진 공중화장실의 변모 사실에 깜짝 놀랐다. 추운 겨울날, 빵빵하게 데워진 화장실이 필자를 반기니 더없이 흐뭇했다. 아기자기하게 가꾸어진 화장실 안 벽면은 편 백 나무로 곱게 단장이 되어있어, 볼일을 보면서도 이리저리 눈이 휘 동그래졌다. 더구나 일반 가정집에도 설치되어 있지 않은 고급 비대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양평 세미 원을 가는 길목에도,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피아노 화장실이라는 곳이 있었다. 필자는 엊그제 두물머리로 향하던 중에 호기심으로 그곳에 잠깐 들렀다. 하수처리장이라고 쓰여있는 입구에서 주차를 했다. 내리는 순간부터 이상한 오물 썩는 냄새가 풍겨왔다. 느낌이 썩 좋지는 않았으나 잘 정돈된 환경에는 실로 감탄이 절로 나왔다.
조용히 흐르는 계곡물 위로 정수 처리를 이용해 만들어낸 인공적 폭포가 한눈에 들어왔다. 한여름의 찌는 더위를 한방에 날려주었다. 그 광경에 시선을 멈추었으나 물살과 함께 퍼져오는 하수구 냄새는 기분을 망가트렸다. 하수처리장 위에도 그랜드피아노의 외형으로 멋진 화장실을 연출했다. 건물 꼭대기 옥상 위로는 그랜드 피아노 뚜껑을 열어 상징적인 지붕을 만들어 냈다.
처리장 건물 앞, 작은 건물에도 피아노 의자 형태가 그대로 만들어져 있다. 기가 막힌 발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는 호기심도 많고 볼일도 있기에 2층 화장실로 오르려니 계단에 건반이 놓여있다. 층계를 밟는 순간 한음이 흐른다. 올라가는 대로 피아노 건반처럼 리듬 소리를 내는 것이다.
밟을수록 신나는 음악이 되어 크게 울려 퍼졌다. 한순간에 쾌쾌한 냄새가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층으로 올라가니 아담하고 예쁘게 가꿔진 식물 화단이 보인다. 잠시 쉬어가는 벤치와 아가들 수유하는 곳도 마련되어 있다. 그러나 어딘가 구조가 어색해 보인다. 잘 꾸며진 고급스러운 세면대에서 손만 대충 닦고는 그냥 내려왔다. 어쨌든 화장실이라 오래 머무르기가 찜찜했다.
화장실이란 더럽고 부정한 것 같은 냄새로 일단은 청결 상의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선가 묘한 냄새가 나는 듯해 서둘러 내려오는데 잘 가라고 또 인사를 한다. 계단 층계가 건반이 되어 밟는 대로 음계 소리를 내며 손을 흔들었다. 위대한 창조의 힘, 사람의 작은 아이디어가 또 다른 사람들에게 커다란 힐 링을 주었다.
그러나 바람이 부는 대로 시궁창 냄새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저 놀라운 발상에 잠시 스쳐가는 곳이었다. 더러운 냄새로 버려진 곳을 사람 발길을 이끌며 멋지게 피아노가 있는 풍경으로 그려낸 것은 실로 감탄할 만 했다.
동방예의지국인 대한민국에 화장실 문화는 매우 중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구석구석 손대야 할 곳이 너무나 많은데 특별히 화장실에 낭비가 심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람들 개개인에게 어쩌면 필요한지도 모르지만 과연, 외출해서 그것도 공중화장실이라는 곳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비대를 쓰는지는 의심스럽다. 그 비싼 금액은 도대체 어디서 충당이 되는지라는 의문점도 생긴다. 결국은 국민들의 피땀 어린 세금 창고가 이리저리 세어 나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대한민국은 이리저리 몸살을 앓고 있다. 지 자체마다 독립적 행정으로 저마다 지역의 발전을 과시하는 난 개발이 우후죽순 벌떼를 쑤셔 놓은듯하다. 여기저기 공사판에 난장판은 주야를 막론하고 사람들의 통행은 물론 차선도 가로막는다. 그나마 잘 꾸며진 둘레 길로 향하는 길가에도 미세먼지가 남발하고, 사람들 얼굴에는 온통 가면을 쓰고 거리를 활보한다.
가장 선진국인 미국에도 화장실은 깨끗하고 청결하게 관리하는 것으로 족하다. 거금을 들여 멋지게 꾸미기보다는 철저한 관리가 더 중요하다. 한국은 시간이 걸려 사용되는 비대가 줄 서서 기다리는 공중 화장실에 거의 설치되어있다. 마치 허술한 집에 화려하게만 꾸며진 화장실의 겉치레를 연상케 한다. 물론 서로가 앞다투어 먼저 이루어낸 아름다운 화장실 문화가 나쁘지만은 않다.
그러나 이제는 다른 미흡한 것들과 잘 어우러져, 보다 멋지고 훌륭한 나라, 기둥이 튼튼한 나라가 되기를 기원해 본다. 언젠가 멋진 ‘피아노 화장실’ 소리가 더욱 아름답게 들려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