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세대 1주택 60세 이상 고령자에 대한 종합부동산세(이하 종부세) 납부 유예 제도가 새롭게 도입된다.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이날 제40차 부동산시장 점검 관계장관회의를 열고 최근 부동산 시장 동향을 점검한 뒤 1세대 1주택자 지원 방안을 논의하고 관계부처 합동브리핑을 통해 ‘2022년 공동주택 공시가격안’과 ‘1세대 1주택자 보유세 부담 완화 방안’을 발표했다.
먼저 소득이 없거나 적어서 보유세에 부담을 느끼는 고령층의 종부세 납부 시점을 양도·증여·상속까지 유예한다. 종부세 세액이 100만 원 이상인 60세 이상의 1세대 1주택자를 대상으로 하는데, 직장인이라면 연봉 7000만 원 이하, 자영업자라면 종합소득 6000만 원 이하의 소득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고령자 종부세 유예는 종부세법 개정이 필요한 사안이다.
또한 한시적으로 1세대 1주택자 보유세의 전반적 부담은 지난해와 비슷하도록 유지하고, 건강보험료 혜택에도 영향이 없도록 한다.
올해 전국의 아파트 공시가격이 지난해보다 평균 17.2% 오른 것으로 나타난 가운데, 공시가격 급등으로 인한 세금 폭탄을 맞지 않도록 1주택자에 한해서 지난해 공시 가격을 적용한다.
1가구 1주택자(올해 6월 1일 기준)라면 재산세와 종부세 과표 산정 시 지난해 공시가격을 적용할 방침이다. 다만 올해 공시가격이 지난해와 같거나 낮을 경우에는 올해 가격을 적용한다.
지역가입자 건강보험료 산정 시에 활용하는 과표도 지난해 수준으로 동결할 계획이다. 재산공제액도 재산 규모와 상관없이 5000만 원으로 일괄 적용한다.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관계장관회의에서 “부동산 시장은 특성상 수급 상황뿐 아니라 유동성, 기대 심리요인 등 여러 요인이 얽힌 복합시장”이라며 “정부 교체기를 앞둔 지금 부동산 시장 가격의 하향 안정세가 흔들리지 않도록 시장 상황을 안정적으로 관리해 나가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차기 정부가 확고한 시장안정 기반 하에 국민 주거안정을 추진할 수 있도록 사전청약, 공공재개발 등을 포함한 시장 안정 정책 역량에 집중해 마지막 순간까지 총력 경주하겠다”며 “확정안에 대해서는 법령 개정안 발의, 전산시스템 개편 등 후속 조치를 신속하게 진행하겠다”고 덧붙였다.
은퇴를 앞둔 86세대는 걱정이 많다. 우선 고정적인 수입이 끊긴다는 점이 공포스럽다. 하루가 다르게 느껴지는 신체적 변화도 두렵다. 일만 열심히 했던지라 은퇴 후 닥쳐올 방대한 시간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도 막막하다. 이런 그들을 위해 일하는 은퇴자 컨설턴트가 있다. 같은 고민을 공유하기에 그의 자산관리뿐만 아니라 인생 2막 설계 서비스는 호응도가 높다. 동년배 친구와 강사, 컨설턴트를 넘나들며 고객의 마음이 편해지도록 돕는 86세대 이관석 신한은행 은퇴솔루션 컨설턴트를 만났다.
이관석 컨설턴트는 명예퇴직한 회사에 재취직한 케이스다. 기하급수적으로 커지는 퇴직연금 시장에서 실제로 은퇴해본 자산관리 경력자가 필요하다는 은행장과 퇴직연금사업그룹장의 판단으로 이뤄진 일이다. 명퇴 전 자산 규모 50억 이상 초고액 자산가들의 자산관리 업무를 맡았던 경험을 인정받은 것이다.
이전에 비해 보수도 적고 업무량도 소일거리에 가까운 수준이지만 일은 만족스럽다. 그간 해왔던 업무 지식과 경험을 활용해 일할 수 있어서 현재 맡고 있는 ‘은퇴 자산관리 컨설팅’은 앞으로 발전할 유망 분야를 개척한다는 자부심도 있다.
무엇보다 은퇴를 앞둔 동년배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어 보람차다. 일대일 은퇴 컨설팅을 진행할 때면 고객의 성향을 파악하는 일을 우선시한다. 솔루션 제공은 그 다음 일이다. “본인은 은퇴 후 일터를 떠나 여유롭게 살고 싶어 하는데 백세 시대이니 무조건 일하라고 한다거나, 계속 일하고 싶은데 경제적으로 준비가 잘 되어 있으니 일터를 떠나 여행하고 놀러 다니라고 조언한다면 듣는 사람 마음이 편할까요?” 같은 시대를 살아왔고, 이미 은퇴를 경험해본 데다 숱한 컨설팅 경험으로 다져진 그다. 이관석 컨설턴트는 1년째 하고 있는 컨설팅과 강의가 마냥 즐겁다.
“86세대, 수혜자이자 낀 세대”
그가 평가하는 86세대는 고도성장의 수혜자이자 자식 부양을 받지 못하는 낀 세대다. 어릴 적 가난하고 힘든 시절을 보냈지만, 본인 노력 여하에 따라 충분히 경제·사회적 신분 상승이 가능했고, 집도 한 채씩은 마련할 수 있는 환경을 누렸다는 것. 하지만 정호승 시인이 말했듯 누구나 자신의 어깨에 짊어지고 가는 삶의 무게는 비슷하다. 86세대는 부모를 부양해야 하지만 자식에게는 부양받지 못하는 최초의 세대가 되었다.
그런 그들의 주된 관심사는 단연 건강이다. “나이 50이 넘어가면 몸이 하루가 다르게 나빠지는 것을 느낍니다. 나이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만난 자리의 대화 주제는 거의 대부분 건강입니다. 어디가 어떻게 안 좋아졌는지, 그래서 무슨 조치를 취했는지, 무엇이 효과가 좋았는지 등을 얘기해요. 서로 가진 정보를 교환하는 것이죠.”
건강 다음은 전혀 달라질 인생 2막에 대한 걱정이다. 장수는 축복이라는 것도 점차 옛말이 되어가는 시대, 요즘 86세대는 ‘오래 사는 위험’에 대해 고민이 많다. 은퇴 후 40~45년을 살아가야 할 이들의 고민거리를 한 가지씩 추려내니 무려 다섯 가지나 된다. 첫째 유병(有病)장수, 둘째 무전(無錢)장수, 셋째 무업(無業)장수, 넷째 독거(獨居)장수, 마지막으로 투쟁(鬪爭)장수다. “돈 걱정 없고 건강하고 화목하게 오래 살 수 있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럴 수 없다는 걸 다들 알고 있으니 걱정하는 것이지요.”
고객들의 고민 대부분은 그도 공감하는 바이나, 무전장수에 대해서는 생각이 조금 다르다. “건강만큼이나 노후생활비에 대해 고민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과도한, 어찌 보면 쓸데없는 고민이라고 생각해요. 매달 받던 월급은 끊기고, 다달이 지급되는 국민연금으로는 생활하기 어려우니 걱정하는 마음이 드는 것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과도한 걱정이에요.”
2018년 통계청이 발표한 은퇴한 노부부 월 적정생활비는 283만 원, 최저생활비는 197만 원이다. 그간의 물가상승률을 감안해야겠지만, 그는 국민연금에 더해 퇴직금을 연금으로 수령하는 퇴직연금제도를 이용하면 충분한 노후생활비를 마련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퇴직연금을 준비하지 못한 채 은퇴했더라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하므로 전문가 상담을 받는 것도 좋다.
은퇴자 자산관리 컨설팅에 나설 때 그가 강조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퇴직금을 일시금으로 찾지 말고 연금으로 수령하라는 것. 세금 절세는 물론 금융소득종합과세, 건강보험료 등을 포함한 모든 면에서 연금으로 수령하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은퇴자가 빠지면 안 될 4대 크레바스
크레바스(Crevasse)란 빙하가 갈라져 생긴 좁고 깊은 틈이다. 한번 빠지면 구조되기 어려워 목숨을 잃을 정도로 위험한 지형으로, ‘소득 크레바스’나 ‘연금 크레바스’ 등 경제·사회적 위험 요소를 설명할 때 자주 등장한다. 이관석 컨설턴트는 컨설팅, 은퇴자 대상 강의에서 4대 크레바스에 대한 설명을 빼놓지 않는다.
‘배우자 크레바스’는 은퇴한 남성들에게 특히 위험한 크레바스다. 은퇴 후 집에서 배우자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면 갈등이 생기기 마련이다. 자칫하다 크레바스에 빠져 이혼하게 되면 앞으로의 노후가 암담해지는 것은 물론, 살아온 인생 자체가 허망해지기 쉽다. “세계 최고 부자 빌 게이츠를 보세요. 최근 배우자 크레바스에 빠져 그가 모은 재산이 반토막 나고, 그간의 명성에도 먹칠을 하지 않았습니까?”
두 번째는 자식 크레바스다. 자신의 노후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음에도 자식의 유학, 결혼, 사업 자금을 대다 노후가 불행해지는 경우를 의미한다. 어느 부모가 자식에게 잘해주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는 본인이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지원해주라고 말한다. 과도하게 지원하다 노후 자금이 축나서 훗날 부양 부담을 지우는 것보단, 부모와 자식 모두에게 더 나은 선택이기 때문이다.
그 역시 두 아들에게 미리 이야기를 해두었다. “법적으로 성인인 자녀에게 비과세로 증여할 수 있는 한도는 5000만 원입니다. 그래서 아들들에게 미리 말했지요, ‘너희 결혼할 때 5000만 원씩 주겠다. 단, 어떠한 부양도 받지 않겠다’고요.”
세 번째 크레바스는 사업이다. 은퇴하는 사람 중 다수가 재취업이나 창업을 꿈꾼다. 현금 흐름을 만든다는 측면에서 바람직한 건 재취업이지만, 퇴직금이라는 목돈을 갖고 있는 이들은 창업의 유혹에 곧잘 넘어가곤 한다. 하지만 그는 창업을 추천하지 않는다고 힘주어 말했다.
“전에 하던 일이 있는데 고작 그런 일을 어떻게 하느냐며 창업을 꿈꾸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대기업 직원이나 은행원, 군인, 공무원, 교사처럼 세상사에 비교적 적게 노출된 이들이라면 더더욱 피해야 해요. 생각보다 손실이 나기 쉽고, 그 손실을 메우기란 정말 어렵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크레바스는 투자다. 은퇴 자금으로 주식, 부동산 외에도 비트코인 같은 가상화폐에 투자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났다고 말하며 우려를 표했다. 제대로 된 지식 없이 공격적인 투자를 하다 큰 손실을 입고 그 충격에 건강까지 해치는 경우를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그가 추천하는 보편적인 투자 방법은 ‘100-나이 투자법’이다. 숫자 100에서 현재 나이를 뺀 숫자의 비율만큼만 원금 손실 가능성이 있는 주식이나 펀드에 투자하고, 나머지는 예금이나 TDF를 활용해 안정적인 운용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나이가 60세라면, 100에서 60을 뺀 40%만큼만 투자하고 나머지 60%는 예금에 넣어두는 식이다. 사람마다 투자 성향이 다르므로 각자에게 맞는 투자법이란 가지각색이기 마련이나, 그는 변동성이 커 원금 손실 가능성이 높을수록 소액만 투자할 것을 권한다.
자산관리 컨설팅 외에 비재무 은퇴 컨설팅도 맡고 있는 그는 고민하는 86세대에게 다양한 조언을 건넨다. 세 가지 이상의 취미를 만들어둬라, 동호회나 도서관 등 일정하게 외출할 장소를 만들어둬라 등등.
그럼에도 제일 먼저 준비해야 할 것을 꼽으라면 역시나 건강이다. 여태껏 현업에 매진하느라 스스로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86세대가 인생 2막을 힘차게 시작하기 위해서는 건강이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돈이든 취미든, 준비는 빠를수록 좋다.
“은퇴 이후의 삶을 준비하는 시기란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건강이 우선이고, 그 다음 노후 자금을 충분히 확보하세요. 노후에 월급처럼 받을 수 있는 퇴직연금을 마련하는 것도 잊지 마시고요.”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퇴근해 돌아와 보니 아내가 짐을 싸서 집을 나갔다. 장식장과 콘솔 등 소품 자리가 빈 휑뎅그렁한 거실 한가운데에 찌무룩이 섰다가 주방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들이켰다. 찬 기운이 정수리를 타고 올라가는가 싶더니 가슴께로 싸하게 번졌다. 나도 모르게 숨을 크게 뱉었다가 크게 들이마셨다. 정신을 가다듬어야 한다. 하긴 출근길에 아내의 딸이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우는 것을 보았으니 오늘 짐을 빼겠구나 짐작은 했다. 그리 놀랄 일이나 새삼스러운 충격은 아니란 뜻이다.
이렇게 해서 다시 혼자가 되었다. 재혼한 지 1년 반 만에. 말이 1년 반이지 한 공간에서 지낸 것은 6개월도 채 되지 않는다. 다툴 때마다 아내는 버릇처럼 집을 나갔으니까. 친정도 없는 사람이 변변히 갈 데가 있을 리 없건만 마치 가출 자체로 위로를 삼는 것처럼 수틀리면 훌쩍 집을 나갔고, 그렇게 한번 나갔다 하면 몇 달씩 들어오질 않았다. 그럴 때마다 거의 내 쪽에서 화해를 청했고, 아내가 마음을 풀고 돌아오면 이번에는 내가 불안해졌다. 다시 나가지 않을까 하고. 하지만 이제 다시 돌아올 일은 없으리라. 불안할 일도 없으리라. 서로가 재혼이라 혼수를 따로 장만한 것도 없고 아내가 아끼던 자잘한 것들만 가지고 내 아파트에서 합쳤던 터라, 이번 가출은 전과 달리 물건을 모두 실어서 나간 걸 보면 이로써 우리의 인연도 끝난 것일 터. 그렇게 자꾸 나갈 거면 아주 나가버리라고 했던 건 나니까.
다시 혼자가 되어
이렇게 둘이서 서둘러 결정할 게 아니라 그 흔한 부부 상담이라도 받아봤어야 했던 거 아닐까. 갈등의 뿌리는 건드려보지도 못하고 서로 자존심만 세우다 아내도 나도 얼결에 이런 선택을 하게 된 건 아닐까. 나는 아내를 사랑했을까. 아내는 나를 사랑했을까. 함께 연주를 하기도 전에 조율 중인 악기를 내팽개쳐버린 것처럼 이런저런 생각이 마구 뒤엉키며 혼란스레 오갔다.
아내와 나는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으니 법적으로는 부부가 아니다. 그저 잠깐 동거한 관계일 뿐. 그렇게 생각하면 홀가분하다가도 성대히 치른 결혼식이 마음에 걸린다. 그랬다. 우리는 결혼식을 꽤나 성대히 치렀다. 남들 눈에 그럴 듯해 보이고 싶었던 허영심, 과시욕에서만큼은 아내와 내가 의기투합했던 것이다. 돌이켜보니 허탈감과 자괴감이 든다. 재혼의 형식만 그럴 듯했지 부부의 내실은 너무나 허약했고, 그나마 이제는 관계를 쌓아갈 토대가 사라졌다. 그렇다고 내가 재산을 지키자고 아내와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아내도 그건 인정할 것이다. 내 재산 못지않게 아내도 자기 몫이 알찬 사람이니까. 그러니 혼인신고를 미룬 이유는 서로 속 깊이 사랑하지 않아서라 할밖에. 말이 부부지 결속의 끈은 느슨했던 것이다.
동병상련의 사랑
나는 20년 전에 상처(喪妻)를 했다. 대학 선배의 소개로 만난 두 살 아래 전처와의 10년 결혼 생활은 만족스럽고 행복했다. 서른 살에 결혼하여 이듬해와 또 그 이듬해에 연년생 남매를 낳았다. 아이들은 건강하고 영리했다. 안정된 나의 직장과 가정을 소중히 보살피는 아내, 무엇을 더 바란다면 죄를 짓는 느낌이 들 만큼 평범하지만 안온한 생활이었다. 아내가 간암 판정을 받을 때까지는. 그랬던 우리가 무엇을 더 바라는 죄라도 지었던 것일까. 서른여덟 살 젊디젊은 아내는 그렇게 우리 세 식구를 남겨두고 1년 투병 끝에 훌쩍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사랑하고 아끼던 아이들을 남겨두고. 아홉 살, 여덟 살 남매는 엄마를 잃었고 나는 나이 마흔에 아내를 잃고 홀아비가 되었다. 이후 직장과 가정을 병행하여 돌봐야 했던 지난 20년, 고달프고 서글프고 버거워 견딜 수 없을 때면 아내의 묘를 찾아가 “나는 이렇게 힘든데 당신은 어쩌면 이렇게 태연히 누워 있을 수 있냐”고 원망과 푸념을 쏟아내곤 했다.
아내가 떠난 후 남은 우리 세 식구는 함께 외식을 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아내가 없는, 엄마의 자리가 빈 가족 외식은 그 존재의 부재를 더욱 각인시키며 누가 뭐라는 것도 아니건만 식당에 앉아 있는 내내 위축감을 느끼게 했다. 부부와 자녀들이 함께 식사하는 모습을 볼 때는 더욱 그랬다. 저 평범한 일상이 우리에게는 더 이상 주어질 수 없다는 쓰라림과 함께.
아내를 따라 나도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내 책임을 다한 후 이담에 저세상에서 아내를 만나 단단히 생색을 내자며 오기 아닌 오기로 버텨온 것이 어느덧 20년. 30세가 가까운 남매는 아직 미혼이긴 해도 둘 다 직장이 있으니 내 역할은 끝났다고 생각할 즈음, 지금 막 헤어진 두 번째 아내를 만났다. 그간 주변에서 재혼 권유나 소개가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아이들을 생각해서 마다해왔던 것을 이제는 마음을 좀 열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을 때였다.
막 헤어진 지금의 아내도 나와 비슷한 시기인 38세 때, 세 살 많은 남편을 교통사고로 잃고 딸 하나를 데리고 혼자 살아왔다. 설 명절을 지방 시댁에서 보내고 귀경하던 눈길 고속도로에서 타고 오던 차가 미끄러지면서 중앙 분리대를 박으며 순식간에 일어난 사고였다. 피로를 덜고자 부부가 교대 운전을 하고 있었고, 사고 당시 운전대는 아내가 잡고 있었다. 옆자리의 남편은 중상을 입은 후 병원에서 사망했고, 뒷자리에 앉아 있던 다섯 살 딸과 자신은 큰 부상을 입지 않았다.
허울뿐인 결혼
딸을 키우며 20년 가까이 혼자 살아온 아내. 야무지게 자신을 지키며 강한 생활력과 다져진 실력, 철저한 자기 관리로 직장의 잔뼈가 제법 굵어져 나를 만날 무렵에는 꽤 높은 위치에 올라 있었다. 나는 지금 대표 자리에 있는 회사에서 당시는 중역이었기에, 어느 경제인 조찬 모임에서 회사를 대표하여 참석한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열 개 남짓 마련된 원탁 가운데 마침 한 테이블에 앉게 되어 서로 명함을 주고받으며 인사를 나눈 것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우리는 사별의 아픔을 겪은 공통점으로 인해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같은 모임에서 다시 한번 우연히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되자 우연을 인연으로, 인연을 필연으로 연결시키고자 하는 갈망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음을 열었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봤다고 할까. 느낌이란 게 있다고 할까. 우리는 연민과 연정으로 그렇게 한 마음, 한 몸이 되었다.
우리의 성대한 결혼식은 조찬 모임 참석자들을 의식한 점도 작용했다. 경제인 단체 회원 중에 커플이 탄생한 것도 이례적이거니와 그들의 사회적 신분을 고려할 때 아예 가족끼리 조촐히 치르면 모를까, 식을 올린다면 하객들의 신분에 걸맞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지금은 모두 부질없는 짓일 뿐 아니라 크게 벌인 만큼 창피한 일이 되어버렸지만. 실상 말이 가족끼리지 그녀에게는 부모님도, 가까운 친척도 안 계셨고, 나도 다른 형제 없이 홀로 자라 연로하신 어머니 한 분뿐이니 조촐하다 못해 초라한 모양새가 될 게 뻔했다. 결국 사회에서 연결된 지인들을 모시다 보니 나와 그녀의 직장 관계자까지 초대하여 그만 식이 커져버린 것이다.
기가 막히게도 아내는 대학 3학년 때 양친을 한날한시에 교통사고로 잃었다. 그때도 어느 해 설에 부모님과 함께 지방의 조부모님을 뵙고 올라오던 때였다고 한다. 뒷좌석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졸고 있었던 그녀는 사고 후 혼자 살아남았다. 운명이란 게 있다면 그녀에게는 같은 운명이 반복되었던 것이다. 학생 때는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고, 결혼 후에는 역시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었으니. 또한 부모를 잃은 자신의 운명을 딸에게 그대로 넘겨줬다.
굶주린 애정
아내와 그녀의 딸은 처음에는 나와 한집에 살았다. 아내를 위한 나의 배려였다. 또한 두 사람이 불편하지 않도록 나의 두 아이는 따로 거처를 마련해서 내보냈다. 한평생 의지하고 살아온 아내와 아직 미혼인 아내의 딸을 떼어놓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화근이었을까. 모녀는 한 몸처럼 결합되어 도무지 내가 끼어들 여지를 주지 않았다. 다툼의 원인이 아내의 딸 때문일 때도 종종 있었다. 가령 무질서한 생활 습관이나 늦은 귀가 시간에 대해 몇 번 주의를 줬더니 그게 서운했던지 내게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제 엄마랑만 속닥거린 후 독립을 해버렸다. 그때 나는 내심 잘됐다는 생각도 들었고, 제 발로 나가준 것이 고맙기도 했다. 내 아이들을 생각할 때 공평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아내와 나 본격적인 둘만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집을 나가는 아내의 버릇도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딸의 아지트가 있었으니까. 채 정이 들지 않은 나와 사는 것보다 딸과 지내는 것이 더 익숙하고 편했던 거겠지. 관계가 본격적으로 엇나가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부부로 정이 들기도 전에 균열이 깊어가고 있었다. 그러고는 오늘의 결별을 맞은 것이다.
나도 아내도 첫 결혼에서 배우자를 일찍 여의고 혼자 모든 것을 감당해야 했다. 외롭고 팍팍한 길을 걸으며 사랑에 굶주려 있었다. 상대의 빈 가슴을 채워주기보다 나의 허기가 먼저였다. 그만큼 새로 만난 사람에 대한 기대가 컸던 것이다. 남자로서 내가 좀 더 아량이 넓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보지만 그 또한 생각일 뿐, 그게 말처럼 쉽다면 지금의 이 상황을 마주하지는 않았을 터. 누구를 탓하랴. 탓할 것은 내 팔자요, 그녀의 팔자일 뿐. 여하튼 지금은 쉬고 싶을 뿐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적막한 산촌이다. 길섶은 잔설로 하얗다. 해발 500m 고지대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토박이들은 이곳을 ‘하늘 아래 첫 동네’로 친다. 좀 전에 빠져나온 문경의 도심이 현세의 바깥처럼 멀어진다. 세사의 아귀다툼도, 부질없는 불화도 틈입할 수 없는 오지이니 소란과 소동을 싫어하는 이에겐 낙원? 이창순(67, 흙집펜션 산모롱이 대표)에겐 그랬다. 조여진 마음의 현(絃)을 탁 풀어놓고 느린 선율처럼 여생을 자유롭게 연주할 수 있는 적지라 봤다.
“귀촌지를 물색하다가 이 마을을 만난 건 행운이었다. 야, 여기다! 더 볼 것도 없다! 내심 환호성을 질렀지. 눈에 콩깍지가 씌었던 셈이다.(웃음)”
건설회사 토목 담당 직원이었던 남편 이경구(69)를 따라 도시를 전전하며 살았던 이창순에게 귀촌은 오래 묵은 숙원이었단다. 나, 언젠가 시골에서 살리라. 새들이 지저귀는 뒷산을 산책하고, 영혼을 어루만져주는 음악을 즐기고, 밤엔 별처럼 떠오르는 상념을 건져 올려 새끼줄을 꼬듯 긴 글을 쓰며, 나 마침내 산골 자연의 일원으로 돌아가리라. 그런 염원이 샘물처럼 퐁퐁 솟았던 모양이다. 진심으로 간절하면 뛰어들게 마련이다. 그는 상주시에 있었던 모든 살림을 정리하고, 과녁을 향해 직진하는 화살과도 같은 쾌속질주로 귀촌을 결행했다.
이창순이 이 산촌에 옴짝달싹 못 하게 꽂힌 건 수려한 산수 때문만은 아니었다. 착한 가격으로 나온 너와 지붕 황토집이 그를 행운처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준공검사도 마치지 않은 신축 흙집의 평화롭고 참신한 자태에 억누르기 어려운 감흥을 받았던 것. 결함이나 난관이 없는 귀촌이었던 셈이다. 매사 꼼꼼하면서 과묵한 성정의 소유자라는 남편 역시 아내의 주동에 선선히 따랐단다. 결국 이창순은 이상적인 귀촌 생활의 기반을 마련했던 것이며, 이제 낭만과 만족으로 자신을 가득 채우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행운의 여신은 때로 따분하면 변덕을 부리는 법. 인간의 반응이 어떠한지 조사하기 위해 심술쟁이가 된다. 뜻하지 않게 남편이 너무 이른 실직을 했다는 게 아닌가.
어휴, 이제 뭘 먹고 살지?
“우리가 귀촌한 게 15년 전이다. 당시 남편은 겨우 50대 초반이었다. 한창 일할 때라 상주시에서 직장 생활을 계속하며 주말부부로 살기로 하고 귀촌을 했던 거다. 그런데 귀촌 1년 만에 남편이 실직했다. 좋았던 시절이 단 1년 만에 끝날 줄을 어떻게 알았겠나? 어휴, 이제 뭘 먹고 살지? 생계가 순식간에 막막해지더라고.(웃음)”
미리 모아둔 생활자금이 없었나?
“가진 재산 전부를 긁어모아 540평 대지에 지은 황토집을 샀다. 남편의 수입으로 살면서 은퇴 이후를 대비할 경제활동을 천천히 모색하면 된다고 구상했었는데, 돌연한 실직으로 비상 상황을 맞이했다. 그렇다고 기죽어 지낼 일도 아니지. 뭔가 돈벌이를 찾아내면 된다는 쪽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외떨어진 적막강산 시골에서 호구책을 찾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결혼 이후 난 직장 생활을 해본 적이 없었다. 자식 농사가 최고려니 하고 집 안에서만 살았으니까. 이런 내가 시골에서 가능한 돈벌이가 무엇일까? 궁리 끝에 답을 찾았다. 전에 곶감 명산지인 상주시에 살며 감 깎기 알바를 했던 경험을 살려 곶감을 만들어 팔면 되겠다는 착상이었지.”
부부가 머리를 맞대고 의논한 결론이었나?
“아니다. 이왕 상황이 이렇게 된 김에 역할 바꾸기를 하기로 했다. 남편에게 기대나 원망을 가질 거 없다, 이제부터 돈은 내가 벌겠다! 이런 결심을 한 뒤 내가 찾아낸 아이디어였다.”
수고한 당신, 이제는 쉬라? 그 진취적인 발상에 부군의 반응은 어땠나? 세상의 모든 남편들이 부러워할 제안인데.(웃음)
“별 뚜렷한 반응이 없었다.(웃음) 우리 세대 남성들이 흔히 그렇듯, 남편 역시 지독한 가부장적 위신을 중심에 놓고 살았다. 그게 하루아침에 변하겠나? 그러나 시골에서 15년을 살면서 긍정적으로 변하더라. 이건 귀촌으로 얻은 소중한 선물의 하나다.”
과거에 견줄 바 없이 원만한 부부 관계를 누린다는 얘기다. 도시에서와 달리 부부가 하루 24시간을 거의 함께 지낼 수밖에 없는 게 시골 생활이다. 이는 금슬을 북돋울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한다. 정반대로 상대의 단점을 새삼 적나라하게 감상하고 괴로워 악몽을 꾼 사람처럼 비명을 지를 수도 있다. 이창순은 후자의 늪만큼은 피하고 싶었던 거다. 스스로 먼저 변함으로써 남편의 변화까지 유도하고자 했다. 이 웅장한 의도가 귀촌의 한 가지 목표였는데 결국 성과를 거두었다는 얘기다.
‘발효곶감’을 개발해
곶감 사업은 어땠을까? 우아한 전원생활을 밑그림으로 삼은 그의 귀촌은 곶감 생산에 뛰어들면서 돌연 귀농으로 선회했다. 감나무 과수원에서 붉게 영근 감을 사들여 곶감으로 가공 판매해 수익을 거두자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농사치고 만만한 게 있던가. 시행착오가 많았다. 강인한 체질과 바지런한 기질로 안팎을 이룬 그였지만 힘에 부쳐 고꾸라질 지경에 빠지기도 했다. “허! 그거 집어치우라니까!” 듣느니 매양 남편의 퉁바리였다. 그러나 그는 귀를 틀어막고 탕탕 행진했다. 남편의 핀잔을 차라리 응원의 함성으로 받아넘겼다.
“나에겐 장점이 하나 있다. 뭐 하나에 몰입하면 옆에서 누가 죽어 나가도 모른다. 일단 곶감 농사에 뛰어들었으면 10년은 맞붙어봐야 한다는 신념을 고수했다. 덕분에 이젠 알아주는 이가 많은 곶감 생산 농가로 도약했다. 그러기까지 시련이 숱했지만.”
어떤 시련이었나?
“한마디로 맨땅에 헤딩하기였다. 첫해엔 초보자로서는 과도한 물량인 감 4만 개를 사다가 곶감을 만들었다. 근데 별로 판 게 없었다. 초기 한동안의 연매출이 불과 기백만 원에 불과했다. 판로를 찾기 어려워서였다. 이상 기온으로 5만 개의 곶감이 상해 모조리 폐기한 해도 있었다.”
그럼에도 마침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를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SNS 마케팅을 적극 구사했다. 그보다 유력한 건 재래식 발효곶감을 개발한 데에 있다. 곶감 농가들이 다들 유황 훈증을 해 상품을 만든다. 유황을 써 주황빛을 내고 곰팡이도 잡는 것인데, 자칫 과도하면 건강에 해로울 수밖에. 유황 훈증이 위험하다 판단한 나는 자연 건조 방식을 활용했다. 유해균 제거를 위해 오미자액과 식초를 감 표면에 도포했고. 이렇게 해서 시장에 내놓은 게 ‘이창순 발효곶감’이다. 이건 차별화된 고품질 곶감이다. 안심하고 먹을 수 있어 소비자들의 호감을 사게 됐다.”
곶감을 전공으로 삼아 오랫동안 허우적거렸지만 결국 좋은 학점을 받았다. 이창순의 종목은 곶감에 그치지 않는다. 투 트랙 전략으로 귀농 열차를 가동해 달린다. 민박을 병행하고 있으니까. 민박 영업의 계기는 우연히 찾아왔다. 손님이 넘쳐 방이 부족했던 이웃의 민박집에서 이창순의 방 하나를 빌려 쓴 게 동기였다. 옳다구나, 이제 민박이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황토집은 물론 주변의 순수한 자연환경이 민박의 최적 조건에 해당한다는 걸 비로소 깨닫고 민박 사업에 시동을 걸었던 거다.
“남편을 설득해 집을 증축했다. 토목 전문가인 남편이 직접 황토방 세 칸을 지었다. 이름을 지어 붙이고 블로그에 스토리를 올리는 것으로 민박을 시작했지. 새로운 일에 도전한다는 즐거움에 힘든 줄 모르고 땀을 쏟았다. 당장의 성과가 어떻게 나오든 10년은 밀고 가야겠다는 각오로.”
펜션이나 민박집의 경쟁이 치열하다. 업체들의 운영 실정은 어떻다고 보나?
“내가 한때 문경시 민박협회 대표를 맡았는데, 다들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잘되는 곳은 대략 10%에 불과할 정도지. 우리 집처럼 잘되는 곳은 드물고.”
인터뷰 중에도 예약 전화가 걸려오고, 투숙객들이 들이닥친다. 겨울철 비수기임에도 씽씽하게 돌아가는 것. 이 민박집은 어떤 매력으로 사람들을 불러들일까?
“‘조용하게 제대로 쉬어가는 민박집’이라는 테마를 정해 퀄리티를 높였다. 가령 방에 TV를 들여놓지 않았는데, 고요한 산골에서 가족들이 충분한 대화의 시간을 즐기길 바라서다. 원하는 이들에겐 산나물 일색의 자연 밥상을 조식으로 제공한다. 이러한 요소들에 만족하는 고객들이 늘어나면서 자리가 잡혔다.”
성장 과정은 순조로웠나?
“곶감 사업과 마찬가지로 초기엔 어려웠다. 집어치우라는 남편의 볼멘소리를 번번이 들었거든. 가장 중요한 건 역시 블로그 마케팅이다. 블로그 관리에 잠시만 소홀해도 손님이 줄어드는 경험을 하고서 운영에 충실을 기했다. 그게 성장의 토대였다.”
성공한 귀농 사례로 이름났더라. 소득은 얼마나 올리지?
“곶감과 민박을 합친 작년 매출이 1억 1000만 원이다. 강소농 대열에 오른 셈이다. 그러나 아직 멀었다. 연매출 목표치 3억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더 달려가야 한다. 요즘 내가 생각한다. 아하, 나도 부자가 될 수 있겠구나!(웃음) 얼마든지 사업을 키워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사는 거다. 귀농으로 나를 재발견한 셈이지. 사업만이 아니라 삶 자체를 새롭게 변모시킬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었다.”
그는 자신에게 찬사를 바친다. 어라, 내 안에 사업 기질이 있었네? 긴 잠에서 퍼뜩 깨어난 사람처럼 놀란 눈으로 자신이 거둔 성과를 돌아보며 남모를 도도한 성취감을 느낀다. 밝은 미래에 관한 비전으로 설렌다. 한없이 수동적으로 소심하게 살았던 과거의 이창순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한없이 능동적이고 진취적인 여장부 이창순이 등장한 것이다. 과거의 삶은 상처의 전시장에 가까웠던가? 그는 여성이자 아내로서 괴롭게 감내하며 살 수밖에 없었던 일상의 구속과 아픔을 이 산촌에서 글로 써 청산한 걸 귀농이 준 최상의 선물로 여긴다. 그가 쓴 글 더미들은 책으로 출간됐다.
이창순 씨가 주는 귀농 Tip
•반드시 부부가 함께 귀농하자. 부부 협업이 아니고선 난관을 헤쳐나가기 어렵다.
•귀농엔 강인한 체력도 필수다. 나만의 건강법을 고안해 일상적으로 실천하자.
•정책자금에 의존하는 귀농은 위험하다. 자칫 빚더미에 올라앉을 수 있어서다.
•민박을 할 경우 무엇보다 입지 여건부터 따져야 한다. 맑은 계곡을 낀 곳이라면 최적지다. 청결한 침구, 따뜻한 사교, 고객 불편 사항의 신속한 처리 등도 관건이다.
•SNS 마케팅을 구사하라. 판로 확보에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다.
귀농 생활을 근사한 쪽으로 끌어가기 쉽지 않다. 물이야 고수라서 거침없이 순행하지만, 그래 물을 스승으로 삼아보지만, 정작 산전수전에 공중전까지 치르기 십상인 게 귀농이다. 생각보다 더 만만치 않고, 예상보다 더 까다롭다. 기대처럼 낭만적이지도 않으며, 계획대로 수익이 발생하지도 않는다. 한마디로 폭풍 속의 질주다. 광주광역시에서 알아주는 이가 많은 ‘여장부’로 살았던 박선주(50, ‘들꽃다물농장’ 대표)의 귀농 경력은 올해로 6년 차. 그는 비바람 속을 ‘미친 듯이’ 내달렸다. 그가 믿은 건 자신의 야무진 근성 하나였으며, 그걸 아낌없이 꺼내 썼던 것 같다. 덕분에 나가떨어지기는커녕 여하튼 앞으로 나아가는 성과를 거두었다.
산을 무척 좋아하는 버릇이 있는 사람은 마침내 도시를 떠나 산에서 살기를 꿈꾼다. 박선주가 그랬다. 산 아니고 다른 데서 살까 보냐! 동갑내기 남편 고광민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그렇게 산촌 귀농을 염두에 두고 살던 중에 절호의 찬스를 포착했다. 부부의 건강에 상당히 심각한 이상이 생겼던 거다. 옳다구나! 이제 지리산으로 가자!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귀농에 시동을 걸었고, 지체 없이 일을 서둘러 드디어 전북 남원시 운봉읍의 산자락에 살게 됐다.
“지리산 근처에 경치 좋은 터를 잡고 살며 부부의 건강을 되살리고 싶었다. 지리산을 수시로 오르내리고, 산나물들을 가꿔 먹고, 정직한 노동으로 땀 흘리고, 그러면 까짓것 뭐 건강을 회복할 수 있겠지. 그런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상 귀농을 하고 보니 뭐 하나 쉬운 게 없더라. 펑펑 눈물을 쏟은 날이 많았다. 어라, 이게 왜 이런 거야? 이러자고 내가 귀농했나? 광주로 돌아가야 하는 거 아냐? 귀농을 후회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지리산은 자주 올랐고?
“그토록 좋아하는 지리산이지만 일에 치어 거의 올라가지 못했다. 2019년 내 생일날 천왕봉을 한 번 올랐을 뿐이니까.(웃음)”
박선주는 야트막한 야산 하나를 통째로 사들여 농장으로 가꾸었다. 2만 6000평에 달하는 너른 규모다. 허리 휘어질 신역이 실로 자심할 걸 짐작할 만하다.
건강은 좋아졌나? 때로 위중한 사람도 살리는 게 산인데.
“좋아지는 것 같더니만 더 나빠지더라고.(웃음) 남편은 허리디스크에 시달렸고, 나는 뇌경색으로 쓰러지기도 했다. 이게 다 스트레스 탓인 것 같다. 농사일 자체는 어렵지 않다. 몸이 아프더라도 작물이 성장하는 걸 바라볼 때면 행복하니까. 문제는 역시 스트레스의 강도다. 도시에서보다 과중한 스트레스와 상처를 받으며 살았다.”
욕심을 줄이면 스트레스 관리가 좀 쉬워진다고 한다. 과중한 스트레스의 원인이 무엇일까? 과욕? 외부의 횡포?
“스트레스 유발인자가 한둘이 아니다. 난 욕심 많은 여자는 아니다. 기질적으로 어지간한 상처엔 끄떡도 하지 않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데 주민과 갈등하면서 오는 상처엔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더라. 예를 하나 들어볼까? 귀농 초기에 지방신문 기자의 고발로 곤욕을 치렀다. 우리가 백두대간을 훼손했다는 죄목이었다. 이 가당찮은 사건은 무혐의로 결론이 났지만 상처가 컸다. 무섭기도 했다. 외지인을 배척하는 지역 일각의 풍토를 여실히 깨달은 것이다.”
지역에 귀농인이 등장하면 주민들은 무대에 오른 배우를 바라보듯 주시하기 마련이다. 이 무대에서 호감을 사기 위해서는 일단 자세를 낮추는 게 현명하다고들 한다.
“원주민들과 어울리기 위한 노력을 소홀히 하지 않았으나 돌아오는 대가는 정당하지 않았다. 나는 귀농 초기부터 친목과 공동 이익을 도모할 수 있는 갖가지 단체에서 열심히 뛰었다. 리더로도 활동했다. 지역민들과 우호적인 관계 맺기에 성공한 사례라는 얘기도 자주 들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탱크처럼 과감하게 밀고 나가다
박선주 부부는 광주에서 그들의 전공인 기계설비업을 지속해 기반을 잡았다. 남편에 이어 그 역시 ‘기계가공 기능장’ 자격증을 따기도 했다. ‘여성 3호’ 기능장을 받았다. 아마도 뭐 하나에 꽂히면 들입다 파고들어 끝을 보는 성격의 소유자일 게다. 두둑한 배짱을 장기처럼 달고 사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자산을 정리해 만든 13억 원쯤의 자금을 임야 구입과 토목공사에 썼다. 그리고 ‘탱크처럼 매사 과감하게’ 밀고 나갔단다. 그 저돌적인 행진으로 ‘성공한 강소농’이라는 평을 듣기에 이르렀던 것.
그러나 원주민과의 관계에선 한숨이 폭폭 터져 나오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광주로 달아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힐 지경으로 겪은 애환이 많았다. 세태란 원래 어딜 가나 사특한 것. 저기는 안 그런데 여기만 그럴 리야 있겠나? 저기는 낙원이고 여기는 지옥일 리 있겠나? 그저 내가 처신하기 나름이거니, 그리 생각하기 십상이지만 박선주가 귀농으로 경험한 세태는 얄궂다.
“귀농하는 사람들은 제2의 삶을 위해 도시에서 찌들었던 마음을 미리 내려놓고 온다. 대부분 순수한 마음으로 농촌의 정과 인심에 녹아들고 싶다는 의도를 가지고 귀농한다. 그러나 내가 경험한 지역 현실은 차가웠다. 거의 모든 게 토박이들 중심으로 돌아가더라.”
토박이 그룹이 먹이사슬의 상위 기득권을 수호하기 위해 은연중에 발동하는 텃세. 이건 보수적인 농촌 지역에 흔히 고착된 폐습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그들은 지역사회를 위한답시고 단체에 슬쩍 발을 담근 채 영악하게 혜택만 찾아 누린다. 이기적이며 순수하지 않다. 귀농인에겐 좋은 정보나 마땅한 권한조차 공정하게 배분되지 않는다.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남원 사람이 될 수 없겠구나! 결론이 그렇게 나더라고.”
대안은 무엇일까?
“물론 토박이들이 다 그런 건 아니다. 좋은 이들도 많으니까. 그들의 우정에 힘을 얻으니까. 그러나 별수 없다. 발을 빼는 수밖에. 이젠 마음의 문을 닫았다. 이런 얘기를 길게 하는 건 귀농하려는 이들이 참고하길 바라서다. 성급하게 귀농지를 정했다간 낭패를 볼 수 있는 거다. 지역의 인심과 풍토부터 미리 파악하는 게 그 무엇보다 앞서 중요하다.”
부부가 부업에 나서기도
겨울바람이 맵차다. 바람에 눕는 마른 풀들. 잠들어 고즈넉한 나무들. 외진 산기슭의 외딴 거처에 감도는 적막감. 농장의 겨울 풍경은 잠잠해 고독해 보인다. 그러나 수려한 산간이다. 산 아래에서 정상까지 나선형으로 낸 길에선 과도한 인위가 느껴지지만 생산의 기지로 변환한 노고는 더 큰 실감으로 다가온다. 이 산에 사는 텃새들은 알까? 박선주 부부가 야산 개간에 과연 몇 톤 분량의 비지땀을 쏟았는지.
산에 심은 주 작목은 호두나무다. 어린 것들을 심었으니 여러 해가 더 흘러야 수확을 볼 수 있다. 박선주는 당장 생산이 가능한 작목들도 재배했다. 옥수수, 감자, 고구마 따위를. 생산량은 많지 않았지만 용케도 잘 팔려 농사에 재미를 붙이게 하는 촉매가 됐다. 현재까지 각별히 공을 들이는 건 비타민 C 함량이 높은 것으로 유명한 블랙커런트. 즙, 잼, 곤약젤리 등으로 가공해 유통한다. 이 농장의 모든 작물은 친환경 농법으로 재배된다. 해섭(HACCP,식품위생안전시스템) 인증도 받았다. 경험을 살리고 식견을 돋워 일궈낸 성과다. 농업 공부도 그 기반이 됐다.
“귀농 이후 건축법이나 산지관리법 등을 배워 숙지했다. 전국 곳곳의 수많은 농업 교육기관을 찾아다니며 이론과 기술도 습득했다.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건, 무상 교육의 경우 대형 기관이나 단체에서 한결 실속 있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수익 상황은 어떤가?
“2018년 총매출은 2400만 원이었다. 2019년엔 6800만 원, 2020년엔 9800만 원이었고, 2021년엔 1억 원을 넘어섰다. 순수익은 매출의 60% 정도다. 연도별 증가율로 보면 고속 성장이다. 그러나 손익분기점 도달에는 한참 미달한 상태다. 워낙 많은 자금을 초기에 쏟아부었기 때문이지. 게다가 지속적인 재투자가 필연이라 버겁다. 그나마 좀 안도하는 건, 처음엔 지니고 온 자금을 털어 투자했지만 지금은 소액이나마 돈을 벌어 투입한다는 점이다.”
귀농인들이 흔히 하는 얘기가 있다. 농사로 먹고살기 쉽지 않다는 거다.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
“먹고살기 어려운 정도가 아니다. 물정 모르고 덤볐다가는 파탄 나기 딱 좋은 게 농사다. 문제는 판로다. 우리는 공격적인 SNS 마케팅을 구사해 그나마 수입을 거둔다. 그러나 농사일에 정신없이 바빠 SNS에 충실을 기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이래저래 상황이 열악해 때로 눈물 나는 것이지.(웃음)”
어떤 방법으로 현실을 타개하지? 무슨 수가 있기는 있나? 귀농의 명암이야 이미 또렷이 인식했을 텐데.
“멀리 보고 긴 호흡을 하며 달려간다. 미래적 비전은 사회적 농업이나 치유 농업에 두고 있다. 당장 급박한 자금 조달을 위해서는 농외소득을 벌어들인다. 우리 부부가 농사만 짓는 건 아니라는 얘기지.”
농사 외에 어떤 일을 하지?
“내가 알바를 뛰곤 했다. 광주시에 가서 전공인 기계설비 분야의 수업을 해주고 보수를 받는 식으로. 남편은 더 많은 일을 한다. 오늘도 그는 인근 양계장에서 병아리 입출 일을 도와주고 일당을 받아왔다. 이런 식의 부업으로 부부가 매월 벌어들이는 수입이 200만 원 정도다. 농업소득에만 의존하는 귀농은 낡은 방식이다.”
귀농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다각도로 모색하며 멀리 넓게 보라! 박선주가 털어놓는 언설의 행간에 비친 메시지가 그렇다. 이런 그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다시 귀농을 한다면? 답은 이렇다.
“돈 들이지 않고 귀농 생활을 시작하겠다. 300평 정도의 농토를 임대해 농막에 살며 농사 경험부터 쌓을 것이다. 농외소득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는 것도 필수고. 자금을 왕창 쏟아붓는 귀농은 미련한 귀농이다.”
박선주 씨가 주는 귀농 Tip
•승률 높은 농업을 원하면 지역 특산물을 작목으로 선택하자. 판로 확보가 용이하고, 지자체의 지원을 받을 수 있어 유리하다.
•대규모 농업도 잘만 하면 승산이 있다. 지역 특산물을 규모화할 경우엔 승률이 더 높아진다.
•농촌에 대한 낭만적인 환상은 깨끗이 버려라.
•농업정책자금을 함부로 받지 말자. 자립 의지가 수반되지 않은 지원금 운용은 빚만 늘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농사만 믿지 말고 농외소득 획득 방법도 적극적으로 모색하자. 찾으면 일은 얼마든지 있다.
2022년 새해가 코 앞에 다가왔다. 새해가 밝으면 '나이 듦'에 대해 생각하게 마련. 특히 2025년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하는 만큼, 노인 관련 복지 정책에 대한 관심이 절로 높아지고 있다. 이에 2022년 새해를 맞아 새롭게 바뀌는 노인 정책은 무엇이 있는지 짚어봤다. 보건복지부 뿐만 아니라 다양한 부서의 정책을 담았다.
먼저, 보건복지부의 '2022년도 기초연금 선정기준액' 발표에 따르면, 내달부터 기초연금 지급 대상 선정 기준액이 오른다. 노인 단독가구는 월 소득 인정액이 180만원, 부부가구는 288만원 이하면 기초연금을 받는다. 노인 단독가구는 올해 169만원에서 11만원이, 부부가구는 270만 4천원에서 17만 6천원이 오르면서 기준이 확대됐다.
기초연금 선정기준액은 65세 이상 노인 중 기초연금 수급자가 70% 수준이 되게 설정한 기준금액으로 노인의 소득·재산수준, 생활실태, 물가 상승률 등을 종합적으로 반영해 산정한다. 소득평가액과 재산의 소득환산액(재산을 소득으로 환산한 금액)을 합산한 소득인정액이 선정기준액 이하이면 기초연금 수급자로 선정된다.
기초연금은 신청해야 받을 수 있다. 내년에 만 65세가 되는 경우에는 생일이 속한 달의 한 달 전부터 기초연금 신청이 가능하다. 주소지 관할 읍·면사무소 및 동 주민센터, 가까운 국민연금공단 지사를 방문하거나 복지로에서 온라인으로 신청하면 된다.
또한 2022년 장기요양 보험료율이 오른다. 올해 11.52%보다 0.75%포인트 인상된 12.27%로 보험료율이 책정됐다. 이에 따라 가입자 세대 당 월 평균 보험료는 1만 4446원으로 올해 1만 3311원보다 1135원 증가할 전망이다.
장기요양보험료는 고령이나 노인성 질병으로 인해 일상생활을 혼자서 수행하기 어려운 노인 등에게 신체 활동 또는 가사 활동 지원 등을 제공하는 사회보험제도로, 2008년부터 시행됐다. 지난 2017년 6.55%에서 이번 12.27%까지 보험료율이 빠르게 상승하는 추세다.
그런가 하면, 여성가족부는 경력 단절 여성 취업 지원을 강화하기 위해 통합 서비스를 확대한다. 각 부처 전문 인력 양성 과정을 이수한 경력 단절 여성과 새 일 센터의 취업 지원을 연계하는 사업을 8개에서 11개로 늘린다. 고용 유지와 경력 사후 관리도 강화한다. 고숙련·고부가 가치 직업 훈련 과정을 59개에서 약 70개로 확대하고 취업률과 지역 일자리 연계 가능성이 높은 직종의 장기 훈련 과정을 운영한다.
또한 1인 가구 증가에 따른 고독·고립감 해소를 위해 생애주기별(청년, 중장년, 노년 등) 사회관계망 지원 사업을 실시한다. 1인가구는 각 지역의 가족 센터를 통해 자기 개발 및 심리·정서 상담 등 맞춤형 프로그램을 제공 받을 수 있다.
청년 1인 가구는 '자기 돌봄 관계 기술과 소통·교류 모임'을, 중장년 1인가구는 일상에서의 '서로 돌봄 생활 나눔 교육'을, 노년 1인가구는 '심리상담과 건강한 노년 준비 교육' 등 생애주기별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지원한다. 생활 사회기반시설(SOC)형 가족센터도 확충할 계획이다.
농림축산식품부는 농지연금 가입 연령을 현행 만 65세에서 60세로 낮추고, 저소득 농업인과 30년 이상 장기 영농인에게는 월 지급금을 5~10% 추가하는 우대 상품을 1분기 중 도입한다. 농지연금은 주택연금처럼 농지를 소유한 경우 농지를 담보로 사망할 때까지 연금을 지급 받는 제도이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실버 마이크' 사업을 신규로 추진한다. 실버 세대 문화예술인에게 공연 기회를 제공해 고령 문화예술인을 지원하는 사업이다. 만 60세 이상 문화예술인을 공모 및 오디션을 통해 선정해 '문화가 있는 날'(매달 마지막 수요일)에 공연 기회를 제공할 예정이다.
1~5인의 소규모 팀 100팀을 모집하고, 팀 당 5회 공연 기회를 제공한다. 1회 평균 팀 당 150만원을 지원 받을 수 있다. 60대 이상 문화예술가 지원을 통해 노년층이 문화 활동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문화를 향유할 기회를 확대하고자 하는 것이 사업의 목표다.
퇴직을 앞두고 있는 정 씨는 먼저 퇴직한 선배들을 만나 퇴직 후 삶과 노후 자산관리에 대한 이런저런 조언을 듣고 있다. 최근 선배들로부터 퇴직 후 소득의 종류와 재산 규모에 따라국민건강보험료 부과 체계가 다르다는 것과 2022년 7월부터 보험료 부과 방식이 바뀐다는 말을 들은 정 씨는 퇴직 후 자산관리와 관련된 국민건강보험료 부과 체계에 대한 내용을 알고자 상담을 요청해왔다.
국민건강보험 가입자는 직장가입자와 지역가입자로 구분한다. 현재 정 씨는 직장가입자로 월급(보수월액)의 일정 부분(6.86%)을 회사와 반반(3.43%)씩 부담하여 국민건강보험료를 납부하고 있다. 만약 정 씨가 회사에서 근로소득만 받는 직장가입자라면 보수월액에 대한 보험료만 납부한다. 정 씨가 퇴직 후 국민건강보험 혜택을 받기 위한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국민건강보험 가입자인 다른 가족의 피부양자가 되는 것인데, 피부양자는 별도의 보험료를 납부하지 않아도 된다.
정 씨가 퇴직 후 현재 직장에 다니고 있는 큰아들의 피부양자가 되려면 다음의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국민건강보험 피부양자는 소득 요건과 재산 요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먼저 피부양자의 소득 요건부터 알아보자. 일단 사업자등록증이 없어야 한다. 사업자등록증이 있으면 소득 유무와 상관없이 피부양자가 될 수 없다. 사업자등록증이 없더라도 프리랜서 등으로 사업소득 금액이 500만 원을 초과하면 피부양자가 될 수 없다. 사업소득 금액이 500만 원 이하이더라도 이자, 배당, 사업, 근로, 연금, 기타소득 중 종합과세되는 소득의 합이 연간 3400만 원을 초과하면 피부양자가 될 수 없다. 다만, 금융소득(이자 및 배당소득)은 주의가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금융소득은 15.4%의 원천징수 세율로 분리과세된다. 종합소득세 계산 시 분리과세되는 금융소득이 연간 2000만 원을 초과하는 경우에 종합과세된다. 국민건강보험 피부양자 조건을 따질 때는 기준금액이 더 낮아진다. 2000년 11월부터는 다른 소득이 없더라도 금융소득(이자 및 배당소득)이 연간 1000만 원을 초과하면 국민건강보험 피부양자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연간 1000만 원 이하의 금융소득은 피부양자 조건을 따지는 소득 요건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예를 들어 금융소득이 999만 원이고 금융소득 외 종합과세되는 소득의 합계가 3400만 원 이하이면 재산 요건 충족 시 국민건강보험 피부양자가 될 수 있다. 따라서 국민건강보험 관련해서는 연간 금융소득 1000만 원에 유의해야 한다.
정 씨는 금융소득이 1000만 원이 되기 위해서는 수익률 연 2%로 가정하면 원천자산이 50억 원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자신과는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꼭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매년 이자를 지급하지 않고 중도 해지나 만기 때 일괄적으로 이자를 지급하는 장기 금융상품의 경우에는 이자가 한 번에 발생한다. 대표적인 예가 연금보험 및 저축성 보험이다. 보험 상품은 계약 후 10년 이상 유지하면 보험차익(=이자소득)을 비과세한다. 따라서 국민건강보험 피부양자인 경우에는 보험 해약 시 반드시 계약 유지 기간을 점검해야 한다. 연말 정산에서 세액공제 혜택을 받기 위해 8년 전 보험사에 연금저축보험을 가입한 정 씨의 경우를 보자. 만약 정 씨가 이 상품을 내년에 퇴직할 때 일시금으로 찾고, 다른 원천징수되는 금융소득과 합산하여 1000만 원이 넘을 경우 피부양자가 될 수 없을까? 아니다. 세액공제 혜택을 받은 연금저축의 경우 그 상품이 보험이든 펀드든 신탁이든 상관없이 일시금으로 수령할 때 원금과 수익금 전액에 대해 16.5%의 기타소득세가 부과된다. 그리고 연금저축을 연금으로 수령하면 연금소득에 해당하는데, 국민건강보험 피부양자 소득 요건을 따지는 연금소득에는 공적연금의 연금소득은 포함하지만 사적연금의 연금소득은 포함하지 않고 있다.
국민건강보험 지역가입자 보험료 계산 방식
정 씨가 퇴직 후 국민건강보험 피부양자 조건을 충족하지 못할 경우에는 국민건강보험 지역가입자가 되어야 한다. 지역가입자의 보험료는 소득이 100만 원 이하인 경우에는 최저보험료 1만 4380원을 적용한 후 재산과 자동차의 합산 점수에 ‘보험료 부과점수(2021년 201.5원)’를 적용하고, 소득이 100만 원 초과할 경우에는 소득과 재산 그리고 자동차 점수를 합산한 후 보험료 부과점수를 적용한다. 지역가입자의 소득점수는 종합과세되는 이자 및 배당소득, 사업소득, 근로소득, 연금소득, 기타소득을 합산하여 97등급으로 나누는데, 원천징수되는 이자 및 배당소득을 합한 금융소득이 1000만 원 이하인 경우에는 합산되는 소득에 포함하지 않는다. 근로소득과 연금소득의 경우에는 소득의 30%만 보험료 부과 대상으로 한다. 2022년 7월 이후에는 소득반영비율이 50%로 인상된다. 국민건강보험 피부양자 소득 요건과 마찬가지로 연금소득은 공적연금 소득은 포함하지만 사적연금 소득은 포함하지 않는다. 재산점수는 주택, 건물, 토지, 선박, 항공기, 전월세를 합산하여 60등급, 그리고 자동차는 차종, 배기량, 사용연수를 고려하여 11등급으로 구분한다. 지역가입자의 보험료 부과 방식을 표로 정리하면 위와 같다.
국민건강보험료 절약할 수 있는 몇 가지 방법
정 씨는 선배들로부터 국민건강보험료를 절약할 수 있는 방법 중에 하나는 퇴직 후 재취업을 하여 직장가입자가 되는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직장가입자는 소득요건만 따지는 데, 보수 외 소득이 연간 3400만 원을 초과하면 초과되는 소득에 대해 보험료율(2021년 6.86%)을 적용하여 추가로 보험료를 납부해야 한다. 이를 ‘소득월액 보험료’라고 한다. ‘소득월액 보험료’에 적용되는 소득 기준은 지역가입자의 ‘소득점수’ 기준과 같다. 직장가입자의 보수 외 소득 기준도 2022년 7월에 2000만 원으로 낮아진다.
정 씨가 퇴직 후 국민건강보험료를 줄이기 위해서는 소득금액 기준을 확인한 후 소득의 규모와 이자 등의 발생 시기를 조정해야 한다.
금융소득이 비과세되는 금융상품을 활용하는 것도 방법이다. 금융소득이 비과세되는 금융상품은 10년 이상 유지한 저축성 보험(일시납일 경우 1억 원 이하의 보험, 1억 원을 초과할 경우 전액 과세 대상이 됨), 조합원 출자금(1000만 원 한도), 조합원 예탁금(3000만 원 한도), ISA(연간 2000만 원), 연금저축계좌(연간 1800만 원 한도) 등이 있다.
영화, 드라마, 음악 등 이른바 ‘K-콘텐츠’가 글로벌 시장을 사로잡으면서 콘텐츠가 개인 투자자들의 새로운 투자처로 급부상하고 있다. 영화, 드라마, 뮤지컬, 전시 등에 투자할 수 있는 플랫폼 ‘펀더풀’과 음원에 투자하는 ‘뮤직카우’ 등이 대표적이다.
주로 MZ세대가 이용하지만 시니어 이용자도 늘고 있다. 8일 펀더풀에 따르면 펀더풀 이용자 24.3%가 40대, 8.5%가 50대다. 전체 콘텐츠 투자자 3명 중 1명이 40대 이상 이용자인 셈이다. 콘텐츠의 경우 영화, 드라마, 뮤지컬, 전시, 웹툰까지 투자할 수 있는 종류가 다양하고
콘텐츠 투자 플랫폼 ‘펀더풀’은 그간 투자사들만의 영역이었던 콘텐츠 투자를 개인들에게까지 확장했다. 펀더풀은 투자를 원하는 콘텐츠 제작사와 접촉해 개인이 투자할 수 있도록 증권투자 상품을 만든다. 개인은 50만~500만 원까지 투자할 수 있다. 투자 기간이 끝나면 콘텐츠에서 발생한 수익을 원금과 함께 돌려받는다.
펀더풀은 금융위원회에 등록된 금융플랫폼이다. 투자자들이 구매한 증권은 한국예탹결제원에 보관되므로 콘텐츠에 관심 있는 시니어들이라면 투자해볼 만한 영역이다. 다만 다른 투자처들이 그렇듯 원금 손실 가능성이 있음을 염두해야 한다.
투자한 콘텐츠는 투자상품설명서에 제시된 손익분기점을 넘겨야 수익이 발생한다. 반대로 투자 손익분기점에 미치지 못하면 손해가 발생할 수 있다. 이 손해는 투자자들에게 귀속된다. 펀더풀 웹사이트에 게재된 ‘투자 위험 고지’에 따르면 콘텐츠들은 한국거래소 상장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비상장 증권으로 발행된다. 이에 대해 펀더풀 측은 “증권의 환금성에 제약이 있다는 점과 예상 회수금액에 대해 일부 혹은 전부를 회수할 수 없는 위험이 있다”고 고지하고 있다.
원하는 시기에 수익증권을 사고, 팔 수 없다는 점도 주의해야 한다. 콘텐츠 투자 상품들은 청약기간, 투자기간, 증권 발행일, 정산 시기를 정해두고 사전에 고지하고 있다. 청약 기간 내에 투자를 철회할 수 있지만 청약기간 이후에는 정해진 투자 기간 동안 증권화된 상품을 사거나 팔 수 없다. 콘텐츠 투자 기간은 보통 6개월이다. 단기 투자할 생각하고 투자했다간 자금이 묶일 수도 있다.
음악 저작권 거래 플랫폼 ‘뮤직카우’ 역시 꾸준한 성장세를 보인다. 뮤직카우는 음악 저작권료 지분의 일부를 사들여 이를 주식처럼 분할하고 경매에 올린다. 플랫폼 내 경매인 ‘옥션’에서 음악은 ‘주’라는 단위로 거래된다. 투자자는 좋아하는 음악을 구매해 가지고 있는 지분만큼 매월 저작권료를 정산받는다. 주식을 가지고 있을 때 배당을 받는 것과 비슷하다. 시스템 내 ‘마켓’에서 이용자들끼리 음원을 거래해 시세차익을 낼 수도 있다.
음원에 투자할 때도 주의할 점이 있다. 먼저 음원투자는 저작권을 구매하는 게 아니라 ‘저작권료참여청구권’을 구매한다는 점이다. 투자자가 가진 것이 저작권이 아니라 저작권 지분만큼 저작권료 수익을 배당받을 수 있는 권리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박경진 뮤직카우 마케팅 팀장은 “지적재산권인 저작권을 공유하게 되면 저작권법에 따라 권리자 전원 합의로 권리를 행사해야 하는데, 투자자 1명이라도 해당 음악의 유통을 반대하면 유통이 금지될 수 있는 문제가 있었다”며 “법령상, 실무상 제한이 도리어 회원의 권익을 침해할 수 있어 저작권료참여청구권을 고안했다”고 설명했다.
저작권료 참여청구권이 새로운 대체투자 상품이다 보니 투자상품으로서 법적 보호가 미흡하다는 우려도 있다. 저작권료 참여청구권은 자본시장법상 포함되는 범주가 없어 금융제도권이 아닌 전자상거래법과 통신판매업의 규제를 받고 있다.
이에 대해 박경진 팀장은 “투자자들의 자산 보호를 위해 별도의 특수목적법인을 설립해 플랫폼 영업과 자산관리를 분리하고, 혁신금융에 신청하는 등 가능한 방법을 모두 동원해 힘쓰고 있다”며 “궁극적으로 투자자들의 세금부담을 해소하고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음원 투자가 증권화되는 등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좋아하는 콘텐츠에 투자할 수 있는 수단이 늘고 K-콘텐츠가 세계적인 인정을 받으면서 시장의 성장세가 가파르다. 하지만 대체수단으로서 새롭게 개척되고 있는 시장인 만큼 상품과 플랫폼에 대해 잘 알아보고 안전하게 투자할 필요가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0년 60세 이상 재혼 인구는 9938명으로 2010년(6349명)보다 56.5% 늘었다. 가족 상담 전문가는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사실혼 커플의 수치까지 계산한다면 통계 수치보다 서너 배는 더 많을 것으로 내다본다.
황혼의 사랑이 이토록 증가하는 이유는 과거에 비해 길어진 평균수명과 황혼 재혼에 대한 달라진 사회적 시선 때문이다. 100세 시대를 맞이해 혼자 외로이 보낼 여생이 길어지고, 노년의 사랑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자유로워지면서 황혼 재혼을 결심하는 이들이 많아졌다는 설명이다.
이에 결혼정보업체에서는 늘어나는 중·노년층 고객 수요에 맞추어 60세 시니어 회원들을 따로 관리하는 추세다. 업계 종사자들은 “황혼재혼을 원하는 고객의 경우 가족관계, 경제력 등 현실적인 조건을 꼼꼼히 따지는 경향이 있다”라고 전했다. 인생 경험이 많은 시니어일수록 금전 문제나 자녀 반대와 같은 갈등을 최대한 피하기 위해 더욱 명확한 배우자 선택 기준을 세우는 것이다.
황혼 재혼을 고려한다면 다양한 현실적인 문제를 직면하게 되는데, 자식과의 갈등이 대표적이다. 자녀들이 부모의 로맨스를 응원하면서도 재혼을 반대하는 현실적인 이유는 재산분배 때문이다. 현행 상속법에 따르면 상속인이 별도 비율을 나누지 않는 한, 법정 상속 비율은 배우자가 1.5, 자녀가 각각 1씩이다. 만약 1억 원의 재산을 가진 아버지가 재혼할 경우 새어머니가 6천만 원을, 자녀가 4천만 원을 상속받는 셈이다.
이러한 이유로 자식의 반대에 못 이겨 혼인신고를 하지 않고 사실혼 관계를 유지하는 재혼 부부도 종종 볼 수 있다. 하지만 사실혼 관계의 배우자는 상속인의 지위를 갖지 못해, 오랜 시간을 부부로 지내며 배우자의 곁을 지키더라도 재산을 상속받을 권리가 없다. 따라서 사후 지금의 배우자에게 상속재산을 남기기 위해선 반드시 법률혼을 이루어야 한다.
황혼 재혼 부부들이 결혼 전에 상속 문제로 위기를 겪지 않기 위해서는 '혼전 계약'을 체결하는 것이 좋다. 우리나라 민법에 규정된 ‘부부 재산의 약정’ 조항에 따르면, 부부가 혼인신고를 하기 전에 결혼 후의 재산관리 방법을 미리 정해 등기할 수 있다. 재혼 전에 자녀들에게 법정상속분 이상으로 증여하고 ‘증여받았으므로 앞으로 재산 문제로 다투지 않는다’라는 내용의 합의서를 작성해 공증 받는 등의 방법이다.
혼전계약으로 불리는 ‘부부재산계약’은 부부의 합의를 통한 계약 사항들을 만들고 공증사무소에서 전문가의 공증을 받으면 완료된다. 안전하고 공정한 계약을 위해서는 가급적 변호사 등 전문가의 도움과 함께 공증을 받는 것이 좋은데, 이때 전문가는 남편이나 아내의 중립적인 위치여야 한다.
유언장을 통해 상속분을 미리 정해두는 것도 방법이다. 법무법인 승원의 한승미 변호사는 “사후 분쟁을 대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유언장을 미리 작성하는 것이다”라며 “재혼 부부와 자식 간의 신중한 상의를 통해, 배우자와 자녀가 상속받을 몫을 각각 정해 유언장에 적으면 된다“고 전했다. 유언 내용과 작성일, 주소, 성명 등을 자필로 작성하고 도장을 찍은 자필증서도 유효하고, 공증사무소에서 유언 공증을 받을 수도 있다.
다만 혼전계약과 유언장을 공증 받았다고 해서 분쟁이 생긴 경우 계약서 내용대로 100% 법적 효력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고, 소송 시 법원에서 중요한 참고자료 정도로 인정된다. 법원 측은 "이혼·사망으로 인한 재산 분할이나 상속은 미리 알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사전 계약은 100%로 인정하지 않는다"라는 입장이다.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지난달 나는 아내와 재결합했다. 20년 만이다. 지금 내 나이는 70, 긴 외도 끝에 이른바 조강지처의 치마폭으로 ‘기어들었다’. 나는 서울의 명문 치대를 나와 강남에 치과를 개업하고 큰 기복 없이 순탄하게 운영하고 있다. 당시 강남은 지금 같은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선견지명으로 일찌감치 터를 잘 잡았다. 병원에 간호사도 여럿 두었는데 그중 하나와 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우리 병원의 수간호사 격이라 나이도 제법 있어, 나와는 고작 열 살 남짓 차이 났다. 집이 가난해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어린 나이에 간호조무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해 이 바닥에서는 베테랑에 속했다.
그녀는 40 즈음에, 그러니까 내가 쉰 살 되던 해 우리 병원에 들어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위 말하는 나의 오피스와이프가 되어주었다. 치과 업무를 속속들이 안다는 것은 나의 일과 나의 삶을 동시에 이해한다는 의미였다. 나의 꿈과 나의 좌절을 공감하며 위로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아내한테서 얻을 수 없는 그 무엇이 그녀에게는 있었다. 더구나 어린 나이에 사회와 부딪히며 나름 내공을 쌓은 덕에 타인에 대한 이해심도 깊었다. 무엇보다 영리하고 야무졌다. 급기야 나는 그녀와 딴살림을 차렸다. 이혼은 하지 않았다. 아내가 원하지 않기도 했지만 그까짓 절차는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여자와 살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당시 내겐 더 바랄 것이 없었으니까. 그럼 아내는? 아내는 사랑하지 않았냐고? 아내는 아내고 그녀는 그녀였다.
뻔뻔하다고 나를 욕해도 하는 수 없다. 나도 안다. 나는 욕을 먹어도 싸다. 단순한 바람으로 그쳤다면 차라리 덜 욕을 먹었으려나. 하지만 나는 그녀를 사랑했다. 함께 살수록 뒤늦게 참사랑이 찾아온 거란 믿음이 솟았고, 그녀와 모든 것을 함께하고 싶었다. 그랬던 그녀와 헤어진 후 돌이켜보면 아내와 정식으로 이혼신고를 하고, 그녀와 정식으로 혼인신고를 했더라면 하는 후회가 남는다. 그러면 적어도 쪽박은 차지 않았을 테니까. 정식 부부였다면 뭐라도 공동 명의로 남은 게 있었을 테니.
무슨 소리냐고? 그녀는 함께 살던 아파트와 내 전 재산을 독차지한 후 나를 내쫓았다.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그녀 명의로 아파트를 사줬고, 집을 나온 나는 자연스럽게 그 아파트에 들어가서 살았다. 그녀의 아파트였지만 사는 동안은 ‘우리의’ 아파트였던 셈인데, 헤어진 마당에는 엄연히 ‘그녀의’ 아파트란 사실에 나는 치를 떨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치과 수입을 그녀가 관리하는 일도 나로서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한 살림을 하는데 여자가, 더구나 야무진 그녀가 돈 관리를 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그녀는 재테크에도 제법 소질이 있어서 적절한 투자로 돈을 불려나가는 재주도 있었으니까. 20년간 아내에게 보내는 생활비를 빼놓고는 내 돈도 그녀 돈이요, 그녀 돈도 그녀 돈인 줄 진정 난 몰랐다. 그렇게 나는 그녀와의 20년 생활을 청산하면서 몸뚱이만 남게 된 것이다.
헤어진 후 내 수중에는 생활비를 넣고 빼고 하던 허드레 통장 하나뿐. 잔고라곤 겨우 이삼백만 원. 그 통장과 옷가지만 들려서 나더러 나가라고 했다. 법에 호소하여 찾아올 돈이라곤 전혀 없었다. 실상 나는 돈보다 그녀와 헤어지게 된 것이 더 충격이었기 때문에 재산에 대해서는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왜 쫓겨났냐고? 나도 그걸 모르겠다. 20년을 함께 살았으면 부부와 다를 바 없건만, 지난 20년 동안 그녀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나와 살았던 것일까.
그 길로 아내를 찾아갔고, 아내는 나를 흔쾌히 받아주었다. 나는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병원과 아내의 집, 아니 이젠 내 집을 오가며 지내고 있다. 아내와 나는 별다른 대화를 하지 않는다. 아내가 지난 이야기를 꺼내며 바가지를 긁지도 않는다. 언제 폭탄이 터질지 조마조마하지만 겉으로는 평온이 유지되고 있다. 여기까지가 내가 20년 만에 아내와 재결합한 사연이다.
한 달 전 나는 남편과 재결합했다. 내 나이 68세, 남편이 집을 나간 지 20년 만에 돌아온 것이다. 나갈 때처럼 올 때도 빈 몸, 빈 손으로. 남편을 선뜻 받아준 나를 주위에서는 등신이라고 했다. 등신 중에서도 상등신이라고 했다. 지난 세월 그 고생을 한 것이 억울하지도 않냐면서. 도대체 무슨 마음으로 그 인간을 받아줬냐는 거다. 안 할 말로 멀쩡하게 함께 살던 남편도 나이 드니 귀찮아서 떼놓을 궁리를 하는 판에. 혹시 데려다놓고 복수하려는 거냐고까지 했다. 혹자는 남편이 그렇게 좋냐며, 그렇게 사랑했는데 지금까지 어떻게 참고 살았냐고 진심으로 물었다. 사랑? 솔직히 그건 모르겠다. 남편을 사랑해서 받아준 거냐고 묻는다면 ‘내 마음 나도 몰라’라고 할 수밖에.
소설가 이외수의 아내 전영자 씨가 몇 년 전 졸혼했다가 뇌출혈로 투병 중인 남편을 돌보기 위해 최근에 다시 합쳤다지만, 내 남편은 몸이 아픈 것도 아니고 졸혼으로 따진다면 우리 부부는 이미 20년 전에 남남이 되었지 않나. 그런 사이에 무슨 새삼스럽게 사랑 타령…. 그럼 돈 때문이냐고? 나이 70에 손 떨려서 앞으로 얼마나 진료를 더 할 수 있을 것이며, 게다가 이미 소문이 자자하게 났을 테니 환자인들 제대로 올까.
이쯤 되면 내 행동에 대한 명분이 필요하다. 아비투스라는 게 있다. 사회문화적 환경에 의해 결정되는 제2의 천성을 일컫는 말이다. 한마디로 내가 속한 계층, 내가 만나는 사람, 내가 즐겨 하는 일 등 타인과 나를 구별 짓는 취향, 습관, 아우라를 일컫는다. 즉 남편을 받아들인 것은 나의 내면화된 천성에 기인한 품위의 문제라는 것이다. 나아가 20년을 함께 살아온 두 사람이 결국 헤어진 것 또한 아비투스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의 천성과 그 여자의 바탕이 다름에서 온. 걸레를 아무리 깨끗이 빨아도 행주가 될 수 없는 것처럼, 결국 자신의 본색을 드러낸 것이리라.
즉 내가 남편을 받아들인 건 그를 끔찍이 사랑해서도, 나의 현실에 부족함이 있어서도 아니다. 눈물도 말라버린 그 수많은 날들이 곰삭아 이제 독립과 자유로 보상을 얻게 된 마당에 새삼스럽게 그를 위해 밥상을 차리고 속옷을 빨아주는 게 난들 즐거우랴. 아니 그런 것 따위는 대수롭지 않다. 무엇보다 나의 내면화된 선비 기질과 인격이 질척함이나 천박함과 함께 뒹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번 재결합은 나의 높은 자존감의 선택이다.
중년에 떠난 남편이 초로의 노인이 되어 내 곁으로 돌아왔다. 모든 것이 낯설지만 코 고는 소리만큼은 그대로다. 부부로 이 남자와 남은 시간을 잘 살아내느냐 마느냐는 나 하기에 달렸다. 나의 아비투스를 신뢰하며!
※브라보 마이 러브는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