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도산서원을 방문한 날은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안동 시내에서 35번 국도에 올라 도산서원 이정표를 따라 달린다. 도로 오른쪽으로 낙동강 줄기를 이루는 안동호를 끼고 돌다 보면 마치 물 위를 달리는 듯한 착각이 든다. 안동호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를 가르며 마치 신선 물놀이하듯 안개 낀 안동호를 따라 도산서원으로 스르륵 미끄러져 들어갔다.
비가 오는 날은 문화재를 방문하기 좋은 날이다. 평소 왁자지껄한 소음 없이 호젓하게 거닐며 옛 역사를 음미하며 앞으로의 발걸음을 다잡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도산서원 주차장에 도착하니 관광버스 한 대 없다. 오늘의 방문은 무척 만족스러울 듯하다. 입구로 들어가는 길도 오가는 이 없이 고즈넉하게 우리를 맞았다. 지금에야 이렇게 길이 넓었지 퇴계 이황 선생에게 수학하던 서생들은 좁다란 오솔길을 걸었을 것이다. 그렇게 학문에 정진했을 모습을 생각하니 참 편한 세상에 산다는 미안함이 든다.
도산서원 입구 오른쪽 강 건너에 작은 정자가 보인다. 안동호로 흐르는 물길 가운데에 있는 작은 정자다. 섬이라 하기에는 작지만 달리 뭐라 부르기도 애매하다. 이 정자가 잘 보이는 곳에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는데 시사단(試士壇)이라 불린다. 1792년 음력 3월에 정조가 도산서원에서 치른 과거시험을 기념해 단을 쌓고 전각을 세운 것이라고 한다.
당시 과거에 응시한 이가 너무 많아 장소를 도산서원으로 하지 못하고 그 아래 낙동강 모래강변에서 시험을 치렀다는데 답안지를 제출한 사람만 3632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오늘날 공무원 시험에 너도나도 몰빵하는 모습과 오버랩된다.
시사단으로 가려면 서원 앞 강가로 내려가 나룻배로 건너야 한다. 마을 주민들이 순번을 정해 배를 운행한다는데 비가 내리는 평일이라 그런지 배는 있는데 사공은 보이지 않는다. 그냥 서원만 보고 가야 할 듯하다.
소수서원이 평지에 세워졌다면 도산서원은 산자락에 위치해 있어 아래서부터 위로 올라가며 차례로 건물들이 놓여 있다. 문을 들어서자마자 동쪽은 퇴계 이황 선생이 직접 건축해 학생들을 공부시키던 서당이다. 그 옆 싸리문은 아직도 보존돼 있다. 이황 선생은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매일 이 싸리문을 밀치고 마루에 올랐을 것이다. 이 문은 유정문으로 불리는데 ‘그윽한 곳에서 수도하는 사람은 바르고 길할 것’이라는 뜻이 들어 있다.
한국의 서원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이후, 부쩍 서원을 찾는 관광객이 많다고 한다. 그 때문일까? 서원의 핵심 공간이라 할 강학당인 전교당이 현재 보수 중이라 진입이 금지돼 있다. 전교당 현판은 선조의 명령으로 한석봉이 직접 썼다는데 사진으로만 볼 수 있다.
도산서원을 느긋하게 살펴보고 나왔지만 사실 오늘 방문의 주요 목적지는 인근에 위치한 이육사 문학관이다. 도산서원 주차장으로 나오면 퇴계 종택과 이육사 문학관 가는 길 이정표가 나온다. 이육사 본명은 이원록이며 퇴계 이황의 14대손이다. 아래는 두산백과가 이육사를 설명해놓은 글이다.
“육사(陸史). 본명 원록(源祿). 조부에게서 한학을 배우고 대구 교남(嶠南) 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1925년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1926년 베이징으로 가서 베이징 사관학교에 입학, 1927년 귀국했으나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돼 대구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때의 수인번호가 264. 이를 따서 호를 ‘육사’라고 지었다. 출옥 후 다시 베이징대학 사회학과에 입학, 수학 중 루쉰 등과 사귀면서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1933년 귀국, 육사란 이름으로 시 ‘황혼’(黃昏)을 신조선(新朝鮮)에 발표하여 시단에 데뷔, 신문사·잡지사를 전전하면서 시작 외에 논문·시나리오까지 썼다. 또한 루쉰의 소설 ‘고향’(故鄕)을 번역하였다. 1937년 윤곤강 ·김광균 등과 함께 동인지 ‘자오선’(子午線)을 발간, 그 무렵 유명한 시 ‘청포도’를 비롯하여 교목(喬木), 절정(絶頂), 광야(曠野) 등을 발표했다. 1943년 중국으로 갔다가 귀국, 이 해 6월에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 이듬해인 1944년 베이징 감옥에서 옥사했다.
이육사가 죽은 후, 1년 뒤에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되었다. 그 후, 1946년 신석초를 비롯한 문학인들에 의해 유고시집 ‘육사 시집’(陸史詩集)이 간행되었고, 1968년 고향인 경상북도 안동에 육사 시비(陸史詩碑)가 세워졌다.“
이육사가 이황 선생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학교에서 배웠던가? 선생의 독립운동 여정을 자세하게 배운 기억도 나지 않는다. 오로지 떠오르는 것은 “내 고장 칠월은/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로 시작되는 ‘청포도’라는 시 구절뿐이다.
도산서원 주차장에서 빗줄기가 휘몰아쳐 잠시 고민을 하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하고는 문학관을 향해 차를 몰았다. 경북 안동에 위치한 이육사 문학관은 산속에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2층 건물이다. 잠깐 돌아보고 오자 했던 계획은 어둑해져서야 끝이 났다. 문을 닫을 때까지 이리저리 헤집고 다니며 머물렀다. 우리 일행은, 격렬했지만 여리고 순수했던 이육사의 삶의 흔적을 느끼고 그가 남긴 작품들을 돌아보며 마치 질풍노도의 시대를 보냈던 20대 초반으로 다시 돌아간 듯 흥분하고 목메면서 이육사의 삶을 하나하나 경험했다.
이육사의 유일한 혈육인 이옥비 할머니(80)가 기억하는 아버지 이육사의 모습은 어땠을까? 헤어질 때 3세에 불과했으니 기억이 없는 게 당연할 텐데 어떤 한 순간이 강렬하게 뇌리에 박혀 아버지를 기억한단다. 1943년 아버지가 구속돼 베이징으로 압송되던 날이었다.
포승줄에 두 손이 묶이고 용수(죄수의 얼굴을 볼 수 없게 싸리나무로 만든 둥근 통)를 뒤집어써서 얼굴을 푹 가린 아버지가 건넨 마지막 말, "아버지 다녀오마."
올 초 방영된 MBC 예능 프로그램 ‘선을 넘는 녀석들-리턴즈’에서 안동 이육사 문학관을 찾아 이옥비 할머니를 인터뷰한 영상이 있다. 유튜브에 이 영상이 남아 있어 가끔 들어가서 본다. 문학관에서 선생의 유품들을 돌아보자니 유일한 혈육이었던 딸아이를 용수 속에서 바라보며 가슴이 찢어졌을 아픔이 전해진다.
문학관은 선생의 작품들을 연대기별로 정리하고 전시해놓았지만 작품 활동보다 더 치열했을 독립운동에 대한 기술도 잘돼 있다. 특히 이육사 선생이 당했던 처참했던 고문 현장과 피로 얼룩진 도포, 감옥 수감 도구들도 전시돼 있어 악랄하고 광폭했던 일본 경찰의 만행을 느낄 수 있었다.
민족의 독립을 위해 무장 투쟁도 마다하지 않았던 이육사의 작품들은 시와 평론, 시나리오까지 다채롭게 정리돼 있다. 마지막까지 죽음으로써 자신의 신념을 지켰던 이육사. 그를 청포도의 시인으로만 기억해왔던 이가 있다면 지금 당장 안동으로 달려가 그의 문학관을 방문해봐야 한다. 연대기로 서술돼 있는 각종 독립운동의 역사를 보며 가슴이 먹먹하다 못해 목이 메어오는 뜨거운 경험을 하게 될 터이니.
자연과 건축은 좋은 사이가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건축은 자주 자연을 도발한다. 도시 근교 산자락을 파 젖히고 들어앉은 건물들의 현란한 형형색색을 보라. 자연하고 불화를 즐기는 취향? 심술? 그러려면 그러라지, 자연이야 대범하여 그저 태연하다. 지나다니며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들만 피곤하다. ‘이응노의 집’을 향해 걸어가며 떠오르는 생각들이 이러하다. 자연과 친화 관계 맺기에 성공한 건축을 만나는 즐거움의 반향이다. 자연과 좋은 사이로 지내는 미술관을 보고 싶으신가? 그렇다면 ‘이응노의 집’으로 고고싱!
‘이응노의 집’은 고암 이응노 화백(1904~1989)의 생가 터에 지은 기념관이자 미술관이다. 이응노는 생의 후반을 줄곧 파리에서 살았으나 고향을 못내 못 잊어했다. “나는 충청도 홍성 사람이외다!” 그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고향 땅이 그리워 자랑처럼 흔히 홍성을 얘기했다. 그리운 게 고향의 산천뿐이었겠는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성장기의 순수했던 ‘나’에 대한 그리움도 컸을 게다. 고향이란 인간의 욕망이 회항하는 귀소(歸巢)다. 영혼마저 한 자락 실린 고감도의 어떤 차원이다.
한국을 넘어 유럽으로 창작활동의 범주를 확장했던 거목 이응노. 그의 창작력은 한 번 터져 멈출 줄 모르는 활화산처럼 격렬했다. 미술의 온갖 장르를 편력하며 쏟아 부은 다재다능은 또 어떻고? 이 걸출한 화가는 미술에 목숨을 걸어 얻을 걸 다 얻고 돌아갔다.
그러나 ‘이응노의 집’을 건립할 때 눈총들이 쏟아졌다. 싫어하는 소리들과 반대하는 입장들이 분분했다. 이응노라 하면 ‘동백림 사건’부터 떠올리며 ‘불온한 인물’이라 여기는 사람들이 드물지 않았던 것이다. 재판에 의해 왜곡된 혐의는 벗겨졌고, 마땅히 받아야 할 처벌은 2년 6개월간의 옥고로 갚았음에도 여전히 잔존하는 여파. 미술계 내부에서조차 불편해하는 눈들이 있었다. ‘이응노의 집’은 이 일각의 소음과 맞선 단호한 결행으로 건립되었다. 건립 주체는 홍성군 당국. 그들은 2011년, 마침내 ‘이응노의 집’을 개관해 지자체가 멀뚱히 앉아 한심하게도 펜대만 굴리는 ‘철밥통’ 집단이 아니라는 걸 보여줬다.
고개 숙이고 마을 일원으로 끼어든 품새
‘이응노의 집’은 2만6000㎡(약 8000평)의 널찍한 부지에 조성되었다. 991㎡(약 300평)의 미술관을 본동으로 하고 북 카페와 다목적실을 곁에 배치했다. 원래 있었던 지형을 그대로 두고 조경을 한 야외정원은 순박하면서 평온하다. 떠올랐다 가라앉는 상념처럼 일렁이는 정원의 저 부드러운 곡선들. 돌처럼 가만히 앉아 쉬기에 좋은 공간이다. 정원 전면엔 연(蓮)이 자라는 못이 펼쳐진다. 연못과 정원을 거쳐 뒷산으로 흘러들어가는 산책로 역시 그지없이 자연스럽다. 무리가 없어 순리를 느끼게 하는 이 모든 유순한 외경들. 처음 방문한 사람에게 하등의 낯설음을 야기하지 않는 풍경들의 협연. 티 나지 않게 공들인 결과일 게다.
본동 건축을 볼까. 지나치게 크지 않은 사이즈로 지어져 소박하다. 위압이나 위세가 없어 얌전하나 은근히 세련돼 당당하다. 그 무엇보다 멀고 가까운 곳의 지세 성격과 산세 리듬에 조응해 정당하다. 과거부터 터를 잡고 존재해온 마을과 마을 사람들까지 고려한 수굿한 모습이라 안성맞춤이다. 겸손히 고개를 숙이고 마을의 일원으로 끼어든 품새이지 않은가. 이런 구색, 이런 조합이 어디 흔할까보냐. 설계자의 의도가 정밀하게 구현된 걸 느낄 수 있다.
미술관 벽채의 색상을 보자. 황토를 이기고 다져 발랐으니 황토색이다. 굳이 황토를 채택한 건 그게 향토의 빛깔을 뿜어서일 게다. 대지의 살갗 색깔 말이다. 그러나 온통 황토색 일색이면 지루하겠지. 외벽을 분할하며 개입한 흑회색 벽면이 대비와 조화를 이루어 조용히 생동한다. ‘이응노의 집’을 설계한 이는 중견 건축가 조성룡. 그는 건축물이 튀거나 돋보이는 걸 질색으로 여긴다. 인위가 자연을 짓눌러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일 게다. 사람의 기술이 자연과 풍속을 말처럼 타고앉아서는 무례하다 봐서일 게다.
홍성군청과 설계자는 생가 터만 휑하게 남은 부지에서 이응노의 형적을 찾는 일로부터 사업을 착수했을 것이다. 화가는 이곳에서 열일곱 살까지 살았다. 그러나 생가는 물론, 뭐 하나 남아 있는 유적이 없는 상태였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심정으로 생가를 복원했을 테다. 다행히 소년 이응노에게 미술의 싹눈을 틔워준 자연은 옛날 모습 그대로여서 안도하지 않았을까. 나지막한 산들은 충청도 말씨처럼 느릿느릿 푸근하게 품을 펼친다. 저만치 띄엄띄엄 산재한 농가들의 지붕 위로는 새가 기쁘게 날고 솔바람이 감나무를 흔들며 지나간다. 인근에서 소음을 쏟아내며 물방개처럼 허우적거리는 차량만 아니라면 마냥 예스러울 농촌 풍경이다. 이응노는 고향에서의 성장기를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열일곱 살까지 자연 속에서 자랐다. 그림그리기를 좋아했지만 그런 나를 도와주려고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오히려 방해했다. 나는 남몰래 그리고 또 그렸다. 땅 위에, 담벼락에, 눈 위에, 검게 그을린 내 살갗에…. 손가락으로, 나뭇가지로, 혹은 조약돌로. 그러면서 외로움을 잊었다.”
찡하지 않은가. 고향 산천은 이응노를 길러 그림에 눈뜨게 했으나, 다만 홀로 외로이 온갖 것에다 끼적거릴 수밖에 없었다지 않은가. 홀로 외로이! 이는 예술을 부양할 수 있는 본성의 토대이며 모든 인간의 어찌할 수 없는 숙명이다. 이응노는 고향의 자연과 고향 사람들의 당연한 무신경을 통해, 어차피 홀로 가야 하는 창작의 외길을 견딜 고독의 힘과 강철 같은 인내심을 기른 게 아니었을까. 이응노의 광적인 창작 욕구와 믿어지지 않을 지경의 다산성(그는 자그마치 3만여 점의 작품을 생산했다!)의 싹은 이미 고향에서 발아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이쯤에서 이응노의 눈으로 이곳의 평범한 자연을 평범치 않은 기분으로 다시 바라보게 된다. 이응노의 숨결을 느끼기 위해 이곳을 찾아왔음을 상기하며.
그림에 살고 그림에 죽었던 작가
미술관 내부로 들어선다. 로비를 돌아서자 외부처럼 수수한 실내 정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치레와 꾸밈을 한껏 자제해 담박하다. 혹여 전시공간의 장식성이 전시작품으로 향하는 시선들의 집중도를 해할까 염려해 꾸린 의도가 완연하다. 외형에서와 마찬가지로 설계자는 자신의 존재는 물론 공간 자체의 미감까지 과하게 부각되지 않도록 신중한 고려를 했다. 그럼에도 멋 부린 티 없이 멋스러운 게 있다. 벽과 벽 사이에 설치한 대형 유리창으로 들이치는 자연 채광이 자아내는 효과가 그렇다. 빛과 그림자의 대비, 밝음과 어둠의 공존으로 공간에 깊이감과 긴장감을 부여했다.
전시실은 네 개로 구성됐다. 현재 ‘고암 이응노의 사생과 소묘’라는 타이틀의 전람회가 진행 중이다. 전시 작품들은 물론 ‘이응노의 집’의 소장품들이다. 이 미술관은 1000여 점에 달하는 이응노의 작품과 유품을 소장했다. 화가의 유족들과 뜻있는 사람들에 의한 기증품이 많지만 홍성군이 직접 구입한 작품들도 있다. 앞으로도 계속 사들일 작정이라 한다. 군 단위 지자체가 예술품 구입에 적극 나선다? 아마도 드문 일일 게다. 지역 정책에 예술이 가세하고서야 유토피아를 꿈꿀 수 있을 터. 시대를 읽는 홍성군의 촉이 예리하다.
이제 전시회에 나온 그림을 둘러볼까? 해방 이후부터 1950년대 중반까지, 이응노가 전국을 기행하며 사생한 그림들 120여 점을 감상할 수 있다. 습작처럼 가볍게 스케치한 작품들 일색이어서 살짝 아쉽다. 그러나 대가의 노련한 필치와 호방한 운필을 느끼기엔 부족함이 없다. 우리는 흔히 이응노가 말년에 그린 ‘군상’ 시리즈를 기억한다. 하지만 그는 부단히 화풍을 변주하고 전복해 경계를 무너뜨렸다. 어느새 저기까지 갔나 했더니 또 저만치로 내달리는 폭주 열차? 그는 혈관에 팽배한 아드레날린을 주체 못하는 사람처럼 격렬하게 그리고 또 그렸다. 추상미술이 판치는 파리에서 동양의 정신을 기저로 한 ‘문자 추상’ 또는 ‘서예적 추상’으로 유럽 화단의 지지를 받았다. 그의 작품에서 유럽인들은 ‘범신론적 미학’을, ‘주술적 매력’을 발견했다. 주술! 작품 이전에 이응노 자신이 이미 주술의 올가미에 걸린 게 아니었을까. 미술이라는 주술에. 그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나는 그림에 살고 그림에 죽는다.”
이응노의 예술은 만발했다. 그러나 삶엔 그늘이 서려 불운했다. 옥고도 고난이었지만, 이후의 시간들도 밝을 수만은 없었으니. 정치적 파랑에 휩쓸리다 조국을 떠나 프랑스로 건너가야 했으니. 그는 파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토록 그리워했던 고향땅을 다시 밟지 못한 채로. ‘이응노의 집’ 허공에 서늘한 바람 한 점 서성이걸랑 고인을 기릴 일이다. 바람이 그의 기척인 양.
‘이응노의 집’ 설계한 건축가 조성룡
거장의 예술혼을 느낄 수 있도록 설계해
“그거 아는가? ‘이응노의 집’은 참으로 눈물겹게 지은 기념관이라는 거.”
조성룡 선생의 첫마디에 저릿하다. ‘이응노의 집’ 설계자인 그는 건립 과정상의 곡절을 누구보다 잘 안다. “눈물겹게 지었다”는 한마디에 이미 모든 게 들어 있지만, 그는 ‘이응노의 집’이 여느 미술관과 다르게 많은 애환을 거쳐 건립된 공간이라는 걸 놓치지 않길 바라는 것이다.
사실 ‘이응노의 집’은 손쉽게 지어진 기념관이 아니다. “좌파 화가에게 무슨 기념관이냐? 어림없다!” 홍성군에 의해 기념관 기본 계획이 수립되면서부터 일부 주민들 속에서 반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고 한다. 이에 홍성군은 ‘이응노의 집’이 지역의 문화예술 역량을 북돋울 견인차 역할을 할 수 있다며 주민들을 설득했다. 준공 직후에도 논란은 이어졌다. 건축물의 모양새가 너무 소박하다는 비판이 제기된 것. 고암 이응노의 담백한 예술정신을 담고자 한 설계자의 진중한 의도를 납득하지 못했던 셈이다.
“홍성은 고암의 예술혼이라는 켜가 잠재한 곳이다. 나는 그 ‘켜의 드러내기’를 설계의 지향점으로 삼았다.”
‘켜’를 드러내기 위해 어떤 걸 주안점으로 했나? “고암이 성장기에 보고 자란 자연 환경을 존중해 일을 진행했다. 이곳의 수려한 용봉산과 월산은 물론, 평온한 마을 풍경은 한 소년을 예술로 이끌어준 벗이자 스승이지 않았겠는가. 그렇다면 자연 경관을 고려해 건축을 하는 게 필수적이라는 생각이었다.”
건축물은 물론, 군더더기 없이 자연스러운 외부 정원에서도 설계자의 의도가 느껴진다. “관람객이 이곳 쌍바위마을 사람들의 일상적 통행로인 다리와 농로를 거쳐 정원과 만나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그런 동선을 통해야 고암 선생이 늘 바라보았을 시골 풍경의 정취를 누릴 수 있어서다.”
생가 복원엔 본으로 삼은 자료가 있었나? “어느 시골집을 그린 고암의 풍경화를 참고로 했다. 생가 뒤편에서 울타리를 이룬 대숲과 채마밭도 원래 있었을 것으로 가정하고 되살렸다.”
상업적 의도를 중심에 둔 미술관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런 곳에 사람들이 몰려들기도 한다. 이 점에서 농촌의 한적한 자리에 있는 ‘이응노의 집’은 매우 귀하게 느껴진다. “거장의 소장품이 있고, 아울러 자연과 어우러진 풍경이 있는 이 미술관은 특유의 공간이다. 그 무엇보다 고암의 숨결이 배인 장소라 소중하다. 농촌에 있는 미술관치고는 관람객도 많은 편이다.”
조성룡 선생은 소마미술관과 의재미술관도 설계했다. 칠순을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한다. 자신의 건축 철학을 담은 책 ‘건축과 풍화’를 출간하기도 했다. 그는 ‘풍화’의 개념을 이런 요지로 설명했다.
“건축물은 완성되는 순간부터 기의 영향으로 낡기 시작한다. 따라서 가급적 풍화를 지연시키기, 노화가 되더라도 자연스럽게 보이게 짓기. 이게 나의 목표이자 사상이다.”
요즘 여자들이 모였다 하면 빠지지 않고 드라마 '부부의 세계'에 이야기를 나눈다. ‘내 남자의 여자’에서부터 시작돼 ‘밀회’를 거쳐 폭발한 김희애의 불륜 연기는 의사, 음악가 등 고스펙 불륜녀의 다양한 모습으로 형상화됐다.
이번 ‘부부의 세계’에서는 너무 완벽한 삶의 조건으로 균열 하나 있을 것 같지 않던 부부 사이가 어느 한순간 갑자기 남편의 오래된 불륜으로 급격하게 돌기 해 부부의 삶 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의 인생까지 소용돌이치게 되는 부부의 갈등을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다.
사실 간통죄까지 폐지된 마당이라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전대미문의 불륜들이 우리 주위에 넘실댄다. 드라마나 영화가 현실을 따라갈 수 없을 만큼 거침없고 솔직한 불륜들로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내로남불'은 이제 정치적인 은유는 물론 '자기 허물은 보지 못하면서 남의 허물만 나무란다'라는 뜻으로 청소년들까지도 사용하는 대중적 언어가 된 지 오래다.
가만 생각해보면 한국의 중년 여성들에게 '불륜'이라는 단어가 은밀하게 회자하기 시작했던 건 아마 이 영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너무 단아해 불륜이란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여배우 메릴 스트리프가 조용조용 속삭이던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개봉된 지 벌써 25년이 흘렀다.
아일랜드 시인인 예이츠의 시를 읽고 이탈리아 가곡을 듣는 지적이고 단아한 가정주부, 메릴 스트리프(프란체스카)는 아내의 취향은 전혀 모른 채 큰 소리로 떠들고 문을 쾅쾅 닫아 프란체스카를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그런 남편과 살고 있다. 엄마가 이탈리아 가곡을 듣고 있으면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난 자녀들은 요즘 유행하는 팝송으로 재빨리 바꿔버려 집안에서 프란체스카의 자리는 없다.
가족이 모여 밥을 먹는 시간은 서로 나눌 이야기도 없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도 없는 침묵의 시간으로 변한 지 오래. 가족으로부터 존중받지 못한 채 그저 가정생활을 영위하는 부속품처럼 그렇게 하루하루 생활에 찌들어가던 프란체스카에게 어느 날 남편에게서는 느낄 수 없었던 바깥세상의 살아 숨 쉬는 인생을 동경하게 해주는 그런 남자가 불현듯 나타난다.
배경은 1965년, 미국 중부 아이오와주 매디슨 카운티의 조용한 시골 마을.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사진작가 로버트 킨케이드(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조만간 철거될 이 마을의 명물인 로즈먼 다리를 찍기 위해 이곳으로 트럭을 몰고 온다. 낡은 청바지에 셔츠, 니콘 카메라를 메고 프란체스카가 동경하는 세상의 냄새를 풍기며 조근거리는 목소리로 ‘로즈먼 다리가 어디 있냐?’고 물어온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만나는 장면이었다. 마침 남편과 두 아이는 나흘 동안 일리노이주에서 열리는 박람회에 참가하기 위해 길을 떠나 집안은 텅 비어 있었다. 결혼 이후 처음 가족과 떨어져 자신만의 시간을 갖게 된 프란체스카는 로버트가 길을 묻는 그 순간에도 가족들의 빨래를 널고 있었다.
요즘 젊은 친구들에게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지구를 사랑하는 패션 브랜드로 알고 있지만 이 잡지는 지구의 자연을 보호하고 현대화로 사라지고 있는 옛것들을 찾아 기록으로 남겨놓는 전통의 잡지로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격조 높은 잡지다. 그러니 전 세계를 다니며 오지와 천혜의 자연을 촬영하는 로버트라는 사진작가의 영혼이 얼마나 깊고 넓을지 쉽게 상상하고도 남는다.
결혼한 지 15년이 넘어 자신의 꿈을 접은 채 한 남자와 자식만을 위해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던 프란체스카에게 세계의 풍물과 삶의 모습들을 렌즈에 담는 로버트의 인생은 동경 그 자체였다. 프란체스카는 자신이 원했던 삶을 사는 로버트가 부럽기만 했다.
게다가 그와의 대화는 익숙하다 못해 더 이상은 나눌 이야기가 없는 남편과 나누는 대화와는 차원이 달랐다. 문학과 여행, 음악과 미술… 그 자체로서 너무나 환상적인 감정이입의 순간들을 공유한다.
두 사람의 섬세한 감정이 떨릴 듯 화면에 전해지던 장면이 있다. 프란체스카가 로버트를 저녁에 초대해서 함께 부엌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으로 프란체스카는 로버트에게 감자 스튜를 만들어주기 위해 부산스럽기만 하다. 감자는 미국 중부를 상징하는 아이오와주의 대표적인 농산물.
프란체스카의 부산스러움을 느낀 로버트는 “제가 도와드릴까요?” 란 말로 그녀의 맘을 빼앗아 버린다. 너무나 봉건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남편과의 생활에 익숙한 프란체스카는 로버트가 요리를 도와주겠다고 하자 깜짝 놀라며 “요리를요?” “예… 요리를” “당근을 깎아주세요” “이거 말인가요” “예… 끝은 이렇게 다듬어야 해요”
짧은 단답식의 대화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낯선 두 남녀가 한 발짝 한 발짝 자신의 세계를 향해 들어오는 타인에게, 문을 열어주는 과정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고 서로에게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을 부엌에서 함께 채소를 손질하고 감자 스튜를 저으며 그렇게 완성해갔다.
서로에게 배우자가 있다고 해도 어느 날 운명 같은 사랑이 나타날 수 있다. 뒤늦게 사랑의 열병을 앓다 제자리에 도로 주저앉을 수도 있고 또 어떤 이는 운명적인 사랑을 따라 지금까지 가꿔왔던 자신의 세상을 박차고 떠나 새로운 삶을 꾸리기도 한다.
대부분 우리는 순서가 잘못돼 '만났어야 할 운명의 파트너'를 만나 인생을 살고 있기보다 '스치고 지나갔어야 할 그 누군가'를 만나 그것을 '사랑'이라 생각하며 산다. 착각은 이뿐만이 아니다. '사랑'의 완성은 '결혼'이라 믿으며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아 부모가 된다.
이렇게 착각으로 쌓아 올린 결혼이라는 견고한 성안에서 우리는 하루하루 일상을 쌓고 그 일상이 다시 모여져 삶의 결로 퇴적된다. 퇴적된 내 인생의 결이 어느새 작은 봉우리가 되고 제법 봉긋한 작은 산 하나 만들어질 때쯤 우리네 인생은 노년의 삶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오래전 이 영화를 보면서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어버린 중년 남성과 중년 여성의 사랑이란 이런 것일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 당시는 아직 중년의 감성은 아니었기에 100% 감정이입을 못했지만, 육체적 관계의 선을 넘는 것이 아닌 '정신적 교감'을 나누고 ‘시선을 맞추며 안타까워하는 그런 '선'을 나름대로 느낄 수 있었다.
호떡집에 불 난 것처럼 그렇게 부산스럽게 타오르지 않는 사랑, 스튜처럼 오래 끓이며 뭉근히 재료의 맛을 우려내고 깊어지는 사랑. 하지만 ‘불륜’은 그러하지 못할 경우가 많으므로 호떡집에 불 난 것처럼 속전속결로 잡아먹을 듯이 집안을 화염에 휩싸이게 한다.
로버트와 프란체스카는 며칠간의 만남을 통해 서로를 알아가고 대화하며 깊은 울림을 동시에 느낀다. 하지만 자신들의 사랑을 흔히 남녀들이 하는 것처럼 세속에서 이루려고 하지 않는다. 함께 떠나자는 로버트의 간절함을 뒤로하고 프란체스카는 이 작은 마을에 남아 가정을 지키고 자녀에게 헌신한다.
오랜 시간이 흘러 로버트의 유품이 프란체스카에게 도착한다. 로버트가 로즈먼 다리를 찍은 사진이 표지로 담긴 내셔널 지오그래픽 잡지와 니콘 카메라, 그리고 프란체스카가 로버트에게 남긴 다리 위의 쪽지.
프란체스카는 이 유품을 간직해오고 있다가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유서를 남긴다. “살아온 인생은 가족을 위해 살아왔으니 죽은 뒤에는 가족묘지 대신 화장을 해서 다리에 뿌려 달라.”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로버트에 대한 숨겨왔던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다.
영화도 연령대에 따라 감상했을 때 차이가 크게 난다. 예전에는 이 부분이 전혀 가슴에 와 닿지 않았었는데 지금 다시 보니 프란체스카가 자신이 죽은 후, 가족묘지 대신 화장을 해서 다리 위에 유골을 뿌려달라는 말의 뜻이 이제 정확하게 이해된다. 프란체스카는 죽어서까지 가부장적인 가족의 굴레에 매여있기 싫었던 것이다.
그녀처럼 나도 죽으면 화장해서 유골을 태평양에 뿌려달라고 딸아이에게 말했더니 눈을 살짝 흘긴다. 바다를 떠다니며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생각에서 비롯됐는데... 가만, 생각해보면 딸아이가 엄마가 보고 싶을 때 갈 곳이 없어서 곤란하겠다. 이런 생각이 드니 ‘난 또 어쩔 수 없이 엄마구나’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지난 연휴 주말 방영된 ‘부부의 세계’에서 김희애가 자신의 아들에게 ‘살인자의 자식’이라는 멍에를 짊어지게 할 수 없다며 아무도 도우려 하지 않는 전 남편의 알리바이를 증언한다.
뒤를 이어 와인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던 가운데 이미 헤어진 부부가 뜨겁게 키스를 나누는 장면이 나오고 옷이 흐드러진 침대를 보여주면서 끝나 전국의 여성들이 갑론을박 난리가 났다.
한번 갈라진 부부의 길은 다시 합쳐지지 않는다. 잠깐 합쳐지는 듯하다가도 이미 다시 파국을 맞는다. 사랑의 유효 기간이 있기 때문이다. 최고 스펙의 의사도 자신의 감정 다스리기는 어쩌지 못하는 모양이다.
‘부부의 세계’를 시청하면서 ‘사회적 거리두기’는 코로나 19의 극복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부부 혹은 가족 모두에게도 해당하는 말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다 알아야 하고 간섭해야 하고 내 뜻대로 콘트롤 해야 직성이 풀리는 아내들이 의외로 많다. 내 눈앞에서 안보일 때는 어떻게 하는지 몰라도 내 가시권 안에 있을 때는 완벽한 평강공주가 온달에게 시혜를 베푸는 모양새다. 흔히 똑똑하고 성공했다는 고스펙 여성들의 결혼생활은 평강공주 신드롬에 빠져 온달들을 관리하느라 부산스럽기 그지없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부부 사이의 적정한 거리 두기는 결국 나에 대한 객관화로 이어져 보다 성숙한 자아의 실현으로 나아가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 제발, 몰빵 하지 말 것이다.
사랑은 다 가질 수 없어 안타깝고 그래서 귀한 것이다. 오늘을 사는 시니어들은 감자 스튜 같은 뭉근한 사랑을 하고 있을까? 아니면 아직도 프라이팬에 와인을 부으면 불같이 일어났다가 금세 스러지는 그런 불꽃 같은 사랑을 꿈꾸나? 곰곰이 우리 자신을 돌아볼 일이다.
종교를 뛰어넘는 곳에 예술이 있을 것이다. 예술이란 자유로운 정신의 산물이기에. 그 어떤 권능에도 휘둘리거나 꼬리치지 않는 자율적 행위이기에. 그러나 자유 혹은 자율을 근간으로 삼기가 쉽던가. 매사 스텝이 꼬이고 뒤엉겨 좁은 세계에 갇히는 게 사람이다. 신의 이름을 간절히 불러 위안을 구하고서도 돌아서면 외로워 보채는 게 사람이다. 도돌이표처럼 자주 되돌아오는 자문은 하나. 나는 누구인가?
경주시 남산 자락 소나무 숲속에 사는 정미연(65)은 성화(聖畫)로 이름을 얻은 화가다. 얻을 만하기에 얻은 이름이다. 무겁지 않을까, 이름이라는 것. 얻으면 얻을수록 어깨에 얹히는 하중도 커지는 게 이름이다. 더구나 성화란 성(聖)을, 지고지순을, 염결(廉潔)을 구현하는 그림이니 속세에 몸을 둔 화가로서는 얻는 게 있을수록 버거워 불편감에 사로잡힐 수 있을 게다. 그림은 고결하나 삶은 어이 부박한가? 이런 의문이 들솟아서.
그러나 그는 세속을 어지간히 건넜다고 한다. 신앙으로, 기도로, 그림으로 부박한 삶의 때를 어지간히 헹구어 이젠 마음의 소란이 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갈 길이 멀다. 어지간히 건넜다는 안도감, 그게 때로 순간의 착시처럼 흩어지는가. 그는 여전히 남은 갈등과 갈증을 해 저물기 전에 처리하고 싶다. 살면서 내내 움켜쥐었던 ‘나는 누구인가?’라는 화두를 더 옹글게 타야 할 필연을 느낀다는 거다.
“어떤 선각자가 말했다. 인생은 선반 위에 내려앉은 먼지를 닦는 것과 같다고. 잠시라도 닦지 않으면 먼지가 쌓인다고. 실로 그렇다. 잠시만 방심하면 유혹이 스며드는 게 인생이지 않던가. 내 안의 나는 누구인가? 나는 줄곧 그런 물음을 품고 살아왔다. 신앙으로 그 답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마음 안에는 여전히 갈등이 도사려 있다. 갈등과 자주 싸운다.”
“당신이 알아낸 당신은 누구인가?”
“창조주의 피조물이다. 여기엔 아무런 회의가 없다. 신의 사랑 속에서 살고 있다는, 내 존재의 근원이 창조주와 연결돼 있다는 확신이 깊어져서다. 그러나 여전히 삶에 서툴다. 나는 누구인가 파고들어 매번 깨닫는 또 하나의 진실은 내가 부족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신달자 시인은 정미연의 성화가 ‘천상의 모습은 물론, 천상의 평안마저 확신을 가지고 바라보게 한다’고 극찬했더라. 성화가 지닌 감화력의 원천은 어디에 있다고 보나? 작가의 기량? 태도?”
“나에게 성화 그리기는 기도다. 신앙이 무르익기를 염원하며 그림을 그린다는 얘기지. 절실한 신앙으로 영성을 갈구하는 마음, 정신, 그런 게 그림에 담기기를 희구해왔다. 이 과정에서 작으나마 성취가 있었다면 그건 주님이 주신 선물일 뿐이다.”
“화가란 천성적으로 일탈자일 수 있다. 어떤 규율에 길들여지기를 싫어하는 성향이 있지 않던가. 종교생활에서 오는 구속감이 따분하진 않나?”
“초기엔 구속감이 싫었다. 아이고, 나 늙으면 열심히 믿을래! 그런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웃음) 그러나 모든 게 운명처럼 돼버렸다. 성화 작가로 자리매김이 되면서 빼도 박도 못할 상황에 들어가게 되더라. 그 역시 신의 사랑이었다. 결국은 신앙의 진정성, 나의 정체성을 확보하게 되었으니까. 그러나 생래적으로는 좀 도발적이지.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는 싸움도 불사하는 기질이 다분했거든.”
“가령 어떤 싸움?”
“나의 아버지는 완고해 딸의 미대 진학을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법대에 가 법관이 되길 바라는 일념으로. 그러나 난 삐딱선을 탔다. 미술에 품은 뜻을 굽힐 수 없어 정면으로 맞붙어 결국은 고집쟁이 아버지를 꺾었다. 그 시절의 기질대로 살았다면 성화를 그릴 수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묵주기도책과 성화
아비들은 흔히 살아온 공력으로 현명하나 고루하다. 외눈으로 자식을 바라봐 일방적인 통제와 선동을 일삼기 십상이다. 사막에서 태어난 아이에게 물고기처럼 수영하길 바란다. 그러나 그 역시 사랑이 아니라 할 것도 없다. 모순이 없는 사랑이 있던가. 신의 사랑으로 사는 정미연의 눈은 광각렌즈라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서 사랑을 발견한다. 그러하니 완고했던 아버지를 두고서도 사랑 이외에 무엇을 더 말하랴. 어머니는 온전한 사랑의 화신이었던 모양이다. 살아생전 ‘성모님’이라 불린 분이었다지. 결혼 전 가톨릭에 입문했으나 ‘한동안 날라리 신자로 살았다’는 정미연이 성화를 그리기 시작한 건 그 어머니가 남긴 묵주기도책 때문이었다.
“심한 관절염으로 30여 년을 걷지 못한 채로 지내면서도 8남매를 어엿하게 길러낸 어머니였다. 노년엔 촛불을 밝히고 앉아 묵주기도를 바치는 일로 일관하셨지. 어머니의 표정도 기운도 얼마나 맑았던지, 어린 내 가슴에 어머니를 향한 애정과 갈증이 일렁이곤 했다. 사람들이 찾아와 절을 올리는 일도 잦았다. 그런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낡은 묵주기도책을 펼쳐들었는데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그게 성화를 그리기 시작한 계기였다.”
“어머니가 남긴 성스러운 이미지에서 성화 그리기를 착상했다는 얘기?”
“그것만은 아니다. 묵주기도책을 만들어 어머니 영전에 봉헌하고 싶었다. 묵주기도책은 성모님과 예수님의 일생을 그린 성화와 묵상기도문들로 이루어지는데 성화를 내 손으로 그리고 싶었던 거다. 완성까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죽을 만치 앓기도 했다. 기도문은 신달자 선생이 맡아주셨다. 과분하게도 많은 사람이 이 책을 주목했다. 가톨릭 성도들에게 묵주기도책은 흔히 후손에게 상속할 신앙의 유산이자 가보로 간주된다.”
성화로 방향을 바꾸기 이전, 정미연의 그림은 사뭇 달랐다. 아름답거나 미묘하거나, 억눌리거나 튀어나오거나, 인간이 지닌 복잡한 내면을 자유분방한 혹은 고즈넉한 작풍으로 표출하기에 능했다. 그러다가 기도와 관조를 실은 성화로 이행했던 것. 그런데 묵주기도책을 위한 성화를 그릴 때 정미연은 한 가지 재미있는 발상을 했다. 기존 성화들이 답습해온 서구적 양식에서 좀 벗어나 한국적 전통 양식을 가미하자는 착안을 했더란다. 그는 예수의 옷을 한복으로 갈아입혔으며, 성모에겐 잔주름 곱살한 한국 어머니의 얼굴을 부여했다. 석굴암 전실이나 에밀레종 비천상을 성화에 끌어들이기도 했다.
“한국적이고 토착적인 성화를 그리기 시작했지만 불안했다. 이거 제대로 그리는 거 맞아? 혼자 고민하다 정교회 한국대교구 소티리오스 트람바스 대주교님(91, 그리스 태생)이 미술에 조예가 깊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가 감수를 청했다. 그림을 본 대주교님께서 흡족해 이러시더라. ‘나를 아버지로 여기라!’ 이후 각별한 은혜를 입었다. 그분의 소박한 삶과 실천에는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어떤 분이기에?”
“하염없이 높은 분이 늘 하염없이 낮은 자리에 임하셨다. 생활부터 극도로 검소해 입은 옷은 바늘로 꿰맨 자국투성이였다. 조용한 눈빛과 절제된 언어엔 자비와 존엄이 서려 세상 사람 같지가 않을 지경이었지. 신령스럽다, 그런 표현이 맞을라나?”
“깨달은 사람들 중에 어떤 이들은 천진한 어린애로 돌아간다고 들었다. 삶에 대한 모든 욕심과 의문이 사라져서.”
“영성으로 충만한 존재. 대주교님은 그런 분이었다. 그저 소리 없이 빙긋이 웃어주시는 표정만으로도 깊은 위안과 기쁨을 느끼게 했다. ‘제가요, 당뇨도 있고요, 약도 한 움큼씩 먹고요, 저 앞으로 어떡해요?’ 그렇게 내가 방방거리면 ‘오늘 하루의 걱정거리는 오늘 하루로 족해!’ 하시더라. 내일 일을 미리 걱정할 것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면 내 안의 근심이 순간에 스르르 녹아 사라지는 게 아닌가. 이 특별한 분과 함께 그리스의 수도원들을 한 달간 순례하기도 했는데 실로 값진 여행이었다.”
“수도원 순례라. 문외한들은 생각하기 힘든 여행이다. 정결하고 엄숙할 수도원의 무거운 공기부터 연상돼서.”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봉쇄 수도원에 머물기도 했다. 대주교님과 동행했기에 가능한 여정이었지. 며칠씩 머무는 곳마다 나를 사로잡더라. 고뇌와 기쁨으로 신을 찬미하는 수도자들, 헌신을 다투고 사랑을 경쟁하는 수녀들, 성스럽고 아름다운 미사, 놀라운 성화들, 고요한 밤에 은총처럼 창밖으로 내리는 눈송이…. 성모님의 음성이 나를 부르는 것 같은 전율을 느끼곤 했다. 무지렁이 같은 나를 보듬는 예수님의 손길을 깨닫기도 했다. 귀국해서는 평화신문에 순례기를 연재했지. 대주교님께선 글을, 나는 성화를 맡았다.”
고통은 신에게 더 가까이 가는 기회
민첩한 거동, 자주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 분위기에 생기를 집어넣는 순간순간의 센스. 돌돌돌 명랑하게 흐르는 시냇물쯤? 그의 언동엔 거침이 없어 청명한 물살을 연상시킨다. 기도로 진리를 간구하고, 성화 그리기로 영성에 찬 삶을 갈구해왔으니 파란만장 세상사야 이미 관통해 가뿐한가? 그는 ‘모든 것이 주님의 선물’이라는 믿음과 실감으로 기쁘다지. 기쁘기에 평화로운 내부엔 에너지가 샘물처럼 고인단다. 흔히들 방울방울 피를 뿜듯이 진을 빼며 그림과 씨름하지만 그는 색과 선을 거침없이 쏟아낸다. 에세이도 많이 썼다. 그간 여러 권의 서화집을 출간했다.
“내가 다작을 한다. 일단 구상을 하고 나면 작업에 속도가 붙어 손쉽게 그림을 완성한다. 남편의 적절한 통제가 아니었다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 몰입이 지나쳐 건강을 해쳤거든.”
“고 김수환 추기경을 기리는 기념관엔 당신이 만든 성상(聖像) 조각 작품들이 들어가 있다. 성화 작가로서 독특한 위상을 차지한 셈이다.”
“이름이나 위상에 무슨 의미가 있겠나. 미술계에선 성화를 쳐주지도 않는다. 외도로 여긴다. 한때 이름에 욕심이 생기기도 했지만 낮은 자리로 내려가는 게 본분임을 알고선 부끄러웠다. 성화는 순수하지 않으면 그릴 수 없다. 영혼을 다한 작업을 하지 않으면 성화가 나올 수 없거든.”
“사람이 순수할 수만 있겠는가? 진정으로 순수해지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던걸. 신의 숲, 그 안전지대에 들어간 당신은 어떤가?”
“아집과 불순에 휘말린 마음이 망둥이처럼 날뛰기도 한다. 그러나 믿는 자는 믿으면 믿는 대로 된다는 걸 알기에 믿음의 힘으로 망둥이놈을 수월하게 밀어내지. 진실한 신앙인들은 안다. 천사가 늘 우리를 보호한다는 걸. 기적은 성경 안에만 있지 않다. 삶이란 온통 기적이지 않던가? 그렇지 아니한가? 날마다 이어지는 우리의 들숨과 날숨 자체부터가 기적이지 않은가. 세상엔 위선과 탐욕이 횡행하지만 삶을 기적으로 받아들일 경우엔 부정적인 마인드라는 게 들러붙을 자리가 없어진다.”
“인도의 어떤 수행 무리는 이런 노래를 부른다. ‘신이여,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데 왜 이토록 외롭죠? 왜 이토록 괴롭죠?’ 천사가 우리 곁에 있을지라도, 세상의 암초에 부딪히지 않기 위해선 홀로 고통스럽게 계속 노를 저어갈 수밖에 없는 게 인간의 초라한 숙명이지 않나?”
“삶은 고통스럽지만 나는 고통을 고통으로만 받아들이지 않는다. 신에게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경로이자 기회로 삼는다. 신을 섬기는 자에게 극복하지 못할 고통은 없다. 있다면 그건 신의 소관사항이지. 신에게 맡기면 그만이지. 그렇다면 삶을 통째 긍정하지 못할 게 뭐란 말인가. 부족한 나는 부끄러워 성경 한 구절의 말씀이나마 실천으로 이루고자 노력한다. 이젠 더 먼 길을 떠나고 싶다. 삭발 수도자로 살고 싶다. 그렇게 될 거다. 가족은 어쩔 거냐고? 부부가 함께 간다. 남편도 공감하니까.”
그는, 나다운 나를 찾아가는 삶에 올인하는 거다. 내 삶이 꼬였다 느껴지는 건 내가 나를 잘 모른다는 걸 알 때다. 어라, 내가 생각했던 내가 아니네? 이 새삼스러운 발견은 괴롭지만 문제를 풀 실마리? 정미연의 드라마는 ‘나는 누구인가?’에서 시작해 다시금 ‘나는 누구인가?’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흘러간다.
자격증에 관심을 두는 중장년이 늘어났다. 젊은이들이 취업을 위한 스펙 쌓기의 도구로 자격증을 취득하듯, 시니어 역시 재취업을 위한 발판으로 여기곤 한다. 그러나 노소를 떠나 무분별한 자격증 취득은 시간, 돈 낭비에 그치기도 한다. 2019년 등록된 자격증 수는 3만2000여 개. 관심 있는 자격증 정보를 선별하기도 쉽지 않다. 이에 고민인 중장년을 위해 자격증을 분야별로 나눠 총 9회에 걸쳐 알아봤다. 이번 호에는 연재 마지막 순서로 그동안 다루지 않았던 인기·유망 분야에 대해 소개한다.
자료 제공 및 도움말 서울시어르신취업지원센터, 한국산업인력공단, 한국직업능력개발원
2019년 6월 고용노동부와 한국산업인력공단이 발간한 국가기술자격 통계 연보에 따르면, 국가기술자격의 응시자와 취득자는 매년 늘고 있다. 중장년층 역시 제2직업을 위한 스펙 마련을 위해 다양한 자격증에 도전하는 추세다. 2018년 기준 50대 자격증 취득자 수는 전년 대비 7% 증가했고, 60세 이상의 경우 무려 30%가 증가하며 전 연령대에서 가장 빠른 성장세를 보였다.
취업 지원 누리집 워크넷 기준 자격증과 관련된 구인 건수는 28만1675건(23.8%)으로 4건 중 1건가량은 채용 시 자격증을 요구하거나 우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더불어 구인 건수가 많은 자격이 대체로 취득자도 많은 상황이다. 이를 토대로 고용노동부는 취업이 잘되는 자격 10선(구인 공고가 많은 자격 기준)을 [표1]과 같이 발표했다.
구인 공고와 별개로 2018년 기준 자격 취득 현황을 보면 30대 이상 모든 연령층에서 지게차운전기능사 취득이 가장 많았다. 연령대별로 살펴보더라도 50세 이상의 취득 종목 1위는 지게차운전기능사였다. 한식조리기능사, 굴삭기운전기능사 등은 그 뒤를 이었다.
PART1. 국가공인자격
상위를 차지한 자격에 해당하는 업종들의 경우 관련 법률에 따라 자격증 취득자를 고용해야 하기 때문에 그 비율이 높을 수밖에 없다. 앞서 소개한 목록에는 없지만 근래 들어 주목받는 국가공인자격 중에는 ‘드론(초경량비행장치) 조종자’(교통안전공단)가 있다. 올해 한국고용정보원이 발표한 ‘미래가 온다 새로운 직업이 뜬다’와 ‘4차 산업혁명 시대 내 직업 찾기’ 등에서도 드론전문가는 유망 직업으로 손꼽혔다. 단순히 촬영 도구의 일부가 아닌 재난 현장에서 사람을 수색하거나, 먼 섬에 택배를 보내고, 논밭에 비료를 뿌리는 등 다양한 업무에 접목이 가능하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드론 자격 취득자, 드론 장치신고 건수, 사용자 업체 수 등이 빠르게 증가하는 등 그 활용 범위가 점차 늘어날 전망이다.
[자격증 돋보기] 드론전문가가 하는 일은?
크게 드론조종사와 드론개발자로 구분한다. 드론조종사는 드론에 부착된 촬영 장비를 조작해 항공 촬영 및 측량, 농약 살포, 택배, 군사용 무인기 조종 등의 업무를 맡는다. 드론체험교실 등 관련 수업을 진행하기도 한다. 드론개발자는 새로운 드론을 개발하거나 성능 향상을 위한 연구에 힘쓴다. 군사, 촬영, 스포츠, 관측, 정보통신, 배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응용 장치를 개발한다.
2018년 각종 자격증 취득 현황에서 1순위를 기록한 지게차운전기능사의 경우 전체 취득자 3만6441명 중 남성이 3만5819명으로 98%를 차지했다. 그에 반해 여성의 경우 상위 5개 종목 중 1위 한식조리기능사를 제외한 4개 종목이 모두 미용사 자격이었다(미용사 일반, 네일, 피부, 메이크업 순). 물론 두 자격증 모두 젊은 층이 주를 이루지만, 제2직업이나 창업을 위해 관심을 두는 중장년도 적지 않다. 다만, 합격률이 높지 않은 편이고, 실기가 중요한 분야인 만큼 기술을 익히고 실전에서 발휘하기까지는 시간 투자를 해야 한다.
3D 프린터 관련 자격에 주목하라
지게차운전기능사나 미용사의 경우 오랜 세월 익히 알려진 자격이라면, 드론처럼 새롭게 뜨는 자격이 있다. 바로 3D프린터운용기능사다. 3D 프린팅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제조, 건설, 의료, 로봇, 자동차 등 다양한 산업에서 모형 제작이나, 부품과 제품을 만들기 위해 3D 프린터를 사용하며 응용 분야가 확대됐다. 이에 관련 제조업체나 콘텐츠 사업도 많아졌고, 3D 프린터 산업 시장의 매출도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추세다. 세계 각국은 물론 우리나라도 3D 프린터 산업 육성과 전문 인력 양성에 박차를 가하며, 2018년부터 3D 프린터 관련 자격증을 시행하게 된 것이다. 지난해 1회 시험 결과만 놓고 보면 아직 중장년에겐 자격증 취득이 쉽지 않아 보이지만, 전도유망한 분야인 만큼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여볼 만하다.
PART2. 민간자격
과거에 비해 기술이 발달하면서 매해 새로운 직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과거 유망했던 직업들은 하나둘 퇴보하거나 사라지고, 관련 분야에 종사했던 중장년들은 더 이상 경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곤 한다. 이에 자신의 커리어에 접목해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고자 다양한 민간자격을 준비하는 이가 늘고 있다. 한국고용정보원에서 발간한 ‘미래가 온다 새로운 직업이 뜬다’를 살펴보면 신체 건강을 넘어서 정신과 마음 건강까지 살피는 직업들이 눈에 띈다. 웰빙, 힐링,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 등을 중시하는 현대인들의 모습이 반영된 결과다. 모바일건강관리코치, 음악치료사, 식생활지도사, 라이프코치, 수면컨설턴트, 자살예방상담가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특히 중장년의 경우 직업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취미 또는 자신의 심신 건강을 위해 이러한 자격증에 도전하는 이가 많다. 그 밖에도 애견산책도우미, 김치소믈리에, 유품정리사, 조부모-손자녀 유대관계 전문가, 층간소음관리자, 디지털장의사 등이 새로운 직업으로 소개됐다. 이들 직업에 도전하려면 관련 민간자격을 찾아보게 되는데, 한국직업능력개발원 홈페이지 민간자격 검색 서비스를 이용하면 된다. 검색창에 키워드를 치면 수많은 기관에서 시행하는 자격들이 나온다. 이 중 취득을 목적으로 한 자격을 고를 때 다음 사항을 확인해보면 좋다.
민간자격 취득 시 꼭 확인할 사항
첫째, 민간자격의 등록 여부와 공인 여부, 광고에 나온 문의처가 해당 자격을 등록한 업체와 동일한지 확인하기.
둘째, 검정료 외 교재비나 수강료가 있는지, 취득 이후 별도의 등록비나 회비 등을 요구하지 않는지, 변심 또는 불만 등의 이유로도 환불이 가능한지 확인하기.
셋째, 광고 내용과 같이 실제 자격이 활용되고 있는지 본인이 취업하려는 곳에 직접 문의해 확인하기.
나른한 퇴근길, 서울 지하철 1호선 전동차 안에서 그를 보고는 자동으로 인사했다. 생각해보면 그는 어린 시절을 함께한 참 오랜 친구였다. 뽀뽀뽀 체조로 아침잠을 깨면 항상 볼 수 있던 뽀병이었고, 주말 밤에는 두루마기나 정장을 입고 앵커석에 앉아 “지구를 떠나거라~” 혹은 “나가 놀아라~” 같은 유행어를 쉴 새 없이 제조하던 웃긴 아저씨였다. 문득 생각하니 이런 특이하고, 특별하고, 독보적인 캐릭터가 존재했었나 싶다. 지금은 그때의 기운 센 스타 말고 세월에 깎이고 다듬어진 신사가 되어 지하철 옆자리에 앉았다. 달리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우리나라 시사풍자 개그의 효시이자, 명심보감 전도사, 조선대학교의 김병조(金炳朝·69) 특임교수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 서울역사에서 김병조 교수를 다시 만났다. 지하철에서 묵례만 하고 헤어졌던 짧은 만남을 이야기하며 정식으로 인사를 나눴다.
“인기에 연연해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알아본다고 기뻐하거나 알아보지 않는다고 서운해하지 않아요.”
지방 강연이 있는 날이면 용산역이나 서울역에서 KTX를 이용한다. 인터뷰가 있던 날도 대구가톨릭대학교에서 강연이 있다고 했다. 개그맨에서 교수로 직업의 영역은 달라졌지만 비슷한 점이 많다. 사람들 앞에 선다는 것, 그리고 명심보감과 함께한다는 점이다. 옛 기억에도 그는 어렵고 긴 한문 구절을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막힘없이 읊곤 했다.
“방송하던 시절에는 재미있으면서도 유익한 코미디를 만들고 싶었어요. 마침 제 뜻에 공감하고 좋아하는 피디 한 분이 계셨습니다. 방송도 공익을 위한 것이니 교육 기능을 강조해야 한다던 분이셨죠. 고전에서 취득하자고 해서 명심보감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됐고, 지금까지 제 평생 함께하고 있습니다.”
한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얄개
선비 집안의 장손인 김병조는 어려서부터 벗삼던 명심보감을 개그 소재로 삼았다. 작가가 써주는 것을 기다리기보다 아이디어를 발굴해 글을 쓰고, 시사 개그의 앵커 멘트를 고쳤다. 짧고 간결하지만, 속 시원하게 긁어주는 이야기에 많은 시청자가 귀 기울였다. 그가 진행했던 ‘일요일 밤의 대행진’은 7년 동안 평균 70%의 시청률을 기록한 시사 풍자 프로그램이었다.
“제 대본은 거의 다 제가 썼습니다. 고서 인용만이 이유는 아니었어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청중 앞에 섰는데, 그 끼는 타고난 것 같아요. 면 단위 동네에서 아주 유명했습니다. 사회도 보고, 응원 단장도 하고, 웅변대회에서 상도 타고 말이죠. 아주 오랜 경험이 쌓여 있었으니 사람들을 웃길 자신이 있었어요. 작가가 써준 대본을 수정할 경우 양해는 구했죠. ‘내가 고쳤는데 만약에 대사가 재밌고 유익하면 용서해달라’고요. 당연히 재밌지.(웃음) 작문에도 재능이 있었거든요. 개그맨은 작가적 소양을 지닌 연기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 전신인 서라벌예술대학에 진학했다. 원래는 육군사관학교를 지망하던 우등생. 서울대학교를 바라봐도 될 성적이었다. 하지만 어려운 집안 형편에 전액 장학금으로 공부할 수 있는 대학교에 가야만 했다. 서울대 합격률이 높은 광주일고 대신 육사 진학률이 좋은 광주고등학교를 선택했다.
“육사에서 장학금 받을 정도면 연극영화과 학교에 가도 장학금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무엇보다 영화와 연극을 좋아했습니다. 대학에 입학한 후 1학년 1학기 때 과 수석을 제외하고 4년 내내 학년 수석을 했습니다. 장학제도가 다양하지 않던 시절 전액 장학금을 받을 방법은 학년 전체 수석이었습니다. 정말 공부만 했어요. 4년 동안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에 뉴스 형식의 시사풍자 프로그램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많은 자양분이 됐습니다.”
김병조의 인터뷰에 단골로 나오는 이야기는 한학자 아버지와 가난에 대한 내용이다. 이번에도 지나치지 않았다. 고희가 다 된 나이에도 가난했던 얘기를 굳이 또 꺼내느냐는 사람도 있겠지만 김병조는 가난했던 그 시절이 어두웠거나 피해가고 싶은 시간들이 결코 아니기에 마음놓고 말할 수 있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는 스타가 될 사람이 아닌데 스타가 된 유일한 사람일 겁니다. 꼬장꼬장하고 성격도 강했죠. 타고난 재능과 끼가 있어서 연예인의 삶을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덕망 쌓는 것에 더 관심이 많았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제 인생에서 고맙게 생각하는 부분이 바로 가난한 선비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가난하면 비관하고 항거하고 투쟁하는 쪽으로 이끌리는 경우가 많은데 그저 수용했습니다. 제가 너그러워질 수 있었던 것도, 전철을 타고 다니는 것도 복 받은 거죠. 집에 있는 가래떡이나 김만 봐도 너무 좋습니다. 제 행복의 비법은 어려웠던 때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귀이망천자불구(貴而忘賤者不久), 사람들은 성공하면 어려운 시절을 잊어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공이 오래가지 못하는 거예요.”
젊은 시절 ‘배추 머리’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김병조는 방송 활동 내내 톱스타 중에서도 톱스타였다. 어린이 프로그램과 시사 코미디를 넘나들며 모든 세대의 사랑을 받던 슈퍼스타였다. 광고모델로 억대 출연료를 받은 연예인으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그가 등장하는 프로그램은 폭발적인 시청률을 자랑했다. 대체할 만한 인물도 없었다. 한학을 바탕으로 시청자를 배꼽 잡게 하는가 하면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전달하며 사람들을 들었다 놨다 하던 이. 말 그대로 김병조 전성시대였다.
그날 이후, 다른 삶을 살다
1987년 6월 10일. 이날을 기점으로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진일보했다. 김병조는 이날의 사건으로 삶을 정리하고 돌아봐야 하는 상황에 봉착했다. 현대 역사의 결정적 장면과 맞물려 제대로 된 소명 한 번 못해보고 시대의 막을 내려야 했다.
“당시는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혼란한 시절이었죠. 그날은 집권 여당의 전당대회로 대통령 후보를 뽑는 날이었어요. 당원들이 모여 투표하는데 누구 아이디어인지 축제와 함께 진행을 한 거예요. 당대 최고가수도 불렀고 저도 개그맨으로 참석해 달라고 해서 갔습니다. 정당 측에서 코미디를 잘 모르니까 저한테 한 3분 정도 웃길 내용을 적어오라고 하더군요. 대본을 써가지고 보여줬더니 거기다가 뭘 또 적어주더라고요. 그 내용을 보고 사실 대단히 놀랐습니다.”
거기에는 집권 여당을 옹호하고 야당을 폄하하는 발언이 들어 있었다. 단 몇 초 분량의 내용이었지만, 읽어야 할 사람이 대중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던 김병조라는 게 문제였다.
“전당대회에서 대본을 읽기 전까지 얼마나 고민을 많이 했는지 몰라요. 최종적으로는 제 잘못이죠. 과감하게 ‘못합니다’ 하고 거절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정말 후회됩니다. 선비 집안의 장손답게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지 말았어야 해요. 저는 정치투사도 아니고 한 집안 가장이었어요. 또 늘 그래왔듯 대본대로 읽어야 하는 연예인이었습니다.”
당원들끼리 하는 내부 행사라서 방송 전파를 타지 않았지만 한 일간지에 그가 한 말이 보도되면서 일파만파로 사건이 커져버리고 말았다.
“자숙의 기간이 필요해 방송을 쉬고 싶다고 했는데 쉬는 것조차 어렵더라고요. 우리 집사람까지 나서서 ‘원하는 멘트를 했으면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항의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정치인들은 문제를 확대해서 자기네한테 유리한 정쟁으로 삼고 싶었던 것이죠. 잘 모르는 분들은 그 당시 제가 방송계에서 퇴출당한 것으로 생각하시는데 스스로 관둔 게 맞습니다. 그 사건 이후 정치권의 제의도 있었습니다만 다 거절했습니다. 또 방송에도 복귀했지만 실의를 느꼈습니다.”
SBS가 개국하면서 자리를 옮긴 김병조는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전성기 못지않은 사랑을 받았지만, 이미 방송에 대한 매력은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황이었다.
“마침 그때 KBC 광주방송이 개국했습니다. 노래자랑 프로그램 ‘열창 무대’ MC를 맡아 달라는 부탁을 받았어요. ‘잘됐다! 고향의 방송을 하자!’ 하고 갔습니다.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요. 그리고 조선대학교에서 강의 요청도 해왔고요.”
조선대학교에서 강의를 한 지도 벌써 23년째다. 평생교육원을 시작으로 학부와 대학원을 두루 다니며 강의를 해왔다.
199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그의 모습이 시청자들 눈에서 서서히 멀어져간 과정은 그러했다. 몇 해 지나고 개그맨이 아닌 대학교수가 되어 나타난 그는 어딘가 모르게 많이 달라져 있었다. 젊은 시절 흑발의 보글보글하던 머리카락은 단정한 커트의 은발이 됐다. 푸짐해 보이던 몸은 마라톤으로 다져 보통의 건강한 체격으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그 시절 그 사건의 스트레스로 오른쪽 눈은 결국 실명됐다. 그래도 사는 데 불편함은 없다고 했다. 혼자서도 잘 걸어 다닌단다. 당시 정치 상황에 휘말리지 않았어도 그는 지금의 길을 택했을까?
“가르치는 것이 꿈이었어요. 방송에 몸담고 있을 때도 어머니 교실이나 어린이 교실에서 봉사활동을 많이 했죠. 지금 제가 가고자 했던 길을 가고 있으니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그때 그 사건마저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당시 그 기사를 쓴 기자와 기사가 제 스승이에요. 정말 고맙습니다. 진심으로요.”
아들, 손자, 며느리와 함께 ‘시래기톡’
요즘 김병조가 강의 외에 집중하는 건 바로 작년 10월부터 아들과 함께 하고 있는 인터넷 방송이다. 카카오TV와 유튜브에 ‘시래기톡’이라는 채널을 개설해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는 세대 공감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왜 방송 이름이 ‘시래기톡’일까. 파릇파릇했던 배추 머리가 세월이 흘러 묵직하고 담백한 맛과 향을 내는 시래기로 탄생했다는 의미다. 지금의 김병조에게 딱 어울리는 별명인 듯하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유품을 정리하다가 살아생전의 목소리가 녹음된 카세트테이프를 발견했어요. 산소에 모시고 서울로 올라오면서 차에서 카세트테이프를 들으면서 엉엉 울었어요. 그 카세트테이프를 CD로 구워두었죠. 제가 올해 칠십인데 아버님이 일흔둘에 돌아가셨어요. 어느 날 아들이 ‘우리 아버지도 돌아가신 할아버지 나이가 서서히 되어가시네’ 하더라고요. 뭔가 남기고 싶었나봐요. 아들의 생각과 명심보감 구절을 포함해 젊은이들 대상으로 강의하면서 제가 느낀 것들을 영상으로 제작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자기 눈으로 보지 말고 상대의 눈으로 보고 다름을 인정하자’가 시래기톡에서 추구하는 의미란다. 아울러 유튜브 채널을 통한 한학의 대중화에도 기여하고 싶다고 했다.
“이런 의미 있고, 온고지신(溫故知新) 같은 방송도 있어야죠. 훌륭한 일을 하고도 대우받지 못하는 어른 세대와 희망과 꿈이 있음에도 제대로 펼치지 못하는 젊은 세대에게 용기를 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방송은 제 유언이기도 합니다. 남기 유(遺), 말을 남기는 것이죠. 먼 훗날 세상을 떴을 때 아들이 우리 아버지의 철학이 여기에 있었구나. 그렇게 생각해주면 좋고요.(웃음)”
아버님이 카세트테이프에 목소리를 남겨놓은 것처럼 그의 이야기도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나 같은 사람 한 명쯤은 있어야 한다’가 제 철학입니다. 진분수 같은 삶을 살고 싶죠. 가식과 허황한 사람이 주목받는 세상에서 있어도 없는 듯 낮추고, 줏대 있는 가난을 선택하며 살고 싶습니다.”
신중년들의 재취업은 하늘의 별 따기. 수명은 길어지고 건강나이는 늘어 정년 후에도 뭔가 일거리를 찾아야 한다. 어떻게 찾을 것인가? 틈새나 새로운 시장을 창의적으로 개척해 성공한 신중년들의 경험담은 더없이 좋은 사례다. 이러한 점에 착안한 고용노동부와 한국고용정보원(원장 이재흥)은 “창의와 도전으로 시작하는 인생 3모작” 신중년 창직 포럼을 9월 17일 aT센터(서울시 양재동)에서 개최했다.
꿈과 아이디어 그리고 도전정신으로 인생 3모작에 성공한 신중년 사례를 확산하기 위해 마련한 포럼이다, aT센터 세계로룸을 꽉 채운 방청객의 높은 관심 속에 진행됐다. 새로운 도전의 필요성과 의미 그리고 인생 3모작을 앞둔 신중년들이 준비해야 할 것에 대한 기조강연을 시작으로, 새롭게 경력개발을 시도한 신중년 4인의 사례 발표와 질의응답 토크쇼로 이어졌다.
기조 강연에 나선 백만기(67세) 인생학교 교장은 은퇴 후 행복한 삶을 위해 필요한 조건과 마음가짐, 일을 통해 가치를 추구하는 방안을 들려주었다. “30년 가까이 금융회사에서 일한 뒤, 지역사회에 기여하기 위해 인생학교를 설립했다”며 “먹고 사는 일, 재미있는 일, 의미 있는 일, 이 세 가지가 부족함 없이 균형을 이뤄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강조했다.
첫 번째 사례발표는 수다나무협동조합 홍성화(58) 이사장은 “꿈과 사회적 가치를 함께 완성하는 인생 후반”을 주제로 취약계층 관련 시설과 학교 등 공공시설 환경 개선을 위해 협동조합을 운영하는 사례를 구체적으로 발표해 도움을 주었다. 창직은 “내게 필요하고 앞으로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것으로 나와 주변 사람들이 공감하고 의미 있는 것에 대한 자기성찰이 우선 돼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두 번째 발표는 더 쇼퍼(웨딩카운전) 노경환(68) 대표의 “경험과 역량을 살린 인생 3모작”를 주제로 이어졌다. 노 대표는 호텔리어, 대리운전 기사 경험 등을 살려 웨딩카 운전 전문 업체를 운영하고 호텔리어로 일하면서 익힌 고객 응대 노하우를 살려 결혼식 신랑신부의 웨딩카를 운전해주는 웨딩카운전원을 창직했다. “아들의 결혼식에서 신랑신부 이동 서비스에 영감을 받아 창직했다”며 “틈새시장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도전한다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세 번째 사례발표는 유품관리사 김석중(51) 대표가 나섰다. 고령화 및 1인 가구 증가에 대비한 유품관리사의 전망을 소개하고 신 직업에 진출하면서 겪은 어려움과 지속적 도전의 원동력을 들려주었다. 일본 NHK 방송 유품정리회사 다큐멘터리를 보고 회사대표를 직접 찾아가 노하우를 배웠다. “우리보다 먼저 고령화 등을 겪은 일본의 경험을 바탕으로 패키지 형식으로 유품 정리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를 창업할 수 있었다”고 했다. “단순히 유품을 치우는 청소업이 아니라 지식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관점으로 접근한다면 관련 산업이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끝으로 농업협동조합 정년 후 취미로 텃밭 가꾸기 시작해 도시농업전문가로 거듭난 오영기(66) 회장의 사례발표가 있었다. 신중년이 새롭게 출발하기 위해선 과거의 모습과 지위 등을 과감하게 떨쳐버리기를 권유하면서 새로운 분야의 틈새를 공략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일러주었다.
포럼을 주관한 한국고용정보원 관계자는 “신중년의 경력개발을 지원하기 위한 미래직업, 창직 등 다양한 콘텐츠를 생산해 알리고 있다”고 했다. “새로운 인생 후반을 완성하고 싶은 신중년에게 다양한 경력개발 사례로 창직과 사회 가치 구현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러한 포럼을 비롯하여 신중년을 위한 다양한 채널의 지원제도가 이어지기를 희망해본다.
북한 조선노동당 당사로 가는 길에 보이는 김일성 고지 옆. 피의 능선과 백마고지를 관망할 수 있었다.
피의 능선은 6·25 전쟁 당시 4만5,000명의 전사자를 냈는데, 이 전쟁에는 군인들만 있었던 게 아니라 노무대도 같이 있었기에 실제 전사자의 수는 이보다 훨씬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 많은 시신을 미쳐 거둘 수가 없어 그 시신에서 피가 흘러내려 빨갛게 산을 물들였다 하여 ‘피의 능선’이라고 불렸다 한다. 비가 오는 날에는 다시 또 시신에서 피가 흘러 온 산을 붉게 물들였다 하니 그날의 참상이 짐작된다.
70여년 전, 동족상잔의 아픈 상처가 곳곳에 남아 있는 이곳을 돌아보며 이제 더 이상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한반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근에 국군은 화살머리 고지에서 군사분계선까지 12m 폭으로 17㎞의 길을 만들었다. 이 길을 만드는 과정에서 많은 전사자의 유해와 유품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노동당사에 도착했다. 노동당사는 해방 이후 한국전쟁까지 북한이 중앙당으로부터 지령 되는 극비사업을 주도한 곳이다. 이 곳에서 철원, 김화, 평강, 연천, 포천지역 주민들의 동향 사찰은 물론 대남공작을 주도한 공산 치하에서 중부지역의 주요 업무를 관장했다고 한다. 반공 인사들을 구금, 고문, 학살했던 악명 높은 곳으로 고문 흔적을 보여주는 인골, 실탄, 낫, 철사 등도 발견되고 있다.
노동당사는 1946년 초 이곳이 아직 북한 땅이었을 당시 철원군 조선노동당에서 시공하여 그해 말 완공한 러시아식 건물이다. 무철근 콘크리트 건물인데, 3층 건물이던 것이 폭격으로 외벽과 뼈대만 남아있다. 노동당사가 사용된 기간은 ‘해방 후 ~ 한국전쟁’까지다. 유엔군의 집중 폭격을 받았음에도 건물이 완전히 훼손되지 않은 이유는 철근을 넣지 않고 두꺼운 벽돌을 쌓아 지은 공법 때문이라고 했다. 포탄이 외벽에 충격을 주어도 구멍만 뚫렸을 뿐 건물 전체가 헐리지는 않았다.
노동당사 견학을 통해 다시 한번 안보의식을 철저하게 다질 수 있었다.
4월의 찬란한 신록을 만나기 위해 하동으로 간다. 악양행 버스를 타고, 화개천 옆을 지난다. 간밤에 흩날렸을 벚꽃 잎을 상상하며 아름드리 벚나무 가로수 길을 달린다. 오른쪽 차창 밖으로 은빛 섬진강과 푸른 보리밭이 봄볕에 반짝거린다. 섬진강가 산비탈에는 야생차밭이 연둣빛 생기를 뽐낸다.
걷기 코스
화개시외버스터미널▶시내버스 타고 악양면으로 이동▶매암제다원(매암차박물관)▶하덕마을 담장 갤러리▶드라마 ‘토지’ 촬영지▶박경리문학관▶최참판댁▶시내버스 타고 화개장터 또는 화개시외버스터미널로 이동
산자락 아래 볕 좋은 동네 악양
화개시외버스터미널에 악양행 시내버스가 들어온다. 버스에서 내린 행복버스 안내 도우미가 연로한 승객들을 부축해 승하차를 돕는다. 기사도 승객이 승하차할 때마다 반갑게 인사한다. 안내 도우미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악양(개치)정류장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도보 1분 거리에 매암제다원이 있다. 매암제다원은 3대에 걸쳐 40년 동안 친환경 자연농법으로 차밭을 가꾸고, 악양에 전해오는 전통 제다법으로 차를 만드는 곳이다. 다원 안으로 들어서 매암차박물관 옆을 지나자, 초록빛 야생차밭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다원에 따사로운 봄볕이 가득하다. 높을 岳(악), 볕 陽(양) 자를 쓰는 악양다운 풍광이다.
마침 매암차박물관의 장효은 학예실장과 이윤경 기획실장이 야외에서 차담을 나누고 있다. 매암제다원에서 파는 차가 녹차가 아닌 홍차인 이유를 묻자 장 실장이 “많은 사람이 녹차나무와 홍차나무가 다른 나무라고 생각하는데, 같은 나무예요. 찻잎을 발효하면 홍차 잎이 돼요. 악양 사람들은 옛날부터 홍차로 만들어 먹었어요. 서양 홍차는 우리나라 찻잎보다 크고, 맛과 향이 진하죠”라고 대답한다. 이 실장도 거든다. “이곳 할머니들은 찻잎을 잭살이라 불러요. 4월에 처음 딴 찻잎을 참새 雀(작), 혀 舌(설) 자를 써서 작설이라고 부르는데, 거기에서 유래한 것 같아요. 식구들이 감기나 배앓이를 하면 잭살을 한 움큼 넣고 푹푹 우려 약차로 만들어 먹였대요.”
1300여 년 전, 우리나라에 차가 처음 전래된 곳이 하동이다. 임금에게 차를 진상했던 곳도 하동이다. 악양과 화개 산비탈에 자리 잡은 대규모 야생차밭은 한없이 경이롭다. 하동 사람들의 차 사랑과 자부심이 대단할 만하다.
은은한 차 한 잔의 위로
2만여 평의 차밭이 굽어 보이는 매암제다원 마당에 매암다방이 있다. 나무꾼이 살 것 같은 아담한 오두막이다. 실내에 차밭이 보이는 벽마다 큰 창을 내어 자연을 담은 액자처럼 꾸몄다. 실내에 있기에는 아까운 계절. 찻그릇을 담은 차 쟁반을 들고 나가 차밭이 잘 보이는 감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는다. 간지러운 봄볕을 즐기며 찻잎을 우린다. 찻잎에 뜨거운 물을 붓고 모래시계의 모래가 다 떨어지기를 기다린다. 발효된 홍차는 녹차보다 맛이 순하고 구수하다. 찻잔이 작으므로 마주앉은 이의 잔을 수시로 살펴야 한다. 서로 잔을 채워주며 따스한 차담을 나누라고 찻잔이 작은 것일까 생각해본다.
찻잔 위로 스치는 봄바람에 참새 혓바닥 같은 찻잎들이 쫑긋거린다. 연둣빛 여린 찻잎에서 천 년을 이어온 생명력을 느낀다. 다원 입구에 있는 매암차박물관은 일제강점기에 수목원 관사로 사용했던 적산가옥이다. 흰 목조 건물과 푸른 차밭이 어우러져 이국적인 풍경을 그려낸다. 차와 관련한 다양한 유물 130여 점을 전시한다. 차 문화사 강좌, 차 만들기 체험, 차 따기 체험, 하동 차문화 기행 등 문화 교육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매암제다원(매암차문화박물관) 여름철 10:00~19:00, 겨울철 10:00~18:00, 월요일 휴무, 관람 무료, 매암다방(셀프) 찻값 3000원.
사계절 차꽃 피는 하덕마을
매암제다원을 나와, 시골길을 타박타박 20분쯤 걸어 하덕마을에 도착한다. 27명의 작가가 마을 주민의 이야기를 담은 그림, 사진, 조형물을 만들어 골목을 아름답게 꾸며놓았다. 벽화뿐만 아니라 나무, 철, 도자기를 활용한 다양한 작품이 담장에 전시돼 있다.
마을 입구 ‘팥이야기’ 카페에서 출발해, 발소리를 죽이고 고요한 돌담길을 스며들듯 거닌다. 골목에 들어서자마자 하얀 차꽃이 흩날리는 그림 ‘차꽃’과 매화가 핀 찻잔과 보름달을 그린 ‘달 아래에서’, 장식장에 찻잔이 가득한 ‘찻잔’ 벽화가 눈길을 끈다. 기와지붕 처마에 거꾸로 매달린 차꽃 조형물은 이름도 어여쁜 ‘꽃비내림’이다. 담장 위에는 농악대를 형상화한 철 조형물이 곡예를 한다. 가만 보고 있으면 절로 웃음이 난다. 작품들에서 느껴지는 공통된 정서는 ‘푸근함’이다. 시골 정취가 가득한 하덕마을과 정감 있는 예술작품이 어우러져 시너지 효과를 낸다. 오랜만에 맘에 드는 골목길을 만나 가슴이 설렌다. 마을 중앙에 있는 ‘차꽃오미’ 한옥 민박집에도 잠시 들른다. 위엄 있는 솟을대문과 잔디가 깔린 앞마당과 100년 된 고택의 조화가 멋스럽다. 하동군 악양면 악양서로 227.
최참판댁에서 평사리 들판을 굽어보며
하덕마을을 뒤로하고, 박경리 소설 ‘토지’를 드라마화한 토지 촬영장으로 향한다. 찻길 옆 인도를 따라 걷는다. 구재봉 자락에 40만여 평에 달하는 악양면 평사리 들판이 펼쳐진다. 들판 한가운데에 깃대처럼 서 있는 부부송(夫婦松)이 옛 친구 만난 듯 반갑다. 하덕마을에서 약 15분 걸으면 오른쪽에 ‘토지’ 촬영장으로 이어지는 오르막길이 나온다. 이곳이 평사리 상평마을 입구다. 여기서 ‘토지’ 촬영장까지 10분 정도 다시 오르막길을 오른다. ‘토지’ 촬영장에 용이네, 판술네, 두만네, 월선네, 김훈장댁, 송관수네가 살았던 초가와 읍내 장터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마당에는 황소와 토끼가 살고, 곳간에는 장작이 그득하다. 사립문 옆에는 샛노란 산수유와 개나리, 목련이 탐스럽게 피었다. 텃밭에는 상추가 싱싱하게 자란다. 실제 사람이 사는 마을처럼 관리한다. 일부 한옥은 민박집으로도 사용한다.
촬영장 바로 위에 2016년에 개관한 박경리문학관이 있다. 박경리의 유품과 작품, 각 출판사가 발행한 소설 ‘토지’ 전질, 초상화 등이 전시돼 있다. 문학관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최참판댁 솟을대문에 이른다. 서희가 자란 별채와 최치수가 머물렀던 사랑채가 그 모습 그대로다. 최치수인 양 사랑채 마루에 올라서서 평사리 들판을 굽어본다. 아득한 섬진강에 봄 아지랑이가 아롱거린다.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09:00~18:00, 연중무휴.
주변 명소 & 맛집
경상도와 전라도를 가로지르는 ‘화개장터’
화개시외버스터미널 앞에서 다리 하나만 건너면 화개장터다. 화개장터는 하동군과 전남 구례군과 광양시의 경계 지점에 있다. 한국전쟁 전만 해도 경상도와 전라도 사람들이 한데 모여 각 지방의 토산물들을 사고팔았던 곳이다. 원래 위치는 화개천의 화개교 아래였는데 현재의 위치로 옮기면서 상설시장이 됐다. 시골 오일장의 구수한 정취는 사라졌어도 파는 물건과 음식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지리산에서 채취한 산나물과 약초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하동 향토음식 전문점 ‘은성식당’
섬진강가에 자리한 은성식당은 하동 특산물인 재첩, 은어, 참게를 이용한 요리를 판다. 재첩국, 은어튀김, 참게탕이 인기가 많다. 섬진강에서 채취한 재첩을 넣고 맑게 끓인 재첩국은 하동에서 먹어야 제맛이다. 송송 썰어넣은 부추가 향긋함을 더한다. 집게다리에 털이 북슬북슬한 참게에 된장과 고추장을 풀어 푹 끓인 참게탕은 구수한 맛이 별미다. 밑반찬도 모두 맛깔나다. 창밖으로 보이는 섬진강과 차밭 풍광은 덤이다.
팥 전문 카페 ‘팥이야기’
하덕마을 입구에 있다. 도시에서나 볼 법한 이층 양옥이어서 눈에 금세 띈다. 내부는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고풍스럽다. 빈티지한 가구와 소품을 활용한 감각이 돋보인다. 대표 메뉴는 단팥죽과 팥빙수다. 작은 놋그릇에 담겨 나온다. 단팥죽의 당도가 적당하고, 팥의 풍미가 한껏 느껴진다. 식사 대용으로는 양이 부족하지만, 커피 한 잔 값에 맛있는 단팥죽을 맛볼 수 있으니 만족스럽다. 팥이야기에서 1분 정도 걸어가면 토속적인 분위기의 ‘타박네’ 카페(055-883-251)가 나온다. 팥소가 듬뿍 든 우리 밀 찐빵을 판다.
여행 정보 걷기 Tip
-위에 소개한 코스는 수도권 기준, 당일 여행이 가능하다. 대중교통으로도 가능.
-하동을 구석구석 여행하고 싶다면 주민공정여행 프로그램인 ‘놀루와’를 이용하면 된다. 하동 토박이가 여행 상담, 개별 맞춤 여행을 추천·진행한다.
이 책은 요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사는 내 삶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아서 다시 일어본 책이다. 여류 작가 정희재 씨가 쓴 책인데 내가 얼마 전 다녀온 안나푸르나 트레킹 얘기도 나온다. 책 제목에는 ‘피곤한 세상에서 벗어나 잠시 쉬어갈 용기’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멈춰서도 괜찮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래도 괜찮다’라는 부제도 있다.
평생을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살아온 우리에게 ‘잠시 멈춤’이란 단어는 생소하기만 하다. 멈추지 말고 앞만 보고 부지런히 가야 한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히말라야 트레킹에서는 달랐다. 고산병을 예방하려면 절대 가이드보다 앞서지 말라는 얘기를 수없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릿느릿 걸어가는 가이드가 답답했는지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가이드를 앞서려고 했다. 그래서 가이드보다 앞서가는 사람은 벌칙으로 1만 원씩 내기로 했다.
저자는 티베트에 가기 전에 유서를 써놓고 갔다고 했다. 심장도 약한 편인 데다 고산병으로 멀쩡한 사람도 목숨을 잃는 사고가 종종 발생하는 곳이라고 들었기 때문이다. 장례를 치르는 방법을 일러두고 유품정리는 어떻게 하라는 둥 유서를 쓰고 나니 마음이 달라지더란다. 무사히 티베트를 갔다 온 뒤 써두었던 유서를 읽어봤을 때는 다시 태어난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나는 저자처럼 유서를 쓰지는 않았지만 주변 정리 및 마음의 준비를 했다. 고산병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는지 저 세상으로 먼저 떠나버린 사람들이 꿈에 나타나기도 했다.
저자는 안나푸르나 트래킹을 할 때 여러 명이 같이 갔다고 했다. 인적도 드물고 지형도 험한 곳이라서 서로 의지하며 지냈는데 트래킹 마지막 날 저자는 혼자 자겠다고 했다. 대단한 선언이자 용기였다. 일행들을 의식했다면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같이 간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그날 밤 저자는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렇게 혼자 여유를 즐긴 시간은 별로 길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일생에서 가장 가치 있는 시간으로 기억하고 있다.
나도 일행과 떨어져 혼자 잔 날이 있었다. 최연장자라는 이유로 독방을 배정받은 것이다. 전날 같이 자던 사람이 코를 너무 골아 잠을 설쳤다고 불평을 한 이유도 있었다. 그날 밤 마음이 차분히 정리되면서 꿀 같은 잠을 잤다. 마치 태고의 자연 속에 혼자 누워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저자는 다른 사람들 시선을 너무 의식하면 그들이 만들어놓은 룰대로 살게 된다고 했다. 내가 중심이 되어야 행복하다는 조언이다. 한창 일해야 할 직장인이라면 남들과 섞여 살아야 한다. 그러나 퇴직한 시니어라면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를 행동에 옮겨도 된다. 그래야 자기 성찰의 시간도 가질 수 있고 힐링도 할 수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나태해지거나 퇴보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얻는 게 더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