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실버, 액티브 시니어라는 말이 자주 귀에 들려오는 요즘이다. 초고령사회로 빠르게 진입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시니어들의 삶은 각자의 상황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내가 청파 윤도균 님을 만난 건 순수문학 수필작가회에서다. 팔순을 코앞에 둔 나이에 아직도 왕성하게 작품활동을 하고 인천 N방송 시민기자로도 활동한다. 어디서 그런 에너지가 나오는 걸까. 그 열정은 디지털 실버, 액티브 시니어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해 보인다. 인생 선배로서 닮고 싶은 분. 요즘은 주 3회 근처 초등학교에 나가 돌봄 교실에서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치고 있단다. 천성적으로 아이들을 좋아하는 성격 때문이다. 그에게 시니어의 삶이란 뭘까. 그의 얘기를 들어봤다.
은퇴 전에는 어떤 일을 하였는지?
처음에는 종로 세운상가에서 전자제품 판매사업을 했다. 그런데 일할 때 양심을 속일 때가 있었다. 그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 나는 아이들을 유난히 좋아했다. 판매사업 일에 회의가 들던 차에 아이들 교육과 관련된 일이 연결되어 학원 사업으로 전환을 하게 됐다. 어린 시절 내 꿈은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 아마도 그런 연장선상에서 교육과 관련된 일이 싫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학원 사업을 하며 20여 년간 독서실 운영도 했다. 하루에 100여 명 이상의 학생들을 통솔하며 아침 9시부터 새벽 2시까지 근무를 했다. 그 일도 판매 사업 못지않게 힘들었다. 하지만 해맑은 청소년들을 바라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학생들이 꿈을 잃지 않도록 조언도 해주고 예뻐하니까 아이들도 나를 따랐다.
교육 사업은 7년 전에 접었다. 시대의 큰 흐름이 있는 것 같다. 그동안 정성들여 운영해오던 사업을 접을 때는 마음에 다소 서운한 감도 있었지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은퇴 결정 과정은 어떠했는지?
20여 년간 일궈온 사업을 접을 때의 감정은 누구나 다 똑같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순리를 따라야 한다고 판단했다. 물론 일을 그만두는 것에 대한 초조함도 있었고 욕심 같아서는 더 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사업자는 전망 흐름을 보고 빨리 현명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나는 마음을 내려놨고 한편으로는 편했다. 제2의 인생, 은퇴 후의 꿈을 설계하며 접었다.
이모작 인생은 계획한 대로 잘 이루어졌는지?
하던 일(직업)이 없어졌으니 당연히 처음엔 헛헛했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내가 만약 어느 날 갑자기 퇴직했을 때’라는 가상 시나리오를 마음속에 써두고 적응 훈련을 했다. 대안도 미리 생각해놔서 크게 흔들리지는 않았다.
사업할 때는 늘 바쁘다는 핑계로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더 소중한 ‘내 건강’에 대해 신경을 쓰지 못하고 살았다. 퇴직과 함께 잡념을 없애기 위해 먼저 운동(등산, 헬스)을 시작했다. 사실, 직장에서의 퇴직이 아니라 내 일을 하다가 일을 놓은 것이기 때문에 일반 은퇴자들보다 나는 나이가 많았다. 어느새 70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건강밖에 달리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평소 내 성격이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간에 ‘있으나 마나 한 인간’으로 취급되는 걸 가장 싫어한다. 취미로 시작한 운동이지만 남들보다 몇 배 더 노력해 땀 흘려 운동했다. 그러자 사업할 때와 비교해 건강이 몰라보게 향상됐다. 스스로 느낄 정도였고 마치 회춘하는 것 같았다. 자랑이 아니다. 몸이 달라지는 걸 실질적으로 체험했다. 건강하니까 매사가 기쁘고 즐겁고 행복했다. 그리고 무슨 일을 해도 긍정적이고 의욕적이었다.
은퇴 전과 후의 생활은 어떤 차이가 있나?
금전적인 면에서 보면 은퇴 후의 생활이 많이 불편한 것도 사실이다. 퇴직 후 줄어든 수입으로 인해 생활이 척박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이란 한도 끝도 없는 것, 생각하기에 따라 행복의 척도가 달라진다고 스스로 최면을 걸었다. 세월 따라 사람이든 자연이든 영원하지 못할 것이기에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깨달으려고 했다. 작은 욕심조차 내려놓으면 편했다. 그렇게 즐거운 나의 ‘인생 이모작’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퇴직 전에는 내면에서 꿈틀거리던 ‘꿈, 소망’ 같은 것을 생각하다가도 돈 생각으로 이어지면 애써 잊으며 살게 되더라. 그런데 이제 은퇴자가 되니 청년 시절 꿈꿔왔던 글쓰기, 사진, 컴퓨터, 운동, 여행, 친목모임, 봉사활동, 취재, 기타 등을 마음껏 하고 배울 수 있어 좋다.
우연한 기회에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선발되어 13년에 걸쳐 약 300여 편의 기사도 썼다. 인천 N방송 시민기자로 영상뉴스 제작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또 그토록 해보고 싶었던 글쓰기를 통해 수필작가로 정식 등단도 했다. 꾸준히 작품활동을 할 수 있으니 이보다 더 행복한 일이 어디 있을까?
지금의 삶은 어떠한지 궁금하다
내 나이 일흔일곱이다. 더 이상 무슨 욕심이 있겠는가? 그래도 십몇 년째 계속해온 새벽운동은 빼먹지 않는다. 아침 5시에 어김없이 일어나 동네 단골 헬스장으로 향한다. 스트레칭을 시작으로 한 시간에 걸친 근력운동과 유산소 운동으로 2시간을 보내고 나면 땀이 비 오듯 쏟아진다. 그렇게 하루를 열고 집으로 돌아와 개인 블로그 ‘청파의 사람 사는 이야기’에 새 글을 쓰고 댓글도 읽고 답장을 쓴다(그는 블로그 운영을 17년째 하고 있다. 요즘도 하루에 800~1000여 명이 다녀간다. 블로그 활동은 손자인 도영이를 돌보면서 시작했는데, 도영이는 어느새 훌쩍 커버렸다).
은퇴를 앞둔 시니어에게 어떤 조언을 하고 싶으신지?
조언이랄 것은 못 되고, 은퇴는 누구나 다 하는 것이다. 마음가짐을 바로 잡아야 한다. 사람마다 환경, 조건이 다르지만 인생 이모작 시대를 새로 개척해 살아야 하는 은퇴자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첫째 : 자신의 현실에 맞는 소박한 은퇴 설계를 하라.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이 무엇이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고 은퇴 설계에 포함하라.
둘째 : 가족과 시간을 많이 가져라. 지금까지 가정에 충실하지 못했다면 이제부터라도 가족들과 적극적으로 어울리는 삶을 살아라(가사분담 등).
셋째 : 꾸준히 운동하고 자신에게 맞는 공부를 하라(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은퇴는 삶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꿈으로만 간직했던 것들을 하나씩 해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을 만들 수도 있겠구나… 하는 여운이 남았다. 아울러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유명한 말도 떠올랐다.
그는 칠순 때, 북한산 인수봉 암벽등반을 하고 그 후 2년에 한 번씩 암벽등반을 꾸준히 하고 있다. 팔순에는 북한 암벽등반을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니어에게는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이 굉장히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살면서 우리는 많은 것들을 잃어버린다. 그것은 물건일 수도 있고 사람일 수도 있다. 사랑하는 딸이 백혈병으로 그의 곁을 떠났고, 28년을 같이 살았던 사람과 헤어졌고, 아들은 해외에 있어 자주 만날 수도 없다. 게다가 자신이 쓴 분신 같은 책들을 모두 잃어버린다면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올 1월 이다빈 작가(55세)가 에세이집 ‘잃어버린 것들’에서 고백한 이야기다. 힘들었던 시기를 담백하고 진솔하게 써내러 간 그의 책을 읽노라면 가슴이 먹먹해 온다.
1996년 시인으로 등단한 그는 작가, 글쓰기 강사, 출판편집자 등 다양한 이력을 갖고 있다. 그동안 동화집 ‘모자 선생님’, 시집 ‘문 하나 열면’, 인터뷰 에세이집 ‘길 위의 예술가들’, 세계문학기행집 ‘작가, 여행’, 국내 테마여행기 ‘소소여행’ 등의 책을 썼다. 작년에는 24년 동안 글쓰기 지도를 하면서 만난 아이들의 글쓰기 치유기 ‘말하지 않는 아이들의 속마음’을 선보였다.
그런데 작년 말 배본사에서 출고를 기다리고 있던 책들이 모두 불에 타버리는 사건을 계기로, 그는 잠시 삶의 여행을 멈추고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잃어버린 것들’에 실린 작가의 말에서 그는 책을 쓴 이유를 이렇게 밝힌다.
“생각해 보니 잃어버린 것은 내 것이 아니라 원래 있는 자리로 돌아간 것이었다. 많이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짐이 그동안 늘어난 모양이었다(…)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니 온통 결핍 덩어리들이었다. 그 결핍 때문에 사랑을 했고, 아이를 낳았고, 이별을 했다. 이제 다른 곳으로 흘러가기 위해서 기억과도 이별을 하려 한다.”
1부 ‘잃어버린 나’에는 저자가 그동안 잃어버린 것들에 관한 글을, 2부 ‘나를 찾아 떠난 여행’에서는 잃어버린 나를 다시 찾기 위해 떠난 여행 이야기를 담고 있다. 동네서점에서 이다빈 작가를 만나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아버지가 운영하는 공장 일을 하느라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공부보다는 돈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그의 아버지는 대학에 갈 필요가 없다고 했고, 그는 오로지 집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으로 공부를 했다. 진주에서 태어난 그는 부산에 있는 대학에 진학한 후 학생회 일을 하면서 사회 모순에 대해 탐구를 하고 편집장으로 활동을 했다. 졸업 후에는 서울로 올라와서 10년 가량 출판사 편집장으로 일했고, 잡지사에서 기자와 주간으로도 활동했다.
“서울에 와서 소설가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죠. 남편의 직업상 집안 경제를 책임져야 했기 때문에 평생 일을 놓아본 적이 없어요.”
사단법인 부설단체를 운영하면서 초등학생들에게 글쓰기 수업을 가르쳤는데 학생들이 몰려와 성황을 이루기도 했다. ‘모자 선생님’은 당시 가르치던 아이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쓴 동화집으로 문예창작기금을 수상했다.
그는 또 학생들이 글을 발표하고 기자의 꿈을 키울 수 있도록 ‘한국문예신문’을 발행하고, 폭넓은 글쓰기를 위해 학생들을 데리고 국내외 여행을 다녀온 후 아이들이 쓴 글을 책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문학의 대중화를 위해 도서관 상주 작가로 일하기도 했다. 7년 전부터는 고양, 성남, 인천, 서울 등 시민대학이나 도서관에서 성인들을 대상으로 글쓰기 강의를 해오고 있다.
“그동안 치유 글쓰기, 시 쓰기, 여행 에세이 쓰기, 자서전 쓰기 등 다양한 강의를 했어요. 강의하고 책을 쓰면서 저 스스로도 많은 공부를 하고 있어요. 지금은 국내 다섯 개 도시를 배경으로 여행기를 쓰고 있는데 곧 출판할 거예요.”
이다빈 작가에게 책 쓰기는 그리 어려운 작업으로 보이지 않는다. 생각만 하고 주저하는 이들이 보기에 그는 추진력이 대단해 보인다. 강의를 한 후 일반인들에게 매번 책 쓰기를 권하는 이유는 뭘까.
“책 쓰기를 하면 암 덩어리처럼 제 안에 뭉쳐 있던 고민 같은 것들이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 들어요. 뭐든지 고이면 딱딱해지고 병이 되기 때문에 흘려보내야 해요. 혈액도 생각도 뭐든 흐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현대인들은 받아들이는 정보량은 많은데 내보내기가 잘 안 되는 것 같아요. 책도 내보내는 것이니 누구든지 책 쓰기가 필요하다고 봐요. 글쓰기나 책 쓰기는 특별한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니까 겁내지 말고 도전해 보기를 권해요.”
그는 누구나 시인이며 작가이자 그 자체로 완벽한 존재라는 걸 자각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코로나19도 이기고 인생을 재미있게 사는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저는 뭘 하든지 간에 자연의 흐름에 맡기는 편이에요. 멋있지도 않은데 멋있게 쓰려고 하면 독자들도 부담스럽죠. 저는 진지한 편이어서 가볍게 써야 한다는 생각을 늘 해요. 독자들은 무거운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우리는 모두 실수투성이고 완벽하지 않잖아요? 물이 흘러가는 것처럼 생각이 흐르다가 고이는 것을 담아내면 책이 되지요.”
여행과 글쓰기는 잃어버린 자신을 찾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말하는 이다빈 작가는 여행이나 글쓰기를 주저하는 이들에게 힘을 주는 사람이다. 앞으로도 그는 다양한 곳에서 글쓰기를 강의하며 함께 책을 만들어 갈 생각이다.
‘코 고는 것 때문에 부부는 각방을 씁니다’, ‘코 고는 습관 때문에 아내가 여행을 기피하게 됩니다.’, ‘잠자고 일어나도 개운하지 않고 두통이 있습니다’, ‘낮에도 졸립고 운전에 방해가 됩니다’ ‘ 같은 증상을 호소한다.
코골이 환자는 성인 10명 중 평균 3∼4명꼴로 많은 편이다. 2004년 한국인유전체역학조사사업에 참여한 대상자 자료 분석한 결과 수면다원검사에서 남성 27%, 여성 16%에서 코골이가 확인됐다. 3~12세 아이들은 평균 4~5명 중 한 명꼴로 나타난다.
김동현 가톨릭대학교 인천성모병원 교수(이비인후과)는 “단순히 들리는 소리 때문에 코골이를 코에서 나는 소리로 생각하기 쉽지만 기도 내 기류가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해 좁아진 기도를 지나면서 늘어진 구개수(목젖), 혀, 입천장, 인두 등의 입이나 목 안의 구조물 또는 주위 구조물에 진동을 일으켜 발생하는 ‘호흡 잡음’이다”고 정의했다.
코골이 3분의 1은 수면무호흡증 동반
단순히 코골이만 있는 경우도 있지만 3분의 1이상은 ‘수면무호흡증’을 동반한다. 수면무호흡증이 매일 밤 되풀이되면 낮 동안 심한 졸림증과 피로감을 느끼게 되고 종종 교통사고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최근 코골이나 수면무호흡이 시니어의 기억력 저하뿐만 아니라 사물을 인식하는 능력에도 장애를 유발한다는 연구결과가 국내외 여러 학회에서 보고되고 있다.
코골이의 생리적인 원인은 노령, 호르몬 이상, 비만 등으로 그중에서 비만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부학적 원인으로는 코 저항을 증가시키는 여러 가지 코질환이 있고, 소아의 경우 아데노이드증식증, 구강 인두 점막의 비후 등이 있다. 또한 연구개가 늘어져 있거나 편도선이 커져 있는 경우처럼 기도의 해부학적 이상이 원인이 될 수 있다. 유발인자로 흡연, 음주, 항히스타민제나 진정제 같은 약물의 복용 등이 있다.
코골이를 진단하기 위해서는 호흡에 관여하는 코, 목, 편도 등에 관한 철저한 검사가 필요하다. 먼저 코 안의 용종(물혹), 비중격 만곡증(코뼈가 휜 것) , 만성 비염, 편도 비대증, 대설증(혀가 큰 것) 등과 같은 구조적 이상 유무를 확인한다. 이어 체중, 비만의 정도를 관찰하고 합병증과 관련 있는 고혈압, 부정맥 등 심혈관계에 대한 검사를 진행한다. 치료방침을 정하기 위해서는 내시경이나 X-ray, CT(컴퓨터단층촬영) 검사 등을 통해 폐쇄 부위를 정확히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울러 수면다원검사를 통해 코골이와 수면무호흡증을 진단한다. 수면다원검사는 병원에서 하룻밤을 자면서 뇌파·근전도·호흡·심전도·안전도 등을 측정한다. 시간당 무호흡 및 저호흡이 몇 회나 되는지, 중증도는 어느 정도 되는지 판단할 수 있다. 낮에 과도하게 졸리고 잠이 들거나 깰 때 환각·수면마비 같은 증상을 보이는 기면증 등 다른 수면 질환이나 부정맥 진단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코골이나 수면무호흡증은 한 가지 원인만으로 생기는 경우는 드물다. 체중감소를 위한 규칙적인 운동, 수면자세, 금주, 금연 등 생활습관 개선이 가장 중요하다. 최근에는 혀끝을 입천장에 대고 혀를 뒤쪽으로 밀어뜨리는 것과 목젖을 울리면서 ‘아’ 소리를 내는 ‘구강인두훈련(oropharyngeal exercise)’을 매일 했을 때 코골이가 36% 감소했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경우에 따라 항우울제나 프로게스테론(progesterone) 같은 약물치료를 할 수도 있다. 또한 양압기 등 입안에 마우스피스처럼 착용하는 구강 내 장치라는 기구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수술적인 방법으로는 코골이나 수면무호흡증이 발생한 부위의 일부를 수술로 제거하거나 근육 또는 점막의 떨림을 줄이는 방법이 있다.
김동현 인천성모병원 교수는 “코골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취침 전 식사는 가급적 삼가고 금주, 금연, 적절한 운동, 체중 관리 등 건강한 수면에 도움이 되는 생활습관 개선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든든한 아내, 듬직한 세 자녀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행복한 일상을 채워가는 가수 최성수(60). 고등학생 늦둥이 아들에게는 친구 같은 아빠이며, 아내에게는 집안일도 기꺼이 도와주는 평범한 남편이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대로 의미가 있고 어떤 일을 겪든지 다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그가 나이가 들수록 매력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도 다 의미가 있나보다.
‘남남’, ‘동행’, ‘해후’, ‘풀잎사랑’, ‘기쁜 우리 사랑은’ 등등의 메가 히트곡들로 1980년대를 휘어잡았던 대표적인 미남 가수 최성수. 얼마 전에 그는 ‘복면가왕’에 출연해 화제가 됐다. 하림, 카더가든, 혁오 등 수십 년의 나이 차이가 나는 까마득한 후배들이지만 음악성으로 인정받는 가수들의 노래를 과감히 선곡해 특유의 미성으로 완벽하게 소화했기 때문이다. 그가 가왕에 오르지 못한 것은 고작 5표 차 때문이었다. 그 결과는 1983년에 데뷔한 이 베테랑 가수의 감각과 에너지가 지금 세대에게도 여전히 통한다는 의미였다. 감성을 채우면서 60세의 나이에도 변치 않는 젊음과 소통의 아이콘으로 청춘을 노래하고 있는 그다.
“요즘 노래들은 굉장히 세련됐어요. 예전에는 우리 가요를 우습게 생각하고 팝만 들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사람들이 팝을 안 듣고 가요를 듣죠. 케이팝이 그만큼 세계인의 공통된 노래가 됐고 우리 것이 세계 것이 될 정도로 잘 만들어지고 있다는 의미죠.”
최신 트렌드에도 자연스러운 최성수의 모습은 어찌 생각하면 당연하다. 그는 얼마 전 디지털 싱글 ‘린도마니’를 발표한 데뷔 37년 차의 여전한 현역이자 건국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겸임교수. 말하자면 최근의 트렌드에 더없이 민감할 수밖에 없는 위치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된 데에는 그의 기질에서 비롯된 바도 있다.
열등의식이 나를 키웠다
“제 첫 번째 직업은 가수죠. 사업가, 교수 등 여러 가지 일도 할 수 있지만 업(業)으로서는 끝까지 뮤지션이에요. 노래 부를 때 가장 행복하고 감사해요. 힘들 때도 노래만 부르면 시간이 지나갔거든요.”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최성수는 자신의 히트곡 대부분을 작사 작곡한 싱어송라이터다. 그런 그에게 가수로서의 깊이를 더해준 터닝 포인트가 1990년대 중반에 있었다. 서른다섯 살에 미국으로 훌쩍 유학을 떠난 것이다. 그가 향한 곳은 음악인이라면 누구나 동경하는 버클리 음대였다.
“서른다섯에 미국에 가서 프로페셔널 뮤직 전공으로 마흔에 학사를 받았죠. 그리고 돌아왔다가 다시 UCLA에 들어가 뮤직비즈니스 마스터를 하려고 했지만 익스텐션을 받는 걸로 정리했어요. 미국은 뮤직비즈니스를 노동법에 기초해 배우도록 되어 있어서 도저히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귀국했고, 중앙대학교에서 예술 경영을 공부해 석사학위를 받았죠.”
최성수는 서른다섯 살 이후 계속 공부를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요즘 그는 미학 분야에서 박사 학위를 따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공부에 대한 그의 열정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궁금했다.
“제 삶의 터닝 포인트는 열등의식이에요. 못살아서 잘살려고 했고, 잘살기 위해 노래를 했고…. 계속 노래를 하다가 보니 어느 순간 상처를 받았고 공부해야겠다는 터닝 포인트가 생겼죠. 노래를 하고 히트를 해도 공부에 대한 미련이 끊임없이 남아 있었거든요. 그리고 요즘은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니까 교수법도 깊이 알아야겠더라고요. 지식에 대한 욕구 그리고 열등의식이 저를 이만큼 만들어줬어요.”
때때로 열등의식은 자신을 바라보는 토대가 된다. 과거보다는 나은 자신을 만드는 동력이 된다. 최성수는 그 표본이었다.
노래 안에 시를 담은 가수
그는 가수로서의 본분을 절대 잊지 않으려 한다. 특히 노래를 잘하려면 많은 책을 읽고 스스로를 키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야 노래에도 깊이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20대의 최성수와 60대의 최성수가 부르는 노래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그때는 히트하는 게 꿈인 가수였죠. 지금은 다르죠. 요즘은 노래를 부르면서 두렵기도 하고 행복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에게 위로가 될 수 있을까? 이 노래를 불렀을 때 좋아해줄까?’ 하면서 저 혼자의 노래라기보다는 노래를 듣는 사람을 많이 생각하게 돼요.”
그의 정규 10집 앨범은 2007년, 그리고 11집은 2017년에야 나왔으니 무려 10년 만에 나온 셈이다. 노래 발표 주기가 점점 길어지는 것은 노래가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 보다 숙고하게 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11번째 정규 앨범 ‘시가풍류방’(詩歌風流房)의 콘셉트는 시의 멋과 풍류다. 타이틀곡 제목은 김현 시인의 시 ‘고맙다 사랑, 그립다 그대’에서 따왔다. 젊은 남녀에게 진실한 사랑과 일상의 작은 기쁨을 소중히 여기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이외 도종환 시인의 작품 ‘구름처럼 만나고 헤어진 많은 사람 중에’, 김용택 시인의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안도현 시인의 ‘그리운 당신이 오신다니’가 가요로 거듭 태어났다. 시를 좋아했던 그는 오래전부터 유명한 시인들의 시를 가사로 쓰며 다양한 곡을 만들어 왔다.
2019년 싱글 ‘린도마니’가 나오는 데도 2년여가 걸렸다.
‘최성수 독창회’를 작년에 이어 올해도 준비하고 있다. 3월 19일 인천 청라 엘림아트센터에서 열린다. 이번 공연도 콘서트보다는 약간 클래식한 분위기로 그냥 목소리 하나랑 피아노, 성악가들이 함께한다.
“3월에 열리는 제 콘서트 이름을 ‘독창’이라고 지은 건 제 오랜 꿈이에요. 교회 성가대를 하면서 클래식에 대한 꿈이 남아 있었던거죠. 사실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를 불러봤으면 하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어요. 그 노래를 들으면 정화되는 느낌이 들어요. 그래서 콘서트가 아니라 독창회라 이름 붙였죠.”
최성수의 미려한 목소리와 바리톤 성악곡에 있어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의 결합. 상상만 해도 흥미가 생기는 그림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소중한 노래인 만큼 조심스럽게 접근하고자 하는 듯했다. 어쩌면 우리가 최성수에게 기대할 수 있는 또 다른 터닝 포인트로서의 영역이 미래에 준비되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자기관리도 철저하다. 담배는 아예 안 하고, 술을 먹으면 다음 날 노래가 잘 안 되는 걸 몇 차례 느껴 아예 술을 끊었단다.
그는 노래를 위해 술과 담배 등을 멀리하는 절제된 생활을 해왔기에 열심히 사는 게 가능했다고 말한다. 그가 생각하는 좋은 아티스트 요건도 슈베르트의 삶처럼 절박하고 절실한 사람이다.
하루 통화의 절반은 아내와
1990년대 중반에 떠난 미국은 최성수에게 또 다른 선물을 안겼다. 한참 힘들게 지내던 시절, 지금의 아내와 만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어쩌면 그때가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죠. 돈이 없어서 햄버거를 반으로 나눠 먹고 딸에게 1달러짜리 멜론도 못 사주고 했지만…. IMF 때 한국에 돌아와서 아무것도 안 될 때 저를 버티게 해준 건 아내와 하나님이었어요.”
애처가로 소문이 난 그는 요즘도 하루 통화의 절반을 아내와 한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많이 하느냐고 물었더니 주된 화제는 아이들이라고 대답한다.
최성수의 아내는 전 남편과 사별한 후 그와 재결합했다. 전 남편과의 사이에 아들과 딸을 둔 상태였다. 그 아들이 지금은 서른다섯 살, 딸은 서른한 살이 됐다. 현재 아내와의 사이에는 고등학생 아들이 하나 있다.
“제가 자식들이 편하게 생각하는 아빠이긴 해요. 엄마를 무서워하거든.(웃음) 아내는 악역을 자처한 거고, 저는 아이들 편에 서기로 한 거죠. 이제 열심히 일해서 막내아들 대학만 보내면 되겠죠.(웃음)”
이 또한 지나가리라
요즘 삶에 대해 “하루하루가 감사하다”고 말하는 최성수는 자신의 삶을 롤러코스터에 비유했다.
“계획대로 되는 게 없으니까요. 제 뜻대로 살아본 적이 없고.(웃음) 그러니 하루하루 소소하게 행복해하고 감사해야죠.”
그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에는 얼마 전 있었던, 가수 인순이 씨와 아내가 법정까지 갔던 갈등이 어느 정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짐작됐다. 그가 힘들 때 가장 힘이 났던 말은 “이 또한 지나가리라, 좋은 끝이든 나쁜 끝이든 끝은 반드시 있다”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바람대로 사건은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된 듯하다.
“억울하죠. 하지만 지나가고 있는 일이에요. 그것도 감내해야 할 제 일이죠. 그런데 제가 사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 텐데….”
사람은 매번 순간순간, 어떤 때는 행복하지만 어떤 때는 힘들다.
“그런 매순간 자기 판단의 기준에 의해서 이겨내는 힘의 원천을 따져보면, 희망과 가족 덕이죠. 무조건 버텨야 해요.(웃음)”
그는 힘들 때마다 종종 지금보다 더 힘들었던 과거를 떠올린다고 한다. 그러면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게 된단다. ‘내가 어떻게 살았는데 이걸 못할까’ 하는 마음이 훅 들면서 뜨거운 물에 샤워할 수 있는 것만도 너무 감사하게 된다고 한다.
편협한 생각 버려야 현재와 어울릴 수 있어
다소 가벼운 얘기로 돌아갈 시간이 됐다. 최성수에게 지금까지 나온 앨범들 중 가장 아끼는 게 있냐고 물어봤다.
“2집이 저를 만든 앨범이었죠. 1집의 ‘남남’이 저를 바꾼 터닝 포인트였다면 2집의 히트는 소포모어 징크스를 사라지게 해줬어요. 수록곡이 다 히트를 쳤고 지금까지 버티게 해준 앨범이죠. 1집이 씨앗이었다면 2집은 주렁주렁 열린 열매였다고 해야 할까요.”
그는 자신이 가수가 안 되었다면 기술을 배워 공장에 다니고 있었을 거라고 말했다. 아버지가 기타를 부숴버릴 정도로 음악하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제게 바란 건 오로지 기술을 익히는 거였어요. 오죽하면 제가 직업훈련소에 가서 자동차 정비를 배웠을까요. 그런데 결국 그만뒀어요. 그 무렵 사람들이 사우디엘 많이 갔는데, 기술을 계속 배웠다면 사우디에서 일하는 기술자가 됐겠죠?”
그가 자동차 정비공이 안 된 덕분에 한국 가요계는 선물을 얻은 셈이다. 그는 자신이 노래만 부르는 가수가 아니라 음악으로, 아티스트로 기억되길 바란다. 그가 공부를 계속하고 책을 보고 시를 쓰고 여행을 가는 건 모두 깊이 있는 노래를 만들기 위해서다. 그런 생각이 그로 하여금 계속 현 시대와 어울려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듯했다. 그래서 그에게 시니어가 젊은 세대와 잘 어울릴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중년 남자들이 자격지심에 가끔 ‘나를 무시하나?’ 하는 생각을 하는데 그런 편협한 사고는 버려야 한다고 봐요. 꼰대가 되는 상황은 전적으로 자격지심 발로와 연관된 경우가 많거든요. 서로 존중하면 된다고 봅니다. 자신이 속해 있는 조직에서, 자기 위치를 스스로 확인하려고 동물의 왕국에서 영역 표시하는 것 같은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도 아버지와 사이가 안 좋았는데, 어떤 때는 제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놀랄 때가 있어요.”
가족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최성수는 태도에서 많은 문제들이 발생한다고 본다. 그가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 또한 같다.
“요즘 아이들은 지식이 너무 많아서 지식을 가르치기엔 제가 부족할 정도죠. 그것보다는 근본적인 걸 가르칩니다. 예를 들어 음악하는 친구들에게는 인사 잘하고 시간 약속 잘 지키면 인생의 반은 먹고 들어간다고 말해요. 첫인상에서 뭘 알겠어요? 인사 잘하고 시간 잘 맞추는 게 기본이죠. 그리고 리더라는 위치에 서려면 팔로워가 많아야 하는데 팔로워에게서 존경의 눈빛이 있어야 해요. 그 눈빛의 가치가 바로 성공의 척도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려면 진심으로 열심히 하는 모습, 공감과 진정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가 새해 들어 가장 중시하는 건 뭘까?
“집안일 잘하자.(웃음) 어제도 일 끝나고 와서 미뤄뒀던 설거지를 했고요. 하루하루 열심히 감사히 사니까 편해요.”
가족이 없으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의 관심은 온통 가족을 향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그가 말하는, 나이를 잘 먹어가는 비결처럼 보였다.
“인생에서 진짜 잘한 일이요? 하나님을 만나고, 마누라를 만나고, 우리 아이들의 아빠가 되고, 마지막으로 노래를 한 거예요.”
그 누구보다 신사다운 이미지의 배우, 어느 장면에 나와도 화면 안에 그만의 안정감을 불어넣는 독보적인 배우라고 하면 홍요섭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경자년(庚子年)인 올해 예순다섯 살, 서글서글한 눈매와 주름이 더 매력적인 남자, 참 묵직한 홍요섭을 만났다.
배우로서의 삶도 어언 40여 년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렇게 오랜 세월 다져진 배우로서의 캐릭터가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홍요섭은 브라운관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배우다. 다작을 하지 않고 겹치기 출연도 사양하며 철저한 자유인으로서의 삶을 지향하며 살기 때문이다.
“제대 후 스물여섯쯤 됐을 때였죠. 그 시대가 소위 ‘말하면 잡혀가는 시대’였는데 소극장 공연에서 그 ‘잡혀갈 소리’들을 시원하게 하는 거예요. 원래는 전공이 신문방송학과였는데 그걸 본 이후 연극영화과로 전과하게 됐죠.”
‘생각도 못한 일’. 홍요섭은 자신이 배우가 된 것을 그렇게 표현했다. 그런 길을 선택한 자신에게 아버지가 한 말은 평생 지침이 되었다.
“너 하고 싶은 거 해라. 다만 네 아내나 친구들 창피하지 않게 해라.”
삶의 철학을 만들어준 아버지
홍요섭을 말하려면 그의 아버지인 홍영의 목사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사실상 그의 삶 전반을 지배했던 것은 아버지의 존재와 삶의 태도, 남겨진 말들이다.
“아버지가 독특한 분이셨어요. 교육자이자 목사님이기도 하셨고…. 김일성과 동갑이셨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았죠.(웃음)”
故 홍영의 목사는 김일성이 북한에 들어서자 토지 개혁이 시행되기 전에 일가친척을 다 데리고 나와 해주를 거쳐 인천에 도착했다. 그리고 교육사업을 하고 목사로 일하면서 평생을 나눔에 힘썼다.
“처음엔 참 답답했죠. 우리나 좀 주지.(웃음) 결혼하면서 얼마나 창피했는데요, 가진 게 없었으니. 그런데 아내의 친할아버지가 아버지를 아시는 분이었어요. 결혼하기 전 그분이 ‘홍 박사 자식이면 볼 필요도 없다’고 말씀하셨죠. 그래서 장인도 저희 결혼을 쉽게 결정하시게 됐어요.”
그가 지금 전무이사로 있는 브리지스톤골프 또한 그의 아버지의 신념과 일치하기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고 밝혔다. 소위 팔리는 것만 만드는 게 아니라 여성, 아이들 등 보다 다양한 사람을 위해 제품을 만들고 사회공헌 철학이 투철한, 나누는 회사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생 뭐 있나?”라고 여긴다는 점에서 그와 그의 아버지의 기질이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유쾌하게 치러진 아버지 장례식
“아버지는 82세에 떠났어요. ‘나 갈 때 됐다’ 하며 ‘화장해서 버려라. 뼈다귀 들고 돌아다니지 말고. 그리고 살아 있을 때 잘해라. 장인·장모님 자주 찾아뵙고 친구들과 잘 어울리고’라고 말씀하셨죠. 사람들 다 모아놓고 마지막 인사를 받은 후 일주일 만에 돌아가셨어요.”
홍영의 목사의 죽음을 맞이하는 거침없는 말투에서 그 시절 이북 사람다운 강한 기운이 느껴졌다. 아버지의 그런 태도는 아들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제가 한창 인기가 있을 때 한마디로 끊어주셨어요. ‘남들이 보기 싫은 거 하지 말고, 아내 될 사람한테 부담 안 가게 해라.’ 그 말을 들으며 ‘아, 이렇게 날 잡는구나’ 싶었죠. 형들은 공수부대도 가고 해병대도 가고 저도 군대를 힘들게 갔다 왔어요. 그러나 아버지는 자식들 신경 안 썼어요. 하나님 다음이 국가였던 분이셨으니까.”
그런 아버지를 둔 집안답게, 장례식도 매우 유쾌하게 치러졌다고 한다.
“문상객들이 ‘이게 장례식이야?’ 하며 놀랐어요. 우리는 아버지가 좋은 데 가셨으리라는 확신이 있었으니까요.”
도전정신으로 스쿠버에 더 열중
“알아서 해라. 단, 재밌게 살다 가라”고 말하는 강골과 기백이 있던 아버지 밑에서 자란 만큼, 홍요섭은 외면의 신사적인 이미지와 내성적인 인상과는 정반대로 단련된 사람이었다. 그가 방송계와 친해질 수 없는 것 또한 자신의 기준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을 부끄럽지 않게 하는 프로그램에는 나갔지만 겹치기 출연은 거절했다. 예전에 예능 프로그램에 한 번 나간 적이 있는데 나가보니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면서 오버해야 해서 다시는 안 나갔다. 밤무대도 그의 성정과는 맞지 않았다. 대신 그는 산을 타고 오지 여행을 다니며 다이버가 됐다.
“아버지 말씀을 생각해보니 갇혀 지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사람이 200년 살면 모를까. 다양한 걸 해봐야지. 팔라우에 조그만 집을 갖고 있었어요. 드라마 제의가 들어와도 다이빙 약속이 있다고 거절할 정도였죠.”
호기심과 도전정신으로 시작했던 그의 다이버 생활은 45세까지 20여 년가량 이어졌다. 그런데 나이가 들자 조금 힘들어졌다. 그때부터 골프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제대로 커리큘럼을 배워보자 하고 미국으로 가서 고덕호 프로와 함께 생활했죠. 시니어 프로 골퍼 자격까지 얻었어요. 그런데 그때 무릎에 문제가 생겼죠.”
골퍼의 삶에 찾아온 좌절
프로 자격까지 획득해 골프 선수로서의 미래도 생각할 수 있었던 시기, 드라마 촬영을 하던 중 무릎이 시큰시큰하더니 확 주저앉는 일이 벌어졌다.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많이 해서 무릎이 상했기 때문이다. 큰 수술을 한 뒤 재활했지만 골프 선수로서의 미래는 어렵게 되었다.
“회사로부터 2년간 지원을 받기로 했는데, 2년 차에 주저앉은 거죠. 그래서 많이 좌절했어요. 화가 나서 골프대를 쳐다보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십자 인대 말썽으로 좌절해 있던 그에게 재활치료 차원에서 의사가 승마를 권했다. 2007년의 일이었다.
“말? 돈 많은 사람이나 타고, 영화에서나 보는 거 아니냐고 되물었죠. 아니라는 거야. 승마는 허리 아프거나 고지혈증이 있는 사람한테 권하기도 한다는 거예요. 알았다 하고 화성 구석으로 가서 시작했어요. 누가 올려주면 올라가고 손잡고 끌어주면 덜렁거리며 가고…. 그런데 승마를 하니 가장 먼저 바뀌는 게 변이었어요. 장이 좋아지고 살이 조금씩 빠지니까 ‘괜찮네, 본격적으로 해야겠다’ 싶었죠.”
한 번 하면 끝을 보고야 마는 집념
그로부터 14년여가 지났다. 그는 여전히 승마를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젠 승마 코치이자 마사회 홍보위원으로도 활동한다. 또 누구보다 열정적인 승마 예찬론자가 되었다. 그가 데리고 있는 애마 이름은 ‘아줌마’. 올해 열여섯 살로 전성기는 지난, 사람으로 치면 중년쯤 되는 말이다.
“독일에서 승마하는 사람에게서 구했어요. 그 사람이 ‘여자처럼 대하라’고 하더군요.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라 막막했죠.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당근은 쓰다듬으며 줘야 먹고, 엎드려 있을 때 일어나라 하면 일어나지도 않아요. 우아한 성격인데, 함께 지내면서 여자가 이렇구나 싶었어요. 말에게서 많이 배웠죠.”
사람들은 말이 제멋대로 움직이면 말에게 문제가 있어 그러는 줄 착각한다. 그러나 그는 말이 잘못 행동하는 건 다 기수 탓이라고 말한다.
“승마는 착석부터 잘해야 해요. 말 위에 타면 겁이 나니 고삐를 잡아당기는데, 앉아 있는 걸 잘해야 말에게 부담을 안 주거든요. 달리기는 한두 달 하면 누구든 할 수 있어요.”
그는 말이 통하지 않는 동물이지만 승마의 진정한 매력은 교감에 있다고 한다.
“말은 타는 것이 아니고 말이 나를 태워주거든요. 말의 컨디션을 살피고 감정을 주고받으며 말과의 즐거움과 기쁨을 배우고 나니 사람과의 관계, 삶에 대한 새로운 감정을 깨닫게 되더군요. 승마가 제 인생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는 욕심을 덜어내야겠다는 생각에서 작은 집으로 이사도 했다고.
“승마는 제 인생의 마지막 스포츠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진짜 운동할 사람만 하게 되었거든요. 5~6년 전부터 말을 탄다는 얘기가 없어졌어요. 대신 운동했느냐고 물어봐요.”
그가 인상적으로 보는 현상은 젊은 부부들이 승마를 즐기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돈은 꽤 들어도 주말 이틀 동안 승마로 운동을 하면 다른 스포츠를 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이들 중엔 아예 마주가 되려고 말 값을 알아보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그는 인터뷰 도중 자신의 말 ‘아줌마’의 모습을 핸드폰으로 보여줬다. 걸음걸이에서 다른 말들과는 구별되는 비범함과 안정감이 느껴졌다. 문외한이 봐도 멋있는 그의 말을 보니 그가 말에 빠져든 이유가 단숨에 체감됐다.
정치 입문 권유도 있었으나…
무릎 수술은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그리고 그 비슷한 시기에, 그의 삶을 바꾼 비사(祕事)가 하나 더 있었다. 정치와 관련된 일이다. 어쩌면 그와 같은 위치의 사람에게 정치계의 유혹이 없었다는 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과거에 국회의원 영입 제안이 왔었죠. 그런데 보니까 정말 황당한 사람들이 국회의원 후보로 나오더라고요. 이건 아닌 거 같다 싶어서 사양했죠. 그런데 제가 무릎을 다쳤을 때, 이명박 전 대통령이 대선 후보로 선출돼 선거 유세가 한창이었죠. 그때 방송 유세에서 마지막 지지 연사가 저였어요.”
그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속사정을 자세히는 모르지만 빈 사람은 아니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런데 그에게 방송에서 지지 연설을 해달라는 연락이 온 것이다.
“‘나는 정당인이 아니고 정치하는 사람도 아닙니다’라는 전제를 하고, 연설 원고를 고치고 또 고쳤죠. 그리고 그걸로 녹화를 하기 위해 방송국으로 갔어요.”
그런데 막상 방송국에 도착하니 문제가 생겼다. 논조가 바뀐 원고가 놓여 있었던 것이다. 읽어보니 완전히 정치인들이나 하는 말들이었다. 녹화 당일이라는 급박한 타이밍에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진 걸까?
“BBK사건이 터졌기 때문이죠. 상대를 물어뜯어야 하는 상황이 된 거예요. 원래 원고대로라면 내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고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걸 조곤조곤하게 말하는 거였죠. 그런데 당장 정치인이 될 판이었어요. 함께 온 와이프와 친구에게 보여주니 ‘이거 하면 큰일나겠다’고 걱정을 하더군요.”
그를 섭외한 쪽에서 설득했지만, 아무리 봐도 ‘이건 아니었다’.
“정치를 할 거면 벌써 했지.(웃음) ‘못합니다’ 하고 돌아왔어요. 나중에 보니 4~5년 속 썩을 뻔했죠. 그래도 BBK사건 전의 원고는 논조가 참 좋았는데, 아쉬워요.”
채운 것들 덜어내며 달관에 이르다
홍요섭에게는 달관한 사람의 넉넉함이 있다. 세계 곳곳의 오지를 여행하고 바다를 사랑한다.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면서 얻게 된 태도다.
“어지간한 건 탁탁 털어버립니다. 당하기도 많이 당했어요. 변호사 친구들이 난리쳤지만 고발하기 싫어서 넘어간 일도 있죠. 그런데 돌아보니 그게 내 게 아니더라고요.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죠.”
그 역시 요즘 나이 들면 어떻게 살까를 생각하고 있었다. 요즘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석모도다.
“인천 석모도에는 강도 있고 낚시도 잘되고 물 좋은 온천 단지도 있어요. 거기에 조그맣게 집 짓고 사는 것도 좋죠. 장어를 키워보고도 싶어요. 난 물을 좋아하니까. 장어를 키우는 게 손이 많이 간답니다. 그럼 계속 일할 수 있으니까, 재밌잖아요? 흙 묻히고 사는 일.”
그는 자신을 아무도 기억 못하면 좋겠다고 담담히 말했다. 자신이 작정한다고 사람들 기억에 남는 건 아니라고 했다. 그가 사랑하는 물과 바람처럼, 삶을 사랑했지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아버지처럼 그 또한 그렇게 살아왔다. 그의 시원시원한 대답에는 미련이 없었다. 자신이 옳다고 믿은 길만을 걸었기에 잘못되지 않았고, 돈과 명예로도 살 수 없는 그 진정한 자유를 즐기는 그가 다시 한번 부러웠다.
중앙아시아의 나라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카자흐스탄 역시 먼 듯하면서도 가깝고, 낯선 것 같으면서도 친근함이 느껴지는 곳이다. 인천공항에서 카자흐스탄 국영 항공 에어아스타나를 타고 6시간 반이면 닿을 수 있는 알마티는 세계에서 아홉 번째로 큰 나라인 카자흐스탄의 경제문화관광 중심지다. 오랜 기간 소련의 지배 아래 있었던 탓에 카자흐스탄어 외에 러시아어도 사용한다. 130여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슬람교와 러시아정교를 믿지만 종교적 색채는 비교적 옅다. 음식과 풍경, 종교와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주변국의 장점을 관대하게 품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북적이지 않으면서도 원하는 모든 것이 있는 곳. 한국인에겐 의병 홍범도 장군이 생애를 마친 곳이자 10만 고려인이 살고 있는, 역사적 의미가 있는 땅이다.
대자연과 유럽풍 시티라이프 체험
이륙한 지 얼마나 된 걸까. 창밖을 보니 하얗게 이어진 선이 보인다. 구름인 줄 알았더니 길이가 무려 2000km에 달한다는 톈산 산맥이다. 중국,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4개국에 걸쳐 있을 정도의 규모를 자랑한다.
비행기가 사뿐히 내려앉자, 병풍처럼 둘러싸인 만년설산 아래 녹색의 나무들과 아기자기한 건물들이 포근히 안겨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알마티에서의 시간은 차분하면서도 평화롭게 흘러갈 것 같은 느낌이다.
알마티(Almaty)라는 지명은 사과를 뜻하는 ‘알마’와 할아버지를 의미하는 ‘아타’가 합쳐진 알마아타(Alma-Ata)에서 유래됐다. 그만큼 사과가 유명하다. 알마티의 가로수길이라 할 수 있는 아르바트 거리는 세련된 노천 카페들과 ‘스타벅스’, ‘망고’ 같은 글로벌 체인점들로 가득하다. 벤치와 분수대 주변에는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는 현지인들이 모습이 보인다. 이밖에 대통령공원, 판필로프의 28인 기념비, 젠코프 러시아 정교회, 젤료니 바자르 재래시장, 알마티의 남산타워 콕토베 케이블카도 있다. 이들 구시가지에 있는 건물들은 역사에 비해 너무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다. 그 이유는 1887년과 1911년에 발생한 대지진으로 대부분의 건물이 파손되어 재건축됐기 때문이라고 한다.
‘차린 협곡’과 위구르족 마을
이튿날, 3시간여 차를 달려 차린 협곡으로 갔다. 도심을 벗어나자 차도 건물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길 양쪽으로는 끝없는 옥수수 밭이 펼쳐져 있었다. 양떼와 말들만 가끔 보이는 황량한 거리였다. 살짝 지루해질 무렵 점심을 먹을 겸 위구르족 마을에서 내렸다. 언젠가 가봤던 중국의 신장 위구르족 마을 모습과 닮아 있다. 세계는 이토록 신기하다. 어느 국경이든 그곳에는 교집합의 삶이 있고 그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 여행자는 마치 깨달음의 퍼즐을 푸는 듯한 신기함을 느낀다. 길가에 늘어선 가게에서는 하미과(노란색 껍질의 멜론)를 비롯한 과일과 빵을 팔고 있다. 골목 안은 양꼬치 샤슬릭 굽는 연기로 가득했다. 샤슬릭은 우즈베키스탄을 비롯해 중국 신장 등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음식으로, ‘꼬챙이’를 뜻하는 투르크어 ‘쉬시’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두툼하게 썬 양고기에 소금과 후추, 각종 향신료로 간을 한 후, 꼬치에 꽂아 숯불로 훈연한다. 특유의 풍미와 함께 씹을 때 느껴지는 풍부한 육즙이 일품이다. 다른 음식들도 대부분 맛있다. 우리나라 만두국과 비슷한 ‘펠메니’와 카자흐스탄의 대표 면 요리인 ‘라그만’으로 행복한 식사를 하고 난 뒤 보니 그제야 식당 안의 독특한 분위기가 눈에 들어온다. 혼자 식사를 하는 촌로와 막걸리처럼 보이는 차를 마시는 호탕한 두 여인의 모습이 인상 깊어 양해를 구하고 카메라에 담았다. 세상 어떤 풍경보다 아름다운 건 사람이라는 것을 또 한 번 느낀다. 현지인의 얼굴엔 그 나라의 역사와 풍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미국의 그랜드캐니언을 방불케 하는 차린 협곡. 1500만 년 전, 지각변동으로 인해 생겨난 계곡이다. 지질학적·생태학적 보호를 위해 2004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입구에 도착하니 몸을 날려버릴 듯한 세찬 바람이 격한 환영을 한다. 협곡 아래로 가는 계단을 내려가 약 2km 트레킹을 했다. 황톳빛 기암괴석들과 ‘낙타가시’로 불리는 수풀 사이를 지났다. 닳고 닳은 관광지였다면 바위마다 이름을 붙이고도 남았을 터. 웨딩사진을 찍는 커플들과 핸드폰으로 추억을 담느라 바쁜 젊은이들의 모습이 풍경과 어우러지며 싱그럽게 다가왔다. 작심한 듯 트레킹 복장을 갖춘 유러피언들도 눈에 띄었다.
절벽 아랫길은 물론 윗길로도 트레킹이 가능하다니 아웃도어를 즐기는 사람에게 매력적인 장소임에 틀림없다. 트레킹이 끝나는 지점엔 방갈로와 유르트(중앙아시아의 유목민들이 쓰는 이동 가능한 주거 형태)가 갖춰진 에코파크리조트(Eco Park Resort)가 있어 숙식이 가능하다.
유르트에 머물면서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쏟아져 내리는 별도 보고 동틀 무렵의 협곡도 산책하며 하루쯤 문명과 동떨어져 쉬어가고픈 곳이다.
침블락 스키리조트와 빅알마티 호수
알마티 시내에서 차량으로 30분 정도만 가면 닿을 수 있는 침블락 스키리조트에서는 사시사철 만년설을 볼 수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메데우 아이스링크를 지나 3단계에 걸쳐 케이블카를 나눠 타고 해발 3200m에 있는 전망대에 올랐다. 구간 사이의 휴게소에는 간단한 먹을거리와 커피가 마련돼 있다. 전통 의상을 입고 독수리와 함께 사진을 찍는 등 다양한 즐거움도 체험할 수 있다. 이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곧 맞이할 겨울 시즌을 준비하느라 바빠 보였다. 정상에 올라 바에서 마신 맥주 한 잔의 맛이 잊히지 않는다. 문득 스키를 좋아해서 세계의 스키장을 찾아다니는 친구가 떠올랐다. 사진을 찍어 보내주니 당장 올겨울 스키 여행지로 찜했다는 답신이 온다. 11월에부터 4월까지 스키를 탈 수 있어 겨울이 짧은 스키 마니아들에게 좋은 선택지가 될 것 같다. 2011년 동계 아시안게임과 2017년 동계 유니버시아드 개최지로 선정될 만큼 자연설이 좋고, 별장부터 유르트까지 다양한 숙박 시설도 갖춰져 있다. 스키나 보드 장비 대여도 가능하다. 스키를 즐긴 후 근처 온천에서 몸을 녹인다면 이보다 좋은 휴식이 없을 것 같다.
침블락 스키리조트에서 내려와 한 시간 정도 이동해 도착한 곳은 빅알마티 호수. 가는 길은 대관령 고갯길처럼 꼬불꼬불했지만 눈부신 에메랄드 호수를 설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모습은 달력 속 풍경처럼 아름다웠다. 아무데나 돗자리를 펴고 소풍을 즐기는 가족과 연인들의 모습도 정겹다.
탐험이 끝나는 곳에서 또 다른 탐험이 시작된다고 했던가. 알마티 외 다른 도시들도 탐험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캠핑카에서 즐기고 싶다면?
대한민국 캠핑 인구는 500만 명이 넘는다. 국내 캠핑 산업 규모는 2017년 2조40억 원을 기록하며 전년 대비 33.7%(5055억 원) 성장했다. 캠핑카와 캠핑 트레일러 등록 대수도 각각 573대, 2535대로 총 3108대를 기록해 전년 대비 50.4% 증가했다.
캠핑카 종류는 카라반, 캠퍼 밴, 폴딩 트레일러, 트럭 캠퍼 등으로 나뉜다. 카라반은 흔히 말하는 캠핑카를 의미한다. 캠퍼 밴은 소형 트럭이나 미니 밴, 화물 트럭을 개조해 캠핑카로 만든 차량이다. 폴딩 트레일러는 차량 뒷부분에 연결해 견인하는 차량을 가리킨다. 트럭 캠퍼는 평소 트럭으로 활용하다가 캠퍼를 합쳐 캠핑카로 만든 차량을 말한다.
캠핑카 가격은 천차만별이다. 옵션에 따라 4000만 원대부터 1억 원이 넘어가는 것도 있다. 11인승 이상 승합차를 캠핑카로 개조하는 방법도 있는데 이렇게 개조하는 데 드는 비용이 1000만~2000만 원 정도라고 한다. 비용 면에서 부담이 된다면 시중에서 이보다 저렴한 비용의 중고 캠핑카를 구할 수도 있고, 일정 기간 빌려서 즐길 수도 있다.
캠핑카 대여를 원한다면 대여 업체에서 사전 예약을 해야 한다. 보통 15일 정도 여유를 두고 예약을 해야 원하는 날짜에 대여가 가능하다. 차량은 여행 날짜에 맞춰 대여 업체의 차고지를 직접 방문하거나 홈 렌털 서비스를 이용해 자택에서 픽업한다. 렌털료는 1박 2일 기준으로 국산차는 35만~50만 원 선, 수입차는 45만~80만 원 선이다.
캠핑카 대여 조건은 만 26세 이상, 운전 경력 최소 1년 이상. 대인·대물·자손 종합보험은 기본으로 가입돼 있으나 자차 보험은 빠져 있으니 이 점을 유의한다. 또한 승용차에 비해 차체가 커서 운전이 어려울 수 있으므로 안전운행수칙을 교육하는 업체에서 1시간 이상 교육을 받아야 한다.
캠핑카 운전, 보험은 필수!
캠핑카 운전, 보험은 어떻게 가입해야 할까? 대여용 캠핑카의 경우 대인·대물·자손 등 종합보험이 가입돼 있으나 자차의 경우 계약할 때 별도로 체결해야 하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① 캠핑카≠캠핑 트레일러 캠핑카는 운전석 일체형인 ‘캠핑카’ 그리고 엔진이나 동력원 없이 앞차에 끌려가는 형태인 분리형 ‘캠핑 트레일러’로 구분된다. 일체형 캠핑카는 일반 승용차가 아니므로 ‘업무용 자동차 보험’에 가입하면 된다. 하지만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캠핑 트레일러는 자동차가 아닌 자동차의 일부로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종합보험에 가입할 필요 없이 ‘자기차량손해(자차)’ 담보만 가입하면 된다(일부 캠핑카는 경우에 따라 인수 여부 및 보장 사항에 차이가 생길 수 있으니 승차 전에 확인하도록 한다).
② 캠핑 트레일러 사고 시 보상은? 캠핑 트레일러를 끌고 가던 중 사고가 발생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끌고 가던 앞차의 자동차 보험으로 처리하면 된다. 그리고 캠핑 트레일러가 파손된 경우에만 트레일러에 가입한 ‘자기차량손해(자차)’ 담보로 보상받으면 된다. 단, 사전에 캠핑 트레일러를 끌고 갈 앞차의 보험사에 트레일러 견인 여부를 반드시 미리 알려야 한다. 이 경우 사고 가능성이 더 높아지므로 ‘레저장비 견인 중 위험담보 요율’이 적용돼 보험료는 상승된다. 또한 앞차와 트레일러를 잇는 연결고리가 있다면 연결고리는 앞차 자동차 보험 추가 부속품으로 해놓아야 한다.
◇캠핑카 대여 업체◇
코카투캠핑카 인천광역시 서구 도곡로 239
락앤롤캠핑카 서울시 중랑구 면목로30길 25-3
대명캠핑카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용구대로 2325번길 45-73
인생을 2모작도 아닌 5모작까지 치르고 지금은 6모작을 준비 중이라는 사람, ‘N잡러’ 장필규 행복 제1연구소 소장은 1955년생으로 정확히 베이비붐 시대의 한복판에서 태어난 100% 베이비부머다. 그는 요즘 프리워커로서 고용노동부 내공강사, 노사발전재단 전문강사, 경기도 6차산업 현장 코칭 컨설턴트, 인천농촌융복합 현장코칭 전문위원 등 다섯 가지 일을 동시에 하고 있다. 그야말로 정년이라는 단어가 의미 없는 삶을 영위하는 셈. 장차 6모작을 넘어 9모작까지 완성하는 게 꿈이라는 그가 말하는 인생 후반기의 삶과 잡(job)에 대한 철학을 들어봤다.
“제 인생의 4모작은 50플러스재단 컨설턴트였고, 5모작은 N잡러로 활동하는 지금이죠. 이제 6모작을 준비하고 있어요. 시니어에게 일은 새로움과 행복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여행하듯이 즐거움을 찾는 거지요.”
‘N잡러’ 장필규 씨는 요즘 그 어느 때보다도 바쁘게 일하고 있다. 현재 그는 서울시50플러스재단, 노사발전재단, 지방자치단체의 컨설턴트와 전문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최근에는 9모작을 최종 목표를 두고 6모작을 준비하기 위해 직업상담사, 사회복지사 공부를 하고 있다.
“환갑을 넘어 케어를 받아야 할 사람이 사회복지사 공부를 한다고 집사람이 잔소리를 하네요.(웃음) 그런데 저와 같은 나이대에도 취약 계층이 있을 거예요. 제 연배의 장애인이나 소외 계층을 위한 삶을 살고 싶은 거죠. 예전에 거창에서 일할 때 요양병원에서 봉사활동을 한 적이 있어요. 나도 머지않아 그분들과 같은 입장이 될 텐데 이야기 들어주고 도와주니 즐겁더라고요.”
퇴직 없는 삶 위한 평생현역 꿈꿨으나…
그의 이름에는 베풀 장(張), 도울 필(弼)이라는 글자가 들어가 있다. 어쩌면 그의 아버지가 이름을 지어줄 때 베풀고 도와주라는 의미로 새긴 게 아닐까. 현재 그의 모습은 이미 숙명처럼 정해져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건국대학교 축산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1981년 두산그룹 계열사인 배합사료 회사 두산곡산에 취직하면서 본격적인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한강의 기적’이 펼쳐지던 시기였고 그의 삶 또한 대기업 직장인으로서 안정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 사태가 터지면서 그도 사회적 환경에 따른 선택을 강요받게 된다. 그에게 던져진 자리는 두산종합식품 식품사업 부문의 김치공장 관리부장. 고민을 했지만 결국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김치공장으로 간 그는 관리부장, 공장장을 거치며 10여 년간 김치 제조의 일선에서 일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회사 주인이 바뀌는 일이 일어났다. 두산이 식품사업 부문 전체가 대상에 매각될 때 그는 6년 후배가 상사로 승진하는 것을 보게 된다. 더는 버틸 수 없었던 그는 대상 소속으로 2년 정도를 더 지내다 2008년 4월에 퇴직한다.
끊임없는 도전, N잡러로 거듭나다
54세의 나이, 인생 1막이었던 대기업 직장인으로서의 27년은 끝이 났다. 삶에 대한 허무감과 삶을 유지해야 한다는 고통이 동시에 밀려왔다.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치주염 수술을 여섯 번이나 받아야 했던 그는 수술 후 재취업을 도와주는 노사발전재단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에 찾아가는 것으로 인생 2막을 시작했다. 이력서 작성법, 면접 스킬 등을 교육받은 그는 정부에서 추진하는 농업 최고경영자 경영대학원 과정에 합격한 뒤 몇 번의 테스트까지 통과하며 마침내 울진농수산물유통농업회사법인 대표로 취임했다.
그러나 그토록 고생하며 올라간 자리였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과는 맞지 않는 것 같았다.결국 대표 자리를 그만둔 그는 마침 일본 회사와 울진군의 합작 회사인 울진로하스코리아에서 대표 제안을 해와 CEO로서 3년을 지냈다.
“인생 2막의 과정은 지방에서 CEO로 일을 하며 자신에게 더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삶의 터닝포인트가 되면서 재무 문제도 해결되고 가족관계는 물론 건강도 좋아졌죠.”
울진로하스코리아 대표 자리에서 물러난 후에는 2012년 말부터 일자리희망센터를 찾고 취업박람회에 꾸준히 참석하면서 다시 한 번 기회를 노렸다. 그리고 마침내 농촌진흥청에서 마케팅 전문위원으로 인생 3막을 펼쳤다. 이곳에서 5년간 근무하며 농가 500곳을 대상으로 한 컨설팅을 진행했다. 이어 서울시 50플러스재단, 노사발전재단, 고용노동부 등지에서 강사 및 컨설턴트로 활동하며 4막의 장을 펼쳤고 진정한 N잡러가 되었다.
수입 적더라도 즐거움 주는 천직 찾아야
“이제 베이비부머들은 잡(job)이 아니라 워크(work)를 해야 해요. 워크는 천직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천직을 찾아야 오래 즐겁게 할 수 있으니까요.”
그에게 시니어 구직자들의 마음가짐에 대해 묻자 제2인생에서는 일이 무조건 즐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심지어 일이 놀이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지난 삶의 궤적을 돌아보면 이해가 가는 말이다. 수입은 적더라도 길게 오래할 수 있는 천직을 찾아야 한다고 충고하는 그가 N잡러로 다양한 일을 동시에 하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우리 나이에 경제 문제를 해결하려면 하나의 직업 가지고는 안 됩니다. 적어도 세 개 내지 다섯 개는 가지고 있어야 과거 연봉의 절반 정도가 되죠. 특히 시니어는 공부를 위한 비용이나 손주들 용돈, 네트워크 유지비 등 지출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그가 또 강조하는 것은 사고의 유연성, 관계의 유연성이다.
“적을 만들면 안 됩니다. 제 주위를 보면 어떤 사람과는 케미가 맞지 않다고 안 만나는 사람들이 있어요. 물론 그건 취향이기에 좋다 나쁘다 판단을 내릴 순 없죠. 다만 기왕이면 유연성을 갖고 적을 만들지 말아야 평화롭고 품위 있는 노후를 보낼 수 있습니다.”
열린 마음, 유연함으로 세상 대하기
그런데 삶의 부침들을 겪으면서도 마음의 유연성을 갖추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에게는 특별한 노하우가 있는 걸까?
“어느 접점에 있든 열린 마음을 실천하는 겁니다. 역지사지라고 하죠.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불편한 일이 많아져요.”
인터뷰를 하면서 보니 그는 도전적이라기보다는 안정을 추구하는 사람에 가까웠다. 그런 성품에도 불구하고 도전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쟁취해온 것이다. 어쩌면 그러한 결과도 그의 열린 마음 덕분에 가능했던 게 아닐까 싶다.
“박사학위를 가진 시니어도 일에 대한 욕망이 뜨거워요. 그런데 한국인은 디테일에 약해요. 그래서 매뉴얼이 있어도 막상 긴박한 상황이 되면 제대로 써먹지 못합니다. 습관화가 안 된 게 문제입니다. 그걸 극복하려면 계속 반복하고 고치고 훈련하는 수밖에 없어요.”
그는 구직을 하려면 ‘어떻게’에 관한 디테일한 액션 플랜을 짜서 지속적인 연습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수많은 테스트에 통과하며 자신의 자리를 잡은 그이기에 신뢰가 갔다.
나를 제대로 알아야 천직을 찾을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에는 그도 구직자 입장이었다. 그런 그가 이제는 구직자들을 상담하는 입장이 되었다는 게 삶의 아이러니처럼 느껴진다. 양쪽을 다 경험해본 그에게 두 입장에 대해 물어봤다.
“구직을 지원하는 정부 기관들은 고객 니즈에 맞게 세분화, 효율화되고 향상되어야 해요. 그런데 그런 시도가 진행되다가도 중간중간 끊기더라고요. 그게 아쉽죠. 그리고 구직자들의 입장을 보면, 그래도 구직을 위해 오는 사람들은 열정이 있는 거예요. 흔히 퇴직하면 ‘또 직장생활을 해야 해?’, ‘날 찾아주는 데는 없어’ 하며 의욕이 없는 경우가 많죠. 목표의식을 가져야 하는데 퇴직하는 순간 놔버리는 거예요. 물론 그럴 수 있어요. 그러나 그건 자신에게나 가족에게나 무책임한 거죠. 그런 심리를 어떻게 끌어주느냐가 관건이라고 봐요.”
그는 은퇴자 혹은 퇴직자들이 자기진단을 해보고 자신에게 어떤 일이 적합한지 생각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충고했다. 그렇게 자신을 파악하고 일을 찾다 보면 현실의 갭이 조금씩 줄어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이 오래 걸릴 수도 있지만 그걸 인내하는 힘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인 중에 20년 동안 독일 특파원 생활을 하면서 인문학을 공부한 사람이 있는데, 그가 말하길 ‘결론은 나를 찾게 되더라’ 하더군요. 나를 찾는 노력을 하고 준비하면 일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인내심을 키우기 위해서 주위의 긍정적인 사람을 만나는 것도 한 방법이겠죠.”
욕심의 분모 줄이면 행복이 찾아온다
자신이 이 사회에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걸 확인할 때 더욱 의욕이 생기는 사람이 있다. 그는 100세 김형석 교수가 자신의 건강 비결로 ‘평생 손에서 일을 놓지 않은 것’이라고 한 말을 다시 전한다.
“사람은 일이 있어야 삶을 유지할 수 있어요. ‘60~65세가 자신의 황금기였다’는 김형석 교수님 말에 공감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N잡러 장필규 소장은 자신의 행복을 충분히 누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행복론을 소욕지족(少欲知足)에 비유했다. 행복해지려면 욕심의 분모를 줄여나가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욕심의 분모를 자꾸 키우면 내려놓기가 안 되는 사람이에요. 100분의 60과 60분의 60을 비교해보세요. 후자는 60만으로도 부족함이 없죠. 이렇듯 분모를 줄이면 60분의 60이 1이 되듯 가벼워집니다.
‘1’과 ‘일’처럼 디테일하고 작은 것에 만족할 줄 알 때 삶이 풍요로워질 수 있다는 게 제 지론입니다. 결국 ‘1’과 ‘일’처럼 은퇴 후 행복하게 살게 해줄 수 있는 놀이와도 같은 것이죠.”
노후에 좋아하는 일을 찾게 되면 많고 적음을 떠나 돈과 건강, 관계, 여가 등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고 강조하는 그는 “행복이라는 단어를 의식하지 않고 여행하듯 사는 게 진짜 행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는 그렇게 담대하고, 여유롭고 자유로웠다.
인천 무의도에 딸린 섬, 소무의도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2012년에 소무의도 둘레길인 무의바다누리길이 완공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소무의도는 해안선 길이가 2.5km에 불과한 작은 섬이지만 섬 여행의 매력을 다 갖췄으니 가성비 좋은 섬이라고나 할까. 섬 둘레를 걸으며 고깃배가 들락거리는 아담한 포구와 정겨운 섬마을 풍경, 74m 높이의 아담한 산과 푸른 바다를 두루 즐길 수 있다.
추천 코스
용유역에서 무의도행 1번 버스 탑승▶광명항 하차▶소무의인도교길▶마주보는길▶떼무리길▶부처깨미길▶몽여해변길▶명사의해변길▶해녀섬길▶키작은소나무길▶광명항에서 1번 버스 탑승/하나개해수욕장 하차▶하나개해수욕장 촬영세트장▶해상관광 탐방로▶1번 버스 타고 용유역 하차
미니버스 타고 무의도로 가는 길
올해 4월 무의도에 연륙교인 무의대교가 놓였다. 배 출항 여부와 상관없이 언제든 맘 편히 섬 여행을 떠날 수 있게 됐다. 무의도로 가는 길은 대중교통 환승 시스템이 잘 돼 있어 뚜벅이 여행자도 쉽게 찾아갈 수 있다. 인천공항 자기부상 철도를 타고 용유역에 내린 뒤, 길 건너에서 무의도행 1번 미니버스로 갈아탄다. 거잠포와 잠진도를 지날 때 차창 밖으로 반짝이는 갯벌 위에서 낮잠 자는 작은 고깃배와 조개를 캐는 주민들이 보인다. 무의대교가 생기기 전, 잠진도 선착장과 무의도를 무시로 오갔던 배 두 척은 먼바다에 한가로이 떠 있다. 승선 시간이 고작 5분이었지만, 뱃머리에 서서 섬 여행의 설렘을 만끽했던 일이 영영 추억으로 남게 됐다.
미니버스가 바다 위를 가로지르는 무의대교에 올라타자 차창으로 바닷바람이 훅 밀고 들어온다. 무의도 큰무리선착장에 도착한 미니버스는 고개 넘어 섬 끝 광명항으로 달린다. 미니버스가 비탈길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요리조리 잘도 달린다. 고갯마루에 오르자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옆자리 앉은 중년여성이 “아, 너무 좋네. 자주 와야겠다”라며 혼잣말로 감탄사를 연발한다. 어디가 그렇게 좋은지 물으니 반문한다. “안 좋으세요? 무의도에 사세요? 전 서울에서 여기 처음 왔는데 너무 좋네요. 다음에 남편이랑 같이 와야겠어요.” 무의도의 매력을 오래전에 깨달은 터라 그저 미소로 답한다.
무의도의 진주, 소무의도 무의바다누리길
미니버스의 회차 지점인 광명항(소무의도 입구)에 하차한 뒤 무의인도교를 향해 걷는다. 이 다리가 광명항과 소무의도를 잇는다. 다리를 건너기 전에 무의바다누리길 안내판을 훑어본다. 무의바다누리길은 소무의도 해안을 한 바퀴 도는 둘레길이다. ‘마주보는길’, ‘몽여해변길’, ‘부처깨미길’ 등 구간이 8개나 되지만 총 거리는 2.4km밖에 되지 않는다. 천천히 걸어도 한 시간이면 충분한 거리다. 무의바다누리길의 1구간인 ‘소무의인도교길’를 건너며 소무의도를 굽어본다.
갯벌이 드러난 떼무리포구에서 고깃배 대여섯 척이 물 들어오길 기다린다. 포구 앞 서쪽 마을에는 원색 지붕을 얹은 단층집이 옹기종기 모여 섬마을 정취를 뽐낸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처음 만난 구멍가게에 들러 시원한 미숫가루 한 잔을 사 마시고 더위를 식힌다. 인상 좋은 주인에게 듣는 마을의 이모저모는 덤이다. 떼무리포구와 서쪽 마을 앞을 지나는 방파제길이 2구간 ‘마주보는길’이다. 방파제 끝까지 걸으면 관광안내소가 나오는데 안내소 옆 계단으로 오른다. 계단 끝에서부터 그윽한 숲길이 이어진다. 당산이 있는 이 숲길이 3구간 ‘떼무리길’이다.
흙길과 데크길을 번갈아 걷다보면 4구간 ‘부처깨미(꾸미)길’ 안내판이 나온다. 전망데크와 망원경이 설치돼 있다. 옛날에 소무의도 주민들이 만선과 안전을 기원하기 위해 소를 제물로 바치고 풍어제를 지냈던 곳이라고 한다. 부처깨미에서 다시 1분 정도 오르면 전망대가 또 나오는데 이곳은 포토존이라 할만하다. 초승달 같은 몽여해변과 동쪽 마을이 발아래 시원하게 펼쳐진다. 멀리 대부도, 영흥도, 선재도 등이 어렴풋이 보인다. 서해는 누렇다는 편견을 반박하듯 오늘따라 바다 빛이 푸르디푸르다. 전망대와 연결된 계단을 내려와 5구간 ‘몽여해변길’을 거닌다. 부모와 놀러 온 아이들은 갯바위 사이에 바닷물이 들락거리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 어쩔 줄 모른다.
산과 바다를 여유롭게 즐기는 산책길
바다 풍광 좋은 몽여해변에 카페들이 하나둘 생긴다. 한 카페에 들어가니 카페 주인이 바다 쪽 폴딩도어를 활짝 열어준다. 손님들이 “와 오늘 바다 예쁘다!” 환호한다. 빨간 파라솔 아래 앉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지나가는 고깃배들을 구경하는 여유를 부려본다. 카페 가까이에 있는 바다이야기박물관을 지나면 곧 언두꾸미에 닿는다. 이곳은 갯벌에 참나무를 세우고 언둘 그물을 쳐서 물고기를 잡는 주목망 어업을 하는 곳이다. 언둘꾸미가 변해 언두꾸미가 되었다고 한다. 방파제에 둘둘 말아놓은 그늘이 잔뜩 쌓여 있다.
언두꾸미를 지나 울퉁불퉁한 갯바위를 타고 넘어 6구간 ‘명사의해변길’에 도착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 가족이 휴양 왔던 곳이라 하여 이름 붙은 몽돌 해변이다. 바닷가에 하얀 굴 껍데기가 가득 쌓여있다. 우뚝 선 절벽이 해변을 감싸고 있어 아늑한 느낌이 든다. 명사의해변을 지나면 안산 꼭대기로 오르는 숲길이 시작된다. 가파른 나무 계단도 기다린다. 숨을 조절하며 중간쯤 오르니 바다 한가운데에 떠 있는 해녀도가 훤히 보인다. 옛날에 해녀가 물질하다가 쉬었던 곳이라고 한다. 해녀도 뒤로 섬들과 풍력발전기 대여섯 기가 아슴아슴 보인다. 바다와 섬 사이에 해무가 껴 섬들이 공중에 뜬 것처럼 보인다. 계단을 내려가던 사람들이 이 환상적인 풍경을 배경 삼아 기념사진을 찍느라 분주하다. 이 길이 7구간 ‘해녀섬길’이며 무의바다누리길에서 풍광이 가장 좋다.
계단을 조금 더 오르면 안산 정상에서 하도정이라는 정자를 만난다. 하도정 주변에 해풍 맞고 자란 소나무가 많다고 하여 8구간을 ‘키작은 소나무길’이란 이름 붙였다. 하도정 이후로는 내리막길이다. 계단을 내려오면 소무의인도교가 코앞에 있다. 다리를 건너며 아래를 굽어보니 어느덧 바닷물이 차올라 갯벌에 박혀 있던 배들이 둥둥 떠올랐다. 광명항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하나개해수욕장으로 향한다.
바다 위를 걷는 하나개해수욕장 해상관광 탐방로
하나개해수욕장은 ‘섬에서 가장 큰 개펄’이라는 뜻을 지녔다. 해변은 모래밭이고, 썰물 때는 진득한 갯벌이 드러난다. 보드라운 갯벌 흙이 발가락 사이로 파고드는 감촉을 즐기며 일몰을 감상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하나개해수욕장은 일몰 명소로 유명하다.
해변에 오래전에 방영됐던 드라마 ‘천국의 계단’과 영화 ‘칼잡이 오수정’의 주택 세트장이 있다. 실내 관람은 할 수 없다. 세트장 뒤로 해안관광 탐방로로 가는 길이 이어진다. 이정표를 따라 데크를 걷다 보면 호룡곡산 등산로와 해안관광 탐방로의 갈림길이 나온다. 등산로를 뒤로 하고 해안 쪽으로 내려선다. 해안관광 탐방로는 작년에 무의도 해안절벽 옆에 조성한 해상산책로다. 만조 때는 파도 때문인지 약간 흔들거린다. 바다 위를 걷는 느낌이 꽤 스릴 있다. 해안절벽에 있는 진기한 모양의 바위에 이름을 짓고, 탐방로 난간에 안내판을 세워두었다. 억지스러운 이름도 있지만, 자꾸 안내판 사진과 비슷한 바위를 찾으려 애쓰게 된다. 밀물 때는 갯바위가 잠겨 일부만 찾을 수 있다. 가장 그럴싸한 바위는 어미 원숭이가 새끼를 안고 있는 형상의 원숭이 바위다. 탐방로 끝 해안가에 있다.
이 탐방로는 한낮보다는 해질녘 바닷바람 맞으며 걸어야 제맛이다. 매일 물때가 변하므로 이곳에 갔을 때 바닷물이 싹 빠져 갯벌이 드러나 있을 수도 있다. 바다 위를 걷는 스릴을 느끼지는 못하더라도 안내판 속 바위들은 다 찾을 수 있으니 밀물이어도, 썰물이어도 좋으리라. 탐방로 개방 시간은 일출 때부터 일몰 때까지이다.
주변 명소&맛집
무의도의 휴양지 실미도
실미도는 무의도의 부속 섬이다. 1971년 8월에 발생한 실미도 사건의 현장이기도 하다. 실미도에서 북파공작원 훈련을 받던 부대원들이 정부의 사살 명령을 받고 온 기간병들을 살해하고 실미도를 탈출해 청와대로 가던 중 자폭한 사건이었다. 2003년에 이 사건을 영화화한 ‘실미도’가 개봉해 큰 관심을 얻었다. 하루에 두 번 썰물 때마다 무의도와 연결된 징검다리가 드러난다. 이 다리를 건너 실미도를 관통하는 숲길을 지나면 섬 반대편 해변이 나온다. 실미도 영화 세트장은 오래전에 사라졌고 갯바위와 고요한 해변만 남았다. 실미도와 마주 보고 있는 실미유원지에는 100여 년 된 아름드리 노송 군락이 울창하게 우거졌다. 숲에서 야영을 즐기는 여행객들이 많다. 하나개해수욕장보다 한적한 해변을 산책하거나 바닷가 식당에서 해산물 요리를 즐기기에 좋다.
맛집과 카페
무의도는 바지락 칼국수와 영양굴밥, 조개찜이 유명하다. 하나개해수욕장과 실미유원지, 광명항에 횟집과 식당이 많다. 실미유원지에서는 ‘해송회식당’이 입소문 났다. 진한 바지락 국물에 감자와 각종 채소로 맛을 낸 바지락칼국수가 일품이다. 칼칼한 국물이 입맛을 당긴다. 용유역 앞 ‘은행나무집’은 영양굴밥을 잘한다. 소무의도 몽여해변에 있는 ‘섬카페좋은날’은 루프톱 카페다. 옥상에 폭신한 소파를 준비해두었다. 길가에 있어 걷는 중에 잠시 들리기 좋다.
여행 tip
1. 대중교통
-인천국제공항 제1터미널 3층 7번 탑승장에서 2-1, 222번 버스 탑승, 용유역에서 하차한다. 용유역에서 무의도행 1번 버스를 타면 된다.
-인천국제공항 제1터미널역에서 모노레일로 갈아타 종착역인 용유역에 하차, 무의도행 1번 버스를 탄다. 모노레일은 무료이며 오전 7시 30분부터 오후 8시 15분까지 15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인천국제공항역에서 용유역까지 약 12분 걸린다.
-용유역 앞에서 1번 버스가 매시 정각과 30분에 출발한다. 주말에는 10여분 늦어 질 수 있다. 배차 간격이 넓으므로 하차할 때 버스 시간을 알아두는 게 좋다.
2. 실미도는 썰물 때만 들어갈 수 있다. 하나개해상관광탐방로는 물때 상관없이 출입할 수 있으나 바다 위를 걷고 싶다면 물때를 확인해야 한다.
올봄 여행주간(4.27~5.12)을 맞아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는 전국 지자체와 여행 업계와 함께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 ‘여행주간’이란 여름에만 유독 붐비는 여행 수요를 다른 계절로 분산하고 국내 여행을 활성화하기 위해 2014년부터 시행하고 있다. 여행주간 누리집(travelweek.visitkorea.or.kr)에서는 테마별, 지역별 여행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세대별, 취향별 맞춤 여행지 등을 소개하고 있다.
특히 ‘열린관광지에서 다시 만난 봄’은 65세 이상 시니어를 대상으로 한 여행 프로그램이다. 참가자는 총 20명으로 식사나 입장료 등 여행경비가 제공된다. 단, 출발지까지 왕복교통비는 참가자가 부담한다. 오는 4월 30일 강원도 강릉시와 동해시 일대를 여행하며 2018년 열린관광지 12곳 중 하나인 망상해수욕장에도 방문한다. ‘열린관광지’란 장애물 없는 관광 환경을 만들기 위해 2015년부터 문화체육관광부가 시행하는 사업이다. 매년 여행지를 선정해 장애인과 거동이 불편한 시니어, 어린아이를 동반한 가족이 자유롭게 여행을 할 수 있도록 편의 시설을 확충하고 있다. 망상해수욕장의 경우 열린관광지 사업을 통해 단차 없는 통행로와 장애인 전용 주차구역과 화장실, 기저귀 교환대를 마련했다. ‘열린관광지에서 다시 만난 봄’ 참가를 원하는 시니어는 4월 10일부터 21일까지 여행주간 누리집의 퀴즈이벤트를 통해 응모하면 된다.
이 외에 시니어가 참여할만한 프로그램으로는 ‘취향저격 마을여행단’이 있다. 국내 1호 로케이션 매니저(Location Manager, 현지촬영 감독)가 20개 마을을 엄선해 여행주간 누리집에 소개해 놓았는데 이 중 5곳을 선정해 함께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4월 29일은 60대 가족 여행자들을 위한 여행지인 강원도 고성의 왕곡 마을을 여행한다. 반드시 여행의 대표자가 60대이어야 하며 가족관계를 증명하는 서류를 준비해야 한다. 5월 7일에는 40~50대 여행자들과 제천 산야초마을에서 건강한 먹거리로 지친 몸과 마음을 치유할 예정이다. 취향저격 마을여행단에 참가하고 싶다면 4월 2일부터 15일까지 여행주간 누리집에서 사연과 함께 신청하면 된다. 당첨자에 한하여 1인당 만원의 참가비를 내면 된다.
취향저격 마을로 선정된 곳 중 충북 제천 산야초마을, 경기 양평 소나기마을, 강원 삼척 나릿골감성마을, 경북 경주 교촌마을은 40~50대를 위한 여행지로, 강원 고성 왕곡마을, 인천 동구 배다리 마을, 충북 청주 수암골벽화마을, 전북 진안 원연장꽃잔디 마을을 60대를 위한 여행지로 선정해 선정 이유와 여행 정보를 소개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