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저녁, 나른하게 소파에 기대어 드라마를 보다가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 저 배우가 엄청 즐기고 있구나! 한참 나이 어린 배역에게 ‘아버지’나 ‘오빠’를 연발했다. 심심하면 욕설에 머리채를 끄잡는데 그렇게 통쾌할 수가 없었다.
“명희야, 원혁이 번호 땄어!”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106부작의 마지막 대사도 그녀 몫이었다. 지금까지 드라마 속에서 무던하게 녹아 있던 그녀. 이번만은 달랐다. 지난 3월 종영한 KBS2 주말드라마 ‘하나뿐인 내편’에서 귀여운(?) 치매 환자 박금병 역으로 사랑받은 배우 정재순(鄭在順·72)을 두고 하는 소리다.
계단을 걸어 내려오는 그녀를 마주보는 순간 멈칫했다. 연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블랑쉬가 나른하면서도 우아하게 무대로 걸어오는 모습이 연상됐기 때문이다. 팔랑팔랑 손을 흔들면서 명희 뒤만 졸졸 쫓아다니던 박병금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사진 촬영을 하는 내내 정숙하고 단아한 모습을 잃지 않는 배우 정재순. 캐릭터 변신이라고 생각할 만큼 남다른 연기를 보여줬던 ‘하나뿐인 내편’이 그녀 인생에 있어 대단한 도전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맨 처음 배역과 관련해 얘기를 들었을 때 극중에서 치매가 그렇게 큰 소재는 아니었어요. 그냥 약간 병세가 있다 하는 정도였죠. 그동안 치매 앓는 역은 안 해봤는데 어떡하지? 그래도 이 나이 먹어서 한 번쯤 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 모르겠다! 해보자! 그랬던 거죠.”
새 드라마를 시작하면 늘 하던 대로 마음먹었을 뿐인데 시청자의 반응은 예상외였다. 치매 증상이 심해져 극중 손주며느리 도란(유이 역)을 친구 ‘명희’로, 그의 아버지(최수종 역)를 ‘강기사 오빠’로 부르면 부를수록, 며느리(차화연 역)와 둘째 손주며느리(윤진이 역)에게 욕을 하면 할수록, 시청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제가 극중에서 욕할 때 사람들이 참 찰지다고 그러대요? 제가 나쁜 년, 첩년 하고 말할 때요. 저도 상상 못했고 작가님도 이렇게까지 생각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이야기 전개를 하다 보니 여건이 잘 맞아떨어진 거죠. 그런데 자꾸 촬영 분량이 많아지더라고요.(웃음)”
말 그대로 배우 정재순의 재발견이었다. 올해로 데뷔 51년 차. 지적이고 차가운 이미지로 언제나 그 자리에 서 있는 거목과도 같은 중견배우였다. 긴 세월 각인되어온 이미지를 깨고 새로운 캐릭터를 완성해냈으니 박금병이 더욱 사랑받았던 것은 아닐까. 정재순은 딴생각 안 하고 배역을 즐겼다고 했다.
“재미있었어요. 왜냐하면 치매 환자라는 배역 설정 때문에 오만 가지를 다 해봤거든요. 그동안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연기도 해보고요. 배우로서도 찾기 힘든 캐릭터였어요. 카타르시스도 느꼈고요. 특히 머리끄덩이를 있는 대로 낚아채잖아요.(웃음) 처음에는 굉장히 힘들었는데 하다 보니까 요령이 생기더군요. 치매 증세가 나올 때 특히 나쁜 사람들에게 바른 소리도 마음껏 하고 말이죠.”
극중 박금병의 인기는 인터넷을 치면 확인된다. 정재순의 이름을 검색창에 치면 드라마에서 착장한 귀걸이며 사용한 안경테, 옷 등의 브랜드를 알 수 있을 정도.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젊은 시절을 주로 기억하는 치매이다 보니 빨간 립스틱에 화려한 색감의 옷도 입고, 짧은 점퍼에 토끼 머리띠는 물론 시니어에게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미니크로스백도 수차례 바꿔 멨다. 70을 훌쩍 넘긴 나이에 후배 연기자들에게 애교 부리는 모습은 귀엽기까지 했다.
“도무지 모르겠어요. ‘하나뿐인 내편’에 출연하면서 귀엽다, 예쁘다는 말을 평생 들어도 차고 넘칠 만큼 들었어요. 귀엽대요. 제가요. 저는 원래 재미없는 사람인데요.(웃음) 배우는 정말 좋은 직업이에요. 순간순간 다른 인생을 살기 때문에 내 삶에도 도움이 되고요.”
그렇다고 그녀가 박금병 같은 강한 캐릭터 연기를 처음 해본 것은 아니다. KBS1 드라마 ‘하늘만큼 땅만큼’에서는 뽀글뽀글 파마머리를 한 새엄마 역할을 했고, SBS 드라마 ‘그래 그런거야’에서는 배우 송승환과 연상연하 부부로 연기한 적 있다. 스스로 놀랄 정도로 지금까지 맡았던 역할 중 박금병이 인기나 화제성에서 단연 으뜸이다. 그녀는 최근 드라마와 캐릭터의 인기에 힘입어 KBS2 예능 프로그램인 ‘해피투게더’에도 모습을 드러냈다.
“예능 프로그램에는 살면서 처음 나가봤어요. 우리 집안에 예능 PD가 있는데 출연 제의가 와도 안 나간다고 했거든요. 매니저 등쌀에 못 이겨 결국 나갔네요. 유재석 씨가 능력자더라고요. 나같이 재미없는 사람 앉혀놓고 잘 이끌더군요. 그날 ‘해피투게더’가 자체 최고 시청률을 찍었다 하더라고요.”
데뷔 51년 차, 나를 돌아보다
스타 탄생 비화에 종종 등장하는 스토리. 정재순도 친구 따라 탤런트 시험에 응시했다가 얼떨결에 연기자의 길로 들어섰다. 1968년 TBC
8기 공채 탤런트로 합격했지만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다. 미술대학교 지원도 못하게 했는데 탤런트를 하겠다니, 부모님은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런데 의외의 지원군이 정재순 옆에 있었다. “저는 그때 대학 재수를 하면서 군대 간 남자친구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반대가 심해서 집에서 쫓겨나기도 했는데 당시 남자친구였던 제 남편의 부모님이 제가 탤런트 된 걸 너무 좋아하셨어요. 밀어줬다기보다는 ‘괜찮다’ 이 정도요? 그때 시어머니께서 하셨던 말씀이 기억나요. ‘시댁에서 바람날 여자는 안방에 앉혀놔도 막을 수 없다.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힘과 용기를 내 방송사에 갔는데 세상에 아유…. 막상 닥쳐보니 제가 아무것도 모르고 끼도 없더라고요.”
간단히 말해 얼굴이 예뻐서 합격한 케이스였다.
“괜찮은 여자 탤런트가 들어왔다고 방송사에 소문은 났는데 연기를 시켜도 뭘 할 줄도 모르고 꿔다놓은 보릿자루였거든요. 야외 촬영은 너무 싫었어요. 스튜디오 촬영은 얼마든지 했고요. 사람들이 와서 지켜보고 있으면 불편하고 힘들었는데, 세월이 흐르다 보니까 박금병이 같은 역할도 하고. 약간 뻔뻔해졌다고나 할까?”
어찌어찌 하다 보니 세월이 그렇게 갔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그리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연기자는 생각도 안 해본 직업이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뭘 잘 모르고 시작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하는 것 같아요. 그냥 군대 간 남자친구를 기다리면서 방송사를 다니던 시절도 있었어요.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어느새 세월이 이렇게 흐른 거죠. 51년 동안 인정받을 만한 작품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 때는 너무 아쉬워요. 이번에 ‘하나뿐인 내편’은 기억에 남겠죠.”
기다림이 만들어 준 또 다른 이름 화가
남들이 기억하는 작품이 많은 것보다 오랜 시간 기복 없이 꾸준한 모습으로 시청자들을 만나온 것 자체가 더 대단한 결과가 아닐까?
“그렇죠. 감사한 일이죠. 그런데 연기자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요. 제가 선택하는 게 아니고 선택받는 직업이잖아요. 매년 꾸준하게 몇 작품씩 들어와야 하는데 들쭉날쭉했어요. 그래서 그 기다림의 시간을 채우기 위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죠.”
중고등학교 시절 그림대회에 나가 상도 많이 받아왔지만 부모님 반대로 포기해야만 했다. 결혼하고 나서도 그림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물감을 사 모으기도 했다.
“집에서 혼자 수채화를 그리다가 본격적으로 공부해볼 생각을 했어요. 처음에는 어린 시절의 은사를 찾아가서 배웠는데 체계적으로 공부해보라는 권유를 받았습니다. 책도 찾아보고 공부도 하면서 미술공모전이 있으면 열심히 작품을 냈습니다. 미술계 유명한 공모전에는 거의 다 출품했던 것 같아요. 1991년에 첫 개인전을 할 때까지 응모했죠.”
그녀의 첫 개인전은 당대 히트작이었던 MBC 주말연속극 ‘배반의 장미’의 촬영 장소로도 쓰였다.
“극중에서 제 배역은 속 썩이는 남편을 둔 재벌가 며느리였어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그림을 그리는 캐릭터였는데 ‘배반의 장미’를 집필하신 김수현 선생님이 제가 전부터 그림을 그린다는 걸 알고 계셨어요. 극이 끝날 때쯤, 전시회가 있다는 걸 아시고 전시회 신(scene)을 만들어주셨어요. 그 드라마에 나왔던 전시회 장면은 제 개인전 모습이었어요. 정말 감사했죠. 어느 연기자가 그런 배려를 받을 수 있겠어요.”
화가란 말이 어색하지 않을 만큼 어느새 그녀는 미술계에서도 인정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연기자로서의 삶과 화가로서의 삶은 그 성격이 판이했다.
“저는 연기와 그림을 병행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림은 혼자서 작업해도 되지만 드라마는 40~50명이 같이 어우러져서 일하잖아요. 1996년도에 네 번째 전시회를 할 때 ‘나는 누구인가, 나는 뭐하는 사람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어요. 그때 한꺼번에 세 작품을 소화하는 중에 전시 스케줄까지 잡혔었거든요. 그 뒤 5년간은 드라마에만 집중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그리고 다시 개인전을 연건 12년 만이었죠.”
요즘은 그림 활동을 안 하다시피 하니 화가 정재순이라는 말이 참으로 어색하다. 그래도 마음이 힘들던 시절에 자신을 위로해줬던 것은 그림이었다고 말했다.
“우리 시니어도 시간이 많다고 무료하게 지낼 게 아니라 취미 활동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게 훨씬 좋을 것 같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자기를 위해서도 주변 사람을 위해서도 좋더라고요. 드라마를 하면서 힘든 게 얼마나 많았겠어요. 그래도 그 힘든 세월 동안 그림이 있었으니까 많이 위로를 받은 거죠. 그리고 또 드라마 열심히 해서 좋은 모습도 보여드리고 있잖아요. 저는 행복한 사람이에요.”
그림은 항상 마음 깊은 곳에 있지만 혼자 하는 작업이다 보니 자꾸 소홀해지는 것을 느낀다. 긴장감도 떨어지고 말이다.
“옛날같이 체력이 안 따라줘요. 예전에는 드라마와 그림을 같이 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쉽지 않아요. 저는 비구상화를 그려요. 마음이 캔버스에 드러나는 작업이기 때문에 어떤 것을 담아낼지 고민이 없으면 절대 그림을 그릴 수 없어요. 뭘 그릴까 계속해서 고민을 해도 작품이 나올까 말까예요. 누구도 함께할 수 없죠. 하지만 그림을 그리기 위해 고민하고 스트레스받는 건 굉장히 행복하고 자유스러운 거예요.”
박금병이 때문에 김장도 못했다
한참을 드라마와 그림에 대한 얘기를 하다가 여자로서의 삶에 대한 이야기로 슬쩍 흘러갔다. 아이를 키우고 살림을 하고 일을 하면서 최선을 다했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다고. 나긋하게 깔리던 목소리의 톤이 높아졌다.
“작년 말에 박금병이 역 하느라고 처음으로 김장을 못했어요. 살면서 거른 적이 없거든요. 매년 수산시장에서 젓갈이며 생선이며 사서 온 정성을 다해 담갔는데, 사이다처럼 톡 쏘는 맛이 별미인데 참 아쉽네. 이번에 대사도 많고 스케줄도 빡빡했거든요. 그런데 김장을 안 하니까 여기저기서 주셔서 김치가 되게 많아요. 그래도 박금병이도 잘되고 드라마도 잘돼서 좋습니다.”
인터뷰 초반에는 몰랐는데 살림이며 가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녀에게서 발랄한 목소리의 박금병이 느껴졌다. 이제 드라마도 끝났으니 다시 정재순으로 돌아올 시간. 가발을 벗고 단장을 했는데 영 어색하다며 머리를 매만진다.
“생각해보니 정식으로 할머니 역할을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엄마였다가 자연스럽게 할머니가 되는 역은 많았는데. 거기다가 치매 환자 연기까지 했잖아요.”
매일이 새로운 연기자
제대로 연기했다는 만족감을 준 배역을 묻자 주저 없이 “이거. 박금병!”이라고 대답하는 정재순.
“저는 연기자를 그냥 직업이라고 생각했어요. 연기자로서 다른 삶을 연기할 때 충실하게 살려내려고 노력했어요. 직업 정신으로요.(웃음) 부족함도 많고 잘 모르니까 새 작품에 들어갈 때마다 항상 새로웠던 거죠. 연기자로서의 욕심을 좀 부려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아쉬워요. 우선 성격 강한 박금병이랑 헤어졌으니 조금 쉬어야 할 것 같아요. 주어진 역할은 뭐든지 최선을 다하자는 게 제 원칙이니까 또 열심히 해야겠죠.”
앞으로 배우로서 바람이 있다면 카리스마 넘치는 회장 역할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100세 시대잖아요. 시니어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요. 치매 연기 같은 거 말고. 힘과 용기와 아름다움과 즐거운 취미활동 같은 것들을 전달해줄 수 있는 그런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화가로서 시간이 허락되면 내년쯤 전시회를 가져볼까 해요. 전시회 열면 초대할게요.”
인터뷰를 마치고 정재순이 곧바로 향한 곳은 ‘하나뿐인 내편’의 종방연 현장이었다. 플래시 세례 속을 ‘강기사 오빠’인 최수종 팔짱을 끼고 걷는 정재순을 인터넷 뉴스로 접했다. 데뷔 51년 만에 인생 배역의 기쁨을 제대로 누리고 있는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도 영원할 수 있었던 그녀만의 힘, 주어진 일에 대한 감사와 사랑이었다.
카리스마, 예능 프로그램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감초, 그리고 아버지 故 박노식으로부터 이어지는 3대째 배우 가족의 가장인 배우 박준규(56)를 만난 것은 박술녀 한복연구소에서였다. 새해를 맞이해 생애 처음 그가 아내 진송아 씨, 장모(정갑숙), 어머니(김용숙)와 함께 한복 나들이를 한 자리였다. 촬영 현장에서 가족들을 대하며 보여줬던 즐거운 모습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이 사람을 만나면 즐거울 수밖에 없다’라고 말하게 되는 에너지가 저절로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우리가 예능 프로그램에서, 드라마에서 보는 그의 모습이 무엇이든, 실제의 그는 열정적이면서도 가족에 대한 애정을 모든 것에 우선해서 두는 사람이다. 그의 남다른 가족 사랑, 그리고 숨겨뒀던 이야기를 들어봤다.
박준규와의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사진 촬영을 하는 동안 보여준 그의 자연스러운 유쾌함이 계속 궁금했다. 그래서 그 마음을 유지하는 방법에 대해 물어봤다.
“긍정적 마인드죠. 저는 현장에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버티지 못합니다. 현장에서 연기만 하고 차 안에 있다가 나가고 하는 그런 건 제겐 힘들어요. 어떤 사람은 쉴 때가 되면 자전거로 전국일주를 하거나, 유럽에서 혼자 한 달 동안 지내다 온다는데, 저는 해본 적 없고 그런 생각도 든 적 없어요.”
타고난 기질이 그렇다는 게 그의 대답이었다. 그리고 그의 긍정적인 마음은 오롯이 가족을 향해 있었다.
“집안 돌아가는 게 모든 것의 우선이죠. 어디 투자도 못하고 꾸준히 먹고살 정도로만 살고 있어요. 빌딩 하나 사도 될 만큼 번 적도 있지만 집에서 놀고먹다가 까먹고.(웃음) 여행도 항상 아이들을 데리고 다녀요. 혼자 있는 거 싫거든요.”
연예인 가족으로 살아간다는 것
그러고 보니 그의 아들인 박종혁 군과 박종찬 군은 둘 다 배우다. 박준규의 아버지인 액션스타 박노식 씨까지 아우르는 3대 배우 가족이다. 그리고 아내 진송아 씨 또한 배우다. 그야말로 가족 전부가 연기 전문가다.
“아이들 스스로가 택한 길이죠. 쉽지 않은 직업이고 잘 이겨내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이 많지요. 그런데 앞으로는 제가 되도록 아이들과 같이 TV에 안 나가려고 해요.”
어째서일까? 그 이면에는 연예인 가족이라는 입장이 주는 부담이 있었다. 그와 그의 가족에 대해 쓰는 수많은 ‘악플’에 너무 큰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다. 연예인이 불특정 다수의 대중에게 받는 근거 없는 조롱과 멸시도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고, 특히 요즘 사회를 경악케 만든 소위 ‘2세들의 갑질’에 대해 민감해하는 대중의 정서가 고스란히 전해진 탓도 있다.
“‘네 아버지가 쌍칼이라 잘되는 거지’, ‘애 연기자 시키려고 저러나보다’라는 말들이 큰 상처가 돼요. 그런데 종혁이, 종찬이는 드라마, 뮤지컬 전부 다 스스로 알아서 오디션을 봐서 통과한 거예요. 지금도 계속 오디션을 보고 있고요. 요즘 세상에 어떤 제작자가 아무나 캐스팅하겠습니까. 대충 지인 꽂아서 만들지 않아요. 사실들을 모르고 하는 얘기죠. 물론 그런 과정은 다 겪어야 하는 거지만… 속상하죠.”
‘3대째 하고 있는 칼국수집은 믿음이 간다’ 하면서 ‘3대째 연기자 집안은 끼리끼리 해먹는다’라고 표현하면 그것은 편견 아닌가, 어쩌면 연기를 전문적인 기술로서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정서가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늘 함께하는 가족
그러나 같은 일을 함께 공유하는 가족이어서 얻는 보람과 즐거움도 분명히 있다. 연기에 대해 얘기하자 그의 침울했던 목소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밝아졌다.
“따로 연기 공부를 시킨다든지 하는 건 없어요. 종찬이가 뮤지컬 공연할 때 포즈나 행동, 액션에 대해 잠깐 보여주면 ‘이게 낫다’ 하는 정도로만 조언해요. 와이프도 배우이다 보니 네 명이 앉아서 연기나 음악에 대한 주제로 대화가 집중되죠. 우리 가족은 대화 자체가 해피해요. 같은 주제를 논할 수 있는 사람들이니까요.”
대개 가족과의 대화가 단절되는 이유는 서로의 영역에 대한 관심이 부족해서다. 그러나 박준규의 집에서는 연출이나 연기 등에 대한 다양하고 깊은 대화가 오간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이 밖에서 따로 도는 일도 없다. 술 마실 일이 있으면 가족 전부가 모여서 같이 마신다.
“저 같은 경우는 금수저로 태어났다가 흙수저가 됐다가 다시 금수저가 되어가는 중이고, 우리 얘들은 금수저죠. 그런데 금수저면 스스로 금수저답게 행동해야지, 누가 가르쳐줘서 되는 게 아니라고 봐요.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도 맞는 말이지만 좀 늦게 정신 차리는 경우도 있거든요. 1년이 지나 걷는 아이도 있는데 억지로 걷게 해서 더 안 좋아지는 것처럼요.”
박준규의 교육 방침은 기본적으로는 ‘내버려둬’이다. 자기가 살다 보면, 단체 생활을 하게 되면, 때 되면 알게 된다는 게 그의 신조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냥 내버려둔다는 의미는 아니다. 기본은 가르치고 버르장머리 없고 이기적인 습관들은 지적해줘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우리가 가족이라는 걸 잊지 말자는 것만큼은 지키고 살았죠. 아빠가 일하고 들어왔는데 방에서 공부하느라 인사도 안 한다면, 그런 건 잘못됐다고 봐요. 어떤 상황에서도 나와서 인사해야 하죠. 우리가 함께 무언가를 하겠다고 약속한 게 있으면, 약속 전날에 밤을 새든 말든 상관 안 하지만 그 약속은 꼭 지켜야 해요.”
그의 교육적 방침이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있었다. 책임질 부분을 명확하게 하고, 그 외에는 자유롭게 해주는 것. 다행히 아이들은 단체 생활인 드라마 제작 현장을 어렸을 때부터 봤기 때문에, 자기들이 잘못된 게 있으면 스스로 고치려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을 갖고 있는 게 고맙다고 말한다.
“일하다 보면 주변에서 제 아이들이 잘한다는 얘기들을 듣게 되는데, 너무 기분 좋죠. 바쁜 아버지와의 추억이 많지 않아 아들들한테는 친구 같은 아버지가 되고 싶어요. 아버지가 되고 나서야 아버지 박노식을 이해할 수 있게 됐지요.”
난데없이 떨어진 7억 빚
그는 사람들에게 “박준규가 나오니 작품이 재미있네”라는 얘기를 듣고 싶다고 말한다. 항상 그렇게 믿음이 가는 배우로 남았으면 좋겠다는 그의 소망은 그가 가진 연기와 작품에 대한 애정을 느끼게 만든다. 실제로 그는 꾸준한 연극 활동을 하고 있으며 2012년 이후부터는 연출도 맡았다. 그러나 이번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그가 그렇게 사랑하는 공연 쪽에서 큰 문제가 난 적이 있었다고 사실을 밝혔다.
“2016년에 뮤지컬을 제작했어요. 11월 11일 빼빼로데이 때 시작했는데 초반에는 굉장히 잘돼서 ‘음, 역시 박준규는 제작이면 제작, 연출이면 연출 못하는 게 없어’라고 생각했죠.(웃음) 그런데 그해 12월에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사건이 터졌어요. 그러면서 관객 수가 급감해서 망했어요. 그리고 파트너였던 사람이 개인파산을 신청하면서 제작비 전부가 제 빚이 되더군요. 서류상으로 할 게 아무것도 없더라고. 그래서 저 혼자 갚고 있는 중이에요.”
그는 담담하게 말했지만, 그 일로 그가 갚아야 할 빚은 약 7억 원. 결코 작은 액수가 아니었다. 채권자 중에는 지인도 있는 만큼 그들에게 도의를 다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앞으로 1, 2년 더 고생하면 갚을 수 있을 듯해요. 그동안 아이들도 잘되면 좋고. 나도 좋은 작품 한 번 또 열심히 하게 되면 좋고요.”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
인생사에 새겨진 굵직한 상처를 보듬어주는 것이야말로 가족이 할 수 있는 일 아닐까. 배우가 아닌 가장으로서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잘한 일은 지금의 가족을 만난 것이라고 말한다.
“인생에서 잘한 일이라면 진송아와 결혼한 거죠. 진송아가 아니었으면 벌써 이혼해서 쓰레기 인생을 살았을걸.(웃음) 어머니와 아버지는 저를 낳아주셔서 감사하고 지금의 아이들이 있어줘서 고맙고요.”
그가 보는 아내의 장점은 ‘괴롭히지 않고 잔소리를 안 한다는 것’이다. 두 사람이 부부로서 오래 함께 잘 살아온 비법은 아이들을 ‘내버려둔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그래서일까, 두 사람을 보면 케미가 좋은 동지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부부의 인연을 오래 고스란히 유지하려면 상대가 바뀌길 바라면 안 돼요. 있는 그대로 둬야죠. 대부분의 부부싸움은 상대를 자기화하려고 해서 일어나요. 가르치려고 들고, 서로 몇십 년간 살아온 습관이 있는데 그걸 바꾸라고 강요하다가 다투게 되죠. 와이프와 저는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유지하니까 이렇게 살 수 있는 것 같아요.”
솔직한 박준규, 깨달음을 만나다
박준규의 강점은 솔직함이다. 그의 이름이 몇 년 전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오른 적이 있다. 방송에서 아침은 며느리가 차려주는 걸로 먹어야겠다고 말했던 일 때문이다. 요즘처럼 페미니즘이 커다란 화두로 떠오른 시기에는 더 화제가 될 발언이다.
“맞벌이 부부라면 아침을 남편이 해줄 수 있는 거죠. 그런데 가정주부라면 자기 할 일은 해야지. 그런 말 몇 마디 했다가 ‘망언이네, 간 큰 시아버지네’라며 이상하게 몰아가려 하더라고요. 시아버지가 돼서 며느리 밥 먹겠다는 게 이상한가? 전 지금도 그걸 바라고 있어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서로 자발적으로 해야 한다는 거죠. 뭔가를 힘들게 해야 하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마음이 움직여서 하는 것이 진짜 희생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어요.”
그 발언을 한 후 동네 약국에서 한 사람이 그의 손을 꼭 잡으면서 “내게도 아들이 있는데, 고맙다”라고 말해주더란다. 아마도 그의 말에 동조하는 사람들, 그러나 말할 처지가 못 되다 보니 그의 솔직함에 기댈 수밖에 없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의 가족도 그의 솔직함을 약간(?) 걱정하는 눈치다. 솔직함이 때로는 까칠해 보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와이프는 ‘제발 그런 얘기가 나와도 말 좀 가려라, 여성 비하 발언은 조심하라’고 말해주더라고요. 살다 보면 이해가 안 가는 부부들을 많이 봐요. 예전에는 그런 사람들 보면 뭐라고 했는데, 이제는 자제하고 있어요. 아내가 ‘그런 얘기를 들어도 뭐 그런 것도 좋겠네 하면서 대꾸하지 마라’ 해서 그럴려고요.(웃음) 정말이지 훌륭한 할아버지가 되고 싶걸랑요.”
I’m the best, so you
2019년의 박준규도 지금까지처럼 바쁘게 움직일 생각이다. 봄이 되면 우선 지난해 방영되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드라마 ‘검법남녀’ 시즌2 촬영이 예정되어 있다. 그리고 그 역시 유튜브 크리에이터를 기획하고 있다고 한다. 혼자가 될지 여럿이 될지는 구상 중에 있다고. 인터뷰 끝에 앞으로 더욱 바빠질 수밖에 없는 그에게 신년 덕담을 주문했다.
“요즘은 자신은 안 돌보고 자식들만 돌보는 사람들이 있고, 반면 자신만 생각하고 타인에 대한 예의를 모르는 사람들도 있어요. 아임 더 베스트, 소 유(I’m the best, so you), 내가 최고고 당신도 최고다. 우리는 항상 베스트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해요. 그리고 다른 사람도 베스트라는 것도요. 모든 사람은 똑같다는 거죠.”
거품과 함께 빙글빙글 돌아가는 둥근 통 안의 옷들을 보면서 어쩌다 한 번쯤은 해봤을 생각을 잘 표현한 연극이 무대에 올려졌다. 바로 ‘오아시스 세탁소 습격사건’이다.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연말 대학로(알과핵 소극장/극단 모시는 사람들)에서 제목부터 심상찮은 이 연극을 봤다. 30년 넘게 대를 이어 세탁소를 운영하는 강태국 씨의 세탁소에서 벌어지는 일을 소재로 다뤘다.
‘오아시스 세탁소 습격사건’은 중견 극작가 김정숙 씨가 쓴 희곡으로 2003년 예술의전당에서의 초연을 시작으로 2005년 대학로 공연까지 33만 관객을 동원했다. 동아연극상, 희곡상도 수상했다. 극작가 김정숙 씨는 현재 극단 모시는 사람들의 대표이기도 하다.
연극은 시간이 되어도 불이 켜지지 않는 암전 상황에서 야릇한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잠시 후 불이 켜져서 보니 사람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다. 그 후 다시보기로 난장판이 된 상황을 되짚어온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오아시스 세탁소를 아내와 함께 운영하는 강태국 씨는 세탁소에 남다른 애정이 있다. 단지 옷을 세탁하고 다림질하는 게 아니라 사람의 정이 오가도록 자신이 가교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수십 년 전 맡긴 어머니의 옷이 생각나서 찾아온 초라한 행색의 남자에게 옷을 찾아 그냥 내어주고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는가 하면 무명 연기자가 오디션을 볼 때마다 손님이 맡기고 오래 안 찾아가는 옷을 빌려주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치매로 오늘내일하는 할머니가 임종을 앞두고 ‘세탁’이라는 말을 남기자 세탁소를 습격한 자녀들은 세탁소에 걸린 옷들을 뒤지며 할머니의 유품을 찾느라 정신이 없다. 연극은 욕심을 부리고 서로 밀치던 사람들이 뱅글뱅글 돌아가는 세탁기에서 하얀 옷을 입고 나오는 것으로 끝난다.
옷걸이마다 빼곡하게 옷이 걸린 무대를 보니 한 친구가 생각난다. 초등학교 동창인 그녀는 계절별로 옷 세 벌만 남기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녀는 만날 때마다 늘 눈에 익숙한 간결한 옷차림이다. 여럿이 만난 자리에서 누군가 “세 벌은 너무 적은 거 아니야?” 하고 물었더니 “많이 갖고 있으면 나중에 여러모로 힘만 들지” 하면서 미리 정리하는 삶을 연습하고 싶다고 했다. 나를 포함한 몇이 “대단하다”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우리는 여전히 실천을 못하고 있다.
극작가이자 극단 '모시는 사람들'의 김정숙 대표는 살면서 한 번쯤 해봤을 세탁소 혹은 세탁기에 담긴 생각을 무대에 올려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어냈다. 인간관계가 점점 야박해지고 물질만능주의로 물들어가는 현 시대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 연극이었다.
(전시) 대고려, 그 찬란한 도전
일정 12월 4일~2019년 3월 3일 장소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
고려 건국 1100주년을 기념한 특별전. 미국, 영국, 이탈리아, 중국, 일본 등 국외 5개국과 한국이 참여한 이번 전시에서는 고려의 미술을 종합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주요 문화재 총 390여 점이 출품된다.
(연극) 그대를 사랑합니다
일정 12월 6일~2019년 1월 27일 장소 아트원씨어터 1관 출연 이순재, 박인환, 손숙, 정영숙 등
강풀 웹툰을 원작으로 영화와 드라마로도 제작되었던 ‘그대를 사랑합니다’가 대학로 연극 무대로 돌아온다. 우유 배달을 하는 ‘김만석’과 파지를 줍는 ‘송이뿐’, 주차관리소에서 일하는 ‘장군봉’과 기억을 잃어버린 ‘조순이’가 서로 인연을 맺고 우정과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다. 베테랑 연기자 이순재, 박인환, 정영숙 등이 출연한다.
(축제) 보성차밭빛축제
일정 12월 14일~2019년 1월 13일 장소 한국차문화공원 일원
차밭 빛물결, 은하수 터널, 빛 산책로, 디지털 차나무, 차밭 파사드 등 아름답게 꾸며진 빛 조형물이 보성의 겨울밤을 장식한다. 주말에는 불쇼, 불꽃, 음악, 레이저 조명이 어우러진 불꽃 공연, 실내정원에서 펼쳐지는 판타지 공연, 해외특별 공연 등이 진행된다. 또 소망카드 달기, 문화장터 등의 상설 프로그램도 준비되어 있다.
(영화) 스윙키즈
개봉 12월 19일 출연 도경수, 박혜수, 자레드 그라임스 등
1951년 거제 포로수용소, 탭댄스에 대한 열정으로 뭉친 오합지졸 댄스단 ‘스윙키즈’의 탄생기를 그렸다. 종군기자 베르너 비숍이 포로수용소에서 촬영한 사진 한 장이 모티프가 됐다.
(뮤지컬) 마리 퀴리
일정 12월 22일~2019년 1월 6일 장소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출연 김소향, 임강희, 박영수, 조풍래 등
프랑스의 물리학자 마리 퀴리는 방사능 연구를 통해 방사성 원소인 폴로늄과 라듐을 발견하는 등 새 방사성 원소를 탐구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후 라듐의 유해성을 알게 된 그의 인간적인 고뇌를 작품에 담았다.
(전시) 피카소와 큐비즘
일정 12월 28일~2019년 3월 31일 장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입체미술 운동의 탄생 배경에서 소멸까지의 흐름을 연대기적 서술을 통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20세기 현대미술의 거장’ 파블로 피카소, ‘근대회화의 아버지’ 폴 세잔 등 유명 작가의 진품 명화 90여 점을 만나볼 수 있다.
깊은 가을 시월의 막바지 토요일에 흥겹고 참으로 신명 나는 우리 국악 창극 ‘변강쇠 점찍고 옹녀(국립 창극단)’를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에서 관람했다. 사실 음악이라면 젊을 때부터 팝송, 샹송, 칸초네 등을 즐겨 들어서 국극이나 마당놀이 같은 창극엔 관심이 덜 했다. 그러나 나이 들어감에 따라 국악에 대한 호기심도 생겼고 기회가 있어 감상해 보았던 ‘심청전’이나 ‘흥보가’ 등으로 우리 국극이 이렇게 재미있다는 걸 느끼고는 관심을 두고 찾아보게 되었다.
오늘 본 작품은 외설적으로만 알려진 ‘변강쇠전’을 바탕으로 주인공은 변강쇠가 아닌 그의 여자 ‘옹녀’였다. 그래서 제목도 ‘변강쇠에 점을 찍고 옹녀’가 되었나 보다. 옹녀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대로 남자만 밝히는 여자가 아닌 자의식을 가지고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용감하게 운명에 맞서는 의지의 여인으로 나온다. 포스터만 봐도 예쁜 옹녀가 유혹하듯이 도발적인 모습으로 돌아보고 있어 오늘의 옹녀 연기가 기대되었다. 이제까지 보았던 뮤지컬이나 연극의 오케스트라는 무대 아래에서 객석을 마주하고 연주를 했다. 그런데 이 공연의 연주자들은 무대를 향해 앉았는데 국극의 특성상 지휘자가 없어 연기자들의 동작을 보면서 연주를 해야 하기 때문인가 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쟁, 피리 긴 나팔 같은 악기가 보였다.
무대가 열리자 하얀 소복을 입은 여자가 나와 애교 넘치는 목소리로 절을 하며 “옹녀 인사드리오”라고 했다. 목소리부터 어찌나 간드러지는 지 웃음이 절로 났다. 창극의 매력은 말투와 억양에 있는 듯하다. 외롭다는 단어도 ‘외로와라’ 고 하니 더욱 정감이 느껴진다. 무대는 다른 뮤지컬이나 연극보다 매우 단조로웠지만, 가림막이 네 조각으로 나뉘어 움직이고 있어 공간이 다양하게 연출되어 입체적으로 보였다.
이전의 공연에선 옹녀도 죽어 장승이 되어 변강쇠와 서로 마주 보며 영원히 함께한다는 내용이었다는데 이번 공연에는 죽은 어머니의 도움으로 옹녀가 이승과 장승의 세계를 오가며 변강쇠와 사랑을 나누기도 하고 아기도 낳아 기른다는 설정이다. 다들 잘 알고 있듯 옹녀는 미인이기는 하지만 청상살, 상부살이 끼어 만나는 남자마다 죽는 운명을 타고났다. 열다섯에 첫 결혼을 하지만 하룻밤에 남편이 죽고 열여섯, 열일곱 등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일 년에 한 번씩 혼인만 하면 남편이 죽었다. 그뿐 아니라 그녀를 탐하는 동네 남정네도 모조리 상을 당하니 마을에서 쫓겨나게 된다.
쫓겨나는 길에서 만난 변강쇠와 살림을 차리고 궂은일로 돈을 버는데 손끝이 야물어 남보다 많은 돈을 받는다. 변강쇠는 하는 일 없이 노름판에서 옹녀가 번 돈을 다 써버리지만, 옹녀는 자신과 만났는데도 죽지 않으니 감사히 생각하고 감수한다. 그러다 마을을 지키는 장승을 뽑아 장작으로 태워버린 변강쇠는 장승들의 저주를 받아 온갖 병을 얻어 죽는데 옹녀의 변강쇠 살리기 작전으로 장승들과의 한판 전쟁이 볼만하게 펼쳐진다.
재미있는 건 우리 판소리에 녹아있는 해학과 풍자로 듣기 민망한 비속어도 많이 나오는데 거부감 없이 즐겁게 웃으며 들을 수 있다는 점이다. 두 시간이 넘는 공연에 옹녀 역 이소연 배우의 청량하고 맑은소리가 계속되어서 참으로 감탄스러웠다. 이 창극은 2014년 초연된 이후 성황을 이루며 5년째 무대에 올라가고 있다. 옹녀 이야기는 조금씩의 변화를 주는 연출로 계속될 것 같다. 신명 나는 매력적인 한 판 창극에 마음이 시원해진 하루였다.
처음에는 “무슨 추모공연이냐” 반문하며 차갑게 돌아섰다. 공간예술을 하던 이를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추모한다는 말인가. 의미 없다며 외면하려던 찰나 불현듯 생각났다. “선배님이 이 연극에서 연기 참 잘했지.” 좋은 작품을 한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평소 성격답게 세상과 쿨(?)하게 안녕하고 떠난 그녀를 대신해 무대에 오르기로 했다. 조명이 켜진다.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나긋하게 깔리던 닥터 리빙스턴 역의 윤소정, 아니 배우 오지혜(吳芝惠·50)가 빛을 따라 걸어간다.
“안녕, 무대에 계신 엄마.”
왜 우리 엄마를 추모하시려는 거죠?
10월 5일 동양예술극장에서 막이 오르는 연극 ‘신의 아그네스’의 닥터 리빙스턴 역에 배우 오지혜가 낙점됐다. 작년 6월 향년 72세 나이로 작고한 윤소정 배우 추모 헌정공연의 의미가 있는 이번 공연에서 27년 차 중견배우인 오지혜가 윤소정의 역할을 맡았다.
자신의 또 다른 직업을 ‘엄마아빠 딸’이라고 우스갯소리로 말하는 배우 오지혜. 우리나라 대표 배우 오현경과 윤소정의 딸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했던 영화감독 윤봉춘의 외손녀, 1960~70년대 한국 영화 중흥기를 이끌었던 시나리오 작가 윤삼륙의 외조카로 3대째 가업을 잇고 있다.
“조금 의아했어요. 나야 엄마를 누군가가 기억해주는 것이 고맙기는 한데 왜죠? 하루 정도의 추모제는 이해하겠는데 추모공연이라잖아요. 좀 미적거렸더니 이번 ‘신의 아그네스’를 기획하신 신연욱 대표님이 제가 안 해도 작품을 무대에 올리겠다 하더라고요.”
작년 6월 갑작스레 패혈증 증세를 보이다 일주일 만에 세상을 떠난 배우 윤소정. 오지혜의 말을 빌리면, 영화 필름 빨리 돌리기하듯 허망하게 세상과 이별을 고했다. 생사라는 것이 인간의 의지로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예쁘고 멋진, 아름다운 모습만을 남기고 떠난 배우가 오지혜의 어머니 윤소정이다. 그런데 이건 좀 아니었다. ‘故 윤소정 선생 추모 헌정공연’이라는 부제가 붙었는데 배우인 딸이 출연을 안 한다? 게다가 닥터 리빙스턴 역할을 하기에 그녀 나이가 적역이었다.
“머리에 그림을 좀 그려봤어요. 제가 공연 보러 갈 거 아니에요. ‘잘 봤어요, 수고하세요’ 하고 자리 뜨는 모습? 이건 좀 아니지? 딱히 바쁜 일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하기로 했죠. 결론을 말하면 우리 연극인들이 윤소정 선배님을 그리워하며 ‘그 사람이 참 잘했었던 작품이지’라고 하면서 좋은 작품을 하나 올린다! 그게 이번 공연의 주제랄까요?(웃음)”
닥터 리빙스턴을 연기하면서 애써 윤소정을 소환해낼 생각은 없다. 무엇보다 현재 입장에서 닥터 리빙스턴을 읽어보니 너무나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 배역이었다.
“엄마가 리빙스턴 역할을 워낙 잘해서 그렇지 이미지는 제가 더 맞아요. 내가 더 박사스러워. 그리고 여기 캐릭터 딱 나예요. 옳은 거, 그른 거 엄청 막 따지고 드는 게 말이죠. 작품 연습을 하다가 연출가가 저한테 하는 말이 ‘딱히 연기하실 거 없이 무대에 오르시면 되겠네요’ 그러더라고요.”
그래도 문득 자신의 입을 통해 엄마 윤소정의 목소리가 언뜻 나온다고 했다.
“공연의 해석이 예전과 다르긴 해도 어떤 면에서는 조금씩 겹쳐지는 부분이 있을 거예요. 제가 비극 연기할 때 엄마의 모습이 보인다는 얘기를 듣곤 했거든요. 실제로 연습할 때 엄마 연기했던 것이 생각나잖아요. 살짝 소름이 돋았어요.”
아그네스를 꿈꾸던 소녀, 성장통을 겪다
“‘신의 아그네스’를 처음 접한 게 중학교 2학년 때였어요.”
1983년 ‘신의 아그네스’ 초연 당시 오지혜가 살던 아파트 지하 마을회관에서 공연 연습을 했다. 학교 갔다 집에 오면 연습실로 가서 책상 밑에 쭈그리고 앉아 배우들이 연기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아그네스를 연기하던 (윤)석화 언니가 그때 스물일곱 살이었어요. 아그네스가 최면에 걸려서 아이 낳는 장면이 있어요. 어린 나이에 너무 민망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고요. 그러면서 아그네스 역할이 내심 좋았어요.”
‘신의 아그네스’는 어린 오지혜에게 꿈의 무대였다. 중앙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졸업 당시 연기로 주목받았기 때문에 내심 아그네스 역할을 기대했다. 그런데 대학 동기인 신애라가 아그네스 역을 맡았다. 마음속에 상처가 났다.
“안 예쁜 여배우 설움을 평생 받아서.(웃음) 제가 데뷔했을 때 엄마가 세상물정 모른다면서 여배우는 향후 100년은 무조건 예뻐야 한다고 하셨어요. 병원에 갔더니 당시 턱 성형비가 400만 원이었어요. 엄마한테 원판 불변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면서 대신 그 돈 주시면 유럽여행 다녀오겠다고 했어요. ‘지혜 씨 연기는 잘하는데, 좀…’ 이런 얘기를 제가 살면서 얼마나 많이 들었겠어요? 한참 후 나이 좀 먹어서 고현정 씨 컴백 드라마였던 ‘봄날’(SBS)에서 재즈 가수로 나왔어요. 별로 연락도 없던 언니가 전화를 하더니 ‘텔레비전에 사람 얼굴이 나오니까 너무 좋더라(웃음)’ 하는 거예요. 나이 육십 된 여배우도 얼굴에 손대잖아요. 죽어라고 버텼더니 이제는 선생님 소리 들으면서 늙어가는 것 같아요. 어영부영하다 보니 벌써 오십이 넘었네. 아그네스는 아니지만 리빙스턴 역도 하고 말이죠.”
미안하단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신의 아그네스’는 아기를 낳은 뒤 잔인하게 살해한 20대 초반의 수녀 아그네스, 그녀의 정신분석을 위해 수녀원으로 온 닥터 리빙스턴과 원장 수녀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연극이다. 1979년 미국의 존 피엘마이어가 쓴 이 작품은 종교적 관점의 기적과 구원에 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이번 공연에서는 기적이라는 주제를 현 사회와 좀 더 연결시켜 바라보고자 했다.
“제가 먼저 발제했지만 연출가도 공감했던 부분이에요. 이 시대의 기적은 학대받던 아이가 세상으로 나와서 상처를 치유하고, 정상적인 관계를 맺고 스스로 행복을 찾아가는 사람으로 커가는 거라고 봐요. 국가와 사회, 가정과 학교가, 시스템이 상처받은 아이를 구원하는 게 기적인 거죠.”
어른들로부터 제대로 된 도움 한 번 받지 못하고 해맑은 얼굴만 남기고 세상을 떠난 아이들이 결국 우리 시대가 낳은 아그네스라고 했다. 초기 연극이 양심과 신, 신앙, 기적에 관한 이야기라면 2018년에 보여주고자 하는 아그네스에는 아동학대와 기성 간의 부조화, 아이들을 구하지 못한 죄스러움을 담았다.
“세월호 사고가 났을 때 많이 힘들었습니다. 연극배우로서도 회의가 왔고요. 시인인 제 친구는 몇날 며칠 고민해 시를 들고 광장에 나가 자신의 시를 시민들에게 읽어주더라고요. 위안을 주는 예술. 그런데 저는 몇날 며칠 대사를 외우고 무대에 서왔지만 사회적인 역할과 동떨어져 있었어요. 배 안에 타고 있던 아이들이 내 딸보다 한두 살 많았어요. 유가족이 거의 다 제 또래였기 때문에, 안 그래도 배우들은 남의 감정에 빨리 이입이 되는 편이잖아요. 죽을 것 같았어요. 언젠가 미안함을 전하고 싶었는데 마침 ‘신의 아그네스’가 저한테 온 거죠.”
열심히 안 뛰면 내 것은 없다
‘신의 아그네스’ 연습으로 한창 바쁜 요즘. 오지혜만의 닥터 리빙스턴을 만들어가고 무르익은 연기자로서 도리를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라다니는 것이 하나 있다. 소위 부모님의 후광을 받고 태어난 사람으로만 보는 날선 시선이다. 나이 먹을 만큼 먹었고 이제 그만할 때쯤 됐는데 유독 오지혜에게만은 가혹해 보인다.
“엄마를 추모하기 위해서 이번 연극을 하는 거잖아요. 누군가 저에게 ‘역할을 유산으로 받았네?’ 하더군요. 데뷔하고 지금까지 들어온 얘기지만요. 아! 내가 정말 무지하게 열심히 안 하면 안 되겠구나. 인생을 몰라서 너무 아이 같다는 생각이 콤플렉스였어요. 그래서 20대 때 배낭 메고 미친 듯이 여행 다녔어요. 큰 자산이었죠. 정말 최고의 선생은 여행이에요. 나중에 여행 책도 써볼까 해요.”
천생 배우인 부모님 밑에서 자란 것 때문에 받은 편견 외에 남들에게 모나게 보인 이유가 있다. 때때로 회자된 오지혜의 소신발언이 문제됐다. 그녀는 이 시대의 약자를 위해 사회 참여를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하다고 느꼈다. 지난 몇 년간 그녀의 사이다 발언에 미디어들이 예민하게 반응하던 때가 있었다. 아버지 오현경은 앞에는 나서지 말라고 했다. 어머니 윤소정은 달랐다.
“어렸을 때도 아빠는 혹시 데모하면 저더러 뒤에 서라고 하셨어요. 엄마는 ‘우리 아버지 故 윤봉춘 감독님께서 말씀하시길 예술가로서 동시대 사람들에게 동시대의 문제를 제시하고 슬픔을 공유시키지 않는 것은 예술가가 아니라고 했다. 지혜 이야기가 맞다’ 하셨어요. 외국은 연예인이나 사회 지도층이 나서서 행동하면 지지하고 응원하는데 우리는 그렇지 않더라고요.”
그녀는 지난 두 정권에서 블랙리스트 문건에 이름이 올랐다. 꽤 오래 라디오 DJ를 했는데 하루아침에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제가 말하는 게 불편하다고 개편도 아닌데 잘렸어요. 처음에는 그런가보다 했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어요. 심한데? 장난이 아닌데? 할 정도로요.”
10년을 블랙리스트에 오른 연예인으로 낙인 찍혀 있다 보니 덕분에 책에 파묻혀 사는 시간이 많았다. 매일이 여행이고 산책이었다. SNS에 글을 쓰고 일상을 정리하는 시간을 지속했다.
이 세상에 없는 엄마에게
“우리 엄마 정말 열심히 일했어요. 제가 그렇게 묶여 있는 동안 저도 도와주셨어요. 여섯 살 때부터 무대에 섰는데 끝까지 한 번도 쉰 적 없이 말이죠. 평생 소녀 가장으로 살았던 게 지겨웠나봐요. 뭐가 급한지 제 책 나오는 거도 못 보고 가버리셨네요. 엄마가 책을 정말 기다렸어요. 원래 계획대로라면 5월에 나오는 거였는데 늦어졌어요.”
장례를 치르고 난 두 달 후 “딸? 책 언제 나와?” 하고 엄마가 그렇게 기다리던 에세이 ‘날씨맑음-오늘도 여행 같은 하루’가 출판됐다. 지금까지 SNS에 적었던 글들을 모아 만든 책. 책 표지를 열고 본문을 채 읽기도 전에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엄마에게’라는 문구 때문에 눈물부터 쏟아냈다. 어디 나가서 쥐어박히고 다니는 딸이었지만 엄마한테는 크나큰 자랑이었다.
“훗날 글 쓰고 살고 싶은데 어쩌다 수필집이 나왔어요. 다음에는 소설도 쓰고 싶고 아직 아무한테도 안 보여줬는데 단편소설도 쓰고 있어요.”
인터뷰를 마치면서 어머니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된 소감을 물었다.
“엄마는 ‘이런 감정으로 대사를 쳤구나’ 혹은 ‘나랑 해석이 다르네’ 하는 부분도 있어요. 연기에 맞고 틀린 건 없잖아요. 보면서 엄마의 해석이 또는 제 해석이 마음에 드는 사람들이 있는 거겠죠. 참 의미 있고 재미있어요. 특히 부모와 같은 직업인에 무대 위에 서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감정이잖아요. 이런 자산을 가지고 태어난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신께 감사드립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에서부터 이 사람은 싫고 좋은 게 분명할 것이며 그 점을 드러내는 데 거리낌이 없으리라는 인상을 준다. TV 밖 현실 속에서 만난 배우 박정수의 첫인상은 어떤 단호함 혹은 자신만의 세계가 확고한 이가 주는 강인함이었다. 얼마 전 드라마 ‘데릴남편 오작두’를 끝낸 그녀는 마침 인터뷰를 한 날 미국으로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학생 시절 청춘스타로 화려한 데뷔, 긴 휴식, 복귀, 그리고 이제는 안정된 중견 배우로 그 이미지를 각인시킨 그녀를 만나 연기자로서의 삶, 묵직한 여정에 대해 물어봤다.
“요즘은 드라마 끝나면 일해야겠다는 생각만 들어요. 젊은 시절에는 드라마 끝나면 어디로 놀러 가야지, 쉬어야지 했는데 이제는 하도 쉬어서 일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요.”
드라마가 끝나면 다음 일을 생각한다는 배우 박정수의 말은 바로 그녀가 워커홀릭이라는 짐작을 하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워커홀릭인 그녀가 지금 미국을 거쳐 캐나다 로키산맥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원래 즐겁게 여행하는 걸 좋아하지만 매우 힘들 때도 여행을 떠난다고 말했다. 뭔가 이상했다. 그녀는 지금 일을 준비해야 할 때인 것 같은데 여행을 준비하고 있으니…. 말하자면 그녀가 힘들다는 의미 같았다.
정상에 도착하기 전, 날이 저물다
그녀의 대학 시절 전공은 경영학과였다. 입학은 제약학과로 했다. 그리고 정작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과목은 미술이었다. 지금도 가방과 구두를 유독 좋아하는 그녀는 미술을 계속했다면 패션 디자이너가 됐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녀가 선택한 삶의 지점들이 여러 갈래인 이유는 가족 때문이다. 교육자 집안의 아버지는 딸이 미술을 하는 걸 반대했고 그녀는 현실과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대학교 재학 시절 탤런트 시험을 봤는데 합격을 하면서 신데렐라 같은 연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화려한 연예계는 그녀에게 보람보다는 환멸을 더 줬던 것 같다. 탁월한 미모의 연예계 총아였던 그녀가 갑작스러운 은퇴를 결심했기 때문이다.
“내 뜻과는 달리 연기자 생활을 시작해서, 남들보다 빨리 자리를 잡았어요. 그런데 주인공 몇 번 하다가 이 생활이 싫어서 시집을 갔죠. 그러다 15년 후 서른아홉 살에 다시 밑바닥에서부터 연기를 시작했어요.”
불혹을 앞두고 복귀한 연예계에서 밑바닥이라 할 수 있는 엑스트라 연기까지 하면서, 그녀는 악착같이 돈을 벌었다. 혼자서 딸 둘을 제대로 키워야 한다는 의무감이 힘이 됐을 것이다. 그렇게 수십 년을 살았다. 그리고 예순여섯의 나이, 지금 그녀는 기자에게 연기자 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회의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산을 올라가고 있는 중인데… 그런데 정상에 도착하기 전에 날이 저물었어요. 다시 내려와야 하는 거야. 그래서 길을 잃은 거예요. 지금 내 마음이 딱 그래. 딜레마죠. 이걸 계속해야 해? 이 길을 가야 할까? 너무 힘드니까 고민이 돼요.”
또 다른 자신 마주하기
그녀는 자신이 이런 고민에 빠졌다는 사실이 당혹스러워 보였다. 재작년까지는 이런 고민을 해본 적이 없다고도 말했다. 연기자의 길은 당연히 자신의 길이라 확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진실하면 무조건 통한다는 생각으로 살아왔어요. 그런데 작년에 나이 든 것을 처음 느꼈죠. 나이를 먹으니 도태되는구나 하고 현실을 직시하게 됐어요. 그리고 나를 돌아봤어요. 너무 행운아였더라고. 정말 운이 좋았던 거죠. 그런데 그 운이 다한 거예요. 운이 다했는데, 이걸 밀고 나갈 힘이 있을까? 몸은 늙었고 늙다 보니 마음도 작아지고 겁이 나더라고요.”
물론 그렇다고 그녀가 은퇴 선언을 하겠다는 건 아니다. 외려 정반대로, 그녀는 연기 외의 다른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일을 언제까지, 어디까지 감수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여전히 둥둥 떠다니며 그녀를 괴롭혔다. 말하자면 그녀의 딜레마는 자신의 업에 대한 확신과 함께, 그 업의 한계를 잔인하게 체감하면서 시작된 듯했다.
애초에 기자는 적절한 시점에 그녀에게 ‘행복하냐’고 물어보려 했는데, 이런 상황에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질문이 되어버렸다. 잠시 동안 그녀가 겪은 삶의 굴곡을 생각해봤다. 그녀는 정상에 올라갔다가 길이 안 보여서 내려왔고, 다시 길을 올라가다가 또 길을 잃은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는 지금의 박정수는, 어쩌면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또 다른 자신을 마주한 상황이 아닐까?
바닥을 치고 올라오기 위해 더 가라앉다
“저는 제 아집이 너무 셌기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생각해요. 운 좋게 이 자리까지 왔지만 좀 더 열린 마음이었으면 오늘보다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내가 그런 걸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독선이 강했지, 실패가 없었으니까. 뒤를 돌아볼 시간이 전혀 없었던 거예요.”
그녀의 자기고백은 그녀가 하고 있는 고민의 깊이를 느끼게 해줬다. 동시에 그녀가 그렇게까지 자신을 진단할 수 있을 정도로 강인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해줬다. 모든 편견을 다 내려놓고 자신을 알아챈 그녀는 자신이 늪에 빠져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그 늪은 고민에 대한 해답을 줄 수 있는 늪이기도 했다.
“늪은 허우적거리면 더 빠져들어가죠. 그러니까 내가 어디까지 빠질 수 있는지를 확인한 다음, 바닥을 치고 나오는 게 좋겠다 싶어요. 끝까지 제가 감당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더 깊숙하게 자신을 침잠시켜 답을 구하겠다는 다짐은 자아에 대한 자신감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브라운관 너머에서 살아가는 여자 박정수가 더 궁금해졌다.
절제하는 배우가 갖게 된 연륜
“누군가 제게 그렇게 말한 적이 있어요. 너는 사막에 떨어지면 전갈을 씹어먹고서라도 살아남을 사람이라고.(웃음)”
그 말처럼, 겉으로 보이는 박정수는 독하다. 너무 이른 나이에 경험한 연예계, 그리고 홀로 키워야 했던 두 딸.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내기에는 생활인으로서 책임져야 할 것들이 많았다. 그 책임감은 그녀의 연기에도 영향을 미쳤다.
“저는 연기를 해도 어디까지는 가는데 선을 넘지는 않아요. 그런데 이건 배우로선 나쁜 점이에요. 배우라면 갖고 있지 말아야 할 감수성을 갖고 있는 거니까요. 미쳐야 미친다지만 미치도록 미치지는 않는 거죠. 감정을 절제하기 위해 다 내보내지 못하고 늘 참아요. 그게 아버지 영향이 크지 않았나 싶어요. 아버지도 교육자, 외할아버지도 교육자인 집안이었으니까요.”
그녀가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려 하고 이성적으로 행동하려 하는 것은 교육자 집안에서 자랐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늘 합리적인 선택을 하려 했다. 그런데 사실 이런 행동과 성격은 연기자보다는 CEO에 더 어울리는 자질이다.
“그래서 배우로 성공 못했나봐.(웃음) 기획을 너무 잘한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거든요. 그러다가도 ‘박정수, 네가 하는 거나 잘해’ 그렇게 스스로 말하죠.”
그렇게 ‘하는 거나 잘한’ 박정수가 얻은 것은 연기 연륜이다. 선을 넘지 않으면서도 남들이 보기에는 선을 넘은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능력. 젊었을 때는 상황을 너무 객관적으로 보며 몰입하지 못하는 감정이 단점이었지만 지금은 큰 걸림돌이 아닌 이유다.
너무 하고 싶은 영화
나이 들어서도 잃고 싶지 않은 것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녀의 대답은 간단했다.
“내 자존감, 그리고 총명함이에요. 옛날에는 스마트하다는 말 참 많이 들었는데… 나이 들어가면서 총기를 많이 잃었죠.”
그녀 삶의 낙은 여행과 여행에 관한 독서, 그리고 영화 감상이다.
“여행은 머리와 몸을 싹 비워줘요. 그곳의 문화에 젖어서 사는 거죠. 연기자로서도 도움이 돼요. 제가 워낙 새로운 곳의 새로운 문화를 접하는 걸 좋아하는데… 아마 호기심이 많아서겠죠.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은 없어요. 사람을 만나기 싫은 것은 사람에게 치여서, 부대끼는 게 싫어서 그런 것이지, 누구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좋아해요.”
그러고 보니 인터뷰를 하면서 그녀가 영화를 너무 좋아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넌지시 영화에 출연하고 싶은 생각은 없냐고 물었다.
“정말 하고 싶죠. 그런데 예전에 영화계를 모르던 시절에 개런티를 많이 받고 출연한 적이 있어요. 당시엔 그 개런티가 파격적이었나봐요. 그때는 내가 인기가 좀 있었던 때니까. 그런데 그다음부터 영화계에서 ‘박정수는 비싼 배우’로 낙인을 찍었어요. 그리고 영화계는 사단이 형성되어 있어 늘 같이 하던 사람만 세트업되더라고요. 이게 굉장히 큰 장벽이구나, 진작에 하자고 할 때 할걸 너무 배짱을 부렸나 했죠.(웃음)”
시니어 감정을 표현하는 연기 하고파
그녀에게는 아직 여자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고 있을 때 해보고자 하는 연기 욕심이 있다.
“요즘은 과거에 비해 나이 드신 분들이 감정을 교환하는 게 복잡해졌을거예요. 사랑과 미움 등의 감정도 이제는 심플하지 않잖아요? 그런 부분을 잘 살려낸 영화나 드라마가 있다면 해보고 싶어요.”
그녀의 말은 시간과 함께 시대를 자신의 연기 속에 녹여내고 싶은 여배우들 모두의 소망이기도 하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TV 속에 나오는 나이 든 여자를 단순하게 ‘어머니’의 이미지로만 보고 싶어 했다. 그러나 우리 삶에서 만나는 나이 든 여자는 모두 ‘어머니’로만 존재할까.
그녀가 새삼 여성스럽게 느껴진 건 이 지점에서였다. 다소 거침없어 보이는 면모는 삶의 부침을 겪다 보니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그녀만의 방어기제가 아닐까.
마음의 평정을 찾은 사람이 멋있다
다시 그녀가 겪고 있는 딜레마로 얘기가 돌아왔다. 삶의 좌표를 안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박정수는 그걸 알기 때문에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내면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 ‘결국 뭐든지 내가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말을 듣자 그녀가 강인한 사람이지만 외로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우로서는 만족스러운데… 극복해야죠. 사실 이런 딜레마는 배우가 아니라 다른 누구도 겪는 거니까요. 그걸 딛고 일어서지 못하면 패배자가 되는 건데, 어떻게든 딛고 일어서야죠. 다만 얼마만큼 시간이 걸릴지, 어떻게 해야 할지가 문제죠.”
그녀는 나이 들어서도 멋있는 사람의 기준으로 ‘마음의 평정’을 꼽았다. 그렇다면 현재 마음이 평온하지 않은 그녀는 자신의 기준에서 멋있는 사람일 수가 없기에, 어떻게든 답을 찾아내려 할 것이다. 그 순간 그녀에게 준비된 질문 중 폐기될 뻔한 질문을 꺼낼 수 있었다. ‘10년 후의 박정수는 어떤 사람일지’에 대한 물음이었다.
“질문이 너무 슬프게 만드네.(웃음) 이걸 다시 뛰어넘고 더 행복해질 수도 있고…. 저도 모르죠. 모르겠지만, 좌절하고만 있을 것 같지는 않아요.”
마지막 대답은 그 어떤 말보다 그녀다웠다. 모든 것을 잃더라도 자신만은 절대 잃지 않을 것이라는 단호한 다짐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녀가 찾아낼 길이 어떤 모습이든, 그것은 자신이 선택하고 납득한 길일 것이다. 배우 박정수의 새로운 길을 믿고 지켜볼 가치가 있는 이유다.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그녀의 핸드폰 너머로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그녀는 슬럼프에 빠진 배우의 모습에서 바삭한 미소의 여자로 변신했다. 역시 ‘배우 박정수답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그녀의 표정에는 스스럼없고 당당한, 그렇지만 자존감을 잃지 않으려는 자기애가 스며들듯 젖어 있었다.
만나고 보니 꽤나 독특한 삶이다. 마치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듯 시간은 하염없이 흘렀다. 완벽하게 전문적이고 색다른 인생담. 전생과 현생을 말하는 듯 세대를 넘나드는 사건 전개. “내가 무슨 인터뷰할 게 있어”로 시작했지만 누구보다 특별하고 치열한 역사 드라마를 고스란히 감상한 느낌이랄까? ‘선데이서울’ 전 방송사 출입기자이자 MBC 전 복싱 해설위원, 등단 1년 차 신인 소설가 한보영(韓寶榮·82) 작가를 만났다. 대한민국 1960~70년대를 주름잡았던 별들의 야사와 링 위의 전쟁이 정신없이 쏟아져 내렸다.
한보영 작가를 만난 곳은 서울시 중구 서울신문 사옥 내 한 커피숍. 세련된 모습으로 단장한 서울 중심부이지만 옛 시절부터 발을 디뎌온 기자 선배의 눈에만 보이는 아지트가 숨어 있다고 했다.
“한국체육언론인회가 이 근방에 있어요. 체육기자 출신 모임은 여기에서 하거든. 전 직장인 서울신문 사우회도 여기에 있고, 자주 가는 기원도 이곳이니까 벗어나지 못해요. 아무래도 내가 가는 단골집도 많고요. 교통편도 좋고 나는 광화문이 편해요.”
한보영 작가는 매일 아침 일찍 배낭 하나 메고 되도록 빨리 집을 나선다.
“생활에도 리듬이 있고 재미가 있어야 하는데 밋밋한 건 딱 질색이거든. 그러니 집에만 있을 수가 없는 거예요.”
시간을 벌어 글을 쓰고 오랜 지인들 만나 얘기하고 또 짬을 내서 글을 쓴다. 한보영 작가는 작년 4월 손자와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단편소설 ‘너와 나의 끈’으로 월간 문예지 ‘조선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이후 꾸준하게 단편소설을 문예지에 게재하면서 소설가로서 새로운 삶을 그려가는 중이다.
“열심히 쓰고 있어요. 작년에 4편을 발표했습니다. 제가 등단했던 ‘조선문학’ 6월호에 작품 하나가 나왔고. 7월은 한국소설가협회에서 나오는 월간지 ‘한국소설’에 신작이 나옵니다. 올해 말까지 한 5개 정도 쓰고 내년 초에 지금까지 썼던 단편소설을 묶어서 단행본으로 내려고 해요.”
하루도 거르지 않고 틈틈이 글을 쓰고 있는 신참내기 소설가. 참 안타까운 현실은 이렇게 정성들여 월간 문예지에 게재를 해도 원고료 주는 곳이 많지 않다. 돈을 염두에 두고 이 일을 했다간 한 글자도 못 쓸 것이 빤하니 금전적 보상은 단념하고 작품활동에만 전념한다고 했다.
“나이가 들어가지고 호흡을 고르면서 써야 돼, 쉬엄쉬엄. 그 대신 뭐 시간이 꼭 정해진 건 아니지만 조금씩 쓰다가 나중에 싹 지워버리고 다시 쓰고 그럽니다. 예전에 한 번은 컴퓨터 조작을 잘못해서 다 없어지는 바람에 처음부터 새로 썼다고. 얼마 전에 발표를 했는데 디테일한 점은 좀 모자라는 대신 구성은 오히려 마음에 들더라고요.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겪는 거죠. 글은 쓸 때마다 기분이 제일 중요합니다.”
뭐든 마음에 들면 들이대!
전라북도 남원 출신으로 전주에서 고교 시절을 보낸 한보영 작가는 배구선수로 활약했다. 문제는 한보영 작가가 운동에만 몰두하는 성격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관심 분야가 생기면 일단 발부터 담가보기를 반복했다.
“배구부에 있을 때 트럼펫에 관심이 생겨서 밴드부에 들어갔더니 한 선생님이 ‘운동하는 애가 왜 여기에 있냐’며 저를 쫓아냈습니다. 문예부에도 들어갔었어요. 글재주가 있었으니까요. 교지 만들 때 일조했습니다. 대부분 운동부라고 하면 수업시간에 안 들어가잖아요. 저도 그랬어요. 중학교 3학년 때 교실에 거의 들어가지 않았어요. 운동만 해서 그런지 어느 순간 배구가 싫었습니다.”
배구도 곧잘 해 서울 소재 대학에서 배구선수로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으나 거절하고 입시 준비를 하지 않았다. 그러다 ‘내가 대학교를 안 가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입학한 곳이 바로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였다.
“글을 제대로 써봐야겠다는 생각에 들어갔습니다. 김동리 선생과 서정주 선생이 저희 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어요.”
한보영 작가는 특히 김동리 교수와 가깝게 지냈는데 하루는 자신이 쓴 습작을 봐주십사 부탁했다. ‘선데이서울’ 기자도 MBC 복싱 해설위원도 아닌 어린 나이에 소설가로 데뷔할 절호의 기회였을지도 모를 중요한 순간이었다.
“한창때 실존주의 이론에 빠져 있었어요. 젊은 패기에 선생님이 해주는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때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김동리 선생이 저와 별 상의 없이 습작에 관한 심사평을 ‘현대문학’에 내신 거예요. 문장과 구성은 다 좋은데 주제와 내용이 마음에 안 드신다고 하셨더라고요. 시골 동네에서 벌어지는 근친상간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김동리 선생 취향과 너무나 동떨어졌던 것이죠. 화가 나서 찾아갔더니 본인과 주제가 잘 맞지 않으니 다른 소설가를 소개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그 말에 충격받아서 두 번 다시는 소설 안 쓰겠다고 하고 집어치워버렸습니다. 그때는 어깨에 왜 그렇게 힘이 많이 들어갔는지.(웃음)”
당시에 만약 김동리 선생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더라면 한보영 작가의 삶은 어떻게 전개가 됐을까? 대작을 쓰는 작가로 거듭났을까? 소설에 대한 희망을 접고 선택한 한보영 작가의 첫 번째 직업은 선생님이었다. 경기도 포천의 한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하지만 1년 만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눈앞에 펼쳐진 자연이 사무치도록 좋았지만 몇 개월 지나자 공포감이 엄습했다. 눈이 내렸다 하면 허리까지 차올랐다. 월급은 보리와 쌀 반 가마니. 그나마 현찰로 지급되는 돈은 학교운영회에서 거친 회비를 조금 얻어 쓰는 정도였다. 하숙할 곳도 마땅치 않았다. 힘든 시간을 좀 이겨내나 싶었을 때 영국 민요 ‘오 데니 보이’를 여학생들에게 가르치다 교장에게 발각됐다. 노래 속에 사랑 얘기가 들어 있다는 게 화근이었다. 왈가왈부하다 결국 사표를 내고 서울로 올라왔다.
방송사 출입기자로 방송가를 누비다
“나는 잡지 출신이야. 신문사 출신이라는 말 잘 안 해.”
‘선데이서울’이 ‘서울신문’에서 나오는 주간지였고, 복싱 해설위원으로 모습을 바꿀 때도 ‘서울신문’에 적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인터넷으로 인물검색을 하면 전 신문인으로 뜬다. 하지만 한보영 작가는 우리나라 초창기 잡지를 꿰고 있는 잡지사 기자 출신이 맞다. 초등학교 교사직을 내려놓고 들어간 곳이 월간 ‘여성계’였다. 피란 시절 대구에서 창간했던 월간 ‘여성계’를 시작으로 ‘교육평론’이라는 잡지사에서도 일했다. 책이 나오는 달만 월급이 나오는 상황인지라 돈도 없고, 잘 챙겨먹지 못해 급기야 위장병을 달고 살았다.
“김동리 선생이랑 싸우고 소설도 안 써지니까 위장병에 걸렸던 것 같아요.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밖에서 밥을 사 먹다 보니 나아질 기색이 없었어요. 결국 위장병이 있는 상태로 군대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규칙적인 생활을 하니 몸이 좋아지더라고요. 건강을 되찾고 난 다음 군에 있는 동안 프리랜서로 글을 꽤 썼습니다. 다른 월급쟁이들보다 낫다 싶을 정도였죠.”
제대 후에는 당시 인기 잡지였던 ‘아리랑’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방송사 출입 기자로서의 발판을 마련했다. 요즘으로 말하면 연예부나 문화부 기자로 방송사에 드나드는 기자를 말한다. 예전에는 방송사마다 탤런트와 개그맨, 성우를 매년 정기적으로 뽑았다. 특히 탤런트의 경우 소속 방송사의 드라마와 프로그램에만 등장할 수 있었다. 방송사 소속 아나운서와 같다고 보면 된다. 심은하, 장동건을 보려면 MBC를 찾아가야 했던 시절이 있다. 방송사 출입기자는 연기자와의 끈끈한 인맥과 유대감은 물론이고 방송사 관계자와의 관계도 신경 써야 하는 힘든 분야 중 하나였다.
“‘아리랑’은 글씨를 세로가 아닌 가로로 표기한 최초의 잡지였습니다. 연예인 주변 이야기, 스포츠, 만화 등 다양한 콘텐츠를 담아낸 세련된 책이었죠. ‘아리랑’에 있을 때 배우 신성일과도 친해졌습니다. 그때는 방송사 소속 탤런트들이 조금 딱했습니다. 기획사를 차리는 게 꿈이었는데 잡지 사업에 발을 들이고 말았습니다. 뜻대로 안됐죠.”
‘아리랑’에 있는 동안 음악 전문지를 만들어볼 생각에 ‘청춘’이라는 소규모 잡지를 인수했다. 젊은 세대를 위한 음악 잡지로 만들려고 했는데 1970년대 초 유신시대가 도래해 뜻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두 달여 공을 들였지만 사회 상황과 잡지 성향이 맞지 않아 사업을 접어야만 했다. 큰 손해를 봤지만 되돌릴 수 없었다.
“남들처럼 술 먹고 울분을 토하고 그런 성격이 또 제가 못됩니다. 극장에 가서 가만히 앉아 있었어요. 그렇게 실업자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산업경제신문’에서 연예부 기자로 오란 연락을 받았습니다. 물불 가릴 것이 없었어요. 사업이 제대로 되지 않아 퇴직금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나왔거든요. 그곳에 있다가 서울시청에 납품하는 ‘주간 시민’으로 옮겼고 그다음이 ‘서울신문’ 대표 매거진인 ‘선데이서울’이었죠.”
한보영 작가가 방송사 출입기자로서 활약하고 성과를 낸 매체는 ‘선데이서울’이다. 본격적인 방송계 출입기자 삶을 산 시간이 이때였다고도 자평했다.
“기자는 많은데 방송사를 제대로 찾아다니는 기자가 의외로 적었습니다. ‘선데이서울’에 있을 때는 정말 탤런트, 연예인들 일에 제가 많이 좌지우지했던 것 같습니다.”
이름만 대면 쉽게 알 만한 연예인 사생활에 대해서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과거 연예사를 들춰내는 종합편성채널 TV 프로그램 출연이 잦았다. 한 여성 탤런트는 한보영 작가에게 전화를 걸어서 “선생님, 그런 방송에 안 나왔으면 좋겠어요”라면서 넌지시 말을 건네기도 했단다.
“요새는 방송 출연 제의가 들어오면 저보다 순발력 있는 다른 사람을 구해보라며 거절해요. 누구 부탁 때문이 아니고, 그게 좀 더 방송이 살 것 같아서죠.”
복싱 해설위원으로 다른 삶을 살다
방송국 출입기자로서 일간지, 주간지, 월간지 등을 두루 섭렵하며 승승장구하던 그가 어쩌다 돌연 스포츠 분야로 눈을 돌려 복싱 해설위원으로도 이름을 알리게 됐을까.
“1972년 3월 ‘선데이서울’에 방송사 출입기자로 들어가 오랜 시간 연예계 기사를 썼습니다. ‘서울신문’에서 ‘주간스포츠’를 창간해 왔다 갔다 하면서 복싱 관련 기사를 쓰다가 1980년대 초에 ‘주간스포츠’로 완전히 옮겨가 복싱 담당기자가 됐습니다. 당시 복싱 인기가 정말 대단했어요. 그런데 복싱 담당기자가 자꾸 나가버리니까 하루는 국장이 불러서 복싱을 맡으라니 어쩌겠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영화배우와 탤런트를 위한 기획사를 차리는 것과 방송 극본을 쓰는 것이 나름의 목표였다. 스포츠 분야로 가라는 말에 회사를 관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지만 국장의 선택에 따르기로 했다.
“어차피 같은 회사니까 복싱 담당을 하다가 연예부 쪽에서 일하라 하면 그쪽으로 가서 취재했죠. 나중에는 스포츠 쪽에 남기로 했습니다. MBC와 해설위원 이야기도 된 상태였고요.”
한국 복싱 전성기, 최고의 명승부에는 늘 MBC 복싱 해설위원으로 활약하던 한보영 작가의 예리한 분석이 뒤따랐다. 방송사 출입기자에서 복싱 담당기자, 이를 바탕으로 복싱 해설위원으로 살아온 삶. 기간이 좀 길어서 그렇지 듣고 보니 납득이 가는 인과관계가 있다. 새로운 격변이 아닌 삶에 순응하고 적극적으로 따른 결과였다.
“나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뭐든지 억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니까,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대로 조금은 그렇게 순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의 최전성기 복싱 해설을 했다는 것도 행복한 일입니다. 남들 은퇴하는 55세에 종이매체와 이별하고 MBC와 해설위원으로 정식 계약을 맺었습니다. 70에는 고희기념 출판기념회를 열었고요.”
복싱의 인기가 사그라지면서 방송 기회도 점점 줄어들었다. 2003년 MBC와계약을 만료하고 MBC스포츠로 옮겨 2007년까지 간간이 복싱 해설을 했다.
“그런데 지금도 저는 복싱 해설을 합니다. 어디서 하는 줄 아세요? 유튜브에서요. 오픈게임부터 끝까지 제가 도맡아서 합니다. 훨씬 힘든 대신 신바람은 납니다. 복싱 해설도 내 인생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일부분이고 제가 좋아하는 일이죠. 1년 차 소설가이면서 현역 복싱 해설위원 입니다.”
한참 복싱과 관련한 얘기를 하다가 현실로 돌아오듯 소설 이야기로 돌아온다. 최근 집필한 ‘친부(親父)의 꿈’은 어디엔가 살아 있을 전설의 파이터 김득구 아들을 상상하며 썼다고 했다.
“김득구 아들이 지금 살아 있으면 34세쯤 됐을 거예요. 그런데 왜 복싱에 데뷔하느냐면 말이지….”
이야기 보따리가 온몸 구석구석 한아름이다. 한 번도 멈추지 않고 3시간 꼬박 앉아서 참 많은 얘기를 끄집어낸다. 아무리 봐도 적당한 시기에 자기 진로를 잘 선택했다. 지금이 딱 소설 쓰기 좋은 나이라고나 할까? 대학 시절 김동리 선생과의 일화는 새삼 한보영 작가 인생의 중대한 복선이 된 것만 같다. 그 후 방송계와 복싱계를 누비며 쌓아놓은 기억은 소설가 한보영에게 좋은 자양분이 됐기 때문이다. 돌고 돌아 원래 바라던 제자리로 돌아오고야 말았다. 오늘도 어딘가에서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상념에 잠겨 있을 한보영 작가에게 한마디 건네고 싶다. 언제나 브라보 유어 라이프.
연극 ‘돌아온다’가 초연 3년 만에 대학로 무대로 돌아왔다. 미투의 칼바람이 휩쓸어버린 이후 연극계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관객의 발길이 끊어지지는 않을까 걱정도 됐다. 연극 ‘돌아온다’의 재공연 소식을 듣고 찾은 혜화동은 조금이나마 다행스런 모습이다. 매진 행진을 이어가며 그리움과 먹먹함으로 수놓았던 연극 ‘돌아온다’. 초연에 이어 색감 따뜻한 영화로 찾아왔다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돌아온 작품 ‘돌아온다’를 잠시 좀 들먹여보도록 하자.
2015년 10월, 지인이 괜찮은 작품이 무대에 올랐으니 같이 관람하자며 혜화동으로 불러냈다. 연극을 보는 나름의 방식이다. 누가 같이 보자고 연락을 해오거나, 공연을 한다며 보러 오라고 하면 본다. 아주 수동적인 자세로 객석에 앉게 되는 일이 부지기수. 그런데 공연장에 끌려들어갔다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 팬이 돼서 나온 작품이 바로 극단 필통의 ‘돌아온다’(선욱현 작/정범철 연출)였다. 연극 ‘돌아온다’는 당시 기대 이상의 성과를 보이며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해 서울연극제 우수상과 연출상을 휩쓸며 작품성 또한 인정받았다.
무대의 주 배경인 막걸리집에는 ‘여기서 막걸리를 마시면 그리운 사람이 돌아온다’라고 쓰인 표구가 걸려 있다. 등장인물 모두 그리움과 기다림이라는 정서를 안고 이곳을 찾는다. 누군가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 잔 또 한 잔을 기울인다. 하지만 막걸리집을 자주 드나드는 사람들의 기다림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운 상대가 돌아오는 방식은 다들 다르지만 결국 어떤 방식으로든 돌아와 서로에게 안긴다.
좋은 작품은 역시 생명력도 강하다
초연을 본 허철 영화감독은 선욱현 작가에게 이 연극을 영화로 만들겠다고 제안했다. 배우 김수로 또한 자신이 연극으로 제작하겠다고 러브콜을 보냈다. 2015년 말 연극 초연에 이어 영화로 제작된 이 작품은 2017년 제41회 몬트리올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서 금상을 받으며 영화로도 성공을 거뒀다. 올봄 배우 김수로의 제안까지 성사돼 재공연에 이르렀다. 초연이 끝남과 동시에 영화 작업, 개봉, 연극 재공연까지 쉼 없이 이어온 작품이 ‘돌아온다’이다.
영화 제작 전 허철 감독은 선욱현 작가에게 “연극에 나온 배우들을 많이 기용하고 연극의 분위기를 최대한 살려 독립영화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선 작가는 “상업영화로 만들게 되면 판권료를 훨씬 많이 받을지도 모르겠지만 좋은 감독을 만나 그 순수성이 영화로 잘 전달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흔쾌히 수락했다. 영화라는 장치에 연극의 느낌과 원형을 그대로 살린 작품이 있었던가? 영화 ‘돌아온다’는 사실적인 색체가 강하면서도 연극과 영화가 스리슬쩍 교차하는 실험영화이기도 했다.
재공연과 관련해 배우 김수로가 제작에 나서면서 작품이 혹시 변색되는 것은 아니냐는 목소리도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영화와 TV에서 보여준 김수로의 이미지가 한몫했다. 배우 김수로가 제작을 주도한 재공연. 극단도 달라졌고 극장 또한 달라졌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연극 역시나 좋다. 초연에 이어 다시 연출을 맡은 정범철 연출가의 뚝심이 빛을 발했다. 막걸리집 주인으로 등장한 대학로의 숨은 연기파 정상훈과 영화배우 강성진이 초연 연기자인 윤상호의 빈자리를 꽉 채웠다. 이전보다 배역을 줄여 무대의 몰입도도 높였다. 스크린이 더 익숙한 김수로와 강성진이 어색했다면 그건 편견일 뿐이다. 특히 김수로는 좋은 작품에 선뜻 손 내밀어 제작에 나섰고 주인공 아닌 배역을 맡아 최선을 다했다. 박수를 쳐줘도 모자라다.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이 만들어낸 이야기
‘돌아온다’의 원작자이자 강원도립극단 예술감독인 선욱현 작가는 이 작품을 왜 썼냐는 질문에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라고 입을 뗐다.
“어느 순간 제가 아버지한테 너무 불효를 하고 살아왔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게 언제인지 아세요? 제가 도립극단 예술감독으로 들어오고 나서입니다. 월급 받는 직장인이 되니까 아버지가 너무 좋아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글을 쓰는 동안 제 가슴에 문학적 화두로 그리움과 기다림이 자리 잡았습니다. 실향민도 아니고 시련을 겪은 적도 없는데 왜 이렇게 그리워할까. 지금도 못 풀었어요.”
공연을 보면서 관객들보다 더 많이 울었다고 고백하는 선 작가다.
재공연 관람 이후 작품 ‘돌아온다’ 전편을 다 본 듯 후련하다. 초연 때 인연이 영화로도 이어져 우리 잡지에 소개한 바 있다. 재공연을 끝으로 마무리 기사를 쓰고 있자니 느낌이 남다르다. 마침 공연을 보던 날 선욱현 작가뿐만 아니라 약속이라도 한 듯 영화팀 배우와 제작진까지 모였다. 제목 때문일까? 돌아온다. 모두 돌아와 만났으니 말이다.
연극이나 문학을 조금만 공부해도 쉽게 알 수 있는 이름, 안톤 체호프(Анто́н Па́влович Че́хов, 1860∼1904)와 외젠 이오네스코(Eugène Ionesco, 1909∼1994). 이들은 사실주의극과 부조리극의 대가이다. 생몰연도를 보아 일치하는 부분이 없는데 산책을 하다니. 연극 제목이 희한하다. 체호프와 이오네스코가 배역으로 등장하는 창작극? 각자 다른 시대를 살다 간 작가 이름이 함께 거론되는 연극의 제목이 궁금해 공연장 문을 두드렸다.
물과 기름 같은 연극, 해설로 만나다
한국 연극의 메카 대학로. 매일 밤 150여 개의 극장에서는 뮤지컬을 비롯해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공연이 무대에 오른다. 그 화려한 틈새에서 연극 ‘체홉과 이오네스코의 산책’이 공연됐다. 체호프와 이오네스코라니. 고리타분한 교과서 속 인물을 누가 소환했을까. 원로 배우 권성덕이 고문으로 있는 동양레퍼토리다. 신구세대 연극인이 조화를 이룬 극단으로 노경식 작가의 ‘반민특위’와 ‘두 영웅’ 등 역사의 진실과 마주하는 묵직한 연극으로 관객을 만나왔다. 무거운 주제에서 벗어나 해설을 통해 고전 연극을 만나보자는 취지에서 이번 무대를 준비했다. 체호프의 각 연극이 시작하기 전에 해설자가 무대에 나와 이야기를 해주는 방식이다. ‘청혼’과 이오네스코의 ‘대머리 여가수’를 중견 연극인의 해설을 곁들여 무대에 올렸다. 고전의 딱딱함과 무게를 살짝 걷어내고 누구든지 이해할 수 있는 연극으로 말이다. 다소 어려울 수 있는 이 연극을 관객들은 보고 웃어댄다. 관객의 마음으로 풀어준 해설이 친밀하게 공연을 감상할 수 있도록 윤활유 역할을 해주었다.
‘청혼’, 고집불통 노처녀 시집은 갈 수 있을까?
안톤 체호프의 연극은 매년 크고 작은 무대에서 꾸준히 공연되고 있다. 연극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그의 4대 장막인 ‘갈매기’나 ‘벚꽃동산’, ‘세자매’와 ‘바냐아저씨’는 풍월로라도 듣지 않았을까? 러시아 사실주의 연극을 대표하는 안톤 체호프. 그의 직업은 사실 의사였다. 집안 사정이 어려웠던 탓에 의과대학 시절 문학잡지에 단편과 수필을 기고해 돈을 벌어 가족들을 보살폈다고 한다. 대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신인작가로 이미 이름을 알렸다. 러시아의 파란만장한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장막을 쓰기 전 체호프는 단편 희극을 쓰기도 했는데 그중 하나가 ‘청혼’(1889)이다.
‘청혼’은 지병이 있는 데다 뚱뚱하고 소심하기까지 한 젊은 지주 로모프가 이웃의 지주 추푸코프의 노처녀 딸인 나탈리아에게 청혼을 하러 오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추푸코프는 로모프가 혹시나 돈을 꾸러 온 것이 아닌지 의심하며 경계하지만 딸에게 청혼을 하러 왔다는 말에 기뻐한다. 나탈리아 또한 결혼할 생각에 기뻐서 로모프를 만나지만 토지사유권 주장을 하면서 언쟁을 한다. 이 와중에 지병이 있던 로모프는 쓰러졌다 극적으로 되살아나지만 또 다른 언쟁에 부딪히며 해피엔딩인지 아닌지 모를 결말로 끝을 맺는다.
‘청혼’은 동양대학교 연극영화과 출신 젊은 배우들과 중견 연극배우의 조합이 극의 재미를 끌어올려줬다. 특히 25세 노처녀를 연기한 60대 연기자 장연익의 소녀 같은 연기가 압권. 영화나 드라마가 해결할 수 없는 연극 최고의 판타지는 ‘배역’은 있어도 배우 나이의 경계가 없다는 점이다.
아무말대잔치 흠뻑 즐겨라 ‘대머리 여가수’
안톤 체호프의 연극이 사실적인 상황과 이야기 전개로 이어졌다면, 뒤이어 공연된 이오네스코의 초기작 ‘대머리 여가수’(1950)는 배우의 등장부터 파격적이다. 남녀 배역 모두 남자 배우가 연기했다. 여자 배역의 남자 배우는 수염을 덥수룩하게 붙이고 진하게 화장을 했다. 남자 배역은 수염 없이 깔끔하게 등장해 소극적인 자세로 사건에 개입한다. ‘대머리 여가수’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황 전개와 인물 구성, 역할 파괴로 왜 이런 연극을 만들었나 하는 의문을 갖도록 한다.
‘대머리 여가수’를 번역한 순천향대학교의 오세곤 교수는 극의 이해를 도우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오네스코가 처음 극작을 하면서 집착했던 문제는 인간 언어의 부조리함이었다. 인간은 자신의 언어를 합리적이라 믿고 문화의 축적과 의사소통의 도구로 삼지만 실제는 달랐다. 대단히 비논리적이고 불합리해 원초적으로 소통이 불가능한 오해의 연속일 뿐이며, 거기서 비롯된 언어의 횡포가 인간들을 핍박하고 있다.”
부조리극의 태동과 의미를 알면 쉽게 이해된다. 부조리극은 1차, 2차 세계대전 이후 1950년대부터 60년대 초반까지 프랑스를 중심으로 공연된 극의 한 형태다. 다시 말하면 전쟁을 겪은 이들이 표출해낸 예술이다. 전쟁 이후 세상은 부조리 그 자체. 극 속에서도 이야기는 물처럼 흐르지 않고 아무 말이 튀어나와도 이해가 강요된다. 논리의 허무 속에서 부조리극이라는 결과물을 얻어낸 것. 부조리극의 대표작인 이오네스코의 ‘대머리 여가수’ 또한 여전히 매력적인 희곡으로 손꼽히며 다양한 방식으로 전 세계에서 공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