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52년 경남 합천군 초계면의 한 시골 마을 방앗간 집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우리 집은 아들만 여섯인 아들 부자 집이다. 원래 어머니는 아들만 일곱을 나으셨는데 첫 째는 돌도 못 넘기고 잃었다고 한다. 그 후 집안의 귀한 첫 아들로 태어난 나는 태어난 후 사흘 동안 눈을 뜨지 않아 부모님의 애를 태웠고, 어릴 때 비행기만 떠도 놀라서 경기가 드는 아이였다고 한다.
우리형제들은 모두 호적 나이가 실제 나이보다 일 년 씩 어리게 되어있다. 돌까지 살아남으면 호적에 올려주었다. 아마 첫째를 돌전에 잃었기 때문인 듯하다. 이 덕분에 나는 퇴직 시 명퇴금을 1년 치나 더 받을 수 있었다.
어머님과 아버님은 고향 마을에서 한집 사이를 두고 결혼을 하셨는데 그 중간 집에 사시는 분이 중매를 하셨다고 한다. 우리 부모님은 동네에서 잉꼬부부로 소문난 금슬이 좋으신 분이셨다. 아버님은 엄격하시고 강직한 분이셨다. 반면 어머님은 따뜻하고 정이 많으신 분이셨다. 아들들을 한없이 칭찬하고 격려하시고 보듬어 주신분이다. 우리 형제들은 우리집안의 유일한 여자 분인 어머님을 무척 좋아했다. 지금도 우리 형제들은 돌아가신 지가 15년이 지났지만 모이면 어머니 애기를 자주하고 다섯째는 대기업의 임원이지만 술 한 잔 되면 보고 싶다고 울곤 한다.
할아버지의 손자 사랑은 지극하셨다. 손자들이 많았기에 우리는 돌만 지나면 사랑방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잤다. 할아버지는 손자들 이불을 덮어주시고 음식도 챙겨주셨다. 손자들에 대한 자랑과 자부심이 대단하셨다. 친구 분들이 오실 때면 언제나 불러 인사를 시키셨다. 우리형제들은 그 당시 초등학교에서 형제들 모두가 급장을 다 하던 때라 자랑이 대단하셨다. 내가 나중에 취직이 되어 첫 월급을 새 돈으로 할아버지께 용돈을 드렸는데 돌아가실 때까지 그 돈을 보관하고 계셨던 분이다.
우리 할머니는 연약하신 분이지만 우리 형제들은 모두 할머니 등에 업혀 자랐다. 낳아주신 분은 어머니이고 키워주신 분은 할머니이다. 할머니 등은 손자들의 코 때가 지워지는 날이 없었다. 서울에서 방학 때 내려가면 맨발로 뛰어 나오시던 분이다. 나는 첫 손자로서 조부모님의 사랑을 한없이 받고 자랐다.
우리 집의 가훈은 우애(友愛)이다. 할아버지는 손자들에게 어릴 때 귀가 닿도록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하셨다. ‘조선팔도 다 다녀도 형제같이 화합할까’ 할아버지께서 항상 우리에게 하시던 말씀이다. 우리 형제들은 이 말씀을 어머님 돌아가신 15주기 때 고향 우리 집 정원에 비석으로 새겼다.
나는 초등학교에서 모범생 이었다. 한 학년에 두 반인 작은 시골 학교였지만 나는 입학해서 졸업할 때까지 6년간 급장을 했고 선생님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부모님도 아들을 자랑스러워했다. 소먹이기, 풀베기, 나무하기 등 집안일도 잘 도와드렸고 어머니가 가지 오이 등을 장에 갖다 팔아야 할 때는 리어카에 실어다 드리는 착한 아들이었다.
나는 1968년 무장공비 김신조가 청와대 담을 넘어 공격하던 해 서울 경기상업고등학교로 유학을 왔다. 경기상고는 시골에서 올라온 가난하지만 우수한 아이들이 많았다. 청운중학교와 같은 교정이어서 청운 중학교 출신도 많았다. 고향 초계중학교에서는 서울로 두 명이 유학을 왔는데, 친구는 배제고등학교를 가고 난 경기상고에 입학했다. 친구는 고모 집에서 다니고 나는 삼촌 집에서 다녔다. 그 후 세월이 흘러 나는 은행원이 되었고 친구는 고대의대를 나와 강릉의 유명한 외과의사가 되었다.
경기상고는 일제 강점기에는 경기도립상업고등학교로 도상이라 불렸던 학교로 일제 때부터 훌륭한 선배들이 많았다. 당시 정·재계에는 태완선 총리, 김종희 한국화약 회장님 등을 비롯한 분들이 포진해계셨고 특히 금융권에는 임원들이 많았다.
내가 경기상고를 선택한 것도 유연이다. 아버지와 서울에 올라와 어떤 학교를 가야할지 고심할 때 삼촌 이웃에 양정고등학교 선생님으로 퇴직한 분이 계셨는데, 이분이 도상을 추천해주셨다. 아버님은 대구상고를 나와 제일은행에 취직한 고향의 내 친구 형으로부터 ‘은행에 취직을 하니 당장 선생님의 월급보다 많더라’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아들을 은행에 취직시키고 싶어 하셨다. 양정고 퇴직 선생님은 상고 중에는 도상이 최고라며 당장 도상을 추천해 연희동에서 청운동까지 버스를 갈아타면서 먼 길을 삼년을 다녔다.
상고에서 은행에 취직하는 것은 인문계학교에서 대학에 진학하는 것과 같았다. 매년 어느 은행에 몇 명이 합격했는지 통계를 내고 홍보하던 때였다. 우리학교는 한 학년이 7개 반으로 6개 반이 취직반이고 마지막 7반이 진학 반이었다. 취업반은 은행 취직을 위한 전략을 세워 공부했다. 가장 공부 잘하는 학생은 한국은행, 산업은행, 외환은행 순으로 가고 다음 조흥, 상업, 제일, 한일, 서울은행 등을 갔다. 나는 신설된 한국신탁은행을 지원 했다. 신설된 은행이 향후 전망이 나을 거라고 선생님이 추천해 주셨다. 그해 경쟁률이 높아 우리학교에서는 나를 포함해 두 명 만이 합격했다. 대졸 중견 30명, 상고 졸 초급 60명을 모집했는데, 대졸 중견은 서울 대 출신이 반이 넘고, 나머지는 연대, 고대 등 대부분 명문대 출신이 전부였다. 71년 당시는 지금처럼 삼성, 현대, 엘지 같은 대기업이 성장하기 이전 이어서 공무원, 한전, 은행 등으로 인재들이 몰리던 시기였다.
그 당시 은행의 대우는 좋았다. 복지제도가 좋고 각종 수당이 수시로 나왔다. 그러나 입행을 하고나니 아무래도 대학을 가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건국대학교 경영학과 야간 학부에 시험을 봐 합격했다. 그러나 말단 직원이 대학 수업시간에 맞추는 것이 어려워 포기하고 다시 이듬해 야간 전문대학인 서대문에 위치한 국제대학을 지원 해 입학했다. 이 학교는 야간만 있는 대학으로 저녁 6시에 수업을 시작해 그 당시 인기가 있었다. 나는 경영학과에 입학했는데 정원이 30명으로 우수한 인재가 많았다. 한국은행, 산업은행 등 상고출신이 많았다. 적은 인원의 대학이지만 그 당시 매년 사법, 행정고시, 공인 회계사 등의 합격자들을 배출했던 시기이다. 내 친구도 산업은행에 다니면서 공인회계사 전국 수석 합격했다.
그때는 그야 말로 주경야독을 했던 시기이다. 은행의 업무는 최대한 빨리 끝내고 대학 수업시간에 맞추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동료들의 도움을 많이 받아야만 했다. 상사들의 눈치도 봐야 했다. 저녁은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라면으로 때우기가 일수였다. 4년을 그렇게 생활하니 위장병이 생길 것 같았다. 토요일도 근무하던 때라 일요일은 도서관에서 공부해야했다. 그래서 나의 이 시기는 다른 애들처럼 취미생활을 하거나 연애를 할 틈이 없었다.
그 당시 나에게는 큰 짐이 있었다. 둘째 동생이 서울로 올라와 중대 앞에서 자취를 하면서 같이 공부했다. 얼마 후에는 막내를 제외한 세 명의 동생들이 모두 서울로 올라와 동생들과 힘든 시기를 보냈다. 아버지는 학비와 쌀을 올려 보내주시지만 아들들이 공부하기엔 턱없이 부족하기에 나는 힘을 보텔 수밖에 없었다. 나는 75년 2월에 대학을 졸업하고 그해 12월에 군에 입대를 했다. 나 혼자 만의 일이라면 대학 2학년 정도 마치고 군대를 다녀오는 것이 좋겠지만 동생들을 남겨놓고 입대할 수가 없어 4학년을 마치고 친구들이 다 제대를 할 즈음 입대를 해야만 했다. 내가 입대를 해도 은행은 본봉의 월급이 나오는 때라 그 돈으로 동생들은 학교를 다녔다. 지금도 이야기 한다. 동생들이 형의 월급을 받으려 은행에 갔던 시절을…
둘째 동생은 중앙대 법대에 나왔다. 졸업 후 삼성생명에 입사해 항상 전국에서 일등의 업적을 내는 유능한 직원이 되었다. 신한생명 초기에 스카우트되어 신한그룹 최연소 임원이 되어 부사장 까지 승진해 8년이나 임원생활을 하고 지금도 퇴직해서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그 때 동양중학교 학생으로 다니던 다섯째 동생은 한양대 경영학과를 나와 지금은 롯데 칠성의 임원으로 재직 중이다. 필리핀 펩시콜라 사장을 5년 동안 역임했고 우리 동생 중 아직도 떠오르는 별이다. 나머지 두 동생도 대구에서 사업을 잘하고 있다. 힘든 시기를 넘겨 좋은 결과가 있어 보람은 있는 일이었다.
79년 제대를 앞두고 아버지의 권유로 첫선을 보았다. 휴가 중 서울의 작은 다방에서 맞선을 보았는데 단 한 번의 만남으로 결혼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그렇게 쉽게 평생의 배필을 선택 했는지 신기하다. 서로의 가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고, 부모님께서 미리 선을 봐 합격점을 준 상태라 하지만 개인적으로 서로에 대해 전혀 알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아내는 면장님의 둘째 딸이라 자라면서 큰 힘든 일은 해본 적 없이 곱게 자란 규수였다. 그 당시 나는 장남으로서 결혼 후에도 동생들을 데리고 있어야 할 형편이어서 아내를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대학에서 나를 따르는 여자도 있었고, 은행에서 자취집에까지 찾아온 여자도 있었지만 결혼을 쉽게 결정할 수는 없었다.
79년 6월 제대를 하고 11월에 결혼을 했다. 아버지는 내가 장남이라 전통혼례식을 올리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신부 집에서 아내는 족두리를 쓰고, 난 사모관대를 쓰고 혼례를 올렸다. 동네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멍석을 펴놓고 상위에는 살아있는 닭이 퍼덕 거렸다. 첫날밤은 신부 집에서 보내기로 하는데, 그 날 밤 신랑을 짓궂게 장난을 거는 사람 들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어 나와 아내는 저녁에 해인사로 피신하는 신혼여행을 떠났다. 밤중에 택시를 타고 해인사로 향하던 신혼 여행길에 노루가 튀어 나와 놀라던 추억이 새롭다.
내가 아내를 단한번의 선을 보고 선택한 것은 일종의 모험이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 보니 내 일생의 가장 잘 한 선택이었다. 아내는 검소하고 강하고 현명한 사람이었다. 지금 형제들이 성공하여 화목하게 잘 지내는 것은 대부분 아내의 공로인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후회스런 일을 꼽으라면 신혼초기 아내가 힘들 때 너무 도와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동생들 뒷바라지에 아이들 키우기 힘들 때 연탄불 한번 갈아준 적이 없고, 아이들 한번 제대로 봐준 적이 없다. 아내는 밤중에 아이가 깨어 울면 남편 잠 못 자 직장생활에 지장을 줄 까봐 아이를 다른 방으로 대려나가 밤새 혼자 방을 새우곤 했다. 아내는 그렇게 자신을 희생하고 오직 나를 위해 정성을 쏟은 그런 여자였다. 그 당시에는 왜 그리 철이 없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은행에 입행해 퇴직을 하기까지 만 38년을 다녔다. 지나고 보니 나는 직장 운은 좋았고 축복을 받은 사람이었다. 은행이란 직장은 안정되고 복지가 훌륭하고 좋은 직장이었다. 아이들 대학까지 등록금을 주고 집을 마련하도록 사원주택 아파트를 주고, 월급날 하루도 늦은 적이 없고 지점장 시절 억대가 넘는 연봉에 퇴직금도 적지 않은 직장이다. 재직 시에도 지점장 명함이면 누구나 신뢰하고 인정을 해주는 곳이다.
나는 초년 시절부터 성실했고 열심히 노력했다. 언제나 상사의 인정을 받았고 지점에서 언제나 대부계 같은 요직을 담당했다. 자기계발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주경야독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88년에는 해외 OJT연수를 미국 시애틀 은행으로 다녀왔다. 그 후 은행의 중요 부서인 종합기획부에 과장으로 근무하고, 카드 사업부, 개인금융부 등에서 차장으로 근무했다. 1998년 지점장으로 나갈 때 까지 황금기의 시절을 보냈다.
카드사업부에 근무할 때는 해외여행의 기회가 많았다. 일본 JCB카드사, 미국 비자사, 마스터 카드사, 유럽 유로페이 등 카드사를 매년 연수를 다니면서 여행할 수 있었다. 특히 시애틀 연수 후 미주, 유럽, 하와이, 동남아, 핀란드, 스페인, 지중해 해협 등 유럽 전역을 장기간 여행한 경험은 좋은 기회였다.
은행 승진도 남보다 늦지 않게 진급했다. 지점장 진급은 아이러니컬하게도 IMF 덕분에 빨랐다. 선배들이 명퇴를 하고 서울은행, 제일은 행이 매스컴에서 회자될 때 오히려 해택을 보았던 셈이다. 하나은행과의 합병 시에도 많은 직원이 퇴직을 했지만 그때도 살아남아 십년이 넘도록 지점장 생활을 하고 임금피크제 까지 일 년을 하고 퇴직할 수 있었다. 당시의 상황으로는 은행원의 천수를 다한 셈이다.
지점장 생활은 10년 동안 시흥남, 관양동, 수원, 서빙고, 부천, 성남 등 6개 점포를 거쳤다. 그러나 가장 기억에 남는 점포는 처음으로 부임한 석수역 앞에 위치한 시흥남지점 이다. 첫 지점장 발령을 받고 휴일 혼자 점포를 찾아가 어떤 전략을 구사할 것인가 많이 고심을 했던 기억이 새롭다. 아내는 많은 걱정을 했다. 사교성도 없는 고지식한 사람이 점포영업을 잘 할 수 있을 까 걱정을 많이 해, 지점장으로 승진을 했는데도 그렇게 좋아하지 않은 듯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지점 실적이 부진하여 평가에 하위 성적을 받으면 명퇴의 우선대상자가 되어 퇴사해야 할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내의 예상외로 난 지점장으로서의 점포경영을 십년이상 훌륭히 잘 수행했다. 내가 부임한 점포는 전임 점포장이 실적 부진으로 불명예 퇴진한 곳이 많았지만 나는 훌륭히 점포를 잘 부활시켰다. 나는 점포 경영의 핵심은 직원들의 관리와 경영 전략에 있다고 믿는다. 점포장의 철학과 의사결정이 중요하다. 그 핵심은 사람의 관리에 있다고 확신한다.
2009년 1월 은행을 퇴직했다. 재직 시에 시간이 없어 못했던 골프를 학교친구들이나 동생들과 같이할 수 있어 좋았다. 5월에는 홀인원을 하는 행운도 누렸다.
양재천과 대공원을 몇 년을 걸으면서 나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퇴직 1년 전에 과천어울림 남성합창단에 입단했다. 매주 화요일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연습해서 매년 연말에 시민회관에서 정기공연을 한다. 벌써 정기 공연을 일곱 번을 넘겼다. 7년이 지난 셈이다. 단원이 30명이 넘어 지역사회에서 새로운 친구를 많이 알게 되었다. 플루트는 퇴직 후 시작해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다. 아들결혼식 때 연주하고 퇴직직원 모임 등에서도 연주했다. 지금은 동호회를 만들어 매주 목요일 부림동 문회센터에서 연습하고 레슨도 받는다.
퇴직 후 5년을 쉬고 나니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2014년 새로운 준비를 해보기로 결심을 했다. 자격증을 취득하고 공부를 시작하기로 했다. 유통관리사를 3개월 동안 과천도서관에 다니면서 공부해 합격을 했다. 그리고 경영지도사 공부를 시작해 지난해 1차 시험에 합격하고 2차 시험을 준비 중이다. 그리고 이듬해 3월 호서대글로벌창업대학원에 입학해 이제 졸업을 위해 논문 준비 중이다
2014년에는 건국대학교 미래지식교육원에서 시니어플래너 과정을 공부하고 같이 공부한 동료들 5명이 KSP교육협동조합을 만들고 나는 이사장직을 맡았다.
다음해는 도심권이모작센터의 열린강사에 선정되어 평생 처음 강사로서 강의를 3차례 해보았다.
2015년에는 KDB 시니어브리지 아카데미 과정을 공부하고 시니어블로거협회에 참여하게 되어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머니투데이 방송에 시니어 악기배우기라는 주제로 방송에도 출연했다. KBS 시니어토크쇼 ‘황금연못’의 패널로도 출연하고 한겨레신문 시니어통신에 기고도 했다. 2016년 3월에는 공무원연금공단 미래설계교육 여가 주거부문 강사로 선정되었다. 매달 2회 제주, 설악산, 수안보, 천안 등에서 퇴직을 앞둔 공무원들 대상으로 강의를 하고 있다.
대학원 동문들과는 석사 박사과정을 마친 24명의 동문들이 참여해 컨설팅프렌즈라는 컨설팅회사를 창업했다. 졸업을 하면 이 멤버들과 할 일이 많아질 것 같다.
퇴직 후 만 7년의 세월이 지났다. 앞으로 얼마나 시간이 남아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시간의 속도는 더 빨라지는 것 같다. 내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조금은 알 것 같고, 인생이란 직접 경험해보아야만 알게 되는 것이 많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지금부터는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가치 있는 일들을 하고 싶다. 아내와 내가 건강하고 아들과 딸은 독립하여 제 몫을 잘하고 있다. 손녀의 재롱이 귀엽고 한 때 어려웠던 시절을 보냈던 동생들과 할아버지의 가훈처럼 화목하게 지낸다. 이러한 가족 간의 사랑이 무엇보다 소중하다. 그리고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면서 주변의 사람들도 돌아보고 작은 재능이지만 나누는 삶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 것이라 믿는다.
‘기생충 박사’로 잘 알려진 서민(徐民·50) 단국대 의대 교수가 쓴 , 등을 보면 기생충이 꼭 나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기생충(寄生蟲)은 이름처럼 사람의 몸에 기생하는데 특별한 증상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 존재에 대해 느끼지 못한다. ‘죽음’ 역시 그러하다. 모든 인간은 죽음을 갖고 태어나지만, 막상 그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실감하기 어렵다. 사람에게 이로운 기생충도 있다던데, 과연 죽음도 그럴 수 있을까? 서민 교수가 추천하는 은 왠지 그 답을 줄 것만 같았다.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책 제목이 별로라고 생각해요.” 책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하자 서 교수는 제목이 마음에 안 든다고 했다. 뭔가 삶을 정리하고 죽음에 대한 심오한 이야기를 들려줄 것 같았는데 실제 내용은 뜻밖이라는 것이었다. 그의 말에 수긍이 갔다. 책을 읽어보면 엄숙하기보다는 의외로 꽤 재미있기 때문이다. 물론 죽음에 대해 생각해볼 만한 책인 것은 틀림없다. 조금 특별한 건 그것을 신경외과 의사의 시선으로 느끼게 된다는 점이다.
“저자가 영국의 유명한 신경외과 의사인데 자기 경험담을 글로 재미있게 잘 썼어요. 의사들은 어쨌든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갈등할 수밖에 없잖아요. 책을 보면 양쪽 전두엽이 파열된 한 환자를 두고 수술을 하되 평생 불구로 살 것인지, 오히려 평화로운 죽음을 맞게 할 것인지를 두고 딜레마에 빠지는 상황이 생기죠. 그때 저자의 심정이나 고민이 가장 와 닿았어요. 물론 나라면 당연히 수술을 안 하겠지만요.”
심장병을 앓던 서 교수의 아버지는 4시간 동안 수술을 받고는 허무하게도 이튿날 돌아가셨다. 꼭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지만, 만약 그런 상황이 온다면 그는 미련 없이 죽음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했다. 그런 서 교수가 책을 읽으며 가장 생각났던 사람은 지난해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친구였다.
“정말 친한 친구였는데 갑자기 살이 10kg 넘게 빠지길래 병원 한번 가보라 했더니 췌장암 말기 진단을 받았어요. 나야 의대를 나왔지만, 꼭 그렇지 않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암 말기에는 수술을 안 하는 것으로 생각하잖아요. 그런 걸 모를 친구도 아닌데 갑자기 희망적인 메시지나 기적적인 이야기에 집착하더니 결국 수술을 받았어요. 고등학생 딸이 시집가는 것을 꼭 보고 싶다면서요. 수술이 소용없다는 것을 알지만, 죽음 앞에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모습을 보니 차마 입이 안 떨어지더라고요. 걔는 자기가 그렇게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을 못 한 거죠. 결국 수술을 하고 항암제로 고통받다 세상을 떠난 그 친구를 보면서 나는 항상 죽음을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행복의 분모가 낮으면, 삶이 아름다워진다
서 교수가 말하는 ‘죽음 준비’란 언제 떠나도 괜찮다는 마음가짐에서 온다.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그의 말에서 삶에 대한 만족도가 드러났다. 아쉬운 것은 없는지, 더 하고 싶은 것은 없는지, 잃을까 봐 두려운 것은 없는지. 집요하게 물어봤지만 그의 대답은 모두 “없다”였다. 말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는 모습이나 태연한 표정에서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서 교수는 “행복의 기준이 아주 낮은 덕분”이라며 인생의 실수를 통해 깨달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저자는 의사이기 때문에 작은 실수에도 사람의 목숨이 오갈 만큼 치명적이죠. 제가 손이 여물지 못한 편이라 실험하면서 실수를 많이 했거든요. 그래 봐야 기생충 몇 마리 죽는 거지만, 내가 이 일과 안 맞는 사람인가 하고 괴롭기도 했어요. 나중에서야 깨달았는데 내가 손이 거칠면 섬세한 아이를 조교로 두면 되더라고요(웃음). 생각을 바꾸니 일에서의 실수는 어느 정도 만회가 됐죠. 하지만 내 인생의 가장 큰 실수는 나를 바꿔놓았어요.”
그는 인생에서 가장 치명적인 실수는 ‘첫 번째 결혼’이라고 한다. 6개월 만에 이혼 도장을 찍었지만 그야말로 ‘지옥’이었다고 표현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지금 ‘천국’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한다.
“1999년에 그 일을 겪고 결혼은 절대 안 한다며 8년을 버텼어요. 그 세월을 견디고 지금의 예쁜 아내를 만나 아주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죠. 아마 그런 실수가 없었다면 대충 아무나 만나서 결혼했을 거고, 지금처럼 즐겁지도 않았을 거예요. 모든 시련은 의미가 있더라고요. 그때 바닥을 치고 나니까 웬만한 일에는 우울하지 않았어요. 그때 이후 나머지 인생은 덤으로 사는 거라 생각하니 별거 아닌 것에도 감사하고 즐겁고 그래요. 저는 원하고 바라는 게 별로 없어요. 그러면 자연히 행복 분모(기준)가 낮아지고 가진 게 적어도 더 행복할 수 있죠.”
서 교수의 꿈은 ‘베스트셀러 작가’였다. 으로 그 꿈을 이뤘고, 아름다운 아내와도 행복하게 살고 있으니 이제는 정말로 바라는 게 없다고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10년 전부터 로또를 꾸준히 사고 있다고. 되면 좋고, 아니면 마는 것이지만 말이다.
‘참 괜찮은 죽음’이란 무엇인가
저자는 어머니의 임종을 보며 ‘괜찮은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한다. 그는 ‘고통이 없는 죽음. 순간적으로 소멸하는 죽음’을 원하면서도, 그렇지 않다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고운 말 한마디를 남기고 싶다고 썼다. “멋진 삶이었어. 우리는 할 일을 다 했어”라는 말과 함께 생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그의 어머니처럼. 서 교수가 생각하는 ‘괜찮은 죽음’은 무엇일까?
“치매 오고 이런 건 무섭잖아요. 굳이 죽는 방법을 따지자면 저자의 얘기처럼 순간적인 소멸이 좋겠죠. 근데 꼭 마지막에 어떤 말을 남기겠다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저는 죽기 전에 하지 말고 평상시 할 말은 다 해놔야 한다고 봐요. 작년에 죽은 친구처럼 언제 세상을 떠날지 모르니까요. 버킷리스트나 자서전 이런 것도 꼭 몇 살이 돼서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모든 게 어느 날 갑자기 할 수 있는 건 아니거든요.”
올해는 강의 스케줄을 줄이더라도 가능한 한 책을 많이 내고 싶다는 그는 중·장년 세대에게 글쓰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자신의 전문 분야나 살아온 인생에 대한 글을 쓰고 책을 남기는 것은 누군가에게 꿈을 심어줄 수 있는 소중한 일이기 때문이다.
“제가 기생충 책을 내고, 그걸 읽고 나서 이 일을 하겠다고 온 사람이 많았어요. 책을 보지 않았다면 누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요? 젊은 친구들에게 꿈을 물어보면 의사, 변호사, 과학자 뭐 이런 전형적인 몇 가지밖에 몰라요. 가령 소행성을 연구하는 사람이 쓴 책을 봤다면 그런 삶도 있다는 것을 알고 다양한 꿈을 가질 수 있겠죠. 그래서 앞서 산 사람들이 책을 써야 하는 거예요. 물론 내 경험을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글 쓰는 연습을 해야겠죠. 돈을 벌려고 내는 책이 아니니 화려한 문장도 필요 없어요. 조카에게 이야기하듯 내 삶이 누군가의 꿈이 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쓰는 게 중요해요.”
스트레스가 많은 한국인들은 마음 편하게 숙면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 그래서 잠을 잘 못자는 사람들에게 도움될 지혜와 지식을 모아본다.
◇안대
숙면을 위해 안대나 암막커튼은 유용하다. 심야팀으로 야근한 적이 있다. 그때 낮에 잠을 자라고 안대를 회사에서 나눠받았는데 연예인들이 암막커튼으로 대낮에도 깜깜한 밤처럼 만들어 숙면을 취하는 것처럼 숙면에 크게 도움되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음식
숙면에 도움되는 음식을 먹는 것도 좋다. 의학, 건강tv프로그램에 의사들이 수없이 언급해서 우리 모두 익숙한 수면조절기능이 있는 생화학물질인 세로토닌을 만들어낸다는 트립토판이 많이 들어간 식품이다. 일반적으로 많이 들었던 우유를 포함하여 멸치, 참깨, 바나나등의 식품을 먹고 자는 것은 숙면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특히 의사 이에스더님은 멸치를 더 강조한다.
특히 열대야에는 숙면슬러시를 만들어 마시면 좋다. 아예 잠 못 자는 저녁이 계속 되면 저녁식사를 이 재료가 주로 들어간 숙면전이나 숙면빈대떡,숙면반찬 종류로 준비하는 것 또한 매우 도움될 내용이라고 본다.
◇4.7.8호흡법
478호흡법도 도움이 된다. 작년 5월께부터 각종 포털사이트와 SNS에 대거 꾸준히 올라온 내용으로 하바드 의대 출신의 대체의학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인 앤드류 와일 박사가 개발하여 폭발적인 반응을 얻은 내용이다. 다음은 이 호흡법의 핵심 내용.
입을 다문 상태에서 코로 4초간 숨을 깊게 들이마신다.
깊이 들이마신 숨을 7초간 참는다.
참았던 숨을 8초간 서서히 내뱉는다.
이 4,7,8호흡과정을 2~3회 꾸준히 연습하면 숙면에 크게 도움 된다고 한다.
실제 이 호흡법을 해보면 상기되었던 상태가 이완되면서 소화에도 매우 도움되었고 숙면에도 실제로 도움되는 경험이 있기에 강조해도 될 것이다.
◇임신부의 경우
임산부 시절 잠이 안 올 때 효과를 봤던 가장 좋은 방법은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따뜻한 우유나 따뜻한 대추차와 감두탕(감초와 검은콩달인 물)마시고 나면 신기하게 잠이 잘 왔던 기억이 난다. 대추차는 정치인들이 그래서 편안한 정신 상태로 신경을 이완시켜주기에 많이 먹는다고 한다.
◇그밖의 팁
의사들은 잠 자기 전까지 TV나 스마트폰 등을 보는 것을 금하라고 권한다. 드라마나 예능이나 휴대전화에서 나눈 대화나 여러 가지 정보가 생각을 많이 하고 번민이 이어질 수 있어서 숙면에 방해된다는 것. 하지만 좋아하는 예능프로그램이 있다면 크게 웃기 때문에 오히려 잠을 잘 잔 기억이 많다.오히려 번뇌의 마음으로 뒤척이는 것보다 도움된 일상이었다.
한국이 출산율을 높이고자 최근 매년 10조 원 이상을 쓰는데도 출산율은 2015년 기준 1,24명으로 1.3명의 벽을 뚫지 못하고 있다. ‘1960년 합계 출산율(여성 1명이 평생 동안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자녀수) 6.0명→1990년 1.5명→2013년 1.22명→2015년 1.24명인 것이다. (2015.1.11.통계청‧‧보건복지부 잠정집계)
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이대로 가다간 2100년 인구는 지금의 절반인 2,468만으로 줄어들 것이란 예상이다. 심지어 2500년에는 중남미 소국인 바하마 인구수준인 33만 명 수준이 될 것이란 최악의 시나리오를 내놨다. 전문가들은 취업-결혼-첫 출산-둘째 출산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가 끊어졌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문제가 심각하다.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는 환경이 안 되는 것이다. 옛날에는 남편은 벌고 아내는 아이를 기르는 것이 보편화 되어 있었다. 아니면 할아버지 할머니가 함께 살면서 자녀를 봐주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혼자 벌어 집 장만하기가 요원하다. 둘이 죽자 하고 벌어야 집도 마련할 수 있다. 핵가족 시대가 된 요즘 아이만 덜컥 어른들에게 맡기기도 여의치 않다. 그나마 국공립 어린이집은 경쟁이 치열할 정도다.
아는 지인 중 한 사람이 의대를 나와 고향에 가서 산부인과를 개업하고 고향에 봉사하고자 했다. 그런데 몇 년 만에 접고 올라와야 했다. 아기를 받아본 것이 몇 명 안 된다는 것이다. ‘이래 가지고야 입에 풀칠하기도 어렵다.’라는 그의 말이다. 어느 TV에서는 일부 산부인과는 폐업하고 피부과를 개업하였다며 비싼 산부인과 기계가 먼지가 쌓인 채 덮여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시골 마을에 아기가 없다. 노인들만이 마을을 지키는 시골이 늘어난다. 그러다 보니 폐교도 늘어난다. 어린 학생들로 넘쳐나야 할 학교가 전교생 다 합쳐 4명이라는 뉴스를 보며 마음이 아프다. 그 학교도 6학년 두 명이 졸업하면 조만간 문을 닫을 것이라 한다.
출산에 따른 가족계획표어를 살펴보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1963년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 못 면한다’
1966년 ‘3명의 자녀를 3년 터울로 35세 이전에 단산하자’
1971년 ‘딸·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1980년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
1986년 ‘하나로 만족합니다. 우리는 외동딸’,
1990년 ‘엄마건강 아기 건강 적게 낳아 밝은 생활’ 등 이었다.
2004년 “아빠! 하나는 싫어요. 엄마! 저도 동생을 갖고 싶어요.”라는 내용의 가족계획 표어가 선보였고, 2006년 “낳을수록 희망 가득 기를수록 행복 가득”으로 보다 적극적으로 출산을 장려하는 내용으로 변했다.
2010년대 ‘하나는 외롭습니다. 자녀에게 가장 좋은 선물은 동생입니다.’라는 표어와
‘아들딸 구별 말고 많이 낳아 잘 기르자!’ 하는 표어가 등장했다.
출산장려에 나선 보건 복지부가 전 국민에 출산장려 공모를 시행하기에 이르렀다. "자녀는 평생 선물, 자녀끼리 평생 친구." 이 표어가 2014년 7월 제3회 인구의 날에 보건복지부가 실시한 출산장려 국민표어 공모전에서 우수작으로 선정된 작품이다. 물론 표어가 출산장려를 촉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노년인구는 늘어나는데 생산인구가 줄어든다는 것은 심각한 일이다. 가분수 형의 인구구조로는 밝은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 지금이 그 전환점인 것만은 확실하다.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모든 여건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이제 그 몫은 정부에 있다. 여건만 되면 더 낳겠다고 한다. 국가가 그들에게 믿음을 주어야 할 차례다. 국가가 아이들을 키워준다는 믿음이다. 그래야 아이 울음소리가 도심 한가운데서 부터 저 지리산 꼴짜기 마을까지 우렁차게 울려 퍼질 것이다.
나무야 나무야 큰 나무야
사과나무야
힘에 겨워 업에 겨워
모진 삶을 살았느뇨
허리가 휘어지게
서글픈 구절로 시작하는 이 시의 제목은 ‘척추측만증’이다. 이 시인의 다른 작품들의 제목을 살펴보면 ‘인술(仁術)’, ‘골다공증’, ‘약이되는 사람’ 등 다소 생소하다. 그도 그럴 것이 김연아나 박지성 등의 허리를 책임졌던 자생한방병원의 신준식(申俊湜·64) 이사장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 신준식’의 시는 손이나 약,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제공 자생의료재단
신준식 자생한방병원 이사장은 한의사이자 정식으로 등단한 시인이다. 환자의 마음의 병까지 치유하는 심의(心醫)가 되고자 노력한 결과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아픔’에 관한 이야기가 유독 많다. 한 번은 척추측만증인 여학생이 그를 찾아왔다. 16세밖에 안 된 이 학생은 안타깝게도 척추가 구조적으로 비뚤어져 교정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였다. 그렇게 치료를 위해 땀을 흘리는 도중 소녀의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을 봤다. 소녀의 고통과 아픔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척추측만증’이다.
그렇게 시를 쓰기 시작한 지가 20여 년이 됐다. 2012년 종합문예지 월간 의 신인문학상 시 부문에 당선돼 시인으로 정식 등단했다. 그해 에 그의 시 ‘생의 반환점에서’ 등 2편이 선정되기도 했다. 이렇게 꾸준한 작품활동을 통해 지난해에는 네 번째 시집인 를 출간했다.
“시에 대한 영감은 주로 진료실에서 나오죠. 선친은 늘 저에게 마음의 병부터 치료하는 심의(心醫)가 되라고 가르쳤습니다.”
이런 그의 마음은 그의 시 ‘인술(仁術)’에서도 엿볼 수 있다.
“아버지는 나에게/의사는 시내인술(是乃仁術)이라 하셨다/의사는 의술로만 치료하지 말고/인술로 치료해야 한다/마음의 병부터 치료하는 심의(心醫)가 되라.”
실제로 그는 선친의 뜻을 따라 영혼까지 치료하려 애쓰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임직원과의 소통도 시로 한다. 병원 블로그 등에는 그가 직원들에게 전달하는 시가 심심치 않게 게시되곤 한다. 처음에는 낯부끄럽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내 진심을 담아 한 줄 한 줄 자기 생각을 시로 전달했다. 그러자 직원들에게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환자를 대하는 태도부터 달라졌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지만, 그가 시를 놓지 않는 이유다.
“하루는 직원 한 명이 제게 메신저로 수시로 보내주시는 이사장님 시 덕분에 삶의 태도가 긍정적으로 변했다면서, 감사함을 환자에게 갚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빈말일 수도 있겠지만, 그럴 때 시를 쓰는 보람을 새삼 느낍니다.”
이러한 소통 방식은 전국 18개 자생한방병원 분원과 임직원 1500여 명을 하나의 연결고리로 묶고, 국내 최대 규모의 한방 의료재단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됐다. 1988년 자생한의원으로 시작해 2013년 11월 국내 최대 한방 공익 의료재단으로 거듭났다.
7대째 이어오는 한의사 집안
신준식 이사장의 집안은 7대째 한의업을 이어오고 있는 한의사 집안이다. 선친은 양의사이면서도 한의사였다. 외과의사로 양·한방을 함께 진료했던, 당시로선 매우 드문 의료인이었다. 한국전쟁 때 충청도 시골 마을로 피란을 갔는데 환자들 때문에 전쟁이 끝난 후에도 서울로 돌아오는 것을 포기했었다. 환자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다니느라 신 이사장의 가족은 무려 17번이나 이사를 했다.
충남 당진에서 한의원을 운영했던 선친은 환자들이 돈이 없다고 하면 쌀이나 감자, 옥수수 등을 받고 병을 고쳐주기도 했다. 그러다 척추 골절과 척추 결핵으로 6년간 앓다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그렇게 병으로 고생하실 때 꼭 낫게 해드리겠다고 약속했어요. 하지만 결국 그 약속은 지킬 수 없었죠. 척추 질환을 꼭 정복하겠노라고 맘먹은 것도 그때쯤이었어요. 경희대 한의대에 들어가서 같은 뜻을 가진 동기들과 추나요법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어요. 해답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죠. 덕분에 전국에 안 가본 곳이 없었어요. 국내에 추나요법에 관한 자료가 많지 않아 공부하기가 쉽지 않았고,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허릿병을 잘 고친다는 사람 따라다니다 쫓겨나기도 부지기수였죠. 비방(祕方)으로 추나요법을 전수받은 한의사를 설득해 배우기도 하고, 때로는 안마사에게도 고개를 숙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연구에 매달리다 보니 빛이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2700년 역사 자랑하는 추나요법
척추질환은 현대사회의 대표적인 질환 중 하나다. 과거에는 통증을 줄이기 위해 수술요법을 많이 선택했지만, 수술의 높은 난이도와 재발의 위험성 때문에 비수술 요법에 대한 선호가 높아지고 있다. 양의학에서도 절개를 최소화하는 최소침습시술 방식이 인기를 얻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한방에서 치료하는 ‘추나요법’은 대표적 비수술 요법이다.
대개 비수술 치료는 약물과 추나요법 등을 통해 상태를 호전시킨다. 약물과 추나요법만으로도 2~4주 이내에 회복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디스크가 빠져나오면 인체는 그것을 이물질로 간주해 강력한 면역작용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추나요법이란 어긋나거나 비뚤어진 뼈와 관절, 뭉치고 굳은 근육을 바로잡아 울체(鬱滯, 막히거나 가득참)된 기혈을 정상적으로 순환시켜 통증을 개선하고, 인체의 자연치유력을 회복하여 질병의 원인을 해소하는 수기(手技) 치료법이다. 골관절과 근육, 인대, 근막 등 주변 연조직의 기능적인 불균형으로 인해 발생하는 척추관절질환을 치료한다. 시술자의 손과 지체(肢體, 팔다리와 몸)의 다른 부분을 사용하거나 보조기기 등을 통해 인체의 특정 부위(체표의 경혈, 근막의 압통점, 척추와 전신의 관절 등)를 조작하고 인체의 생리적·병리적 상황을 조절함으로써 치료 효과를 거두는 것이다. 즉, 한의사가 수기법을 통해 가하는 힘이 관절·골격 또는 환자의 특정 부위를 교정함으로써 치료 효과를 내는 것이다.
추나의 역사는 길다. 2700여 년 전 이라는 한의서엔 안마와 지압이, 그리고 밀고 당겨 어긋난 관절을 맞춰주는 에도 수기 치료가 기록돼 있다. 추나(推拿)라는 말은 한의학 경전인 에 나오는 치료법인 ‘도인’, ‘안교’에서 유래됐다. 그러다 명나라 때 문헌에 처음으로 ‘추나’라는 명칭이 등장한다. 청나라 때는 황실의 의료를 담당하던 태의원(太医院)에 ‘추나과(推拿科)’를 설치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선 손으로 하는 의술을 천시한 데다 환자들이 신체 노출을 꺼려 빛이 바랬다가 서양의 카이로프랙틱이 들어오면서 역사 속의 추나요법이 부활했다. 물론 부활의 중심에는 신준식 이사장이 있었다.
한의학 세계화 이끌다
1992년 대한한의학회에서 추나학회(현 대한척추신경추나의학회)가 공식 인준되었고 그동안 별다른 관심을 얻지 못하던 추나요법은 마침내 공동 연구의 광장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한의대에서 추나학을 교과목으로 채택할 정도로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민간요법의 하나로 홀대받던 추나요법이 이젠 한방 치료법의 하나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자생의 설립 목적에는 신 이사장의 의료철학이 담겨 있다. 한의학의 과학화·표준화다. 그는 소위 비방(祕方)이라는 명목 아래 등한시해왔던 한의학의 치료 효과를 과학적으로 밝히는 연구를 하고 있다. 이를 위해 SCI급 국제학술지에 논문을 매년 수차례 게재하고 있다.
“한의학 또한 양방의학과 마찬가지로 치료의학의 우수성을 입증할 수 있도록 임상을 통한 증명 자료를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근거 중심의 임상치료 데이터를 모아 우수 논문들을 주류의학인 양방의학계에 발표해 한방을 과학화하고 인정받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병원 경영이 안정돼야 연구도 하고 논문도 쓸 수 있습니다. 그러지 못할 경우에는 병원의 현상 유지를 위한 행정에만 머무르게 됩니다.”
이러한 연구성과가 뒷받침되면서 신 이사장의 의술은 해외에서도 인정받아 미국 어바인의과대학 선택과목 채택(2002), 미국 하버드대 의대 협력 연구(2006) 외에도, 2011년부터 미국 러시대학메디컬센터, 미시건주립대학교 정골의과대학, 시더사이나이 병원, 러시아국립의과대학교 등 해외 굴지의 대형 종합병원과 의과대학의 초청을 받아 강의하고 있다.
올해 6월에는 키르기스스탄 대통령병원 개원 70주년 기념 국제 콘퍼런스에 초청을 받아 비수술 한방 척추디스크 치료법 강연을 했다. 이 자리에서 신 이사장은 한방 추나요법과 침 치료법(동작침법) 등 강연을 하며 현지 급성요통환자에게 동작침법을 시연하기도 했다.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많은 척추환자가 통증으로 고통 받으며 수술 치료를 고려하고 있습니다. 비수술적 치료방법인 우리 전통 한의학의 우수성을 전 세계에 알리는 것이 저의 사명입니다.”
진정한 명의(名醫)란
명의(名醫). 사전적 의미로는 ‘병을 잘 고쳐 이름난 의원이나 의사’를 뜻한다. 말 그대로 유명한 의사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신준식 이사장 또한 명의일 것이다. 하지만 신준식 이사장이 생각하는 명의는 명망 있고, 병을 잘 고친다고 해서만 되는 것이 아니다. 환자의 마음까지 다스릴 줄 알아야 ‘진정한 명의’라고 강조한다.
“동의보감에는 ‘약을 잘 처방하면 약의(藥醫)로 삼등(三等)의사요, 음식을 잘 조절하면 식의(食醫)로 이등(二等)의사요, 마음을 잘 다스리면 심의(心醫)라 일등(一等)의사’라 했어요. 환자의 아픔을 어떻게 하면 깨끗하게 치료해 더 이상은 고통 받지 않고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지를 아는 것이 진정한 명의예요. 저는 환자들이 아픈 몸을 치료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병원을 찾아다녔고, 적지 않은 비용과 시간을 들이며 힘들어 했는지 잘 압니다. 그러기에 제 방문을 열고 찾아와 도움을 요청하면 따뜻한 미소와 포근한 말과 정성스런 손길로 얼어붙어 있는 환자의 마음을 안아주고 싶습니다.”
누구나 그렇듯이 앞만 보고 살아온 것 같다. 방향과 방법은 다를지라도 모두가 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온 것 같다. 때로는 남들보다 더 열심히 살아왔노라고 위안도 해본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인가 몸이 맘대로 안 들어 먹는다.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알 수없는 통증으로 견딜 수가 없다. 이것이 갱년기 인가?
옛날 엄마가 하던 소리, “너희들도 나이 먹어 봐라. 내 몸이 내 몸이 아니다.” 하시던 말씀들이 그대로 재연되고 있었다. 세상에 무서울 것 없이 눈썹 휘날리며 멋도 부려가며 정신 없이 살아왔는데 병명도 모르는 병원체가 자신을 마구 무너져 내리게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본성이 어디로 갈 것 인가. 몸 속에 여전히 꿈틀거리는 열정의 피는 다시 생동하고 있었다.
필자의 별명은 “의지의 한국인”이다. 그러나 정말 좋아하는 또 하나의 별명이 있었다. 자신을 늘 살아있도록 만들어 준 말, 바로 산소 같은 여자라고 사람들은 불렀다. 그 말은 언뜻 들으면 칭찬 같기도 하지만 어쩌면 상당히 부담스러운 말 일수도 있었다. 그래서 어느 날 거울을 들여다 보면서 혼자 지껄였다. "산소? 그래, 그렇게 살자. 앞만보고 열심히 살다 보면 없는 산소도 뿜어져 나와 내 몸을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더 신명 나게 살아왔다.
그저 닥쳐올 미래보다는 당장 현실에 적응하며 힘들 때는 때때로 체념도 하면서, 열심히 처해져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그러다 보면 그것들의 연속이 좋은 미래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나름의 위안으로 생각하며 살아왔다. 필자는 두 딸들에게도 그저 욕심내지 말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서 살다보면 다 살기마련이라고 습관처럼 말하곤한다. 그것이 필자의 가훈이자 좌우명이었다.
두 딸들은 말한다. 어느 때는 엄마가 계모냐고 또는 악녀라고 소리치며 반문을 한다. 아마도 자기들 마음을 몰라준다고 반란스러운 생각을 한 모양이다. 왜냐하면 다른 집 엄마처럼 마냥 다정하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집 같으면 공부 잘하고 착하고 그만하면 떠 받들어 주련만 필자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누구 보다 정성을 다했고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하기에 그것들이 아이들에게는 어쩌면 훌륭한 엄마로 내제되어 있을런 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인가. 우연히 아이들이 의대 대학원에 입학하기 위해 제출하는 서류 안에서 자기소개를 하는 글을 읽게 되었다. 잔잔하게 떨려오는 감동이 손등위로 뜨거운 눈물을 떨어트리도록 짜릿했다. 아니 아이들이 흐뭇하고 대견스러웠다. 자기들 소개서에 엄마의 생애를 그려 넣고 있었다. 이러이러한 장한 엄마 덕분에 그 영향 아래 자기 들이 자라온 것을 무척이나 자랑스럽게 소개하며 엄마의 지나온 삶을 아주 정확하고 솔직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결국 아이들에게 계모같은 엄마는 대단한 멘토가 되어있었던 것이다. 그 감격의 감사함으로 오늘날 까지 버텨 왔는 지도 모르겠지만 필자는 그것들을 복사 해 지금까지도 아이들 몰래 고이 간직하고 있다.
눈을 감고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지난 한해는 너무나 캄캄한 지옥 이었다. 물론 다시 시작하는 한국생활에 적응기간이라고 할 수 있었겠지만 감당하기가 아주 힘이 들었다. 한 해 동안 응급실로 실려간 횟수가 아마도 대 여섯 번은 되는 것 같다. 정말 모든 것 다 내려 놓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남은 미련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5년의 시간동안 떨어져 있던 가족들은 한국에서 다시 만났고, 한 가족이 사랑으로 섞이는 과정은 일년이라는 세월과 그 매일은 전쟁터였다. 다행히도 가족 전쟁이 끝나게 된 것은 오로지 필자 한사람 자신의 패전이었다.
자식들이 더이상 품안에 자식이 아님을 다소곳이 낮은 자세로 받아 들여야만 했다. 그것 만이 싸움터 해결의 실마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식이기는 부모가 없다는 말인가보다. 지난날의 군주로 지내왔던 여왕의 시대가 끝나고, 그저 자식과 부모라는 단어 앞에 적당히 양보하며 받아들이고 성인이 돼버린 자식을 인정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부모가 결국 무기를 내려놓고 먼저 달라지기를 하면서 그 싸움은 종전이 될수있었다.
예전에 사람들은 필자를 보면 또 힘이 솟는다고 했었다. 에너지가 넘친다는 것이다. 그래, 솟구치는 에너지가 그들에게 전달되어 함께 나태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란 말인가. 나름 대로 위안도 하면서 열심히 그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었던것 같다. 그리고 그러한 일들은 잠시도 힘들다고 생각치 않았다. 그리고 이제 세월지나 나이든 지금 이순간도 애써서 행복은 넘쳐흐른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잘돼서가 아니라 이글을 쓰는 자신이 커다란 기쁨으로 다가와 작은 가슴에 충만하기 때문이다. 기쁨은 작은 것으로 부터 시작되고 감사는 자신이 마음먹기에 따른 것이다.
모든것 내려놓았던 마음에 휴식은 다시 자신의 울타리에서 잉태를 시작하였고, 필자를 의지의 한국인으로 정중하게 안내를 해주었다. 그것은 신비하게도 앤돌핀이라는 에너지를 창조 해주었다. 바로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내뱉어 지나온 삶을 글쓰기로 우러내어 세상과 소통하도록 해주는 일이었다. 글쓰기, 누구나 해보고 싶어하는 위대한 소망이며 선망의 대상이리라.
풀 죽어 시들시들 했던 시니어 라는 이름이 무거운 몸을 부추겨 다시 산소를 뿜으려 노력하니 하루가 활기차고 병원가는 일이 줄었다. 병원가는 비용으로 맛난것들도 사먹으며 힘을 충전한다. 글을 쓰는 시간, 자신의 솔직한 마음들을 드러내며 만들어가는 창조의 힘은 하나의 신세계가 되어 그 파장은 남편도 아이들도 모두 웃게 만들어주었다. 의지의 한국인은 여전히 살아 숨 쉬며 꿈틀거리고 있었다.
젊은 날의 그 싱싱했던 의지가 아직은 남아 있기에 그 힘으로 자신의 삶을 당당히 써내려 갈것이다. 그리고 멋들어진 한 권의 책을 펴내어 사랑하는 주변사람들에게 선물하고 싶다. 그저 열심히 한국사람으로 당당하게 살아왔노라고 외치면서 묵묵히 자신의 찬란했던 그 별명들을 그대로 펼쳐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 오늘도 한껏 뿜어져 나올것만 같은 산소의 에너지가 아이들에게 그리고 세상 많은 사람들에게 잠시 쉬어가는 쉼터의 활력소가 되기를 꿈 꾸어 본다.
중년 이상의 세대에게 한 가지 낯선 현상이 있다. 바로 아토피란 질병인데, 심하면 온몸을 뒤덮으면서 정상적인 생활마저 어렵게 하는 이 질병을 40대 이상의 세대는 아무리 기억을 떠올려 봐도 만난 적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왜 언제인가부터 이 질병이 떡하니 풍토병처럼 우리 사회에 자리를 잡은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과학자들은 위생가설(Hygiene Hypothesis, 衛生假說)이라는 이론으로 설명한다.
이 이론은 ‘미생물 공생체 결핍 이론’ 또는 ‘잃어버린 친구 이론’이라고도 불린다. 한마디로 어렸을 때, 흙바닥에서 놀면서 각종 감염성 세균과 기생충 같은 기생체들에게 노출되면서 자란 아이들은 면역계가 이들과 투쟁하면서 자신의 신체조직에 대해서는 면역 관용(Immune tolerance)을 만들어 지켜주는 역할을 하고, 자신의 몸이 아닌 다른 생명체에 대해서는 구별을 확실히 하면서 싸울 수 있는 준비를 갖추기 때문에 정체성이 명확해진다는 것이다. 반면에 어릴 적부터 너무 깨끗한 환경에서 자라난 요즘 아이들은 이런 기회를 충분히 갖지 못했기 때문에 면역계도 특별히 외부 물질과 싸울 일이 많지 않다 보니 피아구분을 잘 하지 못하고, 면역력이 남아돌면서 오히려 민감해진 면역계가 자신의 조직을 공격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의문을 가져볼 필요는 있다. 면역력이 강하다는 것은 외부 감염에 대해 저항력이 높기 때문에 인체에 유리한 것 같은데, 왜 면역력이 과도해지는 것이 오히려 자가면역질환을 가져오는지 궁금할 수 있을 것이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면역을 담당하는 세포 중에 T세포라는 것이 있다. 이 T세포가 외부 이물질에 대해 직접 독성물질을 분비해서 공격하는 작용을 주로 하는데, 이 과정에서 염증이 일어나는 것이다. T세포는 염증을 일으키는 물질뿐만 아니라 염증을 가라앉히는 물질도 같이 분비하는데, 면역계가 필요 이상으로 민감해지면 염증을 일으키는 물질의 생성이 훨씬 증가하기 때문에 만성적으로 우리 몸에 염증을 일으키는 자가면역질환이 되는 것이다. 이 자가면역질환 중에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환자가 발생하는 크론병(Crohn’s disease)이라는 것이 있다. 만성 난치성, 염증성 장질환으로 분류하는데 구강에서 항문까지의 위장관 전체에 염증을 일으킬 수 있는 심각한 자가면역질환이다. 복통, 체중 감소, 설사를 끊임없이 일으키며, 한 번 발생하면 평생 동안 지속되면서 장관 협착, 천공(장관에 구멍이 생기는 것) 등의 합병증도 일으킨다. 그동안 이 질환은 서구에서만 흔한 것이라고 알아왔는데,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얼마 전, 싱어송 라이터이자 방송인인 윤종신이 이 병으로 인해 장 일부를 절제하는 수술을 받으면서 세간에 화제가 되었다. 현재의 치료법은 염증이 일단 발생하면 소염제나 스테로이드제제를 집중적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약물 부작용도 심하다. 면역 억제제를 사용하면 다른 감염증에 대해 취약해지면서 나중에는 결국 장의 상당 부분을 잘라내야 하는 수술을 받는 경우가 많아진다.
결국 이 자가면역질환들은 인류가 자연 그대로를 멀리하면서 생겨난 부적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최근 이 자가면역질환을 치료하기 위해서 다시 자연 속에서 답을 찾는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중 크론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선택된 것이 바로 돼지 편충이다. 돼지 편충은 돼지 장내에만 특정적으로 기생하는 기생충인데, 돼지의 맹장이나 대장에서 피를 빨아 먹으면서 3년 정도 머물다가 죽는다. 이 돼지 편충의 알을 한 번에 2500알 정도씩 2주에 한 번 정도 복용하는 것이 치료법이다. 편충 알이 사람 몸속으로 들어오게 되면 위장에서 부화해 껍질을 깨고 나온 성충이 대장이나 맹장에 머문다. 약간 피를 빨기도 하지만, 결국 전혀 낯선 숙주의 환경에서 잘 적응하지 못하고 2주 만에 대장 내에서 파괴되어 배설 된다.
그 2주 동안 돼지 편충은 계속 장벽을 자극하고 면역계를 긴장시키면서 면역계와 싸우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면역계는 새로운 침입자에 대해 총동원령을 내리고 침입자를 몰아낼 때까지 다른 곳에 전혀 신경 쓸 여력이 없어진다. 이 과정에서 크론병의 증상이 사라지는 효과가 나타난다. 아직 정식 치료법으로 채택되지 못하고 실험적인 방법이지만, 24주 동안 투여한 결과 80%의 사람들에게서 효과가 있었고, 73%가 완치판정을 받았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이다. 돼지 편충은 사람 장속에서는 별로 힘을 못 쓰면서 별다른 부작용이나 합병증도 없어서 안전한 것으로 밝혀졌다. 물론, 단점도 있다. 편충의 알이 부화되고 자라나는 기간이 길기 때문에 충분한 양을 조달하기 어려운 관계로 2주에 한 번 먹는 비용만 수백만 원에 달하는 것이다. 그래도 다른 치료법으로 특별한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가뭄에 단비가 아니랄 수 없다.
2016년에 들어와서는 또 다른 희소식이 크론병 환자들에게 찾아 들었다. 그 중 하나는 국내 연구진에 의해 개발되고 있는, ‘애기뿔 소똥구리’라는 곤충에서 추출한 물질이 크론병 치료에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이 물질은 코프리신이라는 것으로서 일종의 항생물질이다. 쥐를 이용한 실험에서 이 코프리신이 장질환으로 손상된 대장 점막세포를 회복시키는 것이 관찰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람의 대장 상피세포를 이용한 실험에서도 정상세포를 증가시키면서 장점막의 회복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 결과는 미국 하버드대 의대의 검증을 거쳐 미국의 유명 학술저널에도 게재되었다.
물론 임상실험을 거쳐 신약으로 나오기까지의 과정은 길고 지난한 것이다. 하지만 자연 속에서 답을 찾았다는 또 다른 희망을 보여준 것이다. 이렇게 자연 속에서 찾은 물질들은 비교적 인체에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재생의 효과를 나타낼 가능성이 높다. 또 다른 국내 연구진도 특정 바이러스를 이용해서 대장 안에서 면역세포가 염증을 줄여주는 물질을 분비하는 것을 관찰했다. 이런 연구결과들은 기존의 화학적 치료법에서 발생하는 모순에 대한 해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장질환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투여되는 항생제 등이 오히려 장내에서 사람과 공생하고 있는 좋은 균들을 죽이면서 상태를 더 악화시킬 수 있다. 따라서 인체와 잘 조화되는 치료법이 발견된다면, 이런 위험도 줄여주어 다시 장 건강을 찾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문화와 과학의 발달로 인류는 자연과 동화되는 방법을 점점 잃어가고, 그 잃어버린 자연과의 관계에서 자가면역질환같은 부작용이 나타났다면, 이제는 그 잃어버린 자연들이 다시 인간에게 손짓하며 희망의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 최혁재(崔爀在) 약사 경희의료원 약제본부 예제팀장
경희대 약학대학 객원교수, 한국병원약사회 법제이사, 서울시 약사회 병원약사이사, 대한약물역학위해관리학회 총무이사.
얼마 전 홍콩에서 10여 년간 거주하며 우리나라와 일본을 사업차 자주 방문한다는 ‘동양 전문가’인 캐나다인과 우연히 한·중·일 문화에 대해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 동양 전문가는 삼국의 문화에 무슨 차이가 있느냐는 듯 의아해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필자가 현대식 대형 건물이 아닌, 동양식 전통 건물에 한·중·일 삼국의 각기 다른 문화 코드가 녹아 있다고 하니 무척 놀라워하는 모습이었다.
삼국의 전통 건물이 서양 건축에 비해 목조라는 점 외에 다른 공통점은 건축물에서 지붕이 차지하는 면적이 크다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한·중·일 삼국이 지붕 선(roof line)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는 것이다. 중국은 지붕 끝이 하늘을 향해 찌르듯이 올라가는 데[사진 1] 비해, 한국 지붕은 가운데 부위에서 지붕 양 끝이 조금 높아지는 느낌만 주는 정도[사진 2]이고, 일본의 지붕 선은 일직선으로 마무리되는 게 특징이다[사진 3]. 이런 차이점을 말하자, 그 동양 전문가는 무릎을 탁 치며 “그래, 정말 그러네” 하며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걸 기뻐하며, 왜 그 쉬운 차이를 여태껏 자기는 못 봤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필자가 각기 다른 지붕 선에 스며든 문화 코드를 설명해 나가자 그는 더욱 경청하는 자세를 취했다. 중국 건축물에는 권위적 정서가 스며 있는데, 특히 지붕 선은 그런 느낌이 더욱 강해 보는 이로 하여금 중압감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일본은 건축의 핵심이 간결한 직선인데, 지붕 선 역시 단순한 일직선으로 팽팽한 긴장감이 흐른다. 반면 한국의 건축물은 권위감이나 긴장감보다는 여유로움이 묻어난다. 특히 지붕 선(線)은 약간 휘어져 있는데, 양쪽에서 실(絲) 끝을 잡고 일직선으로 팽팽하게 당기지 않고 살짝 긴장을 푼 듯 느슨한 인상을 주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 선조들은 자연 친화적 정서를 으뜸으로 꼽은 것이 문화의 코드라면, 일본은 ‘긴장감 속의 아름다움(beautiful charm in tension)’과 인위성이 문화의 한 코드인 셈이다.
그 동양 전문가는 우주라는 자연에는 직선이 존재하지 않기에 “직선은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든 조형물이다”라고 주장한 오스트리아의 건축가이자 미술가인 프리덴슈라이히 훈데르트바서(Friedensreich Hundertwasser, 1928~2000)의 말이 떠오른다고 했다. 그러면서 독일의 대문호 괴테(Goethe, 1749~1832)가 “가장 어려운 것이 무엇일까?/ 바로 네 눈앞에 있어 눈으로 볼 수 있어/ 네가 가장 쉽다고 생각하는 것이다(“Was ist das Schwerste von allem?/Was dir das Leichteste dünket,/Mit den Augen zu sehen, was vor den Augen dir liegt.”)라고 했다면서, 지금껏 동양 삼국의 문화는 중국 것이라 생각해왔기에 자신이 서로의 차이점을 못 본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한·중·일 건축물의 지붕 선이 지닌 미술사적 의미를 짚어보면서 ‘그 하나’에 얼마나 큰 차이가 존재하는지를 다시금 깨닫는다. 그리고 삼국의 문화적 차이가 새삼 흥미롭게 다가온다.
>>>글 이성낙 현대미술관회 회장
독일 뮌헨의대 졸업(1966),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피부과 교수, 아주대학교 의무부총장, 가천의과대학교 총장, 가천의과학대학교 명예총장(現), 한국의약평론가회 회장(現), 간송미술재단 이사(現)
첫번째 오남매가족사진, 1번 임산부필자 3번 40대의필자 4번 빛바랜 가족사진들 6번 두딸과 필자모습
카네이션 꽃들이 만발하는 5월이 되면 유년 시절의 필자는 그리움 반 미움 반으로 시들어진 꽃다발을 가슴에 품고 엄마를 그리다 잠이 들곤 했다. 어린 마음속에서 흘린 눈물은 차곡차곡 쌓여 강하고 모진 모성애를 잉태하기 시작했다.
눈물 속의 회상
어린 시절 필자 5남매는 주말이면 어김없이 어머니를 면회하기 위해 병원으로 향해야 했다. 필자가 아주 어릴 때부터 시작된 일종의 주말 이벤트였다.
그날도 우리는 큰오빠의 지시 아래 엄마에게 필요한 것과 음식을 정성껏 준비하고 묵묵히 오빠를 따라나섰다. 그리고 버스에 타 자리에 앉자마자 이내 차창 밖으로 시선을 떨군 뒤 멍하니 바깥만 응시했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에 얼굴을 들 수가 없어서였다.
버스가 서울 중랑구 면목동을 지나 중곡동 가까이에 닫자 필자의 가슴은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마치 멀고 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변해 있을 어머니를 만나려면 미리 단단한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철창문이 열리고 퉁퉁 부어오른 모습으로 뒤뚱뒤뚱하며 걸어 나오는 어머니. 어머니 얼굴은 오랫동안 빛을 못 봐 하얗게 변해 버렸다. 또 오랜 병원 생활로 비정상적으로 부어 마치 ‘큰 바위 얼굴’ 같았다. 그리고 약에 취해버려 연신 흐느적댔다. 자식들은 그 만남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눈을 피하며 안절부절 어머니를 맞이했다. 아버지를 다른 여자에게 빼앗기고 그것도 모자라 구타까지 당했던 어머니. 그 옛날 귀한 집 외동딸로 태어나 심성 바르고 순수하며 착하던 어머니가 한평생을 정신 줄을 놓으시고 병원 생활로 약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어머니 그만 해요. 도대체 왜 그래? 그까짓 아버지 뭐하러 생각해! 우리가 있잖아.” 필자가 보탤 수 있는 말은 이뿐이었다. 이따금 아버지가 자식에 대한 책임감만으로 마지못해 병문안 왔다 가는 날에는 어머니의 병세는 더 나빠지고 어머니의 정서뿐 아니라 자식들 기분도 엉망이 되곤 했었다. 필자는 그런 아버지를 늘 원망했다. 돈 잘 벌어 양쪽 집 9남매 대학 보내 주는 것보다는 차라리 따뜻한 가정 속 아버지를 더 몸서리치도록 그리워했다. 그래서 5남매는 서로 만나면 침묵한다. 그게 더 아프지 않을 유일한 방법이니까
도망치듯 떠나온 어머니의 품
대학을 마치고 도망치듯 같은 캠퍼스 선배와 결혼했다. 그토록 그립던 사랑을 갈구하며 현실을 도피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전쟁 터 같은 생활들이 너무나 싫었다. 그러나 결혼생활 또한 살아온 각자의 삶이 다르듯 많이 부딪쳤다. 대학 졸업 후 시작한 교사직과 함께 나름대로 결혼생활에도 충실했으나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자신이 없었다. 결혼 2년 후 큰아이를 임신하며 또 고통이 다가왔다. 건축 장교로 제대한 남편이 중동으로 파견 나간 후 필자가 임신 중독증으로 교단을 떠나야 했던 것이다.
혼자 남은 임산부 새댁은 유난히도 겁이 많았고 신혼생활의 달콤함을 접고 시댁으로 들어가 배부름을 혼자 감당해야 했다. 부자인 시어머니와 시아버지는 늘 여행을 일삼아 집을 비우셨고, 아침에 왔다 오후 5시면 돌아가는 도우미 아주머니가 유일한 친구였다. 어쩌다 어머니가 병원에서 퇴원할 때면 시부모의 허락을 받아 친정으로 달려갔다. 그토록 그리던 어머니를 마음으로 느끼며 손을 꼭 잡고 함께 잠드는 밤이면 비록 병든 어머니였으나 그 품이 왜 그리 따뜻했을까. 시댁에서 밤마다 방에 드리운 길다란 옷걸이 그림자가 무서워 잠 설쳤던 한 달 동안의 밀린 잠을 푹 잔듯했다.
중동에서 돌아온 남편은 건설 회사를 차렸고 4년 후 작은아이를 가졌다. 남편은 큰아이 때 못 해준 것을 만회하기 위해 이 아이를 여왕마마처럼 모시겠다고 굳게 약속을 하더니 반대로 필자도, 두 아이도 용서할 수 없는 큰 사고를 쳤다. 남편은 무릎 꿇고 벌벌 떨면서 사죄했지만 용서되지 않았다. 결국 죽을 힘 다해 쌓아 올렸던 가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필자는 모든 것들은 다 포기 할 수 있었으나 아이들만큼은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커다란 혼란과 방황이 시작되었고 그때부터 자신과의 싸움은 실로 ‘의지의 한국인’ 수준이었다. 그 방황을 감수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으로 다시 대학을 다니며 학문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대학 때와는 전혀 다른 전공을 선택해 20세 차이 나는 아이들과 캠퍼스를 누볐다. 배움은 채워지지 않는 상처투성이 사랑의 빈 공간을 그나마 채워주었다. 늦은 나이에 다시 생소한 학문을 하며 젊은이들과 함께한 캠퍼스 생활은 신선한 삶의 충격이었다. 그 충격을 오래 누리고 싶어 대학원까지 다녔다. 그리고 드디어 시간강사, 전임강사가 되어 전국을 누렸다. 자신이 얼마나 멋지고 훌륭한지,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지 확인하면서 모습이 무척이나 대견스러웠다.
백 번 말보다는 보여주는 교육이라고 했던가. 다행히도 두 아이들은 필자를 자랑스러워△하며 열심히 그 뒤를 따라와 주었다. 큰아이는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필자를 추천하여 아이가 다니는 과학고등학교에서 장한어머니상도 받게 해주었다. 이보다 어떤 값진 보석이 또 있을까?
1997년 온 나라에 IMF라는 경제 위기가 몰아 닥쳤다. 하루아침에 남편 회사는 문을 내리고 가족은 빈털터리가 되었다. 고심 끝에 이민의 길을 선택했다. 한 가정의 기둥이 되어 위기를 기회로 삼아 어떻게든 어 다시 지붕을 쌓아가야 한다는 신념으로 가득했다. 남편을 설득해 먼저 보내고 초등학교를 졸업한 작은딸을 그 이듬해에 보냈다. 그리고 큰딸을 한국에 둔 채 필자는 2001년 LA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만으로 허물어져가는 가정의 든든한 기둥이 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동안 어렵게 오랜 시간 투자해 얻은 교수의 길, 필자의 것들을 다 포기해야만 했다.
무궁화 꽃 속으로 흐르는 눈물
한국과학기술대학교(KAIST)에서 국비 장학생으로 과외하며 생활하던 큰아이는 방학만 되면 가족이 보고 싶고, 엄마 품이 그립다며 열일 제치고 미국으로 날라왔다. 비록 낯설고 물 설은 이국 땅, 남의 나라였지만 그리웠던 가족의 재회는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 삶의 원동력이었는지 모른다.
힘겨웠던 바닥생활 2년 후, 해변의 도시 싼타모니카에 세탁소를 시작했다. 필자는 바느질을 하고 남편은 빨래하며 자리잡기 시작했고 백인동네에 멋진 이층 집도 장만했다. 주말이면 1박 2일 파티도 열며 나름대로 훌륭한 이민생활을 했다. 다른 사람들은 필자 가족을 무척 부러워했다. 그러나 작은 아이가 우등생으로 ‘캘리포니아주립대 LA캠퍼스(UCLA)’를 졸업하고 언니가 있는 한국으로 나와 버렸다. 왔다갔다 하던 큰아이는 어느덧 멋진 의사가 되었고 작은 아이도 남의 나라에서는 더 이상 꿈을 펼 수가 없다며 훌쩍 떠나와 버렸다.
아이들이 떠나고 난 빈 자리를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가 없었다. 2층 아이의 방에는 덩그러니 아이의 그림자만 남아 있었고, 텅 비어버린 커다란 집은 더 이상의 따뜻한 가정이 아니었다. 심지어는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세탁소 2층에 머무르며 일만하며 살았다. 세탁소 재봉틀 앞에 큰 거울을 붙여놓고 필자 얼굴과 마주보며 외로움을 달래곤 했다. 필자는 또다시 미국 한 의대에 입학했고, 그 길만이 유일한 정신적 버팀목이었다. 세탁소 일이 끝나는 저녁 6시에 가서 밤 11시면 돌아왔다. 장장 8년에 걸쳐 졸업했다. 그리고 작은아이도 1년 후 의대에 합격했다.
어느덧 나이 60세를 향하면서 이민생활도 고갯길에 접어들어 수시로 불안감이 몰려왔다. 남편이 있어도 파고드는 고독함은 중병이 되어 대학병원 응급실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삶과 죽음이 하루에도 수십 번을 머리 속에서 교차했다. 어느 날인가 남의 나라에서 아이들과 떨어져 소리 없이 죽어가는 꿈을 꾸었다. TV 속에 한국 뉴스가 끝나고 애국가만 흘러도 눈물이 주룩주룩 얼굴을 타고 내렸다.
삶의 질을 찾아 떠나온 18년 세월에 늙고 병만 들어 마음은 마냥 연약해져만 갔다. 아이들이 있는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점점 더 몸을 황폐하게 만들어갔다. 마음이 아프면 몸도 아프다고 했던가? 미국은 사람 사는 곳이 아니라 일만 하는 노예의 삶이니 받아들이라며 세탁소에서 일만하던 남편도 필자 뒷바라지에 다리를 못쓰게 되었다. 병들은 부부는 낯설은 이국 땅에 내려앉은 눈커플만 껌뻑 거리며 나란히 누워버렸다. 피붙이라고는 아무도 없었다. 산다는 것에 깊은 회의를 느끼며, 아무리 좋은 선진국, 부와 사치스러운 명예, 그따위 것들이 있어도 아무것도 아님을 철저히 느끼던 날에 다시 아이들 곁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남편을 설득하고 뿌리를 내렸던 세월을 미련 없이 정리했다. 고생하며 정들어온 곳, 아픈 추억들이 고스란히 담긴 땅을 뒤로한 채 고국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비행기 차창 너머로 피땀 흘려 견뎌온 시간들이 추억과 함께 너풀대며 날아다녔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행복한 꿈으로 온몸이 날아 갈 것만 같았다. 행복은 별 것 아니었다. 하늘에 떠 있는 작은 공간, 부푼 가슴이 천국이었다. 오랜 시간 공들여 모든 것들을 얻었으나 또 다 버리고 선택한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 다시 만나 만들어가는 소중한 가정의 행복을 무엇에 비유한단 말인가.
아이들을 향한 모성애 꽃이 만발하는 날, 한국 행 비행기 날개 가슴에는 무궁화 꽃이 활짝 피어났다.
1960년대의 일이니 꽤 오래된 기억이다. 여유로운 어느 주말 오후, 뮌헨 거리를 한가로이 지나가는데, 한 미술관 출입구 주변에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필자는 무심코 미술관 벽면을 크게 장식하고 있는 플래카드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1898~1967)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1904~1989) 작품 중심의 초현실주의(Surrealism) 전시회가 아닌가? 하마터면 놓칠 뻔했다 싶은 마음에 필자는 황급히 긴 행렬 끝에 섰다.
그 무렵 필자는 살바도르 달리에 빠져 있던 터라 달리만 본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르네 마그리트를 제쳐놓은 채 미술관을 나왔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1980년대에 미국 시카고미술관에서 르네 마그리트와 독대(獨對)할 기회가 있었다.
초현실주의 작품들 사이에서 별로 크지(63.5×93.98) 않은 ‘파이프(Pipe) 그림(위 사진)’에 시선이 머물렀다. 학창 시절 파이프 담배를 즐겼던 기억을 더듬으며 그림을 감상하는데, 문득 화폭에 있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Ceci n’est pas une pipe)’라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그동안 여러 번 이 ‘파이프 그림’을 봤지만 캔버스의 글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터였다. 작품 설명, ‘불신의 초상화(The Treachery of Image 1926~1929)’만을 보고 부끄럽게도 별생각 없이 그냥 넘어갔던 것이다.
그런데 파이프를 그려놓고 파이프가 아니라니? 혼란스러웠다. 그렇게 의아해하며 한참 동안 작품을 유심히 바라보던 어느 순간, 가슴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그래! 작가는 파이프를 그렸을 뿐이지, 그림이 파이프 자체는 아니잖아!” 그 이후 필자는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 세계에 새롭게 몰입했다.
르네 마그리트의 수많은 그림 중에서 ‘파이프 그림’과 맥을 같이하는 작품으로는 ‘통찰력(La clairvoyance 1936)’을 들 수 있다(아래 사진). 그림 속의 화가는 이젤 위의 캔버스에 날개를 펼친 채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한 새를 그리고 있다. 아울러 그림 속 화가는 왼쪽 손에 팔레트(Palette), 오른쪽 손에 붓을 들고, 시선은 옆 테이블에 놓인 달걀 모양의 새알을 향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작가 르네 마그리트는 ‘통찰’이라는 개념을 시각적으로 명료하게 정의한다. 사물을 보고 그 형태를 그리는 것은 스케치 범주에 머물 수밖에 없다. 요컨대 진정한 통찰은 새알 자체를 넘어 그 안에서 꿈틀거리는 생명체를 꿰뚫어보는 것이라는 얘기다. 르네 마그리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보는 것을 그리지 아니하고 생각하는 것을 그린다.” 르네 마그리트가 왜 ‘초현실주의 화가’라고 불리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는 조선시대 초상 미술의 큰 화두였던 ‘전신사조(傳神寫照)’와도 일맥상통한다. 전신사조는 초상화를 그릴 때 피사체(被寫體)인 대상 인물의 외형 묘사보다 그 인물의 고매한 내면세계를 표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정신세계를 보건대 우리 선조들은 오래전에 이미 ‘초현실주의 사상’을 갈파(喝破)했다는 생각이 든다.
>>>글 이성낙 현대미술관회 회장
독일 뮌헨의대 졸업(1966),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피부과 교수, 아주대학교 의무부총장, 가천의과대학교 총장, 가천의과학대학교 명예총장(現), 한국의약평론가회 회장(現), 간송미술재단 이사(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