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별한 김준기(79)씨는 15세 차이 나는 아내와 1995년 재혼했다. 현재 결혼생활 22년, 그러나 이들 부부는 아직 신혼이나 다름없다. 김준기씨는 평생을 농사꾼으로 살아왔다. 힘들고 고단한 농촌계몽운동, 야학, 4-H연구회 등 사회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아내와의 일상에 대해 묻자 그의 얼굴에는 어느새 미소가 가득해진다.
재혼한 부부에게 ‘가족’이라는 단어만큼 가슴을 따뜻하게 하는 말이 또 있을까. 1월의 찬바람 속에서도 지나온 인생을 이야기하는 김준기씨의 얼굴에선 온기가 떠나지 않았다.
“처음엔 많이 망설였어요. 겁도 나고. 남의 시선도 두렵고. 그런데 살아보니 내 신발같이 내 발에 잘 맞는 느낌이에요. 살수록 새록새록 감사하기도 하고요. 이 사람 못 만났으면 어떤 선택을 했을지 몰라요. 사실 혼자가 되면 기댈 데가 없어요.”
전 부인과 사별한 뒤 3년도 안 돼 재혼한다고 하니 그의 재혼을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이 달갑지 않았다. 나이 차이도 많을 뿐더러 다 큰 자식들(2남 2녀)의 얼굴 보기도 민망했다.
그러나 김준기씨는 재혼을 합리적으로 생각했다.
“첫 번째 아내가 세상과 이별한 후 혼자 치매를 앓고 있는 어머니를 돌봐야 하는데 사실 그럴 처지가 못 됐어요. 자식들을 위해 일을 해야 했으니까요. 어머니를 모실 사람이 필요한데 미안해서 지금의 아내한테 선뜻 결혼하자는 말을 못 하겠습디다. 제가 그렇게 어쩌지 못하고 있던 어느 날 아내가 결혼해서 어머니 모시겠다고 먼저 말을 꺼냈어요.”
자식들도 늦게 만난 사랑인 만큼 더 존중하고 배려하면서 한길을 걸어가는 이들 부부를 응원해줬다.
“그렇게 착한 사람이 내게 오는데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부부의 금실은 자랑할 만하다. 20년이 지나도록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다니 말 다했다. 싸우기보다는 서로 이해하고 가끔 서로 놀랄 만큼 같은 생각을 하는 ‘짝’이다. 둘 사이에 끊이지 않는 것은 대화다.
이들 부부가 황혼에 인연을 맺고 행복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을 묻자 김씨는 ‘결핍의 생활화’라고 강조했다. 그는 “황혼재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에게 베풂을 기대하기보다는 그저 말없이 기다려주는 것”이라며 “수십 년을 각자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만큼 존중과 배려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체면 때문에 재혼을 망설이는 이들을 주위에서 많이 본다”며 “인생이 얼마나 남았겠는가. 좋은 사람 있으면 결단을 내리라”고 귀띔했다.
서로에게 너무 큰 기대 하지 말아야
재혼 후 재산 문제로 자녀와 갈등을 겪거나, 서로에 대한 높은 기대치로 인한 갈등으로 상담을 받는 재혼 부부들이 많다고 들었다. 실제로 초혼에서 받지 못한 애정과 돌봄을 재혼 남편에게 바라고, 전통적인 아내의 의무만을 강조하면서 많은 갈등이 생긴다고 한다.
그는 “서로에게 너무 큰 기대를 하기보다는 여생을 함께 보낼 좋은 말벗이나 몸이 아플 때 곁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동반자라고 생각해야 결혼생활에 성공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결혼생활이 마냥 좋기만 하지는 않다는 전제하에 우려되는 점은 없냐는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나이 들어가니 걱정이 생겼습니다.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나면 아내 혼자 남는데 그럴 때 자식들이 등지고 왕래도 안 하게 되는 상황이 될 것 같아서요. 우리 자식들이야 그러지 않겠지만 다른 재혼 가정들을 보면 많이들 그런다고 합니다. 실제로 장례식장에 가보면 미망인이 혼자 떨어져 있고 자식들은 쳐다보지도 않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이런 일이 없기를 바란다는 그는 대안을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며 잠시 울컥했다.
“어렵게 늦게 만났으니 하루를 살아도 지금처럼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죠. 아내의 잔소리는 사랑의 불꽃이 되어 다 태워진 뒤 연기를 모락모락 피우며 향기로운 명언으로 쏙 박힙디다.”
질곡의 인생길을 아내는 묵묵히 따라왔다
“삼천만 잠들었을 때 우리는 깨어/ 배달의 농사형제 울부짖는 날/ 손가락 깨물며 맹세하면서/ 진리를 외치는 형제들 있다…”
‘농민가’의 한 구절이다. 이 노래를 전국적으로 보급한 이가 바로 김준기씨. 그는 “농민가는 원래 서울대 농대 다니던 시절에 ‘농사단’의 단가로 만들었어요. 가사는 나와 동기인 김성훈 전 농림부장관과 후배 이용화(언론인) 등 농사단 멤버들의 의견을 모아 만든 공동 창작이고, 곡은 구전되던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저는 10대에는 너무 가난했고, 20대에는 농촌계몽활동을 했고, 30대에는 농민운동을, 40대에는 지역운동을, 50대에는 통일운동을, 60대에는 정치운동을 한 셈입니다. 이제 70대에는 뭔가 가치 있는 일을 해보려고 해요. ‘一農공동체사회연구소’를 만들어 지역공동체운동과 지방 주민자치교육 그리고 협동조합 네트워크 등 11개 학교 4-H 조직들을 챙겨보고 있습니다.”
사람농사꾼으로서 사람농사를 짓는 것이 평생 업이었던 그는 서울대 농대 재학 당시 전국대학 4-H연구회연합회 초대 회장을 지냈다. 이후 가톨릭 농민회를 주도하면서 상계동 농장을 운영, 1975년부터 신구대학 교수로 학생들에게 농업을 가르치며 성남YMCA, 시민대학을 만들었다. 그러나 1986년 그는 해직을 강요받고 강사로 활동하게 된다. 1989년에는 임수경과 서경원의 평양방문 사건이 공교롭게도 그와 연관이 됐는데, 그가 속해 있던 ‘민자통(민족자주평화통일중앙회의)’에서 정부의 통일정책을 비난한 성명서가 문제가 되는 바람에 결국 안기부로 끌려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2년간 옥살이를 했다. 그때가 1991년. 이후 사면·복권이 되고 나중에는 명예회복이 됐지만 평생을 농민과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걸어온 그의 여정은 험난했다. 그러나 그의 곁에서 묵묵히 내조를 해온 헌신적인 아내가있었기에 그 세월을 견딜 수 있었다.
“잘하려고 하는 게 아닌, 진짜 잘하는 아내가 제 인생의 가장 큰 선물”이라고 말하는 사람농사꾼 김씨에게 자식농사는 어땠냐고 물었다.
“사연 없는 집이 어디 있겠어요. 마음처럼 안 되는 자식들과 갈등하는 것은 다른 집들과 똑같아요. 하지만 지나고 보니 그 모든 것도 ‘행복’이라는 선물이더라고요. 아내는 마음이 고운 사람입니다. 제 뜻을 잘 따라준 아내에게 항상 고맙죠. 잘 자라준 아이들에게도 고마움이 앞섭니다. 각자가 사회 일원으로서 제 역할을 다하고 있어 감사할 따름입니다.”
1977년 10월 24일 김포공항. 자유로운 해외여행이 어려웠던 시기. 하지만 이날은 달랐다. 생이별을 앞둔 인파로 가득했다. 한 사람을 배웅하기 위해 형제, 자매와 조카까지 모두 공항에 자리를 잡았다. 곳곳에서 울음이 터져 나왔고, 힘줘 잡은 두 손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곧 먼 이국의 땅으로 떠날 파독(派獨)광부들을 환송하는 자리. 그 자리에는 만삭의 아내와 두 아이를 끌어안고 이별을 고하는 민석기(閔錫基·66)씨도 있었다. 그리고 39년이 흘러, 그는 이날의 이야기를 자서전에 기록해 세상에 내놓았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오병돈 프리랜서(Studio Pic) obdlife@gmail.com 장소협조 Frenchie B
1960년대 초 대한민국. 당시 경제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박정희 군사정권 초반 시행한 경공업 위주의 수출 지향 정책은 되레 실업자 양산과 외화 부족 현상을 증가시켰다. 대책이 필요했다. 그래서 선택된 방안 중 하나가 바로 ‘인력 수출’이다.
당시 독일은 ‘라인 강의 기적’이 완성돼가고 있었다. 경제는 가파르게 성장했고, 일자리는 많았지만 사람이 없었다. 일자리를 고를 수 있는 상황에서 거친 일을 하려는 사람이 부족했다. 당연히 육체노동이 요구되는 일자리는 외면당했다. 독일 정부 역시 비슷한 선택을 했다. ‘인력 수입’이다.
양쪽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1963년부터 1980년까지 약 7900여 명의 광부가 독일에서 근무했다. 500명을 모집했던 첫해, 첫 번째 모집에는 4만6000여 명이 몰릴 만큼 좋은 일자리는 절실했다. 민석기씨도 그중 한 명이었다.
독일에서 찾던 ‘경력 광부’
한때 광부만 2000명이 넘었던 함태광업소. 사촌누나와 매형 덕분에 광부로 자리 잡을 수 있었고, 그곳에서 2년을 일했다. 독일로 갈 사람을 뽑는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도 그때였다.
“독일로 갈 광부를 뽑는다네.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났어.” 동료 광부의 전언이 계기가 됐다. 그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민석기씨는 새로운 꿈이 생겼다고 했다. 당시 독일 광부들의 월급은 600마르크(약 160달러) 정도로 한국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제가 독일에 지원했던 시기는 파독광부제도 시행 후반이었어요. 초기에는 해외생활에 적응할 수 있을 만한 머리 좋은 사람들을 주로 뽑았죠. 처음에는 대학생들이 많이 갔는데, 일을 안 하고 요령 피우는 친구들이 많았나봐요. 그래서 힘쓸 만한 사람들 위주로 뽑았더니 이번엔 폭력사건이 골치를 썩였죠. 그래서 독일 측에서 요구했대요. ‘진짜 광부’를 보내달라고. 이때 탄광일에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우대해줬고, 저도 되겠다 싶어 지원하게 됐죠.”
들어 올리지 못했던 가마니
영화 에는 파독광부를 지원했던 주인공 ‘덕수(황정민 분)’가 체력시험을 보는 유명한 장면이 나온다. 반드시 합격하겠다는 일념으로 쌀가마니를 힘겹게 머리 위로 들어올리는 장면. 1977년에는 그 체력시험이 서강대학교에서 있었다. 독일인 심사관도 통역을 받으며 지원자들을 지켜봤다. 하지만 현실은 영화와 달랐다. 번쩍 들 필요도 없이 어깨 위에 들쳐 매기만 하면 됐는데 그것조차 되질 않았다. 쌀 대신 모래가 들어 있던 60kg짜리 가마니는 꼼짝도 하질 않았다.
“시원하게 떨어졌죠. 이해할 수 없었어요. 평소 같으면 쉽게 들 수 있었을 텐데 안되더라고요. 요령이 없었나봐요. 그렇게 풀이 죽어 태백으로 돌아갔는데, 후에 연락이 왔어요. 다시 시험을 보라고. 그래서 서울로 향하기 전에 열심히 모래가마니를 들어올리는 연습을 했어요. 그것도 열심히 하니까 요령이 생기더라고요.”
두 번째 도전에서는 필기시험까지 일사천리로 합격했다. 합격하고 나서도 독일로 가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본인이 부담해야 하는 경비가 30만원이나 됐다.
“당시에 대구에서 집 한 채 사는 데 150만원이었으니 엄청나게 큰돈이었죠. 하지만 돈을 빌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어요. 그 시절에는 ‘독일 가는 데 돈 좀 빌려달라’고 하면 잘 모르는 사람도 선뜻 빌려줬어요. 그만큼 파독광부는 선망의 대상이었고 신용도 높았어요. 어떤 기수는 한국에서 한 달짜리 사전교육까지 다 마쳐놓고도 떠날 날짜가 자꾸 미뤄져 빚이 늘어나는 경우도 있었어요. 곧 독일에서 큰돈을 벌 테니까 하는 마음에 빚으로 흥청망청 생활했던 거지요. 다행히 저는 사전교육을 제대로 마칠 수 없을 정도로 출국일이 급하게 잡혀 별일 없이 독일로 향할 수 있었어요.”
3년 후 돌아오겠다는 약속 못 지켜
“3년만 꼭 참아. 3년만 참고 일하면 한국에서 잘살 수 있을 거야.”
출국심사를 하기 전 눈물을 흘리는 아내에게 민석기씨는 이렇게 말했다. 기본 계약이 3년이었으니 그 시간만 채우고 돌아오면 한국에서 무엇을 시작해도 쉽게 할 수 있는 밑천을 만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그때는 자신의 귀국이 훨씬 늦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상상도 못했다.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과 곧 대구의 시댁으로 내려가야 하는 아내를 뒤로 한 채 그는 루프트한자 항공기에 올랐다.
“당시엔 비행기 자체가 신기했던 시대였으니까요. 타고 있던 커다란 것이 두둥실 떠오르면서 진짜 떠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젠 내릴 수도 없고, 도망갈 곳도 없다는 현실이 체감됐어요.”
버스는 어둠 속을 5시간을 넘게 달렸고, 잔뜩 겁먹은 얼굴의 한국인 무리가 낯선 향기의 공기를 들이마시며 차에서 내렸을 때 그들은 딘슬라켄의 땅을 밟고 있었다. 이들이 독일의 광부로서 생활을 시작한 로벡 광산이 있는, 먼 훗날 이들을 기억하기 위해 ‘아리랑파크’가 건립된 장소였다.
“처음엔 말도 못하게 고생했어요. 말이 안 통했으니까요. 이걸 들라는 건지 내리라는 건지 당기라는 건지 밀라는 건지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죠. 멍하니 들고 서 있을 때가 태반이었어요. 망치, 톱, 정 같은 공구 이름도 전혀 몰랐고요. 갱도 내에서는 무전으로 지시를 받는 경우가 많아 더 알아듣기 힘들었어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저녁에는 괜한 군기를 잡겠다는 선배들의 괴롭힘도 있었다. 하지만 가장 힘든 것은 역시 지옥 같은 갱도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000m쯤 갱도를 내려가면 작은 터미널 같은 것이 나와요. 개미굴같이 여러 소규모 갱도들로 연결되는 철로들이 집결되는 곳이죠. 거기서 열차를 타고 10분 넘게 들어가면 다시 지하로 내려가야 하고, 내려가서 실제 작업하는 곳까지 다시 수백m를 더 들어가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어요. 내려가고 들어가기를 여러 번 반복하기도 했고요. 석탄을 찾아 따라다니는 것이죠. 공기가 공급되는 환풍기 근처는 찬바람 때문에 서늘했지만, 바람이 통하지 않는 곳은 지열 때문에 40℃가 넘기 일쑤였죠. 거기서 독일인들의 고함을 들어가며 일했어요. 죽을 고비도 많이 넘겼고.”
그래도 말이 들리고 일이 익숙해지자 독일은 지옥에서 천국으로 변했다. 한국에선 쉬는 날도 없이 작업시간이 길었지만 독일은 달랐다. 주 5일 근무에 공휴일도 꼬박꼬박 쉬었고, 하루에 8시간만 근무하면 그만이었다. 막장에 들어가는 데 1시간, 나오는 데 1시간, 점심시간 1시간을 제외하면 실제로 일하는 시간은 5시간에 불과했다.
독일에서 나 홀로 이름 지어본 ‘새마을협동농장’
처음에는 3년만 있자 하고 온 독일이었지만, 첫 휴가는 그보다 훨씬 뒤인 7년 만에 이뤄졌다. 한 달 휴가 동안 도로공사나 다른 일을 하면 큰돈을 쥘 수 있었고, 더 돈을 모아 금의환향하고 싶은 마음도 컸다.
한국에 도착했을 땐 집에서 잔치가 벌어졌다. 8남매가 모두 모여 민석기씨를 환영했다. 형제 대부분이 직·간접적으로 독일에서 큰돈을 벌고 있는 민석기씨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빨갛고 파란 테두리가 그려진 아빠의 국제우편을 늘 기다리던 막내는, 막상 난생 처음 아빠를 만나자 낯설음에 뒷걸음쳤다가 곧 아빠 품에 안겼다. 그렇게 가족들은 그동안 쌓인 회포를 풀었다.
휴가 때 그의 마음을 흔든 것 중 하나는 ‘새마을운동’이었다. 한국을 떠나 있는 동안 조국은 많이 변해 있었고, 그 변화의 중심에 새마을운동이 있다고 믿었다.
“당시에 전 기숙사를 나와 인근 마을의 농장에서 일하고 있었어요. 농장에서 지내는 것이 훨씬 편했고, 주말에도 쉬지 않고 일할 수 있었으니까요. 주말에 시간이 남는 한국인 광부들을 유혹하는 것들은 너무나 많았어요. 전 아예 나와 있어서 이런 유혹을 피할 수 있었고 농장일로 가욋돈까지 벌었죠. 그때 농장 주인의 제안으로 빈 땅에 직접 배추와 무, 갓 등을 심으며 농사를 짓기 시작했는데, 새마을협동농장이라고 이름을 지었죠.”
후에 그의 이 농장은 현지 신문에 소개되면서 지역에서 화제가 되었는데, 그의 ‘외도(?)’가 회사에까지 알려져 곤란을 겪기도 했다.
외로운 말년의 파독광부 많아
한때 아이들을 독일로 불러 완전한 정착도 꿈꿔봤지만, 아이들이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자 1989년 민석기씨는 한국으로 완전히 돌아왔다. 휴일도 없이 일해서 모은 목돈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되리라 기대했지만 돌아와서 보니 그것과는 먼 삶이었다. 다른 파독광부들처럼 남의 손에 관리가 부탁된 돈들은 형제들에게 그리고 처가로 스며들었고, 되찾기 어려운 상황이 돼 있었다.
“잘된다는 말만 믿고 형님 건설회사에 계손 돈을 보탰지만, 실제로는 까먹기만 했어요. 또 처가 쪽으로도 돈이 흘러가 수중에 남는 게 없었죠. 결국 가기 싫다는 아이들을 설득해서 독일에서 엄마와 살게 했고, 전 딸아이와 한국에 남았어요. 그 후 식당일부터 안 해본 일이 없었죠. 건강이 나빠졌을 때는 간이식을 받으러 중국까지 갔었어요. 굴곡이 많은 삶이었지만 그래도 남에게 폐는 끼치지 않고 잘 살아온 것 같아요.”
독일로 가 인생의 대박을 맞이한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어려움이 많았던 민석기씨. 그렇다면 다른 광부들의 사정은 어땠을까.
“파독광부들이 잘산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아요. 독일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 300명 정도의 사람들은 돌아오고 싶어도 못 돌아오는 상황인 거죠. 한국에 돌아온 사람들 중 주변 사람들에게 속아 빈털터리가 된 경우도 적지 않아요. 심지어 재산권 때문에 ‘오지 말라’고 하는 친척들도 있죠.”
마침 그를 만난 12월 9일은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발의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날이었다. 민씨와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가결 소식이 들려왔는데 그 소식을 듣는 그의 표정에서 많은 이야기들이 읽혔다. 현 대통령의 아버지에 의해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었고, 또 평생을 지지했는데, 이제는 상당수 국민이 그의 딸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로서는 명쾌하게 답을 낼 수 없는 상황일 것이다.
“그래도 독일에 다녀온 것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많은 광부들이 한국인의 성실함을 몸으로 증명했기 때문에 경제성장의 동력이 된 차관도 독일로부터 빌려올 수 있었죠. 또 조국과 민족, 가족을 위한다는 마음이 있어 막장에서도 그렇게 열심히 일할 수 있었고요.”
민씨의 이야기는 가족과 부모 이야기를 자서전으로 엮는 회사 ‘뭉클스토리’의 기획 행사에 선정돼 함께 독일에 다녀온 간호사 노금희, 황보수자씨의 이야기와 함께 책으로 만들어져 지난 10월 정식 출간됐다.
거친 바다 마을 출신의 사내라 해도 이 우주선 같은 치료기는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차라리 폭풍우 속 배 위가 더 속 편하지 않았을까. 돌아가는 기계 위에 누워 있으려니 좀이 쑤시고 욕지거리가 나올 것 같았다. 낮은 목소리의 소음은 조용했지만 시끄러웠다. 임재성(林在聲·56)씨는 그래도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이 기계가 큰 병을 낫게 해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암(癌)이라는 큰 병을 말이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오병돈 프리랜서(Studio Pic) obdlife@gmail.com
보통 암이라고 하면 자신의 건강을 과신하던 어떤 사람이 느닷없는 선고에 당황하게 되는 병이라고 생각하고, 실제로도 그런 사례가 많다. 그런데 국립암센터에서 만난 임재성씨는 그에 반해 억울한 구석이 많은 경우다.
전라남도 여수시에서 주유소 사업을 하던 그는 교직에 있는 아내와 함께 평범한 가정을 평탄하게 꾸려나가고 있었다. 사업은 남부럽지 않을 정도로 유지됐고, 그의 활달한 성격에 주변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자녀도 1남 1녀다. 마치 동사무소 입구에 꽂혀 있는 홍보물 표지 사진 속 가족을 그대로 옮겨놓았다 해도 믿을 정도였다.
이 반짝이는 가족의 삶에 작은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1989년부터다. 별 신경을 쓰지 않았던 건강검진에서 B형 간염에 감염됐다는 결과가 나왔다.
매년 빠짐없이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원래 건강에 자신이 있었어요. 실제로 간염 환자가 겪는다는 식욕부진이나 피로감 같은 것은 하나도 느끼지 못했어요. B형 간염도 어머니를 통해 받은 것이니 크게 동요할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정기적인 검사만 제때 받으면 되겠지 하고 평소처럼 생활했어요. 주변 사람들과 자주 어울리면서요. 그때만 하더라도 주(主)님이 아닌 주(酒)님을 모실 때였죠(웃음).”
그 시절부터 그는 정기적인 건강검진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다. B형 간염은 까딱하면 간암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경고를 들어왔기 때문에 건강검진만큼은 반드시 지키는 생활을 이어왔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작은 균열은 조금씩 더 벌어지기 시작했다.
2014년 말, 광주에서의 건강검진 결과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간암일 수 있다는 의사의 말. 하지만 그를 더 화나게 한 것은 정기검사 때마다 만났던 의사의 태도였다.
“간 상태가 나쁘지 않아서 아직 B형 간염 약을 먹을 단계는 아니라고 했거든요. 그랬던 그 의사에게서 느닷없이 암 진단을받았으니 당황스러울 수밖에요. 그 상황에서 요즘 의술이 좋아져 초기 간암은 치료된다고 이야기하는데 위로가 위로처럼 받아들여지지 않더라고요. 그럴 수밖에 없잖아요?”
당연히 암 선고는 그에겐 충격이었다. 여느 암 환자처럼 그 역시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고, 부정과 분노 등 다양한 과정을 거쳤다. 죽기 전에 손주는 볼 수 있을까, 죽음을 준비해야 하나, 고통은 어느 정도나 될까, 더 괴로워지기 전에 차라리 생을 끝내는 것이 나을까. 말도 안 되는 걱정과 의문들이 그를 괴롭혔다. 심지어 검게 변해 죽어 있는 물고기들이 바닷가로 잔뜩 밀려오는 악몽을 꿀 정도였다.
그렇게 암 선고에 당황해하고 있을 때 처가 쪽 친척으로부터 일산으로 올라오라는 제안을 받았다. 일산에 국립암센터가 있으니 진단이든 치료든 그곳이 가장 정확하고 믿을 수 있는 곳 아니겠냐는 조언이었다. ‘약사님’ 친척의 조언이었기 때문에 의심할 필요도 없었고, 믿어보기로 했다. 그 길로 바로 서울로 향했다. 그러고는 국립암센터의 방사선종양학 전문의 김태현(金泰現·46) 교수를 만났다.
비장의 카드 ‘양성자치료기’
김태현 교수는 “임재성씨는 간암 환자 중 우리 주위에서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형태의 환자예요”라고 설명했다 .
“B형 간염은 한국 사람들에게서 아주 흔하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독 한국과 중국 사람들에게서 많이 볼 수 있어요. 이에 반해 일본과 서양인들은 C형 간염 보균자가 많죠. 최근에는 간염 예방 백신의 보급이 적극적으로 이뤄지고 있어 그 수가 줄고 있지만, 그래도 B형 간염 보균자는 우리 주위에 적지 않습니다. 이 간염이 우리 몸에 들어오면 염증이 일어났다 나았다를 반복하는데, 이러다 암으로 발전되는 경우가 많아요.”
임씨의 경우 간암 초기였기 때문에 경동맥 화학색전술로 치료를 했는데, 원하는 만큼 예후가 나오지 않아 간암고주파열치료술까지 시도했다. 경동맥 화학색전술은 간 전체에 여러 암세포를 치료할 수 있도록 약을 뿌리는 방식이고, 간암고주파열치료술은 특정 암세포에 고주파를 쬐어 높은 마찰열을 발생시켜 괴사시키는 치료법이다.
“문제는 임재성씨의 증세가 다발성(多發性)이라는 것이었죠. 암세포가 또 발생했는데 이번에는 그 위치가 애매했어요. 접근이 무척 어려운 부위라 수술도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양성자치료였어요.”
400억원 넘는 꿈의 치료기
양성자치료기는 CT나 방사선치료기와 같은 ‘의료기기’로 생각하기 쉽지만 ‘의료시설’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국립암센터의 양성자치료기도 장비가 먼저 자리 잡은 뒤에 그 위로 건물이 지어졌다. 지어진 건물 안으로 장비를 넣는 것이 불가능한 규모이기 때문이다. 세계 최초의 양성자치료 장비는 가속기 반경이 4km 정도였다. 우주의 기원을 좇는 입자가속기와 유사한 가속기를 통해 수소 원자의 핵을 빛의 속도로 가속시키면 튕겨져 나오는 방사선을 받아 암세포에 쏘이는 방식이다.
의사들에게 이 장비가 꿈의 장비로 불리는 이유는 일반적인 방사선치료 장비와 달리 주변 조직에 미치는 영향이 최소화되기 때문이다. 일반 방사선 장비는 방사선을 투과할 때 암세포 앞뒤의 정상 조직이나 장기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방사선 조사각을 이리저리 돌려 쪼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반면에 양성자치료기는 정확히 암세포에만 조준사격이 가능하다. 주변에 미치는 영향도 훨씬 미미하다. 암세포를 죽인 뒤 몸을 통과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소멸한다. 치료하는 의사 입장에서도 부담이 적은 셈이다. 일반적인 방사선치료가 식욕부진이나 설사, 두통 등의 부작용을 동반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국립암센터의 양성자치료기는 2007년부터 본격 치료를 시작했고, 지금은 삼성서울병원에 한 대가 더 도입돼 국내에 2대가 운용 중이다. 국립암센터의 양성자치료기 도입 예산은 약 480억원이었고, 삼성서울병원이 밝힌 양성자치료기 도입 예산은 1000억원 선이다. 일반인이 상상하기 힘든 규모의 치료 시설이다. 전 세계적으로도 60대가 안 되는 귀한 장비다.
치료비는 건강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되면서, 예전의 10분의 1 수준이 됐다. 암종, 치료기간, 치료횟수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100만~800만원 수준이다.
김 교수는 “최대한 건강한 간 조직을 유지시키는 데 가장 주의를 기울였어요. 임씨와 같이 만성 간변병증이 있는 경우는 낮은 백혈구·혈소판 수치 때문에 출혈이 잘 멈추지 않아 수술을 하려면 위험을 감수해야 하니까요. 그래도 치료가 잘되어 이제는 더 이상 암세포가 보이지 않는 상태가 됐어요. 다행이죠.”
암 환자 더욱 위험하게 하는 건 ‘얇은 귀’
임씨가 양성자치료기를 통해 본격적인 치료를 받은 것은 2016년 2월부터다. 이 과정에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의사들은 가능성과 확률을 이야기하지만, 기본적으로 B형 간염 보균자는 간암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하시는 편이 도움이 될 거예요. 우리나라에 이렇게 B형 간염 보균자가 많은데, 그에 비해 경각심은 너무 부족한 것 아닌가 싶어요. 저도 그랬으니까요. 이와 함께 또 경각심을 가져야 할 곳이 있어요. 바로 언론이에요. 요즘 종편에서 의학 관련 프로그램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믿어선 안 될 이야기들이 많은 것 같아요. 암 환자는 기본적으로 귀가 얇아질 수밖에 없어요. 마음이 다급하니까요. 이 마음을 악용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일부 엉터리 프로그램도 그렇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그는 주변의 다른 암 환자들과 등산을 하거나 모임을 갖는 등 활동을 해왔는데, 불필요하게 효과도 없는 건강식품에 돈을 쏟아 붓는 사람을 적지 않게 목격했다. 효과가 좋다고 암 환자들을 유혹하는 각종 식품들에 대해 김 교수도 비슷한 의견을 말한다.
“흔히 암에 좋다는 음식 중 상당수는 몸에서 분해되는 과정에서 되레 간에 부담을 주는 경우가 많아요. 간암은 간을 보호하는 것이 첫 번째 목표인데 간을 쉬지 못하게 만들어요. 그러니 예후가 좋을 리 없죠. 환자가 어느 날 갑자기 간 수치가 나빠져서 오는 경우가 있는데, 결국 원인은 음식인 경우가 많아요.”
“그래도 난 운이 좋은 사람”
임재성씨는 그래도 스스로를 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간암이라는 장벽을 만났지만 남들보다 훨씬 수월하게 위기를 넘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비교적 일찍 암을 발견한 것이 운이 좋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덕분에 초기에 치료를 받았잖아요. 또 간암에 효과적이라는 양성자치료기를 알게 되어 혜택을 받았는데, 치료를 받기 직전에 건강보험 적용이 돼서 혜택을 많이 받았어요. 치료 과정에서 임상시험 대상자로 뽑혀 치료비 부담도 줄였고요.”
양성자치료는 아직 모든 암에 적용되지는 않지만 일부 암종을 대상으로 2015년 9월부터 국민건강보험 급여화가 됐다.
“워낙에 가무에 능했는데, 이제는 술과 이별을 해서 대신할 만한 것이 필요했죠. 그래서 드럼연주를 시작했어요. 절로 흥이 나면서 즐거운 마음이 되더라고요. 보통 큰 병에 걸리면 주변 사람들에게 왜 신경 안 써주냐, 왜 이건 안 해주냐며 화를 내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자신의 병은 자신이 챙겨야 해요. 스스로 아무것도 안 하면서 몸이 좋아지길 바라면 그게 이뤄지겠어요? 또 이런저런 주변의 유혹에 빠지지 말고 의료진의 진료에 따르는 것이 제일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지방 근무할 때 퇴근 후 무료한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기위해 어학원을 다녔는데 어학원에는 필자의 딸 나이와 버금가는 20대의 여성공무원이 같은 수강생이 있었다. 내친김에 실전경험을 쌓기 위한 개인교습도 받았는데 여성공무원과 단둘이 희망하여 더 많은 시간을 함께했다. 같이 수업을 받으니 자연스럽게 많은 대화를 하면서 신상파악을 할 수 있었다. 예쁘고 활달하고 공무원이라는 신분도 마음에 들어 우리 회사 남자 직원과 짝을 맺어주기로 마음먹었다.
마음에 둔 우리 회사 남자 직원은 집을 떠나 독신으로 타향살이를 하고 있는 성실한 청년이었다. 처녀보다 나이도 2살 정도 많고 이래저래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우선 의사 타진을 양쪽에 했다. 여성은 나를 믿으니 단박에 만나보겠다고 OK 사인을 보내오는데 남자직원은 확실하게 대답을 못하고 망설이기만 했다.
남자직원이 망설이는 이유가 여자에 비해 자신이 꿀린다고 생각하고 혹 여자에게 차이면 직속상사인 나를 보기가 민망해서 머뭇거리는 줄로만 짐작했다. 만나보고 싫으면 그만두면 되니 부담 갖지 말고 나를 믿고 만나보라고 안심시키면서 한쪽으로는 그만한 여성 만나기 어려우니 꼭 잘되었으면 좋겠다고 호기심이 들도록 충동질까지 했다.
직속상관인 내가 권하니 머뭇머뭇하면서 겨우 만나겠다는 승낙을 했다. 만나보면 대번에 마음이 변할 거라고 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말해 양쪽을 내 기준으로 저울질해보면 남자보다 여자가 인물이나 학벌 게다가 남들이 부러워하는 여성공무원으로 한수 위라고 생각 했다.
예전의 중매는 호젓한 다방에서 중매쟁이가 양쪽을 불러 앉혀놓고 인사시키고 중매쟁이가 먼저 일어나는 순서를 밟았다. 심지어 양가 부모님이 나오는 경우까지 있어서 집안에서도 선남선녀의 첫 만남은 큰 사건이었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어 보라하고 중매쟁이가 슬그머니 일어나서 나가면 그때부터 남녀가 말문이 터져 대화를 이어갔다. 주로 남자가 대화를 리드해 나갔는데 아주 숙맥 같은 남자는 수줍음을 많이 타서 말을 못해 여자가 리드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상대의 면전에 대고 박절하게 우리는 인연이 아닌 것 같다고 말은 못하고 다음 만날 약속을 하지 않으면 이것이 이별 통보였다.
요즘은 만나게 하는 방법도 아주 간편하다. 양쪽에 전화번호만 알려주고 이런 전화가 오면 그 사람이니 전화를 받고 약속장소와 시간을 서로 정해서 만나보라고 하면 소개자의 임무는 끝이다. 두 사람도 이런 과정을 거쳐 만났다.
다음날 여성에게 호감이 가느냐고 물어보니 좋다고 긍정적인 대답을 하는데 의외로 남자가 아직 결혼 할 마음이 없다고 발을 뺀다. 이친구가 자기 복을 발로 차는구나!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일 년 뒤 서로 다른 짝을 찾아 결혼을 했다.
결혼 후 남자 직원이 어렵게 내게 말했다. 필자가 중매를 설 때 이미 지금 결혼한 여자와 혼인하기로 서로 언약한 상태였다고 한다. 상사인 내가 중매를 하자 단칼에 거절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다 맞선자리에 까지 나가게 되었다고 한다.
만나보니 지금 결혼하기로 약속한 아가씨보다 더 예쁘고 조건도 더 좋아서 마음이 순간 흔들렸다고 한다. 하지만 둘 사이에 철석같이 결혼을 맹서해놓고 조건에 쫓아 혼약을 파기하면 천벌을 받지 하는 생각에 흔들리는 마음을 바로잡고 용기를 내어 나에게 완곡하게 거절의 의사를 표시했다고 했다.
만약에 서로 다른 짝을 찾았으면 어떻게 되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인생에 있어서 만약에는 없다. 두 사람이 맺어질 인연이 아니어서 맺어지지 못했고 서로의 좋은 인연을 쫓아 맺어졌다고 본다. 결혼은 우리 인생에서 큰 사건임에는 틀림없고 최고의 인연을 맺어졌다고 믿어야 마음이편하다. 거기서 자식이 태어나면 책임과 의무감이 있어야 한다.
요즘 사귀다가도 조금만 더 낳은 상대가 나타나면 쉽게 돌아서는 사람들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다. 사랑은 영원하지만 그 상대는 변한다는 괴변이 판친다. 결혼하고도 이혼을 쉽게 결정하고 자식의 장래보다 나의 행복이 우선이라는 무책임한 이유를 들면서 갈라선다. 수 십 년을 살고 저승길 떠날 몇 년을 못 참아 황혼이혼도 마다하지 않는다. 우리의 부모세대는 얼굴도 모르고 시집와서도 참고 살았다. 무조건 참고 살라는 뜻이 아니라 처음부터 결혼상대를 신중히 선택하고 한번 선택했으면 서로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결혼해서 덕 보려는 이기심만 없애도 혼인생활이 파탄으로 치닫는 경우는 드물다. 한번 맺은 인연을 소중히 하는 마음이 세상을 아름답게 한다.
해마다 거리에 캐럴이 흘러나오는 이맘때쯤이면 약간은 분위기가 들뜨고 여러 가지 약속들로 분주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올해는 모든 것을 잡아먹는 괴물, 블랙홀이 등장하여 연말의 감상에 사로잡힐 틈이 없이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게 흘러가고 있다. 매일 흥미진진한 것은 좋은데 나날이 도낏자루가 썩어가고 있으니 그것이 걱정이긴 하지만.
상황이 이렇다 보니 떠들썩하게 연말 분위기를 내는 것은 좀 눈치가 보이는 것도 같다. 김영란법 때문이라고도 하지만, 식당가가 유독 한산한 것이 보기에도 좀 민망하고 안타깝다. 경제가 어려워 주머니가 가벼워진 유독 쓸쓸한 겨울이지만, 2017년이 오지 않는 것도 아니고 올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니 한 해를 보내는 소회가 없을 수 없다.
한 해가 가는 것을 보며 문득 이형기 시인의 라는 시가 떠오른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대학입시라는 굴레에서 벗어난 지금 오히려 이 시가 절실하게 다가온다. TV 화면을 가득 메우며 마지막을 더럽히고 있는 인사들과 달리 올해 병신년은 깔끔하게 정유년에 자리를 양보하고 있으니 얼마나 아름다운가.
올해는 연초에 이사가 있어서겠지만, 유난히 물건을 많이 버린 한 해였다. 아끼는 물건들과의 이별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모든 물건에는 추억이라는 이름의 가치가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추억의 강도와 유용성의 갈림길에서 많이도 망설였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그렇게 많은 물건이 낙화처럼 스러져 갔다.
많은 물건을 버리고 나니 거기에 얽혀 있던 여러 추억도 사라져갔다. 그러니까 물건을 줄인 것이 아니라 기억을 정리한 것이었다. 사실 그 많은 기억을 끼고 죽기까지 살아갈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는 살아가면서 부단히 기억도 슬림하게 다이어트를 해야만 한다. 올 한 해는 그처럼 불필요한 기억들을 정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깨달음을 얻었으니 기억해 둘 만하다.
모든 성인병도 덜어내지 않고 쌓아두는데서 시작된다. 대부분의 쌓여 있는 물건들은 대부분 절대로 부패한다. 사실 버린 물건들은 쓸모도 없었거니와 거의 낡았다. 우리가 열심히 기억하고 있는 추억 중에도 낡고 부패한 것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런 기억들을 청소하고 새로 널찍한 사색의 공간을 확보했으니 그 또한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잘못된 만남을 정리하지 못한 한 여인의 불행을 애처롭게 바라보면서 죽어야 사는 이치를 깨친다. 한 알의 밀알이 썩기를 거부하면 가을의 열매는 기대할 수 없듯이 올 한 해의 불행들이 모두 자신을 죽여 정유년 우리 모두의 삶이 다시 번성하기를 기대할 뿐이다.
과거 중년들이 생각하는 병원에 대한 개념은 한마디로 ‘어지간해서는 가지 않는, 가면 큰일 나는 곳’이었다. 내 가족을 위해 죽어라 일만 하며 살아온 이들에게 병원은 적어도 선고 정도는 받아야 가는 곳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 세대에게 병원은 아파서 가는 곳이 아니라 친구 또는 가족과 이별하는 장소로만 각인돼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엔 세태가 달라졌다. 더 이상 자녀 손에 이끌려 가는 곳이 병원이 아니다. 미용실이나 목욕탕 가듯 필요하면 언제든 당당하게 병원을 찾는 시니어들이 늘고 있다.
글·사진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최근 ‘비즈니스 성형’이란 신조어가 유행하고 있다. 50대 전후 세대가 사업이나 사회활동에 도움을 받기 위해 진행하는 미용 성형 시술을 뜻한다. 면접 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취업준비생들이 선택하는 ‘취업 성형’과 비슷한 시술이다.
실제로 지난 6월 강남의 유명 성형외과인 아이디병원이 환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에 의하면, 이 병원에서 주름제거 시술을 받은 40대 남성 비율은 2012년 3%에서 2013년 10%, 2014년 16%로 증가했다. 50대 이상 남성 역시 같은 기간 1%, 8%, 9%로 증가했다. 자신을 위해 병원을 찾은 중년 남성이 늘었다는 방증이다. 병원에서 주름제거 시술을 받은 남녀 200명을 대상으로 벌인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최고경영자, 전문직, 자영업 종사자 등이 42%를 차지했다.
‘동안’에 대한 시니어의 욕구 증가
이런 변화에 대해 순천향대학교 부천병원 성형외과 박은수 과장은 “단지 사업을 위해서만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은퇴 후 사회활동이 늘면서 다양한 대인관계를 위해 외모의 개선을 선택하는 시니어들도 적지 않습니다. 좋은 인상이, 나의 외모를 돌보는 것이 두 번째 인생을 살아가는 데 중요하다는 것을 시니어들도 깨닫게 된 것 같아요”라고 설명한다.
시니어들의 ‘동안’에 대한 욕구 증가는 피부과에서도 실감하고 있다. 보톡스 등을 전문으로 하는 한 피부과 개원의는 “예전에 시니어들이 병원을 방문하면 대부분 결혼이나 취업을 앞둔 자녀를 위한 상담이 대부분이었어요. 본인의 피부관리에 대해서는 크게 개의치 않았었죠.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어요. 자녀와 함께 시술을 받기도 하고, 자신만을 위해 상담하는 시니어들이 크게 늘었어요”라고 말했다.
실제로 성형외과, 피부과 등이 몰려 있는 강남 병원들의 분위기도 바뀌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젊은이들이나 외국인들에 밀려 중년들은 ‘찬밥’ 신세였지만, 지금은 모시기 열풍이 불고 있다.
시니어들의 내 신체에 대한 관심은 ‘미용’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내 건강에 대한 관심도 늘고 있다. 지난 10월, 네이버 건강은 처음으로 사용자 대상의 건강 강연회를 개최했다. 헬스조선과 공동으로 개최된 이 행사는 치매를 주제로 진행됐는데, 시니어들의 관심이 대단했다.
네이버 건강 담당자는 “공고가 나간 당일에 400석 신청이 매진될 정도였습니다. 꼼꼼하게 메모하시는 분들이 많아 관심을 확인할 수 있었고, 최신 치료법이나 동향을 반영한 질문들도 많아 의학적 지식의 수준도 엿볼 수 있었죠. 건강은 네이버가 서비스하는 여러 분야 중에 구독 설정 사용자가 가장 꾸준하게 증가하고 있고, 50대 이상 사용자 비율이 높은 분야입니다”라고 밝혔다. 시니어들의 적극적인 관심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건강강연, 건강검진도 몸 돌보기에 필수
이러한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는 분야 중 하나는 건강검진이다. 주요 종합병원들은 건강검진 프로그램에 시니어 대상, VIP 환자 대상의 건강검진 프로그램을 구성해 운용하고 있다. 또 휴식과 검진의 개념을 결합시킨 1박 2일 코스의 숙박건강검진 프로그램의 도입도 늘고 있는 추세다. 서울대병원 헬스케어 강남센터에는 건강검진 결과를 특진 교수가 직접 설명해주는 2박 3일 프로그램도 있다. 검진료는 600만~900만원 수준이다. 서울아산병원 건강증진센터는 100명 회원만을 대상으로 하는 주치의 서비스와 건강검진 프로그램이 결합된 멤버십 서비스를 운용 중이다.
한 대학병원 관계자는 “일부에선 고가 건강검진 서비스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몇몇 암이나 일부 질환은 고가 진단 방법을 쓰지 않으면 조기 발견에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저선량 폐 CT가 대표적입니다. 따라서 고가의 검진 프로그램이라고 무조건 배척하기보다는 꼼꼼히 따져가면서 건강상태에 따라 선택 항목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라고 조언했다.
참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러 먼 길을 다녀왔다. 가락동에서 몇 번 전철을 갈아타고 택시를 한 번 더 타고서야 친구네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친구는 어릴 적 돌담을 사이에 두고 십 여년을 살았던 이웃이었다. 그러다 당시 초등학교 2학년 때 친구가 먼저 이사를 하고 필자도 5학년 때 고향을 떠나 이사를 하게 되었다. 그때 동네가 커서 50여 호의 집들이 있었고 자녀를 보통 5~6명씩 낳는 것이 기본이어서 남녀 또래 친구들도 많았다. 이사를 간다 하니 어린 마음에 여자친구들이 이별의 선물을 주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제 나이가 예순이 막 넘어 머리가 희끗희끗해서야 서로 연락을 하게 되어 김영길이란 친구도 만나게 되었다.
그 친구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외가가 있는 안성으로 이사해서 중학교 때 이미 키가 180CM 가까이 되어 배구 선수를 하다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 특기자로 뽑혀 갔다 했다. 그런데 그 후 185cm까지밖에 안되어 더는 국가대표에 뽑히지 못하고 울산에 있는 H 중공업에 취업을 하여 직장생활을 하였다 한다. 나이 스물다섯 젊은 나이에 능력을 인정받아 큰 사업을 맡게 되어 활발하게 일하던 중 현장에서 무거운 물체가 떨어지면서 머리를 부딪치고 그 여파로 척추까지 주저앉자 머리에 대 수술을 하고 하반신도 못쓰는 장애가 되었다 한다.
이런 친구가 이제야 연결이 되어 만나보게 되었다. 현재 안산 근처 상록수라는 마을에 살고 있었다. 오랜 세월을 고생하며 살아왔을 생각을 하면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아주 힘들어하지 않을까 생각을 하며 대면하게 되었다. 자신을 비관하고 세상을 원망하면서 살았다면 아마 인상도 어둡고 성격도 우울해하지 않을까 걱정도 했다. 그러나 만나본 친구의 모습은 어두운 그림자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얼굴 모습은 변하여 어릴 때 윤곽이 약간 있을 뿐이지만 횔체어를 타고 필자를 대하는 모습에서는 기쁨으로 가득 찬 모습이었다.
차 한잔하면서 이야기를 해 보니 그동안 혼자 성경책을 수없이 읽고, 영어, 한자 등 공부도 많이 하고 밝게 살게 되었다고 한다. 고향에 있던 여자 동창이 아이를 낳고 암으로 일찍 사망하자 고육원으로 보내게 된 아이를 데려와 30년 동안 키우고 가르쳐 주며 작년에 결혼시켜 분가해줬고, 세 명의 아이를 더 돌봐 자녀를 네 명이나 두고 있다고 했다. 본인도 장애이면서 당시 보상금과 산재에서 나오는 돈으로 어려운 이웃을 돌보며 살아왔던 것이다.
점심을 함께하면서 우린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어릴 때 추억이 오롯하게 되살아났다. 수십 년이 지나 머리가 희긋한데도 당시로 돌아가 이야기가 끝이 없었다. 마음속 저 깊은 곳에 묻혀 있던 추억들이 하나하나 모래를 헤치고 나오는 사금처럼 세상으로 살아 나오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밝고 긍정적으로 사는 친구에게 필자는 고마움을 전했다. 대학에서 이 나이가 되도록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필자에게 성공했다고 치켜세우기에 필자는 그 말에 단호하게 선을 그어줬다. 성공은 지위의 높고 낮음이나 돈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각자가 있는 곳에서 행복한가? 만족한가? 라는 물음에 “그렇다”고 답할 수 있는 사람이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해줬다. 그렇게 본인도 힘들면서도 더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고 남을 위해 기쁨을 주며 긍정적 삶을 사는 친구야말로 가장 성공한 사람이라고 필자는 힘주어 말해줬다.
그는 진정 성공한 사람이다. 친구야 고맙다.
글 배국남 대중문화 평론가 knbae24@hanmail.net
요즘 힙합 열풍이 대단하다. 힙합이 음악의 대세로 떠올라 트렌드를 선도하고 있다. 대중들의 일상 대화에 다이믹 듀오, 도끼, 매드 크라운, 비와이, 보이비 등 힙합 뮤지션들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멜론 등 각종 음원차트 상위를 ‘데이 데이’, ‘포에버’, ‘호랑나비’ 등 힙합곡들이 차지한다. , , 등 힙합 관련 프로그램들은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다. KBS 등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힙합 스타와 힙합곡 패러디가 유행이다.
힙합 열풍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폭발적이지만 힙합에 관심이 있는 중·장년층도 적지 않다. 물론 “힙합이 노래냐?”라는 냉소를 보내는 사람도 있고, 욕설까지 포함된 랩 등 일부 힙합 가사를 두고 선정적이고 폭력적이라며 비판을 하는 사람도 있다. 또 방송에 나온 힙합 뮤지션들의 팔과 몸에 드러난 문신과 파격적인 패션 스타일에 노골적으로 거부감을 드러내는 중·장년층도 많다.
하지만 중·장년층이 음악을 비롯한 젊은이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다가가는 태도는 자식들을 포함한 젊은 세대에 대한 이해의 접점을 확장할 뿐만 아니라 소통을 배가시키는 첩경이다. 압축적인 고도성장, 급변하는 사회, 고령인구 증가, 산업구조 변화, 전통적 가족 해체, 가족 구성원의 역할 변모, 젊은 세대의 미래지향적 태도와 장·노년층의 과거지향적 인식의 충돌 등 다양한 원인으로 세대 간의 갈등은 증폭되고 있다. 세대 간의 갈등은 여러 곳에서 표출되고 있는데 문화도 예외는 아니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 간의 간극은 벌어질 대로 벌어져 서로의 문화와 콘텐츠 향유는 고사하고 이해조차 못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게다가 세대 간의 문화에 대한 무시와 폄하 행위까지 횡행한다.
정성호 강원대 사회학과 교수는 저서 에서 세대 갈등의 해결책으로 “세대 간에 서로의 창조적 자의식을 북돋우면서 포용력 있는 공감대를 만들어가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젊은이들이 좋아하며 열광하는 음악을 이해하는 것은 젊은이들의 문화와 생활, 현실을 이해하는 방법 중 하나다. 요즘 젊은 세대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힙합을 이해하는 것 역시 젊은이들의 문화뿐만 아니라 대중음악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는 첩경이자 젊은 세대와의 소통의 기회를 확장하는 기제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힙합을 통해 미국 젊은이들의 현실과 고뇌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1970년대 미국의 가난한 흑인 젊은이들이 자신들을 표현하기 위해 만든 거리의 음악, 힙합은 비트가 빠른 리듬에 맞춰 일상의 삶이나 욕망과 분노를 드러내는 랩, 레코드 스크래치, 브레이크 댄스 등이 가미된 음악과 문화를 지칭한다.
힙합은 미국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 젊은이들의 폭발적 인기를 얻은 음악 장르로 자리를 잡았다. 1990년대 라임을 이루는 말을 리듬에 맞춰 음악적으로 발성하는 랩이 한국 음악에 본격적으로 도입되면서 힙합이라는 음악 장르가 한국 대중과 처음 만났다.
1990년대에는 듀스, 서태지와 아이들, 지누션, 드렁큰 타이거가, 2000년대에는 다이나믹 듀오, 에픽하이 등이 힙합 음악을 하며 대중의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한동안 힙합 음악은 일부 청소년과 젊은이들만이 환호하는 하위문화, 비주류 음악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2010년대에 들어와 힙합 뮤지션이 많이 늘어났고 , , 등 힙합 관련 방송 프로그램과 공연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한국 대중음악의 주류로 급부상했다. 무엇보다 힙합에 환호하는 대중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힙합 신드롬이 일고 있는 것이다.
젊은이들이 힙합에 환호하는 이유는 힙합이라는 음악이 갖는 매력 때문뿐만이 아니다. 저항과 분노, 욕망을 거침없이 표출하고 편견을 깨는 음악에 자신들의 감정을 이입하는 것이다. 한국 대중음악의 대부분을 차지한 아이돌 음악과 발라드, 트로트는 사랑 아니면 이별을 소재로 하는 비슷한 가사와 멜로디가 많다. 이런 음악에 식상함과 진부함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힙합은 기존 음악과 확연한 차별화를 보이며 사회에 대한 비판이나 문제의식, 저항, 분노를 풍자나 디스, 스웨그 등으로 다양하게 표출한다. 또한 개인적인 감정과 입장도 직설적으로 표현한다.
3포 세대, 흙수저, 헬조선으로 표현되는 어려운 현실 속 젊은이들은 이러한 힙합을 통해 자신들의 입장과 의견을 표현하거나 감정을 거침없이 표출한다. 그래서 힙합을 이해하면 젊은이들의 음악과 문화는 물론 그들의 고통과 현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Coffee shop에서/ Part time job으로 나는 Two job/ 아침과 밤이 다른 나의 자화상이/ 또 나를 부르네/ 생활비는 내 손으로 벌어 써/ 두발로 딛는 서울 땅에서 …척하면 척인 나의 눈칫밥만 더 늘어나는 사이/ 현실 앞에서 누구도 대변해줄 수가 없지/ 이것도 피하지 못한 내 현실’ 에서 우승한 자이언트 핑크가 부른 ‘돈벌이’ 가사의 일부다.
‘어쩌다 내가 이 게임에 몸을 던졌나/ 가난이 죄고, 학벌이 깡패라는데 아/ 너 그렇게 과속하고 달려가면/ 개천의 용은 멸종위기 1급 동물/ 시작도 하기 전에 아연실색/ 쫓아가는 것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히네/ 뒤처지기 싫어 꽉 어금니 깨물어도/ 노력과는 상관없어 뒤처지는 경쟁 구도…’ 힙합 뮤지션 MC메타가 지난 5월 방송된 에 소개한 ‘개천에서 용이 날까용?’ 랩 가사다.
우리는 이 두 곡의 힙합 가사를 읽고 무엇을 느껴야 할까?
올해에도 노벨문학상 유력 수상 후보로 거론됐던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의 소설 에서 “죽음은 삶의 대극(大極)이 아니라, 우리 삶 속에 잠재해 있다”고 말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일상과 무관하고, 삶과 거리가 있게 느껴지지만 사실 죽음은 늘 우리와 함께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가? 대단히 죽음에 인색하다. 입에 올리는 것마저 거북해한다. 매일 죽음을 접하는 사람은 다르게 느낄까? 이 단순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가톨릭관동대학교 국제성모병원 마리아 병동(호스피스 병동)의 이인순(李仁順) 수녀를 만났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오병돈 프리랜서(Studio Pic) obdlife@gmail.com
“저는 죽음이 삶의 완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인간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존재니까요. 하루하루 죽어가는 존재라는 이야기도 있고요. 모든 여정에는 그 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자가 던진 우문(愚問)에 이인순 수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도 소인의 입장에선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매일 죽음을 맞닥뜨리는 일이라니. 일이 어렵거나 도망치고 싶을 것 같다고 얘기했더니 이인순 수녀는 되레 의아해한다. 소임받은 일에 의문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인순 수녀가 이 호스피스 병동에 부임한 것은 국제성모병원이 개원한 2년 전. 가톨릭대학교 인천성모병원에서 근무하다 수녀회로부터 소임 이동 명을 받고 이곳 병원의 호스피스 병동에서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물론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자격이 필요한데, 이 수녀는 간호사이면서도, 호스피스 전문 간호사 대학원 과정을 이수했다.
“물론 이곳에서 일하는 간호사들에겐 이곳 일이 쉽지만은 않아요. 다들 젊은 나이이기도 하고요. 24시간 교대근무를 하는 간호사들은 환자와 가족들과의 만남 시간이 상대적으로 많은데 병동에서 함께 산다고 볼 수도 있죠. 돌보던 환자가 돌아가시면 습(襲)까지는 아니지만 시신을 정성껏 닦고 새 옷을 입혀드립니다. 그리고 장례식장으로 보내드리는 일까지 모두 직접 해요. 스트레스도 적지 않아요. 그래서 함께 일하는 팀원들의 소진 예방을 위한 프로그램도 운영합니다.”
가족이 치료 대상이 되는 이유
이렇게 어려운 일인 호스피스는 무엇일까? 호스피스 완화의료는 말 그대로 더 이상 적극적인 치료로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환자를 대상으로 치료보다는 통증 경감과 기타 신체적 증상 조절, 심리·사회·영적 돌봄을 통해 ‘남은 삶의 질 향상’을 목적으로 진행되는 의료서비스를 말한다. 완치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죽음만을 기다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다운 생의 마감과 가족과의 이별을 돕는 것이 목적이다. 정부에선 지난해 7월부터 호스피스 완화의료를 국민건강보험 적용 대상으로 지정해 운영 중이다. 국민건강보험에서는 말기 암 환자만을 대상으로 하지만, 앞으로 그 대상이 다른 질환의 환자까지 확대될 예정이다. 현재 이인순 수녀가 있는 마리아 병동에는 33개 병실이 있다. 환자가 머무는 시간은 평균 한 달 정도. 물론 길면 두 달, 짧으면 일주일 이내에서 몇 시간까지 차이가 있다.
호스피스 병동이 일반 병동과 다른 것 중 하나는 바로 ‘가족’에 대한 관점이다. 호스피스 병동에선 가족도 돌봄의 대상으로 바라본다고 이 수녀는 말한다.
“‘사별 상실 스트레스’라는 말이 있어요. 말 그대로 가족을 잃은 상실감이죠. 보통은 13개월에서 3년 정도면 사별 상실 스트레스를 극복할 수 있다고들 해요. 하지만 그 이상 길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아요. 그 정도 되면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하죠. 여전히 배우자와의 사별이 가장 큰 충격, 즉 삶의 스트레스 1위이지만 최근에는 형제·자매와의 사별도 그 충격이 매우 큰 것으로 보고되고 있어요.”
이러한 사별을 극복하는 방법 중 하나는 비슷한 고통을 겪은 다른 사람들과 슬픔을 나누는 것이라고 한다. 사별의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에겐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별 상실 스트레스를 겪는 분들이 말합니다. 자녀나 가족들로부터 ‘이제 그 얘기 좀 그만해. 잊을 때도 됐잖아’라는 말을 듣는다고요. 죽음을 터부시하고 외면하고 싶은 심리가 있으니까, 고인에 대한 이야기도 못 꺼내게 하는 것이죠. 하지만 이런 태도는 사별 가족 모두에게 좋지 않아요. 심한 경우 50년이 지나서 사별 상실의 슬픔이 터져 나오는 경우도 있어요. 사별을 겪었던 당시에 상실의 슬픔을 충분히 표현하거나 극복하지 못한 채 마음속 깊이 묻어두고 건드리지 않았던 것이 결국은 표출되고 마는 것이지요. 이러한 슬픔은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나’와 ‘슬퍼하고 있는 그 당시의 나’를 대면하고 인정하면서 극복해나가야 합니다.”
병명 알고 죽음 맞는 환자 적어
현재 호스피스 병동은 말기 암 환자를 대상으로 운영되고 있기 때문에 일단 입원하면 모든 환자가 암 환자다. 그러나 실제로 병명과 상태를 정확히 알고 오는 환자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 이 수녀의 설명이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가족에게 권하는 것이 ‘진실 통고’ 혹은 ‘나쁜 소식 전하기’예요. 환자의 알 권리를 존중하자는 것이지요. 환자에게 병명이나 의료적 상태를 정확히 알리고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보호자, 즉 자녀분들이 당사자들에게 말기 암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것을 꺼리는 경우가 많아요.”
환자에게 가벼운 병명으로 둘러대거나 거짓말을 하는 것은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심지어 미화시키는 경우도 있다. 왜 이런 거짓말을 하는 걸까?
“‘진실 통고’를 권하면 보호자들 반응이 대부분 비슷해요. ‘아마도 충격을 받으실 겁니다, 얼마 안 남으셨는데 꼭 그런 얘기까지 해야 하나요, 삶의 끈을 놓으실 것 같습니다’ 등등 이유가 많습니다. 하지만 삶의 주인공은 나 자신, 환자 본인이잖아요. 자신의 남은 삶을 삶의 주인이 갈무리해야 하는데, 그것을 자녀들이 막는 셈이죠. 환자의 권리를 앗아가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본인들에게 진단명이라는 이름으로 말기 암을 알리고 현재의 의료적 상태를 알렸을 때 심리적으로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만약 환자에게 진실 통고를 할 때 심적 부담이 된다면, 보호자가 그 짐을 떠안을 필요는 없어요. 원래 그 이야기를 전하는 것은 의료진의 몫이니까요. 가족 중에 말기 암 환자가 있다면 환자는 물론이고 가족 모두가 환자 상태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손주들, 즉 어린아이까지요.”
어린아이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이 수녀는 말한다. 어린아이들이 놀란다는 이유로 혹은 어리다는 이유로 부모 사별 현장 또는 조부모 사별 현장에서 배제된다. 결국 남는 것은 기억뿐인데, 부모와의 마지막 추억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 수녀의 이야기다.
병명을 확실하게 언급하지 않고 숨기더라도, 환자는 병 진행에 따른 본인의 몸 상태의 변화나 병동의 환자들, 주변 분위기를 보고 눈치를 채는 경우도 있다. 그럴 경우 환자는 자신이 어떤 상태라는 걸 안다는 사실을, 또 가족은 환자가 눈치 챘다는 것을 알아도 입을 닫는다. 서로가 서로를 안타까워하며 현실을 외면하고 숨기는 것이다. 슬프게도.
시한부 환자가 겪는 5단계
그렇게 알게 된 말기 암에 대한, 본인의 몸 상태에 대한 환자의 심리적 반응은 어떨까.
“호스피스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Elizabeth Kubler Ross)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5단계로 설명했어요. 맨 처음엔 부정하죠. 결과를 믿지 않고 다른 병원을 찾아가요. 그러나 같은 결과를 듣게 되지요. 그럼 ‘하필 내가 왜?’라며 자신이나 가족 또는 병원 직원, 더 나아가 신에게까지 분노를 직접적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환자가 존경과 이해와 지속적인 관심을 받으면 격한 분노가 한결 누그러집니다. 진실과 인내가 필요하죠. 그러면서 사실을, 죽음을 인지하지요. 하지만 타협하는 과정을 거쳐요. 종국에는 신과의 타협입니다. 그것이 끝나면 우울해지고 수용하는 과정을 맞게 됩니다. 하지만 실제로 현장에서 만나는 환자들은 반드시 이 순서대로 감정 상태를 보이지는 않아요. 감정의 기복이 큽니다. 누구를 만났는지, 어떤 말들이 오갔는지에 따라 완전히 달라져요.”
그렇게 죽음을 수용하는 과정을 거친 후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 어떤 준비를 하는 것이 좋은 죽음일까. 또다시 튀어나온 모호한 질문에 이 수녀는 아주 현실적인 이야기들을 분명하게 해줬다.
“그 전에 바르게 사셔야 해요. 잘살아야 잘 죽을 수 있는 것이지요. 흥청망청 살다가 인생 말년에 웰다잉하겠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입니다. 가족과의 불협화음이 있는 경우의 환자들은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도 순탄치 않아요. 마지막까지 외롭고 힘든 과정을 거치게 되더라고요. 환자 본인이 해결해야 할 문제는 확실하게 의사표현을 해서 정리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특별히 경제적인 문제는 남은 가족한테 떠넘기지 말고 본인이 해결하셨으면 좋겠어요. 사별의 아픔을 겪는 가족들에게 또 다른 고통을 남기는 셈이니까요.”
냉정하게 들릴 수 있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당연한 이야기다. 죽음 역시 인생의 방점이고 현실이니까. 로맨틱할 이유도, 동정만 할 일도 아니다. 죽음을 앞두고 있다고 해서 책임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자택 임종’ 하고 싶어도 못해
호스피스 병동에서는 의학적으로 임종 시기가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하단다. 때문에 그 시기가 가까워지면 환자를 임종실로 모시고 차분히 마지막을 맞이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가족들과 이별할 시간도 마련한다.
“임종실을 해밀방이라고 불러요. 해밀은 비온 뒤 맑은 하늘을 뜻하는 우리말이에요. 해밀방으로 옮겨지면 환자와 가족들이 그간 하지 못했던 말, 하고 싶은 말을 모두 하라고 권해요. 서로가 청할 것이 있으면 청해서 용서받고, 화해하라고요. 이런 과정은 환자와 가족 모두에게 도움이 돼요. 한번은 의식이 없는 아버지(환자)와 가족 모두가 마지막 인사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환자의 의식이 살짝 돌아와, 네가 했던 말 다 들었다고 하면서 고맙다고 표현하신 거예요. 환자의 큰아드님이 감격스럽고 아름다운 추억을 가지고 가셔서 감사하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환자는 의식이 없어 반응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귀는 열려서 듣고 있었던 거죠.”
그렇게 환자가 임종하면 이 수녀와 담당 간호사는 고인의 몸을 닦고 준비해뒀던 옷, 생전에 좋아했던 옷으로 갈아입힌다. 이 수녀는 이 과정을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보람 있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마지막에 피를 토하는 환자가 있어요. 그러면 고인의 얼굴을 잘 닦아드리고 정돈된 모습으로 가족과 마지막으로 인사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드려요. 그러면 가족들이 기억하는 고인의 마지막 모습은 피 토한 흔적 없는 깨끗하고 편안한 모습이에요. 그 모습에 가족은 위로를 받아요. 편한 얼굴을 보고 편하게 돌아가셨다고 믿고 싶은 거죠.”
환자들은 생의 마지막 장소로 병원을 어떻게 생각할까. 사실 많은 환자들이 임종 장소로 집을 원한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도 병원이 선택되는 이유는 현실적인 문제들 때문이다.
“집에서 환자를 24시간 간호한다는 것이 쉬운 문제가 아니잖아요. 환자를 돌보는 문제도 있지만, 집에서 임종을 맞이하고 난 뒤에도 문제가 있어요. 사망 확인을 위한 행정적인 절차가 꽤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호자들이 겁을 먹는 경우가 많아요. 죽음의 현장이 자연사임에도 불구하고 죽음 자체가 익숙하지 않고 낯선 것이니까요. 죽음을 터부시하는 문화의 영향이 지배적인 거죠. 현재는 꼭 가정에서의 임종이 아니어도 가정형 호스피스 제도를 통해 호스피스 서비스를 가정에서 받으실 수 있어요. 올 3월부터 시범사업을 시행 중인데, 병원에서와 같은 돌봄을 가정에서 받을 수 있고 돌봄 제공자들이 연계되어 가정으로 방문합니다. 환자들이나 가족들의 반응도 좋아요.”
죽음 앞에서 가족들의 모습은 어떨까. 이 수녀는 예외 없이 모두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고 했다. “수고했다. 고통 없는 좋은 데로 가라”고.
“다들 그러세요. 고생 많았다. 수고했다. 고통 없는 데로 먼저 가라고 하면서 덧붙이는 말이 있어요. 다시 만나자고. 아마 우리네 민간신앙이 바탕에 깔렸겠지만, 죽음 너머에는 여기가 아닌 어딘가가 있다고 믿는 것이죠. 그래서 이야기해요. 좋은 곳에 먼저 가 있으라고. 다시 만나자고.”
이 수녀는 마지막으로 잘 죽는다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송나라의 주신중(朱新中)이 훌륭한 죽음에 대해 5멸(五滅)의 실천을 이야기했어요. 멸재(滅財), 재산을 남기지 말고 죽을 것. 멸원(滅怨), 원한을 남기지 말 것. 멸채(滅債), 남에게 빚을 남기지 말고 죽을 것. 멸정(滅情), 정분을 남기지 말고 죽을 것. 마지막으로 멸망(滅亡),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죽을 것이라고요. 인생 여정의 붙잡고 있기와 놓아주기를 균형 있게 한다면 하루하루 잘 죽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한국 사회가 고질적인 부패 때문에 드디어 김영란법이란 충격적 요법을 도입하였다. 고대 사회는 공직의 부패가 훨씬 광범위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공직사회의 청렴을 그리는 열망도 당연히 높을 수밖에 없었다.
중국 서진(西晉)시대 육운(陸雲)이란 시인은 시 에서 매미의 다섯 가지 덕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머리 위에 갓끈 무늬가 있으니 그것이 곧 문(文)이요, 기를 머금고 이슬을 마시니 그것이 곧 맑음[淸]이며, 기장과 피를 먹지 않으니 그것이 곧 청렴[廉]함이고, 거처함에 집을 지어 살지 않으니 그것이 곧 검소[儉]함이며, 기다려 절개를 지키니 그것이 곧 그 믿음[信]이다.”
이후 중국에서는 매미가 청백리(淸白吏)의 상징이 되어 이를 옥으로 조각하거나 그림으로 그려 공직사회에 대한 경계로 삼았다. 또한 익선관(翼蟬冠)이라 하여, 황제가 쓰는 관의 뒷부분에 매미 날개 모양의 장식을 붙여 스스로 경계를 삼았는데, 명(明)나라부터 시작한 이러한 복식은 조선시대에도 전해져 내려온다.
또한 청백리를 상징하는 단어로 ‘빙심옥호(氷心玉壺)’란 단어가 있다. 당나라 때 시인 왕창령(王昌齡)은 관료로서 여러 번 좌절한다. 깨끗한 인품임에도 하찮은 실수로 좌천당하는 경우가 여러 번이었다. 그가 난징(南京)에서 벼슬을 하고 있을 때 친구 신점(辛漸)이 찾아왔다.
불운한 처지에 빠져 있을 때 찾아온 친구가 어찌 반갑지 않을 텐가? 이 친구가 떠날 때 헤어지기 섭섭한 마음에 그가 시 한 수를 적으니, 그것이 바로 이라는 시다.
寒雨連江夜入吳(한우연강야입오)
차가운 밤비 강을 따라 오나라로 흐르는데, 平明送客楚山孤(평명송객초산고)
새벽녘 벗 보내니 초산이 외롭구나.
洛陽親友如相問(낙양친우여상문)
낙양의 벗들이 내 소식 묻거든,
一片氷心在玉壺(일편빙심재옥호)
한 조각 얼음 같은 마음 옥항아리에 있다고 전해주오.
왕창령이 ‘청렴’ 또는 ‘고결’과 연관시켜 사용한 이후로 ‘빙심옥호’란 단어는, 부정부패와는 거리가 먼 깨끗한 마음가짐을 나타내는 대표적 표현이 된다.
그런데 친한 친구와 이별할 때 쓴 시여서 이 말은 이별을 아쉬워하는 마음을 표현할 때도 사용된다. 예컨대 조선조 정유재란 때 명나라는 조선에 지원군을 파견한다. 이때 지원군으로 파견된 오명제(吳明濟)란 장군을 상대하는 역할로 조선은 허균(許筠)을 지명하는데, 허균은 나중에 귀국하는 오명제에게 ‘빙호(氷壺)’란 단어가 들어간 시 구절을 지어 보낸다.
國有中外殊(국유중외수)
나라야 중국과 외국의 구별 있지만,
人無夷夏別(인무이하별)
사람은 오랑캐와 중국인 구별이 없는 법.
落地皆弟兄(낙지개제형)
태어난 곳 달라도 모두 형제이니,
何必分楚越(하필분초월)
초나 월나라 나눌 필요 뭐가 있으리오?
肝膽每相照(간담매상조)
간과 쓸개를 꺼내어 매번 서로를 비추니,
氷壺映寒月(빙호영한월)
티 없이 깨끗한 마음을 시린 달이 내려 비추네.
앞의 왕창령 시는 2013년 박근혜 대통령이 북경 칭화(淸華)대 강연을 갔을 때, 박 대통령이 존경한다는 펑유란(馮友蘭) 선생이 쓴 이 시의 서예작품을 선물받아 소개된 적이 있었다. 허균의 시는 다음 해인 2014년 시진핑 주석이 한국 방문 시 서울대 강연에서 인용하여 소개된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