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날을 하루 앞둔 5월 7일 토요일 오후. 하얀 가운을 입은 이들이 서울 동작종합사회복지관을 방문한 어르신들의 건강 상태를 꼼꼼히 살피고 있었다. 의사 선생님이라 부르기엔 앳된 얼굴을 한 그들의 가운에서 ‘소금회’라는 글자가 눈에 띈다. 20년 넘게 동작종합사회복지관을 찾는다는 이들은 국가유공자 자녀 중심으로 꾸려진 ‘소금회 대학생 의료 봉사단’이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자 한다는 소금회 학생들이 흘린 건강한 땀방울의 의미를 되새겨봤다.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1986년 결성한 소금회는 국가유공자 의대생 자녀들이 부모세대와 국가에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시작한 의료 봉사단이다. 30년이 흐른 지금, 일반 의료계 전공자들도 참여할 수 있는 대학 연합 동아리로 발전했으며, 해외 의료 봉사도 나가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봉사단은 크게 진료반(의과대학 학생), 치과반(치과대학과·치위생학과 학생), 간호반(간호대학 학생), 약국반(약학대학 학생)으로 나뉜다. 의과대학은 서울대·연세대·한양대·중앙대·순천향대 학생들이고, 약학대학은 이화여대·숙명여대, 간호대학은 가톨릭대, 치과대학은 연세대, 치위생과는 영동대(永同大) 학생들이다. 재학생들로 구성된 봉사단이기 때문에 평균 연령은 24세 정도로, 대부분 대학교 2학년 때부터 2년간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소금회 창단 초기에는 의료 혜택을 받기 어려운 무의촌(無醫村) 주민들을 대상으로 의료 봉사를 했다. 동작종합사회복지관에선 20년 넘게 격주 토요일마다 어르신들의 말벗과 상담, 방문 진료를 진행하고 있다. 2003년 당시 소금회 회원들은 태풍 ‘매미’로 인해 전염병이 우려되었던 충북 영동군 상촌면 일대에서 봉사활동을 하였다. 그때의 인연으로 매년 여름이면 상촌면을 찾아 진료 봉사를 한다. 현충일에는 국립현충원 국립묘지를 찾은 국가유공자 유가족을 대상으로 무료 건강 검진과 응급 처치 등 의료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부모세대의 희생을 통해 배운 베풂의 미덕
매년 그들이 하계 진료 봉사를 위해 떠나는 상촌면은 병·의원이 한 곳도 없는 의료 취약지이다. 소금회 회원들은 3박 4일 동안 여름날 한낮 태양보다 더 뜨거운 마음으로 주민들을 위해 봉사한다. 지난해부터 소금회를 이끄는 이상원(李相沅·23·한양대학교 의학과 4학년) 회장은 “아직 학생들이기 때문에 병을 완벽히 치료하거나 아픈 것을 전부 해결해 줄 수는 없겠죠.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작은 조언을 드리는 것만으로도 그분들의 생활에 큰 도움이 된다고 하니 정말 기쁩니다”라며 어린 학생들의 작은 손길이 어르신들의 건강한 삶에 일조하는 것에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 회장뿐만 아니라 많은 소금회 회원이 3박 4일간의 봉사활동을 의미 있게 여긴다.
“우리가 이렇게 뜻깊은 봉사 활동을 할 수 있는 것도 국가유공자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거예요. 부모세대는 우리에게 항상 자랑스러운 존재입니다. 일제 강점기가 끝난 이후 한국전쟁 등 크고 작은 사건들을 거치며 지금의 이 나라를 만든 고마운 분들이죠. 그들은 자녀 세대가 잘 성장하기 위한 토대를 만들어 주셨잖아요. 건실하게 잘 자라고, 남을 위해 베푸는 자세로 국가와 사회 발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그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해요.”
남을 위하는 봉사는 결국 나를 위하는 길
공부하고 학과 수업 따라가기 바쁜 의대생에게 주말과 여름방학은 잠시나마 머리를 식힐 수 있는 달콤한 휴식 시간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봉사 활동을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막상 결심을 했더라도 쉬는 날이 되면 침대를 벗어나기 어렵고, 친구들과의 약속을 저버리기 힘든 것이 현실. 그러나 아주 짧은 시간이라도 봉사 활동에 참여한다면 자신의 삶에 긍정적인 효과가 있으리라는 것을 깨달은 이 회장이다.
“봉사는 자신의 일부분을 포기하며 그만큼 남에게 베푸는 것이라 생각해요. 자기 시간이 줄어든다는 점에서는 힘들다고 표현할 수도 있지만, 단순히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죠. 부모님은 항상 남에게 베풀라고 가르치셨어요. 봉사 활동을 하다 보니 베푼다는 것이 힘든 일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내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는 ‘베푼다는 것’이 참 막연했는데, 소금회를 통해 좋은 친구들과 체계적인 방법으로 여러 사람에게 베풀 수 있게 된 것 역시 감사할 일이라고 덧붙였다.
“누군가에게 소금회에 대해 이야기하면 대개 부럽다는 반응을 보여요. 봉사 활동을 하고 싶은 사람은 많지만, 봉사하는 단체와 자신이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 그만큼 의미를 갖고 열심히 하기 힘들기 때문이죠.”
이 회장은 봉사에 대한 생각이 있다면 바로 시작하는 게 좋다고 이야기한다. 마음으로만 하고자 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것.
“일단 결심을 했다면, 어떤 단체에서 들어가서 무슨 활동을 할 것인지 구체적으로 알아보는 게 좋아요. 제가 아직 누군가에게 조언할 처지는 아니지만, 또래의 친구들에게 한번 해보면 봉사의 참맛을 알 수 있을 거라는 말은 할 수 있어요. 물론 자신도 챙기기 어려운 세상이지만, 봉사란 그렇게 많이 부담스러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조금씩 천천히 꾸준히 오랫동안
봉사 현장에 나간 소금회 회원들이 가장 많이 듣는 말은 “고맙다”는 인사다. 당연하다고 생각할지 모르는 이 한마디가 봉사 활동을 하는 이들에게는 큰 힘이 되고, 보람을 느끼게 한다.
“한 달로 치면 총 7~8시간, 짧다면 짧은 이 시간이 누군가에게 큰 고마움 선사하는 것 같아요. 아무리 짧은 시간이더라도, 내가 의미 있는 무언가를 했다는 것이 뿌듯해요.”
지난 30년 동안 묵묵히 어려운 이웃의 빛과 소금 같은 존재가 되기 위해 꾸준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소금회. 국가유공자 자녀를 중심으로 생겨난 봉사단체인 만큼 매년 현충일에는 국립현충원에서 뜻깊은 봉사를 한다.
“올해 현충일에는 혈압, 혈당을 측정하고 간단한 건강 상담을 할 예정이에요. 보훈처 직원과 미리 만나 봉사할 내용을 보고하고, 현충원 내에 부스를 지정받아요. 소금회 회원들은 6월 6일 오전에 장비를 설치하고, 현충원 행사가 시작되면 본격적인 의료 봉사 활동을 시작합니다.”
또 다른 활동 계획은 없는지 물었다. 이 회장은 새로운 일을 벌이는 것보다는 그동안 걸어온 소금회 활동의 명맥을 유지하고, 회원들의 변함없는 마음이 이어지길 바란다고 했다.
“선배들이 활동해온 것 외에 추가로 무언가를 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그저 우리가 보는 어르신들, 주민들이 앞으로도 건강하기만을 바랍니다. 또 함께 하고 있는 회원들, 그리고 미래의 회원이 될 학생들도 소금회 활동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으면 좋겠어요. 부모세대의 헌신 덕분에 우리가 느낄 수 있었던 보람과 경험을 계속해서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싶어요.”
나는 안경 대신에 콘택트렌즈를 착용하여 눈이 나쁘단 사실을 한동안 숨겨왔다. 우리 시절엔 여자가 안경을 쓰는 걸 터부시했었으니까. 예를 들어 택시기사도 안경 쓴 여자를 첫손님으로 받으면 온종일 재수가 없단 말을 공공연하게 했다면 요즘 젊은이들은 믿기나 할까? 맞선 보는 자리에 안경을 쓴 색싯감은 일순위로 딱지를 맞았다는 일화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근시의 원인은 아직도 잘 모른다는데, 대개 어두운 데서 책을 읽는다든가 눈에다 너무 가깝게 대고 본다든가 텔레비전 앞에 바투 앉아 시청을 한다든가 등등을 원인으로 꼽는다. 하지만 텔레비전을 바보상자라고 부르며 절대로 사주지 않았던 부모님 덕분에 고등학생이 되기까지 텔레비전은 구경도 못하고 자란 내가 시력이 나빠진 데에는 억울한 사연이 따로 있을 것이다. 그것은 명백히 최루탄 탓이라 믿고 있다.
어릴 적 내가 살던 집은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이었는데 몇 정거장만 올라가면 고려대학교와 맞닿았다. 그 당시 대학교 근처에 산다는 건 곧바로 최루탄 세례를 받는다는 말과 같았다. 4·19와 5·16땐 아직 어려 엄마 품에 있었기에 세상이 아름답게만 느껴졌지 그렇게 매운바람이 불어올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철이 들고 나서부터 봄은 최루탄 가스와 함께 시작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신학기가 되면 대학생들은 여지없이 교문 밖으로 뛰어나와 데모를 벌였고 데모를 진압하는 경찰이 최루탄을 투척하면 매캐한 연기가 온 동네를 뒤덮고 말았다. 그 겨자보다도 더 모질게 매운 최루탄 가스 앞에서 우리들은 비극의 주인공처럼 눈물을 질질 흘리며 대학생들을 원망하곤 했다. 특히 아버지를 비롯한 어른들이 혀를 끌끌 차셨다.
“학생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데모만 하다니…”
친구들과 모래성 쌓기 놀이를 하다가 불발탄이 된 최루탄 조각이 땅속에서 불쑥불쑥 솟아나오면 그게 마치 수류탄이기라도 되는 듯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던 날도 많았다. 최루탄 가스가 눈이나 코, 피부로 들어가면 눈물과 콧물이 쏟아지며 심한 통증이 찾아온다. 어떤 땐 구토까지 일으키며, 피부가 온통 뒤집어지기도 했다. 일시적 실명현상까지 일으키는 최루탄 가스 세례를 해마다 받고도 내 시력이 나빠지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하다 할 것이다.
그렇게 매운 환경 속에 성장한 나는 중학생이 되던 해부터 안경잡이로 살아야 하는 운명에 접어들었다. 안경 쓰기의 불편함을 감내하면서 대학생이 되면 절대 데모 따윈 하지 않으리라는 각오를 다졌다.
하지만 1978년에 대학에 입학하고 보니 세상은 정권에 대해 반발하는 국민정서가 정점에 올랐던 그 시기였다. 나라가 흔들바위에 올라앉은 것처럼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이듬해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을 시해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으니 얼마나 흉흉한 시절인지 모른다. 내가 다니던 이화여자대학교 캠퍼스에는 붉은 글씨로 ‘독재 정권 물러나라’라는 대자보가 매일 새롭게 붙었다가 뒤돌아보면 어느새 떼어내고 없어지곤 했다. 교정 곳곳엔 날카로운 눈빛의 아저씨가 손에 워키토키 무전기를 들고 우리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나는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그런 아저씨와 눈이 마주칠까봐 건물 뒤로 먼 길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학생들 사이에선 늘 무언가 새로운 정보가 수군수군 퍼져나갔고 등사기로 민 조잡한 인쇄물이 나돌아 다녔다. 주로 ‘군사 정권을 타도하자’는 내용이었다. 캠퍼스 한곳에서 간헐적으로 데모가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면 여지없이 삽시간에 경찰버스가 밀어닥쳐 마치 닭장을 탈출한 어린 닭을 잡아들이듯 한심하단 표정으로 여학생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 싣고 떠났다.
정말 무서운 광경이었다. 나무 위에 유령처럼 숨어 있었던지 정보부 직원이 어느결에 나타나 군홧발로 잔디밭을 짓밟으며 데모 현장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대학이 지성과 아무 관계없는 치열한 전투 현장처럼 여겨졌다. 그러다가 부마(釜馬)사태가 발발한 1979년 가을 무렵이었다. 학생들은 모두 서울역 앞에 집결하기로 결정했다. 과 대표가 결연한 모습으로 더는 침묵할 수 없으므로 한 곳에 모여 구국의 결의를 다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날이 아마 서울에서 대학생들이 벌인 가장 큰 시위였을 것이다. 진압하는 경찰을 피해 달아나다 붙들려 옷이 찢어지거나 신발을 잃어버린 학생들이 대다수였고, 곤봉으로 얻어맞은 친구들도 많았고, 몇몇 학생은 결국 붙잡혀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그 시절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이런 생각에 잠기곤 한다. ‘그때 만일 나도 친구들을 따라 서울역에 갔었더라면….’
그때 서울역에 가는 대신 나는 도서관으로 향하며 이렇게 자기합리화를 했다. 의과대학에 들어온 이유는 정치에 상관없이 사람을 살리는 의사가 되려는 것인데 일일이 세상 돌아가는 일에 참여하다 보면 언제 공부를 하겠어? 의사란 이념보다는 인간애를 중시하고 또 실천하는 직업이 아닌가? 구태여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대학생들이 세상을 바로잡을 테지…. 하지만 그건 치졸한 변명에 지나지 않았고 사실 나는 겁에 질려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어떤 교육을 받아왔던가? ‘국민교육헌장’을 제대로 못 외우면 손바닥을 대나무 회초리로 맞았고, 국어 시간엔 애국에 대한 표어를 짓고 미술 시간엔 ‘반공 포스터’를 그렸다. 자나 깨나 반공교육을 통해 공산주의를 무슨 괴물이거나 악마로 여기도록 만들었다.
그때 우리에게 가장 무서운 단어는 뭐니뭐니 해도 ‘간첩’이었을 것이다. 강원도에 살던 이승복이란 아이가 무장공비를 향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라고 저항하다가 본인은 물론 가족들까지 몰살당했다는 뉴스는 섬뜩하기 짝이 없었다. 하필 이승복은 나와 생년월일이 똑같은 1959년 12월 9일생이라서 결코 그 이름을 잊지 못하고 있다.
그뿐인가. 서울 한복판에도 무장공비가 출몰한다는 소식은 우리들 머리 위에 구름처럼 공포를 드리워 놓았다. 공포만큼 인간을 다스리기 편한 도구가 또 있을까? 청와대를 폭파하는 목적으로 남하했다는 간첩 김신조가 체포되었다는 속보가 허공을 날아다녔다. 구름에서 비가 떨어지듯 하늘에서 불안감이 뚝뚝 떨어졌다.
대학생들이 데모를 벌이면 어른들은 그게 모두 북한 공산당의 사주를 받은 거라고 말했다. 그럴 땐 북한 공산당이라고 하지 않고 빨갱이라고 부르게 마련이었다. 그건 지금까지 하나도 변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사실 대학생이 되었다고 하루아침에 세상을 향해 감긴 눈이 떠지는 건 아니다. 일간 신문에 실리는 기사를 액면 그대로 믿었고, 부모님과 학교 선생님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던 평범한 여학생이 정권의 실체가 무엇인지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겠는가? 다른 친구들이 민주화를 외치며 서울역을 향해 뛰어가도 그건 지각없는 부화뇌동일 뿐이라 여겼다. 도서실에 두더지처럼 숨어 있던 나는 스스로 부모님께 걱정을 끼치지 않는 착한 딸이라고 믿었다. 그땐 그랬다. 덕분에 안기부에 끌려가는 일 없이 무사히 대학을 마치고 의사가 된 걸 안도해야 할까?
아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없다. 물론 여러 가지로 평가해야겠지만 확실한 건 만일 내가 다시 대학시절로 돌아가 민주화 운동의 소용돌이 속에 서게 된다면,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면, 그땐 절대로 데모대를 외면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이기적인 시선으로 개인의 안정만 도모하는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얼마 전부터 남미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권력과 억압에 대한 항거가 비단 우리나라에 국한된 역사가 아니란 걸 새삼 알게 되었다. 칠레에는 피노체트 정권하에서 짓밟힌 수많은 목숨이 스러져갔고 아르헨티나의 ‘추악한 전쟁’ 동안에는 불순분자로 낙인 찍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수만 명의 실종자들이 있었다. 과테말라에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미구엘 앙헬 아스투리아스의 는 어쩌면 그렇게 우리나라의 모습과 닮았던지 소름이 끼쳤다. 대통령의 심복이 겪는 불행이 비정한 군부정치의 생리를 잘 드러내고 있었다.
또 로베르토 볼라뇨의 에는 멕시코시티의 대학에서 데모대가 진압 당할 때 화장실에 숨어서 13일을 연명한 우루과이 출신의 여대생 이야기가 나온다. 그건 실화를 가지고 만든 소설이어서 더욱 숨죽이며 읽게 되었다. 그녀는 나중에 ‘멕시코 시(詩)의 어머니’로 추앙받는다는 조금 심오한 내용이다.
또 아리엘 도르프만의 희곡 에는 여죄수에게 가하는 고문의 강도를 연구하며 강간을 저지르는 의사가 등장한다. 그 의사는 성적 고문을 하는 동안 슈베르트의 현악 4중주 ‘죽음과 소녀’를 들려주는 친절함을 베풀었다는데 이 희곡의 공간적 배경은 ‘칠레일 수도 있지만 오랜 독재 기간이 끝난 직후 민주정부가 들어선 경우라면 어느 나라도 무방하다.’라고 설정되어 있는 것만 봐도 독재란 전염병처럼 세상에 널리 퍼졌던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민주화 투쟁을 하던 데모는 비단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인 반향이었던 것이고 그런 데모에 동참하지 않았던 나는 전 세계적으로 비겁한 인물이 된 셈이다.
그런 중에 칠레 태생의 천재적 작가 로베르토 볼라뇨가 어느 수상식에서 이런 말을 했다는 걸 보고 눈이 번쩍 뜨였다. 양질의 글쓰기란 ‘암흑에 머리를 들이밀 줄 알고, 허공에서 뛰어내릴 줄도 알고, 문학이 기본적으로 위험한 일임을 알고 쓰는 글’이라고.
그게 비단 글쓰기에만 해당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즉 암흑에 머리를 들이밀 줄 알고, 허공에서 뛰어내릴 줄도 알고, 기본적으로 인생이란 위험한 것이란 걸 알고 사는 삶이 가치가 있다는 뜻이리라. 그러니까 나는 그동안 모르는 게 너무 많은 채 살아왔던가 보다. 나이가 들면 점점 더 안정과 자기 영달을 추구한다지만 내게 남은 세월엔 지난 부끄러움으로 더는 낯을 붉히지 않게 되길 소망한다.
△ 김애양(金愛洋) 은혜산부인과 원장·수필가
이화여대 의대 졸. 은혜산부인과(서울 강남구 역삼동) 운영. 1998년 수필가로 등단, 수필집 5권 발간. 한국의사수필가협회를 결성해 모임을 주도하고, 해마다 ‘한국 의학도 수필공모전’을 통해 의대 학생들의 인문학적 소양을 함양시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실로 생경한 풍경이었다. 십여 년간 취재를 위해 수많은 병원을 들락거렸는데,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의자가 없는 원장실이라니. 몸을 기댈 곳이라고는 서 있는 상대방 앞에 앉기 민망할 만한 높은 홈바 의자가 전부. 알파고를 바라보는 이세돌의 심정이 이랬을까. 상식을 깨는 리셋의원 박용우(朴用雨·53) 원장이 말하는 ‘건강한 걷기’ 역시 파격적인 그의 업무 공간을 닮아있었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박용우 원장을 지칭하는 수식어는 많다. 1990년대 후반부터 언론을 통해 이름이 오르내린 덕에 스타 의사나 국민 주치의로 불리기도 하고, 최근엔 연예계를 중심으로 돌풍을 불러일으켰던 해독주스의 창시자로도 손꼽힌다. ‘걷기 전도사’ 역시 그가 가진 별명 중 하나다.
그가 처음 의대에 입학했을 때 꿈꾸었던 미래는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고 했다.
“처음부터 의대를 목표로 공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부모님이 기술을 익혀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해서 이과를 선택했고, 성적이 좋은 이과 학생에게 선택지는 몇 가지로 좁혀지니까요. 그래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으로 진학했는데, 눈이 좋지 않아 외과는 포기해야 했습니다. 신설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용의 꼬리보다는 낫겠다 싶어 가정의학과를 공부하게 됐죠.”
가정의학과에서 그는 처음엔 스포츠의학에 관심을 갖게 됐고, 운동선수들의 체형 관리에 관한 연구를 하다 자연스레 비만 치료로 연구분야가 옮겨갔다고 했다. 하지만 당시는 비만을 질병으로 인정하지 않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전문적인 연구를 고민하던 차에 제안을 받고 덜컥 개원을 결정하게 된다. 그때가 1991년이다.
국내 최초의 비만클리닉 메덱스. 위치가 강남인 데다 운동 처방이 가능하고, 임상 영양사까지 갖춘 병원. 요즘의 병원이라고 해도 파격적이라 생각할 수 있을 정도의 앞선 의료기관이었지만 보기 좋게 실패했다.
당시는 의사가 반말하고 환자가 높임말을 쓰던, 환자를 고객이라 표현하면 손가락질을 당하고, 인테리어라고는 깨끗한 흰 벽이 전부였던 시절이었다. 잘될 리가 없었다.
이후 강북삼성병원 교수 재직 시절 그는 비만 연구에 대해 새로운 계기를 맞이하게 된다. 미컬럼비아대학 비만연구소에서의 연수과정이 그것이다.
“영양과 비만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됐죠. 서로 다른 관점에서 접근하는 의사, 영양학자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이 동등한 발언권을 갖고 토론하죠. 임상뿐만 아니라 역학이나 통계학, 기초의학 등 다양한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는 귀중한 기회였습니다.”
2008년 비만 치료 분야의 중심이 대학에서 개원가로 넘어오면서 그 주도권을 유지하기 위해 그 역시 개원을 택해 지금의 리셋의원을 열게 됐다.
그런 그에게 환자들은 어떤 질문을 가장 많이 할까?
“건강관리를 어떻게 하는지 가장 궁금해하시죠. 과연 저 사람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하는 호기심이겠죠. 저의 경우는 모든 분에게 권할 만큼 100% 완벽하게 하고 있진 않거든요. 술을 좋아해서. (웃음)”
그가 건강 관리에서 첫 번째로 강조한 것은 앉는 시간을 줄이라는 것이다. 시간을 내어 공기 좋은 곳에서 걷는 것도 좋지만, 반드시 일정 시간 이상 공들여 걷는 것만이 효과를 내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그의 근무 공간에서 의자를 아예 치워버린 이유도 이 때문이다. 휴식을 취하다 짬을 내어 걷는 것이 아니라, 계속 서 있다 지칠 때 휴식을 취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많이 걷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앉는 시간을 줄이는 것입니다. 걷기가 건강에 도움을 주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 과정에서 엉덩이와 허벅지 근육이 심장에 신선한 피가 돌 수 있도록 펌프질(pumping)을 해줘서입니다. 엉덩이와 허벅지 근육은 우리 몸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근육으로, 걷기는 이 근육들을 강화해 줄 수 있습니다. 인간의 몸은 사냥을 위해 걷고 뛰는데 최적화되어 있습니다. 앉아 있기 위해 만들어진 구조가 아니죠. 해외에서는 앉아 생기는 병(sitting disease)이란 표현도 씁니다. 의자에 앉아 있는 시간을 줄여, 단 1분이라도 하체를 자주 움직여야 합니다.”
일정 시간 이상 해야 효과가 있다는 그동안의 상식과는 다소 다르다. 그는 이에 대해 인체에 새겨진 유전자와 생활 환경의 불일치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몸이 본능적으로 가진 것을 깨워야, 암 예방 물질 생성과 같은 몸속 유전자 정보가 발현될 수 있다고 말했다. 서 있거나 걸을 때의 자세도 조언했다. 의식적으로 상체를 들고 쫙 펴는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근육의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노화와 퇴화는 다른 개념입니다. 보통 나이가 들면 몸의 변화는 당연하다고 하지만, 관리하지 않아 몸의 기능이 저하되는 것은 노화와는 다른 것이죠. 이것은 퇴화입니다. 스스로 몸을 관리하고 젊게 살려고 노력한다면 퇴화는 분명히 막을 수 있습니다. 오래 앉아야 하는 환경이라면 30분에 한 번씩이라도 앉았다 일어나기를 하거나 가볍게 걷기를 잠깐이라도 하시기를 추천합니다.”
그의 건강관리 비법 중 또 하나는 영양제다. 술을 좋아하는 그가 더욱 중요하게 여기는 습관이다. 음주로 인해 소모되는 각종 영양성분을 보충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 음주 후 2, 3일은 간을 쉬게 해 주고, 술을 마실 땐 해산물 중심의 안주를 고르려 노력하는 것도 그가 선택한 방법이다.
“서구식 식습관으로 바뀌면서 대장암 같은 질환이 늘어나고 있는데, 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유산균 보충을 위한 프로바이오틱스를 권합니다. 여기에 비타민과 칼슘, 마그네슘, 오메가3 등을 보충한다면 영양 불균형으로 인한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박용우 원장은?
서울대 의과대학과 가정의학과 석사를 마치고, 고려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91년 국내최초 비만클리닉 메덱스를 개원했다. 이후 1993년부터 성균관대학교 강북삼성병원에서 13년간 교수로 활동했다. 그 과정에서 미국 컬럼비아대 의대 비만연구소 교환교수를 역임했다.
2008년 리셋클리닉을 개원했다.
방송활동이 활발해 MBC 과 MBN , 올리브TV 의 고정 패널로 활동 중이며, KBS , , JTBC 등에도 출연했다.
저서로는 가 열풍을 이끌며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이외에도 , 가 있다.
그날따라 신촌 길을 걷고 싶었다. 봄바람이 불던 첫날. 몸도 마음도 가벼웠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손에 들고 걷던 길 멀리서 잔잔한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따라 다다른 곳은 신촌 홍익문고 앞 피아노. 많은 젊은이가 멈춰 서서 익숙한 선율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피아노 앞에는 갈색 모자에 목도리를 단단히 두른 노신사가 앉아 있었다. 그렇게 밤길 위의 피아니스트 장요한(張요한·62)씨를 만났다.
차 한잔 함께 하실래요?
그의 연주가 끝나기가 무섭게 다가가 다짜고짜 물었다. 봄이라지만 밤은 겨울이었다. 차라도 한잔 하면서 얘기가 하고 싶었다. 무엇 때문에 젊은이들의 장소에 나와 피아노를 치는지 묻고 싶어졌다.
“그저 취미로 피아노를 칩니다. 일과를 마치고 피아노 칠 수 있는 곳을 찾아옵니다. 오늘은 날씨가 좀 풀린 거 같아서 신촌에 나왔는데 사람들이 피아노 연주를 들어주니까 좋았습니다.”
겨울 동안 장요한씨는 신촌이 아닌 여의도 IFC몰 CGV영화관 안에 서 피아노를 연주했다. 그는 20분이고 30분이고 피아노를 쳤다. 그가 피아노를 치는 날이면 영화관 측에서 관객(?)들이 앉을 테이블과 의자를 마련해 주었다.
“수줍음이 많은데 어렸을 때부터 남들 앞에서 연주를 좀 해서 그런 지 거리에서 피아노를 치는 게 어렵지 않았습니다. 신촌에는 오늘 정말 오랜만에 나온 겁니다.”
장요한씨가 최근에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 건 작년 3월 인사동에 설치된 ‘달려라 피아노’를 알고부터다. ‘달려라 피아노’는 연주되지 않거나 거실, 공공시설에 방치된 중고 피아노를 기증받아 화가들이 새롭게 디자인한 뒤, 지역 공공장소에 설치하는 프로젝트다. 2008년 영국 버밍엄에서 시작해 한국에는 신촌 홍익문고 앞, 인사동, 선유도 공원, 어린이 대공원, 동대문 DDP 등 서울과 지방 여러 곳에 번지고 있다.
장요한씨는 인사동과 신촌, 여의도를 오가며 매일 연주를 했다. 피아노 칠 때는 모르지만 연주가 끝나고 나면 몸이 아주 힘들었다.
“쉬고 운동도 해야 하는데 퇴근만 하면 자꾸 발걸음이 피아노 있는 쪽으로 향하더라고요. 가끔은 왜 내가 아프면서까지 피아노를 치고 고생할까도 생각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박수가 피아노를 칠 수 있는 원동력이자 중독의 요인이라고 말했다. 피아노를 치고 난 뒤 쉬어야 하는데 박수를 받으면 연주를 끊을 수 없다. 몸이 좀 힘들어도 그가 연주하는 이유다.
피아노는 배운 적이 없다? 천재 아니십니까?
그는 단 한 번도 정식으로 피아노를 배운 적이 없다. 어렸을 때 집에 있는 풍금을 접한 것이 피아노를 치는 계기가 됐다.
“1974년 어느 날, 커피숍에서 누군가 피아노를 치는 모습을 봤는데 그게 너무 멋있었어요. 원래는 기타를 배우려고 했다가 때려치우고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생각해보면 항상 음악과 함께한 세월이다. 중·고등학교 악대부원으로 활동할 때는 클라리넷을 연주했다.
“악대부 유니폼을 입고 안동 시내 시가행진을 하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어요. 취미활동도, 특별활동도 늘 음악을 선택했습니다.”
학교 음악선생님이 음대에 가라더군요.”
고등학교 때는 고향인 안동에서 대구로 유학을 가 큰누님 집에서 살았다. 등교하기 전 피아노를 30분정도 치고 갔다. 전공자도 아닌 고등학생이 참으로 대단한 열정이 아니었나 싶다. 작곡가 출신이던 고등학교 음악선생님을 대신해 수업 시간에 피아노를 치기도 했다는 장요한씨. 그런 그에게 음악선생님은 음대에 갈 것을 권유했다. 그런데 장요한씨는 음악은 그냥 취미로 여긴다며 음악선생님의 추천을 거절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음대를 준비했던 것도 아니고……. 그때 당시에 음악선생님이 대구시립 교향악단 지휘자였거든요. 음대에 가라고 했는데 저는 1년 더 공부해서 치과대학에 들어갔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피아노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가 피아노를 쳤다. 손님이 없는 레스토랑이나 피아노가 있던 대구교대 안에 들어가 피아노를 쳤다. 피아노를 전공하지 않은 것에 대한 약간의 후회가 남아 있는 듯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음악에 상당히 소질은 있었어요. 부모님이 제 재능을 알아보고 잘 키워줬으면 어땠을까요? 지방이 아니라 서울에 살면서 음악을 더 접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도 해봅니다.”
과거의 이루지 못한 꿈이 미련으로 남아 장요한씨를 길 위의 피아니스트로 만든 게 아닐까.
“그래도 대학 다닐 때 학교 그룹사운드에서 키보드를 연주했습니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 조용한 음악이 좋지만 저도 나름 20대 때는 록 음악이 좋았습니다.”
그는 경북대 의대 그룹사운드 ‘메디컬 사운드’ 2기 출신이다. 본과에 올라가기 전까지 활동하다 후배들에게 물려주는데 지금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전통의 그룹사운드다.
낮에는 치과의사 장요한의 삶을 삽니다
장요한씨의 본업은 치과의사다. 경북대학교 치과대학 1기로 졸업한 뒤 35년을 치과의사로 살고 있다. 최근 1년 사이 피아노를 치는 삶에 심취한 듯 보이지만 하얀 가운을 입는 순간 영락없는 의사 선생님으로 돌변한다.
“피아노만 치고 치과 진료에 관심 없는 듯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최대한 정직한 진료로 꼼꼼하게 환자를 보려고 노력합니다. 우리 병원에는 과잉 진료를 피하는 방법도 적어두었습니다. 은퇴하는 날까지 양심적인 치과의사로 일하고 싶습니다.”
장요한씨는 마음을 비우고 일반 환자만 치료하고 있다. 임플란트 시술도 안 한다. 엑스레이 찍기, 스케일링도 장요한씨 스스로 한다.
“속은 편합니다. 수익이 별로 없는 게 문제지만, 돈에 대해 신경을 별로 안 써도 됩니다. 내 월급 누가 주는 거도 아니고 진료가 끝나면 저는 피아노 치러 나갑니다.”
치과의사를 하는 35년 동안 피아노를 치지 않았다. 그만큼 치과의사로서 열심히 살았다고 말한다.
“제 나이는 이제 은퇴할 나이잖아요. 하루에 받을 만큼만 예약한 환자들을 봐줍니다. 환자를 볼 수 있을 만큼만 봐서 에너지가 축적이 된 건지. 그래서 아마 피아노를 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장요한씨는 피아노라도 안 쳤으면 서울서 살기가 힘들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모든 사람에게 힐링 되는 연주 선물하고파
“저는 레퍼토리가 아주 많습니다. 그냥 놔두면 2~3시간 칠 수도 있어요.”
장요한씨는 리처드 클레이더만의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를 비롯해 영화 OST , , , 등 피아노로 치기 편하고 인기 좋은 음악들을 고른다.
“힐링이 되는 음악을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습니다. 제가 치는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 거 보면 따뜻한 음악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제 연주가 편하고 좋다며 다가와 말해주는 사람도 있었어요.”
장요한 씨는 좋은 연주를 위해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는단다.
“어떤 팝송이 치고 싶다고 생각하면 원곡을 계속 열심히 듣습니다. 듣다 보면 내가 따라 할 수 있고 딱 듣기 좋은 부분들이 들립니다.”
영어 어휘력을 늘리듯이 그렇게 차근차근 손에 건반의 느낌을 익힌다고 했다. 피아노를 치다 잘 넘어가지 않고 자꾸 걸리는 부분이 있으면 잘 풀릴 때까지 연습한다.
“반복해서 하나하나 치다 보면 되더라고요. 내 실력으로는 도저히 안 될 것 같던 악보도 치다 보니 됐습니다.”
장요한씨는 은퇴 후 의료 시설이 취약한 시골에 가서 살고 싶다고 했다. 서울에는 사람들도 많고 또 치료해 줄 의사도 많다고 느낀다.
“치아 미백도 하고 다른 여러 가지 하면서 돈을 번다는데 저는 그런 거하고 멀어요. 고향으로 가고 싶은데 가족들이 서울이 더 좋다고 해서 고민입니다.”
한편으로는 사람들 속에서 피아노 치는 게 그리울 거 같아 걱정이다. “내일은 뭐 하실 건가?”라는 질문에 “날씨가 추워진다고 하니 여의도에 가서 피아노를 칠 생각입니다”라고 말하는 장요한씨. 1년 넘게 그의 일상으로 자리 잡은 피아노 연주를 위해 그는 친구를 만나는 것도, 술을 마시는 것도 자제한다. 봄이 되면 신선한 바람을 맞으며 피아노를 칠 생각이라는 장요한씨. 오늘 혹시 시간이 된다면 여의도 IFC몰로 가보기를 권한다. 산뜻한 표정의 치과의사, 아니 밤의 피아니스트 장요한씨를 만날 수 있다.
김원곤(金元坤·63) 서울대 의대 흉부외과 교수는 독특한 이력들을 갖고 있다. 국내 굴지의 대학병원 교수라는 것도 충분히 화제가 될 수 있는 이력이지만, 동시에 열정적인 미니어처 술병 수집가이며 영화광이기도 하다. 얼마나 그 취미를 파고들었는지 미니어처 취미는 ‘닥터 미니어처의 아는 만큼 맛있는 술’, 영화 취미는 ‘영화 속의 흉부외과’라는 책으로 만들어졌다. 그는 또한 소위 말하는 ‘몸짱’으로도 유명하다. 환갑을 앞두고 1년 동안 몸 만들기에 매진한 그는 세미누드 사진집까지 펴낼 정도로 자신을 가꿨고, 중년을 위한 몸 만들기 책도 펴냈다. 쉬지 않고 스스로를 단련하고 있는 그가 다음으로 시도한 영역은 4개 외국어다.
그는 50세의 나이에 일본어, 중국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4개 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놀랍게도 4개 외국어능력시험의 고급 과정에 단 한 번에 합격했다. 이 정도면 사람이 좀 불공평하게, 그러니까 김 교수가 어떤 특출한 자질을 갖고 태어나서 그런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러나 김 교수는 그런 생각이 말도 안 된다고 말한다.
“저는 제가 언어력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르고 살았어요. 우리 집에서는 그런 공부를 한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영어 알파벳 선행학습 한 거하고 서양 사람 얼굴을 AFKN에서 본 게 제 어린 시절 외국어와 접촉했던 전부예요. 그러니까 대학 졸업 전에는 어학 관련해서는 접한 게 없습니다.”
더구나 김 교수는 콤플렉스까지 있었다. 바로 자신의 사투리 발음에 대한 것이다.
“첫 아이가 태어났을 때, 의욕적으로 한글 교육 정도는 내가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초등학교 들어갈 때가 돼서 한글을 가르치고 받아쓰기 테스트를 했는데, 받아쓰기가 영 엉망인 거예요. 막 야단을 쳤죠. 그런데 아이가 ‘아빠가 발음하는 대로 썼다’ 하는 겁니다. 그 이후로는 뭐 아이에게 한글 교육 같은 거 안 했어요. 지금도 영어의 p 발음과 f 발음은 구분하기 힘들어요.(웃음)”
그가 50대가 넘어서 외국어 공부를 시작한 것 자체가 굉장히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그가 50세가 되었을 때 주5일제 제도가 시작되면서 전에 비해 여유 시간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나중을 생각해서 후회 없이 한 가지를 해보자고 다짐했다고 한다. 영어 외의 제2외국어를 찾다 보니 가장 만만한 게 일본어였다. 거기서부터 시작이었다.
인생에 후회가 없을 일을 한번 해보자
“운동이나 외국어, 다 어렵죠. 운동도 그렇고 외국어 공부도 그렇고 공통적인 특징은 자기가 아무리 열심히 해서 궤도에 올려놨다고 해도 잠깐 게을리하면 쭉 떨어진다는 거예요. 멈춘 상태로 그대로 가는 게 아니라는 게 무서운 거죠. 학원에 다니다 보면 그런 사람들을 수없이 봐요.”
그는 특히 전업으로서, 혹은 생활에 도움이 되는 수단으로서의 공부가 아닌 취미로서의 공부는 더욱 어렵다고 말한다.
“그건 한 번 시작하면 끝이 없는 걸 뜻하는 거예요. 올림픽을 목표로 하거나 대회가 있으면 그러한 구체적인 목표에 매진하면 되지만 취미 생활로 공부를 하면 목표가 있을 수 없죠. 그러니 평생 해야 한다는 건 어렵죠. 먹고살 일도 아니고. 열심히 하면 수입이 보장되는 일도 아니잖아요? 얻을 수 있는 건 자기만족과 자기발전이란 건데, 그 외에는 사실 동기 부여가 없는 셈이죠. 그게 힘든 거죠.”
하긴 그렇다. 취미로서의 공부란, 아무도 옆에서 강요하거나 격려하지 않는다. 공부하는 사람 본인은 그냥 안 하면 그만인 일이다. 하지만 김 교수는 결코 그만두지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해 그는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을 드러냈다.
“다 좋은 거잖아요. 공부나 운동이나.”
외국어에서 문법과 단어가 중요할 수밖에 없는 이유
김 교수가 자신의 외국어 정복기를 묶어 책으로 만든 ‘파란만장 중년의 4개 외국어 도전기’에서 인상적이었던 내용은 문법과 단어를 뼈대와 근육으로 표현했다는 점이다. 일상 회화의 중요성이 계속 강조되는 근간의 외국어 공부 흐름과는 조금 달라 보였다.
“우리 시절에는 해외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어요. 외국인을 만날 기회도 이유도 없었죠. 그러니 오로지 가르치는 게 문법이었어요. 현실에서는 말 한마디 못하는 게 사실이었죠. 그런데 시대가 바뀌니 말하는 게 중요하다, 해서 일상 대화가 강조됐습니다. 사실 말하는 건 중요하죠. 그런데 한국 사람끼리를 생각해 보세요. ‘밥 먹었니.’ ‘날씨 좋다.’ 우리나라 사람들 일상 대화를 보면 늘 그런 식으로 얘기합니다. 그렇게 단순히 얘기해도 일상생활에선 불편이 없죠. 그런데 같은 사람을 계속해서 만난다고 생각해 보세요. 만날 식당에만 가는 것도 아니고, 할 줄 아는 말이란 게 밥 먹고 날씨 좋다고 말하는 것뿐이라면 문제가 있죠. 심층적인 얘기도 좀 하고 정치 사회 현안에 대해 얘기도 하려면, 단어를 모르면 할 수 없어요.”
외국인이 우리 문화권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을 설명하려면 그걸 표현할 수 있는 바탕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외국인에게 공자에 대해 설명해 주려면 공자를 표현할 수 있는 사회적, 철학적 단어들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김 교수는 문법이나 단어의 바탕이 좋은 사람은 외국어 능력 발전에 가속도가 붙지만 회화만 할 줄 아는 사람은 역으로 발전이 잘 안 된다고 지적했다.
한자를 많이 안다고 중국어를 잘할 수는 없다
우리나라 사람이 가장 쉽게 배울 수 있는 언어는 누구나 알고 있듯이 일본어다. 그런데 시니어들 중에는 한자를 많이 알고 있다고 하여 중국어도 일본어만큼 배우기 쉬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한자를 많이 알고 있으면 중국어를 배우는 데 조금 도움은 될 수 있지만 잘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중국어에서 특히 어려운 건 성조예요. 우리나라는 억양이 달라도 성조가 없으니까 다 알아듣는데, 중국은 성조가 없으면 아예 못 알아들어요. 그리고 어순이 우리와 완전히 다르죠.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쓰는 한자 대부분이 중국계 한자와 다르다는 거예요.”
우리나라가 받아들인 현재 쓰고 있는 한자의 상당수는 일제 당시에 일본에서 만들어진 일본식 한자다. 애초에 중국과 다를 수밖에 없는 데다, 중국은 따로 간체자라고 하는 새로운 한자 체계를 조직하여 쓰고 있다. 아무리 한자 지식이 많다고 해도 현재의 중국에서 통용될 수 있을 리가 없다.
김 교수는 프랑스는 유럽 언어 중에서 우리나라 사람이 배우기에 가장 어려운 말이라고 소개했다. 특히 발음이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국어를 배우는 사람들 사이에선 중국어 성조가 더 어려우냐, 프랑스어의 발음이 더 어려우냐 하는 비교가 있을 정도라고 한다.
“사실 프랑스어의 문법은 크게 어렵지는 않아요. 그런데 우리는 영어로 자란 세대니까, 영어와 다르면 무조건 어려운 거죠. 그리고 스페인어는 발음은 우리나라 사람 입장에서 쉬운 편이긴 합니다.”
진짜 공부는 일상 속에서 한다
김 교수는 올해 우리 나이로 63세다. 그는 자신도 나이를 거스를 순 없으며 젊었을 때보다 기억력이 쇠퇴했을 것이라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런데 학원을 가면 젊은 친구들이 많은데 단어 암기에서 제가 그들에게 뒤진다는 생각은 안 하거든요. 자기의 타고난 능력에 대해선,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변명하기가 좋아요.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암기는 가장 효과가 있는 시점에 반복하고 자주 반복하는 게 좋아요. 학원을 마치고 나오면 해방이다, 이러면서 핸드폰으로 게임하고 영화를 보고, 소주 한 잔을 하든지 그러면, 암기가 잘 안 될 수밖에 없어요. 저는 지하철을 이용하는데 타고 가면서 배운 걸 보고, 자기 전에 또 봅니다. 거리를 가면서도 공부할 것들이 많아요. 간판에 적힌 글자들만 봐도 뭔가 궁금해지면 바로 스마트폰으로 검색하여 공부하죠. 그래서 시간이 없다는 건 거짓말이라고 생각해요.”
공부를 마치고 나서 바로 짧은 시간에 반복해서 다시 복습을 하는 것, 그리고 자투리 시간을 내서 공부를 하는 그의 태도는 공부법에서 말하는 복습의 중요성을 일깨우게 만든다.
“나이 든 사람들과 공부를 해보면 그분들 나름대로 한계가 있긴 해요. 그러나 다 극복할 수 있다고 봅니다.”
머리 중심 노익장의 시대가 올 것
김 교수는 ‘나이 많은 몸짱’이란 개념도 거의 10여 년 전부터 시작해서 이제는 꽤 보편화된 개념이 됐다고 진단했다. 아직도 스페셜하긴 하지만. 그 자체가 화젯거리가 되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는 것이다.
“몸짱은 그렇다 칩시다. 사람들이 이제 다 그런 개념을 갖게 됐으니까. 그런데 머리를 쓰는 것은 어떤가요? 나이를 먹은 사람의 특성상 머리를 쓰는 게 몸을 쓰는 것보다 더 맞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우리가 노인이 돼서 머리가 안 돌아간다고 말하는 건 오래된 축적된 경험과 지혜를 바탕으로 하는 것보다는 기억력과 관련된 문제예요.”
김 교수는 공부에 뜻이 있는 시니어들이 막상 해보려고 하면 자꾸 기억이 안 나게 되니 좌절감을 느끼고 ‘나는 안 된다’라고 느낀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지금 ‘몸짱’이 나이 많은 사람에게 정립이 된 것처럼 자연적으로 머리를 바탕으로 하는 노익장이 주목받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생각해 보면, 먹고살기 위해서는 그걸 처절하게 견뎌야 하는 몸이 바탕이 되어야 했으니 몸이 먼저 주목받았던 게 당연합니다. 사실 머리는 당장 먹고사는 것과는 관계가 없죠. 그래서 머리와 관련된 기능은 쉽게 퇴화하고 유지하는 게 어려운 걸 수도 있어요.”
은퇴, 그 자체를 잘 모르겠는 마음
나이를 잊은 것처럼 에너지가 넘치는 김 교수에게 은퇴 후의 삶이란 어떻게 다가올까? 그는 그 질문에 대해 ‘잘 모르겠다’라고 대답했다. “세상이 너무 변했어요. 요즘은 나이가 들어도 너무도 건강하게 됐어요. 은퇴 생활이 60대에 적용된다고 보면, 남들은 일하는데 은퇴한 자신은 놀고 있으면 능력이 없어 보이는 자괴감이 들 수도 있는 그런 세상이 된 거죠. 그래서 저는 은퇴 후라는 게 ‘인생을 열심히 살아보자’인지, ‘유유자적하게 살자’는 것인지 모르게 됐어요. 사회적으로 정립이 안 된 걸 개인이 뭐라고 말하기가 어렵죠. 내년에는 양상이 또 바뀌지 않을까 싶어요. 그래서 정말 어려운 문제예요.”
의학의 발달과 사회적 진화로 인해 기존의 정년 개념은 이제는 무의미하게 됐다. 이제 은퇴라는 말은 아직도 충분히 일할 수 있는 상당수의 시니어들에게 낯설게 다가오는 말일 수도 있다. 김 교수가 말하는 은퇴에 대한 개념을 들으며 느낀 것을 많은 시니어들도 동감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넓은 공부의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다
술, 영화, 운동, 외국어까지 섭렵했다. 이제 다른 영역으로 김 교수가 도전해보고 싶은 게 있을까?
“사실 지금까지 한 것들도 도전을 위해서 한 게 아니고 우연히 한 거죠. 우연히 시작한 걸 버려선 안 된다, 한때의 추억으로 남기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어요. 앞으로의 욕심이라면 현재 하고 있는 외국어, 운동들로 그 자체 내에서 내가 얼마나 발전할 수 있나를 시험해 보고 싶습니다. 운동은 가시적인 발전에 한계가 있습니다만 외국어는 끝이 없을 거라고 봐요. 커피도 그렇잖습니까? 다 맛있다 하다가도 원산지, 볶는 법 등등을 알게 되면 끝이 없잖아요. 언어도 그런 게 더 없겠습니까?”
그는 나이가 들어도 지금 꾸준히 하고 있는 것들을 잃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언제까지 할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보다는 더 이상 퇴보하는 건 없도록 하고 싶어요. 그 기간이 오랫동안 연장이 됐으면 싶고. 1차 목표는 70세로 하고, 더 좋은 기회가 주어지면 75세로 늘리려고요(웃음).”
근래 ‘금수저’, ‘은수저’, ‘동수저’, ‘흙수저’라는 새로운 시사용어가 회자되고 있다. 우리 사회의 양극화를 조장하는 표현으로 웃어넘기기보다 거북하게 다가오는 것은 ‘네오 계급론’의 냉소적 내음이 묻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같은 동양 문화권인 한중일 삼국의 식탁 중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왜 숟가락을 볼 수 없으며, 왜 우리는 숟가락 없는 식탁을 상상할 수 없을까 곰곰 생각해본다.
일본 나라(奈良) 현 도다이지(東大寺)에 자리한 일본 왕실 유물들의 보관 창고 쇼소인(正倉院)에는 “756년 쇼무 왕이 죽자 왕비는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숟가락을 비롯한 칼·거울·무기·목칠 공예품·악기 등 600여 종의 애장품을 49재(齋)에 맞춰 헌납하였다”(참고: )는 기록이 있다. 즉, 옛 일본 왕가에서는 숟가락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필자는 수년 전 일본 나라 현 소재 덴리교(天理敎) 대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다. 안견(安堅, ?~?)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1447)’를 비롯해 그곳에 소장된 조선 시대 귀인(貴人)들의 초상화를 연구하기 위해 덴리교 대학교 도서관을 찾은 것이다. 그때 대학 부속 세계민속박물관에서 일왕의 식탁을 찍은 영상 자료를 보았는데, ‘놀랍게도’ 우리의 잔치 밥상을 연상케 하는 그 식탁에 숟가락과 젓가락이 나란히 놓여 있던 기억이 생생하다.
요컨대 일본 식탁에서 숟가락을 볼 수 없는 것은 일본 왕실의 생활 문화와 평민의 생활 문화 간에 넘지 못할 장벽이 존재했음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중국에서는 숟가락을 사용하는 풍습이 왜 없을까? 필자는 오래전 대만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중국 송(宋)나라(960~1279) 휘종(徽宗, 1082~1135) 시대에 그려진 ‘문회도(文會圖, 184.4×123.9cm, 1100~1125?)’에서 숟가락을 본 적이 있다.(참고: 사진 자료 1,2) ‘문회도’는 당시 궁중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인데, 상 위에 숟가락과 젓가락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중국에서는 기원전 5000년 전의 것으로 추정하는 숟가락이 출토되기도 했다. 이런 사실로 보아 중국인은 숟가락을 오랫동안 생활 용기로 사용해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명나라 이후 차츰 기름지고 뜨거운 음식에 숟가락보다 젓가락을 사용하는 게 보편화되면서 숟가락이 설 자리를 잃었다고 한다. 이와 달리 한국은 온갖 찌개류와 국물류가 주도하는 식탁에서 숟가락을 빈번하게 사용해온 것이다.
숟가락과 관련해 흥미롭게도 중국의 경우에는 ‘진화 의식’을, 일본의 경우에는 ‘순응 의식’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한국의 경우에는 예나 지금이나 사회를 지배하는 ‘평등 의식’을 엿볼 수 있다.
근래 우리 사회에서 회자되고 있는 ‘금수저’, ‘흙수저’ 논쟁을 보며 숟가락을 사용하지 않는 중국과 일본의 사회 계층 간 갈등은 어떤 양상을 띠고 있을지 사뭇 궁금해진다.
‘한중일 식탁 문화의 차이점을 찾아서’, 월간지 내용과 일부 겹침을 밝혀둔다.
>>>글 이성낙 현대미술관회 회장
독일 뮌헨의대 졸업(1966),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피부과 교수, 아주대학교 의무부총장, 가천의과대학교 총장, 가천의과학대학교 명예총장(現), 한국의약평론가회 회장(現), 간송미술재단 이사(現)
체온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체온이 1도 낮아지면 면역력이 30퍼센트 떨어진다고 한다. 암세포는 35도에서 가장 증식을 활발하게 한다고 한다. 결론은 체열을 통상적인 정상온도 36도보다 높은 37도가량 유지해야 건강해진다는 것이다. 이른바 체온면역설이다.
요즘 신문과 방송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일본에서 유래했다. 일본 의사 사이토 마사시가 쓴 란 책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2010년 출간 이래 일본에서 80만권이나 팔렸다고 한다. 사이토 마사시는 일본인이지만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종양내과 전문의다. 그는 이 책에서 체온이 1도 내려가면 면역력이 30퍼센트 떨어지고 반대로 1도 올라가면 500~600퍼센트 올라간다고 강조한다.
이론적 토대는 일본의 면역학자 아보 도루박사가 제시했다. 일본 니가타대 의대에서 면역학을 가르치는 그는 체온저하가 교감신경을 활성화하고 이것 때문에 백혈구 가운데 림프구가 감소하면서 면역이 떨어진다고 설명한다. 2004년 일본에서 출간된 그의 저서 을 통해서다.
우리나라에선 한의학을 중심으로 체온면역이론이 중시되고 있다. 2015년 12월 14일자 한 신문에 따르면 메르스 유행 시 환자들의 체온이 신기하게도 36.5도에 못미치는 경우가 많았다는 의사의 고백이 나온다. 처음에는 체온계 고장을 의심했지만 체온계는 정상이었고 환자들의 체온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폐암을 앓다 완치된 환자의 사례도 나온다. 진단 시 체온이 35.8도였지만 수술과 생활습관으로 완치되어 11년째인 요즘 37도의 체온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메르스나 폐암이 체온저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강조한다. 과연 체온과 면역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까? 정말 체온이 떨어지면 질병에 걸리고 체온을 높이면 건강에 도움을 줄까? 나는 체온면역설이 몇 가지 관점에서 비판의 여지가 많다고 생각한다.
첫째 그들이 말하는 체온의 정의가 모호하다.
알다시피 체온의 종류는 다양하다. 구강체온, 직장체온, 피부체온까지 측정 부위에 따라 다르다. 생리학 교과서를 보면 직장체온은 대단히 안정적이다. 나체로 건조한 공기에 노출될 때 11.7도에서 54.5도까지 0.6도 안팎으로 일정한 체온을 유지한다.
구강과 직장에선 상황에 따라 다르다. 같은 사람이라도 극심한 추위에선 35.6도까지 떨어지고 극렬하게 운동할 땐 40도까지 오를 수 있다. 피부체온은 가장 변동 폭이 크다. 보통 적외선 카메라로 측정하는데 외계온도에 따라 10도 이상 춤을 춘다. 추운 겨울에 재면 내려가고 더운 여름에 재면 올라간다. 더욱 중요한 것은 피부체온이 대개 구강과 직장보다 낮게 나온다는 것이다. 피부체온은 실온에서 잴 때 보통 33도이며 구강체온은 36도, 직장체온은 37도를 보인다.
기사에 말하는 메르스 환자의 체온을 어떤 방식으로 쟀는지 궁금하다. 당연히 동일한 환경에서 측정해야 한다. 그러나 기사에선 누가 몇 명을 대상으로 어떻게 측정했는지 설명이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피부체온이라면 당연히 낮게 나올 수 밖에 없다.
둘째 면역의 정의가 모호하다.
면역은 대단히 어려운 주제다. 아직까지 면역을 객관적으로 수치화할 수 있는 검사는 없다. 백혈구 숫자나 아드레날린 수치 등 몇 가지 작은 지표 하나를 갖고 면역이 올라갔다 혹은 내려갔다 단정할 수 없다.
그들은 자신들이 말하는 면역이 무엇을 말하는지 설명하지 않고 있다. 베스트셀러였다는 사이토 마사시의 책을 구석구석 읽어보았지만 어디에도 면역이 어떤 방법으로 측정한 것인지 설명이 없다. 대단히 단순하게 서술되어 있다. 14페이지에 “체온이 1도만 내려가도 면역력은 30퍼센트나 떨어진다”라고 나와 있다. 앞뒤 아무런 설명이 없다. 왜 20퍼센트도 아니고 40퍼센트도 아니고 하필 30퍼센트일까 궁금하지 않은가.
15페이지엔 “반대로 체온이 1도 올라가면 면역력은 무려 500~600퍼센트 올라간다”고 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아무 설명이 없다. 숫자에 대한 설명은 물론 왜 그러한지 기전에 대한 설명도 없다. 나의 말이 곧 진리니까 그대로 믿으라는 것처럼 황당하기 짝이 없다.
아보 도루 박사의 책에선 좀 더 구체적으로 나온다. 그는 백혈구 안에 림프구와 과립구 숫자의 비율로 설명했다. 체온이 내려가면 교감신경이 흥분하면서 림프구의 비율이 줄고 그래서 면역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면역=림프구 비율’로 바라보는 단순함에 놀랐지만 그래도 약간이라도 그럴 듯한 설명을 해준 게 어딘가 싶다. 마찬가지로 그의 책 어디에서도 30퍼센트에 대한 설명은 나오지 않는다. 답답하다.
셋째 원인과 결과가 뒤바뀐 경우다.
설령 그들의 주장이 백번 옳아 체온이 떨어지면 면역이 떨어진다고 해도 체온저하가 정말 면역저하의 원인인지는 따져봐야 한다. 단순히 통계적 연관성에 불과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즉 원래 질병이 있거나 몸이 안 좋으면 체온이 떨어질 수 있다. 체온저하는 몸이 안 좋거나 질병이 있어서 나타난 하나의 결과일 뿐인데 겉으로 보기에 몸이 좋지 않게 된 혹은 면역이 떨어진 원인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들이 내놓는 대책이다. 체온을 올리기 위해 운동해서 근육을 키우라고 말한다. 여기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근육을 키우는 운동이 면역을 포함한 우리 건강에 도움될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설명하는 과정이 틀렸다. 엉뚱하게 체온을 끌어들여선 안 된다는 것이다.
체온은 대뇌 깊숙이 위치한 시상하부가 관장한다. 항상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는 게 정상이다. 나의 의지나 노력으로 끌어올릴 수 없다. 인간은 항온동물임을 기억해야한다. 체온은 올라가는 것도 내려가는 것도 둘다 바람직하지 않다.
서적뿐 아니라 이와 관련한 국내언론의 보도도 문제가 많다. 메르스 환자가 체온이 낮았다는 기사는 어이가 없다. 어떤 연구기관에서 어떤 방법으로 몇 명을 대상으로 측정했더니 결과가 어떠했다는 기본적인 팩트도 나와 있지 않다. 그냥 ‘익명의 누가 그러더라’라고만 기술하고 있다.
폐암 환자 완치사례에 대한 기사도 단지 한 사람의 케이스만으로 전체 폐암으로 일반화하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암세포가 35도에서 가장 잘 자란다는 이야기도 금시초문이다. 전 세계 유력 학술잡지의 논문들을 모조리 뒤져도 그런 주장은 나오지 않는다.
설령 그렇다 해도 시험관 실험에서의 결과일 뿐이다. 암환자를 포함한 보통 사람들의 몸에서 35도란 체온은 추운 환경에 오래 노출되어 저체온증이 시작되지 않는 한 있을 수 없다.
체온면역설은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일본 건강서적의 무분별한 수용이 불러온 해프닝의 하나다. 사람들은 운동하고 금연하라는 뻔한 이야기에 식상하다. 그러다보니 이색적인 주장에 솔깃해질 수밖에 없다. 가끔 이를 부추기는 전문가들이 있다. 박사나 의사, 대학교수 가운데 이러한 주장을 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근거주의에 입각해야 하며 근거가 없다면 의학적 개연성에서만이라도 보편타당하게 납득되는 설명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아울러 언론도 건강 관련 보도에서 흥미 위주에서 벗어나 신중하고 객관적일 태도를 지녀야 할 것이다.
장홍
레드 와인을 즐기는 사람들은 우선 다양하고 현란한 붉은색에 매료된다.
다음으로 코를 잔으로 가져가면 다채로운 향의 정원을 만난다. 그리고 한모금 입에 머금어 혀의 여러 부위로 와인을 굴리면서 단맛, 신맛, 쓴맛 등을 음미하다가 조심스럽게 삼킨다. 그런데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는 이 한 잔의 와인은 수백 종류의 화학성분이 함유된, 그야말로 실험실이다. 포도 속에 함유된 당분이 박테리아와 효모의 작용으로 알코올, 보다 정확히는 에탄올로 전이되는 과정이 발효라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리고 주조와 숙성 과정을 통해 와인은 여러 종류의 산(acids)과 향을 얻게 된다.
이뿐만 아니라 포도 속에는-특히 껍질과 씨 속에는-중요한 몰레큘라(분자)들이 포함돼 있으며, 이들은 알코올에 의해 조금씩 축출돼 와인 속에 녹아든다. 그중에서도 페놀 그룹인 폴리페놀은 최소한 500여 종에 달하며, 각자의 화학적 구조에 따라 소중한 기능을 지니고 있는데 바로 나쁜 콜레스테롤의 형성을 막는 황산화 성분이다. 그리고 이 황산화 성분이 심장 혈관 계통의 질병을 예방한다는 유명한 프렌치 패러독스의 기원이기도 하다. 게다가 알츠하이머와 같은 뇌신경 질환, 비만, 암 등의 예방에도 효력이 있다고 주장하는 연구 결과도 나오고 있다. 물론 논쟁의 여지는 있지만.
두 그룹의 폴리페놀
와인 속에는 크게 두 그룹의 폴리페놀이 함유되어 있다. 플라보노이드(flavonoides)와 비-플라보노이드(non-falvonoides)가 그것이다. 클레르몽-페랑(Clermont-Ferrand) 국립농산물연구소(Inra)의 오귀스탱 스칼베르(Augustin Scalbert) 박사는 여러 음식물에 포함된 폴리페놀의 양을 측정하는 새로운 연구 분야의 개척자다. 그는 450종에 달하는 식재료에 함유된 500가지 폴리페놀에 대한 분석 결과를 내놓았다. 이 연구 결과에 따르면 레드 와인은 화이트나 로제에 비해 10배 이상의 폴리페놀을 함유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폴리페놀 중에서도 플라보노이드 타입의 폴리페놀이 레드 와인에 다량 함유된 것으로 밝혀졌으며, 비-플라보노이드는 소량 검출되었다. 비-플라보노이드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졌으며, 와인의 핵심적 질병 예방 요소로 지명되었던 레스베라트롤(resveratrol)은 3.42㎎/100㎖ 정도로 지극히 소량이었다.
하지만 현재는 와인에 함유된 폴리페놀 중에서 어떤 것이 진정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 런던의 퀸 메리 의대(Queen Mary’s School of Medicine and Dentistry)의 교수인 로저 코더(Roger Corder)는 여러 연구 결과를 증거로 제시하면서 프로시아니딘(procyanidines)이 건강에 핵심적 요소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프로시아니딘은 다른 폴리페놀에 비해 항산화성과 혈관 확장에 있어서 보다 우수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특히 레드 와인에는 프로시아니딘의 함유량이 레스베라트롤보다 거의 1000배나 많다고 한다.
페놀-익스플로러(Phenol-Explorer)에 관한 또 다른 주요 정보도 밝혀지고 있다. 와인을 제외한 다른 알코올 음료(위스키, 럼, 맥주 등)에는 폴리페놀이 거의 함유되지 않은 반면 다른 식재료에는 레드 와인만큼, 혹은 그 이상의 폴리페놀이 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레드 와인에는 100㎖당 107㎎의 폴리페놀이 들어 있는 반면 맥주에는 3.28㎎, 위스키에는 1.25g, 럼에는 고작 0.43㎎이 들어 있을 뿐이다. 같은 와인이라도 로제에는 10㎎, 그리고 화이트와 샹파뉴에는 10.4㎎의 폴리페놀이 함유돼 있다. 그리고 포도주스에는 100㎖당 단지 1㎎만이 들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커피에는 214㎎, 녹차에는 89㎎ 그리고 초콜릿에는 무려 216㎎이나 들어 있다. 단지 폴리페놀 측면에서만 본다면 커피나 초콜릿 한 잔이 보르도나 부르고뉴 와인을 한 잔 하는 것보다 훨씬 효용성이 뛰어나다.
광범위한 역학(epidemiology: 생활양식, 사회 환경 따위가 질병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의학 분야)을 통해 프랑스인들이 폴리페놀을 섭취하는 근원에 대한 연구를 실시한 세르주 에르베르그(Serge Hercberg) 박사에 따르면, 커피가 36.9%로 가장 앞서고, 다음으로 33.6%의 녹차나 다른 차, 그리고 10.4%의 초콜릿이 뒤를 잇는다. 레드 와인은 7.2%로 네 번째에 위치하고 있으며, 과일(6.7%)이 그 다음으로 밝혀졌다. 이쯤 되면 육류를 먹을 때 녹차를 곁들이는 것이 바람직할지도 모를 일이다.
문제는 모든 알코올 음료와 마찬가지로 와인 속에 함유된 에탄올이다. 에탄올은 미세한 몰레큘라로 수용성이고 특히 알코올에 잘 혼합되며, 모든 세포에 침투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술을 마시고 몇 분 내에 뇌를 비롯한 인체의 모든 기관에 퍼져나가며, 섭취한 양에 따라 효과가 다르게 나타난다. 술을 마시면 처음에는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혈압이 오르지만 많이 취하면 반대 현상이 일어난다.
현대 의학은 알코올이 뇌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증명했다. 미국 메릴랜드(Maryland) 주 베데스다(Bethesda) 연구소가 2006년 20명의 자원자를 대상으로 행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극소량의 알코올 섭취도 뇌 속 글루코오스의 신진대사를 감소시킨다고 한다. 매사추세츠(Massachusetts)의 웰즐리 대학(Wellesley College)이 1839명을 대상으로 2008년에 실시한 연구 결과는 우리를 더욱 걱정스럽게 한다. 이에 따르면 알코올 섭취량과 뇌의 크기(volum) 사이에 상관관계가 존재한다. 즉 알코올 섭취량이 많으면 많을수록 뇌의 크기는 반대로 줄어든다는 것이다. 뇌의 일부 지역은 무려 20%나 감소한다고 한다. 그리고 특히 뇌가 성숙 단계에 있는 청소년기에 알코올을 섭취하면 그 악영향은 엄청나다고 한다. 프랑스의 한 국립연구소(Inserm)에 근무하는 미카엘 나실라(Mickael Nassila) 박사에 의하면 청소년이 알코올을 섭취할 경우 성인의 경우보다 뉴런(신경단위)이 2.5배나 많이 죽는다고 한다.
아, 불행한 와인이여! 에탄올을 함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와인은 여느 다른 알코올과 다를 바가 없다. 과다한 알코올 섭취는 암, 간경화는 물론 뇌에도 나쁜 영향을 주는 만병의 근원이다. 게다가 와인의 도수도 최근 들어서 조금씩 높아지는 경향이 있다. 당장이라도 금주법을 다시 시행해야 할지도 모른다. 금주만이 유일한 미덕일지도 모른다.
아, 행복한 와인이여! 다른 알코올 음료에는 없는 다양한, 그리고 다량의 폴리페놀을 함유한 와인이여! 하여 여느 알코올 음료와는 다른 와인이여! 폴리페놀은 그 명칭이 시사하듯 수많은 종류가 있다. 어떤 종류가 어떤 질병의 예방에 유용한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지만, 폴리페놀의 항산화 효과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심장 혈관 계통의 질병과 알츠하이머 예방 효과 그리고 심지어는 다이어트에도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와인!
영원한 형제이자 적인 폴리페놀과 에탄올을 모두 함유한 와인은 분명 두 얼굴을 지닌 야누스의 모습을 하고 있다. 프랑스 샹송의 가사처럼 결국 현명한 사람만이 와인을 제대로 즐길 수 있나 보다.
△ 장 홍
성균관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에서 국제관계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프랑스 알자르 소믈리에협회 준회원이며, 등 다수의 저서를 펴냈다. 사회학적 측면에서 살펴본 와인, 인류역사 속 와인의 의미와 파워, 예술 인문학을 통해 본 와인 등에 대해 강의도 진행하고 있다.
얼마 전, 필자는 지난 50년간 패션계에서 가장 큰 변화가 무엇인지를 해외의 한 패션 디자이너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아마 ‘미니스커트’가 아닐까 생각하면서. 그런데 예상 외의 답이 돌아왔다. “블루진(blue jeans).”
의상 패션은 예로부터 왕족이나 귀족사회, 즉 상류사회를 상징하는 점유물처럼 자리매김해왔고 어떤 의미에서 지금도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고 했다.
블루진은 모두가 알고 있듯이 미국 서부 개발기 광산촌 광부들의 작업복에서 시작해 카우보이(cowboy)를 상징하는 의복으로 진화하더니 한국전쟁 때 미국 해군 사병들 군복의 일부로 우리 생활권에 들어왔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우리 거리를 청바지 패션이 ‘장악’하고 말았다는 사실에 동의할 수밖에 없을 정도다(사진 자료 참고). 거리는 물론 지하철, 심지어 사무실에서조차 볼 수 있는 의상의 절대 다수를 청바지류가 점령했다는 사실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거리 패션(street fashion)’이라는 표현을 실감한다.
그런데 그 패션 디자이너의 ‘청바지의 사회학적 해석’이 관심을 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고급의상 패션에는 사회 계층 간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 있는 반면, 블루진 패션인 경우 그 경계선이 없다는 것이다. 사회 각층의 사람이 모두 진 패션을 즐긴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거리 패션이 상류사회까지 침투했다는 것에 사회학적 의미를 부여한다.
‘거리 패션’ 하면 ‘거리 예술(street art)’이 떠오른다.
거리 예술 또는 거리 미술 하면 장미셸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 1960~1988)의 ‘그라피티(Graffiti)’로 이어진다. 바스키아는 뉴욕 거리, 특히 전철역 내 또는 전철 차체에 낙서 수준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유명해졌다.
허락되지 않은 공적 공간에 숨어서 빠르게 낙서를 하려니 일반 화구(畵具)로는 소요 시간 때문에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 대안으로 건축·공업용 스프레이 안료(spray-paint)가 등장했는데, 목적에 잘 부합하는 화구였다.
이렇게 ‘불법’, ‘공공장소(public place)’ 그리고 ‘낙서’라는 공통분모를 가진 예술이 1970년대에 ‘Graffiti’라 불리며 활기를 띠기 시작했는데 이제 세계적 대도시 파리, 뉴욕, 런던의 거리, 특히 시외 특정 지역을 상징하는 표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그 트렌드는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
그런데 얼마 전 파리에 위치한 피나코텍 미술관(Pinacotheque de Paris)에서 개최한 ‘Graffiti 특별전’을 보며 거리 미술이 이제 ‘실내 공간’으로 들어왔다는 시대적 변화를 경험하며 Jean 패션의 사회적 연결고리를 보았다.
그렇다. ‘거리 패션’, ‘거리 미술’에는 이 시대의 시민 정신이 깃들어 있다. 그 공통분모를 보며 유럽 사회에서 국민(英 Folk, 獨 Volk)이라는 표현에 왜 시민(英 Citizen, 獨 Burger)이 대체해나가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 이성낙 현대미술관회 회장
독일 뮌헨의대 졸업(1966), 연세대의대 피부과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가천의과대학교 총장, 가천의과학대학교 명예총장(현), 한국의약평론가회 회장(현), 간송미술재단 이사(현)
지난 여름 파리 피카소 미술관에서 작품을 감상하다가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가 1951년에 그렸다는 과 다시 만났다. 순간 20세기 거장의 작품을 보며 왠지 씁쓸한 기분을 숨길 수 없었다. 필자의 국적 때문은 아니었다. 이념의 덫에 걸린 예술 문화 작품을 다시 보는 듯했기 때문이다.
수년 전 원로 서양화가 김병기(金秉騏, 1916~) 선생이 국내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전쟁 중 피카소의 한 작품을 보고서 피카소와 굿바이했지”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아마 1951년 피카소가 한국전쟁에 대해 편향되게 작업한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피카소는 왜 그런 그림을 그렸을까?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안 되는 시점. 1945년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구성한 연합군의 승전 열기가 점차 식어가면서 확장 일로에 있던 공산주의 세력과 이를 견제·경계하던 자본주의 세력이 본심을 드러내면서 한국전쟁이 발발했다고 독일 사회는 믿었다. 그래서 독일에서는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가정마다 한반도 지도를 펼쳐놓고 언제 대전 전선이 무너지고, 또 언제 대구 전선이 무너질지 가슴 졸이며 뉴스에 귀 기울였을 정도라고 한다. 당시 독일인은 한국전쟁이 끝나면 소련이 그다음에는 서독으로 총구를 겨눌 거라고 믿었다.
반면, 프랑스의 사정은 사뭇 달랐다. 공산주의 이념이 비교적 보편화된 프랑스 지식인에게는 한국전쟁이 아주 큰 충격이었다.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이 반인륜적 전쟁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 소련 공산당 기관지 가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며칠 지나서야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났으며, 북침으로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보도하자(주: 전쟁관련 뉴스는 자고로 긴급히 보도되는 것이 상식인데도 말이다) 당시 장 콕토(Jean Cocteau, 1889~1963),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1980), 파블로 피카소 같은 파리지앵들은 안도의 숨을 쉬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된 가운데 피카소는 한국전쟁이 북침으로 시작되었다고 단정하고 이란 그림을 그리기에 이르렀다. 그의 이 그림에는 연약한 노약자, 어린아이, 임신부를 무참히 살해하는 미 제국주의 군인을 부각하는 총대만 보인다. 작품 구도는 프랑스 점령군이 마드리드에서 양민을 학살하는 행태를 고발한 스페인의 낭만주의 화가 고야(Francisco de Goya, 1746~1828)의 을 패러디한 것이 분명한 듯싶다.
이 비록 피카소 작품이긴 하지만, 미술관에서도 작품성을 크게 평가하지 않아서인지 상대적으로 구석진 곳에 걸려 있는 듯하다.
필자는 을 보며 어느 예술 문화 작품도 결코 편향된 이념에 휘말려서는 안 된다는 교훈과 함께 모든 작가는 언제나 이데올로기와 편견을 멀리해야 한다는 강한 메시지를 다시 한 번 되새긴다.
>> 이성낙 현대미술관회 회장
독일 뮌헨의대 졸업(1966), 연세대의대 피부과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가천의과대학교 총장, 가천의과학대학교 명예총장(현), 한국의약평론가회 회장(현), 간송미술재단 이사(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