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일 오전, 전철 1호선을 타고 종착역인 인천역으로 간다. 한산한 전철 안에서 시간여행자가 되는 상상을 한다. 인천역 앞에 있는 화려한 패루를 통과하면, 1800년대 말 인천 개항 시절의 풍경이 펼쳐지는 상상 말이다. 실제로 패루 너머에 근대건축물이 많이 남아 있다. 그곳에 새겨진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의 시간을 되짚어보면, 나도 모르게 근대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고 만다.
걷기 코스
전철 1호선 인천역▶ 제1패루▶ 차이나타운▶ 선린문(제3패루)▶ 자유공원▶ 제물포구락부▶ 청일조계지 경계계단▶ 인천 중구청(옛 일본영사관)▶ 중구생활사전시관▶ 인천개항박물관(옛 인천일본제1은행)▶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옛 인천일본18은행지점)▶ 신포시장▶ 답동성당▶ 애관극장▶ 싸리재 카페▶ 전철 1호선 동인천역
인천 개항과 함께 형성된 화교 마을
1883년 인천 개항 후 청국인, 일본인, 러시아인, 독일인, 영국인들이 앞다퉈 제물포(지금의 인천항)로 몰려왔다. 항구 일대에는 각국의 조계지가 형성되었다. 최초의 근대식 공원, 극장, 학교, 호텔, 은행과 같은 서양식 근대건축물도 세워졌다.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 철도, 시외전화, 화폐, 구두, 등대, 담배 성냥, 축구, 야구 등 해외 문물도 물밀듯 들어왔다. 이 시절의 흔적이 제물포와 가까웠던 지금의 인천시 중구에 오롯이 남았다. 그 자취를 찾으며 질풍노도 같았던 인천의 근대사를 돌아본다.
출발지인 인천역부터 특별하다. 인천역은 1899년에 개통한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의 시·종착역이었다. 인천역에서 서울 노량진까지 우마차나 수로로는 반나절 이상 걸릴 길을 열차로 한 시간 만에 갔다고 하니, 당시 사람들에게는 신세계나 다름없었겠다.
인천역 광장 맞은편에는 중국 산둥성 웨이하이 시에서 기증한 패루가 화려한 단청을 뽐내며 서 있다. 패루 사이로 차이나타운의 ‘T’자형 대로가 보인다. 차이나타운 골목마다 붉은색으로 치장한 대규모 중식당과 중국 간식 상점, 기념품점이 즐비하다. 인천 차이나타운은 개항 후 중국 산둥성에서 건너온 화교들이 살기 시작한 곳이다. 이때 정착한 화교들이 중국요리점을 열고, 한국인 입맛에 맞는 자장면을 개발했다고 한다. 자장면의 대명사로 불렸던 ‘공화춘’의 우희광 씨는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1983년에 문을 닫은 공화춘은 30년 뒤인 2012년에 ‘짜장면박물관’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 옛날 공화춘의 인기는 신승반점, 만다복, 연경, 중화원 등이 잇고 있다. 차이나타운에서 중국 요리 외에 화덕 호떡인 옹기병과 월병, 홍두병, 공갈빵 같은 중국 전통 간식도 재미 삼아 먹어볼 만하다.
뜨거운 옹기병을 뜯어 먹으며, 차이나타운 중간 지점에 있는 선린문(제3패루)으로 향한다. 3개의 계단을 지나 마지막 계단 위에 우뚝 세워진 선린문은 차이나타운 최고의 포토존이다. 선린문을 통과해 다시 계단을 조금 오르면 자유공원 입구와 만난다. 왼쪽 길에 초한지 벽화 골목이 있고, 오른쪽 길은 자유공원 산책로와 연결된다.
우리가 알아야 할 인천 근대사 이야기
자유공원은 1888년 응봉산에 건립된 국내 최초의 서구식 근대공원이다. 공원 초입에 있는 석정루에 올라 인천 앞바다와 월미도를 조망하고, 한미수교 100주년(1982년)을 기리는 기념탑과 한국전쟁 영웅으로 알려진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둘러본 뒤, 제물포구락부로 이동한다. 제물포구락부는 자유공원과 이어진 계단 중간에 있다. 이곳은 개항 당시 제물포에 거주했던 독일, 미국, 러시아, 일본인들의 사교장이었다. 하얗게 회칠한 외벽과 고풍스러운 홀이 인상적이다. 제물포구락부와 청일조계지 경계 계단도 거리가 가깝다. 이 계단은 일본과 청나라가 각각 조계지를 설정하고, 영역을 구분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계단을 경계로 북성동 쪽은 청나라의 차이나타운이, 신포동 쪽은 일본 건축물이 들어섰다. 계단 양쪽에 세운 석등조차 중국식과 일본식으로 구별돼 있다. 계단 상단의 공자상도 중국 쪽으로 약간 치우쳐 세워졌다. 외국인들이 조선 땅을 땅따먹기하듯 갈라놓은, 어처구니없는 역사의 현장이다.
청일조계지 계단을 내려와 왼쪽, 중구청(옛 일본영사관)으로 가다 보면, 일본 적산가옥과 일본제1은행, 구 일본18은행과 같은 근대건축물이 모여 있는 개항장 거리를 만난다. 차이나타운처럼 이국적인 분위기다. 거리 입구에 있는 중구생활사전시관은 1888년에 개업한 국내 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대불호텔의 외관을 되살려 지은 건물이다. 귀부인이 머물렀을 법한 객실과 1960~70년대 인천 중구의 의식주 생활공간을 실감나게 재현했다. 나무 전봇대가 세워진 골목길과 문방구, 백항아리집(선술집), 극장, 다방, 의상실, 이발소 등 추억을 부르는 풍경이 마냥 반갑다.
전시관 옆 개항박물관은 옛 일본제1은행을 개조한 것이다. 1883년에 건축한 르네상스풍의 석조 건물로서 일본영사관의 금고 역할을 했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들어온 우표와 우편물, 우체통, 전보와 전화기, 경인선 기관차 모형 등을 전시하고 있다. 같은 라인에 있는 근대건축전시관은 일본제18은행 건물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나가사키 상인들이 상해에서 수입한 영국 면직물을 한국에 수출해 큰 이익을 얻자, 인천에 은행 지점을 세운 것이다. 이곳에서 개항장 일대에 현존하는 근대건축물과 소실된 건축물의 모형을 볼 수 있다.
인천과 서울을 연결했던 싸리재 고갯길
개항장 거리를 지나 먹거리 성지인 신포국제시장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신포시장은 인천 개항 이후 형성된 인천 최초의 근대적 상설시장이다. 19세기 말 화교 농민들이 산둥성에서 채소 씨앗을 가져와 키워 시장에 내다 판 것이 신포국제시장의 시초라고 한다. 역사가 깊은 만큼 먹거리도 풍성하다.
쫄면의 탄생지도 신포시장이며, 신포순대, 신포만두의 고향도 이곳이다. 주먹으로 깨 먹는, 단단한 공갈빵과 매콤한 맛을 강조한 신포 닭강정의 인기는 말할 것도 없다. 닭강정을 사려는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골목 안이 새까맣게 보일 정도다.
시장 골목 끝에서 길 하나만 건너면 국내 성당 중 가장 오래된 답동성당과 국내 최초의 극장인 애관극장을 만날 수 있다. ‘보는 것을 사랑한다’는 뜻을 지닌 애관극장은 1895년에 ‘협률사’라는 이름으로 설립됐다. 1920년대부터 애관극장으로 불리며, 복합상영관이 주름 잡는 이 시대에도 꿋꿋하게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시설은 여느 극장과 비슷하고, 상영작도 같다.
흐뭇한 마음으로 애관극장을 구경하고, 동인천역으로 내려가는 고갯길, 싸리재를 걷는다. 옛날에 이 길에 싸리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지금은 낙후한 거리가 되었지만, 1920년대 말부터 70년대까지만 해도 병원, 한약방, 약국, 양화점, 포목점 등이 즐비했던 곳이다. 서울 명동 못지않은 상권을 자랑했다고. 옛날 양복점과 병원 건물과 기록 사진만이 싸리재의 옛 영화를 증명한다.
최근, 뉴트로 열풍에 힘입어 싸리재의 아날로그 정취가 돋보인다. 그 중심에 ‘싸리재’ 카페가 있다. 지은 지 90년 된 목조 카페에서 노부부가 커피를 내린다. 카페 안쪽에는 노부부의 100년 된 한옥 살림집이 있다. 음악에 조예가 깊은 부부는 수집한 축음기로 레코드판 음악을 들려준다. 마침 퀸의 ‘보헤미안랩소디’가 흘러나와 한껏 흥에 젖는다. 바리스타인 박차영 대표에게 메뉴 추천을 부탁하니 자신이 개발한 ‘커피봉봉’과 ‘싸리재’를 권한다. 모든 커피를 모카포트로 내려준다. 쌉싸래한 에스프레소와 달콤한 연유, 촉촉한 생크림의 조화가 감미롭다. 싸리재의 빈티지한 분위기와 포근하게 손님을 맞이하는 노부부가 두고두고 기억날 것 같다. 싸리재 카페에서 동인천역은 멀지 않다. 전철을 타기 전에 송현동 순대 골목이나 화평동 냉면 거리, 동인천 삼치 거리에서 요기를 해도 좋겠다.
주변 명소 & 맛집
신승반점과 명월옥
공화춘은 1983년에 폐업했으나 우희광 씨의 자손들이 공화춘의 손맛을 이어가고 있다. 우희광 씨의 외손녀가 운영하는 신승반점이 그곳. 신승반점의 인기 메뉴는 돼지고기와 채소를 갈아 춘장과 볶은 유니자장면이다. 달지 않으면서 감칠맛 나는 자장 소스와 부들부들한 면발이 입맛을 당긴다. 흰 자장면이 궁금하다면 만다복(032-773-3838)을, 맛있는 짬뽕을 먹고 싶다면 복림원(032-773-8778)을 추천한다. 한식은 신포시장 가는 길목에 있는 백반식당, 명월집이 잘한다. 1966년에 개업한 식당이다. 7000원짜리 백반에 밑반찬만 열 가지. 여기에 곤로 위에서 푹 끓인 돼지김치찌개와 누룽지도 양껏 먹을 수 있다.
신승반점 인천 중구 차이나타운로44번길 31-3, 매일 11:00~21:00
명월옥 인천 중구 신포로23번길 41, 07:30~19:30(일요일 휴무)
송월동 동화마을
송월동 동화마을은 차이나타운과 이어져 있다. 2013년 마을 주거환경개선사업을 통해 세계명작동화를 주제로 마을을 예쁘게 꾸몄다. 입구의 아치문을 통과하면, 알록달록한 동화 속 세상이 펼쳐진다. 골목마다 도로시길, 빨간모자길, 전래동화길 등 테마가 있다. 동화 캐릭터 입체 조형물이 많아 곳곳이 포토존이다. 이 마을이 개항기 때 독일, 일본, 프랑스인들이 살았던 부촌이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인천 중구 자유공원서로37번길 22(연중무휴)
짜장면박물관
1908년 차이나타운에 개업한 중식당, 공화춘의 내부를 개조해 2012년에 개관했다. 전시물을 통해 화교와 자장면의 탄생기, 전성기, 자장라면의 역사 등을 알 수 있다. 1930년대 공화춘 접객실, 1960년대 공화춘 주방을 실제 크기로 재현했다. 졸업식이나 운동회 날에 부모님과 자장면을 먹으러 갔던 추억이 떠오른다. 공화춘 건물은 중국 산둥 지방의 장인이 참여해 중국식으로 지었으며, 2006년에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인천 중구 차이나타운로 56-14, 09:00~18:00(월요일 휴관)
걷기 Tip
❶ 차이나타운은 골목이 많으므로 인천역 앞에 있는 관광안내센터에서 지도를 받아, 갈 곳을 미리 표시해두는 게 좋다. 송월동 동화마을을 코스에 넣는다면, 맨 먼저 들르자.
❷ 신포시장까지만 걷는다면, 수인선 신포역에서 전철을 타면 된다.
❸ 개항박물관, 짜장면박물관, 중부생활사전시관, 근대건축전시관, 한중기념관 등 5개 전시관 통합관람권을 구매하면 입장료를 아낄 수 있다. 통합관람권 어른 3400원. 매달 마지막 수요일 문화의 날에는 입장료 무료.
인천 앞바다 관광 유람선에 올라 파도가 이는 바다를 바라보니 작고한 서영춘 코미디언이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떳어도 고뿌(컵) 없으면 못 마셔요!”라며 웃음을 주던 말이 떠오른다. 아무리 좋은 풍광도 카메라 없이는 남겨둘 수 없다.
유람선 실내는 신나는 음악과 함께 흥에 겨운 승객들이 춤사위로 요란스러웠다. 갑판 위에 올라 드넓은 바다를 바라본다. 웅장한 인천대교가 위용을 드러내고 유람선 꽁무니를 따라 날고 있는 갈매기 떼는 승객들이 갑판 위 난간에 기대어 던져주는 새우깡을 먹으려 달려든다. 순식간에 먹잇감을 포획해가는 갈매기 모습이 신기한 듯 사람들은 감탄을 한다. 과자를 하나라도 더 먹으려는 갈매기들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유람선을 쫓아온다.
그래, 먹이를 낚아채는 순간을 사진에 담아보자. 찰나의 장면이라 쉽지 않다. 이럴 때는 셔터 속도를 단축할 수 있는 고급 기종의 카메라가 부러워진다. 내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승객 중 한 분이 먹이 던져주는 역할을 자청한다. 고마움을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분에게 새우깡을 주는 손의 위치를 미리 정해준 뒤 초점을 수동으로 맞추고 먹이를 채어갈 갈매기를 기다렸다.
주변을 흐리게 하기 위해 최단 거리로 좁히며 다가섰다. 갈매기의 깃털과 눈의 선명도를 높이려 렌즈 조리개는 8로 정했다. 렌즈 구경을 더 좁혀도 되지만 갈매기의 순간 동작을 정지화면으로 만들려면 셔터 속도를 허용 범위 안에서 높여야 했다. 그분에게는 미안한 마음이었지만 능청을 떨며 거듭 부탁을 했다. 고맙게도 한참을 응해줬다. 삼각형, 대각선 구도를 머릿속으로 구상하며 연속 촬영을 해 한 장의 사진을 남겼다. '순간 포착‘이라는 제목도 붙었다.
사진 촬영에 도움을 준 분은 전남 목포에서 관광 온 단체의 일행이었다. 자기들 사진을 찍어달라는 부탁을 하려는 속셈을 직감으로 알았으나 내가 원하는 사진을 찍을 수 있다면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촬영이 끝난 후 일행 사진을 여러 장 찍어서 보내줬다. 너무 감사하다는 답신이 왔다.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서로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보들레르는 “여행이란 어른들에게는 인생이라는 악랄한 강대국과 맺은 휴전, 전반적인 긴장과 투쟁 중에 취하는 잠시 동안의 휴식이다”라고 했다. 찌는 듯한 여름엔 시원한 곳이 그립더니 마음까지 움츠러들게 하는 겨울이 되니 따스함이 마냥 그립다. 베트남이야말로 한겨울 따스한 꿈을 꾸기에 더없이 알맞은 곳이다.
여행에서의 하루는 1년 치 행복이다
한국에서 4시간 반을 날아 다낭 국제공항에 내리면 하노이나 호치민과는 또 다른 베트남을 만나게 된다. 산과 바다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다낭은 휴양지로서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태국의 파타야나 필리핀의 세부처럼 리조트형 휴양지에선 느낄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화려함보다는 소박함, 떠들썩함보다는 호젓한 느낌이 바로 그것이다. 한쪽으로 비켜나 조용한 안식을 주는 곳. 그곳은 바로 다낭과 호이안 그리고 후에다. 파도가 낮은 포복으로 밀려오는 미케비치의 아침은 더없이 상쾌하다. 모래사장엔 대나무로 만든 광주리 모양의 전통 고기잡이배 ‘틴퉁’이 무심하게 던져져 있다. 베트남 국적기를 배에 단 어부는 부지런히 그물을 걷어 올리고 있다. 사회주의 체제의 베트남이지만 호젓한 새벽의 바닷가를 겁낼 필요가 전혀 없어 보인다. 사회주의 국가로 여행 간다고 하면 사람들은 으레 ‘안전’에 대한 질문을 한다. 그러나 경험에 의하면 사회주의권 나라가 훨씬 더 안전하다. 이런 나라에선 범죄를, 특히 자국을 방문한 외국 여행자에게 범죄를 저지르면 중형의 벌을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여행자들의 모습은 평화롭고 여유롭다. 여행자의 신분을 잊고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곳이 바로 다낭이다. 다낭이 주는 특별한 선물이다.
베트남 중부의 최대 상업도시이자 베트남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 다낭은 베트남전쟁 때 미군의 최대 기지로 사용될 정도로 역사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러다가 미군이 물러나자 아이러니하게도 침체기를 맞게 된다. 다낭은 역사와 문화, 자연이 어우러진 천혜의 환경으로 요즘 새롭게 부각되는 곳이다. 주변에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될 만큼 매력적인 호이안과 후에도 있다.
동서양이 혼합된 낭만적인 밤 풍경 ‘호이안’
여행을 자주 해서 좋은 점은 무작정 많이 보려고 허덕이지 않게 된다는 것이고, 안 좋은 점은 어딜 가든 닮은 곳을 찾아내고 비교하게 된다는 것이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의 건축물들과 중국식 유적이 어우러져 낭만적인 풍경을 선사하는 호이안은 남인도 항구도시 코친과 중국의 리장을 합쳐놓은 듯한 인상이다. 전통을 훼손하지 않고 개성 있게 변화한 골목들, 그 속에서 살아가는 서민들을 마주하고 있으면 호이안이야말로 가장 베트남다운 곳이란 느낌이 든다.
작고 아름다운 투본 강을 낀 채 마치 중세시대에서 시간이 멈춘 듯한 호이안은 타임머신을 타고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오랜 역사가 스며 있는 장소들과 과거 번화했던 국제 무역항의 모습이 애수를 자아낸다. 내원교, 전가사당, 풍흥고가, 광조회관처럼 천 년에 걸쳐 중국과 일본의 지배가 남긴 흔적들이 절묘하게 섞여 있다. 에도 막부가 수교 거부 정책을 펼치자 호이안에 살던 일본 상인들은 하나둘 떠나가 버렸고 그 자리를 중국인이 차지했기 때문이다.
호이안에 밤이 오면 상점들은 하나둘 화려한 연등을 켠다. 동서양이 혼합된 이국적인 풍경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할 만큼 낭만적이다. 베트남의 명물인 시클로를 타고 골목 탐험에 나서도 좋다. 정신없이 돌아다니다 보면 시장기가 든다. 북부에선 국물이 있는 쌀국수가 대세이지만 중부에선 볶음쌀국수 카오라우가 대세다. 쌀국수가 질리면 프랑스 식민지 시절부터 내려온 바게트샌드위치(반미, 막대기 모양의 베트남식 바게트)를 먹거나 분위기 있는 노천 레스토랑에서 현지 맥주에 시푸드도 괜찮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구시가지를 관통하는 운하에서 연등을 팔고 있는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연등을 하나 사서 강물에 띄우며 소원을 빌어본다. 원뿔 모양의 전통 모자 ‘논(non)’을 쓰고 연등을 파는 꼬마들의 순박함과 노를 젓는 노파의 온화한 미소가 기도를 더욱 순수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
안 가면 후회할 ‘후에’
다낭에서 후에로 가는 길. 이탈리아 남부 소렌토가 연상되는 멋진 해안도로를 끼고 달린다. 세계 10대 비경 중 하나라는 하이반 고개에는 외국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려고 만들었다는 요새들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망루에 올라 저 멀리 펼쳐진 바다를 감상한다. 점심은 유럽풍의 아기자기한 마을 랑코비치에서 먹는다. 다낭에서 두 시간 거리인 후에는 드라이브의 즐거움도 주지만 다낭과 호이안만으로는 충족되지 않은 역사적 자취를 살펴볼 수 있게 해줘서 좋다. 후에는 옛 참파 왕국의 수도답게 독특하고 고풍스런 유적이 많다. 마지막 날엔 흐엉 강을 따라 산책도 하고 배를 타고 사색에도 잠겨본다. 바람도 상쾌하고, 강물도 더없이 잔잔해 다음 날을 계획하기에 이보다 소중한 시간은 없을 것 같다. 배는 충분해서 가격 흥정도 해볼 수 있는 분위기다. 보통 한 시간에 5달러(베트남 돈으로 10만 동=5000원), 두 시간에 10달러면 작은 배 한 채를 단독으로 빌릴 수 있다. 이보다 더한 호사가 없다. 그렇게 배를 빌려 타고 배 안에서 두 시간 정도 깊고 고요한 강물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기울여본다.
사람들이 고요함을 못 참는 이유는 뭘까. 밖이 조용하면 상대적으로 시끄러워지는 내면의 소리들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일까. 익숙하지 않지만 참고 있어보면 고요는 나와 세상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여행지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으로 돌아간 후에도 하루 한두 시간 정도 고요히 나를 지켜보는 시간을 갖는다면 내면의 아름다움을 더 잘 찾아낼 것 같은 생각이 든다.
travel tip
★찾아가기 인천- 다낭간 직항(대한항공, 베트남항공)이 있으며 4-5시간 소요된다. 다낭공항에서 시내까지는 차로 30분, 다낭에서 호이안까지 차로 30분 소요. 다낭에서 후에까지는 차로 두시간정도 소요되며, 기차도 매일 4편 운행된다.
★기본여행정보 아열대성기후이며, 여행 적기는 건기인 12월부터 5월이다. 5월부터 10월까지는 우기로 많은 비가 내린다. 특히 10월은 태풍이 지나가는 시기이므로 피하는 것이 좋다. 90일간 무비자며, 화폐단위는 동(VND)으로 1달러는 2만동이다. 언어는 베트남어와 부분적으로 영어가 통용된다.
★추천 숙소 풀만 다낭 비치 리조트 Pullman Danang Beach Resort
호이안 구시가지까지 무료셔틀 운행. 공항 서비스. Vo Nguyen Giap street, Khue My Ward Ngu Hanh Son District, 55000 Danang, tel. +84 511 3958 888 info@pullman-danang.com
스코틀랜드의 긴 역사가 고이 간직된, 천년고도 에든버러. 대영제국이 된 지 300년이 흘렀어도 근원은 스코틀랜드일 뿐이다. 남자들은 킬트 줄무늬 치마를 입고 길거리에서는 백파이프 연주가 흐른다. 스코틀랜드의 민족성과 풍습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이외에도 스튜어트 왕가와 귀족들, 월터 스콧, 애덤 스미스, 데이비드 흄, 로버트 번스 등 세기의 작가들 흔적이 남아 있다. 회색빛의 고풍스러운 건축물에 서리서리 스며 있는 역사의 이야기는 긴 겨울밤을 하얗게 지새우게 한다.
스코틀랜드의 대문호 월터 스콧 기념탑
에든버러 공항에서 버스를 타면 시내 중심까지 한 시간이 채 안 걸린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 탓일까? 아니면 약간 구릉진 언덕 위에 자리를 잡은 고색창연한 건축물들 때문일까? 에든버러 겨울의 첫 느낌은 ‘회색빛’이다. 어쩌면 버스정류장 앞쪽에 우뚝 서 있는 스코틀랜드 대문호인 월터 스콧(1771~1832)의 기념탑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오래된 것처럼 보이게 해달라는 스콧의 유언에 따라 시커먼 사암석으로 만든 뾰족한 탑. 61m 높이의 기념탑은 왠지 기괴하고 음산하다. 이 탑을 만들 때, 잉글랜드에 대한 경쟁심으로 영국에서 제일 높은 트라팔가 광장의 넬슨 기념탑보다 5m 더 높이 올렸다는 후일담이 있다. 287개의 계단을 올라가면 에든버러 시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지만 포기하고 스콧 기념탑 아래 프린세스 정원의 국립 갤러리, 로열아카데미를 찾는다. 모두 무료 입장이다. 관광객으로서는 매우 반가운 일. 미술관에 걸린 수준 높은 명화를 마음껏 감상하면서 미소 짓는다.
에든버러의 국교는 장로교
에든버러는 남북을 가로지르는 프린스 스트리트를 경계로 북쪽의 올드 타운과 남쪽의 뉴타운으로 구분된다. 구시가지는 15세기부터 스코틀랜드 왕국의 수도로 행정, 문화의 중심지였다. 신시가지는 18세기 이후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조성된 주택, 상업지구. 1985년, 유네스코는 신·구시가를 묶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하지만 시선도, 마음도 구시가지에 다 빼앗긴다. 무조건 ‘고성(古城)’을 기점으로 걷는다. 고성까지 걸어가는 길목에서 화폐 박물관, 뉴대학을 만난다. 대학 건물은 해묵은 향기를 뿜어낸다. 토마스 찰머스(1780~1847) 목사의 동상이 있는 이 대학은 스코틀랜드 장로교 교구가 있던 곳. 16세기경, 이곳은 매우 중요했다. 1560년, 스코틀랜드가 국교로 지정한 장로교를 잉글랜드와 미국으로 전파하는 중심지였다.
스코틀랜드-잉글랜드 격전지, 에든버러 성
에든버러 성은 오래전 활동을 중단한 화산 꼭대기(133m)에 있다. 성 뒤쪽은 거대한 바위산이 버티고 있는데 3면이 깎아지를 듯한 절벽을 이루고 있다. 딱 봐도 요새로 최적이다. 비교적 경사가 완만한 동쪽이 출입구. 이 성은 현재 영국군 사령부 역할을 하고 있는데 전통 복장을 한 두 명의 근위병이 성을 지키고 있다. 한겨울에도 킬트를 입은 채 맨살을 보여주는 근위병은 여행자들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지만 정작 그들은 관광객들의 시선에 무심하다. 에든버러 성은 6세기에 지어졌다는 설이 있지만 정확한 기록은 없다. 1018년부터 조금씩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고 현재의 건물들은 16~18세기 혹은 그 이후에 지어졌다. 이 성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격렬한 투쟁사를 보여주는 현장이다. 수 세기에 걸쳐 여러 차례 성주가 바뀌었다.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가 수많은 전투를 치르는 동안 이 성은 이긴 자의 차지였다. 스코틀랜드의 스튜어트 왕조를 끝으로 결국 잉글랜드 차지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성내에는 가장 오래된 12세기 초기의 건축물인 세인트 마가렛 예배당이 있는데 대부분 군사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타탄 무늬 제품의 천국 도시
에든버러의 백미는 구시가지 거리 로열마일이다. 에든버러 성과 홀리루드 하우스 궁전을 연결하는 1.6km 남짓의 도로. 과거 왕가에서 쓰던 전용 도로로서 길이가
1마일이나 되어 ‘로열마일’로 불린다. 왕족들만 다닐 수 있는 로열마일 때문에 서민들은 좁은 클로즈 골목을 이용해야 했다. 대로 옆으로 무수한 클로즈 골목이 눈에 들어왔다. 클로즈는 한국의 피맛골 거리와 엇비슷하다. 로열마일 양쪽으로는 역사를 간직한 옛 건축물들이 즐비하다. 기념품 숍, 식당, 호텔 등도 무수히 이어진다. 로열마일에서 가장 흥미로운 곳은 브로디스(Brodie’s) 클로즈다. 18세기, 낮에는 저명한 인사로 지내고 밤에는 도둑으로 살았던 윌리엄 브로디(1741~1788)의 이름을 따서 붙인 골목이다. 론마켓에서 캐비닛을 만드는 장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낮에는 경건하고, 부유하고, 훌륭한 시민이었다. 1781년에는 시의 조합장(deacon)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밤에는 강도짓과 도둑질을 했고 도박꾼으로 방탕하게 살았다. 그는 두 번째 부인과 살면서 돈을 많이 써댔다. 1786년에는 시립은행의 열쇠를 복사해 800파운드를 훔쳤다. 또 부유한 집안에 일하러 다니면서 열쇠를 따로 복제했다. 주변 상인들도 도둑질에 끌어들였다. 기록에 의하면 그의 교활함과 뻔뻔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결국 성 자일스 교회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브로디의 이중적인 캐릭터에 영국 소설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1850~1894)이 영감을 얻어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라는 작품이 탄생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나 그 진위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현재 그의 집은 카페로 이용되고 있다.
애덤 스미스 동상과 세인트 자일스 대성당
로열마일의 가장 번화한 광장에 과거 스코틀랜드 국회의사당, 청동 말과 동상으로 만들어진 버클루 공작의 기념비, 애덤 스미스의 동상과 성 자일스 성당 등이 몰려 있다. ‘국부론’으로 잘 알려진 애덤 스미스(1723~1790) 동상은 랜드마크 역할을 한다. 애덤 스미스 동상 앞에 있는 성 자일스 성당(1495년 건립)의 노르만 양식의 탑이 인상적이다. 이 교회는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곳. 종교개혁가 존 녹스는 프로테스탄트 동지를 규합했다. 성당 앞에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의 18세기 시청사가 있다. 시청사 옆 리얼 마리 킹 클로즈는 ‘귀신 나오는 골목’으로 관광 트렌드가 되었다. 이 광장에서 조금 밑으로 내려가면 콕번 스트리트를 앞두고 데이비드 흄(1711~1776)의 흉상이 있다. 흄은 에든버러 근교인 나인웰스에서 태어났지만 에든버러에서 대학을 다니는 등 인연이 깊다. 우여곡절이 많은 그의 인생 이야기가 참 재미있다. 흄은 “철학자가 되어라. 그러나 철학 가운데서도 여전히 인간이어라!”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메리 여왕이 살던 홀리루드 하우스
흄 흉상을 지나면서 길은 한가해진다. 길 끝에 홀리루드 하우스 궁전이 있다. 홀리루드 하우스는 1128년 데이비드 1세가 지은, 성 아우구스티누스회의 성당이었다. 1498년, 제임스 4세의 명에 따라 궁전으로 다시 지었고 1530년대에는 제임스 5세가 자신과 왕비인 기즈의 메리를 위해 탑을 덧붙였다. 1560년대에는 이들의 딸인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가 살았다. 메리는 1565년, 이 수도원에서 사촌 단리와 두 번째 결혼을 했다. 하지만 단리가 살해되자 얼마 되지 않아 남편 살해 용의자 보스웰 백작의 아이를 임신한 채 이 궁전에서 결혼했다. 메리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메리와 단리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제임스 6세는 에든버러에 머물 때는 홀리루드 하우스를 이용했으나 1603년, 그가 영국으로 떠난 뒤로 이 궁전은 왕가의 방문이 있을 때만 사용되었다. 2002년에는 왕실이 소장한 예술작품을 전시하는 ‘퀸스 갤러리’가 만들어졌다.
주인의 무덤 지킨 충견, 보비
에든버러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보비의 동상이다. 존 그레이의 양치기 개 보비. 존은 보비와 여행을 하던 중 병으로 객사했다. 존의 시신은 보비가 지켜보는 가운데 에든버러 그레이프라이어스 교회 묘지에 묻혔다. 당시 두 살이었던 보비는 죽을 때까지 무려 14년간 매일 밤 존의 무덤을 지켰다. 보비의 감동적인 이야기는 스코틀랜드 전역은 물론 해외까지 퍼졌고, 에든버러의 아이들은 용돈을 모아 보비에게 목걸이를 선물했다. 보비가 집 없는 개로 오인받아 다른 사람들에게 잡혀가거나 사살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보비는 개로서는 유일하게 에든버러 시 명예시민권을 부여받았고, 죽은 뒤에는 특별허가를 받아 존 옆에 묻혔다. 보비의 동상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해리포터’의 작가인 조앤 롤링(1965~)이 즐겨 찾았다는 카페가 있다. 이혼 후 에든버러에 정착한 그녀는 아이 분유 값을 벌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동화를 쓰기로 결정한 그녀는 집 근처 카페에서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을 완성했다.
Travel Data
항공편 스코틀랜드까지 가는 직항편이 없다. 인천→영국 런던행 직항편을 이용해 히드로공항까지 약 11~12시간 소요.
교통 런던 빅토리아 코치 역에서 에든버러까지 내셔널익스프레스 버스가 운행된다. 런던 킹스크로스 역에서는 매일 20여 회 기차가 운행된다.
시차우리나라보다 9시간 늦다.
음식 ‘하기스(Haggis)’가 유명하다. 양의 내장을 잘게 다져 곡물과 섞은 것을 양의 위장에 채워 삶은 음식. 스코틀랜드의 전통 요리로서 매시포테이토와 순무를 곁들여 먹는다.
주류 스코틀랜드를 대표하는 것 중 하나가 스카치위스키다. 몰트위스키와 그레인위스키를 섞어 만드는 블렌디드 위스키가 가장 일반적이고, 한국인들이 즐겨 마시는 종류다.
숙박 게스트하우스, 호스텔 등을 이용하면 된다. 고급 호텔은 25만 원 이상의 비용이 들지만 평균 8만~10만 원대에서 이용 가능하다.
화폐 파운드
여행 포인트 시간 여유를 갖고 북부 고지대에 있는 ‘하일랜드(Highland)’ 지역을 연계하면 좋다. 에든버러 시내 여행사를 이용하면 편리하다.
최근 뉴스에 안타까운 사건이 보도됐다. 우리나라 유학생이 그랜드캐니언으로 여행을 갔다가 실족해 병원에 실려 갔는데 병원비가 10억 원이나 나오고 국내에 오려면 2억 원의 비용이 더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라 고국으로 오지 못하고 있다는 사연이었다. 여행사는 가이드가 조심하라고 경고한 장소에서 일어난 일이라며 책임을 미루고 있다는데 해결이 어떻게 날지 결과가 매우 궁금하기도 하고 안타까운 마음이다.
여행지에서는 가이드 안내에 잘 따라야 한다. 이번 사건으로 나도 어느 날의 기억이 떠올라 새삼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시 생각해보면 우습기도 하지만 그 당시엔 정말 심각했었다. 그때 40여 년간 만나온 동창 7명은 홍콩으로 단체여행을 떠났다. 다들 경험했겠지만 여자 7명이 마음 맞춰 여행을 떠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래도 어찌어찌 날짜를 맞춰 출국을 하게 됐다.
낯선 여행지에서는 가이드 역할이 참으로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운 없게도 아르바이트 날라리(?) 가이드를 만났다. 물론 가이드 입장에서는 다양한 여행객들을 인솔하는데 어려움이 있고 책임을 져야 하는 부분도 있어서 그랬겠지만, 너무 자주 경고를 하면서 겁을 줬다. “홍콩에서는 여러분이 하는 영어로는 통하지 않는다. 길을 잃으면 찾아올 수 없다. 그러니 절대 자리를 이탈하지 말라”고 했다.
어쨌든 홍콩에서의 관광은 시작되었고, 여행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들은 신이 났다. 그리고 여행 셋째 날, 우리는 옵션 여행을 하지 않고 우리끼리 자유시간을 가졌다. 간단한 영어로 택시도 타고 침사추이 다운타운에서 아울렛 구경도 하고 망고 주스와 아이스크림도 사 먹고 예쁜 카페에서 커피도 마시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사건은 마지막 날 공항에서 벌어졌다. 가이드는 “비행기 타기 전까지 한 시간 정도 여유가 있으니 유명한 홍콩 공항 쇼핑을 하고 안녕히 돌아가시라”면서 “혹시 시간이 좀 늦어도 승객이 한 명이라도 타지 않으면 이륙하지 않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홍콩 공항은 정말 크고 넓다. 우리는 각자 선물도 사고 쇼핑도 하러 다니다가 뿔뿔이 흩어졌다. 물론 비행기 타는 시간에 맞춰 탑승구 앞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나는 초콜릿과 과자를 사려고 가게에 들어갔다가 친구들과 헤어졌지만 비행기 시간을 자주 체크하며 약속시간에 맞춰 지하 전동차를 타고 탑승구 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탑승 시간이 촉박한데도 친구 3명이 오지 않았다. 비행기 탑승 시간 10분 전쯤 되니 승무원이 어서 비행기에 오르라며 재촉했다. 우리는 일행 3명이 아직 안 왔으니 잠시만 더 기다려 달라고 부탁을 했지만 당장 탑승하지 않으면 다른 손님들을 기다리게 할 수 없어서 그냥 떠나겠다고 했다. 그 순간 우리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는지 모른다. 우리끼리 먼저 타야 하는 게 옳은 건지, 탑승을 포기하고 기다리는 게 나은 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결국 우리는 탑승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남겨진 친구들한테는 배신자가 된 듯한 느낌도 들고 그 친구들 걱정도 돼 인천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침울할 수밖에 없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관계자에게 물어보니, 비행기를 못 탄 친구들은 대한항공을 타고 돌아오게 되었다고 알려줬다. 그제야 우리는 안심하고 웃을 수 있었다. 우리는 저가 항공사 비행기로 왔는데 대한항공 비행기 온다니 더 잘됐다며 서로를 위로했다.
그 친구들은 비행기 값을 더 지급했을 텐데 말을 안 해준다. 쇼핑 때문에 비행기 탑승 시간을 놓쳤다는 사실이 창피하다면서. 어쨌든 실수가 있기는 했지만 여행은 무사히 마쳤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까지 고민할 문제는 아니었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래도 시간은 잘 지켜야 한다는 교훈은 얻었다. 한 사람이라도 오지 않으면 비행기가 떠나지 않는다는 가이드의 말이 잘못된 것이었을까, 가이드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우리가 잘못한 걸까. 지금도 우리는 모임에서 가끔 그날의 이야기를 하며 추억을 떠올리곤 한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인천성모병원과 함께 ‘백세 건강 챙기는 가정용 의료기 백배 활용법’을 연재합니다. 시니어가 흔히 가정에서 사용하는 의료기를 제대로 알고 쓸 수 있도록, 재미있는 영상과 함께 찾아갑니다. 영상은 네이버TV 브라보 마이 라이프 채널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감수 김대균 인천성모병원 가정의학과 교수 출연 안지현 인천성모병원 간호사
평생 내복 한 번 입지 않고 겨울을 지내왔다는 것을 자랑삼아 이야기하는 중년 남성들이 적지 않다. 건강에 대한 자랑도 자랑이지만, 그들에겐 몸에 딱 붙는 속옷이 익숙지 않기 때문. 그랬던 중년 남성들이 달라졌다. 아침마다 부지런히 속옷을 챙겨 입는 이들이 하나 둘 늘고 있다. 그것도 그냥 내복이 아닌 스타킹, 게다가 입기도 까다로운 압박스타킹을 말이다.
시니어가 압박스타킹을 챙겨야 하는 이유는 바로 하지정맥류와 노인성 하지부종 때문이다. 하지정맥류는 말 그대로 다리에 있는 정맥, 피부 바로 밑에 있는 표재 정맥이 늘어나 피부 밖으로 보이는 질환을 말한다. 종아리나 오금 등에 푸른 빛이 도는 혈관이 실뱀처럼 드러나 보인다면 하지정맥류 가능성이 우선 크다. 이 질환은 50~70대 시니어들에 잘 나타나는데, 이유는 혈관이 노화로 인해 탄력이 떨어져 쉽게 확장되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순환되어야 할 혈액이 제대로 돌지 않고 넓어진 혈관에 고이게 되는 것. 혈액순환을 위한 근육의 펌프 기능이 점차 떨어지는 것도 문제이고, 노인비만도 원인이 된다. 특히 오래 서 있는 직종일수록 이러한 증상은 쉽게 나타난다. 만약 당뇨병이 있다면 더욱 세심한 관리가 필요하다. 혈전이나 피부궤양 등의 합병증이 발생할 수도 있다.
제대로 착용하면 하지부종에 효과
반면 노인성 하지부종은 노화의 과정에서 피부가 처지고 다리의 근육이 쇠약해지면서 생기는 현상으로, 정맥기능이 감소되면서 특징적으로 무릎 이하의 다리에만 부종이 생기는 증상이다. 정맥은 스스로 피를 이동시키지 못하고 주변 근육의 움직임에 의해 발생되는 압력에 의해 순환이 이루어진다. 하지부종은 평소 꾸준한 운동으로 예방할 수 있으나 운동을 할 수 없거나 이미 발생한 상태라면 압박스타킹으로 부족한 근육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다.
압박스타킹은 다리를 전체적으로 압박해 혈관에 피가 고이는 것을 방지한다. 실제로 스타킹 업계 관계자들은 “여성 사용자의 비중이 높지만, 그래도 증상을 개선하기 위해 제품을 찾는 중장년 남성들도 적지 않다”고 귀띔한다. 특히 시니어의 경우 해외여행 시 2시간 이상 비행기를 타야 하는 상황이라면 압박스타킹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대부분의 여행객들이 사용하는 이코노미 클래스의 좁은 자리에 장시간 앉아 있게 되면 다리의 혈액 흐름이 억제되어 자칫 혈전이 발생하고 이로 인해 뇌경색, 폐색전증 등 심각한 합병증이 발생할 수 있는데 압박스타킹은 이를 효과적으로 예방해준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입어서는 곤란하다. 제대로 입지 않으면 되레 혈액순환을 방해할 수도 있고, 지나치게 압력이 센 스타킹을 골라도 병을 더 키울 수 있다. 그러므로 의료용 제품이 아니거나 너무 압박력이떨어지는 제품은 피하는 것이 좋다. 의료용 압박스타킹도 신체 사이즈와 용도에 맞게 압력을 제공하므로 유의해서 골라야 최적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압박스타킹 선택법은?
의료용 압박스타킹은 형태나 재질, 압력별로 무척 다양하다. 모양에 따라 종아리형, 무릎형, 허벅지형, 팬티형 등이 있고, 재질이나 색깔도 다양하다. 평소 복장이나 용도에 따라 적당한 것을 맞춰 고르고 압력도 증상에 따라 선택하면 된다. 다만 가장 중요한 것은 전문의와 상담을 통해 증상에 맞는 형태와 압력을 골라야 한다는 것. 특히 30mmHg 이상의 중압 제품은 의사와 상의 없이 무작정 입었다가는 부작용에 시달릴 수 있다. 최근에는 패션을 고려한 제품들도 많이 나와 있어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 의료용 압박스타킹의 시중 가격은 3만~15만 원 선.
어떻게 입을까?
압박스타킹의 가장 기본이 되는 착용법은 스타킹을 완전히 뒤집은 후 발끝부터 입는 것이다. 대충 양말을 신듯 발을 집어넣다가는 제품에 손상이 갈 수도 있고, 다리에 균일한 압력을 제공하지 못해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a 스타킹을 완전히 뒤집은 후 발끝부터 뒤꿈치까지 위치에 맞게 신는다. b 발목부터는 양손 엄지손가락을 안쪽으로 넣어 스타킹을 잡은 후 차근차근 말아 올린다. c 이 과정에서 주름이 잡히지 않도록 스타킹을 끝까지 펴면서 입는다.
관리는 이렇게
제조사에서는 압박스타킹의 수명을 유지하기 위해 같은 제품을 매일 입는 것보다는 두 개 이상을 준비해 번갈아 입는 것이 탄성을 유지하는 데 유리하다고 말한다. 또 가능하면 착용 후 바로 세탁을 하는 것이 좋다고. 세탁은 미지근한 물에 약간의 중성세제를 풀어 손세탁하되, 잘 헹구는 것이 중요하다. 비틀어 짜거나 세탁기로 탈수시키면 안 된다. 마른 수건 사이에 펴 넣은 후 물기를 제거하고, 빨랫줄이나 건조대에 널지 말고, 그늘 바닥에서 말리는 것이 좋다.
2015년 겨울, 미국에 사는 아들과 딸을 만나러 갔다. 우연한 기회에 미국 유학을 마친 아이들이 그곳에 터 잡아 산 지 10년이 흘렀지만 사는 것 보러 미국에 갈 시간이 없었다. 직장생활에 매어 있던 몸이라 불가피하게 정년퇴직을 하고 나서야 꿈에도 그리워하던 아이들을 만나러 갔다. 출발하던 날 인천공항은 겨울비가 왔는데 비행기는 멋진 구름바다 위를 날았다. 창밖의 하늘은 그야말로 판타스틱했다.
국내 항공이 아닌 유나이티드 항공을 이용하면서 내심 걱정을 많이 했다. 많은 외국인 사이에 끼어 앉아 불편하지는 않을까 하는 막연한 걱정은 언어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다행히도 예전과는 다르게 한국인 탑승객도 꽤 많았다. 게다가 영어와 한국어로 한 번씩 해주는 기내 안내 멘트는 불편했던 마음을 조금씩 풀어주기에 충분했다.
기내식으로 불고기와 치킨, 따뜻하고 통통한 샌드위치 한 조각을 먹었다. 후식으로 제공되는 커피 한 잔을 들고 느긋하게 창문을 통해 구름바다를 내려다봤다. 저 구름바다 밑에서 수많은 사람이 지지고 볶으며 살아가고 있다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콜로라도에 정착해 10여 년째 살고 있는 아이들은 어떤 모습으로 변해 있을까? 창밖 구름바다를 보며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인천국제공항에서 비행기를 탄 지 11시간 만에 샌프란시스코를 경유해 미국 국내 항공으로 환승, 2시간을 더 날아갔다. 어느새 하나 둘, 불빛을 밝히는 덴버 공항이 시야로 들어왔다.
여행의 피로감이 한꺼번에 밀려와 곤한 첫날 밤을 보냈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눈 폭탄이 세상을 휩쓸고 지나갔다. 덴버가 춥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많은 눈이 내리는 광경은 난생 처음 보는 듯했다. 온 식구가 마당으로 나와 눈을 치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계속 쏟아지는 눈을 다 처치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을 맞으며 마냥 신이 난 손자 녀석과 함께 눈사람도 만들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한낮이 되자 햇살 아래 그토록 많은 눈이 요술처럼 녹아버렸다.
덴버에서의 첫 휴일, 아이들은 로키마운틴으로 스키를 타러 가자고 했다. 스키 세트 일체는 미리 준비돼 있었다. 오래전 용평스키장에서 아이들에게 처음 스키를 가르쳐줬더니 하루 전날 저녁부터 너무도 자연스럽게 스키와 스노보드를 손질하던 모습이 기억났다.
덴버에서 스키장으로 출발할 때 말갛던 하늘이 갈수록 흐려지더니 출발한 지 한 시간이 지나자 함박눈이 펑펑 쏟아졌다. 콜로라도는 해발 약 1600m 고지대에 위치해 있어 공기가 맑고 하늘도 파랗다.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린다. 로키마운틴이 가까워올수록 더 많은 눈이 내렸지만 스키장을 향하는 차량 행렬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천신만고 끝에 스키장에 도착해 하염없이 쏟아지는 함박눈을 맞으며 스키 장비를 착용하고 곤돌라에 올랐다. 끝없이 올라가는 곤돌라에서 내려다본 로키마운틴의 스키장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미끄러지듯 슬로프를 내달리는 사람들의 행렬이 마치 동화 속 나라의 모습처럼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가족 단위로 행복하게 스키장을 누비고 있던 그날은 마침 성탄절이었다.
스키장 정상에 도착해 곤돌라에서 내리니 눈발이 더욱 거세졌다. 아름다운 설경과 광활한 급경사 슬로프. 로키마운틴의 스키장 풍경에 매료되고 말았다.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생긴 나무 위에 소복이 내려앉은 눈송이는 때때로 불어오는 산바람에 후드득 떨어졌다. 몇 번의 워밍업을 마친 후 드디어 슬로프에 섰다. 스키를 타지 않은 지 몇 년이나 됐으니 처음 타는 사람처럼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여러 차례 연습을 한 끝에 그린코스로 향했다. 그린코스는 기초 코스를 막 끝낸 다음 가는 중급 코스인데, 생각보다 경사가 가팔랐다. 처음엔 온몸에 잔뜩 힘을 주고 탔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손자 녀석은 옆에서 보드를 타면서 할아버지를 격려했다. 이 멋진 곳에서 아내와 아들, 딸네 가족 등 온 가족이 함께 즐긴 스키와 보드.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밀려왔다.
돌아오는 길에 글렌우드 스프링스 노천온천에 들렀다. 하얗게 눈이 덮인 산을 바라보며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니 세상의 온갖 피곤함과 번잡스러움이 스르르 녹아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날의 멋진 설경은 두고두고 마음에서 그리움처럼 피어오르곤 한다.
삼총사와 자유여행 도전!
11월 마지막 주에 삼총사 친구들과 일본여행을 떠났다.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도 하지만 비행시간이 두 시간 남짓으로 여행 가기엔 적당한 곳이다. 특히 두 친구는 꾸준히 일본어 공부를 하고 있어서 웬만한 의사소통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편하고 좋았다. 이번에 우리는 여행사를 통하지 않고 자유여행을 떠나보려고 했다.
그래도 비행기 표나 숙소는 역시 여행사 패키지를 따라가는 게 나을 것 같아 2박3일 일정에 하루 정도 자유 시간을 갖는 상품을 택했다. 갑자기 결정해서인지 저가 항공에 작은 호텔이라는 데도 가격이 꽤 비쌌다. 그래도 더 고를 여지가 없었다. 삼총사 중 한 친구가 돌보는 손자가 때 마침 부모와 여행을 하게 되어 좋든 싫든 우리도 그날에 맞추어 떠나야만 했다. 그래도 여행 일정은 알차게 짜였다. 한국에서 오전 8시 출발해서 돌아오는 날은 오후 8시 비행기였다. 6시 10분까지 공항에 가야 했는데 정작 비행기의 연착으로 9시로 출발이 늦춰졌다. 우리가 탄 항공은 저가라서 기내식은 제공되지 않는다더니 정말 주스 한잔이 없었다. 그저 생수 한 컵만 나와서 우리는 기내식 없는 여행은 처음이라면서 서로 웃었다. 도쿄에 도착하면 츠키지 시장에 가서 참치초밥과 맛있는 와규를 많이 사먹자며 입맛을 다셨다.
여행은 즐거웠다. 특히 가이드 없이 도쿄, 긴자거리를 누비고 다녔던 건 신나는 일이었다. 지하철도 900엔짜리 1일권을 사서 본전 뽑고 남을 만큼 돌아다녔다. 길 가다 일본사람에게 장소도 물어가며 재미있게 돌아다녔다. 유명한 츠키지 시장에선 참치 해체 식도 보았고 맛있는 참치초밥과 성게초밥 등 이번 먹방 여행의 진수를 맛보았다. 마음을 초조하게 만든 건 돌아오는 날이었다.
험난했던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일본 속의 아기자기한 차이나타운 관광을 마지막으로 8시 비행기를 타려고 공항에 왔는데 출발 때처럼 또 연착이라고 한다. 도쿄는 맑았는데 우리나라에 전날 폭설 수준의 눈이 내려서 공항 사정으로 좀 늦게 되었다는 안내가 있었다. 연착되는 시간을 계산해보니 인천공항에 도착하면 거의 10시 반이 넘을 것 같았다. 그러면 짐을 찾고 입국수속하고 나오면 11시가 훌쩍 넘어 공항버스가 다 끊어졌을 시간이다. 마침 공항철도가 11시 50분까지 있다는데 그것도 서울역까지다. 그래도 서울역까지만 가면 집까지 택시를 탈 수도 있을 테니 기대를 했다. 만일 공항버스나 공항철도가 끝날 때까지 도착하지 못하면 어떻게 할지 고민하며 우리는 머리를 맞대었다. 최악의 경우 택시를 타는 것인데 친구 하나는 작년에 이런 일이 있어 집인 상암동까지 택시비로 8만 원이 나왔다는 말을 했다. 우리 집은 상암동보다 더 멀어서 택시비가 얼마 나올지 걱정이 앞서면서 제발 공항버스가 있기를 바랐다. 요즘은 공항 근처에 찜질방도 있으니 하룻밤 자고 가야 할 지도 모르겠다며 웃기도 했다.
미리 걱정하기 않기
그러면서도 마음은 몹시 초조하고 조바심이 났다. 인천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11시 30분이 막 지난 시각이었다. 같이 돌아온 젊은 아가씨가 스마트폰으로 찾아보더니 이미 공항버스는 다 끝났다고 말해 주었다. 우리는 마지막 공항철도는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각자 자식들에게 전화를 했다. 나도 아들에게 전화해서 사정이 이러하니 서울역으로 엄마를 데리러 오라고 했더니 흔쾌히 그러겠다고 한다. 공항철도 쪽으로 가다가 안내하는 아저씨가 있어 우리 동네 버스는 끝났냐고 했더니 5분 후에 떠나는 막차가 있다고 했다.
와, 그때의 반가움이란... 대중교통이 그렇게 고마운 존재인지 처음 느꼈다. 드디어 공항리무진에 탔다. 아들이 동네 입구로 나와 주었다. 버스가 어떻게 달렸는지 30분 만에 우리 동네에 내려주었고 아들의 차로 집에 무사히 들어왔다. 비행기 안에서 고민하던 걸 생각하니 이제야 웃음이 난다. 12시가 넘은 시간 잘 들어갔는지 묻는 친구들의 카톡이 울렸다. 다들 무사히 제 무대로 돌아왔다. 항상 어떤 일이든 방법은 있는 것이다. 아까의 고민은 부질없었다. 너무 미리 걱정은 하지 말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소청도를 출발한 ‘코리아킹’은 불과 10여분 남짓 달려 대청도 선진포항의 선착장에 닿았다. 멀리서 봐도 아담하고 각양각색 지붕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는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선착장에는 미리 연락을 받고 여행사에서 버스 한 대를 대기시켜놓고 있었다. 아직은 저녁 먹을 시간이 어중간하여 일단 해안을 돌면서 일몰구경하기로 했다. 대청도 선진포항은 고려에 이어 조선시대부터 중국 상선의 이동이 많았던 지역이다. 중국 선원들은 항해하다가 쉬어갈 곳을 찾던 중 이곳이 정박하기에 적합하다고 하여 여장을 풀곤 했다. 또한 선진포항은 일제 강점기 포경회사의 기지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1918년 일본인들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던 고래잡이는 1944년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농여해변
대청도는 주민들의 90%이상이 어업에 종사하고 있다. 섬 일주 해안도로를 따라 아름다운 해변과 절경들이 이어져 있는 곳이 대청이다. 버스를 타고 얼마를 지나 해안선에 도착했다. 썰물이 시작되었는지 바다가운데 모래언덕이 드러나 있었다. 썰물에 드러난 모래언덕을 ‘풀등’이라고 했다. 드러난 풀등을 구경하면서 농여해변을 걸었다. d이곳은 일몰이 아름다운 해변이다. 고운모래가 사각사각 밟히는 느낌이 좋았다. 한참을 걷다보니 기이한 모양의 바위 하나가 우뚝 솟아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가운데 구멍이 뚫어진 형상을 하였는데, 고목바위라고 했다. 바위에 새겨진 결은 보통 가로무늬 결인데, 이 바위에는 유독 세로로 결이 나 있었다. 지구의 나이를 46억년 정도로 친다면 고목바위의 나이가 20억년정도 되었다고 한다. 수십억 년 전에 바닷 속에 퇴적물들이 쌓였다가 지진이나 융기현상에 의해 생성되었다. 그러니까 예전에는 고목바위가 서 있는 곳도 깊은 바다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물결무늬는 바닷물이 하루에 두 번씩 밀물과 썰물현상으로 생긴 ‘연흔’이다. 바위에 있는 ‘연흔’을 ‘화석연흔’이라고 하고 바닥에 있는 가로연흔을 현재 생존하는 ‘현생연흔’이라고 하여 지질학적 가치가 큰 해변으로 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고목바위 앞에서 인증 샷을 남기고 걸음을 재촉했다. 농여해변을 지나 미아동 해변까지 걷다 보니 어느덧 어둠이 장막처럼 내려오기 시작했다. 일몰이 가장 예쁘다는 ‘농여해변’이었지만 해무로 인해 일몰을 볼 수는 없었다.
바닷가 모래사장을 걸으면서 절경이 이어진 해변을 구경하다보니 배도 고프고 피로가 몰려왔다. 우리가 저녁을 먹기 위해 도착한 음식점에서는 이미 근사한 상차림이 준비되어 있었다. 특‘히 싱싱한 홍어회와 소라, 그리고 갑오징어 요리가 한상 가득 채워졌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독점하던 고래잡이는 1930년대 이후 쇠퇴하고, 지금은 홍어, 우럭, 광어, 농어 등이 대청앞바다에서 많이 잡힌다. 그중에서도 홍어가 많이 잡히는데, 홍어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흑산도와 목포를 떠올리지만 사실은 홍어의 70%가량이 대청도에서 잡힌다고 했다. 여기서 잡힌 홍어는 흑산도와 목포 쪽으로 내려가 가공되어 팔린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삭힌 홍어가 아닌 싱싱한 홍어를 회로 썰어냈다.
사실 삭힌 홍어에 길들여진 입맛이었기에 처음에는 별로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먹다보니 입안에 착착 감기는 맛이 별미였다. 특히 마지막에 신 김치를 숭덩숭덩 썰어 넣고 끓여낸 홍어애탕은 시원하면서도 감칠맛이 있어 한층 입맛을 돋우었다. 반주를 곁들인 저녁을 잘 먹고 숙소로 향했다. 오랜만에 만난 선, 후배 동문 간에 정겨운 얘기가 끝없이 이어졌다. 특히 2년 후에 닥칠 개교 100주년 행사에 대한 토론이 진지하게 논의 되었다. 요즘 북핵폐기와 관련하여 남북 간의 화해무드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핫이슈인 서해5도는 백령도를 포함하여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대연평도, 소연평도) 그리고 강화도 위쪽으로 우도라는 섬을 일컫는다. 서해5도는 1953년도 정전협정 당시 육상의 DMZ는 합의 설정이 되었지만 해상은 그렇지를 못했다. 6.25전쟁당시 치열한 전투 끝에 확보한 서해5도의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UN사령부에서 일방적으로 그은 선이 NLL이다. 한반도의 화약고처럼 언제든지 무력충돌이 일어날 수 있는 지역이 바로 이지역인 셈이다. 근래의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같은 사건이 바로 이지역에서 일어났다.
경이로운 모래사막
다음 날, 아침을 먹고 다시 투어에 나섰다. 버스를 타고 옥죽동 해안사구로 향했다.
한국의 ‘사하라 사막’이라고도 일컬어지는 옥죽동 해안사구는 오랜세월 모래가 바람에 날려 이동하면서 거대한 모래산을 이루었다. 옥죽동 해안사구는 계절에 따라 형태가 변화하는 활동성 해안 사구이다. 푹푹 빠지면서 모래산을 오르다 보면 실물크기의 낙타가 나타난다. 우리나라에 사막은 없지만 고비사막이나 사하라 사막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흥미로운 경관을 목격할 수가 있었다.
버스를 타고 다시 이동하여 모래울 해변에 도착했다. 모래울 해변의 풍경은 병풍처럼 둘러싸인 적송군락과 더불어 더욱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대청도에는 삼서 트레킹이 있다. ‘삼각산’으로부터 ‘서풍받이’로 이어지는 트레킹 코스라 앞 글자를 따서 ‘삼서’ 트레킹이라고 부른다. 대청도에서 제일 높은 삼각산은 높이 343m로 인천광역시에 가장 높은 계양산(354m) 다음으로 높은 산이다. 삼각산-기름항아리-마당바위-서풍받이-정자각으로 이어지는 코스의 총 길이는 약 7km 정도이며 소요시간은 대략 2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우리는 시간 관계상 삼각산 트레킹은 생략하고 서풍받이 트레킹만 하기로 결정했다. 서풍받이 트레킹이 시작되는 광난두정자각에서 단체로 인증 샷을 남기고 트레킹을 시작했다. 풍경을 보며 걷다 보니 어느새 숨은 차오르고 다리는 뻐근해지기 시작했다. 대청도는 작은 섬치고는 지형이 꽤나 울퉁불퉁하고 높은 편이다. 하늘전망대까지의 여정은 평소에 운동을 안 한 사람이라면 조금 힘들 수도 있다. 힘들게 헉헉거리며 하늘전망대에 도착하니 시원한 바람이 몸의 열기를 식혀 준다. 전망대 앞바다에는 대갑죽도가 있다. 모양은 사람이 입을 벌린 옆모습과 흡사하다. 하늘을 향해 어민들의 무사귀환을 기원하는 모습인
대갑죽도는 주민의 90%가 어민인 이곳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섬이라고 한다. 얼마나 걸었을까, 짧은 트레킹 코스의 반환점이자 대청도 최고의 경관을 자랑한다는 조각바위언덕 전망대에 도착했다. 전망대를 기준으로 오른쪽엔 서풍받이, 왼쪽엔 조각바위 언덕의 정상, 뒤로는 넓은 갈대밭과 둑바위 해안으로 이어지는 아담한 길이 있다. 잠시 땀을 닦고 숨을 골랐다. 어제 저녁에 못 다먹은 홍어회와 소주로 정상주를 한 잔씩 돌렸다. 시원한 해풍에 정상주 한 잔은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더구나 최고의 경관을 바라보면서 먹는 싱싱한 홍어회는 우리 모두를 황홀감에 물들게 했다. 시간을 보니 ‘코리아킹’이 일행을 태우러 올 시간이 불과 1시간여밖에 남지를 않았다. 부지런히 하산을 했다. 선진포항 전망 좋은 음식점에서 성게 칼국수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나니 몸은 노곤하고 늘어졌지만 시간에 쫓겨 부지런히 항구로 내려왔다. 어느덧, 1박2일의 트레킹이 끝나가고 있었다. 비록 짧은 시간으로 소청도와 대청도의 모든 것을 보고 느낄 수는 없었지만 시간에 비해 많은 것을 보고 간다. 이 멋진 풍경들이 당분간은 잔상으로 남을 것이다.
또 다른 느낌의 에너지였다. 붓이 물 안에서 살랑, 찰랑. 물 묻은 붓이 물감을 만나면 생각에 잠긴다. 종이에 색 스밀 곳을 물색한다. 한 번, 두 번 종이 위에 붓이 오가면 색과 색이 만나고 교차한다. 파고, 풀고. 수백, 수천 번 고민의 흔적에 마침표를 찍으면 삶의 향기 드리운 수채화 한 점이 생명을 얻는다. 수채화 그리는 일상을 살아가는 김재열 교수의 제자 모임 ‘수연회’를 찾아갔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온몸으로 느끼고 각자의 시선으로 색감 물들이는 이들에게는 잔잔한 어울림과 따뜻함이 있었다.
수채화를 그리는 모임 ‘수연회’
“2004년쯤 수채화교실의 인터넷 카페를 만들려고 보니 대표할 이름이 없는 거예요. 마침 그때 KBS2 드라마 ‘겨울연가’ 인기가 일본에서 대단했어요. 일본에 있는 친구가 드라마 촬영 장소를 그려서 책을 만들자고 해서 강원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릴 때였습니다. 그래서 ‘수채화연가’라고 이름을 지었고 지금의 수연회가 됐습니다. ‘수채화를 사랑하는 모임’. 자연스럽게 예쁜 이름이 지어졌습니다.”
지난 9월 말 인천학생교육문화회관 가온갤러리에서 열린 ‘2018 한·일 수연회 아카데미전’에서 밝은 얼굴의 김재열 교수를 만났다. 홍익대학교에서 건축미술을 전공하고 1980년대 이름을 날렸던 주식회사 보루네오가구 임원으로 정년퇴임한 김재열 교수. 현재 홍익대학교 문화예술 평생교육원을 비롯해 다양한 예술교육 현장에서 제자를 양성하고 있다. 제자들이 그림 그리는 것에만 멈추지 않는다. 그들의 솜씨를 세상에 알리고 보여주기 위해 매년 이렇게 전시회를 열고 있다. 32년 전 업무차 만났던 일본인 친구 우에노 히로시(上野 博) 첼시아트아카데미 대표는 평생을 함께하는 그림 친구로 꾸준히 교류 중이다. 전시장 안에는 김재열 교수와 제자 45명, 우에노 대표와 제자 18명의 연합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한·일 양국 두 스승과 제자들의 교류 전시회는 올해로 7회째로 수채화 총 64점이 전시됐다. 내년에는 일본에서 한·일 연합 전시를 할 예정이다. ‘나의 즐거움’이라는 주제로 치러진 이번 전시회에서는 양국 제자들이 살아가는 방식과 일상을 엿볼 수 있었다.
달리던 도시인, 느린 삶에 눈뜨다
수연회에 모인 사람들은 직업군도 나이도 다양하다. 30대부터 80대까지 전·현직 교사, 퇴직 공직자, 주부, 작가, 제빵 경영인 등이 수채화를 그리기 위해 모였다.
“선긋기부터 시작합니다. 그림을 잘 모르던 사람도 함께 그리다 보면 실력이 늘어요. 퇴직한 분들도 오십니다. 그림 한 번 그려본 적 없는 분도 있고요. 다들 용기내서 들어오십니다.”
그렇다면 어떤 매력이 있어서 수채화 속에서 이들은 낭만을 즐기는 것일까?
“수채화가 다시 사람들 마음속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여행을 하더라도 관광지에서 사진만 찍고 끝내지 않아요. 느리게 여행하고 대상을 천천히 봅니다. 사진이 아니라 그림으로 남겨오면 더 좋잖아요. 그게 바로 ‘어반스케치(urban sketch)’, 즉 스케치 활동을 하며 도시기행을 하는 것이죠.”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인생을 담는 작업이기에 시니어들에게 더 없이 다 필요하다고 김재열 교수는 말했다.
“시니어가 ‘고희연’ 같은 잔치 대신 전시회를 열었으면 합니다. 작년에 파킨슨병으로 더는 그림을 못 그리는 회원 한 분이 금혼식과 함께 전시회를 했어요. 도록을 만들면서 옛 사진도 넣어 만들었더니 좋아하더군요. 특히 전시회 도록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저도 장담 못해요. 언제 아플지 모르잖아요. 그림과 기록은 남잖아요. 잔치 대신 전시회! 이런 캠페인을 벌이고 싶은 게 제 마음입니다.”
화실에서 만난 수연회 사람들
김재열 교수의 화실에서는 매주 금요일에 5명의 제자들이 모여 그림을 그린다. 전시회에서 그림 관람을 하고 방문한 화실에는 수연회원 4명이 모여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전시장에 인상적인 바게트 그림을 출품한 제과점 사장 조화익 씨, 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는 박진주 씨, 극작가 진윤영 씨, 13년째 김재열 교수를 사사하고 있다는 주부 이경자 씨가 넓은 테이블에 앉아 그림을 그렸다.
올해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지 3년째라는 조화익 씨는 서울 인사동과 안국동 근처에서 20년 넘게 제과점을 하면서 화가들을 많이 만났다고 한다. 그분들이 그림을 그려주면 받기도 했는데 그때 그림을 그리겠다는 꿈을 조금씩 키워왔다. 마음속에 떨어져 있던 겨자씨가 어느새 자라 나무가 된 것이다.
“젊었을 때부터 그림에 관심이 있었지만 제과제빵 기술자로 일하느라 그림 그릴 시간이 없었습니다. 올해 제가 일흔여덟 살인데 지금이 내 인생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가장 적당한 시기인 것 같아요.”
박진주(37) 씨는 홈스쿨로 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면서 필라테스 사업을 하고 있다. ‘세월의 향기’라는 작품으로 2017 인천미술대전에서 특선을 한 박진주씨는 마무리가 있어서 수채화가 매력적이라고 했다.
“유화는 계속 덧칠할 수 있어서 끊임없이 수정할 수 있어요. 끝이 없죠. 그런데 수채화는 끝이 있어요. 상쾌하고 맑아서 좋아요. 색감도 좋고요. ‘세월의 향기’라는 작품을 1년 8개월 동안 그렸어요. 그림을 그리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냥 덮고 가고 그랬는데 결국 해낸 거죠. 동기부여가 됐어요. 처음에는 이게 뭐냐 했는데 정말 열심히 그림을 팠어요. 수채화를 파고 푼다는 말로 표현하는데 저는 풀지는 못하고 파기만 합니다. 교수님은 물로 물감 농도 조절해서 풀면서 그리시는데 저는 아직 멀었죠.”
이경자 씨는 20년 동안 그림을 그렸고 지금까지 상도 많이 받았다. 5년 정도 소묘를 하다가 수채화를 배우기 위해 김재열 교수를 만났다. 이창포를 그리기 위해 밑그림을 그리고 있던 그녀는 마침 화실에 쌓아두었던 그림을 정리하다가 그림 한 점을 꺼내 보여줬다
“10년 넘게 묵혀놓았던 그림이에요. 2007년도 세계평화미술대전에서 특선을 받은 건데 제목은 ‘역주’입니다. 그때는 역동적인 그림만 그렸어요.”
꽃그림만 그릴 줄 알았는데 다양한 모델을 찾기 위해 이것저것 많이 찾아본다는 이경자 씨.
“SNS에 가수 손담비가 동묘구제시장에서 옷을 사 입고 포즈를 취한 걸 봤는데 멋지더라고요. 드로잉하면 되겠다 싶어서 팔로잉하고 사진 캡처도 했습니다.”
진윤영 씨는 수채화를 그린 지 2년 됐다. 가끔 호랑이나 사자 그림을 그려 SNS에 올렸는데 사납거나 용맹스러워 보이지 않아 그림도 주인을 닮는구나 생각했다고. 그는 지인이 그려 달라던 강아지 두 마리 그림을 보여줬다. 맹수가 아니라 그런지 둥글둥글 귀여운 강아지 모습을 꽤 잘 그렸다.
“교수님이 제 연극작품을 좋아해서 때마다 많은 분을 모시고 공연을 보러 오셨어요. 그림에 관심이 있다 했더니 화실로 당장 오라고 하셨어요. 처음부터 무조건 그렸습니다. 아직 부족하지만 그림 그리는 시간이 좋습니다.”
mini interview
운명 같은 그림, 제자들과 나눕니다 수연회 지도교수 김재열
재능에 칭찬을 더한 삶을 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방학숙제로 냈던 그림이 교실 뒤에 붙은 게 계기였죠.”
형이랑 같이 그려 방학숙제로 냈던 그림이 우수작에 뽑혔다. 그때부터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된 김 교수는 입소문이 날 정도로 미술 영재로 성장했다. 중학교 시절에는 미화부장을 줄곧 맡았다고 했다. 경상북도 의성 출신인 김재열 교수는 산업인재 육성에 힘을 기울이던 시절 대구공업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공고라 대학 진학이 멀어지나 싶었는데 때마침 미술반이 생겼다. 고교시절에도 경북 도내에 미술과 관련한 상은 다 휩쓸었다. 그림이 좋았지만 예술을 하면 어렵게 살게 될 것이라는 주위 사람들의 우려도 있었다.
“그때 홍익대학교 건축미술과가 있다며 한 선배가 얘기해줬어요. 그림에 디자인도 배울 수 있다면서요.”
홍대에서 열렸던 미술 실기대회 입선 경력도 있고 그림에 자신 있었던 김 교수는 무리없이 미대 명문인 홍익대학교에 입학했다.
“건축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즐겁게 생활했습니다. ROTC 장교로 군에 있을 때도요. 사단 내에서 크리스마스트리 대회에서 1등을 해서 휴가도 나가고 진급도 빨랐죠. 군 제대 후에 보루네오가구에 입사하면서 인천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대규모 가구공장이 인천에 있었거든요.”
그리고 이때 평생의 그림 친구인 우에노 씨를 만났다.
첫 만남부터 평생 친구를 알아보다
“우에노 선생이 우리 가구공장에 견학을 왔어요. 1986년, 32년 전에요. 우에노 씨는 공장장이면서 디자이너였습니다. 저는 회사의 디자인개발 소장이었고요. 그때 제가 불고기 쌈밥을 좋아해서 식당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한국의 쌈 먹는 방법을 설명해줬습니다. 만났던 첫날 언젠가 함께 미술 전시를 하자고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16년 만에 그 약속을 서로 지켰죠.”
그림 공부를 하고 싶었던 우에노 씨는 51세에 회사를 관두고 다음해 영국 첼시로 유학을 떠났다.
“우에노 씨가 영국에서 유학할 때 저도 그를 만나기 위해 영국에 갔습니다. 그때 같이 도시를 다니면서 스케치도 하고 말이죠. 1년 3개월 유학생활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간 우에노 씨는 책도 내고 수채화를 가르치는 미술 아카데미를 개원했습니다. 저는 아직 회사에서 일할 때였습니다. 저도 정년퇴임하고 나서 그림을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화실도 만들고 본격적으로 교류하고 말이지요. 우리는 서로에게 꼭 필요한 멘토입니다.”
드로잉북과 함께 떠나는 여행
취재를 마칠 즈음 꼭 보여줄 게 있다면서 노트를 꺼내 들고 방에서 나왔다. 여행하면서 그린 그림과 비행기 티켓, 글귀 등이 담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드로잉북이었다.
“기내에서 와인을 자주 사 마시는데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입니다. 먹고 자고 관광만 할 것이 아니라 제대로 느낌은 담았으면 합니다.”
그는 기내 사무장이 준 감사편지도 잊지 않고 드로잉북에 붙여놓았다. 더 보고 싶어 방으로 따라 들어가니 크고 작은 드로잉북이 한가득이다. 언제까지 이렇게 제자들과 함께하실 생각이냐고 물었다.
“즐거우니까 싫어질 때까지? 죽을 때까지 붓 들고 있으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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