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낙의 그림이야기] 피카소의 작품도 이념에 휩싸이면

기사입력 2015-12-29 17:52 기사수정 2015-12-29 17:52

▲피카소 ‘한국에서의 학살’(좌), 고야 ‘1808년 5월 3일’(우)
▲피카소 ‘한국에서의 학살’(좌), 고야 ‘1808년 5월 3일’(우)
지난 여름 파리 피카소 미술관에서 작품을 감상하다가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가 1951년에 그렸다는 <한국에서의 학살(Massacre en Cor)>과 다시 만났다. 순간 20세기 거장의 작품을 보며 왠지 씁쓸한 기분을 숨길 수 없었다. 필자의 국적 때문은 아니었다. 이념의 덫에 걸린 예술 문화 작품을 다시 보는 듯했기 때문이다.

수년 전 원로 서양화가 김병기(金秉騏, 1916~) 선생이 국내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전쟁 중 피카소의 한 작품을 보고서 피카소와 굿바이했지”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아마 1951년 피카소가 한국전쟁에 대해 편향되게 작업한 <한국에서의 학살>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피카소는 왜 그런 그림을 그렸을까?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안 되는 시점. 1945년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구성한 연합군의 승전 열기가 점차 식어가면서 확장 일로에 있던 공산주의 세력과 이를 견제·경계하던 자본주의 세력이 본심을 드러내면서 한국전쟁이 발발했다고 독일 사회는 믿었다. 그래서 독일에서는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가정마다 한반도 지도를 펼쳐놓고 언제 대전 전선이 무너지고, 또 언제 대구 전선이 무너질지 가슴 졸이며 뉴스에 귀 기울였을 정도라고 한다. 당시 독일인은 한국전쟁이 끝나면 소련이 그다음에는 서독으로 총구를 겨눌 거라고 믿었다.

반면, 프랑스의 사정은 사뭇 달랐다. 공산주의 이념이 비교적 보편화된 프랑스 지식인에게는 한국전쟁이 아주 큰 충격이었다.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이 반인륜적 전쟁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 소련 공산당 기관지 <프라브다(Pravda)>가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며칠 지나서야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났으며, 북침으로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보도하자(주: 전쟁관련 뉴스는 자고로 긴급히 보도되는 것이 상식인데도 말이다) 당시 장 콕토(Jean Cocteau, 1889~1963),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1980), 파블로 피카소 같은 파리지앵들은 안도의 숨을 쉬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된 가운데 피카소는 한국전쟁이 북침으로 시작되었다고 단정하고 <한국에서의 학살>이란 그림을 그리기에 이르렀다. 그의 이 그림에는 연약한 노약자, 어린아이, 임신부를 무참히 살해하는 미 제국주의 군인을 부각하는 총대만 보인다. 작품 구도는 프랑스 점령군이 마드리드에서 양민을 학살하는 행태를 고발한 스페인의 낭만주의 화가 고야(Francisco de Goya, 1746~1828)의 <1808년 5월 3일(The Third of May, 1804)>을 패러디한 것이 분명한 듯싶다.

<한국에서의 학살>이 비록 피카소 작품이긴 하지만, 미술관에서도 작품성을 크게 평가하지 않아서인지 상대적으로 구석진 곳에 걸려 있는 듯하다.

필자는 <한국에서의 학살>을 보며 어느 예술 문화 작품도 결코 편향된 이념에 휘말려서는 안 된다는 교훈과 함께 모든 작가는 언제나 이데올로기와 편견을 멀리해야 한다는 강한 메시지를 다시 한 번 되새긴다.

>> 이성낙 현대미술관회 회장

독일 뮌헨의대 졸업(1966), 연세대의대 피부과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가천의과대학교 총장, 가천의과학대학교 명예총장(현), 한국의약평론가회 회장(현), 간송미술재단 이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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