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6학년 때 나는 장래 인생의 목표를 세웠다. 어머니나 담임선생님도 같이 소망했다. 그리고 그 장래 목표는 중학교, 고등학교에 이르는 동안 한 번도 변하지 않았다. 중학교, 고등학교 내 생활기록부란을 쓰시는 선생님은 편했을 것이다. 위칸 하나만 쓰면 나머지는 점 두 개로 같다는 표시를 하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초등학교 졸업 즈음 담임선생님은 중학교 진학 문제로 보호자를 모셔오라고 했다. 내가 중학교에 간다는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학교에 오셨고 선생님은 내 앞에서 어머니에게 강권을 했다. “형철이는 옆에 있는 남중, 상고를 졸업하면 틀림없이 은행원이 될 테니 6년만 어머니가 고생하시면 됩니다”라고.
그 말에 어머니가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내 중학교 진학을 결정했고, 나는 고마움에 답하기 위해 은행원이 되기로 결심했다. 이후 나는 선생님의 말씀처럼 군산남중과 군산상고를 졸업했고 내 장래 목표를 완성했다. 1973년에 중소기업은행 행원이 되어 세종로 지점에 발령받았기 때문이다.
지점에 발령받아 일하던 그해 11월 지점장이 정년 퇴직을 했다. 송별식을 위해 지점장석과 차장석을 이어붙이고 그 위에 모조지를 깐 뒤 중국음식을 주문하여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나는 막내였으므로 섭섭한 마음을 담아 노래를 하라는 말을 듣고 노래를 불렀다. 여운의 ‘과거는 흘러갔다’였다.
송별식이 끝나고 소격동의 하숙집으로 가기 위해 경복궁 길을 걸었다. 오동잎이 떨어지고 있었다. 쓸쓸했고 뭔가 자꾸 떠올랐다. 한 사람이 자신의 일생을 바쳐 일하고 떠나는 송별회인데 탕수육이니 잡채니 몇 개 음식을 시켜놓고 몇 마디 한 뒤 그만 인사하고 헤어진다는 것이 너무 초라하고 궁색하다는 생각이 거듭 들었다. 그리고 그 모습이 30 여 년 후의 내 모습이라 생각하니 뭔가 잘못된 것은 아닌가 생각되었다.
그날 일기장을 펼치고 1973년부터 2000년까지 연도별로 적고 그 옆에 내 나이를 적었다. 동시에 옆에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나이를 적고 동생들의 나이를 죽 적었다. 그리고 은행에서 대리로 승진하는 해와 차장이 될 수 있는 나이에 선을 그어보았다. 대리가 되고 차장이 되면서 내가 차지할 집안 전체의 역할도 가늠해보았다. 2000년도쯤 되면 슬슬 배나오고 영락없는 한 명의 가장이 되어 살겠고 얼마 후에는 낮에 보았던 퇴임식이 나의 미래가 될 것이다. 아하, 그러다가 죽겠구나 하는 생각에 약간 쓸쓸해져 밖으로 나와 달을 쳐다보았다.
그렇지만 내 인생이 뭔가 달라질 것도 없었고 그게 그리 나쁘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뭔가 허전하다는 생각은 있었다. 그래서 세운 계획은 그 다음 해에는 반드시 야간대학에 가서 열심히 책이나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고3때 영어공부를 많이 했는데, 좋고 아름다운 말이 많았고 그런 책들을 제대로 전체적으로 읽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 해에 나는 국제대학(현 서경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했다. 낮에 일하고 밤에 대학에 다니는 일은 쉽지 않았다. 자주 늦었고 빠져야 하는 경우도 많았으며 설령 학교에 간다 해도 낮에 일하던 피로가 몰려와 강의 시간은 잠자기 좋은 시간이 되는 때가 너무 많았다.
그렇지만 공부하는 분위기는 너무 좋았다. 더구나 여학생이 꽤 많았기에 너무 행복했다. 게다가 은행원식 언어에 익숙한 내게 “얘, 건넙시다가 뭐니. 건너자고 말하면 되지”라며 길 가운데에서 물끄러미 쳐다보며 꼰대풍의 나를 젊게 교정해준 또래의 여자애가 있었으니….
실컷 졸다가 뭔가 어수선한 분위기에 깨고 보면 수업이 다 끝나 은행의 합숙소로 가는 버스를 탈 시간 쯤에는 더없는 인생의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수업은 재미없어도 야간대학의 수업 분위기가 좋아 행복했던 1학기 중간고사 즈음 우연히 참가한 백일장에서 시를 쓴 것이 가작에 선정되어 채플 시간에 상패까지 받았으니 나는 정녕 신세계에 입문한 셈이었다.
나를 뽑아주신 양명문 시인이 나를 불러 “강군은 시적 재능이 있는 것 같으니 열심히 써보게” 해주신 말은 나를 들뜨게 했고, 고등학교 때까지 백일장에 나가는 동안 수상 한 번 못해본 내게 신선한 충격이었고 감격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은 과 예비역 형에게서 “네가 시 쓴다고 하던데 써놓은 것 있으면 한번 보자”는 말을 듣고 며칠간 고심참담하며 몇 편의 시를 선뵈게 되었다. 나름 밤을 새우며 노트에 써간 시를 그 형은 손가락에 침을 발라 노트 매수를 살피듯 넘겨보고 나서 나에게 “야, 너는 고등학교 때 문예반도 안 했느냐”고 묻는 통에 얼굴이 붉어졌던 기억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형은 신춘문예 평론부문 최종심에서 떨어진 이력을 가진 문학의 고수였다. 그의 눈에 내 시는 초보의 수준도 못됐으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그날 이래 나는 그 형의 제자가 되었다. 그에게서 현대문학이란 잡지도 알게 되었고 문학은 많은 공부를 통해서 숙성되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엔 그 형을 따라 다방에도 갔고 산에 올라 해 질 녘까지 이런 저런 문학얘기를 들으면서 훌륭한 시를 써야겠다는 마음을 다져가게 되었다. 삼립빵 몇 개와 우유를 마시며 다닌 길이었지만 너무나 행복했다. 그러면서 내게 제대로 문학을 하려면 철학을 공부해야 하고 그러려면 이렇게 야간대학에서 공부할 것이 아니라 아예 주간대학에 편입해서 공부하고 졸업 후에 다시 직장에 가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나처럼 시골의 부모님께 일정한 돈을 보내주어야 하고 동생들의 학비도 생각해야 하는 처지에선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런 꿈같은 일을 이행하는 대신 서점에서 철학책을 사서 공부하면 될 것이라 생각하며 열심히 책을 사서 읽곤 하였다.
그런 내게 2학기 수업은 새로운 세계로 가는 계기가 되었다. 혼자 읽어보려 했지만 어려웠던 철학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는 계기가 생겼기 때문이다. 최명관 교수를 철학개론 시간에 만난 것이다. 첫 시간에 영어도 아닌 희랍어로 철학이란 말을 쓰셨고 학문이란 메타 호도스라고 하는데 그 뜻은 길을 따라서 가는 것이라며 수업시간에 본인이 쓴 ‘철학개론’이란 책으로 공부할 테니 미리 읽어오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너무나 행복했다.
그날 저녁부터 철학개론을 읽기 시작했고 3일만에 다 읽었다. 다 이해는 못했지만 너무나 뿌듯했으며 이제 그토록 바라던 한 세상을 만난 것처럼 행복했다. 그리고 철학개론 시간에 듣는 이야기는 내 눈의 허물을 벗겨주는 것 같았다. 철학자들의 삶이 너무 아름다웠고, 그 공부는 내게 새로운 세계로 가는 문이 되었다.
1학기가 끝날 무렵 나는 감히 생각도 못한 주간대학으로의 편입을 생각하게 되었는데 그러기 위해서 철학 교수님을 뵙고 조언을 듣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무작정 주소를 들고 찾아뵌 교수님은 날 알아보실 일이 없었기에 내 상황을 설명하고 교수님께 배울 길이 없겠느냐고 여쭈었다.
지금 다니는 은행이 좋은 곳인데 뭐하러 고생을 자처하느냐고 하면서 한 시간 가량 만류하시던 교수님이 내가 공부해서 시를 쓰고 싶다는 말에 기특하다고 여기셨는지 편입하면 좋은 선생님들이 있으니 그리 해보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러면서 미리 공부할 책을 몇 권 소개해주셨고 시와 철학의 관계에 대해서도 많은 말씀을 해주셨다.
일 년 동안 열심히 일하면서 틈틈이 철학공부를 한 뒤 주간대학 편입시험을 치렀다. 당시 내 계획은 편입시험에 합격하면 휴학한 뒤 군대에 가고 가 있는 동안 나오는 돈으로 집에 보태면 집에 대한 어느 정도 의무를 다하게 된다는 생각이었다. 제대 후에 열심히 공부해서 적당한 회사에 취직하면 그때 남은 도리도 하고 시를 쓰겠다는 생각이었다.
어렵게 숭실대 철학과 편입시험에 합격하고 등록금을 낸 뒤 며칠 있다가 휴학을 하러 학교에 갔을 때 확인한 것은 편입생은 바로 휴학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럴 경우 복학할 때는 다시 등록금을 내야 한다는 말에 난감해졌다. 더욱이 당시 은행에는 제대 후 이직이 잦자 군대있는 동안 받은 돈을 갚지 않을 경우 퇴직도 안 되는 특별규정이 있었다. 궁리 끝에 어려워도 은행을 그만 두고 그냥 학교에 다닌 뒤에 곧바로 취업하면 되겠다는 생각으로 시골의 어머니에게 허락을 받자고 생각했다.
겨우 생활이 안정되어가는 판국에 욕심 많은 장남이 은행을 그만두겠다는 말을 하면서 제대로 대학을 안 나오면 출세할 수 없다는 말을 들은 어머니는 기꺼이 동의하셨다. 그러나 아버지가 들을지 모르겠다며 밤새 아버지를 설득하셨다. 다음 날 어머니는 아버지 허락을 얻었다며 네 생각대로 하라고 하셨다. 나는 그 이튿날 은행에 사직서를 냈다. 3년 만이었다. 동생들 학비도 대야 하고 집안도 살려야 할 장남이 그리 욕심 많은 짓을 했어도 너를 믿는다는 한마디 말로 넘어가신 어머니! 아 우리들의 어머니.
열심히 공부해보려 했지만 장학금을 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대신 시를 열심히 써서 대학의 문학상도 받았고 그 상금으로 아버지에게 시계도 사드렸다. 퇴직금으로 2학기 등록금을 내고 나니 앞이 막막하여 1년 다닌 뒤 해군에 입대했다. 출동을 나가거나 정박기간에도 나는 열심히 시를 썼고. 제대 무렵에는 쓴 시가 제법 되었다.
1980년 복학 전에 쓴 시를 조태일 시인에게 드렸을 때 그 자리에서 읽은 후 창작과비평에 투고하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드디어 내가 지녀왔던 꿈을 이루게 되었다는 생각을 하고 투고했으나 가을호나 그 다음에 보자는 말을 듣고 좀 더 노력하고 있을 즈음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을 겪게 되었다.
더구나 투고했던 잡지는 1980년 7월경에 폐간되면서 시인이 되는 일은 미루어지게 되었는데, 그 기간은 오히려 내 시가 무엇이 부족한지를 깨닫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내가 정녕 공부하지 않은 역사나 민족의 현실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이 투옥되고 존경하던 교수님들이 학교를 떠나는 일이 생겼을 뿐만 아니라 억울하게 죽은 민중들의 죽음을 듣고 알게 되면서 시인이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참된 민족 구성원이 되는 것이 더욱 더 소중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나의 느낌과 생각이 내 것이면서도 동시에 우리들의 것이 되지 못하면, 억울하고 힘든 사람들의 그 느낌과 열망이 하나가 되지 못하면 시가 아니라는 것, 강제로 분단된 조국이 통일을 이루기까지는 반쪽짜리 문학이라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다. 역사와 민족 혹은 민중의 자유와 평등이란 가치를 깨닫게 되면서 그동안 내 시가 그런 큰 주제를 제대로 용해시켜 쓰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을수록 많은 책들을 읽고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다.
이후 1985년에 민중시란 제목의 무크지에 시를 발표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시를 쓰게 되었고 그동안 해망동 일기, 야트막한 사랑, 도선장 불빛 아래 서 있다, 환생 등 네 권의 시집과 시인의 길 사람의 길, 발효의 시학 등 두 권의 평론집을 냈다.
그동안 문인단체의 사무차장, 사무국장, 상임이사, 부이사장의 직책을 맡아 내나름 열심히 일했다. 어려서 해본 3년 동안의 은행업무와 대학 졸업 후 일했던 신용금고(현 저축은행) 3년의 실무경험이 유용했다. 또한 2003년에는 문화관광부 산하기관인 한국문화예술진흥원(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현기영 원장을 모시고 2년 6개월 동안 사무총장으로 일하기도 했고, 1996년에 숭의여대 교수로 임용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며 막연하게 은행원이 되어야 앞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했던 나의 인생이 많은 곡절을 거쳐 전혀 다른 분야의 인생을 사는 모습으로 변모되었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크게 변한 것도 없는 것 같다. 겉모양은 달라도 내게 주어진 조건에서 열심히 살고 생각한다는 것, 그리고 보다 좋고 바른 삶이 보이면 서슴없이 그 길을 선택하여 성심을 다한다는 것, 그런 것의 연속일 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아래 어디쯤에는 사람들과 세상을 사랑하시던 어머님의 잔잔한 가르침이 깃들어 있다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2007년 내 어린 시절 꿈을 꺾지 않으시고 존중해주셨던 어머니가 치매를 얻으셨다. 그동안 못한 도리를 하려고 2010년부터 고향 군산으로 이주했다. 역설적인 사실은 어머니와 살면서 내가 어머니를 돌보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로부터 생생한 인생 교육을 받았다는 점이다. 어머니는 2014년에 돌아가셨지만 나는 또 안다. 마음속엔 여전히 살아계셔서 내가 아직 공부가 덜 되었고. 또한 미숙한 시를 숙성시켜 당대 사람들의 아름답고 숭고한 삶을 훌륭하게 형상화해야 한다는 것을 준절하게 깨우쳐주고 계시다는 것을.
10여 년전 연구회에서 잘 알고 지내던 교수 한분이 직접 쓴 ‘경제수명 2050시대’ 이라는 책을 보내왔다. 50대에 창업을 하여 과거의 경험과 전문성을 살려 새로운 제2인생의 길을 선택한 필자의 이야기가 그 책에 소개되어있으니 한번 읽어보라는 뜻으로 보내온 것이었다.
5권 세트로 나온 이 책은 어떻게 하면 '경제 수명' 을 늘릴 수 있을까에 대한 이 분야 전문가들의 체험적 연구서였는데 '2050'은 20대부터 50년을 일해야 한다는 의미도 되고, 50대도추가로 20년을 더 일해야 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즉 경제수명을 50년은 유지해야만 고령화 시대에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이 책의 요지였다.
10년이 지난 지금, 이제는 ‘경제수명 2060’시대가 절실하게 되었다. 20살에서 70세까지만 일한다가 아니라, 80세까지 60년 동안 일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의미다. 나이 들어서도 직업이 있거나 안정적인 수입원을 가질 수 있다면 고령화 사회를 겁낼 필요가 없다. 겁을 먹게 되는 것은 고령화가 진행되는 한편으로, 평균적 퇴직 연령의 급격한 감소가 이뤄지고 있지만 은퇴 후 30년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90세, 100세를 사는데 50대 퇴직도 보장하기 어렵다면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 수 있을까?
2060을 몸소 실천하는 분 중에 이상헌 선생님이 계시다. 80세 가까이 되어서도 열정적으로 일하시며 100살까지 일하시겠다고 늘 말한다. 지금까지 무려 140여권의 책을 썼는데 지금도 일 년에 책을 서너권을 쓰고 있고, 일주일에 4~5회 강연과 신문 잡지사에 컬럼쓰기는 물론 1주일에 한번씩 행복에 대한 멧세지를 지인들에게 직접 보낼 정도로 왕성하게 활동하시는 분이다.
며칠 전 선생님을 찾아뵈었더니 ‘100살이다 왜!’라는 책을 선물로 주셨다. 보통 회사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후쿠이 후쿠타로(福井福太郞)씨가 쓴 자서전이다. 실제로 저자는 1912년생 102세다. 증권사 임원으로 은퇴했지만 더 일하고 싶어서 70세에 직원 3명이 일하는 도쿄 복권상회에 입사한 현역 회사원이다. 아침마다 전철로 1시간 거리에 있는 일터로 출근해 복권 분류와 배달, 회계 업무를 맡아 지금까지 30년째 일하고 있다. 근무 시간은 9시부터 2시. 96세 되던 해에 회사에 폐가 될까 우려해 회사에 사표를 냈지만 계속 남아서 일해 달라는 회사 경영진의 간곡한 만류로 지금까지 일하고 있다고 한다.
100세가 넘어서도 계속 일을 하는 이유는 딱히 없다. "건강에 이상이 없는 한 인간은 계속 일을 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요. "그 일이 대단한 일이건 그렇지 않건 돈을 많이 벌건 적게 벌건 자기가 먹을 양식을 스스로 마련할 수 있다면 그 자체로 멋진 직업“이라는 것이다.
일본은 65세 이상 노인들이 이미 23%를 넘었고, 지금 100세 이상의 고령자가 6만명을 넘는 세계 최고령국가다. 그래서 그런지 100세 이상 일하는 현역 분들이 의외로 많다. 시바타 도요 할머니는 100살에 ‘약해지지 마’라는 시집을 내어 100만부 이상의 베스트 셀러가 되었고 ‘나이를 거꾸로 먹는 건강법’의 저자 히노하라 시게아키(日野原重明) 박사는 금년 103세(1911생)로 현역 병원장이다. 100살이 되던 3년 전 83세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사업을 키워나가고 있는 이길녀 총창의 초청으로 대학에서 강의를 하러 한국을 다녀갔다. 그는 ‘어떤 일도 생각하기 나름, 늙는 다는 것은 쇠약해 지는 것이 아니라 성숙해지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진정한 늙음과 젊음은 마음에 있다."고 말한다.
이제 우리도 자신이 활동하거나 일하는 유통기한 즉, 경제수명을 50년에서 60년으로 늘려야한다. 여기에는 생애교육(生涯敎育)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과거에는 더블 30, 즉 부모 밑에서 30년 + 자신의 30년 인생을 살았다. 이제는 트리플 30으로 바뀌었다. 퇴직 후 기나긴 30년이 더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아무 준비 없이 퇴직하여 ‘무노동 무임금’으로 마지막 30년을 보낸다는 것은 이제 본인에게는 악몽의 30년이 될 수밖에 없고, 자식들에게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짐이 되고 만다.
여기서 말하는 생애교육은 평생교육과 같은 의미로 쓸 수도 있지만 매우 다르다. 생애교육은 100세 시대를 살아가는 지혜를 젊은 나이에서부터 공부하고 무언가를 미리 준비하자는 것으로 막연하게 죽을 때까지 공부하자는 평생교육과 다르다. 평생교육은 어찌보면 삶의 질을 높이는 데는 큰 효과가 있으나 2060을 실현하는 데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선진국 기업들은 일찌감치 퇴직지원은 물론 젊어서부터 생애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기업들이 오래 전부터 입사한 신입사원부터 퇴직이후를 준비하는 Life Plan을 세우고 은퇴 이후의 노후 커리어 관리와 생활계획을 수립하도록 하고, 50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세컨드라이프 코스에 참여하는 기회를 주면서 퇴직 준비를 돕는다.
서구에서도 인사조직 컨설팅사 에이온휴잇에 따르면 미국 기업의 90% 이상이 정기적으로 은퇴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독일에선 기업이 정리해고를 하려면 퇴직지원 프로그램을 의무적으로 진행하도록 법에 규정돼 있다.
지금까지 국내 기업 퇴직 프로그램은 전직 전문회사(Outplacement)주도로 퇴직 이후 전반적인 삶을 설계하기보다 전직이나 당장 경제활동을 지속하도록 하는 재테크 컨설팅에 그쳤다. 단기간 성과는 제공할 수 있어도 길어진 은퇴 기간을 준비하는 데는 너무 미흡하다. 재무 설계뿐 아니라 지속적인 일(job), 건강, 여가, 가족관계 등 비재무적인 프로그램까지 포함시켜‘퇴직지원’에서‘은퇴준비’로 젊어서부터 노(老)테크를 준비하도록 생애교육 프로그램 영역을 넓혀야 한다. 기업 측에서는 물론 노조도 생애교육에 대한 적극적 지원과 직원들의 의식을 변화시키는“100세 시대를 살아가는 생애교육”에 적극 나서고 참여해야 할 때다.
젊어서 생애교육을 통해 준비한 후 퇴직이후에 무슨 일을 하던 한 달에 가령 2백만 원을 번다고 치자. 말이 그렇지 초저금리로 인해 200만원을 이자로 받으려면 적어도 10억 이상의 현금을 은행에 넣어두어야 가능한 금액이다. 만약 퇴직 이전에 노후 대비 자금을 마련해 두지 않았다면 60세 이후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일을 잡는 것과 젊어서부터 미리 준비하여 취미와 소일거리로 직장을 찾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즉 은퇴 계획은 특정 세대와 상관없이 빠를수록 좋으며 노테크도 하루라도 빨리 시작하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상황이 이렇게 변화했는데 우리의 의식 수준은 ‘퇴직은 곧 일에서 은퇴’라는 80세 수명시대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다.
“청년이란 생의 어떤 기간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에 의해 결정된다. 붉은 뺨이나 입술이 아니라 굳센 의지, 상상, 감정, 생명력에 달렸다. 청년은 용기로 비겁을 이기며, 모험으로 앞일을 안다.”고 맥아더 장군은 말하였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육체적 젊음뿐만 아니라 정신적, 영적으로 활기찬, 늙었지만 진정한 젊은이가 많아야 고령화시대에 대비할 수 있다. 열정 인생엔 나이가 없다!
글: 피플스그룹 대표이사 가재산
한국형 인사조직 연구회 회장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
중장년층과 베이비부머세대, 퇴직자들, 즉 시니어들이 공통적으로 최대의 관심 정보는 뭘까? 바로 일자리다. 재취업은 하늘에 별 따기고 연금은 부족하다. 한국고용정보원에 따르면 55∼64세 고령자 고용률은 2012년 63.1%로 1995년 63.6%보다 0.5%포인트 하락했다.
고용지표상으로만 보면 베이비부머 세대인 50대 중심으로 취업자가 늘어가고 있고, 여성과 중장년층의 고용율이 증가하고 있다. 하지만 그 이면을 들춰보면 시간제근로자, 기간제근로자 등의 비정규직 근로자 비중이 늘어나고 있을 뿐이다. 그야말로 숫자만 채우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그렇다면 50대 이후 시니어들 재취업은 정부와 기업의 전직지원 구축이 시급한 이유다.
자신과 상관없는 일을 하게 되는 재취업에 절망
비자발적, 자발적이든 정든 직장을 떠날 수밖에 없던 퇴직자들은 인생2막을 열기 위해 다시 취업전선에 뛰어들어야 한다. 이들에게는 재취업이 필수다.
그러나 시니어 계층의 재취업과 창업에 대한 절박한 사회적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그 현실화가 제대로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중장년층 구직자들을 위한 전직 서비스가 아직 자리잡지 않았고, 기업들이 퇴직자를 바라보는 편견도 넘어야 할 벽이다.
명예퇴직 신청을 한 1년 전부터 50대 초반 A씨는 6개월 동안 ‘전직지원전문가’에게 심리상담, 진단과 피드백, 원하는 일이 무엇인가?, 전직교육, 취업알선 등 전문 컨설팅을 받았고, 퇴직 후 곧바로 자신의 경력과 적성에 맞는 새로운 직장에 재취업했다.
퇴직이 배우자의 사망에 이은 가장 큰 심리적인 충격이라는 여론 조사 결과를 보더라도, 퇴직은 개인에게 또한 매우 큰 시련이다. 게다가 고령화사회 정년퇴직 연령이 낮아지는 노동시장의 형태 속에서 퇴직은 고급 인력들의 사회 참여 폭이 작아지는 사회 해체의 문제와도 연관돼기 때문에 퇴직자들에 대한 기업과 사회의 고민은 매우 커져갔다.
따라서 그 동안 회사를 위해 기여한 근로자들 퇴직 이후의 삶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으며, 그 대안으로서 아웃플레이스먼트(전직지원프로그램)가 도입되고 확대되기 시작했다. 정부 차원에서도 퇴직 후 일정기간 동안 실업급여를 제공하고 또 재취업을 위한 각종 교육훈련제도를 만드는 등의 노력을 병행하고 있다.
정년연장과는 별개로 기업들은 고령화의 적극적인 대응책으로서 전직지원서비스에 주목하고 있다. 고령화 시대의 최선의 복지는 일자리 제공이며, 일자리가 행복의 조건인 상황에서 이직하는 근로자가 가급적 실업 없이 새로운 일자리를 찾을 수 있게 지원하는 전직지원서비스의 중요성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즉, 퇴직자에게 일시적 희망 퇴직금이나 복리후생보다는 근로능력이 있는 중·장년 근로자를 일할 수 있게 지원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중·장년의 재취업과 창업이 잘 안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사회 전반적으로 퍼져있는 재취업에 대한 비틀린 시선이다. 시니어들에게 정부가 주도하는 재취업 지원이 시니어들의 전문성이나 그간 해왔던 일들과는 상관없는 일감들을 맡기기 일쑤라는 불평을 듣는 건 어렵지 않다.
아웃플레이스먼트 실행이 잘 안되는 이유
소위 아웃플레이스먼트 서비스를 도입한 기업일지라도 퇴직을 앞둔 1주일 전에 단발성으로 워크샵을 가거나 온라인 상담정도에 그친다. 이력서 쓰는 방법 알려주거나 면접 보는 스킬정도. 직전 퇴사 처리된 회사에 대해 악의를 품지 않도록 잘 달래주는 일이 겨우 아웃플레이스먼트라고 시늉하는 행태에 머물러 있다. 기업들의 평판에만 신경쓰는 저비용 고효과를 기대하는 변형 아웃플레이스먼트를 흉내내고 있다는 의미다.
전직지원프로그램이 있다고 소문난 기업에도 아웃플레이스먼트 서비스 개념도 모르고 있는 곳이 많다. 퇴직자들이 아웃플레이스먼트제도를 요구하지 않아서 도입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 HR부서에서 아웃플레이스먼트 서비스 정보를 아예 전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990년대에 들어 우리나라 기업에 소개되기 시작하였다가 IMF 경제위기 이후의 구조조정과 전직지원장려금제도가 도입되면서 국내 기업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하지만 도입 10년이 넘게 흐른 지금 아웃플레이스먼트 서비스에 대한 기업들과 퇴직자들의 반응은 냉랭하기만 하다. 기업들은 아웃플레이스먼트 서비스에 대해 ‘무용론(無用論)'을 주장할만큼 서비스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또한 퇴직자들은 아웃플레이스먼트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에 퇴직 시에 아웃플레이스먼트 서비스 보다는 현금 보상을 더 선호하는 상황이다.
위로금을 선호하는 퇴직자들, 전직지원 서비스 요구해야
이런 이유들로 인해 도입 초기에 비해 서비스를 제공하는 외국계 기업 및 국내 기업은 많이 늘었지만, 교육프로그램 중심으로만 커진 시장 규모는 역설적으로 그리 크게 늘지 않았다.
하지만 국회에 계류중인 법 개정안에 따르면 앞으로 300인 이상 사업장의 경우 이같은 퇴직(전직)자에 대한 재취업, 창업 알선 등 지원서비스가 의무화 되면 전직지원서비스를 하려는 기업은 늘어 날것으로 전망된다. 퇴직자 가운데 장년을 대상으로는 전직지원 장려금을 지급하고, 사업주에게는 고용유지지원금을 지급하는 방안이 검토된다는 것이다.
KT는 지난 4월 무려 8300여명의 명예퇴직 신청을 받아 1조3000억원 가량을 명예퇴직금으로 지급했다. 1인당 평균 1억4457만원에 이르렀다. 또 한국시티은행은 최근 실시한 명예퇴직에서 5년치 급여를 특별퇴직금으로 지급했다. 1인당 평균 4억원에 달했다. 이밖에 자녀 학자금, 건강검진 혜택도 보장했다.
현대차그룹 계열회사도 최대 2억원을 넘게 퇴직위로금을 조건으로 제시했다. 인건비를 줄이기 위한 감원인데, 막대한 인건비를 지출하게 된다.
경력관리체계가 자리 잡힌 일본, 공공과 민간 양쪽에서 재취업 지원
고령화 사회의 문제점을 일찌감치 치룬 해외 선진국에서는 재취업-창업 프로그램에 대한 내용들이 우리나라보다 고도화되어 있다. 일본은 정부의 ‘헬로워크’와 민간의 ‘시니어살롱’이 그러한 역할을 하고 있다. 헬로워크는 일본의 후생노동성이 고용안정 기회 확보를 위해 만든 공공직업안정소의 애칭으로 전국에 약 500개가 만들어져 있다. 취직 상담, 직업 교육, 직업 소개, 고용보험 관련 업무 등 취업과 관련된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그러나 사실 일본에서도 헬로워크는 상대적으로 낮은 직무 능력을 가진 중·고령자들을 위해 단순한 일자리를 소개해 주는 곳으로 인식되곤 한다. 하지만 ‘시니어살롱’은 전문 경력을 가진 시니어를 대상으로 구인구직 및 직업 교육, 상담을 진행하는 민간 비즈니스 모델로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는 일본의 국가 공인 경력관리체계가 안착됨에 따라, 경력관리모델에 의해 노년에도 전문성을 충분히 살리는 일을 맡기기 때문이다.
베이비붐이란 단어의 탄생지인 미국은 비영리단체(NPO)가 잘 정비돼 있어 경험과 지식이 많은 계층의 재취업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미국의 NPO는 200만 개 정도 있는데 그중 절반은 의료, 복지와 관련된 일을 하고 30% 정도는 각종 교육 활동, 나머지 20%는 기타 다양한 활동을 한다. 미국에서는 NPO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취업 인구에 포함시킨다. 그래서 미국 전체 취업 인구의 10% 가까이가 NPO에서 일하고 있는 걸로 나온다. 즉 취업 알선 분야의 규모가 워낙 거대하다보니 그 분야 자체가 일자리까지 제공할 정도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중인 것이다.
각 지역사회 내에서의 재취업 지원 활성화 시작
우리나라도 문제들에 대한 대책과 대안들이 나오지 않은 건 아니다. 공공기관과 기업들은 매 시기마다 열리는 다양한 일자리 박람회와 함께 다양한 재취업 프로그램을 준비해놓고 있다.
‘중장년 재취업 프로그램’이 경제단체와 지자체들을 중심으로 생겨나고 있지만 실효성에 대한 의문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40대 후반 항공회사 출신 조기 퇴직자는 “간혹 일자리를 연결해 줘도 그곳에서 추천해주는 일자리들이 너무 열악한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다양하고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해야 앞으로 10년 뒤에도 폐지가 노인 일자리를 감당하는 비극적 일은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고령자고용촉진법 개정안에 따르면, 앞으로 300인 이상 기업은 퇴직을 앞둔 근로자에게 의무적으로 전직지원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고 한다. 고용정보원 한 연구원은 전직지원 서비스에 대한 기업의 인식 개선이 시급하다고 진단했다.
퇴직자에 대한 전직지원은 결국 기업과 소비자를 위한 서비스라는 인식이 선진 외국처럼 뿌리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숫자나 통계치 목표에 기준을 두지 말고 ‘양질의 일자리’를 모색한다면 퇴직자들이 전직 및 제2의 인생을 설계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 강조했다.
퇴직 후 재취업은 이제 근로자 개인의 것으로 취급할 문제가 아니다. 특히 중장년 퇴직자의 전직과 노후설계 지원은 기업이 정부, 전문가와 손잡고 수행해야 할 사회적 책무가 되어야 한다.
현재 많은 기업에서 전직지원 서비스를 실시하고 있는데 기업에 따라 기본교육만 실시하고 있는 기업이 있는가 하면 전체 프로세스를 활용하여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기업도 있다.
기본교육은 퇴직을 앞둔 대상자의 변화, 심리, 가족, 건강, 여가, 경력, 법률, 재무, 인생설계 등 퇴직후 누구에게나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교육을 말한다. 교육프로그램 중심으로 기업에 따라 집합교육 및 온라인으로 진행하고 있다.
아직 도입단계인지라 전직지원에 대한 집체교육을 실시하는 기업이 늘고 있으며 전직지원 상담의 경우에는 개인적 상황에 따라 시간을 유동적으로 하고 있다.
상담 및 컨설팅의 경우는 개인의 재무상태나, 경력 활용방안, 법률적 문제나 여가활용 방안 등 개인의 문제를 1:1로 전문가에 의해 심층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방법이며 창업이나, 재취업의 경우 컨설팅을 통해 재취업 실행까지 지원 하도록 해야 한다.
P&G, 수출입은행, 한전, KT에서는 이러한 전직지원 프로그램을 이미 시행 중에 있으며, 퇴직 예정자 뿐만 아니라 이미 퇴직한 사람들도 유용하게 접할 수 있어 향후 기업들이 전직지원 서비스 도입을 검토하고 있는 중이다.
삼성 그룹, 계열사별로 18개 경력컨설팅센터 운영 중
한편 대기업들도 자사의 직원들을 위한 아웃플레이스먼트(Outplacement)를 차차 갖춰나가고 있다. 아웃플레이스먼트는 1960년대 말 미국에서 처음 탄생한 개념으로 우리 말로는 ‘전직 지원 프로그램’ 또는 ‘퇴직자 지원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다. 포천지 선정 500대 기업들 중 80% 이상이 이를 실행하고 있을 정도로 선진국에서는 일반화된 개념이다.
아웃플레이스먼트는 IMF 이후 기업에서는 효율적인 구조조정의 수단으로, 정부에서는 실업률 해소를 위한 방안으로 활용돼 공공과 민간부문에서 지속 적으로 성장했다.
우리나라에선 아웃플레이스먼트를 실행하는 대표적인 기업으로 삼성 그룹을 들 수 있다. 삼성은 회사를 떠난 임직원이 일자리를 쉽게 찾을 수 있게끔 퇴직 관리를 해주는 경력컨설팅센터를 2001년부터 시작하여 현재 각 계열사별로 18개를 운영하고 있다.
특히 40~50대 중장년 퇴직(예정)자들의 재취업을 돕는 전직 지원 서비스를 시작했다.
경력컨설팅센터는 퇴직임원, 정년퇴직자(또는 예정자), 퇴직자(또는 예정자)를 대상으로 자문역 전직, 정년준비, 전직 상담을 해주며 재취업 알선뿐만 아니라 재교육, 창업지원을 하면서 퇴직 후 삶을 계획할 수 있게끔 종합적으로 관리해주고 있다. 현재까지 총 3천 600명이 재취업에 성공했다는 것이 센터측의 얘기다.
센터 관계자는 “전직지원 프로그램 제공을 통해 회사는 내부 고객으로서의 근로자와의 계속적 관계를 유지함과 동시에 퇴직과 관련한 근로자 개인의 심리적 불안감을 완화할 수 있습니다. 심리안정 후 여기서는 6단계의 교육을 실시합니다. 일에 관한 인식을 전환하고 자산을 체크, 가족, 건강, 여가, 관계 등을 탐색하면서 생각을 바꾸게 한다”고 말했다.
재취업자가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실패를 줄이기 위해 사후관리까지 해주는 점이 특징이다.
삼성전자 경력컨설팅센터가 국내 전직지원서비스의 롤모델로 부각되면서 LG, SK 등도 벤치마킹 움직임을 보이고 있고 전직지원장려금제도 부활과 맞물려 시너지를 낼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 부장, 재취업보다는 더 늦기 전에 생애설계부터 하지”
전문가들은 재취업 준비를 자신의 장점과 전문성을 살릴 수 있는 분야로 찾아보라고 조언한다. 물론 척박한 재취업 환경을 갖고 있는 현재에 그를 위해선 철저한 준비가 뒤따라야 한다. 당연히 시니어 본인은 재교육에 대한 필요성도 느끼고 실행해야 한다. 그 모든 과정은 어찌 보면 자신이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에 대한 재점검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시니어 취업자들이 눈높이를 낮추라는 말도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의견이다. 이는 아직 현실적으로 시니어들의 취업 지망과 기업이 인재에게 바라는 요구사항의 격차가 큼을 우회해서 알려준다. 물론 시니어들의 눈높이 낮추기만을 강요하지 말고 기업에서 시니어들을 고용하는 일에 거부감을 갖는 풍토 또한 개선되어야 할 부분이다. 이를 위해선 시니어 재취업에 있어 정부에서 기업에게 제공하는 다양한 혜택, 세금 감면, 인센티브 등이 보다 현실화될 필요가 있다.
중장년 대다수가 일할 의사가 있는데도 정년은 57세 수준에서 정체되어 있고 기업의 장년 채용 기피 관행이 있어 재취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런 점에서 중장년 재취업 대책의 실효성을 점검하고 구체적인 보완책을 내놓아 중장년 고용률의 획기적인 변화를 유도해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제 인터넷으로도 조문(弔問)을 할 수 있다. 오는 7월 1일부터 ‘사이버 장례식장’이 문을 열기 때문이다.
한국골든에이지포럼은 25일 서울 YWCA 강당에서 ‘사이버 공간을 이용한 건전 장례 문화 확산’세미나를 열고 이같이 밝혔다.
사이버 장례식장 사용법은 간단하다. 상주가 입회비(3만원 예정)를 내고 인터넷으로 사이버 장례식장(efuneral.co.kr)에 접속해 사용하면 된다.
이 사이트에서는 현실세계와 같이 편지를 주고받거나, 대화도 할 수 있다. 쇼핑과 은행 업무는 물론 가상화폐를 이용한 상거래까지 가능하다. 또한 이 곳에서는 올바른 장례 예법과 장사절차, 장례 용품 등에 관한 정보도 제공할 예정이다.
김일순 공동대표는 “사이버공간은 정보기술의 발달로 날로 확대되고 있다”면서 “사이버공간을 건전 장례문화 확산운동에 활용하자는 것이 이번 세미나의 취지”라고 밝혔다.
골든에이지포럼 이광영 이사도 “인터넷에서 고인이 남긴 글이나 사진, 상주의 인사를 차분히 읽어 보는 것이 의미 있는 추모다”라고 말했다.
# 전세계약 만기일을 앞둔 나경제(가명ㆍ38)씨는 새로 분양하는 아파트를 알아보고 있다. 서울 전셋값에 조금만 보태면 수도권에서 '내 집 마련을 할 수 있겠다' 싶어서다. 하지만 서울을 벗어나면 출퇴근 시간이 늘어나게 되는 점이 고민거리. 그래서 그는 급행 열차 정차역 인근 아파트를 1순위로 삼고 있다. 특히 급행열차는 보통열차보다 속도도 빠르고 정차하는 역도 적어 출퇴근 시간을 줄일 수 있어서다.
서울 전셋가 상승에 서울 외곽지역의 매매로 전환하는 수요가 늘면서 급행 역세권 아파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치솟는 전셋값에 내 집 마련을 위해 서울외곽으로 옮겨가지만 서울에 있는 직장과의 출퇴근 시간을 무시못해 급행 역세권 아파트를 찾고 있는 것이다.
8일 KB국민은행에 따르면 따르면 3월 기준 서울의 전세가격 비율(전세가율)은 63.2%를 기록했다. 지난 2001년 12월 이후 최고치이다.
급행열차는 보통열차보다 속도가 빠르고 정차하는 역이 적어 서울 도심까지 출퇴근 시간을 줄일 수 있다. 특히 1호선 경인선은 구도심이 자리잡고 있어 분양가는 낮고 생활인프라는 잘 갖춰져 있어 서울 서남권으로 출퇴근 하는 실수요자들이 선호한다.
대우건설은 다음 달 경기 부천시 송내동에서 ‘송내역 파인 푸르지오’를 분양한다. 전용 62∼84m² 총 539가구 규모로 2009년 이후 신규 입주물량이 없었던 소사구에서 처음 공급되는 중소형 아파트인 데다 올해 소사구 일대에서 공급되는 유일한 물량이라 관심을 모은다.
도보로 3분 거리의 1호선 급행열차 정거장인 송내역을 이용하면 여의도와 구로 등 서울 서남권 업무지역으로 20분이면 이동 가능하다. 또한 단지 인근에 조성중인 송내역 북부광장 환승센터가 내년 5월 완공되면 철도역에 버스, 택시 등 교통수단을 통합 배치시켜 환승거리를 최대한 짧게 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시민들의 이용편의가 크게 개선된다.
동도건설은 5월 부천시 심곡본동에 실속형 중소형아파트 ‘부천역 동도센트리움’을 분양한다.
이 단지는 지하 3층 지상 18층, 전용 59㎡, 아파트 80가구와 전용 71㎡ 오피스텔 64실등 총144가구 규모다. 1층과 2층에는 상업시설이 입점하며 3층부터 18층까지는 아파트와 오피스텔이 들어선다.
부천역 동도센트리움은 지하철1호선 급행정차역인 부천역이 도보 5분 거리에 위치한다. 또 경인고속도로와 46번 국도를 통해 서울로 쉽게 이동할 수 있다. 서울 외곽순환도로도 가까워 수도권 각 지역으로 이동이 편리하다.
금강주택은 오는 9월 의정부시 민락동 민락2지구 B-7블록에 전용 60~84㎡, 총 719가구를 짓는 ‘의정부 민락2지구 금강펜테리움’을 분양한다. 민락로, 동일로를 통해 서울 노원구, 도봉구 등으로 이동하기 쉽고 간선직행버스(BRT)가 개통되면 서울지하철 1,7호선 환승역인 도봉산역을 통해 서울시청 방면 도심과 강남권으로 출퇴근이 더욱 쉬워질 전망이다
서희건설은 경기 양주시 덕정동에서 4월 입주를 시작한 ‘양주 덕정역 서희스타힐스’를 분양 중이다. 지하철 1호선 덕정역이 바로 앞에 위치해 급행전철 이용시 서울 창동까지 20분이면 도달할 수 있다.
이 아파트는 전용 59~84㎡, 지하 2층~지상 18층, 4개동의 1단지 207가구와 지하 2층~지상 21층, 11개동의 2단지 821가구 총 1,028가구 규모로 조성된다. 3.3㎡당 700만원 대로 전용 84㎡의 분양가가 2억6900만원(4층 이상 기준)수준이다. 여기에 발코니 확장 무료혜택까지 더해진다.
삼성물산은 인천시 부평구 부평동 일대에 `래미안 부평`을 분양 중이다. 오는 9월 입주 예정인 지하 3층~지상 최고 33층 18개 동, 총 1,381가구 아파트로 현재 전용 84㎡와 114㎡ 일부 잔여 물량을 판매하고 있다.
래미안 부평은 경인선 부평역이 인근에 있어 급행전철을 이용할 수 있으며 지하철 7호선•인천 1호선 부평구청역을 도보로 이용가능해 출퇴근이 편리하다. 경인고속도로 부평IC, 외곽순환고속도로 중동IC 접근이 편리해 서울 및 수도권 진출입이 쉬운 것도 강점이다.
곽창석 ERA코리아 부동산연구소장은 "점점 오르는 전셋값에 서울외곽으로 눈을 돌리는 사람들이 늘면서 서울 도심과의 교통이 편리한 곳이 주거지역으로 꼽히고 있다”며 “그 중에서 급행열차를 이용할 수 있는 급행 역세권은 출퇴근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어 30~40대 직장인들의 수요가 많다”고 밝혔다.
한국의 노인 자살률은 OECD 회원국 중에서도 1위이며, 그 수치도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노인의 자살 주요 원인으로 꼽히는 우울증의 경우 적절한 상담을 통해 마음의 문을 열고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는 사례도 많다. 이처럼 생과 사의 기로에 선 노인들을 직접 만나 진정성 있는 상담을 통해 그들에게 새로운 인생을 제안하는 이들이 있으니, 바로 ‘자살예방 상담사’다.
서울노인복지센터 노인 일자리 사업단에서 만65세 이상 12명으로 구성된 이들은 노인의 자살위기 사례 발굴 및 상담을 통한 우울증 감소를 통해 노인의 자살을 예방하는 데 큰 힘이 되고 있다. 그들은 매월 36~40시간 자살예방상담사로 근무하며 소정의 급여를 받고 있지만, 월급보다 더 얻는 것이 많아 항상 보람과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한다. '자살예방 상담사'라는 제2의 직업을 통해 자살을 고민하는 이들에겐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자기 자신도 또 다른 삶의 의미를 찾아가고 있다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은행 지점장보다 자살예방 상담사로 사는 요즘이 더 보람되고 마음이 풍요로워요."
1998년 은행 지점장 은퇴 후 크게 하는 일 없이 지내왔던 조희채(70)씨. 그러던 그는 3년 전 인터넷 모집공고를 통해 노인 상담사 일을 시작했다. 당시 일반 상담으로만 이뤄졌던 업무가 자살예방·성(性)인권상담·민생상담 등으로 나뉘자 조씨는 자살예방 상담사를 택했다.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다는 그는 “지난해 전화 상담 중 자살하고 싶다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의 마음을 되돌리려고 40분 넘게 상담을 했죠. 그가 느꼈을 상실감에 대해 이야기도 나누고, 자아를 버려서는 안 된다고 설득해나갔어요. 상담이 끝난 후 119와 경찰에 연락해 그의 자살을 막아냈습니다. 그때 그 일로 노인 자살예방 쪽으로 더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자살예방상담분야를 택하게 됐습니다”라며 그때 그 사건이 상당히 인상 깊었다고 설명했다.
조씨는 평소에도 타인과의 대화법이나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강연을 듣거나 책을 읽는 등 친밀감 있는 상담을 진행하기 위한 공부를 하고 있다고. 그는 상실감을 느끼는 이들에겐 그 무엇보다 목표설정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조씨는 “먼저 자존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해줘야 해요. 그렇게 하려면 자기 장점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거든요. 저는 상담할 때 ‘당신의 장점을 10가지만 써보세요’라고 합니다. 그러면 처음엔 ‘나는 장점이 없다’고 하신 분들도 10가지가 아니라 20가지, 30가지까지 써내려가죠. 본인들도 깜짝 놀라요. 그런 과정을 거치다 보면 스스로 목표를 정하게 되는데, 그로 인해 스스로 더 발전하게 되는 거죠”라며 그만의 상담 노하우를 공개했다. 그는 더 친밀감 있는 상담을 위해 관련 책들을 많이 읽고 있다며, 끊임없이 노력해 이 일을 계속 해나가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알코올 중독자로 살았던 지난날, 실제 경험을 통한 상담이 사람들의 마음 움직였죠.”
2011년 정년퇴직 후 ‘무엇을 할까?’ 생각하다가 그동안 학교에서 배우고 가정·사회에서 혜택받은 것을 모두 돌려줘야겠다고 다짐했다는 유을상(67)씨. 그도 한때는 알코올 중독자였다고 털어놨다. 그 역시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난 경험이 있는 한 상담사를 통해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됐다며, 현재 그가 상담사로 활동하게 된 계기에 대해 말했다.
“다른 상담사에 비해 산 경험을 토대로 상담을 하다 보니 더 많이 공감하시고 도움이 된다고 느끼시는 것 같아요. ‘당신이 뭘 알아?’라고 돌아섰던 분들도 제 앞에선 꼼짝 못 한다니까요. 자살하고 싶은 사람들의 경우엔 빈곤·우울·고독 등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이론적인 이야기보다는 제가 겪었던 일이나 다른 사람들의 경험과 치유 사례를 들려주는 편입니다. 본인 마음이 움직여야 자살충동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생각해요”
인터뷰 중 유씨는 아주 중요한 얘기를 들려주겠다고 했다. 그는 “현재 우리나라는 빠르게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갑자기 노인 인구가 많아지니까 그분들이 갈 곳이 없어진 거죠. 대게 노인들이 종로3가 지하철, 탑골공원, 종묘공원 등으로 몰려나오는데, 여기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들은 계속 소통할 사람이 필요하고 상담을 통해 마음의 안정을 찾아야 하는데, 우리처럼 나이가 비슷한 사람들이랑 얘기해야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분들의 귀가 되어줄 가장 효과적인 인력이 바로 우리(노인 자살예방 상담사)라는 겁니다. 제 도움이 필요한 분들을 위해서 저는 이 일을 죽을 때까지 할 계획입니다”라며 노인 상담사 인원이 확충돼 더 다양한 상담을 진행하고 싶다는 바람도 함께 전했다.
“절대로 좌절하지 마세요. 열정·희망·격려를 통해 젊은 세대와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현재 목사로도 활동하고 있는 김복룡(70)씨는 1998년 봉사활동차 라오스에 방문해 마약 중독자들을 접한 후 마약 재활센터에 대한 생각들을 키워나가게 됐다. 국내 재활센터를 비롯해 미국과 말레이시아의 재활센터도 방문해 다양한 훈련을 받아온 그는 최근 이화여대에서 알코올 상담과 관련해 정식으로 2학기를 수료한 상태다. 그는 장차 마약중독 재활센터를 세울 프로젝트를 가지고 있다. 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는 장소만 준비되면 바로 시작할 수 있을 정도로 탄탄하게 준비했다며 자부심을 드러낸 그다.
김씨는 “마약중독자 대부분이 자살을 시도하려는 사람들이고, 실제 자살자도 많습니다. 2년 전, 직접 관리하고 기도했던 지인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러한 계기들로 이쪽 상담센터도 오게 됐죠. 앞으로 재활훈련소를 만드는 일을 진행하더라도 노인자살예방에 상담 일은 병행할 겁니다. 노인 자살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관심을 두고 정보를 교류해가며 각 분야를 서로 접목해 볼 계획입니다”라며 열의를 다졌다.
그는 인생2막 준비를 앞두고 방황하고 있는 이들에게 당부의 말을 전하기도 했다. “요즘 어르신들은 나이에 따라서 너무 좌절합니다. 절대로, 결코 좌절하시면 안 됩니다. 앞으로 좋은 신약들이 개발되기 때문에 수명은 연장되기 마련입니다. 이런 시대에 벌써 좌절한다면 자녀들에 치이고, 젊은 세대에 치입니다. 정말로 강인한 정신력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교육하고 훈련하려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젊은이들과 더불어 사는 것이 어려워지고 생활이 고단해집니다. 어르신들끼리 서로 소통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서로 소통하고, 협력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열정과 희망 그리고 격려가 너무나도 필요합니다.”
인터뷰를 통해 만난 자살예방상담사 세 사람 모두 “이 일을 계속 해 나갈 것이고, 현재 직업에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은퇴 이전 나 자신을 위해 땀 흘려온 시절보다 다른 사람을 위해 함께 고민하는 지금이 더 가치 있고 행복하다며 미소 짓는 그들이다. 그들은 자신 있게 말한다. “어려움에 빠져있다고 좌절하지 마시고 우리를 찾아오세요. 계속 찾아오세요. 함께 나누면 분명히 해결할 수 있습니다.”
고민이 있다면, 목표가 없다면, 격려가 필요하다면 그 무엇보다 내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면 그들을 찾아가자. 매주 셋째 주 수요일 오후 2시, 종로3가역 육의전광장으로 가면 그들을 만날 수 있다.
중.장년의 희망은 오직 기술뿐 !.
자신과의 싸우며 기술 배우기를 3년……
수백 통의 이력서로 취업 활동 후 드디어 취업에 성공!
저는 56년생으로 2010년 10월 은행 경영의 악화의 원인으로 고액 연봉자들의 대대적인 명예퇴직을 유도하여 전직원의 25%인 3800명이 퇴직할 때. 저 또한 나이가 정년에 가깝고 경영악화의 주범으로. 그리고 후배들에게 길을 터주기 위하여 자리를 양보하고 퇴직을 하였습니다..
2010년 11월부터 그동안 여행하고 싶었던 몇 몇 곳을 선정하여 나 홀로 도시락을 배낭에 넣고 전국으로 여행 다녔으나. 마음은 항상 퇴직 후 무엇 하며 노후를 보낼까 하는 생각으로 마음이 가볍지만은 아니하였습니다.
◆무엇으로 제2인생 준비할 것인가? “노력하는 자에겐 하늘이 돕는다”
퇴직을 결심하고 돈을 절약하기 위한 한 방법으로 , 집 가까운 거리는 자전거로 이동하기 위해, 그동안 타지 않았던 자전거를 수리하기 위하여, 동네 자전거 수리점을 찾아가서 고치면서 기다리는 중에 주인 사장님의 친구분들이 옆에 있어, 물었죠, ‘이 자전거 가게 사장님은 노후 걱정은 안하셔도 되겠다’고, 그랬더니 가게 주인 사장님의 친구분들이 하시는 말씀이’이 자전거 가게를 이 자리에서 40년을 했는데 큰돈은 벌지 못해도 자식을 공부시키고 결혼도 시켰으며, 작은 건물도 구입했노라’는 이야기를 들었으며, 또한 같은 60대 나이에 은퇴도 없고 자식들에게도 손 내 밀지도 않고 친구들 모임에 회비를 낼 수 있고 가끔 막걸리도 사주는 친구들 중 가장 유일하며,가장 행복한 친구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아! 그렇구나.
‘기술만이 남은 여생 30년을 보낼 수 있겠구나’를 생각하였으며, 나도 자전거 수리를 배워, 노후를 보낼까를 생각하면서 삼천리 자전거 홍보부에 근무하는 후배를 만나 자전거 수리점에 대하여 많은 의견과 자문을 받아 보는 등 여러가지로 고민하며 수일을 보냈습니다.,
2010년11월 은퇴 후, 12월 중순에 은행으로부터 2년 계약직(지점감사업무)으로 근무할 수 있다고 통보 받아 1월 초에 근무지로 출근하던 중. 지하철역에 붙여있는 홍보 벽보에 서울시에서 기술교육을 무상으로 가르쳐 준다는 포스터를 보았으며. 아! 그렇구나 내가 여생은 큰 힘 들이지 않고, 적은 수입이라도 뭔가 할 수 있는 일거리로 보람을 느끼며 앞에서 언급한 자전거 가게 사장님과 같이 뭔가 기술을 배워 살아보겠다는 생각으로 인터넷을 검색하며, 늙어서 할 수 있는 기술이 뭔지를 고민하였습니다.
◆어떤 기술을 배울 것인가?
그동안 강남의 대형 점포 지점장으로 근무하던 시절 알고 지냈던 사장들과 식사하는 중에 ‘조경과 보일러, 목공, 자동차 수리, 조리 기술 중 어느 기술을 배우는 것이 미래가 가장 유망 하겠나’를 물었더니, 조경 쪽으로 교육 받으라고 하였으며, 조경은 무료교육 대상자 모집에서 연령제한이 없었으나, 보일러, 자동차 수리 등은 만 55세는 이후 노령자는 지원대상에서 제외된다고 하여, 연령이 제한되기 전에 보일러, 자동차 기술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하였으며, 보일러 기술은 월급이 적지만 힘이 들지 않는 직종이라 생각하여, 2011년 2월에 서울종합직업학교(현 동부기술교육원) 보일러과에 지원하였습니다.
등록 후 합격자 발표만을 손 꼽고 기다렸으나, 합격자 발표일에 제 이름 석자가 없었기에, 아! 그럼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를? 또 고심하게 되었습니다..
발표일 3일 후 기술학교측으로부터 연락이 왔는데, 등록학생 중 몇 명이 주간으로 등록을 변경하게 되어 야간학생 결원이 있어 예비 합격자 중에 제가 포함되어 합격 했으니 3월 3일부터 학교에 나와서 기술을 배우라고 하여, 3월부터 기술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기술 취득과정
(1) 보일러 기능사 취득 과정
2011년 3월부터 고덕동 소재 서울종합직업학교에 오후 6시부터 9시 30분까지 매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6개월 공부하였으며, 실습할 때는 30년간 책상에 앉아서 근무한 은행원이 보일러 용어 하나하나가 생소하여 용어를 익히는데 부단히 노력하였으며, 특히, 가스나 전기 용접시에는 옷을 태우기도 하였으며, 손이나 발을 다치기도 하는 등 잦은 실수를 연발하여 같이 공부하는 학생들로부터 웃음꺼리가 되기도 하여 창피하기도 하였으며, 개인적으로 자존심이 많이 상했으나 참고 견디었습니다.
필기시험은 과거 5년간 시험 출제 문제를 컴퓨터에 입력하여 어느 문제가 자주 출제되는지를 분석하고 외웠습니다. 입학 2개월 후 용어도 잘 모르던 제가 현장에 근무하면서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하여 입학하여 공부한 학생들도 낙방하는 보일러 기능사 필기시험에 합격하였으며, 5월부터 보일러 기능사 2차 실기시험을 준비하였으며, 6월에 최종 합격하여 보일러 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하게 되었습니다.
(2) 공조냉동 기능사 취득과정
공조냉동시험 준비는 기술학교에서 보일러시험 끝난 후 기초적인 내용을 가지고 졸업할 때까지 약 2개월간 배우고 실습하였으며, 학생들이 쉴 때도 수업이 끝난 후에도 틈틈이 홀로 가스 용접 실기에 매달렸으나 무난히 1차 필기시험에 합격한 것과는 달리 2차 시험인 실기 시험에 낙방하여 10월에 재 응시하여 12월에 어렵게 합격하여 자격증을 취득하였습니다
(3) 에너지산업기사 취득과정
공조냉동을 가르쳐 주시는 교수님께서 보일러, 공조냉동 자격증을 취득 후에는 요즘에 인기 있고 정부차원에서 각종 지원되는 에너지관리 기사 시험을 준비하는 것이 유익하다고 하셨으나, 정해진 수업기간이 끝나 학교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기술학교 보일러 과정을 끝마친 후 또 다른 기술을 준비 중에 기술학교 홈페이지를 열어 보았더니, 에너지 관련 수업이 9월부터 진행된다고 하여 9월에 지원하여 9월 중순부터 본격적으로 에너지관리기사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런데,에너지 기사시험은 실무 경력이 없어 에너지관리 산업기사 시험만 응시할 수 있다고 하였으며, 시험은 1년에 1회밖에 없으며, 2011년의 경우는 124명이 응시하여 한 명도 합격하지 못하는 아주 어려운 시험이라고 유념하여 공부하라고 하였다. 학교에 입학하여 처음 공부할 때는 33명이었으나, 각종 공식이나 수치 계산 등으로 점차 공부가 난해 함을 느끼고 또한 수업하는 교실이 추워서 공부하기가 너무 힘드니까, 다들 중간에 포기하였으며, 마지막 남은 3명의 학우들도 포기하자고 하였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금년 아니면 내년에 공부한다고들 하지만 저의 경우는 나이가 60대를 바라보니 지금 이 기술 공부를 포기하면 갈 곳이(취직할 곳)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여 포기하지 못하겠다고 하며 끝까지 기술 공부를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2011년에는 한 명도 합격하지 못하는 어려운 시험이지만, 2012년에는 내가 한번 도전하여 합격 했다는 소문을 듣게 하겠다고 하면서 피나는 노력을 했습니다.
에너지관리시험 준비하기를 7개월,.. 드디어 1차 시험을 무사히 합격하고, 2차 실기시험을 주관식을 치르게 되었으며, 합격자 발표 전날 밤 꿈에, 합격자 명단을 보니까 4명이 있는데 나의 이름이 있는 꿈을 꾸었습니다. 합격자 발표하는 날 인터넷 검색을 하니, 전국에 단 4명만이 합격하였으며, 그 명단에 제 이름이 있어 크게 감동했으며 노력하는 자는 하늘이 돕는 구나라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근무하던 지점의 은행 직원들이 더 좋아했으며 같이 공부한 동료학생들과 교수님으로부터 축하 전화를 받았습니다. 1차 시험에 60점으로 겨우 통과했는데, 2차 시험은 과연 몇 점이나 되는지? 인터넷으로 검색 했더니, 문답 50점 만점에 22점, 동영상 문제 50점 만점에 38점으로 더도 덜도 아닌 합격점수 커트라인인 60점으로 합격하여 감동의 드라마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4) 전기기능사 취득과정
보일러, 공조냉동, 열에너지관리산업기사 자격증 있으면 계약직으로 근무하는 은행보다는 조건이 더 좋은 곳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취업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전경련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에 가입하여 컨설턴트와 상담도 하고, 베이비부머 취업박람회에 참가하는 구직활동에 전념하였지만 성사되는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회 전반적으로 많이 활용되며 취업대상업체가 더 광범위한 전기기술을 배워 기술력을 더욱 향상시켜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전기기능사과정 교재와 동영상 C/D를 구입하여 혼자 독학으로 공부하였으나,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아, 전기기술을 가르쳐 주는 기술학교 야간과정에 등록하여 9월부터 수업을 듣게 되었으며, 수업 듣는 그해 12월에 같이 수업 듣는 학생들보다 먼저 1차 필기 시험과 2차 실기시험을 통과되어 자격증을 취득하였습니다.
(5)전기산업기사 자격증 취득 도전기
2012년 12월에 전기기능사 자격증을 추가로 취득하여 이젠 취업이 쉽지 않겠나 하는 생각으로 여러 곳에 취업활동을 하여 00시설관리공사, 00회사, 00구청 등 무려 수십 곳에 서류전형에 합격하여 면접을 보았으나 결과는 역시 나이를 극복하지 못했으며, 젊은이에게 밀려 나기를 수십 번….
아~! 누구나 가지고 있는 기능사 자격증만으로는 나이에 대한 한계를 넘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점점 나이에 따른 압박관념에서 모든 일이 점점 위축되었으며, 노후에 대한 자신감과 활기를 잃어가며 가족들 간의 유대도 소홀해 지며, 패배의식이 팽배해져 가며, 우울증으로 지내기를 수개월 지난 후 어느 날
한편의 신문에 실린 다음의 이야기에 용기를 얻었습니다.
참판집 종으로 일하며 ‘도둑공부’… 신분벽 넘어 형조판서 우뚝
공부하고 싶은 노비의 열망이 높은 신분의 장벽마저 뛰어넘었다. 참판 집안의 종에서 형조판서로 우뚝 선 반석평(潘碩枰·?∼1540)의 이야기다. 그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조상이다.19세기의 족보 ‘만가보’에 따르면 석평은 충북 음성에서 아버지 반서린(양반으로 추정)의 서자로 태어났다.
석평은 1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노비 신분으로 서울의 이 참판 집에서 종노릇을 했다. 본래 똑똑했던 그는 얼마나 공부가 하고 싶었던지 자기 또래였던 주인집 아들 이오성이 방에서 글을 배우고 있을 때 밖에서 ‘도둑공부’를 했다. 땅바닥에 글씨를 쓰면서도 배우는 대로 외우는 영리한 아이였다.
석평의 도둑공부를 알게 된 이 참판은 그를 기특하게 여겼다. 석평은 이 참판에게 집을 나가 공부를 더 해서 과거시험을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당시 종은 공민권이 없어서 과거시험을 볼 수 없었다. 석평의 재주와 성품을 남달리 여긴 이 참판은 그의 청을 들어주었다. 석평의 노비문서를 불태워 없애고 아들이 없는 친척 양반집에 양자로 보낸 것이다.
석평은 1507년 식년문과 병과에 급제했다. 이후 예문관검열(예문관에서 사초를 기록하던 정9품 벼슬)이 되었다. 경차관으로 함경도에 파견되어 여진의 동정을 보고했으나 천얼(賤孼) 출신이라는 이유로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다. 1516년 문신 안당의 추천으로 경흥부사가 되었고 이후 함경남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병조참의,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충청도 관찰사 등을 지내고 1531년에는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예조참판, 전라도 경상도 평안도 관찰사, 형조참판, 한성부 판윤 등을 거쳐 형조판서(정2품·지금의 법무부 장관에 해당)를 지냈다.
그는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다. 석평이 형조판서일 때 길에서 옛 주인집 아들 이오성이 거지가 다 되어 다니는 것을 발견했다. 석평은 초거(종2품 이상의 벼슬아치가 타던 수레)에서 내려 그의 앞으로 달려가 절했다. 석평은 왕에게 자신의 원래 신분을 밝히고 자신의 벼슬을 깎아 이오성에게 주기를 청했다. 조정에서는 이를 오히려 기특하게 여겨 용서하고, 이오성에게 사옹원 별제 벼슬을 내리고 석평의 관직도 그대로 유지했다.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이 이야기를 전하면서 석평과 조정을 모두 높이 평가하며 “이와 같이 한다면 세상 풍속이 어찌 분발하지 않겠으며 재주 있고 덕 있는 자가 어찌 감동되지 않겠는가”라고 썼다. 물론 석평의 출세가 법적으로 문제될 것은 없었다. 이 참판이 스스로 노비문서를 불태워 양인이 되게 해 주었고 석평이 노력해 정식으로 문과에 급제했기 때문이다.
그저 자신의 처지를 보살펴 준 이 참판의 아들이 거지꼴이 된 것을 마음 아프게 여기고 양심고백을 한 것으로 봐야 한다. 중종실록에는 석평에 대한 이야기가 종종 나온다. 특히 그가 종 출신이지만 문벌에 구애받지 않고 능력으로 등용된 바람직한 사례로 든 것이 인상적이다.
위 기사에 힘을 얻어 다시 전기산업기사에 도전하면서 취업 활동을 해 보겠다는 마음에서 2013년 3월부터 본격적으로 도시락을 지참하여 인근 도서관에 9시에 도착하여 밤 10시까지 공부하였으며, 친목회,동창 모임 등 참석하지 않고 기술 공부에 홀인 하였습니다.2014년 3월 제1회 전기산업기사에 시험을 응시했으나 역시 유사직종에 근무한 경험이나 유사한 학과에 공부하지 않는 터라, 또다시 5~8점 차이로 낙방하는 쓴 맛을 보게 되었습니다.
◆자격증으로 재 취업!
전기기능사는 어느 정도의 노력으로 합격하였으나, 역시 기사 시험은 실무나 관련 학과와 인연이 있어야 이해가 쉬워 기사 시험 응시에 쉽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도서관 다니며 공부하다보니 경제적 어려움과 마음마저 우울해지게 되어 기사 시험 종료와 동시에 취업하겠다는 마음으로 매일 전경련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 홈페이지와 노동부의 워크넷에 등재된 채용공고를 검색하던 중에 2014년 2월 27일 국민은행 본점 시설과 근무 직원을 모집한다는 내용을 보고 28일 이력서를 제출하여 가진 자격증으로 응시하여 서류 전형과 면접을 거친 후 2014년 3월5일부터 근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취업을 준비하시는 분들께
결론적으로 말하면 눈높이를 낮추면 미래가 보이며
국가나 사회나 자식들에게 손을 내 밀수 있는 것보다 은퇴후에도떳떳한기술하나라도배우고익히면,개인이 행복하고 가정이 건전하며 나라가 튼튼해진다고 확신합니다.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는 다음 세가지만 유념 하시면 됩니다.
첫째, 지난 것 다 잊으시고, 오직 기술만이 살길이라는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과거에 지점장을 했느니? 정부, 재계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했느니? 월급을 얼마나 받았느니? 이런 생각을 버리고 가장 낮은 자세라야 기술을 배울 수 있으며, 같이 배우는 옆 학우들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요즘 시대는 과거 어느 학교 출신인가, 어느 직업을 가졌나 보다는 오직 자격증만이 살길입니다. 자격증 없이는 사회적으로 대우도 못 받으며 월급도 많이 받지 못합니다. 물론 경력도 중요하지만 당장 회사에 취직을 한다든가, 사업을 하려고 한다면 자격증을 소지해야만 우선 지원서를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자금이 넉넉하여 쉽게 회사나 가게를 차리실 수는 있겠지만, 기술이나 경험이 없이 시작하는 것은 모래성처럼 쉽게 무너지게 됩니다.
둘째, 처음 시작하는 아름다운 마음 변하지 마시고 끝까지, 앞만 보고 달려가야 합니다.
기술을 배울 때는 하루 빠지시면 그 다음 수업과 연결이 안 됩니다. 특히, 기술을 배우시는 분들은 더 더욱 그렀습니다. 용어 등이 생소하기 때문이며, 교수님께서 설명하시는 용어들을 그때그때 듣고 놓치지 말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과거 저와 같이 보일러과에 등록하신 분들 중에 열심히 참석하신 분들은 보일러 기능사 자격증을 다 취득하셨으며, 또한 공조. 냉동자격증 까지 바라보고 공부하여 원하는 자격증을 취득하였습니다. 반면에 상반기 공부했던 학생들 중에 출석이 부진 했던 분들은 교수님께서 출제 예상 문제를 가르쳐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결석이 빈번하여, 불합격 원인으로 귀결되었습니다. 물론, 기술을 배우시려고 하신다면 중간에 여러 가지 극복하셔야 할 일들이 많으실 것입니다.
저의 경우는 야간으로 기술 받는 기간 중에도 여러 회사에서 같이 근무하자는 제안이, 유혹이 많았습니다.
물론, 2~3년은 현재보다는 더 많은 월급 받고, 대우도 받으며 살겠지만, 그 이후의 삶을 생각하여 정중히 거절하였으며, 또한, 연말 연시 때나 주말에 동창, 동료직원, 각종 사회모임으로부터 회식, 등산, 골프, 낚시 등 많은 종류의 유혹들도 있었지만, 제2인생을 준비한다고 양해를 구하고, 회사 퇴근 후나 주말에는 곧바로 기술학교로, 도서관으로 달려갔습니다. 그 모든 유혹을 뿌리치고 말입니다.
셋째, 같이 공부하시는 분들과 협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를 잘하면 또 다른 하나를 못하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즉, 필기 시험에 자신이 있는 분은 실기 시험에 약한 분들이 있고요. 실기시험에 강한 분들은 필기 시험에 약한 분들이 있습니다. 따라서 같이 공부하시는 분들은 서로 협력하여 같이 합격하실 수 있도록 상호 서로 도와주라는 뜻 입니다. 그래야, 힘들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경우는 기억력이 약하여 외워도 외워도 돌아서면 잊어버리게 되고. 특히 실기시험은 완전 빵점 인생 이었습니다. 그런데 같이 공부하시는 분들을 위해 필기시험에 대비하여 교수님께서 설명하신 내용을 요약하여 같이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제공 하였더니, 필기시험에 도움 받은 동료 학생들이 실기 때는 제가 모르는 각종 공구들, 밸브들, 전기용접 및 가스용접 등등… 많은 도움을 주어 쉽게 실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끝으로, 지난날들을 회상해 볼 때 힘들었지만 보람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남들에게 은행 지점장이 겨우 보일러 기능사 공부 하냐고 비아냥거리는 소리와 손가락질을 당하기도 했습니다만, 기술만이 남은 30년 인생을 하나님을 위하여! 소외된 이웃을 위해 자원봉사하며! 내가 배운 기술로 겨울을 따뜻하게, 여름을 시원하게 그리고 무엇보다도 에너지를 절약하도록 기술을 펼치며 보람 있게 살며, 멋지게 보내리라 확신하기 때문에 선택한 것입니다.
끝으로 이 모든 것들을 먼저 기도로 준비했으며, 다음에는 앞뒤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렸습니다.
※위 내용은 전국경제인연합회 중소기업협력센터에서 올해 초 실시한 중장년 재취업 성공수기 공모전 최우수상 수상작입니다.
금융자산 10억원 이상을 보유한 대한민국 금융부자의 43.6%가 자수성가형인 것으로 조사됐다.
9일 하나은행과 하나금융경영연구소가 발표한 ‘2014 한국 부자 보고서(2014 Korean Wealth Report)’에 따르면 금융부자들의 자산구성 비율은 부동산 44%, 금융자산 55%를 나타났다.
이번 설문조사는 금융자산 10억원 이상을 보유한 하나은행 프라이빗뱅킹(PB) 고객 977명을 대상으로 실시됐다.
설문조사 결과, 앞으로도 지금의 비율을 유지하겠다고 응답한 비중은 52%로 지난 해 조사결과(38%)에 비해 증가했다. 불확실한 경제상황을 염려한 자산가들이 당분간 자산구성 변화에 신중한 자세를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는 분석이다. 부동산 비중을 늘리겠다는 응답이 10%, 금융자산 비중을 확대하겠다는 응답이 31%로 나타나 부동산보다는 금융자산을 통해 자산을 축적할 것으로 예상된다.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수석연구원은 “부모의 도움 없이 스스로 자산을 모을 수 있었던 요인으로는 성실성을 꼽았다”며 “상속형 부자들도 부모로부터 증여·상속 받은 자산이 현재 자산의 20% 미만이라고 응답한 비중이 29.4%다”라고 설명했다.
부채수준은 금융부채 비중이 작년대비 증가했다. 연구원은 “금융자산 100억 이상 부자들의 부채비율은 올해 20%로 작년(13%)에 비해 증가했다. 금융부자들의 부동산 자산이 증가한 점으로 보아 부채를 적극 활용해 저평가된 부동산에 투자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부자들의 소득구조는 재산소득 38%, 근로소득 31%, 사업소득 25% 등으로 구성됐으며, 금융 자산이 많을수록 재산소득 비중도 커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구당 월평균 지출액은 1028만원으로 지난해 지출금액(1014만원)보다 증가했다.
직업별로는 의료·법조계 전문직 종사자들의 경우 자녀의 사교육비와 가사 서비스에 지출이 컸고, 자영업자와 기업 경영자들은 문화·레저 서비스에 대한 지출이 많았다. 대외 업무가 많은 기업 임원과 경영자들은 업무 특성상 의류·잡화의 구입비 지출액이 타 직업 종사자들에 비해 크게 나타났다.
지역별로는 강남·서초·송파 거주자의 지출액이 작년보다 약 20% 증가했다. 반면 강남3구를 제외한 다른 서울 지역과 지방 거주자의 지출은 감소세를 보였다.
지방 분양시장의 노른자위로 불리는 혁신도시와 세종시 분양물량이 올 2분기에 대거 쏟아진다.
28일 부동산업계에 따르면 다음달부터 오는 6월까지 혁신도시와 세종시에 공급 예정된 신규 분양물량은 총 1만1595가구(아파트 1만1174가구, 오피스텔 421실)로 집계됐다.
이들 지역은 공공기관과 정부부처 이전에 따라 행정과 업무, 주거 등이 한데 어우러진 계획도시로 조성돼 실수요자와 투자자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실제 KB국민은행에 따르면 최근 3년간(2011년 2월~2014년 2월) 지방 혁신도시 가운데 대구(36.46%), 경북(37.16%), 전북(13.58%) 지역의 아파트가격이 우상향 움직임을 보였다.
올 2분기 혁신도시에서는 대구, 전북, 경북, 광주전남 등 영·호남권 지역에서 3581가구가 신규 공급될 예정이다.
한국토지신탁이 대구혁신도시 내 신서동 413-1번지 일대에서 오피스텔 '코아루 파크뷰'를 다음달 초 분양할 계획이다. '코아루 파크뷰'는 지상 15층, 계약면적 54~67㎡ 214실로 구성됐으며, 단지 가까이에 한국가스공사, 교육과학기술원, 한국산업단지공단, 한국정보화진흥원 등 11개 공공기관이 위치해 직주근접 환경이 우수하다는 평가다. 서한도 대구혁신도시 B6, B7블록에 서한이다음3·4차를 분양한다. 총 624가구 규모로 전용 74~84㎡ 중소형 평면으로 구성됐다.
중흥건설은 4~6월에 전북, 경북, 광주전남혁신도시에서 각각 신규 분양을 준비 중이다. 4월에는 대한지적공사 등 12개 공공기관이 이전하는 전북혁신도시 C3블록에서 지상 25층, 9개동, 전용 84~115㎡ 총 481가구 규모의 '중흥S-클래스'를 선보인다. 5월에는 광주전남혁신도시 B14블록에 721가구 규모의 '중흥S-클래스 센트럴 2차'를 분양할 예정이며, 경북혁신도시에서는 AC-4블록에 전용 84~127㎡ 450가구를 상반기 중 공급할 계획이다.
세종시 역시 통계가 작성된 작년 4월부터 아파트값이 완만한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 올 2분기 분양 예정 물량은 중흥건설과 한양, 반도건설 등 총 8014가구다.
한양은 다음달 세종시 3-2생활권 M5블록, 3-3생활권 M4블록에서 '한양수자인 와이즈시티'를 선보인다. 일단 살아보고 분양을 결정할 수 있는 분양전환 임대 아파트로 총 2170가구 규모다. 같은 시기 중흥건설도 3-2생활권 M4블록에서 전용 98~169㎡ 656가구 규모의 '중흥S-클래스 리버뷰 2차'를 선보인다.
6월에는 반도건설이 1-4생활권 H1블록에서 주상복합 '세종 반도유보라'를 분양할 예정이다. 상반기 중 포스코건설과 현대건설이 세종시 2-2생활권 P2블록에서 1704가구를 선보일 계획이며, 세종시 2-2생활권 P4블록에서는 금성백조주택이 672가구 분양을 채비하고 있다.
오는 24일 부터 KRX 금시장(금 현물시장)의 정식 거래가 시작된다.
23일 금융위원회는 8개 증권사와 49개 금 실물사업자가 회원으로 가입해 금 거래에 참여하며 일반 투자자들은 회원 증권사를 통해 금 현물시장을 이용할 수 있게 된다고 밝혔다.
이때 해당 증권사는 대신, 대우, 삼성, 신한투자, 우리투자, 키움, 한국투자, 현대증권이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소액으로 간편하게 금 실물에 투자하는 것이 가능해짐에 따라 투자자들의 자산운용 폭이 넓어지고, 골드뱅킹 등 금 관련 금융투자상품의 발전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주문제도를 살펴보면 증권 및 파생상품 계좌와 별도의 일반상품계좌를 개설해야 하며 주문방법은 전자통신, 전화, 문서 등 현행 증권 및 파생상품과 동일하다.
위탁증거금은 당일 결제에 따른 결제대금 예납성격으로 금지금 및 결제대금을 주문 전 100%예탁해야 한다.
매매제도는 순도99.99%, 중량 1Kg이 1 종목이며 매매, 호가수량 단위 및 호가가격 단위는 1g, 10원이다.
다만 실물 임치,인출은 1kg단위로만 가능하다.
매매거래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며 매매체결방법은 경쟁매매방식이다.
다만 시가, 종가 중단 후 재개가격 결정시에는 단일가매매방식, 그 외의 경우에는 접속매매 방식이 적용된다.
단일가매매 시간 중 동일가격에서는 실물사업자 주문을 우선적으로 체결한다.
또 청산할 경우 거래소가 회원의 채무를 인수하여 차감(netting)후 결제분을 회원에게 통지하면 회원이 거래소에 납부해야 한다.
결제시한은 실수요 목적으로 거래하는 실물사업자의 수요를 반영해 당일(T일) 오전(11:30)․오후(16:30) 2차례에 가능하다.
증권·선물회사는 매수·매도 반복거래에 따른 매매의 편의성 제고를 위해 거래증거금을 징수하지 않는다. 실물사업자 회원은 거래증거금을 징수한다. 이때 결제대금은 예납성격을 띈다.
회원자격으로 투자 및 실물수요를 감안해 금융기관(증권·선물사, 은행)과 실물사업자(제․정련, 유통업자 등)로 한정한다.
회원종류는 매매거래 수탁이 가능한 ‘일반회원(증권·선물사)’과 중개업무가 불가한 ‘자기매매회원(은행·실물업자)’ 2가지 유형으로 분류한다.
가입요건을 살펴보면 일반회원으로 참여하는 금융기관은 영업용순자본비율 150% 이상이어야 하며, 실물사업자인 자기매매회원은 최근 사업연도 기준 매출액 1억원 이상, 신청일 현재 체납세액이 없어야 참여 가능하다.
금 현물시장에 금지금을 공급할 수 있는 적격생산․수입업자는 자기자본 및 생산실적 등 강화된 요건을 적용한다.
한국조폐공사가 국내 생산금 및 해외 수입금에 대한 품질검사를 담당하는 품질인증기관 역할 수행한다.
거래소 시장감시본부가 금 현물시장 감시를 위한 관련 시스템을 구축하고, 규정에 따라 시장감시업무 수행한다.
거래소 금 현물시장에 참여하는 법인, 개인사업자들에 대해 거래소 이용 실적에 따른 소득공제 혜택 부여한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거래소 금 시장을 통해 안정적이고 효율적인 거래환경이 제공되는 만큼, 음성적으로 이루어지던 금 거래의 상당부분이 점진적으로 거래소 금 시장에 흡수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