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맘때쯤이었다. 1962년 완도 앞바다의 햇살은 따뜻했다. 바닷가엔 조개껍데기가 지천에 널려 있었다. 뱃머리에 선 소년은 이 정도 기온이면 다시는 추위에 떨지 않을 수 있겠다 싶어 안심했다. 당시만 해도 전라남도 완도에서 서울로 가려면 배를 두 번 타야 했고, 꼬박 24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14세 소년은 멀고 긴 상경길이 걱정되지 않았다. 고향에는 다시 내려오고 싶지 않았다. 금의환향을 위해서는 차라리 먼 여정이 낫다고 생각했다. 소년은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눈 앞의 조개들이 그의 인생을 바꿔놓을 것이라는 사실을. 소년은 나전칠기 대한민국명장 임충휴(任忠休·67)씨다.
“원래 어릴 때부터 공부에 관심이 없었어요. 그래서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무작정 서울로 가출을 했죠. 신문팔이며 구두닦이며 닥치는 대로 일을 했어요. 그런데 서울의 추위는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한 달 만에 집으로 도망쳐왔어요. 그리고 날이 좀 풀렸을 때 다시 서울로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어요. 동네 이장이셨던 아버지는 그때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다시 도망쳐올 것 같으면 생각조차 하지 말라고. 성공하려면 인내가 있어야 한다고 말이죠.”
임충휴 명장은 그날부터 아버지의 조언을 평생 가슴에 새기며 살고 있다. 그의 작업실 한쪽에는 큼지막하게 쓰인 ‘忍耐’라는 글자 액자가 걸려 있다.
그는 두 번째 상경 때 생각을 바꿨다. 무작정 돈을 좇기보다는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인천의 라이터 공장에 들어갔다. 그의 성실함이 통했는지 후암동의 한 공장에서 함께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나전칠기 공장이었다.
나전칠기를 처음 본 소년은 바로 사랑에 빠져버렸다. 영롱한 빛깔이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그가 나고 자란 고향에서 전복 껍질은 지천에 널린 흔한 것이었지만, 주걱 대신 무엇을 긁을 때 말고는 쓸모가 없었다. 그런 하찮은 것이 이렇게 아름답게 변하다니 신세계를 만난 것 같았다. 그는 이 기술을 꼭 자기 것으로 만들겠노라 다짐한다.
월급·휴일 없어도 감지덕지
그러나 기술을 익히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처음 3년간은 월급도 받지 못했다. 그저 명절 때 주는 옷 한 벌과 간식 정도 사먹을 수 있는 용돈이 전부였다. 일요일도 없었다. 휴일은 한 달에 한 번뿐이었다. 그래도 숙식을 해결하며 어깨너머 기술을 훔쳐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작업만 고됐던 것이 아니다. 한겨울에도 찬물로 청소를 하느라 손과 무릎에는 생채기가 가실 날이 없었다. 아직도 그의 몸에는 당시의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말도 못하게 힘들었죠. 어린아이에게는 벅찬 일들뿐이었어요. 당시엔 기술자 중 상당수가 통영 분들이었는데, 연장 명칭은 죄다 일본어였죠. 전라도 출신 아이가 일본어가 섞인 경상도 사투리를 어떻게 알아듣겠어요. 그런데 말도 못 알아듣는다고 혼났죠(웃음).”
엄격한 교육은 요령을 부리지 않고 길고 번거로운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해야 제대로 된 완성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체득하도록 해줬다. 전통 공예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었다.
그렇게 3년이 지나고 그는 이미 한 사람의 몫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그리고 또 한 번의 기회가 찾아온다. 중일(잡부가 아닌 정식 기술자의 초보 단계) 자리를 줄 테니 공장을 옮겨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이었다. 그렇게 인연이 된 공장은 보문동의 조안공예사. 이곳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0호 나전장 김태희 선생의 제자 안승권씨가 운영하던 공장이었다. 임충휴 명장은 아직도 당시에 인연을 맺은 13명과 친목회를 통해 친분을 이어가고 있다.
그를 담금질한 성공과 고난의 시간들
제대로 기술을 배울 수 있다는 기쁨에 날아갈 것 같았지만 그 역시 순탄하지는 않았다. 옻칠에 사용되는 고운 토분(土粉)을 얻기 위해 매일같이 흙먼지를 마셔야 했고, 나무판자 표면을 곱게 고르는 작업에 종일을 바쳐야 했다.
그렇게 또 정신없이 5년을 보내고 나니, 임충휴 명장은 업계에서 꽤 알려진 기술자가 돼 있었다. 탐을 내는 사람도 많았다. 말 그대로 어엿한 기술자였다. 웬만한 화장대나 문갑 정도는 만들 수 있는 실력이 됐다. 그리고 또 한 번의 스카웃 제의가 있었다. 이번에는 김호창 선생이었다.
“김호창 선생님 덕분에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었죠. 제 성실함을 눈여겨보셨는지
4년 만에 그 공장에서 공장장을 맡게 됐어요. 저보다 나이 많은 사람도 많고, 실력 있는 사람도 있었지만 악착같은 제 모습이 맘에 드셨나봐요. 그곳에서 공장장으로 일하다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제 회사를 차리게 됐어요. 독립하고 나서도 선생님이 하청을 주고 신경을 써주셔서 자리 잡는 데 큰 고생은 하지 않았어요.”
어렵게 융통한 300만원이 밑천이 됐다. 시작은 직원들 먹일 밥 지을 곳이 없어 비 맞으며 음식을 할 정도로 열악했다. 전라도 사람을 차별하는 풍토도 있어 어떻게든 신용만은 지키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성공이라는 계단을 차근차근 밟아나갔다.
“그때는 9자 나전칠기 장롱이 300만원 정도 했어요. 그 돈이면 당시 시골에서 논 20마지기(약 6000평)를 살 수 있었어요. 고향에서 장롱이 그 가격이라고 하면 믿지 않았으니까요(웃음). 덕분에 여러 고관대작의 집에 들락날락했는데 그분들 중에 재벌이나 국회의원, 장관도 있었죠. 가장 기억에 남는 일 중 하나는 삼성종합건설의 부탁으로 쿠웨이트 영빈관에 줄 선물로 자개병풍을 만든 것이에요. 사진이라도 하나 남겨놨으면 좋았을 텐데….”
인내는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 뚝섬과 성남에 나눠져 있던 그의 작업장에는 직원이 어느 새 100명에 달했다. 제대로 된 9자 나전칠기 장롱이 만들어지는 데는 6개월이 걸리는데, 그의 작업장에서는 하루에 하나꼴로 완성됐다. 그만큼 꾸준한 수요가 이어졌을 정도로 그의 작품은 시장에서 사랑받았다.
“당시 나전칠기 장롱은 주부들에게는 일종의 로망이었어요. 누구나 갖고 싶어 했고, 부의 상징이었죠. 실제로 정부에서는 이 장롱을 사치품으로 간주해 특소세 인지가 있어야 거래가 가능하도록 했어요. 주부들이 자개장을 갖기 위해 계모임을 하는 것도 흔한 일이었어요.”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그에게도 어려움이 닥쳤다. 1978년 2차 유류 파동에 잠시 휘청했던 사업이 좀 견뎌지나 싶더니 1997년 IMF라는 직격탄을 맞고 말았다. 현찰 대신 받았던 어음들은 줄줄이 부도가 났다. 당시 부도난 어음의 총규모는 12억8000만원 정도. 개인사업자가 넘길 수 있는 액수가 아니었다.
“당시 인사동과 명동, 신설동에 거래하던 가게들이 많았죠. 물론 대부분 어음으로 거래를 했어요. 받지 못한 돈이 12억이 넘었어도 절 믿고 따라준 거래처, 직원들을 실망시킬 순 없었죠. 몇 채 가지고 있던 집들을 모두 처분하고 빚잔치를 했죠. 직원들에게 퇴직금도 조금씩 챙겨주고. 그러고는 칠기와는 인연을 끊으려 했죠.”
실제로 그는 칠기와 잠시 이별했지만 다시 돌아왔다. 그도 천직을 잊기 어려웠지만, 그의 솜씨가 사장되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주변의 만류도 컸다. 그렇게 해서 지금의 진성옻칠공예가 다시 부활했다.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면서 그는 과거의 제작 방식과 전통 소재에 더욱 집중했고, 이러한 노력은 2004년 노동부의 칠기 분야 명장 지정으로 결실을 맺는다. 그는 명장 지정 이후에도, 전승공예대전 문화재청장상, 한국옻칠공예대전 금상 수상, 대한민국명장회 최우수 명장 위촉 등으로 진가를 제대로 인정받고 있다.
“어려운 시기를 잘 이겨냈다며 주는 상 같았어요. 그간의 노력이 인정받은 것 같아 기뻤습니다.”
그는 명장 제도가 기능인들의 사기를 살리고, 상공인들의 활동에 활력을 불어넣었다고 평가했다.
칠기에 대한 몇 가지 오해
나전칠기에 대한 가장 큰 오해 중 하나는 자개 장식에 관한 것. 나전칠기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당연히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수많은 자개 장식이다. 이 자개 장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가구는 높은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일까? 임 명장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칠기의 생명은 곱고 투명하게 옻칠을 하는 실력과 옻칠의 재료인 칠액에 있어요. 칠액은 옻나무의 수액을 정제해서 만드는데 1Kg에 70만원을 호가하기도 해요. 그래서 예전엔 저렴한 동남아에서 캐슈(cashews) 나무 수액으로 만든 칠액을 쓰는 곳도 있었어요. 사실 자개가 가구 표면에서 차지하는 면적이 넓으면 넓을수록 만드는 과정은 쉬워요. 또 자개 재료는 상대적으로 저렴하고요. 그래서 자개는 약간의 장식으로만 쓰인 옻칠 가구가 훨씬 귀하고 비쌉니다.”
또 옻칠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 조금 다른 방법으로 진행된다. 말리는 과정이 그렇다. 칠액을 바르고 말리고 바르고 말리는 과정이 수차례 반복되어야 제대로 된 옻칠의 광택이 살아난다. 투명 옻칠은 이 과정을 스무 번 정도 반복해야 한다. 보통 말린다는 표현은 수분이 날아가 표면이 단단하게 굳는 것을 의미하지만, 옻칠은 물로 말린다. 습도가 80% 이상 되는 곳에서 표면을 굳혀야 특유의 투명함이 살아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업실의 건조장 바닥은 늘 흥건하다.
이렇게 천연재료로 만들어진 칠기는 모양뿐만 아니라 기능적으로도 훌륭한 생활 도구가 된다. 환경호르몬이 원인으로 지목되는 아토피 같은 질환을 예방하는 데도 좋은 친환경 재료로 알려져 있다. 칠기 가구가 아기용 옷장으로 입소문이 난 것도 이 때문이다. 잘 썩지도 않고 불도 잘 붙지 않는다.
후진 양성을 위한 노력
임충휴 명장은 최근 가능한 한 많은 사람에게 옻칠을 전수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보통의 장인이라면 옻칠을 평생의 업으로 삼겠다 마음먹은 제자들 중에서 후계자를 골라 기술을 전수하겠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지금 업계의 가장 큰 문제는 일할 장인이 없다는 것이에요. 특히 자개장 같은 건 기능인이 부족해서 웬만한 곳에서는 만들 엄두도 못 내요. 50세 정도는 이제 현장에서 젊은 축에 듭니다. 예전엔 옻칠조합 회원이 100명도 더 됐는데, 이젠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가 돼서 조합도 없어졌어요.”
그래서 시작한 것이 후진 양성이다. 군포시에 위치한 서울남부기술교육원 옻칠나전학과에서 취업이나 취미를 목적으로 모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기술을 가르친 지 2년이 됐다. 이제 그를 사사한 학생이 100명이 넘는다. 장인에게 기술은 밥줄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는 교육원의 제안에 흔쾌히 응했다.
“전통공예를 현대적 디자인에 접목하고 싶어도 매일 비슷한 것만 만들어온 사람들에겐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칠기 소비를 늘리기 위해서는 다양한 시도가 필요한데 말이죠. 그런데 교육원에서 학생들을 만나면서 오히려 제가 배우는 기분이에요. 실제로 미술 전공자들도 많이 있고요. 이제 교육원에 나가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일은 제 인생에서 보람 있는 일 중 하나가 됐어요.”
산이 그리웠던 사나이는 꽉 막힌 도시생활을 접고, 설악산이 바라다보이는 탁 트인 곳으로 떠났다. 자연과 벗삼으러 갔지만 행복도 잠시였다. 돈 되는 일에 목마른 인간의 욕심이 푸르른 숨통을 조여 왔다. 올무에 걸린 듯 이곳저곳 상처 난 설악산을 위해 사나이는 발길 닿는 대로 찾아가 세상에 알렸다. 오랜 세월이 흘렀고 그의 소원대로 설악산에는 바라던 평화가 찾아들었다.
버스정류장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박그림 선생님!”
환경단체 녹색연합 공동대표 박그림(朴그림·69)씨가 내 앞을 지나갔다. 귀신에 홀린 듯 정류장 의자에서 일어나며 이름을 불렀다. 밤늦은 종로 한복판. 반갑게 인사를 이어나갔지만 신기했다. 박그림 대표와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하던 중 그가 도깨비처럼 내 앞을 걸어온 것이다. 인연이었다. 국정농단 사건의 파장이 일파만파이던 12월 말, 한국 역사에 길이 남을 대단한 사건 하나가 있었다. 1995년부터 강원도 양양군에서 추진해오던 설악산 오색케이블카 사업이 사실상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지금까지 환경과 관련한 정부나 지자체 사업은 시민단체나 주민이 발 벗고 반대해도 무사통과였다. 이번에는 달랐다. 결국 계란으로 바위를 깬 것. 박그림 대표가 몸소 뛰어다닌 노력으로 이제 더 이상 설악산에 케이블카가 생겨나지 않게 됐다. 마른 체구, 바람에 낡아버린 모자를 쓰고 점퍼를 입은 그는 세상 짐을 다 지고 있는 성자의 모습이었다.
도시 남자, 산속에서 환경지킴이 되다
박그림 대표는 오랜 시간 설악산 지킴이로, 산양들의 아빠로 살아왔다. 하지만 그는 서울에서 나고 자란 서울깍쟁이란다.
“서울에서 사업을 했어요. 의료 부자재 관련 사업도 하고 종목을 바꿔가면서 개인사업을 했죠. 그런데 잘될 수 없었어요. 늘 마음이 산에 가 있었거든요.”
1992년 가족들과 함께 결단을 내리고 설악산이 보이는 곳으로 옮겨갔다. 아내 또한 서울 삶에 큰 미련이 없었다. 산이건 어디건 괜찮다고 생각했다.
“무일푼으로 갔어요. 다들 서울로 가는데 시골로 오느냐고 주변에서 그러더군요. 아이들 교육은 어떻게 하고, 뭘 먹고 살 것인지 말들이 많았습니다. 아내와 저는 마음의 정리가 됐기 때문에 내려갔죠. 그냥 가서 부딪치면서 살았어요.”
그렇게 박그림 대표의 진짜 인생이 시작됐다. 산을 좋아하는 마음은 자연스럽게 환경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이어졌다.
“환경의 눈으로 항상 산을 바라봤던 것은 아니지만 산에 다니면서 ‘저거는 괜찮은가?’ 하는 관심이 생기더라고요. 그전부터 배달녹색연합(지금의 녹색연합) 회원이기도 했고요. 그런데 제가 가자마자 속초 청초호유원지 건립에 필요한 환경영향평가가 진행되고 있었어요. 청초호 40%를 매립해 유원지를 만들겠다는 계획이었죠. 이를 막기 위해 ‘청초호를 되살리는 시민의 모임’에 합류해 힘을 모았습니다. 그 이듬해에 공사가 진행됐고 고민이 많아졌어요. 그때 지역 단체보다는 전국 규모 단체의 지부를 만들면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저는 온전히 설악산 문제에 매달리겠다는 마음으로 설악녹색연합을 창립했어요. 1993년 3월이었습니다. 그리고 몇 년 뒤 케이블카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어요.”
사업 초기에는 오색약수터에서 대청봉까지 케이블카를 놓을 계획이었다. 그러나 환경부 국립공원위원회에서 부결됐고, 이후 노선을 달리해 추진했지만 그 일대가 남설악의 산양 최대 서식지였기에 또다시 제동이 걸렸다. 최종적으로 대청봉이 아닌 끝청봉(대청봉에서 1.4km 떨어진 지점)을 상부종점으로 정하고 하부종점까지 3.5km 노선을 정했지만 결국 사업 무산으로 가닥을 잡은 것이다.
“환경부 국립공원위원회에서 승인했던 사업을 상위법인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에서 10명 위원 전원 만장일치로 사업을 부결했습니다. 1년 넘게 설악산 자연실태조사를 거쳤기에 재심을 해도 통과는 어렵다고 봐요. 현재 설악산 대청봉을 오가는 사람은 연간 40만~50만 명 정도입니다. 설악산은 벌써 다 망가진 상태죠. 만약 케이블카가 설치돼 탑승객까지 더한다면 100만 이상이 될 것이고 결국 설악산 전체는 무너지게 됩니다.”
설악산 산양 아빠 거리로 나서다
박그림 대표는 앞서 말했지만 ‘산양 아빠’로 불려왔다. 설악산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그는 산양에 대해 관찰하고 조사해 알리는 일을 나서서 해왔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산양 아빠라는 별명이 붙게 됐다.
“산양은 천연기념물 217호이면서 멸종위기종 1급입니다. 마음놓고 살 수 있게 놓아두지 않으면 멸종의 길을 갈 수밖에 없는 아주 절박한 상황이죠. 계속 어떤 상황인지를 알려야 했어요. 이게 바로 산양이구나, 우리가 정말 관심을 갖고 사랑해야겠다. 이렇게 함으로써 산양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었습니다.”
산양을 향한 사랑은 케이블카 사업을 반대하는 행동으로 이어졌다. 2000년대 초부터 반사판으로 된 커다랗고 동그란 피켓을 들고 다니면서 설악산 케이블카 설치에 대한 현장 상황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늘 들고 다녔어요. 케이블카 사업이 부결되기 전에는 어디든 약속이 있으면 만남 시간 한 시간 전에 와서 피켓을 들고 서 있었습니다. 어느 장소건. 이것을 그저 운동으로 생각했으면 못했을 거예요. 내 삶이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것이죠.”
박그림 대표는 피켓을 들고 있는 동안 당당하고 올곧았다. 제재하면 제재하는 대로 밀리면 밀리는 대로.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설악산의 상황을 발길 닿는 곳 어디에서든 알렸다. 싸운 적도 없다. 이유는 간단했다.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평화롭고 아름다운 세상인데 싸우고 그러면 안 되잖아요.”
박그림 대표는 젊은 활동가들에게 자신의 삶을 통해 꿈꿔온 세상을 만들어나가라 말한다고. 일로 보는 순간 결과를 따지게 되기 때문이다. 된다, 안 된다 결과에 집중하면 포기하기 쉽지만 삶으로 나아가면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 박그림 대표의 설명이다. 이제 자연보호법을 개정하기 위한 움직임이 시작됐다. 국립공원에 케이블카 설치는 안 된다는 조항을 넣을 생각이다.
“국립공원 내에 인공 시설물도 사실 너무 많아요. 데크나 계단 등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서 시설을 하잖아요. 국립공원은 최소한의 시설만을 설치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난간과 계단을 하나의 시설물로 만들어놓았어요. 일본 쿠시로 습지의 경우 옆으로 떨어지면 이탄지대라 쑥 들어가요. 난간이 없어요. 산도 정말 이 지역이 위험해서 안 되겠다 싶으면 기본적인 사다리만 딱 걸쳐놓고. 안전은 산을 오르는 각자의 책임입니다. 관리 당국이 어떻게 안전을 확보해주냐는 거죠. 위험이 없고 불편함이 없으면 무엇 때문에 산으로 가는 겁니까? 그럼 그건 자연이 아닙니다.”
시니어, 산을 대하는 마음이 달라져야 한다
갑작스런 궁금증이 생겼다. 시니어 세대 또한 산을 즐기고 싶을 텐데 케이블카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나이가 들어도 대청봉에 올라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박그림 대표는 욕심이라고 말했다.
“20대는 올라갈 수 있지만 70대는 못 올라갈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문제가 있죠. 시니어들을 위해 케이블카를 놓아야 한다면 그게 왜 설악산뿐이겠습니까? 그리고 왜 케이블카뿐이겠습니까? 그 나이가 되면 산을 바라만 보고도 설렐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꼭 산속으로 들어갈 필요가 없다고 했다. 옛 조상들은 산을 바라만 보고도 진경을 느끼고 시심이 일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왜 정상을 갈구하는지. 그것이 의문이라고 했다.
“진경산수화 같은 것도 정말 멀리서 바라보고 그린 그림이잖아요. 바라봤지만 깊이 있게 들여다봤죠. 우리는 지금 빨리, 아주 높이 올라가지만 겉핥기식으로 산을 오르고 내려옵니다. 탄성을 지르고 내려오지만 남는 것이 없죠. 어떤 시설이 없을 때는 힘들여 산을 오르게 됩니다. 오랜 인내를 통해 올라간 정상에서는 더 많은 것들을 바라볼 수 있죠. 나에게 주어진 시간 속에서 자연과 일체를 이룰 수 있는 그런 상황을 맞이하기 때문에 훨씬 다르게 산을 느끼게 됩니다.”
손자·손녀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박그림 대표가 케이블카를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미래세대를 걱정하는 마음 때문이다. 그는 설악산에서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체험 캠프도 진행한다. 산을 돌아다니면서 산양의 발자취를 찾아다니며 바람 소리를 몸으로 느끼는 시간이다.
“바람의 느낌을 지식을 통해서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아이의 손을 잡고 바람 부는 언덕에 서면 가르치지 않아도 아이는 ‘이게 바람이구나’하고 느낄 것입니다.”
현재 우리나라 국립공원 22개가 차지하는 넓이는 전국토의 5%밖에 안 된다고. 그것마저도 아이들에게 온전하게 되돌려줄 수 없다면 이다음에 어디에서 지친 영혼을 달랠 수 있을까를 박그림 대표는 걱정한다고 말했다.
“제게는 다섯 살짜리 손자와 돌 지난 손녀가 있습니다. 이 아이들이 아름다운 청년으로 자라났을 때 바라볼 설악산이 어떠해야 되는가를 난 늘 꿈꾸거든.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 일을 멈출 수 없습니다.”
내가 처음 미국을 방문한 것은 1961년이었다. 그 당시 미국의 교수들을 비롯한 지성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말 중의 하나는 ‘인생은 60부터’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 나이가 되면 인생은 끝나는 때라고 흔히 말하던 시기였다.
그런데 100세 시대를 바라보는 지금은 인생의 전성기가 60부터라는 관념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즐기기 위해 산다는 목표를 세운다면, 인생은 40부터라는 생각이 일반적일 것이다. 그러나 인생을 값있고 보람 있게 살기 원한다면 60부터라는 판단이 적절할 것 같다. 그리고 즐기기 위해 사는 사람보다는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 사회적 의미도 창출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60은 100세 시대를 바라볼 때 늦은 나이가 아니라고 여겨진다.
60이 되면 인간적 성장과 성숙의 완숙기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내가 나 자신을 믿을 수 있고 대인관계나 사회생활에 있어서도 자신을 갖추는 연령이라고 생각한다. 공자의 자기평가와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그리고 60부터 75세쯤까지는 노력만 한다면 누구나 정신 및 인간적으로 성장이 가능하다. 지식과 사상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인간성 전반에 걸친 생산적이며 창의적인 노력과 사회 기여가 가능하다고 본다. 가능한 것만이 아니다. 100세 시대 인간은 누구나 그렇게 살아야 한다.
내가 76세 때의 일이다. 한 후배 교수가 회갑이 되었다는 얘기를 들은 내 친구가 “그 친구 철도 안 들었는데 회갑부터 된다”라며 웃었다. 자기도 그랬었다는 뜻이다. 비슷한 때였다. 내 나이를 물은 90대 초반의 선배 교수가 “좋은 나이로구먼…” 하며 부러워하던 얘기를 지금도 기억에 떠올리곤 한다. 60에서 75세쯤까지가 인생의 황금기였다는 사고는 누구나 잠재적으로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75세쯤까지 성장할 수 있다면 그 성장의 위상을 언제까지 연장할 수 있는가이다. 노력하는 사람은 85 내지 87세까지는 연장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스스로의 성장을 포기하는 편이다. 40대라고 해도 공부와 일을 포기한 사람은 녹슨 기계와 같아서 사회적 기여를 못한다. 그러나 70대가 되어서도 사회적 관심을 갖고 노력하는 사람은 젊고 활기찬 생애를 이어갈 수 있다.
언제까지 연장될 수 있는가. 내 주변 친구들은 85세까지는 사회가 요청할 수 있을 정도로 봉사하며 도움을 주고 있었다. 가깝고 존경스러운 친구들 중 김수환 추기경, 김태길 교수, 안병욱 선생 모두가 그랬다. 90 가까이까지 일하기도 했다.
그런 점들을 감안해본다면 100세 시대의 후반기는 50대부터 시작하게 되고 50대가 되면 내가 80대가 되었을 때는 어떤 인생을 살게 되며 동료들과 사회는 나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를 스스로 묻고 대답을 얻어가는 삶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 나름대로의 인생관과 가치관이 확실해야 한다. 나 자신이 교육계에 몸담고 있을 때를 회고하면서 스스로 후회스러운 반성을 해보는 때가 있다. 대학생활을 시작하는 20대 젊은이들에게, ‘내가 50쯤 되었을 때는 어떤 모습으로 인생을 살고 있을까?’ 하는 문제의식을 반드시 찾아 지녀야 한다고 권고하지 못한 잘못이다.
20대에 문제의식을 갖고 50세를 맞이하는 사람은 대부분 보람과 성공의 기반을 갖출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문제의식을 갖지 못한 젊은이들은 인생의 낭비가 너무 심하다. 인생의 전반기를 굳건히 다지지 못한 사람은 후반기에 가서도 그 빈자리를 메우기 힘들어지는 법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50대에는 80대 후반기까지의 장래를 계획하고 바르게 정진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갖고 살아야 한다. 인생관의 가장 큰 과제는 삶의 목적을 설정하는 일이다. 가치관의 핵심이 되는 것은 ‘어떻게 사는가?’에 대한 해답을 지니고 사는 것이다.
그런 생각들을 정리하게 되면 80대가 채워질 때까지는 마음 놓고 자신 있게 인생의 마라톤에 뛰어들어도 좋다는 결론이 된다. 나는 80대가 되면서 이제는 쉬고 싶고 쉬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가져보았다. 그 휴식의 1년은 일하고 공부하는 1년보다도 더 지치고 무의미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시작해서 지금까지 17, 18년 동안 공부하고 일하는 것을 계속해보고 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싶거나 객관적 평가를 원해서가 아니다. 나 자신의 삶의 의미와 풍요로움을 상실하고 싶지 않아서다.
그런데 누군가가 90 고개를 넘긴 후에는 어떠했느냐고 물으면 객관적인 권고를 할 자신이 없다. 할 수 있는 대답이 있다면 나는 이렇게 살고 있다는 개인적 소감을 피력할 수 있으면 다행일 것 같다. 내 주변의 90대 사람들을 많이 보고 있기 때문이다.
90대가 되면 자신의 신체적 건강을 뜻하는 대로 지탱할 수가 없다. 자연히 누군가에게 의존하게 된다. 부부 중의 한쪽은 떠나간다. 자녀들에게 의탁하는 것도 옛날과는 다르다. 여성들은 90대가 되어도 모성애의 대가라고 할까, 갈 곳이 있으나 남성들은 홀로 남는 것이 보통이다. 그 나이가 되면 친구들도 떠나간다. 그때 찾아드는 남성적 고독과 인간적 외로움을 극복하는 것조차 힘들어진다.
지금 나에게 하는 가장 적절한 문안인사가 있다면 “사시는 것이 많이 힘드시지요?”라는 말이다. 90대 후반은 더욱 그렇다. 그러한 부담을 극복할 수 있어야 90대에도 보람과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지금 누군가가 나에게 “그래도 아직 행복하세요?”라고 물으면 나는 숨기지 않고 “행복합니다”라고 대답하곤 한다. 내가 지니고 있는 짐은 무겁지만, 그래도 일할 수 있고, 주변 사람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나누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버거운 짐이지만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고생이라면 그 이상의 행복은 없겠기 때문이다. 사랑이 있는 고생이 행복임을 깨닫는 사람이 최선의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 아닐까.
>> 김형석(金亨錫) 연세대 명예교수
1920년생. 안병욱 교수(숭실대), 김태길 교수(서울대)와 함께 한국의 1세대 철학자로, 아직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영원한 현역’이다. 현재도 활발한 저술 및 강연을 통해 우리 사회에 큰 울림과 귀감이 되는 삶을 살고 있는 석학이다. 특히 100세 시대를 대표하는 지성인으로서 사랑과 행복에 대한 철학적 고찰을 바탕으로 동시대인들에게 깊은 성찰과 깨달음, 진정한 행복의 의미를 전하고 있다.
평생월급 국민연금이 '국정농단 스캔들’에 휘말렸다. 사익추구에 국민의 돈을 동원했다는 의혹 때문에 국민의 걱정이 태산 같다. 국민연금공단 조직과 기금운용의 독립성이 보장되지 않은 탓이다.
기금운용본부가 지난해 삼성물산ㆍ제일모직의 합병에 찬성해 대규모의 손실을 입힌 데 책임이 있다고 보고, 의사 결정을 주도한 혐의로 연금공단 이사장 등을 구속기소하였다. 운용본부는 삼성합병 건은 논의도 않고 반대의견을 뒤엎었다.
국민연금의 주인은 가입자와 수급자이다. 정부는 국민연금을 관리하고, 공단은 이를 대행하는 업무수탁자이다. 공단조직에 주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주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이사장은 대통령이, 임원은 복지부장관이 임명한다. 업무관리 수급자인 정부나 공단이 국민연금을 떡 주무르듯 할 아무런 이유를 찾을 수 없다. 정치적 이해관계로 비전문가 낙하산 인사가 자행되었던 것이 지금의 결과다.
국민연금공단의 독립성을 보장하도록 법을 확 바꾸어야 한다. 국민대표기관이 포함된 인사추천위원회를 구성하여, 엄격한 자격을 구비한 자를 공개모집하도록 한다. 이사장은 적어도 국회청문을 거치도록 하고, 임원과 위원회 구성도 낙하산 밀실인사가 철저히 차단되어야 한다.
국민연금법에 따르면 국민연금 기금운용과 관련한 최고 의사결정기구는 ‘기금운용위원회’다. 제도상으로는 복지부 장관이나 기금운용본부장이 마음대로 기금을 주무를 수 없다. 그러나 현실은 기금 운용의 독립성이 보장되지 않고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휘둘린다는 지적이 나온다. 기금운용위원회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해서다.
기금운용위원회는 기금운용지침, 연도별 운용계획, 운용결과 평가 등 기금운용에 관한 중요 사항을 심의·의결한다. 하지만 내부자들로 구성된 기금운용위원회의 민낯은 독립성과는 거리가 멀다. 회의는 요식 행위에 불과했다. 나머지 위촉위원들도 대부분 비전문가다. 이런 위원들이 모여 두 시간 밥 먹으면서 회의를 하니, 안건 대부분은 무사 통과였다.
기금 운용 지배구조의 최상단에 있지만 기금운용위원회는 기금의 실제 운용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예산회계법이나 국가재정법처럼 예산편성과 집행ㆍ결산을 제대로 하여야 한다. 경영정보도 투명하게 공개할 필요가 있다. 지난해 열린 회의에서 삼성합병과 관련된 의결권 행사를 어떻게 할 것이냐를 두고 논쟁이 오갔으나, 당시 위원장인 전 복지부장관은 두 회사의 합병 안건을 운용위원회 회의에 부치지도 않았다. 기금운용위원회가 거수기 역할밖에 못 한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기금운용위원회를 상설화하고 위원들을 전문성 있는 인사로 구성해 명실상부한 ‘최고 의사결정기구’로 만들어야 한다. 감사기능을 활성화 하여 기금운용에 대한 불안을 불식시키는 노력을 다 하도록 한다.
국가예산보다 큰 규모인 국민연금은 국민이 믿는 평생월급이다. 독립성과 자율성이 보장되도록 국민연금의 조직과 운용방식을 근본적인으로 개혁하여야 한다. 국민은 내일의 희망을 먹고 산다.
부득이 이사를 하면서 더 이상 책을 수납할 공간이 없어서, 아니면 부모님이 소장하고 계시던 유품들을 정리하다가 남게 된 책들, 이러한 책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아끼던 책, 다 읽은 책, 필요가 없어진 책, 기증 받은 책들 중 한 권 한 권 정리하며 내놓았다. 쌓을 대로 쌓아 놓고 보니 어마어마하다. 가물가물 새록새록, 기억의 조각을 더듬어 열어 본 책 틈에 낀 먼지에서 청춘이 흩날린다.
좋은 책, 나쁜 책, 이상한 책에 따라 사고파는 가치가 달라진다. 괴테의 말에 ‘지금 네 곁에 있는 사람, 네가 자주 가는 곳, 네가 읽은 책들이 너를 말해 준다’처럼 그 사람의 마음을 가늠하기 어려울 때 그 사람의 책장을 보면 된다. 수십 년 소중하게 보관해 왔던 책을 팔아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차곡차곡 박스에 담아 고생해서 헌책방에 가져갔지만, 주인의 짠 가격 매김에 다시 들고 돌아와야 하나 아니면 울며 겨자 먹기로 책을 넘길 것인가의 갈림길에서 한 번쯤 고민해 봤을지 싶다. 그 책의 가치를 아는 것은 자신이고, 자신만큼 그 책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제대로 값을 쳐 주고 새로운 주인에게 책을 내어 주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같을 텐데,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좋은지 살펴보자. 분명한 것은 같은 책이라도 파는 이의 정보력에 따라 다른 값에 팔린다는 점이다.
첫째, 책의 상태를 점검한다.
중고 책의 값을 결정할 때 당연히 책의 상태가 중요하다. CD와 DVD 등의 부속품이 딸린 책이라면 그게 없을 경우 거래 가격은 뚝 떨어진다. 인기 작가의 소설과 유명 인사의 저작 등의 단행본이라면 책 띠까지 갖춘 미품(美品) 상태라면 그렇지 않은 책보다는 높이 평가받을 수 있으며, 초판본의 경우엔 그 희소성 때문에 더 주목을 받을 것이다. 또한 영화화한 작품이라든지 문학상 수상작품, 그리고 화제의 인물과 관련된 책 등 시대와 유행에 따라 책의 희소가치는 시시각각 변하고 있으니 그런 점들도 눈여겨봐야 하겠다.
그밖에도 읽으면서 밑줄을 친 곳은 없는지, 혹시 저자의 친필 사인이 들어 있는 책은 아닌지 팔기 전에 우선 꼼꼼히 책의 상태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전집이라면 당연히 완질 상태, 시리즈라면 전부 갖춘 상태라야 제값을 받을 수 있다. 잡지의 경우라도 창간호부터 있거나 화제의 인물과 기사가 실려 있으면 수집가 혹은 연구자들에게 그 가치를 평가 받을 것이다.
둘째, 중고 책의 가격대를 알아야 한다.
인기 있는 책은 당연히 비싼 가격에 팔린다. 아울러 재고량과 희귀품인지 아닌지도 거래 가격의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소장한 책의 현재 거래 가격 내지 적절한 가격을 알아 두는 건 큰 도움이 된다.
셋째, 해당 분야의 전문 책방을 이용한다.
책값을 매기는 것은 그 책의 상태와 가치이다. 상태야 눈썰미 있는 사람이라면 꼼꼼히 살펴보면 알겠지만, 그 책의 가치는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사실 알기 힘든 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책이지만 업자에 따라서 값이 들쑥날쑥한 법이다.
음악과 미술 서적은 예술 계통의 전문 책방에, 의학서라면 의학 관계 서적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서점에 가져가야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팔기 전에 조금 수고스럽겠지만, 그 분야의 지인들 혹은 전문가에게 조언을 구하거나 인터넷으로 검색해 본 뒤 사전 지식을 갖는 자세가 필요하겠다.
넷째, 온라인 전문 사이트를 이용한다.
처분할 책이 많거나 헌책방까지 갈 시간이 없을 경우 등등 그 밖의 이유로 온라인 전문 사이트를 이용할 경우가 있다. 사이트에 따라 책 점검과 가격 결정, 그리고 판매 대금 입금 방법 등 차이가 있으며, 차별화된 서비스와 장·단점을 서로 비교해 봐야 한다. 또한장르별로 전문적 지식과 경험이 있는 경우도 있으니 온라인 전문 사이트가 헌책방보다 더 싸게 거래된다는 생각은 편견일 수도 있다.
특히, 판매하지 않더라도 온라인 전문 사이트를 통해 값을 비교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니 자신의 책이 어느 정도 값이 매겨지는지 사전 조사 차원에서도 이용하면 좋을 것이다.
다섯째, 인맥과 SNS를 이용한다.
헌책방이나 온라인 전문 사이트를 이용하지 않고, 직접 필요한 사람에게 파는 직거래야말로 책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고 아껴줄 사람에게 책을 처분하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필요로 하는 사람이 어디 있는지 모르고, 어떻게 알야 봐야 하는지 알 수 없는 게 대부분이다. 그럴 때는 자신의 인맥과 카카오스토리, 페이스북, 트위터 등 소셜 네트워크를 이용하는 게 효율적이다. 판매자, 즉 책을 소장한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하기에 처분할 책을 구입하려는 사람도 안심하고 거래할 수 있다는 장점과 함께 책 거래를 통해 새로운 인맥이 형성될 수도 있을 것이다.
여섯째, 중고 및 경매 사이트를 이용한다.
내가 처분할 책의 값을 직접 매길 수 있는 중고나라, 벼룩시장 등의 중고 사이트를 이용하는 방법도 좋겠다. 또한, 처분할 책을 갖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여러 명 있을 것 같다는 판단이 서면 옥션 등 경매 사이트를 이용하면 경매에 참여하는 사람들로 인해 판매 가격이 올라갈 것이다.
출간된 지 50년 이상 된 책이거나 유명 작가와 저명인사의 사인이 들어 있는 책 등 소장 가치가 높다고 판단되는 책이라면 고서 및 골동품이나 예술품 등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경매 사이트를 이용한다면 생각지도 못한 놀라운 결과를 얻을수도 있겠다.
1. 개똥이네 www.littlemom.co.kr 중고서적 전문 사이트, 중고 및 새책 판매, 가격비교, 이벤트 등 정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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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코아트 www.koarts.com 서양화, 판화, 한국화, 조각, 서예, 골동품, 도자기, 서적,
[TIP]중고 책 구매를 피해야 하는 책
1. 최근의 트렌드를 반영하고 있는 책
2. CD등의 부록이 있는 책
3. 시간의 제약을 받는 몇몇 실용도서
4. 시리즈나 일련번호의 도서
한 번 빠져들면 출구 찾기 힘들다는 배우 금보라를 돌직구 시사평론가 이봉규가 만났다. 중년임에도 여전히 아름다운 외모를 자랑하는 금보라는 지나간 삶을 돌아보는 여유를 가지며 아름답고 당당한 삶을 열어 가고 있었다. 그녀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으나 또 많이 달라져 있기도 했다. 그간 몰랐던 그녀의 진짜 모습을 리얼하게 보여 주면서 그녀와 그는 꽤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녀의 자취가 ‘센 언니’처럼 보이겠지만 금보라는 도시락 싸주는 엄마, 현모양처로 살고 있었다.
글 이봉규 시사평론가
최근 MBC 주말드라마 에서 ‘명품연기’를 보여 주고 있는 금보라와의 데이트 약속을 잡고서는 설레었다. 거침없는 그녀가 무슨 말을 쏟아 낼지 궁금해서였다. 나와는 TV조선의 라는 프로그램에서 몇 달간 같이 방송을 한 적이 있어서 어느 정도 그녀의 캐릭터를 알고 있기에 분명 깜짝 놀랄 이야기가 쏟아져 나올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 금보라는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처럼 폭주했다. 특히 분위기가 무르익자 정치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더니 눈이 반짝거리면서 폭탄발언을 와장창 쏟아 냈다.
“사드 배치를 반대하는 정치인들 미친 거 아닙니까?” 라고 핏대를 세우더니 “우리 집 앞에 사드를 설치하라고 데모라도 하고 싶다”면서 “대한민국 국민이 어떻게 이렇게 안보에 무책임 할 수 있나?”하고 광분한다. 그녀의 평소 성격대로 솔직하고 꾸밈이 없이 민감한 정치적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연예인이 예민한 정치적 발언을 하면 자칫 구설수에 올라 상당히 곤란을 겪을 수 있는데도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녀 성격에 이봉규가 ‘보수 꼴통’이라서 분위기를 맞추려고 하는 이야기기는 절대 아닐 것이다. “나 금보라야!”라고 금방이라도 소리칠 것 같다.
사람들이 답답해서 할 말이 많아도 토론하기를 꺼리는 세월호에 관해서도 거침이 없다. “세월호 침몰은 부도덕한 기업의 잘못으로 일어난 비극적 사건인데 왜 대통령을 욕하냐?”면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내친김에 정치 이야기를 더 끌고 나갔다. 금보라는 충청남도 당진이 고향이라 같은 충청도 출신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대통령 되는 걸 바랄 줄 알고 그에 관해 물었더니, “반기문 절대 안 찍겠다”고 잘라 말한다. 그 이유는 “벌써 자기가 대통령이 된 줄 알고 거품이 잔뜩 들어가 있어서 싫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새누리당에서 이정현 대표가 요즘 괜찮아 보인다고 말한다. 그의 인생 스토리가 드라마와 같아서 대통령이 될 수도 있다는 분석이다. 어린 나이에 배우로서 안 해 본 역할이 없을 정도로 간접 경험을 많이 해 본 터라 인생스토리가 중요함을 깨달은 것은 아닐까. 필자도 대통령이 될 사람은 인생스토리가 국민들에게 감동을 주어야 표로 연결된다고 믿는 사람 중에 한 사람으로서 그녀의 분석이 날카롭게 꽂힌다. 정치평론가 누구도 아직 확신을 가지고 이정현 대표가 대통령이 될 수도 있다고 예언하지 않는데 금보라가 말한 것이다. 정치평론가 보다 오히려 일반 시민들이 잘 맞추는 경향이 있다. 그냥 마음속에 와 닿는 대로 평가하기에 이심전심으로 통하고 그게 선거 결과로 그대로 반영 될 수 있다는 논리다. 물론 이정현 대표가 지금 상황으로 볼 때 대통령이 될 확률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지만 혹시 모를 일이다. 만약 이정현 대표가 대통령이 된다면 아마 대한민국의 유명인사들 중에서는 금보라가 처음 맞추었을 것 같다.
필자가 진행하는 TV조선의 에 게스트로 초대해서 본격 정치토론을 하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요청하자 그녀는 흔쾌히 응했다. 조만간 금보라가 정치토크에서 열변을 토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개봉박두! 기대해도 좋을 듯!
두 번째 남편, 먼저 자빠뜨린 남자
이혼의 아픔을 겪고 난 후에 지금의 남편과는 정말로 행복해서 “비행기 타고 가다가 이대로 떨어져 죽어도 한이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금방 “아니지! 지금은 행복하니까 죽으면 아깝지”라고 번복한다. 지금의 남편과는 우연히 만났는데 진짜 괜찮은 사람이라서 “나하고는 안 되겠다”하고 지레 겁먹었다고 털어 놓는다. 그래서 이판사판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런 그녀의 털털하고 솔직한 모습에 반해서일까 그와 결혼에 성공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남편과 만난 지 8개월 만에 금보라가 먼저 결혼하자고 프러포즈를 했단다.
남편 이야기가 나오니까 입에 모터를 달아 놓은 것처럼 자랑을 늘어놓느라 정신이 없다. “통통하고 생긴 것도 마음에 들지만 경상도 ‘상남자’에다 배려심이 많다”며 그녀는 한마디로 남편을 존경한다고 한다. 결혼 전에 남편과 데이트 할 때 그녀가 밥값과 술값은 도맡아 냈을 뿐만 아니라 지갑이나 벨트 등 선물 공세를 펼쳤다는 것이다. 다른 여자들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금보라처럼 예쁘고 대한민국이 다 알아주는 스타인데 금상첨화로 매너까지 좋다면 어느 남자가 반하지 않을까? “나는 늪이거든~”이라고 또 자랑 질이다. 한 번 빠지면 절대로 헤어날 수가 없단다. “인간 금보라를 제대로 알려면 사계절은 지나야 한다”고 목청을 높인다.
그녀가 아직도 남편과 아이들 도시락을 직접 싸 준다니 믿기 어렵다. 밤샘 촬영을 하고 지쳐도 도시락은 꼭 자기 손으로 정성스레 싸 준다니 이봉규가 금보라를 아직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 이유는 자기가 남편보다 뛰어난 것이 없기 때문이란다. “남편에게 잘 해 줘서 내가 없으면 불편하게 만들어 내 소중함을 어필하자는 작전”이라는 것이다. 라는 프로그램에서 같이 방송 할 때가 생각난다. 그녀는 ‘예쁘고 거친 여우’임에 틀림없다.
그런 그녀도 “이혼 후 아이들 문제로 난감했던 적이 있었다”고 털어 놓는다. 아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 어린이날 운동회를 갔는데 ‘아빠와 달리기’ 경기가 있었다. 그런데 당시에는 재혼 전이라서 아빠가 없었었기에 참가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옆에서 한 학부모가 대신 아빠 역할을 해 주겠다고 했지만 기분이 상해 주최 측에 ‘부모와 달리기’로 바꿔 달라고 항의했다. 결국 그날 엄마와 뛴 사람은 우리 아들뿐이었다”며 당시의 안타까운 사연을 말한다. 금보라는 아들과 열심히 뛰었지만 아빠들과 뛰는 아이들을 이길 수는 없었다. “아이가 위축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엄마가 못 뛰어서 졌다”고 속상해 했지만 “자기 혼자 아빠 없이 엄마와 뛰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 깔끔한 성격은 엄마를 닮은 것이 분명해 보인다. 여배우 처지에 아빠와 달리기 경기에 엄마가 뛰게 해달라고 우겨서 참가했으니 그녀도 참 어지간하다.
그녀에게는 지금의 남편이 데리고 온 25세의 딸이 있는데 최근에 갤러리아 백화점에서 명품 신발을 사와 속상했다. 아직 명품을 살 나이는 아니라는 평범한 엄마와 같은 생각이다. “13년 동안 자기 딴에는 정성껏 잘 키웠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것 같다”는 고백이다. 소리 지르면서 야단치면 폭발할 것 같아서 카톡으로 차분하게 주의를 줬다고 한다. 그리고는 주말에 반품을 하는지 지켜보고 아니면 어떤 형태로든 응징을 할거라며 결과를 지켜보고 있다고.(추후에 반품했다는 메시지가 왔다.) 남편의 금보라에 대한 평가는 “가방끈은 짧아도 똑똑하고 아는 건 많지 않아도 현명한 여자다.” 남편의 평가대로 그녀는 현명하게 장문의 카톡으로 딸을 꾸짖었다. 그 내용을 지면으로 그대로 옮긴다.
어제 일은 내가 수십 번을 생각하고 생각해도 결코 옳지 않은 일이라 잠까지 설치는구나. 나름 딸내미를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잘 키웠다고 자부했건만 솔직히 약간은 쇼크라고 할까?
여하튼 속상하고 화도 났다.
어떻게 네 나이에 그런 쇼핑을 할 수 있는지? 아무리 명품 신발이 신고 싶다고 해도 그건 아니라고 본다.
세상 살면서 네 말대로 없는 게 더 많을 수 있지만 그 반대로 넌 다른 네 또래보다 많은 걸 가졌고 넘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설사 네가 돈을 많이 번다 해도 사치와 허영에 들떠서 생각 없이 명품만 쫓는 한심한 여자로밖에 난 생각이 안 들었다.
...(중략)...
아빠와 엄마가 너를 언제까지고 보호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너 스스로 살아가려면 절제도 배우고 참을 줄 알고 그래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단다. 너의 가치관으로 볼 때 내 지적이 틀린다 할 수도 있겠지만 부모로서 널 위해 하는 말이다. 그래도 네가 옳다면 이것만은 알아 두길 바란다.
명품 신고 입고 든다고 사람이 명품이 되는 게 아니라는 거. 올바른 삶을 살아갈 때 사람은 비로소 빛난다는 걸.
존경하고 사랑하는 남편이 데리고 온 딸이 내가 낳은 자식보다 더 애틋하고 사랑스러워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이 그녀의 글 속에 절절히 묻어난다. ‘계모는 이래도 계모고 저래도 계모’라는 내용의 책을 쓰고 싶다는 금보라의 속내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마도 기른 정이 낳은 정보다 깊다는 말일 것이다.
지금 인터뷰하고 있는 서울 강남구 청담동 극동빌딩 6층의 ‘M바’대표에게 직원들 빨리 퇴근시키라고 야단치면서도 뒤로는 직원들에게 택시비를 슬며시 건네는 금보라의 마음 씀씀이로 볼 때 딸에 대한 꾸짖음도 끔찍한 사랑이라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어느 보석이건 나를 빛나게 해 주지 않았다. 오직 남편만이 나를 빛나게 해줬다”고 하니 금보라의 딸에 대한 꾸짖음과 사랑은 정당해 보인다.
“마누라가 천국”이라고 말하는 자신감은 그녀의 일상에 배어 있을 것 같다. 외모만큼 섹시한 금보라의 일상을 염탐하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나는 1952년 경남 합천군 초계면의 한 시골 마을 방앗간 집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우리 집은 아들만 여섯인 아들 부자 집이다. 원래 어머니는 아들만 일곱을 나으셨는데 첫 째는 돌도 못 넘기고 잃었다고 한다. 그 후 집안의 귀한 첫 아들로 태어난 나는 태어난 후 사흘 동안 눈을 뜨지 않아 부모님의 애를 태웠고, 어릴 때 비행기만 떠도 놀라서 경기가 드는 아이였다고 한다.
우리형제들은 모두 호적 나이가 실제 나이보다 일 년 씩 어리게 되어있다. 돌까지 살아남으면 호적에 올려주었다. 아마 첫째를 돌전에 잃었기 때문인 듯하다. 이 덕분에 나는 퇴직 시 명퇴금을 1년 치나 더 받을 수 있었다.
어머님과 아버님은 고향 마을에서 한집 사이를 두고 결혼을 하셨는데 그 중간 집에 사시는 분이 중매를 하셨다고 한다. 우리 부모님은 동네에서 잉꼬부부로 소문난 금슬이 좋으신 분이셨다. 아버님은 엄격하시고 강직한 분이셨다. 반면 어머님은 따뜻하고 정이 많으신 분이셨다. 아들들을 한없이 칭찬하고 격려하시고 보듬어 주신분이다. 우리 형제들은 우리집안의 유일한 여자 분인 어머님을 무척 좋아했다. 지금도 우리 형제들은 돌아가신 지가 15년이 지났지만 모이면 어머니 애기를 자주하고 다섯째는 대기업의 임원이지만 술 한 잔 되면 보고 싶다고 울곤 한다.
할아버지의 손자 사랑은 지극하셨다. 손자들이 많았기에 우리는 돌만 지나면 사랑방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잤다. 할아버지는 손자들 이불을 덮어주시고 음식도 챙겨주셨다. 손자들에 대한 자랑과 자부심이 대단하셨다. 친구 분들이 오실 때면 언제나 불러 인사를 시키셨다. 우리형제들은 그 당시 초등학교에서 형제들 모두가 급장을 다 하던 때라 자랑이 대단하셨다. 내가 나중에 취직이 되어 첫 월급을 새 돈으로 할아버지께 용돈을 드렸는데 돌아가실 때까지 그 돈을 보관하고 계셨던 분이다.
우리 할머니는 연약하신 분이지만 우리 형제들은 모두 할머니 등에 업혀 자랐다. 낳아주신 분은 어머니이고 키워주신 분은 할머니이다. 할머니 등은 손자들의 코 때가 지워지는 날이 없었다. 서울에서 방학 때 내려가면 맨발로 뛰어 나오시던 분이다. 나는 첫 손자로서 조부모님의 사랑을 한없이 받고 자랐다.
우리 집의 가훈은 우애(友愛)이다. 할아버지는 손자들에게 어릴 때 귀가 닿도록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하셨다. ‘조선팔도 다 다녀도 형제같이 화합할까’ 할아버지께서 항상 우리에게 하시던 말씀이다. 우리 형제들은 이 말씀을 어머님 돌아가신 15주기 때 고향 우리 집 정원에 비석으로 새겼다.
나는 초등학교에서 모범생 이었다. 한 학년에 두 반인 작은 시골 학교였지만 나는 입학해서 졸업할 때까지 6년간 급장을 했고 선생님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부모님도 아들을 자랑스러워했다. 소먹이기, 풀베기, 나무하기 등 집안일도 잘 도와드렸고 어머니가 가지 오이 등을 장에 갖다 팔아야 할 때는 리어카에 실어다 드리는 착한 아들이었다.
나는 1968년 무장공비 김신조가 청와대 담을 넘어 공격하던 해 서울 경기상업고등학교로 유학을 왔다. 경기상고는 시골에서 올라온 가난하지만 우수한 아이들이 많았다. 청운중학교와 같은 교정이어서 청운 중학교 출신도 많았다. 고향 초계중학교에서는 서울로 두 명이 유학을 왔는데, 친구는 배제고등학교를 가고 난 경기상고에 입학했다. 친구는 고모 집에서 다니고 나는 삼촌 집에서 다녔다. 그 후 세월이 흘러 나는 은행원이 되었고 친구는 고대의대를 나와 강릉의 유명한 외과의사가 되었다.
경기상고는 일제 강점기에는 경기도립상업고등학교로 도상이라 불렸던 학교로 일제 때부터 훌륭한 선배들이 많았다. 당시 정·재계에는 태완선 총리, 김종희 한국화약 회장님 등을 비롯한 분들이 포진해계셨고 특히 금융권에는 임원들이 많았다.
내가 경기상고를 선택한 것도 유연이다. 아버지와 서울에 올라와 어떤 학교를 가야할지 고심할 때 삼촌 이웃에 양정고등학교 선생님으로 퇴직한 분이 계셨는데, 이분이 도상을 추천해주셨다. 아버님은 대구상고를 나와 제일은행에 취직한 고향의 내 친구 형으로부터 ‘은행에 취직을 하니 당장 선생님의 월급보다 많더라’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아들을 은행에 취직시키고 싶어 하셨다. 양정고 퇴직 선생님은 상고 중에는 도상이 최고라며 당장 도상을 추천해 연희동에서 청운동까지 버스를 갈아타면서 먼 길을 삼년을 다녔다.
상고에서 은행에 취직하는 것은 인문계학교에서 대학에 진학하는 것과 같았다. 매년 어느 은행에 몇 명이 합격했는지 통계를 내고 홍보하던 때였다. 우리학교는 한 학년이 7개 반으로 6개 반이 취직반이고 마지막 7반이 진학 반이었다. 취업반은 은행 취직을 위한 전략을 세워 공부했다. 가장 공부 잘하는 학생은 한국은행, 산업은행, 외환은행 순으로 가고 다음 조흥, 상업, 제일, 한일, 서울은행 등을 갔다. 나는 신설된 한국신탁은행을 지원 했다. 신설된 은행이 향후 전망이 나을 거라고 선생님이 추천해 주셨다. 그해 경쟁률이 높아 우리학교에서는 나를 포함해 두 명 만이 합격했다. 대졸 중견 30명, 상고 졸 초급 60명을 모집했는데, 대졸 중견은 서울 대 출신이 반이 넘고, 나머지는 연대, 고대 등 대부분 명문대 출신이 전부였다. 71년 당시는 지금처럼 삼성, 현대, 엘지 같은 대기업이 성장하기 이전 이어서 공무원, 한전, 은행 등으로 인재들이 몰리던 시기였다.
그 당시 은행의 대우는 좋았다. 복지제도가 좋고 각종 수당이 수시로 나왔다. 그러나 입행을 하고나니 아무래도 대학을 가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건국대학교 경영학과 야간 학부에 시험을 봐 합격했다. 그러나 말단 직원이 대학 수업시간에 맞추는 것이 어려워 포기하고 다시 이듬해 야간 전문대학인 서대문에 위치한 국제대학을 지원 해 입학했다. 이 학교는 야간만 있는 대학으로 저녁 6시에 수업을 시작해 그 당시 인기가 있었다. 나는 경영학과에 입학했는데 정원이 30명으로 우수한 인재가 많았다. 한국은행, 산업은행 등 상고출신이 많았다. 적은 인원의 대학이지만 그 당시 매년 사법, 행정고시, 공인 회계사 등의 합격자들을 배출했던 시기이다. 내 친구도 산업은행에 다니면서 공인회계사 전국 수석 합격했다.
그때는 그야 말로 주경야독을 했던 시기이다. 은행의 업무는 최대한 빨리 끝내고 대학 수업시간에 맞추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동료들의 도움을 많이 받아야만 했다. 상사들의 눈치도 봐야 했다. 저녁은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라면으로 때우기가 일수였다. 4년을 그렇게 생활하니 위장병이 생길 것 같았다. 토요일도 근무하던 때라 일요일은 도서관에서 공부해야했다. 그래서 나의 이 시기는 다른 애들처럼 취미생활을 하거나 연애를 할 틈이 없었다.
그 당시 나에게는 큰 짐이 있었다. 둘째 동생이 서울로 올라와 중대 앞에서 자취를 하면서 같이 공부했다. 얼마 후에는 막내를 제외한 세 명의 동생들이 모두 서울로 올라와 동생들과 힘든 시기를 보냈다. 아버지는 학비와 쌀을 올려 보내주시지만 아들들이 공부하기엔 턱없이 부족하기에 나는 힘을 보텔 수밖에 없었다. 나는 75년 2월에 대학을 졸업하고 그해 12월에 군에 입대를 했다. 나 혼자 만의 일이라면 대학 2학년 정도 마치고 군대를 다녀오는 것이 좋겠지만 동생들을 남겨놓고 입대할 수가 없어 4학년을 마치고 친구들이 다 제대를 할 즈음 입대를 해야만 했다. 내가 입대를 해도 은행은 본봉의 월급이 나오는 때라 그 돈으로 동생들은 학교를 다녔다. 지금도 이야기 한다. 동생들이 형의 월급을 받으려 은행에 갔던 시절을…
둘째 동생은 중앙대 법대에 나왔다. 졸업 후 삼성생명에 입사해 항상 전국에서 일등의 업적을 내는 유능한 직원이 되었다. 신한생명 초기에 스카우트되어 신한그룹 최연소 임원이 되어 부사장 까지 승진해 8년이나 임원생활을 하고 지금도 퇴직해서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그 때 동양중학교 학생으로 다니던 다섯째 동생은 한양대 경영학과를 나와 지금은 롯데 칠성의 임원으로 재직 중이다. 필리핀 펩시콜라 사장을 5년 동안 역임했고 우리 동생 중 아직도 떠오르는 별이다. 나머지 두 동생도 대구에서 사업을 잘하고 있다. 힘든 시기를 넘겨 좋은 결과가 있어 보람은 있는 일이었다.
79년 제대를 앞두고 아버지의 권유로 첫선을 보았다. 휴가 중 서울의 작은 다방에서 맞선을 보았는데 단 한 번의 만남으로 결혼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그렇게 쉽게 평생의 배필을 선택 했는지 신기하다. 서로의 가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고, 부모님께서 미리 선을 봐 합격점을 준 상태라 하지만 개인적으로 서로에 대해 전혀 알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아내는 면장님의 둘째 딸이라 자라면서 큰 힘든 일은 해본 적 없이 곱게 자란 규수였다. 그 당시 나는 장남으로서 결혼 후에도 동생들을 데리고 있어야 할 형편이어서 아내를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대학에서 나를 따르는 여자도 있었고, 은행에서 자취집에까지 찾아온 여자도 있었지만 결혼을 쉽게 결정할 수는 없었다.
79년 6월 제대를 하고 11월에 결혼을 했다. 아버지는 내가 장남이라 전통혼례식을 올리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신부 집에서 아내는 족두리를 쓰고, 난 사모관대를 쓰고 혼례를 올렸다. 동네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멍석을 펴놓고 상위에는 살아있는 닭이 퍼덕 거렸다. 첫날밤은 신부 집에서 보내기로 하는데, 그 날 밤 신랑을 짓궂게 장난을 거는 사람 들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어 나와 아내는 저녁에 해인사로 피신하는 신혼여행을 떠났다. 밤중에 택시를 타고 해인사로 향하던 신혼 여행길에 노루가 튀어 나와 놀라던 추억이 새롭다.
내가 아내를 단한번의 선을 보고 선택한 것은 일종의 모험이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 보니 내 일생의 가장 잘 한 선택이었다. 아내는 검소하고 강하고 현명한 사람이었다. 지금 형제들이 성공하여 화목하게 잘 지내는 것은 대부분 아내의 공로인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후회스런 일을 꼽으라면 신혼초기 아내가 힘들 때 너무 도와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동생들 뒷바라지에 아이들 키우기 힘들 때 연탄불 한번 갈아준 적이 없고, 아이들 한번 제대로 봐준 적이 없다. 아내는 밤중에 아이가 깨어 울면 남편 잠 못 자 직장생활에 지장을 줄 까봐 아이를 다른 방으로 대려나가 밤새 혼자 방을 새우곤 했다. 아내는 그렇게 자신을 희생하고 오직 나를 위해 정성을 쏟은 그런 여자였다. 그 당시에는 왜 그리 철이 없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은행에 입행해 퇴직을 하기까지 만 38년을 다녔다. 지나고 보니 나는 직장 운은 좋았고 축복을 받은 사람이었다. 은행이란 직장은 안정되고 복지가 훌륭하고 좋은 직장이었다. 아이들 대학까지 등록금을 주고 집을 마련하도록 사원주택 아파트를 주고, 월급날 하루도 늦은 적이 없고 지점장 시절 억대가 넘는 연봉에 퇴직금도 적지 않은 직장이다. 재직 시에도 지점장 명함이면 누구나 신뢰하고 인정을 해주는 곳이다.
나는 초년 시절부터 성실했고 열심히 노력했다. 언제나 상사의 인정을 받았고 지점에서 언제나 대부계 같은 요직을 담당했다. 자기계발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주경야독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88년에는 해외 OJT연수를 미국 시애틀 은행으로 다녀왔다. 그 후 은행의 중요 부서인 종합기획부에 과장으로 근무하고, 카드 사업부, 개인금융부 등에서 차장으로 근무했다. 1998년 지점장으로 나갈 때 까지 황금기의 시절을 보냈다.
카드사업부에 근무할 때는 해외여행의 기회가 많았다. 일본 JCB카드사, 미국 비자사, 마스터 카드사, 유럽 유로페이 등 카드사를 매년 연수를 다니면서 여행할 수 있었다. 특히 시애틀 연수 후 미주, 유럽, 하와이, 동남아, 핀란드, 스페인, 지중해 해협 등 유럽 전역을 장기간 여행한 경험은 좋은 기회였다.
은행 승진도 남보다 늦지 않게 진급했다. 지점장 진급은 아이러니컬하게도 IMF 덕분에 빨랐다. 선배들이 명퇴를 하고 서울은행, 제일은 행이 매스컴에서 회자될 때 오히려 해택을 보았던 셈이다. 하나은행과의 합병 시에도 많은 직원이 퇴직을 했지만 그때도 살아남아 십년이 넘도록 지점장 생활을 하고 임금피크제 까지 일 년을 하고 퇴직할 수 있었다. 당시의 상황으로는 은행원의 천수를 다한 셈이다.
지점장 생활은 10년 동안 시흥남, 관양동, 수원, 서빙고, 부천, 성남 등 6개 점포를 거쳤다. 그러나 가장 기억에 남는 점포는 처음으로 부임한 석수역 앞에 위치한 시흥남지점 이다. 첫 지점장 발령을 받고 휴일 혼자 점포를 찾아가 어떤 전략을 구사할 것인가 많이 고심을 했던 기억이 새롭다. 아내는 많은 걱정을 했다. 사교성도 없는 고지식한 사람이 점포영업을 잘 할 수 있을 까 걱정을 많이 해, 지점장으로 승진을 했는데도 그렇게 좋아하지 않은 듯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지점 실적이 부진하여 평가에 하위 성적을 받으면 명퇴의 우선대상자가 되어 퇴사해야 할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내의 예상외로 난 지점장으로서의 점포경영을 십년이상 훌륭히 잘 수행했다. 내가 부임한 점포는 전임 점포장이 실적 부진으로 불명예 퇴진한 곳이 많았지만 나는 훌륭히 점포를 잘 부활시켰다. 나는 점포 경영의 핵심은 직원들의 관리와 경영 전략에 있다고 믿는다. 점포장의 철학과 의사결정이 중요하다. 그 핵심은 사람의 관리에 있다고 확신한다.
2009년 1월 은행을 퇴직했다. 재직 시에 시간이 없어 못했던 골프를 학교친구들이나 동생들과 같이할 수 있어 좋았다. 5월에는 홀인원을 하는 행운도 누렸다.
양재천과 대공원을 몇 년을 걸으면서 나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퇴직 1년 전에 과천어울림 남성합창단에 입단했다. 매주 화요일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연습해서 매년 연말에 시민회관에서 정기공연을 한다. 벌써 정기 공연을 일곱 번을 넘겼다. 7년이 지난 셈이다. 단원이 30명이 넘어 지역사회에서 새로운 친구를 많이 알게 되었다. 플루트는 퇴직 후 시작해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다. 아들결혼식 때 연주하고 퇴직직원 모임 등에서도 연주했다. 지금은 동호회를 만들어 매주 목요일 부림동 문회센터에서 연습하고 레슨도 받는다.
퇴직 후 5년을 쉬고 나니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2014년 새로운 준비를 해보기로 결심을 했다. 자격증을 취득하고 공부를 시작하기로 했다. 유통관리사를 3개월 동안 과천도서관에 다니면서 공부해 합격을 했다. 그리고 경영지도사 공부를 시작해 지난해 1차 시험에 합격하고 2차 시험을 준비 중이다. 그리고 이듬해 3월 호서대글로벌창업대학원에 입학해 이제 졸업을 위해 논문 준비 중이다
2014년에는 건국대학교 미래지식교육원에서 시니어플래너 과정을 공부하고 같이 공부한 동료들 5명이 KSP교육협동조합을 만들고 나는 이사장직을 맡았다.
다음해는 도심권이모작센터의 열린강사에 선정되어 평생 처음 강사로서 강의를 3차례 해보았다.
2015년에는 KDB 시니어브리지 아카데미 과정을 공부하고 시니어블로거협회에 참여하게 되어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머니투데이 방송에 시니어 악기배우기라는 주제로 방송에도 출연했다. KBS 시니어토크쇼 ‘황금연못’의 패널로도 출연하고 한겨레신문 시니어통신에 기고도 했다. 2016년 3월에는 공무원연금공단 미래설계교육 여가 주거부문 강사로 선정되었다. 매달 2회 제주, 설악산, 수안보, 천안 등에서 퇴직을 앞둔 공무원들 대상으로 강의를 하고 있다.
대학원 동문들과는 석사 박사과정을 마친 24명의 동문들이 참여해 컨설팅프렌즈라는 컨설팅회사를 창업했다. 졸업을 하면 이 멤버들과 할 일이 많아질 것 같다.
퇴직 후 만 7년의 세월이 지났다. 앞으로 얼마나 시간이 남아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시간의 속도는 더 빨라지는 것 같다. 내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조금은 알 것 같고, 인생이란 직접 경험해보아야만 알게 되는 것이 많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지금부터는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가치 있는 일들을 하고 싶다. 아내와 내가 건강하고 아들과 딸은 독립하여 제 몫을 잘하고 있다. 손녀의 재롱이 귀엽고 한 때 어려웠던 시절을 보냈던 동생들과 할아버지의 가훈처럼 화목하게 지낸다. 이러한 가족 간의 사랑이 무엇보다 소중하다. 그리고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면서 주변의 사람들도 돌아보고 작은 재능이지만 나누는 삶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 것이라 믿는다.
대한민국은 급성장했다. 바야흐로 선진국 대열에 우뚝 서섰다. 가장 하찮게 여기던 화장실 문화가 세계 1위 급이다. 그러나 어딘가 어색해 보인다. 주축 대가 흔들리는 기둥에 이상한 지붕을 얹힌 듯한 불균형이 보인다. 국민 국고가 낭비되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오래간만에 돌아온 고국은 엄청 많이 변해있었다. 그중에 하나가 화려하게 단장하고 곳곳에 설치되어있는 고급스러운 화장실의 모습이다. 20여 년 전, 지방의 한 정치인으로부터 시작된 깨끗하고 아름다운 화장실 가꾸기가 전국으로 파생되었다. 예전에는 뒷방 문화로 하찮게 여기고 뒤쪽에 위치하여 뒷간으로 불리던 것이 새롭게 탄생되기 시작한 것이다.
예전에 뒷간이란 사람들의 배설물 처리장으로 냄새가 많이 나고 지저분한 곳이라 사람 사는 생활공간과는 격리되어있었다. 요즈음의 화장실은 용변뿐만 아니라 깨끗하게 손을 씻고 화장하는 다양한 기능으로 어느덧 한나라의 문화 수준 평가의 잣대로 인식되기도 한다. 최근에는 각지방 자체 별로 막대한 국고 거금을 경쟁적으로 고급 화장실 만들기에 쏟아붓는 느낌이 들었다.
필자는 지난겨울, 동네마다 잘 꾸며진 둘레 길을 따라 걷다가 예쁘게 지어진 작은 건물로 들어갔다. 달라진 공중화장실의 변모 사실에 깜짝 놀랐다. 추운 겨울날, 빵빵하게 데워진 화장실이 필자를 반기니 더없이 흐뭇했다. 아기자기하게 가꾸어진 화장실 안 벽면은 편 백 나무로 곱게 단장이 되어있어, 볼일을 보면서도 이리저리 눈이 휘 동그래졌다. 더구나 일반 가정집에도 설치되어 있지 않은 고급 비대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양평 세미 원을 가는 길목에도,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피아노 화장실이라는 곳이 있었다. 필자는 엊그제 두물머리로 향하던 중에 호기심으로 그곳에 잠깐 들렀다. 하수처리장이라고 쓰여있는 입구에서 주차를 했다. 내리는 순간부터 이상한 오물 썩는 냄새가 풍겨왔다. 느낌이 썩 좋지는 않았으나 잘 정돈된 환경에는 실로 감탄이 절로 나왔다.
조용히 흐르는 계곡물 위로 정수 처리를 이용해 만들어낸 인공적 폭포가 한눈에 들어왔다. 한여름의 찌는 더위를 한방에 날려주었다. 그 광경에 시선을 멈추었으나 물살과 함께 퍼져오는 하수구 냄새는 기분을 망가트렸다. 하수처리장 위에도 그랜드피아노의 외형으로 멋진 화장실을 연출했다. 건물 꼭대기 옥상 위로는 그랜드 피아노 뚜껑을 열어 상징적인 지붕을 만들어 냈다.
처리장 건물 앞, 작은 건물에도 피아노 의자 형태가 그대로 만들어져 있다. 기가 막힌 발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는 호기심도 많고 볼일도 있기에 2층 화장실로 오르려니 계단에 건반이 놓여있다. 층계를 밟는 순간 한음이 흐른다. 올라가는 대로 피아노 건반처럼 리듬 소리를 내는 것이다.
밟을수록 신나는 음악이 되어 크게 울려 퍼졌다. 한순간에 쾌쾌한 냄새가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층으로 올라가니 아담하고 예쁘게 가꿔진 식물 화단이 보인다. 잠시 쉬어가는 벤치와 아가들 수유하는 곳도 마련되어 있다. 그러나 어딘가 구조가 어색해 보인다. 잘 꾸며진 고급스러운 세면대에서 손만 대충 닦고는 그냥 내려왔다. 어쨌든 화장실이라 오래 머무르기가 찜찜했다.
화장실이란 더럽고 부정한 것 같은 냄새로 일단은 청결 상의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선가 묘한 냄새가 나는 듯해 서둘러 내려오는데 잘 가라고 또 인사를 한다. 계단 층계가 건반이 되어 밟는 대로 음계 소리를 내며 손을 흔들었다. 위대한 창조의 힘, 사람의 작은 아이디어가 또 다른 사람들에게 커다란 힐 링을 주었다.
그러나 바람이 부는 대로 시궁창 냄새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저 놀라운 발상에 잠시 스쳐가는 곳이었다. 더러운 냄새로 버려진 곳을 사람 발길을 이끌며 멋지게 피아노가 있는 풍경으로 그려낸 것은 실로 감탄할 만 했다.
동방예의지국인 대한민국에 화장실 문화는 매우 중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구석구석 손대야 할 곳이 너무나 많은데 특별히 화장실에 낭비가 심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람들 개개인에게 어쩌면 필요한지도 모르지만 과연, 외출해서 그것도 공중화장실이라는 곳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비대를 쓰는지는 의심스럽다. 그 비싼 금액은 도대체 어디서 충당이 되는지라는 의문점도 생긴다. 결국은 국민들의 피땀 어린 세금 창고가 이리저리 세어 나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대한민국은 이리저리 몸살을 앓고 있다. 지 자체마다 독립적 행정으로 저마다 지역의 발전을 과시하는 난 개발이 우후죽순 벌떼를 쑤셔 놓은듯하다. 여기저기 공사판에 난장판은 주야를 막론하고 사람들의 통행은 물론 차선도 가로막는다. 그나마 잘 꾸며진 둘레 길로 향하는 길가에도 미세먼지가 남발하고, 사람들 얼굴에는 온통 가면을 쓰고 거리를 활보한다.
가장 선진국인 미국에도 화장실은 깨끗하고 청결하게 관리하는 것으로 족하다. 거금을 들여 멋지게 꾸미기보다는 철저한 관리가 더 중요하다. 한국은 시간이 걸려 사용되는 비대가 줄 서서 기다리는 공중 화장실에 거의 설치되어있다. 마치 허술한 집에 화려하게만 꾸며진 화장실의 겉치레를 연상케 한다. 물론 서로가 앞다투어 먼저 이루어낸 아름다운 화장실 문화가 나쁘지만은 않다.
그러나 이제는 다른 미흡한 것들과 잘 어우러져, 보다 멋지고 훌륭한 나라, 기둥이 튼튼한 나라가 되기를 기원해 본다. 언젠가 멋진 ‘피아노 화장실’ 소리가 더욱 아름답게 들려올 것이다.
“저 사람은 도대체 어디서 튀어 나왔지?” 영화 에서 본 장광(張鑛·64)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영상을 압도하는 무서운 표정의 배우는 어디서도 보기 드문 악역 전문이 될 거라 믿었다. 첫 영화 이후 4년이 흐른 지금, 장광은 매서운 눈매를 치켜세우거나 혹은 선한 눈을 하며 웃어도 어울리는 자유로운 배우로 사랑받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은퇴할 나이에 혜성같이 나타나 ‘대세 배우’로 살아가는 배우 장광을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글 권지현 9090ji@etoday.co.kr 사진 오병돈 프리랜서(Studio Pic) obdlife@gmail.com
장소협조 전광수 커피하우스 대학로점
배우 장광과 걷는 대학로는 앞으로 나아가기 쉽지 않았다. 그날따라 일일장터가 열린 탓이기도 했지만 내 옆에 걷는 이가 잘나가는 장 배우(?)이기에 인사를 하거나 악수를 청하는 사람들이 꽤 됐다. 나도 모르게 매니저 아니면 경호원이 된 듯 보호본능을 일으키며 주위를 살핀다. 인기 배우와 함께 있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싶다.
인터뷰 장소로 이동하는 동안 우선 시청자로서 제일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어떻게 매번 인기 흥행작에만 유독 얼굴을 비출 수 있는지 말이다. 영화는 물론이고 출연했던 TV드라마를 눈여겨보면 장광은 중년층이 즐겨보는 일일드라마나 주말 드라마에 출연한 적이 없다. 5월 초 막을 내린 tvN , 출연이 예정돼 있는 KBS 퓨전 사극 도 젊은 세대를 겨냥하거나 해당 방송사 주력 시간대 드라마다. 굳이 유행하는 작품만 고르는 걸까?
“아니요. 그런 거 생각 안 해요. 그냥 들어오는 대로 하는 겁니다. 사실 이번에 일일드라마에서도 제의가 있었는데 과 시간이 겹쳐 하지 않기로 했어요. 일부러 고르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은 캐스팅 1순위, 대체불가 배우로 꼽히지만 4년 전만 해도 꿈도 못 꾸던 일이었다. 다른 무명배우들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오디션에 응시하고, 고배 마시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정년퇴직할 나이, 생애 최고의 영화를 만나다
그러다 만난 작품이 바로 영화 다. 이 영화 한 편으로 배우 장광은 인생역전 드라마를 쓰기 시작했다.
“그때 사실 부동산에 투자했다가 사기 당하고 큰 손해를 입어 문제가 아주 심각했습니다. 7~8년 동안 서서히 숨통이 조여 왔어요. 상황이 점점 안 좋아지다 보니 다른 사람들한테 더 이상 도움 받을 수가 없었어요. 기도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는 영화 를 만나는 과정을 신앙인으로서 기도와 말씀 없이는 설명할 수 없다고 말했다. 타 매체 인터뷰에서 자신의 종교 신념을 표현해주지 않은 것에 대한 서운함을 토로했다. 그러면서도 다시 당시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이어나갔다.
“매일 새벽기도에 나갔습니다. 집사람과 기도원이라는 기도원은 다 다녔죠. 그런데 를 만났던 2011년, 40일 동안 하는 새벽기도회에서 목사님이 ‘여러분들에게 앞으로 찾아올 10년, 20년이 생애 최고의 해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현실을 돌이켜보니 그때 내가 우리 나이로 쉰아홉이었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정년퇴직하고 손 놓을 때잖아요. 그런데 앞으로 10년, 20년이라는 비전을 가지라더군요. 현실적으로는 정말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했지만 깊이 와 닿았습니다.”
그리고 40일 기도회가 끝나기 바로 며칠 전에 영화 오디션 소식이 들렸다. 오디션 보게 될 배역을 보자마자 가족 모두 하나님이 보내신 거구나 생각했단다.
“영화 에서 원하는 배역이 50대 후반의 대머리여야 하고 연기는 잘해야 하는데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배우, 겉으로 보기에는 굉장히 선한데 뒤에서 악랄한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하나님이 준비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장광이 맡은 1인2역의 교장과 행정실장은 교회 장로였다.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으로서 부담됐지만 기도로 받은 역할이라 생각했다. 800명이 지원해 단 한 명, 장광이 선택됐다. 이 배역이 정해지지 않아 6개월 여 난항을 겪다 장광이 합류하면서 바로 영화 촬영이 진행됐다고. 실화를 다룬 영화, 19금 등 흥행을 저해하는 요소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460만(누적 466만2 914명) 관객이 영화관을 찾았다. 실제 도가니 법(장애 여성, 아동 등을 성폭행으로부터 보호하자는 법) 제정에도 큰 영향을 줬다. 사회적으로 파장이 커서일까? 영화를 만든 스태프와 배우에게 난감한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결국 쫑파티를 못했습니다. 사회적으로 이슈가 됐는데 우리는 손님 많이 들었다고 웃고 즐길 수가 없었어요. 그렇게 할 분위기도 아니었죠. 상영 시작하고 한 달 뒤, 전라도 어디 초등학교 폐교에 가서 쫑파티 했습니다(웃음).”
주인공으로 등장한 배우 공유(본명·공지철)도 공유지만 쌍둥이 교장과 행정실장을 연기한 장광이 더욱 더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무엇보다 영화 이후 다양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부드러운 인지도를 쌓아 나갔다.
“하여튼 예능 프로그램은 다 돌았던 거 같아요. 우리집 식구 다 찍고 그러고 나니까 처음 했을 때는 ‘저 얼굴도 보기 싫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거도 싫다. 나쁜 놈, 못된 놈, 더럽게 생겼다’ 이렇게 나오다가 나중에는 ‘귀엽다’ 소리까지 들었습니다.”
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로 날개를 달다
악역에만 국한되지 않는 전천후 배우로 활약하게 된 첫 번째 작품이 배우 이병헌과 함께 했던 영화 다.
“를 찍을 땐 참 재밌었습니다. 악독한 배역이었다가 ‘내시’를 한다는 게 말입니다. 보통 ‘내시’라고 그러면 가늘고, 마르고, 앵앵거리는 소리를 내는 거만 생각하는데 감독님은 저한테 ‘아주 듬직한 고목나무 같이 끝까지 상감을 보필하는 우직한 내시를 연기해 달라’고 주문했습니다.”
영화 를 연출한 추창민 감독은 장광의 연기를 꼼꼼하게 챙기고 요구했다. 영화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를 때라 완벽하게 따지고 확인해 주는 추 감독의 도움이 컸다고.
“그때 칭찬 받았던 것이 뭐냐면 감독이 원하는 딱 그만큼만 한다는 거였어요. 차지도 넘치지도 않게 말입니다. 그래서 촬영 과정에서 연기 잘한다는 얘기가 들리더군요.”
작년 8월 개봉했던 영화 에서는 사이비 교주 역할을 맡았다.
“난 그런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것이 재밌습니다. 성우를 할 때도 그랬는데 강한 캐릭터나 만들어내기 어려운 것, 과연 저걸 어떻게 만들까하는 역할을 많이 했어요. 의 스탠스 필드(게리 올드만 분), 의 펭귄맨, 애니메이션 더빙으로는 와 도 해봤고요. 이 성공하지 못하고 완성도도 약해서 아쉽긴 했지만 사이비 교주 역은 아주 재밌었습니다.”
집안에서 나는 60~70점짜리 가장
얼굴이 알려진 이후 단 한 번의 기복도 없이 배우 생활을 하고 있는 장광. 아버지로서 가장으로서 본인의 점수를 물어보니 60~70점은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장광의 부인 전성애, 딸 장윤희, 아들 장영 모두 연예인이다. 서로의 일상이 바쁘지만 돈독한 가족애를 위해 노력하고 살고 있단다.
“각자 스케줄 때문에 여행을 못해요. 그게 좀 아쉽지만 가족 예배를 드릴 때가 있기 때문에 볼 시간도 있고 기도 제목을 얘기하면서 서로의 고민을 나눕니다. 친구 부부들과 함께 만날 때면 우리 부부가 편안하게 말을 많이 한다더라고요. 내 친구들은 자식들 걱정에 속이 썩어들어 가도 말 못할 때가 많다는데 저는 다행이죠.”
내 아들, 미안하다! 사랑한다!
코미디언으로 활동하고 있는 딸 장윤희씨와는 정말 친구처럼 지낸다는 장광. 그런데 아들 장영씨와는 조금은 서먹함을 느낀다고 했다.
“아무래도 남자라서 그런지 밖으로 돌고 그래요. 물론 서로 할 만큼은 하는데 내가 어렸을 때 아들에게 상처를 많이 준 거 같아요. 따지고 보면 잘되게 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그런 거죠. 우리 나이 아버지들이 대부분 다 그렇잖아, 자기는 잘 못했으면서 아이들은 제대로 시키려고 강제적으로 하는 거요.”
어느 날 꼭 날을 잡고 아들에게 사과할 생각이다.
“아이가 어렸을 때 교회 프로그램이던 아버지학교에서 편지를 써서 아들에게 보내고, 안아도 봤는데 풀리지 않더라고요. 스킨십도 하고 사랑한다 말도 해야 한다는데 아버지가 아들한테 그런 말 하는 게 쉽지 않아요. 젊은 사람들은 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나이는 너무 어렵습니다. 꼭 언젠가 아들에게 얘기해 줄 겁니다. 미안하다고요.”
집밥 백선생님? 장광 배우님 어떠신가요?
사실 영화 로 카메라 앞에 서기 전, 성우로 일을 할 때도 줄곧 주인공을 맡아 인정받는 성우로 살아온 장광. 오디오와 비디오의 차이일 뿐이지 사랑을 많이 받고 산 사람이라 스스로 평가한다고. 물론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도 겪었지만 현재를 생각하면 많은 것이 감사하다. 신앙적으로도 를 전후해 하나님을 깊이 만난 것도 인생에서 너무 고마운 부분이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뭔가 배우고 싶다거나, 하고 싶은 것이 있는지 물었다.
“사실 젊었을 때는 탭댄스를 정말 배우고 싶었습니다. 진 켈리가 나왔던 뮤지컬 영화 를 보고 정말 멋지다고 느꼈습니다. 지금은 뭐 따라하는 정도일 거고 제 나이에 맞는 스포츠댄스를 운동 삼아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배우고 싶습니다.”
최근까지 교회 공동체에서 기타를 배워보기도 했는데 정말 매일 미친 듯이 쳐야 늘 것 같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또 배우고 싶다는 것이 있었다.
“이제는 요리하는 것을 배워야 할 것 같아요. 요즘 분위기로 남자들도 요리는 좀 해야 할 것 같더라고요.”
혹시 이 글을 tvN 제작진이 읽기를 바라며 시즌3에는 꼭! 장광 배우를 섭외하길 권한다.
‘배우’. 자신의 이름을 걸고 연기하는 사람들에게 배역이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특권이다. 그 어떤 옷을 입는다 해도 충격이지 않게 단지 그의 연기로 몰입하게 만드는 배우가 우리 주위에 얼마나 있을까? 배우 장광이 지금 별처럼 빛나는 이유? 바로 그것! 그것이다.
조선인들 중 두 번째 해외 나들이를 한 사람은 1888년 미국에 공사로 파견된 박정양(朴定陽, 1841~1905.11) 일행이다. 사절단의 ‘일원’이며 가이드로 수행한 인물이 호러스 알렌(Horace Allen, 1858~1932), 한국어 이름 안련(安連)이다. 알렌은 조선이 서양 국가들과 개항조약을 맺은 후 1884년 조선에 온 최초의 외국인 선교사이다.
조선-미국 개항조약에 선교에 관한 구체적 언급은 없다. 6조에 ‘조선 개항장에 거주하는 미국인은 해당 지역에서 건물 또는 토지를 임차하거나 주택 또는 창고를 건축할 수 있다’, 8조에는 ‘언어, 문학, 법률이나 예술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보호를 받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미국은 이를 토지나 주택을 사서 교회 등 문화적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으로 확대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초대 미국 공사 푸트(Lucius Foote)는 기독교 박해가 자행된 조선에서 선교사 신분은 여전히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알렌을 ‘미국 공사관에 속한 무급 의사’로 임명한다.
알렌은 조선에 도착한 지 3개월 후인 이해 12월 갑신정변에서 개화파의 공격으로 죽어가는 명성황후의 조카 민영익(閔泳翊)을 치료한다. 한밤중에 피투성이가 된 민영익이 업혀 와서 치료받는 장면은 드라마에서 극적으로 묘사되는데 이건 픽션이 아니라 사실이다. 이 운명적 만남 덕분에 그는 명성황후와 황실의 신임을 듬뿍 받는다. 명성황후는 알렌이 조제한 약이 아니면 먹지 않았다고 한다. 알렌이 감기약을 알약으로 주었다면 그 후 다른 의사가 조제한 가루약은 같은 성분이라도 먹지 않고 알약으로 바꾸어 오라고 할 정도로 알렌에 대한 신임은 절대적이었다.
‘미국인’ 알렌이 구한말 ‘소용돌이 정치’에 깊숙이 개입하게 된 것은 숙명처럼 보인다. 그는 1887년 조선정부의 참찬관(參贊官, 오늘날의 서기관) 자격으로 박정양의 미국행을 주선하고 수행하며 1890년에는 미국 외교관이 되었다. 미국은 한국정부에 대한 그의 영향력을 높이 사서 알렌을 서울 주재 미국공사관의 서기관으로 임명했다. 1897년 9월에는 공사관 최고위 직인 공사로 승격된다.
그러나 러일전쟁 시기 미국이 한국문제에 적극 개입할 것을 주장하고 본국 정부의 친일-반러시아 정책을 비판함으로써 테드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과 국무부와 마찰을 빚어 1905년 3월 해임된다. 연세대는 의료 선교사로서 그의 공적을 기리는 ‘알렌관(Allen Hall)’을 만들었다.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평가가 상반된다. 조선의 의학 발전과 독립을 위해 도움을 주었다는 호의적 평가와, 미국인들을 위해 이권을 얻는 데 급급한 이기적 인물이라는 주장이 대립하고 있다. 이 문제는 라는 제목으로 발간된 그의 전기가 가장 잘 설명해 줄 것이다. 1962~1970년 위스콘신 대학 총장을 지낸 역사학자 프레드 해링턴(Fred Harrington)이 쓴 이 책의 제목은 우리말로 옮기면 이다. 그는 처음엔 선교사로 일했고, 그 다음 조선 왕실과의 친분을 이용해 미국인들의 이권 획득을 도왔으며, 마지막엔 미국 공사로서 일본인들을 상대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이광린 교수가 로 번역했다.)
그의 전기에서는 조선에 대한 애정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고종 등 황실과 당시 조선사회 전반에 만연한 미국에 대한 호감으로 인하여 그를 친한적(親韓的) 인사라고 인식했을 뿐이다. 미국이 아시아 국가들의 독립을 지지하고 영토적 야심이 없다고 믿은 고종은 일본과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미국이 한국문제에 관심을 갖기를 원했다. 그러나 미국은 아시아에서 군사력을 보유하지 않아 이 지역 외교무대에서 내세울 수 있는 게 도덕성뿐이었다. 한국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의도나 능력이 없었다는 게 정확한 평가이다.
그런데도 고종은 미국이 조선에 관심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알렌에게 수차례 묻는다. 알렌은 이에 서슴없이 “미국인들에게 광산 이권을 주십시오”라고 대답한다.
아시아에서 최대 금광인 운산금광(평북 운산)은 이렇게 해서 미국회사가 차지하게 되었다. ‘노다지(no touch)’라는 말을 유행시킬 정도로 엄청난 수익을 안겨준 금광이다. 1930년대 후반 일본이 강제로 이를 매입할 때 미국 외교문서는 ‘운산금광의 매매와 양도는 미국의 선구자적 금광 사업가들이 동양의 미개발된 땅에서 44년간 이익을 남긴 흥미로운 사업을 종결짓는 것’이라는 감동적이며 애수에 찬 논평을 남기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미국이나 영국은 고종이 금광만이 아니라 철도, 전차, 전기 등 각종 이권을 ‘팔면서’ 높은 배당금을 챙기는 데만 혈안이었다는 점을 부각시켰다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고종의 비자금은 주로 이를 통해 조성된 것이다.
그는 보고서에서 조선을 부정, 부패와 무능으로 인해 곧 망할 나라라고 묘사하고 있다. ‘조용한 아침(Morning Calm)’이란 이제 옛말이다. 조선은 이제 아침이 지나 춥고 음울한 고요의 땅(the Land of the Cold Grey Calm of the Morning After)이 되어가고 있다’, ‘이 나라 국민들은 스스로 다스릴 수 있는[自治] 능력이 없으며, 따라서 과거와 같이 지배자(overlord, 중국)를 가져야 한다’, ‘고종은 로마가 불타는 것을 보면서 악기를 타는 네로와 같이 궁녀들과 유희나 즐기고 있다’, ‘정부가 바뀌면 천연자원과 잠재성을 가진 국민을 가진 이 나라에 약간의 희망을 줄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 승리한 나라가 조선을 삼키고, 국민들에게 약간의 자유를 주면서 탐욕스럽고도 비인간적인 관리들을 쓸어버리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일본과 러시아 간 전쟁의 결과가 무엇이든 한국은 그 승자에게 먹힐 것이다’. 이것은 알렌 개인의 평가라기보다는 당시 선교사들과 외교관들의 일반적인 인식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후일 서양 열강들이 일본의 강제합병에 찬성하거나 묵시적으로 동의한 배경이라 할 수 있다.
의사 출신 알렌은 특히 조선인들의 비위생적인 모습에 대한 혹평도 빠뜨리지 않았다. 조선인들은 목욕을 하지 않으며 우물물을 소독 없이 식수로 사용하여 선교사들이 이질 등 질병이 걸렸다는 것이다. 이건 알렌의 편견이라 할 것이다. 기후에 관계없이 매일 목욕을 하는 게 위생적인 것은 아니다. 일본은 기후가 습하여 목욕을 자주 해야 하지만 조선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조선인은 우물물을 먹어도 이질에 걸리지 않는데 선교사들만 걸린 것은 풍토병에 대한 면역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고를 지닌 인물이 조선 사절단을 이끌고 미국으로 간다.
△ 구대열 이화여대 명예교수
서울대 영문과 졸, 한국일보사 기자, 런던정경대 석ㆍ박사(외교사 전공).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통일학연구원장 등 역임. 저서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