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얼마만큼 살 것인가’보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가치를 두는 이가 많아졌다. 언론인 최철주(崔喆周·75)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장수시대라는 착각에 빠져 우리의 삶이 더욱 오만하고 지루해지는 것을 경계한다. ‘웰빙’을 위한 ‘웰다잉’을 이야기하는 그의 생각을 에 담았다.
호스피스 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 이른바 ‘웰다잉법’이 2018년 2월부터 시행된다. ‘죽음’과 관련한 법인 만큼 제정 단계에서 주목을 받았지만, 정작 시행을 수개월 앞둔 현재, 나라 안팎의 혼란과 희석되며 이에 대한 관심이 흐려졌다. 그러나 이대로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상황. 그동안 글과 강연을 통해 ‘웰다잉’을 알렸던 최철주의 목소리가 더욱 높아졌다.
“작년에 김영란법이 만들어졌잖아요. ‘웰다잉법’도 우리가 필요해서 여론을 모아 만든 건데, 막상 시행하려 하니 사람들이 잘 모르더라고요. 아니, 잊어버린 거죠. 우린 그렇게 죽음을 기피하고 도망가려 해요. 김영란법도 처음 시행됐을 때는 논란과 혼란이 많았죠. 이제 내년이면 웰다잉법도 그런 상황이 벌어질 거예요. 그 전에 우리 스스로 이 법이 무엇인지, 왜 필요한지 알길 바라는 마음에서 글을 쓰게 됐어요.”
웰다잉법은 ‘존엄사법’이라고도 하는데, 자칫 안락사로 오해하거나 죽음[死]이라는 단어에 거부반응을 보이는 이가 많다. 그는 괜한 시비를 막기 위해 되도록 ‘웰다잉법’이라 말하지만, 이번 책의 제목에는 ‘죽음’을 정면으로 내세웠다. 그 앞에는 ‘존엄한’이라는 수식어가 묵직하게 놓여 있다. 그가 말하는 ‘존엄’이란 무엇일까?
“사람이 사람다운 대접을 받으며 사는 것, 그렇게 살다가 사람다운 모습으로 떠나는 것이 ‘존엄’이라 생각해요. 광화문 사거리에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없던 횡단보도가 생겼어요. 차보다는 사람을 우선시하는 거죠. 여성을 성희롱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 건 여성의 존엄을, 학교나 군대에서 함부로 폭행하지 말라는 건 우리 아이들의 존엄을 지키려는 거예요. 그렇게 우리 삶 모든 부분에 존엄은 필요해요. 인간의 존엄을 최고의 이념으로 하는 게 헌법이잖아요. 그런데 왜 우리 삶의 마지막에는 존엄이 없느냐. 존엄하게 살다가 존엄한 모습으로 떠나도록 해야겠다. 그게 웰다잉법의 목적입니다.”
집안의 어른이 먼저 죽음을 논하라
웰다잉법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사전연명의료의향서’다.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가 사전에 작성해놓은 서류에 따라 자신의 연명의료를 중단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 역시 ‘생명을 포기하는 것 아니냐?’고 오해하기 쉬워, 그는 자세한 설명을 덧붙일 수밖에 없다.
“연명의료는 더는 의학적 치료 효과가 없는 말기 단계에 이뤄지는 심폐소생술이나 약물 투여 등을 말합니다. 무조건 치료를 안 한다는 게 아니에요. 치료할 것은 다 하고, 어느 때가 되면 자연의 섭리에 따라 떠나야 하는데 환자나 가족들이 그걸 인정 못하는 거죠. 그건 우리가 살면서 죽음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러다 막상 죽음이 다가오면 굉장히 고달파 해요. 평소 죽음을 고민하지 않았다면, 막연히 본능적으로 연명의료를 선택할 수밖에 없죠.”
그는 연명의료 과정에서 고통을 이기지 못해 팔다리가 묶여 발악하다가 혼수상태로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의 모습을 안타깝게 기억한다. 더욱 애석한 점은 말기 환자 대부분이 자신이 아닌 자녀나 주변인의 결정으로 연명의료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기자에게 “부모님이 사전연면의료의향서를 써두었다고 해도 막상 그 상황이 닥치면 연명의료를 중단할 수 있겠느냐”라고 물었다. 속 시원한 대답이 나오질 않았다. 고개를 갸우뚱하는 기자에게 그는 “자식으로서 쉽지 않다”며 “부모가 먼저 나서야 한다”고 조언했다.
“평소 부모와 자식이 죽음에 대해 자주 이야기해야 하는데, 자식이 먼저 그런 이야기를 꺼내봐요. 불효막심한 자식이라 괘씸하게 여기죠. 그러니 집안의 어른이 먼저 대화의 단초를 열어야 해요. 또 ‘나는 내 인생의 마무리를 이렇게 하고 싶다’고 이야기한 것을 문서화해두고 보관 장소까지 알려주는 것이 좋죠.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런 순간이 닥쳤을 때 가족끼리 의견이 분분해져 다툼이 나고, 한 사람의 죽음이 엉망이 돼버립니다. 그럼 그게 자식들의 가슴에 응어리로 남게 되고요.”
그는 식탁에서도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끌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소통이 어렵다는 요즘 가족, 그들이 죽음을 논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흔히 드라마나 영화만 봐도 죽음이 등장하잖아요. 가령 ‘얘, 그 주인공 보니까 마지막에 그렇게 죽는 게 안 좋아 보이더라. 나는 나중에 그렇게 하기 싫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죠. 또 장례식장을 다녀오거나 주변에 연명의료를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례를 통해 자신의 바람을 드러내보기도 하고요. 우리가 살면서 중요한 두 가지가 뭘까요? 생명과 돈이죠. 평생 벌어놓은 돈 자기가 결정해놓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요? 나라가 또는 자식이 결정하잖아요. 그래서 유서는 많이들 써두죠. 그럼 내 생명은요? 내가 결정해두지 않으면 의사나 가족이 연명의료하겠죠. 그렇게 중요한 걸 왜 남에게 맡기나요? 죽음도 돈처럼 자기주도권을 가지고 스스로 결정해야 해요.”
죽음에도 롤 모델이 필요하다
아무리 친근하게 설명해도 사람들은 여전히 죽음에 거부감을 느낀다. 그럴 때면 하는 수 없이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는 그다.
“딸이 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몇 년 뒤 아내도 암으로 세상을 떠났죠.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때를 계기로 웰다잉 공부를 하고 책도 쓰게 됐어요. 내 사정을 이야기하지 않고 웰다잉에 대해 말하면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해하기 힘들어해요. 난 그게 좀 싫지만 어쩔 수 없이 지난 아픔을 드러내게 되죠. 그래야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이야기하니까요.”
그는 사랑하는 이들과의 이별로 죽음을 공부하게 됐지만, 누구든 죽음을 생각하고 배우길 바란다고 했다. 그 방법의 하나로 인생의 롤 모델을 정하듯, 죽음에도 롤 모델 찾기를 권했다.
“좋은 죽음은 우리 삶에 좋은 지침서가 됩니다. 김수환 추기경이나 법정 스님처럼 최후의 순간에도 위엄과 존엄을 잃지 않는 모습에서 우리는 감동을 하죠. 시각장애를 딛고 미국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 차관보를 지낸 강영우씨는 세상을 떠나기 3개월 전에 기자회견을 열었어요. 자신이 시한부라고 밝히며 그동안의 삶이 행복했고 도움을 준 분들에게 감사하다고 말했죠. 존엄하게 삶을 끝내는 이들을 보며 내 인생도 그렇게 마무리하겠다고 느끼면, 지금의 삶을 더 의미 있게 살겠다는 마음이 생겨요. 난 이렇게 죽으려고 한다,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하지? 보람 있고 좋은 일을 하며 살아야겠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더 알뜰하게 살게 돼요. 잘 죽기 위해 잘 사는 것, 웰다잉을 생각하면 삶은 자연히 웰빙이 됩니다.”
오랫동안 교육 책임을 맡아오면서 후회스러운 일이 있다. 20대를 맞이하는 젊은이들에게 학교 성적이나 공부에 열중하는 것보다는, 너희들이 50세쯤 되었을 때 어떤 직업을 갖고 어떤 모습의 사회인이 되기를 바라느냐는 문제의식과 삶의 목표를 설정하도록 권고하고 이끌어주는 것이 더 소중한 과제였다는 사실이다. 그런 문제를 갖고 인생의 목표가 확실했던 학생들은 대부분 성공했고 보람 있는 장년기를 맞이했다. 그러지 못했던 젊은이들은 자기 길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방황하기도 하고 삶의 진로나 직업을 바꾸는 어려움과 세월의 낭비에서 오는 불행과 성공의 문을 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사회교육에 참여하면서는 후배들에게 꼭 권고해야 할 사항이 있었다. 당신이 80세를 앞둔 나이가 되었을 때는 부끄럽지 않고 보람을 느끼며 주변 사람들로부터 존경스러운 지도자의 모습을 갖고 살았다는 자부심을 갖출 수 있을까를 물어야 한다는 충고다. 구체적으로 지적한다면 확실한 인생관과 가치관을 갖고 50대부터 사회생활을 마감할 때까지 일과 더불어 정진해야 한다는 뜻이다. 아무런 인생의 목표도 세우지 못하고 사회생활을 위한 가치의식도 없이 장년기 30년을 다 보낸다면 그것은 인생의 상실이며 사회적으로는 무가치한 인생이 될 수도 있다. 내가 실패했다는 일로 그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인생관과 가치관이 없이 살았기 때문에 지도자로서의 기대와 존경심까지도 배신당하는 과오를 범한다. 70 평생의 업적과 노고를 부끄럽고 창피스럽게 마무리하는 사람들이 언론에서도 자주 보도되는 때가 있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 아니다. 자신의 인생관과 가치관이 없는 사람은 언제나 그런 유혹과 실망스러운 평가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 두 가지를 갖출 수 있다면 나는 누구나 행복하고 보람 있는 인생의 탑을 쌓아올릴 수 있다고 믿는다. 내 인생의 탑을 다른 사람과 비교해볼 필요는 없다. 나는 내 인생에서 보람과 행복을 찾으면 된다. 나이 들면 나에게는 나의 인생의 길과 목표가 있었고 그 과정에서 최선을 다했느냐가 문제일 뿐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또 그 사람의 길이 있다. 왜 나와 같은 길을 걷지 않느냐고 묻는 것이 잘못인 것이다.
사회 속에 살면서 내가 나를 믿을 수 있는 나이가 60쯤이라고 본다. 그리고 75세쯤까지는 누구나 인간적인 성장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75세쯤까지 성장한 자세와 위상을 언제까지 연장하는가 함이다. 내 주변의 친구들을 살펴보면 10년 정도는 연장된다고 봐도 좋을 것 같다. 그러니까 80대 후반기를 맞이할 때까지는 사회적 활동을 할 수 있고 보람 있는 인생을 유지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기간은 60에서 80대 후반기까지가 아닐까 하고 기대해본다. 기대가 가능으로 채워질 것으로 믿는다.
내 주변의 친구들도 그렇게 살았고 나 자신도 체험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생의 마라톤 경기를 위해서는 90을 목표선으로 삼고 누구나 열심히 달려도 좋다고 믿는다. 또 그것이 100세 시대를 맞는 우리들의 인생설계여서 타당하다고 본다.
가장 먼저 찾아드는 어려움은 건강이다. 많은 사람이 50대쯤부터 관리했다면 유지할 수 있었을 건강을 소홀히 여기거나 방치했다가 뒤늦게 발견하고는 후회하기도 한다. 또 평소부터 잘 조절했다면 충분히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장·노년기를 질병과 함께 보내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80이 넘으면 건강이 최고 제일이라고 해서 건강을 위한 건강이 인생의 전부인 듯이 살기도 한다. 그러나 일을 포기한 건강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유·소년 기간을 병약하게 자랐기 때문에 항상 열등의식과 조심스러움으로 살았다. 50이 되면서 건강의 자신을 갖기 시작했다. 그래서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조건들을 찾아왔다. 산책과 수영이 건강을 위한 한 가지 방법이 되었고 그때그때의 정신적 피로를 해소하기 위해 짤막한 휴식이나 오수시간을 갖는다. 나는 운동은 건강을 위해서, 건강은 일을 위해서라는 신념을 갖고 산다. 그래서 일을 사랑하는 사람은 일을 즐길 수 있고 일이 다시 내 건강을 이끌어준다고 믿는다.
건강 이외에도 문제가 있다. 가족을 비롯한 사랑하는 사람들의 고통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고 어떤 때는 손아래 가족들의 죽음에서 오는 어려움을 담당해야 한다. 그 고통과 불행은 경혐해본 사람이라야 안다. 그런데 80을 넘기면서는 누구나 비슷한 곤경에 빠질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자녀들의 사업이나 인생의 실패 때문에 그 짐을 분담하는 노년기를 보내기도 한다. 그렇게 사는 것이 인생이다.
그런 때는 오랜 세월과 많은 사람의 체험을 거울삼아 지혜로운 판단과 선택을 해야 한다. 체념할 것은 받아들이며 최선을 다했으면 하늘의 뜻을 기다리는 너그러움이 필요하다. 운명에 따른다는 것은 나의 노력의 한계 이상의 사건들을 대하는 지혜다.
나는 90의 나이를 넘기면서 누구나 겪는 시련을 받아들였다. 아내가 먼저 갔기 때문에 혼자 남는 어려움도 겪었다. 평생을 함께 일해오던 존경하는 친구들도 다 떠나갔다. 나 혼자 남은 것 같은 고독이 그렇게 힘겨운 줄 몰랐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아직 일할 수 있는 건강이 남아 있고 정성스럽게 쌓아올렸던 학문과 인생의 교훈이 유지되어 있기 때문에 사회적인 작은 기여라도 할 수 있어 감사히 생각한다. 사람은 아직도 여러 사람이 나를 필요로 하고 있는 세월만큼 행복한 때가 없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무엇인가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모든 시련과 난관을 극복할 수가 있다. 그리고 그 봉사와 섬김의 열매가 일을 통해 사회와 겨레에까지 미칠 수 있다면 그것이 내가 간절히 기원해왔던 평생의 소원이기도 하다.
나는 최근에도 나와 함께 같은 일을 해왔던 두 친구의 생애를 잊지 못한다. 우리 셋은 60이 될 때까지는 공부하는 일과 학문적인 일에만 열중해왔다. 그러다가 60을 넘기면서부터는 언제나 사회와 겨레를 위한 대화와 걱정을 나누곤 했다. 그런데 사회와 겨레를 위한 관심과 걱정 때문이었을까? 셋이 다 90이 될 때까지 열심히 일했다. 사회가 요청해왔기 때문이다.
김태길 교수가 먼저 떠나면서, 우리 세 사람이 50년의 우정을 계속하면서도 셋을 위한 즐거운 시간도 못 가졌지만 이제는 갈 나이가 되었으니까 조용히 서로 마음으로 위해주다가 차례가 오면 가자고 말했다. 이제 다시 정을 쌓았다가 한 사람씩 가게 되면 남은 사람이 힘들지 않게 남은 몇 해를 보내자고 말했다. 찾아올 이별을 슬픔 없이 보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던 김 교수가 먼저 떠났다.
몇 해 지난 후에 안병욱 교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용은 너무 간단했다. “김태길 선생을 보내고 힘들었는데 아무래도 김 선생이 혼자 남을 것 같아”라는 얘기였다 건강이 힘드냐고 물었더니, “왜 그런지 그렇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라면서 말을 끊었다.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었을 것이다. ‘나까지 가더라도 너무 힘들어하지 말라’는 당부다. ‘우리가 못다 한 일의 마무리를 위해 수고해주시겠기에 …’라는 말을 입 밖에 꺼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안 선생도 세상을 떠났다.
두 분이 다 행복하고 자랑스러운 인생을 살았다. 그 이상의 인생을 산 사람도 많지 않다.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두 분을 보내드릴 의무가 있다. 그런데 안 교수를 보내면서 슬프지는 않은데 계속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래도 행복한 눈물이었다.
>>김형석(金亨錫) 연세대 명예 교수
올해 97세인 김형석 교수는 평남 대동에서 태어나 일본 조치(上智)대학 철학과를 졸업했다. 연세대 철학과에서 30여년간 후학을 길렀고 지금은 저서활동과 강의를 병행하고 있다. 30년 전부터 일주일에 두 번씩 수영을 하고 아침 식사로 계란, 사과를 먹는 게 건강 비결이다. 후배들과 신촌 카페에서 담소를 즐기는 따뜻하고 다감한 한국 철학계의 아버지이다.
“여기가 수원인가? 어디니?”
“엄마, 이천이야.”
휠체어에 앉아 바람과 소통하고 계시던 엄마의 쓸쓸한 뒷모습을 소리 없이 눈물을 삼키며 바라만 보고 있었다.
집으로 모셔가라는 서울 S병원의 통보를 받고, 막내는 양동이로 퍼붓듯 쏟아지는 장대비 속에서 어머니를 이천 D병원으로 모셔갔다. 밖에서 마지막 식사로 평소 좋아하시던 우리밀국수를 드셨다. 엄마는 세상과의 이별을 그렇게 시작하셨다.
자식들이 오는 날이면 푸짐히 음식을 준비하셔서는 자식들 트렁크에 가득 채워 보내시곤 했던 엄마, 겨울철이면 손수 지으신 채소로 집집마다 김치냉장고를 가득 채워주셨던 엄마는 어느 날 병이라는 악마 앞에 무너져 침대 위에 누워버리시고 말았다. 힘드니까 농사 그만 짓고 편히 쉬시라는 자식들의 권유에도 아랑곳하지 않으시면서 “난 너희들 챙겨주는 재미로 산다. 농사를 안 지으면 무슨 재미가 있나?” 하시던 울 엄마. 울 엄마만큼은 안 아프시고 건강하실 거라 믿었는데 더 말리지 못했던 것이 후회가 되고 또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을 현실은 가르쳐주고 있었다.
“엄마! 운전면허증 따면 내가 차 사드릴게.”
운전을 하시고 싶어 하시던 엄마의 말씀에 여동생은 한글도 잘 모르시고 농사만 지으시던 엄마가 설마 면허증을 따실 수 있을까 하는 의문 속에 약속을 했다. 하시고자 하는 욕구가 강해 아버진 운전학원에 등록을 해주셨고 엄마는 주경야독으로 열심히 공부를 하셨다.
‘설마 엄마가 필기를 통과하실 수 있을까?’ 자식들은 엄마의 인지가 한 장을 채워 넘기는 것을 보고 애처로운 마음에, 최선을 다하셨으니 이제 그만하시고 관광이나 다니시며 즐겁게 사시라고 말씀드렸다. “택도 없는 소리 하지 마라.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지” 하시던 엄마는 인지 한 장 반을 붙이신 어느 날 합격했다는 전화를 주셨다. 그 전화를 받는 순간 쏟아졌던 감격의 눈물. 68세가 되어 받으신 면허증을 우리 가족은 크게 확대해서 코팅을 한 뒤 대대손손 자식들에게 조상의 영광을 알려야 한다며 한바탕 눈물파티를 했다. 그리고 동생의 축하 선물로 자동차 시승식을 하시는 엄마를 감격 어린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그 후 엄마는 이건 아무개 친구가 병원에 데려가줬더니 준 선물이구, 이건 울 곗날 친구들 태우고 바람 쐬게 해줬더니 준거라며 콩에 들기름에 과자에 선물이 가득하셨다.
동생이 “엄마! 친구분들 모시고 다니다 사고 나면 큰일 나. 그니까 다른 사람 태우고 다니지 마” 하니 불호령을 내리셨다. “아파하는데 어찌 보고만 있냐. 내가 알아서 잘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라” 하셨다.
삶의 팍팍함에 지치고 힘들다가도 엄마가 해내신 노력의 결실을 생각하며 ‘나도 할 수 있다’, ‘꿈은 이루어진다’를 되새기며 나를 희망의 마술 속으로 끌어들이곤 했다. 그렇게 우리 자식들의 롤 모델이셨는데 엄마가 큰 병 앞에 갑자기 쓰러져버리셨다. 씽씽 달리던 시골 할머니의 자가용도 그렇게 멈춰버렸다. 그리고 누우신 뒤에는 오히려 자식들 마음 기둥이 흔들리실까봐 안타까워하셨다.
누워 계시는 내내 필자는 무력함으로 엄마를 바라만 봐야 했고, 엄마는 서서히 삶을 정리하며 가파른 호흡을 기계에 의지하시다가 미국 출장 간 큰아들을 보시고서야 눈을 감으셨다. 늘 사랑과 열정을 우리에게 심어주신 엄마. 아직 돌려드리지 못한 사랑이 너무나 많은데 울 엄마는 어느 날 우리 곁을 그렇게 조용히 떠나가셨다.
“엄마! 죄송합니다. 존경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필자는 41년 전인 1976년 군대에서 만난 한 장교와의 인연을 뒤돌아보려 합니다. 1979년 전역 후에도 2011년까지 35년 동안 만남을 이어오던 중이었습니다. 담도암이라는 재활할 수 없는 병에 걸려 일찌감치 삶을 마무리한 옛 전우와의 안타깝고 못다 한 아쉬운 인연을 추억해봅니다.
오늘 이 화창한 초여름에, 따뜻한 체온을 함께 나눌 수 없는 누군가와 영영 작별을 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준비되지 않은 이별의 섭섭함과 안타까움이 쓰나미처럼 가슴속을 덮쳐옵니다.
그리 크지 않은 체구이셨지만, 뿜어져 나오는 정기는 어느 누구도 당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하셨습니다. 올곧은 모습은 주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셨습니다. 허스키한 음성에 호탕한 웃음소리는 지금도 귓가에 생생합니다. 둘러앉아 같이 나누던 음식도 맛나게 드시며 아낌없이 나눠주곤 하셨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담소하며 함께 즐기던 시간들이 진하게 남아 있습니다.
님은 혈기 왕성한 젊은 시절에 직업군인으로 청춘의 삶을 시작하셨습니다. 그즈음엔 누구나 어렵고 힘들은 시절이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남다른 학구열과 집중력을 발휘하시어 사병에서 영관 장교까지 진급하신 자수성가, 대기만성의 표본이셨습니다.
설악산 뒤편 깊숙한 골짜기에서 모래배낭을 메고 산악구보 훈련으로 체력단련을 해야만 했죠. 구보 후에는 배낭에 쓸려 전투복 등판에 배어나온 검붉은 핏자국을 개울가에서 같이 빨아 말려야 했습니다. 한여름 6·25를 전후로 하는 혹서기 천리행군과 12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진행했던 혹한기 천리행군도 생각납니다. 그때도 잰걸음으로 항상 선두에 나서서 팀원을 이끄셨죠. 고공낙하 훈련 시에는 팀원들의 무사 귀대를 기원하며 아내와 함께 성당에 나가서 기도를 드리기도 하셨다죠. 저희 팀원들은 전우애로 느끼기 전에 훈훈한 인간애로 함께했었습니다.
주도면밀한 전략과 반복적인 철저한 훈련으로 탁월한 팀 전투력을 평가받았습니다. 짧게나마 같이했던 힘겹고 즐거웠던 시간들을 이제 우리들 가슴속 깊이 서글픈 마음으로 묻어두어야 합니다. 앞으로 우리들끼리 모여 옛일을 얘기할 때마다 한 장씩 한 켜씩 꺼내 들춰보게 될 것입니다.
전역 후엔 인생의 선배로서뿐만 아니라 혈육으로 맺어진 친형제처럼 지내왔습니다. 계절마다 만나서 회포도 풀고 정분도 쌓으며 이승에서의 여정을 함께함이 즐거웠습니다. 퇴촌 산자락에 수십 개의 벌통을 줄 세워놓고 양봉을 하셨죠. 자나 깨나 망투를 덮어쓰고 따가운 벌침에 쏘여가며 돌보신 향긋한 꿀을 우리들과 주위 이웃들에게 나눠주시곤 하셨습니다. 꿀보다 더 달콤한 인간의 정을 건네주셨기에, 안타까이 보내드려야 하는 우리들 가슴이 더욱 메워져옵니다.
남들보다 더 투철한 사명감과 국가안보관을 가지시고 국방 업무에 30여 년 젊음을 받치셨습니다. 그동안 아내께서는 묵묵히 다정하신 손길과 따뜻한 미소로 손발이 되어주셨습니다. 아름다운 내조자로서 가시는 님에게 너무도 잘 어울리는 반쪽이셨습니다.
그 어떤 서방님이시고 그 어떤 애들 아버지이셨는데, 이렇게 먼저 떠나보내야 하시다니 억장이 무너지실 겁니다. 서글프고 안타까운 마음을 누가 대신 알아줄 수 있겠으며 어느 누가 보듬어줄 수 있단 말입니까? 이제 젊고 건실한 두 아들과 함께 못다 이루신 님의 뜻을 받들어 이어가셔야 합니다. 기도드리며 님이 떠나가신 커다란 공간을 채워나가셔야 합니다. 속상하고, 처절하고, 불쌍하고, 안타까워 눈앞이 캄캄하시겠지만 앞으로도 저희들이 함께할 것입니다. 조금만 더 힘을 내시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지금까지 우리들이 함께해왔던 것처럼 친근한 모습 이어가기를 먼저 가시는 님은 믿고 기대하고 계실 겁니다.
평상시 혈육의 정을 나눠오시던 일가친척분들과 이웃의 형제자매님들 모두 오셨습니다. 멀리 떠나시는 길을 배웅하며 우리들 모두 두 손 모아 빕니다. 하느님의 품에 따뜻하게 안기시어 연년세세 평안하시고 아름다운 곳에서 영면하시길 비옵니다.
이맘때쯤이었다. 1962년 완도 앞바다의 햇살은 따뜻했다. 바닷가엔 조개껍데기가 지천에 널려 있었다. 뱃머리에 선 소년은 이 정도 기온이면 다시는 추위에 떨지 않을 수 있겠다 싶어 안심했다. 당시만 해도 전라남도 완도에서 서울로 가려면 배를 두 번 타야 했고, 꼬박 24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14세 소년은 멀고 긴 상경길이 걱정되지 않았다. 고향에는 다시 내려오고 싶지 않았다. 금의환향을 위해서는 차라리 먼 여정이 낫다고 생각했다. 소년은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눈 앞의 조개들이 그의 인생을 바꿔놓을 것이라는 사실을. 소년은 나전칠기 대한민국명장 임충휴(任忠休·67)씨다.
“원래 어릴 때부터 공부에 관심이 없었어요. 그래서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무작정 서울로 가출을 했죠. 신문팔이며 구두닦이며 닥치는 대로 일을 했어요. 그런데 서울의 추위는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한 달 만에 집으로 도망쳐왔어요. 그리고 날이 좀 풀렸을 때 다시 서울로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어요. 동네 이장이셨던 아버지는 그때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다시 도망쳐올 것 같으면 생각조차 하지 말라고. 성공하려면 인내가 있어야 한다고 말이죠.”
임충휴 명장은 그날부터 아버지의 조언을 평생 가슴에 새기며 살고 있다. 그의 작업실 한쪽에는 큼지막하게 쓰인 ‘忍耐’라는 글자 액자가 걸려 있다.
그는 두 번째 상경 때 생각을 바꿨다. 무작정 돈을 좇기보다는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인천의 라이터 공장에 들어갔다. 그의 성실함이 통했는지 후암동의 한 공장에서 함께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나전칠기 공장이었다.
나전칠기를 처음 본 소년은 바로 사랑에 빠져버렸다. 영롱한 빛깔이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그가 나고 자란 고향에서 전복 껍질은 지천에 널린 흔한 것이었지만, 주걱 대신 무엇을 긁을 때 말고는 쓸모가 없었다. 그런 하찮은 것이 이렇게 아름답게 변하다니 신세계를 만난 것 같았다. 그는 이 기술을 꼭 자기 것으로 만들겠노라 다짐한다.
월급·휴일 없어도 감지덕지
그러나 기술을 익히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처음 3년간은 월급도 받지 못했다. 그저 명절 때 주는 옷 한 벌과 간식 정도 사먹을 수 있는 용돈이 전부였다. 일요일도 없었다. 휴일은 한 달에 한 번뿐이었다. 그래도 숙식을 해결하며 어깨너머 기술을 훔쳐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작업만 고됐던 것이 아니다. 한겨울에도 찬물로 청소를 하느라 손과 무릎에는 생채기가 가실 날이 없었다. 아직도 그의 몸에는 당시의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말도 못하게 힘들었죠. 어린아이에게는 벅찬 일들뿐이었어요. 당시엔 기술자 중 상당수가 통영 분들이었는데, 연장 명칭은 죄다 일본어였죠. 전라도 출신 아이가 일본어가 섞인 경상도 사투리를 어떻게 알아듣겠어요. 그런데 말도 못 알아듣는다고 혼났죠(웃음).”
엄격한 교육은 요령을 부리지 않고 길고 번거로운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해야 제대로 된 완성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체득하도록 해줬다. 전통 공예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었다.
그렇게 3년이 지나고 그는 이미 한 사람의 몫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그리고 또 한 번의 기회가 찾아온다. 중일(잡부가 아닌 정식 기술자의 초보 단계) 자리를 줄 테니 공장을 옮겨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이었다. 그렇게 인연이 된 공장은 보문동의 조안공예사. 이곳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0호 나전장 김태희 선생의 제자 안승권씨가 운영하던 공장이었다. 임충휴 명장은 아직도 당시에 인연을 맺은 13명과 친목회를 통해 친분을 이어가고 있다.
그를 담금질한 성공과 고난의 시간들
제대로 기술을 배울 수 있다는 기쁨에 날아갈 것 같았지만 그 역시 순탄하지는 않았다. 옻칠에 사용되는 고운 토분(土粉)을 얻기 위해 매일같이 흙먼지를 마셔야 했고, 나무판자 표면을 곱게 고르는 작업에 종일을 바쳐야 했다.
그렇게 또 정신없이 5년을 보내고 나니, 임충휴 명장은 업계에서 꽤 알려진 기술자가 돼 있었다. 탐을 내는 사람도 많았다. 말 그대로 어엿한 기술자였다. 웬만한 화장대나 문갑 정도는 만들 수 있는 실력이 됐다. 그리고 또 한 번의 스카웃 제의가 있었다. 이번에는 김호창 선생이었다.
“김호창 선생님 덕분에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었죠. 제 성실함을 눈여겨보셨는지
4년 만에 그 공장에서 공장장을 맡게 됐어요. 저보다 나이 많은 사람도 많고, 실력 있는 사람도 있었지만 악착같은 제 모습이 맘에 드셨나봐요. 그곳에서 공장장으로 일하다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제 회사를 차리게 됐어요. 독립하고 나서도 선생님이 하청을 주고 신경을 써주셔서 자리 잡는 데 큰 고생은 하지 않았어요.”
어렵게 융통한 300만원이 밑천이 됐다. 시작은 직원들 먹일 밥 지을 곳이 없어 비 맞으며 음식을 할 정도로 열악했다. 전라도 사람을 차별하는 풍토도 있어 어떻게든 신용만은 지키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성공이라는 계단을 차근차근 밟아나갔다.
“그때는 9자 나전칠기 장롱이 300만원 정도 했어요. 그 돈이면 당시 시골에서 논 20마지기(약 6000평)를 살 수 있었어요. 고향에서 장롱이 그 가격이라고 하면 믿지 않았으니까요(웃음). 덕분에 여러 고관대작의 집에 들락날락했는데 그분들 중에 재벌이나 국회의원, 장관도 있었죠. 가장 기억에 남는 일 중 하나는 삼성종합건설의 부탁으로 쿠웨이트 영빈관에 줄 선물로 자개병풍을 만든 것이에요. 사진이라도 하나 남겨놨으면 좋았을 텐데….”
인내는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 뚝섬과 성남에 나눠져 있던 그의 작업장에는 직원이 어느 새 100명에 달했다. 제대로 된 9자 나전칠기 장롱이 만들어지는 데는 6개월이 걸리는데, 그의 작업장에서는 하루에 하나꼴로 완성됐다. 그만큼 꾸준한 수요가 이어졌을 정도로 그의 작품은 시장에서 사랑받았다.
“당시 나전칠기 장롱은 주부들에게는 일종의 로망이었어요. 누구나 갖고 싶어 했고, 부의 상징이었죠. 실제로 정부에서는 이 장롱을 사치품으로 간주해 특소세 인지가 있어야 거래가 가능하도록 했어요. 주부들이 자개장을 갖기 위해 계모임을 하는 것도 흔한 일이었어요.”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그에게도 어려움이 닥쳤다. 1978년 2차 유류 파동에 잠시 휘청했던 사업이 좀 견뎌지나 싶더니 1997년 IMF라는 직격탄을 맞고 말았다. 현찰 대신 받았던 어음들은 줄줄이 부도가 났다. 당시 부도난 어음의 총규모는 12억8000만원 정도. 개인사업자가 넘길 수 있는 액수가 아니었다.
“당시 인사동과 명동, 신설동에 거래하던 가게들이 많았죠. 물론 대부분 어음으로 거래를 했어요. 받지 못한 돈이 12억이 넘었어도 절 믿고 따라준 거래처, 직원들을 실망시킬 순 없었죠. 몇 채 가지고 있던 집들을 모두 처분하고 빚잔치를 했죠. 직원들에게 퇴직금도 조금씩 챙겨주고. 그러고는 칠기와는 인연을 끊으려 했죠.”
실제로 그는 칠기와 잠시 이별했지만 다시 돌아왔다. 그도 천직을 잊기 어려웠지만, 그의 솜씨가 사장되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주변의 만류도 컸다. 그렇게 해서 지금의 진성옻칠공예가 다시 부활했다.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면서 그는 과거의 제작 방식과 전통 소재에 더욱 집중했고, 이러한 노력은 2004년 노동부의 칠기 분야 명장 지정으로 결실을 맺는다. 그는 명장 지정 이후에도, 전승공예대전 문화재청장상, 한국옻칠공예대전 금상 수상, 대한민국명장회 최우수 명장 위촉 등으로 진가를 제대로 인정받고 있다.
“어려운 시기를 잘 이겨냈다며 주는 상 같았어요. 그간의 노력이 인정받은 것 같아 기뻤습니다.”
그는 명장 제도가 기능인들의 사기를 살리고, 상공인들의 활동에 활력을 불어넣었다고 평가했다.
칠기에 대한 몇 가지 오해
나전칠기에 대한 가장 큰 오해 중 하나는 자개 장식에 관한 것. 나전칠기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당연히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수많은 자개 장식이다. 이 자개 장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가구는 높은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일까? 임 명장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칠기의 생명은 곱고 투명하게 옻칠을 하는 실력과 옻칠의 재료인 칠액에 있어요. 칠액은 옻나무의 수액을 정제해서 만드는데 1Kg에 70만원을 호가하기도 해요. 그래서 예전엔 저렴한 동남아에서 캐슈(cashews) 나무 수액으로 만든 칠액을 쓰는 곳도 있었어요. 사실 자개가 가구 표면에서 차지하는 면적이 넓으면 넓을수록 만드는 과정은 쉬워요. 또 자개 재료는 상대적으로 저렴하고요. 그래서 자개는 약간의 장식으로만 쓰인 옻칠 가구가 훨씬 귀하고 비쌉니다.”
또 옻칠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 조금 다른 방법으로 진행된다. 말리는 과정이 그렇다. 칠액을 바르고 말리고 바르고 말리는 과정이 수차례 반복되어야 제대로 된 옻칠의 광택이 살아난다. 투명 옻칠은 이 과정을 스무 번 정도 반복해야 한다. 보통 말린다는 표현은 수분이 날아가 표면이 단단하게 굳는 것을 의미하지만, 옻칠은 물로 말린다. 습도가 80% 이상 되는 곳에서 표면을 굳혀야 특유의 투명함이 살아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업실의 건조장 바닥은 늘 흥건하다.
이렇게 천연재료로 만들어진 칠기는 모양뿐만 아니라 기능적으로도 훌륭한 생활 도구가 된다. 환경호르몬이 원인으로 지목되는 아토피 같은 질환을 예방하는 데도 좋은 친환경 재료로 알려져 있다. 칠기 가구가 아기용 옷장으로 입소문이 난 것도 이 때문이다. 잘 썩지도 않고 불도 잘 붙지 않는다.
후진 양성을 위한 노력
임충휴 명장은 최근 가능한 한 많은 사람에게 옻칠을 전수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보통의 장인이라면 옻칠을 평생의 업으로 삼겠다 마음먹은 제자들 중에서 후계자를 골라 기술을 전수하겠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지금 업계의 가장 큰 문제는 일할 장인이 없다는 것이에요. 특히 자개장 같은 건 기능인이 부족해서 웬만한 곳에서는 만들 엄두도 못 내요. 50세 정도는 이제 현장에서 젊은 축에 듭니다. 예전엔 옻칠조합 회원이 100명도 더 됐는데, 이젠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가 돼서 조합도 없어졌어요.”
그래서 시작한 것이 후진 양성이다. 군포시에 위치한 서울남부기술교육원 옻칠나전학과에서 취업이나 취미를 목적으로 모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기술을 가르친 지 2년이 됐다. 이제 그를 사사한 학생이 100명이 넘는다. 장인에게 기술은 밥줄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는 교육원의 제안에 흔쾌히 응했다.
“전통공예를 현대적 디자인에 접목하고 싶어도 매일 비슷한 것만 만들어온 사람들에겐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칠기 소비를 늘리기 위해서는 다양한 시도가 필요한데 말이죠. 그런데 교육원에서 학생들을 만나면서 오히려 제가 배우는 기분이에요. 실제로 미술 전공자들도 많이 있고요. 이제 교육원에 나가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일은 제 인생에서 보람 있는 일 중 하나가 됐어요.”
사람은 왜 사는가.
어디선가 홀로 피어나 고통과 울음으로 맞이한 삶의 시작.
살아온 과정이야 어떠하듯 결국은 순서 없이 이별 하는 것을.
그 떠남을 예감치 못하고, 예약 없이 혼자 훌쩍 떠나가는 것을.
그 악다구니로 살아온 짧은 삶의 여정 속에서 과연 쥐고 가는 것은 또 무엇이었을까.
누군가의 삶은 이별의 아쉬움 세상 속에 아주 진한 색깔로 떠들썩하고
어떤 삶은, 조용히 몇몇 친지 들만의 가슴
저 편 속에 묵묵히 들어앉는다.
‘블랙 앤 화이트’ 색깔의 조화처럼 이승과 저승의 갈림길.
감회의 눈물은 애잔한 슬픔으로 다가와 봄빛의 곁으로 쓸쓸히 내려앉는다.
사람이 산다는 것이 삶과 죽음의 문턱에서 그저 덧없음을
그 타고 남은 흔적만 덮쳐와 송두리째 무너져 버린다.
만남이라는 소중한 인연이 있었기에 아름다운 이별도 있는 것.
사람들은 아니, 우린 기약없이 그 만남을 맞이 했었는데,
또 준비없는 이별로 가슴의 상처만 끌어안고
하얗게 남아 있는 삶이라는 고뇌와 검게 내려 앉은 떠남의 깊은 슬픔 속에서도
또 살아 버텨야 함은 남은 사람들의 마지막 몸부림일까.
아님, 아직 산 삶에 뒤엉킨 애착사랑이련가.
사람들의 발버둥은 온갖 얼룩진 색깔로 번져만 가면서도
언젠가 어디론가 떠날 때를 예감치 못하며, 다시올 이별의 시간을 연장만 하고있다.
그래, 그 어떤 색깔 총천연색 세상에도 생명의 기쁨은 존재하리라.
숱하게 부딪치며 모순속에서도 막연히 또 터득하는 것이
인생이기에 산 사람들은 성숙을 자위하며, 그 포용의 삶을 또 살아가는 것이리라.
오늘도 색깔 다른 삶의 그림자를 등지며 오래된 인연 살갑던 만남을 떠나보낸다.
마음 저 켠 어딘가에 드리워질 추억의 공간만 남겨 버린 채…
강대규 감독 작품이다. 주연에 사형수 문옥 역으로 나문희, 정혜 역으로 김윤진이 나온다. 여자 교도소에 수감된 여죄수들의 얘기다.
사형수를 비롯해서 꽤 큰 중범죄자들을 수감하고 있는 여자 교도소인데 생각했던 것보다 교도관들도 친절하고 분위기도 좋다. 어느 날 위문 공연차 교회에서 합창단이 다녀갔다. 교도소에서 아이를 출산한 정혜는 여자 수감자들로 구성된 합창단을 만들자는 제안을 낸다. 잘되면 아들과 특박을 얻는 조건이었다. 마침 고참 사형수 문옥(나문희 분)이 음대 출신으로 지휘를 맡게 하고 연습에 들어갔으나 만만치 않다. 정혜가 자장가를 부르면 아이가 울음을 터뜨릴 정도로 음치다. 교도소 내에서도 수감자들이 한데 모이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 소프라노가 없어 고민하던 중에 성악가 출신의 젊은 여죄수가 들어온다. 처음에는 혼자 놀았으나 결국 마음을 열고 합창단에 합류한다.
저마다 아픈 사연이 있어 교도소에 들어온 죄수들. 교도소에서 아들을 출산한 정혜는 법적으로 18개월이 되면 입양을 보내야 하는 입장에 있다. 여죄수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아들과 눈물의 이별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합창단은 교도소 내 공연에서 찬사를 받고 드디어 서울에서 열리는 전국합창대회에도 참가하게 된다. 그녀들의 합창 소리가 교도소 담장을 넘어 세상에 막 울려 퍼지려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합창대회에 참가한 날 고위 경찰관 부인이 목걸이를 분실한 사건이 벌어지고 여죄수 합창단이 의심을 받게 된다. 온갖 수모와 함께 대회 출전도 취소되는 등 절망적인 상황으로 치닫는다. 하지만 교도소장의 설득으로 간신히 대회에는 참가할 수 있게 된다.
합창대회를 마치고 교도소에 돌아왔을 때 사형수들에게 사형 집행 명령이 떨어졌다. 합창단을 지휘하던 문옥은 면회 신청이 왔다며 불려 나간다. 그러나 문옥은 그것이 자신에 대한 사형 집행 명령이라는 것을 감지한다. 교도소는 눈물바다가 된다.
필자도 현대백화점 합창단 오디션에 합격해 6개월간 합창 연습을 한 적이 있다. 당시 KBS-TV에서 합창단 프로그램이 선풍적인 인기를 일으킨 직후였다. 당시 합격자들은 여자 39명에 필자가 유일한 남자였다. 남자 목소리로 여자 알토 그룹에서 합창을 하려니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알토, 메조소프라노, 소프라노가 각자 자기 몫의 소리를 내며 화음을 맞춰가는 과정은 감동적이었다. 연습 과정은 꽤 힘들었다. 연습 과정 중에 예민한 사람들이 분란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하모니라는 매력에 푹 빠지고 말았다. 누구든 절대로 튀면 안 되는 것이 합창이다.
이 영화는 합창으로 하모니를 이루게 되면 서로 양보하고 함께 잘해보려는 협동정신이 생기는 것을 보여줬다. 시니어들에게 가장 권하고 싶은 것이 합창이다. 한 번쯤 해보면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이다.
중국 절강성(浙江省) 소흥(紹興)에는 심원(沈園)이란 명소가 있다. 중국 남송시대 때 부자였던 심씨 소유의 아름답고도 거대한 정원인데, 이 정원 입구에는 계란 모양의 둥근 바위가 둘로 쪼개져 있는 조형물이 서 있다. 가서 살펴보면 ‘단운(斷雲)’이란 행서체 글자가 한 자씩 새겨져 있다.
이게 무슨 뜻일까? 바로 부부간의 정을 뜻하는 ‘운우지락(雲雨之樂)’을 끊어버린다는 뜻으로, 사랑하는 부부였지만 헤어지지 않을 수 없는 슬픈 사연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곳은 바로 중국 남송시대의 유명한 애국시인 육유(陸游, 1125~1210)의 애절한 사랑의 일화가 서려 있다. 육유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같이 성장한 당완(唐婉)이라는 이종사촌 동생이 있었다. 어렸을 때는 소꿉친구로 지내다가 미모와 재색을 겸비한 규수로 성장하자 둘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어 육유의 나이 20세 때 결혼을 하게 된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육유가 과거시험에 자꾸 낙방하자 며느리 탓이라 여기게 된다. 자식도 못 낳고, 시아버지의 갑작스런 사망. 이런 상황들이 모두 며느리를 잘못 들여 생긴 일이라고 생각한 시어머니는 급기야 둘을 강제로 떼놓는다. 모친의 성화에 시달리다 못한 육유는 이혼을 가장하고 인근에 당완을 숨기고는 몰래 만나는 행각을 이어가지만 곧 들통이 나고, 결국 모친이 정해준 왕씨 성의 여인과 재혼을 한다. 어쩔 수 없게 된 당완도 친정어머니의 권유로 조사정이라는 사람에게 개가(改嫁)를 하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헤어진 두 사람이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는데, 육유가 27세 되던 봄이었다. 육유는 심원에 놀러왔다가, 같은 날 봄나들이를 온 당완을 만나게 된다. 당완의 낯빛이 변하는 것을 본 남편 조사정은 사정을 물었고, 당완이 사실대로 말하자 조사정은 대인의 풍모를 보이며 술과 안주를 준비한 뒤 육유를 초대해 두 사람을 만나게 해준다. 그러나 서로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육유는 짧은 만남을 뒤로 한 채 영원한 이별을 하게 되는데, 그 비통한 마음을 담아 이 라는 시를 벽에 써두고 떠난다. 이듬해 이 정원에 다시 놀러온 당완은 이 시를 보고 같은 제목의 시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다. 그리고 마음의 상처가 너무 컸는지 시름시름 앓다가 일 년 뒤 세상을 떠나고 만다. 당완의 죽음을 알게 된 육유는 큰 상처를 지닌 채 시간이 날 때마다 이곳 심원을 찾아와 당완을 그리는 시를 지었는데, 그중 유명한 작품이 75세 되던 해 지은 라는 시다.
城上斜陽畵角哀(성상사양화각애) 성곽에 노을이 지니 들리는 뿔피리소리 애절한데,
沈園非復舊池臺(심원비복구지대) 심원은 옛날의 연못과 누대로 돌아갈 수 없구나.
傷心橋下春波綠(상심교하춘파록) 서로 마음 아파했던 그 다리 아래 봄의 물결은 푸른데,
曾是驚鴻照影來(증시경홍조영래) 그때 놀란 기러기 같던 그녀의 모습이 그림자처럼 스치네.
夢斷香消四十年(몽단향소사십년) 꿈도 없어지고 향도 사라진 40년…
沈園柳老不吹綿(심원유로불취면) 심원의 버들도 늙어 버들 솜도 날리지 않는구나.
比身行作稽山土(차신행작계산토) 이 몸도 곧 죽어 회계산(會稽山) 흙이 되겠지만,
猶弔遺蹤一泫然(유조유종일현연) 그녀의 남은 옛 자취 찾으면서 한없이 눈물 흘리노라.
>>하태형(河泰亨) 전 현대경제연구원장
서울대 경영대 졸업, 뉴욕주립대 경제학박사. 수원대 금융공학대학원장 역임.
홍콩의 한 아파트에 두 가구가 새로 이사 온다. 지역신문사 기자 차우(왕조위 분) 부부와 무역 회사에서 비서로 일하는 수리첸(장만옥 분) 부부다. 수리첸의 남편은 무역 회사에 근무해 출장이 잦고 차우의 아내도 집을 비우는 시간이 많다. 차우는 수리첸의 핸드백이 아내와 똑같다는 것을, 수리첸은 남편의 넥타이가 차우 것과 같다는 것을 알고 나서 자신들의 남편과 아내가 서로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차우와 수리첸은 배우자의 일로 괴로워하다가 점점 가까워지고 마침내 사랑에 빠진다.
배우자의 외도로 쓸쓸하게 남겨진 두 남녀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을 그린 왕가위 감독의 줄거리다. 서구의 가치와 전통 가치가 충돌하던 홍콩에서, 사회의 시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별을 선택했던 두 사람은, 이루지 못한 사랑임에도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했던 순간으로 그때를 기억한다. 훗날 차우는 앙코르와트 사원 벽 구멍 속에 사랑했던 리첸과의 비밀스런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인생의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절을 풀과 진흙으로 봉인한다. 앙코르와트 사원 벽에 비밀을 봉인하는 왕조위의 모습은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가슴에 서늘하게 남아 있다.
이 영화가 아름다운 건 주인공들이 가지고 있는 사랑의 감정이 영원할 것임을 믿기 때문이다. 만일 이 영화에 후일담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실제로 감독은 두 주인공이 나중에 다시 만나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찍어두었다고 한다. 짙은 색의 수수한 양복만 입고 다니던 차우는 선글라스에 청바지로 멋을 내고, 리첸은 아들을 하나 두었다는 설정이다. 고맙게도 감독은 변화된 주인공들의 모습을 생략함으로써 차우와 리첸의 사랑이 영원할 것이라는 낭만적 상상을 가능하게 해줬다.
그러나 현실의 사랑은 영화와 다르다. 결혼식을 올릴 때 주례 앞에서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될 때까지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맹세하지만 얼마 못 가서 그 맹세가 얼마나 허망하고 덧없는지 알게 된다. 사랑에 빠졌을 때는 하루하루가 축제 같고 설렘 가득한 나날이지만 로맨틱한 사랑이 일상이 되면 불타오르던 마음도 식어버리고 지루해진다. 콩깍지가 낀 상태가 영원히 유지되기 어렵다는 의미다. 사랑은 변하는데 결혼생활은 점점 더 견고해지니 불협화음이 생긴다. 어쩌면 비밀스런 관계를 꿈꾸고, 밖으로 눈을 돌리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바람구두라는 닉네임으로 블로그 활동을 하고 있는 필자에게 본드라는 남자가 다가와 말을 걸기 시작했다. 본드라는 닉네임을 쓰는 걸로 봐서 주색잡기에 능하고 여자 꼬시는 데 관심이 많은 남자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혹시 첫사랑을 못 잊는 순정파는 아닐까. 그렇다면 낭만적인 사람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무튼 호기심을 갖게 됐다. 그런데 필자만 그런 게 아니었다. 상대방도 ‘바람구두’가 궁금했던 모양이다. 자유로운 사고방식에, 조금은 화려한 여자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본드 앞에 나타난 바람구두는 화장기 없는 얼굴에 점퍼 차림이었다. 그는 실망스러웠는지 “바람구두님 진짜 맞으세요?”라고 몇 번을 되물었다. 우리는 서로의 속내를 고백하고 껄껄 웃고 말았다.
만일 남편만큼 매력적인 사람이 나타나면 어떻게 할까? 에서 불륜의 문턱까지 갔던 두 사람이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면서 제자리로 돌아가기를 애쓴 것처럼, 필자도 멋진 결별을 하리라 상상해보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인생을 살아갈 때 우리는 슬픔을 겪는다. 그런데 그 슬픔이 극에 달한 절절함은 이별(離別)할 때 나타난다. 이별의 슬픔을 노래한 시로는 중국 위진남북조시대 강엄(江淹)의 ‘별부(別賦)’를 최고로 친다.
암담하여라… 혼(魂)이 다 녹아나는 건, 오직 이별 외에 또 다른 것이 또 있을까! … 고로, 이별이란 정서(情緖)는 하나이지만, 이별하는 사연은 만 가지라네… 봄풀이 푸르게 싹을 틔우고, 봄물이 맑은 물결 일으킬 때에, 사랑하는 임을 남포(南浦)로 보내면, 그 가슴 찢어지는 아픔을 어떻게 하리오! … 이처럼 이별의 상황은 일정치 않고, 이별의 이치도 갖가지이나, 이별에는 반드시 원망(怨望)이 있고, 그 원망은 반드시 가슴에 사무치게 되네…
(黯然銷魂者, 唯別而已矣! … 故別雖一緒, 事乃萬族... 春草碧色, 春水淥波。送君南浦, 傷如之何! … 是以別方不定,別理千名。有別必怨, 有怨必盈…)
이별의 아픔이 얼마나 절절한지 ‘앞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혼마저 다 녹아내린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이별의 아픔 중 사랑하는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인의 절절함이 가장 돋보이는 시는 조선시대 천재 여류시인인 이옥봉의 ‘몽혼(夢魂)’이다.
近來安否問如何(근래안부문여하)
요즈음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月到紗窓妾恨多(월도사창첩한다)
달빛 드는 사창에 소첩의 한이 더욱 서립니다.
若使夢魂行有跡(약사몽혼행유적)
꿈에라도 넋이 오간 흔적 만일 남는다면,
門前石路半成沙(문전석로반성사)
문 앞 돌길이 반은 모래가 되었을 거예요.
이옥봉은 조선시대 선조 때 충청도 옥천(沃川)군수를 지낸 이봉(李逢)의 첩에게서 태어나, 승지(承旨)를 지낸 조원(趙瑗)의 소실이 된 여인이다. 조원을 사모하여 소실을 자청하였는데, 조원은 이옥봉을 받아들이며 어릴 적부터 시명(詩名)을 날리던 이옥봉에게 다시는 시를 짓지 말라는 조건을 달았다. 그러나 얼마 후 조원 집안의 산지기가 칠석날 밤에 술을 한잔하고 돌아오다가 억울하게 소를 훔친 누명을 쓰게 되어 하옥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 아낙이 옥봉에게 소장을 써달라고 간청하자 옥봉은 아낙을 불쌍히 여겨 ‘위인송원(爲人訟寃)’이란 시를 지어 파주목사에게 보낸다.
洗面盆爲鏡(세면분위경)
얼굴을 씻는 동이로 거울을 삼고
梳頭水作油(소두수작유)
머리 빗을 때 물로 머릿기름 삼는 신세입니다.
妾身非織女(첩신비직녀)
이 몸이 직녀가 아닐진대
郎豈是牽牛(낭기시견우)
제 낭군이 어찌 견우가 되오리까?
칠석(七夕)날 일어난 사건이므로, 견우(牽牛)와 직녀(織女)의 고사를 인용해 견우가 아닌 사람이 어떻게 소를 끌고 갔겠는가라고 쓴 기막힌 시다. 이 시를 접한 파주목사는 기이하게 여겨 산지기를 방면하지만, 결국 이 사건은 구설수에 오르게 된다. 일종의 필화(筆禍)사건인 셈인데, 불같이 화가 난 조원은 이옥봉을 쫓아내게 되고 이후 이옥봉이 버림받은 뒤 지은 시가 바로 ‘몽혼’이다. ‘자술(自述)’이라고도 불리는 이 시는 참으로 절절하다. 달빛이 창을 비추는 밤, 버림받은 여인의 한이 서린 그리움은 더욱 깊다.
>>하태형(河泰亨) 전 현대경제연구원장
서울대 경영대 졸업, 뉴욕주립대 경제학박사. 수원대 금융공학대학원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