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속 순간을 매일 기록하는 것이 일기라면, 자서전은 한 인간의 인생이 담긴 삶의 기록이다.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는 말처럼 명예로운 일을 한 위인들만 자서전을 쓸 수 있는 걸까?
그것은 아니다! 인생의 막바지에 이르러 지나간 시절의 행복을 떠올리면서, 삶을 되돌아보고 성찰의 시간을 갖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자서전을 통해 마음을 다독이는 동시에 다음 세대와 건강한 소통을 할 수 있다면 그것만큼 멋진 마무리가 있을까? 자서전은 아름다운 종착을 위한 멋진 선택일지도 모른다.
자서전 쓰기 전 준비사항에 대해 알아보자!
공책과 메모
눈 밖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 무수한 연습만이 실전에서 살아남는다. 글감이 없다면 책상에 앉아도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생각나는 사건과 떠오르는 감정을 놓치지 않도록 틈날 때마다 공책에 메모하자.
주제와 시기별로 나눠라
평소에 글쓰기를 많이 하지 않았다면 막막할 것이다. 이를 위해 각자 살아온 인생을 10대, 20대, 30대 등 시기별로 있었던 일을 정리하거나, ‘어머니’, ‘가족과 얽힌 음식’, 등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주제를 찾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자.
말하듯이 써라
일단 정리는 했는데 쓰려고 하니 마음이 심란하고 도무지 감이 안 잡힌다. 그럴 때는 부담감을 버리고 평소 손주나 친구, 배우자와 대화하듯이 말하면서 써보자! 진짜로 그들을 옆에 앉혀놓고 서로 대화하면서 쓰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앞길이 구만리인 청년 세대의 화두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고 할 수 있지만, 인생의 종착점이 다가온 시니어의 화두는 ‘어떻게 남길 것인가?’다.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유·무형 자산에 해당하는 증여와 자서전에 대해 살펴본다.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중소기업의 사장이 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결국 성공한 사업가로 거듭난 김증여 씨. 최근에는 손주 돌보는 재미에 푹 빠져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살고 있다. 귀여운 손주를 위해서 무엇이든 해주고 싶은 마음에 재산을 증여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른바 세대 생략 증여를 결심했다. 세대 생략 증여는 절세 효과도 뛰어나다고 하는데, 정말일까?
국내 자산가들은 자산 이전에 관심이 많다. 지난해 KB경영연구소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자산의 증여와 상속으로 자산을 이전하겠다고 응답한 비율이 63.6%였다. 과반수가 동의하고 있었다. 이러한 원인은 그들도 윗세대로부터 받은 재산으로 부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증여와 상속은 부의 원천 중 하나였다. 실제로 50억 원 이상 부자의 23.7%는 상속과 증여를 부의 원천으로 꼽기도 했다.
다만 상속의 대상이 점차 변하고 있다. KB경영연구소의 ‘2020 한국 부자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상속 및 증여 1순위 대상은 자녀였다. 이는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10년 전과 비교해서 주목할 만한 변화가 생겼다. 2011년까지만 해도 손주는 상속과 증여 비중에서 9.2%에 불과했는데, 2020년 기준 약 3배 이상 증가하며 31.8%를 기록했다. 특히 50억 원 이상 부자의 경우 10년 전과 비교하여 상속과 증여 대상에서 자녀 비중이 6.3% 감소했으나, 손주의 비중은 23.8% 증가했다.
KB경영연구소 관계자는 “여전히 자녀의 비중이 높지만, 손주의 비중이 갈수록 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원인이 있겠지만 세대 생략 증여의 절세 효과도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친 것 같다”라고 말했다.
최근 자녀 세대를 건너뛰고 미성년 손주에게 재산을 증여하는 세대 생략 증여도 늘고 있다. 지난해 고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세청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조부모에서 미성년자 손주에게 증여된 재산 총액은 2015년 3054억 원에서 2018년 7117억 원으로 3년 만에 133% 급증했다. 1건당 평균 증여액도 1억5693만 원에서 1억7886만 원으로 늘었다. 특히 부동산을 통한 손주 증여액은 2015년 1296억 원에서 2018년 3653억 원으로 182%나 뛰었다. 실제로 지난해 국세청에서 발표한 통계 자료에 따르면 직계존비속 증여 재산 가액이 30조 원을 넘어서기도 했다.
세대 생략 증여로 절세
증여세의 세율은 금액에 따라 5단계 구조로 나뉜다. 해당 구간의 초과 금액만큼 최소 10%에서 최대 50%까지 세율이 매겨진다. 예를 들어 1억 원의 경우에는 10%에 해당하는 1000만 원을 증여세로 내면 된다. 하지만 3억 원이라면 계산이 달라진다. 1억 원일 경우 내야 하는 1000만 원과 더불어 1억 원을 초과하는 금액인 2억 원의 20%에 해당하는 4000만 원을 합해 총 5000만 원을 증여세로 낸다.
세대 생략 증여는 최소 30%에서 최대 40%까지 가산된다. 법규상 손주에게 증여할 경우 기본적으로 30%가 가산된다. 미성년 손주에게 20억 원을 초과하는 재산을 증여할 경우 40%를 가산한다. 다만 아들이 사망한 후 손주에게 증여하는 경우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세대 생략 증여의 절세 효과는 아예 없는 걸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순차적으로 증여를 한다고 가정하면 조부모는 자녀에게 한 번, 자녀는 손주에게 한 번 해서 총 두 번의 세금을 낸다. 반면 세대 생략 증여는 손주에게 증여하면서 세금을 한 번만 내면 된다. 예를 들어 조부모가 1억 원의 재산을 자녀에게 증여하면 10%의 증여세를 내고, 자녀가 그 재산을 손주에게 물려주면 다시 10% 증여세를 내야 하는데, 이렇게 되면 총 20%에 해당하는 2000만 원의 증여세를 내는 것이다. 반면 조부모가 손주에게 1억 원을 증여하면 할증 과세로 30%가 붙더라도 총 1300만 원의 증여세만 내면 되기 때문에 확실히 절세 효과가 있다.
또한 세대 생략 증여는 상속세를 줄인다. 상속세는 사망 당시 남긴 재산의 가액에 따라 세금이 결정된다. 상속세를 줄이기 위해서는 미리 증여를 통해 사망 후 남길 재산을 줄이는 것이 낫다. 다만 법에서 상속개시일 전 10년 이내에 상속인에게 증여한 재산 가액이 있거나 5년 이내에 상속인이 아닌 자에게 증여한 재산 가액이 있는 경우에는 과세 가액에 가산하는 규정을 두고 있다. 결국 자녀에게 증여할 경우 피상속인이 10년 이상 살아야 가산을 피할 수 있고, 손주에게 증여하는 경우는 5년 이상 살아야 과세 가액에서 배제된다. 황혜린 NH투자증권 세무사는 “세대 생략 증여는 할증 과세를 내야 하지만, 상속세를 줄이는 데는 효과적이다”라고 말했다.
시니어는 자서전을 남긴다
영화 ‘원더풀 라이프’에서 주인공은 천국의 중간역 ‘림보’에서 일하는 PD다. 그의 역할은 천국으로 가기 전 각자가 가진 소중한 기억을 선택하게 도와주고, 이를 영화로 만들어 보여주는 것이다. 첫사랑과의 만남, 디즈니랜드에 처음 간 일, 어린 시절 오빠 앞에서 춤을 멋지게 춘 일 등 각자가 추억하는 삶의 명장면이 달랐다. 물론 택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영화에서는 영상으로 표현했지만, 이를 글로 표현하면 무엇일까? 바로 자서전이다. 자서전은 살아온 시간 중 삶의 순간을 선택하고 조립하여 만든 결과물이다.
일상 속 순간을 매일 기록하는 것이 일기라면, 자서전은 한 인간의 인생이 고스란히 담긴 삶의 기록이다. 현시대에 유행처럼 일어난 현상도 아니다. 역사적으로 자서전에 대한 갈망은 과거에도 꾸준히 있었다. 서양에서 이러한 일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는데, 대표적인 예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이나 몽테뉴 백작의 ‘수상록’ 등이 있다.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는 말처럼 명예로운 일을 한 위인들만 자서전을 쓸 수 있는 걸까? 그것은 아니다. 인생의 막바지에 이르러 지나간 시절의 행복을 떠올리면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성찰의 시간을 갖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특히 글쓰기는 다른 것에 비해 준비물이 간소하다. 펜과 그 펜을 쥘 힘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다만 지난 시절의 추억과 생각을 정리하는 동시에 알맞은 단어와 문장으로 편집해서 그럴듯한 글로 만들기까지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하기에 큰 각오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시니어들은 어떤 마음으로 자서전을 쓰고 있을까? 지난해 코로나19가 불어닥친 악조건 속에서도 서대문구청이 진행한 ‘행복 타임머신’ 사업에 참여하여 자서전을 쓴 시니어들이 있었다. 올해 4년 차에 접어든 해당 과정은 대학생과 함께 자서전을 써나가는 수업인 동시에 시니어에게는 학교나 다름없었다.
아름다운 종착을 위한 선택
코로나19 이전에는 함께 교외로 나들이를 나가고, 대학교 내의 구내식당을 이용하는 등 대학생과 비슷한 생활을 했다. 실제로 참여했던 분 중에 주위 지인에게 자신을 대학생이라고 소개하는 분도 있었다고 한다. 수업을 통해 글쓰기 이론을 배우며 실제로 써보기도 하고, 자신의 글을 남 앞에서 발표하는 시간도 가졌다. 저마다의 고달픈 사연으로 인해 발표 시간은 늘 울음바다였다고 한다. 그렇게 대학생과 함께 적어나간 삶의 얘기들은 ‘안산자락에 살으리랏다’라는 제목을 달고 한 권의 책으로 탄생했다.
그들은 어떤 마음으로 이 수업에 참여했고, 수업은 그들을 어떻게 변화시켰을까? 참여 동기는 대부분 비슷했다. 삶의 순간을 정리하고 기록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실행에 옮기기 쉽지 않았던 차에 주위의 권유와 안내 책자를 보고 호기심에 도전한 것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자서전 쓰기는 그들의 인생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수업 이후 그들에게 새로운 삶의 이정표가 생겼다. 수업에 참여한 이상각(75) 씨는 “가끔 수업에서 시 낭송을 했는데, 그 시간이 되면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이었다”라고 말하며 “자서전 쓰기는 마음가짐을 정돈하는 동시에 나의 소중함을 알려줬다”라고 밝혔다. 엄신자(78) 씨는 “자서전 수업을 통해서 낭비와 후회가 없는 삶을 살고 싶어졌다”라고 밝히며 “글쓰기에 관심이 생겨서 틈틈이 글을 적고 있는데, 나중에 이를 바탕으로 산문집을 한 권 내고 싶다”라고 말했다.
자서전 쓰기 수업을 진행한 이성림 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 명예교수는 “자서전은 이제껏 살아온 나날을 정리하는 동시에 내 삶의 정체성을 기록하는 일이다”라고 설명했다. 덧붙여 “자서전 쓰기는 결과물을 만드는 과정인 동시에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상처와 아픔을 마주하는 일이다. 실제로 수업에 참여하신 분들은 같은 시대를 살아온 만큼 각자의 얘기에 공감하고, 서로를 다독였다”라고 말했다.
최종적으로 자서전은 후손에게 전하고 싶은 삶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자서전 수업에 참여한 김옥원(85) 씨는 “내 삶을 비추는 거울과 같은 자서전이 훗날 손주들의 삶에 보탬이 되는 밀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썼다”라고 말했다. 또한 지난해 쓴 자서전에 내용을 덧붙여 USB 형태로 손주에게 물려줄 계획이라고 밝혔다.
임순철 한국기록연구소 대표는 “자서전은 책이 아니라 살아온 이야기다”라고 말하며 “노인들은 자서전을 통해 이야기를 건네면서 자기위로를 할 수 있고, 새로운 세대에게는 그들을 이해하는 미디어다”라고 설명했다. 자서전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다독이는 동시에 다음 세대와 건강한 소통을 할 수 있다면 그것만큼 멋진 마무리가 있을까? 자서전은 아름다운 종착을 위한 멋진 선택일지도 모른다.
마당에 널어둔 육쪽마늘 씨알이 참 굵다. 주말 내내 마늘을 캤으니 온몸은 쑤시고, 흘린 땀으로 눈은 따가워도 수확의 기쁨이 모든 것을 이겨낸다. 이틀간 내 손같이 쓰던 ‘마늘 창’을 놓으니 가뿐하면서도 무언가 허전하다. ‘마늘 창’이란 모종삽보다 조금 큰 손잡이에 쇠스랑보다는 작은 창살이 두 개 혹은 세 개 달린 농기구다. 꼭 50년 전 이즈음, 마흔이 되기 전의 젊은 부모님과 마늘이며 감자를 캘 때에는 없던 녀석이다. 하얗고 통통한 마늘에 앳된 소년의 얼굴이 오버랩된다.
시골 소년답지 않게 뽀얀 피부의 소년이 삽과 호미로 열심히 마늘을 캐고 있었다. 수업료와 육성회비를 내지 못해서 조례시간에 담임에게 호명이 되었다. 급우들 형편이야 다들 비슷한 처지였건만, 이번 분기에는 어찌 다들 납부하고 몇 명만 미납이었다. 마늘을 캐서 팔아야 수업료를 낼 수 있다는 아버지의 말씀에 소년은 기말고사를 앞둔 시점에도 마늘 캐기에 열심이었다.
상고에 진학해서 농협 직원이 되어 가계에 보탬이 되라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었다. 맏이는 대학에 진학해야 한다는 것은 어머니의 주장이었다. 평소 남편 의견에 무조건 순종하던 어머니는 맏이의 대학 진학과 관련해서는 요지부동이었다. 어머니가 자기주장을 그토록 강하게 하신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마지막이자 두 번째는 여동생을 대학에 보낼 때였다. 인근 조선소에서 깡깡이(녹슨 배에 페인트칠을 하기 전에 망치로 녹을 떼어내는 작업)를 하고, 쉬는 날에는 농사를 지으며 손톱이 빠지도록 일한 어머니의 교육열은 아버지도 말릴 수 없었다. 하루 종일 망치로 녹을 떼어내는 일을 하고 돌아온 어머니의 덜덜 떨리는 손을 보면서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에 있는 대학교로 진학한 뒤에는 모든 것을 내가 결정해야 했다. 학비와 생활비를 위해 과외 교사와 학원 강사를 병행해야 했다. 시골에서 올라온 가난한 유학생의 처지는 다 비슷했으리라. 대학생활 내내 과외와 학원 강사를, 그리고 운 좋게도 졸업 전에 취업해서 월급을 받았지만 늘 지난한 삶이었다. 농사로는 가족 건사가 힘들어 고속도로 건설 현장에서 일하시던 아버지는 사고로 몸져누웠고, 어머니는 아버지 병간호와 7남매를 혼자서 건사할 수 없었다. 첫 월급은 23만 원, 생활비를 제외하고는 모두 아버지 병원비와 동생들 학비를 위해 집으로 송금했다.
36개월 군대를 마치고, 복학해서 재학 중 취업하고 1년간 직장생활과 학업을 병행한 뒤에 졸업장을 딸 수 있었다. 입학식에는 와보지 못했던 가족들이 졸업식에는 모두 상경해 함께했다. 거리 사진사에게 2000원인가 2500원인가를 주고 찍었던 가족사진은 아직도 우리 집 거실에 걸려 있다. 사진 속에서 어머니는 참 환하게 웃으며 학사모를 쓰셨다. 어머니에겐 그게 고된 삶의 보상이었으리라.
뒤돌아보지 않고 열심히 사는 게 삶의 우선순위였다. 사업에 실패하고 술독에 빠져 살다가 겨우 정신 차리고 고속도로 건설 현장에서 일을 시작했지만 사고를 당했던 아버지처럼 되기는 싫었다. 손으로 밤낮없이 바닷물에 녹슨 페인트 덩어리들을 쳐대는 노동으로 남자보다 거친 손을 한 어머니. 어머니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막냇동생이 대학에 입학하던 1986년, 동생 등록금을 납부해주면서 항상 어깨를 짓누르던 장남의 책임에서 조금 가벼워졌다. 동생들도 졸업하고 취업해서 자리를 잡고 있었고, 아버지는 농사를 지을 수 있을 만큼 회복되었고 어머니도 드디어 깡깡이를 그만둘 수 있었다.
장남 대신, 이제는 한 여자의 남편, 그리고 두 아이의 아빠라는 책임이 더 깊어졌다. 부서 경리로 일하던 아내와 사내 커플로 만나서 결혼했다. 회사 비품 하나도 살뜰히 아끼고, 부서 살림을 맵짜게 운영하던 모습에 반했다. 연애는 짧았어도 이 여자가 내 일생의 반려자다 싶었다. 연년생 두 아이를 키우면서 결혼 후에도 회사를 그만두지 않고 억척스레 일했다. 아내에게서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다.
1986년부터 1988년은 내 인생의 첫 번째 전성기였다. 아시안게임부터 올림픽까지 내가 일하던 회사에서 참여했고, 참여 팀의 주요 팀원 중 하나였다. 건국 이래, 아니 단군 이래 가장 큰 행사가 내 손을 거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영광인가. 밤낮없이 일했고, 주말도 잊은 채 일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미련한 일이었다. 또한 아내에게 너무나 미안한 일이었다. 두 아이의 육아를 아내에게 맡긴 채 회사 일에만 몰두했으니, 그래서 지금은 항상 아내에게 봉사하는 마음으로 산다.
회사 일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아내의 희생 덕분이긴 했지만, 두 아이가 잘 자라고 있었고, 생애 처음으로 ‘내 집’, 아니 ‘우리 집’이 생겼다. 서울 외곽의 작은 주택이었지만 사글세도 전세도 아닌 ‘우리 집’이었다. 아이들이 벽에 낙서를 해도, 대문을 꽝 닫아도, 마당에 오줌을 싸도 한소리 듣지 않았다. 우리 집에서는 라면만 먹어도 배부를 것 같다며 아내 눈에 눈물이 글썽였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아침엔 영어학원, 저녁엔 중국어학원에 등록했다. 30대 후반에 접어드는 나이라도 시대의 흐름에 뒤처질 수는 없었다. 특히 외국과 일하는 것이 많은 업무 특성상 영어는 기본이고, 점점 발전하고 있는 중국을 무시할 수 없었다. 아직은 미수교국이지만 조만간 중국과 국교가 수립될 거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1992년 중국과 국교가 수립되자마자 회사에서는 중국 지사 설립과 중국 공장 설립을 위해서 미리 준비하고 있던 팀을 중국에 파견했다. 팀장이 되어서 중국에 첫발을 내딛었다. 장기출장 가방을 싸주며 근심이 가득하던 아내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공산국가, 적대국의 이미지가 강했던 중국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리라. 지사가 설립되고 3년 뒤에 중국에 온 아내는 생각과 달리 많이 발전된 모습을 보고 놀라기도 했다.
1997년까지 중국에서 발판을 다지고 어느 정도 성과를 올렸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성과에 맞는 승진 자리를 얻으리라 믿었다. 그리고 모든 기대를 베어버리는 IMF 구제금융 시대가 닥쳤다. 자고 일어나면 부도 소식이 들렸다. 재무 쪽 동기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1달러라도 더 모으기 위해서 다들 혈안이었다. 달러 부족으로 흑자도산하는 기업들도 부지기수였다. 회사에서의 하루하루가 칼날 위를 걷는 듯했다. 가만히 있어도 불편하고, 무슨 일을 하려 해도 불편한 시기. 자칫 썰려나지 않기 위해 모두가 작두 위에서 위태롭던 시간이었다.
혹독한 시간, 책상은 유지할 수 있었지만 자리는 지키지 못했다. 핵심 인력이라 생각했던 내가 자르다 남은 인력이 되어버렸다. IMF의 파고는 조금 작아졌지만 개인들에게는 정말로 하루 앞을 알 수 없는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한 것이다. 살얼음을 걷는 하루하루, 눈을 감으면 아내가, 눈을 뜨면 아이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톡 하고 건드리기만 해도 끊어질 것 같은 지푸라기를 잡고 있는 이유였다. 그리고 어머니, 7남매의 무탈만을 위해 살아온 어머니의 이마에 주름 하나를 더 늘릴 수는 없었다.
엄혹한 시절이 지나고 조금씩 훈풍이 불었다. 훈풍을 따라 IT벤처 열풍이 불었다. 바다 건너 미국에서부터 인터넷 기업, 닷컴 기업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겼고 이내 한국에도 수많은 IT 기업들이 강남 테헤란로를 점령했다. 회사에서도 젊은 직원들을 모아 새롭게 도전해볼 적임자를 찾고 있었다. 20~30대 젊은 직원들이, 그것도 IT 관련이나 기술 관련 전공자들이 젊은 혈기로 뛰어드는 사업이라는 이미지를 ‘벤처’ 기업은 갖고 있었다. 이미 십수 년간 조직에 몸담아 회사원으로 살아왔던 구태가 몸에 밴 사람들이 섣불리 도전하기 쉬운 게 아니었다. 회사의 입장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렵게 IMF를 넘기고 새롭게 투자하는 사업인데 아직 혈기왕성한 젊음만 믿고 도전하는 직원들에게 모든 것을 맡길 수는 없었다. 회사라는 조직을 운영하고 관리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회사에서는 어차피 남는 인력이었고, 그대로 버티고 있는다고 다시 원하던 자리가 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꼰대’ 소리 듣는 나이가 되어가는데 더 늦기 전에 도전을 해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잘린다고 어디 가서 밥이야 굶겠는가. 아직 초등학생, 중학생인 아이들이 걸렸지만 마지막 도전이다 생각했다. 살아오면서 가장 큰 결심이었다.
사내 벤처팀의 사업계획서를 보았지만 처음엔 내용을 파악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십수 년간 해온 일과는 전혀 접점이 없던 사업 계획이었고, IT 분야는 전혀 알지 못했다. 주판을 쓰고 수기로 장부와 기획안을 쓰던 시기에 입사해서 경리가 타자를 쳐주던 시기를 지나왔다. 독수리 타법은 벗어났고 워드프로세서 정도는 다룰 수 있었다. 영어와 중국어를 배웠듯이 이제는 젊은 직원들에게 단어 하나하나, IT 관련 사업 하나하나를 배워가야 할 때였다.
많게는 스무 살, 적게는 띠동갑 정도 되는 직원들은 세대 차이를 넘어서 나에겐 아득한 존재들이었다. 오렌지족, X세대 등으로 불리던 그들은 나와는 다른 나라에서 다른 삶의 방식으로 살아온 사람들 같았다. 여동생이 대학에 갈 때, 시대가 바뀌어서 이제는 여자도 배워야 한다며 눈물을 흘리던 우리 어머니가 느끼던 그 감정 같은 것이었을까? 어쩌면 그 감정보다 더 멀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았다.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은 ‘꼰대짓’을 하는 것만큼이나 보기 흉하다.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하며 거리를 두는 것이 좋다는 것을 그때 배웠다. 20대 때, 30대 때 열심히 일했던 나처럼, 벤처팀들도 자기 선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을 지켜봐주는 것이 중요했다. 대신 적절한 예산과 범위 내에서 그들이 즐겁게 일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면 되는 것이다. 닷컴 버블과 시작된 사내 벤처는 의외로 성공을 거두었고 젊은 청년들이 성공담에 한 줄을 보탤 수 있었다. 지금은 인터넷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되었지만 함께했던 청년들은 지금 여러 곳에서 맹활약 중이다. 가끔씩 들려오는 그들의 소식을 들을 때면 분당에서, 강남에서 밤을 새던 때가 떠올라 미소 짓게 된다.
사업 론칭이 성공하고 나서 다시 본사로 돌아왔고 중국 지사에 다시 갔다. 3년 후에 본사로 돌아오니 지천명을 넘긴 나이가 되어 있었다. 회사에서는 부속품처럼 25년 가까이 일하고 배터리처럼 방전되었다. 정년을 5년 남짓 남긴 그때, 회사 내 권력에서 밀려나 있어서 임원이나 사장단에 도전하기에는 힘들었다. 무엇보다 더 이상 도전할 여력이 내게는 남아 있지 않았다.
바쁘게 살아온 시간에 어느새 훌쩍 커버린 두 아이는 스무 살을 넘어 성인이 되었으니 제 앞가림을 할 터였다. 늦은 나이에 방통대에 입학한 아내는 그동안 하고 싶어 했던 상담 관련 공부를 시작했다.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이제는 진짜로 잉여가 되는 것은 아닌가, 출근길도 퇴근길도 발걸음이 가볍지 않았다.
건강도 좋은 편은 아니었다. 술과 폭식으로 인한 고혈압에 고지혈증, 당뇨까지. 쉰을 넘긴 몸은 여기저기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IMF 시절 이후 다시 백척간두에 선 느낌이었다. 시간은 갈수록 빠르게 지나가고 머지않아 환갑을 넘길 텐데 난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마음이 조급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 했다. 부모님 세대의 쉰과 우리 세대의 쉰은 다르다. 또 우리 뒷세대, 그리고 지금 20대가 쉰이 되었을 때의 그 ‘쉰’이 주는 느낌은 전혀 다를 것이다. 나이와 직급에 얽매여 권위를 찾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지 벤처 일을 할 때 깨달았다.
이 나이쯤엔 이 정도 재산이나 이 정도 사회적 직위를 갖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도 사회적 관습에 의한 고정관념이었다. 20대에 대학을 가고, 30대에 결혼을 하고, 40대에 내 집을 갖고… 이렇게 컨베이어벨트처럼 이루어진 한국인들의 삶을 한 장면으로 나타내며 비판하는 카툰을 본 적이 있다. 그렇게 정해진 대로만 산다면 60대에는 손주들을 돌보는 삶을 살아야 하리라.
참으로 평범하게 모나지 않게 살아온 50년이었다면 이제 남은 생은 그 컨베이어벨트에서 이탈해서 다른 곳에는 뭐가 있는지 살펴보며 살아도 좋지 않을까? 은퇴에 대해 처음으로 아내와 이야기했을 때 아내는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당신처럼 꽉 막힌 일벌레가 이런 생각도 하다니 대견하다면서.
정년은 금방이었다. 30년 넘게 일했으니 미련이 없을 만도 한데 사원증을 반납하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아이들과 술을 마시면서 처음으로 취한 날이기도 했다. 시원함 반, 아쉬움 반, 거기에 임원에 대한 미련 한 꼬집. 눈물이 핑 돌던 밤이었다.
퇴직 후에 딱 1년만 쉬자고 했지만 달리던 자전거는 그리 오래 멈춰서 쉴 수 없었다.
딱 가족이 먹을 것만 소일거리로 농사지으며 1년을 보내던 중 답답해 견딜 수가 없었다. 고상하고 우아한 취미생활은 거리가 멀었다. 몸을 쓰고 현장에서 뛰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동안 해보고 싶었던 맥도날드 시니어 알바도 해보고, 편의점 알바도 해봤다. POS를 익히는 것이 제일 어려웠지만 그래도 한때 IT 벤처에서 일했던 가닥에 그 뒤로도 꾸준히 컴퓨터를 다루다 보니 온갖 할인이나 쿠폰을 다루는 데도 익숙했다. ‘아직은 청춘!’ 이런 마인드가 아니었다.
40년 전, 내가 스무 살 때는 없었던 일들을 해보며 우리 아이들과 주변의 청년들이 어떻게 사는지 느껴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패스트푸드점 복장과 편의점 조끼를 입은 나를 보며 아내와 아들들은 누구보다 좋아했다. 가족과 더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가족과 다시 하나가 되는 느낌, 참 오랜만에 받는 느낌이었고 이때부터 다시 나의 제2의 황금기가 시작되었다.
같은 시기에 퇴사한 동기와 무역업을 시작한 것은 한참 뒤였다. 다 잊어버린 중국어를 떠듬거리며 중국전자제품을 수입했다. 거창한 사업도 아니고 동기와 나 두 사람 소소한 용돈벌이로 시작했다. 그래도 저가 저품질 제품을 다량으로 떼다가 파는 일은 하지 않는다. 적정 가격의 적정한 품질의 제품을 파는 게 목적이었다. 사업을 키울 생각은 없었지만 몇 년 새 규모가 커져갔다. 욕심을 부리지 말자, 한 걸음 물러서서 생각하자. 시작할 때의 다짐은 잊지 않고 지켜가고 있다. 주말 농장과 아내, 손주들과 함께할 시간은 빼두고 일하는 것이 가장 먼저이기도 하다.
할아버지다운 할아버지가 지금 내 삶의 목표 중 하나다. 할아버지가 아닌 ‘노땅’이나 ‘꼰대’가 되는 것이 문제 아닐까? 푸근하게 가족과 이웃을 품어줄 수 있는 할아버지, 그런 할아버지다운 할아버지가 되기 위해서 오늘 하루도 웃으며 시작한다.
이제 마늘을 엮어 공기가 잘 통하는 곳에 걸어둘 때가 되었다. 장마철을 무사히 보낸 마늘은 농막 처마 밑에서 더욱 단단하게 맵고 달달하고 향긋한 마늘로 익어갈 것이다. 그처럼 내 안의 할아버지가 더 할아버지다워졌으면 좋겠다.
62세, 교사로서의 35년 삶을 뒤로하고 명예퇴직 후 시작한 택시 운전. 아내와의 유럽여행을 손꼽아 기다리며 제2의 인생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속쓰림과 몇 번의 토악질 끝에 찾은 응급실에서 시작된 투병생활. 췌장암 진단을 받은 후 2년간 사투를 벌이며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지난주부터 갑자기 배의 통증이 심해졌습니다. 오늘 예약한 외래 진료를 기다리며 진통제를 몇 번이나 먹었는지 모릅니다. 더 이상 항암치료는 권해드릴 수 없다며 호스피스 입원에 필요한 진단서를 써준 의사는 외래 진료실을 나설 때까지 끝내 제 눈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이제 예정된 시간까지 이 고통을 견디는 일만 남은 걸까요? 차라리 그날이 오늘이면 좋겠습니다.
힘들게 견뎌온 치료에도 불구하고 환자가 말기 상태에 이르렀다고 판단되면 주치의는 환자와 가족들에게 호스피스 입원을 권유할 수 있습니다. 혹은 “병원에서는 더 이상 해드릴 게 없습니다”라고만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의사의 명시적인 말기 진단 이전에 이미 자신의 병이 악화돼가고 있음을 눈치 채는 환자들도 적지 않습니다. 어떤 말기 암 환자 가족들은 인터넷에서 말기 암 환자를 완치시켰다는 ‘OO주사, OO약침, OOO추출물’ 등에 대한 경험담을 보고 매달립니다. “호스피스 알아볼까?”라는 말은 모든 걸 포기하는 것 같아 입안에서만 머뭅니다.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한 지 3일이 지나고 있습니다. 집에 있는 동안 밤이 정말 두려웠습니다. 물론 낮에도 통증이 끊임없이 몸을 웅크리게 했지만 특히 밤에 통증이 심해 식은땀이 흘러내렸습니다. 밤새 안절부절못하는 저를 위해 며칠째 밤을 새운 아내도 연신 두통약을 삼키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아내를 보며 그렇게 망설이던 호스피스 병동 입원을 선택했습니다.
호스피스 병동의 첫인상은 제 예상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의외로 병실 복도를 오가며 운동을 하는 환자도 있었고, 다리를 마사지해주는 봉사자들과의 대화 속에 간간이 웃음소리도 섞여 나오곤 하더군요. 저는 아주 엄숙하고 무거운 공기로 숨쉬기 답답한 병실을 예상했거든요. 입원하자마자 담당의사는 통증에 대해 이것저것 한참을 물었습니다. 바로 주사를 한 대 맞았고 수액병이 걸리자 10여 분 후부터 정말 놀라운 시간이 시작됐습니다. 그렇게 고통스럽던 통증이 약간의 불편함 정도로 변해버렸습니다. 통증이 사라지자 정말이지 제가 말기 암 환자라는 사실조차 잊을 수 있었습니다.
호스피스 병동에서는 적극적인 통증 조절을 통해 환자가 오늘을 잘 살고 내일을 준비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암 환자의 통증은 소위 ‘총체적 통증’(total pain)이라고 불리듯 신체적 문제뿐 아니라 심리·사회적 요인이 크게 작용할 때가 많습니다. 환자가 겪는 우울, 불안, 분노, 두려움 등의 심리적 문제는 약물 치료와 함께 지지적 상담을 통해 돕다 보면 완화될 수 있습니다.
호스피스 병동에 온 지 이제 3주가 지났습니다. 지난주부터는 물만 마셔도 구토를 해 얼음을 입에 녹여 갈증만 줄이고 금식을 하고 있습니다. 입마름 때문에 종종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불편하지만 영양제를 맞아서인지 배는 별로 고프지 않습니다. 지난 토요일에는 사회복지사 선생님이 주선해 요법실에서 가족사진을 찍었습니다. 아주 오랜만에 양복을 입었습니다. 올가을에 아들과 결혼 예정인 예비 며느리도 사진 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아내는 말렸지만 고집을 좀 피워 제 영정사진도 부탁해 찍었습니다. 아내와 아이들의 수고를 하나 줄여준 것 같아 내심 마음이 놓입니다. 미용 봉사를 받아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정돈해두길 잘했습니다.
말기 암 환자와 그 가족들에게 임종을 앞둔 마지막 몇 주의 시간은 살아온 시간만큼이나 귀중할 것입니다. 호스피스 팀은 이 기간이 환자와 가족들이 사랑을 확인하고 혹은 갈등을 치유하는 금쪽같은 시간이 되기를 소망하며 다양한 이벤트를 제안할 수도 있습니다. ‘생전 장례식’, ‘자서전 출판기념식’, ‘미술 전시회’, ‘미니 결혼식’, ‘가족사진 촬영’, ‘가족음악회’, ‘가족여행’ 등등 다양한 이벤트가 오로지 ‘한 가족’만을 위해 준비됩니다. 종종 이런 시간들은 환자 사후에 가족들이 잘 견뎌낼 수 있도록 돕는 마법이 되어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호스피스 병동에서는 임종 과정의 환자를 위한 별도의 ‘임종실’(1인실)이 운영됩니다. 호스피스 팀은 임종 과정이 온전히 환자와 가족들이 함께하는 시간이 될 수 있도록 임종기의 신체적 변화에 대해 가족들에게 미리 알려 불필요한 두려움과 오해가 생기지 않게 돕습니다. 또한 처음 경험할 수도 있는 장례 과정 등 사후 절차에 대해 충분한 사전 정보를 제공하고 교육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호스피스 돌봄은 환자가 병동에 머무는 시간뿐 아니라 사후 사별가족들에 대한 지지와 상담 등을 포함합니다. 대부분의 호스피스 전문 의료기관은 체계적인 사별가족 프로그램 및 고위험 사별가족에 대한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합니다.
한국 여자농구 전성기의 중심엔 강현숙, 박찬숙, 조영란, 정미라, 전미애 등의 스타군단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강현숙은 빼어난 미모와 실력으로 수많은 남성 팬을 몰고 다녔다. 1972년 청소년 대표팀으로 첫 태극마크를 단 뒤 1980년 은퇴할 때까지 국가대표로 맹활약한 강현숙(姜賢淑·64) 한국여자농구연맹(WKBL) 재정위원장을 만났다.
“돌이켜보면 그때 무슨 생각으로 농구를 하겠다고 손을 들었는지 모르겠어요.”
그가 농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조금 특별하다. 초등학교 5학년, 농구하고 싶은 사람은 손을 들라는 담임선생님의 말에 무턱대고 들어 올린 손 덕분(?)이었다. 내성적이고 심지어 운동도 딱히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고 고백하는 그는 “어쩌면 나의 농구 인생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말한다.
누구보다 열심히 했던 연습벌레
그가 챙겨온 앨범을 열자 그의 선수 시절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마치 한 장면도 잊은 적이 없다는 듯이 사진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이때는~”, “이건~” 이라며 설명을 덧붙인다. 그가 어렸을 때 부모님과 찍은 흑백사진부터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젊은 시절의 사진까지, 마치 그의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난 기분이었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사진이 있었다. 바로 ‘박신자 선수와 같이 훌륭한 선수가 되기 위해 피눈물 나는 노력을 하자’라는 문구가 써진 자료다. 가로도 아닌 세로로 써진 글자는 비장함을 더했다.
“박신자 선수가 제 롤 모델이었어요. 1967년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 우리나라가 2위를 했는데 이례적으로 우승팀이 아닌 준우승팀에서 최우수선수상 수상자가 탄생했죠. 그 주인공이 바로 박신자 선수였어요. 정말 대단해 보였죠.”
1999년 ‘여자농구 명예의 전당’에 아시아 선수로는 유일하게 헌액된 박신자 선수의 인상 깊은 플레이는 새내기 농구선수였던 강 위원의 열정에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됐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매일매일 농구에 ‘올인’하는 생활이었다.
“새벽에 학교에 가면 교문이 닫혀 있었어요. 그러면 철문 사이로 가방을 밀어 넣고 담을 넘어서 체육관에 가곤 했죠. 오후에 본 연습이 끝나면 남아서 또 연습했고요. 드리블 연습, 슛 연습 등 혼자 할 수 있는 연습은 다 했던 것 같아요. 밤늦게 집에 도착해서 밥을 먹다가 잠드는 날도 있을 정도로 모든 것을 농구에 다 쏟아부었죠.”
누구보다 성실하게 노력한 덕분이었을까. 그는 중학교 2학년이 되면서부터 주전으로 뛰었다. 비록 첫 데뷔 무대에서 골대 방향을 잘못 알고 역주행하는 바람에 자살골을 넣을 뻔했지만 말이다. 그 후 8년간 국가대표선수 생활을 하면서 세계 베스트5에 두 차례나 선정되고, 1979년과 1980년엔 국가대표팀 주장으로서 팀을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 2위, 아시아여자농구선수권대회 우승으로 이끌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어버린 만남
그는 가장 특별했던 경험으로 북한팀과의 경기를 꼽았다.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은 여자농구가 아시안게임 공식 종목으로 채택된 대회이기도 하지만 중국과 북한이 참가한 첫 아시아 스포츠 무대였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을 받았다. 그는 난생처음 북한 선수를 만난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을 떠올리며 “참 할 말이 많은 경기였다“며 운을 뗐다.
“선수촌 셔틀버스를 타면 타국 선수들이 있든지 말든지 북한 노래를 부르다가 마지막엔 ‘조선은 하나다!’ 하고 고함을 쳤어요.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은 물론이고 경기 전 몸을 풀 땐 우리나라 코트까지 넘어오면서 비매너의 끝을 보여줬죠.(웃음)”
북한 선수들은 경기 내내 거칠게 굴었다. 그는 “실력은 우리나라보다 뒤처졌지만 괜히 겁이 났다”고 털어놨다.
“루즈볼 상태에서 볼을 다투는데 북한 선수가 볼이 아닌 김은주 선수의 머리채를 잡아 바닥에 내리친 거예요. 결국 들것에 실려 나갔죠. 싸우자는 건지 경기를 하자는 건지….”
한국팀이 큰 점수로 리드하며 경기를 끌고 가자 북측은 게임 종료 2분여를 남기고 퇴장소동을 벌였다. 심판이 반칙한 북한 선수에게 파울을 선언하자 마치 준비해놓은 대본이라도 있는 양 일제히 항의하더니 한국팀을 향해 “너네 심판한테 돈 멕였구나”라고 소리치며 경기장을 나가버린 것이다. 그날 이후 강 위원이 선수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북한 여자농구팀을 볼 수 없었다고. 그렇게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북한 선수와의 인연은 감동이 아닌 전투적 만남으로 기억되고 있다.
여자농구의 제2전성기를 바라며
“요즘 남자 아이돌 부럽지 않았어요.”
그가 기억하는 1970년대 여자농구의 인기는 그야말로 대단했다. 경기가 끝난 뒤 나오면 팬들에게 둘러싸여 꼼짝 못하는 일들이 다반사였고 초등학생, 성인 가릴 것 없이 국민들이 보내온 팬레터도 셀 수 없을 정도였다.
“1979년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세계선수권대회가 있었던 날은 1층부터 3층까지 빈자리가 없었어요. 경기하다 슛이 들어가면 그 많은 관중이 동시에 함성을 지르는데… 상상해보세요. 소름이 돋다 못해 희열을 느낄 정도였죠.”
특히 그와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온 박찬숙 선수와의 패스 플레이가 득점으로 이어지면 관중의 뜨거운 환호가 터져 나왔다. 그는 “박찬숙 선수는 눈빛만 봐도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는 동료”라고 설명했다.
농구 코트를 떠난 지 38년이 지난 지금, 그는 세 딸의 어머니이자 ‘손주 바보’ 할머니가 되었다. 그리고 지난해 12월 1일, 그의 농구 스토리를 담은 자서전 ‘나는 국가대표 포인트가드’를 출판했다. 자신에게 돌아올 관심보다는 독자들이 다시 한번 옛날 여자농구를 추억하고 그때의 사랑을 현역 선수들에게도 이어줬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예전엔 스포츠 종목이 다양하지 않기도 했지만, 여자농구가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대회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면서 주목을 많이 받았어요. 반면 요즘엔 워낙 많은 종목이 생기면서 인기가 좀 분산되지 않았나 싶어요. 그 많던 여자농구팀이 이젠 여섯 팀밖에 남지 않았다는 게 아쉬울 뿐이죠. 앞으로의 목표가 있다면 한국여자농구연맹 재정위원장으로서 한국농구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거예요. 사람들의 관심을 조금씩 얻다 보면 언젠가는 여자농구의 전성기가 다시 찾아오지 않을까요?”
죽음은 생의 마지막이지만, 죽음과 관련해 늘 최초란 수식어가 붙는 사내가 있다. 국내에서 최초로 유품정리인으로 활동했고, 최초의 유품정리 회사를 창업했다. 국내에서 유통되는 유품정리라는 생소한 분야의 정보 중 상당수는 그의 입과 글을 통해 나왔다. 김석중(金石中·49) 키퍼스코리아 대표의 이야기다. 그가 창업 8년 만에 ‘누가 내 유품을 정리할까?’라는 책을 펴냈다. 어떤 내용을 담았는지, 유품정리 개념이 도입된 이후 우리 사회 문화는 많이 달라졌는지 김석중 대표에게 물었다.
“멍밖에 안 들었어요.” 기대 밖의 대답. 유품정리라는 분야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김 대표는 누구나 아는 그 인물이 아닌가? 관련 기사만 검색해도 방송과 신문, 잡지를 막론하고 그와 회사 이름이 오르내린다.
“국내의 유품정리 분야는 변질되고 있는 상황이에요. 유품정리를 국내에 처음 소개한 것은 ‘유품정리인은 보았다’라는 책을 번역해서 출간했을 때였어요. 당시 이 책은 매스컴의 주목을 받았지요. 하지만 미디어의 관심은 고독사 같은 자극적인 주제에만 집중됐어요. 왜 우리가 유품정리를 해야 하는지, 죽기 전에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은 없더라고요. 그 후 국내 유품정리 산업은 ‘청소’의 한 분야가 되어가고 있어요. 유품정리를 서로 다른 단어로 사용하고 있는 셈이죠.”
제일 좋은 것은 직접 하는 것
유품정리는 고인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것을 정리하는 과정이라고 김 대표는 정의한다. 유품은 망자가 죽기 전까지는 그의 소유이기 때문에 타인이 정리할 수 없고, 사망 후에는 상속 권한을 가진 유족만이 관리할 수 있기 때문에 쉽게 처분할 수 없는 법적 배경을 갖고 있다.
아울러 유품은 한 사람의 삶이 담긴 기념물이기 때문에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 일본에는 고인의 유품을 추억이 담긴 기념품으로 소중히 여기고, 이를 친척이나 친지에게 나눠주는 카타미와케(かたみわけ)라는 문화가 있다. 이러한 일본에서 유품정리가 발달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그는 말한다.
“유품정리는 결국 유족들이 고인의 물건을 처리하는 과정이다 보니 남은 사람들에게 짐이 될 수도 있죠. 그래서 일본에서는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활동인 종활(終活)의 하나로 생전정리를 일상화하고 있어요. 이에 반해 우리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접하는 것을 너무나 금기시해요. 죽은 사람의 물건이라면 다들 찜찜해 하잖아요. 빨리 치워버리려 하고요. 그러면서도 유명인의 유품은 웃돈을 주고서라도 사려고 하죠.”
실제로 국내의 유품정리 업계에서 활약하고 있는 이들 상당수는 중고품 판매업자나 폐기물업자가 많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평당 단가를 매겨 고인의 짐을 쓸어간다. 이후 값나가는 물건을 찾는 ‘보물찾기’를 거친 후 돈 안 되는 것은 모두 버린다. 환가(換價)할 수 없는 것들은 거기 담겨 있는 것이 추억이든, 학술·예술적 가치이든, 중요한 정보이든 상관없이 처분한다.
그가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이나 가족을 잃은 유족에게 “직접 해보라”며 권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누구나 생전정리는 필요해요.평소엔 관심조차 없었던 생전정리를 생각하는 순간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일 거예요. 현재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살아가는 데 무엇이 필요한지, 버릴 것은 무엇인지 고민하고 결정하게 됩니다. 그렇게 조금씩 정리하다 보면 삶에서 뭐가 중요한지 알게 되죠. 유족들도 마찬가지예요. 어떤 물건을 남기고 버릴지 직접 고민하는 과정에서 고인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를 깨닫게 되지요. 남은 가족을 귀하게 여기는 계기도 되고요.”
일본에선 스스로 조금씩 정리를 하다 마지막이 다가온 것을 느끼면 유품정리 회사에 예약하는 경우도 많다. 자식이 있어도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의식이 반영된 것. 키퍼스코리아에서도 이런 예약을 받는다. 김 대표는 “때가 되면 와 달라는 약속의 의미이지 구체적인 계약의 개념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할수록 돈 까먹는 일
김 대표가 유품정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회사 직원이 사고로 세상을 떠서 충격에 빠져 있을 때 일본의 유품정리회사를 소개하는 다큐멘터리, ‘천국으로의 이사를 도와드립니다’를 우연히 보게 되면서부터다. 그는 일본인 지인을 통해 다큐멘터리 주인공이자 일본 최초의 유품정리회사 키퍼스를 설립한 요시다 다이치(吉田太一) 사장을 만나 의형제 같은 사이가 됐다. 김 대표의 진심을 알게 된 요시다 사장은 지금까지 후견인을 자처하며, 한국 직원의 일본 연수, 소모품 지원과 같은 사업에 필요한 대부분의 것들을 후원했다.
하지만 2010년 시작한 김 대표의 유품정리 사업은 순탄치 않았다. 현실은 냉정했다.
“제대로 유품정리를 하려면 현장에 직접 가서 견적을 내야 해요. 하지만 현장에 가서 견적을 내면 비싸고 번거롭다며 거절당하기 일쑤였죠. 한 상조회사와 MOU를 맺고 유족의 의뢰를 받았는데, 6년간 실제로 성사된 건수는 손으로 꼽을 정도입니다. 사업을 할수록 손해만 봤어요. 결국 견적을 내기 위해 교통비만 허공에 날린 셈이 됐죠.”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유품정리 과정은 매우 철저하다. 유족에게 의뢰를 받으면 기본적으로 버릴 것과 남길 것을 판단하는 시간이 걸린다. 유언장이나 권리관계 계약서, 귀중품 등뿐만 아니라 후대에 남길 가치가 있는 유물이나 추억이 담긴 물건까지 골라낸다. 이 과정에서 유족과 상담이 이뤄지고 필요할 경우 법적 절차나 세무 처리가 진행되도록 돕는다. 이러다 보니 비용도 올라간다. 일반 이사 비용의 2배 정도다.
하지만 집을 상속받아 내용물을 빨리 비워내고, 신속하게 처분하길 원하는 유족이라면 이러한 과정이 맘에 들 리 없다. 그의 유품정리 사업이 국내에서 번창하지 못한 이유다. 그나마 일이 들어와도 현장에서 천대받기 일쑤다. 자살한 사람의 유품을 정리하러 갔다가 건물주에게 “죽어 나간 집이라고 소문내는 거냐”며 손가락질에 야유까지 받는 상황은 예사다.
관련 사업 중 그가 손대지 않는 분야가 있다. 바로 치매 등으로 인해 요양병원이나 요양원으로 떠난 부모의 짐을 치워 달라는 의뢰다.
“집을 팔아 상속세를 아껴보려는 분들이 연락을 합니다. 이런 경우 성년 후견인 지정이 되어 있어야만 우리가 일을 할 수 있는데 무작정 맡기려는 분들이 있죠. 법적 절차 없이 물품을 처분하면 불법입니다. 하지만 공공연하게 이뤄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에요.”
유품정리 알리는 일, 계속할 것
결국 2010년 창업 후 키퍼스코리아의 규모는 점점 줄어들었다. 전용 차량도 있었고 일본에서 연수까지 마친 직원들로 팀을 구성해 사업을 시작했지만 이익 창출이 잘되지 않았다. 차량은 매각됐고, 직원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는 동안 가슴에 멍만 들었다.
김 대표는 키퍼스코리아를 창립하기 전부터 해왔던 항공사용 기내 서비스 물품이나 기업체 식·소모품 등을 납품하는 회사를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다. 대부분의 수입은 여기에 의존하고 있는 상태. 10년 전쯤엔 사업을 꽤 크게 벌였지만, 유품정리 사업에 손을 대기 시작하면서 이 사업마저도 상당히 축소된 실정이다.
“키퍼스코리아는 1인 기업으로 운영되고 있어요. 의뢰가 들어오면 각 분야의 전문가들, 과거에 함께 일본 연수를 받았던 경험자를 불러 함께 처리하는 방식이죠. 이제는 견적 의뢰가 오면 먼저 설문 문항을 보내드려요. 직접 가지 않고 비용을 산정할 수 있도록 말이죠. 항목이 24개나 되다 보니 설문만 보고 포기하는 유족도 있답니다.(웃음)”
하지만 그렇다고 유품정리에 대해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다고 그는 이야기한다. 이번에 출간된 신간 ‘누가 내 유품을 정리할까?’를 쓴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무언가 메시지를 남기고 싶었어요. 10년 이상 매일 죽음을 생각하면서 살아왔잖아요. 누군가 이 분야에 대해 관심이 있다고 한다면 내가 밟은 전철을 밟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어요. 그리고 생전정리에 대한 마음도 바꿨어요. 업계에 회사들 많은데 꼭 내가 직접 생전정리를 할 필요가 있겠나? 다른 회사들 제대로 할 수 있게 도와주면 되는 것 아닌가? 하고 말이죠. 그렇게 유품정리인이자 전문유족으로 남고 싶어요. 그래서 책도 썼고 앞으로는 죽음 연계 교육도 해보려고 해요. 몇 분이라도 모아놓고 자서전 쓰기 활동과 더불어 자기성찰을 돕는 키퍼스 노트의 국내 소개도 계획하고 있어요.”
평범하게 사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들 한다. 1990년대 후반 IMF를 악으로 깡으로 견뎌야 했던 부모 세대에게 묻는다면 ‘평범했노라’ 회상하는 이는 극히 드물 것이다. 넥타이를 매던 손놀림이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된 어느 날 아침부터 부지런히 살아야만 했던 수많은 아버지 중 변용도 동년기자도 있었다. 남들보다 이른 ‘용도폐기’ 인생을 딛고 잇따른 ‘용도변경’ 요구에도 능숙 능란 살아온 인생. 세월 역경을 딛고 여유로운 귀촌생활에 도시생활 잘 섞어가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어봤다.
푸른 들판이 바라보이는 땅콩집에 산다
인터뷰가 있기 며칠 전, 변용도 동년기자와 점심식사를 하다가 지금 살고 있는 집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아내와 가깝게 지내던 이웃사촌 부부와 마음이 맞아 경기도 고양시에 대지를 사들이고 건물을 지어 두 가구가 같이 사는 이른바 ‘땅콩하우스’에 산다고 했다. 텃밭을 일궈 봄부터 가을까지 다양한 채소를 따먹고 집 주위 논밭 다니며 사진을 찍기도 한다. 변용도 동년기자는 우렁이 알과 관련한 기사를 ‘브라보 마이 라이프’ 온라인에 게재하며 귀촌해서 사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아침마다 찾아오는 참새에게 모이도 가끔 준다고.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누리는 귀촌생활이라니. 마침
8월호 커버스토리가 귀농·귀촌 이야기라 변용도 동년기자의 집에 방문하기로 했다. 햇빛 잘 드는 텃밭에서는 상추, 오이, 가지, 파 등이 잘 자라고 있었다. 집 안 마당에 깔아놓은 잔디도 깔끔하게 정돈돼 있었다. 아내 이흥열 씨가 집에서 딴 부추로 만들었다며 부추전을 부쳐 내오신다.
“논에 가면 우렁이도 있고 오리도 봅니다. 가을이면 밤도 많이 떨어져요. 사실 이곳에는 안사람 때문에 왔습니다. 이렇게 한번 살아보고 싶다 하더라고요. 대신 아내가 제 매니저 역할을 종종 해줍니다. 지방 강의가 있을 때 운전을 해주기도 하고 주변 역까지 차로 바래다주고 마중도 나오고 말이죠.”
‘좌절할 시간에 뭐든 했다
멀리 내다보이는 들이며 밭이며 마음 참 편안하게 해주는 곳에 사는 것을 보니 부럽기도 하다. 이 정도면 성공한 인생을 사는 사람 아닐까? 현재 변용도 동년기자의 직업은 전문강사다. 여가 설계와 생애 재설계뿐만 아니라 사진이나 스마트폰으로 찍는 사진 등을 또래 시니어에게 가르친다.
“정년퇴임 후 여가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 취미생활이라든지 봉사활동, 학습 이런 것들에 관해 강연합니다. 제 경험을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요. 다행히 강의를 듣는 분들이 잘 호응해주셔서 강의시간이 즐겁습니다.”
뿐만 아니다. SBS러브FM ‘유영미의 마음은 언제나 청춘’ 리포터로 시니어 소식을 전하고 있다. 시니어 자격으로 노크할 수 있는 매체란 매체는 두루 섭렵했다. 글을 좋아하다 보니 저서도 출간했고 육십 넘어서부터는 사진작가로도 활동 중이다. 최근에는 연기에 관심이 생겨 연극무대에 설 준비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미투 운동을 ‘춘향전’에 접목한 창극 ‘어화둥둥 아.우.성’에서 변사또 역으로 출연합니다. 50플러스영등포센터에 있는 연극 소모임 작품인데 저는 회원은 아니고 이름이 특이해서 뽑혔대요. 이래봬도 제가 고등학교 때와 군 시절에 연극무대에 서본 경험이 있거든요. 7월 30일 공연이고 10월에도 서울시청에서 공연한다는군요.”
말 그대로 액티브 시니어의 삶을 살고 있는 이가 바로 변용도 동년기자다. 하지만 은퇴는 그의 생각보다 빨랐다.
“마흔일곱 살에 회사 그만뒀거든요. 쌍용화재 영남권 본부장이었는데 IMF 앞두고 하루아침에 해임됐습니다.”
꽤나 잘나가던 시절이었다. 우리나라 보험 상품을 최초로 개발한 이들 중 한 사람이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낚시보험, 골프보험 등 특색 있는 보험에서부터 가정종합보험, 해양시추보험 등을 개발했다. 텃새 심한 제주도권 본부장으로 지낼 때 만났던 직원들은 아직까지도 변용도 동년기자가 제주에 떴다 하면 만나기를 청한다.
“회사에서 나오고 나서 참 많은 일을 했어요. 청학동 산골에서 나고 자라다 대학교를 다녀야해서 서울로 왔고 졸업한 뒤로 회사에만 있었으니 제가 뭘 어떻게 했겠어요. 회사 나와서 처음으로 한 사업이 만화방이었습니다. 화정 L마트 옆에서 한 3년 했어요. 요즘 만화방이 유행이던데, 예전에 집에서 만화 보던 식대로 드러누워서 만화를 볼 수 있게 만들었는데 잘됐어요. 처제에게 인수하고 부대찌개 집을 한 1년 했습니다. 술도 팔다 보니 늦게 끝났습니다. 안사람 고생이 심했죠.”
힘에 부쳐 부대찌개 가게를 팔았다.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 들어간 곳이 당시 호황을 누리던 생활정보지 회사 건물. 보직은 조경관리사였다.
“고양, 일산 이쪽에서 생활정보지가 상당히 잘됐습니다. 그 회사 건물에서 조경관리사를 뽑더라고요. 말이 좋아 조경관리사지 쓰레기도 치우고 허드렛일 다 했죠. 그때 월급이 40만 원이었습니다. 제가 가끔 강의할 때 그 시절 이야기를 하는데 ‘명색이 대기업 임원이던 양반이 대비전 마당쇠 했다’ 그래요.”
나무 좀 가꾸다 쓰레기 치우고, 단풍 치우고, 잔디도 깎았다. 마음이 썩 내키는 일은 아니었지만 그런 것도 기회라 생각했다. 열심히 하다 보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겼다.
“한창 정육식당 바람이 불 때였어요. 생활정보지 회사가 500평 정도 잔디밭을 가지고 있었어요. 거기다 정육식당 하면 딱 좋겠다 생각하고 회사에 건의를 했더니 그럼 저더러 점장을 하라더군요. 마당 쓸다가 대형 식당 점장이 된 거죠. 처음엔 젊은 사람 시키라면서 못하겠다고 고사했는데 그동안 제 얘기를 들었는지 믿고 맡기더라고요.”
마음에 안 차도 열심히 덤벼들었더니 새로운 길이 열렸다. IMF 때는 드라마 엑스트라 출연도 해봤다. 정치인의 주례가 잠시 금지됐던 시절에는 예식장 전속 주례사도 했다.
“여하튼 돈 되는 일이라면 다 했습니다. 지나고 보니 잘했든 못했든 이 모든 것들이 나중에 큰 자산이 되더라고요. 그러니까 지금 제가 사람들 앞에서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는 거예요. 어쨌든 기회가 되면 그냥 한번 도전해보자고요. 규모가 작건 소소하건 해보면 뭐든 얻는 것이 있습니다.”
‘중요한 한 가지, 하고 싶은 것을 한다
변용도 동년기자를 만나서 얘기하다 보니 ‘안 해본 일이 거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제대로 인정받을 때까지 파고드는 근성은 타고난 것 같다. 가족을 위해 살고 자신의 행복을 찾기 위해 쉬지 않고 문을 두드리고 찾아다니게 된 계기가 있다고 했다.
“두 친구가 비슷한 시기에 죽었어요. 건강하던 친구들이 하루아침에 한 명은 산에 갔다가, 한 명은 차를 몰고 가다가 심근경색으로 갑자기 간 거야. 술도 안 먹고 건강관리도 잘했어요. 다른 친구는 100억대 자산가였고요.”
죽고 나니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어느 날 허망하게 갈 수도 있는 인생,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바람처럼 불었다. 그래서 시작한 게 사진이었다.
“어렸을 때 친구 권유로 ‘촌놈의 세상보기’라는 문패를 달고 인터넷 사이트에 글을 쓰고 있을 때였습니다. 디지털 카메라가 마침 있어 글 쓸 때마다 사진과 같이 올렸어요. 좀 더 잘 찍고 싶고 배우고 싶은 마음이 생겼어요. 두 친구가 죽고 난 뒤에 사진에 대한 생각이 깊어지기 시작했죠.”
점점 사진에 취미가 붙으면서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사진을 찍을까 고민을 하게 됐다. 일산동구청에서 하는 무료 사진교실이 있다기에 찾아가 일주일에 두 번 사진도 배웠다.
“때마침 첫째 아들이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온라인 쇼핑몰 사업을 하겠다며 사두었던 카메라가 있었어요. 아이가 그 사업을 접으면서 카메라를 저에게 줬습니다.”
2010년 7월에 사진 공부를 시작했고, 그해 10월에 공모전에 당선됐다. 스물여덟 번 도전 끝에 이뤄낸 결과였다. 시니어 기자로서 다양한 방면에서 두각을 보이고 블로그에서도 덤덤하게 인생 표현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방송 프로그램 출연 요청이 들어왔다. 케이블TV 출연 뒤 KBS ‘아침마당’에 은퇴준비 전문강사 중 사진 분야 강사로 출연하며 인생에 큰 계기를 맞이했다. 진짜 다른 사람들 삶에 귀감이 되는 전문강사가 된 것이다.
“육십이 돼서 사진을 배우기 전까지는 먹고살기 위해 이 일 저 일 가리지 않고 살았습니다. 이제 여유가 좀 생겼어요. 요즘은 아침이 되면 사진기를 들고 나갑니다. 장애인 시설에 가서 사진 찍어주는 봉사도 하고요.”
물론 변용도 동년기자의 사진 실력은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서도 빛을 발한다. 온라인에 게재하는 기사에 적절한 사진은 기본이고 다른 동년기자 취재에도 사진기자로 참여한다.
“2017년 1월호 ‘브라보 마이 라이프’ 커버스토리에 장영희 동년기자가 취재했을 때 제가 사진을 찍어드렸습니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에 대해서 물으니 사진을 가르치는 학교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변용도 동년기자의 집 3층은 개인 사진 전시 공간으로 쓰인다. 최근 ‘한 달 자서전 쓰기 프로그램’을 통해 써낸 자서전에서 자신을 청학빛그림학교 교장으로 소개한 바 있다.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죠. 영상도 배우고 싶고, 책도 3년에 한 권은 내고 싶어요. 무엇보다 사진을 더 잘 찍고 싶고 말이죠. 사진이 빛그림이잖아요. 사진은 카메라로 쓰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또는 카메라로 그리는 수채화이기도 하고요. 제 사진 전시회 제목도 ‘카메라로 그리는 수채화’였습니다. 저희 집 3층도 좋은 전시 공간이니 야외전시도 할 수 있겠죠. 두세 명은 이곳에서 충분히 합숙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아침에 주변을 돌변서 산책도 하고요.”
훗날 때가 되면 아내 이흥열 씨와 함께 이 지역 저 지역을 돌아다니며 살고 싶다고 했다. 집의 규모를 땅콩하우스로 줄인 것도 훗날 여행을 하면서 살 계획이 있기 때문이란다.
“이곳저곳 다니면서 사진도 찍지만 사람들을 찾아가 봉사도 하니 찾아가는 사진교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사람하고도 오랫동안 얘기했습니다. 지금은 강아지 때문에 못 가요. 아직은 챙겨줘야 하니까.”
집 안 가장 따뜻한 자리에서 이불 깔고 사는 반려견 헨리 때문에 아직은 계획을 이행할 수 없다고 했다. 함께 산 지 19년, 앞도 잘 못 보고 귀가 나빠져 잘 듣지도 못해 재롱도 부리지 않지만 가족이기에 늘 마음이 쓰인다.
‘용도변경’ 그리고 ‘다쓰가’
인터뷰를 마치고 변용도 동년기자가 메시지를 보내왔다. 자신을 뒷받침하는 두 가지 용어인 ‘용도변경’과 ‘다쓰가’에 대한 설명이었다.
“첫째 사자성어가 용도변경입니다. 후반생을 바쁘고 즐겁게 살자고 만든 말입니다. 60세에 제 삶을 용도변경했습니다. 사진이 그 출발점이었고요. 취미에 머물지 않고 영역을 확대해 강사로 방송인으로 사진강사로 저술로 활동하고 있죠. 현재 사진작가로 나름의 브랜드도 만들었고요. 포토스토리텔러, 제가 만든 세계 유일한 말이에요. 마지막으로 ‘다쓰가’는 ‘다 쓰고 가자!’를 세 글자로 줄인 말입니다. 은혜를 되갚고 경험과 지혜, 재물을 다 쓰고 가는 것을 후반생 삶의 철학으로 삼고 있습니다.”
인터뷰가 있던 날에도, 뭔가 물어보려 연락했던 오늘도, 여전히 바삐 살고 있는 변용도 동년기자. 그렇게 부지런히 살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싶지만 이미 걸음을 옮겨 어디론가 떠나 걷고 있다. 너무도 이른 절망 속에서 희망의 빛을 찾고 행복한 삶을 사는 모습에 미소가 절로 스민다.
브라보 3기 동년기자 릴레이 인터뷰를 본지 에디터가 진행합니다.
예닐곱 어렸을 때부터 아는 소리를 입에 담았다. 열두 살부터 무병을 앓고 열일곱에 만신(萬神)이 됐다. 내림굿을 해준 이는 외할머니였다. 나라 만신으로 불리는 김금화(金錦花·87) 선생의 무당 인생 첫 장을 간단히 말하면 이렇다. 무당이 된 이후 세상 숱한 질문과 마주한다. 제 인생은 어떻게 될까요? 만사형통합니까? 크고 작은 인간사는 꼬리에 꼬리를 문다. 신을 모신 지 올해로 71년. 오늘도 내일도, 어쩌면 죽는 날까지도 끊임없이 질문을 받게 될 만신. 그녀와 지극히 일상적인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다. 신의 목소리를 전해 듣는 거 말고 인간 김금화의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2018년 대한민국에 대한 축원은 덤이었다.
너무 시간 많이 빼앗으면 안 돼
만신 김금화 선생과 만날 수 있는 시간은 대충 낮 12시 이후다. 공연이 있거나 행사가 있는 날을 제외하고 오후 12시쯤까지 한나절. 김금화 선생은 서울시 동대문구 이문동 자택이나 금화당(강화에 있는 김금화 선생의 굿당)에서 점(占)을 보러 오는 손님을 맞이한다. 구순을 바라보는 만신이지만 인기는 여전하다. 이른 아침부터 점 보러 온 손님이 집 안에 앉아 있다. 예약 문의전화도 꾸준히 걸려온다. 무복(巫服)에 다양한 무구(巫具, 굿에 사용되는 도구)를 들고 춤을 추거나 작두를 타는 모습만 머리에 그려왔다. 무복은 특별한 날만 입고 평소 편하게 입고 지낸다. 인터뷰가 있던 날은 무복 대신 단아하게 한복을 차려입었다. 인사를 나누고 잡지에 대해 설명을 하는데 대뜸 김금화 선생이 물어본다.
“그런데 누가 나를 인터뷰하러 온 거야?”
“저요.”
오전 내내 손님을 받아서인지 목소리에 힘이 없고 피곤해 보였다. 힘드니 시간 많이 빼앗지 말아 달라 기자에게 당부했다.
“자, 갑시다!(웃음)”
만수대탁굿으로 첫 이야기를 시작했다. 작년 10월 말, 김금화 선생은 생애 일곱 번째로 만수대탁굿을 성황리에 마쳤다. 황해도 지방의 재수굿(집굿)인 만수대탁굿은 이 지역에서 전승되는 굿 중 가장 크다. 집안의 번창과 가족의 건강, 불로장생 등을 빌며 노인의 만수무강과 죽은 뒤 극락천도를 기원하는 굿이다.
“만수대탁굿은 굉장히 큰 굿이에요. 소 잡고 돼지도 두어 마리 올리고 말이지…. 첫째 날은 상산부군맞이하고 칠성, 제석굿을 해요. 다음 날은 일월성신을 맞이해서 솔문(소나무를 휘어서 만든 문) 앞에서 대화가 이뤄져요. 세태를 풍자한 사또놀이를 하고, 소 바치고, 도령돌기를 해요. 도령을 돌면서 칠성님한테 아들 낳게 해달라고도 하고, 명공(名公) 많이 달라고도 빕니다. 그렇게 한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동참해서 돌지 뭐. 그리고 나중에 굿이 끝날 때쯤 작두 타고, 대감놀이도 하고. 굿거리(극에서 장의 개념)도 마흔 거리는 되나봐.”
만수대탁굿은 무당이라고 해서 다 할 수 있는 굿은 아니다. 큰무당 중에서도 일정 수준과 경지에 이른 무당에게 허락된 굿이다. 마흔 거리가 넘기 때문에 하루에 다 할 수 없고 최소 3일에서 5일 정도 기간이 걸린다. 특히 10년에 한 번, 무당 평생 세 번만 해도 하늘의 문이 열린다는데 김금화 선생은 일곱 번의 만수대탁굿을 치러냈다. 10년에 한 번이란 말에 못 가 뵈어 죄송하다는 말이 기자 입에서 절로 나왔다.
“왔으면 좋았을걸. 소 한마리 잡고, 막걸리도 많이 남았었는데. 굿을 크게 했어요. 소 잡는 것도 내가 삼지창으로 찍고 다 했어요. 제자들이 받쳐줘서 작두에도 올라가고. 사람의 힘으로는 못하는 거잖아.”
작년 치러진 만수대탁굿은 이제 마지마기라고 김금화 선생은 내내 얘기했다. 10년 후에도 꼭 다시 하셨으면 한다는 기자의 말에 고개를 흔든다.
“만수대탁굿을 할 때는 젊어지는가 싶었는데 요즘 날씨가 추워서 운동을 못하니까 영 좋지가 않아요.(웃음)”
세상 무게를 짊어지고 사는 운명
살아온 인생 이야기를 좀 해달라고 부탁했다. 만신이 아닌 사람으로 살아온 얘기를 듣고 싶은 마음에 건넨 질문이었다. 너무 오랜 세월 세상을 위해 기도하는 삶을 살아서일까? 자신의 일상에 관한 이야기는 좀체로 꺼내지 않는다.
그래도 일제강점기 정신대에 끌려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 14세 어린 나이에 시집간 이야기부터 호되게 시집살이하다 도망친 얘기, 장티푸스에 걸려 온 가족이 죽을 뻔한 일, 열일곱 살 신내림 받던 순간과 병에 걸린 한 사내를 낫게 해준 일화, 황해도 옹진군 동남면의 용호도라는 섬에서 했던 첫 대동굿의 감격에 대해서는 또렷이 들려줬다. 그 연세에 생생하게 당시 기분을 기억해내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얘기들은 차창 너머 풍경처럼 넘기려고 한다. 이미 너무 많이 알려진 김금화 선생의 이야기다. 박찬경 감독의 영화 ‘만신’ 혹은 김금화 선생의 자서전 ‘만신 김금화’에 더 자세하게 나와 있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그녀의 일상에 대해 묻지 않았다.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미주알고주알 해본 적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사람들이 알고 싶은 건 만신 김금화가 아닌 자신의 걱정과 시름, 그리고 그것을 깨쳐내는 일이었다. 인터뷰가 시작되고 20여 분 지나자 김금화 선생이 시계를 봤다.
“나 지금 계속 말하면 머리가 어지러워질 거 같은데…. 힘들다. 어제 맞은 영양제 오늘 이러고 다 쓰겠다.”
다음에 만나 좀 더 편한 얘기를 했으면 하는 바람에 이만 자리를 무르기로 했다.
일상의 이야기를 나누다
첫 번째 인터뷰를 마치고 며칠 후 다시 자택을 찾았다. 밥도 함께 먹고 편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또다시 약속은 낮 12시 이후. 오전 점사(占辭) 보는 일이 끝나는 시점이었다. 두꺼운 바지 차림이 예전보다 편해 보였다. 목소리도 밝았다. 그런데 최근 부쩍 입안이 개운치 않고 입맛이 없다고 했다.
“배가 고픈데 뭐 먹고 싶은 게 하나도 없어. 원래는 잘 먹었는데 요즘 입맛이 없어. 밥도 먹기 싫고, 식빵이나 구워 먹을까? 아침도 억지로 먹었어.”
이렇게 말해놓고 재차 방문한 기자가 맘에 걸리는지 숙성시켜놓은 감을 숟가락으로 퍼먹으라며 손에 쥐어준다. 날씨가 좋지 않아 통 못 나갔던 새벽 운동도 이날만큼은 다녀왔다고 했다. 그런데 미세먼지가 ‘나쁨’ 수준이라니. 운동하기도 쉽지가 않다고 했다.
“아침에 마스크하고 밖에 다녀왔는데 더는 못 나가겠다, 그럼. 좀 나가면 좋겠는데 미세먼지 때문에 어떻게 걸어.”
김금화 선생의 손이 문득 눈에 들어왔다. 류머티즘으로 손가락이 굽은 지 5년이 됐단다. 당시 속 썩을 일이 있어 스트레스가 쌓였는데 결국 류머티즘으로 왔다. 안마라도 해드릴 생각으로 손을 만지니 얼음장같이 차다.
“손에 염증이 있어서 계속 좀 부어 있어. 어떨 때는 얼얼해, 이게. 류머티즘이 자가면역질환이잖아. 자기가 자기를 친다는 거 아니야. 자기 살이. 손이 못생겼지. 물리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시간도 없고 병원이 또 2층이라 올라가기가 힘들어서 못 가. 물리치료 받으면 조금 나아지지.”
그 사이 사무장이 식빵에 블루베리 잼을 잔뜩 발라 김금화 선생 앞에 내주었다. 어려서부터 단 것을 좋아했다지만 입속은 여전히 불편해 보인다.
“입안이 되게 아프다. 너무 달아서. 단거 먹어도 아프고, 뜨거운 거 먹어도 아프고.”
사무장이 계란을 권했지만 먹고 싶지 않다고 했다. 식사시간이 돼 음식이 한 상 차려졌는데도 뭔가 먹고 싶다는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여러 가지 짧게라도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어 이것저것 생각나는 대로 질문을 했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자신에 대한 소소한 질문이 어색한지 대답 이어나가는 것이 좀처럼 쉽지 않았지만 말이다.
만신은 은퇴가 없나요. 드라마 ‘왕꽃녀님’처럼요?
은퇴하는 사람도 있더라. 나는 아니고.
외국에서도 점을 보러 오나요?
꽤 와요. 지난번엔 중국에서 사람이 왔어요. 한국 신이 몸에 들어왔다면서요.
오전에만 점사를 보시는 건가요?
네. 하루에 세 명도 보고 많으면 일곱 명도 보고 그래.
앞으로 하고 싶은 거 없으세요?
글쎄…? 이제 나이가 들어서 뭐… 그런 거 없어.
어렸을 때 꿈이 있었어요?
꿈 그런 거 몰라.
귀도 한번 안 뚫으셨네요.
그거 왜 뚫어 아픈데.(웃음)
젊은 여성들이 가끔은 부럽지 않은지에 대해서도 물었다. 짧게 대답했던 이전의 질문과는 달리 곰곰이 생각하다 기운을 내며 답했다.
“으이, 부럽지 않아. 나도 하고 싶은 거 다 했는데 뭐. 돈 한 푼 안 내고 비행기 타고 외국을 오갔잖아. 그것도 비즈니스석에 타고, 대우받고, 돈도 많이 받아오고 말이지. 그때는 이렇게 문화재가 될 거라고 생각을 못했어요. 세월이 좋으니까 중요무형문화재지.”
집 안 벽면에 붙여놓은 사진을 찬찬히 보다 김금화 선생이 야자수 나무 아래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한복 차림의 모습만 보다 양장을 입은 모습을 보니 너무나 새로웠다.
“35년 전인가 하와이에서 찍은 사진이야. 쉰세 살? 하와이대학교 초청을 받아 공연 갔을 때 찍은 사진이거든. 아무튼 사진들을 다 훔쳐가. 인터뷰하러 와서 가지고 갔다가 안 가지고 오기도 하고. 우리도 또 있다 보면 잊고.”
무당이 안 됐으면 뭐가 됐을 것 같은지도 물었다. 넘세(어린 시절의 김금화 선생의 이름)는 꽤 총명하던 아이였다.
“무당이 안 되고 공부 많이 했으면. 의사 아니면 검사나… 그런 거 했을 거야. 공부했으면.”
만약 그랬다면 시대를 선도한 검사 김금화로, 의사 김금화로 만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곱고 당당한 얼굴이 꽤 어울렸을 것도 같다. 하지만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의 부름은 평생을 다른 이의 복을 대신 빌어주는 만신으로 살게 했다.
김금화가 신어머니라고 한 적 있어?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10여 년 전 연안부두에서 기자와 만나 사진을 같이 찍은 적이 있다고 했더니 뜻밖의 얘기를 꺼낸다.
“나랑 같이 사진 찍고 우리 김금화 신어머니라고 안 했어?(웃음)”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김금화 선생을 바라봤다. 최근 들어 김금화 선생이 자신의 신어머니라고 사칭하고 다니는 사람이 요즘 꽤 된다는 설명.
“무속인들이 나하고 사진 찍고서는 김금화가 신어머니라고 하는 사람이 있대요. 아침에도 어떤 여자가 왔는데 어떤 무속인이 김금화 만신이 자기 선생인데 무슨 큰 일을 준비하고 있다면서 많은 돈을 보태라고 했답니다.”
사기 치는 사람이 많아져 이제는 사진 찍는 것도 잘 안 한다고 했다. 자기로 인해 피해를 보는 일은 절대 없길 바란다면서 말이다.
“우리나라가 괜찮지 그럼 어드래?”
끝으로 우리나라가 올해 잘될 수 있도록 축원의 메시지를 부탁했다. 김금화 선생은 매일 나라를 위해 축원한다고 했다. 나라가 편안하고 평화통일을 이루고 전쟁 없는 나라가 되게 해달라 기도드린다고 했다.
“2018년에는 모든 백성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고, 밤늦도록 술 먹고 길에 넘어지고 싸우고 막 그렇게 하지 말고 착실하고 정말 아름답게 모두 하나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하고 또 서로 아끼고. 음식도 아끼고요. 너무 많이 해서 내버리지 말아요. 하늘이 내려다봅니다. 아이도 많이 낳으시기를 바랍니다. 한 가정에 3명, 4명 낳아서 나라에 좋은 일 하고, 아이 안 낳고 자기들 혼자서만 살면 어떻게 해. 늙어서도 외로울 거 아냐? 가정과 사회에서도 좋은 일 하시기를 바랍니다. 조상님, 할머니, 할아버지한테도 효도하는 마음으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제가 드리는 축원입니다.”
올해 우리나라가 어떤지 물었다.
“괜찮지 그럼, 어드래? 안정도 되고….”
나라 만신의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오기를 바랐다. 안정된다는 말에 근심걱정 없는 한 해가 되기를 염원해본다.
오랜 세월의 풍파를 헤치고 가녀린 노구가 지탱하고 섰다. 평소 조용히 행동하다가도 무대 위에 서면, 작두 위에 오르면 신빨(?) 날리는 젊은 만신으로 되살아난다.
올해도 7월이면 어김없이 서해안 배연신굿이 기다리고 있다. 각종 공연과 굿판이 만신 김금화 선생의 몸짓을 위해 준비될 것이다. 김금화 선생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기자는 간절한 마음이다. 10년 후 그녀의 여덟 번째 만수대탁굿을 꼭 볼 수 있기를 말이다.
종활(終活, 슈카쓰)은 인생의 마지막을 맞이하기 위한 다양한 준비 활동을 뜻하는 일본 사회의 신조어다. 보통 일본 대학 졸업 예정자들이 공공기관이나 기업의 공채 시기에 맞춰 취직활동(就職活動)에 노력하는 것을 슈카쓰(就活)라고 줄여 부르는 것에 빗댄 것. 발음까지 같다. 취업을 원하는 젊은이들이 검은색 정장 차림으로 기업 면접을 위해 뛰어다니는 것처럼 죽음이 머지않은 시니어도 그만큼 열심히 준비해야 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일본의 종활은 지금 어디쯤 왔을까?
일본에서 종활이란 단어가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09년. 유명 매체인 주간 아사히(週刊朝日)에서 이에 관한 연재가 진행되면서 일본인들 입에서 종활이란 단어가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2010년에는 유력 출판사가 선정하는 ‘신조어·유행어 대상’ 후보에 오를 정도로 대중화가 됐다.
일본에서의 종활은 단순한 장례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미리 내 삶을 정리하는 대표적 아이콘인 ‘엔딩노트’의 작성에서부터, 이달 국내에서도 시범사업이 마무리되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와도 연관이 있는 연명의료 혹은 존엄사에 대한 논의도 포함된다.
일본 사회에서 종활은 다양한 서비스를 만들어냈다. 자신이 묻힐 묘지 동기들과 온천여행을 통해 친분을 쌓는 서비스 등 고령화 사회를 등에 업고 이와 관련된 사업은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다.
“장례식 찾아줄 지인 없어”
평균수명이 길어지고 고령화 사회가 되면서 종활을 준비하는 일본인들에게 걱정 중 하나는 비용이다. 일본은 절에 고인을 모시고 친척이나 직장동료, 지인 등 손님을 맞이하는 장례 형태가 일반적인데, 이럴 경우 우리 돈으로 2000만~3000만 원의 비용이 발생한다. 물론 이는 일본인들에게도 부담이 되는 금액이다. 일본도 우리처럼 조의금 문화가 있는데, 보통 1만 엔(10만 원) 전후의 금액을 전달한다.
문제는 장례식을 찾아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평균수명이 높아지면서 고인의 사망 시점에는 직장과 같은 인적 교류가 이미 단절된 상태인 경우가 많기 때문. 부를 사람도 많지 않고, 부르고 싶어도 연락이 안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현실적으로 찾아줄 사람이 없다면 장례비용이 유족에게는 부담일 수 있다. 또 상조회사의 높은 상품가격에 대한 불만도 장례에 대한 시선 변화에 불을 지폈다.
이로 인해 가족들끼리만 장례를 치르는 ‘가족장’ 등 소규모 장례식을 선택하는 일본인이 늘고 있다. 화장만 하면 우리 돈으로 200만 원 내외, 가족을 중심으로 한 소규모 장례식은 500만 원 이하로 가능하다. 최근에는 이런 소규모, 저비용 상품을 내놓는 상조회사가 늘면서 가격이 점점 내려가고 있는 중이다.
죽기 전 지인들과 이별하는 ‘생전장’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한 개념의 생전장(生前葬)도 종활의 새로운 방안으로 대두되고 있다. 사실 일본 사회에서 생전장은 최근에 생긴 문화가 아니다. 과거에는 사회적으로 잘 알려진 만담가나 군인이, 현대에는 연예인 등이 죽기 전 지인을 만나는 마지막 기회로 활용하는 행사를 가져왔는데 이를 생전장이라고 부른다. 사회적 활동의 종료를 알리는 수단인 셈이다. 죽은 자가 없는 장례식인 만큼 자서전 출판기념회나 파티 등의 형태를 띤다.
지난해 10월 21일에는 프로레슬러 김일과의 대결로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전직 프로레슬러이자 사업가인 안토니오 이노키(アントニオ猪木)가 자신이 선수로 활약했던 료고쿠 경기장(両国国技館)에서 생전장을 치렀다.
이런 행사는 ‘유명인’의 행사로만 인식됐지만 종활이 대중화되면서 생전장의 대상도 일반인들에게 확대되고 있다. 지인들을 불러놓고 사진이나 기록 등을 보며 과거를 추억하고, 그간의 신세에 대해 감사를 전하는 식이다. 선물을 전달하기도 하고, 노래방 기계를 놓고 즐겁게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생전장의 장점은 당사자가 원하는 대로 행사의 형식을 정할 수 있고, 본인의 뜻과 전언을 직접 전할 수 있다는 데 있다. 또 형식이 자유롭다 보니 비용면에서도 유리하다. 다만 일본 내에서도 완전히 대중화된 문화는 아니어서 낯설어하는 지인들에게 이해를 구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우주장, 애완동물 종활 서비스도 등장
최근 종활과 관련해서 눈에 띄는 서비스 중 하나는 바로 우주장(宇宙葬) 서비스다. 미국과 일본 회사가 준비하고 있는 일종의 상조상품으로 상업용 로켓을 이용해 고인을 화장한 골분을 대기권 밖까지 이동시켜주는 방식이다.
화장한 유해 모두를 하늘 위로 올리는 것은 아니다. 가로·세로·높이가 모두 1cm 정도의 작은 캡슐에 유골의 일부를 담는다. 무게로 따지면 1g 남짓 된다. 다른 신청자들과 함께 로켓에 실려 발사된 후 대기권 밖에 도달하면, 위성궤도에 캡슐이 뿌려진다. 캡슐은 궤도를 따라 지구 주변을 돌게 되는데, 어느 시점이 되면 중력에 이끌려 대기권으로 추락해 재로 변한다. 우주 쓰레기처럼 대기권 밖을 떠돌거나 위성 등 다른 시설에 방해가 될까 걱정할 필요도 없다.
비록 유골의 형태이지만 삶의 마지막에 우주와 지구 전체 모습을 경험할 수 있다는 로맨틱한 내용이 마케팅 포인트다. 이런 우주장 서비스를 받으려면 1인당 28만5000엔, 우리 돈으로 약 300만 원 정도 비용을 내야 한다.
애완동물을 위한 종활 서비스도 있다. 이동식 화장 차량을 통해 애완동물을 화장할 수 있고, 장례 서비스도 지원된다. 사람 장례식 못지않다. 원할 때 만날 수 있는 납골당도 준비되어 있다.
일각에서는 일본인의 이러한 종활 붐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종활 따위 그만두세요(終活なんておやめなさい)’의 저자이자 불교 학자인 히로 사치야(ひろさちや)가 대표적이다. 600권 이상의 저서를 집필하며 일본 불교계의 거목으로 불리는 그는 이 저서를 통해 “종활은 사후를 위한 불필요한 준비에 불과하며 지금 즐거운 인생을 사는 편이 낫다”고 말하면서 “상속 등 사후에 벌어질 일들 역시 남아 있는 유족에게 맡기는 것이 좋다”고 주장했다.
어디선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의 발원지를 찾으며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20대 초반쯤 아버지가 살고 계시던 사택에 갔을 때의 일이다. 담 너머로 무심코 눈길을 돌리던 필자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나무 막대기로 얼기설기 엮은 짐승우리 같은 곳에 발가벗은 사람이 갇혀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그 사람이 오물을 벽에 칠한다는 치매 환자임을 알게 됐다. 가족은 농사를 지으러 논밭으로 나가야 했기에 환자를 집 안에 둘 수 없었다고 한다. 치매와 관련해 필자가 기억하는 첫 장면이다.
필자의 친구 부부는 둘 다 6·25 전쟁 때 아버지를 잃은 유복자다. 그래서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를 함께 모신다. 그런데 어느 날 친정어머니가 덜컥 치매에 걸리고 말았다. 그때부터 시어머니는 사돈은 왜 우리 집에서만 사냐고, 다른 자식은 없냐며 타박하기 시작했다. 친구는 아들 옆에 붙어 잔소리를 해대는 시어머니가 서운하고 미워서 저녁이면 친정어머니와 놀이터로 가서 도리도리 짝짜꿍 놀이를 하고 집으로 들어오곤 했다. 그러면 친정어머니는 아이처럼 좋아했다. 그런 어머니를 차마 요양원에 보낼 수는 없었다. 가족들에게도 마음의 병을 주는 게 바로 치매다.
도봉구에서 만난 한 수강생은 자기 어머니가 예쁜 치매에 걸렸다고 말한다. 어머니가 새벽같이 일어나 몸단장을 하고 대문 앞에 의자를 갖다 놓고 앉아서 오가는 사람들에게 아침 인사를 하기 때문이다.
사극치매에 걸린 노인도 있다고 한다. 며느리가 외출 후 집에 들어오면 공손하게 “마마, 어디 다녀오셨습니까?” 하고 공손하게 묻는단다. 화가 나는 일이 있으면 “네 이년! 이실직고하지 못하겠느냐” 하며 며느리를 당황하게 만든다는 사극치매.
한 노인은 돼지고기를 볶아 맛있게 저녁을 먹고는 아들이 퇴근하자 며느리가 밥을 안 줘 배가 고파 죽겠다며 악을 썼다고 한다. 치매는 어느 날 그렇게 시작된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모든 층의 버튼을 누르고 모르는 집 문을 두드리는 일은 예삿일이다.
90세의 한 노인은 자서전을 출판하려고 준비 중이었다. 필자와 대화를 나누다가도 아내가 치매 환자인데 돌봐야 할 시간이라며 서둘러 집으로 갔다. 아내를 요양원에 보내려 했지만 그럴 때마다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당신 곁에 있게 해달라고 애원을 한단다. 자서전이 내일이면 나올 날이었는데 노인이 갑작스럽게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리고 3일 후 그의 아내는 자식들에 의해 요양원으로 보내졌다.
치매로 고생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환갑이 지나고 보니 남의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필자의 지인은 어머니를 요양원에 입원시키려 모시고 갔는데 그곳 직원들을 공손하게 대하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단다. 기억을 잃어가도 생존 본능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이다.
84세의 친정어머니는 아직 맑은 정신을 간직하고 계시지만 치매를 떠올리면 불안감이 밀려온다. 사회적 고립감이 치매를 일으킬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전화를 자주 드린다. 어머니를 만날 때는 앨범, 빨간 내복, 반짇고리, 어머니께 사다 드린 옷과 목도리, 형제와 찍은 사진을 보여주는 이벤트를 한다.
가족의 사랑만이 치매를 예방하고 진행 속도를 늦출 수 있다. 만약 필자가 치매에 걸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하기도 싫다. 우선 고혈압과 당뇨에서 풀려나야겠다. 그리고 살도 좀 빼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