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분야의 장인을 만나는 것은 늘 즐거운 일이다. 이번에 만난 이도 마찬가지였다. 철강 산업 분야에 반평생을 몸담은 만큼 국내 철강 역사와 관련한 에피소드들이 끝없이 쏟아진다. 묻지도 않은 이야깃거리도 저절로 나온다. 평범한 사람은 물을 수도 없는 스토리다. 평생을 철강 업계에서 보내던 그가 이제는 다소 독특한 철강 칼럼니스트란 직종을 창직(創職)해 활동 중이다. 바로 전 동국제강 상무 김종대(金鍾大·63)씨다.
“함께 일하던 작가가 그러더라고요 책 한번 내볼 생각이 없냐고. 순간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았어요. 그동안 회사와 업계의 대표선수 중 한 명이라고 자부심을 갖고 살았는데, 생각해보니 내 이름으로 출간한 제대로 된 책 한 권 없었던 것이죠.”
그가 칼럼니스트로 변신하게 된 결정적 순간의 이야기다. 동국제강 창립 50주년 사사(社史)를 준비하던 당시, 함께 일하던 작가에게 받았던 그 질문은 그의 두 번째 인생에 큰 영향을 줬다. 아직 회사에 몸담고 있던 시절이었다. 퇴직 전까지 그는 동국제강 홍보를 담당하는 상무로 활약했다.
새로운 직업을 찾다
철강 칼럼니스트. 한 분야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한 칼럼을 전문적으로 쓰는 작가는 많다. 최근에 각광받는 음식 칼럼니스트들은 대중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이들도 꽤 많고 정치나 음악, 대중문화에 대한 칼럼니스트들도 있다. 하지만 철강이라니 다소 생소하다.
“처음부터 철강 칼럼니스트를 생각한 것은 아니에요. 30년 가까운 인생을 보낸 철강 분야의 이야기를 책으로 써보자고 마음먹고 조금씩 준비를 해왔죠. 먼저 주변에서 칼럼 청탁이 들어오면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아예 연재를 하면서 글을 하나하나 모아가면 하나의 책으로 완성하는 데 수월할 거라 생각했죠.”
그에게 글쓰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회생활을 기자로 시작했고, 홍보 일을 하면서 각종 연설문이나 축사 등을 자주 썼고 매체에 기고하는 일은 업무의 일부이기도 했다. 지금 그는 ‘철이 미래다’라는 주제와 부정 철강제품 추방에 대한 글을 1년 동안 쓸 계획에 있다. 현재 쓰고 있는 글들은 한국철강협회 간행물과 동국제강 블로그, 그리고 업계 전문지에 게재되고 있다.
원고 청탁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철강 칼럼니스트가 됐다. 그리고 은퇴 후 그는 자연인이 된 자신을 소개할 때 철강 칼럼니스트라고 말한다.
정권에 의해 운명이 바뀐 두 번의 변곡점
그가 철강업계에 몸담게 된 사연은 좀 기구하다. 1954년 인천에서 태어난 그는 경희대학교 언론홍보대학원에서 홍보를 전공했다. 첫 직업은 신문사 편집기자였다. 현장을 뛰는 기자는 아니었지만 꽤 적성에 맞는 일이었다고 기억한다.
“일을 빨리 배우고 싶어 꾀를 부렸죠. 선배들이 신문의 면을 구성하는 것을 어깨너머 배우기 위해 소조(小組)들을 집에 챙겨왔어요. 소조는 면 구성을 메모해놓은 종이인데, 기사의 분량이나 제목, 속보 등에 따라 최종결정이 나기까지 여러 차례 바뀌기 마련이거든요. 선배들이 버린 소조들을 사환을 시켜 확보해놨다가 하숙집 천장에 잔뜩 붙여놓고 편집 공부를 했죠. 선배들이 가르쳐주지 않아 몰래 모으느라 애먹었어요(웃음).”
하지만 그런 노력은 얼마 가지 못했다. 그가 일했던 신문사는 1980년 언론통폐합을 통해 경향신문에 흡수 합병된 신아일보였다. 갓 입사한 신입기자였던 그는 결국 회사를 나와야 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익혀뒀던 기술은 후에 빛을 발했다. 당시는 인쇄, 편집기술이 대중화되지 않아 수요가 많았는데, 그는 직접 회사를 차려 대학교 학보나 회사 사보 편집을 대행해주는 일을 했다. 그리고 그의 실력을 알아본 관계자의 추천으로 국제상사 홍보실에 입사하게 된다. 그곳에서 사보 의 편집장이 되면서 홍보 관련 업무를 담당했다.
“워낙 정치적으로 어수선했던 시기니까요. 그래도 언론통폐합 한 번으로 변곡점이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아시다시피 국제상사는 1985년 신군부에 의해 해체되는 고초를 겪죠. 저 역시 그 과정에서 국제상사에서 연합철강으로 적을 옮기게 됐고, 연합철강은 동국제강으로 경영권이 넘어갔어요. 그때부터 동국제강 사람이 됐죠.”
편집기자에서 철강 홍보맨으로
‘철강맨’이 된 그는 동국제강이라는 회사의 소식을 외부에 전하는 ‘입’이 되었다.
“사실 철강회사 홍보팀을 대단치 않게 여길 수 있어요. 철강산업 자체가 대중을 소비자로 상대하는 곳이 아니고, 철강 소비자들은 모두 기업이니까요. 게다가 초창기 철강산업은 제품만 만들면 팔리는 잘나가던 사업이었어요. 경제성장기에는 공급이 수요를 따라주지 못해 너도나도 먼저 제품을 사가겠다고 줄을 서던 시절이니까요. 그런데 무슨 홍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겠어요.”
그래도 그는 때로는 회사를 상대로 때로는 언론을 상대로 때로는 경쟁업체와 기관을 상대로 치열한 길을 걸었다. 한때는 ‘물을 먹였다(특종을 놓치게 했다)’는 이유로 한 매체가 부정적 기사를 연이어 게재하는 바람에 가슴에 사직서를 품고 기자를 찾아가 단판을 짓기도 했다. 기업 홍보실 책임자의 비애였다.
철강업계에 그가 남긴 족적은 또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6월 9일 ‘철의 날’이다.
“협회에서 홍보 담당자들끼리 회의를 하는데 우리도 기념일을 하나 만들자고 제안했어요. 업계가 다 함께 기념할 수 있도록 말이죠. 처음엔 다들 시큰둥해하더라고요. 하지만 꾸준히 제안해 6년 만에 철의 날이 제정되었어요. 그게 2000년 6월의 일이에요.”
한국철강협회의 철의 날이 6월 9일로 지정된 것은, 국내 철강 역사상 처음으로 고로가 가동된 날짜를 기념하기 위해서다. 포항제철소 1고로에서 국내 최초로 쇳물을 생산한 날짜는 1973년 6월 9일이었다. 또 국내 사진계에서 손꼽히는 행사로 인정받는 철강사진전과 마라톤대회의 창설 역시 그의 작품이다.
은퇴 후 직업을 위한 일상의 원칙들
은퇴 후의 삶을 살고 있는 그에게 다행스러웠던 점은 남들과 다르게 은퇴를 미리 경험해볼 수 있었던 것. 그는 2012년 말 첫 번째 은퇴를 한다. 사규에 따른 것으로서 정상적이었다면 회사와의 인연은 거기서 끝나야 했다. 하지만 회사에 오너리스크가 발생하자 그만 한 적임자가 없다는 경영진의 판단에 회사로 다시 되돌아올 기회를 얻는다.
“제겐 행운이나 다름없었죠. 2년 6개월의 은퇴를 미리 경험할 수 있었으니까요. 예상했던 퇴직과 실제로 경험했던 삶은 완전히 달랐어요. 준비를 많이 해야 한다는 주변 선배들의 얘기가 실감나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엔 단단히 준비해야겠다 맘먹었죠.”
그가 은퇴를 준비하면서 가장 먼저 마련한 것은 서재다. 은퇴 후 허송세월을 보내지 않으려면 은퇴 전과 다름없이 ‘출근’하는 기분을 유지하는 것이 좋다는 추천 때문이었다. 그 역시 짧은 은퇴 경험을 하면서 그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꼈다.
“다행히 장가 간 아들 방이 비어 있어 그 방을 서재로 쓰겠다고 했죠. 아내도 제 설명을 듣고 이해해줬어요. 덕분에 매일매일 규칙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어요. 아침에 강아지와 산책하며 글의 윤곽을 대강 구상하고, 낮에는 글로 구체화하는 작업을 해요. 그렇게 초고를 써놓고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밤을 새서 다듬기를 반복하면서 탈고 과정을 거쳐요. 처음에는 글이 제대로 써지질 않아 애를 먹었어요. 책상 앞에 앉았는데 도통 진도가 나가질 않더라고요. 몸이 아직 적응하지 못했던 모양이에요.”
완성된 원고는 반드시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평가를 해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글의 완성도를 높여갔고, 또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알리는 계기로도 삼았다. 자신에게는 자극이 되는 과정이었다.
“은퇴 후 제대로 글을 써보겠다 생각하고 공부한 철강 분야에 대한 학습량은 30년 회사생활 동안 한 공부보다 더 많을 거예요. 막상 글을 쓰려니까 모르는 것이 너무 많더라고요. 그래서 국가기록원 등 철강산업의 발전과 관련한 곳들을 모두 찾아다녔어요. 다행히 오래 접했던 분야라 그런지 흥미로웠어요.”
그가 회사생활을 하며 꾸준하게 모았던 다이어리, 스크랩들도 집필에 도움이 되고 있다. 최고경영진과의 대화와 메모, 그리고 경영상의 위기나 불황을 겪으면서 상황 타개를 위해 노력했던 순간들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최근에는 이 자료를 보다 편하게 볼 수 있도록 디지털 파일로 전환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돌아보면 ‘鐵’이 보인다
김종대씨는 이제 여행을 다닐 때도 ‘鐵’이 보인다고 이야기한다. 직업병 때문인지 독일에서도, 프랑스에서도 철강문화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남들은 관광 명소로 생각하는 에펠탑도 그에게는 철의 문화이자 역사의 상징으로 보였다.
그가 철강 칼럼니스트로서 앞으로 쓰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일까?
“지금 남아 있는 철강산업의 역사는 포항제철(현 포스코)에만 집중되어 있어요. 물론 포항제철이 국내 철강산업에 큰 획을 그은 것은 맞지만, 일제 강점기 때부터 우리의 철강산업 역사는 이어져왔어요. 이 시기에 대한 자료나 학문적 연구가 부족한 것이 사실이에요. 이런 현실이 조금이라도 개선될 수 있도록 돕고 싶어요.”
그의 또 다른 바람은 철강산업에 대한 인식 개선이다.
“철강산업은 굴뚝산업이라는 대중의 인식을 바꾸고 싶어요. 최근 4차 산업혁명 시대가 열리고 있다는데 철강산업도 예외는 아니에요. 최첨단 제품을 개발하는 데 있어 소재 개발은 기본 중에 기본이죠. 국내 철강산업은 미래에도 살아남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어요. 이런 부분들이 대중에게 알려지고, 종사자들이 좀 더 자부심을 갖고 일하는 환경을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은 것이 저의 바람입니다.”
드디어 발트 3국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한 에스토니아에 도착했다. 역시 국경을 넘는지도 모를 정도로 버스가 달리다보니 에스토니아였다. 에스토니아는 발트 3국 중 인구도 가장 적지만, 이웃 나라 핀란드 덕분에 발트 3국 중 가장 잘 사는 나라라고 했다. 리투아니아가 폴란드, 벨라루스와 접경인 것을 감안하면 이웃나라도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모양이다.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보니 아침 기온이 6월 중순인데도 8도에, 비 오고 바람까지 불어 꽤 춥게 느껴졌다. 그래서 가벼운 패딩 옷을 준비하라고 했는데도 서울의 날씨만 생각하고 반팔 옷만 준비한 사람들은 곤욕을 치렀다. 온도도 초봄날씨지만, 체감온도가 더 춥게 느껴졌다.
첫 방문지는 여름 수도라는 타르투였다. 볼거리라고는 타르투 대학 캠퍼스를 돌아보는 일이었는데 일행 중 절반은 이미 커피숍에 앉아 담소를 즐기고 나머지 절반만 캠퍼스 구경을 했다. IQ가 높은 사람들은 공부하러 캠퍼스 구경에 나섰고, EQ가 높은 사람들은 커피숍의 담소가 더 좋았다고 하여 웃었다. 정복자 스웨덴이었지만, 스웨덴 사람이 세운 대학이라고 했다. 천사의 다리, 악마의 다리가 눈길을 끌었다. 그 외에 역사와 문화의 도시라 하여 대성당, 시청사 광장 등 볼거리를 둘러 봤다.
다음 행선지는 국경도시 나르바였다. 러시아 민족이 주민의 87%라고 했다. 두고두고 골치가 될 소지가 있어 보였다. 온천도시라서 온천욕을 즐겼다. 남녀 혼탕이지만, 수영복을 입어야했다.
다음 행선지는 라헤마 국립공원이었다. 서울의 2배 정도인 습지라는데 과연 땅이 물기를 지니고 있어서 밟으면 물이 올라오는 땅이었다. 30분 정도 산책길을 걸어 들어갔다가 나오는 코스였다.
다음 코스는 합살루라는 도시였다. 옛 러시아 황족들이 타던 열차와 철도, 옛 정거장이 전시되고 있었다. 조금 이동하니 벽돌로 쌓은 고성이 있었다. 힘든 줄도 모르고 135계단을 올라 꼭대기 전망대까지 올라가 전경을 구경했다. 호수 가에는 차이코프스키가 즐겨 찾았다는 벤치가 노래비처럼 설치되어 있었다.
마지막 코스는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이었다. 도시 절반은 카페이고 나머지 절반은 기념품 상점일 정도로 관광도시였다. 중세의 신비한 분위기와 이제 막 생기기 시작한 현대식 빌딩들이 혼재되어 있다. 이웃 핀란드 사람들, 중국 관광객들이 와서 붐비는 도시였다. 구 도시가 하이라이트이다. 유럽의 축소판이라고 보면 된다. 거리마다 악사가 길거리 연주를 하고 오픈 카페가 손님을 끌었다. 매력 있는 골목들과 고만고만한 상점들의 상품도 쇼핑객을 끈다. 러시아 상품들이 꽤 있다는 점이 다른 발트 3국과 다르다.
발트 3국은 도로가 옛 마찻길로 돌을 심어 놓아 매우 불규칙하다. 그래서 멋을 내려고 굽이 높은 구두를 심은 여성들은 발목을 삐는 사고가 속출했다. 멋도 좋지만, 발 편한 운동화가 제격이다.
올 때 갈 때 비행기에서 잤으므로 발트 3국 여행에 6박 8일을 보낸 셈이다. 여행 경비는 250만원이 들었다. 탈린에서 이스탄불까지 3시간 반 이동하고 다시 이스탄불에서 12시간 비행하여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장거리 비행이라 노인들은 힘이 드는 편이다. 더 늙기 전에 가보는 것을 권하고 싶다.
발트 3국을 가기 위해서는 인천공항에서 12시간 비행하여 이스탄불에 도착한 후 환승하여 다시 3시간 반을 더 가서 리투아니아의 수도인 빌뉴스의 작은 공항에 도착했다. 서울과 6시간 늦은 시차라서 비행기 안에서 제대로 못 잔 사람들은 매우 피곤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출입국 심사는 좁은 대합실에 승객들을 몰아넣고 한 시간이나 걸렸다. 자동입출국 시스템이 있는 인천공항에 비해 한참 후진국 형 시스템이라며 투덜댔다. 인천에서 밤 12시에 출발한 비행기였으므로 빌뉴스에 도착하니 아침 시간이라 호텔 체크인도 못하고 막 바로 관광에 들어갔다.
리투아니아의 첫 인상은 다른 유럽국가와 별 차이는 없었다. 현재 수도인 빌뉴스, 그전 수도였던 트라카이, 전쟁 중 임시 수도였던 카우나스를 둘러보면서 세 도시 공통점이 수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럽은 역시 돌로 만든 석조건물들이 많아, 오래 보존이 가능했던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했다.
구 시가지가 보존되어 있는데 입구에 ‘새벽의 문’이 있다. 빌뉴스의 구 시가지는 서울 성곽 같은 성곽이었는데 서울의 숭례문처럼 여기만 남아 있다고 했다. 성 오나 성당, 버나딘 성당, 빌뉴스 대성당, 베드로 바울 성당 등 성당이 많이 남아 있다. 카우나스에는 독일군 침공을 막기 위해 축조한 카우나스 성, 중세에 지어진 구 시청사, 그 외 고딕양식의 집들이 볼만 했다. 트라카이에서는 호수 가운데 위치한 고성이 볼만했다.
가장 인상적인 관광지는 라트비아와 국경 지역에 있는 십자가의 언덕이었다. 크고 작은 십자가들이 나지막한 언덕에 놓여 있다. 5만개라는 설도 있고, 10만개라는 설도 있을 정도로 온통 십자가이다. 아픈 역사를 지닌 나라이므로 희생자도 많았을 것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글자가 써져 있는 걸 보면 저마다 사연이 있다. 무덤이 따로 없고 십자가만 그렇게 모여 있다.
리투아니아는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도 그랬지만, 산이 없다. 한참을 가도 양쪽으로는 자작나무와 키가 큰 리기다소나무가 줄지어 있고 길가에는 민들레가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도로도 고속도로라고 하기에는 미흡하지만, 그래도 시속 100km로 달릴 수 있으니 이동시간은 도시간 거리가 길어야 약 2시간 정도 걸렸다.
유럽 관광에서 가장 불편한 것은 화장실이다. 가끔 무료 화장실도 있지만, 대부분 유료 화장실이다. 30센트에서 50센트 종전을 따로 준비해 가야 한다. 단체 버스로 가면 한꺼번에 내리므로 여성들은 하나 밖에 없는 화장실을 사용하려면 매우 불편하다.
발트 3국의 특징에 대해 이미 갔다 온 사람들 얘기가 멋진 남자와 여자들이라고 했다. 역사적으로 여러 나라의 지배를 받다 보니 피가 많이 섞여서 그렇다는 해석이다. 과연 좋은 체형에 옷도 깨끗하게 입으니 볼만했다. 다만 인구가 적다 보니 그곳 사람들 보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 아쉬웠다.
마침 백야의 시즌이라 낮이 길다. 밤 9시면 해가 아직 서쪽하늘에 떠 있고 밤 12시가 넘어도 해가 어스름할 정도라서 관광에는 좋았다.
27일 오후 5시 여의도 신한금융투자빌딩 웨이홀에서 척추건강과 치매를 주제로 한 ‘시니어 헬스 콘서트’가 열린다.
㈜이투데이PNC가 주최하는 이번 행사는 척추와 치매 관련 강연과 더불어 관객과 함께 이야기하는 소통의 장으로 꾸며진다. 가천대 뇌건강센터장과 인천시 치매센터 센터장을 맡고 있는 가천대 길병원 연병길 교수와 우신향병원 신경외과 전문의 민형식 부원장이 강연자로 나섰다. 연병길 센터장은 ‘치매와 마주보기’를, 민형식 부원장은 ‘척추 알면 10년 젊어진다’를 주제로 강연을 펼친다.
아울러 개그맨 권영찬의 진행으로 펼쳐지는 의학 토크쇼와 관객과 함께하는 일문일답 코너를 마련해 시니어들의 궁금증을 풀어나간다. 의학 관련 프로그램 외에 김범룡, 여행스케치 등 가수들의 흥겨운 공연 무대까지 즐길 수 있다.
참가 신청은 브라보 마이 라이프 기획팀(02-799-6730)을 통해 무료로 가능하며, 선착순 마감한다.
그해 늦은 여름, 갑자기 달라진 주변 상황에 안절부절못하고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일단 서둘러 떠나보내고 나면 후련할 것만 같았는데 영 그렇지 않았다. 바람이 실컷 들어간 풍선 같은 마음을 다잡고 차를 돌려 근사한 간판이 눈에 띄는 곳으로 향했다. 마음을 가라앉히기에는 커피 향이 은은하게 퍼지는 분위기 있는 카페가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모처럼 혼자가 된 것을 자축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묘한 기분은 발걸음을 그냥 집으로 향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날, 새벽부터 일어나 커다란 가방 속에 이것저것 주섬주섬 집어넣었다. 짐이 한 가득이었다. 남편을 겨우 달래 미국으로 보내고 인천공항에서 한 시간 남짓 도망치듯 달려온 탓에 두 다리가 뻐근했다. 오랜만에 남편 대신 운전을 한 탓도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남편 없이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은 전혀 피부로 와 닿지 않았다.
그동안 남편은 어쩌다 짧게 집을 비우는 일이 있었지만 이번 외출은 언제 돌아올지 기약할 수 없었다. 숨 쉴 틈 없이 열심히 살아온 우리 부부는 IMF라는 국가적 경제 위기 속에서 아주 위태로운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어디론가 떠나 휴식이라도 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지쳐 있었다. 있는 것이라곤 밤마다 끙끙대며 해결책을 찾아도 답이 나오지 않는 난제들뿐이었다. 이러다가는 큰일 날 듯싶었다. 남편에게 미국 여행을 권했다. 그렇게 남편을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우선 멋지게 보이는 카페로 들어가 제일 아늑하고 편안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훤하게 보이는 창가 쪽 아주 푹신한 곳에 도도하게 다리를 꼬고 자유분방한 여인처럼 우아하게 앉아 가장 비싸고 맛있게 보이는 메뉴를 주문을 했다. 홀가분함이 넘쳐흘러 주체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갑자기 닥쳐온 풍파 속에 마구 쏟아지던 폭풍우가 그 혈기를 다 풀어놓은 듯 아주 조용하고 쾌청한 마음이었다. 온 세상이 내 것처럼 당당했다. 그 황홀함과 넘치는 행복이 사라질까봐 마구 주워 담고도 싶었다. 그 후 혼자 밥을 먹어야 하는 시간이 많았지만 자유로움을 지켜내려고 애를 썼다.
어느새 시간이 흐르고 한 잎 두 잎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이 왔다. 필자에게도 계절은 바람처럼 거침없이 불어왔다. 가뜩이나 무서움을 잘 타는 탓에 자다가 깨어나면 우두커니 걸려 있는 옷걸이가 사람처럼 보였다. 집안 쓰레기를 버리는 등 궂은일까지 혼자 감당해야만 했다. 더구나 남편이 마무리 짓지 못한 일까지 책임을 져야만 했다.
혼자가 되었다는 홀가분함은 사라지고 하루하루가 고단했다. 정신적, 물질적으로 의지할 데가 없어 몸에 이상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면역체계가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 병원에서는 당장 입원을 해야 한다고 했다. 결국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혼자만의 행복과 자유로움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남편도 외로워서 도저히 견디기 힘들다며 집으로 돌아오고 싶어 했다. 충분히 이해가 됐다.
끝내는 가족이 있는 울타리 속에서 남편과 함께 고난이든 기쁨이든 함께 나눌 때, 그만한 행복이 따로 없음을 진지하게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 잠시라도 남편과 떨어져 있으며 그렇게 원하던 자유를 몸서리치게 체험해봤다. 그리고 가족, 남편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지금까지 필자 곁에서 건강하게 살아준 남편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또한 살아 있는 모든 의미 있는 존재들에게도 감사한 마음이다.
필자의 엄마는 여행을 좋아하신다. 그런 엄마 덕에 여기저기 많이도 다녔다. 여행을 떠나는 날 아침, 엄마는 참 바빴다. 네 명의 아이들에게 예쁜 옷 찾아 입히고 머리 빗기면서 3단 찬합 가득 김밥을 싸야 했고 그 와중에 화장도 해야 했으니 출발도 하기 전에 엄마 목소리가 커지기 일쑤였다. 4형제 중 누구 하나가 엄마 주먹맛을 본 후에야 우리는 집에서 출발할 수 있었다. 엄마는 현관 앞에서 뒷짐 진 채 서 있던 아버지를 원망했지만 아버지는 가만 웃기만 할 뿐이었다. 아이들 데리고 힘든데 왜 그렇게 열심히 돌아다녔냐고 물으니 자식들이 넓은 세상 많이 보길 원했다고 하셨다.
“수덕사에선 너 때문에 살아났어.”
아버지가 이야기를 꺼내셨다. 필자가 일곱 살 무렵이었는데 자다가 한밤중에 깨어 머리가 아프다고 우는 바람에 가족들이 연탄가스 사고를 피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는 열 번도 더 들었다. 여행 중에 일어난 가장 큰 사고여서 여행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단골로 나왔다. 자연농원에서 찍은 사진을 앞에 놓곤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가 도망치듯이 한국을 떠난 이야기가 펼쳐졌다. 주차장을 배경으로 찍은 가족사진을 보니 그 당시 우울한 집안 사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우리는 누가 더 못생기게 나왔는지를 보며 깔깔댔다. 식탁에 앉아 여행에 관한 이야기보따리가 한 번 풀리면 수다가 멈출 줄 몰랐다.
엄마와 단둘이 일본 여행
오랜만에 엄마를 만났다. 엄마는 몇 달 전에 봤을 때보다 등이 굽고, 키가 한 뼘이나 작아져 있었다. 80세가 넘은 티가 확 났다. 관광버스를 타고 남해에 다녀오셨단다. 엄마는 오랜만에 버스 타는 일이 얼마나 좋았던지 도착해서도 버스에서 내리기 싫었다고 했다. 버스 타는 게 그렇게 좋냐고 퉁명스럽게 내뱉곤 미안한 마음에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나랑 둘이 여행 갈래?”
“좋~지.”
엄마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혼자 인천공항까지 올 수 있냐고 물으니 나를 어떻게 보고 그런 말을 하냐며 나보다 먼저 공항에 도착해 있었다.
일본은 몇 번 다녀와 별로라는 엄마는 미야자키를 맘에 들어 했다. 태평양 푸른 바다가 인상적인 우도신궁에서 소원을 빌고, 시원한 소나무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노천 온천도 즐겼다. 회전초밥집에 가서 싱싱한 초밥을 먹은 뒤에는 동물원 구경을 했다. 아주 가까이서 기린과 눈이 마주친 엄마는 깜짝 놀라 뒷걸음치더니 쪼그리고 앉아서 비둘기 모이를 주는 재미에 푹 빠졌다. 엄마는 행복해 보였다.
저녁이 되자 가방에서 주섬주섬 초록색 표지의 낡은 수첩을 꺼냈다. 엄마가 메모를 열심히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여행 수첩이 따로 있는지는 처음 알았다.
“뭐라고 쓸 건데?”
엄마 옆으로 바짝 다가갔다.
“별거 없어. 며칠에 뭘 했고 뭘 먹었나 정도 쓰는 거야. 쓸 때는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나중에 읽어보면 정말 재밌어.”
엄마는 수첩에 ‘산본 광장동 공항버스 정류장 오전 6시, 일본 공항 11시 30분 도착’, ‘쇼핑몰 구경하고 7시 회전초밥 저녁식사’와 같은 사소한 일정들을 적어 내려갔다.
돌아서면 잊어버리니 여행의 기억을 오래 간직하기 위해 기록한다는 엄마의 수첩을 들여다보았다. 중국 여행, 싱가포르 여행, 캐나다 여행, 제주 여행, 울릉도 여행. 수첩엔 여행의 기록이 끝이 없었다. 대부분 아버지와 둘이서 한 여행이었다. 지금은 걷는 게 편치 않아 엄마와 함께하지 못하는 아버지의 건강이 안타까웠다. 그 많은 여행 중에 필자가 동행한 여행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결혼해서 내 자식, 내 식구 돌보느라 엄마, 아버지를 잊고 살았던 모양이다.
“엄마, 언제부터 이런 걸 쓰고 있었던 거야? 너무 멋진걸.”
필자의 칭찬에 엄마는 신이 났다. 수첩에 기록해놓은 여행지를 하나하나 설명하면서 그때의 기억을 소환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밴쿠버에 사는 큰딸 집에서 보낸 두 달 동안의 기록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 집에서 먹은 삼시 세끼, 교회 가서 헌금하라고 사위가 쥐어준 빳빳한 달러, 주변 지인들의 식사 초대, 블루베리 따러 갔던 일 등이 세세하게 기록돼 있었다. 엄마는 딸이 생각날 때마다 그 수첩을 펼쳐보았다고 말했다. 자식을 그리워하는 부모의 마음이 느껴져 코끝이 시큰해졌다.
필자는 부모님과 자주 만나 식사를 하고 간단한 드라이브를 즐기긴 했지만, 잠깐 만나고 헤어졌기 때문에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러다가 여행 와서 엄마와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엄마를 참 모르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의 이야기를 듣느라 관광은 뒷전이 되어버렸지만 엄마를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엄마와의 여행은, 여행이 목적이기보다는 함께하는 시간이 곧 여행이란 걸 깨닫게 해주었다.
서울대 심리학과 최인철 교수는 행복의 최고 활동은 여행이라 하였다. 사람은 뭔가에 대해 신나게 이야기할 때 행복감을 느끼는데, 여행은 다양한 경험을 통해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새 옷을 산 얘기는 몇 년째 할 수 없지만, 몇 년 전 다녀온 여행에 대해서는 지금 이야기해도 즐겁다. 새로운 곳에 가서 맛있는 거 먹고 같이 간 사람들과 말하고 노는 것도 즐겁지만, 여행은 다녀와서도 말할 거리가 있기 때문에 행복감이 높아진다.
행복하지 않은 인생은 재미없다.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을 텐데 여행을 통해 행복감을 높일 수 있다면 당장 가방을 싸야 하지 않을까? 요즘은 가족이라도 각자 자신의 삶을 사느라 서로를 돌아볼 새가 없다. 한집에 살아도 한상에 둘러 밥 먹는 일이 뜸해지니 별 할 말도 없다. 이럴 때 가족여행을 다녀온다면, 여행지에서 새로운 것을 즐기는 재미는 물론이려니와 다녀와서도 식탁 위 대화가 풍성해질 것이다. 엄마가 쾌활하고 건강하게 사는 건 여행을 즐기기 때문인 것 같다.
필자는 엄마가 건강한 심장과 다리로 여행하고 살면서 행복한 감정을 늘 간직할 수 있기를 빈다.
여기저기 꽃이 만발한 봄날이다. 가고 싶은 데 있으면 얘기해보라는 필자의 말에 엄마는 미리 준비라도 해둔 듯 “백두대간 협곡열차가 참 멋지던데” 하신다.
최근의 여행 트렌드는 친구나 연인과의 여행보다는 가족과 함께 떠나는 테마 여행의 비중이 커지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여행의 보편화와 맞물리는 현상으로 보인다. 여행이 일상이 된 현재, 보다 일상적인 이벤트로서 가족과 함께하는 모습이 늘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시인 류시호씨는 며느리, 사위, 손주 등 온 가족과 자주 여행을 떠난다. 이번 5월에 떠나는 여행지 그곳의 시간이 느리게 흘렀으면 좋겠다.
류시호 시인ㆍ수필가
얼마 전, 가족 9명을 데리고 보라카이로 여행을 떠났다. 큰아들 부부와 작은아들 부부가 직장을 다니며 고생하기에 손주들과 시원한 바다에서 여유롭게 쉬도록 우리 부부가 경비를 마련했다. 여행은 어디를 가든 즐겁다. 준비할 때부터 기분이 좋다. 우리 가족은 그동안 강원도 양양의 바닷가에서, 강원도 영월에서, 그리고 충북 수안보에서 숙박을 하면서 여러 번 가족여행을 했기에 서로가 여행 분위기를 잘 느낀다.
이번 가족여행은 해외로는 처음 가는 것이라 어린 손주 3명이 걱정스러웠다. 이동 중 간식을 먹이는 문제도 그랬고 장거리 비행 중 아프지나 않을까 마음이 조마조마하고 염려가 됐다. 어린아이들 때문에 인천공항까지 가는 길에도, 비행기에 탑승할 때도 여러 어려움이 있었다. 우리가 탈 비행기는 게이트 번호가 100번이 넘는 곳이라 탑승구로 가기 위해, 지하로 내려가 열차를 타고 가서 비행기를 타야 했기에 탑승시간에 임박해서 겨우 게이트에 도착했다. 그동안 여러 번 해외여행을 했지만, 공항 내에서 지하철로 이동한 것은 처음이었다.
비행기 안에서 이륙할 때 큰 손주는 좋아서 웃고 작은 손주들은 울음을 터트렸다. 장거리 비행기를 타다 보니 둘째 손주가 기내 공기가 안 좋아서인지 좁은 곳이 갑갑해서인지, 며느리 가슴에 음식물을 토하기도 했다. 막내 손주는 인천공항 비행기가 이륙할 때, 그리고 보라카이 섬과 가까운 칼리보 공항으로 비행기가 착륙할 때 울어댔다. 기압 차이로 귀에 통증이 왔던 것이다. 막내 손주가 어디가 불편한 건지 표현을 잘 못해 며느리가 고생을 많이 했지만, 그 외 시간은 비행기 안에서도 잘 놀아 다행이었다.
작년과 재작년에 필자가 방문한 베트남과 미얀마는 공항 입국 심사대에서 한국인들을 우대해줬는데 이곳은 세관 심사가 너무 까다로웠다. 보라카이 휴양지는 세계적으로 유명해 하루에 이곳을 찾는 여행객이 2만 명이나 된다 하니 작은 섬의 인기가 대단하다. 이 섬의 치안은 안전한 편이라고는 하지만, 10년 전 필리핀을 여행할 때도 총기사고가 있었다. 최근에는 불법으로 유통되는 총기가 100만 정이나 된다는 뉴스도 있었다. 심지어 총기 규제가 허술하니 ‘필리핀에서는 택시를 타지 말라’는 경고도 있다.
칼리보 공항에 내리니 밤이었다. 그곳에는 한국인 가이드가 아닌 필리핀 가이드가 서 있었다. 필리핀 가이드는 어디론가 전화를 하더니 한국인을 바꿔줬다. 그분이 하는 말이 오늘 한국 여행객들이 많이 와서 안내하느라 자신이 두 시간 거리인 보라카이에 있으니 현지 가이드와 같이 오라고 한다. 공항에서 낯선 필리핀 사람이 우리 가족들 이름이 쓰인 피켓을 들고 서 있는 것을 보고 약간 실망도 했는데 어두운 밤에 그 외국인을 따라 목적지인 보라카이로 가려니 걱정도 됐다. 그러나 가는 동안 필리핀 가이드와 대화를 한 뒤 불안감은 조금 가셨다.
얼마 후 보라카이 섬으로 들어가는 부두에 도착했다. 현지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배를 타니 한국 여행객들이 많았다. 그제야 비로소 안심이 됐다. 섬에 도착하니 보라카이의 대표적인 교통수단인 자전거 택시 베디카부와 오토바이를 개조해 좌석을 몇 개 만든 3륜 오토바이 트라이시클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것을 타고 우리 가족은 호텔로 이동을 했다. 10여 년 전, 마닐라를 방문했을 때는 미군이 사용하던 군용 지프를 개조한 작은 버스 지프니가 대중교통 역할을 했다.
우리 가족이 예약한 호텔은 이 지역에서 꽤 유명한 호텔로 시설이 아주 좋았다. 다음 날 호텔 수영장을 배경으로 한국인 모델이 촬영을 하고 있어 관계자에게 문의하니 인기 있는 호텔이라 한국에 선전하려고 찍는다고 했다. 그만큼 괜찮은 호텔이라는 의미라서 기분이 좋았다.
보라카이는 세계 3대 화이트비치라는 소문에 세계 여러 나라의 자유여행객들에게 인기 있는 여행지 중 하나로 손꼽힌다. 보아하니 한국인들도 많이 온 것 같았다. 숙소인 ‘파라다이스 가든’에는 넓은 부지에 야자수를 비롯한 다양한 꽃들이 심어져 있었다. 조용한 휴식과 레저 스포츠를 즐기기에도 적합해 보이는 이곳은 아름다운 정원과 함께 상쾌한 물줄기를 내뿜는 인공폭포가 마련된 옥외 수영장이 인기였다. 전체적으로 안락한 분위기에 우수한 시설로 불편이 없었고 도보로 5분 거리에 화이트비치가 있어 참 편리했다.
호텔에서 주는 아침은 열대식물이 있는 정원에서 가족 9명이 대화를 나누며 즐겁게 먹었다. 아름다운 섬 보라카이의 멋진 정원에서 식사를 하니, 대기업에서 스트레스받으며 일하는 큰아들 부부, 부부 공무원으로서 민원인들에게 시달리며 일하는 작은아들 부부가 기분이 좋은지 눈빛이 반짝반짝 빛났다. 손주들도 신이 나는지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아파트에 사는 손주들에게 늘 했던 “조심하라”는 말을 안 해서 필자도 즐거웠다.
옥외 풀장에서는 가족 모두가 물놀이를 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특히 우리 부부가 손주들과 놀아주니 아들과 며느리들이 오랜만에 해방된 기분이라며 이구동성이다. 점심은 보라카이 다운타운 디몰(D-mall)에서 먹기로 했다. 세계 각지에서 온 여행객들이 많아서인지 멕시코식, 일식, 그리스식, 스페인식, 이탈리아식, 스위스식, 한식 등 여러 나라 음식이 많았다. 우리 가족은 이곳저곳을 살피다가 필리핀 음식점에서 닭고기와 돼지고기로 만든 음식을 주문했다. 공장에서 만들었는지 종이에 싼 밥도 나왔다. 손주들과 며느리들이 맛있게 먹어주니 기분이 좋았다. 후식은 자리를 옮겨 필리핀 특산물인 망고로 만든 망고쉐이크를 주문했다. 가족들 모두가 좋아했다. 길을 걷다가 이탈리아식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젤라토를 사 먹기도 했다. 그런데 큰손주가 망고쉐이크가 맛있다고 또 사달라고 하니, 둘째 손주도 덩달아 자기도 사달라고 해서 할머니가 지갑을 분주히 열고 닫아야 했다. 가족들 모두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사는 맛이 났다.
다음 날, 바다에서 물놀이도 하고 밀가루 같은 모래로 손주들과 두꺼비집도 지으며 놀았다. 큰손주는 신이 나서 아예 이곳에서 살고 싶다고 했다. 이어서 필리핀 전통 선박으로 엔진 없이 바람의 힘으로 움직이는 돛으로만 이동하는 세일링 보트를 탔다. 그물망에 앉아 바람을 느끼며 보라카이의 에메랄드빛 바다를 즐겼고, 가족 모두가 흥겨워하니 쪽빛 바다, 흰 파도, 그리고 멋진 모래사장이 있는 이곳으로 여행을 잘 온 것 같다.
저녁에는 가족 모두가 방에 모여 맥주와 위스키, 간식을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우고 손주들이 즐겁게 노는 모습을 보면서 가족과의 행복한 시간을 만끽했다. 특히 손주들이 이 방 저 방으로 옮겨 다니며 즐거워하니 아들과 며느리들도 만족스러운지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그동안 국내 여행을 자주 함께하며 가족 간 사랑을 나눴던 게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
부모와 형제는 수족 같고 처자식은 의복과 같다고 했다. 어른이든 아이이든 사랑을 받아야 삶의 활력이 생긴다. 사랑은 살아가는 이유가 될 만큼 아름다운 감정이다.
세상의 아버지들은 어깨 위에 올려놓은 자식과 손주를 절대로 짐으로 여기지 않는다.
자녀들은 가족이 함께 있을 때는 소중함을 잊고 살지만 공부와 취업, 그리고 결혼 때문에 떨어져 살거나 부모 중 한 분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그제야 부모의 소중함을 더욱 느끼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은 각자 자기 둥지에서 살다가 인간관계, 심리적인 문제 등이 생겼을 때, 가족을 찾는다. 가족이 가장 편하고 세상 어느 누구보다 든든한 지지자이기 때문이다. 특히 어머니는 늘 따뜻한 마음으로 자녀들을 안아주고, 아버지는 투명한 빛으로 자녀들의 길을 밝혀주기에 부모가 오래 곁에 있다면 최고의 복이다.
이 세상에서 가정의 행복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집이 대궐같이 으리으리하고 돈이 많아도 가족 간에 사랑이 없으면 행복한 가정이라 할 수 없다. 가정의 행복을 맛본 사람은 인생의 햇볕을 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그 빛으로 아름다운 삶의 꽃을 피울 수 있다. 보라카이로 떠난 가족여행은 행복했고, 무사히 귀국하게 되어 감사한 마음이다. 덕분에 가족들의 아름다운 미소는 오랫동안 우리 가정의 풍경이 되고 에너지가 됐다.
주말에 큰손주가 오면 “할아버지 할머니 보라카이 또 가요. 그리고 망고쉐이크 사주세요” 한다. 그 말에 필자와 아내는 싱긋이 웃는다. 그리고 또 다른 여행 계획을 짜본다. 가족이 함께 여행을 할 수 있는 것은 큰 행복이다. 재충전의 기회도 된다. 5월은 가정의 달이다. 그동안 가족의 소중함을 잊고 살았다면 가까운 곳이라도 여행을 떠나보자. 손을 잡고 눈을 마주치는 시간 속에 어쩌면 꽃보다 더 아름답고 향기로운 웃음꽃이 만발할 것이다.
>>류시호 시인ㆍ수필가
초등학교 교사로 정년퇴임한 후 시인과 수필가로 등단해 현재 중부매일신문의 오피니언 ‘아침뜨락’에 2008년부터 고정필진으로 있다. 이외 대구일보와 현대문학신문의 필진으로 있으며, 한국예술인복지재단 2016년 문학 창작금 수혜(受惠)를 받았다. 서울특별시장의 ‘서울사랑 이야기 공모전’ 수상 외 6건을 수상했고, 저서로 과 등 4권이 있다.
함철훈 사진가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만이 여행할 수 있고, 많은 것을 가진 사람만이 내려놓을 수 있다. 그리고 고향이 있는 사람만이 사진을 찍는다는 짠한 말을 네덜란드 출신 미국의 가톨릭 사제인 작가 헨리 나우웬(1932~1996)은 남겼다.
몽골국제대학교에서 일하기 위해 한국에서 울란바토르로 이사를 하고, 사진 강의를 위해 매달 홍콩으로 출장가면서 잠시 서울에 들르게 되었다. 세상을 두루 다니는 직업이라 짐을 여러 번 꾸렸지만 서울에 오면 언제나 편안하고 푸근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느낌이 달랐다. 인천공항에 내려 서울 시내로 들어가면서 우리는 이방인이었다. 그때 느낀 외로움이 무척 낯설었다. 내 고향은 서울이고, 서울은 여전히 나와 내 아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삶을 살아가는 곳인데 말이다.
늦은 밤 인천공항에 도착한 우리가 갈 곳은 우리 집이 아니었다. 서울에선 너무나 낯선 게스트하우스란 이름의 주소를 손에 들고 있었다. 비로소 우리가 서울이라는 고향을 떠나 더 근본적인 곳으로 이미 이동했다는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그동안 몽골에서 막연히 느낀 여러 종류의 이질감을 서울에서 정면으로 맞닥뜨린 것이다.
서울에 가면 이런 이질감은 모두 해소될 거라고 생각하며, 이런 배타감은 잠시라며 몽골에서는 만나는 대로 뒤로 핑계 대며 미뤄왔던 것이다. 그런데 서울에서 내가 서울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내가 느끼는 외로움은 불편함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소외감이었다. 몽골국제대학교에서 일을 하기 위한 이주는 여행이나 출장, 파견 근무가 아닌 아예 모든 삶의 근거를 옮긴 것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깨닫게 된 것이다.
우리는 다른 것과의 만남으로 다른 것이 되어 간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외로움을 느낀다. 그 외로움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나와 다른 것도 불편한 것만은 아니다. 조금 생각해 보면 자기 발전과 사람들 간의 문제는 대부분 나와 다른 것을 해석하는 방법에서 시작된다. 외로움을 어떻게 소화해 나가느냐 하는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익숙한 사람과 낯선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는 서로 모두 낯선 사람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익숙해진 사람들과 한데 모여 살아왔다. 거기가 고향이었으며, 일가친척에 둘러싸이게 되었다. 그런 한국에서의 편안하고 안락한 생활을 뒤로 하고 몽골국제대학교의 초청에 응한 것은, 우리의 삶에서 생긴 일종의 자신감 같은 것이었다. 특별히 나는, 나와 다른 사람들과도 잘 살 수 있다고 믿었고, 그들과 살기 위해 고향을 떠날 수도 있다는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 깊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대의 흐름과도 맞다고 판단했다. 이젠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를 이겨내지 못하고, 질시하고 경쟁적으로 군림하고자 했던 시대는 지났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인들이나 특별히 젊은이들에게 국제기구나 비정부조직 또는 개인과 나라의 이익을 넘어서는 일이 갖고 있는 보람과 자부심이 앞으로는 더 폭넓고 귀하게 펼쳐질 것이라고 조언해 왔다.
21세기 지금 세대부터는 서로 다른 것과의 이해와 화합을 화두로 삼기 시작할 것이다. 그래서 내가 서울과 몽골 양쪽에서 겪는 이질감에서 오는 외로움은 한 아프리카 부족에 전해 내려오는 속담을 생각하게 한다.
“사람을 정말 가난하게 만드는 것은 외로움이 아니다. 정말 가난한 사람은 곁에 아무도 없는 사람이다.”
그 속담의 반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경고를 뛰어넘는 길, 모두를 만나기 위해 먼저 떨어져야 하는 길, 감히 많은 이상주의자들이 외쳤던 그 길을 우리 세대가 넘어가리라 믿는다. 우리 대한민국의 유전인자에는 독특한 것이 있다는 것을 외국에 살면서 조금씩 확신하고 있다. 내가 나를 보기는 쉽지 않지만 내가 우리를 알아가는 좋은 길을 외국에 살면서 하나 알게 되었다. 우리와 다른 남들 안에서 나는 우리를 조금 더 잘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양쪽에서 반쪽이의 어려움을 겪는다 해도, 그래서 얻게 된 우리가 있다. 이렇게 반쪽이가 된 많은 우리를 만나는 기회가 많아졌다. 양쪽을 잘 승화시킨 우리의 꿈나무들이 무럭무럭 잘 크고 있다. 또한 광화문 촛불시위 사이 틈틈이 허리를 굽히고 타버린 초와 종이컵을 줍는 젊은이들이다. 우리의 다음 세대들이다.
늙은이들의 노파심 중에도 잘 자라고 있는 우리 대한민국이 기대된다. 서로 다름을 시기하지 않는 길, 그 길들이 이젠 꿈에서가 아니라 분명히 보인다. 아주 추운 몽골의 눈길을 가면서도, 앞이 잘 보이지 않는 2017년 새해를 맞으면서도 새 시대를 여는 새 세대가 여기서도 분명히 보인다.
어젯밤에는 ‘이자카야’ 데이트 나갔던 아들, 며느리가 들어오는 걸 모르고 잠이 들었다. 팔짝거리며 뛰어다니는 아기들 때문에 잠이 깼다. 17개월 된 손자가 누나가 하는 대로 따라서 뒤뚱뒤뚱 쫓아다니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 웃음이 났다.
오늘도 역시 화창하고 환한 바깥 풍경이 감동을 준다. 베란다에서 내다보이는 풍경은 그림같이 예쁘다. 가끔 뎅 뎅 종소리가 울리는 하얀 교회당은 참으로 평화로워 보였다. 결혼식을 주로 한다는데 이곳에서 결혼한 부부는 평생 평화롭게 잘살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니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그 옆으로 수영장과 맞닿은 곳의 너르고 푸른 바다가 가슴을 시원하게 해줬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도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하니 아쉽기만 하다.
여행을 할 땐 미리 다녀온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정보를 얻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호텔에서 외출할 때 문밖에 초록색 카드를 붙이면 방 정리만 원하고 청소는 안 하겠다는 에코 클린 표시라고 한다. 그러면 메이드는 방 정리만 해주고 호텔 측에서는 500엔짜리 쿠폰을 2장 준단다. 이 쿠폰으로 호텔 쇼핑센터에서 기념품 등 사고 싶은 걸 살 수 있으니 좋다며 며느리가 웃는다. 알뜰하고 현명한 며느리가 예쁘다.
600엔짜리 작고 귀여운 수호신 ‘시사’를 3개 사면서 쿠폰을 사용했다. 초록색 ‘시사’ 하나는 내가 가졌다. 그들의 이런 작은 서비스가 고객을 즐겁게 하고 다시 찾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하는 것 같다. 여행 마지막 식사로 일본 가정식을 먹은 후 짐을 챙겨 호텔을 나서는데 왜 그리 아쉬운지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다음에도 여행을 한다면 이곳에 다시 오고 싶다. 오키나와에 와서 느낀 것 중 하나는 매우 작은 차들이 많다는 점이다. 또 관광지만 다녀서일지도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친절하고 거리는 깨끗했으며 도로 위의 차는 우리나라 티코 정도의 차들이 많았다. 본받을 만한 점인 것 같았다.
1시 반 비행기라 서둘러 나서서 주유소에 들러 기름을 채웠다. 렌트할 때 기름이 가득 차 있었던 만큼 돌려줄 때도 그만큼 채워서 반납해야 한다. 3박 4일 동안 300km 정도를 다녔고, 주유비는 3만원이 나왔다. 렌트비가 26만원이고 주유비가 3만원이니 교통비로 30만원밖에 안 드는 편리한 이동 수단이라는 생각이 든다.
차를 반납한 후 셔틀버스로 ‘나하’ 공항으로 가니 우리가 탈 아시아나 비행기가 바람 때문에 연착해 1시간 정도 늦어질 거라고 한다. 오히려 잘됐다며 우리는 느긋하게 면세점에서 선물과 초콜릿 등을 사며 기다렸다.
오키나와는 일본 내에서도 여러모로 독특한 지역이다. 과거 존재했던 독립국 류큐 왕국이 일본에 포함된 지 채 200년이 되지 않아서 류큐 왕국의 유산, 독특한 문화, 그리고 남국의 자연 풍경 등 볼거리가 많아 관광지로 인기가 많은 지역이다. 원래 류큐 왕국의 중심지는 ‘슈리’ 로 ‘슈리 성’이 있기도 한데 일본에 병합된 후에는 ‘나하’가 중심지가 되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오키나와 전투의 아픔이 있기도 하고 주일 미군기지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도 한다. 어쨌든 오키나와에 대한 인상은 매우 좋았으므로 다음 기회에도 다시 찾고 싶은 생각이 든다. 특히 어린 손자 손녀와 함께 일본 여행을 계획하는 분들께는 추천하고 싶은 곳이다.
인천공항에 도착하니 오후 5시. 3박 4일 동안 주차비는 하루 9000원으로 36000원이 나왔다. 집에 왔는데도 여행의 여운이 사라지지 않는다. 참 즐겁고 편안했던 가족 힐링 여행이었다. 벌써부터 다음 여행이 기다려진다.
여행은 언제나 즐겁고 마음 설레게 한다. 가족여행이면 더욱 좋다. 10월의 마지막 주 아들, 며느리, 손녀 손자와 함께 일본 오키나와로 휴가를 떠났다. 가기 전 그쪽 날씨를 검색해보니 우리가 가는 3박 4일 내내 계속 흐리거나 비가 내린다는 예보다. 한 달 전부터 계획하고 예약한 상태라 날씨가 흐리다고 안 갈 순 없었다. 흐리면 흐린 대로 즐거운 게 여행이다. 요즘 우리나라는 햇살이 뜨겁지만 아침저녁으론 좀 추운 날씨다. 그런데 오키나와는 10월의 막바지인데도 한낮의 기온이 30도를 넘는다고 한다. 그래서 한여름 옷과 카디건을 챙겼다.
9시 반 비행기라 우리 가족은 새벽 6시 좀 지나 인천공항으로 출발했다. 공항 주차장에 자리가 없을까봐 우려했지만 마침 빈자리가 있어 주차 걱정 없이 산뜻하게 떠날 수 있었다. 아시아나 항공기로 일본 오키나와 ‘나하’ 공항까지 가는 데는 2시간이 채 안 걸렸다. 오키나와는 제주도처럼 남쪽에 있는 섬이라 본토 사람들이 우리가 제주도로 휴양가듯 찾는 섬이라고 한다. 원래 오키나와는 일본과 중국 사이의 독립적인 섬으로 일본이 아닌 류큐 왕국이었는데, 일본의 침략으로 일본 식민지가 되었다 또한 태평양전쟁 땐 미군이 점령해 지금까지도 곳곳에 미군 기지가 남아 있는 아름답지만 슬픈 섬으로 불리기도 한다.
‘나하’ 공항에 도착하니 하늘이 너무나도 파랗고 깨끗해서 여행 내내 비가 올 것이라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일본 기상청의 틀린 예보가 좀 우스워졌다. 공항 밖은 정말 들은 대로 매우 더웠다. 한여름 옷을 입고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짐을 찾아 나가니 도요타 렌터카 회사 사람이 팻말을 들고 있었다. 렌터카 회사로 가는 셔틀버스에는 많은 여행객들이 타고 있었다. 렌터카 회사는 공항 가까운 곳에 있었고 우리 가족은 예약한 대로 7인승 차를 빌렸다. 일본은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고 도로도 우리나라와는 달라서 좀 걱정되었지만 아들이 능숙하게 운전해서 다행이었다.
먼저 ‘나하’에서 꼭 사고 싶은 물건이 있다며 목적지를 ‘류보’ 백화점으로 잡았다. 마음에 든다는 예쁜 그릇을 고르고 오키나와 브랜드인 블루씰 아이스크림을 사먹으며 여행은 시작되었다. 온통 바다로 둘러싸인 섬인 오키나와 남쪽 ‘나하’ 공항 중부 쪽에 있는 예약 숙소 몬테레이 호텔은 코앞에 바다가 멋지게 펼쳐진 곳에 있었다. 에메랄드빛 바닷물이 어찌나 맑고 깨끗한지 눈이 시릴 정도여서 감탄이 절로 나왔다.
호텔은 모든 방이 바다 쪽으로 나 있었고 베란다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결혼식을 주로 한다는 하얀색의 교회당과 수영장 너머로 아름다운 바다가 끝없이 보이는 정말 예쁜 한 폭의 수채화처럼 보였다. 아직 어린 아기가 있어 잠자리가 편해야 한다고 고른 호텔이어서 모든 것이 안락하고 깔끔했다.
하루 한 끼는 호텔에서 제공하는데 뷔페와 일본 가정식 중에서 고르면 되었다. 그런데 숙소로 오는 도로가 엄청 막혔다. 지나다 보니 버스 한 대가 다 타버린 사고가 있었다. 좀 늦은 시각 도착한 우리는 방에 짐을 내려놓자마자 식당으로 저녁을 먹으러 내려갔다. 바다가 보이는 창가에 자리를 잡으니 맛이 있든 없든 귀부인이 된 듯 기분이 매우 좋았다. 아이들도 여행이 즐거운지 재롱을 부리며 늦도록 잠을 안 잤다. 이렇게 오키나와 여행 첫날이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