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 게재하기로 한다.
'임진ㆍ정유왜란 피랍인 후손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이는 14대 심수관이다. 일본 도예의 대명사가 된 사쓰마 야키(薩摩燒) 중흥의 주인공이라는 게 그 이유일 것이다.
1969년 그를 주인공으로 설정한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의 소설 ‘고향을 어찌 잊으리오’가 화제가 되자 그의 명성도 부풀어 올랐다. 정유재란 때 납치된 도공들이 규슈 가고시마(鹿兒島) 땅에 터를 잡고 400년 동안 조선인 혈통을 이어가며 살아온 이야기가 독자들의 심금을 울린 것이다.
한국에서는 ‘노란 셔츠 입은 사나이’로 유명했다. 1974년 한국에 온 그는 서울대학교 강당에서 강연했다. 질의응답 시간에 일제 치하 36년에 대해 묻는 학생들에게 “여러분이 36년을 말한다면 나는 370년을 말해야 합니다. 과거에 매이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답했다.
그 순간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지면서 유명한 노래의 합창이 울려 퍼졌다. 마침 그가 노란 티셔츠를 입고 있었던 것이다. 14대째 한국 이름을 쓰고 있는 데 대한 존경과 사랑의 표시였다. 그 일을 계기로 그는 박정희 대통령을 예방하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다.
그건 오래전 이야기이고, 근래에는 고(故) 노무현 대통령이 그의 집을 방문하고, 한일 각료회담 간담회가 그의 집에서 열린 일로 유명해졌다. 2004년 12월 18일 가고시마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이 끝난 뒤, 유명 온천 휴양지 이부스키(指宿)로 가는 길에 노 대통령이 그의 집에 들러 차 한 잔을 마신 일이 있었다.
1998년에는 가고시마 한일 각료회담 후 양국 각료들이 그의 집에서 간담회를 가진 일도 있었다. 30년째 주일 한국대사관 명예 총영사직을 수행하고 있는 그의 가교역할이 필요하기도 했지만, 양국이 서로 편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81년 도쿄에서였다. 정확히 말하면 그의 작품과의 만남이었다. 게이오대학교 신문연구소에서 공부할 때 우연히 신주쿠 이세탄(伊勢丹)백화점에서 ‘심수관 도예전’이 열린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달려갔다. 먼저 놀란 것은 작품 값이었다. 막사발로 보이는 그릇 하나에 30만 엔짜리 가격표가 붙어 있었다. 도예에 까막눈이었던 젊은 기자의 눈에는 큰 놀라움이었다.
두 번째로 놀란 것은 그가 심수관이란 이름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분명 일본인이었고, 그의 선대가 납치되어온 지 400년을 바라보는데 아직도 우리나라 이름을 쓴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재일동포 대부분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숨기려고 통명(通名)이라는 일본식 이름을 쓰고 있지 않은가.
그 일이 있은 후 꼭 한 번 그를 만나 인터뷰를 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소원은 10년 만에 이루어졌다. 1990년 7월, 주일 특파원으로 발령받아 도쿄에 부임하자마자 가고시마로 달려갔다. 도쿄에서 신칸센으로 후쿠오카까지 7시간, 거기서 특급열차로 가고시마까지 5시간, 다시 로컬 열차로 30분을 달려, 시골 역에서 택시로 30분을 더 가야 했다. 중간에서 하룻밤을 머문 여정이었다. 미야마(美山)라는 지금의 마을 이름보다 나에시로가와(苗代川)라는 옛 이름이 더 유명한 곳이다.
그는 10년 지기처럼 환대해주었다. 수장고에서 선대들의 작품들을 둘러보는 사이, 14대가 가마에서 나왔다는 전갈이 왔다. 수염이 덥수룩한 얼굴이 이웃집 아저씨 같은 푸근한 인상이었다. 잉크빛 작업복은 개량한복 같았다. 따스한 손길에 이끌려 사랑채에 오르니, 낡은 선풍기 저편 벽에 ‘백세청풍(百世淸風)’이라는 글씨가 눈길을 끌었다.
“선친께서 조선에 가셨을 때 황해도 해주의 어느 정자에서 탁본을 떠온 것이오. 우리 집 가보요.”
수인사가 끝나고 액자를 화제 삼자 그는 이렇게 대답하며, 가문의 내력부터 설명하기 시작했다.
많은 것을 물었고, 많은 말을 들었다. 정유재란 때 붙잡혀온 도공 후예들이 사는 마을이라기에 당신처럼 조선 이름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더니, “우리 집뿐이오” 했다. 성은 그대로인 임(林) 씨가 있지만, 읽기는 일본식(하야시)으로 하는 집이 하나, 나머지는 모두 일본 성으로 바뀌었다 했다. 200여 호 가운데 50%는 조선 도공 후예들이고, 나머지는 메이지(明治)유신 이후 흘러 들어온 일본인들이라 했다.
“지금은 달라졌지만 메이지 유신 무렵까지만 해도 마을에 서당이 있어 글 읽는 소리가 낭랑했답니다. 조선의 혈통을 보전시키려는 사쓰마 번(藩)의 보호정책 덕분에 모두가 사족 대우를 받으며 경제적으로도 유족하게 살았지요.”
그는 나에시로가와 마을이 번 당국으로부터 어떤 보호를 받았는지를 강조하는 사례로, 마을 사람 하나를 죽인 범인과 관련자 6명이 모두 처형당한 사건을 들었다.
서당 이야기가 끝나자 그는 잠시 자리를 뜨더니 ‘한어훈몽(韓語訓蒙)’과 ‘숙향전(熟香傳)’ 고본을 들고 왔다. 한어훈몽은 자녀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칠 때 쓰던 교과서다. ‘매오 다’(매우 좋다), ‘책을 닐러라’(책을 읽어라) 같은 우리말 고어 옆에 일본 글자로 훈이 붙어 있었다. 그렇게 가르친 우리말로 자녀들에게 ‘숙향전’ 같은 책을 읽혔다는 것이다.
아직도 우리말 잔재가 많고, 한동안은 개고기를 먹는 풍습에서부터 제례 혼례에 이르기까지 조선 색채가 남아 있었다 했다. 그가 어렸을 때 돈이 없다는 말은 ‘동가 샤가나이’, 방귀 뀌었다는 말은 ‘방구 시타’라고 했다. 공방과 가마에는 그런 표현들이 더 많다. ‘안질통’은 가마에서 일할 때 쓰는 간이의자다. 물그릇은 ‘무루사쿠’, 흙덩이는 ‘동그레’, 주걱은 ‘비코세’, 막대기는 ‘찌르레’, 흙을 두드려 펼 때 쓰는 연장은 ‘슈르레’, 장작은 ‘찍순’이라 했다. 일본어에는 없는 말들이다.
점심 대접을 받은 뒤 그가 운전하는 벤츠 승용차를 타고 단군사당 옥산궁(玉山宮)부터 찾아갔다. 자동차 라디오에서 우리말 방송이 나왔다. KBS 제주 방송이었다.
“우리말을 알아들으시네요.”
“아닙니다. 뜻은 몰라도 들으면 편안해서 그냥 틀어놓습니다.”
우리말을 몰라서 미안해하는 표정에 어린아이 같은 부끄러움이 묻어 있었다.
차를 내려 차 밭 사이로 난 나지막한 언덕길을 잠시 오르니 대숲 가에 옥산궁이 모습을 드러냈다. 개량기와로 지붕을 이은 정자 같은 건물 앞에 작은 도리이(鳥居, 신사 입구에 세운 기둥문)와 돌 등롱이 서 있었다. 일본 신사 분위기가 나지 않아 다행이었다. 가까이 가 보니 사당은 많이 퇴락해 있었다. 상주 관리인이 없는 탓인지 잡초가 무성했다.
“오래전에 신관이 죽고 새 사람을 모실 수 없어 이렇습니다. 아무나 신관으로 앉힐 수도 없는 일이라서… 다시 사당을 부활시키자는 논의가 있으니 머지않아 문을 열게 되겠지요.”
그렇게 된 것이 자기 책임이라도 된 듯, 표정에 미안해하는 빛이 역력했다. 그러면서 얼른 옥산궁의 유래를 말하기 시작했다.
“살기에 여유가 생기고부터 마을에 갈등이 심했던 모양입니다. 서로 자기 가문이 잘났다고 티격태격한 것이지요. 어느 날 밤 현해탄 쪽에서 커다란 불덩이 하나가 날아와 이곳에 떨어졌는데, 다음 날 아침에 와 보니 큰 바위가 있더래요. 사람들은 서로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살라는 단군의 계시로 알고 이 자리에 사당을 세웠답니다.”
옥산궁이 생긴 뒤 매년 설날과 추석에 단군제가 열렸다. ‘오노리소’라는 신축가가 그때부터 불렸는데, 이제는 노랫말 뜻도 제대로 전해지지 않는다.
도자기 작품에 새겨져 내려오는 노랫말은 ‘오는 날도 오는 날도 매일 매일이 오늘과 다름없네. 날이 저물고 또 해가 떠올라도 오늘은 오늘, 언제나 같은 세월’이라 돼 있다. 고국에 돌아갈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인고의 세월에 오늘과 내일의 차이가 있겠느냐는 체념과 실망의 의미를 담은 글이다.
옥산궁을 떠난 자동차는 이웃 구시키노(串木野) 시가지를 지나 시마비라(島平) 해안에 멎었다. 1598년 겨울, 1대 심수관 일행 42명이 표착한 해안이다. 주차장에 차를 세운 14대는 성큼성큼 해변으로 걸어가더니, 검은 빗돌 아래에서 잡초를 한 움큼 뽑아냈다. 선조들의 도래 400주년을 앞두고 그가 세운 기념비다.
비석에는 ‘게이초 경장 3년 겨울, 우리들의 개조 이 땅에 상륙하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돌을 세운 경위를 설명하고 나서 그는 해안 바윗돌에 올라, 먼 지평선을 가리키며 고난의 역사를 설명했다. 조선을 떠난 피랍인 배는 3척이었다. 두 척은 맞은편 가고시마 해안에 상륙했는데, 그들의 조상 42명을 태운 배만 이곳에 표착했다. 그 까닭은 아무도 모른다 했다.
오랜 굶주림과 뱃멀미에 시달린 도공들은 뭍에 오르자마자 지쳐 쓰러졌다. 배 안에서 숨을 거둔 사람도 있었다. 그 무덤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 아녀자들은 신음 섞인 울음을 그칠 줄 몰랐다. 당장 먹을 것과 바람을 피할 움막이 필요했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마른풀과 잔가지를 꺾어 움막을 짓고, 진흙을 파서 가마부터 만들었다. 먹고살 방도는 그것뿐이었다.
이상한 말을 쓰는 사람들이 구워내는 그릇은 곧 현지 마을의 화제가 되었다. 곡식과 채소를 가져와 바꿔가기도 했고, 돈을 가져오는 사람도 있었다. 맨손으로 와 빼앗아가려는 무리도 있었다. 어느 날 왜인들이 떼 지어 몰려온다는 소문이 돌았다. 무리의 지도자 심당길과 박평의(朴平意)는 의논 끝에 마을을 버리기로 결정했다.
유약과 공방 도구부터 챙겨 넣고 옷가지와 취사용품은 남부여대(男負女戴)한 채 하염없이 걷다가 발을 멈춘 곳이 나에시로가와였다.
“여기 지형이 남원 천지와 너무 흡사하지 않은가!”
발길을 멈추고 짐을 내린 이유는 단 하나, 그들의 고향 남원 땅을 닮은 곳이라는 것이었다. 그곳에 새 둥지를 틀자마자 번 관리가 성하촌(城下村)으로 이주하라는 명을 가져왔다. ‘성주인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명령’이라 했다. 마을 어른들은 단호히 거부했다. “군부(君父)를 팔아먹은 원수와는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남원성 함락 때 요시히로 군을 지름길로 안내한 주가전(朱嘉全) 같은 자들이 거기 모여 산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으니 거기 그대로 살게 하라. 대신 그들의 조선인 혈통을 철저히 보전토록 하고, 도자기 생산을 적극 지원하라.”
히데요시가 죽은 뒤 열도의 패권을 겨룬 세키가하라(關が原)전투에서 돌아온 요시히로는 애써 붙잡아온 도공들이 생각난 듯, 적극적인 보호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도공 마을에 잡인의 출입을 금하라, 조선의 언어와 풍속을 이어가게 하고 반드시 동족끼리만 혼인하도록 하라, 한 번 결혼하면 이혼할 수 없게 하라, 도자기 생산에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말라. 생산된 제품은 모두 성에 납입하도록 하라….”
보호·지원정책에 힘입어 조선 도공 마을의 도자기 산업은 날로 융성했다. 번의 지원을 받은 박평의가 백토를 발견한 뒤로 도자기 생산이 가능해졌다. 유명한 ‘시로 사쓰마(白薩摩)’의 탄생이다. 도자기란 자석(磁石) 없이는 아름다운 색과 빛을 낼 수 없는데, 흰 자석을 쓰게 되니 금상첨화가 된 것이다. 당시 일본에서는 시로 사쓰마 한 점이 ‘일국일성(一國一城)에 값한다’는 말로 평가되었다. 차(茶) 문화는 발달했으나 다기(茶器)가 조잡했던 문명의 수준 탓이었다. 이렇게 양산된 사쓰마 야키는 번 재정에 엄청난 보물단지가 되었다. 나가사키 항을 통해 외국에 수출하고 국내 시장에도 출하해 막대한 수입을 거머쥘 수 있었다.
정유재란 때 일본 무장들이 도공 납치에 혈안이 되었던 까닭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메이지유신 때 사쓰마 번이 조슈(長州, 현재 야마구치) 번과 함께 중심 역할을 한 것도 그에 힘입은 것이었다. 사쓰마 야키는 1873년 오스트리아 만국박람회에 출품한 12대 심수관 작품이 은상을 수상한 것을 계기로 국제적으로도 유명해졌다.
심수관 가 수장고에 있는 ‘히바카리(ひばかり)’ 막사발은 일본 국보로 지정돼 있다. 이를 만든 도공도, 흙도, 유약도 모두 조선의 것인데 오직 불 하나만 일본 것이라는 뜻이다. 사쓰마 야키 개조 심당길이 표착 초기에 만든 이 작품은 1998년 서울 일민미술관에서 열린 ‘400년 만의 귀향전’에 출품되어 화제가 되었다. 사쓰마 야키 400년 기념 행사의 일환으로 14대가 주관한 전시회였다.
14대와의 두 번째 만남은 1993년 8월 대전엑스포 ‘한국의 도자기 귀향비교전’ 취재 때였다. 고국과 오랜 왕래가 있었던 그는 친한 도예 작가들과 얼싸안고 재회의 기쁨을 나누었다. 말은 통하지 않아도 뜻이 통하는 것 같았다. 같은 처지이지만 고국과 유대가 없어 서먹서먹해하는 도공 후예들에게는 친절한 가이드 역할을 했다.
일본 도자기의 신이 된 이삼평(李參平)의 12대 가네가에 삼페에(錦が江三兵衛), 가라쓰 야키 13대 나카사토 다로에몽(中里太郞衛門), 다카도리 야키 12대 다카도리 하루산(高取八山), 하기 야키 12대 사카 고라이자에몽(坂高麗左衛門), 고다 야키 11대 아가노 사이츠케(上野才助) 등이 ‘한국의 도자기 귀향비교전’ 출품자들이었다.
이들 중에는 자신이 한국계라는 사실을 확신하지 못한다는 사람도 있었고, 조상이 어디서 붙잡혀 갔는지 확실한 연고지를 몰라 “이번 기회에 꼭 확인하고 싶다”는 사람도 있었다. 고국에 올 때마다 조상이 붙잡혀간 남원과 관향인 경북 청송읍을 찾아보는 14대와는 너무도 대조적인 삶이었다.
‘400년 만의 귀향전’ 때 그는 불까지 조국의 것으로 하자는 뜻으로 남원 교룡산성에서 채화된 불씨를 일본으로 가져가는 행사를 주관했다. 그 불씨는 지금도 미야마 도유관(陶遊館)에서 꺼지지 않고 타오르고 있다. 후손들은 가마에 불을 지필 때마다 거기서 불씨를 채화한다.
400주년 기념 행사들을 마친 뒤 14대는 “이제야 선대의 비원을 이루어 감회가 깊다. 특히 400년 사업을 부탁한 선친의 유언을 받들어 기쁘다”고 했다. 그 모든 사업이 단군의 보살핌 덕분이었다는 말도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헤어질 때 귀중한 선물을 받았다. 돌아와서 열어보니 아름다운 꽃병이었다. 나무상자 안쪽의 친필 휘호에 감격했다. ‘本是同根-14代 沈壽官’ 생면부지의 특파원을 동족으로 대해준 따뜻한 마음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다.
그가 심수관 도원 당주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준 지도 30년째다. 그는 이탈리아 유학에서 돌아온 아들을 또 한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도예의 기본은 옹기에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 아들의 아들도 벌써 공방과 가마를 드나들며 흙일을 배우고 있다.
올해 93세가 된 그는 16대를 습명(襲名, 선대의 이름을 계승함)하게 될 손자에게 흙일을 가르치고 있다. 근래 한국 기자와의 인터뷰에서는 “거동이 불편해 2013년 이후 한국에 가지 못하고 있다”면서, 지금도 최후의 여행을 꿈꾸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어를 아는 택시 운전사를 만나 한국의 각 지방을 돌며 고향 산천과의 작별을 고하는 게 마지막 소원이라 했다.
서울시 지하철 1호선 동묘역과 6호선 창신역 사이의 창신동은 최근 예쁜 옛 동네로 주목받고 있다. 낡고 오래되면 ‘뉴타운’이라 이름 붙여 첨단 건축물을 세우고 땅값을 올리는 것이 불과 몇 년 전까지 도시의 운명이었다. 창신동은 개발을 거부하고 주민들의 푸근함을 담아 이른바 재생의 길을 택했다. 창신동 구석구석 남아 있는 기억 중 하나가 바로 동덕여자중·고등학교다. 1960년대, 단발머리 어린 숙녀 박혜경(朴惠慶·66)은 창신동 이곳저곳을 누비며 추억을 쌓았다.
우리 학교 동덕여자중·고등학교
박혜경 동년기자에게 창신동은 동덕여중·고 시절 기억과 함께한다. 1986년에 학교가 서초구 방배동으로 이전해 사실상 그 시절의 흔적이라든가 추억 한 자락 남은 것이 없었다. 운동장이 있던 자리에는 대단위 아파트가 들어섰다. 참새방앗간 드나들듯 다녔던 문방구는 반찬가게가 돼버렸고 말이다. 하지만 박혜경 동년기자의 눈은 기자의 눈과 달랐다. 아파트 입구를 보며 학교 정문을 설명하고, 그 너머 너른 학교 운동장과 숱한 세월의 더께가 앉은 수위실이며 귀밑머리 1cm를 외치는 규율부 학생들을 회상했다. 타임머신을 타고 추억 속 교정을 거니는 듯 말이다.
“지금 창신동 두산아파트 자리가 바로 우리 학교가 있던 자리예요. 요즘은 가수 아이유가 나온 학교로 유명하더라고요.(웃음) 우리 때는 시험을 쳐서 들어갔는데 저도 무사히 잘 붙어서 동덕여중·고를 다녔어요. 일제강점기 때 조동식 박사가 우리 민족이 독립을 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우선이고, 여성도 교육받아야 한다며 세운 게 우리 학교거든요.”
1973년 사라예보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우승 주역인 탁구선수 정현숙 씨와는 고등학교 시절 같은 반이었다. 동덕여고는 사라예보대회로 세계에 이름을 날리기 전에도 탁구로 유명한 학교였다. 당시 이에리사 선수(서울여상)를 제외한 정현숙, 나인숙, 박미라, 김순옥 선수 모두가 동덕여고 출신이다. 방과 후 특별활동으로 무용을 할 때마다 강당 한 편에서 열심히 운동하는 탁구선수 친구들을 봐왔다.
민족학교이자 독립운동가의 산실
여기서 잠깐! 현재 동덕여자고등학교 사서교사이자 59회 졸업생인 이숙희 씨의 추억 속을 좀 들춰보기로 하자. 옛 사진을 구하기 위해 동덕여고에 연락을 했더니 마침 이 학교 졸업생인 이숙희 씨를 소개해준 것.
“동덕은 순수 민족자본으로 세운 민족학교입니다. 1908년 스물두 살이던 조동식 박사가 동원여자의숙이라는 이름으로 학교를 설립했습니다. 우리 민족이 빨리 독립을 하려면 여성이 공부를 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어요. 옛날 양반 댁은 딸들을 동덕여고로 보냈다더군요. 그리고 여성 독립운동가를 많이 배출한 학교이기도 합니다.”
3·1운동 만세사건 때 동덕 학생들이 태극기를 몸에 숨겨 만세 현장으로 가서 전달했다. 현재 서대문 형무소 여옥사에는 동덕여고 시절 단짝이었던 18회 이효정과 박진홍이 눈물의 상봉을 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석고상이 설치돼 있다. 이들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수감돼 1935년 4월 이곳에서 재회했다. 일제강점기 학교의 명성 또한 높았다고 덧붙였다.
“그 시기 우리 학교는 전국구 학교였어요. 함경도 함흥, 명천, 경상도 봉화, 울주, 마산, 전라도 고창, 제주도 등지에서도 동덕을 왔으니까요.”
지방의 한 중학교에서 우등상을 놓치지 않았던 이숙희 씨 또한 1972년 서울로 유학을 올 때 여성 교육의 전통적인 명문의 이미지를 가진 동덕여고를 선택했다.
동대문 아파트와 낭만의 스케이트장
다시 박혜경 동년기자의 추억으로 돌아가서 학교 주변 이야기에 대해 들어보자. 학교 밖을 나와 학생들 사이의 핫 플레이스는 바로 동대문 스케이트장이었다. 이곳도 안타깝게 남아 있는 것 하나 없이 찜질방 건물이 들어서 아쉬움을 남겼다.
“동대문 친구들이랑 자주 가서 놀았어요. 얼음 바닥 정리 시간이 되면 다들 스케이트장 밖으로 나가잖아요. 그때 매점에서 남학생들을 만나는 거예요. 일종의 즉석만남이요.(웃음) 음악소리가 들리면 스케이트장으로 가서 기차를 만들 듯 길게 늘어서서 같이 스케이트를 타기도 했어요.”
1964년 1월에 문을 연 동대문 스케이트장은 우리나라에 생긴 첫 실내 스케이트장이었다. 스케이트가 붐이었던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스케이트를 타려면 논바닥이 꽝꽝 어는 겨울을 기다려야만 했다. 사시사철 얼음을 지칠 수 있는 실내 스케이트장의 출현은 일대 사건이었다. 오전 8시부터 밤 9시까지 연중무휴로 운영된 동대문 스케이트장은 성황을 이루다 롤러스케이트장의 출연과 다양한 놀이 시설 도입으로 경영 악화를 겪다가 여러 번의 폐점 위기에 봉착하더니 1990년대 중반 자취를 감췄다.
동대문 스케이트장 바로 옆에는 연예인들이 많이 살았다 하여 ‘연예인 아파트’로 불리던 동대문 아파트가 있다. 1965년 완공된 7층짜리 건물로 지은 지 50년이 넘은 이 아파트는 지금까지도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당시만 해도 고급 아파트였던 동대문 아파트는 중앙정원형으로 지붕이 없는 형태로 요즘 건축 양식에서는 보기 드문 구조로 만들어졌다. 영화 숨바꼭질의 영화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현존하는 아파트 중 두 번째로 오래된 동대문아파트는 2013년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지정됐다.
창신동 일대 입학과 졸업 철이면 발 디딜 틈 없이 문전성시를 이루던 진고개 식당을 끝으로 박혜경 동년기자와의 데이트를 마무리했다. 창신동 이곳저곳을 거닐며 아이처럼 좋아하던 박혜경 동년기자의 웃음소리가 지금까지도 들리는 듯하다. 창신동에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도 많지만 여전히 남아 함께 숨 쉬고 있는 것도 많다. 동대문 아파트도 그렇고 백남준의 생가를 복원한 백남준 기념관, 곳곳에 옛집들도 남아 있다. 창신동의 추억이 있는 독자라면 날씨가 풀리는 어느 날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산책 나가 보시기를 권한다.
‘꽃잎은 바람결에 떨어져 강물을 따라 흘러가는데…’
나의 명동 쉘부르 입성 즈음 대한민국은 온통 전영 씨의 ‘어디쯤 가고 있을까’의 나라였다. 그 노래 하나로 모두가 행복한 모습이었다. 그때 ‘쉘부르’를 빛내던 전영 씨였기에 내 상업적인 무대의 시작은 이 노래와 함께 출발한다.
나와 비슷한 시절을 보낸 청춘들은 한 번쯤 다녀갔을 명동의 통기타 생맥주 살롱! 아니 그보다 통기타 가수들의 요람이라 함이 옳을 듯싶다. 그곳은 돈 없고 기댈 곳 없는 수많은 무명가수들의 등용문인 동시에 ‘쉘부르’라는 이름 안에 가두어 자부심을 갖게 하는 통기타의 메카였던 것이다. 지금 열광하는 오디션의 효시인 셈이다. 그랬기에 객관적 평가를 받으려는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노래를 준비해 국민 DJ 이종환 씨의 평가를 받으려고 토요일 오후마다 북새통을 이뤘다.
사실 아무 영문도 모른 채 단순히 상금 때문에 지원해서 두 차례 고배를 마시고 세 번째 도전에서 쉘브르家에 입성하게 된다. 그러는 동안 서로 익숙해진 얼굴들 서로의 실력 또한 어느 정도는 알고 있기에 자주 만나는 사람끼리 눈인사도 하며 하나가 된 분위기… 노래라는 공통분모 덕분에 그리 될 수 있었던 통기타 시대의 역사이기도 할 것이다.
그들 중에는 이문세도 매번 만날 수 있었는데 노래는 예나 지금이나 무척 잘했지만 이종환 씨 눈에 들지 않아 끝내 쉘부르 무대 시간표에 이름을 올리지는 못했다. 그곳에서 만난 얼굴들 중에 나중에는 유명 가수가 된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실력이 있어도 오디션 문턱을 못 넘은 사람이 많았을 만큼 이종환 씨의 주관적인 평가는 많은 이들의 꿈을 빼앗아가기도 했고 나처럼 가수가 목표가 아니고 상금이 목적이었던 사람들에게 무대를 허락하기도 했다.
내가 1977년 10월에 문을 두드려 얻어낸 자리를 노래보다는 말솜씨가 좋아서 발탁된 첫 케이스, 주병진! 뭔가 멋져 보였고 수줍음 많고 조용했던 청년 하덕규! 그는 시인과촌장으로 대중가요 명반 대열에 이름을 올린 훌륭한 뮤지션으로 훗날 ‘재회’란 노래를 내게 준 음악적 동지이자 은인이기도 하다. 그리고 탄탄한 가창력의 소유자 김승덕은 ‘나의 사랑 그대 곁으로’를 작곡한 친구인데 이들 모두 똑같은 방법으로 내 뒤를 이었다. 40년 전의 일인데 너무도 선명하게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렇게 청춘은 흘러 이제 육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쉘부르와 함께 추억에 젖어본다.
젊음! 20대의 기웃거림! 청바지와 통기타를 앞세워 암울했던 시기에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불러댔던 노래들! 그 시절의 명동은 ‘쉘부르’, ‘오라오라’, ‘가젤’, ‘PJ’ 등등 몇몇 통기타 라이브 클럽이 성행했으며 12시 야간통행금지가 있었던 때라 10시가 지나면 마치 썰물처럼 사람들이 순식간에 빠져나가곤 했다.
그 시절 노래하는 사람들 중 형편이 좋은 사람은 많지 않았고 집안 반대를 무릅쓰고 나와 노래했던 터라 용돈이 풍족할 리 만무였다. 그저 좋아하는 노래를 한다는 이유로 우린 늘 굶주림 속에서 배고픔을 안고 생맥주로 휘청거리는 명동, 무교동을 무거운 통기타를 들고 오가며 행복했다. 무명가수였지만 나름 이름을 빛내고 있었고 배가 고파서 불행하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한 적 없는 진정한 딴따라였는지도 모른다.
그 당시 제일백화점 왼편에 있던 제일 값싼 막국숫집에서 거의 한 끼를 해결했고 조금이라도 여유가 생겨 라면 골목으로 달려가 그냥 라면도 아닌 계란라면이라도 먹는 날은 우리들 모두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때 우리에겐 짜장면도 사치였으니… 지금도 사랑받는 ‘명동교자’ 그땐 ‘명동칼국수’ 집이었는데 상금 타던 날 회식한 이후로 몇 번 가보지도 못한 채 명동 시대를 접었던 기억도 슬픈 추억이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적 있는가?’ 다산으로 인해 모든 게 부족하기만 했던 우리 시대를 살아온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경험했을~ 그리하여 단단해진 우리 세대들이 난 늘 자랑스럽다. 콩나물시루 같은 교실에서 눈을 반짝이며 꿈을 키우던 날들~ 몽당연필의 소중함으로 늘 근검절약을 하던 시절~ 소풍 갈 때 전날 미리 사둔… 계속 손으로 만지작거려 미적지근한 사이다 병이라도 드는 날엔 어깨가 으쓱했던 기억하며 도시락 뚜껑을 열었을 때 뻘건 소시지와 계란프라이가 있는 친구들이 한없이 부러웠던 그런 시절!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던 시절의 추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어떤 것은 더욱 선명하게 남아 있다.
꿈같은 시간들이 흘러 이젠 꿈의 시간으로 왔다. 60세! 예전 같으면 ‘고려장’을 이미 치렀을 나이에 서 있다. 더러는 정년퇴직을 해야 하거나 은퇴를 생각해야 할 나이가 되고 보니 정년 없는 무대에 서의 삶이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젊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인정받고 달려온 날들이 있는가 하면 나이 들었다는 이유로 관심받지 못함도 견뎌내야 하고 이젠 젊은 친구들이 놀아주지 않는 설움도 감수해야 할 나이다. 하지만 난 예전이나 지금이나 찬란하고 푸르르다. 내 마음이 그러하고 내가 그러하다.
내가 지켜온 40년 동안의 대중문화예술계! 꼭 내가 지켜왔다고 할 순 없지만 수백, 수천의 가수들 중에 아직까지 살아남아 있지 않은가? 40년을 자의이든 타의이든 무대를 떠나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하기에 축복이라는 생각이다.
지금 노래하는 친구들 중에 과연 40년을 살아남을 자들은 얼마나 될까? 내가 힘들게 올랐던 그 산의 정상에 오를 사람들은 몇이나 될 것이며 과연 몇이나 나처럼 근사한 곡선을 그리며 하산할 것인가? 오르며 만난 수많은 꽃과 나무… 그리고 사람들… 그 아름다운 관계 속에서의 행복을 과연 몇이나 알겠으며 몇이나 나처럼 단단하게 여물겠는가? 중턱에서 바라보기만 할 친구들이 얼마나 많을지는 충분히 상상 가능한 일이다. 노래를 시작한 40년을 되돌아보니 참 잘 살아왔다는 자찬이 절로 나온다. 내가 이 얼굴로 살면서도 성형수술이나 어떤 시술을 하지 않고 예쁜 여배우들한테도 꿀리지 않고 살아왔듯이 나를 사랑하기에~ 진심을 다해 온전히 나를 사랑하기에~ 내가 찬란한 내 인생의 주인공이기에~ 어떤 것도 내가 불행해지게 내버려두지는 않은 듯싶다. 난 누구보다도 건강한 정신이 있기에 절대 행복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행복해야 하고 그리하여 지금 행복하다. 그 원천은 건강한 마음에서 시작된다고 본다. 누군 ‘이 나이 육십에 뭘~’ 이런 이야기는 사형선고 받은 사형수들이나 할 수 있는 이야기이지 않은가!
삼천갑자를 살다간 동방삭의 삶에 비하면 이제 겨우 하나의 갑을 보낸 나이에 뭐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난 거짓말처럼 60세가 되길 기다렸고 24세 개띠 해에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로 가수 인생 최고의 영광 속에 지냈었고 이제 또 개띠 해를 맞게 되니 새로운 열정이 뜨겁게 올라온다. 무엇이든 새로 시작하기에 충분한 나이! 어떤 일도 두려움 없이 도전할 수 있는 나이!
그렇게 하얀 마음으로~ 뜨거운 가슴으로~ 나는 다시 한 살로 태어나고 싶다. 비움으로 순수함으로아름다운 남은 시간들을 맞이하고 싶다. 그렇게 호기심을 놓지 않고 끊임없이 궁금해하며 공부하고 가슴으로 모든 걸 사랑하고 싶다. 내가 태어나던 무술년 그 가을처럼 그렇게~ 60년 만에 다시 돌아온 무술년이기에 그렇게~
2018년 1월 1일
남궁옥분
새벽에 차 시동을 걸었다. 한탄강이 흐르는 전곡 원불교 교당을 찾아가는 길. 가는 내내 40년 전 초등학교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추수가 끝난 논에는 서리가 하얗게 내려앉아 있었다. 거대한 독수리들이 검은 무리를 이루고 있는 모습이 생소하고 두려웠다. 논길을 지나고 작은 마을의 고불고불한 길을 빠져나와 언덕을 넘으니 옅은 안개 속에 아담한 교당이 나타났다.
필자는 경주 인근 산골에서 살다가 초등학교 2학년 2학기 때 서울 제기동으로 이사 왔다. 그 친구는 초등학교 3학년 때 만났다. 4학년이 되어 또 이사를 했으므로 친구와 사귄 것은 1년 정도에 불과하다.
시골에서 학교 다닐 때는 성적도 좋았고 반장도 했다. 그러나 서울에 와서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경상도 사투리가 심했기 때문에 아이들 놀림감이 되었다. 심지어 담임선생님도 자꾸 책읽기를 시켰다. 자신감이 없어지고 더 내성적으로 바뀌었다.
한옥 집 문간방에서 온 가족이 살았다. 텔레비전이 동네에 몇 대 없을 때였다. 시골 촌뜨기에게 그들은 텔레비전도 보여주지 않았다. 필자는 언제나 그들 주위를 맴도는 외톨이였다.
그 친구와 어떻게 가까워졌는지는 기억에 없다. 어느 날 집에 놀러가자고 했다. 마당 한가운데 펌프와 꽃이 가득한 네모난 정원이 있었다. 정원을 둘러싸고 미음자로 지어진 큰 한옥집이었다. 유리알처럼 반들반들했던 마루의 감촉이 지금도 생생하다. 학교가 끝나면 늘 친구 집에 가서 어머님께서 내주신 과자와 과일을 먹으며 둘이서 텔레비전을 봤다. 친구는 바둑을 잘 두었다. 필자의 바둑 실력은 8급 정도인데 그때 배운 그대로다. 검은색 자가용도 있었는데 그 시절에 기사도 있었다. 잘사는 집이었다. 광나루로 가족 물놀이를 갈 땐 필자도 데려갔다. 그러나 4학년 때 우리 집이 면목동으로 이사하면서 친구와 연락이 끊어졌다.
그리고 40년이 흘러 필자가 오십이 되던 해에 문득 그 친구가 간절히 보고 싶어졌다. 세상을 좀 살아보니 남을 배려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되었다. 갈빗대가 다 드러날 정도로 몸이 약했고 내성적이며 사투리를 쓰는 시골 촌뜨기를 챙겨준 친구도 고마웠고 늘 다정하게 대해주셨던 친구 어머님도 보고 싶었다.
다행히 친구 이름을 잊지 않았다. 친구가 어느 중학교로 진학했는지 겨우 알아냈다. 그 중학교에서는 개인정보를 지켜야 한다면서 친구에 대한 정보를 일절 알려줄 수 없다고 했다. 여러 번 사정했지만 허사였다.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인터넷에 친구의 이름을 입력해보았다. 눈에 익은 한 사람의 얼굴이 검색되었다. 눈이 번쩍 뜨였다. 40년이 지났지만 그 친구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는 원불교 스님이 되어 있었다.
교당 주차장에 이르자 가슴이 뛰었다. 그도 나를 알아볼까. 잠시 후 우리는 손을 맞잡았다. 시간이 되돌려진 듯 40년 전으로 돌아갔다. 마당 한가운데 네모난 정원과 펌프의 위치, 집의 구조와 마루에 있던 텔레비전, 바둑판이 놓인 자리를 종이 위에 그리는 필자를 그는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다. 하늘 아래 누군가 수십 년간 자기를 잊지 않고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고맙다고 했다.
그의 시집 안에서 어머님의 마지막 모습을 확인했다. 너무 늦게 그를 찾았다.
스타벅스에서 30년 만의 재회를 기다렸다. 문이 열릴 때 혹시 상대를 못 알아볼까봐 출입구가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푸근한 인상의 한 남자가 들어섰다. 그는 잠깐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망설이지 않고 우리 자매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언니가 대학생이고 필자가 중학생일 때 이문동 주택에서 월세를 산 적이 있다. 우린 별채에 살고 주인은 안채에 살았다. 작은 정원에는 철 따라 꽃이 피었다. 청신한 봄이면 유난히 라일락꽃이 탐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창문 가까이에 핀 꽃은 가난했던 우리 자매의 방을 향기로 가득 채워주곤 했다. 첫사랑이라는 꽃말처럼 우리의 꿈을 키워가며 설레던 시절이었다.
안채에 사는 주인집 아저씨는 월남한 사람이었는데 자녀가 아들 넷, 딸 하나였다. 주일이면 온 가족이 함께 교회에 나가는 신앙심 깊은 가정이었다. 주인집 아주머니는 정갈한 모습에 세련미까지 갖춘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가족이 성가를 부를 때면 아들들은 테너와 바리톤, 딸은 알토, 어머니는 소프라노로 멋진 화음을 들려줬다. 경외감이 들 만큼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한겨울 추위에 몸을 떨며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와 혼자 방에 앉아 있으면 주인집 아주머니가 조용히 노크를 하고는 이북식 김치밥을 주발에 그득히 담아 건네주시곤 했다. 김치와 고기를 듬뿍 넣은 따끈따끈한 밥이었다. 필자는 아직도 그때처럼 맛있는 김치밥을 먹어보지 못했다. 아주머니는 사랑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를 몸소 보여주신 분이었다.
옛 추억을 더듬던 우리는 이제라도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었다. 우리 자매는 스타벅스에서 30년 만에 만난 둘째 아들에게 아주머니의 안부를 물었다. 뵈올 수 있기를 잔뜩 기대하며 현재 어디 사시는지, 건강하신지를 물었다.
그러나 그는 미안해하며 어머니가 치매로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시니, 그때의 기억을 그대로 간직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어머니의 모습이 너무 엉망으로 변해서 보이고 싶지 않다는 얘기를 들으며 우리 자매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슬픔에 빠졌다.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는 치매. 인간에게는 너무 잔인하고 가혹한 병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격적인 마무리를 방해하고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치매가 예견된다면 조금이라도 정신이 멀쩡할 때 남은 삶에 대해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배우자나 자식들은 남의 이목을 의식해야 하고 평판을 염려해야 하고 경제적 손실도 고려해야 하는 등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누구든 좋은 추억을 남기고 떠나면 좋겠다. 산 자들이 종종 떠난 사람을 떠올리며 가슴 뭉클할 수 있으려면 냉정한 판단이 필요해 보인다. 치매가 깊어 회복할 수 없다면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듯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의미한 연명치료는 아무 의미가 없다. 치매 집단시설도 가족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한 것이지 환자를 위한 공간은 아니다.
죽을 날 기다리며 남의 손길에 의지하는 삶은 최악이다. 필자라면 한 손에 읽던 책을 든 채 자는 듯 죽고 싶다.
깊어가는 가을밤 지금 충무아트홀에서는 ‘벤허’가 공연 중이다.
벤허의 내용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이다.
얼마 전 리메이크된 영화도 있지만 그래도 벤허를 생각하면 필자의 젊은 날 대한극장의 와이드 화면으로 보았던 찰톤 헤스톤 주연의 작품을 떠올리게 된다.
여고 시절 중간고사나 기말고사가 끝나면 전교생이 대한극장에 가서 단체로 명화를 관람했다. 당시에는 극장 중에서 가장 크고 화면이 넓은 곳으로 대한극장을 꼽았다.
대한극장에서 많은 명작을 보며 꿈을 키우고 가슴 설렜던 그때가 눈앞에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대한극장에서 보았던 ‘벤허’는 누구에게나 큰 감동을 주었다. 와이드 화면에 펼쳐졌던 수많은 명장면은 잊을 수 없는 감동이다.
특히 마차 경주 장면은 아무리 리메이크를 한다 해도 다시는 따라 할 수 없을 정도의 명장면이라는 생각이다.
신당동의 충무아트홀에서 ‘뮤지컬 벤허를 보았다.
뮤지컬을 좋아해서 몇 번 와본 공연장이지만 벤허의 그런 스펙터클한 장면을 어떻게 표현할지 매우 궁금했다.
벤허의 방대한 내용을 3시간 안에 어떻게 연출했을지도 기대되었는데 역시 훌륭한 배우와 연출가의 역량으로 탄탄하게 잘 함축되었다.
그 긴 스토리도 어느 곳 하나 허술하지 않게 잘 연출되었으며 뮤지컬 배우들의 열연은 여느 뮤지컬보다 더 큰 감동을 안겨주었다.
영화와 뮤지컬의 차이를 알면서도 자꾸만 찰톤 헤스톤의 벤허와 비교하며 이 장면은 어떻게 표현할지 미리 상상해 보는 나쁜 관람 태도가 있었지만 억울한 누명으로 노예선에 탄 장면은 깜짝 놀랄 만큼 사실적으로 다가왔다.
뒤 배경으로 영상을 띄웠는데 진짜 노예선에 탄 사람들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느낌을 주며 멋지게 연출되었다.
그러나 역시 마차 경주 장면에선 웃음이 나왔다. 흰말 검은말 8마리의 모형 말이 방향을 바꾸어가며 움직여 마차 경주 장면을 연출했는데 무대 여건상 어쩔 수 없다는 걸 이해하면서도 우스웠다.
그래도 마차에 탄 두 배우 벤허와 멧살라의 연기는 진지하고 멋지게 다가왔다.
서기 26년 예루살렘은 제정 로마제국의 폭정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벤허는 명망 높은 유대의 귀족으로 오랜만에 로마의 장교가 되어 돌아온 친구 메셀라와 재회한다.
메셀라는 전쟁 중에 고아가 되어 벤허의 가문에서 거두어 벤허와 친구로 자란 사람이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벤허를 질투하여 증오심을 가진 인물이다.
많은 전투에서 승리해 장교가 된 그는 벤허에게 유대인 폭도의 소탕을 도와 달라 하지만 벤허는 거절한다.
벤허의 여동생 티르자는 메셀라를 좋아한다. 어느 날 로마 총독의 행군을 옥상에서 구경하던 티르자가 메셀라를 찾아보다 기왓장을 떨어뜨리는 사고를 낸다.
메셀라는 이를 문제 삼아 벤허 가문 전체에 반역죄를 씌운다.
나쁜 놈, 키워준 은혜를 모르는 나쁜 놈이라는 욕이 절로 나온다.
억울한 누명을 쓴 벤허는 노예선에 오르게 되고 부유한 귀족이던 어머니와 여동생은 지하 감옥에 갇혀 지내다 문둥병 환자가 되는 비극을 맞는다.
노예선에서 해적과의 난투 중 사령관을 구한 벤허는 그의 양자가 되어 로마 귀족이 된다.
생사의 갈림길을 극복한 벤허는 모든 것을 앗아간 메셀라에게 복수를 결심한다.
전차경주에서 메셀라는 다쳐서 죽고 벤허는 어머니와 여동생이 살아있다는 걸 알게 된다.
한편 예루살렘은 나사렛에서 유대의 새로운 왕이 온다는 소문으로 술렁이고 예수의 고난이 시작된다.
예수님의 은총으로 문둥병이 사라진 어머니와 여동생과 사랑하는 여인 에스더와의 만남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가 잘 함축되어 보여 졌고 관객들은 웅장한 음악과 배우들의 열연에 뮤지컬이 끝나고도 계속 기립박수를 멈추지 않았다.
잘 아는 내용임에도 또다시 큰 감동을 준 멋진 뮤지컬 ‘벤허’였다.
결별의 후유증은 크다. 열병을 앓는 듯하다. 그렇다고 사랑을 기피할 필요는 없다. 삶의 이유이기 때문이다. 기회가 오면 맞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언제나 결별을 각오해야 한다. 살아오면서 여러 번 결별을 겪어봤기에 제법 노하우가 쌓였다. 일단 관계가 좋을 때도 결별에 대한 준비를 한다. 그래야 충격이 적다. 또 결별로 얻어지는 장점들을 생각하며 위안을 삼는다. 사실 관계가 지속되고 발전되면 책임이 따른다. 둘이 합쳐야 하고 그에 대한 성실한 준비도 필요하다.
남자들은 최종 반려자가 아니더라도 좋은 여자라면 굳이 헤어지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자들은 최종 반려자가 아니라는 판단이 서면 결별 선언을 하고 관계를 철저히 끊는다. 같이 영화도 보고, 여행도 가고, 맛있는 음식도 같이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는데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좋은 남자라면서 헤어지자는 이유가 이해 안 된다. 그렇다고 다른 남자가 생긴 것도 아니다. 몇 년 후 우연히 마주치면 여전히 싱글이다.
조항조의 ‘가지 마’라는 노래가 있는데 가사가 와 닿는다. “울지도 마요, 잡지도 마요, 마음 편히 가게 해줘요” 결별하면서 곱게 보내야지 잡는다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요즘은 ‘데이트 폭력’이라는 것이 사회 문제가 되어버렸다. 결별에 대한 폭력적 저항이다. 호적에 빨간 줄 만들어가며 그럴 필요는 없다. 남자는 속으로는 울지라도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이 노래에는 “가지 마, 날 떠나가지 말라고 애원도 못한답니다”라는 내용도 있다. 가는 사람 잡아봐야 돌아올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럴 바에는 빨리 잊는 것이 상책이다.
결별에 대한 여자들의 조언은 이해하지만 굉장히 복잡하다. 쿨하게 또는 얌전히 결별했다 해도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결별 후 연락을 끊으면 그간의 정이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관계였었나 하며 원망한단다. 연락을 기다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 조언을 듣고 자존심 상하는 일이고 재회 가능성도 없는 사람에게 그럴 필요가 있냐고 반문했다. 남자의 자존심 정도는 접으라고 했다. 그래야 다시 만나게 될 때 비온 뒤 땅이 굳어지는 것처럼 관계가 더 돈독해진다는 것이다. 첫 번째 결별은 밀고 당기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했다. 사귀는 중에도 밀당한 적이 없는데 결별 통보 후에 밀당을 하자니 마음이 내킬 리 없다. 남녀의 차이인지도 모른다.
혼자 사는 메리트는 많다. 우선 자유롭다. 하고 싶은 것 마음대로 하고, 하기 싫은 것은 안 해도 된다. 그러나 둘이 살게 되면 좋은 점도 있지만, 양보하고 포기해야 할 것도 많다. 결별의 노하우는 다시 혼자가 되어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혼자 사는 장점을 더 크게 생각하면 결별의 상처는 차차 잊힌다. 결국 인생은 혼자 가게 되어 있다. 요즘은 한 집 건너 싱글이라는데 추세를 거슬러 싱글을 탈피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고 본다.
이 영화의 볼거리는 크게 곱게 늙은 여배우 다이안 레인, 프랑스의 아름다운 풍광, 여행길에서 남편 아닌 남자에게 느낀 40여 시간의 미묘한 이성적 감정 등이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은 영화 로 유명한 감독이다. 그의 딸도 2017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 이 영화는 코폴라 감독의 아내 엘레노어 코폴라가 80세에 만든 첫 장편 상업영화다. 일단 코폴라라는 이름만으로 믿고 볼 만한 영화라고 생각했다.
80세의 나이에서 오는 솔직함이랄까, 남편이 아닌 남자와 40시간 동안의 자동차 여행은 엘레노어 코폴라의 실화였는데, 감추기 어려운 감정들을 오히려 남편이 도와줘 영화로까지 만들어졌다.
영화에서 앤(다이안 레인 분)은 남편(알렉 볼드윈 분)과 전세 비행기로 칸에서 부다페스트로 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앤이 귀가 아파 도저히 비행기를 탈 수 없다고 하자 남편의 사업 동료인 자크(아르노 비아르 분)가 자기 차로 파리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제의한다. 7시간이면 갈 수 있는 길을 자크는 군데군데 들르며 시간을 지체한다. 앤은 빨리 파리로 가자며 재촉하면서도 자크의 낭만적인 매력에 점차 빠져든다. 자크는 앤에게 파리는 도망가지 않고 그 자리에 있다며 능청을 떤다. 남편은 바람기 많은 프랑스 남자를 조심하라고 조언한다. 자크는 여행 중에 틈틈이 늑대로 변할 소지가 있었지만, 파리까지 앤을 잘 데리고 간다. 그리고 마지막 키스. 파리에 도착하면서 영화는 끝나지만, 앤은 자크와의 재회를 암시하는 여운을 남긴다. 자크는 앤에게 “당신은 지금 행복한가요?” 하고 묻는다. 특별히 불행하지도 않지만, 행복하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남편과 살 만큼 산 유부녀의 틈새를 노린 질문이다. 일부일처제의 지루함을 찌른 바람둥이 프랑스 남자의 수작이다.
또 하나의 볼거리는 영화제로 유명한 칸에서부터 프랑스 남동부를 영화로 돌아보는 것이다. 실제로 관광으로는 가기 어려운 곳이다. 평화로운 농촌 풍경의 액상 프로방스, 로마의 유적 가르 수도교, 프랑스 제3의 도시 리옹과 뤼미에르 박물관, 그리고 유명한 포도주와 음식들이 등장한다. 스토리상으로는 안 넣어도 되는데 감독이 의도적으로 프랑스의 풍광을 담으려고 여기저기 들른 것으로 보인다.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다이안 레인의 매력이다. 1965년생으로 170cm의 늘씬한 여배우다. 우아하면서도 그윽한 미소가 사람을 편안하게 만든다. 한때 청소년들의 우상이었던 소피 마르소처럼 책받침 미녀로 유명했다지만, 오십 고개를 넘다 보니 많이 늙기는 했다. 그러나 곱게 잘 늙었다.
아침 출근길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비가 내린다. 정말 모처럼의 단비다. 제발 대지를 흠뻑 적셔주면 좋겠다. 바싹바싹 타 들어가는 농심이 얼마나 고대한 비인가. 그러나 좀 내리나 하던 빗줄기는 야박하게도 금세 그쳐버린다. 또 태양이 쨍쨍한 햇볕을 내리비추며 심술궂게 혀를 내밀고 있다.
태양을 피하는 방법? 뭐 그런 게 있을까 싶지만 문득 떠오르는 곳이 있다. 피하기보단 오히려 태양을 기꺼이 즐길 수 있는 대표적인 곳, 바로 부산이다. 부산은 가끔이 아니라 수시로 생각하는 곳이다. 벚꽃이며 목련이며 봄꽃 소식에서부터 부고장이며 청첩장까지 줄줄이 달리는 SNS 댓글들 속에서 말이다.
지난 6월 1일 전국에서 처음으로 해수욕장을 개장한 부산은 지금쯤 작열하는 태양을 피해 해운대로 찾아든 사람들로 벅적일 것이다. 필자도 이참에 올여름 휴가지로 부산여행이나 추천해볼까?
부산이 처음이라면 동백섬 한 바퀴 돌고 해운대 백사장 거닐다 달맞이고개에서 야경에 취할 수 있는 데이트 코스도 있고, 줄서서 먹는다는 대연동 쌍둥이 돼지국밥에서 민락동 회센터로 이어지는 식도락 코스도 좋고, 남포동 자갈치시장과 국제시장을 누비는 지름신 쇼핑 코스도 있다는 것을 알고 가면 좋겠다.
필자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전학 와서 대학 졸업 때까지 약 18년간을 살았으니 그야말로 청춘의 황금기를 오롯이 보낸 곳이 바로 부산이다. 몇 년 전엔 졸업 후 약 30여 년 만에 초등학교를 찾아가기도 했다. 학교 정문 앞에 있던 문방구가 아직까지도 있는 걸 보고선 너무 놀랍고도 반가워 한참을 쳐다보며 닫힌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그리고 간절함이 통했는지 이젠 칠순이 훌쩍 지난 그 옛날의 문방구 아저씨와도 짧게나마 재회의 기쁨도 누렸다. 추억의 키워드를 나열하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오륙도의 윤슬!
남구 용호동 끝자락을 밟으면 눈앞에 좌~악 펼쳐지는 장관이 있다. 부산을 대표하는 아이콘 중 하나인 오륙도가 바로 그곳이다. 오늘 같은 날 햇빛에 아롱질 그 눈부신 윤슬(햇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은 정말 혼자 보기엔 아까운 풍경이다.
좌측으론 광안대교를 굽어보며 우측으론 해운대 달맞이고개를 조망할 수 있는, 해안절경을 따라 이어진 길도 너무 매력적이라 쉽게 설명할 길이 없다. 또한 몇 년 전에 개장된 스카이워크에서 내려다보이는 벼랑 끝, 그 넘실대는 파도에 부서지는 바위섬은 아찔한 스릴과 폐부를 찌르는 쾌감을 가져다준다. 그리고 이때다 하고 ‘부산 아지매’들이 권하는 회 한 접시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재주가 없다. 흥정 연습이라도 미리 해둬야지 싶다.
철썩이는 밤바다에 풍경소리, 해동 용궁사!
해운대를 돌아 기수를 북쪽으로 돌리면 금방 닿는 곳이 있는데 최근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와 '몸살'을 앓고 있다는 용궁사다. 바닷가 해안을 따라 조성된 덕분에 용궁사라는 이름이 정말 기가 막히게 어울리는 절이다. 낮 시간대의 비경도 일품이지만 필자는 밤 시간대의 관람을 권하고 싶다.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철썩철썩 귓가를 때리는 파도소리와 바람결에 실려오는 풍경소리가 로맨틱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곳, 그 밤바다의 ‘콜라보레이션‘은 한마디로 끝내준다.
‘Kiss in the dark’은 바로 이런 곳에서 해야 한다. 애독자들이시여, 부디 ’낮 뜨거운‘ 시간을 피해 어둠을 틈 타 살짝궁 다녀가시길 권한다. 참고로 인근의 송정해수욕장 바다 산책로도 추천한다.
제주에 올레길이 있고 서울에 둘레길이 있다면, 부산엔 갈맷길
와우~ 여긴 또 어디일까? 부산 앞바다 남서쪽 끝부분에 위치한 송도해수욕장에서 암남동으로 이어진 해안절경 길인 송도 갈맷길을 빼놓을 수 없다. 최근엔 케이블카까지 재가동 했다고 하니 올 여름 ’핫 플레이스‘가 되지 않을까 싶다. 빨리들 다녀가시라.
어떤 투어이든 일단 여행길엔 입이 심심해선 안 된다. 돼지국밥이나 곰장어 구이, 밀면, 물회도 있으니 입맛 따라 고르면 된다. 부평시장 야시장(일명 깡통시장) 구경하며 거인통닭 시식도 권할 만하다. 인근의 보수동 헌책방 골목에서 독서삼매경에 빠져보는 것도, 단팥죽 한 그릇 하는 것도 이열치열엔 그만이겠다.
아~ 부산, 그곳에 가고 싶다.
그 여인은 지금 어디에서 살고 있을까? 댓잎에 바람이 스치는 소리를 들으면 불현듯 생각나는 여인이 있다. 고운 얼굴은 아니었어도 목소리는 청아했다. 필자가 자원입대한 공군 복무를 마치고 2학년에 복학했을 때 그녀는 3학년이었다. 나이는 필자가 네 살 위였다. 경상도 시골 태생이었던 필자는 서울 생활이 서툴기만 했다. 세련된 구석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서울에서 태어나 자랐다. 의상학과를 다녀서인지 옷매무새가 세련되고 늘 깔끔했다. 나이 차이가 있어 친오빠 같은 생각이 들었는지 만나는 날이면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곤 했다. 여동생이 없었던 필자도 그녀가 싫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별다른 감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가 4학년이 되던 봄날, 제안을 해왔다. 여자 친구와 단양팔경으로 1박 2일 여행을 가는데 여자끼리는 두려우니 필자가 함께 가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하도 간절하게 부탁을 하는 통에 거절도 못하고 따라가 경호원 역할을 하기로 했다. 물론 기차여행이었다. 출발 시각에 맞춰 청량리역에 도착하니 혼자 기다리고 있었다. 친구가 일이 급하게 생겨 못 가게 되었단다. 나중에 알고 보니 처음부터 필자와 함께하려는 계획이었다.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기차를 타고 단양으로 향했다. 살가운 누이동생과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었다. 도담삼봉과 상선암 등을 둘러보았다. 그러는 사이 해가 저물어 하룻밤을 지낼 숙소를 찾아야 했다. 참으로 난처했다. 그러나 그녀는 마냥 즐거운 모습이었다. 따로 방을 잡으려니 혼자 무섭다며 반대해 한방에 들었다. 남녀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어떠한 일도 이미 각오했지 싶었다.
그러나 우리는 특별한 일 없이 하룻밤을 한방에서 보냈다. 친누이 동생을 보호하듯 팔베개까지 해서 말이다. 대단한 인내심의 발휘였을까? 아니면 책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다음 날 나머지 여행까지 마치고 우리는 귀경하였다. 그런데 그날의 일이 오히려 그녀에게 큰 신뢰를 준 것 같았다. 필자에게 더 마음을 쏟으며 다가왔다. 그녀의 짝사랑에 필자가 분명한 태도를 보여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후회가 남는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필자는 기대했던 행정고시에서 낙방한 후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고 지리산 자락 고향 마을에서 외부와 연락을 끊고 지내고 있었다. 그 시기에 그녀는 계절 졸업을 했다. 졸업식에 필자가 꽃다발을 들고 나타나리라 기대했을 그녀.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았으니 실망이 얼마나 컸을까?
그녀를 다시 만난 건 필자가 직장을 다니던 어느 날이었다. 그녀의 연락을 받고 종로에 있는 커피숍에서 재회했다. 물론 필자는 지금의 부인과 결혼한 상태였다. 그녀는 필자와의 만남이 좋은 추억으로 남았다며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담담히 털어놓았다. 그리고 모든 걸 자기 운명으로 돌렸다. 그녀는 대학 졸업 후 약사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지만 2년도 채 되지 않아 남편이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는 비운을 맞았단다. 그 뒤 친정에 돌아와 두문불출하다 옛 생각이 나서 얼굴 한번 보려고 연락을 했다는 것이다. 마음이 착잡했다.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날이었다.
그 뒤 필자는 엽서 한 장을 받았다. 어느 늦가을 그녀는 지리산 칠불사 암자로 온 이야기와 함께 골바람에 바스락거리는 댓잎 소리를 들으며 엽서를 쓴다고 적었다. 엽서 맨 아래에는 ‘다른 곳으로 떠나며… 칠불사에서’라는 글이 씌어 있었다. 그러고는 더 이상 소식이 없었다. 지금은 어디서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다시 연락이 되면 오래된 친구처럼 반갑게 만나 그녀가 좋아하던 짙은 커피 향을 맡으며 추억에 잠기고 싶다. 그리고 한마디 들려주고 싶다. “당신 참 괜찮은 사람이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