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운수 좋은 날’은 운세 전문 사이트 '운세사랑'으로부터 띠별운세 자료를 제공받아 읽기 쉽고 보기 좋게 재구성한 콘텐츠입니다.
◈ 쥐띠 총운 (금전운 : 상, 애정운 : 상, 건강운 : 중)
모두 이익이 오를 때니 물질 면의 이익에만 구애됨이 없이 하라. 경거망동하여 일을 행할 시에는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니 되도록 먼 여행 하지 말고 은인자중함이 길한 괘이다.
•84년생 : 하는 일도 잘되고 재수도 좋으나 이성 문제는 불안하다.
•72년생 : 전후좌우를 잘 둘러보고 움직이면 재수가 풀린다.
•60년생 : 자본 융통은 잘되나 투자는 조심해서 해야 한다.
•48년생 : 괴상한 문서로 애를 먹는 운이니 도장 문서를 조심하라.
◈ 소띠 총운 (금전운 : 하, 애정운 : 중, 건강운 : 상)
하는 일마다 막힘이 많으나 중도에서 그만두면 나만 손해다. 움켜지고 있다고 모두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은 것과 같으니 때가 되고 시가 되면 스스로 크게 될 우려가 있으니 큰 손실이 가지 않은 선에서 타협점을 찾아라.
•85년생 : 좋은 것을 찾기보다는 현재의 모든 것은 중요하게 생각하라.
•73년생 : 올라가려고만 하지 말고 뒤를 돌아보고 생각을 바꿔라.
•61년생 : 자신의 힘으로 이뤘으니 내 손으로 지켜야 한다. 좋은 수가 생긴다.
•49년생 : 사업은 힘드나 잠깐 재수는 좋으니 융통할 길은 있다.
◈ 호랑이띠 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중, 건강운 : 상)
계획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니나 시기를 잃음이라 때를 기다려라. 비록 운기가 길하여 현실에 이익은 있을 것이나 훗날을 기약해 자만은 금물이다. 가벼이 일신을 움직이지 말 것이니 복이 더욱 가중된다.
•86년생 : 올바른 마음만 먹으면 안 되는 일이 없으니 가슴이 확 뚫린다.
•74년생 : 금전 운이 대길하나 놓치면 힘든 운이 기다린다.
•62년생 : 쓸데없는 출입으로 손해 봄이 많으니 출입을 삼가라.
•50년생 :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부딪혀보면 이야기할만하니 만나 보라.
◈ 토끼띠 총운 (금전운 : 하, 애정운 : 하, 건강운 : 중)
천둥은 오래가지 않고 그치니 놀랄 일이 있어도 움직이지 마라. 도모하는 일이 있다면 사사로운 일로 인해 큰 화를 부를지 모르니 작은 것이라도 소홀히 넘기지 말고 잘 살핌이 길할 것이다.
•87년생 : 묵묵히 내 자리를 지킴이 내일을 위하여 좋은 일이 된다.
•75년생 : 원앙이 빛을 잃으니 사귀든 사람이 소리 없이 가버린다.
•63년생 : 궂은일이 생기나 몸담아 처리하면 명예가 오르고 재수도 길해진다.
•51년생 : 이리저리 다닌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니 안에서 잘 찾아보아라.
◈ 용띠 총운 (금전운 : 하, 애정운 : 하, 건강운 : 중)
자존심을 잃는 것은 모든 것을 다 잃는 것이니 끝까지 지킴이 좋다. 운기가 흉흉하니 경거망동은 금물이며 자중하는 가운데 때를 기다림이 길한 괘다. 먹구름은 다시 사라질 것이니 너무 자책하지 말라.
•76년생 : 잔꾀는 안 통하니 정당한 방법으로 논의하면 도움을 받는다.
•64년생 : 자존심 대결에서 이기니 아무 거리낌이 없고 이득이 배나 크다.
•52년생 : 자금 문제가 발생하여 힘든 일이나 도와주는 사람이 나타난다.
•40년생 : 먹을 것은 많이 생기나 소화할 능력이 없으니 조심하라.
◈ 뱀띠 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중, 건강운 : 중)
오늘의 일진은 하루 안에 처리할 일이 너무 많으나 한 가지만 완벽하게 하면 된다. 도모하는 일이 있다면 어려움에 봉착하였어도 뜻하지 않은 도움이 나를 찾아 작은 해결을 볼 것이니 너무 심려하지 말라.
•77년생 : 재수 좋아 취업 소식도 오고 멀어진 인연도 다시 찾는다.
•65년생 : 잃은 것은 다시 생각 마라 지금 일이 막중하다.
•53년생 : 다툼이 화가 되어 관 재가 보이니 엉뚱한 말을 조심하라.
•41년생 : 다 좋으나 한가지 걱정이 안 풀리니 다음으로 미루어야 한다.
◈ 말띠 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상, 건강운 : 상)
상이나 축하받을 일이 생기니 겸손한 마음가짐은 더 돋보이게 한다. 돌부리에 넘어져도 재빨리 일어나는 모습이 필요한 시기이다. 오뚝이의 지혜를 배울 것이니 어찌 운기가 늘 나쁘다고 하겠는가. 희망을 품어라.
•78년생 : 금전 운 좋고 칭송받을 일이 생기니 기운이 난다.
•66년생 : 어렵든 일이 합의되어 고비는 넘기나 완전히 해결하려면 노력해야 한다.
•54년생 : 묶여서 꼼짝 못 하듯 일의 앞뒤가 안 보이니 오늘은 해결이 안 된다.
•42년생 : 재수가 좋으니 좋은 음식 대접을 받으나 과한 음주는 삼가라.
◈ 양띠 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중, 건강운 : 중)
묘수가 없을 때는 공연히 날뛰면 정신건강만 해치니 자중하라. 도모하는 일이 있다면 방해자가 발생하니 주의하여 잘 살핌이 길함을 유지 할 것이다. 곳곳에 나를 해하는 이로 가득하다.
•79년생 : 조금 들어오는 금전이니 그것에 만족하고 연인과 시간을 보내라.
•67년생 : 부부간에 애정 갈등이 심하니 일단 달래고 일을 처리하면 좋다.
•55년생 : 아랫사람의 충고를 기분 나쁘게 듣지 말고 받아주면 좋은 일이 생긴다.
•43년생 : 일이 안 풀릴 때는 어디 가도 좋은 소리 듣지 못하니 조용히 기다리자.
◈ 원숭이띠 총운 (금전운 : 상, 애정운 : 상, 건강운 : 중)
숨은 실력을 발휘할 때가 왔다. 기회는 여러 번 오는 것이 아니다. 도모하는 일이 있다면 신중히 처리해야 할 것이니 이는 길함 속에 망동에서 비롯될 것이다. 항상 자중하여 행하라.
•80년생 : 남의 것이 크게 보이나 생각지 말고 내 것을 개발하면 득이 있다.
•68년생 : 늦게까지 공들이다 결정하라 성급하면 손해를 보는 운이다.
•56년생 : 마음껏 열어 보여라. 보고도 말이 없는 사람은 두말 말고 멀리하라.
•44년생 : 문서의 결점을 보완하면 큰 재물로 변하니 결정을 서두르지 마라.
◈ 닭띠 총운 (금전운 : 하, 애정운 : 하, 건강운 : 중)
뜻밖의 일로 구설에 오르게 되니 길이 아니면 쳐다보지 말라. 도모하는 일이 있다며 열심히 노력하는 가운데 좋은 일이 발생할 것이며 이익 또한 배가 되어 나를 기쁘게 할 괘이다.
•81년생 : 원망스럽던 일도 풀리고 사고력도 살아나니 침체한 일을 풀어 보라.
•69년생 : 너무 급하게 서두르면 일을 그르치니 끝까지 긴장하다 결정하라.
•57년생 : 음주할 일이 생기나 과음을 피해야 일 처리가 잘 된다.
•45년생 : 부부간에도 예의를 잘 지키면 소득이 있고 고집부리면 손해를 본다.
◈ 개띠 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상, 건강운 : 중)
이동수가 생기나 직업 변동은 불가하고 그 외에는 길하다. 도모하는 일이 있다면 노력하는 가운데 일거양득의 기회를 잡을 것이다. 안일한 생각은 버리고 매진하라.
•82년생 : 외로움에서 벗어나고 재수 좋은 일이 생기니 기회를 잘 포착하라.
•70년생 : 포기가 빠르면 그만큼 다른 일이 빠르니 안 되는 것은 빨리 정리하라.
•58년생 : 흐리면 갠 날도 있는 법이라 이렇게 개인 때에 힘을 써보자.
•46년생 : 믿음을 잃으면 회복하기 힘드니 신의를 지키면 어렵든 일이 열린다.
◈ 돼지띠 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중, 건강운 : 상)
장단 맞추는 사람이 많아 도움은 되나 나눠 먹을 일이 어렵구나. 만사가 여의하니 태평성대를 이룸과도 같다 하겠다. 도모하는 일이 있다면 열심히 노력할 것이니 길함이 가득해 복이 깃든다.
•83년생 : 신수 불길하니 하던 일이나 하고 지내면 지나간다.
•71년생 : 여러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 반드시 일이 생기니 출입에 이득이라.
•59년생 : 재수 대길하니 기다리든 일을 처리되는데 투자는 곤란하다.
•47년생 : 흑과 백을 분명히 가리고 일을 처리해야지 아니면 힘든 일이 생긴다.
장맛비가 오락가락하고 폭우와 폭염으로 주춤해진 일상이다. 그사이 해바라기는 벌써 피고 지고 있다. 길도 나지 않은 언덕을 오르기 전 백련이 가득한 연못을 지나는데 군데군데 남아 있는 수련이 생존을 알린다. 밭둑 위로 노랗게 해바라기 군락이 보인다. 풀섶 둑길을 걸어도 뜨거운 김이 훅훅 느껴지는 여름날이다.
조붓한 그 길을 따라 오른 언덕 위 넓은 밭에는 해바라기가 장마와 폭염으로 무참하게 축축 늘어져 있다. 마치 뙤약볕 아래서 처절하게 버티고 있는 모습이다. 광활한 벌판에 모두 함께 뒤섞여 피어 태생적으로 고독과 외로움이란 단어와는 거리가 멀 것 같았는데 수만 평의 풍광은 지독한 고독으로 다가온다.
태양의 꽃(sunflower)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해바라기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무자비한 무더위 속에 늘어진 채 맥을 못 추고 있다. 그 모습을 보니 안쓰러움이 발동한다.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태양을 바라보던 모습은 간데없다. 이렇게 지구가 변해가고 앞날을 예측하기 힘든 세상에 우리가 산다.
세파에 지쳐 고개 숙인 해바라기 모습만큼이나 그리스 신화 속의 해바라기도 가슴 아픈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 물의 요정 크리티에는 태양의 신 아폴론을 사랑했으나 아폴론은 바빌론 왕의 딸인 레우코토에를 흠모했다. 질투에 사로잡힌 크리티에의 모함으로 레우코토에가 죽자, 아폴론은 크리티에를 더 철저하게 외면했다.
사랑을 받지 못해 상심한 크리티에는 하루 종일 아폴론의 상징인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앉아서 해만 바라보았다. 9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매일 해만 바라보던 그녀의 다리는 땅속으로 들어가 뿌리가 되고 얼굴은 꽃이 되었다. 그 꽃이 바로 ‘태양의 꽃’ 해바라기다.
해바라기는 자생력이 강해 어디에서나 쉽게 뿌리내리고 번식한다. 중앙아메리카가 원산지이며, 키가 2m 정도 되는 키다리 식물이다. 까슬까슬한 털이 억세지만 꽃은 밝고 환하며 지름은 8∼60cm로 제법 크다.
해바라기는 이런 신화가 아니어도 떠올려지는 이야기가 많다. 열정적이었던 화가 반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이 있고, 잘 알려진 드라마나 노래도 있다. 그중 이탈리아 배우 소피아 로렌이 출연했던 영화 ‘해바라기’를 가장 많이 떠올릴 듯싶다. 영화 시작부터 끝도 없이 펼쳐지던 해바라기의 물결은 도대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볼 만했다. 게다가 배경 음악은 또 어찌나 가슴 저리게 했는지. 그뿐만 아니다. 어쩐지 해바라기와 소피아 로렌의 인생도 함께 겹쳐지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이탈리아 사람들이 파스타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듯 소피아 로렌도 파스타를 광적으로 좋아해서 "내 몸은 스파게티로 만들어졌다"고 말할 정도였다. 가난했던 그녀가 영화배우가 되고 싶었던 이유도 "그냥 다섯 가지 파스타를 매일 먹을 수 있는 집에 시집가는 게 꿈이어서…"라고 했다. 미모만큼 사랑스러운 배우다.
그랬던 그녀는 16세에 만난, 이십여 년 나이 차이가 나는 영화 제작자 카를로 폰티와 결혼한다. 그리고 스타의 반열에 오른 뒤에도 스캔들이나 흔들림 없이 아름다운 인생을 살았다. 폐 합병증으로 남편 폰티가 먼저 세상을 떠난 뒤 재혼을 묻는 질문에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며 오직 남편만 바라보는 사랑을 보여줬다. 영화 해바라기에서처럼 86세인 그녀는 지금도 혼자 살고 있다. ‘해바라기’는 당연히 그녀의 인생작이고 여전히 소피아 로렌만의 작품이라고 할 만하다.
그뿐인가. 아주 오래전의 경쾌한 노래도 있다. 가수 글렌 캠벨(Glen Campbell)의 ‘선플라워’(Sunflower)는 풋풋했던 그 옛날 길거리를 걷다가 문득 들려와도 즐거웠고 무심코 혼자서 흥얼거려도 기분 좋은 리듬의 노래였다. 누군가는 케케묵은 리듬이라 웃겠지만 까맣게 잊고 있다가 해바라기 밭을 오가며 느닷없이 기억 속의 시간을 떠올리는 것은 기분 좋은 순간이다.
“해바라기, 좋은 아침, 당신은 언제나 기분 좋은 시간을 만들어주는군요(Sunflower, Good morning, You sure do make it like a sunny time)"라고 시작하는 긍정적인 노랫말처럼.
'당신만을 사랑합니다', '숭배', '기다림' 등의 꽃말처럼 바라보기만 해도 그 느낌이 전해지는 꽃. 영화나 그림이나 노래를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하늘을 향한 그리움과 희망으로 태양을 따라 고개를 돌리는 해바라기의 마음이 저절로 느껴진다. 비록 폭염과 폭우와 세상을 뒤덮은 바이러스가 기진맥진하게 할지라도 해바라기의 노란 희망처럼 이 험한 시절을 모두들 잘 건너가시기를.
재즈를 아는 이가 드문 시절이었으니 당연하게도 물심양면의 외로움이 많았겠다.
“아예 무대를 얻지 못해 무교동 주점을 찾아가 무료 연주를 자청하기도 했다. 근데, 그냥 가라 하더라고. 재즈는 필요 없다는 거였다.(웃음) 집에선 와이프의 원성이 자자했지. ‘제발 월급이라는 걸 가져와보라’고 다그쳤다. 결국 TBC(과거 동양방송)의 ‘이봉조 악단’이나 KBS ‘길옥윤 관현악단’에 들어가 일하며 월급을 받았지. 그러나 허구한 날 가수들의 반주나 하자니 자존심이 상해 견디기 힘들더라고.”
결국은 뛰쳐나왔다는? 재즈 역사상 가장 위대한 베이시스트로 꼽히는 찰스 밍거스(Charles Mingus)는 한동안 활동을 중단하고 우체국 직원으로 살았더군. 그는 예술적 자존심의 손상을 감내하면서까지 클럽의 주정뱅이들을 상대로 연주하긴 싫었던 거다.
“재즈 뮤지션들은 자유로운 삶을 추구한다. 그런데 나에겐 삶의 자유보다 더 지배적인 욕망이 있었다. 나만의 연주 스타일을 확보하고 싶다는 거! 그러자면 맹렬한 연습이 필요했다. 방송국 악단을 뛰쳐나온 건 월급봉투보다 연습을 통한 기량 향상이 중요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게 재즈 뮤지션의 자존심을 지키는 길이기도 했다.”
내심 독을 품은 연습벌레로 살았다는 얘기이겠다. 엉덩이가 물러터지도록 내내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을 난타하고, 그러다 지겨워 마신 술에 취해서도 두드리고, 재즈 LP를 들으며 채보(採譜)를 하고, 필이 떠오르면 작곡을 하고…. 그는 피아노에 육신을 내던지는 부단한 연습과 학습으로 뮤지션으로서의 정체성을 다져나갔다. 그리고 실존적 경제적 기반 확보를 위한 하나의 유력한 조치를 취했다. 서울 홍대 앞에 재즈클럽 ‘문 글로우’(Moon Glow)를 차렸던 것. 이곳은 신관웅이 주도해 만든 빅밴드(열 명 이상의 뮤지션으로 편성한 앙상블 형태의 밴드)의 주둔지였다. 김준(보컬), 김수열(색소폰), 강대관(트럼펫), 류복성(봉고), 이판근(베이스), 조상국(드럼), 홍덕표(트롬본) 등 신관웅과 함께 미8군 무대에서 잔뼈가 굵은 1세대 재즈 뮤지션들이 참여했다. 다시 말해, ‘문 글로우’는 한국 재즈의 요람이자 플랫폼이었다.
“‘문 글로우’에선 날마다 공연이 펼쳐졌다. 재즈 마니아들이 즐겨 찾아들면서 명소로 부각됐고. 그러나 운영난에 봉착하게 되더군. 임대료조차 감당하기 어려워 폐업을 고려할 수밖에 없었지. 그러자 이를 안타깝게 여긴 언론들이 보도를 하고, ‘문사모’(문 글로우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라는 후원모임이 지원을 해 간신히 지속해나갔다. 하지만 결국은 문을 닫았다. 개업 15년 만에.”
폐업에 이른 동인은 재즈가 대중화하지 못한 탓?
“그렇다. 사람들은 재즈를 낯설어한다. 어렵다고들 투덜거린다. 이건 과거나 요즘이나 마찬가지다.”
요즘도? 비주얼과 스펙을 겸비한 젊고 유능한 재즈 연주자들이 속속 등장하는데도?
“재즈 연주자는 시중에 넘치지만 감상자들은 밋밋하게 증가했을 뿐이거든. 아이돌 뮤직과 트로트의 돌풍을 보라. 대중을 모조리 쓸어가는 게 아닌가. 재즈는 여전히 설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어떤 방법으로 활로를 찾을 수 있다고 보나?
“재즈의 본질적 성향인 클로스오버로 파고를 넘어서야 한다. 난 이미 오래전부터 재즈와 국악을 접목한 공연을 시도해왔다. K-재즈! 여기에 답이 있다고 보는 거다. 재즈란 원래 흑인들의 한을 정서적 근간으로 한 장르다. 국악 역시 한을 정조로 하기에 양자의 결합은 절묘한 시너지 효과를 거둘 수 있거든. 국악+재즈 빅밴드를 결성하는 게 나의 꿈이다.”
재즈의 모든 기법 구사해
신관웅의 재즈 인생 고백엔 낙심과 낙관이 교차한다. 번번이 주린 배를 움켜쥐고 무대에 섰던 기억은 악몽처럼 쓰라리나 값진 단련의 기회였다고 한다. 검불 몇 조각 펄럭이는 황무지와도 같았던 한국의 척박한 재즈 토양에 씨를 뿌렸다는 자부심은 노년의 그에게 정당성을 제공한다. 하여, 그는 자신에게 여전한 현역의 자격을 부여한다. 그의 재즈 선율에는 이와 같은 긍정과 자신감 또는 가라앉지 않은 갈증의 심상이 아롱질 터다. 서정적인 멜로디, 수려한 레가토주법(둘 이상의 음을 사이가 끊어지지 않도록 부드럽게 이어서 연주하는 주법), 호쾌한 건반 두드림, 그리고 ‘끼’의 분출에 의한 쇼맨십까지, 신관웅의 연주엔 재즈의 모든 기법들이 동원된다.
“서정적인 면과 폭발적인 면, 나는 이 둘의 조화로운 표출을 연주 목표로 삼아왔다. 그런데 나이 들면서 좀 변하더라. 과거엔 기법 중심의 화려한 연주였다면 요샌 감성의 흐름을 중시해 다분히 정적이거든.”
심금을 울리는 음악은 영혼을 다한 자만이 가능하다지?
“내 안에도 한이라는 게 있다. 한이야말로 영혼의 움직임이지 않을까? 나는 낱낱의 음에 한의 정서를 실어 사람을 사로잡을 수 있기를 갈망한다.”
재즈 정신에는 사회모순과 금제에의 도전이라는 측면도 있다. 일단의 재즈 뮤지션들은 자유를 숭상하는 아웃사이더이기도 했다. 당신의 성향은 어떤가?
“내가 생각하는 현대 재즈는 하나의 독특한 제도권 문화다. 청중과 교감할 수 있는 매우 유용하고도 강력한 장르이기도 하다. 더 넓게 보자면 인격 완성의 수단이기도 하지. 알다시피 재즈는 즉흥연주를 기본으로 삼는다. 하지만 밴드 멤버들 각자의 선율이 어울려 고도의 하모니를 이루지 않고선 성립할 수 없는 음악 행위다. 즉, 연주곡 하나하나가 모두 인격체의 산물인 거다. 나의 성향? 둥글둥글하다. 꽤나 온화하거든. 뭐 과음을 즐기는 버릇이 있긴 하지만 취중에도 모난 짓을 하진 않는다.(웃음)”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지?
“나를 내려다보시는 신의 눈길을 가끔 느낀다. 한번은 재즈 성가를 녹음했는데, 일을 마치고 보니 녹음의 절반이 날아갔더라. 기술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었는데도 말이다. 대번에 영감이 떠오르더군. ‘넌 아직 멀었다! 어디서 감히 성가를?’ 그런 하늘의 음성을 들은 기분이었다.”
어디서 감히! 신의 음성이 아니더라도 가슴을 치는 일갈이다. 나 잘난 ‘자뻑’도, 카랑카랑한 논리도 지나치면 실족한다. 신관웅의 개성이라면 그저 무덤덤한 유연함? 이는 ‘어디서 감히!’의 진실을 알고 사는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절제의 폭을 웅변할지도.
임철순 언론인ㆍ전 이투데이 주필
화향(花香)백리! 꽃의 향기는 백 리를 가고, 주향(酒香)천리! 술의 향기는 천 리를 가고, 인향(人香)만리! 사람의 향기는 만 리를 간다. 송년회나 회식 자리에서 건배사로 더러 쓰는 말이다. 덕과 인품을 갖춘 사람은 꽃보다 더 향기로우며 다른 이들의 모범과 사표로 길이 기억된다. “아름다운 향기는 백년을 가지만 악취는 만년을 간다[流芳百世 遺臭萬年].” 그러니 훌륭한 인격을 갖추도록 늘 자신을 성찰하고 검속(鈐束)하라는 뜻이리라.
그런데 인향만리라는 말을 뜻밖의 경우에 듣고 보니 착잡해진다. 지금 인터넷에는 고 박원순 서울시장에 대한 고소장이라는 글이 떠다니고 있다. 그 문건에서 고소자는 박 시장에게 인향만리라는 말을 하며 성추행을 모면하려 애쓰고 있다. 정황이 상당히 구체적이고 생생해서 거짓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러나 피해 여성의 대리인은 그 고소장이 수사기관에 제출한 문건이 아니라며 유포자를 처벌해달라고 고소장을 낸 상태다.
사람은 꽃보다 아름다울 수 없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고 노래하는 것은 그렇게 되고 싶기 때문이지만, 실은 그렇게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언행이 일치하고, 겉과 속이 다르지 않고, 전과 후가 한결같은 삶을 일구고 가꾸어 그 결실까지 거두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천수를 다한 백선엽 장군과, 스스로 생을 버린 박원순 시장의 삶과 그 마지막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두 사람의 죽음은 애도와 장례 형식을 둘러싼 갈등과 대립을 낳았다. 백 장군의 경우는 그의 친일 행적을 문제 삼는 사람들이 국립현충원 안장을 반대해온 게 오래됐지만, 갑작스러운 박 시장의 준비되지 않은 죽음은 사회 분열을 결정적으로 키웠다. 더욱이 죽음을 택한 이유가 성추행 의혹이었으니 오랫동안 여성인권 신장을 위해 활동해온 그의 생애가 송두리째 부정당할 판이다. 그야말로 그동안 쌓은 공이 아까운, 전공(前功)이 가석(可惜)한 일이다.
게다가 박 시장은 모든 분에게 죄송하다면서 정작 피해 여성에게는 한마디 사과도 없는 유서를 남기고 떠나갔다. “어떤 자살은 가해였다. 아주 최종적인 형태의 가해였다.”라는 말이 요즘 많은 이의 공감을 얻고 있다. 이 경우에 그 말을 액면대로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저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라고 절규하는 피해 여성의 글을 읽으면 자살의 공격성을 잘 알게 된다.
백 장군과 박 시장의 죽음을 어떻게 봐야 할까. 이미 60년 전에 시인 조지훈이 쓴 ‘지조론’( 1960년 3월호)에서 판단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두 대목을 인용한다.
-일제 때의 경찰에 관계하다 독립 운동으로 바꾼 이가 있거니와 그런 분을 변절이라고 욕하진 않았다. 그러나 독립 운동을 하다가 친일파로 전향한 이는 변절자로 욕하였다. 권력에 붙어 벼슬하다가 야당이 된 이도 있다. 지조에 있어 완전히 깨끗하다고는 못하겠지만 이들에게도 변절자의 비난은 돌아가지 않는다. 나머지 하나 협의(狹義)의 변절자, 비난 불신의 대상이 되는 변절자는 야당 전선에서 이탈하여 권력에 몸을 파는 변절자다. 우리는 이런 사람의 이름을 역력히 기억할 수 있다.
-기녀(妓女)라도 늘그막에 남편을 좇으면 한평생 분 냄새가 거리낌이 없을 것이요, 정부(貞婦)라도 머리털 센 다음에 정조를 잃고 보면 반생의 깨끗한 고절(苦節)이 아랑곳없으리라. 속담에 말하기를 “사람을 보려면 다만 그 후반을 보라” 하였으니 참으로 명언이다.
사람에 대한 평가는 그 마지막의 행적과 죽음의 방식에 의해 좌우된다. 개관사정(蓋棺事定), 시신을 관에 넣고 뚜껑을 덮은 후에야 일을 결정할 수 있다. 즉 사람은 죽고 난 뒤에라야 올바르고 정당한 평가를 할 수 있다. 이 말은 두보(杜甫)가 깊은 산골에 떨어져 살 때 이곳에 유배를 온 친구의 아들에게 써준 시에 나온다. 두보의 취지는 좋은 일이 나쁜 일이 될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으니 실망하지 말라는 응원과 격려였다. 그런 점에서는 새옹지마(塞翁之馬)의 의미와 같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관 뚜껑을 덮기 전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삶의 완성이든 종결이든 죽음은 모든 것의 마지막이므로 그때에야 그가 어떤 사람인지, 사회에 어떤 기여를 한 인물인지 또는 어떤 해악을 끼친 인물인지 평가가 가능해진다. 그러니 평가를 할 때는 그의 후반, 최종적인 모습을 보라, 그러니 누구든 후반을 조심하라, 이런 의미로 받아들여야 마땅하다.
박 시장의 죽음을 보면서 성공했거나 출세한 사람들의 내면에 도사린 텅 빈 허무와 외로움, 아무도 모르지만 늘 입 벌리고 있는 그 어둠을 생각하게 된다. 원래 공인의 죽음은 사회의 공공재산이며 후세에 전해지는 문화유산의 한 가지여야 한다. 아름답고 좋은 죽음은 길이 향기롭게 기억되고, 성숙하고 완성된 죽음은 사회통합에 기여한다. 두 죽음을 지켜보며 우리 사회의 갈등과 불행을 다시 생각한다. 그리고 사람은 누구든, 공인이라면 더욱, 나라를 이끌어가는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좋은 죽음을 완성해가도록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숙면 외에 또 다른 바라는 것이 있다면?”
“다른 인생”
영화 ‘세상의 모든 계절’ 도입부에서 심리상담사 ‘제리’와 불면증과 우울증을 앓는 ‘자넷’이 대화하는 중에 나온 말이다. 자넷은 행복했던 삶의 기억이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어둠 속에서 사는 60대 언저리의 여자다. 그녀를 통해 우리는 관계를 제대로 맺지 못하고 삶도 소중하게 가꾸지 못하는 현대인의 허기진 영혼을 본다.
이 영화는 현대사회의 물질적이고 이기적인 문화를 비판해온 영국 감독 ‘마이크 리’가 만든 또 하나의 걸작이다. 영화 제작 당시 60대였던 마이크 리 감독은 같은 60대를 사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통해 삶의 방식과 태도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한다. 카메라는 지질학자인 톰과 심리상담사인 제리 부부를 따라가 어느 한 해에 생긴 일을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시간 순으로 보여준다.
런던에 사는 60대의 노부부 ‘톰과 제리’는 내면의 진실에 귀 기울이며, 주변 사람들을 존중하고 안아주며 살아간다. 톰의 어릴 적 친구 켄은 은퇴 후 닥쳐올 외로움이 두려워 술에 의지해 살아간다. 제리의 친구 메리는 콤플렉스와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하고 불안과 고독에 휩싸인 채 지내는 불안정한 독신이다. 영화 내용은 이들이 아픔과 결핍을 끌어안고 각자의 안테나로 세상과 관계하면서 만들어내는 삶의 순간들로 채워진다. 생에 대한 어떤 정의나 교과서적인 메시지는 없다. 그저 강약 없이 희미하게 인물들의 살아가는 시간을 나열한다.
인생을 살면서 ‘내 삶’과 ‘내 삶을 바라보는 또 다른 나’ 사이에 거리 조절이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이 영화는 영감을 준다. 메시지 전달의 매개는 주로 대사로 이루어진다. 영화에서는 두 곳의 중요한 공간이 나온다. 한 곳은 ‘톰과 제리’ 부부의 이상적인 삶을 상징해 보여주는 주말농장이다. 이곳은 시간의 흐름과 계절을 보여주는 장치로도 사용된다. 다른 한 곳은 ‘톰과 제리’의 집이다. 두 사람이 쉬고 위로받고 소통하는 공간이며 삶의 빛과 그림자를 보듬어주는 곳이다. 나아가 타인을 위로하고, 사랑하며, 세상의 모든 길이 막혔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벗이 되어주는 장소다. 영화의 주 무대인 이곳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치유의 공간이 된다.
초반부터 긴장하고 보게 만드는 인물은 ‘자넷’이다. 얼굴 표정과 시니컬한 대화 내용이 이 영화를 끌고 갈 것이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처음에 얼굴을 보여준 후 영화가 끝날 때까지 자넷은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강렬했던 자넷의 얼굴 표정은 메리의 신들린 연기로 이어진다. 감독은 메리에게로 바통을 넘기며 그녀가 서사를 끌고 가게 하는 전략적 선택을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넷의 표정과 비교되도록 수십 초 동안 정지된 프레임으로 메리의 얼굴을 보여준다. 감독이 의도해서 보여준 메리의 표정 변화와 눈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 해석은 오롯이 관객의 몫이다.
이 영화의 매력은 등장인물들에 대해 공감을 하게 된다는 데 있다. 메리에게서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사는 많은 현대인의 모습을 본다. 그래서 그녀의 외로움, 좌절, 질시, 공허는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우울증을 앓고 있는 켄의 이야기에는 아픔과 연민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또 상실의 슬픔조차 보이지 않는 로니의 눈길을 보면 살며시 다가가 어깨를 감싸주고 싶어진다.
몇몇 사람들은 인생을 성공적으로 완성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버티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자신을 돌보고, 어떤 상황에서도 조건 없이 사랑하고, 계약 없이 사랑하고 싶은 작은 꿈이 피어오른다.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힘이다.
감독 ‘마이크 리’는 배우들과 함께 캐릭터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배우의 연기력을 끌어내는 데 탁월한 재능을 지녔다는 평판이 자자하다. ‘레슬리 맨빌’(메리 역)은 이 영화로 미국과 영국의 비평가협회상을 휩쓸었다. 그녀가 두 눈으로 보여주는 연기가 이 영화의 진가를 알렸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끝나고 난 뒤에도 우리 삶으로 이어진다. 이 영화가 특히 그렇다.
AD 2020년 ‘창백한 푸른 점’이라 불리는, 은하계 행성 중 하나인 지구에 큰 혼란이 일어났다. 당시 지구에 사는 인간들은 그 혼란이 재앙인지, 유행인지, 축복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하지만 무지는 회복탄력성이 되었다. 곧 눈앞에 벌어질 일에 대해 정확하게 예측하지 못하는 것만 인간의 무지는 아니었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지난 일을 잊어버리는 증상도 있었다.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지구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개인별 감(지구의 다른 생명체와 결정적으로 차별화되는 인간만의 능력)으로 충격이 강한 몇몇 일과 현상을 일정 기간 뇌에 저장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인간은 용량을 규정할 수 없는 뇌라는 저장장치를 가지고 있다). 인간은 그것을 기억 혹은 추억이라고 불렀다.
당시 발생한 혼란의 원인은 지구를 지배해온 인간의 욕심 때문이었다. 그들은 지구가 푸른색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편리와 효율성을 위해 지구를 붉은빛을 띠는 별로 오염시켰다. 한 줌도 안 되는 추상적, 독점적 지배논리(이데올로기, 종교, 국가 개념 등)로 서로 반목하면서 인간의 특징인 ‘따스한 마음의 결’도 황폐화시켰다. 결국 이러한 욕심은 인간의 생명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는 바이러스를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지구의 모든 것을 완전히 바꿔버린 AD 2020년의 ‘코로나19’다.
‘코로나19’에 대응하기 위해 지구별 전체의 합쳐진 힘이 필요했다. 근본 원인이 된 인간의 욕심을 내려놓은 ‘공존과 배려의 공동체 의식’이 치료제다. ‘코로나19’가 처음 발생했을 때 다른 외계에서는 지구 회복과 그곳에 사는 인간의 보편적 행복 증진이 동시에 진행될 것으로 예측했다. 하지만 어리석게도 인간은 그러지 않았다.
인간이 바이러스에 대응하기 시작할 때 우리 ‘K-1625(지구로부터 7500광년 떨어진 곳에 있다) 행성’의 연구자들은 한반도 남쪽에 있는 녹색 점을 주목했다. 파란 바다에 떠 있는 섬이 유독 싱그럽게 보였다. 자연과 인간이 잘 어울려 공존하는 장소였다. 두 개의 큰 섬과 부속 섬으로 이뤄진 이곳은 수려한 자연을 보호하기 위해 ‘한려해상 국립공원’으로 지정돼 특별 관리를 받아온 ‘남해’다. 바이러스가 발붙일 틈을 보이지 않았다.
인간은 일정한 규칙과 방법에 따라 신체 기량이나 기술을 겨루는 운동을 하거나, 보는 것을 즐겼다. 남해는 천혜의 경기장들을 갖추고 있어 운동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훈련을 하러 온다. 그만큼 인간의 신체가 최고의 쾌적함을 느낄 수 있는 자연환경을 지니고 있다.
그 밖에 남해에는 몇 가지 숨겨진 보물들이 있다.
1. 남해 바래길
2010년에 개통한 문화생태탐방로인 ‘남해 바래길’은 총 16개 코스로 이뤄져 있다. 이 중 ‘가천 다랭이 길 4km’와 ‘물미 해안길 2km’ 코스는 해안을 따라 걷는 ‘해안 누리길’이다.
살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외로움이 파도처럼 밀려와 앞으로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때 ‘남해 바래길’은 걷는 것만으로도 영혼을 토닥거려주는 치유제가 된다. 남해의 길들은 풀잎을 보고도 우주를 상상할 수 있게 해주고, 도처에서 요정을 만나게 해주는 묘한 힘이 있다. 길은 난이도에 따라 4등급으로 나눠져 있다. 자신에게 맞는 코스를 선택해 걸으면 된다. 단, “너무 빨리 걷지 마라. 영혼이 따라올 시간을 주어라”는 아프리카 격언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남해 바래길은 치유의 길이자 성장의 길이기 때문에.
2. 독일마을
1960~70년대에 한국 경제를 끈 주역들이 있다. 바로 산업 역군으로 독일에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들이다. 이 마을은 그들의 고국 정착을 위해 조성된 곳이다. 남해의 아름다운 자연과 잘 어우러진 주황색 지붕의 예쁜 독일식 주택. 이 마을의 이국적 풍경은 많은 드라마 촬영의 배경이 됐다. 파독 전시관에 들러 어려웠던 시절의 기억을 회상해보는 시간도 의미 있다.
3. 토피아랜드
언덕 경사지에 조성한 편백나무 숲 체험장이다. 평온과 안식의 휴식처인 이곳에 오르면 아름다운 꽃과 나무와 정원에 스며들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어떤 노력과 기도에도 열리지 않던 문이 저절로 스르륵 열릴 것만 같다. 자연과 타인과 접속하기 위한 영혼의 준비 운동을 하기에 최고의 공간이다.
세상을 치유하는 깊은 힘의 원천이 남해에 있다. 인생이 이기적 목적을 위한 경쟁으로 채워지는 것만큼 슬픈 일은 없다. 막다른 골목에서도 ‘혼자’가 아님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지구의 인류가 ‘코로나19’를 극복하는 길이다. 남해의 길과 자연에서 그 깨달음의 온기를 느낄 수 있다.
※ ‘운수 좋은 날’은 운세 전문 사이트 '운세사랑'으로부터 띠별운세 자료를 제공받아 읽기 쉽고 보기 좋게 재구성한 콘텐츠입니다.
◈ 쥐띠총운 (금전운 : 상, 애정운 : 상, 건강운 : 중)
모두 이익이 오를 때니 물질 면의 이익에만 구애됨이 없이 하라. 경거망동하여 일을 행할 시에는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니 되도록 먼 여행 하지 말고 은인자중함이 길한 괘이다.
•84년생 : 하는 일도 잘되고 재수도 좋으나 이성 문제는 불안하다.
•72년생 : 전후 좌우를 잘 둘러보고 움직이면 재수가 풀린다.
•60년생 : 자본 융통은 잘되나 투자는 조심해서 해야한다.
•48년생 : 괴상한 문서로 애를 먹는 운이니 도장 문서를 조심하라.
◈ 소띠총운 (금전운 : 하, 애정운 : 중, 건강운 : 상)
하는 일마다 막힘이 많으나 중도에서 그만두면 나만 손해다. 움켜지고 있다고 모두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은 것과 같으니 때가 되고 시가 되면 스스로 크게 될 우려가 있으니 큰 손실이 가지 않은 선에서 타협점을 찾아라.
•85년생 : 좋은 것을 찾기보다는 현재의 모든 것은 중요하게 생각하라..
•73년생 : 올라가려고만 하지 말고 뒤를 돌아보고 생각을 바꿔라.
•61년생 : 자신의 힘으로 이뤘으니 내 손으로 지켜야 한다. 좋은 수가 생긴다.
•49년생 : 사업은 힘드나 잠깐 재수는 좋으니 융통할 길은 있다.
◈ 호랑이띠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중, 건강운 : 상)
계획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니나 시기를 잃음이라 때를 기다려라. 비록 운기가 길하여 현실에 이익은 있을 것이나 훗날을 기약해 자만은 금물이다. 가벼이 일신을 움직이지 말 것이니 복이 더욱 가중된다.
•86년생 : 올바른 마음만 먹으면 안 되는 일이 없으니 가슴이 확 뚫린다.
•74년생 : 금전 운이 대길하나 놓치면 힘든 운이 기다린다.
•62년생 : 쓸데없는 출입으로 손해봄이 많으니 출입을 삼가라.
•50년생 :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부딪혀보면 이야기 할만하니 만나 보라.
◈ 토끼띠총운 (금전운 : 하, 애정운 : 하, 건강운 : 중)
천둥은 오래가지 않고 그치니 놀랄 일이 있어도 움직이지 마라. 도모하는 일이 있다면 사사로운 일로 인해 큰 화를 부를지 모르니 작은 것이라도 소홀히 넘기지 말고 잘 살핌이 길할 것이다.
•87년생 : 묵묵히 내 자리를 지킴이 내일을 위하여 좋은 일이 된다.
•75년생 : 원앙이 빛을 잃으니 사귀든 사람이 소리 없이 가버린다.
•63년생 : 굳은 일이 생기나 몸담아 처리하면 명예가 오르고 재수도 길해진다.
•51년생 : 이리저리 다닌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니 안에서 잘 찾아 보라.
◈ 용띠총운 (금전운 : 하, 애정운 : 하, 건강운 : 중)
자존심을 잃는 것은 모든 것을 다 잃는 것이니 끝까지 지킴이 좋다. 운기가 흉흉하니 경거망동은 금물이며 자중하는 가운데 때를 기다림이 길한 괘다. 먹구름은 다시 사라질 것이니 너무 자책하지 말라.
•76년생 : 잔꾀는 안 통하니 정당한 방법으로 논의하면 도움을 받는다.
•64년생 : 자존심 대결에서이기니 아무 거리낌이 없고 이득이 배나 크다.
•52년생 : 자금 문제가 발생하여 힘든 일이나 도와주는 사람이 나타난다.
•40년생 : 먹을 것은 많이 생기나 소화시킬 능력이 없으니 조심하라.
◈ 뱀띠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중, 건강운 : 중)
하루 안에 처리할 일이 너무 많으나 한 가지만 완벽하게 하면 된다. 도모하는 일이 있다면 어려움에 봉착하였어도 뜻하지 않은 도움이 나를 찾아 작은 해결을 볼 것이니 너무 심려하지 말라.
•77년생 : 재수 좋아 취업 소식도 오고 멀어진 인연도 다시 찾는다.
•65년생 : 잃은 것은 다시 생각 마라 지금 일이 막중하다.
•53년생 : 다툼이 화가 되어 관 재가 보이니 엉뚱한 말을 조심하라.
•41년생 : 다 좋으나 한가지 걱정이 안 풀리니 다음으로 미루어야 한다.
◈ 말띠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상, 건강운 : 상)
상이나 축하받을 일이 생기니 겸손한 마음가짐은 더 돋보이게 한다. 돌부리에 넘어져도 재빨리 일어나는 모습이 필요한 시기이다. 오뚝기의 지혜를 배울 것이니 어찌 운기가 늘 나쁘다고 하겠는가. 희망을 품어라.
•78년생 : 금전 운 좋고 칭송 받을 일이 생기니 기운이 난다.
•66년생 : 어렵던 일이 합의되어 고비는 넘기나 완전 해결하려면 노력해야 한다.
•54년생 : 묶여서 꼼짝 못하듯 일의 앞뒤가 안보이니 오늘은 해결이 안 된다.
•42년생 : 재수가 좋으니 좋은 음식 대접을 받으나 과한 음주는 삼가라.
◈ 양띠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중, 건강운 : 중)
묘수가 없을 때는 공연히 날뛰면 정신건강만 해치니 자중하라. 도모하는 일이 있다면 방해자가 발생하니 주의하여 잘 살핌이 길함을 유지 할 것이다. 곳곳에 나를 해하는 이로 가득하다.
•79년생 : 조금 들어오는 금전이니 그 것에 만족하고 연인과 시간을 보내라.
•67년생 : 부부간에 애정 갈등이 심하니 일단 달래고 일을 처리하면 좋다.
•55년생 : 아랫사람의 충고를 기분 나쁘게 듣지 말고 받아주면 좋은 일이 생긴다.
•43년생 : 일이 안 풀릴 때는 어디가도 좋은 소리 듣지 못하니 조용히 기다리자.
◈ 원숭이띠총운 (금전운 : 상, 애정운 : 상, 건강운 : 중)
숨은 실력을 발휘할 때가 왔다. 기회는 여러 번 오는 것이 아니다. 도모하는 일이 있다면 신중히 처리해야 할 것이니 이는 길함 속에 망동에서 비롯될 것이다. 항상 자중하여 행하라.
•80년생 : 남의 것이 크게 보이나 생각지 말고 내 것을 개발하면 득이 있다.
•68년생 : 늦게까지 공들이다 결정하라 성급하면 손해를 보는 운이다.
•56년생 : 마음껏 열어 보여라 보고도 말이 없는 사람은 두말 말고 멀리하라.
•44년생 : 문서의 결점을 보완하면 큰 재물로 변하니 결정을 서두르지 마라.
◈ 닭띠총운 (금전운 : 하, 애정운 : 하, 건강운 : 중)
뜻밖의 일로 구설에 오르게 되니 길이 아니면 쳐다보지 말라. 도모하는 일이 있다며 열심히 노력하는 가운데 좋은 일이 발생할 것이며 이익 또한 배가 되어 나를 기쁘게 할 괘이다.
•81년생 : 원망스럽던 일도 풀리고 사고력도 살아나니 침체된 일을 풀어 보라.
•69년생 : 너무 급하게 서두르면 일을 그르치니 끝까지 긴장하다 결정하라.
•57년생 : 음주할 일이 생기나 과음을 피해야 일 처리가 잘 된다.
•45년생 : 부부간에도 예의를 잘 지키면 소득이 있고 고집부리면 손해를 본다.
◈ 개띠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상, 건강운 : 중)
이동수가 생기나 직업 변동은 불가하고 그 외에는 길하다. 도모하는 일이 있다면 노력하는 가운데 일거양득의 기회를 잡을 것이다. 안일한 생각은 버리고 매진하라.
•82년생 : 외로움에서 벗어나고 재수 좋은 일이 생기니 기회를 잘 포착하라.
•70년생 : 포기가 빠르면 그만큼 다른 일이 빠르니 안 되는 것은 빨리 정리하라.
•58년생 : 흐리면 개인 날도 있는 법이라 이렇게 개인 때에 힘을 써보자.
•46년생 : 믿음을 잃으면 회복하기 힘드니 신의를 지키면 어렵든 일이 열린다.
◈ 돼지띠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중, 건강운 : 상)
장단 맞추는 사람이 많아 도움은 되나 나눠 가질 일이 어렵구나. 만사가 여의하니 태평성대를 이룸과도 같다 하겠다. 도모하는 일이 있다면 열심히 노력할 것이니 길함이 가득해 복이 깃든다.
•83년생 : 신수 불길하니 하든 일이나 하고 지내면 지나간다.
•71년생 : 여러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 반드시 일이 생기니 출입에 이득이라.
•59년생 : 재수 대길하니 기다리든 일을 처리되는데 투자는 곤란하다.
•47년생 : 흑과 백을 분명히 가리고 일을 처리해야지 아니면 힘든 일이 생긴다.
한 고발 프로그램에서 혼자 사는 노인들 실태를 방영했다. 우연히 본 내용은 다소 충격이었다. 좁은 골목시장에서 옷가게를 하다 치매에 걸린 엄마를 파출소에 데려다 놓고 없어진 딸은 이후 연락이 되지 않았다. 아들에게 연락해도 모실 여력이 안 된다고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결국 노인은 보호시설로 인계되었다.
취재를 위해 예전 옷가게를 찾아가 주변 상인에게 확인하니, 엄마가 치매를 앓자 딸이 와서 가게를 처분하고 장사하며 번 돈으로 장만한 집까지 수억 원에 판 뒤 정작 치매에 걸린 엄마는 외면했다. 집을 판 돈도 자식들이 가져간 것 같다며 방 한 칸이라도 엄마 앞으로 남겨두었으면 저렇게 되진 않았을 거라고 안타까워했다.
혼자 사는 노인들의 숫자는 대전광역시의 인구를 훌쩍 넘겼다고 한다. 통계청에 따르면, 독거노인 비율(전체 노인 중 홀로 사는 노인 비율)이 2015년 18.4%에서 2018년 19.4%로 높아지면서 같은 기간 혼자 사는 노인이 120만 명에서 143만 명까지 늘었다. 우리나라의 노인 빈곤율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높다.
혼자 사는 사연도 다양하다. 남편의 부재로 홀로 아들을 키웠는데 아들 내외와 다투고 혼자 산다는 노인은 가끔 아들이 보고 싶지만 이제는 연락도 안 된다고 한다. 서로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래야 편하다면서. 혼자 사는 게 어떤 마음이냐고 묻는 말에 "혼자 산다는 건 아무도 없다는 거죠 뭐"라고 한다.
혼자 남은 노인들은 주로 쪽방촌으로 모인다. 200여 명의 노인들이 모여 사는 한 쪽방촌. 등이 굽은 노인들이 좁은 골목에 삼삼오오 앉아 있다. 사연을 들으니 대개 홀로 아이들을 키운 노인이 많다. 애지중지 키운 자식일 텐데 왜 나이 들어 외면당해야 할까 마음이 답답하다.
40년간 쪽방촌에서 살아온 분도 있다. 94세의 이 노인은 아들이 둘이지만 멀리 있어서 거의 못 온다고 했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일본에서 가정부로 일하다가 근로정신대에 강제 징용됐고 해방 후에야 노역에서 벗어나 다시 돌아왔다는 이분은 외로움과 싸우며 살고 있다. 근처에 산다는 동생 연락처를 찾다가 “어디로 갔지?” 하며 혼잣말을 하는 이 노인도 치매라고 한다.
독거노인들이 모여 사는 여인숙도 있다. 이들은 아침마다 서로 문을 두드려 안부를 묻는다. 행여 누군가 돌아가셨을 때 자녀를 수소문해 연락을 해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한다. 여인숙에 사는 한 노인에게 자녀가 있냐고 물으니 있어도 없는 것과 같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자기들끼리 잘살면 바랄 게 없다면서 해준 것 없으니 바랄 것도 없다는 노인은 “힘든 게 뭐냐?”는 질문에 그저 외롭고 쓸쓸하다고 한다. 홀로 사는 노인들은 대개 자녀가 없거나 자녀가 있어도 연락이 끊긴 노인이 많다.
누구나 나이가 드는데 그런 선택을 해야만 하는 자식들의 사정은 무엇일까. 사정이 어떻든 자녀들의 마음도 편치는 않을 것이다. 마음에 묵직한 돌 하나 얹힌 듯 답답한 시간이었다.
노인이 되어 혼자 산다는 것은 이유를 불문하고 쓸쓸한 일이다. 기대수명이 길어진 세상, 노년을 잘 살아내려면 미리미리 대비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할 것 같다. 건강에 더 신경을 써야 하는 건 물론이고, 재산도 자녀에게 미리 물려주지 말고 지인들과 관계를 지속하면서 바깥 활동을 하는 것도 필요하다.
병마와 마주친 오철근(77세) 어르신은 오로지 집 주위에서만 맴돌다가 10년의 세월을 속절없이 보내버리고 말았다. 뇌경색으로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 대인기피증에 시달렸고 삶에 대한 의미는 퇴색되어 하루하루를 견디기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음의 문을 조금씩 열면서 10년 만에 외출을 했다. 영영 잃어버릴 수도 있는 시간들을 다시 찾게 해준 외출이었다.
운동 잘하고 공부도 잘했던 핸섬 보이
청소년 시절의 어르신은 운동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는 핸섬 보이였다. 그의 부친은 지방의 기초의회의원이었다. 어르신은 어린 시절 스케이트를 아주 잘 탔는데, 당시 지방에서 스케이트를 탈 정도면 주위의 부러움을 살 만한 집안이었다. 그 시절 농촌은 몇몇 집을 빼고는 다 고만고만한 살림이었다. 겨울철, 꽁꽁 언 논배미에서 썰매는 타는 아이는 많았지만 스케이트를 탈 수 있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특별히 선택된 아이에게만 주어진 특권이었다. 운동이면 운동 공부면 공부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았고 외모까지 출중했으니 여학생들에겐 늘 선망의 대상이었다. 어르신에게 청소년 시절은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날들이었다.
한때는 잘나가던 스피드스케이팅 선수
당시 부친은 장남의 될성부른 떡잎을 알아보셨는지, 아니면 유난히 운동신경이 뛰어난 아들의 소질을 파악했는지 스케이트를 선뜻 사주셨다. 은빛 스케이트 날을 번쩍이면서 얼음을 가르던 그는 고등학교 때 전국체전 경기도 대표로 출전해 입상을 했고, 상을 탈 때마다 운동장 조회 때, 전교생 앞에서 교장선생님의 칭찬을 듣곤 했다.
군 생활도 운 좋게 카투사로 했다. 당시 카투사에게는 일반 군대와는 다른 환경을 제공했다. 어르신은 미군들과 복무하면서 오로지 영어에 매진했다. 통역을 할 정도의 실력은 제대 후 사회생활에 많은 도움이 됐다. 군 생활을 하면서도 전국체전이 열리면 경기도에서 보낸 협조 공문으로 도 대표 선수로 출전하곤 했다. 하계체전 때는 육상선수로, 동계체전 때는 도 대표 스케이팅 선수로 활약했다. 스케이트는 나이가 들어서도 자주 즐기는 운동이었다. 칠십에 가까운 나이에도 태릉은 물론 잠실 롯데월드 빙상장으로 스케이트를 타러 다녔다. 세월이 한참 흘렀는데도 그의 스케이트 실력은 전혀 녹슬지 않았다. 스케이트만 신으면 펄펄 날았다. 어르신은 그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말했다. “술 먹다가 술자리에서 죽거나 얼음판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다가 쓰러져 죽으면 여한이 없겠다”는 말을 할 정도로 술과 스케이트를 사랑했다.
스물한 살 어린 나이에 결혼
지병이 있던 아버지의 병치레로 장남인 그는 스물한 살 어린 나이에 이웃 마을에 살던 세 살 아래 소녀와 결혼을 했다. 어른들의 권유 때문이었다. 이른 결혼 후 아내는 곧바로 임신을 했고, 그 사실도 모른 채 그는 군대에 입대하고 말았다. 제대 후 집에 돌아오니 엉금엉금 기어 다니는 떡두꺼비 같은 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가 아빠라고 부르며 엉금엉금 다가오면 어른들 눈치가 보며 슬며시 자리를 피하곤 했다. 그 시절에는 자식 한번 제대로 예뻐해주지도 못하고 안아주지도 못한 채 살았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고, 지난 시절을 돌이킬 때마다 그는 자식들에게 사랑 표현 못하고 산 걸 제일 안타까워했다.
잃어버린 10년
60대 중반이 막 지나던 어느 날, 머리에 열이 오르고 뜨거웠다. 그게 뇌경색의 전조증상인지도 모른 채 방치하다가 결국 병원으로 실려 갔다. 중증의 뇌경색이었다. 좌측 팔과 다리가 마비됐고 음식물을 씹어 삼키는 게 어려운 삼킴 장애까지 발생했다. 어르신 건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잘 먹는 것’인데, 제대로 삼키지 못했으니 잘 먹지도 못했다. 당연히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다. 여기에 심리적 상실감까지 더해져 우울증이 생기면서 삶의 의지를 잃어갔다.
지독한 뇌경색은 어르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렸다. 매일매일 빨리 죽게 해 달라고 빌었다. 자살을 생각하던 하루는 실행에 옮겼다. 안방에서 전깃줄로 목을 매고 침대에서 뛰어내렸는데 지지대가 부러지는 바람에 돌침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혔다. 쿵! 소리에 놀라 달려온 둘째 아들에게 발견되어 119구급차로 병원으로 실려 갔다. 미수에 그쳤지만 이후에도 자살 충동이 시시각각 그를 엄습했다.
몸무게 51㎏의 다소 왜소한 체구는 병마로 참혹했다. 한때 펄펄 날던 몸이 한순간에 편마비가 되어 초라한 모습으로 변해버렸으니 그 실망이 오죽했을까. 대인기피증으로 만나는 사람도 없이 하루를 버티다가 저녁에 잠자리에 들면 다시는 아침이 오지 않기를 수없이 기도했다. 이렇듯 삶이 지난(至難)했으니 식구들에게, 특히 아내에게 짜증을 부리기 일쑤였다. 아내는 명일역 근처에서 혼자 노점상을 하면서 생계를 책임졌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장사를 마치고 고단한 몸으로 들어온 아내는 온종일 말 한마디 못한 채 보낸 남편의 스트레스를 다 받아줘야 했다. 어르신이 막걸리라도 한잔 마신 날에는 늦은 밤까지 아내를 앞에 앉혀놓고 술주정을 했다. 가부장적인 사고와 직설적인 표현은 자녀들도 힘들게 했다. 2남 1녀의 아이들은 아버지의 모습이 보기 싫어 일찌감치 독립해 나갔다. 관계는 점점 더 소원해졌고 몸이 불편한 어르신의 외로움은 점점 깊어졌다.
진심어린 대화를 통해 위로를 받다
2020년 초에 오철근 어르신을 만났다. 편마비의 불편한 몸과 피폐해진 정신으로 자존감이 한없이 떨어져 있는 상황이었다. 삶의 의미를 잃은 채, 막걸리를 마시며 하루하루를 견디는 어르신에게 도움이 필요해 보였다. 마음도 삭막하게 닫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진심으로 위로를 건네는 나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더니 말문이 트이기 시작했다. 청소년 시절 문학에 관심이 많았고 역사에 대한 식견도 높아 한국의 고대사를 포함해 근현대사에 해박했다. 나와 대화가 통해서인지 어르신은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10여 년간 잊고 살았던 스케이팅에 대한 추억도 하나하나 끄집어냈다. 어르신은 잠실의 123층 롯데월드타워가 건설되었다는 걸 뉴스로만 봤다며 꼭 한 번 가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어르신의 흔쾌히 그 요청을 들어드리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약속한 날에 지하철을 이용해 롯데월드타워에 도착했지만, 코로나19로 인해 일시적으로 문을 닫는다는 안내를 들어야 했다. 오랜만의 외출이라 그냥 귀가하기는 너무 아까웠다. 기왕 나온 김에 화려한 벚꽃과 연산홍이 화사하게 핀 석촌호수를 한 바퀴 돌기로 했다. 어르신은 어린아이 같은 순진한 미소를 감출 줄 몰랐다. 연산홍과 어우러져 더욱 홍조를 띠었다. 푸르게 변해가는 나뭇가지에서 지저귀는 새소리와 유유히 호수를 헤엄치는 백조들의 자유로움을 넋을 놓고 바라봤다. 그렇게 한동안 시선을 고정한 채 자신의 지나간 10년의 세월을 찾아갔다.
며칠 후에는 함께 종로로 향했다. 장애인 리프트와 엘리베이터를 몇 번씩이나 갈아타고 도착한 종로에서 지난 시절을 추억하며 거리를 걸었다. 휠체어를 밀면서 힘들었지만, 어르신의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서 힘을 냈다. 종묘를 찾았다. 종묘는 조선 시대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받들고 제례를 봉행하는 유교 사당이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훈정동 1번지에 있으며, 사적 제125호로 지정되어 있다. 휠체어를 타고 종묘를 탐방하면서 어르신은 쉴 새 없이 이야기를 했다. 그 해박한 식견에 나는 또 한 번 놀랐다. 새록새록 떠오르는 추억들이 좋았는지 어르신은 내친김에 명동에도 가보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며칠 후, 우리는 명동 거리로 나갔다. 명동을 거쳐 종로 송해거리의 한 음식점에서 늦은 점심을 먹으며 막걸리도 한 잔 곁들였다. 점심을 먹은 뒤에는 인사동 거리를 탐방했다. 그날, 겨우내 꽁꽁 얼었던 얼음이 봄과 함께 해동하듯 어르신의 마음도 서서히 봄빛으로 물들어갔다.
자연과 건축은 좋은 사이가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건축은 자주 자연을 도발한다. 도시 근교 산자락을 파 젖히고 들어앉은 건물들의 현란한 형형색색을 보라. 자연하고 불화를 즐기는 취향? 심술? 그러려면 그러라지, 자연이야 대범하여 그저 태연하다. 지나다니며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들만 피곤하다. ‘이응노의 집’을 향해 걸어가며 떠오르는 생각들이 이러하다. 자연과 친화 관계 맺기에 성공한 건축을 만나는 즐거움의 반향이다. 자연과 좋은 사이로 지내는 미술관을 보고 싶으신가? 그렇다면 ‘이응노의 집’으로 고고싱!
‘이응노의 집’은 고암 이응노 화백(1904~1989)의 생가 터에 지은 기념관이자 미술관이다. 이응노는 생의 후반을 줄곧 파리에서 살았으나 고향을 못내 못 잊어했다. “나는 충청도 홍성 사람이외다!” 그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고향 땅이 그리워 자랑처럼 흔히 홍성을 얘기했다. 그리운 게 고향의 산천뿐이었겠는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성장기의 순수했던 ‘나’에 대한 그리움도 컸을 게다. 고향이란 인간의 욕망이 회항하는 귀소(歸巢)다. 영혼마저 한 자락 실린 고감도의 어떤 차원이다.
한국을 넘어 유럽으로 창작활동의 범주를 확장했던 거목 이응노. 그의 창작력은 한 번 터져 멈출 줄 모르는 활화산처럼 격렬했다. 미술의 온갖 장르를 편력하며 쏟아 부은 다재다능은 또 어떻고? 이 걸출한 화가는 미술에 목숨을 걸어 얻을 걸 다 얻고 돌아갔다.
그러나 ‘이응노의 집’을 건립할 때 눈총들이 쏟아졌다. 싫어하는 소리들과 반대하는 입장들이 분분했다. 이응노라 하면 ‘동백림 사건’부터 떠올리며 ‘불온한 인물’이라 여기는 사람들이 드물지 않았던 것이다. 재판에 의해 왜곡된 혐의는 벗겨졌고, 마땅히 받아야 할 처벌은 2년 6개월간의 옥고로 갚았음에도 여전히 잔존하는 여파. 미술계 내부에서조차 불편해하는 눈들이 있었다. ‘이응노의 집’은 이 일각의 소음과 맞선 단호한 결행으로 건립되었다. 건립 주체는 홍성군 당국. 그들은 2011년, 마침내 ‘이응노의 집’을 개관해 지자체가 멀뚱히 앉아 한심하게도 펜대만 굴리는 ‘철밥통’ 집단이 아니라는 걸 보여줬다.
고개 숙이고 마을 일원으로 끼어든 품새
‘이응노의 집’은 2만6000㎡(약 8000평)의 널찍한 부지에 조성되었다. 991㎡(약 300평)의 미술관을 본동으로 하고 북 카페와 다목적실을 곁에 배치했다. 원래 있었던 지형을 그대로 두고 조경을 한 야외정원은 순박하면서 평온하다. 떠올랐다 가라앉는 상념처럼 일렁이는 정원의 저 부드러운 곡선들. 돌처럼 가만히 앉아 쉬기에 좋은 공간이다. 정원 전면엔 연(蓮)이 자라는 못이 펼쳐진다. 연못과 정원을 거쳐 뒷산으로 흘러들어가는 산책로 역시 그지없이 자연스럽다. 무리가 없어 순리를 느끼게 하는 이 모든 유순한 외경들. 처음 방문한 사람에게 하등의 낯설음을 야기하지 않는 풍경들의 협연. 티 나지 않게 공들인 결과일 게다.
본동 건축을 볼까. 지나치게 크지 않은 사이즈로 지어져 소박하다. 위압이나 위세가 없어 얌전하나 은근히 세련돼 당당하다. 그 무엇보다 멀고 가까운 곳의 지세 성격과 산세 리듬에 조응해 정당하다. 과거부터 터를 잡고 존재해온 마을과 마을 사람들까지 고려한 수굿한 모습이라 안성맞춤이다. 겸손히 고개를 숙이고 마을의 일원으로 끼어든 품새이지 않은가. 이런 구색, 이런 조합이 어디 흔할까보냐. 설계자의 의도가 정밀하게 구현된 걸 느낄 수 있다.
미술관 벽채의 색상을 보자. 황토를 이기고 다져 발랐으니 황토색이다. 굳이 황토를 채택한 건 그게 향토의 빛깔을 뿜어서일 게다. 대지의 살갗 색깔 말이다. 그러나 온통 황토색 일색이면 지루하겠지. 외벽을 분할하며 개입한 흑회색 벽면이 대비와 조화를 이루어 조용히 생동한다. ‘이응노의 집’을 설계한 이는 중견 건축가 조성룡. 그는 건축물이 튀거나 돋보이는 걸 질색으로 여긴다. 인위가 자연을 짓눌러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일 게다. 사람의 기술이 자연과 풍속을 말처럼 타고앉아서는 무례하다 봐서일 게다.
홍성군청과 설계자는 생가 터만 휑하게 남은 부지에서 이응노의 형적을 찾는 일로부터 사업을 착수했을 것이다. 화가는 이곳에서 열일곱 살까지 살았다. 그러나 생가는 물론, 뭐 하나 남아 있는 유적이 없는 상태였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심정으로 생가를 복원했을 테다. 다행히 소년 이응노에게 미술의 싹눈을 틔워준 자연은 옛날 모습 그대로여서 안도하지 않았을까. 나지막한 산들은 충청도 말씨처럼 느릿느릿 푸근하게 품을 펼친다. 저만치 띄엄띄엄 산재한 농가들의 지붕 위로는 새가 기쁘게 날고 솔바람이 감나무를 흔들며 지나간다. 인근에서 소음을 쏟아내며 물방개처럼 허우적거리는 차량만 아니라면 마냥 예스러울 농촌 풍경이다. 이응노는 고향에서의 성장기를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열일곱 살까지 자연 속에서 자랐다. 그림그리기를 좋아했지만 그런 나를 도와주려고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오히려 방해했다. 나는 남몰래 그리고 또 그렸다. 땅 위에, 담벼락에, 눈 위에, 검게 그을린 내 살갗에…. 손가락으로, 나뭇가지로, 혹은 조약돌로. 그러면서 외로움을 잊었다.”
찡하지 않은가. 고향 산천은 이응노를 길러 그림에 눈뜨게 했으나, 다만 홀로 외로이 온갖 것에다 끼적거릴 수밖에 없었다지 않은가. 홀로 외로이! 이는 예술을 부양할 수 있는 본성의 토대이며 모든 인간의 어찌할 수 없는 숙명이다. 이응노는 고향의 자연과 고향 사람들의 당연한 무신경을 통해, 어차피 홀로 가야 하는 창작의 외길을 견딜 고독의 힘과 강철 같은 인내심을 기른 게 아니었을까. 이응노의 광적인 창작 욕구와 믿어지지 않을 지경의 다산성(그는 자그마치 3만여 점의 작품을 생산했다!)의 싹은 이미 고향에서 발아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이쯤에서 이응노의 눈으로 이곳의 평범한 자연을 평범치 않은 기분으로 다시 바라보게 된다. 이응노의 숨결을 느끼기 위해 이곳을 찾아왔음을 상기하며.
그림에 살고 그림에 죽었던 작가
미술관 내부로 들어선다. 로비를 돌아서자 외부처럼 수수한 실내 정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치레와 꾸밈을 한껏 자제해 담박하다. 혹여 전시공간의 장식성이 전시작품으로 향하는 시선들의 집중도를 해할까 염려해 꾸린 의도가 완연하다. 외형에서와 마찬가지로 설계자는 자신의 존재는 물론 공간 자체의 미감까지 과하게 부각되지 않도록 신중한 고려를 했다. 그럼에도 멋 부린 티 없이 멋스러운 게 있다. 벽과 벽 사이에 설치한 대형 유리창으로 들이치는 자연 채광이 자아내는 효과가 그렇다. 빛과 그림자의 대비, 밝음과 어둠의 공존으로 공간에 깊이감과 긴장감을 부여했다.
전시실은 네 개로 구성됐다. 현재 ‘고암 이응노의 사생과 소묘’라는 타이틀의 전람회가 진행 중이다. 전시 작품들은 물론 ‘이응노의 집’의 소장품들이다. 이 미술관은 1000여 점에 달하는 이응노의 작품과 유품을 소장했다. 화가의 유족들과 뜻있는 사람들에 의한 기증품이 많지만 홍성군이 직접 구입한 작품들도 있다. 앞으로도 계속 사들일 작정이라 한다. 군 단위 지자체가 예술품 구입에 적극 나선다? 아마도 드문 일일 게다. 지역 정책에 예술이 가세하고서야 유토피아를 꿈꿀 수 있을 터. 시대를 읽는 홍성군의 촉이 예리하다.
이제 전시회에 나온 그림을 둘러볼까? 해방 이후부터 1950년대 중반까지, 이응노가 전국을 기행하며 사생한 그림들 120여 점을 감상할 수 있다. 습작처럼 가볍게 스케치한 작품들 일색이어서 살짝 아쉽다. 그러나 대가의 노련한 필치와 호방한 운필을 느끼기엔 부족함이 없다. 우리는 흔히 이응노가 말년에 그린 ‘군상’ 시리즈를 기억한다. 하지만 그는 부단히 화풍을 변주하고 전복해 경계를 무너뜨렸다. 어느새 저기까지 갔나 했더니 또 저만치로 내달리는 폭주 열차? 그는 혈관에 팽배한 아드레날린을 주체 못하는 사람처럼 격렬하게 그리고 또 그렸다. 추상미술이 판치는 파리에서 동양의 정신을 기저로 한 ‘문자 추상’ 또는 ‘서예적 추상’으로 유럽 화단의 지지를 받았다. 그의 작품에서 유럽인들은 ‘범신론적 미학’을, ‘주술적 매력’을 발견했다. 주술! 작품 이전에 이응노 자신이 이미 주술의 올가미에 걸린 게 아니었을까. 미술이라는 주술에. 그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나는 그림에 살고 그림에 죽는다.”
이응노의 예술은 만발했다. 그러나 삶엔 그늘이 서려 불운했다. 옥고도 고난이었지만, 이후의 시간들도 밝을 수만은 없었으니. 정치적 파랑에 휩쓸리다 조국을 떠나 프랑스로 건너가야 했으니. 그는 파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토록 그리워했던 고향땅을 다시 밟지 못한 채로. ‘이응노의 집’ 허공에 서늘한 바람 한 점 서성이걸랑 고인을 기릴 일이다. 바람이 그의 기척인 양.
‘이응노의 집’ 설계한 건축가 조성룡
거장의 예술혼을 느낄 수 있도록 설계해
“그거 아는가? ‘이응노의 집’은 참으로 눈물겹게 지은 기념관이라는 거.”
조성룡 선생의 첫마디에 저릿하다. ‘이응노의 집’ 설계자인 그는 건립 과정상의 곡절을 누구보다 잘 안다. “눈물겹게 지었다”는 한마디에 이미 모든 게 들어 있지만, 그는 ‘이응노의 집’이 여느 미술관과 다르게 많은 애환을 거쳐 건립된 공간이라는 걸 놓치지 않길 바라는 것이다.
사실 ‘이응노의 집’은 손쉽게 지어진 기념관이 아니다. “좌파 화가에게 무슨 기념관이냐? 어림없다!” 홍성군에 의해 기념관 기본 계획이 수립되면서부터 일부 주민들 속에서 반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고 한다. 이에 홍성군은 ‘이응노의 집’이 지역의 문화예술 역량을 북돋울 견인차 역할을 할 수 있다며 주민들을 설득했다. 준공 직후에도 논란은 이어졌다. 건축물의 모양새가 너무 소박하다는 비판이 제기된 것. 고암 이응노의 담백한 예술정신을 담고자 한 설계자의 진중한 의도를 납득하지 못했던 셈이다.
“홍성은 고암의 예술혼이라는 켜가 잠재한 곳이다. 나는 그 ‘켜의 드러내기’를 설계의 지향점으로 삼았다.”
‘켜’를 드러내기 위해 어떤 걸 주안점으로 했나? “고암이 성장기에 보고 자란 자연 환경을 존중해 일을 진행했다. 이곳의 수려한 용봉산과 월산은 물론, 평온한 마을 풍경은 한 소년을 예술로 이끌어준 벗이자 스승이지 않았겠는가. 그렇다면 자연 경관을 고려해 건축을 하는 게 필수적이라는 생각이었다.”
건축물은 물론, 군더더기 없이 자연스러운 외부 정원에서도 설계자의 의도가 느껴진다. “관람객이 이곳 쌍바위마을 사람들의 일상적 통행로인 다리와 농로를 거쳐 정원과 만나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그런 동선을 통해야 고암 선생이 늘 바라보았을 시골 풍경의 정취를 누릴 수 있어서다.”
생가 복원엔 본으로 삼은 자료가 있었나? “어느 시골집을 그린 고암의 풍경화를 참고로 했다. 생가 뒤편에서 울타리를 이룬 대숲과 채마밭도 원래 있었을 것으로 가정하고 되살렸다.”
상업적 의도를 중심에 둔 미술관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런 곳에 사람들이 몰려들기도 한다. 이 점에서 농촌의 한적한 자리에 있는 ‘이응노의 집’은 매우 귀하게 느껴진다. “거장의 소장품이 있고, 아울러 자연과 어우러진 풍경이 있는 이 미술관은 특유의 공간이다. 그 무엇보다 고암의 숨결이 배인 장소라 소중하다. 농촌에 있는 미술관치고는 관람객도 많은 편이다.”
조성룡 선생은 소마미술관과 의재미술관도 설계했다. 칠순을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한다. 자신의 건축 철학을 담은 책 ‘건축과 풍화’를 출간하기도 했다. 그는 ‘풍화’의 개념을 이런 요지로 설명했다.
“건축물은 완성되는 순간부터 기의 영향으로 낡기 시작한다. 따라서 가급적 풍화를 지연시키기, 노화가 되더라도 자연스럽게 보이게 짓기. 이게 나의 목표이자 사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