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박원식 소설가
지리산 자락,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산야에 살포시 내려앉은 9월의 소슬한 가을빛. 한낮이지만 핼쑥한 가을볕을 받은 능선도, 숲도, 나무도 덩달아 수척하다. 연신 허리를 틀며 휘어지는 언덕길 양편엔 상점이 즐비하다. 사람들의 발길도 연달아 이어진다. 소설가 박경리(1926~2008)의 대하소설 의 무대이자 드라마 촬영장인 ‘최참판댁’을 관람하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이다.
언덕 끝자락 외진 곳엔 ‘박경리문학관’이 있다.
‘최참판댁’ 일대엔 들고나는 사람들로 바글거리지만, 바로 옆에 있는 문학관은 찾아드는 이가 드물어 고요하다. 문화보다는 관광을, 문학보다는 눈요기를 포식하는 일로 만족을 구하는 항간의 경향이 여기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박경리는 생시에 를 기념하는 공간인 ‘최참판댁’을 조성하는 일을 당최 마뜩치 않아했다. 죄스럽기까지 하다고 토로했다. ‘최참판댁’이 필시 요란한 관광상품으로 쓰일 것을 미리 내다보았으며, 가뜩이나 넘쳐나는 ‘관광지’ 홍수에 또 하나의 관광지를 보태는 게 달갑지 않았으며, 결국은 지리산에게 누를 끼치는 일이라 보았다. 세상과 세태를 읽는 박경리의 냉철한 눈과 광활한 가슴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박경리문학관’은 하동군이 올해 5월 개관했다.
이전에 ‘전통농업문화전시관’으로 쓰였던 한옥 건물을 개조해 문학관을 꾸몄다. 건물의 형용은 덤덤하거나 밋밋해서 슬쩍 섭섭하다. 그러나 내부에선 박경리의 혼이 스멀거린다. 300㎡쯤 되는 공간의 벽면과 진열장에 작가의 개인사와 창작열과 일상을 더듬을 수 있는 갖가지 책자와 초상화, 사진, 영상물 등이 전시되었다. 다분히 정형화된 구색이자 구성이지만, 박경리가 생시에 사용하거나 아꼈던 유물 41점이 흥미롭다. 이 소중한 유물들은 박경리의 딸이자 토지문화재단 이사장인 김영주에 의해 무상 대여 받은 것들이다.
박경리의 는 자그마치 25년이라는 긴 집필기간을 통해 5부 16권으로 완간한 걸작이다. 그는 오직 칩거한 채 에 매달린 장구한 시간을 ‘빙벽에 걸린 자유, 주술에 걸린 죄인의 세월이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암 수술을 받고 퇴원한 날에도 가슴에 붕대를 감고 책상 앞에 앉아 원고를 썼다. 탁발한 재능의 소유자이기 이전에 그는, 유례가 드문 독종이자 강골이었다. 유리 진열장 안에 놓인, 방울방울 피를 뿜듯이 써내려갔을 육필원고 뭉텅이들이 숙연한 감동을 자아낸다. 글씨체에선 활달한 기운이 생동한다. 늘 곁에 두고 수시로 뒤져 알토란같은 토속어를 건져 올렸을 게 분명한 국어사전은 낡아 너덜거린다. 소설이란 여하튼 모국어와의 내밀하고도 치열한 통정(通情)이라는 사실을 일깨우는 유품이다.
특유의 도회적이고 지적인 용모를 한껏 돋보이게 하는 데에 이바지했을 원피스와 재킷, 일상의 실용적인 동향을 짐작하게 하는 싱거 미싱, 안경과 만년필과 가죽장갑, 도자기와 그림부채 같은 유물들이 눈길을 오래 붙잡는다. 박경리의 끽연 습성은 생과 함께 유구하게 지속됐는데, 진열장 안에 덩그마니 놓인 저 아리랑 담배와 재떨이와 라이터를 무시로 애용했던 사람은 지금 우주의 어느 푸른 공간에 거주하는가.
빛바래고 균열이 간 흑백사진 하나에 다시 눈길이 오래 머문다.
박경리의 소녀 적 사진이다. 자못 그윽한 눈매, 고집스레 두툼한 볼, 헌칠한 이마…. 자존감과 내향성이 도드라지는 모습이다. 경남 통영에서 태어난 그는 진주여고에서 소녀기를 보냈는데 유별난 독서광이었다. 책에 푹 빠져 지냈던 소녀 박경리는 마치 예정된 길로 접어들듯이 문학이라는 꽃길, 혹은 가시밭길로 자연스럽게 걸어들어갔으며, 게걸스러운 독서를 통해 얻은 상상력으로 소설의 산정(山頂)에 올랐다. 많은 소설가들이 실증과 조사를 중시해서 작품을 쓰지만, 박경리는 붙박이 장롱처럼 칩거한 채 매진한 독서를 통한 상상력이라는 폭약을 창작의 화톳불로 삼았다. “내 소설의 밑천은 오로지 상상력이오!” 그는 그리 거듭 말했다. 해외여행이라는 걸 거의 하지 않았던 그는, 놀랍게도 의 배경지인 이곳 하동 악양 땅조차 작품을 완간한 뒤에야 처음으로 밟았다는 게 아닌가.
‘박경리문학관’은 박경리라는 거목을 하나의 풍경과 세계로 새삼 눈여겨 바라보게 하는 재료를 제공한다. 박경리는 자신을 추켜세우는 기념관 명색을 극구 꺼렸다. 그러나 그를 기리고 그리는 사람들에겐 흡족한 선물일 수밖에.
박경리문학관 관람 정보
주소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길 79 관람시간 09:00~18:30
관람요금 성인 2000원 / 청소년·군인 1500원 / 어린이 1000원
※박경리문학관은 하동 최참판댁 안에 있습니다.
침대 모서리에 무릎이라도 찧어 보면 알 일이다. 쓸쓸함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아침에 눈 비비며 일어나, 아무렇게나 던져둔 트레이닝복을 집어 들었다가, 바짓가랑이에 발을 잘못 끼운 탓에, 외발로 몇 걸음 콩콩거리고는, 볼썽사납게 풀썩 쓰러진다. 얼굴을 찡그리고 두 손으로 무릎이 닳도록 비비다 보면 어느새 진면목을 내밀고 있다. 외로움이라는 불청객. 곁에서 누군가 위로만 해줬어도 이렇게 아플까. 아니, 깔깔거리며 비웃기만 했어도 이처럼 서러울까. 일상에서 고독은 으레 고통과 더불어 사무친다.
글 김유준 프리랜서 dongbackproject@gmail.com
20년 넘도록 그렇게 살고 있다. 대학 졸업 후 직장에 들어가면서 시작했으니, 네 자리 숫자에 네 자리 숫자를 빼는 나름대로 힘겨운 작업을 마쳐보면, 올해로 정확히 25년째 혼자 살고 있음을 깨닫는다. 7000일이 넘는 짧지 않은 세월이다. 그 많은 나날 동안 대부분 홀로 잤고, 홀로 깨어났다.
주위 사람들은 부러워한다. 대학 졸업반인 딸아이가 연인에게 버림받고 일주일째 방에서 두문불출하고 있다고 말하는 친구도, 고 3인 아들이 그 유명한 ‘PC방 폐인’이라면서 땅이 꺼져라 한숨 쉬는 이웃도, 잘난 부인이 인사동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갖는다면서 초대장을 건네는 후배도…. 혼자라서 편하겠다고, 자유로워서 좋겠다고. 그때마다 씁쓸히 웃었다. 시퍼렇게 멍든 양 무릎을 보고도 그런 소릴 할까.
인생의 좌우명이 ‘무엇이든 물어보세요’이지만, 왜 혼자 사느냐는 질문만은 질색이다. 대답할 말이 없다. 어차피 그러고 싶어 그러는 것도 아닐진대 까닭이 어디 있고 곡절이 어디 있겠는가. 살다 보니 그리 됐다. 딴에는 최선을 다한 답변에도 집요한 누군가는 재차 묻는다. 달리 살 수 있었다면 그랬겠느냐고. 역사에 가정은 부질없다 했지, 아마. 개인사 또한 다르지 않다.
“살면서 점을 세 번 봤거든요. 첫 번째 점쟁이는 ‘마흔 이전에 결혼하면 이혼한다’고 하더라고요. 두 번째는 ‘횃불처럼 홀로 타오르는 사주’라고 하고, 마지막 한 명은 ‘일생이 낙목공산’이라던가. 나뭇잎 다 떨어져 텅 빈 민둥산 팔자라는 거 아니겠습니까. 자, 뭐 더 있으세요?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팔자소관으로 돌려버리는 편이 차라리 낫다. 그쯤 되면 더 이상 내 삶의 방식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지 않는다. 안타까움의 한마디로 대화는 종결된다.
“여자라면 그나마 좀 나았을 텐데….”
곰곰 생각해보니 그런 듯도 하다. 실제로 여자들은 혀를 끌끌 찬다. 세탁기가 고장 나 손빨래를 하다가 스며드는 창문 햇살에 저도 모르게 울고 말았다는, 나의 구질구질한 경험담을 듣고 나면 말이다. 이야기 상대가 처지 비슷한 독신 여성이어도 안쓰러워하기는 마찬가지다. 자기 신세도 자랑스럽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 정도는 아니라면서 숫제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린다. 가만 듣다 보면 위로하려는 것인지, 자신의 덜 불행함에 안도하는 것인지 구분도 가지 않는다.
인류학이나 동물학 전공자는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수컷이 혼자 살기에 적합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 않을까 싶다. 무엇보다, 수컷이 하고 싶어 하는 것 가운데에는 홀로서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것이 끼어 있다. 옛날이야 돈으로 어찌어찌 무마할 수 있었다고 쳐도, 요즘은 그조차 쉽지 않다. 그러고 싶지도 않고. 그러고 보면 세상에서 가장 외롭고 구저분하게 사는지 모른다.
자괴감에 잔뜩 빠져들었을 즈음, 고등학교 선배와 술을 한잔하다가 생애 가장 큰 격려를 들었다. 그날은 무릎 대신 입술을 다친 터였다. 칫솔질 도중 잠시 딴 생각에 빠졌다가 그만 오른손에 힘을 너무 줘버렸다. 살짝 부운 입술을 혀로 매만지며 쓰라리기보다 처량하다고 툴툴거렸더니 선배는 엄살떨지 말라면서 나무랐다.
너만 그런 줄 아느냐고. 여섯 가족이 모여 살아도 아픈 건 아프다고. 어여쁜 마누라가 연고에 밴드까지 발라줘도, 입술을 동그랗게 말고서 후후 불어줘도 쓰라리긴 매한가지라고. 그러면 저절로 또 서럽다고…. 하나부터 열까지 행복하기만 한 줄 알았던 선배의 신세타령이 하도 뜻밖이어서 아예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
“진짜로?”
남의 불행은 진정 나의 행복이었다. 얻다 대고 반말이냐는 핀잔도 듣기 싫지 않을 만큼 위로가 됐다. 선배는 어느 책에서 읽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삶은 완벽히 홀로 떠나는 여행이다.”
그리 참신하지는 않았지만 세상 어떤 비유보다 가슴에 와 닿았다. 흡사 머리에 띠 두른 응원단이 곁에서 큰북을 둥둥 울리며 지옥에서 천당까지 반동이라도 해주는 듯했다. ‘어느 책’이 무엇인지 인터넷과 서점을 뒤지기까지 했다. 읽고 싶어서였다. 나중에 사라 밴 브레스낙의 임을 알아내고는 문득 궁금해졌다. 어여쁜 부인에 토끼 같은 두 딸로 모자라 맏아들 부부까지 품에 끼고 살면서 제목이 그 모양(?)인 책을 왜 읽었을까? 전화라도 걸어 묻고 싶었지만 그냥 꾹 참았다.
나름대로 사정이 있겠지, 싶어서.
그럼에도 못내 선배가 부러운 것은, 그에게 있는 것이 내게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뻔하다. 사람이라는 존재 자체. 쉽게 말해, 나는 이야기 상대가 그립다. 텔레비전 뉴스나 오락프로그램을 보다 보면, 순간순간 떠오르는 저널리스트 특유의 유머러스하면서 예리하기까지 한 비평을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어 미칠 지경이다. 상대가 “그게 지금 웃으라고 하는 소리냐?” 하고 비웃어도 상관없다. 어쨌든 그러고 싶다.
때마다 휴대전화 버튼을 누르거나 새삼스레 주위를 둘러보는 것은 그 때문이다. 물론 휴대전화는 한결같은 바탕화면이요, 곁에는 아무도 없다. 오직 나 하나라 크지도 않은 방이 그처럼 적막하고 휑뎅그렁할 수 없다.
마흔 넘어 혼자라는 어느 방송진행자는 방송프로그램에서 “오래간만에 사람들과 어울리니 정말 즐겁다”고 말하곤 했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어쩌다 사람들 속에 뒤섞였다면 자리를 파하기가 그리도 싫다.
“어디 가?”, “언제 와?”, “밥은?”
이 세 가지가 이른바 ‘나도족’ 또는 ‘젖은낙엽족’이 입에 달고 사는 3대 질문이라고 한다. ‘나도족’이나 ‘젖은낙엽족’은 젖은 낙엽이 빗자루에 엉겨 붙듯 “나도” “나도” 하면서 부인 뒤만 졸졸 따라다니는 남편들을 싸잡아 일컫는 신조어란다. 엉겨 붙을 부인은 없지만, 사람들과 만나면 엇비슷한 질문 세 가지를 자주 하기는 한다.
“벌써 가려고?”, “한 잔만 더 하고 가지?”, “에이, 내가 낸다니까 왜 그래?”
극구 가려는 사람을 주저앉히려 안달이다.
옛날에는 그런 스스로가 창피했다. 요즘은 그렇지 않다. 되레 어엿하다. 같이 있자고 조른다고 해서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하나를 얻으면 다른 하나를 잃어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어느 친구가 일깨워준 덕분이다.
“말상대가 그립다고? 곁에 붙어 있어도 괴롭기는 똑같다. 너는 없어서 괴롭고 나는 있어서 괴롭고, 그 차이다.”
원효대사가 동굴에서 해골 물을 마셨을 때 정도는 아니어도, 그 말에 느낀 바가 자못 크다. 블레즈 파스칼이 에서 “끝없는 공간의 영원한 침묵은 공포를 가져다준다”고 했다가 다른 페이지에서는 “사람은 외톨이로 죽으므로 외톨이처럼 살아야 한다”고 적어놓은 것을 읽고 ‘이 사람, 거의 이랬다저랬다 장난꾸러기 수준이 아닌가?’ 하고 고개를 갸웃한 적이 있는데, 친구의 말을 듣고서야 그분이 왜 그랬는지 깨달았다.
고독이 비록 두려울망정 인간으로서 어쩌지 못할 운명인 동시에 평생 따라야 할 행동강령이라는 뜻 아니겠는가. 그러니 친구는 ‘있어도 괴롭다’고 투덜거리고, 선배는 ‘삶이란 홀로 떠나는 여행’이라고 주장하는 것 아니겠는가.
우주의 섭리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배배 꼬여 있다면,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떤가. 남들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 어떻고, 그 작업에 실패해 홀로 덩그러니 남으면 또 어떤가. 어딘가의 결핍은 다른 어딘가의 풍요로움을 잉태하는 법이니, 내 외로움이 남들의 단란함만 못하다고 낙망할 필요는 없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사는 게 인생이다. 그들도 힘들다지 않는가. 어차피 똑같다면 두려워도 괴로워도 말자.
나는 혼자 산다. 25년째 그러고 있다. 그 사실이 자랑스럽지 않지만 부끄럽지도 않다. 그렇게 살아서 때때로 외롭지만 마냥 불행하지만도 않다. 어떨 때는 더없이 좋다. 영화가 보고 싶으면 툭 털고 일어나 보러 가면 된다. 느닷없이 꽃구경이 당기더라도 문제없다. 훌쩍 떠나면 그뿐이다. 친구들이 모처럼 술 고플 때 가장 먼저 찾는 사람이 누구겠는가. 바로 나다. 자랑삼아 말하면 친구들 사이에서 요즘 내 별명이 ‘알비데’다. 부르기만 하면 언제든 “곧 갈게” 한다고 해서 그리 부른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절대 자유. 혼자 살지 않는 사람이 들었다면 혀를 내두르며 부러워할 삶을 나는 지금 한껏 누리며 살고 있다.
그런 생각도 한다. 아주 옛날 영화 ‘벤허’에서 노예 신세가 된 주인공이 그러는 것처럼, 삶이란 상심의 바다를 노 저어 가는 거친 뱃길이 아닐까. 천둥 치고 벼락 치는 와중에 주위를 둘러보면 노 젓는 이들이 수두룩 눈에 띈다. 대부분 나와 달리 한 배에 여럿이 타고 있다. 적게는 둘, 많게는 여섯. 그들이 노를 서로 나눠 저으며 파도를 헤치는 모습을 보면 흐뭇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나룻배에 홀로 탄 신세라 그만큼 쓸쓸하기도 하다.
그럼에도 만족하려 한다.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남들이 사람을 태우려 내던져야 했던 기쁨과 행복이 내 배에는 제법 실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홀로 노 젓는 고달픔이나 외로움 따위는 감내하려 한다. 공간의 침묵이 괴롭더라도, 크지도 않은 방이 무섭도록 휑해도 견디려 한다. 호강에 겨워서 어딘가에 뭐 싸는 놈이라는 비난을 듣지 않으려면, 나는 마땅히 그래야 한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다. 하나를 잃었다면 다시 하나를 얻는다. 그것은 삶의 철옹성 같은 진리다. 누가 그랬던가. 목표의 7할만 이루는 것이 가장 좋다고. 다만 외톨박이일 뿐, 그것도 모를 만큼 바보는 아니다.
‘읽지 않으면 읽힌다’고 말하며 지독하게 독서하고, 70여 권이 넘는 저·역서를 출간해내는 등 새로운 지식을 끊임없이 출산하는 지식산부인과의사(?) 유영만(劉永晩·52) 한양대 교육공학과 교수. 그에게 책은 창이라고 말한다. 읽어낸 책이 많을수록 세상을 내다보는 창이 많아지고, 그만큼 남다른 개념을 습득할 수 있으며, 남다른 개념을 가진 사람이 남다른 사유를 할 수 있다고. 유 교수가 얻어낸 무수히 많은 창 중에 라는 창을 열어보고자 한다.
‘감·상·실’에서 발견하는 중년의 ‘삶의 정도’
(2011)는 (1981), (1991), (2001)에 이은 윤석철 서울대 명예교수(경영학)의 네 번째 10년 주기 작(作)이다.
“책이 나오고 바로 읽었어요. 윤석철 교수님은 경영학자이시지만 문학가 같기도 하고 때론 철학가 같기도 하시죠. 그런 윤 교수님의 면모와 이전까지 나온 저서들의 내용이 잘 집약된 책이 라고 생각해요. 그동안 공부하시고 연구하신 것들을 목적함수와 수단매체, 이 두 가지로 아주 심플하게 표현하셨죠. 실제로 그 단순한 원리가 제가 전공하는 HRD를 비롯해 경제, 경영, 교육 등 다방면에 접목이 되요. 요즘도 손에 닿는 곳에 두고 제가 하는 일들을 대입해 보곤 하죠.”
의 저자 윤석철 교수는 복잡함을 떠나 간결한 삶을 추구하기 위해 ‘수단매체’와 ‘목적함수’라는 두 개념으로 삶의 정도(正道)를 표현했다. 목적함수란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노력의 방향이며, 수단매체란 목적함수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적 도구이다.
“책을 읽다보면 ‘내 삶의 목적함수는 무엇일까?’라는 생각이 떠오르고, 그렇다면 ‘그 목적함수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은 무엇일까?’라는 고민을 하게 되죠. 대개 중년들은 자신보다 가족이나 타인의 목적함수를 위한 수단매체처럼 살아왔을지도 몰라요. 지금까지 남을 위해서 남들처럼 살아왔다면, 이제부터는 나를 위해서 나만의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런 의미에서 는 중년에게 새로운 목적과 수단을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책이죠.”
책의 3부 수단매체와 목적함수의 결합에는 ‘감수성, 상상력, 탐색 실행’ 세 가지 키워드가 나온다. 유 교수는 이를 ‘감·상·실’이라 부른다.
“저는 창조는 교실에서 자라지 않고 ‘감·상·실’에서 자란다고 말해요. 감수성이란 게 머리로 하는 게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것이거든요. 세종대왕이 한글을 모르는 국민을 불쌍하게 여긴 측은지심(惻隱之心)처럼, 모든 창조의 원동력은 감수성에서 시작하죠. 그리고 상상력은 그 감수성으로 포착된 그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발휘됩니다. 사람들은 상상력 하면 공상, 망상, 허상 등 엉뚱한 생각을 하는데, 상상력은 현실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아픔을 사랑하고 고민할 때 나오는 아이디어와 같은 것이에요. 그리고 그 상상력의 현실 가능성을 검증하는 노력으로서 ‘탐색 실행’이 필요하죠. 이렇게 ‘감·상·실’을 통해 얻은 확신으로부터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고, 삶의 정도를 정의할 수 있어요.”
버킷리스트 ≠ 목적함수
유 교수는 지난해 안나푸르나를 다녀오면서 버킷리스트 중 한 가지를 실현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안나푸르나 등정이 목적함수라 예상했지만, 그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버킷리스트가 목적함수는 아니에요. 얼핏 안나푸르나에 도달하는 것이 목적함수로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그저 여러 수단매체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안나푸르나에 오르는 등 여러 개의 버킷리스트를 달성하면서 ‘궁극적으로 내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에 대한 깨달음을 얻게 되는데, 그 깨달음을 얻는 것이 제 인생의 목적함수인 거죠. 결국 버킷리스트는 삶을 남다르고 가치 있게 살게 하는 수단매체가 되는 것이고, 그것이 모이면 삶의 의미, 보람, 행복 등의 목적함수를 얻게 되는 거죠.”
내인생의 4130
“버킷리스트를 실천해본 사람은 또 다른 버킷리스트를 달성할 수 있어요. 제 경우는 안나푸르나를 다녀왔으니 그걸 능가하는 또 다른 버킷리스트를 상상하게 되겠죠. 그런 상상을 통해서 또 다른 도전을 하게 되고, 그 도전으로 얻게 되는 깨달음과 행복 역시 늘어날 거예요. 올해는 몽블랑을 다녀올 계획이에요. 몽블랑에 올라 몽블랑 만년필을 들고 글을 쓰는 상상을 해요. 그렇게 한 가지를 이루고 나면 내년엔 또 다른 도전이 기다리고 있겠죠?”
유 교수가 선택한 수단매체 안나푸르나의 높이는 4130m이다. 평소 습관적으로 숫자나 단어에 의미를 부여하는 그는 이번에도 역시 남다른 의미를 되새겨봤다.
“4130m를 등정하면서 ‘내 인생에 4130이 의미하는 게 뭘까?’라고 엉뚱한 생각을 해봤어요. 4는 인의예지(仁義禮智) 또는 사단(四端)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 1은 ‘내 인생에서 하나를 뽑으라면 결국엔 행복이다. 인생을 행복하게 살자’라는 깨달음. 3은 내 삶의 가장 소중한 세 가지 키워드 ‘도전, 열정, 혁신’ 그 세 가지대로 살겠다는 마음. 그렇게 살다 생각해보면 결국 사람이라는 게 다 영(0)에서 시작해서 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생각. 그렇게 내 삶에 대해 생각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제 인생의 거대한 목적함수를 이루는 수단매체라고 할 수 있죠.”
꿈꾸지 말고 꿈 깨
많은 사람이 “생각을 바꿔야 행동이 바뀐다”는 말을 하지만, 유 교수는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가만히 앉아 생각만 바꾸려 하는 것은 아무런 변화를 줄 수 없다는 것이다.
“딴짓을 해야 딴생각이 들어요. 가만히 앉아서 생각만 바꾼다 한들 뭐가 달라질까요? 저는 ‘꿈꾸지 말고 꿈 깨라’고 말해요. 꿈을 자꾸 앉아서 머리로만 꾸는데, 꿈은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이뤄내는 거예요. 내가 꾸는 꿈을 이룰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몸을 움직여봐야 알 수 있죠. 요즘 지성은 있는데 야성이 없는 교수나 직장인들이 많아요. 책상에 앉아 책이나 컴퓨터만 보고 있으니 그들의 몸은 머리를 회의장소로 이동시키는 수단에 불과하죠. 그러면 몸은 점점 퇴화해요. 몸은 ‘마음이 거주하는 우주’라고 생각해요. 몸이 망가지면 우주가 망가지는 거예요. 그래서 마인드컨트롤이나 마인드파워라는 말은 의미 없죠. 몸이 망가지면 다 소용없거든요. 특히 나이가 들수록 행복하려면 돈도 시간도 있어야 하지만 가장 필요한 것은 연골이라 생각해요. 연골이 없으면 인간은 골골해지죠. 그러니 연골이 멀쩡할 때 여행도 다니고 몸을 움직여 많은 경험과 도전을 했으면 좋겠어요.”
그는 삶의 목적이나 비전을 묻는 질문보다 인생에 있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언인지 묻는 것에 더 의미를 둔다.
“저보고 사람들이 ‘인생의 목적이 뭐냐? 책도 70권 쓰고, 이룰 것 다 이룬 것 같은데 뭘 또 사하라까지 가느냐? 안나푸르나는 왜 가느냐?’ 이런 질문들을 하지만, 저는 그저 제 인생에서 소중하게 생각하는 키워드 세 가지(도전, 열정, 혁신) 대로 사는 것뿐이에요. 도전적으로 열정적으로 혁신적으로 그렇게 살다 보면 새로운 경험이 생겨서 이제까지 몰랐던 새로운 가능성을 알게 되고, 그 부산물로 책이 나올 수도 있고, 덤으로 제가 행복하고 즐거워질 수도 있는 거죠.”
인생의 부록을 다시 쓰는 시점 ‘불혹(不惑)’
“마흔을 불혹이라 하잖아요. 반대로 마흔부터는 유혹에 흔들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까지 내면에 흐르는 욕망을 절제하고 살았을 텐데 이제는 그런 욕망이 이끄는 대로 물 흐르듯 살아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불혹은 인생의 부록을 다시 쓰는 시기가 아닐까 싶어요. 또 중년이란 내가 인생의 중심이 되는 시기인 것 같아요. 자기 인생2막의 별책부록은 무엇인지 탐색해보고, 인생의 중심을 나로 잡아서 나다운 인생 후반전을 살아가는 시점, 그게 바로 중년 아닐까요?”
◇‘청바지’를 즐겨라
얼마 전 친구들 모임에 갔더니 건배사로 '청바지(청춘은 바로 지금부터)'를 외친다. 연배가 비슷한 또래다 보니 자영업 하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일선에서 물러나 있는 상태다. 그러다 보니 그동안 일에 매달려 잃어버린 청춘에 대한 보상 욕구 심리로 ‘청바지’를 부르짖는 것 같다. 사실 그동안은 모두들 일에 매몰돼 요즈음처럼 자유 시간을 만끽하며 지내오지 못한 것 같다.
내 경우도 1975년 직장 생활을 시작해 잠시 공직, 삼성그룹 간부 임원, (주)신라밀레니엄 CEO, 일요시사 회장 등으로 일에 파묻혀 지내다 2013년부터 자유인이 되어 최근에는 매주 2회 문화 강좌 수강, 1~2회 등산 등으로 바쁘게 지내고 있다. 2013년 8월에는 백두산 서파-북파 트레킹을 계획했는데 폭우로 인한 산사태로 서파, 북파 등정 및 지하삼림 트레킹으로 만족하고 아쉬운 마음에 대신 2014년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4130m)를 트레킹하기로 하고 건기에 트레킹이 가능하기 때문에 10월 24일~11월 3일 사이에 친구 3명 등 일행 13명이 H여행사를 통해 카트만두-포카라-푼힐 전망대-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레킹을 하게 되었다.
◇체력, 고산병, 식사 걱정할 필요 없어
안나푸르나 트레킹 계획을 세운 뒤로 히말라야에서 매일 6~9시간씩 총 80km를 팔일 동안 트레킹해야 하고 4000m 이상 고지를 오르는 데 따른 체력과 고산병 문제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체력은 나름대로 일년 넘게 매주 1~2회 4시간 내외 등산을 했기 때문에 별다른 걱정을 안 했으나 4000m 이상 고산 경험은 처음이라 고민이 돼 출발 전 병원에서 다이막스(이뇨제)와 비아그라를 처방받았다.
고산은 산소가 상대적으로 희박해 뇌에 적정한 산소 공급을 위해 혈류량을 늘려주는 비아그라와 이뇨제 이외 별다른 처방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 트레킹 과정에서 현지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어떤 때는 답답할 정도로 천천히 걷고 끼니마다 제공되는 보리차를 물통에 채워 수시로 마신 결과 처방해 갔던 약은 쓸모없는 것이 되었다. 천천히 걷고 물 많이 마시는 것이 고산병의 약인 셈이다.
또한 20여kg의 짐, 식사 등도 걱정되었으나 여행사의 편의 제공으로 걱정 없이 트레킹만 하면 되었다. 식사는 매 끼니 한식이 제공돼 잘 먹고 영양 섭취에 충분했다. 우리 일행 13명을 위해 트레커 개인 짐과 식자재 등에 포터 15명이 동원되고 식사 준비에 조리팀 5명, 전문 안내인을 비롯한 가이드 3명 등 그야말로 ‘황제 트레킹’(그러나 경비는 300만원 미만)이었다. 일행 중 50대 중반 여성이 있었는데 등산 경험도 적어 항상 맨 꼴찌에 처졌으나 마지막 가이드가 따라붙어 전속 가이드 역할을 해 트레킹을 무사히 마쳤다. 아마도 각자 등산 장구를 메고 침식을 하며 안나푸르나를 트레킹하라면 전문 산악인 이외 아무도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봉(高峯) 무리, 일출 황금설경(黃金雪景)은 장관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레킹은 푼힐 전망대를 경유할 경우 닷새 동안 올라가고 사흘 동안 내려오는 긴 여정이다. 카트만두에서 국내선으로 포카라(40여분 탑승)를 거쳐 버스, 지프로 두 시간 이동 후 맛보기 트레킹을 한 뒤 힐레에 도착하면서 롯지 생활과 트레킹이 시작된다.
둘쨋날 일곱 시간 트레킹 끝에 고라파니에 다다른다. 푼힐 전망대 (3210m)를 들르기 위해서다. 이튿날 새벽 네시반 기상해 한 시간에 걸쳐 등산 후 푼힐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히말라야 준봉에 비치는 일출 광경은 장관이었다. 동쪽에서 뜨는 해가 서쪽에 위치한 다울라기리(8172m), 투크체(6920m), 안나푸르나(8091m) 등 고봉들의 꼭대기 만년설을 비출 때 시시각각 눈이 반사돼 황금색으로 변해가는 모습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광경이다. 이곳은 모든 사람들이 고봉들의 일출 황금설경 장관을 보러 온다. 하산할 때 보니 입장료를 받던 관리인들이 없어졌다. 새벽 등정객 외에는 전망대에 오르는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이란다.
아침 식사 후 트레킹을 시작해 때로는 3000개의 계단을 오르내리고 숲속 길도 지나고 만년설이 녹은 장엄한 물소리의 계곡, 수백 미터 높이의 폭포 등을 지나 츄일레 롯지, 시누와 롯지, 데우랄리 롯지 등에서 머문 후 마침내 트레킹 닷새째 저녁 때 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3700m)를 지나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4130m) 입구에 이르렀다. 불과 몇km 앞에 펼쳐지는 고봉들이 우리를 반기듯 그동안 끼었던 안개가 걷히고 속살을 드러낼 때 일행은 탄성을 질렀다.
전기 사정으로 일찍 잠자리에 든 후 이튿날 새벽 다섯시에 기상해 몇 백 미터 올라가 일출이 비추는 고봉을 보는 것은 또 다른 장관이었다. 푼힐 전망대는 일출시 멀리서 히말라야 황금 고봉을 감상하는 데 비해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는 바로 지척에서 안나푸르나(8091m), 안나푸르나 사우스 피크(7219m), 강가푸르나(7454m), 안나푸르나III(7555m), 네팔 성산(聖山,등정 불허)인 마차푸차레(6997m) 등의 고봉들이 황금빛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가까이서 고개를 들고 지켜보는 게 또 다른 매력이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는 분지로 돼 있어 가장 가까이 한 곳에서 여러 고봉을 감상할 수 있는 히말라야 가운데 유일한 곳이라서 많은 트레커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하산하는 길은 발길이 한결 가볍다. 하산이라 해도 사흘 내내 오르락 내리락 해야 돼 몸은 고되지만 마음은 가뿐하다.
등정할 때 하산하는 트레커들의 발걸음이 가벼워 부러워 보였는데 지금 등정하는 사람들의 우리를 바라보는 심정이 비슷해 보였다. 밤부 롯지, 지누단다 롯지 등에서 머문 뒤 사흘 하산 트레킹을 마치게 되었다. 지누단다에서 노천 온천과 저녁 식사 때의 염소 수육 맛이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포카라에서 국내선을 타고 카트만두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창으로 옆을 보니 히말라야의 만년설에 뒤덮여 줄지어선 고봉들이 정겹게 느껴졌다.
◇궁(窮)하면 통(通)한다
카트만두 도착 첫날과 귀국 전날 밤은 카트만두 최고급 오성 호텔로 과거 궁전이었던 소알티 크라운 플라자 호텔에서 머물렀다. 그러나 둘쨋 날부터는 고산지대여서 숙소가 롯지로 열악해 2~4인실에 투숙하고 공동 변소와 샤워장을 사용해야 했다. 공동 샤워장은 일 달러 지불하면 더운 물을 이용할 수 있으나 고산에서는 머리를 감거나 샤워를 해 자칫 열을 빼앗기면 감기나 고산병에 걸리기 쉽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사전 준비했던 물티슈를 활용해 얼굴, 손발 등 온몸을 씻고 심지어 친구에게 물티슈로 등도 닦아달라고 해 매일 '물티슈 사워'를 했다.
그리고 첫날은 면도를 했으나 둘쨋 날부터는 도저히 면도하기 힘들어 수염을 기르기로 하였다. 일주일 기르니 제법 멋있게 자라 주변에서 ‘만화가 이모(某) 씨 같다’면서 계속 기르라고 권유하기도 하였다. 또한 옷도 등산복, 평상복, 속옷 등을 갈아입을 요량으로 많이 준비했으나 초반 하루 이틀 이외 별로 갈아입지 않게 되었다. 귀찮기도 했지만 땀을 흘려도 냄새가 거의 나지 않았고 멋내기도 필요 없었다. 준비해간 체육복은 만사형통이었다.
롯지에 도착해 간편복인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잠잘 때도 보온을 위해 체육복을 입고 침낭에 드는 것이 매일 연속이었다. 그야말로 ‘노숙자’같은 생활이었다.
한 번은 등산 스틱 한 개가 고장나 ‘장애 스틱’이 되어 다소 불편했는데 친구가 맥가이버칼로 등산로 주변에 널려 있는 대나무로 지팡이를 만들어줘 트레킹이 끝날 때까지 ‘대나무 스틱’을 요긴하게 사용하였다.
◇안분지족(安分知足)이 행복의 근원
네팔은 1인당 국민소득이 750달러로 가난한 나라이다. 카트만두 이외 거주 국민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해 트레킹하다 보면 수십 계단의 다랑이 논(주로 벼, 조 농사)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밖에 일부 국민이 트레킹 가이드, 포터, 셰르파(전문 산악인 가이드) 등 관광 관련업에 종사하고 있다. 일반 트레킹 포터들이 일주일 동안 짐을 져나르고 몇 십 달러를 받는다는 얘기를 듣고 눈물이 핑돌았다. 이마저도 고루 나누기 위해 마을별로 할당하고 순번을 정해 고용한다고 한다.
2014년 10월18일 에베레스트 남동루트 쿰부 얼음폭포(5800m) 눈사태로 사망 14명, 실종 3명 사고 당시 셰르파 사망 보상금이 1인당 415달러에 불과해 셰르파 300여명이 파업을 벌인 일도 있다고 한다. 그렇더라도 네팔인들은 대체로 낙천적이다. 40여 kg의 무거운 짐을 이마에 메고 3000 계단을 오르내리느라 힘들겠지만 ‘나마스테(Welcome)’인사하면 웃으면서 ‘나마스테’한다. 저녁 식사 때 포터, 가이드, 조리팀 등 일행은 별도로 식사를 하는데 식사 전, 식사 중, 식사 후 그들 나름의 노래를 부르며 즐긴다.
트레킹하면서 마을을 지날 때 어른, 어린 아이들을 보면 항상 밝게 웃는 낯이고 얼굴이 평화롭다. 카트만두만 해도 거리가 무질서하게 복잡하고 매연이 심해 몇 분만 걸어가도 목구멍이 따가울 정도인데 그래도 네팔인들은 잘도 참고 견디며 산다.
그동안 보도 등에 따르면 가난한 부탄, 네팔 같은 나라 국민들의 행복지수가 상대적으로 높다고 한다.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며 큰 욕심 없이 주변 사람들과 비슷한 처지에서 하루 하루 만족스럽게 사는 것이 비결 아닐까?
노자(老子)는 소우주(小宇宙)와 대우주(大宇宙)를 설파하였다. 대우주는 우주의 생성, 존재, 법칙 등 진리로 인간이 인식하든 안 하든 존재하는 것이고 소우주는 인간 각자 거울 속에 비친 인식으로 소우주는 각자의 지식, 경험, 환경에 따라 다르게 인식한다.
네팔인들은 주변 환경이 열악하고 생활 수준 및 문명 정도가 낮은 데다 전기 및 통신 제약으로 받아들이는 정보에 한계가 있을 뿐더러 개별 수준 차이도 별로 없어 그 정도 생활에서 안분지족(安分知足)하는 것 아닌가 생각해본다. 잠시나마 번뇌에서 벗어나 어떻든 그네들의 참삶의 지혜를 맛보면서 오늘 나에게 주어진 환경과 현실에 감사하며 욕심을 줄이고 남과 더불어 매일 매일 충실하고 즐겁게 살아갈 것을 기약해본다.
오늘 하루가 얼마나 소중한 날인가? 19세기 미국의 유명한 시인이자 철학자인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이 말한 ‘당신이 쓸모없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누군가가 간절히 원하던 내일이다(Today that you wasted always is tomorrow that the one who died yesterday wanted to have so desperately.)’라는 경구가 새삼 귓전을 때린다.
△ 변종경(65) 일요시사 전 회장은 서울대학교를 졸업(1973)한 뒤 잠시 공직을 거쳐 미국 유학, UCLA 대학원에서 석사 취득(1985) 후 1987년 삼성물산(주) 조사부장, 경영기획부장, 1994년 삼성그룹 비서실 기획 담당 임원(이사,상무,전무), 2004년 삼성 사회공헌위원회 부사장 등 기획 분야에 주로 종사해 '기획통'으로 알려져 있다. 2007년 삼부그룹 계열 ㈜신라밀레니엄 대표이사에 취임해 경영 혁신을 통해 2011년 지식경제부, 중앙일보 주관 '한국을 빛낸 창조 경영인' 대상(혁신 경영 부문)을 수상하였고 2012년 일요시사 회장으로서 언론사 경영에 참여하는 등 경영자로서 경륜을 쌓기도 하였으며 2013년 자유인이 된 뒤 등산, 사진 등 다양한 취미 활동으로 그동안 못 다한 여가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명로진(明魯鎭·49). 그의 얼굴을 아는 이라면 배우 명로진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명로진의 인생에 있어 그는 배우이기 전에 작가의 길을 먼저 걸어왔다. 지난 15년간 펴낸 책만 40여 권. 지금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그는 ‘저자 명로진’으로 남고자 한다. 사람들의 마음에 오래오래 남는 책을 쓰고 싶다는 그에게도 오래도록 남게 될 책 한 권이 있으니, 바로 ‘장자’다.
중년의 길목에서 만난 장자, 그리고 깨달음
5년 전, ‘홍대학당’이라는 고전읽기 교실을 개설하며 ‘장자’를 만났다. 논어, 맹자, 소크라테스, 플라톤 등 다양한 고전을 접했지만 ‘장자’는 그에게 남다른 깊이로 다가왔다.
“책 쓰기 교실을 하다 보니 인문 고전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더라고요. 그래서 장자를 접하게 됐는데, 굉장히 재밌고 ‘나와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고전은 한 번 읽고 마는 책이 아니라고 하잖아요. 한 번 읽었을 때는 잘 모르는데, 두 번 세 번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다른 거예요. 분명 똑같은 문장이고 똑같은 내용인데도, 그때 내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른 의미로 다가오더라고요.”
내가 ‘빈 배’가 되어라
깊은 관계일수록 기대가 커지고, 기대가 큰 만큼 갈등이 생겼을 때 받는 상처 또한 크다. 사랑하는 이들에게 상처 주지 않고, 상처받지 않기 위해 그는 자신이 ‘빈 배’가 되고자 한다.
“갈등이 생기고 다툼이 일어날 때면 장자의 ‘빈 배’를 떠올리곤 해요. 어떤 사람이 배를 타고 가는데 뒤에서 오는 다른 배하고 쾅 부딪친 거예요. 돌아보니 빈 배였죠. 그러니 화를 낼 수가 없잖아요. 그러고 다시 가는데 또 뒤에서 오는 배하고 쾅하고 부딪쳤어요. 이번엔 사람이 타고 있었죠. 좀 전과 똑같이 부딪쳤는데도 사람이 있으니, 언성을 높이고 싸우다 결국 욕설까지 하게 되더라는 거예요. 거기서 깨달은 것이, 그러면 우리 자신이 빈 배가 되어 살아간다면 어떨까라는 거예요. 그러면 누가 나를 보고 소리를 치지도 않을 것이고, 화를 내지도 않고, 다툼이 생기지 않을 테니까요.”
속세의 번뇌를 씻어주는 장자
그는 마음이 번잡할 때 북한산 정상에 올라 세상을 내려다보면 마음이 홀가분해진다고 했다.
“장자는 제게 북한산 같은 책이죠. 북한산에 올라 서울 시내를 보고 있으면 ‘아, 내가 왜 저 밑에서 그렇게 아옹다옹 살았나’싶어요. 장자도 마찬가지예요. 읽고 나면 그런 위안이 되죠. 장자가 죽을 때, ‘내 시체를 길바닥에 놔둬라’라고 했다는 거예요. 제자들이 ‘그럼 개미와 벌레가 스승님의 시신을 먹을 텐데.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자, 장자는 ‘밤하늘이 관 뚜껑이고, 흙이 나의 관 밑바닥이고, 온 우주와 별들이 나의 죽음을 애도할 텐데 뭐가 아쉽겠느냐. 또, 내가 길바닥의 시체로 썩지 않으면 개미와 땅강아지들은 뭘 먹고 살겠느냐’라고 했다는 거죠. 그런 구절을 읽으면 ‘그래 사는 거 뭐 있어. 너무 욕심낼 것도 없고 너무 집착할 것도 없고 그렇게 물 흐르는 대로 살아야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베스트셀러보다는 스테디셀러
장자가 씌어진 지도 어언 2400년이 흘렀다. 장자는 이 세상에 없지만, 장자의 이야기는 여전히 많은 이들의 가슴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읽는다는 건 기나긴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이 힘을 얻고 많은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죠. 논어나 맹자에 비해 장자는 굉장히 이야기가 많아요. 저 역시 이야기를 통해 오랜 여운을 남길 수 있는 책을 쓰고 싶어요.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하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스토리텔링을 통해 힘을 얻고 위안이 될 수 있는 책이요.”
진정한 성공의 의미, 장자에서 찾다
청년은 성공하는 삶에 의미를 두지만, 중년은 성공 그 이후의 삶에 대한 의미를 찾는다. 그는 그 의미를 ‘장자’를 통해 찾길 권했다.
“장자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이 진짜 성공인가?’라는 의문을 던져요. 장자는 중년 이후에 읽어야 하는 책 같아요. 나이가 들어 많은 것을 이뤘을 때, 그 이룸의 의미가 뭔가라는 깨달음을 주거든요. 살다 보면 그 이룸이 인생의 끝은 아니라는 거죠. 장자를 읽다 보면,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 명예, 권력이 인간의 존재나 행복에 있어 필수조건은 아니라는 힌트를 발견하게 되죠.”
명로진의 인생 이모작
다양한 이력만큼이나 다채로운 인생2막을 꾸며가고 있을 법했던 그에게 인생 후반전을 어떻게 달리고 있는지 물었다.
“저는 달리고 있지 않아요. 슬슬 걸어가고 있어요. 제 두 번째 삶은 단순화시키는 게 목표예요. 읽고, 쓰고, 놀고. 그게 남은 인생의 3대 프로젝트예요. 책도 슬슬 읽고 여행 다니고 바람처럼 살아요. 얽매일 게 없잖아요. 정년을 다한 분들과 마찬가지로 저도 조직이나 회사를 다니지 않으니까요. 마음이 젊으면 젊은 거예요. 뭐든 할 수 있죠. ‘당신이 얼마나 잘하는가는 문제가 아니다 얼마나 잘하고 싶어 하는지가 문제다’라는 책 제목처럼, 잘하고 싶으면 되는 거예요. 성과를 낼 필요는 없어요. 잘하고 싶어 하는 그 마음 자체로도 보상되거든요. 못하면 또 어때요. 그냥 재밌게 하면 되는 거죠. 성과는 인생 전반기에 다 냈고, 지금까지 했는데 성과 안 났으면 이제는 그냥 그만큼인 거에요. 그럼 그거에 만족하고 이제부터라도 재밌게 살면 되는 거 아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