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의 사자성어는 “전분세락(轉糞世樂)”이다. 생로병사로 이어지는 인생살이가 어려움이 많아도 살만한 구석이 많음을 강조한 말이다.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 최고령 생존자였던 헤르츠 좀머 할머니는 110세로 생애를 마쳤다. 숨을 거두기 전에 “살면서 많은 전쟁을 겪었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지만, 삶은 배울 것과 즐길 것으로 가득 찬 아름다운 선물”이라는 말을 남겼다. 유대인 학살의 현장을 지켜보며 처절한 아픔을 겪었어도 인생은 아름다운 선물이라고 여겼다. 전분세락을 웅변한다. 동서양을 불문하고 사람이 사는 동네는 살아가는 모습과 생각이 비슷하다. 날이 갈수록 세상은 각박해지고 혼란스러운 점이 없는 바는 아니어도 세상은 살만한 구석이 있음을 발견한다. 가만히 살펴보면 좋은 사람과 기쁨이 가득하다. 이름 모를 풀 한 포기에도, 보일 듯 말 듯 한 귀퉁이에서 피는 한 송이 꽃에도 자연의 아름다움이 담겨있고 생명력이 꿈틀댄다. 보는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설렘은 곧 삶의 기쁨이고 미래의 희망으로 행복의 원천이다.
삶의 기쁨은 여러 곳에서 온다. 자신의 깊은 내면에서 오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생겨나는 기쁨일 수도 한다. 갓난아기의 해맑은 미소에서 엄마가 그냥 행복해지듯이 말이다. 아침 일찍 고운 햇살을 반기며 이슬 머금고 피어나는 꽃송이를 바라보는 데서도 그러하다. 아침 산책길에 만나는 철 따라 피는 꽃도 기쁨을 준다. 산수유, 개나리, 진달래, 생강나무 꽃이 있고 애기똥풀꽃도 그렇다. 대부분 사람이 그러하듯 갓 피는 꽃과 파릇한 새싹을 보고 기쁨을 느낀다. 필자가 사는 동네는 낮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주변이 논밭이다. 모내기가 한창인 요즘 물이 가득 채워진 논에 반영된 불그스레한 일출이 장관이다. 나무 사이로 고개를 쭉 들이미는 한 줄기 햇살에 빛나는 연둣빛 잎새도 정겹고 신비스럽다. 날마다 같은 길을 걸어도 나무와 꽃, 풀 포기, 동녘에 뜨는 아침 태양이 다르게 다가온다. 시간과 날씨에 따라 자연의 모습이 달라지기에 늘 새롭게 느껴진다. 주변에 만나는 소소한 자연의 아름다움에 빠져들어서다. 늘 아름답다는 생각이 가슴에 가득해서다. 일체유심(一切唯心造)이다. 세상은 마음먹기에 달렸음이다. 세상은 아름답게 보면 한없이 아름다워진다. 아름다운 세상을 모두 즐기기엔 인생이 짧게만 느껴진다. 일분일초가 아깝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간다. 전분세락이란 말의 의미를 깨달아 간다. 세월이 익어감이 아닐까? 어떻게 살아야 전분세락의 세상을 더 즐겁고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을까? 더러는 너무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 듯하며 살았는지 모른다. ‘나쁜 포도주를 마시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라는 서양인들의 노후 삶의 철학을 배우고 싶다.
겨울에도 꽃이 달린다고 해서 이름 붙은 동백(冬柏). 늦겨울부터 봉오리가 맺기 시작해 3~4월이면 꽃망울이 터져 절정을 이룬다. 대개 울릉도나 대청도, 오동도 등 섬에서 자생하지만 육지에서도 선홍빛 동백꽃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있다. 충남 서천군의 동백나무숲이다.
천연기념물 제169호로 지정된 마량리 동백나무숲에는 80여 그루의 동백나무가 자라고 있다. 동백나무로 유명한 부산 동백섬이나 여수 오동도 등보다 늦게 개화해 4월에도 만개한 꽃을 볼 수 있다.
이곳 전설에 의하면 500여 년 전 마량의 수군첨사(水軍僉使)가 꿈에 바닷가에 있는 꽃 뭉치를 키우면 마을에 항상 웃음이 가득하고 번영할 것이라는 계시를 받고 바닷가에 나가보니 그곳에 동백이 있어 증식시킨 것이라 전해진다. 그 뒤로 마을 사람들은 해마다 음력 정월이면 이곳에 모여 고기가 많이 잡히고 바다에서 무사하길 염원하며 제사를 지내왔다고 한다. 동백나무숲은 그렇게 마량리 마을의 수호신이자 방풍림(防風林) 역할을 하고 있다.
동백나무가 심어진 언덕을 따라 올라가면 동백정(冬柏亭)이 나온다. 빽빽한 동백나무숲뿐만 아니라 드넓은 서면 앞바다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장소다. 일출과 일몰이 아름다운 곳으로도 알려져 있어, 매 연말이면 마량포 해넘이·해돋이축제가 열린다. 동백나무숲 인근 춘장대해수욕장에서도 매년 봄 동백꽃주꾸미축제를 개최한다. 다양한 주꾸미 요리 시식 행사부터, 주꾸미 낚시, 동백 주꾸미 포토존, 동백나무숲 보물찾기 이벤트 등을 즐길 수 있다.
△ 마량리 동백나무숲
충남 서천군 서면 마량리 산 14번지
동절기 09:00~18:00, 하절기 09:00~17:00
4월 초순경, 장고항 어부들의 몸짓이 부산하다. 실치잡이를 해야 하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실치가 적을 때는 하루에 한 번 정도 그물을 올리지만 많을 때는 수시로 바다에 나가 바쁘게 작업을 해야 한다. 흰 몸에 눈 점 하나 있는, 애써 눈여겨봐야 할 정도로 작은 물고기인 실치가 작은 몸집 흐느적거리면서 장고항 앞바다를 회유한다. 실치는 장고항 봄의 전령사다.
지형이 장고의 목처럼 생긴 어촌 마을
해돋이를 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려 한다. 오전 6시가 채 못 돼 부스스 일어나 장고항 우측 끝자락의 노적봉과 촛대바위가 잘 보이는 위치를 찾는다. 마치 뫼산[山] 형태의 기암은 장고항의 지킴이다. 오랫동안 먼 바다에 조업 갔다 오는 어부들의 버팀목이 되었을 것이다. 이 계절, 기암 사이로 멋지게 떠오르는 해돋이를 기대하진 않는다. 단지 장고항을 대변해주는, 육지 끝자락에 있는 모습을 확인해보고 싶었을 뿐이다. 물이 빠져 갯벌이 다 드러나는 서해에서 바라보는 일출. 동해에서와는 사뭇 느낌이 다르다. 아침 햇살은 빠르게 사위를 밝게 해준다. 서둘러 장고마을로 들어선다. 장고항은 ‘지형이 장고의 목처럼 생겼다’ 해서 ‘장고목’이라 불리다가 후에 장고항 마을로 개칭되었다. 이외에도 가낭골, 당산 마을이라는 이름이 있다. 여행자들도 바닷가 마을만 한갓지게 배회한다. 서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바닷가 마을인 장고항이 특히 유명해진 것은 ‘실치’ 덕분이다.
‘실치’로 이름 알린 장고항
장고항 사람들은 1970년대 초, 실치잡이가 본격화되면서 다들 실치포를 말렸다고도 한다. 실치잡이가 성행할 때는 150여 가구가 소위 멍텅구리배로 불리는 무동력 중선으로 실치잡이를 해왔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연안에서의 실치잡이 어선이 자취를 감춘다. 지금은 인근 앞바다에서 개량 안강망 그물로 실치를 잡는다. 2000년 초부터는 장고항 실치회 축제를 만들어 ‘실치회의 원조 고장’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마을 안쪽 건조대에서는 실치포 말리는 작업이 한창이다. 고샅 건물 벽에 씌인 손글씨를 따라 실치포 작업장을 찾아낸다. 아주 오랫동안 실치포를 만들어왔음이 느껴지는 작업장이다. 실치포 만드는 작업은 눈으로 봐도 힘겨워 보인다. 마치 김 한 장 만들 듯, 물그릇 담긴 실치를 그릇으로 적당량 떠서 사각 나무틀에 쏟아 납작하게 모양을 잡는다. 연륜이 깊고 숙련된 사람일수록 실치의 양을 정확히 가늠하고 평평하게 할 수 있다. 발에 붙은 실치는 신기하게도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붙어 있다. 몇 시간 해풍을 맞으며 건조되면 실치포가 완성될 것이다. 두껍고 살색이 흴수록 좋은 실치포라는 상식을 알게 된다. 기꺼이 실치포 몇 묶음을 산다.
젓가락으로 건져낼 정도로 아주 작은 물고기
건조대를 지나 마을 끝 방파제 쪽으로 발길을 옮기면 수산물유통센터가 나온다. 2012년 4월 28일, 제9회 축제를 맞춰 개장한 곳으로 7209㎡의 부지의 1153㎡의 1층 건물에는 20여 곳의 횟집이 들어서 있다. 난전, 포장마차를 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간판을 달고 한곳에서 영업하고 있다. 싱싱한 활어는 물론이고 실치와 간재미 등이 지천이다. 손님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일까? 바닷물을 가득 담은 고무 대야에 살아 있는 실치들이 헤엄치고 있다. 흰 몸에 점이 하나 있는, 마치 실처럼 가는 물고기가 활발하게 몸을 움직이는 모습이 신기할 따름이다. “나 살아있어요” 하는 듯하다. 횟집들마다 부산하게 실치를 씻으며 손님 맞을 준비에 여념 없다. 실치 씻는 방법도 아주 특이하다. 튀김을 건져낼 때 사용하는, 긴 나무젓가락으로 실치들을 휘휘 저어댄다. 젓가락에 실치가 걸쳐지면 소쿠리에 담아내는 일을 반복한다. 워낙 작은 물고기라서 손품이 많이 필요하다.
기암 촛대바위가 멋진 해안
수산센터를 지나 방파제로 가는 길목에서 멀리서만 봤던 기암을 가까이서 조우한다. 붓을 거꾸로 꽂아놓은 듯한 바위가 촛대바위다. 양쪽으론 기암이 감싸고 있다. 바다 쪽, 높은 바위를 노적봉이라 부른다. 바다 쪽으로 내려서서 좌측으로 돌아가면 석굴(해식동굴)이 있다. 용천굴이라고 부르는데 으레 그렇듯이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천장이 뻥 뚫려 하늘이 그대로 보인다. 이곳으로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이 있다. 다른 전설도 있다. 200여 년 전, 나라에 큰 정변이 일어나서 사람들은 피난을 갔단다. 그때 한 아이가 이 동굴에서 7년을 공부해 장원급제를 해 재상 자리에까지 올랐다는 이야기다. 이후부터 마을 사람들은 이 동굴을 신성시해 출입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번에는 올망졸망 배들이 매어 있는 선착장으로 가 본다. 조업을 마친 배들이 들어오고 몇 팀의 낚시꾼들은 부산스럽게 배를 타고 떠난다. 한편에서는 남편의 고깃배가 들어오는지 고개를 내밀고 기다리는 아낙도 있고 일찍부터 막걸리 한 사발로 술추렴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물망에 걸린 실치 작업에 한창인 어부를 만난다. 이들은 실치 철이 끝날 때까지 자주 바닷가에 나가 작업을 한다. 실치가 적게 잡힐 때는 하루에 한 번 정도 그물을 올리고, 많이 잡힐 때는 수시로 그물을 털 것이다. 내겐 볼거리이지만 어부들에게는 생계의 그물이자 돈 줄 아닌가.
씹힐 틈 없이 살살 녹는 실치회
이제는 ‘당진 8미(味)’ 중 하나로 꼽히는 실치회를 먹어야 할 시간이다. 실치회 한 접시를 시킨다. 아주 작은, 흰색의 물고기가 무더기로 뒤섞인 접시 위로 깨소금, 참기름, 파 등의 양념이 흩뿌려져 있다. 여기에 오이, 깻잎, 쑥갓, 당근 등 갖은 야채에 고추장 양념이 더해지면, 함께 쓱쓱 버무려 입에 넣기만 하면 된다. 실치가 미끄러워 반드시 나무젓가락으로 먹어야 한다. 한입 먹어본다. 작은 물고기라서 입으로 들어가자마자 살살 녹는 식감이 일품이다. 아욱을 넣어 끓여낸 고소한 실치 국에 실치 전, 실치 계란찜까지 배부르게 먹고 나니 실치라는 물고기가 어떤 놈인지 궁금해진다. 실치는 일반적으로 뱅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자료를 찾아보니 ‘베도라치’라는 이름도 있다. 서해에서는 흰베도라치가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실치는 ‘흰베도라치의 새끼’란다. 꽤 긴 이 이름을 외우려면 시간깨나 걸리겠다.
초봄 한 달간 ‘잠깐’ 먹을 수 있는 요리
첫 그물에 걸려드는 실치는 너무 연해서 회로 먹기는 어렵다. 3월 말부터 4월 초순경 적당히 몸집이 커져야 횟감으로 먹을 수 있다. 6월 말까지 잡히지만 4월 중순이 넘으면 뼈가 굵어져 맛을 잃는다. 그래서 실치회를 먹을 수 있는 기간은 약 한 달간으로 눈 깜짝할 새다. 실치는 성질이 급해 잡히면 얼마 안 가 죽어버린다. 당연히 먼 곳까지 운반할 수 없다. 산지에나 와야 싱싱한 회를 먹을 수 있다. 이후부터 잡히는 물고기는 실치포를 만든다. 멸치처럼 데쳐서 말리는 실치포는 칼슘이 풍부한 건강식으로 알려져 있다. 집에 돌아와 장고항에서 구입한 실치포로 밑반찬을 만들어본다. 요리법은 간단하다. 팬에 기름을 두르고 노릇노릇 구워낸 포를 먹기 좋게 가위로 자르면 된다. 밥하고 같이 먹으면 바삭바삭 과자 같은 고소함이 입안 가득 퍼진다. 과장 없이 놀라운 맛. 장고항의 바다 향이 어느새 따라와 있다.
Travel Data
찾아가는 길 서해안 고속도로→송악IC→38번 국도를 타고 대산 방향으로 진행→석문방조제를 지나 615번 지방도로→5㎞ 정도 직진→장고항으로 우회전.
추천 별미집 용왕횟집, 고향나루 횟집 등을 비롯해 다수의 맛집이 있다. 미식가라면 우렁이 박사는 꼭 들러야 한다. 또 당진 시내의 장춘 닭개장도 유명하다. 장어구이를 먹고 싶다면 옛날돌집장어구이, 원조장어구이를 찾으면 된다.
주변 여행지 삽교천도 좋지만 당진 시내 탐험을 해보자. 봄철 당진 장날(5일, 10일)의 장터 풍경이 정겹다.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를 실컷 들을 수 있는 색다른 여행 체험이다. 충남에서는 1위를 차지한 명품 쌀에 쑥이 어우러진 왕쑥송편, 기름을 바르지 않은 호떡을 사들고 남산 건강공원으로 가보자. 산이라기보다는 마치 구릉 같다. 그래도 당진 시내가 한눈에 조망되어 눈앞이 시원하다. 봄철에는 꽃 천국이다. 왕벚꽃이 만발한 봄은 화려함의 극치를 달린다. 당진향교(충청남도기념물 제140호), 의인, 역대 현감, 군수 등의 선덕비, 공적비, 기념비 등 비석문화재 21점의 유적도 있다.
설악산은 사계절 만년설이 있는 산도 아닌데 이름은 ‘설악(雪岳)’이다. 국내에 산은 많아도 이렇게 ‘설자(雪字)’가 붙은 산은 유일하다. 대청(大靑), 공룡능선(恐龍稜線), 용아장성(龍牙長城), 천불동(千佛洞 ) 등 멋진 이름들이 있다. 누가 언제 이토록 멋진 이름들을 붙였을까. 그저 감탄할 뿐이다.
설악산 능선 중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공룡능선으로 향한다. 용대리에서 백담사까지 이어지는 포장도로의 백담사에서 출발해 중청대피소에서 1박한 다음 이튿날 공룡능선을 일주한 뒤 소공원으로 하산하기로 했다.
백담사 경내는 스님들의 동안거로 쥐죽은 듯 고요했다. 오전 11시, 일행은 백담사 마당을 말없이 한 바퀴 돈 뒤 봉정암으로 향했다. 오늘의 목적지는 중청대피소. 백담사에서 중청대피소까지는 약 12km. 해가 지기 전까지 그곳에 도착하는 것이 임무다.
기자는 1년 전 무더웠던 여름날 소공원을 기점으로 공룡능선 일주를 한 적은 있지만 눈 쌓인 공룡능선을 오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서 더욱 기대가 됐고 그만큼 불안했다.
백담사에서 봉정암까지는 약 10km. 오후 3시 봉정암에 도착했다. 백담사에서 영시암을 거쳐 봉정암까지는 불자들 사이에서 유명한 성지순례길이다. 걷다 보면 스페인의 산티아고 트레일에 버금가는 지극한 성정(性情)과 마주할 수 있다. 봉정암으로 이어지는 돌너덜 된비알을 오르는 길에 문득 숙연해졌다. 머리 허옇게 새고 허리는 활처럼 굽은 보살들의 간절한 마음을 떠올리며 지금 이 세상의 고통, 나와 우리의 아픔을 위해 기도했다. 아직까지 절 인심이 살아 있는 까닭에 밥때가 훌쩍 지난 시간이었음에도 일행은 미역국에 밥을 말아 공양했다. 자판기 커피도 무료로 제공하고 있어 불자가 아닌 등산객들도 오며가며 두루 신세를 지는 산방(山房)이 바로 이곳 봉정암이다.
봉정암에서 소청을 지나 중청대피소까지는 1.7km. 소청대피소에서 바라본 설악의 전경은 여전히 할 말을 잃게 했다. 공룡능선을 중심으로 용아장성, 천화대, 울산바위가 비경을 선사했다. 그리고 저 멀리서 멈춘 듯 흐르는 동해의 푸른 물빛.
중청대피소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5시였다. 배낭을 풀고 요깃거리를 챙겨 취사장으로 내려가니 어느덧 해가 다 저물어 있다.
다음 날 아침 7시, 중청대피소에서 빈 몸으로 대청까지 올라갔지만 안타깝게도 일출의 찰나는 잡을 수 없었다. 켜켜이 밀려 있던 안개와 구름이 걷히니 어느새 여명이 온 세상을 데웠다. 흡사 냉동고에 들어 있던 고기처럼 얼어붙은 대청의 비석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서둘러 희운각대피소로 향했다. 그곳에서 아침식사를 할 계획이었다. 스패츠와 아이젠을 차고 새하얀 눈을 저벅저벅 밟으며 길을 냈다. 중청대피소에서 희운각대피소까지는 2.1km. 경사가 제법 있는 내리막이라 특히 더 조심해야 했다. 희운각대피소에 도착했을 때는 9시 30분. 여전히 우리뿐인 취사장에서 라면을 끓여 먹었다.
1년 전 여름의 내 기억 속 공룡능선은 도통 그 거리가 줄어들지 않았다. 능선상 거리는 5km에 불과하지만 신선대, 1275봉, 큰새봉, 나한봉 등 1000m 이상의 봉우리를 오르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과연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눈길이라 걸음에 속도가 붙질 않았다. 일행은 말없이 이동했다. 무너미고개를 넘자 바람은 더 차고 거세졌다. 신선대 위에 서니 천화대 일원이 장관이다. 장군봉, 유선대, 범봉, 세존봉, 마등령이 한 줄로 이어졌다. 그리고 뒤돌아 우리가 올랐던 대청, 중청, 소청 능선을 바라봤다. 저 멀리 외따로 떨어져 솟은 귀때기청봉이 아련하다. 대청 아래로 흐르다가 지금은 하얗게 얼어붙은 죽음의 계곡에 시선이 멈췄다. 우리가 아침에 지났던 희운각대피소와 관련이 있다. 1969년 2월 14일 한국산악회 소속 제1기 에베레스트 원정대가 히말라야 원정을 위해 죽음의 계곡(옛 지명 반내피)에서 등반 훈련 중 눈사태를 당해 전원 10명이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현재 위치에 지어졌다. 대피소 이름이 ‘희운각’인 이유는 희운(喜雲) 최태묵 선생이 ‘이 자리에 산장이 있다면 이러한 사고를 미연에 막을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본인의 사재를 들여 지었기 때문이다.
희운각대피소에서 200m 떨어져 있는 곳에 솟은 무너미고개는 공룡능선의 관문과 같다. 전신재 저 에 따르면 무너미고개는 가야동계곡과 천불동계곡, 그러니까 내설악과 외설악의 분기점인 곳이다. 이름 그대로 물이 넘는 고개[水踰峴]. 물이 전에는 외설악으로 넘어갔는데 지금은 내설악으로 넘어간다고 한다. 무너미에 관한 또 다른 설은 ‘산 너머’의 고어(古語)라는 추측이다. 순우리말로 뫼너머, 메너머, 무너머를 거쳐 무너미로 정착했다는 설. 공룡능선을 기준으로 내설악과 외설악이 갈라지므로 물 넘어, 산 너머 모두 설득력 있는 이야기로 들린다.
“오래전에는 누가 어디서 공룡능선 일주했다 하면 정말 대단하다는 소리 나왔어. 지금은 그 어려움과 명성이 그때 같지는 않지. 그래도 빡세긴 여전히 빡세!”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06년 국지성호우로 설악산에 산사태가 나면서 모든 등산로를 재정비했고, 그 결과 공룡능선에도 난간이나 밧줄 등이 설치돼 산행이 훨씬 수월해진 덕이다.
가까스로 도착한 마등령 삼거리. 이곳에서 오세암을 거쳐 다시 백담사로 내려서는 길, 그리고 비선대를 거쳐 소공원으로 내려서는 길이 나뉘는데 오세암에 이르는 1.4km 구간은 산사태 발생 및 추가붕괴 위험을 이유로 올해 5월 15일까지 통제된다. 시간은 오후 3시, 소공원까지 남은 거리는 6.5km. 배낭 깊숙이 들어 있던 헤드랜턴을 꺼내 바람막이 주머니에 넣고 소공원을 향해 속도를 낸다.
새해 맞이하기 바쁜 세밑이다. 한해를 정리하면서 가까이서 새해일출을 즐기는 방안을 찾는다.
준비물을 철저히 챙겨야
북한산ㆍ도봉산ㆍ관악산 등 평소에 쉽게 다니는 등산 코스도 준비물을 철저히 챙겨야 한다. 햇볕 없는 겨울 산 속은 상상을 뛰어넘게 춥다. 에스키모처럼 중무장이 필요하다. 방한모ㆍ목도리는 필수품이다. 특히 방수가 잘된 신발을 신어야 한다. 눈이나 비가 오지 않는 날이더라도 아이젠이 꼭 챙겨야 한다. 겨울철에는 항상 미끄러운 얼음이 있기 마련이다.
일출 전 산 속은 엄청 어둡다. 랜턴 준비를 잊어서는 안 된다. 배터리는 새
로 교체하고 여벌도 꼭 챙기기 바란다. 남이 비추는 불빛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불빛은 흔들리기 때문에 오히려 사고의 원인이 될 수 있다. 따뜻한 물과 비상식량도 꼭 준비하여야 한다.
서울 근교 산 새해일출
서울 근교 산의 새해일출은 아침 7시 40분경에 완성된다. 평상시 주간등반보다 야간등반 시간이 더 많이 소요되므로 충분히 고려하여야 낭패를 보지 않는다. 손전등을 안내삼아 산행을 하여야 한다. 남산이나 정동진 등 일출명승지 못지않게 평소보다 등산객이 훨씬 많다. 앞 사람 궁둥이만 보고 걷고 또 걸어야 한다. 등산로를 따라 오르는 모습이 일개미들의 행진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둠 속에서 좌우로 흔들리는 손전등 불빛이 여름철 반딧불 같기도 한다.
먼동이 터오기 시작하면 봄이나 여름에 보았던 산과 전혀 다른 모습이 나타난다. 정상에는 발 디딜 틈 없다. 자리를 잡고 동쪽 하늘을 쳐다보면서 추위를 달래야한다. 따뜻한 물 한 모금 마실 여유가 없고, 발이 시려 제자리 뛰기를 하여야 한다. 바로 옆 사람과 품앗이로 사진 한 장 겨우 찍을 수 있다. 저 멀리 옅은 구름이 붉게 타오르기 시작하면 눈을 지긋하게 감고 무언가를 갈구할 것이다.
서울에서 50년 넘게 살면서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 서을 근교 산을 자주 오르고 있다. 봄철의 연두색은 새 색시처럼 포근하다. 여름날에는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키도록 시원한 그늘로 가슴을 연다. 붉은 단풍으로 물든 가을은 가슴을 뛰게 한다. 순백의 겨울은 아름다움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사는 것 같다. 서울 근교 산은 어느 곳보다 뛰어난 새해일출 명승지다.
둘레길 새해일출 명소
등반시간 맞추기 어려우면 둘레길 수준의 일출명소를 찾으면 된다. 남산이 대표적인 명소다. 지하철역에서 접근하기 쉽고 거리가 길지 않아 새해일출 보기에 딱 좋은 곳이다. 하지만 지하철 출퇴근 때처럼 사람에 밀려다니는 북새통이 문제다. 좀 일찍 서둘러야 사진 한 장 남길 수 있다.
인왕산, 서대문 안산, 아차산, 강동구 일자산 등 우리 주위에 새해일출 명소가 많다. 시간 여유를 가지고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먼 거리 여행도 좋고 이름 없는 호젓한 바닷가도 좋다. 아니면 자기 집 옥상에서라도 새해일출을 맞보기 바란다. 새해일출! 내 손 안에 있소이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유치환의 ‘그리움’)
늦가을 철 지난 동해 바닷가를 서성댑니다. 불쑥불쑥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태풍으로 인해, 엄밀히 말하면 주로 일본과 대만 등을 덮치는 태풍의 여파로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모든 것을 삼켜버릴 듯 달려드는 파도를 보면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라는 구절을 읊조리게 됩니다.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나더러 어쩌란 말이냐고 소리쳐봅니다. 그런데 시인의 말은 다릅니다. 시인은 뭍 같은 임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라고 장탄식을 했지만, 사실 뭍은, 심지어 잡채만 한 바위는 꿈쩍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그리움을 농축하고 농축해서 만든 꽃다발을 안고 온몸을 열어 으르렁대며 달려드는 파도를 환영합니다. 저 멀리 수평선으로부터 달려와 포말을 일으켰다가 사라지곤 하는 파도를 향해 보랏빛 미소를 건넵니다.
보랏빛 미소의 주인공은 바로 ‘바다 국화’라는 이름을 가진 해국(海菊)입니다. 해국은 거센 바닷바람에 날려 온 한 줌 모래흙이 전부인 바위 틈새에 뿌리를 내리고 삽니다. 사시사철 그늘 한 점 없는 땡볕에서 온몸을 드러내놓고 살다가 늦가을이면 어김없이 연한 보라색 꽃을 피웁니다. 꽃송이는 가지 끝에 하나씩 달리며 지름 3.5~4cm로 제법 큽니다. 대부분 연보라색 꽃이지만 가끔 순백의 꽃송이도 눈에 띕니다. 척박한 환경에서 자라서인지 높이 30~60cm로 자라는 줄기와 그 끝에 달려 있는 잎은 겨울에도 죽지 않습니다. 줄기는 해가 갈수록 굵어지며 심지어 나무처럼 단단해집니다. 겨울에도 잎과 줄기는 반상록 상태를 유지할 뿐 아니라, 제주도 해안가에서는 늦가을 핀 꽃이 그대로 달려 있기도 하고, 더러는 새로 피기도 합니다. 놀라운 생명력입니다.
그런데 이런 해국이 세계적으로 한국과 일본에만 분포합니다. 당연히 어느 해국이 원종(原種)인지 궁금해집니다. 영남대 생명과학과 박선주 교수는 해국을 비롯해 독도에서 자라는 식물의 고향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그 연구결과의 하나로 2010년 세계유전자은행에 독도 해국의 염기서열을 등록시켜 독도의 자생식물로 국제적 공인을 받았습니다. 박 교수는 “우리나라에서는 독도와 울릉도는 물론 제주도를 비롯해 동·서·남해안 전역에서 해국이 자라고 있으나, 일본의 경우 일본 서해(우리나라로 보면 동해) 지역에만 분포한다”라고 설명합니다. 또 해국의 분포도 및 개체 수 등으로 미뤄볼 때 한국의 해국이 원종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합니다. 박 교수는 조만간 우리나라 여러 지역의 해국과 일본 해국의 유전자 집단 분석 등을 통해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답을 찾아낼 예정이라고 합니다.
Where is it?
동·서·남해안을 비롯해 제주도·울릉도·독도까지 전국의 해안가가 자생지다. 그러나 강화도나 영종도 등 인천 인근 서해 바닷가에서는 보기 어렵다. 서해안에서는 적어도 영흥도나 안면도까지 내려가야 한다. 야생화 동호인들이 해국을 보기 위해 즐겨 찾는 곳은 일출로 유명한 추암 해변인데, 강원도 동해시 북평동 추암해수욕장으로 가면 된다. 길게 뻗은 모래밭을 따라가다 보면 바위틈에 핀 해국을 만날 수 있다. 특히 촛대바위를 바라보는 바위들 사이에 절묘하게 핀 해국(사진-1)은 감탄사를 자아낼 만큼 아름답다. 제주도 전역 및 마라도 개쑥부쟁이 군락 사이에 드문드문 핀 해국(사진-2)도 인상적이다.
강원 속초시 하면 누구나 바다와 산을 떠올린다. 그러나 필자는 속초시에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이 조용한 호수다. 그곳에 나의 작은 아지트가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무작정 속초시로 여행 가서 영랑호를 찾았었다. 천천히 한적한 호숫가를 걷는데 예쁜 집 두 채가 눈에 들어왔다. 짙은 회색 지붕의 모던하면서 아담한 집 두 채가 나란히 호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냥 가정집인 줄 알고 집을 구경하는데 의외로 1층에 커피숍이 있었다. 손님이 1명도 없는 한적한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며 수수하고 사람 좋게 생긴 주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바로 옆 비슷한 집 한 채는 게스트하우스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근처에 커피숍이나 다른 숙소도 전혀 없었고, 집 자체가 상업적인 장소라는 느낌도 전혀 없어 게스트하우스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래, 바로 여기야 !
집주인 부부는 캐나다에 이민했었는데 속초시에 놀러 왔다가 영랑호에 반해서 정착하게 되었단다. 젊은 집주인 부부에게 집 구경을 부탁하였더니 처음 본 낯선 손님에게 흔쾌히 여기저기 구석구석 설명해주고 안내해 주었다.
집 한 채는 아내가 1층에서 직접 커피를 볶고 내리는 과정을 모두 홀로 하고 그 옆의 집 한 채는 남편이 홀로 운영하고 관리했다. 이렇게 모든 걸 부부가 손수 해나가는 소박하고 아담한 게스트하우스였다. 집안은 주인이 화가여서 곳곳에 직접 그린 그림들이 걸려 있고 작은 소품 하나 마치 내 집 같은 편안함을 줬다.
방마다 호수 쪽으로 창이 나 있었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바로 3층 다락방. 하늘을 볼 수 있게 창을 내어 밤에 누우면 별을 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집 구경을 하는 내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래! 이제부터 이곳이 아지트야.
그 이후 필자는 시간 나는 대로 그곳을 찾았다. 어딘가 훌쩍 떠나고 싶을 때, 머리가 복잡할 때마다.
필자는 그곳에서 조용한 호숫가를 천천히 걷거나 때론 자전거로 호숫가를 한 바퀴 돌곤 했다. 아무것도 안 하고 방에서 창을 통해 호수 너머 지는 노을 보는 것도 좋았다. 새벽에 일어나면 작은 해변으로 가서 일출을 보며 아침 산책을 했다.
할 일 없이 다락방에서 뒹굴뒹굴할 때도 있다.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며 여주인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주인이 키우는 개를 쓰다듬으면서 책을 보기도 했다. 그렇게 그곳에서 지내다 보면 내 마음의 모든 독소가 다 빠져나가는 듯하다.
◇아지트를 잃을 위기
처음 그곳을 알게 되었을 때 만 해도 여행객은 거의 없고 간혹 산책하는 사람도 다 그 지역 사람뿐 이었다. 그랬던 곳이 갈 때마다 조금씩 복잡해지고 있다. 호수 주변에 카페도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고 해마다 한적한 호숫가 분위기가 사라져갔다. 조용한 아지트를 잃을 위기에 놓인 것이다. 필자로선 몹시 탐탁지 않은 변화다.
그러나 필자는 개의치 않고 그곳을 찾았다. 예약 같은 건 하지도 않는 채 말이다.
방이 없으면 커피숍에서 조용히 커피 한잔하고 호숫가를 산책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책을 읽고 호숫가를 바라보고 머물다 와도 괜찮았다. 실제로 몇 번은 예약하지 않고 무작정 갔다가 그냥 커피만 마시고 머물다 온 적도 몇 번 있다. 아직은 주말만 피한다면 여전히 유유자적 아지트가 되어 주는 곳이다.
오산중고 뒤편 운동장은 필자 세 자매의 아지트였다. 노을빛이 이루 말로 다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황홀하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필자는 서울 변두리의 용산구 보광동에서 태어나 스무 살까지 그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아름답고 행복한 추억들은 모두 다 보광동에 묻어 두게 되었는데, 그 보광동의 중심에 오산중고가 우뚝 서 있다. 오산중고에 오랜 세월 가보지 않아서 지금은 어떻게 변했는지 알 수 없지만 옛날에 필자가 어릴 때는 앞과 뒤에 모두 넓은 운동장이 있었다. 땅이 넓었기 때문에 온 동네의 행사란 행사는 모두 오산중고에서 하였다. 그리고 동네 아이들도 자전거 타기, 야구, 축구, 농구, 배구등 넓은 장소가 필요한 놀이는 모두들 오산중고등 운동장에 가서 했다. 그렇게 평일의 방과 후나 일요일에는 동네사람들의 차지가 되었다. 필자도 오산중고에서 많이 놀았다. 학교 뒤 운동장의 한강 쪽으로 끝자리는 낭떠러지이고, 그 아래는 강변북로, 그리고 그 너머가 한강이다. 그곳에는 아주 크고 오래된 나무가 하나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우리 세 자매의 아지트였다. 우리 형제들은 오산중고등학교 뒤편 운동장에 자주 가서, 그 나무아래에서 놀다오곤 하였다.
어린 시절, 그곳은 참으로 행복한 곳 이었다
큰언니와 필자는 띠 동갑이다. 터울은 많았어도 우리형제들은 어릴 때, 소박하면서도 행복한 시절을 보냈다. 큰언니는 그 때, 대학교 3학년이었고, 작은언니는 중학교 3학년이었으며, 필자는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이렇게 우리 세 자매는 모두 6살 터울이다. 작은언니와 필자 사이에는 3살 터울의 작은오빠가 있는데, 그때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그 시절에는 남자와 여자가 노는 스타일이 달라서 산책은 주로 자매들끼리만 가기 일쑤였다. 큰언니와 작은언니는 노래를 잘한다. 큰언니는 교회 성가대에서 소프라노 파트를 하고 있었고, 작은언니는 학교에서 대표로 뽑혀서 KBS방송국 출연도 한 적이 있을 정도로 노래를 특히, 잘했다. 두 언니들이 노래를 부르면 화음이 잘 맞고, 참 아름다웠다. 필자는 지독한 음치라서 듣기만 하는데도 얼마나 행복했던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정신 줄 놓고 듣곤 했다. 그리고 우리 큰언니는 동화구연을 참 잘했다. 그 당시에 교회에서 주최하는 동화구연대회에 나가서 상도 탔다. 우리는 셋이서 둘러앉아 큰언니가 들려주는 동화를 얼마나 재미있게 듣곤 했던지! 들어도 자꾸만 또 듣고싶고, 또 듣고싶고 그랬다. 그러고 보면 언니들이 재능이 참 많았다. 큰언니의 동화구연이 끝나 갈 때쯤이면, 하늘에는 저녁노을이 물들어 간다. 노을은 시간에 따라 빛이 다 다르다. 밝고 노오란 빛은 찬란하고, 시간이 점차 지나면 점점 붉게 물들어 가는 것이 어찌나 슬프도록 아름답던지! 우리 세 자매는 넋을 잃고 넘어가는 노을빛에 취해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저녁노을만 바라볼 뿐이다. 그 시간은 각자 상상의 날개를 펴는 시간이다. 필자도 저녁노을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린나이에도 동화 한편 뚝딱이다. 그렇게 공상과 환상 속에서 맘껏 날개를 펴고 날아다니는 시간이 한없이 행복했다. 노을이 지고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면 세 자매는 정신을 차려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흰 머리칼이 여기저기 생겨나고, 나이든 지금도 그 시절이 그립다.
지금도 언제 어디서나 저녁노을만 보면 취한다
필자는 집을 살 때 항상 따져 보는 것이 있다. 바로 집의 ‘향’이다. 모두들 남향을 선호하지만, 필자는 앞이 탁 트인 동남향을 선호한다. 앞이 탁 트인 동남향은 그 집에 살고 있는 동안은 밖에 나가지 않아도 편하게, 아름다운 일출과 저녁노을을 맘껏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살고 있는 집도, 집안 창가에 서서 저녁노을을 맘껏 즐길 수 있는 집이다.
지금도 언제 어디서든 저녁노을만 보면 필자는 정신을 못 차린다. 그 아름다움에 취해서 노을빛 속에 들어가 어릴 때와 마찬가지로 상상의 날개를 편 채, 접을 줄을 모른다. 아마 그 속에서 대하 장편소설도 넉근히 쓰고도 남을 것이다. 땅거미가 져야만 비로소 정신이 돌아오니 말이다. 어릴 적 아지트는 오산중고등학교였지만, 스무 살 보광동을 떠난 뒤로는, 언제 어디서든지 찬란한 저녁노을빛이 ‘나만의 아지트’가 되었다.
'관수세심(觀水洗心), 관화미심(觀花美心)' 즉, '물을 보면서 마음을 씻고, 꽃을 보면서 마음을 아름답게 하라.'는 세미원. 남한강과 북한강의 두 물줄기가 만나 하나의 물 머리가 되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 두 물 머리. 그 유유하게 흐르는
넓은 강줄기와 화사하게 피어난 연꽃들로 조화롭게 탄생된 물의 정원은 참으로 경이로 왔다.
월요일 아침, 필자는 말로만 듣던 세 미원을 향해 남편과 함께 길을 나섰다. 블로그 모임의 화려한 외출이었다. 오랜만에 설레는 경춘선 전철을 타고 호평 역이라는 곳에서 내려 합류를 했다. 처음 맞이하는 호평, 평내라는 도시는 완전한 신도시의 자리매김으로 신선한 호감이었다. 국도를 따라 양평 쪽으로 향해 달리는 길은 멋들어진 카페 촌과 먹거리와 맛 거리의 축제였고, 바람 속으로 달려가는 자전거를 탄 남녀의 합창은 낭만으로 가득 찬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일행은 양수리 시장이라고 커다랗게 써 있는 간판 앞을 지나 골목길로 들어섰다. 연꽃 잎으로 꼭꼭 쌓여진 영양찰밥과 각종의 먹거리로 가득한 시골 음식잔치의 진지상이라는 곳으로 갔다. 처음으로 맛보는 각양각색의 전통적 음식들은 필자 부부에게 대만족이었다. 남산만큼 부풀어 오른 무거운 배를 안고 곧바로 세미 원으로 향했다. 주위 사람들이 수시로 올려대는 사진 속의 연꽃 현장을 빨리 눈으로 맛보고 싶어서였다. 월요일의 한가로움에도 주차할 곳은 넉넉지가 않았다.
두 물 머리는 상수원 보호구역으로, 예전에는 상류에서 떠내려온 쓰레기로 가득한 곳이었다고 한다. 척박한 불모지, 수몰지역으로 버려진 하천부지를 개조하면서, 주민과 정부 환경단체가 각고의 노력 끝에 탄생시킨 별천지 같은 곳이었다. 주민들은 가장 먼저 두 물 머리에서 냄새나는 각종의 오물들을 수거하고 그곳에 수질정화 능력이 뛰어난 연꽃들을 심었다고 한다.
넓은 호수에는 연꽃과 수련, 창포를 심었다. 여기저기 6개의 연못을 만들었고, 그곳을 거쳐 흘러 들어가는 한강물은 자연히 정화가 되었다. 인체에 해로운 중금속이나 부유물질들을 거의 제거시켜 주었고, 그 후에는 깨끗하게 팔당댐으로 다시 흘러 들어가도록 재구성이 되었다고 한다. 인간이 수생식물을 이용한 수질개선으로 기막히게 만들어진 인공의 자연정화공원이 탄생된 것이다.
두 물 머리와 연꽃 가득한 세미 원을 이어주는 첫 번째 다리는 작은 배로 이어진 배다리였다. 출렁거리는 다리 위로 몸을 흔들어대는 젊은 남녀는 신기함에 웃음이 만발한다. 다리를 건너 곧바로 이어지는 흙 길에도 돌 빨래판들이 길게 나열되어 참으로 이색적이다. 눈에 들어오는 세미 원의 넓은 공원에는 수많은 새색시 같은 연꽃들이 고고한 자태로 관광객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불교의 상징이기도 한, 연꽃은 아무리 더러운 진흙탕 속에서도 오염에 물들지 않고, 청결하고 고귀하게 맑고 깨끗한 꽃을 피우는 특징이 있다. 이 꽃은 7월에 피어나서 무더운 8월이 되면 고개를 숙이는 한 여름의 꽃이라고도 한다. 연꽃들은 은은하게 뿜어내는 향기마저도 멀어지면 질수록 더욱 향기로워 그야말로 꽃 중의 꽃이라는 말도 있었다.
낮 동안에 활짝 꽃잎을 열었던 연꽃은 오후가 되면 수줍은 듯 살짝 잎을 오므린다. 분홍색 백색 의 꽃봉오리는 단아한 자태로 뭇 남성의 마음을 사로잡기도 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꽃말도 순결 또는 청아한 마음이라고 하는가 보다. 어떤 유혹에도 물들지 않고 구슬처럼 영롱하게 물방울을 잎에 맺히며, 그 향기로 찌든 중생들은 일상의 분주함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다.
세미 원을 탄생시킨, 두 물 머리의 일출과 일몰 광경은 사진 작가들에게 아주 유명하다고 했다. 북한강과 남한강의 절묘한 만남으로 이어져, 이른 아침에 피어나는 물 안개와 연인들의 사랑이 가득 담긴 사진촬영들은 그 진가를 더한다. 옛 영화의 스토리가 얽힌 나루터와 호젓하게 떠있는 황토 돛단배, 늘어진 수양버들의 정취는 강가 마을의 소박한 아름다움을 그대로 반영해 내고 있어, 지친 삶의 힐링 장소가 되기에 아주 충만한 시간이었다.
더럽고 쓸모없는, 냄새가 가득했던 곳을 인간의 노력으로 만들어낸 창조물은 참으로 위대한 탄생이었다. 많은 대중들에게 더러워진 마음을 물로 깨끗이 씻어내고, 혼탁한 세상에서 꽃을 바라보며 아름다움을 창출해주는 인간의 의지는 대단한 것이었다.
요즈음같이 정신없는 세상에 여유롭게 흐르는 두 물 머리의 강물처럼 넉넉하고, 세미 원의 연꽃과 같은 청아한 향기가 묻어나기를 기대해본다.
필자 부부는 보람찬 하루를 남겼다. 진정으로 힐링이 가득 넘치는 시간이었다.
시니어를 대상으로 ‘어디서 살 것인가’라는 주제로 강의할 때마다 제주에서 살고 싶은 사람을 조사해 본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제주에서 살고 싶다고 선뜻 대답하는 사람이 뜻밖에 적은데 놀란다. 그때마다 왜 제주에 가서 살기를 꺼리는지 그 이유를 물어본다.
맛난 음식도 매일 먹으면 물리는 것처럼 제주도 그곳에 살면 감동이 반감할 거라는 논리가 그 하나다. 그래서 가끔 여행하는 건 좋지만 가서 살기는 싫다는 것인데 충분히 이유가 되는 것 같다. 또 다른 사람들은 제주의 기후를 들었다. 겨울에 육지보다 따뜻한 건 좋은데 비와 바람이 많고 태풍이 올라오는 길목이라서 특히 서쪽과 남쪽은 살기 좋지 않다는 것이다.
제주가 중국 사람들의 세상으로 변해 가는 것 같고 외국인들의 범죄도 잦아 무서워서 가기 싫다는 사람들도 있다. 실제로 제주는 오래전부터 중국인들의 투자지로 주목받고 있다. 그들만의 거대한 게스트 하우스가 곳곳에 건설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최근 뉴스를 보니 지난해 제주에 무비자로 입국한 외국인이 60만 명을 넘었고 불법 체류자도 4,000명을 넘었다고 한다. 그 부작용으로 외국인들의 범죄도 상당히 잦다고 하니 이런 이유도 수긍이 간다. 그 외에 육지로 왕래하기 불편하다든가 의료시설이 부족하다는 등의 이유를 드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필자는 조금 다른 이유로 제주에서 사는 것을 꺼린다. 우선 그동안 서울에 살면서 형성해 놓은 인간관계를 오프라인으로 계속 유지하고 싶다. SNS가 일반화되었다고 하나 서로 대면하는 것과 비교할 수 없다. 대학교와 고등학교 동창들과의 모임은 예외로 하더라도 몇 군데 활동하는 포럼의 정기모임, 걷기 행사, 당구 모임, 저자 강연 등에서 만나는 시니어들과 막걸리 나누면서 사는 이야기 하는 것이 좋다. 갑자기 모이는 번개팅도 무료한 일상에서 특별한 활력을 준다. 지하철이 편리한 교대 앞 곱창집이나 사당동 보쌈집이 번개팅 장소로 좋다.
강의 요청을 받을 때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설렘으로 기다려진다. 강의 후에 몇몇 분들과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고 교류한다. 때로는 그들로부터 새로운 강의 요청을 받기도 한다.
그림이 보고 싶으면 지하철 타고 인사동으로 간다. 갤러리를 돌고 나서 북촌에서 초등학교 친구를 만나서 소주 한잔한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영화를 골라 볼 수 있고, 공연티켓을 가끔 선물 받을 때는 정장을 입고 아내와 예술의전당을 찾는다.
봄에는 어린이대공원 벚꽃 비를 맞는다. 여름에는 도봉산 계곡에 앉아 작은 물고기들을 보면서 새소리, 바람소리를 듣는다. 가을에는 낙엽이 흩날리는 창덕궁을 걷는다.
서울에서 이런 일상의 재미를 누리고 살다가 성산포의 일출과 외돌개 쪽빛 파도에 반사되던 보석 같은 햇살, 용눈이 오름을 뒤덮은 억새와 바람, 곶자왈의 검은 바위와 원시림의 습한 향기, 김대건순례길에서의 묵상 등이 지독히 그리운 어느 날 제주행 항공기에 몸을 싣고 싶다. 그 가슴 벅찬 설렘을 위해 제주는 마음 속에 남겨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