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 서울시니어연극제 개막식 후 대학로 종로마루홀 내 모든 조명이 꺼졌다. 곧 개막작 종로노인종합복지관 시니어연극단 대학老愛(대학로애)의 ‘지하철 두더지’가 소개됐다. 암흑 속에서 살그머니 무대에 오른 유만석 씨는 생각했다. ‘잘하자. 처음이니까 더더욱 잘해야 해. 아, 실수하면 어떡하지? 그건 절대 안 돼! 연습한 대로만 하자. 잘….’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 조명이 탁 켜지고 노신사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다. 탄탄한 발성의 대사가 극장을 울렸다.
“나는 을지로3가역 역장이다. 1983년 개통된 2호선 을지로3가역은 2000년대부터 오후 12시, 2시, 4시, 6시, 하루에 네 번 분주해진다. 지하철 문이 열리면 두툼한 패딩을 입은 어르신들이 어깨에 쇼핑백을 잔뜩 메고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한곳으로 모인다. 어르신들이 내려놓은 쇼핑백들은 끝이 보이지 않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쇼핑백들은 어르신들과 함께 연기처럼 사라진다. 우리는 그들을 ‘지하철 두더지’라고 부른다.”
시작을 알리는 2분 30초 남짓의 독백. 완벽히 해냈다. 연극은 순조롭게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청년 유만석의 꿈도 일흔여덟에 다음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1945년생 ‘해방둥이’ 유만석 씨는 6·25전쟁 후 일었던 연극 붐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동족상잔의 비극 속 피폐해진 심신을 위로한 건 동네마다 가설무대를 만들어놓고 활동한 극단이었다. “휴전 이후 연극이 대단히 인기였습니다. 그때 상당히 매료됐어요. 고등학교 가서는 자연스럽게 영화를 즐겼지요. 저는 박노식 배우를 가장 좋아했습니다. 탤런트 박준규 씨 부친 말입니다. 할리우드 배우 리처드 위드마크도 좋아했지요. 저도 그런 배우가 되고 싶었어요.”
유만석 씨는 꿈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한국 최초의 종합예술대학인 서라벌예술대학(현 중앙대 전신) 연극영화학과에 입학해 배우 수업을 받았다. 그때가 1965년이었다. 기회는 곧 주어졌다. 1967년과 1968년 2년여 동안 작은 배역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꿈에 다가갈수록 벽에 부딪히는 것 같았다. 용돈벌이도 안 되는 현실 속에서 이상만 좇을 순 없었다. “대여섯 작품에 출연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든 생각은 생활의 안정 없이는 어렵겠다는 거였어요. 하루 세 끼 안 먹어도 괜찮습니다. 두 끼를 먹더라도 안정만 됐다면 계속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게 안 됐어요. 언제까지고 고향에서 돈을 받아 쓸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보내줄 수도 없을 것이고요. 배우로 인정받으려면 무수히 많은 시간이 필요해 보였습니다. 오래 활동한다고 다 되지도 않습니다. 이름 한 번 못 알리고 늙을 수도 있지요. 그 어떤 보장도 없는 생활… 접어야 했습니다. 현실이 그랬습니다. 돈을 벌어야 했어요.”
1969년 유만석 씨는 이성적인 판단을 내렸다. 아니, 내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음속에는 배우가 되고 싶은 감정이 계속해서 자리 잡고 있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호프집, 신문 판매직, 세탁소, 부동산중개업까지 하며 바삐 살다 보니 어느덧 일흔이 넘었다. “젊었을 때 마스크가 꽤 괜찮았다”며 보여준 사진 속 부리부리한 청년의 눈매는 어느덧 선하게 처져 있었다. 이제 꿈꾸기 늦은 나이라고 생각했을 때 운명은 그를 연극으로 이끌었다. “복지관은 생활이 어려운 사람을 돕는 기관인 줄만 알았습니다. 여러 특화 활동을 한다는 것은 몰랐어요. 우연히 컴퓨터를 가르쳐준다기에 와봤습니다. 가입하는데 이것저것 묻더군요. 그런데 마침 가입 상담해주신 분이 연극단 담당이었던 겁니다. 이제 와 다시 한다는 것이 어쩐지 꺼려졌는데 올해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지금이라도 해봐야겠다고요.”
유만석 씨가 가입한 대학老愛는 종로노인종합복지관의 시니어연극단이다. 2011년부터 활동한 극단 빨래터가 지역사회 노인 전문 연극단원들의 활동을 알리고 전문성을 갖춘 연극단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2015년 7월 대학老愛로 탈바꿈했다. 세대 공존 연극학교(수업, 공연)를 통해 노인 연극인을 양성하고, 격년으로 서울시니어연극제를 운영 중이다. 단원은 2023년 11월 기준 모두 12명(평균연령 71.4세). 주로 대학로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으로 구성돼 있다.
단원들은 매주 월요일 오후 2시에 모여 합을 맞춘다. 대본을 읽고, 역할을 분담하고, 내공을 덧입힌다. 그렇게 올해는 ‘지하철 두더지’를 연극제에 올리고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크지 않은 무대, 작은 역할이지만 유만석 씨는 만족해 보였다. “매주 월요일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그 두 시간이 기다려져요. 작품상이 없는데, 혹 있었다면 우리가 받지 않았을까요?(웃음)”
유만석 씨는 짐짓 차분해 보였다.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는 식의 호들갑은 없었다. 알려진 배우가 되고 싶다는 욕망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가 이토록 침착한 이유는 과거 행보로 짐작할 수 있다. 1995년 그의 나이 쉰의 일이다. 그때까지도 유만석 씨는 연기 욕심을 냈다. 역할과 분량에도 신경 썼다. 하지만 세상사는 마음처럼 돌아가지 않았다. “실은 영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 출연했습니다. 하고 싶은 역할이 있었는데 다른 배역을 맡게 됐어요. 일본인이었지요. 촬영장에서 쪽대본을 받았는데, 우리나라 말이면 어떻게든 외워서 했을 겁니다. 그런데 짧지도 않은 대사를 모르는 말로 하려니 잘 안 되더라고요. 결국 카메라를 돌려놓고 후시 녹음을 했습니다. 개봉 후 열린 시사회 무대에 오르라고 했는데 그러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내키지 않아서요. 그게 끝이었습니다.”
유만석 씨는 이제 어떤 것도 따지지 않는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 그 자체의 가치를 완전히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대뜸 그는 아들 이야기를 했다. 학창 시절 게임을 좋아해 속을 썩이던 아들은 아르바이트로 게임 회사에 들어갔다가 정식 스카우트 제안을 받고 지금까지 잘 일하고 있다고 했다. 좋아하는 일을 순수하게 따른 아들을 긍정하는 것처럼 들렸다.
다시 50여 년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스물셋 유만석의 선택은 어떨까. 그는 다를 거라고 했다. “잊고 살면서도 가끔 연기 생각이 났습니다. 이따금 도전하고… 그러다 일흔여덟이 됐어요. 지금은 연기를 할 수 있다는 것, 연기를 하면서 즐겁다는 것에 만족합니다.” 후회와 아쉬움 그리고 깨달음. 그 뒤에 그는 이렇게 묻는 것 같았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연극이 끝나고 난 후연극 ‘지하철 두더지’를 올린 대학老愛 단원들의 허심탄회한 소감을 들었다. 자기반성부터 쓴소리까지 역할 크기와 관계없이 이들의 대화는 진지했다. 무대 아래 단원들은 자기 삶의 주인공으로 살고 있었다.
“돌아보니 대본 속에 우리가 지켜야 할 것들이 있었습니다. 대사에 있던 ‘7업’(깨끗하게 클린업, 용모를 단정히 드레스업, 말하기보다 듣기 셧업, 혼자 있지 말고 모임 활동 쇼업, 밝고 유쾌한 분위기 치얼업, 지갑을 열고 입은 닫는 페이업, 마지막으로 포기할 것은 포기하는 기브업)은 친구들에게도 들려줬습니다. 늙어서도 지켜야 한다고요. 무대에서 또 일상에서 박수를 많이 받았습니다. 연극 덕입니다. 감사합니다.” - 배우 남궁유선
“작은 역을 맡았지만 나름대로 카리스마를 보여준 것 같아서 만족스럽습니다. 긴 대사를 외우고 능청스럽게 연기하는 다른 단원들을 보면서 배우고 또 배웁니다.” - 배우 신동숙
“하루는 대사를 외웠는데도 자꾸 실수해서 울었습니다. 암기는 자신 있었는데 잊어버리는 스스로에게 좌절감이 들었어요. 그래도 그 눈물이 더 열심히 하자는 다짐을 하게 해주었습니다. 또 다른 도약을 기대해볼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 배우 양숙자
“딸에게 어떤 옷을 입으면 좋을지 물었는데 대뜸 ‘현장에 한 번이라도 가봤냐’고 했습니다. ‘대본만 앵무새처럼 외워서 하는 게 과연 연극이라고 할 수 있냐’며 신랄하게 비판하더군요. 그 말이 가슴에 꽂혔습니다. 그동안 너무 편하게 해온 건 아닌가 반성했습니다. 좀 더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연기에 임해야겠습니다.” - 배우 구신자
“현실의 저는 사람을 앞에 두고 화를 내는 성격이 아닙니다. 평소와 다른 모습을 끌어내는 게 연극의 매력이라고 매번 느낍니다.” - 배우 송원자
“지금까지 연극을 올릴 수 있도록 도와준 모두에게 감사합니다. 한 가지 단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연극 무대에서 사설은 피해주셨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내 연기, 그리고 내 것에 몰입했으면 좋겠습니다.” - 배우 김정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