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에서 연기하다 죽고 싶다." 배우 이순재가 한 말이다. 이순재는 노년의 나이에도 무대 위에 올라 연기를 펼친다. 그와 같이 배우들은 드라마나 영화로 유명해지더라도 무대를 잊지 못해 돌아온다. 최근 개막을 했거나 앞둔 작품들을 보면 연기력을 인정받은 중장년 배우들이 출연해 눈길을 끈다. 추워지는 날씨에 문화생활을 즐기기 좋은 작품이 될 것으로 보여 소개한다.
오영수, 오일남 벗고 프로이트로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오일남 역을 맡은 배우 오영수. 20대 초반 1963년 광장 극단의 단원으로 입단한 그는 연기 생활 50여 년 만에 가장 큰 주목을 받았다.
'오징어 게임' 이후 오영수의 차기작에 관한 관심이 뜨거웠는데, 그는 무대로 돌아가는 것을 택했다. 오영수가 선택한 작품은 연극 '라스트 세션'이다.
오영수는 '라스트 세션' 기자 간담회에서 "갑자기 '오징어 게임'을 통해 많이 알려지고 나서 나의 중심이나 연기자로서의 의식 흐름이 흩어지지 않을까 염려했다"며 "광고가 들어오고 하는데, 왜 연극을 선택하냐는 사람도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시간이 지나다 보니 내가 연극을 선택한 게 잘한 일인 것 같다. 내 나름대로 지향해왔던 모습 그대로 가는 기회가 주어진 것 같아 뜻깊다"고 강조했다.
연극 '라스트 세션'은 영국이 독일과의 전면전을 선포하며 제2차 세계 대전에 돌입한 1939년 9월 3일을 배경으로 한다. 정신 분석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C.S. 루이스가 직접 만나 논쟁을 벌인다는 상상에 기반한 2인극이다. 오영수와 신구는 프로이트 역에, 이상윤과 전박찬은 루이스 역에 각각 더블 캐스팅됐다.
오영수는 "대사가 일상적인 용어가 아니고 관념적이고 논리적이어서 헤쳐나가기가 상당히 힘들다"며 "신구 선배가 이 역할을 하셨다고 해서 용기를 갖고 참여하게 됐다. 결과가 좋았으면 하는 바람, 염려가 있다"고 말했다.
'라스트 세션'
일정 2022년 1월 7일 ~ 3월 6일
장소 대학로 티오엠
연출 오경택
출연 신구, 오영수, 이상윤, 전박찬
황정민, 다시 리차드3세
'믿고 보는 배우' 황정민이 2년 만에 연극 '리차드 3세'로 무대에 돌아온다. '리차드 3세'는 2018년 초연 이후 4년 만이다. 황정민은 초연 당시 10년 만의 무대 복귀작으로 '리차드 3세'를 선택해 화제를 모았으며,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악인 연기로 호평받았다.
'리차드 3세'는 영국의 장미 전쟁기 실존 인물 리차드 3세를 모티브로 세계적인 문호 셰익스피어가 탄생시킨 희곡이다.
황정민은 선천적으로 기형인 신체 결함에도 불구하고 콤플렉스를 뛰어넘는 뛰어난 언변과 권모술수, 유머 감각, 탁월한 리더십으로 경쟁 구도의 친족들과 가신들을 모두 숙청하고 권력의 중심에 서는 악인 리차드 3세를 연기한다.
황정민은 "시대를 막론하고 명작은 보는 이들이나 만드는 이들 모두에게 깊은 울림과 에너지를 전달한다. 많은 분이 쉽게 접하고 연극과 예술을 어렵게 느끼지 않도록 양질의 좋은 공연을 만들고 싶었다. '리차드 3세'는 그러한 편견을 깰 가장 적합하고 매력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한다"고 작품 출연 이유를 밝혔다.
'리차드 3세'
일정 2022년 1월 11일 ~ 2월 13일
장소 예술의전당 CJ 토월극장
연출 서재형
출연 황정민, 장영남, 윤서현, 정은혜, 임강희, 박인배 등
신성우, 연출 겸 배우
뮤지컬 배우로 자리 잡은 가수 신성우는 뮤지컬 '잭 더 리퍼'의 연출을 맡은 동시에 배우로 출연도 한다. 앞서 신성우는 지난 2019년 10주년 기념 공연 당시 연출을 맡아 화제를 모은 바 있다. 그는 섬세한 연출로 극의 몰입도를 높여 호평을 이끌고 있다.
'잭더리퍼'는 1888년 실제 런던에서 일어난 미해결 연쇄 살인 사건을 다룬 작품으로, 극 중 사건을 따라가는 극 중 극 형태다. 퍼즐 조각처럼 얽힌 살인마의 존재를 파헤쳐 가는 스릴러 뮤지컬로 강력한 반전을 선사한다.
신성우는 극에서 잔혹한 살인마 '잭' 역을 맡아 연기한다. 그 외에 김법래, 강태을, 김바울이 잭 역을 연기한다.
'잭 더 리퍼'
일정 12월 3일 ~ 2022년 2월 6일
장소 한전아트센터 공연장
연출 신성우
출연 엄기준, 이홍기, 남우현, MJ, 인성, 신성우, 김법래 등
“저를 믿으세요.” 배우 이한위(61)가 인터뷰 도중 기자에게 한 말이다. 그야말로 ‘우문현답’이다. 그는 답이 정해져 있거나 유도하는 질문을 날카롭게 알아봤다. 특히 이한위가 지양한 것은 어떠한 단어 혹은 수식어에 갇히고 규정되는 것이었다. 가령 예를 들면 ‘명품 조연’, ‘잉꼬 부부’ 같은. 그는 꾸며지고 포장되는 것을 싫어하고, 자연스러운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이한위의 인생 자체가 그랬다. 1983년 KBS 공채 탤런트 10기로 데뷔, 연기자로 산 지 약 40년. 그의 지난 시간을 돌아봤다.
이한위는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을 열심히 했고, 사람들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여겼다. 그 모든 것들이 모여서 배우의 길이 계속 이어졌고, 그 시간이 켜켜이 쌓여 그는 중후하고 단단한 사람이 됐다.
마치 흐르는 물과 같은 삶을 살아온 이한위. 그가 털어놓은 인생도 있는 그대로 가감 없이 쓰려고 노력했다. 그게 배우 이한위가 원하는 모습이고, 그가 지금까지 걸어온 그리고 앞으로 걸어갈 삶의 방향이기 때문이다.
성격 개조하다, 어느새 배우
학창 시절 이한위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어떤가? 조잘조잘 떠들면서 반 친구들을 이끄는 모습이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실제 그의 과거는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이한위는 중학생 때까지 수줍음 많고 내성적인 소년이었다. 4남 4녀 중 일곱째인 이한위. 그의 어머니조차 “가장 통제가 쉬웠던 자식”이라고 표현했다. 하라는 대로만 하는, 속 썩이지 않는 아들이었던 것.
“별거 아닌 일에도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얼굴이 빨개진다거나 두근두근거렸죠. 크면서 이런 내성적인 성격을 갖고 살아가기 어렵겠다고 스스로 인식했어요. 그래서 점점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도 용기 내는 일을 많이 했고, 고등학생 때는 전혀 성격에 맞지 않는 반장까지 해봤어요. 응원 같은 것도 하고, 노래도 부를 기회가 있으면 하고요.”
그렇게 성격을 개조해나간 이한위는 조선대학교 정밀기계공학과에 진학했다. 그러나 마음은 콩밭에 있었다. 당시 인기였던 대학가요제에 나가고 싶었으나 쉽지 않은 현실을 깨달았고, 때마침 기적적으로 연극반 공고를 보게 됐다. 성격 개조의 방점을 찍고 싶어 동아리에 들어간 이한위. 그와 함께 ‘성실 한위’의 서막이 올랐다.
“연극을 하면 성격이 많이 고쳐지겠구나 싶어서 연극반에 들어가서 매달리다시피 한 거죠. 절대 잘할 수 없었고 잘하지 못했지만 진짜 열심히 했어요.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고. 열심히 하는 사람한테 기회가 많이 주어지더라고요. 주연의 기회도 찾아오고, 연출도 하고, 선배들이 만장일치로 회장도 시켜주셨죠.”
그러느라 공부는 등한시했다는 이한위. 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업할 때가 되어서는 때마침 KBS 공채 탤런트 공고를 보게 됐다. ‘저게 나한테 취업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던 이한위는 시험에 응시했고, 단번에 1983년 KBS 10기 공채 탤런트에 합격했다. 그렇게 연기자의 삶을 시작하게 된 것. 우연이 이어지면서 필연이 됐다.
“처음부터 배우가 되겠다는 생각에 이 길로 들어선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그때 서울로 올라오는 차 안에서 ‘이제 평생 배우로 사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어요. 나는 KBS가 공인한, KBS에 의해 발탁된, 직업이 배우구나라고요. 지금 생각하면 얼토당토않은 철부지 생각이죠. 배우는 프리랜서이기 때문에 그런 마음으로는 배우를 지속할 수 없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부족한 게 많았던 때죠.”
39년 차 배우로 사는 법
이한위는 1985년 방영된 KBS 드라마 ‘별을 쫓는 야생마’를 통해 본격적으로 데뷔했다. 첫 영화는 1998년 개봉한 ‘8월의 크리스마스’다. 이후 그는 드라마 ‘대추나무 사랑걸렸네’, ‘학교’ 시리즈, ‘태조 왕건’, ‘가을동화’, ‘왕꽃선녀님’, ‘불멸의 이순신’, ‘쾌걸춘향’, ‘베토벤 바이러스’, ‘추노’, ‘제빵왕 김탁구’ 등과 영화 ‘박수칠 때 떠나라’, ‘미녀는 괴로워’, ‘울학교 이티’, ‘국가대표’ 등에 출연하며 이름을 알렸다.
캐릭터도 다양했다. 이한위는 맡는 역할에 따라 다른 사람이 됐다. 깡패, 사채업자 같은 특색 있는 캐릭터를 맡을 때도 있고, 직업이 의사, 교사, 시장이어도 어딘가 허술한 경우가 많았다. 나이 들면서는 점점 누군가의 아빠가 됐고, 서민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악역을 해도 사람들이 웃는다. 장점이자 단점이다”라고 스스로 진단했다.
이한위는 오랜 시간 동안 작품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던 이유로 ‘성실함’을 꼽는다. 그는 배우라는 직업을 갖고 “잘하지는 못했지만 열심히 했다”고 자평했다. KBS 공채 탤런트가 된 후 매일 KBS로 출근하면서 감독들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그는 “열심히 하고 한결같고 건강하게 하니까 감독들이 저를 많이 써줬다. 저도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고 말했다.
“우리 때는 오디션을 본 것이 아니라 공채 탤런트가 되면 기용해주려는 마음이 있었어요. 트레이닝해주려는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요즘 시대에 배우가 됐다면, 40년 가까이 배우 생활을 할 수 있었을까 의구심이 들어요. 오디션 제도가 있었다면 배우 생활이 녹록지 않았을 거예요. 지금도 적응이 된 거지, 내성적이에요. 근본적인 성격은 바뀌지 않았죠.”
이한위의 말대로 그와 작업해본 감독들은 계속해서 그를 찾았다. 이는 그의 필모그래피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한위는 계절드라마 시리즈 ‘윤석호 감독의 페르소나’로 통하고 있고, ‘또 오해영’의 송현욱 감독하고도 각별한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이한위는 이를 두고 자신은 ‘운이 좋은 배우’라고 표현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래요. 배우는 운이 좋아야 해요. 감독이 봤을 때 이 배우가 살아남을지 어떨지 모르듯이, 배우가 봤을 때도 이 감독이 어떤 감독이 될지 모르잖아요. 저도 열심히 했지만, 저를 써주신 분들도 꾸준하게 감독일 하는 분들이 많았어요. 그 감독들이 저를 꾸준히 기용해주고, 낯선 감독들이 저를 또 캐스팅해줘서 계속 일하고… 그렇게 해서 여기까지 온 거죠.”
이한위는 사실 무명 시절이 길었다. 대중적으로 유명해진 작품은 2006년 개봉한 영화 ‘미녀는 괴로워’다. 엽기 성형외과 의사 역을 맛깔나게 소화해내며 대중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그는 “무명 시절은 누구나 다 힘들다”면서 덤덤하게 말했다.
“저는 무명 기간이 길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배우로 생존했다고 생각하거든요. 이 세계에 적응하는 맷집이 길러졌다고 생각해요. 맷집과 실력이 없으면 스스로 안심이 안 되고, 시켜주는 사람도 불안하죠. 저는 인생의 여러 가지 비극 중에 소년출세도 있다고 생각해요. 인간은 대동소이하게 유약하기 때문에 어려서 출세하면 그만큼 위험한 거예요. 제가 무명 기간이 길어서 합리화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단계를 잘 밟지 않았나 생각해요.”
그런가 하면 이한위는 터닝 포인트가 된 작품, 인생작을 뽑지 못한다고 했다. 그저 열심히 연기를 해왔을 뿐이라는 것이 그의 답. 그는 지난해 KBS 2TV 드라마스페셜 ‘그곳에 두고 온 라일락’을 통해 첫 드라마 주연을 맡았다. 일반적으로 그 작품이 그의 인생작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는 “주인공을 해야 인생작인가? 스코어가 좋다고 인생작인가? 이렇게 반문할 수밖에 없다”면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그 드라마가 트로트 모창 가수 이야기예요. 작년에 ‘보이스트롯’에 출연했는데, 그 방송을 할 즈음 감독님이 단막극 주인공을 누구로 할까 고민하다 불현듯 저를 방송에서 보고 ‘저분이다’ 생각해서 캐스팅한 거죠. 그동안 했던 서민적인 캐릭터를 연기한 것인데 그것이 길게 나온 단막극이었을 뿐이에요. 어쨌든 주어진 대로 열심히 하고, 1인 2역 연기도 하고, 단막극상 수상도 하고. 좋은 경험이었고 고마운 기억인 거죠.”
기세를 몰아 가수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냐고 묻자 “어휴~ 없어요”라면서 손사래를 친다. 다만, 광주 출신으로 기아 타이거즈의 응원곡을 부를 기회가 오면 부르고 싶단다. 즉 좋은 기회라면 노래를 부를 수 있지만, 적극적으로 가수가 될 생각은 없는 것.
예능감이 뛰어난 그는 예능 출연에 대한 생각도 이와 비슷했다. 예능도 전략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고, 기회가 생겨 나가면 열심히 할 뿐이라고. “저는 연극, 영화, TV 다 해요. 경계가 무너지고 있는데, 넘나드는 배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다만, 예능 출연이 곤욕스러운데 나갈 필요는 없죠. 할 수 있으면 나가고, 나갔으면 뭔가 하고. 나가기만 할 거면 나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결혼, 그리고 끝까지 배우
이한위는 배우로서 연기 말고도 화제가 된 부분이 있다. 바로 인생의 중대사인 ‘결혼’이다. 그는 2008년 49세의 나이에 19세 연하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불멸의 이순신’에서 배우와 스타일리스트로 만났다. 당시에는 우려의 반응도 많았지만, 현재 부부는 누구보다 알콩달콩 잘 살고 있다. 이한위는 모두 아내 덕분이라고 고마움을 표했다.
“몇 번 얘기했지만, 아내는 저를 따진다든지, 뒤진다든지, 캐묻는다든지 그런 것 없이 순종적이에요. 제가 뭔가를 번복하더라도 아내는 이해하는 편이 아니고 받아들이는 편이에요. 사람이 누군가를 이해하면 참 좋지만 이해가 안 될 때는 받아들이면 되잖아요. 그러면 오해가 없고 갈등도 없다고 생각해요. 저희 일이라는 게 정해진 루틴이 없잖아요. 기본적으로 불규칙한 것이 루틴이잖아요. 제 연기 생활 근 40년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규칙적으로 불규칙했다.’ 그런데 아내는 이런 생활을 이해할 필요 없이 잘 받아준다는 거죠. 제 아내는 방송인의 아내로 베스트예요. 항상 고맙죠.”
올해는 배우 생활을 한 이후 가장 한가한 시간을 보냈다는 이한위. 대신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았다. 그는 다둥이 아빠이기도 하다. 슬하에 열네 살 딸, 열두 살 딸, 열 살 아들이 있다. 한 방송에서 이한위는 2년마다 애를 낳았다면서 ‘비엔날레 스타일’이라고 농을 쳤다.
“제게 두 살 어린 남동생이 있는데, 남동생 애가 서른 살이 넘었어요. 그런 것에 비하면 저는 늙은 아버지에 속하죠. 아이들하고 잘 살려면 일도 하고, 운동도 하고, 건강하게 살아야죠. 가족과 시간을 잘 보내는 것도 중요한데, 그런대로 재밌더라고요. 올해는 식구들하고 여행도 몇 번 했는데 의미 있고 재밌었어요. 우리 애들은, 특히 열 살짜리 막내는 지나치게 건강해서 가끔 등산을 같이 가죠. 제가 부암동 쪽에 사니까 가까이 북한산도 있고, 인왕산도 있으니까 능력껏, 형편껏 가죠. ‘무조건 정상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힘닿는 데까지 가고 맛있는 거 먹고 그러면 아주 좋아해요. 늙은 아버지로서 노력하는 거죠. 고맙게도 애들은 아빠가 늙었다고 생각하지 않더라고요.”
‘배우는 루틴이 없다’는 어록을 남긴 이한위. 그래서 그는 당장 2022년 자신의 모습을 예측할 수 없다. 현재 정해져 있는 스케줄은 이달부터 광주방송 라디오 ‘이한위의 그리운가요’의 DJ를 맡게 됐다는 점이다. 이한위는 “설레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 외에는 정해진 것이 없다며, “처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해온 것처럼 뭔가 주어진다면 최선을 다할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이한위는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이날 길어지는 촬영에도 화 한 번 내지 않고, 사소한 부분도 디테일을 놓치지 않았다. “남한테 피해 안 주고, 약속을 잘 지키려고 한다. 배우는 태도도 중요하다”고 말하는 그가 지난 시간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보였다. 스스로 운이 좋았다고 하지만, 이한위의 노력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새삼 40년이라는 세월의 무게가 느껴진다.
“저는 그냥 수식어가 없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수식어를 굳이 단다고 하면, ‘재밌는 배우’, ‘신뢰받는 배우’ 정도가 좋지 않을까 싶어요. 명품 조연 배우,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명품한테 실례되는 말이에요. 명품인지 아닌지는 보는 사람이 정하는 거예요. 만약 저를 그렇게 봐주신다면 감사하죠. 저는 단지 배우로서 끝까지 소용되는 것, 그것이 제 바람이죠.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는 제가 정할 수 없지만, 배우로 생을 마감하는 것이 제 꿈이에요. 이순재 선생님이 ‘무대 위에서 쓰러져 죽는 것이 가장 행복한 것 같다’고 하신 것처럼요.”
극단의 홍보실장, 대한민국 한복 모델 선발대회 결선 진출, 연극 ‘패밀리 스토리’의 연기자 등 최희정 씨의 경력에는 시니어 모델다운 기록들이 적혀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게 1년도 안 되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면 믿을 수 있을까. 작년까지만 해도 평범한 주부로 살아왔던 그녀는 이제 모델과 연기에 진심인 열정으로 가득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녀가 이뤄낸 극적인 삶의 변화는 시니어들에게 말한다. ‘당신도 할 수 있다’고. 그녀를 만나 오랜 꿈과 지치지 않는 열정이 만든 새로운 인생에 대해 들어봤다.
최희정 씨는 1961년생이다. 유아교육학과를 졸업하고 잠깐 학원 교사로 일하다 34세에 결혼했고, 이후로는 가사와 육아에 충실했다. 한마디로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중년의 모습이다. 그런 그녀가 60세가 되어 시니어 모델계에 발을 내딛었다. 평생 전업주부였지만 거침없는 행보와 열정, 숨어 있는 끼를 발산하기까지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60세에 시작하니 다시 한 살이 되는 기분이에요. 어렸을 때 탤런트가 되고 싶었는데 집안이 엄해서 평범한 전업주부로 살았죠. 늦게 시작했고 기간도 짧았지만 주위에 도와주고 마음 써주는 지인들이 많아요. 이런 게 저의 큰 재산인 것 같아 너무 행복해요.”
전업주부, 가족의 적극적 권유로 모델계 입문
최희정 씨의 말처럼 그녀가 모델 일을 하게 된 것은 주변 사람들의 적극적인 권유 덕분이었다. 남편과 모델 일을 하는 동생이 그녀에게 끼가 있으니 도전해보라고 적극 권유하고 알아봐준 것이 계기였다.
“남편이 시니어 모델 전문 교육기관인 M아카데미에 데려가서 수강 신청을 해줬어요.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고 있죠. 처음 시작한 건 작년 11월이지만 기초반은 코로나19 때문에 거의 안 나갔어요.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올 3월부터죠. 말하자면 재수를 한 거예요.(웃음) 지금은 마지막인 프로반 과정에 다니고 있어요.”
모델 일을 시작하고 한복 참 잘 어울릴 거 같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내친김에 대한민국 한복 모델 선발대회에 도전했다. 그리고 수상은 못 했지만 결선까지 진출하는 쾌거를 이뤘다.
“그런데 나이별로 하는 게 아니라 10~70대 중에서 뽑는 대회거든요. 60대인데 결선까지 간 것만 해도 잘한 거죠.(웃음) 어쩌다 나간 무대 위에 서니 어찌 그리 행복하고 설레던지요. 이런 묘한 매력에 푹 빠진 경험이 새롭고 또 기대됩니다.”
어렸을 적부터 꿈이었던 무대
최희정 씨가 새로운 삶에 뛰어든 것은 지금까지의 삶이 어느 정도 완성됐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두 딸은 잘 커서 자기 일 하고 있고…. 집에 앉아 TV나 보고 친구 만나 밥만 먹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나만의 길을 찾아보려고 했죠. 하모니카도, 드럼도 배우면서 내 나이에 할 만한 활동을 찾아보다가 모델 학원을 알게 됐죠. ‘젊은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을까?’ 싶어서 초반에 걱정이 좀 됐지만 잘할 자신이 있었어요. 정말 열심히 했죠. 그러다 보니 지금은 ‘이게 바로 내가 찾으려는 행복이 아닌가’ 싶을 정도예요. 가족들도 요즘 모습이 많이 달라졌고 너무 좋아 보인다고 하고요.”
사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모델 일에 관심이 있었다. 소위 말하는 연예인으로서의 끼를 원래부터 품고 있었던 사람이다.
“어렸을 때도 공부는 뒷전이었고, 무대를 보면 설레었어요. 교육할 때 런웨이에 서니 너무 행복한 거예요. 살면서 이렇게 행복한 적이 없어요. 내게 이렇게 많은 끼가 내재되어 있구나 깨달았죠. 그래도 지금까지 평범한 주부로 살았지 이런 건 상상도 못 했기에 아직 쑥스러움이 있어요.”
진짜 모델이 되기 위해 몸과 마음을 변화시키다
모델로서의 자신의 장점을 ‘열정’이라고 말하는 최희정 씨는 주변 사람들이 ‘그동안 어떻게 그 끼를 억제하고 살았냐’고 할 정도로 재능을 평가받고 있다. 그런 그녀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인성이다.
“모델이나 연기자는 외모도 중요하지만 내면의 멋이 있어야 해요. 시니어 모델의 멋은 과거가 만드는 거니까 체득되어야 해요. 아쉽게도 지금까지 그렇게 못 했으면 이제부터라도 문화와 예술을 접하려고 많이 노력해서 지성미 있는 얼굴을 만들어야겠죠. 열심히 응원해주는 우리 남편은 지성미 있는 시간을 할애해야 가치가 내재화된다고 자주 말하곤 해요.”
그녀는 모델 일을 하면서부터 자신을 모델 조건에 맞추게 되었다고 말한다. 새로운 인생이 그녀에게 준 고통스러운(?) 선물 중 하나다.
“학원에 처음 갔을 때는 전형적인 중년 아줌마였어요. 그런데 지금은 많이 변했죠.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한 시간 반 정도 스트레칭을 해요. 변화하기 위해서 식단도 바꿨고요. 물론 너무 귀찮죠. 하지만 제가 남에게 뒤지는 건 싫어해요. 돈에는 욕심이 없는데 일적으로는 그렇지 않거든요.”
모델을 넘어 연기자까지 도전
최희정 씨의 ‘욕심’은 모델뿐만 아니라 연기 쪽으로도 뻗고 있다. 최근에는 극단 홍보실장으로 활동하고, 8월에는 연극 ‘패밀리 스토리’에 출연해 춤추는 할머니와 여러 단역을 맡았다,
“학원 동료가 극단에 추천해서 대표와 미팅을 하니 비중 있는 역할을 줬어요. 그런데 집안에 우환이 있어서 하차해야 했죠. 그러다 상황이 좀 좋아져서 집에서도 걱정하지 말고 연극을 하라고 하고, 극단에서도 기다렸더라고요. 그래서 ‘패밀리 스토리’에서 춤추는 할머니 역할 등 여러 역을 맡게 됐어요.”
그녀는 요즘 연기의 매력에 푹 빠져 지내는 중이다. ‘패밀리 스토리’는 한 달 남겨놓고 투입됐기 때문에 발가락에 쥐까지 나면서 춤을 배웠다. 이에 힘입어 장태령 감독의 상업영화 ‘영웅들의 눈물’ 작품에서 단역으로 촬영을 마쳤고 이어 이성현 감독의 단편영화 ‘가족 만들기 프로젝트1’도 조연으로 출연해서 편집중이다.
“당분간은 영화, 연극 쪽 일을 많이 할 거 같아요. 영역을 넓히는 중이죠. 어떻게든 해내고 말 거예요.(웃음) 아직은 수줍고 낯설지만 꿈만 같아요.”
‘열정이 없어서 늙는다’
최희정 씨가 예순의 나이에 모델 일을 하게 된 데에는 인연 같은 순간들이 있었다. 박술녀 한복 원장과의 만남도 그렇다.
“한복 모델 선발대회에 참가하기로 하면서 남편한테 ‘난 무조건 박술녀 선생님 옷 입겠다’는 말이 나도 모르게 나왔어요. 그런데 대회 지정 한복이 따로 있어서 너무 실망했죠. 박술녀 선생님 옷을 입어야 하는데 싶어서요. 그때 남편이 자문이라도 받아보자고 해서 일반 전화로 걸었는데 선생님이 직접 받더군요. 선생님은 예약 안 하면 안 받는 분인데, 전화를 받고는 제 목소리에서 에너지가 느껴지셨다고 하더라고요. 그걸 인연으로 선생님과 선생님 옷에 푹 빠졌어요. 특히 교감이 잘 되는 게, 선생님과 저는 성격이나 모든 게 비슷한 부분이 많아요.”
그간 기자가 인터뷰했던 박술녀 원장이 소위 내유외강형이라면, 최희정 씨에게선 외유내강형의 느낌이 났다. 두 사람이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그러한 아우라의 조화 덕분이 아닐까. 그녀는 겉으로 보기에는 천생 여자지만 본연에서부터 나오는 특유의 의지가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지금 가고 있는 새로운 길에 대해서도 두려움이 없다.
“겁 하나도 안 나요. 어떻게 해서든 제가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불태우고 싶은 마음이 강해요. 최선을 다하면 과정이 중요하지, 결과에 연연해하진 않아요. 그리고 제가 가슴 뛰는 일을 즐기면서 하는 게 최고죠.”
‘할 수 있다’고, 중년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싶다
주부들이 가정에서 표시 안 나는 일만 하다 나이가 들면, 아이들은 다 컸고 본인은 우울증이 오는 경우가 많다. 삶이 허무하고 이제 와 뭘 새로 시작하냐고 자조하게 된다. 최희정 씨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지금 모델과 연기자로서의 삶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이유는 그런 중년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싶은 의도도 있다.
“제가 귀감이 되고 싶어요. 별 볼 일 없는 주부가 도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학원 선생님이 그래요. ‘처음 왔을 때는 전형적인 아줌마였는데 지금은 너무 바뀌셨다’고. ‘하루하루 다르게 일취월장하는 모습에 놀랄 정도’라고요.(웃음)”
그녀는 ‘노력하면 할 수 있다. 생활 패턴을 바꾸면 정신과 마음이 건강해지고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자신의 몸으로 증명하는 중이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자신과 같은 시니어들을 위해서.
“‘늙어서 열정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열정이 없어서 늙는다’는 어떤 독일 모델의 말이 정말 가슴에 와 닿았어요. 저는 어떻게 해서든지 할 거예요. 남편이 많은 힘이 돼요. 인생의 도반인 남편이 여러모로 도와주는 중이거든요. 마누라 밖에 나가서 기죽지 말라고.(웃음)”
베테랑 연기자이자 30년 넘는 경력의 라디오 진행자, 예능 MC로 종횡무진하는 탤런트 김성환(72)을 실제로 보면 칠순을 넘긴 나이를 쉬이 믿기 힘들다. 과거와 다를 바 없는 젊음이 분명하게 각인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건강과 젊음에 대해 겸손하게 부모님께 받은 것이라고 말한다. 얼굴에 뭔가 바르는 걸 싫어해서 로션도 잘 쓰지 않고 운동도 걷기 위주로 한다니,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타고난 선물이 부럽게 느껴진다. 그러나 부모님께 받은 ‘선물’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성공한 방송인이자 가수, 노인의료나눔재단 이사장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액티브 시니어 김성환에게 지금의 삶을 만든 해법과 철학에 대해 들어봤다.
요즘 탤런트 김성환을 바쁘게 만드는 일에는 노인의료나눔재단이 있다. 처음에는 홍보대사를 하다가 2018년부터 노인의료나눔재단 이사장에 취임했기 때문이다. 노인의료나눔재단은 1년에 30억 원 정도의 예산으로 시니어들의 무릎 수술비를 지원하는 공익 재단이다. 주로 저소득층 시니어, 연고자가 없거나 홀로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그 지원 대상이다.
어르신들과의 계속된 접점, 이사장까지 되다
“탤런트를 하면서 교양 프로그램, 노래 등 어르신들이 좋아하는 것을 많이 해서 어르신들과 인연이 많았죠. 저도 고향이 시골이라 농사 등 어르신들의 생활에 유달리 관심이 많았고요. 그러다 보니 MBC ‘고향이 좋다’에서 20년 넘게 MC를 하기도 했어요. 하다 보니 어르신들과 접촉이 많았고, 많이 알게 되고, 어르신들이 저를 좋아하시게 되었죠. 그러다 보니 어르신들 위하는 일이 뭘까 관심도 갖게 되었어요. 그래서 대한노인회 홍보대사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인연 덕분에 노인의료나눔재단 홍보대사도 하게 되었죠.”
그는 요즘도 대한노인회 홍보대사 일을 겸하고 있기에, 보건소나 경로당에 가면 그의 사진이 있는 포스터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어찌 보면 김성환은 시니어들이 실생활에서 가장 밀접하게 접하는 연예인일 것이다.
“노인의료나눔재단 홍보대사 일을 하다 보니 열 분의 이사님이 만장일치로 저를 이사장으로 추대해주셨죠. 저보다 먼저 이사장을 맡았던 분들이 다들 쟁쟁하신 분들인데, 영광일 뿐입니다.”
30여 년간의 라디오 DJ 생활
김성환은 자신에게 부여된 사회적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 동시에 스스로도 현재에 머무르려 하지 않았다. 연기와 경영을 공부하기 위해 53세에 경기대학교에 진학한 일 또한 그렇다.
“10년 동안 다녔어요. 탤런트 김영철과 함께 들어갔죠. 열심히 해서 예술학 박사과정까지 마쳤습니다. 살아오면서 가장 큰 일이 대학교 다닌 일과 라디오 방송을 30년 동안 한 거라고 생각해요.”
그가 처음 맡은 라디오는 KBS의 ‘세월 60년 노래 60년’이었다. 5년 동안 KBS 라디오에 몸을 담았던 그는 교통방송(현 TBS)이 개국하자 이적하여 작년 11월까지 무려 26년 동안 라디오를 진행했다. ‘9595쇼’, ‘서울 부르스’, ‘비바 트롯’ 등을 맡았던 그는 TBS 라디오의 터줏대감으로 불렸다. 그는 이러한 장수 방송인의 비결에 대해 단순히 열심히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무슨 뜻일까.
열심히를 넘어 죽기 살기로 해야
“살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열심히 하는 사람은 많은데 그렇게만 해선 안 된다는 거예요. 뭐든지 죽기 살기로 해야 해요. 거친 표현이지만 모든 것을 죽기 살기로. 라디오를 30년 이상 한 것도, ‘고향이 좋다’를 20년 넘게 한 것도, 경인방송 ‘성인가요 베스트 30’을 7년 한 것도 그랬어요. 뭐를 하나 하면 어떻게 해서든지 열심히, 거기에 맞는 사람으로 죽기 살기로 해야 됩니다. 그리고 대인관계도 열심히 해야지 대충 하면 안 돼요. 그 사람이 10을 줄 때 나는 20, 30을 준다는 다짐과 여유가 있어야 해요. 그래야 그 사람도 나를 믿고 함께할 수 있거든요.”
그는 방송을 10년 하려면 삼위일체가 아니라 오위일체가 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잘해야 하고, 건강해야 하고, 열심히 해야 하고, 운이 좋아서 프로그램이 사랑을 받아야 하고, 부지런해야 해요. 10년, 20년, 30년이란 세월 동안 방송을 한다는 건 정말 여러 가지가 어우러져야 가능한 거예요.”
그래서 김성환은 제주도도 한 번 못 가보고 살았다. 제주도에 가서 쉬면 방송이 펑크 날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같은 이유로 과거에는 부산조차 못 갔다. 이제는 KTX가 있어 가능해졌지만. 교통방송에서 낮 12시부터 오후 2시까지 17년 동안 맡을 수 있었던 비결이다. 모든 걸 다 바쳤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유튜브 조회수 1000만 회 넘은 그의 노래
인생은 자신의 모든 걸 방송에 바친 김성환에게 또 다른 선물도 주었다. 바로 가수로서의 성공이다. 유튜브에서 김성환의 이름을 치면 그가 가수로 공연한 방송 클립들이 나오는데 그 조회수에 놀라게 된다. 가장 많은 조회수를 올린 동영상이 대표곡 ‘묻지마세요’를 포함한 그의 히트곡 메들리인데 1030만 회에 달하니, 숫자로만 보면 우리나라 국민 5명 중 한 명이 그의 공연을 봤다는 얘기가 된다.
“1997년에 ‘거시기 인생’이라는 노래를 드라마에서 부르면서 히트를 쳤죠. 어르신들이 좋아하셔서 ‘가요무대’나 ‘전국노래자랑’에서 부르게 됐어요. 물론 본격적인 가수라기보다는 탤런트 중 노래 좀 부른다는 쪽이었는데, 2014년에 발표한 ‘묻지마세요’가 아주 행운이었죠. 이 노래는 원래 진성 씨 노래였는데 팬이 생긴 인기 좋은 노래가 됐어요.”
그가 ‘묻지마세요’ 이후 밀고 있는 노래는 ‘보고픈 친구야’다. ‘묻지마세요’의 작곡가 이충재가 그에게 직접 가사를 써보라고 해서 가사도 자신이 직접 썼다. 나이를 먹으면 친구밖에 없다, 친구 하나를 제대로 사귀면 평생 최고라는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노래다.
“제 노래가 아무나 편안하게 부를 수 있는 노래예요. 가수가 한 곡 히트하기가 어려운데 이렇게 세 곡이 히트한 걸 보면 가수로서도 성공했다고 봐야겠죠?(웃음)”
‘미운 놈이 되지 말라’는 아버지 말씀을 지키다
막힘없이 술술 풀리는 이야기에 김성환이 변죽이 좋은 걸로 유명하다는 게 떠올랐다. 그 스스로도 어릴 때부터 주변 사람을 즐겁게 하는 소질이 있었다고 밝혔다. 그 때문에 애로사항도 있었다고 한다.
“제가 얼굴과 행동과 말이 다르거든요. 그래서 처음에는 방송국에서 역할을 줄 수 없었어요. 재미있는 역할을 주려고 하면 얼굴이 잘생겼고, 얼굴이 잘생겨서 주인공을 주려고 하면 사투리가 막 튀어나와서 주인공 같지 않으니까. 군대에 있을 때 사투리를 고치고 공부해서 제대 후에는 다양한 역할을 맡았어요.”
좌절할 수도 있었던 젊은 날 고민에 적극적으로 도전해 기회로 만든 점이나 사람을 대하는 모습, 그간 방송인이라는 직업에 충실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삶의 행적을 보면 멘탈 관리도 뛰어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스스로 자랑스럽고 잘 살아왔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누구와도 싸워본 적 없다’는 사실에서 찾았다.
“아버지께서는 ‘미운 놈이 되면 안 된다’라고 자주 말씀해주시곤 했어요. 왜 그런 말씀을 자꾸 하실까 했는데 나중에 생각하니 가슴에 와 닿더군요. 저는 성격도 그렇지만 ‘미운 사람이 되지 말자’가 인생 모토예요. 괜히 미운 사람으로 보이겠냐 싶은 거죠. 다른 사람에게 왜 미운 사람으로 보일까요? 말 한마디에 미운 사람이 되는 거예요. 천 냥 빚은 못 갚아도 미운 사람이 되면 안 되잖아요.”
아버지의 말씀을 깊이 새긴 그의 인생 모토는 ‘말 한마디 때문에 다투지 말자’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누구를 흉봐서도 안 되고 헐뜯어서도 안 되고 탓해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그의 깨달음은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자식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다.
“나를 닮으라는 얘기는 안 하지만, 절대 미운 사람이 되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자식과 부모 간에도 하기에 따라 밉거나 존경할 수 있기 때문에 말을 조심해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자기 손으로 탈락시킨 냉정한 아버지
그러고 보니 김성환의 둘째 아들(김도성)은 연기자라는 점에서 아버지와 같은 직업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 과정이 순탄하지 않았다. 오하이오주립대학교에 입학한 재원인 아들이 우리나라로 돌아와 연기자가 되겠다고 하자 그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말려도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니까요. 방송은 정말 힘들다고 충고했지만 결국 네가 알아서 할 수 있으면 하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죠. 그래서 예술대를 졸업하고 군대에 다녀와 연기를 시작했어요.”
그러나 그는 본인이 연기자였기에 연기에서만큼은 냉정한 아버지였다. 그가 심사를 보게 된 KBS 탤런트 공채에 아들이 지원했었다고 한다. 20명을 뽑는데 3만 명이 지원한 치열한 경쟁의 장이었다. 그는 아들의 연기자 심사를 보고 1차에서 탈락시켜버렸다.
“아들이 아버지 맞냐고 묻더군요.(웃음) 그래서 어떻게 탤런트를 뽑는지, 어떻게 탤런트가 되는지 네가 알아야 한다면서 심사 과정을 알려줬어요. 정말 힘들거든요. 대사 외우기, 노래, 운동, 특기, 악기 사용, 성실함 등등. 저도 50년 했지만 정말 힘든 게 이 길이에요. 실력이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길이죠.”
싫어하는 말은 ‘졸혼’, 그리고 부부관계의 해법
아들에 관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부부로 황혼을 지내는 이야기로 이어졌다. 그는 부부관계가 원만한 비결로 서로에 대한 배려를 들었다.
“뭐든지 일방적인 게 없어요. 내가 아무리 잘했어도 상대가 잘했다고 생각해주지 않으면 잘 안 된 거죠. 반면 ‘저 사람이 열심히 살면서 밖으로 많이 돌고 집안일을 안 도와주는 거 같아도 나에겐 소중한 사람이다’ 싶으면 소중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부부관계라는 게 서로 잘하지 않으면 오래 갈 수 없어요. 섭섭할 수 있고, 권태기 때문에 싫어질 수도 있어요. 요즘은 헤어지는 게 다반사 아닙니까.”
그는 너무나 싫어하는 단어가 졸혼이라고도 했다.
“백일섭 형님에게도 이건 있을 수가 없다고 말했어요. ‘수많은 사람 앞에서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잘 살겠다 해놓고 조금 싫다고 헤어지면 되겠느냐’ 했더니 ‘누가 헤어지냐? 누가 이혼한다냐? 조금 떨어져 있겠다는 거다’ 하시더군요. 남진 형님은 ‘그것도 괜찮다’ 하시는데 나는 끝까지 그건 안 된다고 했어요. 아이가 없거나 주변인이 없으면 그럴 수 있죠. 지금 사는 게 나 혼자만이면 그럴 수 있어요. 그러나 남들 눈이 있으면 못 하는 일이 있죠. 하물며 내 자식들이 보고 있는데, 자식들이 괜찮다 해도 부모로선 안 된다고 말할 수밖에 없어요.”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누구 말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는 단서를 달았다. 인생에 정답은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것은 또한 김성환이 계속 지켜온 사람에 대한 예의, 타인을 위한 예의일지도 모른다. 자신만의 답을 갖고 있는 그는 자신만의 길을 올곧이 걸어왔고 앞으로도 꿋꿋이 걸어갈 것으로 보이니 말이다.
행복한 노년을 보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보통 사람들은 건강과 돈, 가족과 친구, 명예 등을 떠올린다. 반면 삶을 이루는 다양한 요소 중 하나인 습관을 떠올리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잘 들인 습관이 열 가지 노력 부럽지 않다는 말도 있듯, 습관에는 노년기의 삶을 청춘의 것처럼 빛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 9월호는 커버스토리에서 ‘습관의 물리학’을 다뤘다. 나쁜 습관의 최고봉인 분노를 다스리는 방법 ‘아하! 내가 지금 화를 내고 있구나!’, 이퇴계의 생활 습관, 습관적 사유와 행동 그리고 ‘약속하는 나’ 등의 콘텐츠를 담았다. 비대면 시대의 시니어가 SNS 사용 시 주의해야 할 나쁜 습관과 좋은 매너, MZ세대에게 배우는 리추얼, 미국 시니어들의 일상 습관을 들여다보며 하루를 달라지게 만드는 웰에이징 습관은 시니어 독자로 하여금 좋은 습관을 들이게 해 주는 안내자가 될 것이다.
‘나는 원래 웃겼다’는 탤런트 김성환을 표지와 기사로 만날 수 있다. 베테랑 연기자이자 30년 넘는 경력의 라디오 진행자, 예능 MC까지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종횡무진 활약하는 그를 움직이게 만드는 인생 철학은 무엇일까. 성공한 방송인이자 가수, 노인의료나눔재단 이사장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그의 변죽 좋은 인생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저절로 웃음이 터져나온다.
스페셜 인터뷰에서는 더 나은 사회를 바라는 이병철 신한은행 퇴직연금그룹 부행장을 만났다. 은퇴한 시니어가 두 번째 인생을 즐기며 의미 있게 놀고, 행복한 인생을 스스로 만들기를 바란다는 그. 이 부행장에게서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 뒷얘기와 신한은행이 바라보는 새로운 시니어 라이프 가치 등에 대해 들어봤다.
참 좋은 시절에서는 서울월드컵경기장과 올림픽체조경기장, 리츠칼튼호텔과 박경리문학관 등을 설계한 대한민국 대표 건축가 류춘수를 만났다. 그의 대표작이자 출세작인 서울월드컵경기장 설계를 맡을 때, 건축계의 ‘골리앗’ 현대건설을 상대로 던진 다윗의 승부수가 무엇이었는지 기사로 확인해보자.
추석 연휴가 있는 9월, 오랜만에 만난 가족과 기분 좋게 대화하는 데 필요한 세대공감 소통법도 담았다. 배우 윤여정과 유튜버 밀라논나, 외식사업가 백종원 등 청년과 원활히 소통하며 인기를 얻고 있는 시니어 3인방의 소통 노하우도 참고할 수 있다.
최근 세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이슈인 우주여행 이야기도 담았다. 시니어들의 오랜 로망 우주여행이 국내에서도 가능할 수 있을지, 트렌드 톺아보기에서 국내 우주여행의 현재와 미래를 엿볼 수 있다.
신문물 설명서에서는 5060세대에게 더 나은 쇼핑 ‘옴니채널’을 소개한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쇼핑 채널의 장점만 모아 유기적으로 연결한 옴니채널을 이해하고 나면 쇼핑이 더욱 즐거워질 것이다.
추어탕, 판소리와 광한루의 고장, 남원. 보고 듣고 느끼고 즐길 거리 많은 이곳에 최근 여행자들 사이에서 주목받고 있는 새로운 명소가 등장했다. 감성 솔솔! 미술관 여기에서는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을 소개한다. 매혹적인 물의 정원과 ‘생명 작가’ 김병종 미술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곳, 김병종미술관으로 떠나보자.
이 외에도 브라보 마이 라이프 9월호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되어줄 ‘브라보 마이 러브’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 대상 수상작 ‘대륙에서 길을 묻다’ ▲재개발과 재건축에 투자할 때 유의해야 할 점들을 알려주는 구해줘 부동산 ▲연금부자로 가는 지름길 TDF를 소개하는 생활 속 법률 상식 ▲나도 지구도 건강해질 수 있는 특별한 운동 ‘플로깅’을 소개하는 ‘코로나19와 함께 사는 세상’ 등의 알찬 콘텐츠로 시니어 독자들에게 다양한 읽을거리를 선사한다.
고품격 시니어 매거진 ‘브라보 마이 라이프’ 9월호는 전국 서점과 인터넷에서 바로 구매할 수 있다.
일본 최대 규모의 극단 ‘사계’ 출신으로 검증된 실력을 자랑하는 뮤지컬 배우 이기동(50) 씨. 국내 대중들에게는 생소한 배우이지만, 1989년 뮤지컬 ‘쉘부르의 우산’으로 데뷔한 뒤 지금껏 60여 개의 작품에 참여했다. 최근에는 뮤지컬 ‘아모르파티’에서 70대의 나이에 사랑을 꽃피우는 ‘박만돌’ 역을 맡아 노년의 사랑을 풀어내고 있다. ‘운명을 사랑하라’는 아모르파티의 뜻처럼 무대가 자신의 ‘운명’ 같다는 이기동 씨. 오랜 무명생활 속에서도 꿈을 놓지 않은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박만돌’은 어떤 캐릭터인가?
사연이 많은 인물이에요. 초등학교 때 6·25전쟁을 겪었고, 휴전 후에는 어머니와 동생들을 책임지기 위해 탄광에서 일하다 폭탄이 터지는 바람에 고막을 다쳤죠. 결혼한 뒤에는 부인에 이어 자식까지 먼저 떠나보내게 돼요. 그렇게 평생을 외롭게 살다 70대의 나이에 ‘금옥분’이란 사람을 만나 사랑의 불씨를 피우기 시작해요.
노년의 사랑을 연기하며 무엇을 느꼈는지?
젊었을 때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도 다음 사랑이 찾아올 거라 믿는 경우가 많잖아요. 근데 나이가 들면 인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지금의 사랑이 마지막이라고 여기게 되거든요. 실제로 노년에는 진정으로 마음 가는 사람을 만나기 힘들기도 하고요. 그래서 젊었을 때 하는 사랑보다 노년의 사랑이 애틋함이 더 큰 것 같아요.
작품 속 유독 와 닿았던 장면이 있다면?
아마 대부분의 나이 많은 한국 남자가 그렇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표현을 잘 못해요. 물론 저도 그렇고요. 말 안 해도 어련히 알겠지 해요. 박만돌도 마찬가지예요. 옥분이가 떠난 뒤 그녀가 쓴 편지를 읽으며 후회하는 장면이 있거든요. “씩씩한 박만돌 씨 보세요” 하고 글이 시작되는데, 매번 그 편지를 읊을 때마다 눈물이 나고 가슴이 아프고 먹먹해요.
뮤지컬 넘버 중 가장 공감 갔던 노래는?
오승근의 ‘있을 때 잘해’라는 곡이 있어요. 노래는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가사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었어요. 작품을 하고 나니 너무 공감되더라고요. 있을 때 잘해, 후회하지 말고. 이 노래 가사는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사랑 이야기에 필요한 말 같아요. 저와 옥분이의 듀엣곡인 노사연의 ‘사랑’도 참 좋아하는데요. 사랑한다고 말 한마디 못해본 두 사람의 상황을 대변하는 가사라 부를 때마다 늘 슬퍼요.
또래인 중장년층에게 들려주고픈 곡이 있다면?
중장년층들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경우가 많잖아요. 언제나 가족 걱정부터 하고 정작 자기 자신을 돌볼 시간은 없죠. 가끔씩이라도 스스로에게 아모르파티에 나오는 가사처럼 응원의 말을 건네면 어떨까 싶어요. ‘자신에게 실망하지 마, 모든 걸 잘할 순 없어.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면 돼, 인생은 지금이야.’
개인적으로 활동하며 힘들었던 순간은?
일본에서 활동할 때는 극단에 소속돼 있어서 주기적으로 공연을 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한국으로 돌아온 뒤 다시 이기동이란 이름을 알리기가 힘들더라고요. 발로 뛰면서 오디션을 보러 다녔죠. 그 과정에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기도 했고요. 자리 잡는 데 한 4년 걸린 것 같아요.
오랜 무명 생활에도 무대를 떠나지 않은 이유는?
이 질문이 가장 어려운데요. 고등학교 연극반에서 연기를 처음 시작했고, 서울예대에서 연기를 전공했어요. 그때부터 자연스럽게 인생을 배우로 시작해 배우로 마감하자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정해진 운명처럼 느껴졌다고 할까요? 근데 나이가 든 지금도 여전히 그런 생각을 해요.
앞으로의 계획이나 꿈이 있다면?
30년 가까이 활동을 했지만 아직도 저는 미완성인 것 같아요. 언제 완성될지 모르겠지만, 지금보다 내년, 내후년에는 더 나은 연기자가 되고 싶어요. 또 다른 꿈이 있다면, 배우가 아닌 감독으로서 관객들에게 사랑받는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어요. 그게 바람 중 하나입니다.
뮤지컬 '아모르파티'
일정 11월 29일까지 장소 JTN 아트홀 1관
연출 이영수 출연 이기동, 이보라, 오산하, 이경수 등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사상 최다 노미네이트, 두 번의 여우주연상과 한 번의 여우조연상 수상. 이 놀라운 기록을 보유한 자는 누구일까? 바로 할리우드 배우 메릴 스트립이다. 1977년 영화 ‘줄리아’로 데뷔한 뒤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60여 작품에 출연한 메릴 스트립은 성별과 연령의 한계를 뛰어넘고 오직 연기력만으로 전쟁터 같은 할리우드에서 최고의 자리를 지킨, 그야말로 ‘철의 여인’ 같은 배우다. 우아하면서도 압도적인 그녀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어쩐지 스크린 속 캐릭터가 실존 인물이 아닐까 하는 착각까지 든다.
이번 주 브라보 안방극장에서는 할리우드 최고의 배우 메릴 스트립의 연기가 돋보이는 영화를 소개한다. 소개하는 작품은 모두 넷플릭스에서 만나볼 수 있다.
1.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The Devil Wears Prada, 2006)
사회부 기자를 꿈꾸는 '앤드리아'(앤 해서웨이)가 최고의 패션 잡지 '런웨이'에 입사해 까다롭기로 유명한 편집장 '미란다'(메릴 스트립)와 함께 일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는다. 과거 패션 잡지 ‘보그’ 편집장의 비서로 일했던 작가 로렌 와이스버거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영화에서 메릴 스트립은 냉철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편집장 연기를 완벽하게 소화해 호평을 받았으며, 제64회 골든 글러브 시상식에서 뮤지컬·코미디 부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앤 해서웨이 또한 20대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사회 초년생 연기로 작품의 완성도를 더하며 메릴 스트립과 나이 차를 뛰어넘는 환상의 호흡을 자랑했다.
2.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 (Kramer Vs. Kramer, 1979)
아내와 엄마로서의 삶에 지친 '조안나'(메릴 스트립)가 남편 '테드'(더스틴 호프만)와 아들 '빌리'(저스틴 헨리)를 두고 떠났다 1년 만에 돌아와 양육권 소송을 거는 이야기를 다룬다. 가족의 해체를 소재로 한 고전 영화로, 이혼 가정이 많지 않았던 1970년대에 큰 반향을 일으킨 작품이다. 당시 데뷔한지 약 3년이 넘은 신인배우였던 메릴 스트립은 이 영화로 아카데미 시상식의 전초격인 골든 글로브상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며 세간의 주목을 받고 할리우드 스타로 급부상했다. 이혼 후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을 통해 역설적으로 가족의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으며, 더불어 메릴 스트립의 젊은 시절 모습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3. 시크릿 세탁소 (The Laundromat, 2019)
유람선 사고로 남편을 잃은 '앨런'(메릴 스트립)이 터무니없는 보험료에 수상함을 느끼고 보험 회사로 향하며 벌어지는 내용을 그린다. 2016년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조세 회피 자료 '파나마 페이퍼스' 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작품으로, 영화의 원제인 '세탁소' 또한 옷이 아닌 돈 세탁을 의미한다. 불법적인 자금 세탁을 고발한다는 영화의 메시지를 보다 선명하게 전달하기 위해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제작됐으며, 배우들은 작품 안과 밖을 유기적으로 이동해가며 내레이터와 연기자 두 가지 역할을 모두 소화한다. 주인공을 맡은 메릴 스트립 또한 영화 후반부에는 극중 역할에서 벗어나 영향력 있는 배우이자 한 나라의 시민으로서 탈세를 지적하는 강력한 메시지를 던진다.
몇 년 전부터 나만의 북큐레이션으로 무장하고 독자와 호흡하는 소소한 이벤트로 세상에서 사라져가고 있던 동네 책방을 되살려내고 있는 책방지기들이 등장했다. 이곳 동네 책방 한쪽에 앉아 차 한 잔 마시며 조용히 책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가슴속 묻어뒀던 작은 행복 하나가 ‘똑똑’ 심장을 두드리며 응답한다.
“남에게 보이는 것보다 내가 행복한 삶’이 좋다. 오늘 당장 떠날 것, 가까운 동네 책방으로!!”
전국동네책방네트워크에 가입된 독립서점들을 살피다 보니 눈에 확 들어오는 이름이 있다. 마치 “저를 찾아와주세요… 저요, 저요” 하고 손을 드는 것처럼 시선을 붙잡아 맨 곳. 바로 ‘날일달월’이다.
일단 인터넷에서 ‘날일달월’ 웹사이트와 블로그, 인스타그램 등을 찾아봤다. 색다르다. 비건식당? 아니, 책방에서 채식주의자들을 위한 음식을 판다고? 컴퓨터 모니터 화면 속에는 컬러풀한 채소들로 가지런히 상차림한 사진이 올라와 있다. 고민할 것도 없이 이번 호에 소개할 동네 책방으로 선택했다.
‘날일달월’은 2호선 강변역 근처에 위치해 있다. 강변역에는 동서울터미널이 있어 늘 사람이 북적이고 어수선한 곳이다. 이런 번잡스런 곳에 독립서점이라니? 의아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동네 책방이 산골에도 생기고 우리 동네 구석탱이에도 있는데 터미널이 무슨 상관일까 싶었다.
건물 3층에 위치한 ‘날일달월’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열심히 채소를 씻던 분이 반겨준다. 먼저 점심 메뉴로 미역콩국수진지를 주문하고 창가에 앉았다. 한국의 마사 스튜어트라 불리는 이효재 씨와 언뜻 인상이 비슷하다. 머리에 두건을 두르고 광목 앞치마를 둘렀다. 한눈에 봐도 대표인 듯 보였다.
창가를 제외한 벽면에는 책들이 가득 꽂혀 있다. 찬찬히 살펴보니 출판사별로 칸이 나뉘어 있다. 서가를 살펴보다 음식 준비에 바쁜 주방으로 다가가 물었다. “혹시 이곳 대표님이신가요?” 그러자 살포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아! 제가 이메일로 인터뷰 요청을 드렸는데 답장을 기다리지 못하고 궁금해서 와봤습니다.” 이렇게 해서 여희숙 대표와 날일달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생채식 식당과 작은 책방의 조합
‘날일달월’은 2018년에 문을 열었다. 비영리법인인 한국도서관친구들 대표를 맡고 있는 여희숙 씨가 개인적으로 운영하는 생채식 식당이자 작은 책방이다. 여 대표는 교사 생활과 독서시민운동 등을 하며 평생 책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왔다. 그러면서도 오래전부터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독서모임을 하고 저자와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을 갖고 싶다는 꿈을 간직하고 있었다.
2017년경 자녀들이 모두 성장해 독립을 하고 은퇴한 남편과 덩그러니 넓은 아파트에 살면서 큰 공간이 별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즈음 건강이 안 좋아진 남편 덕(?)에 먹거리도 완전히 바꾸게 됐다. 이래저래 그동안 살아왔던 삶의 패턴을 바꿔야 할 때 거추장스럽기만 한 대형 아파트를 호기롭게(?) 팔고 두 부부가 살기 적당한 크기의 아파트로 옮겼다. 그리고 집 앞의 빌딩 3층을 임차해 책방 공사를 시작했다.
나만의 공간인 동네 책방을 만들 계획을 세우고 나니 전국 각지의 ‘도서관친구들’ 회원 성원이 하늘을 뚫을 듯했다. 이왕이면 전국 곳곳에 그물망처럼 뻗어 있는 네트워크를 활용해, 친환경 농산물이나 전통적인 방법으로 만드는 식재료를 소개하면 어떻겠냐는 의견도 많았다. 사실 전국에서 도서관 서포터즈를 하는 이들의 경우 귀농을 해 친환경 농사를 짓고 있거나 여러 가지 먹거리 관련 일을 하는 이가 많았기 때문에 이런 생각들이 자연스럽게 공유됐다.
이런 과정을 거쳐 여희숙 대표가 ‘가장 좋아하는 책’과 ‘가장 필요한 생채식 먹거리’가 조합된 ‘날일달월’이 탄생했다. 책방에 식당?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날일달월에 들어서면 오묘한 조합을 느낄 수 있다. 그러면서도 흔히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확’ 풍기는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아 놀라게 된다. 여 대표는 생채식 먹거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생채식이라 지지고 볶을 일이 없어요. 음식 냄새가 나지 않아서 책을 읽거나 고를 때 거슬리는 게 전혀 없습니다. 채식동호회나 환우회 카페 등을 통해 알고 방문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데 오히려 이분들은 ‘채식 전문식당인 줄 알고 왔는데 책방이네?’ 하며 놀라고 가요.”
낭독모임, 희곡 대본 읽기 등 프로그램 다양
여희숙 대표는 오랫동안 독서모임을 꾸리고 진행해왔던 터라 작은 책방을 열고 나서도 꾸준히 모임을 이끌고 있다. 현재 4팀의 독서모임을 이곳에서 하고 있는데 성격도 다채롭다. 주로 시니어들이 함께하는 월요일의 독서모임은 낭독모임이다. 얼마 전 1년간 이어진 ‘열하일기’ 낭독이 끝나고 현재는 ‘돈키호테’를 낭독 중이다.
코로나19 영향으로 새롭게 등장한 모임도 있다. ‘연극배우와 함께 희곡 대본 읽기’다. 연극 공연이 줄줄이 취소되면서 힘들어진 연기자들을 조금이나마 지원하고 싶어 ‘좋은 희곡 읽기 모임’ 대표인 장용철 연기자와 함께 진행하고 있다. 지난 6월에는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 희곡 대본을 함께 읽으며 연기의 맛을 조금 맛봤다. 이후 6주 코스로 ‘햄릿’을 낭독했고 현재는 ‘오이디푸스’를 함께 읽고 있다.
초등학교 교사들과 함께하는 독서모임도 2팀이나 있다. 22년간 초등학교 교사생활을 한 여희숙 대표는 어린 시절의 독서 지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교사들과의 모임은 아무리 피곤하고 힘이 들어도 이끌어나가고 있다. “어느 날은 오전 오후 꽉 찬 독서모임을 하면서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를 때가 많지만 마음만은 너무 행복하다”며 환하게 웃는다.
이밖에 ‘그림책 따라 그리기 100일 프로젝트’도 있다. 그림책 한 권을 정해 그림을 그대로 따라 그리는 모임이다. 최근에는 안승준, 홍나리 작가의 ‘어느 날 우리는’을 따라 그렸다. 이 책에는 고양이와 사자, 돌고래 등의 동물들이 등장하며 그림책 속 QR코드를 스캔하면 노래와 함께 애니메이션 뮤직 비디오까지 감상할 수 있다. 젊은 친구들의 호응이 특히 높다.
또 백승우 감독이 진행하는 금요시네마는 2018년 8월부터 꾸준하게 진행해왔다. 한 달에 한 번 매월 둘째 주 금요일 백 감독이 큐레이션한 작품을 함께 보며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날일달월의 빼놓을 수 없는 대표 프로그램이다.
한편 8월부터 11월까지 마지막 주 금요일에는 ‘금요일, 달이 뜨면 심야책방으로!’ 이벤트가 열린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사단법인 한국서점조합연합회가 함께하는 ‘심야책방 2020’은 서울 지역에서 ‘날일달월’을 포함, 15곳의 동네 책방이 참여한다.
‘날마다 달마다 좋은 책과 음식을 먹으면 밝아진다’는 의미를 담아 이름을 지었다는 ‘날일달월’. 이곳에서 금요일 둥근 달이 뜨면 가족과 함께 친구와 함께, 조용히 책 한번 읽어보면 어떨까? 심야먹방 아닌 심야책방을 꿈꾸며.
Mini Interview ‘날일달월’ 여희숙 대표
여희숙 대표는 출판계와 교육계에서 유명한 인물이다. 진주교대를 졸업하고 마산과 하동, 광양, 포항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22년을 근무했다. 교사 시절 교실마다 작은 학급 도서관을 만들어 ‘아이들과 함께 책 읽는 선생님’으로 소문이 날 만큼 아이들에게 책 읽기의 생활화를 몸에 익히게 했다.
교사 일을 천직으로 알고 누구보다 열심히 일해왔던 여 대표에게 시련이(?) 닥친 것은 포스코를 다니던 남편이 서울로 발령이 나면서였다. 천직을 포기할 수 없어 주말 부부로 살기를 3년. 결국엔 사직서를 쓰고 남편과 합류하면서 서울 광진구에 정착했다. 낯선 서울 생활은 오로지 동네 도서관에서 책 읽는 즐거움으로 버텨냈다.
독서시민운동에 나서게 된 계기 역시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하는 여희숙 씨를 사서가 눈여겨보고 도움을 요청하면서였다고. 이후 2004년부터 본격적으로 ‘도서관친구들’ 활동을 시작해 현재 전국 회원 1만2000명에 달하는 비영리법인 대표를 맡고 있다. ‘도서관친구들’은 보령, 정읍, 남원, 광주, 진주, 울산, 창녕 우포, 부산, 제주, 부천 등 전국 16개 지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2004년부터 활동했으니 16년의 세월이다. 이렇듯 오랜 시간 독서시민운동가로 활동한 여 대표는 KBS, EBS, 교통방송 등을 통해 아이들의 독서와 토론 지도를 위한 학부모 강좌를 진행하거나 패널로 출연, 독서 토론의 길잡이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펴낸 책으로는 2001년 ‘1년을 쓰고 50년을 간직할 독서노트’를 시작으로 ‘책 읽는 교실’, ‘토론하는 교실’, ‘도서관 친구들 이야기’, ‘아이는 도서관에서 자란다’ 등이 있다.
‘날일달월’ 서울 광진구 구의강변로 57 서림빌딩 3층
배우 이광기(52)를 보면 여전히 소년의 이미지를 가졌다는 생각이 든다. 지천명의 나이를 넘겼지만 천진한 외모와 자연스럽게 배어나오는 젊음, 그리고 호기심과 도전의식의 천성을 보여주는 행보가 그렇다. ‘태조 왕건’, ‘정도전’ 등의 작품들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긴 그는 요즘 아트 디렉터로서 제2의 인생을 개척하는 중이다. 유튜브 개인 채널에서 예술 경매라는 독보적인 콘텐츠를 진행하고 있는 그는 예술과 종합적인 공연 프로그램을 결합한 릴레이 라이브 ‘온라인 아트쇼’ 런칭을 준비하고 있다.
여전히 코로나19가 모든 상황을 지배하는 듯한 세상이지만, 엄혹한 가운데에서도 미래를 위한 삶과 변화를 추구하는 분야들이 하나씩 생기고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게 예술 분야.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고 공유의 가치를 중요시하는 예술의 특성은 지금 시대에 필요한 가치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그 현장에 아트 디렉터로 제2의 삶을 개척하고 있는 배우 이광기가 있다.
2000년부터 일찌감치 작품 수집을 시작하여 콜렉터로서 자신의 기반을 닦은 그는 요즘 한창 새로운 도전을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8월 21일부터 23일까지 진행될 온라인 아트쇼 준비를 위해서다.
예술과 공연, 온·오프라인의 결합, ‘아트쇼’를 만들다
“이 위기의 시대에 어떻게 하면 예술의 저변 확대에 도움이 될까 해서 제가 기획했어요. 마침 아트경기에서 프로그램을 함께하면 좋겠다고 연락이 와서 기획안을 올렸는데 다행히 통과가 돼서 지원금을 받을 수 있었죠. 물론 그 돈으로는 부족하기에 옥션에서 일부 수익금, 그리고 후원해주시는 지인들에게 후원금을 받아서 진행하게 됐어요.”
200평 규모의 이광기가 소유한 스튜디오 ‘끼’에서 전반적인 이벤트들이 진행되는 아트쇼는 예술과 연계한 다양한 문화 이벤트로서 기획되었다. 김미경 강사의 팬데믹 시대 분석 강연과 함께 첼리스트 김규식, 피아니스트 조윤성 등 연주자들이 클래식부터 트로트까지 포괄하는 장르의 음악 공연을 한다. 또한 음악 치유 명상 콘서트와 젊은 작가들의 디지털 미디어 아트 및 라이브 경매까지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준비되어 있다.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사전예약을 통해 경험할 수 있는 오프라인에서뿐만 아니라 스트리밍을 통해 온라인에서도 동시에 진행될 예정이다. 그는 코로나19 사태와 긴 장마로 인한 피해가 속출한 현재, 위기를 예술로서 극복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한다는 목적을 밝혔다.
“아트쇼를 통해 말 그대로 다원예술을 실천하는 장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걸 하나의 롤 모델, 브랜드화해 공간에 구애받지 않는 프로그램을 만들고자 합니다.”
‘아트 디렉터’ 이광기를 만나다
수년 전만 해도 배우 이광기가 순수예술계에서 아트 디렉터로서 활약하는 모습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더없이 행복해 보였다.
“저도 사실 지금이 행복해요. 그러나 연기자였기 때문에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다양한 역할을 해봤고, 연기나 예술이나 맥락에 있어 뿌리는 하나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는 순수예술 분야의 일을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다. 10년 전에 아이티 봉사를 다녀오면서 삶의 전환점을 갖게 된 그는 그때 처음으로 월드비전과 함께 그림으로 자선 전시회를 해서 기금을 모았다. 그리고 좋은 그림들이 낙찰될 때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보며 그의 제2의 인생도 열렸다.
“나중에 이걸 공중파에서 해서 대중들에게 예술을 접할 기회를 늘리고 작가들에게 도움을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예능으로 가야겠다 싶어서 몇몇 제작사와 얘기했는데, 아무래도 모험하기를 어려워하더군요. 이해합니다. 워낙 요즘은 시청률에 민감한데 미술로 시청률이 나오기는 힘드니까요.”
그렇게 노크만 하다가 작년부터 뭔가 슬슬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유튜브를 시작했다. 그가 만든 1인 방송국 ‘광끼채널’에서 중점으로 하는 콘셉트는 미술 경매와 쇼를 결합한 새로운 포맷이다.
“이건 경매를 차용한 쇼다. 나는 작가들을 소개하자. 물론 팔리면 작가도 좋으니 열심히 하고.(웃음) 그렇게 매주 해서 벌써 20회가 됐어요. 너무 감사한 것은 지금까지 백 퍼센트 낙찰되었다는 점이죠.”
행복하게 만드는 게 가장 가치 있는 투자
아트 디렉터로서뿐만 아니라 유튜버로서도 그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 이광기. 다수의 사극에서 유독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그가 이렇게 얼리어답터적이고 프런티어적인 사람이었나 싶다. 그의 이런 ‘진취적인 정신’의 이면에는 예술에 대한 사랑이 굳게 박혀 있기 때문이다.
“그림을 보면 행복해야 해요. 그렇지 않은 그림을 가지려고 하면 투기가 되는 거죠. 내가 주인공이 되어야 하지, 작품이 주인공이 되면 투기가 되는 겁니다. 그 균형을 잘 잡아야 해요.”
그는 그림이 부동산이나 주식과는 다르게 눈으로 바로 볼 수 있는 것이 큰 장점이라고 설명했다. 그림은 그 무엇보다 분명한 유형의 가치라는 것이다.
“아침마다 볼 수 있고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있고 같이 공유할 수 있고. 그림처럼 내 것이지만 다른 사람들과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게 앞으로 가장 가치 있는 투자가 될 수 있다고 봐요. 저는 문화를 또 다른 투자 개념으로 생각합니다.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게 어떤 투자보다 가치 있는 투자예요.”
작품은 많이 볼수록 보는 눈이 생겨
올해로 콜렉터로서 어느새 20년 차. 이쯤 되자 이광기가 미술 작품을 선정하는 기준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많이 보는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과감할 때는 과감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무엇보다 내가 좋아야 해요. 남이 좋다고 해도 내가 싫으면 굳이 살 필요 없습니다. 저건 소장가치가 있다고 해도 내 집 벽에 걸지 못하면 뭔 소용인가요. 나와 교감되는 작품을 찾아야죠.”
그는 상업성, 예술성, 역사성으로 볼 때 작가가 이 중 한 가지만 갖고 있어도 성공했다고 본다. 이 기준을 보면 우리나라 작가의 작품들 중 사고 싶은 게 많은데, 그중에서도 가장 저평가받고 있는 사람이 백남준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미디어 아트의 대가 백남준이 저평가받고 있다니 의외의 말이었지만 그는 나름의 논리가 있었다.
“백남준 선생님 작품은 상업성, 예술성, 역사성을 다 가지고 있죠. 미디어 아트의 창시자로 미술사에 기록됐고, 백 선생님이 퍼포먼스의 귀재였으니 스토리와 상업성도 있고, 예술성도 있죠. 이런 작가는 흔치 않은데 그에 비하면 저평가된 셈이죠.”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백남준의 작품이 어렵다고 여기지만 잘 찾아보면 그렇지도 않다며 자신이 소장 중인 백남준 작품을 보여줬다. 놀랍게도 판화 작품이었다. 백남준이 판화 작업도 했다니 의외였고 “잘 찾아보면 있다”는 이광기의 말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백남준 작품을 미술관에 대여도 해주고 있어요. 그러면 뿌듯하죠. 뭔가를 공유하기란 쉽지 않잖아요? 하지만 미술품으로는 그게 가능하니까요. 어마어마한 가치라 생각해요.”
50대, 또 다른 삶을 선물로 받았다
이광기는 요즘 앞으로의 기대 때문에 설렌다고 한다. 아트 디렉터로서, 유튜버로서 50대를 맞이한 그에게 미래는 넓게 열려 있었다.
“아직까지는 투자인 셈이죠. 별것 없어요.(웃음) 적자가 안 나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이 어려운 시기에 저와 손잡고 일하고 싶어 하는 분들이 있다는 것도 그렇고요. 적절하게 할 수 있는 일들을 도모하면 좋을 듯해요.”
사실 작금의 코로나19 상황은 과거에 자식을 잃은 그의 아픈 기억을 상기시키는 면이 있을 것이다. 그때 그는 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했고 아이티로 봉사를 떠났으며 현재의 이광기로 다시 태어나는 새로운 삶의 전기를 맞이했다.
“십 년 전 큰 상처가 없었고 아이티에 가지 않았다면 방송인 이광기로 남아 하루하루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았을 거예요. 오십이 될 때, 요즘은 백세시대니까 인생의 반을 산 거라 생각했어요. 또 다른 삶을 선물로 받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받은 선물이니 가치 있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어요. 그래서 저는 항상 나눔을 생각해요. 십일조를 하는 마음으로 하면 어렵지 않더군요.”
내가 주체가 되는 것이 중요해
이광기에게는 요즘 미션이 있다. 자신의 유튜브 채널을 더욱 활성화하는 것이다.
“매주 실시간으로 60여 명이 들어오는데 100~150명 정도만 되어도 좋을 거 같아요. 구독자 수는 1900명 조금 못 되는데 모두 충성 구독자예요. 여기서 조금 더 늘어나려면 콘텐츠를 다양하게 운영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인테리어, 부동산, 요리, 패션 등 라이프스타일을 찾아가는 시도를 해볼까 생각하고 있어요.”
영상 콘텐츠를 개인이 직접 만드는 세상이 됐기에 그는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플랫폼 공간만 있으면 방송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중요한 것은 온라인 콘텐츠로 무엇을 할 것인가다. 그는 당분간 그 부분에 집중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공유경제에 기반한 블록체인 구조가 보편화되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사회적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 그는 그 생각을 따라 공유가 만드는 새로운 가치에 대해 계속 파고들 계획이다.
“중요한 건 내가 주체가 되는 거죠. 스스로 모든 걸 만들 수 있는 시대에, 예술 분야에선 나름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하니 그 가치를 더 크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아내 외에 진성이 고마워하는 사람이 또 있다. 올여름에 집에 초대할 두 명을 꼽아 달라고 하자 그는 서슴없이 탤런트 김성환과 가수 남진을 말했다.
“무명 시절 야간업소를 전전할 때 김성환 씨를 알게 됐어요. 인기에 연연하지 않는 진정한 연기자이지요. 제가 아플 때도 많은 도움을 주셨어요. 가슴속으로 늘 형님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진 형님도 수십 년 전부터 저를 만나면 항상 좋은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노력하면 언제든 좋은 기회가 올 것이라고 용기를 북돋워주셨죠. 대중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며 자신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중가수의 참모습을 두 분에게서 봅니다.”
그렇다면 가수 진성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기억되고 싶을까?
“저는 시골에서 자란 촌놈이에요. 어렸을 때 마음먹은 거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히트곡 한두 개 만들면 ‘그 친구 그런 대로 노래는 좀 했지’라고, 그렇게만 기억해주면 인생 괜찮게 살았다고 생각해요. 인생에는 음과 양이 있는데 양은 언제든 음으로 변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이 저를 너무 칭찬하면 불안해요. 그냥 ‘그 가수 괜찮았어’ 하면, 그 정도면 성공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진성다움은 ‘진정성’에 있다
진성은 이제 다수의 오리지널 히트곡을 보유한 트로트계의 스타로서 ‘괜찮았다’라는 평가 이상을 받는 가수가 되었다. 그럼에도 그가 존경한다는 남진처럼 적극적이고 꾸준하게 자기관리를 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못난놈’, ‘상팔자’ 등 신곡 4곡이 담긴 EP를 발매하고 적극적인 예능 활동을 펼치고 있다.
“작년에 올해의 계획을 세워놨는데, 코로나19 때문에 대중과 가깝게 만나지 못하고 있어요. 그래서 요즘은 방송을 많이 하는데 방송의 본질을 잘 알고 활동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처음에는 얼굴을 그저 알리는 데 포맷을 맞추다 보니 ‘오버’도 하고 더러 눈살 찌푸리게 하는 행동도 하고 그랬는데… 그런 모습이 제가 봐도 좋지 않아 보일 때가 있어요. 물론 버라이어티적 관점으로 보면 그런 재미도 필요하지만, 그 경계를 잘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요. ‘진정성 있게 가는 게 진성답다’라는 얘기를 많이 듣기도 하고요,”
나이 들면서 좋아지는 게 있냐고 물었더니 완숙미를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늙어가는 게 아니라 익어간다’는 말이 참 적절한 표현이라고 했다.
“멋지게 나이 들려면 자신을 낮추면 돼요. 옛날 얘기가 하나도 틀린 게 없어요. 벼가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고 하잖아요. 우리 나이가 되면 그걸 터득해야 해요. 저는 100%는 아니지만 이제 50%는 겨우 알 거 같아요.(웃음)”
최고의 음악 선보이며 마무리하고파
진성은 40대 중후반까지만 해도 노후에 대한 확실한 보장이 없어 불안했다고 한다. 다행히 이젠 먹고살 만한 정도는 됐고, 홀가분해졌다고.
“히트곡이 한두 개 더 나와줬으면 하는 마음이에요. 하지만 일흔을 넘어서까지 노래를 하고 싶진 않아요. 60대 중후반 정도에 은퇴할까 생각 중입니다.”
최고의 전성기를 달리고 있지만 그간의 삶이 쉽지만은 않았던 때문일까. 그는 이미 30년 전부터 은퇴 나이를 결심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제 가수로서의 진성을 볼 수 있는 시간은 5~6년 정도 남은 셈이다.
“노래 봉사도 눈동자가 살아 있을 때 해야죠.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자리를 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과거의 그처럼 지금도 수십 년째 무명생활을 하고 있을 누군가가 생각나서일까. 그러나 당장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여전히 진성을 사랑하는 팬이 있고 코로나19라는 시대적 상황 때문에라도 더 그렇다.
“지금 전국적으로 행사가 거의 없어요. 그래서 방송에 매진하다 보니 팬들과 가깝게 교류하고 싶어도 못하는 상황이고요. 하지만 가수를 일 년 하고 끝낼 것도 아니고 몇 년은 더해야 하니까 좋은 시절이 오면 여러분 곁에 가고 싶어요. 저는 라이브 가수예요. 좀 더 내실 있는 음악을 만들고 선보이면서 인생을 마무리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