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섬에 서면 느리게 출렁이는 시간을 본다. 느릿한 바람 속에서 태고와 현재가 넘실거리는 것을 느낄 것이다. 아침이면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가을이면 풍성한 갈대와 억새꽃이 군락을 이루어 눈부신 곳 , 생명이 살아 숨 쉬는 무인도 비내섬에서 알싸한 겨울을 맛보는 건 자신에게 때 묻지 않은 겨울을 선물하는 시간이다.
억새꽃 피어나던 섬으로 떠나는 겨울여행
충주에서 앙성면의 비내섬까지는 자동차로 약 30분 정도 달리면 나타나기 시작한다. 차창 밖으로 남한강 줄기와 함께 어우러진 섬이 보이고 벌써부터 가슴이 탁 트인다. 입구의 섬을 향한 다리를 건너서면 바로 자연적으로 형성된 사구 형식의 99만 2천㎡(약 30만 평)의 광활한 무인도가 펼쳐진다. 울퉁불퉁한 길에는 요즘 어디든 놓인 그 흔한 인위적인 데크길이나 여행자를 위한 친절한 안내문도 없다. 초입의 길 옆에 비내쉼터 하나 있을 뿐이다. 오지(奧地)와도 같은 비내섬의 자갈밭과 흙길을 따라 억새의 숲에 파묻힐 일만 남았다.
인적이 드물다. 한적함이 어울리는 섬이다. 언제까지나 덜 알려져서 늘 이랬으면 싶다. 숨겨놓고 나만 알고 싶은 곳, 그 섬에 들면 금방 자연 속으로 푹 잠기는 자신을 본다. 억새 사이로 난 부드러운 흙길에 사람의 발자국과 자동차 바퀴 흔적이 있다. 드넓은 갈대숲에 자동차를 세워놓고 취하는 조용한 휴식도 좋은 방법일 수 있겠다.
갈대와 억새꽃이 만발한 가을에 비해 겨울 들판에 서면 자연스럽게 차분함을 장착시켜 준다. 그 사이로 군데군데 서 있는 버드나무 뒤로 섬을 휘감아 도는 남한강 줄기가 흐른다. 산이나 들에서 주로 자라는 억새와 습지나 물가에서 자라는 갈대가 이곳에서는 사이좋게 공생을 한다. 사람들의 손 타지 않은 이런 풍경 덕분에 드라마 사극이나 사색적인 배경의 촬영지로 자주 등장하기도 한다. 최근엔 이곳 비내섬과 이 지역의 탄금호 무지개길에서 촬영된 배우 현빈과 손예진 주연의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이 방송되고 있는 중이다.
비내는 갈대와 나무가 무성해서 비어(베어) 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는 큰 장마가 지는 바람에 내(川)가 변했다 해서 비내라고 불린다는 말도 있다. 갈대숲을 지나던 마을 어르신이 “예서 뭐 볼게 있어서 이렇게 왔남? 하면서 가던 길을 익숙하게 지나가신다.
눈을 돌리는 곳마다 갈대와 억새가 무리를 이루어 일렁인다. 그 너머로 강변을 끼고 나지막한 산과 들이 배경을 이룬다. 그리고 멀리 몇 채의 시골집과 다 따낸 휑한 사과밭이 겨울 속에 오롯하다. 모든 것을 비운 사람의 멋을 떠올리며 꽃도 잎도 열매도 떨군 겨울 풍경을 본다. 우리 기억 속의 유년기의 마을 풍경처럼 아련하다. 이 모든 것이 제각각 따로 분리되어 보이지 않고 시간이 멈춘 듯 순하고 평화로운 정취로 눈에 들어온다.
발길 닿는 대로 옮기다
이토록 때 묻지 않은 이 섬에는 생태자원이 풍부하다. 람사르 습지 보호지역으로 관리할 가치가 충분하다는 지자체의 입장이다. 생물의 다양성과 멸종위기 야생 동·식물 서식·도래 지역, 지형·지질학적 가치를 위해 환경부에 비내늪의 습지보호지역 지정을 건의 검토 중이라고 한다. 하지만 군사 훈련과 캠핑 차량 통행 등에 따른 훼손이 아직 남아있는 문제로 알려져 있다.
발길 닿는 대로 이리저리 헤매듯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끝없이 호젓하다. 바스락거리며 흔들리는 억새 수풀 사이에서 길을 잃고 싶다는 생각조차 든다. 천천히 걷다 보면 간간이 들려오는 새 울음소리나 곤충들의 조용한 움직임이 숲의 정적을 깬다. 이곳이 계절마다 찾아오는 철새도래지이기도 하다. 비내섬 갈대밭의 자연은 우주만물이 공생하는 곳이었다.
이 지역에서 나고 자란 신경림 시인은 ‘갈대’를 이렇게 노래했다.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한겨울이다. 실내에서만 옹송거리다 보면 몸과 마음이 경직되기 쉽다. 하루 코스로 훌쩍 떠나볼 수 있는 곳 충주 비내섬을 향해 달려보자. 그 섬의 억새 수풀 속에 서서 아스라한 태고의 겨울바람 소리를 들어보라. 뒤엉킨 머릿속이 은은하게 평정된다. 그리고 차분한 겨울 추억의 결을 하나 더 보태는 날이다.
-비내섬 : 충북 충주시 앙성면 조천리 412
△가볼 만한 곳
충주 ‘중앙탑’
비내섬에서 자동차로 20분쯤 거리에 중원 탑평리 칠층 석탑(일명 중앙탑)이 있다. 넓은 잔디밭에 사적공원(史跡公園)이 멋지게 조성되어 산책을 하거나 휴식공간으로 더없이 좋다.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국보 6호 중앙탑이 시원하게 우뚝 선 공원엔 예술적 조각 작품들을 비롯해서 야외음악당, 음악분수대, 향토민속자료관 등 볼거리가 많다. 호수 쪽으로 걷기 좋은 코스 탄금호 무지개다리가 있고, 호수 저 편에 [대한민국 중심고을 충주(CHUNG JU KOREA)]이란 글자가 보인다. 이곳이 바로 이 나라의 중간 지점이다.
탑 주변을 벗어나면 그 옆으로 한옥이 보인다. 의상 대여소 '입고 놀까'는 중앙탑공원에서 인싸 되기 놀이마당이다. 이미 sns상에서 핫플레이스로 이슈가 되고 있다. 거길 나오기 전에 술박물관도 들러볼 만하다. 그리고 가까운 거리에 세계무술공원이 있다.
*중앙탑: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탑평리 11
남한강 물길의 중심 목계나루, 그리고 종댕이길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있지만 그 옛날 남한강 수운을 따라 물류교역의 중심지가 되었던 충주가 전국 동서남북 교통의 요지가 되는 역할을 했던 엄정면 쪽의 목계나루터. 오늘날 그 가치를 살리고자 복합 문화공간이 형성되었고 목계나루의 옛 추억을 되살려 볼 수 있다.
*목계나루: 충청북도 충주시 엄정면 목계리 산35-8
그리고 산책 코스로 좋은 충주호 종댕이길은 1~3코스로 30분에서 4시간까지의 코스의 트레킹이 가능한 행복한 둘레길이다. 2코스의 조망대에서는 해맞이를 할 수 있고 출렁다리도 있다.
*충주공용버스터미널 농업기술센터 정류장에서 514번(용관,시외버스터미널), 515번(터미널,국민은행) 버스 타고 마즈막재 삼거리 주차장 하차.
그 외에도 시내 중심의 충주 호암저수지, 관아공원은 물론이고, 잘 알려진 탄금대와 이화령을 지나 멋스러운 한지박물관과 주변의 문경까지 냅다 달려 볼 수 있다. 하루나 이틀쯤 선비의 풍류가 흐르는 곳 충주에서 겨울여행을 즐긴다면 정감 어린 힐링의 시간이 될 것이다.
충주의 맛
뭐니 뭐니 해도 사과를 빼놓고는 충주의 맛을 이야기할 수 없다. 충주의 사과 작가로 유명한 강병미 화가는 말한다. 대학교 때부터 사과를 그리다 보니 운명처럼 사과의 고장 충주에 와서 살게 되었고 이곳에서 사과 그림 작업은 당연한 일상이라고.
충주시 농업기술센터와 농업회사법인 페트라가 공동 개발한 사과빵이다. 공장에서 대량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주문하면 오븐에서 직접 구워 식혀서 포장해 준다. 호두과자에는 호두가 들어있듯 사과 빵에는 당연히 충주 사과가 들어간다. 부드러운 빵 속에 상큼한 사과 필링이 입안 가득 퍼지는 맛, 따뜻할 때 더 맛있다.
*애플스토리 : 충북 충주시 지현동 963
(충주휴게소, 수안보 휴게소, 주암휴게소, 수안보 상록호텔에서도 구입할 수 있다)
가을에 수확한 사과는 사시사철 먹을 수 있도록 저장도 하지만, 충주에서는 다양한 제품으로도 나온다. 사과 한과, 사과 손약과, 사과 강정 외에도 사과 국수와 주스나 와인 등이 있다. 충주 버스터미널 안에 충청북도 우수 판매전시장이 있어서 귀갓길에 구입할 수 있다.
맛있는 한 끼
올갱이(다슬기)요리는 주로 충주와 괴산에서 먹을 수 있는 맛이다. 푸르스름한 올갱이국이 일품이다. 그리고 충주 부근으로 드라이브 삼아 나가면 그 산에서 나는 산채비빔밥집이 많다. 직접 발효한 효소를 넣은 양념장과 청포묵을 넣은 비빔밥의 맛.
만일 여유있게 하루나 이틀쯤 머문다면 숙소는 비내길에서 20분 이내의 가까운 거리에 앙성 탄산온천지역이 있다. 수안보 온천도 멀지 않아서 온천욕을 하며 편안한 하룻밤을 보낼 수 있다. 겨울여행의 알찬 마무리다.
◇ Exhibition
# 한국 비디오 아트 7090: 시간 이미지 장치
일정 5월 31일까지 장소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한국 비디오 아트의 30여 년을 재조명한다. ‘시간 이미지 장치’를 부제로 하는 이번 기획전은 국내 비디오 작가 60여 명의 작품 130여 점을 선보인다. 시간성, 행위, 과정의 개념을 실험한 1970년대 작품에서 시작해, 1980~90년대의 장치적인 비디오 조각과 싱글채널 비디오까지 아우르며 한국 비디오 아트의 전개 양상을 입체적으로 해석했다. ‘한국 초기 비디오 아트와 실험 미술’, ‘탈장르 실험과 테크놀로지’ 등 크게 7개의 주제로 나뉜다. 기술과 영상 문화, 과학과 예술, 장치와 서사 등 이미지와 개념의 문맥을 오가며 진화해온 한국 비디오 아트의 역사를 다각도로 살펴볼 기회다.
# 매그넘 인 파리
일정 2월 9일까지 장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
프랑스 파리를 주제로 한 사진전으로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로버트 카파 등 20세기 사진의 신화로 불리는 ‘매그넘 포토스’(Magnum photos) 소속 작가 40명의 작품 400여 점이 공개됐다. 2014년 오텔 드 빌(파리 시청)에서 처음 개최됐던 이번 전시는 2017년 일본 교토문화박물관에 이어 세 번째로 한국을 찾았다. 앞서 열린 파리와 교토 전시에서는 선보이지 않았던 엘리어트 어윗의 사진 40여 점으로 구성된 특별 섹션 ‘Paris’와, 파리의 패션 세계를 담은 작품 41점을 추가로 만날 수 있다. 파리의 풍경이 담긴 옛 지도와 희귀도서, 앤틱가구 등으로 꾸며진 ‘파리 살롱’ 등 다채로운 볼거리가 풍성하다.
# 알폰스 무하: Alphonse Mucha
일정 3월 1일까지 장소 마이아트뮤지엄
체코를 대표하는 화가 알폰스 무하의 판화, 유화, 드로잉 등 오리지널 작품 230여 점을 작가의 삶과 여정에 따라 총 5부로 나눠 선보인다. 특히 이번 전시는 체코 출신의 테니스 선수 이반 렌들의 개인 소장품을 주축으로 기획했다는 점에서도 의미를 갖는다. 일명 ‘무하 스타일’이라 알려진 넝쿨 같은 여인의 머리카락, 독특한 서체 등 매혹적인 아르누보 스타일의 포스터에서 작가가 고국으로 돌아가 생을 마감하기까지의 작품까지 총망라한다. 도슨트 운영과 더불어 체코문화원과 함께하는 미술사 강연 및 시즌 이벤트, 키즈 아틀리에 등 전시와 연계한 다양한 교육 문화 프로그램도 제공할 예정이다.
# 고향 gohyang: home
일정 3월 8일까지 장소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서울시립미술관 비서구권 전시 시리즈의 세 번째 프로젝트로, 복잡한 사회·역사적 배경을 가진 중동 지역의 현대 미술을 살펴본다. 중동에서 발생한 다양한 미술적 활동을 통해 고향을 잃거나 빼앗긴, 또는 고향이 없거나 모르는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민족’이라는 관념적 존재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기억의 구조’, ‘감각으로서의 우리’ 등 총 4개의 섹션으로 구성되며 이미지, 사운드 설치, 드로잉, 비디오 등 다양한 형태의 작품을 아우른다. 전시기간에는 할리드 쇼만 컬렉션의 영상 작품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ACC시네마테크 컬렉션으로 구성된 스크리닝 프로그램을 함께 운영한다.
◇ Stage
# 뮤지컬 '레베카'
일정 3월 15일까지 장소 충무아트센터 대극장 연출 로버트 요한슨 출연 엄기준, 신성록, 옥주현 등
‘엘리자벳’, ‘마리 앙투아네트’ 등으로 잘 알려진 뮤지컬계 콤비 미하엘 쿤체(대본·작사)와 실베스터 르베이(작곡)의 대표작. 영국 대표 작가 대프니 듀 모리에의 동명 소설 ‘레베카’와 알프레드 히치콕의 스릴러 영화 ‘레베카’에서 모티브를 얻어 제작됐다. 원작 소설과 영화를 뛰어넘는 감동적인 로맨스, 반전을 거듭하는 서스펜스, 강렬한 음악으로 전 세계 1900만 관객을 마음을 사로잡으며 스테디셀러 뮤지컬로 자리매김했다. 한국 라이선스 공연의 상징이 된 회전하는 발코니 신은 관객이 꼽은 최고의 명장면으로 놓치지 말아야 할 관전 포인트다.
# 마당놀이그 '춘풍이 온다'
일정 1월 26일까지 장소 국립극장 달오름 연출 손진책 출연 김준수, 서정금, 김미진 등
판소리계 소설 ‘이춘풍전’을 바탕으로 한 마당놀이극이다. 34명의 배우와 20명의 연주자가 풍성한 무대를 꾸민다. 기생의 유혹에 넘어가 가산을 탕진한 한량 춘풍을 그의 어머니와 몸종이 혼쭐내고 가정을 되살린다는 이야기를 유쾌하게 그린다. 마당놀이 특유의 세태를 꼬집는 풍자 요소를 곳곳에 배치했다.
# 2020 신년음악회
일정 1월 4일 장소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지휘 정명훈 출연 서울시립교향악단, 클라라 주미 강
세종문화회관과 서울시립교향악단은 경자년을 맞아 새해 첫 주 토요일 신년음악회를 개최한다. 2006년부터 2015년까지, 10년간 서울시립교향악단을 이끈 마에스트로 정명훈이 4년 만에 다시 호흡을 맞추며 의미를 더한다. 실력파 바이올리니스트 클라라 주미 강의 협연으로, ‘브람스 교향곡 제1번’을 비롯해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고 사랑받아온 곡들을 연주할 예정이다.
◇ Movie
# 피아니스트의 전설
개봉 1월 1일 장르 드라마·판타지 감독 주세페 토르나토레 출연 팀 로스, 프루이트 테일러 빈스 등
‘시네마 천국’, ‘베스트 오퍼’에 이은 주세페 토르나토레와 감독과 엔니오 모리코네 음악 감독이 함께한 ‘예술과 사랑’ 3부작 마지막 편이다. 2002년 12월 개봉 이후, 22년 만에 4K 디지털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국내 첫 정식 개봉을 확정했다. 이탈리아 작가 알렉산드로 바리코의 소설 ‘노베첸토’가 원작. 평생 바다 위에서 살며 한 번도 땅을 밟아본 적 없는 천재 피아니스트의 이야기라는 설정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여기에 아름다운 영상과 황홀한 선율이 조화를 이루며 눈과 귀를 사로잡는다.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개봉 1월 16일 장르 드라마 감독 셀린 시아마 출연 아델 하에넬, 노에미 메를랑 등
제72회 칸영화제 경쟁 부문 2관왕에 이어 토론토, 뉴욕 등 세계 유수 영화제에 초청된 작품이다. 원치 않는 결혼을 앞둔 귀족 여인과 그녀의 결혼식 초상화 의뢰를 받은 화가 마리안느의 미묘한 관계를 그린다.
# 몽마르트 파파
개봉 1월 9일 장르 다큐멘터리 감독 민병우 출연 민형식, 이운숙, 민병우
아버지의 인생 2막을 담은 아들의 다큐멘터리. 미술교사로 평생을 산 아버지는 은퇴 후 ‘몽마르트 거리 화가’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프랑스로 떠난다. 파리를 배경으로 아버지의 도전기가 그림처럼 펼쳐진다.
◇ Book
# 55년생 우리 엄마 현자씨 (키만소리 저·책들의정원)
엄마는 해외로 떠난 딸을 그리워하며 자신도 영어공부를 해서 혼자 해외여행을 가겠노라 다짐했다. 그렇게 엄마, 아내, 며느리로서의 의무를 거부한 그녀는 ‘현자 씨’라 불러 달라며 가족들에게 선포한다. 환갑을 훌쩍 넘겼지만 ‘내 나이가 어때서’를 외치며 ‘나다운 나’로 살고 있는 현자 씨의 홀로서기 에피소드를 웹툰과 에세이로 담았다. 자신의 이름 석 자로 인생 2막을 살며 못다 한 꿈을 이뤄가는 당당한 꽃중년의 모습을 그린다.
# 오십, 중용이 필요한 시간 (신정근 저ㆍ21세기북스)
베스트셀러 ‘마흔, 논어를 읽어야 할 시간’에 이은 신정근 교수의 신작. ‘중용’의 원문 중 신중년에게 깊은 영감을 주는 60개의 명문장을 엄선해 인생의 무게 중심을 잡는 법을 일러준다.
# 내가 죽은 뒤에 네가 해야 할 일들 (수지 홉킨스 저ㆍ에프)
자신이 죽은 뒤 남겨질 딸에게 전하는 엄마의 사랑과 조언을 담은 그림 에세이다. 엄마가 떠나고 딸이 홀로 할 일들을 날짜별, 단계별로 보여주고, 행복한 삶을 위한 처방전도 제시한다.
# 굿모닝 미드나이트 (릴리 브룩스돌턴 저ㆍ시공사)
북극에 고립된 78세 천문학자와 지구로 귀환 중인 우주비행사가 생의 마지막 순간 느낀 지난날의 사랑과 회한을 그린 소설. 극한 상황 속 인간의 고독과 복잡한 내면을 아름답게 묘사했다.
# 어반 우즈맨 (맥스 베인브리지 저ㆍ목요일)
우드 카빙으로 숟가락, 주걱, 도마 등 일상에서 쓰이는 물건을 손수 만드는 방법을 소개한다. 목재 구하기부터 도구 사용법, 관리법 등 초보자를 위한 목공 매뉴얼이 자세히 실려 있다.
그는 자유 해방의 흰색 날개를 몸 어딘가에 숨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하늘로 날아올라 들국화 만발한 넓은 들판을 밝은 눈으로 보게 되리라. 매년 가을 러시아의 거장 톨스토이와 차이콥스키, 도스토예프스키를 한 번쯤은 만나봤을지 모를 기러기들을 보러 철원으로 떠난다는 90대 청년. 캠핑 속에서 끊임없이 답을 찾고 우주를 품는 마음으로 평생을 살아온 진정한 캠핑 선구자 박상설(朴相卨·91) 씨를 만났다.
지하철 1호선 양주역에서 내려 또 시내버스를 타고 한참을 가서 내리니 신축 아파트가 들어선 신도시가 눈에 들어왔다. 캠핑과 함께한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듣고자 한다면 직접 집으로 찾아오라고 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 서 있는 박상설 씨가 반갑게 맞이한다. 집 안으로 들어가 보니 남자 혼자 사는 집이 맞나 싶을 정도로 깔끔했다. 서가에는 캠핑과 관련한 각종 서적들과 심리학 책 등이 보였다. 방 안에는 당장이라도 어디론가 훌쩍 떠날 때 입을 등산복들이 걸려 있었고, 강의할 때 사용하는 프로젝터와 각종 캠핑 도구들이 곳곳에 있었다. 집 안 구석구석에는 세월을 가늠케 하는 책처럼 90년 넘게 살아온 이 남자의 이력을 상징하는 것들로 가득했다. 칼럼니스트, 자연과 삶의 전문기자, 기계기술사 등 명함에는 다양한 직업이 적혀 있었다.
사색하는 아버지와 자연 속으로 여행하다
그가 기억하는 최초의 캠핑 장소는 소양강변이라고 했다. 일제강점기,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난 박상설 씨는 법무사였던 아버지 덕에 불편함 없는 유년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가 법원을 드나들다 보니 일본인 판검사들과 친분이 생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국어를 할 줄 몰랐던 그들은 통역이 가능한 아버지를 자주 찾았어요. 그들과 관계를 하면서 일본의 캠핑 문화를 접하게 된 거죠.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여섯 살 무렵에도 아버지와 함께 캠핑을 했을 거예요. 초등학교 운동회 때 쓰는 큰 타프 있잖아요? 해 가리개요. 그걸 강가에 친 뒤 그 아래 평상을 놓고 모기장을 쳤어요. 아버지는 낚시도 하고 책도 읽으시고요. 텐트 치고 여름을 즐기는 집은 당시 우리 집밖에 없었을 거예요. 캠핑은 그렇게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접했습니다. 사람은 어떻게 살아왔느냐에 따라 습관이 생기잖아요.”
인문학을 좋아하고 책 읽기를 좋아하던 아버지 손에 이끌려 간 곳은 책이 즐비한 도서관이 아닌 대자연 속이었다. 그 뒤 시간이 흐르고 대학교를 졸업할 무렵 한국전쟁이 터졌다.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기계공학과 출신인 박상설 씨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육군 공병으로 입대했다.
“미군에서 지원해준 불도저나 글라이더 같은 중장비를 다루는 유일한 공병 중대였습니다. 다른 군인들이 총 들고 싸울 때 저는 대한민국의 길을 닦았어요. 텐트생활을 하면서 계속 이동해 다녔고, 중대장이 된 뒤에는 미군용 CP텐트를 썼는데 꽤 컸어요. 난로와 침대도 있었고요. 다른 사람들은 천막생활을 모를 때였죠. 군대에서 뭐가 제일 좋았냐고 물으면 텐트생활이 가장 좋았다고 말합니다.”
집을 짓고 사는 것은 가짜라고 생각했다. 집은 그에게 있어서 어두컴컴한 박쥐 둥지였다. 박쥐가 사는 곳은 아무리 좋아도 답답한 동굴 속이다.
“박쥐 둥지를 떠나게 해준 것이 텐트였죠. 그리고 책도 있었어요. 셰익스피어, 하이네, 루소의 책을 읽다 보니 캠핑의 의미가 더 선명해졌습니다. 어려서부터 캠핑을 해서 그런지 집에서 사는 게 제일 싫었어요. 특히 기와집이요. 그래서 노마드 보헤미안이 되고 말았죠.(웃음) 풀벌레 소리와 빗소리가 저는 정말 좋습니다.”
인문학과 정서가 스며야 진정한 캠핑이다
캠핑 인구가 100명도 안 됐던 시절,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듯 조금씩 캠핑 문화를 만들어갔다. 한국에 오토캠프의 씨를 뿌린 사람도 박상설 씨였다. 하지만 캠핑이 이뤄지는 행위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의 깨달음에도 집중한다고 했다.
“남이 하니까 부러워서 좇아다니는 것은 캠핑이 아니에요. 텐트 안에 들어가 있으면 우주를 품은 거 같습니다. 예를 들면 그 안에서 전혜린의 책을 읽으면 미쳐버릴 것 같은 감동이 밀려옵니다. 그래서 저는 텐트를 친다고 표현하지 않고 품는다고 말합니다. 정치인의 스캔들이나 세상 떠도는 소문에 관심을 갖는 것은 바보 같은 짓입니다. 우리는 그저 자연과 우주의 섭리에 의해 사는 거죠.”
박상설 씨는 전 세계를 여행하면서 단 한 번도 호텔에서 잔 적이 없다고 했다. 친척집이나 지인의 집에서 자는 일이 생겨도 마당에 텐트를 치고 잔다. 사람들은 집 안으로 들어와 자라고 하지만 고사한다. 그는 건물 속에서 자는 사람이 오히려 불쌍해 보인다고 했다.
“사막에는 꼭 가봐야 해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을 만큼 수많은 별이 쏟아집니다. 알래스카 자작나무 밑에서도 자봐야 해요. 호수가 참 많은데 아침에 일어나서 모닥불 피우고 커피 한잔하고 있으면 사슴이 다가와 5분이고 10분이고 서서 먼 산을 쳐다봅니다. 그 정경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아요? 캠핑 문화는 알프스 사람들의 목가적 생활에서 시작됐습니다. 알파인 문화라고 하죠. 우리나라 사람들의 캠핑은 알파인 문화를 알고 정서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하니까 따라 하면서 장비 자랑하러 다니는 것 같아요. 목가적인 여유를 즐겨야 하는데… 캠핑장도 너무 갑갑해 보입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캠핑장 안 텐트의 간격이 너무 좁아요. 오토캠핑을 제가 소개했지만 이렇게 변형되어 참 안타깝습니다.”
벼랑 끝에서 다시 시작한 캠핑
군 생활 10년 동안 한 가정의 가장이 됐고 아이들이 태어났다. 종전 후 밥벌이를 못하게 된 아버지를 대신해 누나와 여동생까지 공부시키고 시집보내야 했다.
“그때는 정말 버거웠습니다. 군대 월급이
1만5000원밖에 안 될 때였습니다. 제가 벌어먹여야 하는 사람이 저 포함해서 열세 명이나 됐어요. 부업으로 학원 선생을 했어요. 다른 사람들 10만 원 받을 때 저는 50만 원 받는 실력 있는 강사였습니다.”
아무리 벌고 또 벌어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한동안은 죽을 생각에 호주머니에 늘 나일론 끈을 넣고 다녔다.
“그때 장 자크 루소의 ‘에밀’을 읽고 자연에 대해 알게 됐어요. 죽으면 안 되겠구나 하고 끈을 버렸어요.”
1963년 육군 공병 대위로 제대한 후에는 신흥건설종합설계회사에서 근무했다. 당시 부업으로 용산구 보광동 지역 토지를 외상으로 구입해 건설자재 후불 조건으로 15평짜리 집 10채를 지어 큰 수입이 생겼다.
“뭘 할까 고민하다 땅을 사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한 평당
5원 하는 가평의 임야 30만 평을 매입했는데, 캠핑을 본격적으로 하게 된 계기가 됐습니다. 그동안 주말농장 운영과 함께 인문학 강의도 하면서 지냈어요. 서른일곱 살 때부터 했으니 벌써 54년이 됐네요.”
‘캠프나비’라고 이름 지은 그의 농장은 현재 강원도 홍천에 있다. 2000평이나 되는 농장에는 들국화도 피고 각종 채소와 과일들이 자란다. 이곳에서는 다양한 워크숍이 열린다. 인문학 세미나장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잘 지은 건물은 없다. 비닐하우스가 있을 뿐이다. 아이와 어른이 만나 세대를 뛰어넘는 대화를 나누고 잠을 잘 때는 농장 곳곳에 텐트를 친다. 틀에 짜인 도시형 캠핑은 거부한다. 참된 자유를 알고, 본성 찾기를 권하기 때문이다.
길을 걷다가 죽기로 했다
그는 지금도 가끔씩 캠핑을 즐긴다. 생각나면 바로 실행에 옮기고 미루지 않는다. 91세 할아버지가 혼자 산다면 사람들은 그의 자식들에게 손가락질을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세간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는다.
“사람은 어차피 혼자 살아갑니다. 혼자 산 지 33년 됐어요. 이제는 식구하고도 같이 못살죠. 제 자식들과 손주들도 캠핑을 좋아합니다. 대기업 다니는 손주는 결혼 비용을 아껴 주말농장을 샀어요. 우린 이메일로만 연락을 주고받아요. 아흔 살, 백 살이 되면 이렇게 살아야지요. 왜 내가 아들네 집, 딸네 집에 가서 살아야 하나요.”
박상설 씨는 이미 죽음의 문턱을 한 번 넘어갔다 왔다. 환갑 무렵 뇌졸중으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됐다. 그의 건강을 다시 찾아준 것은 의술이 아닌 캠핑이었다. 가족한테도 알리지 않고 아메리카 대륙을 횡단했다. 그러자 움직이지 않던 몸이 서서히 좋아지면서 펴졌다. 자신감이 되살아났고, 길 위에서 삶의 방향을 잡고 살아왔다.
“나이가 아흔하나면 세상 떠나는 날이 내일이 될 수도 있고 모레가 될 수도 있어요. 언젠가는 죽죠. 지금 내가 이렇게 떠들지만 오래 살아봐야 백 살이겠죠. 9년밖에 안 남았습니다.”
그는 82세에 집을 나간 뒤 길을 걷다가 빈촌의 기차역장 집에서 폐렴으로 열흘 만에 생을 마감한 러시아 문학의 거장 톨스토이의 이야기를 해줬다.
“얼마나 멋진 죽음이야. 물론 톨스토이를 흉내 내려는 건 아니에요. 아들딸들도 내가 걷다가 죽기를 원할 거야. 충분히 잘 알기 때문에. 나는 여행할 때마다 시신기증등록증과 약간의 돈을 목에 걸고 다닙니다. 죽으면 제 몸은 대학병원 해부학 교실로 들어가요. 그럼 영안실이 필요 없겠죠.”
주변에 자신이 죽었다는 것도 알리지 말고, 조의금도 받지 말고, 제사상도 차리지 말라고 했다. 어느 날 딸이 “아빠가 보고 싶으면 어떻게 해?”하고 물었단다.
“제가 가을에 핀 들국화를 제일 좋아하거든요. 길을 걷다가 야생 국화를 보면 ‘아버지가 참 좋아하셨는데…’ 그렇게 스쳐가듯 가끔씩 생각해주면 된다고 했습니다. 캠핑은 인생에서 우러나와야만 제대로 발현되는 정서 운동입니다. 일평생 하고도 화장터에 갈 때까지 해야 하는 것, 그것이 캠핑입니다.”
언제 가을이 왔을까? 계절이 소리 소문 없이 변하며 찾아왔다.
세월과 함께 서서히 잊혀가던 추억을 찾아 월출산으로 떠났다. 넓디넓은 평야에 불쑥 솟아오른 해발 809m 화강암의 국립공원이 아니라 어느 천국 같은 가을날의 기억으로 남아있는 곳이다. 경포대 탐방지원 센터에서 시작하는 탐방로를 따라 산을 올랐다.
숲속 산길을 걷기 시작하니 달아나는 시간이나 그 시간을 제어하지 못한다는 막연한 불안감은 사라졌다. 진정한 여행자는 풀잎을 보고도 우주를 상상할 수 있다고 한다. 사물 그 너머의 것을 보는 눈을 가진 여행자는 모래알 하나로도 무한한 행복을 느낀다고 했다. 오르는 산길 곳곳에서 나는 작은 우주들을 보았다. 행복했다. 하지만 추억 속 가을의 길은 만나지를 못했다. 산행 내내 가을을 찾았으나 가을을 보지 못했다. 천황봉 구름 덮인 곳까지 눈길로 찾아보았다.
‘너무 이른 가을인가?’
바람재 삼거리에 도착하니 그곳에 가을의 내음이 있었다. 추억 속 가을의 단편 하나가 튀어나왔다. 삼거리의 무성한 갈대는 바람보다 먼저 누워있었다. 은빛 갈대밭은 잘 익은 성숙한 생명의 벌판이다. 누워있는 갈대는 머리가 무거워 숙인 것이 아니다. 지나온 시간의 길이가 고개를 숙이게 한 것이다.
삼거리에서 왼편으로 돌아 구정봉에 올랐다. 누렇게 변해가는 나주평야와 굽이져 흐르는 영산강 줄기가 한눈에 보였다. 뜨거운 가을 햇살이 벼 이삭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남도 가락의 노랫소리가 실려 왔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아, 이 욕심을 어찌할까!’
구정봉에서 500여m 떨어진 곳에 한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마애석불이 있다. 벼랑 아래 큰 바위에 총 길이 8.6m 크기로 새겨진 마애여래좌상이다. 벽면에 새겨진 불상은 눈이 옆으로 길고 끝이 올라가 있어 미소를 짓는 것 같기도 하고, 안 짓는 것 같기도 하다. 벼랑길을 힘들게 내려와 불상과 마주친 순간 그렇게 찾던 가을도, 추억의 가을도 모두 내려놓게 되었다. 알 듯 모를 듯한 불상의 얼굴 표정이 번뇌를 멈추게 했다.
가을날 오후의 햇살이 석불의 얼굴을 비추었다. 그 가을 햇살을 쫓아 석불이 바라보고 있는 쪽을 보니 삼층석탑이 우두커니 서서 하염없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삼층석탑의 투박하고 단순한 선이 온 감각을 깨웠다. 그렇게 찾았던 가을이 그곳에 있었다.
이번 떠남의 목적은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었다. 나와 만나고 싶었다. 이른 가을의 월출산에서 나는 나와 세계를 대면할 수 있었다. 그렇게 그곳에서 나와 세계를 함께 깨달을 수 있었다.
강진으로의 가을여행은 울림이 있는 여행이 되었다. 또 하나의 기억이 쌓였다. 무엇보다 내 삶이 풍요로워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무슨 일을 하건, 그 분야의 최고가 돼라! 자주 듣는 얘기다. ‘최고’에겐 갈채가 쏟아진다. 다들 ‘최고’가 되기 위해 질주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영혼을 파는 결탁마저 불사한다. 삶의 눈먼 과속은 대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욕망이라는 총구에서 발사된 열정의 탄환. 이 위험한 물질은 과녁을 맞히고도 좌절한다. ‘최고’가 되고서도 감옥에 끌려가는 사람조차 있지 않던가. 그런데 말이다. 자전거 세계여행가 차백성은 권장한다. “꿈을 좇아 최고가 돼라!”고. 그가 말하는 최고란 뭘까. 자전거 여행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어떤 것일까.
자전거로 세계 여행에 나서는 사람이 많다. 점점 늘고 있다. 주로 청년층이 즐긴다. 차백성도 청년이다. 그의 나이는 68세. 나이가 무슨 상관이랴. 애늙은이도 있지 않던가. 가슴에 시퍼런 청년이 살아 있으면 청년이다. 정열과 패기로, 차백성은 청년 열차에 올라탔다. 그는 프로다. ‘전업 자전거 세계여행가’로 통한다. 직업적으로 자전거 세계여행을 하는 사람은 아마도 그가 유일할 거다. 그의 여행엔 협찬이 붙는단다. 여행서 집필과 강의도 어언 직업화됐다.
자전거로 지구를 누비는 사람이라 근육질의 터프가이를 예상했다. 그러나 마주앉고 보니 아니다. 그저 평범한 외양이다. 맑은 표정으로 보자면 학자풍이다. 여기저기 관절이 결릴 시절이지만 몸짓이 곧고 민첩하다. 육체에도 정신에도 강골이 들어 있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인생의 황혼에 무슨 수로 청년의 새아침을 열었겠나. 그는 바야흐로 진정한 전성기를 맞이했다.
“요즘 최상의 행복을 느끼며 산다. 골든 에이지! 바로 지금이 그렇다. 나에겐 하루도 거르지 않는 세 가지 일과가 있다. 운동, 독서, 글쓰기가 그렇다. 이 셋은 새로운 여행에 나서기 위한 준비 작업이자 일상을 맘껏 즐기는 방식이다.”
나이 들며 사람들은 흔히 습관에 안주한다. 나이 타령이나 하며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낭비한다. 당신처럼 자전거로 세계여행을 즐긴다는 건 상상으로나 가능할 뿐이다.
“늙었다고 자조할수록 퇴보한다. 늙음 안에는 경륜이나 지혜 등 좋은 가치들이 들어 있지 않던가. 역사를 보더라도 60세 이후에 위업을 남긴 사람이 많지 않던가. 나는 늙음이라는 걸 경쟁력으로 생각하며 산다. 이 나이에도 자전거 여행을 계속하는 건, 그 경쟁력의 가치를 믿기 때문이다.”
자동차 여행은 어떤가? 굳이 자전거만을 수단으로 고수하는 이유는?”
“어릴 적에 ‘김찬삼의 세계여행’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특히나 그의 자전거 여행에 동경심을 품었다. 그때 꿈이 생긴 것이지. 나, 어른이 되면 자전거로 세계를 여행할래! 그랬던 소년기의 꿈을 뒤늦게 이룬 셈이다. 김찬삼 선생이야말로 내 인생의 위대한 멘토다.”
김찬삼(1926~2003)은 ‘여행의 신’으로 불렸다. 비(非)문명, 오지, 가난한 사람들을 만난다는 여행 원칙을 끝까지 관철한 인물이다.
“대학 교수였던 아버지의 이른 작고도 어린 나에게 특별한 영향을 미쳤다. 염세주의라는 게 생기기 시작했으니까. 선친은 우주처럼 큰 존재였다.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며 어린 내게 인생은 유한하다는 걸 일찍부터 경험하게 했다. 덕분에 좀 조숙하지 않았을까. 이미 발아한 여행에의 꿈이 아버지를 잃은 뒤로 한층 영글었던 것이다. 내게 꿈이라는 게 없었다면 평생을 방황으로 허비하고 말았겠지.”
날마다 100km씩 달렸다
삶이 부끄러운 건, 꿈을 잃었을 때다. 꿈의 관리에 능란하지 못한 채, 꿈을 배반하고 엉뚱한 행로를 헤맸다는 자각이 찾아들 때다. 차백성에게도 그 자각의 순간이 찾아왔더란다. 2000년, 그의 나이 49세 때였다. 참을 수 없는 삶의 진부함에 소스라쳤던 것 같다. 살아온 날들 전체에 회의를 느꼈다는 게 아닌가. 어라, 나 지금 뭐하는 짓이지? 나여! 이건 나의 삶이 아니지 않은가? 그렇게 자가 심문을 했던 모양이다. 대우건설 임원이었던 그는 마침내 사표를 던졌다. 그리고 수면 아래에 매장된 꿈을 두레박으로 길어 올렸다. 그렇게 자전거 세계여행의 시동이 걸렸다. 첫 여행은 미국 서부 해안 종주. 3000km에 달하는 대장정이었다.
“시애틀에서부터 샌디에이고까지, 태평양을 끼고 이어지는 ‘하이웨이 원’을 달렸다. 하루 평균 100km씩, 한 달에 걸쳐 완주했다. 무사히 여정을 마치고는 감개무량했지. 나도 드디어 자전거 여행가 대열에 올라섰다는 만족감이 컸다. 오래된 꿈을 비로소 이루기 시작했다는 쾌감은 더 컸다.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
체력을 다져 떠났겠지? 하루 100km를 날마다 달렸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지경이다.
“물론 준비기간이 있었다. 미국 종주를 하기 이전에도 자전거를 자주 탔다. 나는 매번 엄청난 준비를 하고 떠난다. ‘고생한 그대여, 다 놓고 훌쩍 떠나라!’ 그런 식의 구호를 불신한다. 준비가 충실하지 않은 여행엔 폐단이 많아서다.”
숙식은 어떻게 해결했나?
“불가피한 경우엔 모텔에 투숙했지만, 거의 캠핑을 했다. 자전거엔 7개쯤의 가방을 매단다. 텐트와 취사도구까지 챙기다 보면 꽤 무거워진다. 30kg 이상 된다. 나의 모든 해외여행이 그런 식이다.”
하룻밤만으로도 온몸이 쑤시는 게 캠핑일 수 있다. 말 못할 불편이 많았겠다. 캠핑을 기본으로 하는 이유는?
“두 가지 이점 때문이다. 하나는 캠핑장을 통해 세계 각국의 여행자들과 한결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점. 또 하나는 경비 세이브! 불편? 별안간 설사 날 때가 가장 난감하다. 화장실을 찾기 어렵더라고.”
칼을 두 자루나 들고 덤비는 강도도 만나게 되는 게 자유여행이다. 사고는 겪지 않았나?
“내겐 완벽주의 성향이 있다. 미리 면밀히 예방하는 것이지. 유럽 여행의 경우엔 집시들을 특히 조심한다. 순식간에 자전거를 훔쳐가기 때문에 자전거를 항상 몸에 붙이고 다닌다. 캠핑할 때도 자전거를 분해해 텐트 안에서 끌어안고 잔다. 미국에선 송아지만 한 개가 공격을 해서 죽는 줄 알았다. 용케 모면했다. 미국 개들이 다들 훈련됐다는 게 퍼뜩 생각나 외쳤다. 싯 다운!(sit down) 그러자 대번에 주저앉던걸. 하하핫. 여행엔 기지가 필요하다.”
가벼운 사고는 여행의 풍미를 더해준다. 일테면, 길을 잃을 경우, 더 흥미진진해질 수 있는 게 아닌가. 길이란 결국 어디로든 이어지니까. 그러나 차백성에게 길을 잃는 식의 얼간이 짓은 용납되지 않는다. 사고율 제로! 노련한 여행자의 기록이 혁혁하다.
자전거는 인류가 발명한 가장 근사한 물건에 속한다. 자동차가 지구덩이를 까맣게 뒤덮은 이 시대까지 사멸하지 않은 그 생명력이라니. 이른바 적정기술의 산물이다. 이 주목할 만한 철 구조물에 인간의 숨결과 피를 부여하는 게 차백성이다. 페달을 밟는 그의 거친 숨결에 자전거도 격동하겠지. 그의 몸통에 흐르는 피가 핸들을 거쳐 바퀴까지 설레어 번질 테지. 사물과 인간의 동체대비, 그 사랑과 안심이 여행을 지속하게 할 것이다.
꿈 없는 욕망의 질주는 방황에 불과
그런데, 고독하지 않을까? 그는 늘 혼자 떠나고 혼자 돌아온다. 하루 종일 말 한마디 없이 페달만 밟는 날도 많다는 게 아닌가.
‘나 홀로 여행’을 수칙으로 삼은 사람에게선 독특한 취향 이상의 자기폐칩이랄까, 뭔가 집요한 나르시시즘이 느껴진다. 외바퀴 자전거처럼 고독하지 않을까? 고행을 자행하나?
“고독. 사실 그게 가장 힘겹다. 그러나 우리네 인생 자체가 고독과의 동행이지 아니한가? 당신 역시 곁에 와이프가 있더라도 외로울 게 아닌가? 고독이란 사귈 만한 벗일 뿐, 나쁜 게 아니다. 자전거 여행은 고독과 동행한다는 점에서 인생과 편차 없이 닮은 것 같다. 인생의 축소판이자, 인생을 관조하게 하는 전망대, 그게 자전거 세계여행이지. 그러고 보면 이건 구도 내지는 탐구여행이겠네.”
차백성은 책벌레에 가깝다. 여행 중에도 자주 책을 읽는다지. 그게 고독을 녹여 친구로 만드는 한 가지 방법인 모양이다. 여권처럼 항상 들고 다니는 책도 있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니코스 카잔차키스 애호가이기도 하다. 일부러 지중해 크레타 섬을 찾아 카잔차키스의 묘를 참배하기도 했다. “나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이는 카잔차키스의 비명(碑銘)으로, 차백성의 가슴에도 화인(火印)처럼 새겨진 것 같다.
자전거는 느리다. 느려서 더 잘 보이고, 더 많이 보인다. 모든 지나갈 수밖에 없는 세상 풍경이 잽싼 발길을 멈추고 천천히 흘러간다. 풍경은 물론 삶의 풍속까지.
세계 각국을 섭렵하는 중에 본 최고의 비경은 어디였나?
“뉴질랜드 남섬 밀포드 사운드의 피오르드였다. 만년설 빙하가 흘러내려 형성된 협곡이다. 숨이 멎는 듯한 경이를 느꼈다. 그런데 비경보다 감동적인 건 사람이다. 내가 자전거를 타고 세계를 돌아다니는 것도, 사람의 비경을 만나기 위해서다.”
미움이 쌓이는 게 인간사이지만, 늘 그리운 건 사람이다. 봄날의 여행처럼 따뜻한 존재. 누구나 그런 사람을 기다린다.
“잊을 수 없는 일화가 있다. 한번은 인가 없는 오지의 어둠 속에서 곤경에 처했다가 어떤 남자의 도움을 받았다. 그는 진정 비범한 인간애로 나를 도왔다. 눈물겨워 감사의 뜻을 전할 수밖에. 그러자 그가 하는 말이 의표를 찔렀다. ‘나에게 고마워할 것 없다. 다음에 너도 남을 도우면 되지 않니?’ 그 한마디는, 이후 내 삶의 푯대가 되었지.”
부인에게 헌신적일 거 같다. 그런데 어쩌자고 20년째 ‘홀로 여행’만 하지?
“아내에겐 동의를 미리 구했다. 각자가 추구하는 삶 존중하기. 이는 현명한 부부애이지 않을까? 나는 오랫동안 꿈을 잃은 채 직장생활을 열심히 했으나 그건 일종의 방황이었다. 비관적으로 산 세월이었지. 쉰 살에 이르러서야 잠에서 깨어나 유예했던 꿈을 실현했다. 그러자 긍정적인 인간으로 변하더군.”
별 꿈 없는 보편적 인생도 얼마든지 어엿할 수 있다. 꿈으로 말하자면, 인생 자체가 한바탕의 꿈이지 않을까?
“꿈이 없는 건 강아지나 시체일 뿐이다. 모든 살아 있는 사람에겐 다 꿈이 있다. 잊었거나, 아직 발견하지 못했을 따름이겠지. 꿈을 찾아야 한다. 무슨 일이건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가장 하고 싶은 일을 꿈으로 삼아 도전하라는 얘기다. 도전했다면 최고가 되어야겠지. 그게 가장 좋은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꿈 없는 욕망의 질주는 방황에 불과하다는 얘기이겠지. 꿈이라는 산소통이 빠져나간 삶은 자아를 질식시킨다는 얘기일 테고.
“자전거 여행의 꿈을 이루자 삶의 시공간이 확장되었다. 한결 농밀한 삶이 가능해졌지. 그게 왜냐면, 가령 한자리에서 90년을 산 사람의 삶과 90년을 여행하며 산 사람의 그것은, 질적으로 너무도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세상은, 비단 여행만이 아니라 뭐든 꿈을 좇아가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다.”
차백성은 자전거 세계여행만을 꿈으로 삼진 않았다.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도 뿌리 깊은 것이었단다. 굴레를 벗어나고픈 그의 유목적 개성이 문예 욕망으로 번진 것 같다. 그리고 마침내 세 권의 여행기를 낸 작가로 변신했다. ‘아메리카 로드’, ‘재팬 로드’, ‘유럽 로드’. 셋 모두 인문학적 내공과 글맛으로 버무려진 가작이다. 이제 그는 글을 쓰지 않고서는 좀이 쑤셔 못 견딘다. 그보다 더 그를 달구는 건 물론 여행 충동이지만.
춤을 보다가 음악을 듣다가 이윽고 눈을 감는다. 감은 눈앞에 펼쳐지는 건 에메랄드빛 바다, 미소 담긴 맑은 얼굴, 하늘하늘 치마 끝자락, 사랑과 고귀함을 담은 손끝. 훌라댄스의 매력은 시공간을 뛰어넘어 동경의 세계로 빠져들기 쉽다는 점이다. 하늘과 땅, 대자연의 기운을 온몸으로 전하는 이들을 만나봤다.
고층빌딩이 길게 늘어선 강남의 대로변을 지나 한적한 골목에 다다르니 하와이예술문화협회의 코랄빛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우쿨렐레와 파도소리가 시원하게 들릴 것만 같은 분위기다. 훌라댄스는 잘 알려진 대로 미국 하와이 섬의 전통춤으로 그곳 원주민인 폴리네시아인들에 의해 계승되어오고 있다. 춤의 모든 동작이 수화로 이루어져 있는데 자연의 아름다움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와이 전통음악인 멜레 선율에 맞춰 춘다. 하와이의 해변 곳곳에서 이 춤을 추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어서인지 여행을 마치고 훌라 춤을 배우러 오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 김주영 하와이예술문화협회장은 말한다.
“시니어 여성분들 중에 하와이 여행에서 훌라춤을 보고 난 뒤 잊지 못해 오셨던 분들이 꽤 계셨어요. 그곳에서 진짜 하와이 훌라댄스를 보고 용기를 내시더라고요. 춤을 추면서 우아한 미소를 지을 수 있고 말이죠. 나이가 들어도 여자는 여자잖아요.”
2011년에 정식 창단한 하와이예술문화협회는 서울과 부산을 비롯해 광주, 대구, 대전 등에서 훌라 교실을 열고 있다. 등록 인원은 100명 정도. 30대에서 40대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고, 50대에서 70대까지도 훌라댄스로 세대가 공감하며 어울린다. 훌라춤의 가장 큰 장점은 추는 동안 행복에 빠진다는 것. 노래가사에는 자연과 사랑이 가득할 뿐만 아니라 이별을 노래할 때도 쓰라린 마음의 상처 대신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하라는 아름다운 메시지를 담는다고 한다.
“훌라춤을 추는 시간만큼은 스트레스를 잊는 겁니다. 노래에 따라서 내 몸에 긍정 에너지가 생겨나요. 그리고 하와이는 보이는 모든 것들이 대부분 야생의 꽃과 식물이잖아요. 그것을 다 수화로 표현한다고 생각을 해보세요.”
하와이 원주민 언어로 된 노랫말과 손동작을 외워야 율동이 가능하기 때문에 약간의 두뇌 회전이 필요하다. 그래서 치매 예방에도 좋다고들 한다고. 훌라춤은 하체 근육은 물론 몸 전체 근력을 향상시켜주어 시니어에게 특히 권할 만하다. 골반을 흔드는 동작이 많아 자궁 건강에도 좋단다.
“훌라춤을 출 때 발레 슈즈를 신는 분이 계신데 잘못된 거예요. 발을 구속하면 안 됩니다. 맨발로 땅을 밟으면서 에너지를 받고 손을 펴서 우주의 에너지를 받아 전파하는 거죠. 자연과의 교합을 추구하는 춤이 훌라댄스예요.”
엄마와 딸이 정답게 훌라 선율을 따라가다
하와이예술문화협회에서 훌라댄스를 처음 춰봤다는 유병란(61), 이보라(29) 모녀를 만났다. 김주영 협회장의 구령에 맞춰 춤을 익히고 있었는데 처음치고는 둘 다 곧잘 따라해 초보 훌라 댄서(?)인지 모를 정도였다. 훌라춤을 배우러 온 계기에 대해 이보라 씨에게 물으니 배우는 것이면 무엇이든 좋아하는 어머니 유병란 씨 때문이었다고.
“봉사하러 갔다가 훌라댄스 공연을 봤어요. 연배가 있는 분들이 무대에 서셨는데 너무 아름다운 거예요. 그래서 거기서 막 흉내도 냈어요. 집에 와서 우리 애한테 얘기해주고는 혹시 춤을 배울 수 있는 곳이 있는지 알아보자고 해서 오게 됐습니다. 처음이니까 어색하기도 한데 아주 재미있네요.”
웃음이 절로 나는 바다의 춤
이날 청일점이었던 손정식(52) 씨는 주말을 맞아 서울로 올라온 부산 사나이였다. 구릿빛 피부가 훌라춤과 너무 잘 어울렸다. 하와이에서 왔다고 해도 믿을 정도. 그는 하와이예술문화협회에서 이사직을 맡아 다양한 활동을 돕는 한편 8월 말에 있을 해운대 하와이안 페스티벌을 준비하고 있다. 해운대구 재송2동장이기도 한 손정식 씨는 하와이안 페스티벌 규모를 늘려 해운대를 대표하는 페스티벌로 정착시키기 위한 노력들을 해왔다.
“6년 전 하와이안 페스티벌을 준비하는 담당자인 제가 훌라춤을 모르면 안 될 것 같아서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추기 시작했는데 너무 마음이 좋더라고요. 하와이 전통음악을 멜레라고 하는데 훌라춤을 배우고 나서부터는 멜레만 들어요. 다른 노래는 안 듣게 되더라고요. 춤출 때만큼은 항상 웃게 됩니다. 정서에 제일 좋습니다.”
한국 무용수, 훌라걸스 선언하다
홍예담(54) 씨는 11년간 경남 창원에 살면서 한국무용을 가르쳐왔다. 그리고 3년 전 남편이 직장을 서울로 옮겨 이사온 후 고민에 빠졌다.
“이곳에 와서 ‘한국무용으로 내가 자리를 지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이가 있으니까 그냥 ‘운동을 좀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처음 훌라춤을 접했습니다. 그때가 서울 온 지 만 2년 정도 됐을 무렵이에요. 하다 보니 주변 사람들에게 보급하기에 딱 적합했던 것 같아요. 남녀노소 누구나 따라 출 수 있는 춤이었어요. 처음부터 정말 버릇없게 선생님께 말했어요. 나는 ‘가르칠 목적으로 배운다’고요. 작년 11월에 들어와 2개월 배우고 1월부터 지도자 과정을 밟게 됐습니다.”
창원에 있을 때만 해도 모셔가기 바쁜 무용 선생님이었다. 지금까지 몰랐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고 찾아서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오랜 시간 가르친 경험이 있잖아요. 배우는 것도 좋지만 지도를 하면 더 많이 늘어요. 안 보였던 것들이 세밀하게 눈에 들어옵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까 제가 오히려 배우고 있더라고요.”
사실 올해는 하와이예술문화협회가 잊지 못할 한 해로 기억할 것이다. 훌라춤의 올림픽이라고 할 수 있는 ‘2019 메리 모나크 축제’ 전야제에서 대한민국을 대표해서 공연을 하고 돌아왔다. 뿐만 아니다. 훌라 팀과 함께 우리의 전통예술 공연을 하와이 관중 앞에서 선을 보여 환호와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제는 한국에 사는 이들에게 훌라춤이 주는 힐링의 세계를 선사할 시간이라고 했다. 올여름 사랑을 노래하고 순박한 미소가 담긴 훌라댄스의 리듬에 꼭 한 번 빠져보기를 권한다.
‘남원’ 하면 춘향, ‘춘향’ 하면 광한루원만 생각났다. 남원에는 진정 광한루원 말곤 갈 데가 없을까 궁리하던 때에 마침 김병종미술관이 개관했다. 미술관이 좋아 남원에 들락거렸더니 식상했던 광한루원이 예뻐 보이기 시작했다. 오래된 동네 빵집과 걷기 좋은 덕음산 솔바람길도 발견했다. 이 산책로가 미술관과 연결되는 것을 알고 얼마나 기뻤던지. 남원을 여행하며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는 나태주 시인의 ‘풀꽃’ 시가 종종 생각났다.
걷기 코스
남원역(남원시외버스터미널)▶차량 이동▶광한루원 북문▶남문▶요천 섶다리▶덕음산 솔바람길 입구▶전망대 레스토랑▶남원국립국악원▶그네매점(또는 약수터매점) 뒤 덕음산 솔바람길 입구▶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남원항공우주천문대▶춘향테마파크(또는 덕음산 오감만족숲)
상상 속 달나라를 구현한 광한루원
광한루원에는 남문(정문)과 서문, 북문이 있다. 오늘 걷는 코스는 북문으로 입장해 남문으로 나가는 것이 동선상 편하다. 북문 앞에는 고품격 한옥 호텔인 남원예촌과 규모 있는 한정식 전문점들이 자리했다. 이 일대는 남원 제일의 관광단지라서 거리가 깔끔하고 작은 쉼터도 조성돼 있다.
주중 낮 동안 일반인 관람이 허용되는 남원예촌을 잠시 둘러본 뒤 광한루원 북문으로 입장한다. 광한루원의 중심 건물인 광한루(보물 제281호)와 춘향사당이 코앞이다. 조선 중기 사람들은 달나라에 옥황상제와 선녀가 산다고 생각했다. 이 상상을 지상에 구현한 것이 광한루원이다. 광한루는 옥황상제가 머무는 달나라 궁전이며, 광한루 앞 연못은 은하수를 상징한다.
연못에 섬처럼 떠 있는 세 개의 섬은 지상낙원, 즉 영주산(한라산), 봉래산(금강산), 방장산(지리산)을 뜻한다. 중국 ‘사기’에 등장하는 전설 속 세 산(봉래산, 방장산, 영주산)을 본떠 일컬은 것이다. 나무다리로 연결된 세 섬을 차례로 들러본다. 팽나무가 우거진 영주산 영주각에 올랐다가 봉래산의 대숲을 지나고, 방장산 숲에 숨은 작은 방장정에선 잠시 쉬어간다.
방장정 옆으로 연못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돌다리 오작교가 보인다. 견우와 직녀가 은하수를 건널 때 걸었던 오작교를 본떠 만들었다. 다리 길이가 57m에 달하는 국내 최장 연지교다. 조선 후기 소설 ‘춘향전’에서 성춘향과 이몽룡이 처음 만났던 장소로 등장하기도 한다. 오작교를 건너며 연못을 굽어보니 잉어 떼와 천연기념물인 원앙 수십 마리가 떼 지어 노닌다. 광한루원은 원앙과 잉어에게도 지상낙원인 듯하다. 연못가 버드나무와 짝꿍처럼 잘 어울리는 수중 누각 완월정에 올랐다가 남문으로 나선다.
솔숲이 우거진 덕음산 솔바람길
광한루원 남문으로 나오면 바로 요천변이다. 요천 제방에 올라 벚나무 가로수길을 걷는다. 가로수가 우거져 그늘이 짙다. 덕음산 솔바람길로 가려면 승월교나 섶다리를 이용해 요천을 건너야 한다. 흔한 시멘트다리 대신 섶다리를 선택해 건넌다. 이 섶다리는 옛날부터 요천에 섶다리 두 개가 있었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근래에 만든 쌍섶다리다. 섶다리를 건너면 춘향테마파크와 식당, 놀이공원, 국립국악원 등이 있는 춘향촌 입구가 보인다. 춘향촌 입구 왼쪽에 ‘덕음산 솔바람길’ 입구가 있다. 나무계단을 조금 오르면 솔숲길이 이어진다. 잔잔한 오르막길을 10분 정도 걸었을까. 숲길이 전망대레스토랑 앞 전망대로 인도한다. 이곳에 서서 남원 시내를 굽어본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분지 같고, 도심 가운데로 요천이 흐른다. 남원의 젖줄 요천은 섬진강으로 흘러 들어가 남해까지 간다.
탁 트인 남원 풍광을 감상하고, 포장도로를 따라 국립민속국악원 방면으로 내려간다. 국립민속국악원은 판소리의 성지인 남원의 국악 수준을 잘 보여주는 공연장이다. 주말마다 국내 최고 수준의 전통 공연을 선보인다. 주말에 이 길을 걷는다면, 공연시간을 미리 알아두는 게 좋다. 국립민속국악원 뒤쪽으로 이동해 덕음산 솔바람길의 또 다른 입구를 찾는다. 나무계단을 오르자 김병종미술관까지 이어지는 데크 산책로로 연결된다. 길 곳곳에 전시돼 있는 시, 그림, 캘리그래피 작품을 감상하고, 솔숲 향기를 맡으며 느리게 걷는다. 데크에서 내려오면 바로 김병종미술관이 보인다. 국립민속국악원에서 미술관까지는 15분 정도 걸린다.
남원의 뜨는 명소 김병종미술관과 화첩기행 북카페
2018년 3월 개관한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은 남원 출신 한국화의 거장 김병종이 자신의 작품을 남원시에 기증하면서 건립이 기획됐다. 덕음산 기슭에 위치해 있어 실내에서 창밖을 내다보면 눈길 닿는 곳마다 푸른 숲이다. 김병종 화가의 작품은 1층 상설전시실에 전시돼 있다. 김병종 화가의 초기작이자 그의 이름을 미술계에 알린 ‘바보예수’ 시리즈를 볼 수 있다. 그의 작품은 이해하기 쉽고, 동심이 느껴져 절로 미소 지어진다. 김병종 화가는 여행 에세이 ‘화첩기행’을 저술해 문학가로서도 뛰어난 면모를 보여줬다.
상설전시장 옆에는 화첩기행 북카페 ‘미안’도 자리해 있다. 남원에서 나고 자란 청년 카페지기가 ‘미술관 안에 있는 카페’라는 뜻을 담아 ‘미안’이라 이름 지었다며 환하게 웃는다. 카페 한쪽 벽면에는 김병종 화가의 작품과 그가 기증한 미술, 인문학, 문학 관련 도서 등 약 2000여 권이 진열돼 있다. 나머지 벽면은 통창을 설치해 물이 가득한 정원이 손에 닿을 듯 가깝게 보인다. 오랜만에 맘에 쏙 드는 미술관과 카페를 만나 걷는 즐거움이 커진다. 볕 잘 드는 창가에 앉아 맛있는 커피와 빵을 먹으며 지친 다리를 쉬어간다.
춘향테마파크 걸을까, 오감만족숲을 걸을까
미술관에서 걷기를 마치고 광한루 쪽으로 내려가도 되고, 더 걷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항공우주천문대를 거쳐 춘향테마파크 또는 덕음산 오감만족숲으로 내려가도 좋다. 어느 쪽으로 가더라도 광한루원이 멀지 않다.
항공우주천문대는 미술관 뒤쪽으로 난 길 끝에 있다. 미술관에서 약 300m 거리다. 오르막을 살짝 오르면 돔 형태의 지붕을 얹은 천문대를 만난다. 여러 대의 천체망원경을 통해 낮에는 태양의 흑점을, 밤에는 달과 별자리를 관측할 수 있다. 기상이 좋지 않으면 관측을 할 수 없으니 날씨를 봐가며 입장해야 한다.
천문대 뒤쪽, 솔바람길 이정표를 따라 계단을 내려가면 춘향테마파크 뒷문이 나온다. 이 문은 춘향테마파크의 가장 위쪽 구역에 있으니 아래로 내려가면서 관람하면 된다. 춘향테마파크는 춘향을 주제로 한 문화예술공원이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춘향뎐’의 촬영세트장이 남아 있다. 뒷문 근처에는 월매집, 춘향과 이몽룡이 첫날밤을 보냈던 월매집 부용정, 춘향이 변 사또에게 고초를 당했던 관아 등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춘향테마파크에 입장하지 않고, 뒷문 앞에서 이정표를 따라 오감만족숲/광한루 방면 숲길로 5분 정도 내려가면 오감만족숲 정상에 닿을 수 있다. 오감만족숲은 2017년에 덕음산 기슭에 조성한 공원으로 걷기 좋도록 지그재그형 산책로를 만들어놓았다. 산책로를 따라 내려가면 승월교로 바로 연결된다.
주변 명소 & 맛집
전통시장의 정취가 물씬 남원공설시장
광한루 서문 앞에 있는 상설시장이다. 오일장날에는 아침부터 붐빈다. 남원에는 산과 강이 있어 농수산물이 풍부하다. 특산물을 구경하며 다니는 재미가 쏠쏠하다. 특히 남원산 미꾸라지가 흔하다. 시골 시장에서도 보기 드문, 오래된 뻥튀기 가게도 있다. 온갖 곡식은 물론 무까지 튀겨준다. 남원 사람들이 이 시장에서 즐겨 사 먹는 또 다른 인기 메뉴는 닭발 튀김. 뼈를 발라낸 닭발에 튀김옷을 입혀 바삭하게 튀겨낸다. 맥주 안주로 제격이다. 남원시 의총로 51, 4와 9로 끝나는 날이 오일장.
맛의 고장 남원 맛집
남원에서는 남원산 미꾸라지와 된장을 넣고 푹 끓인 추어탕이 유명하다. 광한루원 서문 쪽 요천변에 추어탕 거리가 형성돼 있다. ‘새집’, ‘현식당’, ‘부산집’이 입소문 났다. 광한루원 북문 앞에 있는 남원 한정식 전문점 ‘종가’도 추천할 만하다. 보리굴비 정식을 주문하면 홍어찜, 육회, 전복구이 등 맛깔난 전라도 음식을 다양하게 맛볼 수 있다. 돌솥비빔밥 전문점인 ‘반야식당’도 광한루 인근에서 오래 장사한 소문난 집이다. 최근 뜨고 있는 ‘집밥, 담다’는 ‘따뜻한 가정식 한 끼’를 표방하는 젊은 감각의 음식점이다. 정갈한 식단으로 호평받고 있다. 예약은 필수.
남원 사람은 다 안다는 명문제과
남원에서 오래 장사한 동네 빵집이다. 가게는 작고 허름하다. 다른 빵집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인 빵을 개발해 인기를 얻었다. 남원에서는 이미 유명한 곳인데 ‘백종원의 3대천왕’에 출연한 뒤로 손님이 더 많아졌다고 한다. 평일에도 줄을 서며, 오후 늦게 가면 인기 빵은 동나 살 수 없다. 3대 인기 빵은 생크림소보로, 꿀아몬드, 수제햄빵이다. 광한루원 북문에서 도보로 10여 분 거리에 있다. 남원시 용성로 56.
걷기 Tip
❶ 5월 8일부터 12일까지 광한루원과 요천 일대에서 제89회 춘향제가 열린다. 광한루원은 야간 조명을 밝히는 밤에 산책해도 좋다.
❷ 4월 24일부터 5월 19일까지 바래봉 철쭉제도 열린다.
레트로는 단순히 오래된, 옛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가령 50년째 장사를 이어온 노포와 1970년대 인테리어로 새로 문을 연 식당. 전자는 전통이라 말하고, 후자가 ‘레트로’라 하겠다. 이러한 레트로 콘셉트의 가게들은 중장년 세대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의 핫 플레이스로 자리 잡고 있다. 자녀와 함께 데이트 즐기기 좋은 레트로 핫 플레이스를 소개한다.
◇ 익선동 한옥섬을 한눈에 ‘낙원장’
옹기종기 기와지붕 아래 레트로풍 맛집과 아틀리에가 즐비한 익선동 거리. 부티크호텔 ‘낙원장’에서는 골목을 가득 메운 한옥 150채의 전경을 한눈에 담아볼 수 있다. 1980년대 지어졌던 ‘그린필드’라는 낡은 여관을 크라우드펀딩으로 매입, 지역 아티스트와 협업해 탄생시킨 공간이다. 클래식한 건물 외관과 달리 세련되고 모던한 실내 인테리어가 레트로 플레이스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끌어올린다. 객실은 일반뷰와 한옥뷰, 프리미엄 한옥뷰 총 3단계로 나뉜다. 그중 LP플레이어가 있는 한옥뷰 룸을 선택하면 커다란 창문 너머로 보이는 익선동 풍경과 함께 LP음악까지 만끽할 수 있다.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표로28길 25 숙박비 평일(일~목) 7만~9만 원, 주말(금~토) 9만~11만 원
◇ 아날로그 선율에 빠지다 ‘바이닐 앤 플라스틱’
현대카드가 운영하는 ‘바이닐 앤 플라스틱(VINYL&PLASTIC)’은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경계에서 사라져가는 음반의 가치를 재조명하는 음악체험형 공간이다. 노출콘크리트와 나무 소재 인테리어가 조화를 이루는 인테리어가 돋보인다. 입구 왼편으로는 턴테이블이 놓인 긴 탁자가 눈에 띈다. 이곳에서 바이닐 앤 플라스틱이 선정한 200장의 LP명반을 감상할 수 있다. 1층에서는 클래식, 재즈&소울, 힙합 등 다양한 장르의 LP음반 9000여 장과 다양한 음향장비를 전시, 판매한다. 2층은 1만6000장에 달하는 CD와 더불어 음악감상 서비스를 제공하는 카페 공간으로 꾸며져 여유를 즐기기 좋다.
위치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로 248 이용시간 화~토요일 12:00~21:00, 일요일 12:00~18:00 (현대카드 미소지자도 입장 가능)
◇ 한국·태국의 퓨전 레트로 맛집 ‘동남아’
태국요리전문점 ‘동남아’의 입구. 세월이 켜켜이 쌓여 낡은 검푸른색 철문을 활짝 열면 레드벨벳 커튼과 이국적인 샹들리에가 맞이한다.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른 이 오묘한 식당은 안쪽으로 들어설수록 이색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한옥을 개조한 실내는 태국 연회장을 모티브로 한 인테리어로, 동남아 여행에서의 아쉬운 마지막 밤을 표현했단다. 메인 홀 외에 공간을 다양하게 나누었는데, 룸마다 강렬한 색감의 독특한 벽지가 눈길을 끈다. 특히 대중탕 욕조(?)를 연상케 하는 앞마당의 테이블은 겨울철 식사를 즐기기엔 다소 불편하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운 공간이다. 인기 메뉴인 꽃게와 커리로 맛을 낸 ‘뿌빳 퐁 커리’와 태국식 볶음 쌀국수 ‘팟타이’ 등 현지 셰프가 요리한 다양한 오리지널 로컬 푸드를 맛볼 수 있다.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표로28길 23-6 이용시간 매일 12:00~22:00, 브레이크타임 15:30~17:00(주말 제외)
◇ 도도한 모던걸의 화려한 외출 ‘경성의복’
익선동 골목을 걸어가다 보면 개화기풍의 원피스와 정장을 입은 이들을 발견할 수 있다. 고궁 일대에서 한복 체험을 하듯, 이곳에서는 개화기 의상을 대여해 레트로 감성을 한껏 즐기는 것이 트렌드. ‘경성의복’에는 다양한 디자인의 복고 의상과 셀프 촬영을 위한 포토존이 구비돼 있다. 고풍스러운 원피스와 장신구로 치장하고 모던걸이 되어 거리를 누벼보는 것 어떨까?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일대로30길 56 2층 이용시간 매일 10:00~20:00
가격 의상대여(의상·장신구·모자·기타소품) 3시간 3만 원/6시간 4만 원/하루 4만5000원/1박2일 5만 원
◇ 딸과 데이트하는 날엔 ‘경양식 1920’
1980년대 전후, 가족외식 하면 떠오르는 경양식집을 테마로 한 레스토랑 ‘경양식 1920’. 레트로 거리로 유명해진 인선동 골목에 젊은이들이 부모 세대와 함께 올 수 있는 외식 공간을 만들기 위해 인테리어를 꾸미고 추억의 메뉴들을 불러왔다. 24시간 숙성한 돈가스와 함박스테이크는 남녀노소 모두 즐기기에 부담이 없다. 실제 방문한 고객들을 살펴봐도 젊은 연인부터 엄마와 딸, 노부부까지 다양한 세대를 아우른다. 사이드 메뉴로는 1980년대 경양식집에서 맛보던 수프와 멕시칸 사라다(샐러드)를 선보인다. 특별한 날에는 하우스 와인 한 잔 곁들여보는 것도 좋겠다.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표로28길 17-30 이용시간 평일 12:00~22:00, 주말 11:00~22:00, 브레이크타임 15:00~17:00(주말 제외)
◇ 뒹굴뒹굴 잠시 쉬어가는 ‘만홧가게’
과거 만화잡지 ‘챔프(CHAMP)’를 비롯해 ‘우주소년 아톰’, ‘스타워즈’ 등 다양한 장르의 만화책과 그래픽노블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평일에 방문한다면 런치스페셜(라면·즉석밥·계란·김치/단무지+만화 1시간, 6000원)로 이용해보자.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표로28길 33-7 영업시간 11:00~23:00 가격 1인 기준 10분당 500원, 좌석(주말 및 공휴일) 2000원
동년기자가 직접 다녀온 레트로 핫 플레이스
◇ 최원국 동년기자/ 돌고 도는 레트로 액티비티 ‘자이언트 롤러장’
부천의 레트로 명소 ‘자이언트 롤러장’. 방문한 날은 휴일이라 인파가 붐벼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30여 년 전 부천의 ‘자이언트 롤러장’이 유명했는데, 장소는 다르지만 복고풍에 맞춰 추억의 이름을 다시 불러왔다고 한다. 지하철 1호선 부천역 3번 출구에서 도보로 10분 이내에 있어 접근성이 좋다. 30년 전 롤러를 타던 학생들이 어른이 되어 옛 추억을 회상하기 위해 아이들과 많이 찾는 듯하다. 롤러장의 경쾌한 분위기를 담당하는 DJ가 있어 음악에 맞춰 롤러를 타다 보면 스트레스가 확 풀린다. 곳곳에 간식을 판매하는 매점을 이용하면 시장기를 해결할 수 있다. 과거 롤러스케이트를 타던 시절의 낭만을 다시 느끼고 싶은 시니어라면 친구 또는 아이들과 꼭 방문해보길 추천한다.
위치 경기도 부천시 장말로 376 지하 1층 1일 입장료 성인 1만1000원, 유아~고등학생 9000원 영업시간 평일 12:00~22:00(무제한 이용), 주말 10:00~22:00(3시간 이용)
◇ 윤영애 동년기자/ 시간이 머무는 곳, 우유 카페 ‘희다’
논현동 주택가 골목에 하얀 3층집, 카페 희다. 낮은 계단을 테라스 삼아 나무 소반에 왕골방석이 놓인 테이블이 눈에 들어온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언젠가 분명 와본 듯 너무나 친숙한 느낌! 어릴 적 시골 할머니 집 냄새도 나는 듯하다. 높다란 1인용 앤티크 의자, 사각밥상 테이블, 양은 개다리소반, 자개문양 화장대와 거울, 낡은 찬장과 괘종시계까지. 곳곳을 돌아보며 낡은 물건들에게 속말로 인사를 건넨다. ‘어디 있다가 여기로 왔니?’ 메뉴를 보니 우유가 주다. 기본 우유에 커피, 홍차, 말차, 페퍼민트, 미숫가루까지 6가지다. 사이드 메뉴로 옥춘당 때때사탕과 큼직한 레몬 마들렌도 있다.
프런트의 젊은이에게 주문을 하고 대표님이 누구시냐 물으니 본인이란다. 긴 생머리가 멋진 나두리 대표 역시 작년 7월 오픈 이래 가장 연로한 리포터가 왔다며 빙긋 웃는다. 주고객은 복고에 관심 있는 젊은이들이고, 우연히 동반한 부모님이 친구들과 다시 와서 단골이 된단다. 대부분의 물건은 나 대표 할머니가 집에서 실제로 사용했던 것들이다. 때문에 “외할머니 집에 온 것 같다”는 고객의 평이 가장 맘에 든단다.
느슨한 공간에서 익숙한 것을 자연스럽게 누리는 것이 콘셉트였다는 나 대표의 의도는 조용한 음악과 소품에서도 잘 드러난다. 갓 씌운 백열등, 도자기, 왕골바구니, 낡은 찬장 속 오래된 커피 잔과 유리컵까지 모든 것이 눈에 익어 정겹다.
‘희다’는 기쁘다[喜]와 많다[多], 즉 기쁨이 넘치는 곳 혹은 우유의 하얀 빛깔을 뜻한다. 오래됨과 잘 어울리는 가게 이름이다. 카페 한편에 ‘검다’라는 글자가 쓰인 화분을 가리키니, 개업 후 “희다인지, 검다인지 카페는 잘돼가냐?” 했다던 아버님의 조크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창밖 현관 옆에는 ‘웃다’라는 이름의 화분도 있다. 잠시 후 혼자 들어온 고객은 동네 주민이라며 아이를 기다리다 들렀는데 편안하고 조용하다면서 레트로풍의 독특한 인테리어에 흡족해한다.
바람 불고 서늘한 가을의 어느 날, 논현동 도심 한복판에서 어릴 적 시골집을 본 듯하다. 500㎖의 대용량 미숫가루우유는 인심만큼 넉넉하다. 남겨온 때때사탕을 구순 노모에게 드리니 어디서 이런 사탕을 사왔냐며 좋아라 하신다. 시간이 멈춘 나만의 비밀 아지트에 다녀온 것처럼 왠지 마음이 따시다.
위치 서울시 서초구 주흥15길 16-4층 영업시간 매일 11:00~21:00
“기차가 어둠을 헤치고 은하수를 건너면….”
전주(前奏)만 들어도 무의식적으로 TV 앞에 앉던 만화 시리즈 ‘은하철도999’. 밥그릇 들고 앉아 눈이 빠져라 메텔과 철이의 우주 모험에 몰입했었다. 옛 기억 속 한 장면과 늘 함께하는 ‘은하철도999’가 시간을 거슬러 와 미디어아트전시 ‘은하철도999 갤럭시오디세이展: 마츠모토 레이지의 오래된 미래’로 탄생했다. 그런데 은하철도999 열차가 정차(?)한 곳이 조금 특이하다. 바로 용산전자상가 단지 한복판. 여주인공 메텔의 슬픈 표정이 인상적인 대형 옥외 광고판 아래로 빨려 들어가면 옛 추억 위에 과거와 현재, 미래가 어우러진 새로운 ‘은하철도999’를 감상할 수 있게 된다.
추억의 만화가 미디어아트로
‘은하철도999’ 주제곡 첫 소절쯤은 1980년대를 살아온 사람이라면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다. 유년기 전반을 관통하는 치명적인 매력의 아이콘이 ‘은하철도999’다. 서울지하철 1호선 용산역에 내려 전자상가로 향하는 구름다리로 걸어 내려가다 보면 다다를 수 있는 용산 나진상가. 이곳이 ‘은하철도999 갤럭시오디세이展’이 열리는 공간이다. 예전 같았으면 복도를 사이에 두고 양옆이 온통 전자제품과 게임기, 게임팩이었을 이곳이 지금은 은하철도999를 추억하는 곳이다. 마치 폐허 위에 쌓아놓은 간이천막 같기도 하고 나름 은하철도999와 콘셉트가 맞아떨어진다. 아카이브 섹션, 오마주 섹션, 체험 섹션으로 구분해 이야기를 배치하고 공간을 나눴다. 옛 기억을 끄집어내고, 현존 작가 10팀이 은하철도를 재해석했다. 작품 안에서 꿈꿨던 기계인간 세상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게 꾸며놓았다. 전시장 중앙에는 모니터에 담긴 기계 백작(은하철도999, 1회에서 철이 어머니를 죽인 무리의 우두머리) 얼굴이 180도로 돌며 관객에게 위압감을 주며 감시당하는 기분이 들게 한다.
80대 거장이 쌓아놓은 시간여행
관람은 ‘은하철도999’의 원작자 마츠모토 레이지(松本零士)를 이해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마츠모토 레이지 80주년 특별전’의 의미도 담긴 전시인 만큼 작가를 제대로 알고 작품을 감상하면 좋다. ‘마츠모토 레이지의 아카이브룸’에서는 64년 동안 작품 활동을 한 작가의 이력과 작품에 대한 설명을 ‘레이지버스’라는 관계도로 정리했다. 은하철도999에 등장했던 인물들이 다른 작품 속 주인공으로도 나오는데 이들 스토리가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 등을 간단하면서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놓았다.
마츠모토 레이지에 대해 간략하게 알고 난 뒤 ‘보딩 트레인’이라는 장소로 이동한다. 우리나라에서 은하철도999가 방영됐던 시기인 1980년대 초반 각 가정의 안방 모습을 재현해놓았다. 앉은뱅이 자개 화장대 옆 작은 텔레비전에서는 은하철도999가 상영된다. 친구들과 함께 모여 앉아 만화를 보던 옛 시절을 회상하는 공간이다. 실제로 구들장 위에 앉거나 누워서 TV를 보다 일어나는 관람객도 있다고. 이외 ‘캐릭터룸’, ‘만화룸’, ‘작가의 작업실’ 등에서 마츠모토 레이지 작품과 관련한 피규어, 만화, 도서, 음반, 게임 등을 관람하고 체험할 수 있다. 메텔과 철이의 옷을 입어 보는 것은 물론, 과거에 그림을 낱장으로 그려 애니메이션 만화 작업했던 것처럼 그림을 그리는 공간도 마련돼 있다. 라면을 좋아하는 철이를 잠시 느껴보라는 의미에서 자판기 라면도 구비해놓았다. 자판기에 돈을 넣고 기다리면 실제로 라면이 끓여져 나온다. 유료 VR 체험도 경험해볼 만하다. 은하철도999에 탑승해 메텔과 철이와 함께 기계인간과 결투를 벌이는 일화에 직접 들어가 체험할 수도 있다.
조 사장 애장품이 뭘까요?
관람을 하다 보면 종종 피규어를 비롯한 전시품에 ‘조 사장 애장품’이라 쓰인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나진상가 내에서 사업체를 운영하는 실제 ‘조 사장’이라는 사람이 개인 소장품을 전시회를 위해 내놓았다. 전시 초기부터 많은 관심을 갖고 주위를 둘러보던 조 사장과 전시 관계자들이 이야기를 나누다가 ‘은하철도999’의 엄청난 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전시 동안 무상으로 일반에 공개하게 된 것이라고. 일본 문화가 개방되기 전 용산은 비밀리에 다양한 일본의 콘텐츠가 유통되던 곳이었다. 오랫동안 이곳에서 사업을 했던 사람이라면 관련 자료 수집이 남들보다 쉬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옛 물건 수집에 일가견이 있었던 개인이 멋진 전시에 동참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싶다. 미래에서 추억으로 향하는 열차에 탑승하고 싶다면 용산 나진상가로 향해 보시라.
전시 안내
기간 2018년 10월 30일까지
장소 용산 나진상가 12-13동(서울 용산구 한강로3가 2-8)
대중교통 용산역 3번 출구
소풍 때만 되면 새벽같이 일어나 엄마와 함께 김밥을 말았다.
김밥 가게가 생겼을 때 ‘과연 이게 팔려?’라고 생각했다. 요즘은 소풍날 아침이면 너도나도 김밥집으로 향한다. 흔하디흔한, 빠르고 간편한 먹거리 김밥. 일상 속에서 쉽게 집어 들던 김밥에 형형색색 특별함을 더해 세계 속에 화려한 모습으로 선보인 이가 있다. 바로 ‘김밥 셰프’로 불리는 김락훈(金樂勳·48) 셰프다. 김밥을 지구촌에 전하다 보니 요즘은 모든 재료의 중심이 되는 우리 농민과 함께 나아가는 일에도 깊은 관심을 갖게 됐다. 김밥 세계화를 넘어 근원적인 문제에 접근하며 소통의 물꼬를 트고 있다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한국을 대표하는 요리를 꿈꾸는 김밥
김락훈 셰프를 만난 곳은 서울 종로구 청와대사랑채 한식홍보관. 미국에서 세미나를 마치고 난 뒤 중국 상하이를 거쳐 전날 밤 한국에 도착했다고 했다. 현재 그는 청와대사랑채 한식홍보관 대표로서 한국 문화와 요리를 알리는 일을 담당하고 있다.
“오래전에 이미 약속된 시간이었어요. 대림중학교 다문화 학생들과 함께 불고기를 만들고 그것을 넣어 김밥을 만들었습니다. 원래는 외국 관광객 체험 프로그램인데 오늘은 특별한 날이에요. 한국 교육제도 아래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을 위해 예외 규정을 준 거죠.”
생소한 한국음식을 체험하는 아이들과 어울리며 흥미롭게 시간을 이끌어가는 김락훈 셰프. 1시간여 진행된 요리교실은 자신들이 만든 김밥을 맛있게 먹는 것으로 끝이 났다.
김밥 세프라는 말이 일단은 생소하다. 전자공학과 출신으로 유럽 배낭여행을 갔다가 초밥의 매력에 푹 빠져 결국에는 다다른 곳이 김밥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왜 그는 김밥 셰프를 자처했을까?
김밥에서 가능성을 보다
“저는 혼자서도 잘 놀아요. 내 만족을 위해 살아왔고 사람들의 평가를 크게 받아본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내 잔재주를 적용시키기에는 너무나 좋은 콘텐츠가 김밥이더라고요. 누구 하나 접근하는 사람도 없었어요. 예쁘게만 잘 만들어서 사람들한테 보이면 되는 거고 완성도는 시간이 가면서 축적되는 거고요. 완벽할 수는 없지만 사람들이 내가 하는 작업에 대해 물어보면 받아칠 수 있는 수준은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일식이면 일식, 멕시칸이면 멕시칸대로 김밥 한 개를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은 생긴 거예요. 멕시칸 푸드로 김밥을 만든다고 하면 사람들이 아는 범위와 한계 내에서 그들의 관심을 긁어줄 수 있을 만한, 그 정도 지식만 쌓으면 되는 거잖아요.”
김밥 셰프로서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수준을 위해 공부하다 보니 국내외에서 딴 자격증만 해도 20여 개나 된다. 네덜란드 룩셈부르크세계요리월드컵에서 개인전, 단체전 동메달을 목에 걸기도 했다. 갖춰야 한다고 생각하는 기본 수준이 어느 정도이기에 이토록 끊임없이 매달리는 것일까.
“저는 세계 1호 김밥 셰프예요. 저도 저지만 김밥을 의인화해서 셰프란 말을 붙인 거라고 보면 이해가 쉬울까요? 저는 레시피를 만들고 요리하는 세프와는 조금 거리가 있습니다. 시스템을 만들거나 조직하는 사람이라고 저를 설명하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가령 시니어의 신규 직업층을 만들고 싶어요. 한식의 새로운 분야로 발돋움할 수 있는 하나의 성장 자료가 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김밥, 세계 속에서 ‘바람’나다
나라 밖에서 한국 김밥을 널리 알리고, 안으로는 농민들과 어떻게 하면 신나고 재미있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는 김락훈 셰프. 우연한 기회에 세계 무대에까지 김밤 셰프로서 얼굴을 알리게 됐다.
“스스로 더 성장이 필요할 때라고 생각했는데 한국 문화를 알려야 하는 중요한 국제 행사에 저를 불러주시더라고요. 물론 김밥 셰프는 저 하나였고 김밥이라면 잘할 자신이 있었죠. 다만 그때의 저는 아직 그런 중요한 자리에 서기에는 검증이 되지 않은 패였습니다. ‘내가 잘못하면 큰일 나겠구나. 정말 잘해야겠다’ 생각했습니다.”
대한민국을 대표한 공식 행사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스페인국제관광박람회(FITUR)였다. 규모 면에서 세계 최고를 자랑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다양한 국내외 행사에 참여했지만 뭔지 모를 책임감이 밀려왔다.
“그때 결정했죠. 외국 행사에 집중하자. 처음 나간 박람회였는데 규모가 대단했다는 것을 3년 동안 국제박람회를 다니면서 알았죠. 처음에는 비교 대상이 없어서 몰랐고요. 우리나라 김으로 제대로 된 김밥을 만들어 선보였습니다. 그리고 행사에 참여할 때마다 저도 점점 성장했습니다.”
김락훈 셰프가 만드는 김밥은 일반 김밥이 아니다. 다양한 무늬가 돌돌 말린 김과 밥 사이에 표현되며 배색 또한 예술이다. 일명 ‘파티 김밥’. 곰돌이 모양, 꽃 모양 등이 동그란 김밥 안에 담겨 있다. 길게 김을 이어 붙여 행사장에 모인 사람들과 김밥을 말기도 했다. 함께 화합해 만드는 의미와 재미도 있고 잘라 먹어보니 맛도 있는 김밥에 세계 각지에서 모인 관람객들이 흥분했다.
“사람들이 어마어마하게 모였습니다. 그 후에 독일 베를린 국제관광박람회(IBT), 한불수교 130주년, 영국 런던 국제관광박람회(WTM) 등 대한민국 정부를 대표하는 자리에 참석해 ‘김밥 쇼’를 했습니다. 다행히도 가는 곳마다 성황이었어요. 실패한 적이 없습니다.”
작년 한 해는 평창동계올림픽 성공 유치를 위한 한국 문화 홍보대사 자격으로 전 세계를 누볐다. 안 가본 나라가 없을 정도였다. 셰프로서는 유일하게 김락훈 셰프가 평창동계올림픽 성화 봉송에 참여했다.
“솔직히 성화 봉송은 하고 싶었어요. 인생에서 의미 있는 한 페이지잖아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최초에 도전하려고 합니다. 미국 선생님들에게도 김밥과 관련한 강의를 해주고 왔습니다. 미국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비빔밥집이 아주 많아요. 그런데 미국 선생님들에게 비빔밥이 아닌 김밥으로 한국 음식 관련 강의를 해온 지가 벌써 4년이나 됩니다. 미국 교육국에 정식으로 등록한 한국 요리 체험 교육도 바로 김밥입니다. 그 전에도 누군가 한국 음식을 가르쳤겠지만 미국 공식 기록에는 음식 체험으로 배운 한국의 첫 요리가 ‘김밥’이 됐다는 의미입니다.”
흠 잡히지 않고 경계를 넘나들다
놀라운 점은 우리나라 한식 분야에도 명망 있고 이름 있는 요리사가 있을 텐데 김락훈 셰프가 그들을 대신해 국가를 대표하고 신나는 한판을 벌였다는 사실이다. 누구의 제자 혹은 정통성을 따져 묻기 좋아하는 한국 사회. 궁중 요리도 전통 한식도 아닌 김밥으로 세계 속에 한국 음식을 알리고 다닌 셈이다. 시기나 질투를 받지는 않았을까?
“저는 계파 같은 거 없잖아요. ‘넌 누구니? 쟤는 뭐야?’ 한마디로 이런 거였죠. 김밥 셰프라고는 저밖에 없고 이래라저래라 하기도 뭣하고 말입니다. 그렇게 살펴만 봤는데 제가 자리를 지켜냈잖아요. 수면 아래에서 쭉 보고 있다가 지금은 응원도 해주시고, 잘하고 있다고도 말씀해주십니다. 한 3년 전부터인 거 같은데 이쪽 업계 분들은 처음에 제가 이러다가 말겠거니 생각했답니다. 지금은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말씀도 해주십니다.”
사실 잘나간다는 말을 듣고 있을 때 자칫 큰 코를 다칠 뻔도 했다. 하나밖에 없는 김밥 셰프이니 김밥 체인 사업을 해보자는 제안도 있었다. 구체적인 가능성도 열려 있었지만 서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멈췄다. 주위 사람들도 말렸다. 섣불리 결정을 내렸다가는 낭패 볼 것이 뻔했다. 그 또한 제대로 준비가 안 됐기 때문이다.
“잘 보고 길을 걸어온 걸까요? 원맨쇼만 하면서 온 건 아닌지. 망가지면 한순간에 무너지고 나쁜 평가를 받게 될 거 아니에요. 그래서 사업적으로는 절대 서두르지 않는 편입니다.”
팜파티로 농촌과 도시 유통망을 좁히다
김락훈 셰프는 김밥 안에 들어가는 식재료에 관심을 갖고 전국의 농작물과 농민을 연계하는 일을 벌이고 있다. 한국벤처농업대학교에서 교수직을 맡고 있는 이유도 농민들과의 교류 목적 때문이다.
“김밥 안에 들어가는 식재료를 다양화하려면 현실적으로 농민과의 접점이 필요하잖아요. 식재료는 농민을 빼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김밥이든 건강한 음식을 대접하는 한식집이든 농촌에서 식탁까지 안전한 먹거리가 유통될 수 있는 매개체를 만들려고 합니다. 그 운동의 일환이 제가 4년 동안 우리 농민들과 함께하고 있는 ‘팜파티’인 것이죠. 여기에 참여하는 농민들은 팜파티 셰프가 되는 것이고요.”
지금까지 국내외 박람회와 각종 행사, 파티를 하면서 쌓아온 모든 노력을 농민의 자립과 건전한 먹거리 유통망을 다지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김락훈 셰프의 계획이자 바람이다. 올해는 외국 활동을 멈추고 한국에 머물면서 농민들과 함께할 사업과 관련해 진지하게 구상 해볼 생각이다.
“요리를 통해 농업을 논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농민들이 믿고 따를 수 있는 매개체도 필요하고요. 말하자면 한국벤처농업대학교 같은 그림도 필요하고, 요리를 할 줄 하는 사람도 필요하고, 판로도 필요하죠. 김밥은 제 스타일로 콘텐츠를 만들어놓았기 때문에 따라만 와주셨으면 합니다.”
자신을 농민 삐끼(?)라고 불러도 좋단다. 생산자로서 농민이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장을 열어주고 싶다고 했다. 7cm 내외 동그란 김밥 안에서 마치 우주를 발견한 사람처럼 농민 이야기에 신이 난 김락훈 셰프다.
“흔들리지 않는 사람들과 같이 일을 벌이고 한식 세계화를 위해 뛰고 싶어요. 지금 저와 함께하는 농민, 그분들이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