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은 실패에 절망하지만 어떤 사람은 귀중한 경험이라고 일어선다. 에디슨은 수 없는 실험을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에디슨이 될 수 있었다. 한국이 UAE 바라카 원전을 세울 때 8100번의 설계 변경이 있었다고 한다. 사막의 예상치 못한 변수 때문이었다. 지치지 않고 설계를 변경하며 사막에 적응한 한국인들 모두가 에디슨이었다.
외국 낯선 여행지에서 만난 현대자동차, 삼성, 엘지의 광고판에서는 한국인의 땀과 피가 느껴져 뿌듯했다.
북한의 민둥산과 황폐한 거리를 보며 불과 50년 전쯤의 남한 모습도 다르지 않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조그만 나라, 자원도 없는 나라, 지형적으로 부침이 심해 남의 나라에 전쟁터로 내주어야 했던 내 조국은 그렇게 쓸쓸하고 황폐하고 도무지 기댈 곳이 없이 막막했었다. 있으나 마나 한 나라는 흔들렸고 세상은 암울했으며 어디에도 희망은 없었다. 그들의 20대는 공장과 초라한 닭장 집을 오가며 사라져갔다. 그 시절 태양은 희미하고, 사랑은 오히려 비정하고, 청춘도 결코 젊지 않았다. 그들에게 청춘은 오히려 저주였을 것이다.
그러나 자식들은 나보다 잘살게 하겠다고 치맛바람까지 일으키던 교육열. 가족과 나라를 위해 기꺼이 헌신했던 아버지들. 자식과 남편을 위해 자신을 송두리째 내던진 수많은 어머니. 영웅이 아니라 그들이 진정한 나라의 초석이 되었다. 새삼 북한을 바라보며 더욱 감사하는 마음이 드는 것은 나만의 일은 아닐 것 같다. 그러나 요사이 일어나는 불신들이 두렵다.
일에는 항상 긍정과 부정이 존재하게 마련이다. 그 부정이 계획적인 것인지 일의 진행상 일어날 수밖에 없는 시행착오인지를 따져봐야 할 것 같다. 모두를 부정으로 몰아가는 사회는 성숙하기 어렵다. 두려움이 실험이나 시도를 움츠러들게 하기 때문이다.
“임자, 해 봤어? 현장에 가 봤어?”
정주영 회장의 트레이드마크다. 하는 일마다 노리듯 비난만 하는 환경에서 누가 현장에 가 볼 수 있겠는가? 세상에는 가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또 이해할 수 없는 망가진 사람을 만나기도 하지만 그래도 상식적인 보통사람이 훨씬 많이 살아가고 있다. 나 빼고 모두 비정상이라는 오만과 편견을 가져서는 우리에게 도움이 안 된다.
무협지 영웅은 적군의 목을 낙엽처럼 떨어지게 하고, 몇 마디 연설로 군사를 사로잡는다. 우리 보통 사람들은 그 영웅에게 짹소리 못하고 낙엽처럼 쓰러지며, 또는 힘없이 이름 없이 전사하여 강물을 붉게 물들인다. 우리 보통사람들은 영웅이 아니고 그의 칼에 쓰러지는 군사이며 그의 말에 벌떼처럼 전사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모두 영웅을 바라볼 뿐 우리 소시민에게는 주목하지 않는다. 그래서 소시민은 자신을 구해 줄 영웅을 갈망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눈 뜨면 나가 일하고 소박한 희망을 품고 세월을 살아내는 소시민들이 진정한 영웅이다. 그들이 나라의 기초를 구성하는 진정한 시민이다.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들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안치환의 노래 중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가사가 있다. 르누아르의 작품을 보면 ‘그림의 아름다움’보다는 ‘사람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표현하는 듯하다. 또, 그림을 통해 사람의 가치와 품격을 한층 격상시켰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1841년부터 1919년까지 78년을 살다간 오귀스트 르누아르(Auguste Renoir). 그는 공방에서 도자기에 장식하는 그림을 그리는 도공 일을 시작으로, 22세가 되는 해에 정식으로 그림을 그리게 된다. 79세에 폐렴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는 많은 그림을 그렸는데, 여성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작품이 주를 이룬다. 특히 50세가 되어갈 무렵 류머티즘으로 뼈가 뒤틀리고 마비되는 고통 속에서도 손에 붓을 묶어가며 우울한 그림보다는 기쁨과 행복을 표현하는 그림을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르누아르와 같은 인상파 화가들의 특징은 빛을 중요하게 여기고, 대상을 구체적으로 세밀하게 그리기보다는 어느 한순간 인상 깊게 느낀 장면을 그리려고 시도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인상파 화가들은 고전적인 전쟁, 신화, 영웅들의 틀에 박힌 모습이 아니라 평범한 주위 사람들의 모습이나 자연풍경과 같은 일상을 주로 그렸다.
선과 색을 뚜렷하게 표현하지 않는 대신 반짝이는 빛을 담기 위해 노력했다. 클로드 모네의 ‘해돋이’, 에드가르 드가의 ‘계단을 오르는 발레리나들’, 르누아르의 ‘무지 발의 무도회’, ‘뱃놀이하는 사람들의 점심 식사’, ‘피아노 치는 소녀’ 등에서 보여주듯 어느 한순간의 장면을 생동감 있게 묘사하는 특징이 있다.
이러한 특징을 살린 ‘르누아르: 여인의 향기展’은 르누아르의 작품을 마치 살아있는 듯 감각적인 영상으로 재현한 컨버전스 아트(Convergence Art)와 음악이 조화를 이루며 오감이 즐거운 체험형 예술전시로 꾸며졌다.
마치 그림 속 인물들이 살아있는 듯 눈을 깜박이고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 등 행복한 모습을 그린다. “그림이란 소중하고, 즐겁고, 아름다운 것이다. 그렇다, 아름다운 것이어야 한다”라던 르누아르의 말을 그대로 실현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번 전시는 여러 개의 방으로 구분하여 그의 예술 세계를 감상할 수 있다. ‘PROLOGUE 꽃의 연희’, ‘Ⅰ 몽마르트 가든’, ‘Ⅱ 미디어 화랑’, ‘Ⅲ 드로잉 뮤지엄’, ‘Ⅳ 그녀의 실루엣’, ‘Ⅴ 우아한 위로’, ‘Ⅵ 르누아르의 아틀리에’, ‘EPILOGUE 그의 향기’ 등으로 구성된다. 이중 ‘Ⅰ 몽마르트 가든에서는 인상주의의 주 소재인 다채로운 색상으로 표현된 르누아르의 풍경화를 볼 수 있으며, ’Ⅲ 드로잉 뮤지엄‘에서는 르누아르가 5분 만에 드로잉을 하였다는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사각사각’ 소리까지 들려 마치 르누아르가 지금 이 그림을 연필로 스케치하는 듯하다.
또한 ‘Ⅳ 그녀의 실루엣’에서는 그가 진정 추구하고 그리고자 했던 여성의 아름다운 ‘누드화’를 감상할 수 있다. ‘잠자는 소녀’, ‘시냇가의 님프’ 등은 여성의 관능적이고 우아한 모습을 곡선 인테리어의 노출과 천 투사 효과로 표현했다. 특별한 모델이 아닌 우리 일상의 소재로 자신의 부인, 동생이며 가정부였던 가브리엘 르나르를 모델로 삼아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 찬 인간의 아름다움을 그려냈다.
병마와 싸우는 고통 속에서도 인간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려 했던 작가의 노력에 새삼 고개가 숙어지기도 한다. 지난 5월 12일 시작된 ‘르누아르: 여인의 향기展’은 올해 10월 31일까지 갤러리아포레 G층 본다비치 뮤지엄 서울숲에서 만날 수 있다. 르누아르의 그림을 대하면서 인간에 대한 존엄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느꼈기에, 한 번쯤 다녀오시길 권한다. 더불어 서울의 도심 삭막한 빌딩 숲속에서의 ‘서울숲’ 공원 산책은 또 다른 만족을 선사할 것이다.
1995년, 핸드볼 최고의 리그라 불리는 독일 분데스리가에 최초로 동양인 선수가 등장했다. 13년 뒤 그는 독일인들이 핸드볼의 신이라 칭송하는 영웅이 되어 한국에 돌아왔다. 선수에서 감독으로, 3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핸드볼과 동고동락한 윤경신(46) 감독을 만났다.
두산베어스 핸드볼팀의 오전 훈련이 한창인 의정부종합운동장, 그곳에서 윤경신 감독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2m가 넘는 키 덕분에 멀리서도 그를 알아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의 옆에 서니 마치 개미가 된 기분이랄까. 앉으면 괜찮을까 싶어 서둘러 카페를 찾았다. 웬걸… 앉아서도 그를 한참 올려다봐야 했다.
“아버지 181cm, 어머니 170cm, 누나 174cm, 남동생이 194cm이니까 가족이 다 크죠. 엘리베이터에서 사람들이 저희 가족을 보면 흠칫 놀라곤 해요.”
그는 203cm로 가족 중에서도 가장 크다. 중학교 때부터 키가 빠르게 크기 시작했는데 2학년 땐 3주 만에 11cm가 자라 거인병을 의심했을 정도라고. 그는 다시 태어난다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190cm만 되면 좋겠다고 말한다.
“큰 키의 장점이요? 별로 없어요. 공기가 맑나?(웃음) 오히려 단점이 더 많은 것 같아요.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도 불편하고 맞는 옷을 찾는 것도 쉽지 않고, 또 사람들이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기도 하죠. 그래서 어릴 땐 큰 키가 콤플렉스였어요.”
하지만 핸드볼 선수인 그에게 큰 키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자 장점이었다. 2m 3cm 장신이 꽂아 내리는 시속 120km의 속사포를 막아낼 사람은 없었다. 1990년 북경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시작으로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금메달과 득점왕, 1995년 세계선수권대회 득점왕을 수상하며 세계에 그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핸드볼 정상에 오르다
우리나라 3대 스포츠가 축구, 야구, 농구라면 유럽에선 핸드볼이 그중 하나다. 특히 독일의 핸드볼 분데스리가는 전 세계 핸드볼 리그 중에서도 최고로 손꼽힌다. 1부 리그 18구단, 2부 리그 20구단 등 남녀 1, 2부를 통틀어 60여 개가 넘는 팀과 시합할 때마다 경기장을 꽉 채우는 수천, 수만 명의 팬들이 그 인기를 증명해준다. 1995년, 핸드볼 선수라면 누구나 꿈꾸는 무대인 분데스리가에 윤경신이 진출했다. 동양인으로는 최초라는 점에서 더욱 특별했다.
“성적이 좋다, 전통 있는 팀이다 해서 들어갔죠. 근데 가서 보니까 성적이 밑바닥이더라고요. 그 당시 16구단 중에서 13~14위를 다투고 있었으니까요.”
그가 들어간 굼머스바흐 핸드볼팀은 1부 리그에 겨우 발을 걸치고 있던 최하위 팀 중 하나였다. 2부 리그로 강등당할 뻔했던 굼머스바흐를 살려낸 주인공이 바로 윤경신. 그는 지능적인 플레이와 파워풀한 공격을 앞세워 굼머스바흐를 3위의 막강 팀으로 만들었다. 유럽 선수들 가운데서 그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이 궁금했다.
“한국에서 핸드볼을 시작했다는 게 가장 큰 무기였어요. 탄탄한 기본기와 경기 기술을 배운 게 많은 도움이 됐죠. 유럽 선수들보다 뒤처지는 웨이트 부분은 개인 트레이너를 고용해서 보완했어요. 믿기지 않겠지만 몸싸움에서 항상 밀려 나가떨어지곤 했거든요. 동료들이 오죽했으면 절 북한 괴뢰군이라고 불렀겠어요.(웃음)”
그는 첫 시즌이던 1996-1997시즌부터 2001-2002시즌까지 연속 여섯 시즌 득점왕, 다시 2003-2004시즌과 2006-2007시즌 득점왕에 오르며 역대 분데스리가 최다 골을 기록했다. 그중 2000-2001시즌엔 324골로 분데스리가 역대 유일한 300골 이상의 기록을 달성했다. 재미있는 점은 그가 2002-2003시즌 득점왕을 놓친 이유가 유럽 선수들이 동양인에게 계속 득점왕을 내주는 게 자존심 상해서 한 선수에게 7m 드로우를 몰아줘 득점왕 자리를 빼앗았다는 것이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처음 독일에 갔을 땐 텃세성 파울이 많아 힘들었다고 말했다. 또 유일한 동양인이다 보니 인종차별도 있었다고 고백했다.
“한국인은 개고기를 먹는다, 마늘 냄새가 난다. 이런 말을 들었어요. 그 고정관념을 깨주기 위해 어머니가 많이 도와주셨죠. 집으로 친구들을 초대해서 마늘이 들어간 불고기랑 잡채를 해주셨거든요. 애들이 밥을 다 먹으면 제 역할은 술 게임을 알려주는 거였어요. 독일엔 술 게임 문화가 없다 보니 ‘369’나 ‘007빵’ 같은 걸 가르쳐주면 정말 좋아했거든요. 그렇게 술 게임을 하면서 서로 친해졌던 것 같아요.”
제2의 고향, 독일과의 작별
2006년 윤경신은 함부르크로 이적했다. 그는 굼머스바흐를 떠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굼머스바흐의 구단주가 바뀌면서 그의 연봉을 삭감하는 등 부당한 대우가 많았다는 것.
“이적할 땐 배신감을 느껴서 번호도 7번에서 77번으로 바꿨어요. 그 당시엔 21번 아래 번호 선수가 주축을 이뤘는데 제가 높은 숫자로 바꾼 이후엔 다들 저를 따라 하더라고요. 나 때문에 유행한 게 맞나…?(웃음)”
2008년 그가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독일에서 가진 마지막 경기에서 공교롭게도 함부르크와 굼머스바흐 두 팀이 맞붙었다. 걱정과는 달리 굼머스마흐 팬들도 그의 마지막 경기를 응원하기 위해 모였다.
“그때 함부르크가 두 골 차로 이겼어요. 굼머스바흐를 상대로 제가 여덟 골인가 넣었죠. 유럽 사람들이 굉장히 다혈질이라 이 사태를 어떡하나 했는데 다행히도 굼머스바흐 팬들이 마지막이라고 예우를 많이 해준 것 같아요. 끝날 때 박수도 쳐주고 북도 쳐주고. 특히 대형 유니폼을 만들어서 작별인사해주던 모습은 아직도 잊히지 않아요.”
당시 독일에서 윤경신의 인기는 ‘한국은 몰라도 윤경신은 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인터넷에서 그를 검색하면 아직도 ‘핸드볼의 신’, ‘득점기계’, ‘구기종목의 전설’이라는 연관검색어들이 뜬다. 문득 그도 인터넷에서 자기 이름을 검색해보는지 궁금했다.
“검색해보는 거 좋아해요.(웃음) 사실 안 좋은 기사가 있으면 어떡하나 더 걱정하는 편이죠. 2012 런던올림픽 개막식 때 기수로 섰는데 하필 태극기가 바람에 뒤집힌 순간에 찍힌 사진이 뉴스로 나갔더라고요. 아휴… 욕 엄청나게 먹었죠. 그래도 종종 제 이름 검색해보고 새로운 기사 나오면 재미있게 읽고 있어요.”
핸드볼 선수에서 감독으로
두산베어스 핸드볼팀은 지금까지 2014년을 제외하면 한 번도 우승을 놓쳐본 적이 없는 강팀이다. 윤경신 감독은 지난 2013년, 두산의 지휘봉을 잡으면서 감독으로 데뷔했다. 부임 첫해 우승을 이끌며 감독으로서도 성공적인 출발을 보여줬다.
“처음엔 두산이 날 감독으로? 왜? 이런 의문이 들었어요. 승승장구하는 팀인데 과연 내가 들어가서 잘할 수 있을까 하는 부담감도 컸죠. 한편으론 ‘스타플레이어는 훌륭한 감독이 될 수 없다’는 말을 깨보고 싶었어요.”
하지만 우승의 기쁨도 잠시, 이듬해인 2014년 지금은 해체한 웰컴론 코로사에게 패해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다. 한 번도 우승을 놓쳐본 적 없는 두산에게 준우승은 그야말로 충격적인 결과였다.
“첫해에 우승하니까 나태해진 거죠. ‘아 이제 됐어, 이렇게 하면 2년 차에도 우승할 수 있을 거야’라고 자만했던 게 결국 패배로 이어졌어요. 그래도 한 번 넘어져봤기 때문에 3년 차, 4년 차에 더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윤경신 감독은 우승의 비결로 선수들과의 소통을 꼽았다. 비시즌에는 선수들과 거리낌 없이 술도 마시며 서로의 고민을 털어놓는다. 그러다 보니 서로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을 많이 헤아릴 수 있게 됐다고. 핸드볼과 함께한 지 어언 30여 년. 지긋지긋할 법도 한데 아직도 핸드볼이 좋을까.
“중간중간 농구해라, 배구해라 유혹이 많았었는데 핸드볼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한 제 자신을 칭찬해요. 핸드볼을 했기 때문에 외국에 나가서 명성과 명예를 얻고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잖아요.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핸드볼을 했지만, 정말이지 매 순간 행복했어요.”
다가오는 11월에 국내 핸드볼의 최강자를 가리는 핸드볼코리아리그가 열린다. 경기장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사람 윤경신, 그의 다섯 번째 우승 도전을 응원한다.
시집간 딸이 친정 부모를 생각해서 삼척으로 놀러 가자고 한다. ‘아니 웬 삼척!’ 삼척 하면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내게는 탄광이다. 삼척, 정선, 사북, 고환 일대의 탄광 지역 벨트라인이다. 업무차 여러 번 가 본 곳이다. 뒤이어 파노라마처럼 연상되는 기억들의 바탕에는 석탄이 있다. 수십 년 전의 기억이지만 어제처럼 또렷하다. 기차역 주위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던 석탄무더기 하며 시커먼 도랑물, 검은 길바닥 그리고 지하 600m 수직갱도 내에서 석탄을 캐내던 광부를 직접 만났던 일들이다. 광부라는 직업이 얼마나 고되고 위험한 직업인지 뼈저리게 느꼈다. 한마디로 삼척의 기억은 관광지로서는 ‘아니올시다’였다. 어디 갈 곳이 없어서 탄광촌에 놀러 가나! 선 듯 내키지 않았다. 딸이 시큰둥해 있는 내 표정을 재빠르게 읽었다.
“아빠, 거기에서 해양레일바이크를 타고 바다가 보이는 해변 옆으로 달리는데 경치가 아주 좋대요. 멋진 추억이 될 거예요.”
우리나라 석탄 광산은 거의 문을 닫았다. 탄광 관련으로 살던 사람들이 대부분 살기 위해 떠나 인구는 절반으로 반 토막이 나고 지역경제는 바닥을 치고 있다는 뉴스는 오래전에 접했다. 정부나 지자체에서 새로운 생존 산업으로 관광산업을 부양하고 있다는 희망찬 이야기도 물론 들은 적은 있었다. ‘그래! 예전과 많이 달라졌을 거야. 예전의 고정관념에 젖어 변화된 오늘을 외면하는 것도 외눈박이 사람이지. 딸이 가자고 할 때 따라나서야지 자꾸 손사래만 치다가는 영영 어디 가자는 소리를 안 할지도 모르지.’ 얼굴에 환한 표정을 억지라도 지으며 좋다고 가자고 했다.
사실 레일바이크는 경북 문경에서 타 본 적이 있는데 아주 좋은 인상으로 남아있다. 돈을 내고도 돈이 아깝지 않을 때가 있고 본전 생각 날 정도로 돈이 아깝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다. 그런데 문경의 레일바이크는 언제 집안 식구들을 데리고 다시 와 봐야겠다는 생각을 한 곳으로 좋은 기억이 남아있다. 아마 집에 와서 아이들한테도 자랑을 여러 번 했던 것 같다.
해양레일바이크를 타는 날은 25~28도 정도로 약간 더웠지만, 맑고 청명했다. 한여름에 휴가를 떠나지 말고 지금이 돌아다니기 참 좋은 날이구나 하는 걸 새삼 느꼈다. 레일바이크는 총길이 5.4km로 복선으로 설치되어있었다. 한쪽은 삼척시 근덕면 궁촌정거장에서 출발하고 반대편에서는 용화정거장에서 출발한다. 궁촌정거장에서 오후 1시에 출발하는 것으로 예약을 하고 갔다. 예약자 우선이라는 팻말에 힘입어 줄지어 기다리는 사람들을 제치고 앞으로 갈 때는 예약문화에 힘입어 끗발이라도 있는 것처럼 우쭐했다.
레일바이크의 길은 약간의 경사가 있어야 오르막에는 힘도 들고 내리막에는 관성의 힘으로 달리는 스릴이 있다. 궁촌정거장 쪽이 높아서 수월하게 용화정거장 쪽으로 가기 쉽다고 인터넷에서 정보를 검색한 딸이 궁촌정거장을 택했다. 역시 이런 것까지 계산하는 젊은이들이 한 수 위다. 출발 전에 안전벨트를 매고 브레이크 작동법과 페달 밟는 법을 알려준다. 행인과 다른 차들이 들어올 수 없는 정해진 레일 위로만 달리니 핸들 조작은 아예 필요 없고 알려주는 주의사항만 잘 지키면 노인이나 아이들도 탈 수 있고 위험성도 없다.
사위와 딸 그리고 우리 둘 부부가 페달을 밟으니 레일 바이크는 앞으로 씩씩하게 잘 나간다. 브레이크는 유압으로 작동되는데 아주 말을 잘 듣는다. 솔밭 사이로 레일바이크가 달린다. 눈을 돌려 좌측을 보니 푸른 바다는 하얀 파도를 연실 토해내고 모래 백사장 위에는 상인들이 여름 한 철 피서객을 맞을 준비에 바쁘다. 오른쪽은 육지 쪽이다. 논밭과 집들이 보이고 도로에는 차들이 씽씽 우리와 함께 내달린다.
중간쯤에 정거장이라는 이름의 휴게소가 있다. 화장실도 다녀오고 주위경치를 배경삼아 사진도 찍으라고 자유 시간을 주는 곳이다. 아이스크림이 동이 나게 팔리고 출출한 손님들을 유혹하는 핫도그와 달달한 과자가 가격이 비싼데도 잘 팔린다. 이렇게 잘 팔리는 가게 처음 보겠다고 다들 한마디씩 한다. 역시 장사는 잘 팔리는 목이 으뜸이다.
20여 분 쉬고 나면 출발하라는 신호가 떨어진다. 타고 온 레일바이크에 올라야 한다. 또 한참을 달리면 터널이 보인다. 이 지역의 영웅 황영조 선수를 터널 입구에 크게 내걸었다. 터널 내부는 해양도시의 특성을 살린 물고기 종류의 루미나리에와 각종 레이저 쇼가 연출된다. 다른 레일바이크 코스에는 없는 독특함이다. 동굴 안이라 서늘한 감이 있는 데다가 레일바이크 바퀴와 레일이 마찰하는 쇠가 부딪히는 기계음이 동굴 속이라 제법 커서 무서움마저 든다.
중간중간의 포토존에는 카메라가 설치되어 자동으로 사진을 찍는다. 도착해서 내가 타고 온 바이크의 번호만 말하면 촬영된 사진을 보여준다. 사진이 마음에 들면 찾고 아니면 말면 된다. 처음이라 몰랐는데 포토존이라고 표시된 곳에서는 폼을 좀 잡을 걸 하고 후회했다.
1시간의 해양레일바이크의 탑승이 끝났다. 옛날 향수를 자극하는 기차, 레일, 바다, 솔밭에다가 쇠가 부딪치는 소리. 아이들의 재잘거림과 손뼉 소리, 맞은편에서 오는 이름 모르는 나와 같은 관광객끼리 손 흔드는 인사 모두가 좋았다. 2014년 ‘한국관광의 별’에 선정된 관광 상품이란다. 삼척은 이제 탄광 도시가 아니고 해양관광의 도시로 탈바꿈에 성공했다. 열심히 일한 사람 떠나라고 한다. 해외여행도 좋지만 국내 여행도 좋은 곳이 많다. 관광객과 지역민들이 서로 도움이 되고 하고 나아가 해외 관광객도 불러 모았으면 좋겠다.
아이, 어른 누구나 읽어도 흥미로운 그리스 로마 신화. 개성 넘치는 캐릭터와 더불어 그들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문화·예술 작품까지 담아낸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그리스 로마 신화’를 책방에서 만나봤다.
참고 도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그리스 로마 신화’ 필립 마티작 저
자료 제공 뮤진트리
신화가 영향을 준 예술 작품들
흔히 그리스 로마 신화 도서들은 이야기를 중심으로 구성된 것이 대부분. 반면 이 책은 그리스 로마 신화가 오늘날 문화 속에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대해 다양한 예술 작품과 더불어 정리한 것이 특징이다. ‘후대 예술과 문명에 비친 OOO’이라는 콘셉트로 신화 속 인물이나 사건이 후대 예술 작품에 어떻게 살아 숨 쉬고 있는지 설명한다. 예를 들어 ‘후대의 예술과 문명에 비친 아프로디테의 탄생’에서는 르네상스 시대의 걸작인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을, ‘후대의 예술과 문명에 비친 레다’에서는 다빈치의 ‘레다’ 등에 대해 그림과 함께 이야기한다.
프로필로 보는 신화 속 인물들
신화 속 인물을 각각 상세하게 설명하기에 앞서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프로필을 보여준다. 신이나 영웅들은 가족이나 연인 관계가 얽히고설켜 있는데 이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부모, 배우자, 연인, 자녀를 비롯해 인물의 특징과 능력, 상징(물), 소재지 등을 정리했다. 특히, 트로이 전쟁에 관여한 인물들을 서열에 따라 보여준 점이 흥미롭다. 크게 그리스인과 트로이인으로 나누고 신, 왕, 영웅, 여인으로 분류해 서열 순서대로 인물들을 설명한다. 트로이 출신이지만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던 제우스를 비롯해 포세이돈, 아테나, 아프로디테 등 30명을 언급했다.
펜화와 명화를 함께 보는 재미
글로만 읽는다면 다소 지루할 수도 있는 이야기에 90여 장에 이르는 삽화와 관련 명화, 조각 이미지 등을 넣어 보는 즐거움을 더했다. 책에 실린 모든 펜화는 19세기에 제작된 작품들이라 한다. 펜화를 포함한 모든 이미지는 흑백으로 실려 있지만, 신화 특유의 클래식한 분위기와 잘 어우러진다.
책에서 발견하는 또 다른 즐거움
#plus1
모든 것을 잊게 만드는 망각의 여신 레테. 그녀의 강한 이미지는 현대 시에서도 자주 인용된다. 책에는 ‘레테 칵테일’ 레시피가 나오는데 그 과정이 독특하다.
#plus2
책에서 트로이 전쟁에 관한 인물 소개를 읽고 난 뒤 영화 ‘트로이’(2004)를 본다면 더욱 흥미로울 것이다. 물론 반대로 영화를 보고 책을 읽는 것도 유익하겠다. 이 영화의 미술감독인 나이젤 펠프스는 작품 배경의 철저한 고증을 위해 제작 전부터 각종 서적과 사료를 탐독했다고 한다. BC 1200년경 미케네 문명과 이집트 문명을 조합한 배경과 당대 예술의 아름다움, 서사적 장대함을 동시에 표현해냈다. 특히 4만 496㎡의 트로이 성과 실제 건물 4층 높이로 제작된 약 12m의 트로이 목마의 웅대한 스케일이 압도적이다.
#plus3
벨기에 플랑드르의 화가이며 바로크 시대 미술의 권위자로 불린 페테르 루벤스(Peter Rubens, 1577~1640). 강렬한 색감과 관능미를 추구했던 그는 신화를 바탕으로 한 초상화, 역사화, 풍경화 등을 그렸다. ‘아레스로부터 에이레네를 보호하는 아테나’, ‘에우로페의 납치’, ‘메두사의 머리’, ‘바쿠스’, ‘비너스와 큐피드’ 등이 대표작이다.
우리는 영국 총리를 지낸 윈스턴 처칠을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웅으로 기억한다. 그의 이전 경력이 주로 군 관련 경력에 치우쳐 있어 그를 무장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 그는 아마추어 수준을 뛰어넘는 화가였으며 소설, 신문 칼럼, 에세이 등 글을 잘 쓰는 문필가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전쟁이 끝난 후 집필한 ‘제2차 세계대전 회고록’으로 195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영화 ‘다키스트 아워’는 영국 해군장관 출신의 정치인 윈스턴 처칠이 전시내각의 총리로 임명되는 1940년 5월 10일부터 덩케르크 작전(다이나모 작전)으로 불리는 대규모 철수작전이 끝나는 5월 28일까지 19일간의 행적을 추적한다. 최악의 상황에서 내각을 이어받은 처칠이 반대 세력으로부터 받는 갖은 압력 속에서 현실과 신념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뇌하는 모습이 이 영화의 전부를 이룬다.
사실 이 영화를 보게 된 동기는 작년에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덩케르크’를 감명 깊게 보았던 영향이 크다. 당시 놀란 감독이 표현해낸 기적 같은 철수 장면이 떠오르면서 당시 영국 내의 상황이 궁금해진 것이다. 그러니까 두 편은 서로 이어진 작품으로 순서만 바꿔 보는 셈이다. 두 편 모두 같은 사건을 각기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지만, 도달하는 지점은 같다는 게 흥미롭다.
‘덩케르크’는 등장인물들의 생존을 위한 투쟁과 이름 없는 국민들의 눈물겨운 헌신이 돋보인다. 반면에 ‘다키스트 아워’는 이들의 운명을 좌우하는 정치 지도자들의 진흙탕 싸움이 전개된다. 사실 이 시점에서 무엇이 옳은지 불분명하다. 현저한 전력의 열세 속에서 히틀러에게 항복하고 희생을 줄이는 것도 나름 정당성이 있다. 그러나 처칠은 항복은 곧 노예의 삶을 의미한다며 결사항전의 의지를 다진다.
무수한 정치적인 공세 속에서 처칠의 흔들리는 신념을 잡아주는 존재는 다름 아닌 이름 없는 지하철의 시민들이었다. 물론 이 영화에서 거의 유일하게 역사적 사실이 아닌 픽션임이 분명한 이 장면이야말로 감독의 의중을 여실히 반영하는 지점일 것이다. 전쟁이라는 막중한 상황에서 어려움을 견디며 전쟁을 수행하는 주체는 결국 이름 없는 일반 국민들인 것이다. 처칠은 그들을 대변하며 용기를 얻는다.
처칠의 무기는 또 하나 있다. 그것은 그의 탁월한 언변이다. 이 영화가 아니더라도 처칠의 말과 관련한 일화는 무수히 많다. 정적을 제압하는 여유 있는 유머는 그의 트레이드마크다. 어디선가 접했을 법한 익숙한 그의 명연설이 감독 조 라이트의 뛰어난 연출을 통해 화면에 전개된다. 역광을 활용한 어두운 분위기의 의사당에서 행하는 마지막 연설은 이 영화의 백미다.
그렇다. 결국은 말의 힘이다. 처칠은 사실 과거 군사적 판단착오로 여러 전쟁에서 실패한 무장이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 말의 힘으로 일어섰다. 올바른 판단을 하였으면서 말로 표현하는데 서툴러 무대에서 사라진 정치가가 얼마나 많은가. 우리의 현실과 비교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우리는 언제쯤 자극적인 막말이 아닌 우아한 언어로 상대를 제압하고 국민을 설득하는 이런 정치가를 만날 수 있을까!
수많은 명언 중 “싸우다 패한 나라는 다시 일어설 수 있어도, 무릎 꿇고 굴복한 나라는 다시 일어설 수 없다.”는 말이 오늘의 우리 상황과 중첩되어 기억에 남는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처칠 역의 게리 올드만에 크게 빚지고 있다. 그가 옛날 의 그 미치광이 형사였다니.
연극이나 문학을 조금만 공부해도 쉽게 알 수 있는 이름, 안톤 체호프(Анто́н Па́влович Че́хов, 1860∼1904)와 외젠 이오네스코(Eugène Ionesco, 1909∼1994). 이들은 사실주의극과 부조리극의 대가이다. 생몰연도를 보아 일치하는 부분이 없는데 산책을 하다니. 연극 제목이 희한하다. 체호프와 이오네스코가 배역으로 등장하는 창작극? 각자 다른 시대를 살다 간 작가 이름이 함께 거론되는 연극의 제목이 궁금해 공연장 문을 두드렸다.
물과 기름 같은 연극, 해설로 만나다
한국 연극의 메카 대학로. 매일 밤 150여 개의 극장에서는 뮤지컬을 비롯해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공연이 무대에 오른다. 그 화려한 틈새에서 연극 ‘체홉과 이오네스코의 산책’이 공연됐다. 체호프와 이오네스코라니. 고리타분한 교과서 속 인물을 누가 소환했을까. 원로 배우 권성덕이 고문으로 있는 동양레퍼토리다. 신구세대 연극인이 조화를 이룬 극단으로 노경식 작가의 ‘반민특위’와 ‘두 영웅’ 등 역사의 진실과 마주하는 묵직한 연극으로 관객을 만나왔다. 무거운 주제에서 벗어나 해설을 통해 고전 연극을 만나보자는 취지에서 이번 무대를 준비했다. 체호프의 각 연극이 시작하기 전에 해설자가 무대에 나와 이야기를 해주는 방식이다. ‘청혼’과 이오네스코의 ‘대머리 여가수’를 중견 연극인의 해설을 곁들여 무대에 올렸다. 고전의 딱딱함과 무게를 살짝 걷어내고 누구든지 이해할 수 있는 연극으로 말이다. 다소 어려울 수 있는 이 연극을 관객들은 보고 웃어댄다. 관객의 마음으로 풀어준 해설이 친밀하게 공연을 감상할 수 있도록 윤활유 역할을 해주었다.
‘청혼’, 고집불통 노처녀 시집은 갈 수 있을까?
안톤 체호프의 연극은 매년 크고 작은 무대에서 꾸준히 공연되고 있다. 연극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그의 4대 장막인 ‘갈매기’나 ‘벚꽃동산’, ‘세자매’와 ‘바냐아저씨’는 풍월로라도 듣지 않았을까? 러시아 사실주의 연극을 대표하는 안톤 체호프. 그의 직업은 사실 의사였다. 집안 사정이 어려웠던 탓에 의과대학 시절 문학잡지에 단편과 수필을 기고해 돈을 벌어 가족들을 보살폈다고 한다. 대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신인작가로 이미 이름을 알렸다. 러시아의 파란만장한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장막을 쓰기 전 체호프는 단편 희극을 쓰기도 했는데 그중 하나가 ‘청혼’(1889)이다.
‘청혼’은 지병이 있는 데다 뚱뚱하고 소심하기까지 한 젊은 지주 로모프가 이웃의 지주 추푸코프의 노처녀 딸인 나탈리아에게 청혼을 하러 오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추푸코프는 로모프가 혹시나 돈을 꾸러 온 것이 아닌지 의심하며 경계하지만 딸에게 청혼을 하러 왔다는 말에 기뻐한다. 나탈리아 또한 결혼할 생각에 기뻐서 로모프를 만나지만 토지사유권 주장을 하면서 언쟁을 한다. 이 와중에 지병이 있던 로모프는 쓰러졌다 극적으로 되살아나지만 또 다른 언쟁에 부딪히며 해피엔딩인지 아닌지 모를 결말로 끝을 맺는다.
‘청혼’은 동양대학교 연극영화과 출신 젊은 배우들과 중견 연극배우의 조합이 극의 재미를 끌어올려줬다. 특히 25세 노처녀를 연기한 60대 연기자 장연익의 소녀 같은 연기가 압권. 영화나 드라마가 해결할 수 없는 연극 최고의 판타지는 ‘배역’은 있어도 배우 나이의 경계가 없다는 점이다.
아무말대잔치 흠뻑 즐겨라 ‘대머리 여가수’
안톤 체호프의 연극이 사실적인 상황과 이야기 전개로 이어졌다면, 뒤이어 공연된 이오네스코의 초기작 ‘대머리 여가수’(1950)는 배우의 등장부터 파격적이다. 남녀 배역 모두 남자 배우가 연기했다. 여자 배역의 남자 배우는 수염을 덥수룩하게 붙이고 진하게 화장을 했다. 남자 배역은 수염 없이 깔끔하게 등장해 소극적인 자세로 사건에 개입한다. ‘대머리 여가수’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황 전개와 인물 구성, 역할 파괴로 왜 이런 연극을 만들었나 하는 의문을 갖도록 한다.
‘대머리 여가수’를 번역한 순천향대학교의 오세곤 교수는 극의 이해를 도우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오네스코가 처음 극작을 하면서 집착했던 문제는 인간 언어의 부조리함이었다. 인간은 자신의 언어를 합리적이라 믿고 문화의 축적과 의사소통의 도구로 삼지만 실제는 달랐다. 대단히 비논리적이고 불합리해 원초적으로 소통이 불가능한 오해의 연속일 뿐이며, 거기서 비롯된 언어의 횡포가 인간들을 핍박하고 있다.”
부조리극의 태동과 의미를 알면 쉽게 이해된다. 부조리극은 1차, 2차 세계대전 이후 1950년대부터 60년대 초반까지 프랑스를 중심으로 공연된 극의 한 형태다. 다시 말하면 전쟁을 겪은 이들이 표출해낸 예술이다. 전쟁 이후 세상은 부조리 그 자체. 극 속에서도 이야기는 물처럼 흐르지 않고 아무 말이 튀어나와도 이해가 강요된다. 논리의 허무 속에서 부조리극이라는 결과물을 얻어낸 것. 부조리극의 대표작인 이오네스코의 ‘대머리 여가수’ 또한 여전히 매력적인 희곡으로 손꼽히며 다양한 방식으로 전 세계에서 공연되고 있다.
세계 3대 박물관으로 손꼽히는 러시아 예르미타시박물관의 소장품 전시인 ‘예르미타시박물관展, 겨울 궁전에서 온 프랑스 미술’(이하 예르미타시박물관展)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4월 25일까지 전시된다. 러시아 박물관에서 왔다고 해서 러시아 작품을 생각했다가는 오산이다. 17,18세기 러시아 여제 예카테리나 2세가 프랑스에서 수집한 회화와 더불어 20세기 초 러시아 기업가들이 사서 모은 인상주의 회화, 조각, 소묘 작품 등 80여개 작품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
이번 전시는 1991년 이후 26년 만에 성사됐다. 당시 예르미타시박물관의 ‘스키타이 황금’ 특별전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렸고 2010년 교환전시로 ‘솔숲에 부는 바람, 한국미술 오천년’ 특별전이 예르미타시박물관에서 개최되었다. 이번 예르미타시박물관展은 두 곳 간의 두 번째 협력전시다. 2016년 예르미타시박물관에서 열린 ‘불꽃에서 피어나다-한국도자명품전’에 대한 교환전시로 추진됐기 때문이다.
니콜라 푸생에서 앙리 루소까지, 프랑스 미술의 거장들이 한 자리에
예르미타시박물관은 300만 여점의 소장품을 전시하고 있는 세계 규모의 박물관이며, 유럽미술 전시가 특히 유명하다. 그중에서도 17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의 프랑스 미술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예르미타시박물관의 기초를 세운 예카테리나 2세와 로마노프 왕조 시대의 황제들과 귀족, 러시아 기업가들이 열정적으로 프랑스 미술품을 수집한 결과다. 예르미타시박물관은 프랑스를 제외한 다른 나라들 중 세계에서 가장 많은 프랑스 미술을 보유한 박물관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는 예르미타시박물관 본관의 일부이자 로마노프 왕조시대의 황궁이던 겨울궁전에전시돼있는 프랑스 미술을 중심으로 구성했다. 총 4부로 구성 됐는데 제1부인 ‘고전주의, 위대한 세기의 미술’은 니콜라 푸생, 클로드 로랭 등 프랑스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들의 작품을 통해 프랑스 미술이 독자적 화풍을 형성하고 유럽미술의 흐름을 주도하기 시작한 17세기의 프랑스 미술을 소개한다. 제2부인‘로코코와 계몽의 시대’에서는 18세기로 접어들어 남녀 간의 사랑과 유희 장면을 즐겨 그렸던 로코코 화가들의 작품과 계몽주의 사상의 확산에 따라 새로운 감각으로 제작된 풍속화, 풍경화를 만날 수 있다.
프랑스 미술은 19세기로 접어들어 큰 변화를 맞이한다.
전시의 3부인 ‘혁명과 낭만주의 시대의 미술’은 나폴레옹의 통치와 일련의 혁명을 겪으며 프랑스 미술계에 일어났던 여러 변화를 소개한다. 신고전주의의 대표적 화가 장오귀스트도미니크 앵그르의 영웅적 초상화를 비롯하여 문학이나 신화, 동방의 문물에서 영감을 얻었던 낭만주의 화가들의 작품이 선보이며, 사실주의 화가 귀스타브 쿠르베와 카미유 코로, 외젠 부댕과 같이 야외 사생으로 인상주의를 예고했던 화가들도 눈길을 끈다.
전시의 마지막인 ‘인상주의와 그 이후’는 고전적인 예술 양식과 결별한 인상주의와 후기인상주의를 조명한다. 클로드 모네, 폴 세잔, 모리스 드니, 앙리 마티스, 앙리 루소 등 인상주의 이후 근대 거장들의 작품은 20세기 미술로 이어지는 흐름을 보여준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 중에서는 예카테리나 2세의 소장품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계몽 군주가 되고자 노력했던 예카테리나 2세는 프랑스 철학자 드니 디드로를 비롯한 동시대 저명인사들과 친분을 유지하며 유럽 각지에서 미술품을 사 모았다. 그녀의 미술품 수집에 대한 열정은 동시대 귀족들에게도 이어졌다. 18세기 말 이후 많은 프랑스 화가들의 작품들이 러시아의 공공건물과 상류층 저택을 장식했다. 이러한 개인 소장품들이 20세기 초에 국유화되면서, 오늘날 예르미타시박물관은 다채로운 프랑스 미술 소장품을 보유할 수 있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예카테리나 2세를 비롯하여 프랑스 미술을 사랑했던 수집가도 함께 소개하고 있다. 예르미타시박물관展을 통해 러시아와 프랑스의 문화적 맥락을 보다 깊게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관람정보
기간 ∼4월15일까지
장소 국립중앙박물관
관람료 성인 6천원 / 중, 고등, 대학생 5500원
전시문의 1688-0361
위치 지하철 4호선, 경의중앙선 이촌역 2번 출구에서 버스 400번·502번 타고 국립중앙박물관 하차
교보문고 광화문 세미나실에서 ‘생각의 깊이 사진으로 더하다’라는 제목으로 달을 넘기며 강의한 내용이 ‘사진으로 만나는 인문학’이란 책으로 출간되었다. 나는 출판사에서 제안한 인문학이란 단어에 손사래를 쳤다. 솔직히 부담스런 제목이었다. 그런데 몽골에서 다시 인문학을 꺼내 들 일이 생겼다. 아직 추운 몽골 봄 평원에서 인문이란 단어가 푸른 하늘로 경쾌하게 피어났다.
사진기를 들고 며칠째 몽골의 부자를 따라다녔다. 국어사전에 정의된 부자란 재물이 많아 살림이 넉넉한 사람을 뜻한다. 그리고 요즘 재물의 척도는 물론 돈이다. 그러나 내가 만난 몽골 부자는 양과 약대를 많이 치고 있는 사람이며, 몽골 정부로부터 ‘새끼 잘 키우는 목자 상’을 받은 사람이다. 난 이 부자를 만나기 위해 우리에게 길을 안내한 마을 공무원과 경찰까지도 애를 먹였다. 몽골 거부라는 그의 권위 때문이 아니라 떠돌아다녀야 하는 그의 일 때문에 그들을 찾기가 참 힘들었다.
어렵게 그들을 만난 후 내게는 부자에 대한 새로운 기준이 생겼다. 유목민에게는 자기가 키우는 생명의 수를 늘리는 것이 목표이지만 돌보는 가축이 많아질수록 생활은 고단하고 삶은 바빠진다. 유목민이란 시장에서 사료를 사다 먹이는 목축업자가 아니라, 자기 가축을 위해 날마다 신선한 목초와 물을 찾아다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목자가 거느리는 가축의 수가 늘수록 다른 이웃 유목민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더 먼 변두리 지역으로 떠돌아다녀야 한다. 그래서 내가 만난 몽골 유목민 부자는 아주 단출한 집 한 채만 갖고 있었고, 살림살이에도 사치가 없었다. 좋은 옷을 입고 누구에게 자신의 부를 뽐낼 일도 없다. 몽골 유목민의 삶을 지켜보는 것은 부자에 대한 나의 선입견을 일깨우는 기분 좋은 일이었다.
이른 봄, 마침 가축들이 새끼를 낳을 때였다. 그의 가족들은 벌판 여기저기에 낳은 새끼들을 가죽 부대에 담아오기 바빴다. 목자가 조금만 한눈을 팔아도 갓 태어난 새끼들은 늑대에게 잡혀 먹히고, 추위와 바람에 얼어 죽기 때문에 목자의 식구들은 말과 오토바이를 이용해 생명과 시간을 최대한 아꼈다.
부지런히 새 생명을 거두고, 종일 그런 어미들을 배부르게 먹이기 위해 그나마 나은 초장을 찾아다니다 날이 저물어 양과 염소를 몰고 돌아온 몽골 부자 바뜨비앙의 얼굴에는 오늘도 지친 기색이 없다. 어린 생명이 가여워 이처럼 그들을 하루하루 돌보다 보니 어느 날 번성해 떼를 이루었단다. 부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는 일이 보람 있고 재미있어 매 순간이 행복하고, 우러나 하는 일이기에 자유롭다고 한다.
다음 날 이른 아침, 바뜨비앙의 아이들은 어린 양과 염소들을 한 마리씩 들어보고 어미가 기다리고 있을 우리 방향으로 던져준다. 새끼들에게 들볶이지 않고 잠을 잘 잔 어미들이 젖을 줄 시간이다. 아무리 봐도 내 눈엔 그 녀석이 그 녀석 같은 어린 양과 염소들의 어미를 분별하는 아이들의 눈썰미가 감탄스러울 뿐이다.
학교에서 배운 인문학은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우스’에서 시작한다. 그 얘기 중 전쟁을 마치고 귀향길에 하데스로 내려간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의 영웅이었던 전우 아킬레스에게 반가운 인사를 하자 대답하는 말의 의미가 심장하다.
“죽음에 대해 내게 그럴싸하게 위로하지 마시오, 내가 여기서 죽은 자들을 지배하고 있지만, 차라리 재산도, 이름도 없는 사람 밑에서 품이라도 팔며 살고 싶소!”
죽음의 위력에 굴복해 살고 있는 당시 사람들을 일깨우는 호메로스의 위대함이 그 말에 있다. 사고의 전환을 선언하는 서양의 첫 서사시는 그렇게 열린다. 결국 생명! 특히 인생의 소중함을 생각하는 것에서 인문학은 방향을 잡는다.
몽골에서 가장 약대와 양이 많다는 몽골 부자의 아이들은 막상 사설학원에 갈 시간도, 부자 부모의 돈을 쓸 시간도 없다.
저만치 떨어져 막 태어난 양과 염소를 돌보면서 바뜨비앙 부부가 아이들에게 외친다.
“누가 어미인지 잘 모르겠거든 아빠 엄마에게 물어봐라!”
아직 추운 중앙아시아 너른 봄 평원에서 사람의 무늬[人文]가 푸른 하늘을 채우고 있다.
함철훈(咸喆勳) >> 사진가·몽골국제대학교 교수
1995년 민사협 초청 ‘손1’ 전시를 시작으로, 2009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Gems of Central Asia', 2012년 이탈리아 밀란시와 총영사관 주최로 'Quando il Vento incontra l’Acqua' 전을 FORMA에서 개최. 2006년 인터액션대회(NGO의 유엔총회)서 대상 수상. 저서로 '보이지 않는 손', '사진으로 만나는 인문학' 등이 있다.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우리나라 최초로 도마 종목에서 은메달의 주인공이 탄생했다. 바로 자신의 이름을 딴 신기술 여1, 여2를 개발해 한국 기계체조를 이끌어온 여홍철(呂洪哲·47). 그는 세상에 한국 기계체조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체조를 안 했으면 조폭이 됐을지도 몰라요.”
1994년 세계체조선수권대회 도마 3위, 1994년 히로시마아시안게임 도마 1위, 1996년 세계체조선수권대회 도마 2위,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체조 도마 2위, 1998년 방콕아시안게임 도마 1위 등 세계 무대에서 메달을 휩쓴 여홍철은 말한다. 그의 인생에 가장 큰 행운을 가져다준 것은 ‘체조’였다고.
그의 체조 사랑은 우연한 만남으로부터 시작됐다. 야구가 좋아서 야구부에 지원했지만, 하필 그해에 야구부가 없어졌다. 마침 그때 눈에 띈 게 체조부였다.
“초등학교 때 무협 영화에 빠져 있었거든요. 그땐 날아다니고 재주 부리는 체조가 너무 멋있어 보였어요. ‘아 이건 내꺼다!’ 당장 체조부에 들어갔죠. 솔직하게 말하면 계속할 생각은 없었어요. 근데 감독님이 찾아오셔서 ‘체조 계속하자, 운동하면 대학도 장학생으로 갈 수 있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을 수 있다’면서 좋은 점만 얘기하시니깐… 거기에 완전히 혹해서 계속하게 된 거죠.(웃음)”
항상 따라다니던 부상
기계체조는 선수들의 안전을 위해 금지된 기술이 있을 만큼 위험 종목 중 하나로 꼽힌다. 특히 머리로 떨어지거나 잘못 착지할 경우 큰 부상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여홍철 또한 부상을 피해갈 순 없었다. 하필 국제대회를 앞두고 벌어지는 사고는 태극마크를 단 그의 발목을 수차례 잡았다. 그는 그동안의 부상이 생각나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선수촌에 들어갔는데 평행봉 연습을 하다가 손가락이 골절됐어요. 선수촌에 들어간 지 한 달 만에 짐 싸서 나왔죠. 아마 제가 단기간 퇴촌 기록 보유자일 거예요.(웃음)”
1990년 베이징아시안게임 땐 경기 두 달을 앞두고 다쳐서 또다시 퇴촌했다.
“철봉에 부딪쳐서 오른쪽 귀가 거의 떨어져나갔어요. 그때는 정말 아쉬웠죠. 어느 때보다 욕심이 났거든요. 가장 끔찍했던 사건은 목 부위가 찢어졌을 때예요. 당시 부분 마취가 불가능한 시절이라 마취도 안 하고 80바늘을 꿰맸는데 아직도 바늘이 살을 뚫고 지나가는 느낌이 생생해요.”
외상은 치료하면 되므로 그나마 다행이었다. 정말로 큰 위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부상, 바로 골수염이었다. 운동을 계속하면 팔을 절단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진단을 받고 그는 2년 6개월간의 공백기를 가졌다. 하늘이 그의 간절함을 알았던 걸까. 다행히 녹아내리던 뼈가 단단히 굳기 시작했고 여홍철은 고민할 여지도 없이 다시 체조선수의 길을 선택했다. 그는 이런 시련들이 자신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줬다고 말한다.
“솔직히 연습하다가 다치면 몇 개월 동안은 그 기술은 쳐다도 안 봐요. 아예 빼버리고 연습하죠. 사실 좀 겁났거든요.(웃음)”
메달 색을 바꾼 통한의 ‘세 발자국’
운동선수라면 모두가 꿈꾸는 무대인 올림픽. 여홍철은 더 이상의 퇴촌은 없다고 다짐하며 선수촌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1992년, 그에게는 첫 올림픽인 바르셀로나올림픽에 출전하게 된다. 비록 결승엔 들지 못했지만 출전만으로도 큰 의미가 됐다.
“그동안 부상을 워낙 많이 겪어서 그런지 올림픽에 나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벅차고 행복했어요. 우선 관중 수부터 어마어마하게 차이가 났죠. 우리나라에서는 비인기 종목이다 보니 대회가 있어도 경기장이 텅 비어 있거든요. 많은 사람 앞에서 기술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게 너무 행복하고 즐거웠어요. 그땐 메달을 따야겠다는 생각보다는 내가 가지고 있는 기술을 실수하지 않고 보여주고 경기를 잘 마치는 것을 첫 번째 목표로 했죠.”
그로부터 4년 뒤인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서 러시아의 알렉세이 네모프를 저지할 가장 유력한 금메달 후보 선수로 꼽혔다. 더불어 한국체조 첫 금메달 유력 후보로도 거론됐다. 아니나 다를까, 도마 1차 시기에서 완벽한 연기를 펼치며 9.837점을 받았다. 이제 큰 실수만 하지 않으면 금메달은 떼놓은 당상이었다. 2차 시기를 앞둔 그의 모습에선 자신감이 넘쳤다. 하얀 탄산마그네슘을 손에 묻히고 최고 속력으로 내달렸다. 힘차게 구름판을 밟고 그의 이름을 딴 신기술 ‘여2(두 손을 정면으로 짚고 공중에서 몸을 펴 두 바퀴 반을 비트는 동작)’를 선보였지만, 착지에서 치명적인 실수를 하고 말았다.
“착지 불안으로 세 발을 뒷걸음질했죠. 내려오는데 순간 눈물이 쏟아지더라고요. 그동안 힘들게 연습하고 훈련했던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데… ‘아 4년을 더 기다려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모든 게 한순간에 무너지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그때의 개인적인 아쉬움은 말로 설명 못하죠.”
그가 착지 불안으로 휘청거리는 순간 경기장에 있던 관중들도 아쉽다는 듯 탄식을 뱉었다. 경기 결과는 알렉세이 네모프와 0.031점 차이로 은메달. 그는 경기 직후 인터뷰에서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연신 되뇌며 눈물을 보였다. 관중들도 그의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했다.
“아쉽기는 했지만, 그때의 실수에 대해선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해요. 당시 1점은 1등에서 40등까지를 갈라놓을 수 있는 점수였어요. 만약 그때 세 발 뒷걸음이 아니라 뒹굴었다면 메달권에도 못 들어갔을 거예요. 저는 그나마 운 좋게 거기서 그쳤기 때문에 은메달을 딸 수 있었던 거죠. 그 부분에 대해선 아직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에게 가장 아쉬웠던 경기를 묻자 의외로 2000년 시드니올림픽을 꼽았다.
“그 당시 제가 도마 세계 랭킹 1위였어요. 이번에는 꼭 금메달을 따겠다 다짐하고 출전했는데 웬걸 규칙이 바뀌었더라고요. 원래 두 번씩 기술을 펼쳐야 하는데 한 번만 하면 되는 거로요. 그건 다시 말하면 잘 못하는 선수라도 운 좋게 착지를 잘하면 결승에 올라가고, 실력이 좋아도 실수를 하게 되면 떨어트리겠다는 것이었어요. 바뀐 규칙으로 시드니올림픽 때 세계 랭킹 상위권 선수들이 거의 결승에 올라가지 못했어요. 대신 쉬운 기술로 착지에 성공한 하위권 선수들이 결승에 올라가는 바람에 논란이 많았죠. 결국, 이후엔 다시 원래대로 두 번 연기하는 거로 바뀌었어요. 그때 생각했죠. ‘아, 금메달은 신이 주는 선물이구나’ 하고요.”
체조는 상대가 아닌 자신과의 싸움
스포츠 경기를 보다 보면 상대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소리를 지른다거나 불필요한 행동으로 도발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혹시 체조도 안 보이는 공간에서 선수들끼리 기 싸움을 할까?
“신경전이요? 그런 건 전혀 없었어요. 어차피 개인마다 기술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자신의 기술만 완벽하게 펼치고 오면 되거든요. 오히려 낯익은 선수들이 있으면 선수대기실에서 인사도 하고 서로 몸 장난도 하면서 긴장을 풀곤 했죠.”
여홍철은 체조는 상대와 하는 싸움이 아닌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말한다. 특히 수백 번, 수천 번씩 반복되는 훈련이야말로 가장 혹독한 자기와의 싸움이라고 강조한다.
“똑같은 기술을 연습할 때 그 지루함을 이겨내는 게 가장 힘들었어요. 중간에 포기하면 완성도가 떨어지는 거고 이겨내면 내 기술이 되는 거고. 기술을 완벽하게 소화하려면 1~2년? 길게는 3~4년이 걸릴 수도 있어요. 이 기간에 완벽히 습득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요. 한 가지 기술을 완벽하게 하기 위해선 무한 반복이 필수였죠. 유연성 훈련은 어릴 때만 고통스러웠지 대표팀 되고 나서는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아 물론 지금 하라고 하면 절대 못합니다.(웃음)”
우리나라 체조 역사상 전대미문의 영웅이었던 여홍철. 기술에서만큼은 최고의 기량을 선보인 그는 비록 올림픽에선 금메달과 인연이 없었지만 후회는 없다고 말한다. 아직까지도 그의 이름을 딴 여1, 여2 기술은 국제대회에서 회자되고 있다.
“나이로 따지면 거의 끝 무렵까지 국가대표를 했기 때문에 큰 미련은 없어요. 이젠 제 체조 DNA를 물려받아 체조선수의 길을 가고 있는 딸을 지지해주는 게 새로운 목표입니다. 얼마나 힘든 운동인지 알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큰 버팀목이 되어주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