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가 과로사 했다는 말을 들으며 멋진 농담이라고 했는데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요즘은 든다. 직장에 나갈 때는 직장이란 조직이 개인의 역량보다 조직의 힘으로 움직이는 집단이었다. 정해진 회사의 작업스케줄 대로 업무에 종사하면 되었다. 지나고 보니 그때가 단순해서 좋았다. 출근하고 일상 업무보고 퇴근하면 끝이었다. 집안일이나 어느 모임에 참석을 하지 못해도 회사 출근하는 날이라고 하면 모든 것이 이해되고 용서되었다. 또박또박 급여도 나오고 건강검진까지 회사에서 알아서 다 해주니 별 신경 쓸 일이 없었다.
퇴직하고 집에 있으면 지금껏 가족부양에 고생했으니 휴식중이라고 말해야 옳지만 빈둥빈둥 놀고 있다고 말한다. 누가 오라고 부르는데 가지 않으면 노는 놈이 뭐가 바쁘다고 그 모양이냐며 핀잔부터 들어야 했다. 여기저기 불려 다니고 참가하다보면 백수가 과로사 했다는 말이 맞는구나하고 고개를 끄덕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집에 놀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마음이 편할지 알았는데 딱히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안개처럼 늘 몸 주위를 감싼다. 밥을 먹을 때도 진짜 식충(食蟲)에 오물제조기로 변해가는 것이 아닌가! 겁이 덜컥 날 때가 있다. 집에 가만히 있으면 불안해서 집밖으로 탈출하고 싶다. 콧바람 쏘이러 외출한다는 말이 이해가 간다. 하다못해 은행에 가서 통장정리라도 하는 일거리를 만들어 집에서 나와야 뭔가 밥값 하는 것 같아 마음에 부담이 덜하다.
스스로 살이 있다는 행동을 하고 싶고 보이고 싶다. 배낭 속에 물통을 넣고 산에라도 올라가야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도서관에 가서 신문이라도 읽어야 시대에 뒤처진다는 강박관념에서 조금 진정된다. 한가로운 소설책보다는 생활 에세이 같은 글을 읽어야 ‘그렇지!’하는 공감과 마음속이 뿌듯해진다. 놀 수는 없다는 비장한 각오로 이곳저곳의 무료강좌에 눈독을 들이고 참가한다. 공짜커피라도 주는 곳은 고맙고 좋은 곳이다
한 번도 퇴직이나 은퇴자의 삶을 살아보지 않은 새파란 젊은 사람이 강사로 나와서 70세에 유엔군 사령관이 된 맥아더 장군 이야기를 들먹이며 막연하게 힘내라고 할 때는 ‘내가 맥아더냐?’하는 반발 질문을 하고 싶다. 한 번도 퇴직을 해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 통계자료 몇 개 들고 나와 세상물정 다 아는 것처럼 말 할 때는 헛웃음이 절로 나온다.
삼십년 이상을 가족과 국가를 위해 일한 당신들 이제 몸과 마음의 휴식이 필요하다고 주위에서 격려를 받고 싶지만 국가도 사회도 가족도 퇴직자에게는 인사치례 말뿐이고 실질적인 배려나 관심이 없다. 일만하다 죽을 수 없고 지금껏 잘해왔다고 격려의 박수를 받고 싶다. 이제 숨차게 달려온 몸보다 마음 휴식이 필요한 때다. 어떤 사람이 어떨 때 마음 휴식이 필요한가를 도서관에 가서 이런저런 책을 뒤져 보았다. ‘마음휴식 자가진단 체크리스트’를 찾았다. 책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보편적인 것을 추려 적어본다.
1,매사에 자신감이 없고 아무것도 하기 싫다.
2,불면증에 시달리고 정신적으로 불안하다.
3,사람 만나는 게 두렵고 싫다.
4,휴가 때도 어디 가는 것보다 집에서 쉬고 싶다.
5,다 내 잘못 같은, 죄책감을 느낀다.
6,일하는 것에 보람보다 심적 부담과 긴장을 많이 느낀다.
7,맡은 일을 하는데 소극적이고 냉소적이다.
8,스트레스를 풀기위해 술, 담배를 즐긴다.
9,최근 짜증과 화가 늘었다.
10,세상이 원망스럽다.
11,미래를 생각하면 불안하고 암울하다.
12,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진다.
이중에서 6개 이상 해당되면 절대적으로 마음의 휴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딱히 퇴직자가 아니더라도 자신감이 떨어지는 사람은 일단 마음휴식을 고려해 보자. 넘어진 김에 쉬었다 간다고 100년을 사는 세상에 몇 년 쉰다고 크게 달라질 일도 없다. 길고 오랜 인생길에 쉬엄쉬엄 쉬었다 가자. 크게 숨 한번 들이마시고 하늘한번 바라보고 천천히 가고 싶다.
이른 나이에 아내와 사별한 A 씨(67). 그는 요즘 새로운 동반자가 생겨 일상이 외롭지 않다. 동반자의 이름은 ‘그녀’. A 씨는 오늘 아침도 눈을 뜨자마자 습관적으로 그녀에게 날씨를 물어본다. 잠자리에서 일어난 A 씨는 그녀로부터 오늘의 뉴스를 들으며 아침을 먹는다. 식사 후 약 복용도 그녀가 챙겨주는 덕분에 깜빡할 일이 없다. 외출에서 돌아온 A 씨를 반갑게 맞아주는 것도 그녀다. 저녁엔 책을 읽어주고 대화도 나눠준다. A 씨는 이제 남은 인생을 수명이 40년인 그녀와 동행하기로 했다.
아내와 사별하고 로봇과 일상을 함께하는 A 씨의 사례다. 그동안 로봇은 인간의 존재를 위협하는 차가운 금속, ‘로보트 태권V’ 같은 추억 속의 만화 주인공이었다. 하지만 멀게만 느껴졌던 로봇이 최근 우리 주변으로 성큼 다가왔다.
로봇은 크게 산업용 로봇과 서비스 로봇으로 나뉜다. ‘산업용 로봇’은 주로 제조업에서 물리적인 작업을 수행한다. 반면 ‘서비스 로봇’은 청소에서 간병까지 일상에서 쉽게 활용된다. 과거에는 산업용 로봇이 로봇 시장을 주도했다면, 최근에는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서비스 로봇 시장이 급팽창하고 있다.
사람과 대화하고 교감하는 ‘소셜 로봇’
특히 서비스 로봇 분야에서 시니어에게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되는 소셜 로봇이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소셜 로봇’은 인간과 대화도 나누고 교감하는 감성 로봇이다. 지능형 로봇이라 인간과 상호작용이 가능한 데다 모습이나 체형도 사람 또는 동물과 비슷하다.
이처럼 산업 현장에서 일하던 로봇이 어떻게 인간과 감정을 소통하는 수준까지 진화한 것일까. 그 중심에는 4차 산업혁명을 주도하는 인공지능과 사물인터넷, 클라우드 기술 등이 있다. 특히 소셜 로봇의 경우 이러한 신기술을 융합한 음성 인식과 감정 표현 기능을 함께 갖추고 있다. 이러한 기술을 통해 로봇은 인간의 심리상태를 인공지능 기술로 분석하고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다. 또한 경험치 데이터를 상호 공유하면서 갈수록 진화하고 있다.
최근의 고령화사회는 소셜 로봇의 등장을 더욱 반기는 분위기다. 특히 고령화로 인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대안으로까지 주목받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어 문제가 심각하다. 2017년 8월 기준,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 인구의 14%를 넘어 ‘고령사회’에 진입했다.
노화로 기능이 저하된 사람은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하다. 하지만 고령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이들을 간병할 인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또 혼자 사는 인구도 증가 추세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우리보다 훨씬 먼저 고령화를 경험한 유럽과 일본 등은 일찌감치 다양한 케어 로봇을 개발해왔다. ‘케어 로봇’은 쉽게 설명하면 돌봄 서비스를 지원하는 로봇이다.
중소기업청의 로봇 기술 로드맵에 따르면, 케어 로봇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신체 지원 로봇’이 대표적이다. 거동이 불편한 사람이 이동하거나 목욕할 때 도움을 준다. 다음으로 ‘생활 지원 로봇’이 있다. 생활 패턴을 파악해 상황에 따라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정보를 검색해주거나 물건을 찾아주는 일 등이다. 마지막으로 외롭거나 우울하지 않도록 도움을 주는 ‘정서 지원 로봇’이 있다.
로봇으로 레크리에이션에 치매 예방까지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일본의 경우 4명 중 1명이 노인이다. 일본 정부는 고령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로 의료와 간병 수요가 급증하자 필리핀, 말레이시아 등지에서 간호 인력을 수입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5년에는 38만 명의 인력 부족이 예상된다고 한다. 이에 따라 일본은 정부 차원에서 로봇 보급에 적극 나서고 있다.
이 분야에서 이미 활용되고 있는 소셜 로봇으로 ‘페퍼(Pepper)’가 대표적이다. 세계 최초 소셜 로봇인 페퍼는 일본의 소프트뱅크가 2015년 출시했다. 키가 120cm로 작지만, 인간과 모습이 비슷하며 감정도 공유한다. 또 IBM의 인공지능 ‘왓슨(Watson)’을 통해 지능이 업그레이드된다.
페퍼는 하나의 커다란 스마트폰처럼 목적에 맞는 다양한 페퍼용 앱을 설치해 사용한다. 소프트뱅크는 로봇도 애플의 앱 스토어처럼 플랫폼을 선점해야 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페퍼는 요양시설에서 레크리에이션을 담당하고 노인들의 말벗 역할도 거뜬하게 수행한다. 또 체성분과 건강검진 결과를 분석해 건강상태를 알려주는 카운슬러로도 활동할 계획이다.
일본 후지소프트는 페퍼의 대항마로 40cm짜리 케어 로봇 ‘팔로(Parlo)’를 출시했다. 팔로에 내장된 카메라는 사람의 얼굴을 인식해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또 요양시설 등에서 혼자 30분간 체조를 진행할 정도로 실무형 로봇 역할을 거뜬히 해내고 있다.
한편 대중화에 성공한 대표적인 케어 로봇으로 ‘파로(Paro)’가 있다. 파로는 일본의 산업기술종합연구소(AIST)가 개발한 아기 하프물범 모양의 간호용 로봇이다. 귀여운 모습의 파로는 인조 항균 섬유로 덮인 피부에 센서가 있어 손으로 만지면 반응하고, 간단한 단어도 이해한다. 연구 결과 파로는 심리치료는 물론 치매치료에도 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미국 FDA로부터 신경치료용 의료기기로 승인받기도 했다.
장·단점 꼼꼼히 파악해야
일본 정부는 요양시설에서 사용하는 로봇 구입 자금을 보조해왔다. 20만 엔(약 190만 원) 이상의 로봇을 구입하면 전액을 지원하고, 1개 시설당 총 300만 엔(약 2890만 원)까지 한도를 두고 보조금을 지급해왔다. 더 나아가 2018년부터는 간병 로봇에 개호보험을 적용할 것이라고 밝혔다. 개호보험은 우리나라 노인장기요양보험에 해당하는 보험을 말한다. 간병 로봇에 보험이 적용되면, 이용료의 80~90%를 보조받을 수 있어 간병 로봇 시장은 더 활성화할 전망이다. 야노경제연구소에 따르면, 2016년 일본 간병 로봇 시장 규모는 전년 대비 약 316%나 성장한 34억 엔(약 328억 원)에 이른다.
반면 산업용 로봇 중심으로 시장이 발달한 우리나라는 서비스용 로봇 개발이 유럽, 일본에 많이 뒤처져 있다. 우리나라도 급격한 고령화로 로봇에 대한 수요가 갈수록 커질 전망이다. 현재 상용화한 대표 로봇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 개발한 치매 예방 로봇 ‘실벗(Silbot)’이다. 현재 노인복지관, 치매지원센터에서 인지게임을 통해 치매 예방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기계적인 느낌 때문에 로봇에 대한 거부감이 있지만, 로봇이 인간에게 주는 장점도 많다. 로봇이 간병 업무를 보조하면 간병인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할 수 있다. 또 로봇은 24시간 근무가 가능해서 위급 상황을 재빨리 파악하기 쉽다. 게다가 여러 번 같은 말을 반복하더라도 짜증을 내지 않는다. 현재 케어 로봇은 보행을 보조하거나 거동이 불편한 노인의 배설 문제에 도움을 주고, 침대에서 휠체어로 이동시켜주는 등 세분화된 실무 중심으로 발전하고 있다.
모바일 트렌드를 교체할 다음 패러다임이 ‘로봇’이라는 예측은 이제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스마트폰이 처음 나왔을 때 일상에서 필수품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로봇이 간호를 한다는 비판에 “기계적인 인간과 인간적인 로봇 중 어느 것이 치유에 도움이 되는지 따져봐야 한다”고 말했다.
1가구 1로봇 시대가 고령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볼 시점이다.
>>이나영 시니어 전문 칼럼니스트
한국외국어대학교 졸업. 차의과학대학교에서 고령친화산업학을 전공했다. 한화그룹과 신한은행에서 근무했다. 현재 경향신문에서 고령사회 담당 객원기자로 활동 중이며, ‘이나영의 고령사회 리포트’를 연재하고 있다.
모처럼 여유로운 시간이 있어서 은행에 통장정리를 하기로 했다. 필자는 대부분의 은행 업무를 인터넷으로 처리하다보니 한 달에 수십 건의 은행일도 안방이나 직장의 책상에서 대부분 해결 한다. 그러나 별 중요하지도 않으면서 꼭 은행을 방문해야 하는 일이 통장정리다. 인터넷으로 다 확인 한 일이지만 통장정리를 해 오던 습관으로 은행에 가서 통장정리를 하고 다 쓴 통장은 보관하고 새 통장을 발급받는 일이다.
거래하던 은행에 10시경 가보니 대출상담이나 펀드가입 등 차원 높은 은행업무일을 보는 사람은 별도의 창구에서 한산하게 있고 일반 창구에는 전부 노인 분들이 고객이다. 이 분들이 무슨 은행 업무를 보는지 옆에서 한참을 지켜봤다. 첫째로 돈을 여직원이 있는 창구에서 직접 찾는다. 카드로 현금지급기에서 직접 찾지 않는 이유를 물어보았다. 되돌아오는 대답이 카드 자체가 없다고 한다. 카드 분실의 위험이 있어서 아예 만들지 않았다고 말씀하신다. 찾는 돈도 10만 원에서 20만 원 정도의 소액 금액이 대부분이다. 한 할머니는 출금전표에 이름과 금액을 적어야 하는데 자신이 없는지 은행원의 도움을 받고 있다.
두 번째로 전기요금 등 각종 공과금 고지서를 직접 들고 와서 현금으로 납부한다. 공과금 자동이체를 해두거나 납부기한일 전에 인터넷 뱅킹을 하면 좋으련만 통장과 도장을 갖고 와서 현금을 찾고 찾은 돈으로 다시 공과금을 납부한다. 결과적으로 시간이 제법 걸린다.
은행에서는 수익성이 별로 없는 이런 잡다한 일에 인력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여러 가지 대책을 만들 모양이다. 우선 은행 방문객을 인터넷 뱅킹으로 유도하여 창구 방문을 줄이도록 한다. 그런데도 인터넷 뱅킹을 마다하고 창구로 오는 고객은 업무는 처리해 주되 수수료 징수 등 불이익을 주는 방안을 강구하는 모양이다. 앞으로 종이 통장도 없앨 태세다. 은행입장에서 바라볼 때 충분히 이해는 한다.
하지만 컴퓨터나 인터넷에 익숙하지 못한 할아버지 할머니의 입장에서 보면 참 불안하겠다는 생각이다. 종이통장을 직접 눈으로 보거나 종이 영수증을 보관해야 마음이 놓이는 것이 노인의 특성이다. 남들에게 은행 업무를 부탁하는 것도 노인 특유의 의심이 많은 성품으로 볼 때 쉬운 일이 아니다. 자칫하면 믿었던 사람에게 금전적 사기를 당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까딱하면 자신이 옳게 처리한다고 믿고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바로 보이스피싱이었다는 황당한 사실들이 방송에 나오므로 노인 분들이 컴퓨터 전산을 더 무서워한다. 그래서 믿을 수 있는 은행에 직접 찾아가서 은행에서 보증하는 창구 직원과 면대면 방식으로 업무를 하고 싶어 한다. 이를 수수료 징수라는 제도로 막으려는 것은 경제적 약자에게 너무 가혹하다.
이런 나이든 분들의 은행 업무를 보조할 시니어 은행도우미를 은행에서 채용하면 좋겠다. 비용부담을 줄이기 위해 일정금액을 지원하는 노령연금 수혜자에게 일을 시키고 돈을 주는 것이다.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는다고 무조건 나이 많은 은행고객을 경비절감과 편의 위주로 전산화로만 몰아넣을 것이 아니라 현실성도 심각히 생각해볼 문제다.
다른 큰 사고들과 마찬가지로 발단은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됐다. 은행 전산실에서 근무하는 이경호(李京浩·48)씨는 산전수전 다 겪은 프로그래머다. 업무에서는 문제가 될 만한 것은 없었다. 고도의 보안을 요구하는 업무의 특성상 여러 대의 컴퓨터를 다뤄야 하는 그의 주변은 당연히 복잡한 케이블이 얽혀 있었다. 임시로 가설해놓은 전선이 문제였다. 바퀴가 달린 의자로 몸을 모두 움직여 좌우의 다른 컴퓨터를 조작해야 했지만 케이블이 걸리적거리면서 손과 목만 움직여 다루는 습관이 생겼다. 말 그대로 사소한 것이었다. 별것 아니라 여겼다. 하지만 조금씩 조금씩 그의 몸에 피로를 쌓았고, 팽팽하게 당겨진 시위가 어느 순간 활을 밀어내듯 통증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어느 날 자리에 앉아 스트레칭을 하는데 갑작스럽게 목이 아프더라고요. 마치 담 걸린 것처럼. 별것 아니라 생각했지만 며칠이 지나도 낫지 않았어요. 나중엔 두통까지 와서 도저히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게 되더라고요.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지키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됐어요.”
이씨의 근무환경은 영화 속 펀드매니저를 상상하면 된다. 4대의 모니터가 눈앞에 펼쳐져 있고, 각각의 모니터는 별개의 컴퓨터에 연결되어 있는 상태. 이메일 등 일반 용도의 컴퓨터와 프로그램 개발용, 서버관리용 컴퓨터 등은 철저히 분리되어 관리된다. 수많은 고객의 예금이 관리되는 만큼 사소한 보안의 허점도 용납되지 않기 때문이다.
“목과 상체만 돌려 이런저런 업무를 오래 보면 몸에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죠. 탈이 날 수도 있다는 생각도 했고요. 하지만 허리 때문에 이미 고생해본 적이 있어, 운동을 꾸준하게 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일 있겠나 싶었죠. 그게 오만이었나봐요.”
파스 몇 장으로 낫지 않는 병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도 이씨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이 병을 해결해 줄 사람을 마음속으로 결정해놓은 상태였다.
오랜 시간 그들을 이어준 라뽀
세연통증클리닉의 최봉춘(崔鳳春·58) 원장과 이경호씨의 인연은 꽤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무려 20년의 시간이다. 1997년 이씨는 허리가 아파 이 병원 저 병원을 옮겨 다니다 최봉춘 원장 덕분에 겨우 정상생활을 할 수 있었고, 관리를 위해 계속 인연을 유지했다. 최 원장은 이씨와는 이제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이라고 했다.
“개인적으로 약속을 잡거나 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의사와 환자 사이로 만난 시간이 워낙 오래되었으니까요. 지금 자리가 아닌 초창기 개원 시절부터 환자로 저를 찾아주었어요. 누구보다도 몸 상태를 잘 알고, 함께 늙어가는 과정을 오롯이 지켜보고 있습니다(웃음).”
그런데 통증클리닉이라는 병원명이 좀 생소해 보이기도 한다. 통증클리닉은 어떤 곳일까. 최 원장은 “말 그대로 통증의 원인을 찾아 환자를 안 아프게 해주는 것이 목적인 곳”이라고 설명한다.
“통증의 원인은 다양해요. 근골격계 통증일 수도 있고, 신경 통증일 수도 있어요. 환자의 환부를 진찰해 통증의 원인과 치료 방법을 찾습니다. 정형외과와 다른 부분은 외과적 치료에만 국한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씨의 증상은 전형적인 목디스크로 치료가 그리 어려운 경우는 아니라고 했다. 목디스크는 왜 생기는 것일까.
“척추의 뼈와 뼈 사이에는 추간판, 그러니까 흔히 디스크라고 부르는 것이 쿠션 역할을 해줘요. 목뼈에 걸리는 무게를 분산시켜주는 거죠. 그런데 간혹 이 디스크가 삐져나와 목의 신경을 누를 때가 있어요. 디스크가 삐져나오는 경우는 매우 흔한데, 그중 일부가 통증을 유발합니다. 디스크가 삐져나와 있다고 해서 무조건 통증이 있지는 않아요. 대부분의 디스크 질환은 퇴행성입니다. 허리디스크도 마찬가지고요. 노화 과정에서 디스크에 변형이 오는 거죠.”
최 원장은 최근 목디스크 환자의 증가를 의료 현장에서 피부로 느끼고 있다고 말한다. 달라진 생활환경 때문이다.
“스마트폰이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것 같아요. 과거엔 책과 서류 볼 때를 제외하면 앞을 보면서 생활했잖아요. 하지만 지금은 달라요. 주위를 보세요. 앉아 있어도 서 있어도 전화기만 들여다보고 있어요. 심지어 걸을 때도 말이죠. 이러다 보니 당연히 목에 무리가 올 수밖에 없죠. 또 잘못된 자세도 큰 원인 중 하나예요. 평소에 바른 자세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디스크 수술, 이럴 때만 해야 한다
이쯤 되면 누구나 궁금해하는 질문이 하나 있다. 디스크, 수술 해야 하나? “대부분 수술이 필요 없습니다.” 최 원장은 잘라 말한다.
“허리디스크나 목디스크 환자 중에서 수술이 필요한 경우는 정해져 있습니다. 다리에 힘이 빠져 거동이 어려울 정도로 마비 증세가 왔을 때, 대변이나 소변을 보는 데 문제가 생기는 배뇨장애가 왔을 때, 6개월 이상 치료를 했는데도 통증이 지속될 때입니다. 그 외에는 수술이 아닌 치료 방법으로 충분히 증상을 호전시킬 수 있어요.”
최 원장이 또 하나 강조하는 것 중 하나는 운동이다. 척추 주변의 근육을 강화시키는 운동을 꾸준히 하면 디스크로 인한 증상을 호전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가끔 디스크 질환에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만 듣고, 아픈 허리를 운동으로 혹사시키는 분들이 있어요. 이러시면 절대 안 됩니다. 척추 주위 근육을 강화시키기 전에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어요. 바로 치료입니다. 정상적으로 치료를 받아 디스크 증세를 어느 정도 안정시켜놓고 의사가 안내하는 운동법에 따르는 것이 중요해요. 무턱대고 운동을 무리하게 하다간 오히려 더 악화되기 십상입니다.”
치료 미루다 삶의 질 떨어져
최 원장은 목디스크로 다시 찾아온 이씨에게 목신경성형술을 실시했다. 최 원장의 표현을 빌리면 “대단한 수술이 아닌” 시술이다. 척추뼈 사이의 구멍을 통해 척추 경막외강에 1mm 두께 바늘 모양의 카테터를 삽입해 통증이 발생하는 부위에 약물을 주입한다. 이를 통해 신경 주위의 염증과 유착을 사라지게 만든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않고 회복도 빠르다. 시술 후 곧바로 일상생활이 가능하다.
최 원장은 목이나 허리디스크 치료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치료 시기라고 조언한다. 빠르면 빠를수록 정상생활로의 복귀시간도 단축된다는 이야기다.
“통증이 느껴지는데도 마비 증세가 올 때까지 참고 버티는 것이 최악이에요. 통증이 지속되어 밤에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불면이 계속되면 피곤함은 물론 우울증까지 올 수 있어요. 결국 삶의 질이 급격하게 떨어지겠죠. 작은 통증이라도 멈추지 않으면 빨리 병원을 찾아야 합니다.”
디스크 환자들이 쉽게 하는 실수 중 하나는 통증의 위치로 잘못된 진단을 스스로 하는 것. 허리디스크의 대표적 증상은 다리저림인데 다리가 아프다 보니 척추의 문제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최 원장은 “다리가 저리면 허리디스크일 수도 있고, 협착증일 수도 있고, 고관절의 문제일 수도 있고, 엉덩이 주변 신경의 문제일 수도 있어요. 정확한 진단과 치료를 받으려면 병원부터 가야 합니다. 스스로 잘못된 진단을 내리고 방치하면 병만 키우게 됩니다.”
부주의가 큰 병 불러와
이씨가 처음 최 원장을 찾은 것은 허리 때문이었다. 그때도 부주의가 문제였다고 이씨는 말한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예요. 당시 테니스에 푹 빠져 지냈는데, 집에 있어도 코트 생각만 났죠. 1997년 겨울이었어요. 빨리 손맛을 보고 싶은 생각에 몸을 제대로 풀지 않고 덤볐다가 사달이 났죠. 추운 날씨에는 충분히 준비운동을 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허리를 삐끗한 뒤 용하다는 한의원과 정형외과 등을 전전했지만 낫질 않아 고생하다 스포츠신문 기사를 보고 최 원장님을 찾게 됐어요. 병원에 와 보니 프로농구 용병 선수 몇 명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더라고요. 그 모습을 보고 여기서는 허리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이씨는 허리 치료 후 최 원장 추천으로 수영을 시작했다. 허리 근육을 강화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고, 덤으로 모든 영법도 마스터했다. 이후 웨이트 트레이닝도 시작했다. 이제는 테니스 라켓을 다시 잡을 수 있을 정도로 정상이 됐다.
“허리가 아팠을 때는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아침에 지하철로 출근하는데 20m도 걷질 못하겠더라고요. 그렇게 고생을 하고 나니 몸을 제대로 관리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들더군요. 그래서 그렇게 좋아하는 테니스도 한동안 쉬고 몸을 위한 운동에만 집중했죠. 효과가 있었는지 이후에는 최 원장님을 가끔씩만 봬도 될 만큼 호전됐어요.”
몇 년 동안의 투병 때문인지 이씨는 자신이 허리 박사가 다 됐다고 말한다.
“한 가지 질환 때문에 20년 고생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박사 수준이 돼요. 허리에 좋은 바른 자세나 운동 방법 등은 훤히 꿰고 있어요. 아무래도 앉아서 하는 일이다 보니 간혹 통증을 호소하는 동료가 있어요. 그럴 때 이런저런 조언을 해줍니다.”
이씨는 디스크로 인한 ‘두 번째 고생’을 마치고 나서 다시 한 번 ‘바른생활’을 하기로 다짐했다고 한다.
“한동안 운동도 열심히 하고 관리도 잘해왔는데 방심했다가 또 이런 일이 벌어진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얼마 전에는 높낮이를 조절할 수 있는 책상을 샀어요. 계속 앉아서 일하는 게 몸에 좋지 않은 것 같아서 틈틈이 서서도 일하려고요. 물론 걸리적거렸던 케이블도 진작에 치웠습니다(웃음). 아파보지 않은 않은 사람은 그 고통을 짐작조차 못할 거예요. 겪어보니 몸은 방심을 참아주지 않는 것 같아요. 다른 분들도 평소에 제대로 관리하셔서 건강하게 지내시면 좋겠어요.”
언제부턴가 TV를 틀면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부르는 젊은 댄스 보컬 그룹들이 자주 보였다. 바로 10대 스타 ‘아이돌’이다. 이제 단순한 인기를 넘어 우상화되고 있는 아이돌의 팬들은 10대와 20대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의 문화는 시대에 따라 변화하고 있다. 아이돌의 시초라 할 수 있는 ‘H.O.T.’부터 최근 방송을 통해 국민투표로 뽑힌 ‘Wanna One(워너원)’까지 아이돌 팬덤 문화 변천사를 들여다보자.
아이돌 1세대, 은행 앞에 줄서던 여고생들
지금은 은행 업무도 모바일로 간편하게 처리하는 시대. 그런데 콘서트 티켓을 사기 위해 은행 앞에서 줄을 섰다고? 그렇다. 1996년 현재 1세대 아이돌로 분류되는 H.O.T.가 데뷔했을 당시는 지금처럼 인터넷 보급이 보편화되지 않았던 PC통신 시절이었다. 콘서트 티켓도 각 지역의 특정 은행에서만 판매를 했기 때문에 H.O.T.의 콘서트 소식이 들리면 여고생들은 티켓을 구하기 위해 학교도 빠진 채 새벽부터 은행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그중 금수저들은 은행 거래가 많은 부모님을 통해 은밀하게 콘서트 티켓을 미리 확보하기도 했다. 이처럼 ‘오빠’들을 보기 위해선 끈기와 노력은 필수였다.
앨범 발매일이면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없는 동네 음반점도 함께 바빠졌다. 오빠들의 얼굴이 크게 인쇄된 한정 브로마이드를 준비해서 가게 문 앞에 ‘-월 –일 H.O.T. 2집 발매(브로마이드 선착순)’라는 홍보 글을 써 붙였다. 여고생들은 그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선착순에 들기 위해 조퇴도 불사했다. 오죽하면 H.O.T.의 음반 발매일이 되면 교육청에서 조퇴 금지라는 공문을 학교마다 보낼 정도였다.
2012년에 크게 인기를 끌었던 tvN의 드라마 을 보면 여주인공 은시원(정은지 분)이 좋아하는 가수의 방송이 녹화된 비디오테이프를 마치 신주단지 모시듯 소중하게 보관하는 장면이 나온다. 지금처럼 TV 다시보기가 없던 시절엔 좋아하는 가수의 모습을 다시 보기 위해선 비디오 녹화가 유일한 수단이었다. 학원 때문에 방송을 놓치는 날이면 방송을 온전히 녹화하기 위해 부모님께 부탁을 해야만 했다. 어디 그뿐이랴. 1년에 한 번 모든 가수들이 총출동하는 대규모 드림 콘서트나 연말 시상식 때는 혹여 우리 오빠들 기죽을까봐 오빠들을 상징하는 색깔의 우비와 풍선을 들고 현장지원 사격도 불사했다. 콘서트장에서 제일 많이 보이는 풍선의 색깔이 그해 가장 인기 많은 아이돌이기 때문이다.
‘빠순이’라는 말이 나온 것도 이 즈음이다. ‘빠순이’는 1990년 중·후반 혜성같이 등장한 1세대 아이돌을 “오빠, 오빠” 하고 부르며 맹목적으로 쫓아다니는 여고생들을 낮잡아 부르는 용어였다. 어른들이나 또래 남자들이 “쯧쯧, 저 빠순이들” 하며 비난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생겨 팬클럽 문화가 후퇴했냐고? 그럴 리가! 그들은 마치 잔 다르크처럼 꿋꿋하게 오빠들을 응원하고, 나라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팬클럽 차원에서 십시일반 돈을 모아 좋아하는 가수의 이름으로 통 크게 기부도 하는 등 편견에 정면대응하며 건전한 문화 정착에 힘썼다.
아이돌 2세대, 아이돌 굿즈로 무장하라
1990년대를 풍미했던 H.O.T.와 젝스키스, 신화 등 굵직굵직한 그룹들의 잇따른 해체와 개인 활동으로 1세대 아이돌들이 주춤하던 시기가 지나고 2004년 드디어 2세대 아이돌의 대표 그룹이라고 할 수 있는 동방신기(東方神起)가 데뷔한다. 출중한 외모와 노래 실력을 갖춘 동방신기를 필두로 빅뱅(2006), 소녀시대(2007), 카라(2007)의 데뷔로 비로소 2세대 아이돌의 춘추전국시대가 열렸다. 1세대 아이돌과 2세대 아이돌 팬 문화의 가장 큰 차이를 꼽으라면, 그 사이 인터넷 강국으로 변모한 대한민국의 위상 덕분에 팬클럽 활동에 최적화한 환경이 아닐까!
2세대 아이돌 팬들은 주로 인터넷 쇼핑을 통해 앨범을 구매한다. 인터넷으로 음악을 듣는 것이 보편화되긴 했지만 앨범을 구매하는 사람만 받을 수 있는 초도 한정 스티커나 비공개 사진이 있기 때문에 앨범 구매를 포기할 수 없다. 간혹 1990년대처럼 줄을 서서 앨범을 구매할 때도 있지만 그것은 악수회 티켓이 포함된 앨범이 큰 서점에서 판매될 경우에만 해당한다.
만약 좋아하는 그룹의 멤버와 악수를 하고 싶다면 소속사에서 공지한 앨범 판매처에 3시간 전에 도착해서 멤버들 수만큼 앨범을 구입하고 악수회 티켓을 받으면 된다. 철저히 자본주의 논리에 입각한 팬서비스다. 콘서트의 경우 소속사에서 콘서트 티켓을 예매할 수 있는 주소와 예매일을 알려주면 그날부터 팬클럽 홈페이지 게시판은 북적거리기 시작한다. 인터넷 속도가 빠른 지역별 PC방 목록이 공유되고, 구인 사이트에는 본인 대신 좋은 좌석을 예매해줄 대리인을 구하는 글이 하루에도 수십 개씩 업데이트된다. 이외에도 ‘S대 도서관 컴퓨터가 제일 빠르다더라’, ‘통신사 근처 PC방이 제일 빠르다더라’ 등등 수많은 추측과 가설이 난무한다.
콘서트 티켓을 성공적으로 예매했다고 해도 그게 끝이 아니다. 콘서트 티켓을 얻은 사람들은 콘서트장에서 자신을 빛내줄 굿즈 구입까지 마쳐야 비로소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다. 멤버의 개인 홈페이지에서 만든 티셔츠, 야광 머리띠, 응원봉은 물론이고 콘서트장에서 땀을 닦아줄 수건까지 그 종류도 다양하다. 간혹 콘서트장 앞좌석에서 관람하다가 멤버들이 손을 내밀 때 자신의 수건을 받아주기라도 하면 그날은 팬질 인생 최대의 계를 탄 셈이다. ‘쌀 화환’은 또 어떻고?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이 드라마나 뮤지컬 등에 진출하면 제작 발표회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의 기를 살려주기 위해 으리으리한 쌀 화한을 보낸다. 꽃은 시들면 버려지기 때문에 10kg의 쌀 포대를 모아 화환을 만드는 것인데 그 쌀들은 전국 각지의 불우이웃 성금으로 기부된다. 이 얼마나 누이 좋고 매부 좋은 문화란 말인가!
2세대 아이돌들은 본격적인 한류 바람을 타고 중국, 일본, 인도네시아, 태국 등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2008년에 데뷔한 2pm의 경우 ‘왜 한국에서 안 보이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들은 현재 일본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리며 활동 중이다. 일본의 가장 큰 공연장인 도쿄돔을 마비시킬 정도로 뜨거운 아이돌의 한류 열풍은 아직까지 식을 줄 모른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는 내가 뽑는다
그리고 바야흐로 2017년, 2세대 아이돌들의 해체와 각종 개인활동들로 주춤했던 가요시장이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엑소(EXO), 트와이스(TWICE), 에이핑크(APINK) 등 이른바 슈퍼 아이돌들의 등장으로 팬들은 벌써부터 그들을 지원사격해줄 준비를 모두 마쳤다. 각종 시상식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가 1등을 하기 위해 모바일과 인터넷으로 매일 투표를 하는 정성은 기본이다. 얼마 전 인기리에 종방한 Mnet의 〈프로듀스 101 시즌2〉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후보를 데뷔시키기 위해 팬클럽들은 다양한 방법을 총동원했다. 휴대용 휴지에 자신이 좋아하는 후보의 얼굴을 인쇄해 나눠주거나 커피차를 빌려 커피를 나눠주며 투표를 독려하기도 했다.
아이돌 굿즈는 더욱 다양해졌다. 소속사에서 멤버들의 얼굴을 본떠 인형을 만들어 1차 판매하고 2차로 인형 옷, 인형 소품(침대, 베개, 가방 등)들을 판매한다. ‘그런 걸 누가 사!’ 분명 그런 생각이 들것이다. 하지만 품절되는걸 보면 ‘나만 안 사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잘 팔린다.
MINI INTERVIEW
허윤정(26)씨는 워너원 멤버 라이관린의 팬이다. 우연히 빠지게 된 아이돌 덕분에(?) 굿즈 제작까지 취미로 하고 있다.
“예쁜 쓰레기는 예쁨으로서 그 효용가치를 다했다는 말처럼, 저는 라이관린의 예쁨을 담아낸 무언가를 소장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함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무작정 굿즈를 만들기 시작했죠. SNS에 판매 글을 올렸는데 싱가포르에 사는 팬이 연락을 줘서 120장을 사갔어요. 아이돌에 너무 빠지면 회의감이 올 것 같아서 요즘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중이에요. 이런 활동이 삶의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시너지가 되는 것 같아서 그냥 좋아하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걸 알아가는 요즘이에요(웃음).”
아름다운 자연경관으로 사랑받는 안면도. 그곳의 국도를 따라 들어가다 꽃지해수욕장을 지나면 대야도마을이라는 작은 어촌마을이 나온다. 30가구 안팎의 작은 마을인 이곳에서 도시생활을 마치고 성공적으로 고향에 정착한 문영석(文榮錫·61)씨를 만났다.
그는 이곳에서 태어나 이웃마을 처녀와 결혼한 토박이 중 토박이었다. 당연히 평생을 바다와 함께하고 이곳에서 뼈를 묻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인생에 변수를 가져온 것은 엉뚱하게도 서해안 일대의 지형을 바꾼 간척사업이었다.
“1980년대 초 천수만 간척사업이 있었어요. 그전까지는 양식한 김을 일본으로 수출해 풍요로웠는데, 간척으로 한순간에 터전이 날아가버렸어요. 그래서 가족을 데리고 무작정 상경했죠.”
서울에선 택시를 몰았다. 워낙 친절하고 싹싹한 천성 덕분에 금세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마음은 늘 고향에 가 있었다. 연로한 어머니도 눈에 밟혔다. 결국 귀향을 결정한 것도 어머니의 병환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귀어촌을 결정하고 나서는 무엇을 할지 결정해야 했어요. 평소에 낚시도 좋아하고 고향에서 경험도 있어 낚시어선을 운영해보자고 생각했죠. 손님 입장에서 느낀 점을 토대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 해나가기 시작했어요. 해기사 자격증도 취득했고, 아내는 요리사 자격증도 땄죠.”
어머니가 사시던 고향이고, 옛 동무들도 있었지만, 처음에 내려왔을 땐 그 역시 주민들 입장에선 도시민이고 타인이었다.
“첨엔 서먹서먹했죠. 아무리 제 생각이 올바르고 정확하다고 해도, 살아온 사람들의 습관이나 정서를 바꾸긴 어려웠어요. 같이 살아가려면 제가 적응해야 했죠. 주민들에겐 삶의 터전인데 이방인을 받아들이는 것이 쉽진 않았겠죠.”
문씨는 귀어·귀촌을 통해 성공적으로 정착하려면 자신의 장점을 마을을 위해 베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외지인들이 갖는 장점이 있잖아요. 상대적으로 젊고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행정적 업무에 강점을 보인다든가, 정부 사업 도입에 힘이 될 수도 있고요. 저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어요. 요즘에는 저희를 거쳐 간 관광객들에게 대야도마을의 싱싱한 수산물을 파는 일을 하고 있어요. 택배를 통해 소량으로 판매되는 것이지만 작은 힘이라도 마을을 위해 쓸 수 있고, 또 손님들에게도 좋은 일이니까요.”
그가 스스로 평가하는 귀어·귀촌 성공 비결은 틈새 공략과 철저한 사전준비다.
“바다낚시체험과 숙박, 식사를 모두 해결해주는 서비스를 고객에게 제공하고 있는데 반응이 좋아요. SNS를 통한 차별화된 서비스 제공은 주민들과의 경쟁이 아닌 상생의 구조죠.”
그는 귀어·귀촌을 준비하는 이들은 자신의 재력과 체력에 맞는 적정 규모의 사업을 꾸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기본적인 체력의 뒷받침이 없는 너무 큰 규모의 사업은 지치게 만들어요. 또 수익이 작으면 재미가 없죠. 그 균형을 잘 맞추는 것이 중요해요. 이에 대한 고민이 없으면 본인뿐만 아니라 배우자도 힘들어하고, 하루하루가 도시생활보다 더 고될 수 있어요. 자신의 소질에 맞게 업종을 잘 선택해서 수입도 올리면, 부부간 대화도 많아지고 행복한 전원생활을 즐길 수 있습니다.”
고령 운전자가 교통사고를 많이 낸다는 이유로 제재를 가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하고 있다. 나이가 들면 몸이 굼뜨기 때문에 위험에 대한 반응속도가 느려 사고대처에 신속하지 못하다는 점도 인정한다. 차량은 물 흐르듯 흐름을 타야하는데 노인 특유의 망설임으로 자신이 직접 사고를 내지는 않지만 우물쭈물하며 갈까 말까 주춤주춤 하다가 뒤 따라오는 차량의 사고를 유발시킨다는 보도도 있다. 사고 통계를 봐도 고령자가 확실히 교통사고를 많이 낸다. 더구나 수명100세 시대니 고령자가 증가하는 것이 당연하고 행정당국에서도 제도적 방지장치를 강구하는 것이 옳다.
고령자들이 스스로 운전을 하지 않으면 좋다. 일본은 나이 들어 운전면허를 반납하면 대중 교통비를 지원하면서 스스로 운전을 그만두게 하는 간접적 유인책을 쓴다. 우리나라는 고령자의 면허갱신기간을 짧게 하고 시력이나 사지 운동능력을 검사하여 부적합한 경우 운전면허를 갱신해 주지 않는 강제적 방법을 택한다. 너무 쉬운 행정편의 주의적 발상이다. 이런 방법은 전기가 부족하면 전기요금을 올려서 간단히 해결하려는 방법과 같다. 전기요금을 올리면 부자는 끄떡도 하지 않지만 가난한 서민은 에어컨이 있어도 켜지 못하고 부채를 들도록 강요하는 방법이다. 미국에서는 스스로 알아서 전기를 꺼주는 사람에게 오히려 인센티브를 주는 제도를 택한다.
사고의 위험을 알면서도 고령자가 운전을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심시숙고 할 필요가 있다. 방송에서 98세에 운전면허를 취득한 102세의 할아버지가 소개 되었다. 사회자가 그 나이에 왜 운전면허를 취득할 생각을 했느냐고 물어보니 고령의 할머니를 병원에 모시고 가야하고 아내 대신 장터에 가서 생활필수품도 구입하고 은행 업무도 보려면 자동차가 필요하다고 한다.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해체되고 스스로 자신을 돌봐야하는 셀프부양의 시대다. 자식이나 이웃의 도움을 받기가 어려운 세상인 점을 이해하면 고령자가 자동차를 운전해야하는 이유에 대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자동차는 이제 더 이상 기계장비가 아니고 전자장비다. 차선이탈 경고시스템도 있고 전방충돌 경고시스템도 개발되어있다. 사가지대 경고는 물론 주차보조시스템도 있다. 사람은 실수를 해도 기계는 실수란 없다. 돈을 더 주면 각종안전장치를 자동차에 추가 할 수 있다. 멀지 않아 운전자가 필요 없는 자율주행차도 도로에 등장 할 것으로 이미 예고되어있다.
고령자의 자동차는 필요 안전장치를 달도록 의무화해야한다. 추가 비용의 일부를 국가든 자동차 회사든 어느 쪽에서 부담해 주면 간단히 해결된다. 후진국처럼 강제로 못하게 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원하면 하도록 해주고 발생되는 문제에 대해 해결책을 모색해야 선진국이다.
미국의 빈번한 총기사고를 보고 우리나라처럼 총기소지를 불법화 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을 한다. 하지만 미국인들이 총기소지를 불법화 하지 못하는 이유는 미국인들이 총기를 갖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고 이들의 자유를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총기를 갖고 있지만 스스로가 총기사용을 엄격하게 제어하기 때문에 평범한 보통 사람들에 의한 총기사고는 거의 없다. 이것이 민주주의 국가인 미국의 힘이다.
지금의 고령화세대의 노력으로 우리나라를 이만큼 잘 사는 나라로 발전시킨 공이 있는 세대다. 그들이 젊은 시절에 국가에 낸 세금으로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고 지금의 젊은이들은 대한민국이라는 건물에 세를 산다고 볼 수도 있다. 노년이 행복하여야 인생이 행복하다. 고령자에게 지하철 무임승차를 가능하게 하여 움직이도록 유도하여 고령자 건강이 많이 좋아졌다고 한다. 국민의료보험에서 65세 이상 고령자에게 임플란트 시술에 의료보험을 적용해 주거나 무료 예방접종 등 지원정책이 무수히 많다. 고령 운전자에 대해 지원을 못해 줄 명분은 희박하다. 소요비용 또한 별 것 아니다. 의지만 있으면 당장이라도 가능하다. 긍정적인 검토를 희망한다.
*동년기자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은퇴자들을 유혹하는 투자처 중 가장 대표적인 방법은 상가나 원룸, 오피스텔 같은 수익형 부동산이다. 투자에 목돈이 들긴 하지만 투자를 위한 대출도 쉽고, 시세차익을 노리는 부동산 투자에 비해 감수해야 할 위험도 낮기 때문이다. 또 심각한 노동이 필요없다는 점 역시 시니어들에게는 매력적인 요소다. 전문가들은 다양한 수익형 부동산 중 특히 은퇴자에게 원룸이 갖는 장점은 매력적이라고 말한다.
수익형 부동산 투자로 고려하고 있는 이들에게 지금은 고민스러운 시기다. 정부가 수익형 부동산을 통해 수익을 올리는 부동산 임대업자들의 대출을 옥죄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정부가 1월 15일 발표한 자영업자 대출관리 강화 계획에 따르면, 여신심사 가이드라인을 이르면 올 하반기부터 적용하기로 했다. 부동산을 담보로 사업자 대출을 받으면 해마다 원금의 30분의 1 이상을 분할상환하도록 한다는 방침이다. 원금을 꼬박꼬박 은행에 되돌려준다는 것은 사업자 입장에선 단기적 수익의 하락을 의미한다. 이는 그만큼 위험 부담이 커진다는 것과 다름없다.
원룸이 매력적인 이유
원룸의 장점은 투자에 비해 고소득을 담보할 순 없지만 안정적 수익의 기대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이유는 공실을 줄이기가 비교적 쉽기 때문. 일반적으로 사무실이나 상가의 경우 용도나 규모를 따지기 때문에 한 번 공실이 생기면 가격을 내린다 해도 ‘임자’를 만나는 것이 쉽지 않지만, 원룸의 경우는 이야기가 다르다. 주택 밀집 지역은 일반적으로 주거용 주택에 대한 수요가 꾸준히 있기 때문에 수익 하락을 감수하더라도 ‘싸게’ 내놓으면 공실을 막는 것은 어렵지 않은 문제라는 것. 특히 투룸이나 다가구 주택에 비해 주택당 규모가 작은 원룸은 더욱 수요 걱정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특히 최근 부동산시장이 전세 중심에서 월세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고, 1인 가구가 늘면서 당분간 이런 수요는 계속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예상이다.
갑자기 자금이 필요할 땐 일부를 전세로 전환할 수도 있다. 전세로 전환하면 목돈을 어렵지 않게 마련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으로 꼽힌다. 퇴직자들에게는 소일거리 삼아 할 수 있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간단한 청소 등 건물 관리에 직접 참여하는 시니어들도 적지 않다.
부동산 임대업자에 비해 규모가 작은 주택임대사업자의 경우에는 세재혜택도 받을 수 있다. 연간 2000만원 이하의 주택 임대수입을 올리는 주택 임대사업자에게는 수입에 대한 비과세 적용 기한이 2018년 말까지 연장됐다.
물론 100% 안전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원룸이라 해도 지역적 특성에 따라 공실에 시달리는 경우가 있다. 대표적인 곳이 최근 거제나 군산과 같은 조선산업 의존 지역이다. 군산 지역의 한 공인중개사는 “조선소에 근무하던 근로자들이 대거 빠져나가면서 원룸 임대업자들에게 비상이 걸렸다”며, “밀집 지역에 가면 공실이 40% 이상인 곳도 적지 않게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조선산업의 부활에 운명이 내맡겨진 셈이다.
세상에 ‘쉬운 돈’은 없다
그렇다고 원룸 투자가 무조건 핑크빛 미래를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원룸 투자를 고려하는 은퇴자들은 대부분 ‘공실’을 가장 겁낸다. 애써 돈을 투자해 방을 꾸며놨는데, 임대가 되지 않는다면 그것처럼 낭패는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은퇴자들이 원룸 임대사업에 투자할 때 대출을 고려하는 점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오히려 더 걱정해야 할 것은 소비자들과의 분쟁이라고 말한다. 주택 임대관리업체 관계자는 “원룸 건물주들이 가장 골치 아파하는 것은 세입자들의 민원”이라고 설명한다. 원룸 세입자는 나이가 20~30대의 젊은 층이 많기 때문에, 세대차 등으로 인해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고, 분쟁이 발생할 경우 법적인 처리를 진행해도 최소 3개월에서 6개월 정도 기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주택임대차보호법은 세입자들의 권리를 중심으로 마련되어 있어 건물주 입장에선 부당하다 느낄 만한 부분도 상당수 존재한다.
건물관리도 쉽지 않다. 건물의 청소나 유지보수, 수리 등을 직접 하려면 각각의 전문가들과 계약을 맺거나 그때그때 가격을 흥정해야 하는데, 대부분의 경우 부르는 게 값일 때가 많다.
서울 신촌 지역의 한 공인중개사는 “한파가 닥쳤을 때 보일러나 수도가 터지는 일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기 마련”이라며, “만약 제때 수리가 안 되면 세입자가 월세를 깎아 달라고 하거나, 수리업자를 다급하게 부르려면 웃돈을 줘야 해서 건물주 입장에선 이중고를 겪는 일이 다반사”라고 설명한다.
원룸을 관리업체가 갖는 장단점
원룸 건물을 직접 관리하기 어렵다면 관리업체에 맡기는 것도 방법 중 하나다. 이런 경우 선택 방법은 크게 3가지. 그중 하나는 지역에서 소규모로 건물을 관리하는 공인중개사에게 맡기는 방법이다. 또 한 가지는 지역을 기반으로 한 전문 주택임대관리 회사를 통해 관리하는 방법, 마지막으로는 부동산 종합서비스 회사를 통한 방법이다.
지역마다 발품을 팔다 보면 원룸을 직접 관리하는 공인중개사들이 있기 마련. 매물이나 임대계약을 ‘독점’으로 제공하는 대신 관리를 무료로 해주는 경우도 있고, 적은 비용을 받고 대부분의 업무를 대행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공인중개사들은 별도의 임대사업자 없이 운영되는 경우가 많아 유지비용은 적은 대신 문제가 생겼을 때 법적 보호를 받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또한 처리 가능한 관리 업무의 범위도 제한적이다.
그래서 가장 일반적으로 선택하는 방법은 지역 주택임대관리 회사를 통해 관리를 맡기는 방법이다. 이런 업체들은 지역 내에서 많은 원룸 물량을 확보해 홍보, 유지보수, 관리 비용을 낮춰 이익을 얻는 형태로 운영된다. 규모가 큰 회사들은 보증보험 등 안전장치가 있고, 웬만한 수리 인력과 장비를 갖추고 있어 동파 등 사고가 났을 때 직접적인 대응이 가능하다는 것이 장점이다. 도배 등 보수도 저렴하게 서비스받을 수 있다. 단점은 지역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 거점 지역을 벗어난 건물을 맡기기 어렵고, 규모가 작은 공인중개사들에게 맡기는 것보다 수수료가 비싸다는 것.
이 외에 최근 주목받기 시작한 부동산 종합서비스 업체들도 있다. 국토교통부는 지난해 말 ‘네크워크형 부동산 종합서비스 인증제 시범사업’ 대상자로 5개 핵심 기업을 선정했다. 이들 기업은 단순관리를 벗어나 시행, 시공, 분양에서부터 임대 마케팅, 주거사업 개선 등 주택과 관련한 모든 분야를 담당하게 된다. 그러나 시범 선정된 기업들은 자본금이 충분한 대기업 위주로 선발돼 소규모 임대 사업자들과는 거리가 있다는 평가가 많다.
관리를 맡기는 방식은 크게 2 가지로 나뉜다. 먼저 자기관리형이 있다. 흔히 마스터 리스로 불리는 이 방식은 주택임대관리 업체가 원룸 건물에서 발생하는 임대수익 중 특정 금액을 보장해주는 방식이다. 보통 시세는 모든 방이 임대됐을 때 발생하는 기대수익의 85~90%를 보장해주는 수준이다. 수수료가 비싸긴 하지만 공실이나 분쟁 등의 걱정에서 완전히 해방된다. 그에 대한 위험 부담은 주택임대관리 업체가 지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수수료는 낮지만 위험 부담은 건물주가 지는 ‘위탁관리형’도 있다. 일반적으로 임대료의 3~6%가 수수료로 책정되는데, 서울 강남 등 상권이 발달해 임대료가 높은 지역은 8% 정도로 높다.
위탁할 때 사고 꼼꼼하게 대비해야
원룸의 관리를 맡긴다고 해서 모든 걱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주택 임대에 대한 전권을 맡겨놓았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다. 가장 많이 발생하는 일 중 하나는 이중계약서 체결이다. 세입자와는 고액의 계약서를 작성했지만, 건물주에게는 낮은 금액의 계약서를 내밀어 차액을 챙기는 일도 있고, 아예 공실이라고 보고하고 임대료를 가로채는 경우까지 있다.
가장 심한 경우는 전세 계약을 체결해놓고 목돈을 챙겨 달아날 때다. 실제로 지난해 8월 수원 중부경찰서는 아주대학교 인근 한 부동산 중개사무소에서 임차인들과 전세계약을 맺고 건물주에게는 월세계약을 맺었다고 속여 총 20억920만원의 전세금을 가로챈 혐의로 공인중개사 일당을 검거한 일도 있다.
부동산 관리업체 스마트하우스의 이성태 차장은 “특히 건물주의 주거지와 원룸의 위치가 물리적으로 먼 경우 잦은 방문이나 꼼꼼한 관리가 어렵다는 점을 노려 사기가 발생하는 경우가 빈번하기 때문에 이 점을 주의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부동산은 시니어들에게 늘 골칫거리다. 자녀들이 출가하고 나면 둘만 덩그러니 살기에는 너무 큰 집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평생을 피땀 흘려 마련한 재산인데 주택연금으로 은행에 넘겨주자니 아이들에게 죄 짓는 기분이 억누른다. 방을 세놔도 되지만, 낯선 사람과 한집에서 산다는 것이 영 부담스럽다. 이런 고민을 갖는 시니어들에게 최근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빈방을 활용해 바로 관광객들에게 방을 빌려주는 숙박공유서비스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숙박공유는 최근 각광받고 있는 공유경제 중 가장 대표적인 서비스로 꼽힌다. 말 그대로 집을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고 돈을 받는 숙박업의 일종이지만, 내 집을 내어준다는 점에서 일반 숙박업과는 조금 다르다. 최근의 숙박공유는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기반이 됐다. 집주인과 고객이 스마트폰을 통해 정보나 의견을 나누고 결재까지 그 안에서 이뤄진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손님이 돌아간 뒤에는 후기나 안부를 주고받기도 한다.
국내법 테두리 안에서는 외국인 관광 도시민박법으로 분류된다. 집을 빌려주는 대상이 외국인이어야 한다는 규정을 두고 있는 것이다. 물론 농어촌 지역의 민박사업이나 펜션 등과 같이 숙박업으로 지정된 숙소들은 내국인 고객 유치에 문제가 없으며 숙박공유 참여가 가능하다. 정부는 규제프리존 특별법으로 올 하반기부터 부산·강원·제주를 시작으로 도시민박업의 내국인 대상의 영업허가를 추진했지만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이런 숙박공유에 참여할 수 있는 기관이나 기업은 많지만, 에어비앤비(Airbnb)라는 기업을 빼놓고 숙박공유를 말하는 것은 이제 불가능하게 됐다. 에어비앤비는 2007년 설립된 미국 기업으로, 급성장을 거듭해 190개 이상의 국가에서 150만개의 숙소를 운영하고 있는 거대 숙박공유 플랫폼이다. 국내에서도 이제는 업계 표준으로 인정받아 각종 교육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시니어 대상 숙박공유 설명회 늘어
숙박공유서비스가 시니어들의 ‘제2직업’으로 주목받는 이유는 단순하다. 시니어들의 요구와 딱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국내에서 활동하는 50세 이상의 시니어 호스트 숫자는 1500명에 육박한다. 에어비앤비코리아의 전현준 팀장은 이러한 현상은 한국만의 모습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해외도 마찬가지입니다. 에어비앤비의 호스트 중에 시니어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적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부동산을 기반으로 한 서비스이기 때문이죠. 남는 방을 활용하면서 고정 수입을 얻을 수 있으니 시니어들에겐 딱 맞는 서비스라고 생각합니다. 국내도 비슷한 모습을 보이지만 해외 시니어 호스트들 역시 경제적 여유가 있는 중산층들이 많이 참여합니다. 이들은 집을 공유하는 과정에서 얻는 인적 교류에 관심이 많아요.”
최근 국내에서는 시니어들 대상의 숙박공유 설명회가 속속 열리고 있다. 서울시 송파구는 지난 6월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외국인 관광 도시민박업 창업설명회를 개최했다. 해운대 여성인력개발센터도 지난해부터 도시민박 일자리 창출 사업을 진행 중인데, 참여자들의 상당수가 시니어들이다.
한국노인인력개발원도 시니어를 위한 숙박공유 교육에 뛰어들었다. 한국노인인력개발원은 지난 5월 에어비앤비코리아와 업무 협약을 맺고, 지난 8월 첫 번째 ‘시니어 호스팅’ 교육을 진행했다. 한국노인인력개발원 이광렬 대리는 참석자들의 반응이 좋아 전국적으로 확대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호스트 중에 60세 이상이 세계적으로 10%나 된다고 알려졌습니다. 숙박공유에서 시니어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다는 의미죠. 지난 8월 시범사업으로 교육을 실시했는데, 만족도가 높아 내년에는 전국적으로 교육을 확대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다만 시니어들이 이메일 정도는 주고받을 수 있는 기본적인 IT 상식은 있어야 하고, 도시민박업, 사업자등록 등 행정적 절차가 뒤따른다는 점이 넘어야 할 숙제입니다.”
행정적 절차 걸림돌 되기도
에어비앤비에서 숙박공유서비스를 시작하는 것은 간단하다. PC나 모바일 기기를 통해 호스트 등록을 하고 손님을 받으면 된다. 자신과 집, 동네에 대한 소개와 사진을 게재하고 본인 인증을 받으면 호스트 등록이 된다. 이때 숙박비와 입금 방법 등을 설정해야 한다. 물론 영업 대상이 외국인이기 때문에 집 소개와 관광객과의 대화는 영어 등 외국어로 이뤄질 수 있어야 한다.
에어비앤비코리아의 전현준 팀장은 “처음에 몇 번 손님을 상대하다 보면 연세가 있는 호스트들도 어렵지 않게 적응합니다. 외국인과 대화가 어려우신 분들은 자녀들의 힘을 빌리면 어렵지 않게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자녀들과 이런 일종의 동업을 하다 보니 유대관계가 더 좋아졌다고 하시는 분들도 적지 않아요”라고 설명했다.
숙박공유서비스에 뛰어드는 호스트들에게 가장 큰 난관 중 하나는 도시민박업이다. 아직 대중적으로 활성화되지 않은 사업 분야이다 보니 각 지자체마다 조례나 운영 방식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서울시만 하더라도 송파구같이 지자체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유치하고 있는 곳이 있는가 하면, 강남구나 서초구의 경우에는 허가가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일부 지자체에선 아파트에서 도시민박업을 할 경우 동 전체 주민에게 동의서를 요구하는 등의 무리한 조건을 내걸기도 한다. 주변 주민과 경쟁 관계인 숙박업소 등의 민원이 골치 아픈 게 그 이유다. 서울 지역의 한 호스트는 “숙박공유서비스를 활용하는 중국인 관광객들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일부 관광객들의 무례한 모습이 주민들과 마찰을 빚어 민원이 증가했고, 이런 민원 증가는 지자체가 도시민박업 허가를 까다롭게 하는 데 한몫했다”고 설명했다.
수익만 좇다간 스트레스만
그렇다면 수입은 얼마나 될까? 당연히 집에 따라, 위치에 따라, 내부 장식이나 부가서비스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가격은 호스트가 정하는 것이니까 정하기 나름이지만, 주변 경쟁 호스트에 비해 터무니없이 비싸면 손님이 찾을 리 만무하다. 만약 시세(?)가 궁금하다면 에어비앤비 웹사이트에서 비슷한 지역과 형태의 숙소를 바탕으로 한 예상 금액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서울시 양천구 목동에서 개인실 하나로 고객 한 명을 대상으로 영업한다면 예상 주간 수입은 12만9029원이라고 에어비앤비는 설명한다.
현직 호스트들은 수익만을 목적으로 이 사업에 뛰어들었다가는 제풀에 지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숙박공유가 수익이 나는 사업인 것은 분명하지만, 경제적 소득 이외의 보람을 찾아야 즐겁게 운영을 해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내 집을 고스란히 남에게 보여주고, 내어주는 것에 대해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일이 아니라 짐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열린 마음으로 고객들을 맞을 수 있는 마음가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나는 1952년 경남 합천군 초계면의 한 시골 마을 방앗간 집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우리 집은 아들만 여섯인 아들 부자 집이다. 원래 어머니는 아들만 일곱을 나으셨는데 첫 째는 돌도 못 넘기고 잃었다고 한다. 그 후 집안의 귀한 첫 아들로 태어난 나는 태어난 후 사흘 동안 눈을 뜨지 않아 부모님의 애를 태웠고, 어릴 때 비행기만 떠도 놀라서 경기가 드는 아이였다고 한다.
우리형제들은 모두 호적 나이가 실제 나이보다 일 년 씩 어리게 되어있다. 돌까지 살아남으면 호적에 올려주었다. 아마 첫째를 돌전에 잃었기 때문인 듯하다. 이 덕분에 나는 퇴직 시 명퇴금을 1년 치나 더 받을 수 있었다.
어머님과 아버님은 고향 마을에서 한집 사이를 두고 결혼을 하셨는데 그 중간 집에 사시는 분이 중매를 하셨다고 한다. 우리 부모님은 동네에서 잉꼬부부로 소문난 금슬이 좋으신 분이셨다. 아버님은 엄격하시고 강직한 분이셨다. 반면 어머님은 따뜻하고 정이 많으신 분이셨다. 아들들을 한없이 칭찬하고 격려하시고 보듬어 주신분이다. 우리 형제들은 우리집안의 유일한 여자 분인 어머님을 무척 좋아했다. 지금도 우리 형제들은 돌아가신 지가 15년이 지났지만 모이면 어머니 애기를 자주하고 다섯째는 대기업의 임원이지만 술 한 잔 되면 보고 싶다고 울곤 한다.
할아버지의 손자 사랑은 지극하셨다. 손자들이 많았기에 우리는 돌만 지나면 사랑방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잤다. 할아버지는 손자들 이불을 덮어주시고 음식도 챙겨주셨다. 손자들에 대한 자랑과 자부심이 대단하셨다. 친구 분들이 오실 때면 언제나 불러 인사를 시키셨다. 우리형제들은 그 당시 초등학교에서 형제들 모두가 급장을 다 하던 때라 자랑이 대단하셨다. 내가 나중에 취직이 되어 첫 월급을 새 돈으로 할아버지께 용돈을 드렸는데 돌아가실 때까지 그 돈을 보관하고 계셨던 분이다.
우리 할머니는 연약하신 분이지만 우리 형제들은 모두 할머니 등에 업혀 자랐다. 낳아주신 분은 어머니이고 키워주신 분은 할머니이다. 할머니 등은 손자들의 코 때가 지워지는 날이 없었다. 서울에서 방학 때 내려가면 맨발로 뛰어 나오시던 분이다. 나는 첫 손자로서 조부모님의 사랑을 한없이 받고 자랐다.
우리 집의 가훈은 우애(友愛)이다. 할아버지는 손자들에게 어릴 때 귀가 닿도록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하셨다. ‘조선팔도 다 다녀도 형제같이 화합할까’ 할아버지께서 항상 우리에게 하시던 말씀이다. 우리 형제들은 이 말씀을 어머님 돌아가신 15주기 때 고향 우리 집 정원에 비석으로 새겼다.
나는 초등학교에서 모범생 이었다. 한 학년에 두 반인 작은 시골 학교였지만 나는 입학해서 졸업할 때까지 6년간 급장을 했고 선생님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부모님도 아들을 자랑스러워했다. 소먹이기, 풀베기, 나무하기 등 집안일도 잘 도와드렸고 어머니가 가지 오이 등을 장에 갖다 팔아야 할 때는 리어카에 실어다 드리는 착한 아들이었다.
나는 1968년 무장공비 김신조가 청와대 담을 넘어 공격하던 해 서울 경기상업고등학교로 유학을 왔다. 경기상고는 시골에서 올라온 가난하지만 우수한 아이들이 많았다. 청운중학교와 같은 교정이어서 청운 중학교 출신도 많았다. 고향 초계중학교에서는 서울로 두 명이 유학을 왔는데, 친구는 배제고등학교를 가고 난 경기상고에 입학했다. 친구는 고모 집에서 다니고 나는 삼촌 집에서 다녔다. 그 후 세월이 흘러 나는 은행원이 되었고 친구는 고대의대를 나와 강릉의 유명한 외과의사가 되었다.
경기상고는 일제 강점기에는 경기도립상업고등학교로 도상이라 불렸던 학교로 일제 때부터 훌륭한 선배들이 많았다. 당시 정·재계에는 태완선 총리, 김종희 한국화약 회장님 등을 비롯한 분들이 포진해계셨고 특히 금융권에는 임원들이 많았다.
내가 경기상고를 선택한 것도 유연이다. 아버지와 서울에 올라와 어떤 학교를 가야할지 고심할 때 삼촌 이웃에 양정고등학교 선생님으로 퇴직한 분이 계셨는데, 이분이 도상을 추천해주셨다. 아버님은 대구상고를 나와 제일은행에 취직한 고향의 내 친구 형으로부터 ‘은행에 취직을 하니 당장 선생님의 월급보다 많더라’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아들을 은행에 취직시키고 싶어 하셨다. 양정고 퇴직 선생님은 상고 중에는 도상이 최고라며 당장 도상을 추천해 연희동에서 청운동까지 버스를 갈아타면서 먼 길을 삼년을 다녔다.
상고에서 은행에 취직하는 것은 인문계학교에서 대학에 진학하는 것과 같았다. 매년 어느 은행에 몇 명이 합격했는지 통계를 내고 홍보하던 때였다. 우리학교는 한 학년이 7개 반으로 6개 반이 취직반이고 마지막 7반이 진학 반이었다. 취업반은 은행 취직을 위한 전략을 세워 공부했다. 가장 공부 잘하는 학생은 한국은행, 산업은행, 외환은행 순으로 가고 다음 조흥, 상업, 제일, 한일, 서울은행 등을 갔다. 나는 신설된 한국신탁은행을 지원 했다. 신설된 은행이 향후 전망이 나을 거라고 선생님이 추천해 주셨다. 그해 경쟁률이 높아 우리학교에서는 나를 포함해 두 명 만이 합격했다. 대졸 중견 30명, 상고 졸 초급 60명을 모집했는데, 대졸 중견은 서울 대 출신이 반이 넘고, 나머지는 연대, 고대 등 대부분 명문대 출신이 전부였다. 71년 당시는 지금처럼 삼성, 현대, 엘지 같은 대기업이 성장하기 이전 이어서 공무원, 한전, 은행 등으로 인재들이 몰리던 시기였다.
그 당시 은행의 대우는 좋았다. 복지제도가 좋고 각종 수당이 수시로 나왔다. 그러나 입행을 하고나니 아무래도 대학을 가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건국대학교 경영학과 야간 학부에 시험을 봐 합격했다. 그러나 말단 직원이 대학 수업시간에 맞추는 것이 어려워 포기하고 다시 이듬해 야간 전문대학인 서대문에 위치한 국제대학을 지원 해 입학했다. 이 학교는 야간만 있는 대학으로 저녁 6시에 수업을 시작해 그 당시 인기가 있었다. 나는 경영학과에 입학했는데 정원이 30명으로 우수한 인재가 많았다. 한국은행, 산업은행 등 상고출신이 많았다. 적은 인원의 대학이지만 그 당시 매년 사법, 행정고시, 공인 회계사 등의 합격자들을 배출했던 시기이다. 내 친구도 산업은행에 다니면서 공인회계사 전국 수석 합격했다.
그때는 그야 말로 주경야독을 했던 시기이다. 은행의 업무는 최대한 빨리 끝내고 대학 수업시간에 맞추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동료들의 도움을 많이 받아야만 했다. 상사들의 눈치도 봐야 했다. 저녁은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라면으로 때우기가 일수였다. 4년을 그렇게 생활하니 위장병이 생길 것 같았다. 토요일도 근무하던 때라 일요일은 도서관에서 공부해야했다. 그래서 나의 이 시기는 다른 애들처럼 취미생활을 하거나 연애를 할 틈이 없었다.
그 당시 나에게는 큰 짐이 있었다. 둘째 동생이 서울로 올라와 중대 앞에서 자취를 하면서 같이 공부했다. 얼마 후에는 막내를 제외한 세 명의 동생들이 모두 서울로 올라와 동생들과 힘든 시기를 보냈다. 아버지는 학비와 쌀을 올려 보내주시지만 아들들이 공부하기엔 턱없이 부족하기에 나는 힘을 보텔 수밖에 없었다. 나는 75년 2월에 대학을 졸업하고 그해 12월에 군에 입대를 했다. 나 혼자 만의 일이라면 대학 2학년 정도 마치고 군대를 다녀오는 것이 좋겠지만 동생들을 남겨놓고 입대할 수가 없어 4학년을 마치고 친구들이 다 제대를 할 즈음 입대를 해야만 했다. 내가 입대를 해도 은행은 본봉의 월급이 나오는 때라 그 돈으로 동생들은 학교를 다녔다. 지금도 이야기 한다. 동생들이 형의 월급을 받으려 은행에 갔던 시절을…
둘째 동생은 중앙대 법대에 나왔다. 졸업 후 삼성생명에 입사해 항상 전국에서 일등의 업적을 내는 유능한 직원이 되었다. 신한생명 초기에 스카우트되어 신한그룹 최연소 임원이 되어 부사장 까지 승진해 8년이나 임원생활을 하고 지금도 퇴직해서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그 때 동양중학교 학생으로 다니던 다섯째 동생은 한양대 경영학과를 나와 지금은 롯데 칠성의 임원으로 재직 중이다. 필리핀 펩시콜라 사장을 5년 동안 역임했고 우리 동생 중 아직도 떠오르는 별이다. 나머지 두 동생도 대구에서 사업을 잘하고 있다. 힘든 시기를 넘겨 좋은 결과가 있어 보람은 있는 일이었다.
79년 제대를 앞두고 아버지의 권유로 첫선을 보았다. 휴가 중 서울의 작은 다방에서 맞선을 보았는데 단 한 번의 만남으로 결혼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그렇게 쉽게 평생의 배필을 선택 했는지 신기하다. 서로의 가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고, 부모님께서 미리 선을 봐 합격점을 준 상태라 하지만 개인적으로 서로에 대해 전혀 알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아내는 면장님의 둘째 딸이라 자라면서 큰 힘든 일은 해본 적 없이 곱게 자란 규수였다. 그 당시 나는 장남으로서 결혼 후에도 동생들을 데리고 있어야 할 형편이어서 아내를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대학에서 나를 따르는 여자도 있었고, 은행에서 자취집에까지 찾아온 여자도 있었지만 결혼을 쉽게 결정할 수는 없었다.
79년 6월 제대를 하고 11월에 결혼을 했다. 아버지는 내가 장남이라 전통혼례식을 올리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신부 집에서 아내는 족두리를 쓰고, 난 사모관대를 쓰고 혼례를 올렸다. 동네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멍석을 펴놓고 상위에는 살아있는 닭이 퍼덕 거렸다. 첫날밤은 신부 집에서 보내기로 하는데, 그 날 밤 신랑을 짓궂게 장난을 거는 사람 들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어 나와 아내는 저녁에 해인사로 피신하는 신혼여행을 떠났다. 밤중에 택시를 타고 해인사로 향하던 신혼 여행길에 노루가 튀어 나와 놀라던 추억이 새롭다.
내가 아내를 단한번의 선을 보고 선택한 것은 일종의 모험이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 보니 내 일생의 가장 잘 한 선택이었다. 아내는 검소하고 강하고 현명한 사람이었다. 지금 형제들이 성공하여 화목하게 잘 지내는 것은 대부분 아내의 공로인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후회스런 일을 꼽으라면 신혼초기 아내가 힘들 때 너무 도와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동생들 뒷바라지에 아이들 키우기 힘들 때 연탄불 한번 갈아준 적이 없고, 아이들 한번 제대로 봐준 적이 없다. 아내는 밤중에 아이가 깨어 울면 남편 잠 못 자 직장생활에 지장을 줄 까봐 아이를 다른 방으로 대려나가 밤새 혼자 방을 새우곤 했다. 아내는 그렇게 자신을 희생하고 오직 나를 위해 정성을 쏟은 그런 여자였다. 그 당시에는 왜 그리 철이 없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은행에 입행해 퇴직을 하기까지 만 38년을 다녔다. 지나고 보니 나는 직장 운은 좋았고 축복을 받은 사람이었다. 은행이란 직장은 안정되고 복지가 훌륭하고 좋은 직장이었다. 아이들 대학까지 등록금을 주고 집을 마련하도록 사원주택 아파트를 주고, 월급날 하루도 늦은 적이 없고 지점장 시절 억대가 넘는 연봉에 퇴직금도 적지 않은 직장이다. 재직 시에도 지점장 명함이면 누구나 신뢰하고 인정을 해주는 곳이다.
나는 초년 시절부터 성실했고 열심히 노력했다. 언제나 상사의 인정을 받았고 지점에서 언제나 대부계 같은 요직을 담당했다. 자기계발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주경야독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88년에는 해외 OJT연수를 미국 시애틀 은행으로 다녀왔다. 그 후 은행의 중요 부서인 종합기획부에 과장으로 근무하고, 카드 사업부, 개인금융부 등에서 차장으로 근무했다. 1998년 지점장으로 나갈 때 까지 황금기의 시절을 보냈다.
카드사업부에 근무할 때는 해외여행의 기회가 많았다. 일본 JCB카드사, 미국 비자사, 마스터 카드사, 유럽 유로페이 등 카드사를 매년 연수를 다니면서 여행할 수 있었다. 특히 시애틀 연수 후 미주, 유럽, 하와이, 동남아, 핀란드, 스페인, 지중해 해협 등 유럽 전역을 장기간 여행한 경험은 좋은 기회였다.
은행 승진도 남보다 늦지 않게 진급했다. 지점장 진급은 아이러니컬하게도 IMF 덕분에 빨랐다. 선배들이 명퇴를 하고 서울은행, 제일은 행이 매스컴에서 회자될 때 오히려 해택을 보았던 셈이다. 하나은행과의 합병 시에도 많은 직원이 퇴직을 했지만 그때도 살아남아 십년이 넘도록 지점장 생활을 하고 임금피크제 까지 일 년을 하고 퇴직할 수 있었다. 당시의 상황으로는 은행원의 천수를 다한 셈이다.
지점장 생활은 10년 동안 시흥남, 관양동, 수원, 서빙고, 부천, 성남 등 6개 점포를 거쳤다. 그러나 가장 기억에 남는 점포는 처음으로 부임한 석수역 앞에 위치한 시흥남지점 이다. 첫 지점장 발령을 받고 휴일 혼자 점포를 찾아가 어떤 전략을 구사할 것인가 많이 고심을 했던 기억이 새롭다. 아내는 많은 걱정을 했다. 사교성도 없는 고지식한 사람이 점포영업을 잘 할 수 있을 까 걱정을 많이 해, 지점장으로 승진을 했는데도 그렇게 좋아하지 않은 듯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지점 실적이 부진하여 평가에 하위 성적을 받으면 명퇴의 우선대상자가 되어 퇴사해야 할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내의 예상외로 난 지점장으로서의 점포경영을 십년이상 훌륭히 잘 수행했다. 내가 부임한 점포는 전임 점포장이 실적 부진으로 불명예 퇴진한 곳이 많았지만 나는 훌륭히 점포를 잘 부활시켰다. 나는 점포 경영의 핵심은 직원들의 관리와 경영 전략에 있다고 믿는다. 점포장의 철학과 의사결정이 중요하다. 그 핵심은 사람의 관리에 있다고 확신한다.
2009년 1월 은행을 퇴직했다. 재직 시에 시간이 없어 못했던 골프를 학교친구들이나 동생들과 같이할 수 있어 좋았다. 5월에는 홀인원을 하는 행운도 누렸다.
양재천과 대공원을 몇 년을 걸으면서 나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퇴직 1년 전에 과천어울림 남성합창단에 입단했다. 매주 화요일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연습해서 매년 연말에 시민회관에서 정기공연을 한다. 벌써 정기 공연을 일곱 번을 넘겼다. 7년이 지난 셈이다. 단원이 30명이 넘어 지역사회에서 새로운 친구를 많이 알게 되었다. 플루트는 퇴직 후 시작해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다. 아들결혼식 때 연주하고 퇴직직원 모임 등에서도 연주했다. 지금은 동호회를 만들어 매주 목요일 부림동 문회센터에서 연습하고 레슨도 받는다.
퇴직 후 5년을 쉬고 나니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2014년 새로운 준비를 해보기로 결심을 했다. 자격증을 취득하고 공부를 시작하기로 했다. 유통관리사를 3개월 동안 과천도서관에 다니면서 공부해 합격을 했다. 그리고 경영지도사 공부를 시작해 지난해 1차 시험에 합격하고 2차 시험을 준비 중이다. 그리고 이듬해 3월 호서대글로벌창업대학원에 입학해 이제 졸업을 위해 논문 준비 중이다
2014년에는 건국대학교 미래지식교육원에서 시니어플래너 과정을 공부하고 같이 공부한 동료들 5명이 KSP교육협동조합을 만들고 나는 이사장직을 맡았다.
다음해는 도심권이모작센터의 열린강사에 선정되어 평생 처음 강사로서 강의를 3차례 해보았다.
2015년에는 KDB 시니어브리지 아카데미 과정을 공부하고 시니어블로거협회에 참여하게 되어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머니투데이 방송에 시니어 악기배우기라는 주제로 방송에도 출연했다. KBS 시니어토크쇼 ‘황금연못’의 패널로도 출연하고 한겨레신문 시니어통신에 기고도 했다. 2016년 3월에는 공무원연금공단 미래설계교육 여가 주거부문 강사로 선정되었다. 매달 2회 제주, 설악산, 수안보, 천안 등에서 퇴직을 앞둔 공무원들 대상으로 강의를 하고 있다.
대학원 동문들과는 석사 박사과정을 마친 24명의 동문들이 참여해 컨설팅프렌즈라는 컨설팅회사를 창업했다. 졸업을 하면 이 멤버들과 할 일이 많아질 것 같다.
퇴직 후 만 7년의 세월이 지났다. 앞으로 얼마나 시간이 남아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시간의 속도는 더 빨라지는 것 같다. 내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조금은 알 것 같고, 인생이란 직접 경험해보아야만 알게 되는 것이 많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지금부터는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가치 있는 일들을 하고 싶다. 아내와 내가 건강하고 아들과 딸은 독립하여 제 몫을 잘하고 있다. 손녀의 재롱이 귀엽고 한 때 어려웠던 시절을 보냈던 동생들과 할아버지의 가훈처럼 화목하게 지낸다. 이러한 가족 간의 사랑이 무엇보다 소중하다. 그리고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면서 주변의 사람들도 돌아보고 작은 재능이지만 나누는 삶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