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보다 아침 기온이 높다는데
얼굴 마주치는 바람의 흐름이 어제와 다르다.
내가 아는 신화엔 반드시 등장하는 바람.
인간에겐 본능적으로 바람에 관심이 많은 유전자가 있는지
영웅호걸이 등장하려면 폭풍이 불거나 회오리 몰아친다.
어떤 형태든
바람이라는 조연이 우연이라는 이름으로
중간 중간 제 역할 해줘야
등장인물이 돋보이고 신비감 주는 건 당연한 스토리텔링.
예쁘지만
가시라는 양면성이 동시에 존재하는 장미와 달리
모난 곳도, 가시도 없이
누구와 만났느냐에 따라 전해지는
바다, 비 내음, 삼림살내, 나무, 꽃 향은 탐욕과 고통을 잠재운다.
우리에게는 마파람이라는 봄바람이 있어 흥할 수 있었고
좋은 토질에서 누구도 부러워하는 작물을 생산할 수 있었다.
온 세상 존재하는 것은 무엇 하나 변하지 않는 게 없지만
바람이라는 이름 하나로
죽지도 않고 우리의 몸과 마음 곁에 늘 있구나.
언제 태어나 몇 살인지 아는 이 없고 궁금해 하는 사람도 없지만
적어도 나 보단 훨씬 연배인 건 알겠는데
노후 내가 바라는바와 같이 나이티도 안 낸다.
내가 부르지 않아도
나름의 스케쥴 맞춰 매년 한 차례씩 정해놓고 찾아오고
무엇 때문에 성질났는지 몰라도
가끔 스팟으로 씩씩 있는 대로 성질내며
혓바닥 길게 뽑아 아무거나 핧으며 지랄 떨 때도 있다.
잔디에 흰 구름 보며 누워 즐거움에 젖을 때면
"너 혼자만 재미 있을려구, 너 혼자만 즐길려구" 하며
곁을 차지하지만,
내 품에 안겨지지도 않아 네가 외롭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구나.
아 하
그래서 여기 저기 집적대며
나뭇잎, 풀잎하고도 얘기하자 건드리며 흐느끼는구나.
심술부려 가로등 불꽃 일부러 꺼트린 게 그래서였구나.
다 익지 않은 꽃잎 떨어트린 것도 그래서였구나.
풀내음 다 걷어가며 나뭇잎 떨군 장난도 그래서였구나.
그리고
간다는 말은 없어도, 갔다는 표를 그리 내는구나.
그래도 나는 안다.
차디찬 겨울바람, 훈훈한 서풍, 곡식 병들게 하는 동풍, 꽃 피우는 남풍
너는 보이지 않는 악기로
청 보리밭, 옥수수 밭, 가랑잎, 대숲의 노래를
천만가지 외로움 연주하며 관심을 끌려하는 것을
무슨 이름욕심 그리 많아
산바람, 계절풍, 편서풍, 회오리, 무역풍 말고도
셀 수도 없이 지어내는 것도 외로워 누군가 필요해서라는 거
그래도
역할이 영웅을 찾는다는데
재주 많은 너는 야심은 아닐 것이고
할 수도 없는 일들을 거칠 게 없이 펼치는 바보의 전형이다.
개혁을 원하니
혁명을 원하니
종교는 갖고 있니
적어도 너는 자살은 안 하겠구나.
네 직업이 궁금하다.
바람도 지난 바람이 낫다는데
남에게 바라는 게 없으면 내 마음이 편하다지만
늘 곁에서 네 외로움 달래주는 내가되고 싶구나.
바람 없었으면 글쟁이들 뭘로 먹고 살았을까.
극작가 노경식(盧炅植·79)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
“어떤 얘기든지 들려주세요.”
극작가란 무언가. 연출가에게는 무한대의 상상력을, 배우에게는 몰입으로 안내하는 지침서를 만들어주어 관객에게 의미를 전달하는 자가 아닌가? 그래서 달리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인생 후배로서 한평생 외길만을 걸어온 노장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고 싶었다. 무대 위 모노드라마를 관람하듯 말이다.
자, 그럼 이제 커튼을 열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봐 주시겠습니까?
노경식 희곡집 1권 을 꺼내 들다
인터뷰에 나가기 전 서재에서 책 하나를 찾아냈다. 노경식의 첫 희곡집 이었다. 노경식 작가와도 가까웠던, 지금은 고인이 된 은사에게 2004년 초판을 선물로 받았다. 책을 받고 13년 만에 일종의 필자 사인회를 거행(?)한 것. 196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로 당선된 걸 생각하면 한참 시간이 흘러 희곡집을 발간했다.
“내가 책을 늦게 냈거든. 그래도 지금까지 7권이나 나왔어요. 희곡은 한 40편 되는 것 같아. 그중에 5편 정도 빼고는 다 공연을 했습니다.”
전북 남원 출신인 노경식 작가는 경희대학교 경제학과를 거쳐 서울예술대학교의 전신인 드라마센터 연극아카데미에 들어가 동랑 유치진, 여석기 선생으로부터 극작 수업을 받았다. 올해 80의 나이에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한국 리얼리즘의 대표 현역 극작가다. 노경식 작가는 토속적인 색채에서부터 역사, 정치극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작품을 써왔다. 앞서 언급한 1971년 작품 으로 제8회 한국연극영화 예술상(백상예술대상) 희곡상과 연기상 등을 받아 세간의 이목을 받았다. 작년 극작50주년 기념공연 을 비롯해 , , 등은 노경식을 대표하는 역사 시대극이다.
“내가 왜 역사나 정치에 관심이 많냐면 경제학과 중에서도 경제사를 전공했기 때문입니다. 조선, 한국 경제 그런 쪽. 그래서 시대극이나 역사적인 소재가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독립운동사라든지 임진왜란도 많이 썼고요.”
작가 황순원의 눈에 든 남원 촌놈
처음 노경식의 가능성을 알아본 사람은 경희대 재학 시절 만난 소설 의 작가 황순원이다. 황순원은 노경식이 수강하던 교양국어의 담당 교수였다.
“대학교에 입학해서 ‘하와이’란 제목의 수필을 교내 학보사에 투고했어요. 저는 당해본 적 없는데 전라도 출신 선배들이 서울에 올라와 가난 때문에 차별당한 이야기를 쓴 글이었어요. 꽤 길었는데 학보에 실렸더라고요. 그것을 보고 황순원 선생님이 잘 썼다며 칭찬해주셨습니다. 얘기를 들어보니 황 선생님도 동경 유학 시절 비슷한 차별을 당한 적이 있으셨더군요.”
황순원은 학생 노경식을 볼 때마다 “너 수필 잘 쓰더라”며 글쓰기를 부추겼다. 결국 또 한 번 파란의 주인공이 됐다.
“우리 학교에는 그때 교내 문학상 제도가 있었어요. 미술, 음악, 시, 소설, 그림…. 1등이 되면 등록금이 면제였습니다. 황순원 선생님 역시 제가 글을 문학상에 내보기를 계속 권하셨습니다. 저는 그냥 희곡이나 한번 써볼까 해서 써냈습니다. 근데 그게 또 1등이 된 겁니다. 희곡을 쓴 건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상을 주는 교수들의 입장이 사실 난감했다. 이전 수상자였던 무역학과 학생이 장학금만 받고 글쓰기를 멈춘 것이다. 경제학과인 노경식 또한 장학금을 받고 글을 쓰지 않으면 주나 마나 한 상황이 되니 심사위원 교수끼리 회의를 열었다.
“희곡 심사위원이었던 김진수 선생 옆에 있던 황순원 선생님이 ‘왜? 경제학과야? 노경식?’ 하더니 ‘어, 노경식이 내가 알아. 내가 보증할게’라고 해서 제가 된 겁니다.”
결국 노경식은 빚을 톡톡히 갚은 거다. 대학 시절 희곡으로 장학금을 타는 바람에 지금까지도 열심히 작품 활동을 하는 극작가로 사니 말이다.
“ 초연 때 모셨는데 작품이 마음에 드셨나봐요. 내 손을 꼭 잡고 ‘애썼다. 잘 썼다’ 그러시면서 ‘희곡이 소설보다 좋은 거 같아. 관객을 놓고 박수도 받고 야, 희곡 좋은 거 같다’ 나한테 그런 말씀도 하시더라고. 뭘 잘해드린 적도 없는데 참 예뻐해주셨어요. 황순원 선생님이 결혼식 주례도 서주시고 말입니다. 선생님이 서주신 제자가 많이 없을 겁니다.”
현역 작가로서 저력을 과시하다
인터뷰 차 만났던 9월 대학로의 한 카페. 그 어느 때보다 한결 여유로운 얼굴이었다. 지난여름 제2회 늘푸른 연극제를 통해 무대에 올린 연극 가 관객의 뜨거운 호응과 평단의 찬사 속에 막을 내린 것. 공연이 끝나고 원로 연극인들과 함께 기분 좋은 온천 여행을 다녀왔다고 덧붙였다.
늘푸른 연극제에서 노경식 작가가 선택한 는 신의 한수였다. 그와 함께 연극제에 초청된 배우 오현경, 이호재, 연출가 김도훈은 대표작을 내걸고 공연했다. 노경식 작가 또한 대표작인 을 공연할 것이라 대부분 사람들은 예상했다.
“는 2005년에 극단 미학에서 초연했던 작품입니다. 기대만큼 결과가 좋지 않았어요. 그런대로 성과가 나면 모르겠는데 미치지 못하니 작가는 한 번 더 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잖아요. 도 마침 생각하고 있었는데 늘푸른 연극제에 선정됐습니다. 나를 선정한 거니까 내가 맘대로 작품을 고를 수 있다기에 를 선택했습니다. 좀 오래전에 써서 개작을 많이 했어요. 이번에는 만족합니다.”
그의 대표작 을 기다린 관객에게는 아쉬운 일이다. 하지만 노경식 작가는 현역 작가로서 과감한 도전에 박수받기를 택했다. 원로 연극인으로서 지금껏 살아온 노고에 대한 격려 대신 말이다.
“만족이야. 기분 좋습니다. 이번 연출을 맡은 김성노씨한테 고맙다는 소리를 몇 차례 했어요.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습니다.”
는 일제강점기 친일파의 반민족행위를 처벌하기 위해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제헌국회에 설치했으나 1949년 친일 경찰의 ‘6·6습격사건’을 기점으로 반민특위가 해체되는 과정을 보여준 정치극이다.
여전히 잘 팔리는 극작가
“나는 잘 팔려, 고민 안 해(웃음).”
연극 가 끝나기가 무섭게 노경식 작가는 신작을 내놓았다. 이미 세상에 내놓은 것, 꼭 쓰겠다고 작정한 것 두 가지 작품이 있다. 여전히 잘 팔린다며 너스레를 떠는 모습이 재밌다. 우선 세상에 내놓은 작품은 이라는 제목의 4·19혁명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4·19혁명에 관한 작품이 없어요. 왜 없는 줄 알아요? 4·19혁명이 나고 5·16 군사정변이 났잖아. 그 이야기에 손댔다가 시끄럽고 어쩌고… 몸을 사리는 거지 작가들이. 내가 4·19세대거든. 나라도 본격적으로 4·19 얘기를 써야 되겠다. 내가 겪은 이야기니까. 그래서 마침내 성공을 했어요.”
4·19혁명과 관련해 작가로서의 사명감이 오래전부터 있어왔다는 노경식 작가. 몇 달을 걸려서 자료를 찾고 화보집을 보면서 작품을 썼다.
“내가 아는 얘기, 겪었던 일이에요. 그리고 4·19는 영웅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민초의 이야기죠. 구두닦이, 우리 학생, 대학생, 초등학생들도 나왔어요. ‘총 쏘지 마세요’라면서요. 양아치들, 매춘부까지 다 나왔던 민초들이 이뤄낸 역사입니다.”
이번 작품의 주인공은 매춘부라며 깜짝 놀랄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작가의 고향 남원과 관련한 토속적인 얘기를 쓰고 싶단다.
“사실 봄꽃이 아니었으면 먼저 쓰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자꾸 뒤로 밀리고 있어요. 늘 생각은 있어요. 우리 집안의 얘기도 관계가 있고요. ‘밤으로의 긴 여로’ 같은 것을 쓰고 싶은데 어찌 될지.”
프리한 80? 행복한 극작가!
노경식 작가와 얘기하는 동안 머리에 맴도는 의문 한 가지가 있었다. 지금까지 만나온 극작가는 대부분 연출과 겸업을 하고 자신만의 극단을 거느리고 있다.
“나는 한 번도 극단에 들어가본 적이 없어요. 단원이 돼본 적도 없고. 그냥 늘 자유롭게 조직에 구애받지 않고 연극을 했어요.”
듣고 보니 이유는 간단했다. 노경식 작가가 극작가로 데뷔한 1965년도에는 출판사 편집장을 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드라마센터 동기들이 연극판으로 몸을 옮겼을 때 노경식 작가는 매일 출근을 해야 했다. 대신 누구든 노경식 작가가 쓴 대본을 넘겨주면 공연을 하겠노라고 했다.
“국립극단에서도 내 작품을 하겠다고 하니까 극단에 소속될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내 극단을 가져보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다. 다들 잘해주고 공연 잘하는데 굳이 그럴 필요도 못 느꼈다. 무엇보다 스스로 간섭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어떤 작가들은 연출 해석이 잘못되면 언성을 높이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런데 그건 내 스타일이 아니에요. 혹시라도 연습실에 가면 앉았다가 ‘술이나 한잔하자!’ 그러면 땡이고. 술 마시다가 살짝 얘기하면 되지. 화내고 그럴 필요 전혀 없어요. 한 사람 머리보다 두 사람이 낫지 않겠어?“
연출자도 작가도 창조자이고 작품을 좋게 만들 뜻으로 만났으니 서로의 신뢰가 아주 중요하다고 했다.
대학로 만빵 모임 좌장 납십니다!
경계 없이 만나고 사귄 덕에 주위에 사람들이 넘쳐난다. 그러다 만든 모임이 바로 만빵 모임이다. 노작가가 좌장(?)으로 있는 만빵 모임은 2년째 대학로 바닥을 주름 잡는 원로 연극인 모임으로 자리 잡았다.
“두 주에 한 번씩. 매주 목요일 오후 5시. 만원씩 가지고 빈대떡 주점에서 모이다가 ‘만빵 모임’이 된 거예요. 혼자 부담하려면 너무 크니까. 여유 있는 친구들이 가끔 다 내기도 하고 나오면 받고 안 나오면 안 받고 그래요. 우리도 한번 모여보자 해서 만나는데 만빵 모임의 존재를 아는 후배들이 빈대떡 주점에 돈을 맡기고 갈 때도 있더라고요. 만나서 한잔하고 그러면 좋잖아.”
원래는 70세 이상만 모이다가 가끔 후배들도 종종 참여하고 있다. 만나서 막걸리는 기본. 웃고 떠들고 과거를 추억하다 요즘 젊은이들의 연극에 대한 걱정도 한다.
“평가라기보다 우리 연극이 좀 시류를 따른다고 해야 하나, 영합한다고 해야 하나. 가볍다고 말하기도 그렇고. 좀 묵직하고 그런 작품들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적어도 만빵 늙은이들은 그렇게 생각해(웃음).”
사실 이런 말을 하고 싶어도 이제 젊은 후배들을 만날 기회가 없는 것이 안타깝다고. 정말 특별한 인연이라 꼭 좀 와주십사 연락하는 사람이 있으면 연극을 보러 가는 정도다. 아무렴 어떤가! 그래도 늘 행복한 웃음을 잃지 않는 노경식 작가는 어딜 가나 인기가 높다. 지금 이 시간 해피 바이러스 내뿜으며 젊음의 거리를 거닐고 있을 노경식 작가에게 인터뷰 중 약속했던 한마디를 남기고자 한다.
“고향에 관한 연극 꼭 쓰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젊은연극제란? 전국의 연극영화전공 학생들이 주축이 된 연극제.
◇ exhibition
무민원화전:
Moomin Original Artworks
일정 9월 2일~11월 26일 장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핀란드 화가 토베 얀손(Tove Jansson, 1914~2001)의 손에서 탄생한 ‘무민(Moomin)’의 70여 년 연대기가 펼쳐진다. 무민은 1945년 얀손이 직접 글을 쓰고 삽화를 그린 라는 소설을 시작으로 만화, 애니메이션 등을 통해 전 세계 대중에게 알려졌다. 작가가 직접 그린 원화와 더불어 저작권자(얀손의 조카 소피아 얀손)가 소장한 미공개 작품과 오브제까지 총 350여 점을 만날 수 있다. 무민캐릭터스, 핀란드 탐페레무민박물관, 헬싱키시립미술관, 헬싱키연극박물관 등에 소장되어 있던 주요 작품들이 이번 국내 첫 전시를 위해 한국을 찾는다. 총 7개의 섹션으로 구성되며, 무민 라이브러리, 무민 상영관 등 관람객이 직접 작품을 체험해볼 수 있는 참여 공간도 함께 마련된다.
The Selby House:#즐거운 나의 집
일정 10월 29일까지 장소 대림미술관
세계적인 크리에이터들의 개성 넘치는 라이프스타일을 기록하는 아티스트 토드 셀비(Todd Selby, 1977~)의 작품 400여 점을 총망라한다. 이번 전시는 그의 대표 사진들뿐만 아니라, 일상 소재에 위트를 더한 일러스트레이션, 영상, 그리고 새롭게 창작한 대형 설치 작품까지 만나볼 수 있다. 입구부터 시작해 전시장 내부, 정원, 카페까지 미술관 전체가 즐거움으로 가득한 ‘셀비의 집(Selby’s House)’으로 꾸며졌다. 유명인들의 사적 공간을 담은 사진 작품이 주를 이룬다. 작가 특유의 라이프스타일을 엿볼 수 있는 거실, 침실, 작업실을 재구성한 ‘셀비의 방’과, 그의 유년기 시절 꿈과 기억이 환상적으로 어우러진 ‘셀비의 정글’은 관객이 직접 체험하며 즐길 수 있다.
◇ book
세상과 이별하기 전에 하는 마지막 말들
재닛 웨어 저·인물과 사상사
간호사로서 호스피스 환자를 돌보는 데 헌신해온 저자가 임종 환자를 지켜보며 느낀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자는 삶의 마지막 순간 그들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말을 했는지 등을 기록했다. 죽음은 삶의 일부이며, 그 순간은 탄생 못지않은 기적임을 말한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서울편
유홍준 저·창비
1993년부터 시작한 답사기가 남도, 제주, 북한, 일본 등을 거쳐 서울에 도착했다. 저자는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서울의 문화유산과 역사, 인간사 등을 통찰력 있게 바라본다. 종묘와 더불어 창덕궁, 창경궁 구석구석을 살피며 조선시대 건축의 아름다움과 삶의 애환 등을 담았다.
◇ movie
안녕 히어로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가족의 소소한 일상을 담아낸 다큐멘터리 영화로, 오늘날의 노동 현실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작품을 연출한 한영희 감독은 “쌍용자동차의 대규모 정리해고 이후 이에 대한 다양한 화두가 한국 사회에 등장했다. 그러나 노동자의 현실은 나아지지 못한 실정이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비극적인 현실 속에서 영화를 통해 우리가 사는 노동과 해고의 현실을 이야기하고자 한다”고 작품 의도를 밝혔다. 그는 영화의 영문 제목을 ‘굿바이 마이 히어로(Goodbye My Hero)’라고 지으며 “세상의 영웅(노동자)들이 더는 짓밟히지 않았으면 한다”는 바람을 드러내기도 했다.
개봉 9월 7일 장르 다큐멘터리 감독 한영희 출연 소년 현우, 아빠 정운
치어댄스
일본 최고의 고교 치어 댄스팀 ‘제트’의 실화를 바탕으로, 팀의 탄생부터 이후 3년간의 도전기를 담았다. 인생에서 가장 고민하고 갈등하면서도 아름다웠던 고교 시절을 그린 성장 스토리로 중장년에게는 추억을, 청춘들에겐 용기를 북돋워준다. 한국에서는 로 잘 알려진 히로세 스즈가 몸치 소녀 ‘히카리’ 역을 맡았다. 또 로 익숙한 아마미 유키가 호랑이 선생님 ‘사오토메’ 분을 연기하며 훈훈한 사제지간의 모습을 담아냈다. 출연 배우들이 완벽한 동작을 연출하기 위해 반년 동안 특훈과 합숙 기간을 거친 것으로 알려지며 영화 속 치어리딩 장면이 기대를 모은다.
개봉 9월 21일 장르 드라마 감독 가와이 하야토 출연 히로세 스즈, 토미타 미우, 아마미 유키 등
◇ stage
쿵짝
지난해 초연에서 전 회차 매진 기록을 달성했던 뮤지컬 이 1년 만에 재연을 확정지었다. 주요섭 작가의 단편소설 의 옥희를 주인공으로, 사랑이라는 보편적인 메시지와 삶의 의미에 대해 재조명한다.
장소 동숭아트센터 일정 9월 30일까지 연출 우상욱 출연 윤여진, 권태진, 조현식 등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
신념을 지키려는 선생님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악마와도 손잡을 수 있다고 말하는 학생들 사이의 대립을 그렸다. 반전을 거듭하는 탄탄한 구성과 빠른 전개, 잘 짜인 논리로 팽팽한 긴장감을 선사하며 관객을 압도한다.
장소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일정 9월 8일~10월 15일 연출 이재준 출연 우미화, 박정복 등
틱틱붐
배우 이석준, 이건명, 배해선의 데뷔 20주년 기념 공연이다. 성기윤을 비롯해 의 원년 멤버들이 뭉쳤다. 의 극작가 조나단 라슨의 유작으로 작품을 향한 예술혼을 불태운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장소 대학로 TOM 일정 8월 29일~10월 15일 연출 박지혜 출연 이석준, 이건명, 배해선 등
서편제
소리꾼의 길을 찾아나서는 아버지 유봉과 그의 딸 송화, 의붓 남동생 동호의 50년을 넘나드는 소리 인생을 그린다. 판소리 가락과 함께 대중음악 작곡가 윤일상이 제작한 서정적인 록, 발라드 등이 독특한 앙상블을 이룬다.
장소 광림아트센터 BBCH홀 일정 8월 30일~11월 5일 연출 이지나 출연 이자람, 차지연 등
“라디오코리아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989년 2월 1일, LA의 한인들은 눈물을 흘렸다. 라디오를 틀었는데 한국어가 나오고 한국 노래가 나왔던 거다. 이역만리 ‘미국’ 땅에서 말이다. 그렇게 수많은 한인들을 울렸던 목소리는 지금도 매일 오후 3시가 되면 어김없이 흘러나온다. 28년 동안, 그가 마이크를 놓았던 날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그저 방송이 좋아 방송쟁이로 살아왔을 뿐인데, 어느덧 라디오코리아는 그의 인생이 되어 있었다.
최영호 라디오코리아 부회장(69). 그는 부인할 수 없는 LA의 라디오 스타다.
“죽을 때까지 하자던 장희는 울릉도로 가버리고, 글쎄 나만 이러고 있네요. 하하하.”
올해로 28주년을 맞은 라디오코리아와의 인연을 묻자 최영호 부회장은 웃음부터 터뜨렸다. 그랬다.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라디오코리아는 ‘이장희’로 통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장희가 홀연히 떠났고 라디오코리아는 위기설까지 나돌았다. 하지만 이후 10년, 라디오코리아는 여전히 건재하다. 그동안 광역주파수를 가진 자체 라디오방송국도 마련했고 캐나다를 포함한 북미 지역과 하와이까지 지국을 넓혔다. 최근엔 한국의 종편채널 ‘TV조선’과 손잡고 TV까지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최영호 부회장의 공이 적지 않았다.
라디오코리아의 주인도 바뀌고, 건물도 바뀌고, 모든 것이 바뀌었는데 그는 바뀌지 않았다. ‘부회장’이라는 묵직한 타이틀을 달았지만 여전히 그의 자리는 스튜디오 안 마이크 앞이다. 28년을 한결같이 들어온 목소리. 이제 사람들은 라디오코리아 하면 ‘최영호’를 떠올린다.
‘라디오코리아’ 너는 내 운명
“참 재미있는 것이 인생이에요. 미국에 오기 전 장희(가수 이장희)가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동아방송 이라고. 장희랑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친구예요. 친구가 일하는 방송국에 가서 재미 삼아 원고도 써주고 음악도 고르며 놀곤 했어요. 그때 김병우 PD도 알게 됐고요. 나중에 세 사람이 모두 미국 LA에서 만난 거예요. 운명이었죠. 우리에게 라디오코리아는.”
1974년, 대학(연세대학교 물리학과)을 졸업하고 큰누이가 사는 LA에 와 있던 최 부회장은 김병우 PD의 러브콜을 받았다. 그때가 1988년, 무역회사에 잘 다니고 있을 때였다. 한인 라디오 방송국을 만들어보자는 말에 최 부회장은 짜릿함을 느꼈다. 곧 이장희까지 합세, 세 사람은 의기투합했다.
“라디오 방송을 하려면 주파수(스테이션)를 사야 하는데 값이 어마어마합니다. 때문에 같은 주파수를 여러 다른 커뮤니티가 시간별로 렌트해서 나눠 쓰기도 합니다. 우리도 그렇게 시작했어요. 아시안 라디오 Am1300에서 오후 1시부터 6시까지 방송을 하기로 계약을 했어요. 김병우 PD가 한국에 레코드판을 사러 간 사이 우리는 방송 인력을 뽑았어요. 프로를 원했기 때문에 필기시험, 실기시험 갖출 건 다 갖춰서 했습니다. 다섯 명을 뽑았는데 그들이 라디오코리아 공채 1기입니다. 그중엔 현재 라디오코리아 보도본부장을 맡고 있는 송봉후씨도 있었습니다. 그때 목소리가 상당히 좋았어요. 지금도 좋지만…(웃음).”
최 부회장은 1989년 2월 1일 12시를 잊을 수가 없다. 애국가가 울려 퍼진 후 송봉후 아나운서의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가 전파를 탔다.
“친애하는 동포 여러분! 여기는 라디오코리아입니다!”
전화벨은 쉴 새 없이 울리고 수화기 너머의 한인들은 감격에 겨워 울음을 터트렸다. 사람들은 “이 방송이 진짜냐, 내일도 하느냐?” 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장희가 맡은 음악 프로그램 는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방송이 나가는 시간이면 방송국 앞으로 찾아온 사람들로 한바탕 난리가 나곤 했다. 그야말로 미주 한인 이민사의 한 페이지였다.
잊을 수 없는 그날, 4월 29일
“라디오는 참 매력적인 매체입니다. 들으면서 뭐든 다 할 수 있으니까요. 한인들은 삶의 현장에서 라디오를 들었죠. 봉제공장에서, 미장원에서, 방앗간에서, 운전을 하면서 모두가 라디오를 들었던 겁니다. 한 공장에서 미싱을 돌리던 수백 명의 한국인 여직원들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려 미국인 감독이 깜짝 놀랐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힘들었지만 낭만이 있던 시절이죠.”
라디오코리아는 한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성장했다. 함께 울고 웃었다.
가장 떠오르는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최 부회장은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다며 1992년 4월 29일의 LA폭동 이야기를 꺼냈다.
“퇴근을 하려는데 흑인 로드니 킹을 폭행한 백인 경찰관들이 무죄판결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뭔가 일이 터지겠구나 싶더라고요. 직원들에게 퇴근하지 말고 상황을 지켜보자고 했습니다.”
사우스 센트럴 일대는 순식간에 무법천지가 되었다. 폭도들은 북쪽으로 밀고 올라와 코리아타운을 습격했다. 불길이 치솟아도 소방대는 오지 않았고 떼를 지어 가게 물건들을 약탈해가도 경찰은 보이지 않았다. 한인들은 라디오코리아에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리쿼스토어인데 폭도들이 쳐들어온다.”
“지금 창문을 깨고 불을 지르고 있다.”
“웨스턴 길로는 들어오지 않는 게 좋겠다.”
최 부회장은 재빨리 특별 생방송을 결정하고 시시각각 들어오는 소식을 그대로 전했다. 폭도들의 위치를 알려주면 상인들은 미리 대비를 했고, 운전자들은 자동차에서 방송을 들으며 안전한 길로 갈 수 있었다.
“상상해보세요. 스마트폰도 GPS도 없던 시절이었어요. 눈앞에서 폭도들이 날뛰고 건물이 불타는 전시 상황과 같은 곳에서 라디오코리아 방송은 한인들에게 목숨 줄이었습니다. 경찰이 한인타운을 지켜주지 않자 한인들은 스스로 지킬 수밖에 없었죠.
1세들이 이민 와서 피땀으로 일궈낸 모든 것이 초토화될 상황이었습니다.”
폭동이 진압된 후에는 엄청난 피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가 급한 일이었다. 한인 공무원, 회계사, 변호사들을 불러 모아 함께 방송을 했다. 라디오코리아를 중심으로 한인 사회가 똘똘 뭉치는 모습에 미국 주류 사회의 이목이 집중됐다.
“하루는 화이트하우스에서 전화가 왔어요. 백악관 말입니다. 부시 대통령이 라디오코리아를 방문하겠다고요. 믿을 수 없는 일이었죠. 현직 대통령이 로컬 언론사를 직접 찾는 일은 처음이고 아마 앞으로도 없을 거라고 하더군요. 비서실장이 직접 한 말입니다. 언론의 역할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고… 제 개인 삶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 사건이었어요.”
야구광, 다저스를 만나다
최영호 부회장은 유명한 야구광이다. 미국으로 이민 온 이후 다저스의 팬이 되었고 특히 ‘다저스의 목소리’라고 불리는 빈 스컬리 캐스터의 중계를 듣는 것은 그에게 큰 즐거움이었다.
라디오코리아를 개국한 이듬해인 1990년, 최 부회장은 당시 LA 다저스의 구단주 피터 오말리를 찾아갔다. 거두절미하고 그가 던진 말은 “라디오 중계 좀 합시다!”였다고.
“한인들이 다저스 중계를 들으면 얼마나 좋아할까 싶었습니다. 야구 중계를 한번 해보고 싶은 욕심도 있었고요. 재미있었던 것은 오말리 구단주가 기다렸다는 듯이 ‘예스’를 한 거였어요. 당시 메이저리그 중계는 영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이렇게 세 가지 언어로만 했는데 한국어가 네 번째가 된 겁니다. 그해 9월 다저스와 신시내티와의 경기 중계를 하러 다저스구장에 갔지요. 그때의 감격이란… 그날 경기 녹음테이프는 뉴욕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도 있습니다.”
또 한 번의 역사적인 날이었다. 미국 메이저리그의 야구 중계를 한국어로 들을 수 있는 날이 올지 그 누가 알았겠는가. 게다가 최 부회장의 중계는 재미를 더했다. 경기 상황은 물론이고 선수들의 뒷이야기 등 미국 야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담긴 그의 중계는 한인 다저스 팬들을 만들어내는 데 일조를 했다. 다저스 구단으로서도 대만족이었다.
“다저스 구단 측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팀에 한국 선수가 하나 있으면 너무 좋을 거 같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당시 외국 선수를 기용하는 데 꽤 적극적인 분위기였기 때문에 말을 꺼내기도 쉬웠죠. 4년 뒤인 1994년, 마침내 박찬호 선수가 LA에 오게 되었죠. 정말 기분이 좋더라고요. 마이너리그에서 뛰는 2년 동안 라디오코리아는 전 경기를 중계방송했어요. 당신을 응원하는 한인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죠. 이후의 메이저리거 활약은 모두를 신바람 나게 했어요. 박찬호 선수와 지금 뛰고 있는 류현진 선수를 보고 있으면 저 혼자 느끼는 보람 같은 것이 있습니다.”
최 부회장은 지금도 다저스 경기에서 캐스터와 해설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했던가. 야구 중계만이 주는 짜릿함이 있다. 방송 경력 28년에 다저스 경기 중계만 27년, 그는 단연코 가장 재미있는 일이라며 무한애정을 드러낸다.
“간혹 나이도 있는데 언제까지 힘들게 일할 거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럴 때마다 이렇게 얘기해줍니다. 빈 스컬리는 67년간 다저스 중계를 하다가 88세에 은퇴했다고(웃음).”
“인호 형의 작품을 모두 소장하고 있어요”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최영호 부회장은 2013년 작고한 고 최인호 작가의 친동생이다. 세상없는 우애를 나누던 형이자 국민 작가를 떠나보낸 지 어느덧 4년. 아직도 가슴이 먹먹하다. 최인호 작가는 유독 LA와 인연이 깊었다. 3남 3녀 중 누이들과 동생인 최 부회장이 1970년대에 일찌감치 미국으로 이민을 와 있었던 까닭에 자주 찾아와 오래 머물다 가곤 했다. 참고로 최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인 (1982년 이상문학상 수상작)은 LA와 데스밸리 여행 중에 구상된 작품이다. 잡지 에 35년간 연재된 자전적 소설 을 비롯해 고인의 작품 곳곳에는 홀어머니와 그 밑에서 어렵게 자란 형제들에 대한 애틋함이 담겨 있다.
“작가 아니랄까봐 까칠하고 예민한 구석이 없지 않았지만 인호 형과 나는 누구보다도 서로를 이해하는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형의 글 쓰는 모습만 떠올라요. 자고 일어나 문틈으로 보면 역시나 글을 쓰고 있었고… 이사할 때마다 형의 습작들이 한 짐이었지만 어머니는 단 한 장도 버리지 않고 간직하셨습니다.”
형 최인호와 아우 최영호만이 아는 신춘문예 비하인드 스토리도 있다.
“형이 군대를 가면서 자신이 공책에 끄적거려놓은 게 있으니 원고지에 정필해 신문사에 보내라고 했어요. 나름대로 정성껏 써서 신문사에 보냈죠. 그렇게 당선된 작품이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견습환자’예요. 원고지 첫 장에 식은땀이 날 정도로 정성을 들여 한자(漢字)로 썼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이어령씨가 글씨가 너무 유치해서 읽지 않으려 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듣고 형과 한참을 웃었던 기억이 있어요.”
소주잔을 기울이며 고민을 나누던 친구 같은 형이었지만 장례를 치르는 동안 최 부회장은 새삼 깨달았다고 한다. 작가 최인호는 자신이 범접할 수 없었던 ‘거인’이었다는 것을.
“정치, 경제, 문화, 예술계 전체가 애도를 표해왔지요. 끝없이 이어지는 조문객들과 분향을 하고 흐느끼는 독자들을 보면서 형님이 얼마나 위대한 작가였는지, 한 시대를 품었던 예술가였는지 알게 됐어요. 아, 내 형님이 이런 분이었구나, 내가 더 존경해야 했던 분이었구나 회한이 밀려와 많이도 울었습니다.”
최 부회장은 형의 작품을 모두 소장하고 있다. 서고의 벽 하나를 다 차지하는 적지 않은 양이다. 형이 하늘로 간 후로 지금까지 그는 그 책들을 하나하나 다시 꺼내 읽고 있다. 라디오코리아 그의 사무실 책상에도 작가 최인호의 주옥같은 책들이 꽂혀 있다. 늘 곁에 두는데도 볼 때마다 마음이 철렁한다. 첫 장에는 어김없이 ‘영호에게’로 시작되는 형의 짧은 메시지가 담겨 있다. 보물들이다.
“갈수록 무뎌져야 하는데 어떻게 된 게 갈수록 보고 싶어요. 큰누이를 잃고 많이 울던 나에게 형은 누이를 가슴에 묻으라 했어요. 인호 형도 그렇게 가슴에 묻어야겠죠. 그는 나에게 영웅입니다. 형에 대한 존경심은 점점 그 깊이가 더해져요. 형 없이 나 혼자 늙어가는 것이 서글프기도 하지만 또 많이 감사합니다. 형으로 인해, 형의 글들로 인해 깨닫는 것이 많아지니까요.”
지키고 싶은 이름, 방송인 최영호
세월은 흘렀고 세상은 변했다. TV보다는 인터넷을, 라디오보다는 MP3가 더 편한 세대다. 최영호 부회장은 방송은 변하지만 방송을 하는 정신은 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것은 ‘라디오코리아’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로컬 방송의 생명은 바로 우리들 이야기를 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한인 동포들이 라디오코리아에게 가지고 있는 믿음은 정말 소중한 겁니다. 라디오코리아는 미주 한인의 자본으로 만든 한인언론이에요. 진짜 우리의 생각을 전하고 이익을 대변하는 ‘우리 방송’인 거죠. 저는 한인 사회가 있는 한 라디오코리아도 존재할 거라고 믿습니다.”
지금도 마이크 앞에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그는 스스로를 뼛속까지 방송인이라고 칭한다.
“나는 마이크 앞에 방송할 때가 가장 행복해요. 감투도 싫고 명예도 귀찮습니다. 나이가 더 들어 목소리가 변하면 청취자가 싫어할까요? 그래도 같이 늙어가는 친구 같은 분들이 있지 않을까요? 그분들을 위한 좋은 음악방송을 하고 싶어요. 깊은 밤에 함께 음악도 듣고 지난 얘기도 나누고요. 와, 이런 얘기 방송에서 해도 되나 싶은 것도 막 이야기하면서 말입니다(웃음).”
정유년인 올해는 정유재란(1597.1~1598.12) 발발 420주년이다. 임진왜란으로부터는 427주년.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에 게재하기로 한다.
노량(露梁)해전 대승첩이 없었다면 조선은 얼마나 가련하고 부끄러운 나라였겠는가! 만일 이순신 장군이 도망치는 왜적의 앞길을 가로막고 “한 척도 살려 보내지 않겠다”고 분전하다가 살신성인하지 않았다면…. 조선은 정말 의기도 결기도 없는 나라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임진년 국난 이래 중국에만 매달려 주권을 포기한 나라로 종전을 맞았다면, 수오지심도 모르는 나라가 되었을 것 아닌가.
1592년 4월 13일, 부산포에 상륙한 왜군은 무주공산을 달리듯 치고 올라와 채 20일도 못 되어 국도를 손에 넣었다. 대륙 교두보 상륙작전 같은 전쟁이었다. 지방 수령들은 소문만 듣고 도망쳤고, 조선 최고 장수라는 사람은 천험(天險)의 요새인 문경새재를 버리고 충주 탄금대에 진을 쳤다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벼랑에 떨어져 죽었다. 그는 최고 사령관 교지를 받고 전장으로 떠날 때, 군사가 없어 사흘을 모집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홀로 떠났다. 조선이라는 나라의 실상을 웅변하는 사실(史實)이다.
왜적 침입보고가 한양에 당도하는 데는 나흘이 걸렸다. 긴급 보고체제인 봉수체계도, 역참제도도 다 고장 난 탓이었다. 상주에 진을 쳤던 어떤 장수는 적이 10리 밖에 온 사실도 모르고 있다가 “적이 가까이 왔다”고 알린 백성의 목부터 쳤다. 다음 날 적이 나타나자 그는 혼자 줄행랑을 놓았다. 임금은 적이 아직 멀리 있는데도 궁궐을 버리고 달아나면서, 중국에 내부(內附·복속)할 궁리만 했다. 전쟁이 터지기 10년 전, 1년 치 양곡과 재정비축이 없는 점을 들어 “진실로 나라가 아니다”라고 상소한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한탄처럼, 조선은 나라라고 할 수 없는 나라였다.
이순신을 죽이려고 임금과 조정 중신들이 눈에 핏발을 세운 사이, 원균은 수군총수 자리에 앉았다. 그가 첫 전투에서 조선수군을 통째로 수장시켜 나라를 풍전등화에 내놓은 정유재란의 끝을 이순신이 통쾌하게 설욕했다. 그 노량해전 승첩이 있어 지금 옛일을 돌아보는 일이 부끄럽지 않다. 육전과 해전을 망라한 7년 전란 중 그렇게 통쾌하게 적을 토멸한 일이 없었기에 더욱 그러하다.
노량전투 엿새만인 1598년 11월 25일자 에는 전과가 이렇게 기록되었다. “왜적의 배 100여 척을 포획하고 200여 척을 불살랐으며, 500여 급을 참수했고 180여 명을 생포했다. 물에 빠져 죽은 자는 아직 떠오르지 않아 그 수를 알 수 없다.”
뒷날의 집계로는 적 병력 1만5000명 이상을 수장시킨 것으로 돼 있다. 일본 측도 , 같은 기록을 인용한 에서 “일본 배가 더 많이 불타고 파손되었다”,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가문의 함대 피해가 매우 컸다”는 식으로 패전을 전하고 있다.
노량해전 승첩 현장인 노량 바다에는 그날의 흔적이 없다. 이순신이 구국의 충혼을 불사른 관음포 바다는 거듭된 간척사업으로 내해가 훨씬 좁아졌다. 후세에 건립된 이락사(李落祠) 아래 올봄 준공된 ‘이순신 순국공원’의 시설물은 너무 현대적이고 크기만 해 오히려 옛일을 더듬고 추념하기에 불편했다. 100억 원이 넘게 들었다는 기념관의 시설물에는 갖가지 모조품류와 책에 다 나오는 상황도 설명문 류만 가득해 애써 찾는 이의 발품에 값하지 못했다. 오히려 진짜 유적인 이락사가 가려진 느낌이었다.
남해대교 아래 숨어 있는 충렬사(忠烈祠)와, 경내 초빈(草殯) 자리에 만들어놓은 장군의 가묘(假墓)가 옛일을 증언하고 있다. 1970년대 연육교의 효시였던 남해대교 아래 연안을 둘러보면서, 노량 바다의 오묘한 지리를 터득한 것은 현장을 찾아본 보람이었다. 남해대교 폭은 400m 정도다. 경상도 수역에서 전라도 바다로 들어서는 물목인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와 남해 섬 북단의 거리가 그것이다. 명량해협보다 조금 넓은 정도다.
그 물목을 지켜 섰다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구원하러 출동한 왜 함대 500척을 관음포 바다로 몰아넣고 독 안의 쥐잡듯한 전투가 노량해전이었다. 조명 연합수군의 압박을 견디다 못한 왜군은 남해 섬 뭍으로 상륙해 산을 넘어 도망치는 상황이었다. 그 틈을 타 유키나가는 남해 섬을 멀찌감치 돌아 구사일생으로 달아났다.
노량해전을 앞두고 이순신은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陳璘)과 크게 다투었다. 순천왜성을 탈출하려는 유키나가의 뇌물작전에 넘어가 포위망을 풀어주려 한 것이다. 왜성 코앞인 광양만을 봉쇄하고 있던 그는 노량해전 3일을 앞둔 11월 16일 “남해 섬의 적을 먼저 쳐야겠다”면서 떠나려고 했다. 곱게 성을 비워주겠다는 감언이설에 혹한 것이다.
“남해의 적이란 왜적에게 포로로 잡힌 우리 백성들이오.”, “왜적에 붙었으니 적이 아니면 무엇이오?”, “귀국 황제께서는 작은 나라 백성을 구하라 하셨다는데, 약한 그들을 죽이는 것은 황제의 뜻이 아닐 것이오.”, “우리 황제께서 누구라도 명을 어기거든 징치하라고 내게 긴 칼을 주셨소.”, “한 번 죽는 것은 두렵지 않지만 우리 백성을 죽이도록 두고 볼 수는 없소.”
칼을 꺼내 들고 위압적으로 나오는 진 도독에게 이순신이 의연한 자세를 굽히지 않은 이야기는 유명하다.
11월 18일 왜의 대선단이 노량으로 몰려온다는 탐망군의 보고를 알리자 진 도독도 따라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조명 연합수군 합동작전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순신의 조카 이분(李芬)이 쓴 에 따르면, 그날 밤 늦게 광양만을 떠나기 전 이순신은 배 위에서 손을 씻고 무릎을 꿇고 하늘에 빌었다. “만일 이 원수들을 없앨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此讐若除 死則無憾].” 그러고는 모든 병정에게 하무를 물리고 조용히 진군했다. ‘하무’란 군사들이 떠들지 못하도록 입에 물리던 나무재갈이다.
임진년 이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조명 연합수군의 규모는 전선 250여 척에 병력은 2만1000명(조선군 8000명, 명군 1만3000명)이었다. 진 도독이 기함, 좌선봉은 명군 제독 등자룡(鄧子龍), 우선봉은 이순신이었다. 18일 늦은 밤 광양만을 떠난 연합함대는 19일 이른 새벽 노량해협에 이르렀다. ‘해협을 가득 메운 왜선들의 불빛이 긴 뱀처럼 줄지어 있었다.’ 행록에 묘사된 이 문장이 왜적의 규모를 말해준다. 사천 선진리 왜성에 주둔했던 시마즈 요시히로 군뿐만이 아니라, 멀리 울산에 있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원군까지 합세한 500척 대함대였다.
연합함대가 캄캄한 노량 바다를 저어오는 왜적의 앞길을 가로막으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행록에는 ‘밤 10시쯤 조·명군이 함께 출발하여 새벽 2시쯤 노량에 도착, 적선 500여 척을 만나 아침이 되도록 크게 싸웠다’고 적혀 있다. 불화살이 날고, 각종 총통이 포효하고, 불붙은 장작더미가 왜선으로 던져졌다. 이순신의 기도처럼 단 한 척의 적선도 살아 돌아가지 못하게 하려는 조선수군의 분전이었다.
앞길이 막힌 왜적은 남해 섬 남쪽으로 진로를 틀어 활로를 찾으려는 모양이었다. 진 도독 함대가 추격하자 관음포로 달아나던 시마즈 요시히로 함대는 앞길이 막힌 것을 알고 되돌아서 결사적으로 저항했다. 연안에 닿은 배에서는 적병들이 뛰어내려 산으로 달아났다. 아직 닿지 않은 배들은 독 안에 든 쥐처럼 사납게 반격해왔다. 진린 함대를 뒤따라온 왜선들에게 기함이 협공을 당하게 되자, 너른 바다에서 왜적을 무찌르던 이순신이 급히 달려갔다.
“진린 도독을 구하라!” 이순신은 앞장서서 진 도독 기함으로 달려갔다. 날이 완전히 밝은 오전 7시 무렵이었다. 바다 위에는 부서지고 불타는 적선이 뒤엉키고, 바닷물은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순신 함대가 도독의 판옥선을 공격하는 왜선들에게 총통과 불화살을 퍼붓는 사이 왜선들이 겹겹이 몰려들었다. 삼도수군통제사 깃발을 보고 이순신을 노린 것이었다.
적선의 접근에도 아랑곳없이 한 손에 활을 들고 또 한 손으로 북을 울리며 독전하던 이순신이 한순간 가슴에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부장 송희립(宋希立)이 총을 맞았다는 보고에 그쪽을 돌아보다가 그렇게 되었다는 후일담이 전해져온다. 향년 54세였다.
옆에서 돕던 아들 회(薈)와 조카 완(莞)이 달려들어 부축하려 할 때 이순신이 남긴 마지막 말은 성인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입 밖에 내지 말라[戰方急愼勿言我死].” 고통과 회한을 삭이면서 끝까지 걱정한 것은 싸움의 결말이었다. 얼마나 많은 적선을 당파하고 분멸할 것인가, 그리하여 얼마나 많은 왜적을 ‘나의 바다’에 수장시킬 수 있을 것인가!
오직 그것만이 성웅(聖雄) 이순신의 관심사였다. 단재 신채호, 춘원 이광수, 노산 이은상 같은 선각자들은 우리 역사에서 특정 인물에게 성(聖)자를 붙일 수 있는 사람은 세종대왕과 이순신뿐이라고 말했다.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나라 걱정만 했다는 점에서 이 말에 토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영웅의 죽음을 숨긴 채 회와 완이 장군처럼 독전기를 휘두르고 북을 울려 사기를 진작시킨 결과는 찬란했다. 임진년 이래 7년 동안 뭍에서건 바다에서건 이보다 큰 전과를 올린 일은 없었다. 격전 중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요시히로는 남은 함선을 이끌고 남해를 돌아 부산으로 달아났다.
“통제공 수고 많았소. 어서 나오시오.” 싸움이 끝나고 이순신 기함을 찾아온 진 도독은 승리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었다. “숙부님은 돌아가셨습니다.” 조카 완의 말에 도독은 배 위에서 세 번이나 넘어졌다 한다. “공은 죽어서도 나라를 구하셨구려!” 그는 가슴을 치며 통곡을 그치지 않았다. 그 소리 탓에 성웅의 별이 관음포 바다에 떨어진 것을 조명 양군이 알게 되었고, 수백 척 전선에서 터져 나오는 울음이 파도소리를 덮었다.
장군의 시신은 관음포 이락사 자리에 잠시 안치되었다가 노량 충렬사 자리로 옮겨져 초빈되었다. 며칠 후에는 고금도 통제영으로 모셔졌다. 전남 완도군 고금면 덕동리 해안 옛 통제영 터에는 장군의 유해가 안치되었던 월송대(月松臺)가 보존되어 있다.
고금도는 쉽게 가볼 수 없는 섬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육속이 되어 쉽게 찾을 수 있다. 강진군 마량항에서 고금도 북단으로 가로질러진 마량대교를 건너 10여 분 달리다 왼편으로 접어들면 이내 덕동리 해변이다. 잔잔한 바다가 섬 내륙으로 깊숙이 파고들어온 만(灣) 안쪽 아늑한 포구연안이 마지막 통제영 자리다.
사적 114호로 지정된 고금도 충무사는 이순신 영정을 모신 사당 앞에 아담한 사우가 몇 채 둘러섰다. 사당 왼편의 관왕묘 비가 눈길을 끌었다. 원래 도독 진린이 이 자리에 관왕묘(관우사당)를 건립했는데, 뒷날 충무사를 짓고 관왕묘는 묘비(廟碑)만 남겨두었다. 이곳이 명 수군 군영이었음을 증언하는 유적이다.
고금도 통제영을 굽어보는 덕동리 야트막한 언덕 위 솔밭(월송대)에 모셔졌던 성웅의 유해는 83일 만에 고향인 아산으로 모셔져 현재 아산시 음봉면 어라산 기슭에서 영면하고 있다.
고금도 통제영은 명량대첩 이후 적당한 진지를 찾던 이순신이 목포 앞바다 고하도(高下島)에서 정유년 겨울을 나고 옮겨온 마지막 진지였다. 이곳에서 장군은 전함을 건조하고 장정을 모집해 수군 재건에 힘쓰는 한편, 농지를 개간하고 군염(軍鹽) 제조사업으로 전력을 크게 회복시켰다. 자신을 믿고 따르는 주민들의 협력이 큰 힘이 되었다.
정부 지원 한 푼 없이 그렇게 힘을 기른 것이 진 도독의 마음을 산 밑천이 되었다. 1598년 7월 16일 진린이 수군 5000명을 거느리고 고금도 이순신 통제영에 당도했다. 이순신은 술과 안주를 성대하게 차려 배에 싣고 군대의 위의를 갖춰 군악을 울리며 멀리 나가 맞아들였다. 칠천도 패전 이후 중국 동해안 지방이 왜의 위협에 노출되자 명은 부랴부랴 조선에 수군을 파병했던 것이다.
통제영으로 맞아들여서도 성대한 환영연을 베풀었다. 여러 장수들은 잔뜩 취해 “이순신은 과연 훌륭한 장수로다” 하며 좋아했다. 사납고 오만하기로 소문난 진린도 융숭한 대접에 흡족해했다. 그러나 다음 날부터 뜻밖의 변이 일어났다. 명나라 수군의 약탈과 부녀자 희롱으로 동네마다 통곡과 탄식이 터졌다.
보다 못한 이순신은 어느 날 크고 작은 막사를 헐고 옷과 이부자리를 배에 옮겨 실었다. 도독이 그 모습을 보고 달려와 까닭을 물었다. “귀국 군사들 행패를 견딜 수 없어 백성들과 함께 다른 곳으로 옮겨가려 합니다.” 도독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즉시 이순신에게 명나라 수군의 탈법 행위 단속권이 허락되었다. 그 후로 명군의 행패가 사라졌다.
이순신은 크고 작은 전과까지 진 도독에게 양보해 체면을 살려주었다. 그 인품에 감격한 도독은 이순신을 제갈량에 비유하며 명나라에 가 벼슬을 하도록 권유하기까지 했다. 명나라 조정과 선조 임금에게 올린 서장에서 그는 이순신을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재(才)가 있으며, 보천욕일(補天浴日)의 공(功)이 있는 인물”이라고 극찬했다. 천지를 주무른 재주요, 하늘과 해를 손본 공이라는 평가는 진정 감화를 받지 않고는 인사치레로 쓸 수 없는 말이다.
그 서장에 감복한 명나라 신종은 도독인 참도 독전기 등 여덟 가지 물건[八賜品]을 보내 이순신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 전에 이순신을 살리기 위해 면사첩(免死帖)을 보낸 것도 그였다. 한양의 명군 총사령부에서는 영내에 빈소를 설치하고 성웅의 전몰을 애도했다.
그러나 우리 임금은 그 반대였다. 예조에서 그 사실을 전하며 어떻게 해야 할지 하회를 구해도 선조는 대답이 없었다. 재차 하회를 요구하자 마지못해 “알아서 하라” 했다. 뒷날 논공행상 때도 그랬다. 선조는 굳이 원균을 이순신과 같은 정왜(征倭) 일등공신에 올리라 했다. 조정에서 부당하다는 여론이 일었지만 뜻을 굽히지 않았다. 너무 훌륭해 두렵고 질투 나는 이순신의 죽음을 반기지 않고서야 그럴 수가 있겠는가.
조선 500년 역사에서 이순신을 가장 위대한 영웅으로 만들고, 스스로 가장 용렬한 임금이기를 자청한 일이었다.
정유년인 올해는 정유재란(1597.1~1598.12) 발발 420주년이다. 임진왜란으로부터는 427주년.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에 게재하기로 한다.
명량대첩의 기적은 기울어져가던 조선의 운명을 건져 올렸다. 서해안을 타고 올라가 한강하구로 도성을 도모하려던 왜군의 계획을 보기 좋게 좌절시킨 것이다. 원균의 칠천량 패전으로부터 꼭 2개월, 13척의 전선으로 300척이 넘는 왜선을 격퇴한 기적 같은 승첩이었다. 이순신 장군 스스로 천행이었다고 기록한 전투였다.
후세 역사가들은 이 승전을 세계 4대 해전사의 하나로 등재했다. 150척이 넘는 전선이 수몰되고, 장수도 군졸도 죽고 흩어져 전력 제로 상태의 조선수군이 어떻게 그런 기적을 이루어낸 것인가. 믿을 수 없는 이 전투의 경과는 여러 나라 해군의 연구 대상이 되었다. 러일전쟁의 영웅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제독은 자신을 군신(軍神)이라고 떠받드는 말에 “진정한 군신은 이순신 정도다. 그에 비하면 나는 하사관 정도도 못 되는 사람”이라고 말한 바 있다.
옥에서 풀려나 백의종군 길에 오른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된 것이 기적의 단초였다. 8월 3일 진주에서 복직교서는 받았지만 달랑 종이 한 장뿐이었다. 군영도, 병력도, 군량도, 전선도 없는 완전 제로였다. 그래서 기적이었고 세계 4대 해전으로 꼽히는 것이다.
그날부터 이순신은 전라도 해안 지역과 내륙 지방을 순회하면서 수군 재건을 서둘렀다. 그가 다시 수군을 이끌게 되었다는 소식이 퍼지자 숨었던 군관들과 군졸들이 모여들었다. 그들 모두가 한심한 패전에 분을 품었던 모양이다. 배흥립(裵興立), 송희립(宋希立), 이몽구(李夢龜), 최대성(崔大晟) 등 옛 측근들이 상사를 찾아와 진용이 갖추어지자, 거제 현령, 발포 만호 등 지방관들도 낯을 내놓았다. 다시 옛날과 같은 권한을 쥐게 된 사람과 관계를 수복하려는 것이었다.
순천, 보성, 장흥 땅을 거쳐 전선의 소재를 찾아가는 동안 군관 군졸이 120여 명으로 늘었고, 보성에서는 창, 칼, 활, 화살 등 무기류에 약간의 군량미까지 손에 넣게 되었다. 피란민들도 이순신 가까이로 몰려들어 든든한 배후가 되어줬다. 배설(裵楔)이 끌고 도망쳤던 12척의 전선은 우여곡절 끝에 8월 19일 장흥 회진포에서 인수되었다. 이순신이 무서웠던 경상우수사 배설은 주저주저 현장에 나타나 전선을 넘겨주고는 명량회전이 임박하자 도망쳤다.
왜적이 자신을 찾아나선 사실을 모를 리 없는 이순신은 즉시 회진포를 떠나 서쪽으로 항해를 시작했다. 안전한 포구를 찾아 진용을 정비하고 교육·훈련도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왜적에게 쫓기며 수군 재건에 노심초사 과로한 탓인지, 토사곽란이 일어 꼬박 사흘을 앓았지만 편히 누워 쉴 수가 없었다.
이진(梨津·해남군 북평면), 어란포(於蘭浦·해남군 송지면)에 진을 치자 왜적이 알고 달려왔다. 전의와 실력을 떠보려는 것이었다. 어란포에 닻을 내린 8월 28일 새벽 왜 척후선 8척이 포구 안으로 돌입해왔다. 칠천량 이후 사기가 오른 탓도 있겠으나, 전선이 10여 척뿐이라는 것을 알고 얕잡아보는 것 같았다. 이순신은 즉시 출동 명령을 내렸다. 우리 전선이 마주 나가 싸움을 걸자 적은 황급히 달아났다.
야습을 우려한 이순신은 즉시 진도 벽파진(碧波津)으로 진을 옮겨갔다. 그곳에서 보름 동안 머물며 참모들과 함께 왜의 대군을 맞아 싸울 궁리에 머리를 싸맸던 이순신은 마침내 울돌목을 최후의 결전장으로 선택하기에 이른다. 15일자에 그 까닭이 적혀 있다. “벽파진 뒤에 명량이 있는데 수효 적은 수군으로 명량을 등지고 진을 칠 수가 없기 때문”이라 했다.
진도와 해남 땅 화원반도를 가르는 좁은 해협은 옛날부터 물길이 사납기로 유명한 곳이다. 진도대교가 놓인 곳은 폭 300여 m에 불과한데 수중에 날카로운 암초가 많아, 조류가 바뀔 때면 회오리 물결이 일어 물소리가 20리를 간다고 울돌목이란 이름을 지녔다. 그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진도읍에서 고속버스를 내려 되돌아 나와 도보로 대교를 건너면서 실감할 수 있었다. 물목이 300m 정도인 바닷속에 수심이 20m 정도밖에 안 될 정도로 뾰족뾰족한 한 암초가 숨었다니, 조류가 바뀔 때 물살이 울고 돌지 않고 어쩌랴! 특히 해남 쪽 물길이 크게 울었다.
흰 거품을 뿜어내며 세차게 소용돌이치는 모습을 내려다보면서 당시의 통쾌한 전황이 떠올랐다. 조류가 한창 빠를 때는 해남 쪽 해안에서 뜰채를 들고 있다가, 수면 위로 솟아오르는 숭어를 잡는다는 말도 이해되었다.
결전의 날이 왔다. 9월 16일 별망군(별도로 조직된 정탐조)이 보고하기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적선이 명량을 거쳐 우리 배를 향해 들어오고 있다”고 했다. 어란포와 그 부근에 진을 쳤던 무리들이다. 이순신을 따라온 해상 피란민들이 벽파진 인근 야산에 올라 헤아린 바로는 왜선이 300척이 훨씬 넘는다 했다. 초고에도 330척으로 기록돼 있다.
적 선봉장은 해전의 천재라는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道總)였다. 마다시(馬多時)라 불리던 그는 임진년 당항포 해전에서 왜군 함대를 이끌다 전사한 지휘관의 친동생으로, 안골포에 진을 두고 있었다. 그는 “내 손으로 이순신의 수급을 베어 형의 원수를 갚고 서해를 통해 경강(京江·한강)으로 항진하겠다”고 나선 인물이었다.
이 이야기는 14일자 기록으로 입증된다. 이날 탐망군관 임준영(任俊英)이 왜적선 200여 척 가운데 55척이 어란에 들어왔다는 보고 끝에 “왜적에게 붙잡혔다가 도망쳐 나온 김중걸(金仲傑)이 말하기를, 왜적이 각처의 배를 불러 모아 합세해서 조선수군을 섬멸하고 경강으로 올라가기로 의논이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적혀 있다. 연합선단을 꾸려 어떻게든 서해를 장악하려는 의도가 확인된 셈이다.
왜군은 수군 총사령관 구키 요시다카(九鬼嘉隆)였다. 그 휘하에 해전에 능하다는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도도 다카도라(藤堂高虎), 구루시마 미치후사(来島通総) 등 제장이 총동원되었다. 현지 해역에 330척을 비롯해 남서 해안 곳곳에 숨겨놓은 것을 다 합치면 적세는 1000척으로 추산되었다.
출진 전날 이순신은 장수들에게 유명한 정신무장 훈화를 남겼다.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만 하면 죽는다(必死卽生 必生卽死) 하였다.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족히 1000명이라도 두렵게 할 수 있다.”
드디어 결전의 날이 밝았다. 16일 오전 9시쯤 명량해협에 나타난 적은 진도 해안에 머물다가 유속이 느려지기 시작한 정오 가까이 되어 울돌목에 나타났다. 이에 맞추어 이순신 함대도 우수영을 떠나 울돌목 동북쪽, 우수영 포구를 감싸고 있는 양도 앞 바다에서 전투대형을 이루고 기다렸다. 맨 앞에 이순신의 기함, 그다음이 김응함(金應諴)의 중군선단, 그 뒤가 김억추(金億秋)의 후군선단, 그 배후에 전선으로 위장한 피란민 어선 100여 척이 포진했다.
“곧 여러 배에 명령하여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가니 적선 130여 척이 우리 배를 에워쌌다. 여러 장수들은 적은 군사로는 많은 적을 대적할 수 없다 없다고 낙심하면서 모두 회피할 꾀만 냈다. 그 와중에 김억추는 벌써 2마장 밖으로 물러나 있었다. 나는 노를 바삐 저어 앞으로 돌진하면서 지자, 현자 등 각종 총통을 마구 쏘아 탄환이 폭풍우같이 쏟아지고, 군관들이 배 위에 총총히 늘어서 화살을 빗발같이 쏘니 감히 대들지 못하고 나왔다 물러갔다 하였다.” 16일자 에 적힌 초기 상황은 이렇게 위태로웠다.
겁을 먹은 중군과 후군이 멀찌감치 물러서 있고 이순신만이 고군분투하는 장면이다. 배를 돌려 군령을 내리려 해도 적이 대들 것 같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이순신은 초요기(부르는 깃발)를 세웠다. 중군장 김응함과 거제 현령 안위(安衛)가 다가왔다.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친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 통제사의 질책을 받은 안위가 마지못해 적진으로 돌입했다. 김응함에게도 같은 호령이 떨어졌다. “대장을 구원하지 않는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당장 처형할 것이로되 적세가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한다.”
두 장수가 적진으로 뛰어들자 다른 배들도 용기를 내어 본격적으로 해전이 시작되었다. 적 대장선과 휘하 두 척의 군사들이 안위의 배에 오르려고 개미 붙듯 한 것을 보고 이순신이 달려가 총통과 화살을 마구 날렸다. 녹도 만호 송여종(宋汝淙), 평산포 대장 정응두(丁應斗)의 배도 달려와 합세했다. 지자, 현자 총통 소리가 산천을 뒤흔들고 화살이 빗발처럼 날았다.
왜군이 남긴 명량해전도에는 조선수군이 쇠뇌를 발사하는 장면이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쇠뇌는 손잡이를 잡아당기면 화살이 발사되는 장치로, 5~10초당 한 발씩 쏠 수 있어 왜적이 무서워한 무기다.
한창 교전 중 기함에 타고 있던 준사(俊沙)라는 항왜(降倭)가 “적장 다마시가 바다에 빠졌다”고 말했다. 총통이 대장선 층루에 맞아 선교가 통째로 부서져 바다에 떨어진 것이었다. 이순신이 물 긷는 병사 김돌손(金乭孫)을 시켜 갈고리로 적장을 낚아 올렸다. 준사는 “그래, 다마시 맞다!” 하며 좋아 날뛰었다. 그의 시신이 토막토막 잘려 대장선에 효수되자 갑자기 적진이 조용해졌다.
그 틈에 조선함대는 북을 크게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 돌진해 들어가 적선을 만나는 대로 부딪쳐 깨트리고 불화살을 쏘았다. 삽시간에 31척이 분멸되었다. 때마침 조류의 방향이 바뀌어 적진은 우왕좌왕했다. 어쩔 수 없었던지 적은 남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조류에 떠밀려 북쪽으로 흘러든 적선들은 후위의 어선들에게 협공을 당해 흩어졌다.
우리 측 인명과 전선은 전혀 피해가 없었고, 부상자는 기함에서 5명, 전체로는 100명이 안 되었다. 13척의 전선으로 300척이 넘는 적 함대를 물리친 전대미문의 승첩이었다.
유성룡의 에는 이때 조선수군 병력이 8000명이라 했다. 불과 2개월 전 120명을 거느렸던 ‘회령포 결의’ 때와 비교하면 믿어지지 않는 숫자다. 유성룡은 이순신이 통행첩을 발행해 막대한 전비를 충당했다고 썼다. 바다로 피란 온 백성들에게 큰 배는 쌀 3섬, 중간 배는 2섬, 작은 배는 1섬씩을 받고 통행첩을 발행해주었다는 것이다. 또 백성들이 갖고 있는 구리와 쇠 등을 모아 대포를 주조하고,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었다. 이순신에게 의지해 난리를 피하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성안에 다 수용하지 못할 정도였다. 이런 실정으로 보아 병력 자원 해결이 어렵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왜적 함대가 그토록 허무하게 깨진 데는 여러 원인이 있지만, 무엇보다 세키부네(關船)라는 전선이 조선 판옥선보다 몸체가 작아 충돌에 약한 탓이었다. 임진년 연전연패에 충격을 받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전선 대형화를 명해 정유년에는 몸체가 큰 아다케부네(安宅船)가 많이 왔다. 그러나 폭이 좁은 해협에 들어설 수가 없어 뒤에 물러서 있다가 싸워보지도 못하고 쫓겨간 것이다.
조선수군 승인의 하나로 거북선의 역할이 거론되기도 하는데, 이 부분은 더 고증되어야 할 문제다. 8월 19일 배설에게서 12척을 인수하고 1개월도 못 되는 사이 거북선을 건조할 시간이 있었겠냐는 의문이 해결되지 않았다. , , 같은 신빙성 높은 기록에 거북선이 출전했다는 기록은 없다.
또 한 가지는 ‘쇠사슬’론이다. 조선수군이 울돌목 바다 밑에 쇠사슬을 가설해 적선이 걸려 항진할 수 없었다는 학설인데, 이 역시 기록이 없어 증빙이 되지 않는다. 쇠사슬은 임진년 이순신이 전라좌수영 해역에 설치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는 항만 방어용이었지 실전에 이용된 기록이 없다. 다수 학자들은 물살이 센 울돌목에는 무게가 몇십 톤이나 되는 쇠사슬 설치가 불가능하다는 견해를 지지하고 있다.
진도대교를 건너기 직전인 해남 땅에 국민관광지 명량대첩 기념공원이 있다. 작년에 개관한 기념관에는 거북선과 판옥선 실물대 모형선과 전쟁 경과 등에 관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지만 눈에 띄는 유물은 없다. 진짜 유물은 거기서 2km쯤 떨어진 우수영 마을에 있는 명량대첩비다.
숙종 때(1688년) 건립된 이 비석 상단에 새겨진 ‘통제사충무이공명량대첩비’ 전액 12자는 의 작가 서포 김만중(金萬重)의 전서체로 유명하다. 1942년 일제가 강제 철거해 조선총독부청사 뒤편에 방치했던 것을 1950년 우수영 지역 유지들이 되찾아 세웠다. 처음에는 우수영성 밖에 이건했다가, 2011년 도로공사 관계로 처음 자리로 되돌아왔다.
1964년 우수영 마을에 건립된 사당 충무사도 지난 5월 비석 옆으로 이전 건립되어 비로소 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비석을 둘러보다가 현지 주민에게서 기막힌 수난사를 들었다.
“왜놈 헌병 둘이 비석 앞에 와서 권총을 꺼내 몇 발이고 비석을 쏘아버리두만. 비석이 무슨 죄라고. 그때의 파편이 저기 저렇게 남아 있소.”
철거 당시 일곱 살이었다는 노인은 지금도 그 심보를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비석 상단을 유심히 보니 어린애 주먹 크기의 총탄 자국이 몇 개 식별되었다.
대승첩 직후 이순신은 빠른 조류를 타고 당사도(唐沙島·신안군 암태면), 어의도(於義島·신안군 지도읍), 법성포를 거쳐 전북 고군산 열도까지 진출했다. 명량승첩과 이순신의 건재를 알려 피란민들을 안심시키려는 행보였는데, 왜군의 추적을 따돌리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왜군은 어디에 숨었을지 모를 조선함대가 두려워 서해 진출은 꿈도 꾸지 못했다. 신출귀몰하는 이순신의 전법에 또 어떤 수모를 당할지 모를 일 아닌가. 참패의 원수는 갚아야겠는데 바다는 무서웠다. 그래서 택한 것이 뭍에 있는 이순신의 고향집이었다.
10월 14일, 일단의 무리가 아산 금성촌 이순신 본가에 불을 지르고 분탕질을 쳤다. 막내아들 면(葂)이 그 와중에 전사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순신은 영내에 있는 민가에 들어 밤새 통곡했다. 그날 밤 코피를 한 되 넘게 흘렸다는 기록도 남았다. 영웅도 일상으로 돌아오면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던가!
문학작품을 고를 때 작가가 누군지 반드시 확인하면서 영화를 볼 때는 대부분 제목만 보고 선택해왔음을 고백해야겠다. 그러니까 그렇게 많은 영화를 봐왔으면서도 필자에게 영화는 감독의 메시지나 예술적 성취보다는 그저 한 시간 반 정도 즐기는 가벼운 문화적 소비재에 불과했던 것이다. 적어도 무더위가 절정에 오른 지난 주말까지는.
더위에 지친 날 영화를 보자는 제의는 반가웠다. 적어도 영화관은 시원한 곳이니. 게다가 모처럼 남편의 제의라 제목도 묻지 않고 따라나섰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 전쟁영화란다. 남편은 감독의 전작들을 언급하면서 그의 예술적 성취에 대해 열심히 설명했으나 생소한 이야기였고 더욱이 전쟁영화는 필자가 선호하는 장르도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려면 어떠랴. 이 더위를 피할 수만 있다면.
상영시간이 임박해서인지 좌석이 첫 줄밖에 없었다. 아이맥스에서 보고 싶어 했던 남편은 오히려 앞줄이라 좋단다. 우리는 그렇게 그날의 현장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에 포위되어 프랑스 북부 덩케르크 해변에 고립된 연합군 40만 명을 도버해협 건너 영국으로 철수시키는, 실제 있었던 기적 같은 작전을 영화로 재현한 것이다.
그런데 도무지 스토리다운 스토리가 없었다. 영웅 같은 주인공도 없었다. 곳곳에서 살아남으려는 아우성만 가득했다. 그렇다고 처절한 살육 장면도 없었다. 독일군에 포위되어 있다는 설정만 있을 뿐 독일군도 보이지 않았고 본격적인 접전도 없었다. 보통 전쟁영화에서 흔히 보여주는 익숙한 장면들이 보이지 않았다. 배경만 전쟁영화일 뿐 실제로는 재난영화라고 분류해야 할 지경이었다.
감독은 이 영화를 배에 오르는 잔교에서의 일주일, 바다에서의 1일, 하늘에서의 1시간 등 세 가지 시퀀스로 나누어 각기 다른 서술자의 시각으로 교차해가면서 보여준다. 영화 전반부는 서로 소통되지 않는 각각의 상황에서 처절한 사투만이 이어진다. 잔교에서 하염없이 배를 기다리다 적기의 사격으로 속절없이 죽어가는 병사들. 징발된 작은 배를 몰고 전장으로 가는 이름 없는 어선들. 연료가 떨어져가는데 적기로부터 아군을 지켜야 하는 조종사. 거대한 전장을 교직하는 이름 없는 사람들.
이런 아수라장 속에 감독은 세 개의 작은 이야기를 배치한다. 수많은 병사 중 카메라는 토미(핀 화이트헤드)와 남의 이름을 도용한 깁슨(아뉴린 바나드)의 동선을 따라간다. 그들은 살기 위해 본능적으로 행동하지만, 서로 돕는 인간애를 지니고 있다. 징발된 요트를 몰고 나가는 도슨 부자는 따라나선 소년 조지가 바다에서 구해준 병사의 우발적 폭력으로 죽게 되지만 임무를 완수한다.
이 모든 흐름이 하나로 합일되는 시점은 조종사 콜린스가 적기에 격추되어 바다에 추락하고 도슨 부자가 그를 구하는 장면일 것이다. 이들은 각자 자신의 전쟁을 치르고 있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한다. 또 이들은 서로 돕고 피해를 주기도 하지만, 감독의 시선은 선악을 판정하지 않는다. 그들 모두는 살아남으려는 평범한 인간들일 뿐이다.
이 영화는 전쟁을 정의하려 하지도 않고 선악으로 재단하지도 않는다. 아마 감독의 보여주려고 한 메시지는 살아 돌아온 병사들을 환영하면서 한 시각장애인이 “살아서 돌아온 것으로 충분해”라고 한 말일 것이다. 우리를 한 시간 반 넘게 이 품격 있는 전쟁터에 몰입시킨 것은 단연코 음악이다. 시계 초침소리 등 다양한 소리들을 변주하며 줄곧 내장을 울렸던 음악이 시간과 더위를 잊게 해준 공신이었다.
이 영화는 단언컨대 감독의 영화다. 마지막 파리어(톰 하디)의 비행기가 연료가 떨어져 무동력으로 하늘을 비행하는 장면은 압권이다. 이 순간 일주일, 하루, 한 시간이라는 서로 다른 시간의 부조화가 하나로 합일하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천재다.
한때는 취업전선에서 먹고사는 문제에 부딪치고 가족들마저 내 마음을 몰라줄 때 성당의 신부님을 부러워한 적이 있었다. 신부님은 완전고용으로 취업의 어려움이나 회사에서 짤리는 고통 없이 신도들에게 복음만 전달하면 되는지 알았다. 늘 깨끗한 복장에 신도들로부터 존경받기만 하는 모습이 세파에 시달리는 보통우리의 삶과는 다른 모습이 부러웠다.
하지만 신부님들도 저마다 어려움이 있는 모양이다. 예전에 지학순 주교께서 교황을 알현하면 무슨 말을 할까 하고 미리부터 준비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글 중에는 용돈도 좀 있었으면 좋겠다는 내용도 들어있었다. 그러나 막상 교황을 뵙자 차마 그 말을 하지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고 한다. 주교라는 높은 신분임에도 부족한 것이 있어서 윗분에게 하소연할 거리가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어느 신도가 자신의 지치고 힘든 사정을 주님께 말씀드리려고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주님에게 ‘’주님!‘ 하고 부르다가 주님을 바라보니 내 고통은 주님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차마 말씀을 드리지 못했다고 한다. 귓전에서 주님이 ‘너도 나처럼 지쳤구나! 너도 나처럼 힘들구나!’ 하시며 위로하시는 것 같았다고 한다.
이런 글을 읽을 때마다 아들에게 미안한 과거 생각이 난다. 지난날 아들의 대학 졸업식에 참석을 했다. 취업도 하지 못하고 졸업을 하는 아들 어깨도 무거웠지만 이를 바라보는 애비의 마음도 찬바람 불고 황량했다. 아들이 이제 졸업하면 백수인데 남들이 ‘당신아들 지금 뭐해?’ 라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에만 골몰하고 막상 백수의 첫발을 내딛는 아들 마음은 헤아리지 못하고 아들이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미운 감정이 앞섰다.
아들은 어떡하든 졸업하기 전에 취업해 보겠다고 애를 썼다. 학교 근처에 방을 얻고 학교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다. 몇 군데 원서를 넣었는지 묻지도 못했지만 결국 백수로 졸업을 했다. 졸업 후에도 아들은 밤낮으로 도서관에도 다니고 인터넷으로 이곳저곳 조회하여 취직을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여줬다. 하지만 합격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러다가 내 아들이 영영 백수가 되는 것은 아닌지 속 좁은 애비는 불안하고 겁이 났다.
어느 날 내가 만취하여 나도 모르게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을 아내에게 토해냈다. ‘이제 정년이 얼마 안 남았는데 아들이 이렇게 취업을 못하니 큰일이다. 남의 자식은 취직도 잘하는데 어떡하면 좋으냐?’ 라는 푸념을 하고 말았다. 아들이 제 방에서 귀동냥으로 애비의 말을 들었다.
다음날 아들은 내게 편지를 주고 나갔다. 내용은 다 기억하지 못하지만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 아버지 실망시켜드려 정말 죄송해요. 지금까지 25년이나 저를 믿고 기다려 주셨는데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궁하다고 아무 곳이나 들어가면 안 되잖아요? 곧 좋은 소식 드리려고 저도 노력하고 있어요.” 편지를 읽고 나니 나보다 몇 배나 마음고생이 심할 아들의 마음에 눈물이 핑 돌았고 이런 아들을 보듬어주지 못한 애비의 속 좁음을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남들이 ‘당신 아들 아직 취업 못했어?’ 하는 소리를 들을까봐 애비는 조바심했지만 그 시간에 취업 못한 아들의 마음은 애비보다 더 타들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몇 달 뒤에 아들은 기다리던 합격 전화를 받고 제일먼저 애비에게 전해왔다. ‘합격’이란 얼마나 듣기 좋은 소리인가. 전화기 너머의 아들의 씩씩한 음성도 반가웠지만 나도 내 생에 최고의 순간처럼 기뻤다. 아들의 인생은 아들의 인생이고 내 인생은 내 인생이라는 생각을 평소에 늘 해 왔지만 부자간 이라는 천륜이 생각처럼 단순하지 않았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은 성인이여서 그렇다 치더라도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초개같이 목숨을 버린 수많은 영웅들의 고초에 비하면 지금의 우리의 삶은 편안하고 너무 행복하다. 세상에 나만 외톨이로 뒤처져 힘들고 지쳐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용기를 내보자.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이 무수히 많다.
, , 등을 통해 우리 사회에 대한 치밀한 분석과 통찰을 담아냈던 송호근(宋虎根·61)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사회학자로 저명한 그가 이번에는 소설가로서 대중과 만났다. 논문이나 칼럼이 아닌 소설을 통해 송 교수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무엇일까? 그는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성과 지혜를 를 통해 나누고자 한다.
송호근 교수의 첫 소설 는 지난해 말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할 무렵부터 두 달여에 걸쳐 쓴 작품이다. 그는 조선 후기의 무신이자 외교관이었던 신헌(申櫶, 1810~1884)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신헌은 봉건과 근대 사이에 선 경계인이자, 강화도조약을 협상하며 제국의 도래를 내다봤던 선각자로 그려진다. 신헌이 살던 19세기의 모습과 진영논리가 대치하는 21세기 우리 사회의 모습은 송 교수의 머릿속에서 자연스레 오버랩됐다.
“강화도조약 체결 당시 신헌이 쓴 가 바탕이 된 소설인데, 당시와 현재 우리의 처지가 많이 닮았더라고요. 미국과 중국의 함대가 맞붙고, 사드 배치 문제가 뜨거운 이슈가 되었는데 내부 싸움에 여념이 없는 현실을 보며 느낀 답답함을 소설의 언어로 표현했어요. 소설이라는 새로운 작법이 낯설긴 했지만, 한번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도전하게 됐죠.”
감성의 바다에서 건진 위로
그렇다면 왜 소설이라는 장르를 택한 것일까? 평소 그가 쓰던 사회과학서나 논문 등으로 보여주는 게 더 편리하지 않았을까? 이에 그는 ‘감동’의 유무 때문이라고 했다.
“최근 일어난 사태들을 가지고 논리로만 표현하면 별 감동이 없어요. 140년 전에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그럼 우린 어떻게 할 거냐, 이 시대에 신헌 같은 인물이 필요하다. 이렇게 규범적으로만 끝나버리죠. 논리만으로는 화해하기 어려운 감정이 있거든요. 사회과학이 다루는 이성보다는, 소설의 언어와 감성이 사람들을 움직일 때가 있죠. 지식의 공유가 아닌 그런 지혜를 나누고 싶었어요.”
사실 그에게 소설은 낯선 장르가 아니다. 대학 시절 문학평론을 쓰며 가까이했고 여전히 소설을 통해 삶의 실마리를 찾곤 한다.
“학창 시절에는 줄곧 문학만 봤어요. 현실에 불만이 많아서 그랬던 거 같아요. 현실을 뛰어넘는 방법은 종교와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젊을 때이니 종교에 빠지긴 어렵고, 사랑은 가능하긴 하고. 어쨌든 그 두 가지를 리허설해볼 수 있는 방법은 문학밖에 없었으니까요. 문학의 세계가 워낙 넓잖아요. 그 감성의 바다를 유영하면서 살아가는 원칙을 건지거나 신념과 조우하기도 하는 거죠. 소설에는 대개 영웅보다는 요즘 말로 루저(loser)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에게 나를 투영하면서 세상을 들여다보기도 했고요. 문학은 내가 사회과학을 하는 힘이자 문제의식의 창고를 마련해주는 존재로 늘 함께했죠.”
감성의 바다에 흠뻑 젖어 지내던 시절을 지나, 사회학자로서 현실을 바라보고 분석하는 동안 그는 갈증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점에서 는 가뭄의 단비처럼 촉촉하게 송 교수의 마음을 적셔주었다.
“논리는 사람을 만족시키지 못해요. 어떤 논리를 완결해놓아도 조그만 한 부분에 불과하니까. 그걸 학문이라고 말하죠. 학문은 곧 인식론인데, 그건 이미 루트나 패러다임이 정해져 있어요. 그러니 뭘 해도 배고프죠. 집을 지을 때 뼈대가 학문이라면, 그 집을 어린이집으로 지을지 귀신의 집으로 지을지 정체성을 부여하는 건 문학이에요. 산을 볼 때도 문학이나 예술은 색깔도 모양도 다르게 보는데, 사회과학은 그냥 ‘산’이거든요. 그게 리얼리티이고, 그것을 포착하고 분석하는 데 익숙해져 있죠. 말하자면 메마른 지식인 셈인데, 지식은 위로가 되질 않더라고요. 이번 소설을 쓰면서는 그런 허기를 달랠 수 있었어요.”
경계인의 고독, 공(共)으로 채워야
소설을 읽다 보면 이따금 작가의 모습이 투영된 인물을 발견하게 된다. 에서 자신의 모습을 이입한 인물이 있냐고 묻자, 그는 단번에 “신헌 그 자체”라고 대답했다. 작가와 주인공, 두 사람의 연결고리는 무엇일까?
“경계인이라는 점이 같아요. 신헌은 문과 무를 겸한 유장인데, 중세와 근대가 마주치고, 유교와 천주교가 공존하는 경계에 서 있던 인물이죠. 나 역시 과거와 미래, 내부와 외부를 오가며 시세와 처지를 엿보고 있잖아요. 최근 일어난 사건들만 봐도 지식이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어요. 학자는 선택하지 않아도 되거든요. 결정은 정치인이 하는 거죠. 그저 경계인으로서 담벼락만 걷고 있을 뿐이에요. 양쪽을 흘깃흘깃 쳐다보고 고민하고, 계속 가슴속에서 갈등하고. 그런 모습이 신헌에게 투사된 거죠.”
베이비붐 세대의 맏형뻘인 그는 또 다른 경계에 서 있다. 바로 세대 간의 경계다. 아버지 세대를 봉양하고 아들 세대를 부양하는 끼인 세대로서 그는 불만과 설움보다는 자책과 인정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베이비부머는 세대와 권력의 경계에서 밀려나고 있죠. 그 설움이 대단할 거예요. 물론 우리도 한때는 내 아버지 세대를 밀어냈죠. 그러나 베이비붐 세대가 유독 예민한 것은 그 짐이 증폭된 세대이기 때문이에요. 흔히 경제성장의 주역이라고들 하잖아요. GNP(국민총생산)만 해도 1970년대와 현재가 100배 이상 뛰었으니까요. 그만큼 경제적 부담, 양육의 부담, 효도의 부담 등이 증폭된 거예요. 또 부모 세대에게 받은 게 없으니 자식 세대에게 그 한을 많이 풀었죠. 지금의 혼수문화도 돌이켜보면 다 우리 세대가 만들어놓은 거예요. 그런데 이제는 그 덫에 우리가 걸려들어버렸죠. 그러니 다 큰 자식 껴안고 살 수밖에요.”
송 교수가 베이비붐 세대의 삶을 그린 라는 책 제목처럼, 세대의 경계에 선 그들은 소리내 울 수조차 없는 처지에 놓였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상황일수록 나 자신만이 아닌 ‘공(共)’의 개념을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 세대는 평생 사(私)를 위해 살았거든요. 나의 가족, 나의 직장 이게 세계관의 전부예요. 공적인 자산? 그건 내가 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왔죠. 그러나 서양의 경우를 보면 ‘사’가 너무 힘들다 보니 ‘공’으로 돌리는 방법을 찾거든요. 그게 바로 복지죠. 아주 작은 일이라도 좋아요. 아이들 등하굣길을 돕거나 동네 청소를 하거나 구청에 작은 사랑방을 얻어 주니어 멘토링을 한다거나. 그래야 세대 간 조화를 이루고, 일종의 소득 자원도 창출할 수 있다고 봐요.”
그 언젠가 어느 경계에서 또다시
로 시작한 대화는 자연스레 우리 사회에 대한 고찰로 이어졌다. 소설가로 마주했던 그는 어느 순간 다시 사회학자의 모습으로, 그렇게 학문과 문학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었다. 혹시 이번 기회에 소설가의 길로 접어드는 것은 아닌지 슬쩍 질문을 던지자 역시 경계인다운(?) 대답을 내놓았다.
“갑자기 소설가로 등단했다기보다는 예전부터 갖고 있던 것 중 하나를 드러낸 것에 불과해요. 앞으로는 뭘 할지 모르는 거죠. 희곡이나 시나리오를 쓸 수도 있고. 소재도 생각해놓은 것은 많아요. 다만 어느 순간에 절박한 무언가와 만나서 터져 나올 때, 그때 잠시 논리 밖으로 외출하게 되겠죠. 탄핵처럼… 아마 또 그런 계기가 있지 않겠어요? 암울하잖아요. 우리가 도대체 어떻게 살아왔나. 또 그 속에서 생기는 딜레마. 논리로 풀 수 없는 세상과의 부딪침. 그런 게 터져 나오는 거죠. 뭐, 그렇게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어요. 돼도 안 돼도 그만인 거고요.”
지금의 강북 삼성병원 입구쯤에서 내 중년의 한 시절을 보낸 탓에 정동은 길 하나 사이의 낯익은 동네다. 하지만 살기에 바빠 막상 정동을 문화적 역사적으로 접근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
특히 이화여고와는 인연이 깊다. 이화여고를 다닌 큰 딸이 전체 1등을 해서 조회시간에 상을 받으러 단상으로 나가야 했다. 그런데 운동화가 구멍이 나서 친구 신발과 바꿔 신고 나갔다는 에피소드가 남아있는 곳이다. 그 시절 남편의 사업이 잘못되는 바람에 과외는 커녕 워크맨 하나도 못 사주다가 고 3이 되어서야 청계천에서 중고를 사 주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 와중에서도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건전하게 자라 주었다. 어느덧 자라 중년이 된 지금도 엄마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보살피는 착한 딸이어서 고마울 뿐이다.
정동 맞은편 신문로는 80-90 년대 군부 독재에 항거하는 학생 시위대로 자주 교통이 통제되곤 했다. 큰 아이는 늘 교정을 울리는 시위행렬의 “군부독재 물러가라”는 외침이 익숙해서인지 사회학과에 입학했고 1학년부터 시위에 참여한 일이 비일 비재했다. 때로는 경찰의 곤봉을 피해 같은 과 동료 선배들이 우르르 우리 집으로 숨어드는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제 오랜 세월이 흘렀고 그 아이가 벌써 중년의 징검다리를 건너가고 있는 오늘, 나는 다른 지역에 살지만 때마침 유관순 기념관 탐방 기회를 얻어 이화의 교정에 첫발을 딛는다. 물오른 바람이 마중 나와 초여름의 풋풋함을 한 아름 안겨준 유월의 오후였다. 유관순 기념관에 들어서는 순간, 복잡하게 얽인 생각의 밑바닥에서 정체가 불분명한 울렁거림이 고개를 들었다. 사진 속 16세의 어린 유관순이 왜 그렇게 아픈 역사를 잊고 살았냐고 질책 한 것 같아 발걸음이 주춤, 온 몸에 열이 오름을 느끼기도 했다.
삼일 운동의 시위대가 고종의 시신이 있는 덕수궁 주변으로 몰려가며 부르는 대한 독립 만세 소리가 교정을 울릴 때 고등과 1학년이었던 유관순은 여섯 명으로 조직한 시위결사대와 함께 담장을 넘기로 했단다. 교장 프라이는 자신을 밟고 가라며 애원하듯 말렸지만 그들의 의지는 너무 확고해서 기어이 담을 넘고 말았다. 그 후부터 3.1운동 진원지의 핵이 되어 고종의 장례식을 마치고 대거 참여한 시위대에 합류했다가 자신의 온 몸을 조국에 바치겠다고 결심한다. 사촌 언니 유예도와 같이 독립선언서를 숨기고 고향 아우내(병천)로 내려간다. 유관순의 부친 유중권은 일찍 감리교 신자가 되어 향리에 홍호학교를 세우고 민족 교육과 계몽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였다.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란 유관순은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며 아버지와 같이 시위를 주도하다가 헌병들의 총검에 아버지 어머니를 한꺼번에 잃고 오빠도 투옥되었다. 그리고 유관순은 체포되어 공주감옥에서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되어서도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감옥에서 순국한다. 이화학당의 담장을 넘은 후 토막 난 시신으로 프라이 교장과 월터 선생의 품으로 돌아온 것이다. 오늘 우리가 어느 제국의 식민지로 살고 있다면 나도 담을 넘어 역사의 현장으로 뛰어들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해본다. 실은 지금도 문화식민지의 그물을 보이지 않게 펴 놓고 걷어 올릴 기회만을 기다리는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어떻게 나라를 지킬 것인가를 국민 모두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 아닌가 싶다.
이화여고 교정의 늙은 은행나무 아래에서 유관순이 빨래하던 빨래터가 남아 있었다. 어린 그녀가 식민지란 오욕을 두드려 빨아 헹구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아래와 같은 박두진의 시를 음미해 본다.
유관순누나로 하여 처음 나는
3월 하늘에 뜨거운 피 무늬가 어려 있음을 알았다
우리들의 대지에 뜨거운 살과 피가 젖어 있음을 알았다.
우리들의 조국은 우리들의 조국
우리들의 겨레는 우리들의 겨레
우리들의 자유는 우리들의 자유이어야 함을 알았다.
아, 만세, 만세, 만세, 만세, 유관순 누나로 하여 처음 나는
우리들의 가슴 깊이 피터져 솟아나는 ,
우리들의 억눌림, 우리들의 비겁을
피로써 뚫고 일어서는
절규하는 깃발의 뜨거운 몸짖을 알았다.
유관순 누나는 저 오를레앙 잔다르크의 살아서의 영예,
죽어서의 신비도 곁들이지 않는 ,
순수하고 다정한 우리들의 누나,
흰 옷 입은 소녀의 불멸의 순수,
아, 그 생명혼의 고갱이의 아름다운 불길의,
영웅도 신도 공주도 아니었던,
그대로의 우리 마음, 그대로의 우리 핏줄,
일체의 불의와 일체의 악을 치는,
민족애의 순수 절정, 조국애의 꽃넋이다.
아,유관순 누나, 누나, 누나, 누나,
언제나 3월이면 언제나 만세 때면,
잦아 있는 우리 피에 용솟음을 일으키는
유 관순 우리 누나, 보고 싶은 우리 누나,
그 뜨거운 불의 마음 내 마음에 받고 싶고,
내 뜨거운 맘 그 맘 속에 주고 싶은
유관순 누나로 하여 우리는 처음
저 아득한 3월의 고운 하늘
푸름 속에 펄럭이는 피깃발의 펄럭임을 알았다.
-박두진의 “3월 1일 하늘” 전문
*의사와 열사의 구분
총이나 칼등 무기를 가지고 싸웠던 안중근 같은 분을 의사라 하고
맨손으로 싸웠던 유관순을 열사라 한다.
시인 송시월은
전남 고흥 출생, 1997년 월간 으로 등단, 계간 편집 위원
저서로는 시집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