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한 달 살기나 일 년 살기가 유행처럼 퍼졌다.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한 주를 여행해도 일주일 살기라 하듯 하루이틀을 지내도 그 지역에 스며든 여행을 선호한다. 목포에 머물면서 요즘 새로운 여행 패턴인 짧게 살아보기를 경험했다.
목포의 골목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쪽문 옆을 지나고 작은 텃밭을 지나 그들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2박 3일을 살았다.
1897년 목포항 개항 이후 ‘목포는 항구다’라는 말은 지금껏 불변이다. 목포 유달산 중턱엔 가수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세워져 있고, 그 거리를 걷다 보면 지금도 구슬픈 가락이 어디선가 들려오기도 한다. 잔잔한 바다 옆으로 갓바위가 전설을 품었고, 바닷가 마을의 저녁노을에 전율했다.
목포해상케이블카는 고하도 전망대를 거쳐 발밑으로 목포 원도심과 다도해를 짜릿하게 선사했고, 평화의 광장으로 몰려든 커플들은 밤바다에 넋을 잃는다. 목포 주변 섬 여행도 손쉽고, 해산물 노포 맛집도 지천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목포의 변화 역시 만만찮지만 빛바랜 듯 옛 발자취가 여전히 남아 있는 목포다.
북교동 예술인 골목과 옥단이길의 레트로 정서
도시의 매력은 그곳을 지키고 있는 유형무형의 것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목포는 예부터 예향이었다. 유달산을 중심으로 몇 갈래로 뻗은 골목길을 걷다 보면 우리 근현대사를 이어나갔던 예인들의 숨결이 느껴진다. 문학의 향기가 좁은 길마다 연결되어 있고, 화가의 집도 가수 이난영 일가의 전시관도 함께한다.
목포를 대표할 만한 인물로는 대통령도 있고 유명 연예인도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1930년대 초반부터 해방 무렵까지 목포에 살았던 옥단이를 빠뜨릴 수 없다. 옥단이는 이 지역 출신 차범석 작가의 작품 속 실존 인물이다. 옥단이길에 들어서면 물지게를 진 여성 캐릭터 안내판이 맞이한다. 척박했던 시절의 순박한 물지게꾼 옥단이. 목포 사람들의 허드레 물장수를 하며 좁다란 골목길 일대를 누볐던 밝고 당찬 여성이었다. 목포역에서부터 유달산 부근까지 오래된 옛집들 사이로 4.6km에 걸쳐 11개 골목의 옥단이길이 미로처럼 이어진다. 처음엔 탐험하듯 걷던 길이 옥단이라는 이름의 정겨움으로 그저 푸근하다.
옥단이라는 인물을 문학 캐릭터로 세상에 내놓은 차범석 작가의 ‘작은 도서관’은 말 그대로 자그마하다. 작가의 오래된 잡지와 대본집, 희곡 작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도슨트가 없어도 누구나 들러서 조용히 책을 보고, QR 코드로 관광 해설과 목포 시민들의 목소리로 낭독한 오디오북을 들어볼 수 있다. 차범석 작은 도서관이 자리한 골목은 차범석길 27이다. 이 길 곳곳에서 수필가 김진섭, 문학평론가 김현, 극작가 김우진, 여성 문학을 대표하던 작가 박화성 등 문인들의 자취를 보여준다. 현재 예술인 골목이 있는 북교동은 지금의 목원동 일대지만 목포 사람들은 여전히 북교동이라 부른다.
골목 안에는 1970년대 감성을 소환하는 흑백사진 속의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도 여전히 건재하다. 개항과 함께 하루 품팔이를 하던 사람들의 계 모임으로 한때 성황을 이루었던 마인계터 골목, 그 옛날 노라노 패션학원으로 유명했던 건물이 미술관으로 재생된 모습도 보인다.
유달산 자락의 노적봉과 근대역사문화공간
북교동 예술인 골목 옆으로 조금 넓게 트인 길을 따라가 보자. 법정 스님과 고은 시인이 만났던 ‘목포 정광정혜원’을 지나게 된다. 김환기, 남농 허건, 박수근, 천경자 등 남도 출신 예술인들이 그려진 벽화가 쭉 이어지는 오르막을 오르면 곧바로 우뚝 솟은 유달산이다. 유달산을 빼고 목포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지략이 떠오르는 노적봉이 언덕 위에서 맞아준다. 저편으로 목포 앞바다가 시원하다.
유달산을 내려가기 전에 들러볼 곳이 있다. 바로 옆 숲을 이룬 산 아래 1982년에 조성된 국내 최초의 야외 조각공원이다. 자연, 문화, 조각이라는 주제로 설치된 조각 작품들로, 국내 작가는 물론이고 예술성 높은 외국 조각가들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의외로 찾는 사람이 적어 호젓하다.
노적봉과 조각공원을 뒤로하고 유달산 저쪽 아래로는 근대역사문화공간을 비롯한 옛이야기들이 기다린다. 근대역사관 1, 2관과 일본영사관, 옛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은옛 모습 그대로다. 또한 전시관마다 일제강점기의 수탈과 비인간적 야욕 및 잔인함을 증언하고 있다.
주변에는 일본인들이 남긴 적산가옥과 일제 잔재들이 있고, 골목마다 아픈 역사의 상흔을 만나게 된다. 목포는 호남 곡창으로 일본인들이 거점으로 삼았던 곳이다. 발걸음하는 골목마다 일본과 떼어놓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 묻어 있다. 지금은 타임머신을 탄 듯 옛날이야기를 돌아보며 거니는 역사의 거리가 되었다. 알고 걸으면 더 재미있는 목포의 골목길은 역사와 함께하기에 더 의미 있다.
하늘이 가까운 보리마당로의 골목 이야기
유난히 낡은 풍경의 골목이 많은 목포다. 유달산에 기대어 자연스럽게 형성된 마을 골목길이 감성을 품었다. 한때 넓은 보리밭이었고 보리타작을 주로 했다던 보리마당로는 현재의 서산동으로 지대가 높은 윗자락이다. 영화 ‘1987’에서 연희네 슈퍼로 알려진 서산동 골목은 좁기도 하지만 가파른 오르막이다. 영화 속에서는 연희(김태리)와 이한열(강동원)이 무심한 척 속 깊은 시국을 주고받고, 삼촌(유해진)은 조카에게 보안상 위험한 부탁을 하던 곳이다. 우리 모두에게 뜨거웠던 1987년의 이야기가 촬영된 골목이다.
이제는 인문도시 서산동 시화골목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예스러운 사진관이나 작은 미술관, 벽화가 그려진 오밀조밀한 골목 안의 자잘한 정서가 그곳 사람들과 하나가 된다. 다닥다닥 붙은 골목 양옆의 담벼락 사이로 주민들이 지나가며 살짝 옆으로 비켜주기도 하는 게 자연스럽다. 좁은 골목을 오르내리는 동네 사람들이 서로 인사하며 안부를 주고받으니 정겹지 않을 수 없겠다는 생각도 든다. 골목은 좁은 계단이었다가 누군가의 대문 앞이기도 하다. 가끔 고양이가 까무룩 졸다가 인기척에 놀라 도망간다. 비탈진 마을을 오르다 보면 시선 끝엔 늘 하늘이다. 하늘이 가까운 동네다.
공간의 전환, 누스테이에서 살아본 2박 3일
유달산 자락에 앉힌 보리마당로의 너른 공터에서 골목에 이르니 손바닥만 한 텃밭을 일구던 마을 사람이 반겨준다. “여기는 내비게이션에 번지수보다는 한빛교회로 치는 게 가차워요. 거기가 주차하기도 좋으니께 글루 오믄 더 편치.” 뭐라도 도움이 되려는 마음이 진심이다.
코로나 팬데믹을 지나면서 트렌드로 떠오른 말 중 하나가 ‘워케이션’이다. 워크(Work)와 휴가(Vacation)의 합성어로, 원하는 곳에서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근무하는 것을 말한다. 머무름으로 업무와 그 지역을 충분히 경험하는 새로운 방식의 라이프스타일이다. 목포 ‘누스테이’는 인구 소멸이 심화되는 지역에서 재생 건축을 통해 거주와 일이 가능토록 했다.
새벽 잠결에 나지막한 뱃고동 소리에 눈을 떴다. 여기가 어디지? 도심 재생 건축으로 생겨난 목포의 숙소 ‘누스테이’는 자신만의 시간을 담은 여유로운 워케이션이 가능하다. 골목 안 서늘하도록 정갈한 2층집에 모든 게 갖추어졌다. 쉼과 일이 진행되는 공간 1층, 계단참을 밟으며 올라간 2층에선 테라스의 푸른 식물들과 함께 깊은 사색의 시간을 갖는다. 바다가 보이는 발코니에선 차를 마셔도 좋고, 캠프파이어가 가능한 루프톱에선 불멍의 시간이다. 동네의 따스함이 남아 있는 공간에서 나만의 속도대로 살며 크리에이티브한 효과를 기대해볼 만하다.
서울시와 강원도가 초고령 사회와 지역소멸 현상을 동시해 해결하기 위해 ‘골드시티’를 조성하기로 했다.
골드시티는 주거·취업·여가가 가능한 신도시로, 서울시가 추진하는 지방 상생형 주거정책의 일환이다. 강원개발공사, 서울주택도시공사 등 유관기관이 협력하여 시범사업을 추진할 예정이다.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지방에 새 보금자리를 마련하고자 하는 50·60세대가 주 대상이다. 이들이 골드시티로 이주할 때 소유한 서울 시내 주택을 서울주택도시공사에 팔거나 신탁해 생활비(임대료)를 받으며 살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신탁한 서울 주택은 서울주택도시공사가 청년·신혼부부에게 재공급한다.
골드시티가 들어설 시범 사업지는 인구감소 및 소멸 위기에 처한 지방 도시 중 대도시 접근을 위한 교통 기반 시설과 지역거점 병원 접근성이 좋은 지역으로 선정한다. 첫 번째 골드시티는 삼척시에 조성되며, 약 3000가구 공급 계획이다.
김헌동 서울도시주택공사 사장은 지난달 15일 서울시청 인근에서 열린 취임 2주년 기자회견에서 “서울에 사는 은퇴자나 젊은 사람들이 지방으로 이주하도록 돕는다면 서울(인구 과밀)과 지방(소멸 위기)의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라며 “은퇴자가 서울 강남에 보유한 아파트를 SH공사에 팔거나 지분을 넘기면 지방에서 주택연금을 받으며 노후를 안정적으로 보낼 수 있다”고 말했다.
현재 골드시티 사업은 청사진 정도만 제시돼 있다. 이후 추진함에 있어서는 방향성을 확실히 잡아야 한다는 우려도 나온다. 조희정 더가능연구소 연구실장은 단순히 인구를 이주시키는 데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자연히 사람이 모여들고 정착할 수 있도록 유인 요인을 구체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양한 콘텐츠를 통해 지역과 관계를 맺고 교류할 수 있도록 지역 특색을 살린 일자리, 프로그램, 여가 활동 등 다방면의 개발이 필요한 셈이다. 개인과 지역의 정서적 관계가 쌓여야 하므로 장기적인 관점이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조 실장은 지방과 개인의 관계를 축적하는 방법으로 일본의 관계안내소를 꼽았다. 빡빡하고 엄숙한 종친회가 아니라 밀양 박씨, 김해 김씨처럼 ‘전국의 ○○씨 모여라’ 하는 성씨 커뮤니티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이들은 성씨가 등장한 최초의 지역에 모여 자신들의 시조와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며 거리를 좁힌다. 운전면허 취득에 드는 시간과 비용을 기왕이면 지역에서 쓰라며 한 달 동안 지역에 체류하며 면허를 따고 지역을 체험하게 하는 일종의 라이선스 스테이(License Stay) 프로그램도 주목할 만 하다. 가상의 지역 유적지를 돌며 미션을 수행하고 그 과정에서 포인트를 얻어 현실에서 사용하는 RPG 게임은 지역 자체가 거대한 놀이의 장으로서 매력을 발산하게 한다.
더불어 2주택자 세금 지원 등 경제적인 혜택도 명확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골드시티를 세컨하우스로 활용하고자 하는 은퇴자도 있을 터. 두 개 이상의 집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에게 부과하는 세금에 대한 혜택이 이동의 발판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는 “실제 거주하는 주민이나 한 번만 들르는 뜨내기 인구 외에 다른 형태의 인구가 생태계에 스며들면서 지역의 팍팍한 구조에 숨구멍이 만들어질 수 있다”며 “우선 지역 환경 자체가 좋아지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세계에서 가장 죽기 좋은 나라는 어디일까? ‘죽기에 좋다’는 말이 생소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좋은 죽음’에 대해 정의하고 죽음을 준비하는 나라들이 있다. 100세 시대를 맞아
‘잘 죽는 방법’을 고민할 이들을 위해 해외의 웰다잉 문화를 소개한다.
영국의 시사 주간지 ‘이코노미스트’ 산하 연구기관 인텔리전스 유닛(EIU)은 ‘죽음의 질 지수’를 발표했다. 임종을 앞둔 환자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의료 시스템이 얼마나 발달했는지 나타내는 지수다. 죽음을 앞두고 갈 수 있는 병원 수, 치료 수준, 임종 관련 국가 지원, 의료진 수 등 20가지 지표로 측정했다. 80개 국가 중 우리나라는 2015년 기준 18위였다. 1위는 영국이다.
누구나 ‘좋은 죽음’ 맞이하도록
영국도 과거에는 죽음에 대한 논의를 피하는 문화가 있었다. 영국 보건부는 ‘생애 말기 돌봄 전략’을 제시하며 죽음에 대한 사회의 인식을 바꿨다. 이때 영국 정부는 ‘좋은 죽음’을 정의했다. ‘익숙한 환경에서, 가족·친구와 함께 존엄과 존경을 유지한 채 고통 없이 죽는 것’이 그들이 정의한 좋은 죽음이다.
영국은 생애 말기 치료법과 호스피스 제도를 발전시켰다. 생애 말기 치료법은 완화치료라고도 하는데, 질병으로 인한 고통을 줄여주는 치료법이다. 말기 암 환자뿐 아니라 죽음을 눈앞에 둔 환자라면 누구든 완화치료를 받을 수 있다. 또한 가족들의 고통까지 돌보는 호스피스를 강조한다. 호스피스는 죽음이 가까운 환자들이 입원해 고통을 덜어주는 치료를 하는 특수 병원이다. 또한 교과 과정에 ‘상실 체험과 비탄’이라는 과목을 개설한 중·고등학교도 늘고 있다. 비탄 교육이란 소중한 사람(가족)의 죽음, 학교 교사나 친구의 죽음, 유명인의 죽음, 재난을 통한 죽음 등을 경험할 때 필요한 정서적 도움이나 돌봄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다.
“죽음, 준비하세요”
미국, 독일, 일본에서는 ‘죽음 준비교육’을 제도화했다. 미국은 유치원부터 대학교까지 죽음에 대한 이해, 슬픔을 극복하는 방법을 가르친다. 노화 과정, 죽음 준비 과정, 임종 시의 상태, 유가족을 위한 교육 등 네 가지 분야로 나뉘어 있다. 학교별로 죽음 준비교육 관련 프로그램이 100여 개에 이르고, 학교 외에 병원·기관 등에서도 교육을 실시한다. 또한 ‘행복한 죽음 운동’을 시작으로 죽음 만찬, 죽음 살롱, 죽음 카페 등이 빠르게 늘었다.
독일은 중세시대부터 다른 나라와는 달리 종교의 영역에서 죽음 준비교육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초·중·고등학교 종교 수업의 선택 과목 중 하나로 죽음 준비교육 프로그램이 있는 이유다. 중학교에서는 ‘죽음과 죽음에 이르는 과정’, ‘임종-죽음-부활’이라는 교과서로 죽음을 다룬다. 고등학교에서는 더 깊이 있는 죽음 준비 탐색을 위한 5단계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종활’(終活)이라는 죽음 준비 활동이 활발한 일본 역시 죽음 준비교육을 한다. 일본 조치(上智)대학의 알폰스 데켄 교수가 “죽음에 대한 준비교육은 말 그대로 자신이 죽을 때까지 매일 잘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는 철학으로 1977년부터 ‘죽음의 철학’을 강의한 것이 시작이다. 이후 2002년 일본 정부는 초·중·고등학교를 대상으로 삶과 죽음 교육 과정을 개발했고, 2004년부터 교육 과정에 포함됐다. 또한 20여 개 대학에 죽음과 죽어감에 대한 과목이 개설돼 있다.
김조환 웰다잉문화연구소 소장은 “외국에서는 웰다잉 이전에 ‘죽음 준비교육’이라는 말이 보편적으로 사용됐다”면서 “죽음 준비란 계절의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나이 들어감을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삶과 죽음에 관해 철학적으로 사색하며 삶의 방식을 찾아가는 선순환을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우리나라는 어르신 대상으로 삶을 수용하는 방향의 교육이 주로 이뤄지고 있어 아쉽지만, 앞으로는 외국처럼 전 생애에 걸쳐 죽음 준비교육을 하는 방향으로 발전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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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암민속마을은 충남 아산시 송악면 설화산 자락에 있는 옛날 마을이다. 일부러 꾸며 만든 눈요기용 민속 마을이 아니다. 단장이야 좀 했지만 겉치레에 흐르지 않았다. 이곳은 500년간 이어진 ‘예안 이씨’ 집성촌이다. 지금도 일부 후손들이 산다. 기와집과 초가집이 즐비해 이색적이며, 하나같이 묵은 시간의 잔영이 더께로 쌓여 고색창연한 마을이다.
마을 길은 일직선으로 뻗어나가는 일 없이 거듭 휘어져 나직한 선율처럼 포근하다. 느린 걸음으로 걷기에 좋은 골목길이다. 발길이 느려지면 풍경이 한결 세밀해져 살갑게 다가온다. 첫눈에 정겨운 건 돌담길이다. 집과 집을,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며 마을 사이사이로 흘러가는 돌담길 길이는 자그마치 5.3km에 이른다. 외암마을의 시그니처 구조물이라 할 만하다. 예로부터 외암은 ‘삼다(三多) 마을’로 통했다. 양반이 많고, 양반들의 글 읽는 소리가 흔하며, 돌이 유독 많다는 건데, 땅을 파면 온통 돌투성이 지질이란다. 따라서 돌담은 자연스러운 귀결로 등장했다. 이는 어쩌면 주민들이 집단으로 창작한 환경미술에 가깝다. 그 이미지는 수더분하나 아름다우며, 기법은 소박하지만 능란한 것이니까. 돌담길은 미로처럼 얽혀 퍼져나간다. 길 끝이란 없다. 끊길 듯하다가도 다시 이어진다. 마치 미로 속에서 길을 찾는 떠돌이 인생의 상징처럼.
신창댁에서 객을 싣고 시동을 건 돌담길은 온 마을을 감고 휘돌며 덩실한 양반 고택들과 조촐한 초가들을 차례로 보여준다. 주요 반가(班家)들은 대체로 마을 안길 북쪽에 있다. 이곳은 일반 민가들이 들어앉은 남쪽보다 상대적으로 고도가 높다. 그래 마을을 보듬은 설화산으로부터 내려오는 계류의 범람을 피할 수 있다. 즉 주거 여건이 좋은 심층부다. 종가, 사당, 송화댁, 참판댁 등 상류층 가옥들이 주로 여기에 산재한다. 개중 핵심은 건재(建齋) 이상익(1848~1897)이 1869년에 지은 건재고택이다.
건재고택은 우람하면서도 정교한 구조를 지닌 집이다. 떡 벌어진 행랑채 중앙에 자리한 솟을대문으로 들어서면 마당과 사랑채가 있고, 그 뒤편에 정갈하고 수려한 구색으로 돋보이는 안채가 있다. 건재고택이 유명한 건 사랑채 앞마당에 조성한 정원 때문이다. 조선의 옛집들을 보면 크거나 작거나 사랑채 마당을 거의 여백으로 남겨둔 걸 알 수 있다. 조경이라야 그저 소나무나 배롱나무 두어 그루 심거나 자그만 화단을 만든 게 고작이다. 옛사람들은 마당에 굳이 나무를 잔뜩 심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집으로 들이치는 산야의 경관을 만끽하며 내면에 자연을 들여놓는 걸 즐겼을 뿐이다. 이와 같은 전통 미학을 차경(借景, ‘풍경을 빌려온다’는 뜻)이라 한다.
그런데 건재고택의 사랑채 마당엔 수목이 빼곡하다. 용트림처럼 절묘하게 비틀린 채 생동하는 노송을 비롯해 갖가지 정원수를 보라. 화려한 정원이다. 괴석과 석조 장식물에 정자까지 다양한 조경 요소를 조밀하게 배치하기도 했다. 당최 여백이 없어 답답한 기분을 불러일으킨다. 허공으로 펼쳐진 나무들의 가지로 인해 한낮에도 어둑하다. 전통 범례를 초월한 이 정원의 이질성은 오히려 묘한 미감을 자아내기도 한다. 미태의 레이스를 펼치는 나무들의 모습에 무슨 결함이 있으랴. 뭔가 웅숭깊은 맛을 자아내는 이곳에서 신령스러움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이 정원을 전문가들은 대체로 일본식 조경 방법을 따른 것으로 본다. 조선식과 일본식이 혼합된 공간으로 보기도 한다. ‘조선집 마당 가운데 나무를 심은 것은 방에 나무를 심은 것과 같다’며 평가절하하는 견해도 있다. 사랑채와 대문이 일직선상에 놓인 바람에 집안의 기(氣)가 빠져나갈 수 있어 비보(裨補) 용도로 나무들을 심었다는 얘기도 있다.
건재고택에선 추사 김정희를 살짝 만날 수 있어 매력을 더한다. 추사체로 쓴 현판과 주련 다수가 걸려 있어 문기(文氣)가 풍긴다. 이 집은 추사의 두 번째 부인 예안 이씨의 친정이다. 이런 인연으로 추사가 글씨를 남겼다. 낙관이 박힌 추사의 친필은 5점 정도로 파악된다. 건재고택엔 오랫동안 빗장이 걸려 있었다. 개인 소유였던 데다 소유권 소송 문제 등이 겹쳐 문을 닫아뒀던 것. 그러다가 2019년 아산시가 인수한 이후 요즘은 하루 두 차례 일정한 시간에 개방한다.
맹사성 고택은 최고(最古) 민간 주택
건재고택 뒤편 저만치엔 참판댁이 있다. 건재고택과 함께 외암리를 대표하는 집이다. 현재 종손 일가가 산다. 여느 빈집과 달리 사람의 온기로 숨을 쉬는 집이다. 규모로나 구조로나 완연한 대갓집이다. 참판 벼슬을 지낸 퇴호 이정렬(1868~1950)의 고택으로 고종이 하사한 집이다. 고종이 왜? 이정렬은 똑 부러지는 기개로 할 말 다하며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일제의 침략 야욕 저지를 탄원하는 상소를 거듭 올렸다. 하나 반응이 없었다. 그러자 이정렬은 말 등에 거꾸로 올라타고 대궐에 들어가는 진기한 시위를 했다. 조회를 주관하던 고종이 경악할 수밖에. 이 통렬한 장면에 대해 황성신문은 이렇게 썼다. ‘아침 햇살에 봉황이 울었다.’ 이정렬은 종단엔 ‘나라 망하는 꼴은 차마 못 보겠다’며 벼슬을 던지고 낙향했다. 이후의 생활은 매우 곤궁했다지. 그걸 안 고종이 먹고살 만한 재산을 보냈으나 세 차례나 사양하며 돌려보냈고, 이번엔 고종이 낙선재의 축소판쯤 되는 집을 지어줬는데 그게 지금의 참판댁이다. 이 집의 처마엔 금색으로 ‘퇴호거사’라 쓴 현판이 걸려 있다. 퇴호는 고종이 이정렬에게 내린 별호다. 현판은 고종의 아들 영왕이 9세 때 썼다. 이정렬의 못 말릴 결기와 고종의 대범한 풍모가 겹으로 환히 비치는 역사의 한 장면이다.
발길은 이제 설화산 너머 배방읍 중리에 있는 맹씨행단(孟氏杏壇)에 닿는다. 조선의 명재상이자 청백리의 표상인 고불(古佛) 맹사성(孟思誠, 1360~1438)의 고택이 있는 곳이다. 이 집의 주인은 본래 고려 말의 무신 최영 장군이었다. 한편 맹사성은 최영의 손녀사위였다. 이런 연고로 최영이 맹사성에게 집을 물려줬다. 집의 형상은 그지없이 조촐하다. 물질에 무심한 청백리의 살림집답게 단출하다. 세월의 풍상을 겪으며 으스러진 게 많은 집이기도 하다. 덩달아 보수와 변형도 잦았다. 엄밀한 분석을 할 경우 종도리를 받치고 있는 복화반 정도가 이 옛집에 남은 원 구조물이라고 한다. 그렇더라도 고려 말에 지어진 집이라는 사실엔 하자가 없다. 우리나라에 남은 최고(最古)의 민간 주택으로 간주되는 집이다.
맹사성은 황희와 함께 세종조의 황금기를 쌍두마차처럼 이끌었던 주역이다. 정치인다운 기량은 물론 청렴결백으로 당대의 사표가 된 인물이다. 그의 말년 생활은 소박해, 이를테면 집에서 기르던 소를 타고 돌아다니는 정도에서 자족했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겸손해 신분의 고하를 가리지 않았다. 허름한 이가 방문할 때에도 반드시 예를 갖추어 맞이했다. 매사 목에 힘을 주는 법이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이처럼 고결한 인품이 흔하던가? 저마다 꿍꿍이와 내숭을 장착하고 각축을 일삼는 게 속세다. 맹사성의 성정은 봄바람처럼 부드러웠다고 한다. 그의 온유한 정신은 세상의 어둠을 감쌀 수 있는 치마폭 같은 것이었다.
정종호 온양문화원 원장
“락페스티벌 펼쳐 성황 이뤄”
아산시는 1995년 1월 아산군과 온양시가 통합되면서 새로운 출발을 했다. 근래엔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 대형 산업체들이 입주하면서 지역사회에 역동성을 불어넣고 있다. 지역문화를 향유하는 인구도 늘어났다. “문화원이 해야 할 역할이 많아졌다. 책임감도 느낀다.” 이는 정종호 온양문화원 원장의 얘기다.
“아산시 인구가 38만여 명으로 크게 증가했다. 특히 젊은 세대의 유입이 많았다. 아산에서 출생한 2세대도 많은데, 그들은 아산의 미래를 짊어질 소중한 자산이다. 우리 문화원은 아동이나 청소년은 물론 젊은 학부모를 대상으로 하는 문화 프로그램을 강화하고 있다. 반응은 매우 좋다. ‘전통놀이와 내 고장 알기’ 같은 프로그램에 경쟁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디지털 문화의 위력에 눌려 퇴색하기 쉬운 게 전통문화다. 옛것에 관심을 가지는 젊은 세대가 많다고 보나?
“현대적인 문화를 즐기는 경향에 미치지 못한다. 따라서 지역의 옛것에 관한 이해와 관심을 높이기 위한 문화재 탐사 프로그램을 적극 가동하고 있다. 이 역시 참여도가 높다.”
아산은 예로부터 온천으로 유명한 지역이다. 요즘도 온천에 사람들이 몰려드나?
“아산시 온양지구의 온천은 백제 시대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왕실 온천 역할을 할 만큼 유명했다. 1980년대엔 신혼여행지로 각광을 받기도 했다. 이후 생활상의 변화에 따라 한동안 온천의 인기가 저하됐지만 서울-아산 간 전철이 개통되면서 상황이 개선됐다. 전국의 어느 온천 지역보다 양질의 수질을 공급한다는 점도 이 지역 온천의 강점이다.”
요즘 아산시에서 부각된 문화 이슈가 있다면 소개해달라.
“온천 문화의 보고인 ‘온양행궁’의 복원 문제를 꼽을 수 있다. 이는 아산 시민의 숙원이자 지역 발전을 위한 핵심 사업이다. 그러나 재원 문제로 진척을 보지 못하고 있어 아쉽다.”
온양문화원이 추진한 중점 사업과 성과엔 어떤 게 있나?
“신정호수공원을 신정호 아트밸리로 이름을 바꾸고 전국 최고의 명품 공원으로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미 문화예술과 생태가 어우러진 명소로 부상하고 있다. 또한 온양문화원은 ‘락페스티벌 달그락’을 주관하기도 한다. 지난 8월에 열린 행사엔 노브레인, 육중완밴드, 크라잉넛 등 21개 팀이 참가해 열띤 공연을 펼치며 성황을 이루었다. 전국 최고의 페스티벌로 키워나갈 참이다.”
요즘은 문화원마다 전통문화 보존 활동에서 나아가 한결 트렌디한 콘텐츠를 개발하고 있다. 이는 매우 긍정적인 현상이다.
“문화원이라 하면 흔히 옛날 문화를 축으로 삼아 활동하는 걸로 오해한다. 사실 문화원은 이미 변화했으며, 변신에 더욱 가속을 붙이고 있다. 현대 문화를 적극 수용해야 한다. 온양문화원은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프로그램을 다수 개발했다. 타 문화원에서 벤치마킹을 위해 찾아오는 경우가 잦다.”
스물셋, 무명 배우는 이상과 현실 앞에서 현실을 택했다. 그 선택이 일흔 넘어서까지 미련으로 남을 줄 몰랐다. 유만석(78) 씨는 꿈의 무대로 돌아왔다. 오랜 로망을 소박하게 이뤄나가고 있는 지금, 그는 말한다. 그게 언제라도 좋아하는 일을 꼭 하라고.
제4회 서울시니어연극제 개막식 후 대학로 종로마루홀 내 모든 조명이 꺼졌다. 곧 개막작 종로노인종합복지관 시니어연극단 대학老愛(대학로애)의 ‘지하철 두더지’가 소개됐다. 암흑 속에서 살그머니 무대에 오른 유만석 씨는 생각했다. ‘잘하자. 처음이니까 더더욱 잘해야 해. 아, 실수하면 어떡하지? 그건 절대 안 돼! 연습한 대로만 하자. 잘….’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 조명이 탁 켜지고 노신사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다. 탄탄한 발성의 대사가 극장을 울렸다.
“나는 을지로3가역 역장이다. 1983년 개통된 2호선 을지로3가역은 2000년대부터 오후 12시, 2시, 4시, 6시, 하루에 네 번 분주해진다. 지하철 문이 열리면 두툼한 패딩을 입은 어르신들이 어깨에 쇼핑백을 잔뜩 메고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한곳으로 모인다. 어르신들이 내려놓은 쇼핑백들은 끝이 보이지 않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쇼핑백들은 어르신들과 함께 연기처럼 사라진다. 우리는 그들을 ‘지하철 두더지’라고 부른다.”
시작을 알리는 2분 30초 남짓의 독백. 완벽히 해냈다. 연극은 순조롭게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청년 유만석의 꿈도 일흔여덟에 다음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해방둥이의 연기 짝사랑
1945년생 ‘해방둥이’ 유만석 씨는 6·25전쟁 후 일었던 연극 붐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동족상잔의 비극 속 피폐해진 심신을 위로한 건 동네마다 가설무대를 만들어놓고 활동한 극단이었다. “휴전 이후 연극이 대단히 인기였습니다. 그때 상당히 매료됐어요. 고등학교 가서는 자연스럽게 영화를 즐겼지요. 저는 박노식 배우를 가장 좋아했습니다. 탤런트 박준규 씨 부친 말입니다. 할리우드 배우 리처드 위드마크도 좋아했지요. 저도 그런 배우가 되고 싶었어요.”
유만석 씨는 꿈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한국 최초의 종합예술대학인 서라벌예술대학(현 중앙대 전신) 연극영화학과에 입학해 배우 수업을 받았다. 그때가 1965년이었다. 기회는 곧 주어졌다. 1967년과 1968년 2년여 동안 작은 배역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꿈에 다가갈수록 벽에 부딪히는 것 같았다. 용돈벌이도 안 되는 현실 속에서 이상만 좇을 순 없었다. “대여섯 작품에 출연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든 생각은 생활의 안정 없이는 어렵겠다는 거였어요. 하루 세 끼 안 먹어도 괜찮습니다. 두 끼를 먹더라도 안정만 됐다면 계속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게 안 됐어요. 언제까지고 고향에서 돈을 받아 쓸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보내줄 수도 없을 것이고요. 배우로 인정받으려면 무수히 많은 시간이 필요해 보였습니다. 오래 활동한다고 다 되지도 않습니다. 이름 한 번 못 알리고 늙을 수도 있지요. 그 어떤 보장도 없는 생활… 접어야 했습니다. 현실이 그랬습니다. 돈을 벌어야 했어요.”
1969년 유만석 씨는 이성적인 판단을 내렸다. 아니, 내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음속에는 배우가 되고 싶은 감정이 계속해서 자리 잡고 있었다.
대학老愛와 다시 꾸는 꿈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호프집, 신문 판매직, 세탁소, 부동산중개업까지 하며 바삐 살다 보니 어느덧 일흔이 넘었다. “젊었을 때 마스크가 꽤 괜찮았다”며 보여준 사진 속 부리부리한 청년의 눈매는 어느덧 선하게 처져 있었다. 이제 꿈꾸기 늦은 나이라고 생각했을 때 운명은 그를 연극으로 이끌었다. “복지관은 생활이 어려운 사람을 돕는 기관인 줄만 알았습니다. 여러 특화 활동을 한다는 것은 몰랐어요. 우연히 컴퓨터를 가르쳐준다기에 와봤습니다. 가입하는데 이것저것 묻더군요. 그런데 마침 가입 상담해주신 분이 연극단 담당이었던 겁니다. 이제 와 다시 한다는 것이 어쩐지 꺼려졌는데 올해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지금이라도 해봐야겠다고요.”
유만석 씨가 가입한 대학老愛는 종로노인종합복지관의 시니어연극단이다. 2011년부터 활동한 극단 빨래터가 지역사회 노인 전문 연극단원들의 활동을 알리고 전문성을 갖춘 연극단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2015년 7월 대학老愛로 탈바꿈했다. 세대 공존 연극학교(수업, 공연)를 통해 노인 연극인을 양성하고, 격년으로 서울시니어연극제를 운영 중이다. 단원은 2023년 11월 기준 모두 12명(평균연령 71.4세). 주로 대학로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으로 구성돼 있다.
단원들은 매주 월요일 오후 2시에 모여 합을 맞춘다. 대본을 읽고, 역할을 분담하고, 내공을 덧입힌다. 그렇게 올해는 ‘지하철 두더지’를 연극제에 올리고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크지 않은 무대, 작은 역할이지만 유만석 씨는 만족해 보였다. “매주 월요일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그 두 시간이 기다려져요. 작품상이 없는데, 혹 있었다면 우리가 받지 않았을까요?(웃음)”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
유만석 씨는 짐짓 차분해 보였다.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는 식의 호들갑은 없었다. 알려진 배우가 되고 싶다는 욕망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가 이토록 침착한 이유는 과거 행보로 짐작할 수 있다. 1995년 그의 나이 쉰의 일이다. 그때까지도 유만석 씨는 연기 욕심을 냈다. 역할과 분량에도 신경 썼다. 하지만 세상사는 마음처럼 돌아가지 않았다. “실은 영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 출연했습니다. 하고 싶은 역할이 있었는데 다른 배역을 맡게 됐어요. 일본인이었지요. 촬영장에서 쪽대본을 받았는데, 우리나라 말이면 어떻게든 외워서 했을 겁니다. 그런데 짧지도 않은 대사를 모르는 말로 하려니 잘 안 되더라고요. 결국 카메라를 돌려놓고 후시 녹음을 했습니다. 개봉 후 열린 시사회 무대에 오르라고 했는데 그러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내키지 않아서요. 그게 끝이었습니다.”
유만석 씨는 이제 어떤 것도 따지지 않는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 그 자체의 가치를 완전히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대뜸 그는 아들 이야기를 했다. 학창 시절 게임을 좋아해 속을 썩이던 아들은 아르바이트로 게임 회사에 들어갔다가 정식 스카우트 제안을 받고 지금까지 잘 일하고 있다고 했다. 좋아하는 일을 순수하게 따른 아들을 긍정하는 것처럼 들렸다.
다시 50여 년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스물셋 유만석의 선택은 어떨까. 그는 다를 거라고 했다. “잊고 살면서도 가끔 연기 생각이 났습니다. 이따금 도전하고… 그러다 일흔여덟이 됐어요. 지금은 연기를 할 수 있다는 것, 연기를 하면서 즐겁다는 것에 만족합니다.” 후회와 아쉬움 그리고 깨달음. 그 뒤에 그는 이렇게 묻는 것 같았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연극이 끝나고 난 후
연극 ‘지하철 두더지’를 올린 대학老愛 단원들의 허심탄회한 소감을 들었다. 자기반성부터 쓴소리까지 역할 크기와 관계없이 이들의 대화는 진지했다. 무대 아래 단원들은 자기 삶의 주인공으로 살고 있었다.
“돌아보니 대본 속에 우리가 지켜야 할 것들이 있었습니다. 대사에 있던 ‘7업’(깨끗하게 클린업, 용모를 단정히 드레스업, 말하기보다 듣기 셧업, 혼자 있지 말고 모임 활동 쇼업, 밝고 유쾌한 분위기 치얼업, 지갑을 열고 입은 닫는 페이업, 마지막으로 포기할 것은 포기하는 기브업)은 친구들에게도 들려줬습니다. 늙어서도 지켜야 한다고요. 무대에서 또 일상에서 박수를 많이 받았습니다. 연극 덕입니다. 감사합니다.” - 배우 남궁유선
“작은 역을 맡았지만 나름대로 카리스마를 보여준 것 같아서 만족스럽습니다. 긴 대사를 외우고 능청스럽게 연기하는 다른 단원들을 보면서 배우고 또 배웁니다.” - 배우 신동숙
“하루는 대사를 외웠는데도 자꾸 실수해서 울었습니다. 암기는 자신 있었는데 잊어버리는 스스로에게 좌절감이 들었어요. 그래도 그 눈물이 더 열심히 하자는 다짐을 하게 해주었습니다. 또 다른 도약을 기대해볼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 배우 양숙자
“딸에게 어떤 옷을 입으면 좋을지 물었는데 대뜸 ‘현장에 한 번이라도 가봤냐’고 했습니다. ‘대본만 앵무새처럼 외워서 하는 게 과연 연극이라고 할 수 있냐’며 신랄하게 비판하더군요. 그 말이 가슴에 꽂혔습니다. 그동안 너무 편하게 해온 건 아닌가 반성했습니다. 좀 더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연기에 임해야겠습니다.” - 배우 구신자
“현실의 저는 사람을 앞에 두고 화를 내는 성격이 아닙니다. 평소와 다른 모습을 끌어내는 게 연극의 매력이라고 매번 느낍니다.” - 배우 송원자
“지금까지 연극을 올릴 수 있도록 도와준 모두에게 감사합니다. 한 가지 단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연극 무대에서 사설은 피해주셨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내 연기, 그리고 내 것에 몰입했으면 좋겠습니다.” - 배우 김정남
미간에 힘을 주고, 목을 긁는다. 허스키한 목소리가 돋보이는 ‘원조 록스타’ 김정민(55)의 창법이다. 유머러스하게 따라 하는 사람도 많지만, 그는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다는 점에 자부심을 느낀다. “가수로서 가창력이 뛰어나면 당연히 좋겠죠. 그런데 색깔 있는 사람도 오래 기억된다고 생각합니다. 독특함으로 오랜 시간 생존한 것 같아요.”
“저 옛날 사람 맞는걸요. 하하하.” 어느덧 내년이면 데뷔 30주년을 맞이한다. 1995년 ‘슬픈 언약식’이라는 불후의 명곡을 남긴 김정민은 ‘옛날 사람’이라는 표현을 기분 좋게 받아들인다. 2021년 MBC ‘놀면 뭐하니?’를 통해 결성된 프로젝트 그룹 ‘MSG워너비’ 활동 당시 그는 ‘옛날 사람’으로 불리는 동시에 많은 20·30의 MZ세대 팬을 얻었다. 김정민은 젊은 팬들이 자신을 촌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존경의 마음을 담아 바라본다고 느낀다.
“제 노래가 요즘 스타일과는 다르니까 옛날 스타일일 수 있죠. 젊은 팬들이 클래식함, 독특함으로 좋게 봐주시는 것 같아요. 또 과거 노래 가사는 지금과 달리 극단적인 사랑 이야기가 주를 이뤘습니다. 당시 홍콩 누아르 영화를 봐도 마지막에 주인공은 상대를 구해놓고 죽는 경우가 많았죠. 개인적으로 저는 그 시절의 감성을 좋아하는데, 젊은 팬들도 그런 것 같아요.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한번 노래 들어보니까 좋다’면서 저의 다른 노래들도 찾아 들어주시더라고요.”
그렇다고 과거 감성에 취해 있고 고집한다는 뜻은 아니다. 요즘 스타일은 수용하면서 자신의 독특함을 지켜나가고 있다. 무엇이 됐든 오랜 세월 인정받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숨은 노력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사실 제가 가창력이 뛰어난 가수는 아니에요. 그냥 음색이 독특한 가수라고 생각합니다. 부족한 게 많아서 지금도 노래 연습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또 성대도 나이가 들면 늙고 목소리가 변화하기 때문에 매일 노래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어요. 운전할 때 차에서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합니다. 나만의 공간이니까 내가 뭘 하더라도 아무런 제약이 없죠. 지방에 일이 있어 두 시간 운전해야 한다고 하면, 두 시간 내내 MR을 틀어놓고 노래 연습을 하는 거죠.”
팬과 함께한 ‘영원’
김정민은 11월 17일 고(故) 최진영의 ‘영원’(1999년)을 리메이크한 곡을 발표해 화제를 모았다. 원곡의 감성에 김정민의 색깔을 입혀 색다른 곡으로 재탄생했다. 사실 김정민과 ‘영원’은 인연이 깊다. 원래 이 곡은 김정민에게 갈 예정이었는데, 데모를 들은 최진영이 너무 마음에 들어해 그의 노래가 됐다. 그리고 ‘영원’은 리메이크되어 24년 만에 세상 밖에 다시 나왔다.
“(최)진영 씨와 같은 사무실에 있었어요. 술도 자주 마셨고 여행도 다닐 정도로 막역한 사이였어요. 진영 씨가 하늘나라로 간 뒤로는 그 충격에 ‘영원’을 못 부르겠더라고요. 한 10년이 지나니까 감정이 조금 무뎌졌는지 부를 수 있었죠. MSG워너비 하면서 블라인드 오디션 때도 ‘영원’을 불렀는데, 음원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반응이 많았어요. 그러다가 이번에 용기 내서 진영 씨를 잊지 말자는 마음으로 리메이크곡을 내게 된 거예요. 원곡의 완성도가 워낙 높아서 어설플까 봐 고민이 깊었어요. 편곡도 10번 이상 갈아엎었고, 준비하는 데만 1년이 걸렸습니다.”
‘잘해도 본전’이라고 생각했지만 김정민이 ‘영원’ 발매를 용기 내 강행한 데는 이유가 있다. 팬들과 함께 작업했기 때문이다. 기념 영상의 감독, 촬영, 편집 모두 팬이 맡았다. 이런 대형 프로젝트를 기획할 정도니, 김정민의 ‘팬 사랑’은 말 다 했다. 연예계에서도 익히 유명하다. 추억을 공유하며 나이를 먹어가는 동반자인 팬들에게 그는 감사한 마음뿐이다.
“중·고등학생 팬들이 저를 보겠다고 방송국 앞에서 늦게까지 기다리는 모습을 보면, ‘밥은 먹었나’, ‘집은 잘 들어갔나’ 걱정이 됐죠. 한번은 추운 겨울날에도 고생하는 모습이 안타까워서 20명에게 짜장면을 사준 적이 있어요. 그랬던 친구들인데, 이제는 자녀들이 성인이 됐죠. 이제 팬들과 여동생, 남동생 같은 사이가 된 것 같아서 좋아요. 팬은 ‘또 다른 김정민’이라고 생각합니다. 팬들이 저를 만들어줬고 지켜줬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들이 아니었으면 지금까지 올 수 없었을 거예요.”
기러기 아빠의 부성애
그는 최근 친구에게 “정민아, 당장 내일 죽는다고 하면 어떨 것 같아?”라는 질문을 받았다. 나이가 들수록 ‘죽음’을 생각하게 되기에 대화 도중 자연스럽게 나온 이야기였다고 한다. 김정민은 ‘아직은 죽을 수 없다’는 답을 했다. 일본 아이돌 출신 타니 루미코와 2006년 결혼해, 슬하에 세 아들을 두고 있는 그는 아빠로서 삶을 이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친구한테 그 질문을 듣고 생각이 많아지더라고요. 막내가 이제 초등학교 4학년이에요. 막내가 성인이 되어 뭘 하는지는 보고 죽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사실 막내가 결혼하는 모습까지 보고 싶지만, 그건 욕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아이들이 건강하게 잘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그의 부성애는 실로 대단했다. 어떤 질문을 던져도 세 아들에 관한 답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았다. 버킷리스트를 물었을 때도 “아이들이 운동을 계속해서 어느 팀의 선수가 된다면, 그 팀의 응원가를 헌정하고 싶다”고 말했다. 가수 아빠로서 재능기부인 셈이다. 아이들 이야기를 이어가다가 김정민은 최근 ‘기러기 아빠’가 됐다는 사실을 밝히기도 했다.
“큰아들은 광주FC U18 소속으로 축구를 하고 있어서 광주에 있고요. 둘째 아들, 셋째 아들은 엄마와 함께 일본으로 갔습니다. 둘째는 축구를 하다가 쉬고 있고, 셋째는 일본에서 축구를 시작했어요. 기러기 아빠를 제 인생에서 그려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이렇게 됐네요. 두 달밖에 안 됐는데도 쉽지 않다고 느껴요. 아내와 아이들이 많이 보고 싶습니다.”
기러기 아빠가 된 후, 홀로 살고 계신 어머님을 더욱 자주 찾아뵙는다고 한다. 일주일에 2~3번은 방문한다는 그는 “할아버지, 할머니는 손주도 물론 보고 싶어 하지만, 사실 아들이나 딸을 보고 싶어 하는 거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어머니께 이에 대해 여쭤보니 ‘네 아들은 삼 형제지만, 내 아들은 너잖니’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을 듣는데 되게 뭉클했고, 그 이후 자주 찾아뵈려고 노력한다”라고 말했다.
자신감 충만한 중년의 내일
김정민의 인스타그램 사진을 보면 세 아들은 하루가 다르게 크고 있다. 반면 50대 중반의 그는 연예계 대표 동안 스타답게 방부제 미모를 과시한다. 이런 반응에 김정민은 “사실 주름도 늘어나고 많이 늙었다”면서도 “젊은 시절의 몸무게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고 관리 비결을 밝혔다. 그만의 철칙은 ‘플러스 마이너스 3kg 넘지 않기’다.
“10kg 이상 갑자기 확 쪘다고 생각해보세요. 살을 빼도 피부가 늘어나니까 성형외과에 가야 할 테고, 돈이 더 들죠. 평소 ‘3kg 관리’를 습관화하면 돈도 안 들고 건강도 유지하고, 좋은 점이 많습니다. 저는 매일 운동을 병행해요. 오늘 아침에도 실내 자전거 40분 타고 왔습니다. 제가 하도 많이 타서 저희 집 실내 자전거는 한 다섯 번은 바꾼 것 같아요. 하하.”
이처럼 건강관리가 최고의 노후 준비라고 생각한다. 특히 막내가 대학교 갈 때까지 10년 정도 남았다면서 그때까지는 건강관리를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라고 각오를 다졌다. 자신이 건강해야 일하고 자산도 축적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노후에는 한 번쯤 일본 시골 마을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도 밝혔다.
“사실 제가 서울 마포를 벗어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아이들이 제가 졸업한 학교에 다니기도 했고, 벌써 반백 년을 살았네요. 나중에는 아내와 아이들이 지금 살고 있는 곳으로 가고 싶어요. 거기가 시골이라서 공기도 좋은데, 없는 게 없더라고요. 아이들은 걸어서 학교를 다니고, 대형 쇼핑센터도 인근에 있어요. 나중에 누가 물어보면 거기서 지낼 거라고 해야지 했는데, 오늘이 바로 그날이 됐네요.”
김정민은 중년이 된 지금에서야 비로소 자신감을 찾았다고 말한다. 가창 실력이 늘어서도, 외모가 멋있어져서도 아니다. 스스로 마음이 충만해지고 내실을 갖췄다고 느낀다. 그가 지금껏 쏟아부은 노력과 부단한 채찍질이 만든 결과라고 생각한다.
“저는 나름 신조어 같은 것이 있어요. 바로 ‘오늘 하루도 나나 잘하자!’입니다. 톱니바퀴를 보면 한쪽이 돌아가면 반대쪽 바퀴도 돌아가잖아요. 그것처럼 다른 사람을 비방하지 않고 남 탓하지 않으면서 내가 할 일을 잘하면, 이 세상은 잘 돌아간다고 생각합니다. 올해 뮤지컬 ‘맘마미아’를 공연했는데, 무대에 오르기 전에 매일 그 말을 다짐처럼 했죠. 그랬더니 다른 배우들도 공연할 때 그 말이 머릿속에 맴돌아서 연기에 더욱 집중하게 되고 기억에 계속 남는다고 하더라고요. 나의 작은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2024 트렌드 모니터 최인수 외·시크릿하우스
리서치 전문 기업 ‘마크로밀 엠브레인’은 대중 소비자의 흐름을 분석해 트렌드를 전망한다. 2024년 핵심 키워드는 ‘피드백 부재가 낳은 고립된 개인’이다.
이토록 멋진 인생이라니 모리 슈워츠·나무옆의자
나이 듦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의 모리 교수는 주어진 시간을 ‘자기만의 세계’로 완성한다면 큰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공원의 위로 배정한·김영사
조경미학자인 저자는 국내외 여러 공원과 도시에 대한 생각을 58편의 에세이에 담았다. 공공 공간과 도시를 어떻게 가꾸어나가야 할지 묻는 책이다.
초간단 교양 1분만 1분만·메이트북스
구독자 96만 명의 유튜브 채널 ‘1분만’은 단 1분 만에 세상의 온갖 유용한 지식을 재미나게 알려준다. 책에는 반응이 뜨거웠던 질문을 엄선해 실었다.
아파트 공화국으로 불리는 대한민국. 2022년 인구주택 총조사에 따르면, 전체 가구의 52.4%인 1227만 가구가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다. 이렇게 아파트에 사는 사람은 늘어나는 반면, 정작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층간 소음으로 범죄까지 일어나는 게 현실이다. 그러나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아파트 ‘위스테이 별내’에서는 얘기가 달라진다. 국내 첫 ‘아파트형 마을공동체’로서, 입주민 약 1500명은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의 이웃이다. 뿐만 아니라 입주민이 직접 아파트 시설을 설계·운영한다는데, 그 모든 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알아보고자 위스테이 별내를 찾아가 봤다.
입주민이 직접 만든 커뮤니티 시설
2020년부터 사람들이 거주하는 위스테이 별내는 지하 2층부터 지상 22층의 7개 동, 총 491세대(60㎡, 74㎡, 84㎡ 3가지 주택형) 규모다. 약 1500명의 입주민은 모두 ‘위스테이 별내 사회적협동조합’의 조합원이다.
아파트는 크게 전유부(거주하는 집), 공유부, 부대·복리 시설(커뮤니티 시설)로 나뉜다. 이 가운데 위스테이는 부대·복리 시설을 입주민이 직접 설계했다. 위스테이에서는 이를 ‘커뮤니티 디자인’이라고 명칭 했으며, 입주 전부터 거의 1년간 논의의 시간을 거쳤다. 그 결과로 법정 기준의 2.5배에 달하는 2777㎡ 규모의 커뮤니티 시설이 내실을 갖춰 조성됐다.
위스테이 단지 중앙에는 잔디 광장이 있고, 그 주변으로 커뮤니티 시설이 존재한다. 교류의 장인 동네카페를 비롯해 동네책방, 동네체육관이 있다. 작게는 빨래방, 공유주방도 형성됐다. 취미를 공유하는 공간인 동네창작소와 통네텃밭도 만날 수 있다. 아파트 외곽에는 협동상회도 존재한다. 시설을 이용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하는 사람들 모두 입주민이다. 공동체 시설에 잘 어울리는 ‘동네’라는 이름 또한 투표로 결정됐다.
위스테이 별내 입주민들은 월세 10만 원을 내는데, 그중 5만 원은 커뮤니티 시설 이용료다. 입주 초기에는 ‘나는 잘 이용하지 않을 것인데 왜 5만원이나 내야 하냐’면서 볼 멘 소리를 내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입주민의 3분의 1 이상이 동아리 활동을 하고, 각자의 사연으로 커뮤니티 시설을 이용하기 때문에 다들 만족을 표한다. 위스테이에서 커뮤니티 시설은 공동체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아주 중요한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위스테이에 사는 사람들
위스테이 별내는 남양주 일대에서 ‘아이를 키우기 좋은 아파트’로 소문이 났다. 전 세대가 어우러져 살아가며 교류할 수 있고, 관련 시설도 마련돼 있어서다. 단지 내에는 산새꽃어린이집을 비롯해 미취학 아동 및 방과 후 학생을 위한 돌봄 센터가 있다. 외출 시 이웃에게 자녀를 맡기거나, 학부모끼리 고민과 정보를 공유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초고령사회 진입을 앞둔 현재, 어르신을 위한 공간은 없을까. 위스테이의 60세 이상 어르신은 30·40대 입주민의 부모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단지 내에 있는 ‘60+센터’가 그들을 위한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는 경로당이라고 하는 곳이다. 단순히 소통과 취미·여가를 위한 공간일 뿐만 아니라 일자리 창출도 힘쓴다.
“이웃은 나의 친구…여행보다 집이 좋아”
수요일 정오 무렵 ‘60+센터’에서는 맛있게 밥 익어가는 냄새가 났다. 오후 요가 수업을 앞두고 어르신들이 함께 밥 먹는 날이라고 했다. 가족을 표현하는 ‘식구’란 ‘끼니를 같이 먹는 사람’을 뜻하는데, 가족 같은 끈끈함이 느껴진다.
‘60+센터’ 어르신 가운데 김연진(76), 김석순(70) 씨와 얘기를 나눠봤다. 김연진 씨는 ‘비공식 요가 강사’이다. 시니어들의 요가 수업은 온라인 영상을 보고 따라 하는 것으로 진행되는데, 40년 넘게 요가 운동을 해온 그는 선배이자 지도자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다. 김석순 씨는 시니어 동아리 부회장을 맡고 있다.
두 사람은 이전에는 공동체 활동을 해본 적이 없었던 터로 걱정이 많았지만, 현재는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에 매우 만족하고 있다. 김연진 씨는 “최근 가족들과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그런데 힘들기만 하고, 집에 가고 싶었다. 우리 아파트가, 사람들이 많이 그리웠다”면서 “집이 제일 좋다는 것을 느꼈다”고 말할 정도다.
공동체 삶의 장점을 묻자 김연진 씨는 “여기에서 요가도 하고, 라인댄스도 배우면서 사람들하고 정답게 살다 보니 건강이 좋아졌다”고 답했다. 이웃들과 산책을 하며 쓰레기를 줍는 플러깅 활동을 한다는 김석순 씨 역시 건강이 좋아졌다고 맞장구를 쳤다. 또한 그는 “꽁날(공동체의 날)에 우리 시니어들이 공유주방에서 반찬을 만들어서 팔았다. 다들 너무 맛있다고 계속 먹고 싶다고 해서 뿌듯했다. 또 요즘은 어떤 활동을 할 때 앞장서고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있다”고 전했다.
무엇보다 두 사람은 외롭지 않은 노년을 보내게 된 점을 최고의 장점으로 꼽았다. 위스테이에는 홀로 사는 80대 할머니가 있다. 김연진 씨는 언니인 그분이 마음에 쓰여 일부러 종종 찾아가 말도 걸고 같이 산책도 하고 그랬다고 한다. 이제는 언니가 동생을 먼저 찾는가 하면, ‘60+센터’에도 자주 나오면서 달라진 모습을 보여준단다.
‘60+센터’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는 시니어는 30명 정도다. 이제 그들은 돈독한 친구 같은 사이가 됐다. 김연진 씨와 김석순 씨는 “친구가 많을 필요는 없지만, 같이 늙어가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인 것 같다”고 입을 모아 말하며 웃음 지었다. “이제 우리는 서로가 없으면 안 돼. 오죽하면 나중에 우리끼리 같이 살까라는 말도 했다니깐.”
부동산 문제 해결하는 주거 모델
대규모 아파트형 마을공동체 위스테이는 주거 안정을 꾀하는 대안적 주거 모델로 꼽힌다. 1호 별내는 경기도 남양주시에, 2호 지축은 경기도 고양시에 각각 있다. 위스테이 사업을 주관하는 사회혁신기업 더함의 김종빈 부대표는 “위스테이 사업을 시작한 지 7년째 되어간다. 초반에 정부부터 주변 사람들까지 ‘과연 가능할까’라면서 의구심을 표하는 경우가 많았다”면서 “그동안의 시간을 돌아보니 입주민의 만족도도 높고, 관리도 잘 되고 있어 ‘제법 괜찮았다’고 생각 된다”라고 말했다.
흥미롭게도 더함의 창립 멤버들은 부동산 전문가가 아니었다. 김종빈 부대표는 아름다운가게․한솔교육희망재단 등 비영리 단체 출신이다. 양동수 대표는 공익 활동에 치중해 온 변호사였다. 그럼에도 그들이 뭉친 이유는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서였고, 자연스럽게 주요 대상층은 30․40세대가 됐다.
“소득을 기준으로 국민을 10분위로 나눠봤을 때, 우리는 중위 계층에 해당하는 사람들에 집중했습니다. 그중 8, 9, 10분위는 집이 있고, 1, 2분위는 공공이 책임져야 하는 사람들이죠. 저희는 3분위부터 7분위 정도가 저희들의 타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들이 결국 30․40세대인 거죠. ‘전세 난민’, ‘하우스 푸어’, ‘영끌족’ 등 모두 30․40세대에서 시작되거든요. 그래서 입주민을 모집할 때 ‘서울 수도권에 거주하는 30·40세대 중에서 공동체 생활에 대한 거부감이 없는 자’로 아예 표적을 설정했어요.”
더함은 2016년 국토교통부(이하 국토부)의 시범사업인 ‘협동조합형 뉴스테이’의 사업자로 선정됐다. 기업형 민간임대주택 ‘뉴스테이’ 사업은 부동산 시장을 안정화하기 위한 정책으로 2015년부터 시행됐다. 그러나 애초 취지와 달리 모든 이익을 건설사가 가져가는 구조가 되어버렸다. 이에 국토부는 공공성을 보완하고자 협동조합형 뉴스테이 공모 사업을 진행했고, 더함이 선정되면서 위스테이라는 모델이 만들어진 것이다.
기존의 뉴스테이 사업은 건설사가 자금을 대지만, 위스테이는 입주민이 ‘사회적협동조합’을 꾸려 출자하는 방식을 취했다. 건설사는 단순 도급 형태로만 참여했다. 이를 통해 임대료를 주변 시세 대비 20% 저렴하게 제공하게 됐다. 별내는 보증금이 2억 5000만 원, 지축은 2억 9000만 원이다. 그중 4000만 원은 협동조합원으로 내는 출자금(임대차 계약 해지 시 환급)이다.
“위스테이는 ‘민간임대주택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의무 임대 기간을 8년으로 정했고, 2년마다 재계약을 진행합니다. 별내는 이미 한 차례 재계약을 했는데, 보증금은 동결이었으며 임대료는 단 1% 상승했어요. 법의 기준은 1년에 5%씩 상승 가능해서 최대 10%까지 올릴 수 있죠. 그러니까 위스테이는 비용적인 측면만 봐도 좋은 부동산 주택 대안이라고 생각합니다. 8년 이후에는 어떻게 할지는 아직 정해진 게 없어요. 우리 사업 구조가 조합원들에게 이익이 되는 구조이긴 하지만, 법 개정 요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답을 찾아가야죠.”
김종빈 부대표는 위스테이는 ‘어포더블 하우징’(Affordable Housing)을 추구한다고 밝혔다. ‘중·저 소득자를 위한 저렴 주택’으로 번역되는 경우가 많은데, ‘합리적 주택’이 맞는 표현으로 보인다. 그는 “어포더블 하우징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첫 번째, 장기간 거주가 가능해야 한다. 두 번째, 합리적 주택 비용을 지불하는 정도 수준이어야 한다. 세 번째, 그 안에 좋은 커뮤니티가 존재해야 한다. 위스테이는 그 세 가지의 기본 개념을 충족했다”고 강조했다.
공동체 생활 주거 늘어나야
위스테이는 아파트에 거주하면서도 공동체가 살아있는 마을을 만들고, 나아가 지역사회에도 기여하는 모델을 그렸다. 무엇보다 공동체가 잘 유지되기 위해서는 ‘지속가능성이 담보’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평생학습 모델인 ‘100개 마을 학교’와 ‘100개 마을 일자리’를 목표로 세웠다.
“100개 마을 학교는 이미 다 채웠어요. 악기 연주, 스포츠, 목공 등의 만들기 등, 현재 동아리를 보면 마을 학교에서 이어진 경우가 많죠. 그러나 일자리 제공은 50여 개밖에 되지 않았어요. 세입이 창출돼야 지속가능성을 담보할 수 있기 때문에, 마을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내는 것이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마을 일자리는 양질의 일자리는 아니에요. 바리스타, 경비, 청소 등의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는데, 가정주부나 시니어가 하기 적합한 파트 타임 일자리가 많은 편이죠. 좀 더 양질의 일자리로 목표를 이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더함의 직원 10여 명은 실제로 위스테이에 거주하는 입주민인데, 김종빈 부대표는 지축에 산다. 적극적으로 공동체 활동 참여도 하고 있다. 목공 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하는가 하면, 한 달에 한 번은 아들과 영화를 보고 감상평을 나누는 모임에 참석한다. 직접 거주하며 느낀 공동체 생활의장점을 묻자 그는 객관적인 시선을 위해 아내의 얘기를 전했다.
“사실 제 아내가 좀 내향적인 성격이어서 위스테이로 이사 올 때 썩 내켜 하지 않았어요. 남편이 위스테이 사업을 하는 사람이니까 동네에서 좀 알려지게 될 것 같고, 민원도 받을 것 같고 조금 부담스러웠나 봐요. 그런데 이 공간이 주는 힘이 긍정적인 영향으로 작용해서 지금은 굉장히 만족하면서 살고 있어요. 둘째 딸이 초등학교 2학년인데 학부모들끼리 엄청 친해졌더라고요. 여행도 다녀올 정도로요. 또 단지 내 카페에서 바리스타로 일하면서 사람들하고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공동체로 산다는 것은 분명 좋은 점이 많다. 그러나 가족끼리도 싸우는데 ‘갈등’이 존재하지 않을 수 없을 터. 더함은 이를 예상했고, 조합원들이 입주 전 갈등 조정 교육을 60 시간 이상 이수하도록 했다. 또한 위스테이는 갈등 조정 위원회도 두고 갈등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한다. 공동 주택인 아파트에서 발생하는 3대 분쟁은 주차·층간 소음·반려동물 문제를 들 수 있다. 특히 반려동물을 가족처럼 생각하는 ‘펫팸(Pet+Family)족’이 늘고 있는데, 위스테이에서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별내에서는 입주 초기에 반려동물 훈련을 전문적으로 하는 분과 함께 ‘별나개(별내에 나쁜 개는 없다)’ 워크숍을 했었어요. 반려동물을 키우는 가족을 상대로는 에티켓에 대해 얘기했고, 반려동물을 키우지 않는 가족에게는 예상되는 불편함에 대한 의견을 수렴했죠. 그리고 세 번째로 같이 모여서 약속했어요. ‘목줄 잘 채워줘’, ‘배변 잘 치워줘’ 등의 약속이 오갔죠. 별내에서는 2년 전 조사 결과지만, 30~40% 정도 가구가 반려동물을 키우고 있어요. 1인 가구 거주율이 높은 지축은 50% 가까운 사람이 반려동물을 키우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지축에서는 목공 동아리에서 반려동물의 배변을 치울 수 있는 간이 부스를 만들었고, 운영은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의 동아리가 하고 있기도 합니다.”
김종빈 부대표는 물론 입주민은 위스테이와 같은 좋은 주거 모델이 지속해서 나오지 못하는 상황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꼭 위스테이 3호가 아니더라도 ‘공동체 생활이 가능한 합리적인 가격의 주거 모델’이 늘어나길 바라는 마음이다.
“박근혜, 문재인, 현재의 윤석열 정부까지. 대통령이 세 번이나 바뀌는 기간이었는데, 정부의 협동조합형 공공지원 민간임대주택 공모는 딱 한 번 이뤄졌어요. 위스테이와 같은 주거 유형은 대한민국의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적 모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에는 2100만 가구가 사는데, 딱 1000세대만 독특한 모델인 위스테이에 살고 있는 거죠. 앞으로 정부의 노력도 이뤄져서 그 숫자가 늘어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대한항공이 일본 고마쓰와 아오모리 정기편 운항을 재개한다. 이번 복항으로 대한항공의 일본행 하늘길을 모두 되살리면서 코로나19 팬데믹 이전 수준으로 회복한다.
대한항공 인천~고마쓰 노선은 올해 12월 28일부터 운항을 재개한다. 가는 편은 오전 7시 35분 인천공항을 출발해 같은 날 오전 9시 20분 고마쓰 공항에 도착한다. 오는 편은 현지에서 오전 11시 15분에 출발해 같은 날 오후 1시 25분 인천공항에 도착한다.
대한항공 인천~아오모리 노선은 내년 1월 20일부터 운항을 재개한다. 가는 편은 오전 10시 30분 인천공항을 출발해 같은 날 오후 12시 50분 아오모리 공항에 도착한다. 오는 편은 현지에서 오후 1시 55분에 출발해 같은 날 오후 4시 55분 인천공항에 도착한다.
인천~고마쓰, 인천~아오모리 노선은 각각 화·목·토 주3회 운항한다.
고마쓰 공항은 일본에서 매력적인 여행지로 꼽히는 이시카와현에 위치한다.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며 아름다운 바다 경치를 감상할 수 있고, 겨울에는 많은 눈이 내려 스키장을 방문하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17세기부터 이어온 도자기·칠기 기술 등 일본 전통 수공예 중심지로도 알려졌다. 고마쓰 공항은 일본의 알프스라 불리는 산악관광루트 ‘알펜루트’에 보다 가깝게 접근 가능한 경로다.
아오모리는 ‘숨은 보석’이라고 불리는 일본 소도시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시라카미 산지와 산리쿠 후코 국립공원에서 대자연 경관을 만끽할 수 있다. 아오모리현 히로사키성에서 열리는 설등 축제와 자연에 둘러싸여 온천욕도 즐기기 좋다.
이번 복항으로 대한항공은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에 취항했던 일본 12개 노선(인천발 기준)을 모두 회복한다. 일본 도쿄/나리타·하네다, 오사카/간사이, 나고야, 후쿠오카, 삿포로, 니가타, 오카야마, 가고시마, 오키나와, 고마쓰, 아오모리 왕복편 노선을 운영한다.
코로나19 엔데믹 이후 해외여행 수요가 증가한 데 이어 엔화 가치가 떨어지며 일본행 노선 탑승률은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대한항공 관계자는 “늘어나는 여행 수요에 적극 대응하고 여객 서비스 정상화를 위한 노력을 계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시니어가 실버타운에 거주하는 이유는 무엇이고, 직접 살아본 후에는 어떤 부분에 만족감을 느낄까. 이러한 궁금증을 서울시니어스 분당타워에 거주하는 이용승·민신자 부부의 이야기를 통해 풀어봤다.
“아름다운 이별을 하고 싶어서 들어왔어요.” 이용승(81)·민신자(80) 부부는 지난 2월 서울시니어스 분당타워(이하 분당타워)에 입주했다. 함께 산 시간이 반백 년이 넘었는데, 지금도 손을 꼭 잡고 다니는 그들은 애정이 넘쳐 보인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 손을 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100세 시대라고 하지만, 언젠가는 우리가 헤어질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지금까지 우리는 행복하게 잘 살아왔어요. 누구일지는 모르지만 한 사람이 먼저 떠날 테고, 그러면 남은 한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걱정이 된 거죠. 그래서 혼자서도 잘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실버타운을 생각하게됐습니다. 준비부터 입주까지 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어요.”
실버타운 살았더니 회춘
이용승·민신자 부부는 실버타운 전문 유튜브 채널 ‘공빠TV’를 통해 ‘실버타운’을 처음 알게 됐다고 한다. 경기도 용인시 죽전에 거주하던 부부는 그때부터 서울·경기 지역의 실버타운을 가능한 한 많이 다녀보면서 공부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선택한 곳이 바로 분당타워다.
“실버타운에 입주하겠다고 마음먹은 후 집을 팔고 전세로 살았어요. 그리고 입주 신청을 한 실버타운 네 군데에서 연락 오기만 기다렸죠. 만약 연락이 오지 않으면 전셋집을 2년 더 연장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다행히 분당타워에서 자리가 났다고 연락이 온 거죠. 분당타워에서 연락이 와서 정말 다행이에요. 입주 전부터 생각한 분당타워의 장점은 자연환경이 좋고, 분당서울대병원이 가까이 있다는 점이었어요. 저희 경제 수준과 제일 잘 맞는 곳이기도 했고요. 직접 살아본 후 느낀 만족도는 최상입니다.”
사실 이용승 씨는 실버타운 입주를 원치 않았다고 한다. 그런 그를 민신자 씨가 열심히 설득했다. 자식들의 반응도 달랐다. 딸은 부모의 뜻을 바로 존중해줬지만, 아들은 계속 마음이 내키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부모가 실버타운에서 만족스런 삶을 사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바뀌었단다.
“실버타운에서 살겠다고 했더니 아들이 ‘그냥 아파트에서 사시면 안 되겠냐’고 하더라고요. 우리 부부가 외부와 단절될 것 같고, 적응을 못 할까봐 걱정이 됐나 봐요. 그러다가 추석 때 아들이 왔는데, 함께 시간을 보내고 나서는 마음이 좀 달라진 것 같았어요. 여기 직원분이 추석 연휴 전에 가족이 몇 명 방문하는지 조사했어요. 그리고 명절 당일 혼자 계신 분들은 먼저 식사하도록 했고, 가족이 오는 분들은 인원수에 맞게 자리를 마련하고 음식을 준비해놨더라고요. 가족이 10명 정도 온 팀도 있었죠. 그걸 보면서 아들이 느낀 바가 많아 보였어요.”
부부가 실버타운에 거주하면서 가장 만족한 부분은 건강이 좋아졌다는 점이다. 민신자 씨는 남편의 머리를 만지면서 “이것 봐, 이렇게 머리카락이 났다니까”라고 장난스레 말하다가 이내 눈물을 터뜨렸다. 남편 이용승 씨는 남들에게 허락된 ‘건강’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터였다.
40대 때 간경화가 발병한 이용승 씨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둘 정도로 건강이 악화됐다. 그는 “그때는 체중이 43kg까지 내려갔다. 지금은 60kg대를 유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젊은 나이에 퇴직한 이용승 씨는 취미를 살려 전문 사진작가로 활동했다. 민신자 씨는 교장 선생님으로 퇴직했는데, 3년 전부터 건강이 급격히 안 좋아졌다. 이는 부부가 실버타운에 입주한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남편이 아프면서 건강관리의 첫 단계인 식사가 중요해졌어요. 신경을 많이 썼는데, 제가 아프면서는 식사 준비가 힘들어진 거죠. 남편이 밥을 하고, 반찬은 아들이 온라인에서 주문해주는 걸로 먹었어요. 아무래도 건강한 식사는 힘들었죠.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은 마음에 제가 실버타운에 가자고 한 거예요. 실제로 여기 와서 영양 잡힌 맛있는 식사를 하다 보니 우리 부부는 건강을 되찾았답니다. 남편은 살도 찌고 머리카락도 나고요. 저도 친구들이 얼굴 좋아졌다고 하더라고요.(웃음)”
아파트+노인복지관 장점 모여
건강한 삶을 위해서는 식사뿐 아니라 취미·여가 생활을 즐기는 것도 중요하다. 이용승 씨는 일주일에 한 번 외출한다. 거주지였던 죽전에서 수영을 10년간 배워온 그는 현재도 그곳을 찾는다. “수영도 하고, 사람들과 저녁 식사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는 이용승 씨는 외부 활동을 이어서 지속할 수 있다는 점에 만족감을 드러냈다. 도심에 있는 실버타운의 장점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민신자 씨는 실버타운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라인댄스, 오카리나, 일본어교실 등의 프로그램을 들으면서 배움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공동체 활동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그는 기독교 자조 모임 활동을 한다.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은 함께 입주한 동기들이다.
“여기 사시는 분들이 350명 정도 된다고 해요. 만약 여기에서 트러블이 생기면 오래 살기 어렵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사람들과 원만하게 잘 지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같은 시기에 들어온 입주 동기생들과 친해졌어요. 부부 네 팀, 총 8명인데 그분들과 가끔 외식도 하고 산책도 나가요. 비슷한 삶을 살면서 뭔가 함께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생겼다는 점이 참 좋은 것 같아요.”
이용승·민신자 씨는 요즘 ‘실버타운 예찬론자’로 활약하고 있다. 건강하고 외롭지 않게 노년의 시기를 보낼 수 있는 곳. 부부가 직접 살아보고 느낀 실버타운의 장점이다. 더불어 초고령사회를 앞둔 시기이기에 양질의 실버타운이 더 늘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희 같은 부부에게도 물론 좋지만, 혼자 사시는 분들에게 실버타운은 천국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개인적으로 실버타운을 ‘아파트 플러스 노인복지관’이라고 정의합니다. 이곳에는 아파트에서 사는 것처럼 독립된 공간이 있고, 수영장・헬스장 등 복지관의 시설이 다 있어요. 집 안에서 복지관 생활을 할 수 있는 거죠. 그런데 실버타운에 들어오고 싶어도 경제적인 여건 때문에 못 오시는 분들이 많잖아요. 국가에서 노인을 위한 시설, 복지주택이 늘어날 수 있도록 힘써주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