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의 달 5월. 예년 같으면 휴가를 이용해 가족여행을 계획했겠지만, 올해는 쉽지 않은 분위기다. 멀리 떠나지 못하는 아쉬운 마음, 국내에서 즐길 수 있는 호텔 패키지로 단란한 시간을 보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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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라이빗 손주 돌잔치 ‘패밀리 게더링’
반얀트리 클럽 앤 스파 서울은 최상위 객실에서 돌잔치도 열고 휴식도 취할 수 있는 ‘패밀리 게더링’ 패키지를 진행한다. 10인 기준 게더링 식사 및 파티 후 남산프레지덴셜 스위트 객실에서의 1박과 그라넘 다이닝 라운지에서의 조식 혜택이 포함된다(10인 기준 540만 원).
◇ 손주와 자연에서 ‘키즈원더랜드’
켄싱턴리조트 설악밸리는 다양한 콘텐츠를 체험할 수 있는 ‘키즈원더랜드’ 패키지를 운영한다. 바닷속 보물찾기 테마로 꾸며진 ‘해적선’ 또는 드림 카 여행 콘셉트의 ‘마이카’ 키즈룸 중 선택 가능하다. 스위스 초콜릿 만들기, 양 먹이 주기 체험 등도 함께 진행한다(6월 30일까지, 주중 26만7900원부터).
◇ 호텔에서 누리는 모든 혜택 ‘올인 패키지’
노보텔앰배서더 서울 동대문 호텔&레지던스가 호텔 안에서 하루를 온전히 즐길 수 있는 ‘올인 패키지’를 마련했다. 도심 속 휴가를 만끽할 수 있도록 객실 1박권 외 테이스티박스, 미니바, KT Super VR기기, 푸드익스체인지 조식 등 다양한 혜택을 무료로 제공한다(5월 31일까지, 17만9000원부터).
◇어린이날&어버이날 맞이 특별 뷔페
JW 메리어트 호텔 서울의 뷔페 레스토랑 ‘플레이버즈’에서 가정의 달을 맞아 특별 패밀리 뷔페를 운영한다. 기존 메뉴를 비롯해 5월 중 5일에는 미니버거, 핫도그 등 어린이용 메뉴를, 8일에는 카네이션 모양의 토핑이 올라간 생크림 케이크와 미니 컵케이크 등을 선보인다(주중 성인 10만5000원, 어린이 5만 원).
◇ 로맨틱한 부부를 위한 ‘피아토우니코’
인터컨티넨탈 서울 코엑스 30층 스카이라운지에서는 매주 월요일 합리적인 가격으로 이탈리안 정통 메뉴를 맛보는 ‘피아토우니코’ 프로모션을 선보인다(1인 3만 원). 강남 야경을 배경으로 소믈리에가 선정한 추천 와인(병당 3만 원)과 디저트(1만 원)를 곁들일 수 있어 부부끼리 로맨틱한 다이닝을 즐기기에 좋다.
◇온 가족이 즐거운 풍성한 만찬
쉐라톤 그랜드 인천 호텔의 뷔페레스토랑 ‘피스트’에서는 어린이날을 기념해 키즈 스테이션이 특별하게 꾸며진다(주중 성인 4만9000원, 47개월 미만 무료). 더불어 중식당 ‘유에’에서는 지배인이 직접 카빙해 제공하는 북경 오리 메뉴로 온 가족이 푸짐한 한 상을 즐길 수 있다(10만5000원).
마늘·파·부추·달래·흥거 등 오신채를 넣지 않고 만든 요리를 ‘사찰음식’이라 한다. 자칫 맛이 덜하거나 심심할 것이라 오해하지만, 다양한 레시피와 플레이팅을 접목하면 얼마든지 색다르게 즐길 수 있다. 특별한 메뉴에 건강 밸런스까지 생각한 제철 사찰음식 한 상을 소개한다.
레시피 및 도움말 디알앤코 R&D총괄 장대근 셰프(조계종 한국사찰음식전문교육기관 이수)
장소 협찬 키프레시(홍대점) 그릇 협찬 덴비 코리아
어린이날, 어버이날 등으로 가족 모임이 잦은 5월. 따뜻한 날씨에 온 가족 소풍을 계획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소풍 하면 도시락, 도시락 하면 김밥이 떠오른다. 일반적인 김밥이 아닌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싶다면 배추로 싼 닭가슴살 초회 말이는 어떨까? 칼로리 부담도 없고 차갑게 먹을 수 있어 봄소풍 도시락으로 제격이다. 도시락 인기 아이템 중 하나인 닭강정을 닭 대신 석이버섯과 가지를 이용해 만들면 겉은 바삭하고 속은 폭신한 식감을 즐길 수 있다. 제철을 맞은 두릅과 배추를 새콤달콤하게 절인 우거지 두릅 김치를 곁들이면 좋다.
배추 닭가슴살 초회 말이 깨끗이 씻은 배추잎사귀(5장)를 끓는 물에 1분 데친 뒤 찬물에 헹궈 물기를 짜서 준비해둔다. 파프리카(빨강, 노랑 각 1/3개)를 씻어 0.5cm 넓이로 길게 썰어준다. 밑동을 제거한 팽이버섯(50g)을 흐르는 물에 헹군다. 닭가슴살(100g)을 끓는 물에 6~8분 정도 삶은 후 한입 크기로 길게 찢는다. 김발을 이용해 물기를 짠 배추잎사귀 위에 닭가슴살(30g), 팽이버섯(10g), 파프리카(10g)를 올린 뒤 돌돌 말아 김밥처럼 썰어 플레이팅한다. 기호에 따라 원하는 재료를 바꾸거나 배추잎사귀 대신 라이스페이퍼를 이용해도 좋다.
땅콩버터칠리소스 땅콩버터 2큰술, 레몬청 2½큰술, 스위트칠리소스 3큰술을 넣고 잘 섞어 만든다. 배추 닭가슴살 초회를 찍어 먹는 소스로 곁들인다.
석이버섯 가지 강정 석이버섯(10g)을 찬물에 불린 뒤 물기를 짠다. 가지(1개)를 씻어 4cm 길이로 썬다. 표고버섯(1개)은 1.5cm×1.5cm 크기로 잘라둔다. 전분가루(1컵)와 물(1½컵)을 섞어 반죽을 만든 후 2시간 뒤 위에 뜬 물을 따라버린다. 준비한 전분 반죽을 가지에 묻혀 튀김옷을 입힌다. 이때 얼음물로 반죽하면 더 바삭해진다. 170℃로 예열한 기름에 튀김옷을 입힌 가지, 석이버섯, 표고버섯을 넣고 30초 정도 튀겨낸다. 튀김에 데리야끼소스를 버무려 완성한다.
우거지 두릅 김치 두릅(1묶음)과 아스파라거스(1묶음), 배추(1포기)를 흐르는 물에 씻은 뒤 굵은 소금을 뿌려 20분 정도 절인다. 투명한 공병에 레몬청(150㎖)과 매실액(150㎖)을 넣고 섞는다. 기호에 따라 청의 양을 조절한다. 절인 채소의 물기를 꼭 짠 뒤 청이 담긴 공병에 넣어 보관한다.
가장 가까운 사람을 꼽으라고 하면 당연히 가족이 우선이다. 그다음이 형제다. 법적으로도 그렇다. 그러나 정작 가족, 형제 관계가 원만한 집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사회에서 만나 사람들과는 어느 정도의 친소(親疏)가 존재한다. 모임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 수준에서 관계를 유지한다. 대부분 불가근불가원이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말이 잘 통하고 가까이 하고 싶은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그렇다고 별 이슈도 없이 만나자고 하면 부담을 갖는다.
이럴 때 의형제 개념은 바람직하다. 만나서 식사를 한 끼 해도 의미가 있다. 공연을 같이 갈 수도 있다. 생일처럼 개인적인 일이 있을 때 초대해도 명분이 된다. 심지어 남녀 관계에서도 선을 지키기 때문에 남들 앞에서 눈치 볼 필요가 없다.
친형제들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런데 자주 못 본다. 기대하는 것이 많아서인지, 만나면 싸운다. 서로를 어릴 때부터 너무 잘 알고 가깝다는 이유로 잔소리도 서슴없이 하다 보니 만나면 불편해진다.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은 멀리 지방에서 살고 있다. 먹고살기 위해 지금도 현업에서 일하느라 바쁘다. 오래 못 보고 살면 막상 만나더라도 어색하다. 여동생 가족 종교 쪽으로 깊이 관계하며 살아서 거리감이 더하다.
자녀들도 엄연히 있다. 그러나 한창 일할 나이라 바쁘게 산다. 특별한 일도 없이 불러내면 미안한 생각이 든다. 그러다 보니 설, 추석, 어버이날, 그리고 내 생일날 보는 것이 전부다. 생일이나 어버이날도 평일이면 날짜를 앞당겨 그 주 주말에 미리 만난다. 정작 당일이 되면 혼자인 것이다. 허전하기도 하고 묘한 기분이 든다.
어렸을 때부터 만나온 친구들도 있다. 그러나 배우자를 만나 가정을 꾸리면서 각자의 사정이 달라져 만나도 옛날 같지 않다. 서로 너무 오래 만나서 지루함과 피곤함도 있다.
같이 어울리며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의 적당한 숫자는 대부분 20여 명 안팎인 것 같다. 친밀함은 덜하지만, 그런대로 만나는 사람의 수는 100여 명 정도로 본다. 더 많으면 에너지를 나눠야 하는 등 한계가 있어 관계가 옅어질 수밖에 없다.
살다 보면 생일날처럼 개인적인 대소사를 함께할 사람이 필요하다. 같이 공연도 보고 여행도 할 수 있으면 더욱 좋다. 그러나 친한 관계가 아니면 초대에 응하지 않는다. 그리 가깝지도 않은데 자주 연락하면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 대안으로 의형제 맺기가 있다. 법적인 형제 관계는 아니지만, 여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형제 못지않게 의지가 된다. 남에게 털어놓기 어려운 이야기도 할 수 있고 위안도 받을 수 있다. 물질적으로도 주고받는 것도 가능하다. 심지어 유산도 남겨줄 수 있다.
조심해야 할 일은 친형제들과도 원만하지 않은 사람이 의형제 관계를 잘 유지할 수 있느냐는 의심을 받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서로 의무를 다하고 배려를 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송파 노인복지관에서 독거노인 현황을 조사한다며 문자가 왔다. 문자 메시지를 보면 바로 전화해 달라고 했다. 3년 전에도 같은 내용의 전화가 왔다. 65세부터는 노인복지관에서 주기적으로 현황을 조사 관리한다는 내용이었다. 혼자 사는 노인들은 죽거나 중증으로 거동을 못할 경우 남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내가 벌써 요주의 대상이 되었나 하고 씁쓸한 웃음을 지었지만, 내게 관심을 가져준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그때 건강 상태를 묻는 질문에 서울시 장애인댄스스포츠 대표 선수라고 하자 더 이상 걱정할 것 없다며 전화를 끊었다.
이번에는 담당자가 바뀐 모양이다. 일주일에 한 번 방문하고 안부전화도 하겠다 한다. 그럴 필요 없다고 했더니 질병 유무, 건강을 위해 하는 운동 등을 물었다. 얼마 전에 히말라야에 갔다 왔다고 하니까 건강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물을 필요가 없다고 했다.
주소지 확인과 거주하는 집이 자가인지, 전세인지, 이사 갈 계획에 대해서도 물었다. 여차하면 달려가야 해서 거주지가 확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동거 가족이 있는지, 독거노인이 맞는지도 확인했다. 동거가족이 있으면 관리 대상에서 빼도 되지만, 독거일 경우에는 노인복지관에서 반드시 관리해야 할 대상이라는 것이다.
자녀들과의 연락주기도 물었다. 독거노인은 누군가와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연락을 해야 한다고 했다. 서로 바쁘고 무소식이 희소식인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고 답하면서 생일, 어버이날, 설, 추석 명절 등 1년에 네 번 만난다고 했다. 그 사이에 같은 동네에 사는 동생, 형수님과도 연락을 한다고 했다.
사회관계에 대해서도 물었다. 문화센터나 친목 모임 등에 자주 나가느냐는 질문이었다. 동호회와 인터넷 카페 활동을 하면서 함께 식사하고, 당구 치고, 영화 보고, 걷기 운동도 한다고 했다. 동문회, 동창회, 협동조합 일에도 관여해서 일상이 꽤 바쁘다고 했다. 그렇다면 관리 대상이나 요주의 인물에서 빼도 되겠다면서 나에 대한 현황 조사는 1년에 한 번만 하기로 했다.
평상시에는 상황 체크에 문제가 없다. 그러나 장기 여행을 떠날 경우에는 휴대폰을 꺼두기 때문에 걱정하게 만들 수 있다. 이럴 때는 가족 밴드에 여행 일정을 미리 올리면 된다. 일간 신문도 휴독 신청을 해서 문 앞에 쌓이는 일이 없도록 한다. 만약 변고가 생겨서 거동을 못하게 되면 신문이 쌓이므로 누군가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동호회 인터넷 카페 출석표에 매일 체크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앞날에 대해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언제까지나 건강하게 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그때 가서 고민할 일이다.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 게재하기로 한다.
정유재란은 ‘노예 전쟁’이었다. 조선인 노예가 큰돈이 된다는 말에 혹한 일본인 중개상과 외국인 노예 상인들이 일찍이 노예사냥에 나섰다. 왜장들도 되도록 많은 포로를 붙잡아 돌아가서 노비로 종으로 부릴 욕심에 눈이 멀었다. 징병, 징용으로 일손을 잃어 피폐해진 농어촌이 제대로 돌아가게 할 보충 인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정유재란은 ‘도자기 전쟁’으로도 불린다. 우수한 조선 도공들을 납치해 꽃을 피운 도자기 문명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사쓰마 야키(薩摩燒) 같은 일본의 세계적 도자기 브랜드들은 예외 없이 조선에서 붙잡혀간 도공들을 시조로 하고 있지 않은가.
기술자 쟁탈전이기도 했다. 문화적으로 조선에 뒤졌던 일본은 각종 기술자와 의원, 제약사, 목공, 기와공, 미장공, 직조공, 철장, 야장 등을 닥치는 대로 잡아가 해당 분야에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다. 서울의 주자소에 있던 활자와 인쇄 기계를 약탈하고, 인쇄공을 납치해 인쇄 문화에 첫걸음을 뗀 일이 대표적 사례다. 그때 약탈해간 주자소 활자는 지금 도쿄대학교 도서관에 보관돼 있다.
정유재란은 또한 ‘각시 전쟁’이기도 했다. 아름다운 여성을 일컬은 ‘가쿠세이’를 찾으려고 왜장들이 눈에 불을 켰다. 당시 야마구치 지방에 유통되었던 일조회화사전에 “고분 가쿠세이 더불어 오라”는 조선말이 미녀를 데리고 오라는 말이라고 해석돼 있다. 이 말은 출진장병을 보내는 인사말이기도 했다. 그렇게 잡혀간 규수 중 영주의 첩이 된 사람도 있다. 최고 권력자 수청 들기를 거부하다가 태평양 외딴섬에 유폐되어 죽은 오타 줄리아도 피해자의 한 사람이었다.
도망쳐 갈 때 빈 배로 항해하기가 위험하다고 선창을 채울 목적으로 양민을 닥치는 대로 잡아가기도 했다. 임진·정유 양란(兩亂) 7년간 조선에 붙잡혀간 사람은 대체 얼마나 될까? 왜군이 오래 농성했던 경남 해안 지방과 호남 지방에 피해가 극심했지만, 그 수가 어느 정도인지는 알 길이 없다. 전쟁 수행이 급했던 피해국 조선은 관심을 가질 겨를이 없었고, 일본은 각 지방 영주와 그 휘하 장수들의 개별적인 행위여서 조사도 통계도 불가능했다.
일본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2만~3만 명 또는 5만 명까지 보는 학자가 있다. 국내에서는 적게는 5만 명, 많게는 10만 명으로 보는데 최근에는 10만 명이 넘으리라는 주장들이 제기되고 있다. 그 근거의 하나는 사쓰마(薩摩·가고시마) 지역에만 3만700여 명의 조선인이 살고 있었다는 증언 등, 귀환자들이 남긴 글과 단편적인 일본 측 기록들이다.
경상도 사복(司僕·궁중 수레와 말을 관장하는 관직) 정신도(鄭信道)는 귀환포로 출신 전이생(全以生)의 증언을 인용해 가고시마 3만700명 조선인 거주설을 상소문에 인용했다. 광해군 9년 4월 계축일 ‘광해군일기’에 인용된 이 상소문은 광해군 시대가 되도록 피랍인 수조차 파악되지 않고 미귀환자가 많았던 실상을 보여주는 실록이다.
17세기 초 나가사키(長崎) 히라도(平戶) 지역 조선인 분포를 보여주는 자료(平戶町人數改帳)에는 당시 호수(戶數)로 27%, 인원수로는 11%의 조선인이 히라도에 거주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때 나가사키 지역에는 2300명의 기독교인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규슈의 한 지역에만 그렇게 많은 조선인 포로가 있었다면 일본 전국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끌려갔을까 하는 짐작이 가능하다.
일본 유학의 스승으로 불리는 강항(姜沆)의 ‘간양록(看羊錄)’에는 “전후(정유재란 이후) 이요슈(伊豫州) 오쓰(大津) 지방에 잡혀온 사람이 무려 1000여 명인데, 이들은 밤낮으로 마을 거리에서 떼 지어 울고 있으며, 먼저 잡혀온 사람들은 반쯤 왜인에 귀화하여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는 견문기록이 있다.
귀환포로 정희득(鄭希得)은 포로생활수기 ‘월봉해상록(月峯海上錄)’에서 “신이 이르러 보니 우리나라 남녀로서 전후에 잡혀간 자가 아와슈(阿波州) 이야마(猪山)에만 무려 1000여 명인데, 모두 왜졸 하인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정유재란 포로가 임란 초기 포로의 10배가 넘는다는 견문도 기록으로 남겼다.
포르투갈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Luis Frois)가 예수회 총장 신부에게 보낸 글에도 나온다. “이곳 나가사키에는 남자뿐 아니라 많은 여자와 어린아이도 포함된 조선인 포로들이 (기독교)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수는 1300여 명입니다.”
이들이 잡혀가는 모습도 생생한 기록으로 남았다. 마치 개돼지처럼 끌려가는 참상이 저들의 손으로 기록되었다.
“일본에서 수많은 (노예)상인이 왔는데, 그중에는 인신 매매자도 섞여 있었다. 이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포로를 사들여 새끼줄로 목을 줄줄이 엮어 묶은 후 빨리 걸으라고 몰아쳤다. 혹 꾸물대거나 발을 절면 몽둥이로 내리치며 몰아댔다. 그 모습이 마치 지옥의 무서운 귀신이 죄인을 다루는 것이 저럴까 싶었다. 마치 원숭이를 엮어 묶듯 해서는 우마를 끌고 짐을 지고 가도록 볶아대는 것이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다.”
정유재란 종군 왜승 게이넨(慶念)의 ‘조선일일기(朝鮮日日記)’ 11월 9일자 일기 내용이다. 급거 귀국하려고 부산에 모여든 여러 부대 무장들에게서 조선인 양민 포로를 노예로 사들여 끌고 가는 정황이 생생하게 묘사되었다.
그렇게 끌려간 사람들은 다 어떻게 되었을까? 이런 궁금증에는 기록으로 전해져오는 성공 스토리 말고는 대개가 고난과 순응으로 한평생을 마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통탄할 일은 그들 중 일부 젊은이가 왜병이 되어 정유재란 때 조국에 총을 쏜 일이다.
“임진 계사년에 어린아이로 잡혀가 장성하여 정용하고 강하기가 왜놈보다 나은 젊은이들이 정유년 재침 때 적을 따라간 자가 무척 많지만 본국으로 도망쳐온 자는 적고 적국으로 돌아간 자가 많았습니다. 신이 꾸짖어 말하기를 ‘이미 고국에 돌아갔으면 도망쳐 숨기가 쉬운데 다시 적국에 돌아왔으니 이것이 차마 할 짓인가?’ 했더니 ‘우리들이 약속을 맺고 빠져 달아나면 우리나라 복병들이 보고 쫓아오는데 우리는 포로가 되었다가 도망쳐 온 사람들이다, 하고 큰 소리로 외쳐도 더욱 빨리 달려오니 부득이 왜진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우리 군사들이 수급을 바쳐 공을 세우려는 생각 때문이니 어찌 원통하지 않으리오.”
정희득의 ‘월봉해상록’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전쟁의 비극만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애달프다. 그의 가족사는 애달픔을 넘어 비극의 중첩이었다. 남원성이 떨어진 뒤 왜적이 함평으로 들이닥치자 정희득 일가는 급히 배를 구해 바다로 나갔다. 영광 칠산도 바다에서 적선과 조우하자 어머니는 “왜적에게 더러운 꼴을 당하느니 깨끗한 몸으로 죽겠다”며 바다로 뛰어들었다. 아내와 형수, 누이동생도 망설이지 않고 몸을 던졌다.
남자들은 결박당하여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방도가 없었다. 함께 묶였던 일가 정절은 그렇지 않았다. 큰 소리로 왜적의 무도함을 꾸짖었다. 왜적이 그의 오른팔을 잘랐다. 그래도 멈추지 않아 왼팔마저 잘렸다. 저항하지 않은 정희득 형제는 일본으로 끌려갔다.
강항의 가족사도 마찬가지다. 비슷한 시기 같은 해역에서 왜적을 만난 강항 일가 여인들도 바다로 투신했다. 그러나 썰물 때라서 왜적의 갈고리에 건져 올려졌지만 두 아이는 물결에 휩쓸려가고 말았다. 눈앞에서 어린 자식이 죽는 것을 뻔히 눈 뜨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가족과 헤어진 강항의 한이 조용필의 노래 ‘간양록’이 되었다.
이국땅 삼경이면 밤마다 찬 서리로
어버이 한숨 쉬는 새벽달일세
마음은 바람 따라 고향으로 가는데
선영 뒷산에 잡초는 누가 뜯으리
허야 허야 허야 허야 어허허
허야 허야 허야 허야 어허허
노랫말과 곡조, 그리고 조용필의 목소리가 아무리 애달파도 어찌 그 한과 고통을 다 담으리! 이 노랫말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포로로 잡혀 끌려갔던 전라좌병영 우후 이엽(李曄)이 탈출을 시도할 때 썼다는 시에서 애절한 대목만 발췌한 것이다. 이엽의 시는 “삼한의 피를 받아 굵어진 이 뼈, 어찌타 짐승 놈들과 섞일 수 있으리(盡是三韓候閥骨 安能略城混牛羊)”로 끝난다. 그는 탈출에 실패하게 되자 “또 잡히느니 차라리 죽으리라” 하고 배에서 칼을 물고 바닷물에 뛰어들어 자진했다.
강항의 기개도 이에 못지않았다. 히데요시가 죽어 묘에 만금전이 세워지고 그 문루에 일세의 호걸로 떠받드는 글이 오르자 구경 갔던 그는 붓으로 그 글귀를 쭉쭉 그어버리고, 그 옆에 이렇게 써놓았다고 ‘간양록’에 썼다. “반생 동안 한 일이 흙 한 줌인데 십층금전은 울룩불룩 누구를 속이자는 거냐! 총알이 또한 남의 손에 쥐어지는 날 푸른 언덕 뒤엎고 내닫는 것쯤이야!(半生經營土一盃 十層金殿謾崔 彈丸亦落他人手 河事靑丘捲土來)”
굽히지 않는 절의와 의지를 가졌던 강항이나 정희득은 우여곡절 끝에 환국의 행운을 누렸지만 거개의 포로들은 이름 모를 땅에서 불귀의 고혼이 되고 말았다. 이탈리아 사제 카를레티(Carleti)가 남긴 ‘나의 세계일주기’에 외국인 노예상들에게 팔아넘겨지는 정경이 다음과 같이 기록됐다.
“이 나라(Corea)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남녀노소가 노예로 잡혀왔다. 그중에는 보기 딱할 만큼 불쌍한 어린이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아주 헐값에 매매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나도 12큐스티를 내고 5명을 샀다. 그리고 그들에게 세례를 주어 인도 고야에 데려가 자유의 몸으로 놓아주었다. 그중 한 사람만은 플로렌스로 데려갔는데, 그는 지금 로마에 살고 있다. 그는 안토니오 꼬레아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일보 김성우 특파원은 1979년 로마 현지 취재를 통해 안토니오의 선조가 한국인이었음을 밝혀냈었다.
노예로 팔린 사람들은 대개 마닐라, 홍콩, 마카오, 고야 등지를 경유해 아시아 지역의 유럽제국 식민지로 팔려가 사탕수수밭 바나나농장 등에서 혹독한 중노동에 시달렸다. 유럽으로 팔려가기도 했다. 외국인 노예 상인 거개가 포르투갈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규슈 곳곳에 지금도 당인정(唐人町) 또는 고려정(高麗町)이라는 마을 이름이 남아 있는 것도 조선인 포로가 그만큼 많았다는 반증이다. 당인정이란 글자 뜻으로는 중국인 거주 지역으로 이해되기 쉽지만, 그런 곳은 소수이고 거개는 조선 포로 집단 거주지였다. 일본 사람들은 문화와 문명이 발달한 대륙을 동경한 나머지, 한반도나 중국을 ‘가라’라고 했다. 한(韓)도 가라요, 당(唐)도 가라로 읽는 것이 그 증거다.
당인정 또는 고려정이 있는 곳은 규슈의 크고 작은 도시 대다수로 보아도 좋다. 한반도와의 교통이 편리한 혼슈의 야마구치(山口) 현과 오카야마(岡山) 현, 시코쿠(四國) 등 서일본 지역 여러 도시에도 분포돼 있다.
그렇게 많이 붙잡혀간 사람들을 데려오려는 조정의 노력은 한없이 굼뜨고 무책임하기만 했다. 포로쇄환은 정유재란이 끝나고도 7년이 지난 1605년이었다. 강화사로 갔던 사명대사 유정(惟政)은 새 권력자가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만나 3000명의 쇄환 약속을 받아냈지만 실제로 데리고 돌아온 이는 훨씬 적었다. 1607년 회답사 겸 쇄환사로 갔던 여우길(呂祐吉)과 경섬(慶暹)이 그중 큰 성과를 거두었으나, 인원은 남녀 합쳐 1418명에 불과했다. 그 뒤로는 점차 감소해 1643년 쇄환사((刷還使) 때는 겨우 14명에 그쳤고, 그 뒤로는 흐지부지되었다. 수십 년 노력의 성과는 7000명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토록 성과가 부진한 이유는 첫째 일본이 빼돌리고 감춘 탓이고, 둘째는 일본 사회에 녹아든 사람들이 돌아가기를 망설인 탓이었다. 경섬의 보고서에는 “우리 일행이 나온다는 말을 듣고 일본 지방관들이 피로인(被虜人)을 모조리 숨겨놓고 거짓으로 찾아내는 체만 하니, 장부에 있는 조선인 수와 실제 수가 달라 통분했다”고 썼다.
조선으로 돌아가기를 단념시키려는 심리전도 있었다. 이경직(李景稷)의 ‘부상록(扶桑錄)’에는 “쇄환된 자는 죽이거나 절해고도에 보내며, 또 사신이 각자 불러 모았다가 바다를 건너가서는 자신의 종으로 만들어 부려먹는다는 소문이 돌았다”는 내용이 있다. 그런 소문에 현혹된 사람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어렵게 이룬 안정의 보금자리를 떠나기 싫은 사람이 다수였다.
일본인의 종이 되었거나 가정을 이룬 사람들은 나름대로 노력의 대가를 받는 생활에 그런대로 적응이 되었을 것이다. 특히 어려서 잡혀간 사람들이 동화가 빨랐다.
지금 일본에서 조선 포로들의 자취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월봉해상록’에 “지나치는 사람의 반이 조선 포로들”이라던 나고야 성터 거리는 너무 조용하기만 했다. 그 많던 영주들의 진영 건물과 상업시설 주거시설 등은 간데없고, 찾는 이조차 뜸한 어촌마을이 되었다. 가라쓰(唐津) 시에서 버스로 40분을 달려 찾아간 요부코(呼子) 항에는 출어하는 배도 귀항하는 배도 안 보였다. 아침 일찍 귀항해 어획물을 부리고 출어를 준비하는 시간인 모양이었다. 부두 옆에 선 아침시장[朝市]만이 오전 10시인데도 손님을 부르고 있었다.
후쿠오카 당인정은 시내 한가운데 있다. 지하철 오호리(大濠) 공원역에서 세 번째가 도진마치(唐人町)역이다. 역사를 빠져나오면 바로 도진마치 시장. 제법 큰 규모의 시장이라서 낮 시간에도 손님들로 붐볐다.
사가(佐賀) 시 당인정도 시내 중심가에 있다. 사가역을 빠져나와 일직선으로 뻗은 큰길에 도진마치 버스 정류장 팻말이 붙었고, 큰길가에 ‘도진마치 유래’ 안내판이 서 있다. “1591년 사가에 정착한 이종환(李宗歡)이 히데요시 조선 출병 당시 통사원(통역원)으로 종군, 도공들 ‘초빙’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599년 영주 나베시마가 데려온 고려인들을 이곳에 모여 살게 한 것이 그 유래가 되었다”고 설명되어 있다. 그가 왜에 협력해 귀국하지 못했다는 내용도 적혀 있어 입맛이 더욱 개운치 않았다.
쌍둥이 손녀·손자와 외손자 세 손주에게 처음으로 손편지를 썼다. 편지를 잊고 반세기 가까이 살았다. 아니다. 날마다 편지를 더 많이 썼는지 모른다. 어떤 날은 자판을 두드려서 수십 통을 거뜬히 채웠다. 문명의 발달로 치부하지만 참 이유는 게으름 탓이 아닐까.
가슴이 뜨거워졌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것 같은데 생각만 머리를 맴돌았다. 며칠 동안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였다. 지난 10년 가까이 아이들과 무엇을 하였는가. 앞으로 손주들과 더 즐겁게 살면서 아름다운 이야기를 찾아야겠다.
예쁜 율아!
‘할아버지, 왜 헤벌쭉했어?’ 얼마 전 학교 가는 길에서 만나는 이웃 학부형과 여느 때처럼 인사 나누는 할아버지에게 네가 말하였지. 처음에는 ‘헤벌쭉’이 무슨 말인지 몰랐단다. ‘방금 엘리베이터에서 했지 않아!’ 책을 좋아하는 너는 궁금한 점을 종종 질문하곤 하였지.
요즘 헤벌쭉 이야기를 자주 하는구나. 시원한 정답은 자라면서 배운단다. ‘우리 율이 많이 자랐구나!’ 할아버지는 속으로 매우 기쁘단다. 앞만 보고 걸을 수 있는 마술안경을 사달라고 너에게 말했었지. 이제 네가 대답할 차례야. 내일 아침 학교에 갈 때 너의 이야기를 듣자.
율아! 사랑한다. 할아버지가
씩씩한 언아!
할아버지와 씨름할 때마다 재미있지. ‘할아버지, 아빠하고 씨름하면 누가 이겨요?’ 작년 이맘때 네가 물었었지. 그야 할아버지가 당연히 이긴다고 대답했었다. ‘이상하다. 아빠가 저를 이기는데 할아버지가 왜 저한테 져요?’ 너는 어려운 수수께끼를 풀려고 애를 썼다.
올해 2학년이 되어 훌쩍 자라면서 문제가 해결되었다. 너는 건강상태가 좋을 때 씨름을 더 잘하더구나. 할아버지를 이길 때마다 기분이 좋지. 한판이라도 지고나면 이길 때까지 다시 덤벼드는 너의 모습에 기분이 좋단다. 할아버지도 이기도록 연습할 거야. 내일 아침에 씨름 한판 꼭 하자.
언아! 사랑한다. 할아버지가
튼튼한 수민아!
올해 자주 못 만나서 더 많이 보고 싶다. 지난 어버이날 만들기를 좋아하는 네가 종이를 오리고 붙여서 만든 카드에 대문짝만큼 크게 ‘외할아버지 사랑해요’ 라고 썼었지. 지금 꺼내서 보니 너를 만난 것처럼 매우 기쁘구나. 율이 누나, 언이 형과 만나서 장난감, 카드놀이하면서 재미있게 놀 너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지난 여름방학 때 너하고 두 밤 같이 잤던 생각이 난다. 모기가 다른 사람은 물지 않고 왜 너만 물었을까. 퉁퉁 부었던 네 얼굴이 떠오르는구나. 이번에는 모기에 물리지 않도록 할게. 추석에 만나 꼭 안고 자자.
수민아! 사랑한다. 할아버지가
봉투에 이름과 주소를 정성껏 써서 우체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군 제대 후 처음 편지 발송이다. 편지 세통의 우표 값이 900원이다. 그 때 우표 값은 모른다. 군사우편은 무료였다. 젊은 시절의 추억이 한편의 기록영화가 되어 뚜렷하게 떠올랐다. 3년 복무 병장월급 1200원, 초코파이 1통 1000원, 5개 들이 컴 1통 10원이었다. 새파랗던 그 시절이 그립다. 콧등이 시큰해졌다.
아름다운 인생이다. 오롯이 사랑하는 손주들 덕분이다. 며칠 후 할아버지의 손편지를 받으면 이 녀석들 표정이 어떨까.
1~2년 전부터 오락가락하시던 어머님의 정신세계는 아흔여덟이 되던 해에는 하루 중에 많은 시간을 현실과 다른 세상으로 여행을 떠나시곤 했다. 어쩌다 마주하는 자녀들의 모습을 환한 미소로 반기시다가도 깜박깜박 기억을 잊으실 때마다 가슴이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던 것은 아마도 여섯 자녀 모두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노환까지 겹쳐 힘들어하시는 어머님을 요양병원으로 모시게 된 것은 그해 4월 초순경이었다. 자식들이 모여 의논 끝에 일단 병원으로 모셨다. 낯선 환경에 갑자기 노출된 어머님이 밤잠을 설치시고 웅얼거리는 소리가 다른 환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는 간병사의 얘기를 듣고도 어머님을 다시 집으로 모셔야 된다는 얘기를 선뜻 하는 자식은 없었다. 어머님은 잠깐씩 맑은 정신세계로 나오실 때마다 집으로 가고 싶다고 되뇌셨다.
어버이날을 불과 나흘 앞두고 필자는 3일간의 어머님 휴가를 병원에 신청했다. 요란한 경광등 소리를 내며 응급차를 타고 어머님이 필자의 집으로 오셨고
그날부터 어머님 침대머리에서 간이의자를 펴놓고 뜬눈으로 밤을 새우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밤이 되면 “애야, 저기 창문을 좀 열어놓아라” 하시고는 연신 밖을 내다보시면서 알듯 모를 듯 젊은 시절의 기억을 떠듬떠듬 풀어내시곤 했다. 그런데, 그 지명(地名)이나 단어 하나하나는 어렴풋이 어린 시절에 들었던 말들이 틀림없었다. 다음 날 출근하는 관계로 너무 피곤한 나머지 깜박 졸다가 깨어보니 밤새 설치시던 어머님의 머리가 침대 밑으로 축 처져 있었다. 소스라치게 놀라서 어머님을 흔들어 깨우니 푸시시 하고 감았던 눈을 뜨셨다. “아~”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제 어머님이 집에 오신 지 이틀이 지나고 내일이면 다시 병원으로 가시는 날이다. 퇴근길에 사가지고 간 옷을 보여드리고 입혀드리자 어머니는 무척이나 좋아하시면서 얼굴이 상기되셨다. 옷을 다 입혀드리고 나니 곱디고운 아흔여덟의 어머니가 그곳에 계셨다. 카네이션도 한 송이 달아드렸다. 어머니와 함께 이러저러한 포즈를 취하면서 사진을 찍었다. 어머니는 시키는 대로 표정도 밝게 하시고 포즈를 취해주셨다. 노래 좀 해보시라고 하니 처음에는 입술만 달싹달싹하시다가 누님이 “어머니 좀 크게 해보세요!” 하면서 귀에 대고 소곤소곤 아리랑 선창을 하니 어머님께서 힘을 내어 아리랑을 따라 부르기 시작하셨다. 너무 고운 자태로 차분하게 불러보시는 아리랑! 이것이 마지막으로 불러보는 어머니의 아리랑이련가? 어머니가 즐겨 부르시던 노래 중에 ‘사발가’라는 노래도 있었다.
“석탄 백탄 타는데~ 연기만 펄펄 나고요. 요네 가슴 타는데~ 연기도 김도 안 나네~”
카메라를 들고 촬영을 하던 필자의 가슴속에서 알 수 없는 뜨거운 불덩이가 목젖을 타고 올라왔다. 급기야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슬픔이 몰려와 결국은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고 말았다. 함께 노래를 부르던 누님도, 아내도 모두가 얼싸안고 흐느끼는데, 정작 어머니만큼은 차분하게 그리고 끝까지 아리랑을 이어서 부르시는 것이었다.
이 세상에서 두 번 다시 들어볼 수 없는 어머니의 노래일까? 아니 어머니 가슴에 달린 빨간 카네이션을 두 번 다시 사드릴 수 없는 세상이 오는 건 아닐까? 수만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치면서 깊은 슬픔을 꾸역꾸역 참아냈다.
어버이날을 하루 앞두고 그렇게 눈물의 파티는 성대하게(?) 끝이 났다. 그날, 병원으로 돌아가신 어머니는 그 후에도 5년을 더 사시다가 2년 전 103세의 연세로 하늘나라에 가셨다.
‘고향 떠나 긴 세월에 내 청춘 어디로 가고 삶에 매달려 걸어온 발자취 그 누가 알아주랴 두 주먹 불끈 쥐고 살아온 날들 소설 같은 내 드라마…’ -케니 김 1집 ‘내 청춘 드라마’ 케니 김(70). 그는 LA의 트로트 가수다. 한국에서 온 연예인도, 주체할 수 없는 끼의 소유자도 아니었다. 오히려 소심한 성격에 낯가림도 심하던 그가 무대 위에서 그것도 뽕짝을 부르는 가수가 됐다. 연매출 200만 달러의 식품회사 경영권도 아내에게 넘기고 말이다. 올해로 데뷔 7년 차. 1집 ‘노신사의 노래’에서 따끈따끈한 신곡 ‘무명가수’까지. 그의 노래 속에는 43년간의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25개의 직업, 불도저 케니 김
1946년 경북 대구에서 나고 자란 그의 집안은 지독히 가난했다. 하고 싶은 것이 많아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던 20대.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돈 없고 빽 없고 가방끈까지 짧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별로 없었습니다. 서울에 있는 작은아버지 공장에서 허드렛일을 하다가 군대에 지원해 월남에 갔어요. 월남전 막바지라 참 위험했는데 나에게는 막막한 세상으로부터의 탈출구 같았습니다.” 베트남에서 처음 만난 미국은 풍요로움 그 자체였다. 꿈을 꾸는 누구에게나 평등한 나라, 가난하고 힘없고 배운 것 없어도 열심히 일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때마침 미국의 이민법이 개정되면서 한국에도 미국 이민 문호가 활짝 열렸다. 머나먼 그곳에 친척 고모 한 분이 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일단 그곳으로 가기로 했다. 기술 하나는 있어야 할 것 같아서 고압용접 자격증을 땄다. 1973년, 스물다섯의 청년 김종길은 그렇게 고국 대한민국을 떠나왔다. 그리고 미국 땅에서 케니 김이 되어 살아온 지 어느덧 43년이다. “먼 친척 고모뻘 되는 분이 살고 있는 오하이오 주 데이톤으로 무조건 갔죠. 물론 얼굴 한 번 본 적 없었고요. 300달러 손에 쥐고 공항에 내렸는데… 이상하게 겁이 하나도 안 나더라고요. 오히려 정말 원했던 것을 이뤘다는 희열을 느꼈어요. 걸리는 것은 딱 하나, 한국에 두고 온 약혼자 순이였죠(웃음).” 용접기술을 배워간 덕분에 취업도 쉬웠다. 하루 종일 말 한마디 없이 작업에만 열중하는 그를 사장들은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영어를 알아듣지 못해 말을 하지 못했던 것인데도 말이다. 6개월 만에 비행기 티켓을 마련해 약혼자에게 보냈고 꿈에 그리던 순이는 미국으로 와서 케니 김과 결혼했다. 지금의 아내, 우순이(68)씨다. 이듬해 두 사람은 뉴올리언스로 이주한다. 당시 뉴올리언스는 석유 시추의 선봉에 서 있었다. 시추선에서 작업하는 고압용접 기술자는 흔하지 않았기 때문에 최고의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그만큼 위험하고 고된 일이었다. “망망대해에 떠 있는 석유 시추선에 한 번 오르면 2주일은 그곳에 머물러야 했어요. 물론 동양인은 나 하나였죠. 그래도 일만 하면 되니까 괜찮았는데 문제는 아내였죠. 당시 첫아이를 임신하고 있었거든요. 나 없을 때 아기가 나오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설마설마하던 일이 진짜 생기더라고요.”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병원에서 아내는 홀로 아기를 낳았다. 첫딸 제인이었다. 어쩔 줄 몰라 울기만 하던 아내와 시추선 위에서 발만 동동 구르던 남편. 이제는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지만 참 고단하던 시절이었다. “둘째 지나가 태어난 이후로는 정말 손이 무르도록 일만 했어요. 아내가 일했던 세탁소와 가발가게가 두 딸의 놀이터였죠. 겨우 돈을 좀 모아 자동차 바디숍을 인수했는데… 불이 나서 잿더미가 됐어요. 후에 미시시피 강에서 모래를 파 올리면 돈이 된다고 해서 시작했는데 그해 여름 허리케인으로 모든 것이 다 떠내려갔고요. 주저앉아 울 틈이 어디 있어요? 새끼들 데리고 살아야 하는데. 그야말로 산전수전 공중전을 다 겪었지요.” 시푸드 레스토랑의 성공으로 기반을 다진 부부는 1994년 지금 살고 있는 샌디에이고로 이주한다. 이곳에서는 농사꾼이 되어 오이, 참외 등을 기르기 시작했다. 농사의 ‘농’ 자도 모르던 케니 김씨는 한국농촌진흥청까지 날아가 오이농사 비법을 배워왔고 결국은 농장 사업도 크게 성공시킨다. 하지만 또다시 시련이 찾아온다. 지인으로부터 멕시코 농장 투자 사기를 당한 것. 김씨는 수십만 달러의 빚더미에 올라앉게 된다. 돈도 돈이었지만 믿었던 사람의 배신은 오랫동안 김씨를 괴롭혔다. “화재로 잿더미에도 앉아보고 홍수로 다 떠내려가기도 했고 사업도 수차례 망해봤지만 한 번도 좌절한 적은 없었어요. 다시 시작하면 됐으니까요. 그런데 믿었던 사람한테 속은 것은 정말이지… 힘들더라고요. 홀로 멕시코 시골에 틀어박혀서 1년을 지냈는데 그때 인생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어요.”
가수 선언! “나도 가수다”
가발가게, 세탁소, 피자가게, 시푸드 전문점, 패스트푸드점, 야채농장, 광산개발, 부동산, 콩나물 공장… 어느 날은 부부가 작정하고 미국에서 했던 일들을 하나하나 헤아려봤다고 한다. 종사했던 비즈니스가 25가지나 되었다. 이들 부부가 남다른 이력을 가지고 있는 데에는 케니 김씨의 역할이 크다. 우순이씨는 남편에게 ‘불도저’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뭐 하나에 꽂히면’ 기필코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마디했다. “추진력 하나는 끝내주는 양반이에요!” 김씨는 1998년 해조류 가공업체 ‘켈프누들’을 설립, 재기에 성공한다. 다시마를 가공해 만든 국수 ‘씨탱글’이 주력 상품이었다. 그는 에스콘디도 산자락 불모지에 공장을 지었다. 버려진 컨테이너로 공장 건물을 올리고 국수를 뽑아내는 기계는 직접 설계해 만들어냈다. 대부분 고물상에서 구입한 고철들을 용접으로 붙여가며 이루어낸 작업이었다. 이어 영어에 능통한 딸들을 불러들여 시장을 공략했는데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때마침 불어닥친 웰빙바람으로 ‘씨탱글’은 무섭게 팔려나갔다. 현재 켈프누들 제품은 홀푸드, 마더스 마켓 같은 미국 최대의 유기농 마켓에 납품되며 유럽 등 10개국에도 수출되고 있다. 연매출 200만 달러에 이르는 알짜배기 기업이다. 전쟁 같던 이민생활에 조금씩 평화가 찾아오고 어느덧 두 딸도 짝을 만나 슬하를 떠났다. 이제 겨우 숨 좀 돌리려고 보니 어느덧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 젊은 시절 함께 고생하던 친구가 병을 얻어 덧없이 가는 것을 보고는 가슴이 헛헛했다. 장례식을 다녀온 날 김씨는 큰 결심을 하고 가슴에 꼭꼭 숨겨놓았던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그래, 나 하고 싶은 것 한번 해보자 했죠! 중학교 때 학원비 떼어먹으며 배운 기타가 내 음악 인생의 전부이지만 한 번도 가수에 대한 꿈을 저버린 적은 없었어요. 남들이 들으면 웃을 이야기겠지만 진심으로 가수가 되고 싶었습니다. 하하하.” 가장 놀란 사람은 아내 우순이씨였다. 남편의 트로트 사랑이 유별난 것은 알고 있었지만 가수라니. 그것도 자기 노래를 만들어 앨범을 내는 진짜 가수가 되겠다는 것이었다. 허투루 말하는 법이 없고 한 번 결심하면 무슨 일이든 해내는 사람인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아내는 기분 좋게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자기를 위해서는 평생 1달러도 안 쓰던 사람이에요. 야채 농사를 지어 LA로 배달을 나갈 때 왕복 4시간 운전을 하면서 노래를 부르던 모습이 떠올랐어요. 아, 이 사람이 정말 하고 싶은 것이었구나… 마음이 찡하더라고요. 그래 그렇게 열심히 살았으니까 선물을 하자. 그래서 하고 싶은 거 하라고 했죠. 그런데 앨범 하나로 끝날 줄 알았는데 벌써 4집까지 나왔네요. 하하하.” 아내의 허락(?)이 떨어지자 과연 불도저답게 밀어붙였다. 한국에 나가 고시텔에 묵으며 직접 가사를 쓰기 시작했고 곡을 붙여줄 작곡가를 수소문했다. 작곡가 김준규씨와의 만남은 그야말로 운명이었다. 김준규씨는 1980년대 가수 주현미를 스타로 만들었던 트로트 메들리 앨범 ‘쌍쌍파티’의 제작자다. 2010년 케니 김 1집 ‘노신사의 노래’가 나오기까지는 꼬박 1년이 걸렸다. 매일 4시간씩 노래 지도를 받았고 모든 노래 가사를 직접 썼다. 케니는 따근따끈한 자신의 앨범을 훈장처럼 품에 안고 돌아왔다. 그렇게 케니 김은 63세에 늦깎이 가수가 되었다.
당신께 바치는 노래
이때부터 아내 우순이씨는 가수 케니 김의 매니저이자 팬클럽 회장이 됐다. 한인 라디오 방송국 ‘라디오코리아’에 남편의 앨범을 보냈고 이들의 흥미로운 이야기는 곧 방송을 탔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가수 케니 김의 사연과 노래가 미 전역의 이민 1세들의 심금을 울린 것이다. 그들 모두가 척박한 미국 땅에서 눈물과 땀을 쏟아냈던 또 다른 케니 김이고 우순이였다. 방송이 나간 후 팬이 되고 싶다는 전화와 편지들이 쏟아졌고 부부는 이들에게 하나하나 앨범을 선물했다. 밑지는 장사였지만 케니 김은 행복했다. “애당초 음반을 팔아 돈 벌 생각은 추호도 없었어요. 그저 힘들게 위로가 되었던 노래가 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렇게 부른 노래가 또 누군가에게 위로가 된다면 그보다 귀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데뷔 7년. 어느덧 케니 김은 4집 앨범까지 낸 어엿한 중견가수가 됐다. 크고 작은 한인 행사에 초대가수로 불려가고 종종 한국에서 오는 가수의 공연에 오프닝 무대를 장식하기도 한다. 하지만 돈벌이는 여전히 안 된다. 초대받은 행사에 가서 출연료는커녕 기부금까지 내고 오기 일쑤다. 몇 해 전부터는 5월 어버이 날이 되면 100여 명의 노인들을 집으로 초청해 효도잔치를 하고 있다. 그 역시 효도를 받을 나이이지만 누군가를 섬길 수 있다는 것을 큰 기쁨이자 보람으로 생각한다. “어느 해 집 주위에 매실이며 살구가 너무 실하게 열렸더라고요. 우리 둘이 먹기에는 너무 많아 주위의 노인분들에게 오셔서 따가시라 했죠. 너무들 좋아하시더라고요. 미국에 살면서 나들이도 제대로 못하며 살았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아팠어요. 잔치 한번 열어드리려 한 것이 연중 행사가 되어버렸어요. 맛있는 것 실컷 먹고 노래 실컷 부르면서 즐기시는 거 보면 덩달아 기분 좋습니다. 친구 생각,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도 나고요. 뭐 이게 사는 재미 아니겠습니까.”
아메리칸 드림이 별거 있더냐
케니 김씨는 자신만을 위해 시작한 노래를 이제 다른 이를 위해 부르고 있다. ‘수많은 날들 비바람에도 쉬지 않고 걸어온 우리, 여보 정말 고생 많았소~’ 덤덤한 노랫말이 인상적인 ‘무지개’는 사랑하는 아내를 위한 노래이고, 귀에 착 감기는 미디움 템포의 ‘아메리칸 드림’은 먼 이국땅에서 꿈을 향해 달리고 있는 모든 이민자들에게 바치는 노래다. 성공을 위해 별의별 일을 다 해본 이민자 케니 김은 아메리칸 드림은 별게 아니라고 노래하고 있다. 그의 진솔한 고백이다. “아메리칸 드림이요? 이루었죠! 돈을 많이 벌어서가 아니에요. 돈은 믿을 게 못 됩니다.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생기죠. 많은데도 늘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가 하면, 없어도 많은 것처럼 살 수도 있어요. 중요한 것은 나에게 꿈과 희망이 있냐는 것입니다. 한국을 떠나오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나는 단 한 번도 꿈을 꾸지 않은 적이 없었어요. 실패해도 두렵지 않았던 것은 또다시 꿈꿀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꿈을 향한 그의 열정과 집념은 삶의 원동력이다. 열심히 바쁘게 살면 늙을 시간도 없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불도저 케니 김이 요즘 푹 빠져 있는 것이 있다. 바로 뮤직비디오 제작이다. 아마추어 친구들이 힘을 모아 ‘아메리칸 드림’ 뮤직비디오를 만들어 유튜브에 올렸는데 무척 재미있는 작업이었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훨씬 쉽게 노래를 가까이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노래를 부르고 듣기에도 참 좋아진 세상이에요. 저는 좋아하는 가요 카세트테이프를 겨우 구해서 늘어질까봐 아끼고 아껴서 듣던 시절에 살았어요. 캘리포니아에 이사 오면 한국어로 라디오가 나오고 트로트를 실컷 들을 수 있겠다 싶었는데 당시엔 샌디에이고까지는 잘 안 나오더라고요. 얼마나 속상하던지… 아무튼 노래듣기에도 가수하기에도 참 편하고 재미있는 세상입니다.” 지난 4월, 따끈따끈한 새 음반이 두 장이나 나왔다. 하나는 ‘쌍쌍파티’의 리메이크 앨범 ‘케니 김 주연하의 쌍쌍파티’, 또 하나는 케니 김의 4집 앨범이다. ‘쌍쌍파티’는 현재 한국의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절찬 판매중이다. 지난달 음반 판매 수익금 88만원도 받았다. 데뷔 7년 만에 처음으로 번 돈이다. 4집 앨범의 타이틀 곡은 ‘무명가수’, 흥겨운 댄스곡이다. 물론 이번에도 직접 가사를 썼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노래 불러요
스트레스 날리고 장단에 맞춰
박수치며 노래 불러요
행복의 바이러스 드리겠어요
나는나는 무명가수야
우리들에게 행복의 바이러스를 주겠다는 LA의 무명가수 케니 김. 그의 마음속에는 새로운 꿈이 자리 잡고 있다. 장인의 노래가 18번이라는 든든한 첫째 사위와 CCM가수인 둘째 딸 지나와 함께 가족 콘서트를 여는 것이다. 딸과 함께 부르는 트로트 메들리도 멋지지 않겠나. 매니저이자 팬클럽 회장에서 이제는 의상 코디며 메이크업까지 담당하고 있는 아내는 가만히 미소짓는다. 아내의 미소는 늘 케니 김에게 든든한 힘이 되어주곤 했다. 머지않아, 그의 새로운 도전이 또다시 시작될 것이다.
허비되기 쉬운 건 청춘만은 아니다. 황혼의 나날도 허비되기 쉽다. 손에 쥔 게 많고 사교를 다채롭게 누리더라도, 남몰래 허망하고 외로운 게 도시생활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머리에 들어온 지식, 가슴에 채워진 지혜의 수효가 많아지지만, 알고 보면 우리는 모두 은하계를 덧없이 떠도는 한 점 먼지이지 않던가. 그러나 살아 있는 동안 한 걸음 더 나아가야만 한다. 어둠 속을 부유하는 먼지의 신세를 면하기 위해, 저마다 나름의 별이 되기 위해, 타성에 젖은 삶을 바꾸는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스스로 자청한 귀촌이라는 점에서는 유쾌한 도발이거나 즐거운 실험이다. 정착에 성공한다면 주야간에 얻어 누릴 것이 많은, 자못 성대한 사업이 바로 귀촌이라는 논평도 널리 돌아다니는 게 사실이지 않던가. 서울에서 이름 난 회사의 간부로 근무했던 김창승(58)씨. 그는 오래도록 그저 평범하고 무난한 인생을 끌어왔더란다. 퇴근 뒤 주점에 들러 한잔 마시는 일이나, 휴일에 느긋하게 골프를 즐기는 정도를 여흥으로 알고 살았다. 뭐 하나에 빠지면 수면 밑바닥까지 함빡 빠져드는 버릇, 그게 특유의 개성이라면 개성이라지. 본인이 선택한 일을 숭상하는 사람임을 알 만하다. 그런데 아마도 김창승씨가 가장 애호하는 건 아내 김태영(57)씨라는 존재였던 모양이다. 아내는 귀촌의 깃발을 들고 앞장서 나섰으며, 그는 즉각 응했다는 게 아닌가. 그는 ‘충성!’을 속으로 외치며 대번에 아내의 뜻을 따랐던 것 같다. 이를 부부애의 한 절경이라 봐도 무리가 없을 터. 세상의 모든 아내들이 부러워할 정경이렷다. 동쪽으로 가자 하면 일쑤 당나귀처럼 어깃장을 부려 서쪽으로 냅다 뛰기도 하는 게 남편이라는 종족이니 말이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아내가 원하는 귀촌을 결행하기 위해 자신의 내부에 들어 있는 생각과 가치관 따위를 새삼스럽게 신중히 점검한 김창승씨는, 귀촌이라는 종목이 사실상 자신에게도 어울리는 탁월한 선택일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이후 매우 신속하게 일을 서둘렀다. 그는 곧장 회사에 사표를 냈다. 2014년 1월 엄동 철에 부부는 마침내 전남 구례군 토지면의 시골로 귀촌했다.
“아내의 고향이 구례입니다. 고향으로 돌아가 인생 후반을 맞이하고 싶다는 게 아내의 소망이었어요. 이 사람은 초등학교 교사인데, 고향의 작은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텃밭농사를 통해 순수한 먹거리를 거두어 먹고, 자연의 품안에서 평온한 생활을 하며 늙어가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던 거죠. 어릴 적의 추억이 서린 시골에 대한 향수가 소박하지만 절실한 꿈으로 부푼 것 같았어요. 가만히 생각해보자니 저에게도 신선한 전환일 수 있겠더라고요. 그래서 바로 일에 착수했습니다. 집안 어른들의 반대가 심했지만 밀어붙였어요. 어느덧 귀촌 3년의 세월이 흘렀는데요. 아내는 물론 저 역시 크게 만족하며 살아갑니다.”
김창승씨 내외가 깃들어 사는 집은 오래된 기와집. 마당엔 갖가지 나무와 화초들이 자라고, 온갖 작물들이 자라는 텃밭도 솔숲처럼 싱그럽다. 낡고 빛바랜 태로 세월의 풍상을 웅변하는 고가(古家)가 자아내는 푸근한 정감. 길차게 자란 채 집을 빙 에두른 대나무들이 뿜는 청신한 기운. 남도의 전형적 농가의 구색이며, 수더분해서 다분히 이상적인 조경이며, 꾸민 바 없이 자연스럽게 잘 꾸며진 미학의 공간이다. 아니, 이토록 고리타분한 집에서 살려고 시골을 내려왔소? 하고 딴죽을 걸 사람이 드물지 않겠지만, 인간이란 저마다 다양한 취향을 관철하며 즐기며 살아가게 돼 있는 동물. 김씨 내외는 이 옛집이 취향과 구미에 맞아 오직 만족스럽다는 거다. 집 뒤 저편으로는 지리산이 거인의 눈을 껌벅이고 있으며, 집의 전면으로는 수려한 섬진강이 요요히 남실거린다. 명당에 들어앉은 집이라 간주한 내외는 이 집을 아예 사서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으나 여의치 않았단다. 집주인이 집을 팔 의향이 눈곱만치도 없어서였다. 그래서 당분간 그냥 빌려 쓴다.
먹거리 정도는 자급하기로
귀촌이나 귀농을 하는 사람들이 맨 처음 해결할 문제는 단연 거처나 땅을 확보하는 일이다. 게다가 시골의 집값, 땅값은 늘 생각보다 비싸며, 매물 자체가 드물며, 뭘 모른 채 엄벙덤벙 순진하게 덤벼들었다가는 잔머리 굴리는 재주를 가진 이들의 농간에 깜박 속아 넘어갈 수도 있다.
“귀촌 시 가장 어려운 문제는 역시나 들어가 살 집을 장만하는 일입니다. 시골에 빈집은 드물지 않지만, 대부분의 집주인들이 절대 팔지 않겠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어요. 도시에 나가 사는 자제들이 언젠가는 들어와 살거나 별장 용도로 쓰겠다는 생각들이니까요. 그렇다면 현지의 사정도 파악할 겸 잠정적으로 세 들어 살 집을 마련하는 게 현명한 방법이지만, 딱히 임대할 만한 집도 드문 게 현실입니다. 저희도 상당한 공을 들이고서야 이 집을 빌릴 수 있었습니다. 우선은 부지런히 발품을 파는 수밖에 없지요.”
“집 지을 땅이나 농토를 구입하려고 10년을 돌아다녔다는 사람도 있습디다. 뜸들이다 늙어버리는 것이죠. 이상적인 터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도 과욕이지 않을까 싶어요.”
“자연 경관이 빼어난 땅을 덜컥 샀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개발이나 건축을 할 수 없는 땅을 속아서 사는 케이스죠. 계절마다 땅 사정이 다르다는 점도 유념해야 해요. 여름엔 바람골이라 시원하겠다 싶어 사들였다가 겨울이 돼서야 유난한 얼음골이라는 걸 알고 낙심하는 수가 있으니까요. 땅이나 집의 거래 때 마을의 내부 가격과 부동산 업체에 내놓는 가격차가 크게는 두 배에 달한다는 점도 염두에 둬야 해요.”
“선생 내외는 혹한기 1월에 여길 들어왔어요. 춥고 외롭고 불안하진 않았나요?”
“고가의 보일러를 손보고, 벽지를 바르고, 그러곤 그냥 살았어요. 당시엔 TV도 없었어요. 온천지에 깜깜한 밤이 내리면 7시부터 잠을 잤죠. 그렇게 긴긴 겨울을 좀 스산하게 지냈으나, 어느덧 봄이 왔고요, 그 첫봄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몰라요. 이어 여름이, 가을이 오가고, 절기에 맞춰 농사가 시작되거나 마무리되고, 온갖 꽃들이 피고 지고, 참으로 감동적이었어요. 꿈꾸듯이 지낸 날들이었어요.”
“일은? 농사는? 그저 자연 풍경을 관람하며 지냈나요?”
“아내가 교직에 있고, 나름 물적 여력도 좀 있고 해서 황급히 돈벌이에 나서진 않아도 되는 여건이었어요. 그렇지만 이왕에 시골에 살게 됐으니 부부의 먹거리 정도는 자급을 하자, 뭐든 소소하게나마 농사도 지어보자는 생각으로 농토 400평을 샀습니다. 거기에 주로 콩을 심어 된장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귀촌과 귀농을 겸한 방식으로 살아온 셈이죠.”
도시라고 왜 매력 요소가 없을까마는, 한결 안전한 삶이 시골에서라고 거저 주어질 리가 있을까마는, 인구와 차량과 소음이 거품처럼 바글거리는 도회의 생활이란 시골에 비해 피로와 고독을 가중시키는 게 사실이다. 차갑고 쓸쓸한 인간관계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은 곳, 타산이 없는 동행을 만나기 어려운 장소가 도시이기도 하다. 그러나 경쟁과 긴장이 덜한 시골에서 권태를 피해 생기를 유지하고 행복을 구가한다는 게 용이한 일만도 아니다. 적막하거나 적적한 시골살이에 무기력하게 코 꿰게 된다면 그 역시 낭패가 아닐 수 없다. 김창승씨는 가급적 일을 만들어 거기에 온전히 투신하는 게 복된 삶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이즈음의 그는 거의 일벌레다.
“시골 인심은 정말 순후해”
“콩농사와 벼농사, 그리고 양봉도 합니다. 벌통 20개를 운영하고 있어요. 왜 양봉이냐? 지리산 지구인 이곳엔 산야초가 타지에 비해 두 배 정도 많아요. 벌들이 꿀을 물어올 꽃들이 지천이라는 얘기죠. 과수농사도 좀 합니다. 아내는 저보고 일을 벌이지 마라, 좀 편하게 살자, 그렇게 투정처럼 말하지만 일이 즐거우니 어떡하나요? 물론 농사로 아직 수입을 올리진 못하고 있어요. 경험을 축적하는 단계라는 거.”
“구례군 귀농귀촌협회장이기도 하죠? 귀농귀촌인들의 실태에 훤하겠어요. 그들은 어떤 문제에 가장 큰 애환을 느끼죠?”
“만족할 만한 소득을 올리기가 어렵다는 점이죠. 농사로 돈을 만지기란 실로 어려워요. 더구나 막연히 뭔가 잘되겠지 하고 무작정 들어온 경우는 실패하기 십상이에요. 시골에 내려와 살고자 한다면 미리 도시에서 한 가지쯤 기능을 익혀두는 게 현명하다고 봅니다. 목공, 배관, 전기기술, 중장비 또는 숲 해설사라거나, 유용하게 써먹을 기능 분야가 많으니까.”
“마을 주민들과 흐뭇한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어떤 처신이 필요할까요? 융화에 실패하고 패잔병처럼 철수하는 이들이 드물지 않아 묻는 질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대목이죠. 흠. 전통 농경사회의 특성이랄까, 시골 주민들은 ‘외지 것들’ 또는 ‘도회지 놈들’에게 일단 경계심을 품게 마련입니다. 개나 끌고 다니며 괜히 거들먹거리는 사람들, 온갖 참견을 하고, 육하원칙을 내세워 따지고 비판하는 부류들을 좋아할 리가 없죠. 제가 온몸으로 느낀 거지만, 시골 인심은 정말 순후해요. 주민들 속으로 겸손하게 들어가야 합니다. 돈 드는 일도 아녜요. 경로당에 수박 한 덩이 들고 가서 노인들과 어울리는 일은 사실 즐거운 일입니다. 마을 사람 하나와 싸움을 하면, 그건 결국 마을 전체에 싸움을 거는 일과 마찬가지라는 걸 알아야 해요. 존중하라! 그리 말하고 싶어요. 우리네 어버이들이 대부분 시골 출신 아니겠어요?”
자아도취엔 리스크가 많지만 겸허한 실천으로는 길이 열린다. 시골이라는 공동체에서 나를 낮추면 뜻밖에도 쏟아져 들어오는 것들이 많다. 우호적인 눈길, 미더운 관심, 끈끈한 유대감이 시골살이를 안정적인 쪽으로 데려다준다. 그렇다면 귀촌이란 수신(修身)이구나! 교만하거나 우매한 나를 독사의 눈으로 냉철하게 돌아봐 교정하는 교실에 들어선 것이라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자신을 세우되 이웃을 품는 일, 끔찍한 아귀다툼의 세태에서 한발 떼어 자연과 인간에게 순하게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는 일, 이는 음풍농월만큼이나 발랄한 자아실현의 길이지 않겠는가.
“아침저녁으로 새롭게 변하는 자연 풍경들이 정신과 영혼을 정화해주는 것 같아요. 이건 도시에선 도저히 느낄 수 없는 행운이죠. 산과 들과 강, 하늘과 별과 숲을 바라보면 때로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오르기도 하고, 때로는 환희가 가득하기도 합니다. 마치 감동적인 영화를 보고 난 뒤에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할 때처럼…. 이런 경험을 반복하면서 내가 비로소 내 삶의 주인이 되었다는 주체의식과 생기를 깨달아요. 예전엔 아내가 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로운 섬처럼 저를 느끼곤 했으나, 이젠 온전한 기쁨을 느껴요. 뭔가 한층 높고 고결한 곳에 있다는 실감이랄까, 그걸로 만족스러운 겁니다.”
삶의 일상에 자연이 붙어 있을 경우, 행복의 빈도는 더 잦아진다. 강바람에 들이 일어서고 눕는 풍경을 바라보는 일, 나뭇가지 하나를 집 삼아 밤을 나는 박새를 바라보는 일, 별이 모이는 걸 바라보는 일, 이 모든 소소한 풍경들에서 내 심장의 볼륨이 높아지는 걸 깨달을 수 있는, 시골살이란 어쩌면 낙원으로의 입문이다. 낙원의 한 치 곁엔 늘 연옥이 있는 법이지만.
정유년인 올해는 정유재란(1597.1~1598.12) 발발 420주년이다. 임진왜란으로부터는 427주년.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에 게재하기로 한다.
문창재 언론인(前 한국일보 논설실장)
저녁놀이 고와 보이지 않았다. 왜적에게 몸을 더럽히느니 자진하겠다고, 부녀자들이 줄지어 뛰어내려 핏빛이 되었다는 황석산 바위를 보고 온 탓이었다.
취재를 마치고 함양을 떠난 시간이 오후 7시였다. 남원성 전투 취재 때도 같은 시간이었다. 고속버스 차창에 타는 저녁놀이 가득 드리웠지만 여느 때처럼 가슴 뛰는 풍경이 아니었다. 어찌 피뿐이랴. 성안에 있던 군사와 백성이 모두 도륙당한 그 아비규환이 머릿속에 가득한데 붉은 빛이 아름답게 보이겠는가.
전투가 아니어도 그랬다. 왜군 종군승려 케이넨(慶念)의 에는 남원으로 쇄도하던 왜병들의 악귀 같은 만행이 사건기사처럼 기록돼 있다.
“너나없이, 남에게 뒤질세라 재보를 빼앗고 사람을 죽이며 서로 쟁탈하는 모습들, 도저히 눈 뜨고 볼 수 없는 기분이다.”(1597년 8월 4일) “들도, 산도, 섬도 죄다 불태우고 사람을 쳐 죽인다. 그리고 산 사람은 쇠사슬로 꿴 대롱으로 목을 묶어서 끌고 간다. 어버이 되는 사람은 자식 걱정에 탄식하고, 자식은 부모를 찾아 헤매는 비참한 모습을 난생처음 보게 되었다.”(1597년 8월 6일)
이 모든 비극은 원균의 칠천량 패전에서 비롯되었다. 호랑이 같은 조선수군이 궤멸되어 남해안을 마음껏 휘젓고 다니게 된 왜군은 바로 전라도 공략에 나섰다. 임진년에 진주에서 참패하고 이순신에게 짓눌렸던 한풀이였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군을 주축으로 한 왜적우군 6만 명은 7월 25일 울산 서생포 등 각자의 주둔지에서 밀양-거창-안의를 지나 황석산에 이르렀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군이 주력인 좌군 5만 명은 28일 부산포 안골포 순천 등에서 하동-구례를 거쳐 남원으로 쳐 올라갔다. 수군 7000명도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 구례에서 좌군과 합류해 남원으로 쇄도했다.
남원성 전투와 만인의총
남원성 전투는 중과부적이었지만 명나라 총병 양원(楊元)의 용렬한 작전계획이 초래한 참화였다. 지키기 좋은 교룡산성을 버리고 평지성인 남원읍성에만 의지한 졸전이었다. 조선군의 건의대로 험준한 교룡산성에서 버텼다면 최소한 저항기간을 더 늘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사이 지원군이 오면 수성에 성공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구례와 곡성을 거쳐 오면서 마치 사냥하듯 사람을 죽이고 잡아가던 왜적 병력은 5만7000명이었다. 이에 맞서는 수비군은 양원이 거느린 명나라 병사 3000명에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이 이끄는 조선군은 1000명을 밑돌았다. 그것도 제 군사들은 다 도망치고 남의 군사를 끌어모은 오합지졸이었다. 여기에 읍민 6000명이 전투를 도왔다지만, 그래도 6대 1의 싸움이었다.
남원성은 높이 4m 둘레 3.4km에 불과한 읍성이었다. 이 작은 성을 5만7000명의 왜군이 겹겹이 둘러쌌다. 총사령관 우키다 히데이에(宇喜田秀家) 군 1만 명은 남쪽,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 군 1만4000명은 서쪽,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군 1만 명은 북쪽,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家政) 군 1만3000명은 동쪽을 에워쌌다. 물 한 방울 샐 틈도 없는 완전 봉쇄였다.
개전 나흘 만에 낙성된 남원성 전투의 경과는 유성룡의 에 자세히 나와 있다. 조선 파진군(특공대)의 일원으로 명군에 파견되었던 김효겸(金孝謙)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와 유성룡에게 자초지종을 고한 것이다.
8월 13일 왜군 선봉대 100여 명이 성 밑에 접근해 조총을 쏘아댔다. 우리 군사들은 승자소포(勝字小炮)로 응전했지만 사정거리가 짧아 미치지 못했다. 왜적은 몇 명씩 패를 지어 출동했다가 화살을 피해 밭고랑에 흩어져 숨어 총을 쏘았다. 성 위의 우리 군사 여럿이 쓰러졌다. 얼마 후 왜적 몇이 깃발을 들고 성 아래에 와서 큰 소리를 질렀다. 양원이 통역과 함께 병졸을 적진에 보냈는데, 그들이 받아온 문서는 선전포고인 약전서(約戰書)였다.
다음 날 왜군은 성을 3면에서 포위하고 우박처럼 총과 포를 쏘며 공격해왔다. 싸움이 벌어지기 전 양원은 성 밖에 빼곡히 들어찬 민가를 모두 태웠지만, 남은 흙벽과 돌담이 왜적의 방패가 되었다. 반면 성 위의 수비군은 적에게 노출되어 사상자가 속출했다.
15일 왜군은 볏단과 풀단을 무수히 만들어 밤 8시쯤 성 밖의 참호를 메우더니, 성 밑에도 쌓기 시작했다. 성보다 풀단이 높아지자 그것을 타고 넘어 성안으로 쳐들어왔다. 대혼란이 일어났다. 성안 여기저기에 불길이 치솟고 병사와 읍민들이 뒤엉켜 도망치고 숨기에 분주했다.
명나라 기병들은 말을 타고 달아나다 두 겹 세 겹 둘러싼 왜병의 총칼에 낙엽처럼 떨어져 비명을 질렀다. 양원은 호위대의 도움으로 위기를 돌파해 몇몇 수하와 함께 살아남아 제 나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는 탈영죄로 참수되었다. 명 조정은 그 수급을 한양으로 보내 조리돌림시켰다.
유성룡은 “왜적이 양원을 알아보고 짐짓 모른 척 빠져나가게 했다는 말이 있다”고 에 썼다. 조경남의 에도 “양원이 왜적에게 성을 내주는 대신 목숨을 건졌다는 소문이 전해져 온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전투에서 전라병사 이복남을 비롯해 남원부사 임현(任鉉), 총병사후 정기원(鄭期遠), 별장 신호(申浩), 구례현감 이원춘(李原春) 등 9명의 장수가 분전 중 전사했다. 조명 양군 병사 4000명에 읍민 6000명 등 1만 명이 죽었다. 가망이 없게 되자 이복남은 탄약이 적군 수중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화약고에 불을 지르고 분전을 독려하다가 최후를 맞았다.
그의 아들 이성현(李聖賢)은 왜군에게 붙잡혀 끌려간 일본에 뿌리를 내렸다. 히데요시 고다이로(五大老)의 일원이었던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는 그에게 자기 이름의 ‘元’자를 넣어 ‘李家元宥’로 개명시켜 녹봉 100석의 관리직을 주었다. 일본 여자와 결혼해 3남4녀를 두었던 ‘李家’ 가문은 에도시대 조선 왕족의 지류로 인정받아 녹봉 500석을 받았다. 그 후예로는 1980년대 아사히신문(朝日新聞) 출판국장과 아시히학생신문사(朝日学生新聞社) 사장을 지낸 리노이에 마사후미(李家正文)가 유명하다. 그는 어려서 이왕가(李王家) 후손이라는 말을 듣고 자신의 뿌리 찾기 이야기를 책으로 써 화제가 되었는데, 1980년대에 한국에 와서 조상 묘에 참배했다.
케이넨은 전투가 끝난 8월 18일 일기에 “성안으로 진을 이동하다가 날이 밝아 주위를 돌아보니 길에 시체가 모래알처럼 널렸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처참한 광경이었다”고 썼다. 왜병들은 시체에서 코를 잘라 항아리와 나무통에 넣고 소금에 절여 부산으로 보냈다. 포로로 잡혀 일본에 끌려갔던 강항(姜沆)의 에는 이때 일본에 보낸 코 상자의 높이가 “구릉을 이루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만일 교룡산성에 의지했다면 어땠을까. 수비군 위치가 높고 공격군이 아래였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5월 10일 남원에 부임한 양원은 왜군의 공격에 대비한다고 교룡산성 안 민가를 모두 불태웠다. 백성을 읍성 안으로 모아 항전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남원부사 임현은 “천험의 요새인 교룡산성을 지키지 않으면 왜적의 근거지가 됩니다. 다른 고을 백성을 거기에 들여 지킵시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양원은 칠천량 패전을 입에 담으며 “멍청하고 겁이 많은 그대 나라 사람들이 적을 보고 또 자멸하면 어쩔 텐가?” 하면서 교룡산성을 버리고 말았다.
피란지에서 돌아온 백성들은 사방에서 썩어가는 시신을 한곳에 모아 묻고 만인의총이라 불렀다. 시내에 있던 의총은 서원철폐령과 일제의 탄압 등으로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하다가, 1980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져 격식 있는 예우를 받게 되었다. 왕릉에 비교될 만큼 큰 유택을 갖게 되었고 국가사적지 지위까지 얻었다.
만인의총을 둘러보고 관리소 직원에게 물으니 걸어서도 갈 만하다기에 교룡산성을 찾아 나섰다. 의총 왼쪽으로 보이는 고속도로 뒤편이 교룡산(蛟龍山)이라 했다. 빠른 걸음으로 한 시간 가까이 걸어 산 중턱 선국사 입구 산성 문에 당도했다.
가파른 경사에 자연 지형을 최대한 이용해 쌓은 성벽이 옛 모습 그대로였고, 성문은 아담하지만 아름다운 홍예문이었다. 임진년 진주성 싸움처럼 험한 산성을 등지고 군민이 일체가 되어 돌을 굴리고 끓는 물을 퍼부어가며 항전했다면, 그토록 허망하게 낙성되지는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굳어졌다.
황석산성 전투와 백성들의 수난
황석산성 전투 기록은 남원처럼 자세하지 않다. 에는 왜군이 움직이자 “도원수를 비롯한 모든 장병들이 왜적을 피하기만 했다”라고 적혀 있다. 전주를 목표로 서진하는 길목의 목민관들에게는 “각자 알아서 흩어져 피란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영·호남 경계선에 있는 황석산에는 함양, 안음(안의), 거창, 합천, 김해, 초계, 삼가 등 7개 고을 피란민이 몰려들었다. 줄잡아 7000명이 넘었으리라.
“안음 현감 곽준(郭䞭)이 황석산성으로 들어가자 김해부사 백사림(白士霖)도 들어갔다. 그가 무인이라고 모든 사람들이 든든히 여겼다. 그런데 왜적에게 공격을 당한 지 하루 만에 그가 도망치자 먼저 군사가 무너졌다”고 은 기록하고 있다.
에는 곽준 일가의 의연한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남문으로 적이 쳐들어오자 곽준은 밤낮으로 독전했다. 울면서 계책을 청하는 아들과 사위에게 준은 이곳이 내 죽을 곳인데 무슨 계책이 있겠느냐면서 태연히 호상(胡床)에 앉아 죽임을 당했다. 두 아들(履祥, 履厚)이 시체를 부둥켜안고 왜적을 꾸짖으니 적이 함께 죽였다.” 그의 딸은 아버지가 죽고 남편(柳文虎)마저 적에게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목을 매 자진했다.
등 다른 기록에도 백사림의 행태가 고발되었다. 사태가 위급함을 알고 어머니와 두 첩을 줄에 매달아 밖으로 내려보내고 도망쳤다는 것이다. 그것은 일본 측 기록에도 나온다. 근세 일본의 베스트셀러 에는 백사림이 성문으로 도망쳐 나오는 그림과 함께, 그 일이 소상히 적혀 있다. 전투 상황에 대해서는 “일본병(日本兵)이 성안에 난입하니 베어지고 넘어진 조선 병사들의 피가 성안에 가득 넘쳐났다”라고 묘사되어 있다. 함양군수를 지낸 조종도(趙宗道)는 성문으로 들이치는 일본 세와 불을 뿜으며 싸웠으나 성문이 열린 것을 알고 자기 처자를 끌어내 한칼에 베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말이 전해온다. 그가 산성에 들어오기 전에 지었다는 시 한 편은 에 실려 있다.
崆峒山外生猶喜
(공동산* 밖이라면 사는 게 외려 기쁘련만)
巡遠城中死亦榮
( 순원성* 안에서 죽는 게 또한 영광스러워)
*공동산과 순원성은 파천과 순절의 고사를 지닌 중국의 산
우리 측 기록에는 황석산 전사자가 군민 500명 정도로 돼 있다. 그러나 향토사학계는 그것을 믿지 않는다. 7개 고을 백성이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피란해온 산성에 군민이 500명밖에 안 되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10년 넘게 관련 자료를 수집해 을 출간한 박선호 황석역사연구소장은 “황석산 전투는 하룻밤 전투로 조선군 500명이 죽고 왜병은 하나도 죽지 않은 이상한 전투가 아니라, 왜군 7만5000명을 상대로 5일간 치열하게 싸워 왜군을 궤멸 상태로 빠트린 전투였다”라고 저서에서 주장했다. 7개 고을에서 모여든 의병과 백성 7000명이 아녀자들까지 물과 기름을 끓이고, 노인과 아이들은 돌을 나르고 굴린 의로운 전투였다는 것이다.
우리 군민의 피해가 7000명에 이르고, 전투가 끝나고 전주에 입성한 우군 병력이 2만7000명으로 줄어든 것으로 보아 그들의 인명피해가 엄청났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는 일본 측 기록으로도 뒷받침된다. 8월 17일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를 비롯한 적장 6명이 공동으로 작성하여 히데요시에게 보고한 내용은 이렇다. “8월 16일 조선군을 크게 꾸짖고 공격하여 산성을 함락시켰습니다. 성안에서 조선군 수급 353급을 베고, 골짜기에서 추가로 수천 명을 죽였습니다.” 성 바깥 골짜기에 피신한 백성들까지 다 죽인 것으로 볼 수 있는 문서다.
곽준 조종도 등 순절자 위패를 모신 황암사(黃巖祠)는 일제 때 폐사되었다가 2001년 함양군 서하면 황산리 황석산 기슭에 재건되었다. 홍살문 너머로 출입문이 서 있고 그 안에 사당, 그리고 그 안쪽에 석재로 감싼 커다란 봉분이 외로이 누워 있다. 사당을 찾는 이보다 그 옆 청소년수련원을 드나드는 발길이 많은 것은 황석산 전설마저 잊힌 탓이리라.
반대로 황석산은 등산객 발길이 잦은 곳이다. 전국 100대 명산에 이름을 올린 탓이겠으나, 백두대간 덕유산과 통하는 육십령과 맞닿아 있어 산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황암사에서 남강 상류 계곡을 따라 오르다 우전마을 입구에서 ‘정상 5.7km’ 이정표를 따라가면 2시간 반이면 당도할 수 있다. 해발 1000m가 넘는 능선부에 옛 성터가 비교적 잘 보전되어 있고, 무너진 곳은 근년에 다시 쌓아 온전한 험지 산성 모습을 지녔다.
산을 오르면서 남부여대 피란길에 나섰을 백성들의 수난이 떠올라 세월의 간격을 실감했다. 어찌 남부여대뿐이었겠는가. 솥단지와 이부자리에 된장독까지 끌고 오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간단한 행장의 배낭 무게도 벅차 가파른 오르막길을 쉬고 또 쉬어 올랐는데, 노약자와 부녀자들 고통이 오죽했을까. 아무도 살아남지 못해 원혼들이 구천을 맴돌고 있지는 않을까….
육십령 고개를 넘고 장수와 진안을 거쳐 전주에 당도한 우군은 남원성을 유린하고 임실을 거쳐 올라온 좌군과 세를 합쳐 전주 공략에 나선다. 그러나 공략이라 할 것도 없는 무혈입성이었다. 동남 양쪽에서 10만 대군이 닥쳐온다는 소식에 전주성내는 패닉 상태가 되었다. 명군 유격장 진우충(陳愚衷)이 수비군 병력을 이끌고 도망치자, 백성들은 돌팔매에 고기떼 흩어지듯 산지사방 흩어져 성안이 텅 비었던 것이다. 왜군은 그렇게 허무하게 전주를 손에 넣었다. 임진년부터 군량 걱정을 해결하려고 그렇게도 노리던 호남 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