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철 스포티비뉴스 편집국장 전 스포츠서울 편집국장
서울 강남의 한 복싱 체육관이 건장한 중년 신사의 감격적인 포옹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복싱 올드 팬들이 추억의 일기장에서 꺼내들 만한, 그러나 얼굴은 많이 변한 두 복서가 또다시 만남의 기쁨을 함께했다. 주인공은 ‘4전 5기’ 신화 홍수환(66) 한국권투위원회 회장과 엑토르 카라스키야(56) 파나마 국회의원이다. 딱 10세 차이인 두 사람은 39년 전 링에서 맺은 인연을 여전히 이어오고 있다.
한국인 첫 프로 복싱 세계 챔피언의 영광은 김기수가 차지했지만 그의 경기 장면을 TV로 본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당시 대부분의 스포츠 팬들은 김기수가 챔피언 벨트를 허리에 감는 장면을 ‘대한뉴스’ 화면으로만 봐야 했다. 1960년대에는 TV 보급률이 매우 낮았기 때문이다. 1970년대의 흑백 TV 시절, 최고의 프로 복싱 스타는 단연 홍수환이다. 그의 복싱은 한마디로 스마트하면서 호쾌했다. 복싱 팬을 끌어들이는 마력도 있었다.
먼저 홍수환과 카라스키야의 인연부터 살펴보자. 두 사람은 1977년 11월 27일 WBA(세계복싱협회) 슈퍼 밴텀급 초대 챔피언 결정전에서 맞붙었다. 경기 장소가 파나마여서 홍수환으로서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경기였다. 당시 홍수환은 27세의 베테랑 복서였고 카라스키야는 17세의 어린 나이에 11전 11KO승을 자랑하는 샛별 복서였다. 별명이 ‘지옥에서 온 악마’였으니 파나마 복싱 팬들이 그에게 건 기대는 미뤄 짐작할 만하다.
홍수환은 2라운드에서 네 번이나 다운되면서도 오뚝이처럼 일어섰고 마침내 3라운드에서 카라스키야를 KO로 눕히고 챔피언 벨트를 차지했다. 마침 이 무렵에는 1라운드 3회 다운이면 자동 KO가 되는 규칙이 아니고, 무제한 다운제가 시행되었다. ‘4전 5기’의 신화가 이뤄질 수 있었던 배경이다. 이후 카라스키야는 1978년 황복수와의 경기를 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뒤 38년 만에 다시 한국을 찾았다. 당시에는 현역 복서였지만 이번에는 국회의원으로 한국에 왔다. 파나마 국회의 교통·통신위원장을 맡고 있는 그는 한국국제교류재단의 초청으로 방한했다. 그 사이 두 사람은 1999년 한 방송사의 프로그램 출연을 계기로 파나마에서 만났고 17년 만에 한국에서 재회했다.
“어머니, 나 챔피언 먹었어”라는 일화와 관련된 내용도 재미있다.
홍수환은 1950년 서울 종로구 내수동에서 태어났다. 당시 스포츠인으로서는 만나기 쉽지 않은 서울 토박이다. 어렸을 때부터 골목대장 노릇을 도맡아 했지만 주먹이 세서 그랬던 건 아니다. 복싱에는 큰 관심도 없었다. 복싱은 아버지가 좋아했는데 홍수환이 중학교 2학년 때 갑자기 타계했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복싱경기장을 다녔던 홍수환은 그때부터 복싱 경기 포스터만 봐도 아버지 생각이 났다고 한다. 특별한 홍보 수단이 없던 시절, 서울 시내 동네 담벼락에는 영화, 프로 레슬링, 프로 복싱 광고 포스터들이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어머니의 반대가 있었지만 홍수환은 어렵게 글러브를 끼게 된다. 그러나 아마추어 대회에서도 이렇다 할 성적을 올리지 못한 그는 곧바로 프로로 전향했고 이 결정은 그의 복싱 인생에서 ‘신의 한 수’가 됐다. 그리고 홍수환이라는 이름 석 자를 복싱 팬은 물론 거의 모든 국민이 알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974년 7월 3일, 당시에는 멀고 먼 나라였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라디오로 중계방송된 홍수환의 승전보는 많은 복싱 팬의 귀를 의심하게 했다. 홍수환이 그곳에서 타이틀매치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골수 복싱 팬을 빼고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홍수환은 그날 더반에서 열린 WBA 밴텀급 타이틀매치에서 챔피언 아놀드 테일러를 전원 일치 판정으로 누르고 한국인 복서로는 김기수에 이어 두 번째로 프로 복싱 챔피언이 됐다.
프로 복싱에서 원정 온 도전자가 판정승을 한다는 건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홍수환은 그럴 만한 경기력을 보여줬다. 경기 초반 아놀드 테일러를 3차례나 링에 쓰러뜨렸고 14회에서 승리에 쐐기를 박는 네 번째 다운을 빼앗았다. 세계 프로 복싱 관계자들은 아놀드 테일러가 마치 다른 복서처럼 경기를 했다고 평가했다. 거꾸로 보면 그만큼 홍수환이 뛰어난 복싱을 했다는 얘기다.
그런데 당시 홍수환은 현역 사병이었다. 그 무렵 서울 주변의 주요 부대에는 프로 복서 몇 명이 군 복무를 하면서 기량을 연마하고 있었다. 특별한 신분이 아니면 여권은 꿈도 못 꿨고 여권을 받아도 단수였던 시절 현역 군인이 외국에 가서 타이틀매치를 한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김기수의 타이틀매치가 열린 장충체육관으로 직접 갔을 정도로 복싱을 좋아했다. 챔피언에게 줄 개런티(달러) 문제까지 해결한 박정희 대통령은 그 시절 프로 복서들에게는 최고의 후원자였다.
1974년 청년 홍수환이 ‘약속의 땅’인 더반까지 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서울 김포국제공항을 출발해 도쿄, 홍콩, 스리랑카, 요하네스버그 등을 거치는 험난한 여정이었다. 비행기를 여섯 번이나 갈아타야 했다. 그러나 홍수환은 이기겠다는 일념뿐이었고 결국 승리했다.
어떻게 경기를 치렀는지 제대로 되돌아볼 겨를도 없이 중계팀이 홍수환의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방송국 스튜디오에 나와 있던 어머니가 “수환아!”라고 부르는 소리가 이어폰 너머로 들려왔다. 이때 홍수환의 한마디가 오랜 기간 회자됐다.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그런데 홍수환 말보다 더 유명해진 말이 있다. “그래 수환아, 대한 국민 만세다!” 홍수환의 어머니는 ‘대한민국’이 아닌 ‘대한 국민’이라고 외쳤던 것이다.
우디 앨런의 영화는 철저히 우디의, 우디에 의한, 우디를 위한 영화다. 홍상수가 늘 비슷비슷한 자기 스타일의 영화를 만들고 그런 줄 알면서도 팬들이 그의 새 영화를 기다리듯 우디 앨런도 그렇다. ‘관객주의(위주)’가 아닌 ‘감독주의(위주)’ 영화인데도 팬들은 늘 그의 영화를 기다린다.
이번에 개봉한 는 우디 앨런의 47번째 영화이고, 14번째로 칸 영화제에 초청된 영화다. 정말 꾸준한 창작욕이고 꾸준한 수준작이다. 전반기 작품이 삶에 대한 야유와 조롱과 도전이었다면, 후반기 작품들에서는 인생에 대한 깊은 관조가 느껴진다. 영화를 보며 박인환의 시 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영화는 1930년대의 미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평소 할리우드를 동경하던 뉴욕 청년 바비(제시 아이젠버그)는 영화사 거물인 삼촌 필(스티브 카렐)을 찾아 LA로 온다. 필은 바비에게 할리우드 관광 가이드로 자신의 비서인 보니(크리스틴 스튜어트)를 소개해주고 바비는 그녀를 보자마자 첫눈에 반한다.
둘은 할리우드를 누비고 다니며 1930년대를 풍미하던 유명 배우들과 그들의 저택들을 구경한다. 이 장면들에서 슬며시 미소가 지어진다. 전작인 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전작이 ‘시간 이동’이라면 이 작품은 ‘공간 이동’이다. 지나간 시절과 인물들을 만나는 게 우디의 새로운 취미가 된 셈이다. 회고 취미가 생긴다는 건 늙는다는 증거다.
보니에게 금지된 사랑의 상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영화의 호흡은 빨라진다. 더구나 그 상대가 바로 삼촌 필이라니. 보니는 필을 선택하고 바비는 할리우드 이면의 추악함에 대한 환멸과 이별의 충격으로 뉴욕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형의 도움으로 나이트클럽 매니저가 되고 새로운 상류사회를 맛본다.
특유의 사교성으로 큰 성공을 거둔 바비는 비로소 그들만의 리그인 상류사회 ‘카페 소사이어티’의 일원이 된다. 그곳에서 우연히 보니와 같은 이름의 모델 베로니카(블레이크 라이블리)를 만나 결혼하고 아이도 낳는다.
사실 이런 스토리는 흔한 삼각관계의 구조를 보인다. 별로 새롭지 않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매력은 스토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영화 곳곳에서 쏟아지는 우디 특유의 유머와 인생의 페이소스들이 영화 감상에 깨알 같은 재미를 준다. 영화는 과거와 달리 관계의 끈적임이 줄어들고 뽀송하며 따뜻하다. 사랑도 쿨하고 심지어 갱스터 형의 살인도 쿨하다.
대사에도 달관의 자세가 묻어난다. “꿈은 꿈일 뿐.”이라는 대사는 젊은이가 할 대사는 아니다. “인생도 자신의 인생이 있다.”든가, “음미하지 않는 삶은 의미가 없지만, 음미해버린 삶은 매력이 없다.”는 말들에는 젊은 감독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깊이가 배어 있다.
남편과 뉴욕에 온 보니가 바비와 재회하는 장면도 구질구질하지 않다. 남편을 따돌리고 바비와 센트럴파크를 비롯한 도심을 누비며 지난날을 회상하는 데이트도 상큼하다. ‘막장’을 기대했던 관객이라면 아쉬울 정도다.
흔히 불륜은 언젠가 대가를 치른다는 통념을 깨고 필과 보니의 관계도 좋다. 우디 자신의 상황을 변호하고 싶은 마음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 81세인 우디 자신도 이젠 삶의 끈적임이 버거워졌다는 방증이다. 유대인인 자신의 정체성도 코믹하게 유머로 녹여낼 정도로 그의 삶이 가벼워졌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이 영화의 주인공은 음악이다. 시도 때도 없이 흐르는 재즈 음악은 우리를 자연스럽게 1930년대로 초대하며 영화 속에 빠져들게 한다. 무성영화 시대의 감독들이 존경스러울 정도다. 특히 같은 곡은 전형적인 뉴요커인 우디의 취향을 잘 살려내고 있다.
제시 아이젠버그와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케미도 안정감을 준다. 특히 크리스틴은 이미 뱀파이어 류 영화를 뛰어넘어 여인의 향기를 풍긴다. 두 주인공이 각기 다른 장소에서 새해맞이 행사를 하며 동시에 아련한 눈빛을 보이는 엔딩신은 어쩌면 우디가 자신의 지난날을 응시하며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을 보이는 눈빛은 아니었을까? ‘선택에는 배제가 따르는 법!’
글 배국남 대중문화 평론가 knbae24@hanmail.net
1987년 부산에서 쌍둥이로 태어난 지 3개월 만에 각각 미국과 프랑스로 입양된 사만다 푸티먼과 아나이스 보르디에가 4년 전 SNS를 통해 극적으로 재회한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를 보면서, 그리고 “저 역시 입양아로서 살아온 삶에 대해 긍정적이었고, 아나이스 역시 입양의 어두운 면이나 슬픈 이야기들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저희는 대부분 좋은 시간을 보냈다”는 사만다의 말을 들으면서 우리의 입양 현실에 시선이 향한다.
보건복지부가 최근 발표한 입양 현황 통계에 따르면 2015년 한 해 국내 법원에서 국내외 입양을 허가받은 아이는 1057명에 달했다. 이 가운데 국내 입양은 683명으로 2014년의 637명보다 약간 늘어났지만, 국외 입양은 374명으로 2014년의 535명에 비해 줄었다. 국외 입양아 현황을 보면 미국이 전체의 74.3%로 가장 많고 이어 스웨덴(9.6%), 캐나다(5.9%), 노르웨이(2.7%) 순이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01년 4206명이던 입양 아동은 2003년 3851명, 2006년 3231명을 거쳐 2013년 2652명으로 크게 줄었다. 그리고 2014년 1172명, 2015년 1057명으로 감소하는 등 입양이 활발하지 못한 상황이다. 입양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역시 크게 개선되지 않고 있다.
이런 가운데 아이들을 입양해 행복한 가정을 꾸려 입양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며 국내 입양을 활성화하는 데 일조하는 연예인들이 있어 눈길을 끈다. 차인표-신애라 부부, 중견 연기자 송옥숙, 탤런트 이아현, 개그맨 엄용수, 연극배우 윤석화, 가수 조영남, 개그우먼 이옥주 등이 자녀를 입양해 키우는 대표적인 연예인들이다.
여러 아이를 입양해 건강하고 행복하게 키우고 있는 브래드 피트-안젤리나 졸리 부부 등 할리우드 스타들이 일반인의 입양에 대한 인식 전환에 크게 기여한 것처럼 입양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엄존하는 한국에서도 차인표-신애라, 이아현 같은 대중의 시선을 받는 연예인 스타들이 입양 문화 활성화에 일조하고 있다.
자녀를 가슴으로 낳아 키우는 연예인들은 입양은 특별하거나 칭찬받을 일이 아니며 입양으로 인해 오히려 자신과 다른 가족이 더 행복해졌다고 입을 모은다.
“정민이(큰아들)에게 하나님이 우리를 부모로 선택하게 했듯 둘째 예은이, 셋째 예진이는 우리가 입양한 것이 아니라 정민이와 다른 방법으로 이 아이들이 우리를 부모로 선택했습니다. 입양은 가정이 절실하게 필요한 아이에게 울타리를 쳐주는 것이며 새 가족과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새 가족이 생기면서 아이가 사랑을 알게 되고 다른 가족들도 입양한 아이로 인해 많은 것을 깨닫습니다. 입양한 예은, 예진으로 인해 가족들이 더 행복해졌어요.” 두 아이를 입양한 차인표-신애라 부부의 말이다.
“결혼 전 입양을 해 아이를 키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가슴으로 낳은 아이도 배 아파 낳은 아이와 똑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둘째를 입양하고 키우면서 정말 좋았어요. 그래서 셋째도 입양을 하게 됐지요.”신애라의 말이다. 신애라의 적극적인 입양 의사에 남편 차인표를 비롯한 다른 가족들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입양단체 관계자들은 스타 부부 차인표-신애라의 두 아이 입양은 많은 사람들에게 입양에 대해 관심을 끌게 하고 국내 입양 활성화에 크게 기여했다고 말한다.
“입양했다고 하면 왜 칭찬받는지 솔직히 저는 반감이 듭니다. 내 딸들은 나를 있게 해준, 살게 해준 사람들입니다. 딸들이 아니었으면 너무 힘들어서 내가 지금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2007년 첫째 딸 유주(9)를, 2010년 둘째 딸 유라(6)를 입양한 탤런트 이아현이다. 이아현은 입양은 특별한 일이거나 찬사를 받을 일이 전혀 아니라고 했다.
혈연에 대한 집착, 법과 제도 문제 등 한국에서 입양이 활성화하지 못한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자녀들을 입양한 연예인들은 강연과 홍보대사, 그리고 방송 등을 통해 입양에 대한 인식 전환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치기도 한다.
입양한 아이를 잘 키워 결혼까지 시킨 코미디언 엄용수는 방송 등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녀 셋 중 둘이 ‘가슴으로 낳은 애들’이다. 피 한 방울 섞이고 안 섞이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랑으로 가족을 이루면 되는 것이다”라며 입양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설파한다.
입양 홍보대사로 활동하는 연극인 윤석화는 방송 등 대중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우리가 유교적인 사상이 많고, 국내 입양에 대한 편견이 아직도 많은 것 같아요. 외국의 사례나 제 개인적인 경험으로 보면, 정말 아이들이, 생명이 크는 것은 사랑이 가장 우선이고, 오히려 DNA(혈연)보다 더 중요한 게 사랑이고, 환경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아직도 많은 아이가 해외로 입양 가고 국내 입양이 잘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안타깝죠”라며 국내 입양이 활성화했으면 하는 바람을 강력하게 피력한다.
입양 문화가 이전보다 개선됐다고 하지만 장애아나 혼혈아 입양을 꺼리는 인식은 여전하다. 2015년 한 해 장애나 건강에 이상이 있는 아동 중 국내 입양은 24명이었지만, 해외 입양은 99명이나 됐다. 정부가 해외 입양을 통제하지 않았던 시기인 2002년에는 해외로 입양 간 장애아가 827명에 달했고 국내 가정에 입양된 장애아는 16명에 불과했다.
필리핀계 혼혈아를 2007년 입양해 가정을 이룬 중견 연기자 송옥숙은 “입양한 아이가 혼혈이냐 아니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고 혼혈아에 대한 사회의 시선에 개의치 않았다. 아이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라는 것만이 중요했다”고 말하며 장애아나 혼혈아에 대한 입양이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입양아 가정에서 고민이 많은 입양 공개 여부에 대해서도 연예인의 역할이 커지고 있다. 자녀를 입양한 연예인들 대부분은 외국처럼 입양 공개에 대해 찬성하고 있다. 가수 조영남은 “아이를 입양한 것은 세상의 빚을 갚는 심정이었어요. 아이를 공개 입양한 것은 입양 문화에 대한 인식을 바꿔보려고 한 거예요. 결과적으로 입양 사실을 공개함으로써 아이를 밝게 키운 것 같아요”라고 했다. 차인표-신애라 부부는 “저희가 얼굴이 알려진 사람이기 때문에 비밀 입양이라는 게 거의 불가능합니다. 비밀 입양은 아이에게 그늘을 만들어 주는 것 같아요. 부모야 본인이 선택한 거지만 아무 잘못도 없는 아이들은 비밀 입양을 할 경우 숨겨야만 하는 음지가 생기는 것이지요”라며 입양 공개 찬성 이유를 밝혔다.
개그맨 엄용수는 여섯 살 때 입양해 2007년 결혼해 가정을 꾸린 딸 엄현아(35)씨가 아이를 낳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며 입양은 세상에서 가장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라고 다시 한 번 깨달았다며 더 많은 사람이 입양에 대해 긍정적인 인식을 했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입양은 버려진 아이를 데려다 키우는 게 아니라 소중하게 태어난 생명을 하나의 인격체로 키워내는 것이다. 모든 아이들은 따뜻한 가정 안에서 사랑을 받으며 성장할 권리가 있고, 어린아이들을 사회적 인재로 키워내는 것은 어른들의 몫이다. 입양은 내 삶에 가장 잘한 일이다.” 2003년 공개 입양으로 아들 매튜를 가족으로 맞은 영화배우 故 김진아가 생전에 나와 인터뷰하면서 한 말이다.
첫번째 오남매가족사진, 1번 임산부필자 3번 40대의필자 4번 빛바랜 가족사진들 6번 두딸과 필자모습
카네이션 꽃들이 만발하는 5월이 되면 유년 시절의 필자는 그리움 반 미움 반으로 시들어진 꽃다발을 가슴에 품고 엄마를 그리다 잠이 들곤 했다. 어린 마음속에서 흘린 눈물은 차곡차곡 쌓여 강하고 모진 모성애를 잉태하기 시작했다.
눈물 속의 회상
어린 시절 필자 5남매는 주말이면 어김없이 어머니를 면회하기 위해 병원으로 향해야 했다. 필자가 아주 어릴 때부터 시작된 일종의 주말 이벤트였다.
그날도 우리는 큰오빠의 지시 아래 엄마에게 필요한 것과 음식을 정성껏 준비하고 묵묵히 오빠를 따라나섰다. 그리고 버스에 타 자리에 앉자마자 이내 차창 밖으로 시선을 떨군 뒤 멍하니 바깥만 응시했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에 얼굴을 들 수가 없어서였다.
버스가 서울 중랑구 면목동을 지나 중곡동 가까이에 닫자 필자의 가슴은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마치 멀고 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변해 있을 어머니를 만나려면 미리 단단한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철창문이 열리고 퉁퉁 부어오른 모습으로 뒤뚱뒤뚱하며 걸어 나오는 어머니. 어머니 얼굴은 오랫동안 빛을 못 봐 하얗게 변해 버렸다. 또 오랜 병원 생활로 비정상적으로 부어 마치 ‘큰 바위 얼굴’ 같았다. 그리고 약에 취해버려 연신 흐느적댔다. 자식들은 그 만남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눈을 피하며 안절부절 어머니를 맞이했다. 아버지를 다른 여자에게 빼앗기고 그것도 모자라 구타까지 당했던 어머니. 그 옛날 귀한 집 외동딸로 태어나 심성 바르고 순수하며 착하던 어머니가 한평생을 정신 줄을 놓으시고 병원 생활로 약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어머니 그만 해요. 도대체 왜 그래? 그까짓 아버지 뭐하러 생각해! 우리가 있잖아.” 필자가 보탤 수 있는 말은 이뿐이었다. 이따금 아버지가 자식에 대한 책임감만으로 마지못해 병문안 왔다 가는 날에는 어머니의 병세는 더 나빠지고 어머니의 정서뿐 아니라 자식들 기분도 엉망이 되곤 했었다. 필자는 그런 아버지를 늘 원망했다. 돈 잘 벌어 양쪽 집 9남매 대학 보내 주는 것보다는 차라리 따뜻한 가정 속 아버지를 더 몸서리치도록 그리워했다. 그래서 5남매는 서로 만나면 침묵한다. 그게 더 아프지 않을 유일한 방법이니까
도망치듯 떠나온 어머니의 품
대학을 마치고 도망치듯 같은 캠퍼스 선배와 결혼했다. 그토록 그립던 사랑을 갈구하며 현실을 도피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전쟁 터 같은 생활들이 너무나 싫었다. 그러나 결혼생활 또한 살아온 각자의 삶이 다르듯 많이 부딪쳤다. 대학 졸업 후 시작한 교사직과 함께 나름대로 결혼생활에도 충실했으나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자신이 없었다. 결혼 2년 후 큰아이를 임신하며 또 고통이 다가왔다. 건축 장교로 제대한 남편이 중동으로 파견 나간 후 필자가 임신 중독증으로 교단을 떠나야 했던 것이다.
혼자 남은 임산부 새댁은 유난히도 겁이 많았고 신혼생활의 달콤함을 접고 시댁으로 들어가 배부름을 혼자 감당해야 했다. 부자인 시어머니와 시아버지는 늘 여행을 일삼아 집을 비우셨고, 아침에 왔다 오후 5시면 돌아가는 도우미 아주머니가 유일한 친구였다. 어쩌다 어머니가 병원에서 퇴원할 때면 시부모의 허락을 받아 친정으로 달려갔다. 그토록 그리던 어머니를 마음으로 느끼며 손을 꼭 잡고 함께 잠드는 밤이면 비록 병든 어머니였으나 그 품이 왜 그리 따뜻했을까. 시댁에서 밤마다 방에 드리운 길다란 옷걸이 그림자가 무서워 잠 설쳤던 한 달 동안의 밀린 잠을 푹 잔듯했다.
중동에서 돌아온 남편은 건설 회사를 차렸고 4년 후 작은아이를 가졌다. 남편은 큰아이 때 못 해준 것을 만회하기 위해 이 아이를 여왕마마처럼 모시겠다고 굳게 약속을 하더니 반대로 필자도, 두 아이도 용서할 수 없는 큰 사고를 쳤다. 남편은 무릎 꿇고 벌벌 떨면서 사죄했지만 용서되지 않았다. 결국 죽을 힘 다해 쌓아 올렸던 가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필자는 모든 것들은 다 포기 할 수 있었으나 아이들만큼은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커다란 혼란과 방황이 시작되었고 그때부터 자신과의 싸움은 실로 ‘의지의 한국인’ 수준이었다. 그 방황을 감수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으로 다시 대학을 다니며 학문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대학 때와는 전혀 다른 전공을 선택해 20세 차이 나는 아이들과 캠퍼스를 누볐다. 배움은 채워지지 않는 상처투성이 사랑의 빈 공간을 그나마 채워주었다. 늦은 나이에 다시 생소한 학문을 하며 젊은이들과 함께한 캠퍼스 생활은 신선한 삶의 충격이었다. 그 충격을 오래 누리고 싶어 대학원까지 다녔다. 그리고 드디어 시간강사, 전임강사가 되어 전국을 누렸다. 자신이 얼마나 멋지고 훌륭한지,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지 확인하면서 모습이 무척이나 대견스러웠다.
백 번 말보다는 보여주는 교육이라고 했던가. 다행히도 두 아이들은 필자를 자랑스러워△하며 열심히 그 뒤를 따라와 주었다. 큰아이는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필자를 추천하여 아이가 다니는 과학고등학교에서 장한어머니상도 받게 해주었다. 이보다 어떤 값진 보석이 또 있을까?
1997년 온 나라에 IMF라는 경제 위기가 몰아 닥쳤다. 하루아침에 남편 회사는 문을 내리고 가족은 빈털터리가 되었다. 고심 끝에 이민의 길을 선택했다. 한 가정의 기둥이 되어 위기를 기회로 삼아 어떻게든 어 다시 지붕을 쌓아가야 한다는 신념으로 가득했다. 남편을 설득해 먼저 보내고 초등학교를 졸업한 작은딸을 그 이듬해에 보냈다. 그리고 큰딸을 한국에 둔 채 필자는 2001년 LA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만으로 허물어져가는 가정의 든든한 기둥이 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동안 어렵게 오랜 시간 투자해 얻은 교수의 길, 필자의 것들을 다 포기해야만 했다.
무궁화 꽃 속으로 흐르는 눈물
한국과학기술대학교(KAIST)에서 국비 장학생으로 과외하며 생활하던 큰아이는 방학만 되면 가족이 보고 싶고, 엄마 품이 그립다며 열일 제치고 미국으로 날라왔다. 비록 낯설고 물 설은 이국 땅, 남의 나라였지만 그리웠던 가족의 재회는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 삶의 원동력이었는지 모른다.
힘겨웠던 바닥생활 2년 후, 해변의 도시 싼타모니카에 세탁소를 시작했다. 필자는 바느질을 하고 남편은 빨래하며 자리잡기 시작했고 백인동네에 멋진 이층 집도 장만했다. 주말이면 1박 2일 파티도 열며 나름대로 훌륭한 이민생활을 했다. 다른 사람들은 필자 가족을 무척 부러워했다. 그러나 작은 아이가 우등생으로 ‘캘리포니아주립대 LA캠퍼스(UCLA)’를 졸업하고 언니가 있는 한국으로 나와 버렸다. 왔다갔다 하던 큰아이는 어느덧 멋진 의사가 되었고 작은 아이도 남의 나라에서는 더 이상 꿈을 펼 수가 없다며 훌쩍 떠나와 버렸다.
아이들이 떠나고 난 빈 자리를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가 없었다. 2층 아이의 방에는 덩그러니 아이의 그림자만 남아 있었고, 텅 비어버린 커다란 집은 더 이상의 따뜻한 가정이 아니었다. 심지어는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세탁소 2층에 머무르며 일만하며 살았다. 세탁소 재봉틀 앞에 큰 거울을 붙여놓고 필자 얼굴과 마주보며 외로움을 달래곤 했다. 필자는 또다시 미국 한 의대에 입학했고, 그 길만이 유일한 정신적 버팀목이었다. 세탁소 일이 끝나는 저녁 6시에 가서 밤 11시면 돌아왔다. 장장 8년에 걸쳐 졸업했다. 그리고 작은아이도 1년 후 의대에 합격했다.
어느덧 나이 60세를 향하면서 이민생활도 고갯길에 접어들어 수시로 불안감이 몰려왔다. 남편이 있어도 파고드는 고독함은 중병이 되어 대학병원 응급실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삶과 죽음이 하루에도 수십 번을 머리 속에서 교차했다. 어느 날인가 남의 나라에서 아이들과 떨어져 소리 없이 죽어가는 꿈을 꾸었다. TV 속에 한국 뉴스가 끝나고 애국가만 흘러도 눈물이 주룩주룩 얼굴을 타고 내렸다.
삶의 질을 찾아 떠나온 18년 세월에 늙고 병만 들어 마음은 마냥 연약해져만 갔다. 아이들이 있는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점점 더 몸을 황폐하게 만들어갔다. 마음이 아프면 몸도 아프다고 했던가? 미국은 사람 사는 곳이 아니라 일만 하는 노예의 삶이니 받아들이라며 세탁소에서 일만하던 남편도 필자 뒷바라지에 다리를 못쓰게 되었다. 병들은 부부는 낯설은 이국 땅에 내려앉은 눈커플만 껌뻑 거리며 나란히 누워버렸다. 피붙이라고는 아무도 없었다. 산다는 것에 깊은 회의를 느끼며, 아무리 좋은 선진국, 부와 사치스러운 명예, 그따위 것들이 있어도 아무것도 아님을 철저히 느끼던 날에 다시 아이들 곁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남편을 설득하고 뿌리를 내렸던 세월을 미련 없이 정리했다. 고생하며 정들어온 곳, 아픈 추억들이 고스란히 담긴 땅을 뒤로한 채 고국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비행기 차창 너머로 피땀 흘려 견뎌온 시간들이 추억과 함께 너풀대며 날아다녔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행복한 꿈으로 온몸이 날아 갈 것만 같았다. 행복은 별 것 아니었다. 하늘에 떠 있는 작은 공간, 부푼 가슴이 천국이었다. 오랜 시간 공들여 모든 것들을 얻었으나 또 다 버리고 선택한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 다시 만나 만들어가는 소중한 가정의 행복을 무엇에 비유한단 말인가.
아이들을 향한 모성애 꽃이 만발하는 날, 한국 행 비행기 날개 가슴에는 무궁화 꽃이 활짝 피어났다.
서서히 커튼이 오르자 무대 중앙에 커다란 붉은 꽃이 수 놓인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서 있다. 무대 양옆의 삼 층으로 된 발코니에는 총을 든 병사가 장총을 들고 있다. 긴박한 음악 속에 구령 소리가 나면서 일제히 총구를 그에 맞추고 곧 총성이 울린다. 그리고는 곧바로 신나는 음악에 맞춘 캉캉 춤이 난무하는 물랭루주의 화려한 쇼가 펼쳐진다.
뮤지컬 ‘마타하리’는 여주인공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고는 첫 시작으로 장면전환이 되는데 무대 회전도 빠르게 펼쳐지고 화려한 배우들의 움직임이 관객을 몰입하기 충분했다.
어버이날 선물이라며 아들이 공연 티켓을 가져왔다. 아들 덕분에 국내에서 펼쳐진 많은 대작을 섭렵할 수 있어서 좋았는데 이번엔 흥미로운 이중간첩 ‘마타하리’ 공연이다.
남자 주인공은 트리플로 한 배역에 세 명씩 캐스팅됐고 원조 아이돌이었던 핑클의 옥주현이 더블 캐스팅의 여주인공으로 열연을 펼치고 있다. 귀엽고 예쁘기만 한 아이돌에서 이제는 어엿한 중견 뮤지컬 배우가 된 옥주현의 연기가 대견하고 기대됐다.
마타하리, 그 이름은 어딘지 모르게 은밀하고 고혹적인 느낌이 든다. 우리는 마타하리를 뛰어난 용모와 매력으로 프랑스와 독일의 고위층에 접근해 기밀을 빼내는 스파이, 그것도 이중스파이로 결국 프랑스 측에 체포돼 총살당했다고 알고 있다. 아름다운 마타하리는 왜, 어떻게 스파이가 되었을까?
1917년 1차 세계대전으로 세상이 시끄러웠지만 프랑스의 사교계 물랭루주에는 연일 화려한 쇼와 환락으로 흥청대고 있었다. 마타하리는 물랭루주의 가장 인기 있는 무용수로 신비함과 관능적인 매력이 돋보이는 여자였다. 그는 이국적인 동양 인도의 춤 밸리 댄스로 많은 사람을 잡아 끌며 인기를 끌었다. 자연히 그곳을 찾는 유럽 각국의 고위 장교나 특권층과의 친분이 더해져서 넘나들기 어렵다는 국경을 자유로이 오가며 공연을 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프랑스의 라두 대령이 그를 찾아온다. 팬인 줄만 알았던 그는 마타하리에게 무서운 제안을 한다. 당시 프랑스는 연일 전투에서 패배해 수많은 장병이 전선에서 죽어가고 있었는데 그 기밀을 알아내 달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인도 아닌 마타하리가 선뜻 응할 리가 없었다. 라두 대령은 그녀의 어두웠던 과거를 팬들이 알면 어쩌겠냐고 협박한다. 부유한 네덜란드 집안의 딸이었던 마타하리, 본명은 ‘마가리타 거트루드 젤’로 친척에게 성폭행당한 후 오히려 유혹했다는 누명을 쓰고 집안에서 쫓겨나 사회의 밑바닥에서 어두운 생활을 했었다. 이후 팜무파탈로 명성을 떨치며 마타하리라는 예명으로 활동하게 되는데 마타하리는 말레이어로 ‘새벽의 눈동자’라는 뜻이다. 인기가 치솟은 만큼 그 약점으로 어쩔 수 없이 대령의 요청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는 치명적인 매력을 무기로 독일 장교로부터 비밀 작전을 빼내어 프랑스에 전달해 큰 성과를 이루게 했다. 마타하리는 당시 센 강변에서 우연히 만난 조종사 아르망과 사랑에 빠졌는데 실은 라두 대령이 그를 감시하려고 붙인 부하였다. 그러나 화려한 무대에 가려져 있던 그의 진실 된 모습을 보고 깊은 연민을 느낀 아르망은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다. 투철한 군인인 라두 대령도 어쩔 수 없는 마타하리의 매력에 그를 사랑하게 돼 질투를 느끼고 아르망을 독일의 점령지이자 위험지역인 ‘비텔’로 파견한다.
아르망의 소식을 알 수 없어 찾아다니던 그는 부상한 아르망이 비텔의 병원에 입원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는데, 라두 대령은 아르망이 그를 감시하려고 붙인 부하였다고 폭로하고 그 말을 들은 마타하리는 충격을 받는다.
이 말을 믿을 수 없었던 그는 진실을 알기 위해 이미 출입 금지령이 내려진 국경을 가짜서류로 건너 비텔의 병원을 찾아가게 된다. 상처를 입은 그와의 기쁜 재회도 잠시 그로부터 사랑하지만 처음 만남은 우연이 아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절망하며 프랑스로 돌아온다.
그때 독일 장교는 정보가 새나가 작전이 실패한 원인이 마타하리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역공으로 그가 독일에 프랑스 정보를 넘겼다는 거짓 정보를 흘린다. 그래서 프랑스에 돌아온 마타하리는 이중 스파이 혐의로 체포돼 결국 총살로 사라지고 만다.
전쟁 후 영국첩보부에 의하면 마타하리가 독일 측에 정보를 넘겨주었다는 아무런 단서가 없었다고 한다. 냉혹한 라두 대령의 각본에 스파이가 됐다가 목숨까지 잃은 마타하리의 불꽃 같은 인생이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화려한 무대장치는 빠르게 변화했고 주연부터 조연 모두 열과 성을 다한 연기를 펼쳐 참으로 멋진 한 편의 작품을 보여줬다.
넓은 무대지만 필자는 주연의 자리만 보지 않고 옆이나 위쪽의 자리를 지킨 조연배우들에도 눈길을 주며 공연을 즐겼다. 그들도 주연 못지않은 열정으로 작품에 이바지했다는 생각이다.
“목숨을 전부 걸어도 좋으니 내 길은 오직 하나뿐, 사랑하는 그대 품 안에”라고 외치는 정열의 마타하리가 새삼 부럽게 느껴지는 건 언젠가 필자에게도 있었을, 그런 열정이 이미 필자에게선 사라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한때 올림픽 선수가 되고 싶었던 신중년들이 그런 기분을 만끽할 수 있는 경기대회가 미국에서
열린다. 눈요기만 하는 관광보다는 세계 각지에서 온 선수들과 경기를 하면서 우정을 나누고 풍물도 즐기고 싶은 신중년이라면 참가해 볼만한 대회다.
올해로 30회째를 맞이하는 ‘헌츠먼 세계 시니어 경기대회(The Huntsman World Senior Games)’. 미국 서부 유타주 세인트조지(St. George)에서 열리는 이 대회는 시니어 올림픽으로 자리를 잡았다.
‘더 높이, 더 멀리, 더 빨리’보다는 ‘더 건강하게, 더 즐겁게, 더 친밀하게’를 지향하는 것이 올림픽과 다른 점이다. 물론 참가 자격 제한이 있다. 50세 이상이라야 참가가 가능하다. 그 대신 예선전은 없다. 자신의 수준에 맞는 경기에 참가하고 경기하다 보면 메달을 딸 수도 있다. 못 따면 또 어떤가? 연금을 받는 것도 아니니. 올림픽은 참가하는 데 의의가 있지 않은가? 선수로 뛰지 않고 그냥 응원단이나 관람객으로 참가해도 선수와 같은 대접을 받을 수 있다.
딕시주립대학의 한센스타디움에서 개최되는 개막식은 올림픽을 방불케 한다. 세계 20여개 국가와 미국 50개 주에서 온 선수들이 출신 국가와 지역의 특색을 살린 복장과 깃발을 들고 입장을 하면 세인트조지 시민들은 관중석에서 환영의 함성을 지른다. 성화 봉송과 점화, 선수 선서와 매스게임, 그리고 불꽃놀이로 이어지는 화려한 개막식의 분위기에 젖다보면 국가대표선수가 된 느낌이 들게 된다. 부부가 손잡고 함께 개막식에 참석하는 장면은 생각만 해도 흐뭇해진다.
개막식에 이은 연주회에서는 축제 분위기를 더욱 만끽할 수 있다. 지난해 실내 경기장에서 열린 브리티시 인베이션 트리뷰트 밴드와 더 몽키스 밴드의 공연은 압권이었다. 각국의 선수들과 동반자들은 가슴 깊숙이 숨겨 두었던 열정을 마음껏 분출하면서 몸을 흔들고 괴성을 질렀다. 경기 후 열리는 디너와 댄스파티도 잊을 수 없는 행사다. 각국 선수들과 어울려 춤을 추다보면 새로운 추억과 로맨스가 마음깊이 남게 된다.
10월 3일부터 15일까지 2주간 열리는 올해 경기는 모두 29개 종목. 대부분 연령대별(5세 간격)로 나뉘어 경기가 치러진다. 축구, 소프트볼, 배구 등 3개 종목은 팀경기로, 볼링 등 나머지 26개 종목은 개인경기로 진행된다.
팀경기는 팀원을 구성해 함께 등록해야 한다. 개인경기는 개별 등록 후 같이 뛰고 싶은 선수를 등록 리스트에서 선택할 수도 있다. 일정만 맞으면 여러 종목 참가도 가능하다. 한 번 등록한 선수의 번호는 바뀌지 않고 매년 같은 번호가 부여된다. 그래서 다음해 같이 경기를 하고 싶은 선수가 있으면 지정하기도 편리하다.
골프는 사교 경기와 메달 경기 두 그룹으로 나누어져 있어 자신의 수준에 맞는 경기를 택할 수 있다. 메달 경기도 36홀의 연령대별 경기와 18홀의 핸디캡 경기로 나누어 치러진다. 특히 준프로급이 참여하는 연령대별 경기는 내년에 미국에서 열리는 내셔널시니어골프대회 예선전을 겸하고 있어 좋은 성적을 거두면 내셔널골프대회 출전자격도 덤으로 얻을 수도 있다.
유타주 세인트조지시는 선브룩나 딕시 레드힐스와 같은 유명 골프장이 주변에 즐비해 세계의 골프 마니아들이 연중 몰려드는 골프 휴양지다. 건조한 사막성 기후에 붉은 바위산을 끼고 양탄자 같은 잔디가 펼치진 링크코스는 골퍼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도전적인 신중년들은 철인 3종 경기와 산악자전거 경기에서 세계의 베테랑 철인들과 한판 승부를 겨뤄 볼만하다. 강렬한 햇살을 받으며 선인장밖에 없는 황무지에서 진행되는 사이클링, 도로 달리기와 경보는 요즘 붐이 일고 있는 운동. 동우회의 회원들이 함께 참가하면 좋은 추억을 만들 수 있다.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픽과는 달리 헌츠먼 시니어대회는 매년 열려 미국, 캐나다는 물론 세계 각지 스포츠 동우회의 연례 모임 장소로도 활용하고 있다.
네바다주 카슨시의 브렌다 블랙햄 여사는 35년 전 고등학교 배구팀 코치로 활약했다. 전국 대회를 휩쓸었던 추억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동고동락했던 학생 선수들이 이제는 의사, 변호사, 교육자 등으로 미국 각지에서 맹활약을 하고 있으나 다 같이 한번 모이기가 쉽지 않았다.
학생들이 지천명(50세)의 나이를 넘긴 2014년, 이 대회에 배구팀으로 함께 참가하면서 소망했던 재회가 이루어졌다. 손발 한 번 맞추어볼 겨를도 없이 바로 경기에 참가했지만 그저 즐거웠고 경기를 거듭할수록 옛날 팀워크가 되살아나면서 더 즐거웠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 10월의 대회기간에도 바쁜 일을 접어놓고 모두 모여 경기를 하면서 재회의 기쁨을 나눌 계획이다.
독일 배구팀은 지난해 금메달의 한을 10년 만에 풀었다. 2006년부터 참가한 독일팀은 2013년에는 세계시니어배구챔피언십을 겸한 이 대회에서 캐나다 팀에 석패해 은메달에 그쳤다. 2년간 실력을 더 갈고 닦아 지난해 우승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올해 있을 독일과 캐나다 팀 간의 리턴매치는 벌써부터 관심을 끌고 있다.
심금을 울리는 러브스토리도 빠질 수 없다. 서울올림픽 때의 안재형과 자오즈민의 열애에 견줄만한 전설 같은 이야기도 전해진다. 전역 군인인 미국의 댄 크레이번스와 러시아의 마리나 안드리바는 2004년 탁구 경기에 출전했다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했고 이제는 복식조로 함께 참가하고 있다. 신중년과 꽃중년이 뒤늦게 소울 메이트로 만나 적대적인 양국의 탁구계를 잇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해피엔딩 스토리다.
중국 청소년들의 자원봉사활동도 화제다. 2010년 미국의 시니어배구팀이 중국 순회 경기를 갔을 때 친절하게 봉사한 중국 청소년들과 인연이 되어 그 후 해마다 중국 청소년 10여명이 이 대회 때 미국에 와서 한 달여간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제법 치열한 경쟁을 통해 선발된 중국 청소년들은 현지 자원봉사를 통해 영어는 물론 국제 매너와 봉사정신을 익히게 된다.
헌츠먼 대회는 각계의 봉사자와 후원이 뒷받침되면서 참가 선수만 1만명이 훌쩍 넘는 국제대회로 성장했지만 출범은 단순했다. 1987년 존 모건 주니어 부부가 ‘운동과 체력단련이 일상이 되면 신중년의 황금기가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각지의 시니어가 함께 하는 대회를 구상하게 됐다.
여기에 홀인원을 5차례나 기록한 만능 스포츠맨이자 건강과학박사인 스티븐 워너 하이너 교수가 가세하고 세인트조지시도 적극 지원에 나서면서 대회를 출범시켰다. 출범 2년 뒤 헌츠먼코퍼레이션의 존 헌츠먼 회장과 부인이 본격적으로 후원하면서 세계적인 대회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이 대회가 성황을 이루는 데는 1시간 이내의 거리에 자이언캐년 국립공원이 있고 브라이스캐니언, 그랜드캐니언, 라스베이거스, 솔트레이크시티 등 많은 관광 자원과 부대시설이 뒷받침하고 있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문화 행사와 박물관 투어 등 다양한 볼거리와 먹거리가 있고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한 무료 건강검진을 실시하는 등 세심한 서비스도 참가율을 높이는 요인이다.
모건 회장은 메시지를 통해 “봉사자, 후원자, 참가자 및 임직원의 헌신과 노력으로 대회가 놀랍게 발전했다”며 “30주년을 기념해 성대하게 진행될 올 대회에 세계의 신중년들이 적극 동참하여 건강을 증진하고 우정도 돈독히 하자”고 역설했다.
“자네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1994년 1월, 현대건설 이사였던 최동수(崔東秀·77)씨가 사직서를 내밀자 고(故) 박재면 회장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삼성이나 롯데에 가려고 그만두는 거냐?”는 물음에 “기타를 만들겠다”고 대답하자 더욱 황당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당시 현대건설은 국내 건설업계 1위 업체였고, 잘 나가는 건축담당 이사였던 최씨의 갑작스러운 은퇴를 쉽게 받아들이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최씨의 선택은 하루아침에 결정된 것이 아니다. 기타를 만들고자 한 것은 학창시절부터 고이 간직해온 그의 꿈이었고, 20여 년에 걸친 아내와의 약속이었다.
아내와 애인(?)을 위한 선택 ‘은퇴’
최동수씨가 아내인 수필가 허숭실(필명)씨와 연애하던 시절의 일이다. 덕수궁 후원을 걷던 최씨는 허씨에게 엉뚱한 고백을 했다. “당신과 데이트하느라 내 애인을 돌보지 않았더니 그녀가 병들었소. 오늘 당신에게 그 애인을 소개해 주리다.” 허씨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애써 태연한 척하며 그의 애인을 만나러 가자고 했다.
그러자 최씨는 들고 있던 기타를 무릎 위에 척 올려놓고는 “기타가 바로 내 애인”이라고 털어놨다. 그가 말한 애인이 사람이 아닌 기타라는 사실에 그녀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마음이 복잡하기만 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허씨 앞에서 최씨는 “그동안 데이트 자금을 마련하느라 애인을 전당포에 맡겨두었더니 습기가 차 피부가 트고 몸도 틀어져 속상하다”며 기타를 쓰다듬었다고 한다. 그 모습을 본 허씨는 ‘풋내기 예술가’를 발견한 듯 반가움에 가슴이 뛰었고, 그날의 감동이 결국 그녀를 ‘기타 만드는 남자의 아내’로 만들었다.
최씨의 기타 사랑은 고등학생 시절 읽은 한 소설을 통해 시작됐다. 지금은 책 제목도 가물가물한 일본 소설이지만, 당시 전쟁터에서 다리 불구가 된 주인공이 창녀가 된 아내의 집 근처 전봇대 아래에서 기타 연주를 하는 장면만은 또렷하게 기억한다.
그 이후 기타에 매료돼 아버지를 졸라 기타를 하나 샀지만, 아무리 연습해도 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결국 직접 취향에 맞는 기타를 손수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한다. 마땅한 재료가 없어 집안의 오동나무 장롱 서랍을 뜯어가며 기타를 제작하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결혼해서 얼마 동안은 틈틈이 기타를 만들었다. 하지만 건축설계 사무소를 운영하면서 밤낮으로 기타 만들기에 몰두하는 그의 모습을 본 아내는 견디다 못해 한 가지 제안을 한다.
“아이들 교육을 다 마치고 난 뒤에 기타를 만들면 그때는 전폭적으로 지지하겠어요.” 아내의 말에 그는 본업에 충실하기로 마음먹고 1975년 현대건설에 입사한다. 입사 후, 18년을 바레인,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등 타국에서 지내며 아침 6시부터 자정까지 밥벌이에 몰두했다. 그러던 어느 날, 1993년 그가 싱가포르에서 근무하던 때, 아내는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외로움도 암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의사의 말에 그는 조기 은퇴를 결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남은 인생은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다 가겠다고 다짐하던 최씨에게 한 가지 꿈이 피어올랐다.
“사표를 내기 전 아내에게 ‘나 기타 만들까?’라고 물어봤죠.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계산기를 가져와 탁탁 두드리더니 ‘앞으로 삼시 세끼 먹는 데는 문제없겠네요. 인생 1막은 아이들을 위해 물질에 투자했으니, 2막은 당신의 정신적 자유에 투자하도록 해요’라며 흔쾌히 제 결정을 받아들이더군요. 20년 전, 아이들을 키우고 나면 기타를 만들어도 좋다고 했던 그 약속을 지킨 거죠.”
그렇게 그는 아내와의 여생을 위해, 그리고 애인과의 재회를 위해 은퇴를 결심했다.
‘소리가 나는 작은 집’을 건축하다
기타 제작을 결심한 그는 그동안 지내던 서울의 아파트를 정리하고 경기도 고양시 일산으로 이사했다. 31년간의 건축가 경험을 살려, 마당이 딸린 집을 직접 지었다. 아늑한 그의 집은 ‘행운의 열쇠’ 모양을 따서 설계한 1층을 지나면, 기타 제작 공간인 지하실 ‘목운(木韻: 나무에서 소리가 난다는 뜻) 공방’이 나온다. 최씨의 꿈과 애정이 깃든 이곳에서는 1년에 단 2대의 기타만이 세상 밖으로 나온다. 딸을 키운다는 생각으로 기타를 만들고, 시집보내는 마음으로 기타를 파는 그다. 이 때문에 최씨는 기타를 파는 게 아니라 “백마 탄 기사에게 시집보낸다”라고 말한다. 딸을 키우는 심정으로 정성을 다하는 그이지만, 아무래도 기타를 만드는 데는 숙련된 솜씨가 뒷받침돼야 할 터. 기타 제작을 위한 그의 노력도 대단했다.
“은퇴한 첫해에는 미국 힐즈버그(Healdsburg)에 있는 아메리칸 기타스쿨에 입학했어요. 이듬해에는 스페인 코르도바(Cordoba)의 기타페스티벌에서 마에스트로 호세 로마니요스(Jose Romanillos)에게 제작 마스터 클래스를 지도받았죠. 두 과정 모두 한국인으로는 처음이라고 해요. 현재는 미국 현악기 제작가 협회(GAL: Guild of American Luthiers)의 유일한 한국인 회원이기도 하고요.”
기타를 만들지는 않았지만 18년간의 해외생활은 그의 꿈을 실현하는 디딤돌 역할을 했다. 해외 근무라는 이점을 활용해 외국의 공방과 자재상들을 찾아다니며 제작에 필요한 공구를 수집한 것. 그렇게 오랜 시간 기타를 만들기 위해 준비해온 만큼 그는 욕심을 내거나 서두르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시계는 꼬박꼬박 기타를 위한 시간으로 쉼 없이 달려가고 있었다. 집 지하실의 기타 공방으로 매일 아침 9시에 출근하고 오후 6시에 퇴근한다. 야근도 마다치 않는다. 그렇게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드는 기타는 1년에 2대 남짓이다. 기타 제작 과정은 단번에 결과물을 내기보다는 완성까지 꼼꼼한 설계와 인내가 바탕이 돼야 하는 건축일과 닮은 점이 있었다.
“기타는 ‘소리가 나는 작은 집’과 같아요. 제 인생 전반전을 장식한 싱가포르 선텍 시티(Suntec City), 카타르 국립대학 건물, 이라크 북부역사 등을 짓는 것처럼 기타를 만드는 일도 미학적 판단과 설계가 필요한 종합 예술이죠.”
세상에 단 하나뿐인 ‘최동수표 악기’
오랜 꿈, 아내의 내조를 밑천 삼아 시작한 기타 제작은 꾸준히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처음에는 친구나 동료 등 지인에게 주기 위해 만들었는데, 근래에는 서정실, 변보경, 배장흠 등 유명 기타리스트에게 기타를 헌정했다. 대개 유명 기타리스트의 경우 독일이나 프랑스 등 해외 장인이 만든 것을 사용하는데, 그런 이들이 그가 만든 기타를 쓴다는 것은 이미 실력이 아마추어 수준을 넘어섰음을 증명한 것이다. 그의 기타는 보통 1대당 1000만원 가량이다. 예상한 가격보다 비싼 값을 받을 때도 많지만, 그가 공짜로 주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필요한 사람에게 자신의 기타를 주는 것은 결코 공짜 거래가 아니라고 말한다.
“어떻게 돈으로 그 가치를 표현하겠어요? 대부분 손님이 알아서 가격을 정해서 지급하죠. 조금 손해 보는 경우가 있을지 몰라도, 결코 손해가 아니랍니다. 내가 공짜로 기타를 주면 어떤 이는 나에게 훌륭한 그림을 주기도 하고, 좋은 책을 보내기도 하니까요. 악기는 파는 게 아니라 인연을 만드는 과정이라 생각해요. 악기는 내 딸인데, 내 딸을 데려갔으면 그도 사위처럼 내 자식이 되는 거지요.”
그는 팔기 위해 만드는 것은 단순히 ‘기타’라 하겠지만, 아름다운 소리를 내기 위한 단 하나의 ‘악기’를 만들고 있다고 설명한다. 판매나 주문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이 상상했던 모습의 기타를 하나둘씩 실물로 탄생시키는 최씨다.
온도와 습도가 적당한 봄철이면 기타를 만들기 적합하다. 이 시기에 결의 방향과 울림이 좋은 나무를 골라 온도를 맞춘 작업실에 한 달가량 둔다. 그다음 색을 입히는데, 그는 붓 대신 천으로 만든 솜방망이로 문질러 칠하는 방식을 고수한다. 한 번 칠할 때마다 100~150번을 문지르고, 이 과정을 100번 정도 반복해야 한다. 여기까지만 해도 서너 달이 걸리기 때문에, 기타 한 대를 만들고 나면 3~5kg씩 체중이 줄곤 한다.
하지만, 이러한 고통에도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작업은 튜닝이다. 아무리 독특하고 멋진 기타라도 그 감탄은 오래가지 못한다. 결국 기타도 악기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은 소리다. 나무마다 고유한 진동이 있는데, 이를 조화롭게 맞추기 위해 일일이 손으로 나무 두께를 가늠해 조율한다. 기타의 모양이 나오면 제대로 된 소리를 얻기 위해 대전의 음향 전문가에게 보내 진동 실험을 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다시 튜닝을 한다. 튜닝은 한 달이 걸리기도 하고 반년이 걸리기도 하는데 하다가 안 되면 다시 뜯어서 처음부터 만들어야 한다.
“기타리스트 배장흠씨의 기타도 앞판을 세 번, 뒤판을 두 번 바꿔가며 튜닝을 마친 작품이에요. 그는 기타가 만족스러웠는지 고맙게도 그 이후에 제가 만든 기타를 두 대 더 구입했죠. 2014년 7월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공연 무대에서도 제가 만든 기타로 연주했어요. 딸을 시집보낸 입장에서는 참 뿌듯하고 기분 좋은 일이죠.”
요즘 그는 리라(lyre: 고대에 사용한 발현악기) 모양의 기타 제작에 몰입하고 있다. 원래는 일흔넷까지만 기타를 만들려고 했지만, 여전히 46번째 기타 만들기에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그는 그동안의 기타와의 인연을 모아 만든 책 (가제)를 준비하고 있다. 기타를 통해 천상의 소리를 선사하고, 책을 통해 기타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는 게 목표다.
“어언 나이가 차서 손을 거둘 날이 가까워져 오잖아요. 그전에 꿈속에서 상상만 하던 리라 기타와 같은 작품을 몇 가지 만들어 보고 싶어요. 또, 책이 출간되어 많은 분이 제 이야기를 읽어준다면 기타 제작 생애의 목표의 반은 성취한 셈이죠.”
1983년 6월 30일부터 138일에 걸쳐 방송된 ‘이산가족찾기 특별생방송’을 모티브로 제작한 뮤지컬 .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던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등 시대를 대표하는 가요들을 리메이크해 당시의 감동을 전한다. 6·25전쟁으로 자식을 잃고 슬픔 속에 살아가는 돌산댁 역은 배우 나문희가, 전쟁포로로 끌려가 가족과 생이별을 해야 했던 양백천 역은 배우 박인환이 연기한다. 뮤지컬의 연출이자 서울시 뮤지컬단을 이끌고 있는 김덕남 단장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Interview>>
이번 작품을 연출하게 된 계기에 대해
서울시뮤지컬단은 다양한 콘텐츠로 서울시민의 문화예술 향유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작금의 뮤지컬산업은 라이선스 뮤지컬의 홍수 속에 일부 연령층의 뮤지컬 마니아가 선호하는 작품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 소위 그들만의 잔치라는 지적도 나옵니다. 이러한 고민 속에 뮤지컬단장으로 부임하면서 서울시뮤지컬단은 다양한 접근방법으로 작품을 개발해야 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한국전쟁이 빚어낸 질곡의 삶을 조명한 우리의 이야기 을 공연함으로써 전쟁과 이산의 아픔을 겪었던 중·장년 세대들에 큰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시니어뮤지컬 시장의 활로를 개척해 보고자 합니다.
1983년 이산가족찾기 방송을 어떻게 회상하고 있는지
138일에 걸쳐 453시간 45분의 마라톤 방송으로 진행됐던 이산가족찾기 생방송은 온 국민의 심금을 울렸고, 세계 최장시간 생방송 기록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시청자의 88.8%가 방송을 보고 눈물을 흘린 경험이 있다는 한국 갤럽조사연구소의 결과가 나오기도 했고, 저도 물론 그중의 한 명이었어요. 단 한 명의 가족이라도 더 찾길 간절히 기도하며 방송을 봤던 기억이 납니다. 신혼 때 헤어져 33년 동안 만나지 못했던 부부가 재회하기도 했는데, 그 사연이 그렇게 기억에 남습니다. 그토록 온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모은 감동의 시간은 그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많은 중·장년 배우들이 공연 활동을 하고 있지만, 대부분 연극무대입니다. 이번 작품은 뮤지컬인데요. 젊은 배우들이 장악하는 다른 뮤지컬과 비교해 이 작품이 갖는 차별성은 무엇인가요?
요즘은 중년 세대뿐 아니라 젊은 층을 아울러 모든 세대가 잠시 즐기고 끝나 버리는 화려한 재미보다는 오래 마음속에 남을 만한 깊이 있는 감동을 원하는 추세인 것 같습니다. 중·장년뿐 아니라 젊은 세대에게까지 공감이 갈 수 있는 배우가 누굴까 고민하다 나문희·박인환씨를 생각했어요. 대본 자체가 희곡을 리메이크하는 작품이라 연극성이 강합니다. 대극장에서 노래보다 대사가 많은 작품을 어떻게 관객들에게 잘 전달할 것인가를 고민했습니다. 노래보다 연기가 우선시된 캐스팅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연스럽게 웃겨주고 감동을 선사하는 두 배우의 명품연기가 이번 공연의 완성도를 높여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영화 처럼 전 연령층을 아우르는 이야기로 공감대를 극대화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어떤 이들에게 추천하나요?
시니어뮤지컬인 만큼 중·장년 세대가 많이 관람하고, 공감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공연을 관람하며 아프고 어리숙했던 과거를 잠시 돌아다보고, 다시 앞을 내다보면 의미있는 삶을 설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녀부터 조부모 세대까지 온 가족이 함께 관람하며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고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전쟁과 이산이라는 역사도 중요하지만 긴 시간 동안 헤어져 있어도 변하지 않는 부부, 그리고 가족의 끈끈하고 애틋한 사랑의 감정이 전달되길 바랍니다.
△김덕남 연출
세계 25개 도시 공연, 미국 4개 도시 공연. 주요작 , , 등
△ 뮤지컬
장소: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일정: 10월 30일~11월 15일 연출 김덕남
출연: 나문희, 박인환, 곽은태, 왕은숙, 권명현 등
[4월은 꽃이다. 속살 드러낸 자태, 눈부셔라]
요염하게 생긴 봉오리들이 생긋생긋 웃는다. 봄 바람의 속삭임에 작은 꽃망울들이 방긋방긋 미소 짓는다. 4월의 꽃은 화려하고 눈부시다. 설렘으로 마주하는 사람들이 꽃으로 물들이고 웃음꽃이 만발한다. 시를 닮은 4월, 4월의 꽃은 그리움일 수밖에. 마침내 마음의 뜨락에 꽃씨 뿌리다.
꽃이라는 것은 묘한 마력(魔力)이 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마력 말이다. 꽃 한 송이로 사랑의 감정이 싹 트기도 하고, 메마른 일상에 촉촉한 위로가 되기도 한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사람이지만, 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꽃이다. 꽃이 한 여자를 화가로 만들었다. 꽃그림으로 일상의 우울함을 설렘으로 바꿔버렸다. 그림 작가 원은희가 꽃그림으로 설렘과 행복, 웃음을 전한다. 캔버스 안의 꽃다발로.
한마디 한마디가 조근조근하다. 거기에 생글생글한 미소로 무장한 그녀와 이야기 꽃을 피우면 금세 10대 소녀와 대화를 하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녀가 별빛이 쏟아지고, 파아란 바닷물이 넘실대는 남해의 한 마을에서 야생화를 따 소꿉놀이를 하던 소녀 시절을 이야기한다. 그 어떤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눈빛이 초롱초롱해지기 시작한다.
커다란 책가방을 들고 다니던 시절, 등굣길에 화단의 꽃을 꺾어 선생님께 선물한 이야기, 도시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온 오빠들이 8남매를 옹기종기 모아 가곡을 불러준 이야기, 언니들이 사다 준 식물도감으로 꽃을 관찰한 이야기 등 수다의 꽃을 피운 그녀는 영락없는 소녀다.
그래서일까.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을 간직한 53세 소녀에게서는 긍정의 아우라가 흘러넘친다. 그녀를 보면 나도 모르게 미소가 머금어지는 것은 그 아우라에 취해서이리라. 그래서 원 작가는 꽃이다. 보는 것 그리고 향기를 맡는 것만으로도 낭만적이고 위로가 되는 그런 꽃 말이다. 그녀가 모든 것을 놓고 싶을 만큼 힘들었던 시절을 위로해줬던 꽃 그림. 이제는 그런 인생의 위기에 놓인 사람들에게 그녀가 꽃다발을 건넨다. 몇 년 전 자신이 받은 위로의 꽃다발에 사랑과 희망을 담아.
◇ 꽃은 위로였다
2012년 묵호항. 주부 일로 인생의 반을 바친 그녀가 홀로서기를 선언하고 떠난 곳이다. 홀로서기를 선언하기는 했지만 익숙지 않은 사회생활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했고, 가족에게 짐이 될 수도 있다는 염려가 물밀 듯이 쏟아졌다. 또한 신체적 변화에서 오는 우울감을 던지기 위해 묵호항을 찾은 것이다. 묵호항에서 찌든 때를 씻어내고 올라와 그녀가 잡은 것은 다름 아닌 색연필. 그리고 묵호항에서 본 등대를 그리기 시작했다. 남들 눈으로 보기엔 틀림없는 꽃이지만 그녀는 그것이 틀렸다고 일침을 가하는 듯 ‘등대’라는 두 글자를 새겨 놓았다. 누가 봐도 일반인이 연습장에 장난을 쳐 놓은 듯한 그 끄적임 하나가 인생을 180도로 바꿔 놓을 것이라고는 그녀 자신도 상상하지 못했다.
“꽃과 등대. 무엇인가 길잡이가 되고 희망이 된다는 공통점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등대를 꽃으로 표현해 봤는데 저 자신에게 엄청난 위로가 되는 겁니다. 꽃 그림을 그리는 거요? 처음에 그것은 제가 살기 위한 것이었어요. 저를 위한 위로의 꽃다발을 그리다 보니 어느새 마음에 꽃이 피어나더라고요.”
그때 시작한 그림의 세계. 배워보지 않은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녀의 그림은 독창적이고 감각적이다. 거기에 향긋한 꽃의 마력까지 담겨 있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녀의 그림이 빛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삶과 꽃에 대한 깊은 고찰 덕분이리라. 그리고 어린 시절 꽃과 함께 했던 순수함이 그림으로 발현돼 위로의 매개체로 승화했다.
“견디기 힘든 것을 견뎌냈더니 그림이라는 선물을 받게 됐어요. 꽃 그림은 저를 위한 시(詩)이자 기도였는데 이제 다른 사람들이 그런 기운을 느낀다고 하니까 신비로운 일이죠.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또 다른 힘이 솟습니다. 꽃을 주는 것은 고마움을 표하는 일이기도 하니까 계속 이 고마움을 드려야겠어요.”
◇ 매일 매일 꽃다발을 주겠어요
“꽃을 준다는 것에는 많은 것들이 숨겨져 있잖아요. 사랑을 고백하기도 하고, 감사를 표시하기도 하고, 위로를 건네기도 하고요. 사랑, 감사, 위로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긍정적인 수식어를 모두 포함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꽃 그림을 그리는 것이죠. 그 꽃 그림 꽃다발을 받는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 있도록 말이에요.”
어린 시절 언니들이 사온 식물도감이 닳도록 식물 관찰에 몰두했던 호기심 대마왕 소녀는 이제 매일 자신이 그린 꽃다발을 매일 사람들에게 주는 상상을 한다. 그래서 그림을 선물하는 일에 인색하지 않다. 요즘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행복한 법이라는 것을 오감으로 깨닫고 있는 그녀다. 물론, 처음에는 자신을 위해 그림을 그렸지만 이제는 보는 이의 행복한 표정도 그림을 그리는 이유 중 하나가 됐기 때문이다.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꽃을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겨 뿌듯함을 숨길 수가 없단다.
“어느 날은 제 그림을 본 사람들이 길거리의 꽃을 찍어서 저한테 보여주더라고요. 이게 어떤 꽃이냐고 하면서요. 그때 참 뿌듯했죠. 그냥 지나칠 수 있었던 것을 나로 말미암아 한 번 더 보게 돼 그 생명으로서의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니까요. 꽃을 보는 사람이 누구나 그렇듯이 그분도 그것을 보면서 얼마나 아름답다고 생각했겠어요?”
◇ 자유분방함 속 메시지
원 작가는 그림을 정식으로 배운 경험이 없다. 그 덕분인지 그녀의 작품은 하나같이 어떤 방식에 구애 받지 않고 자유분방하다. 또 3년차 작가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삶에 대한 잔잔한 메시지가 담겨 있기도 하다. 보는 이들은 그 작품의 색감과 감각적 요소를 보고 미소를 머금지만 그 안에 새겨진 메시지를 알아차렸을 땐 진한 감동과 추억에 잠기기도 한다.
그녀가 그린 ‘재회’라는 작품은 노란 옷을 입은 소녀가 노란 나비에 둘러싸여 달콤한 상상에 빠져 있다. 눈으로 본 그림에서는 봄냄새 물씬 풍기는 따뜻함이 전해지지만, 사실 원 작가는 여기에 4·16 세월호 희생자를 위한 메시지를 담았다. 비탄함을 넘어 노란 나비와 함께 행복한 곳에서 재회할 수 있는 날을 꿈꾼다는 뜻이다.
본인의 추억이 담긴 작품도 있다. ‘엄마의 빨랫줄’이라는 작품에는 남해 소녀시절 어머니가 마당에 널어놓았던 생선들과 빨래, 그리고 꽃들이 형형색색으로 표현됐다. 그림에서도 알 수 있듯이 50대 원은희가 아닌 소녀 원은희로서의 감성이 물씬 느껴지는 작품이다.
원은희 그녀의 그림 인생의 미래는 아직 정해진 것이 없다. 그래서 더욱 행복하고, 떨리고, 기대가 되고 설렌다는 수식어를 모두 붙이는 그다.
“그림을 배운 적이 없어서 그런지 제 마음속에 있는 것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제 그림의 특징입니다. 제가 꽃을 보고 느끼는 것. 여행을 하면서 느끼는 것. 세상을 보면서 느끼는 것을 가감 없이 그림에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슬프거나 우울하게 표현하지는 않을 거예요. 세상은 설렘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늦게야 깨달았거든요.”
그녀는 ‘일단 살아는 있어야 돼’라는 마음에서 시작한 그림들을 자살예방센터에서 전시했던 것을 공교롭다고 표현했다. 또한 지난해에는 서울 문학의 집에서 ‘매일 매일 꽃다발을 드릴게요’라는 개인 전시회를 열고 서울발레시어터 LIFE 콘서트에 그림을 전시할 수 있는 행운을 얻기도 했다. 이렇게 전시회까지 열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은 그림이었기 때문에 이 모든 상황이 믿기지 않는 그녀다.
“이렇게 될 줄 몰랐는데 꽃 그림은 제게 정말 많은 것을 가져다 줬어요. 위로뿐만 아니고 많은 좋은 사람도 얻게 해줬으니까요. 그리고 전시의 기회도요. 그리고 예전의 저처럼 심적으로 힘든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어 행복합니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시가(詩歌) 문학은 이다. 의 시들 중 가장 오래된 것들은 서주(西周) 초기인 BC 1000년경까지 거슬러 올라가니, 지금으로부터 따지자면 약 3000년 전의 시가이다. 당시 나라별로 유행하던 민요를 모아놓은 것인데, 이후 가락은 없어지고 가사만 남아 시의 형태로 전해오던 것을 공자(孔子)가 305편으로 편찬한 것이다. 이들 중 소남(召南: 낙양) 지방에서 불리던 이라는 시를 살펴보자.
喓喓草蟲(요요초충) 찍찍 우는 풀벌레며
趯趯阜螽(척척부종) 뛰고 뛰는 메뚜기로다.
未見君子(미견군재) 그이를 보지 못하니
憂心忡忡(우심충충) 근심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지누나.
亦旣見止(역기견지) 지금이라도 만나서
亦旣覯止(역기구지) 지금이라도 자리를 같이하면
我心則降(아심즉항) 내 마음이 가라앉을 텐데...
고대 중국사회는 남자의 노동력에 의존한 경제구조였다. 따라서 남자들은 집에서는 농사를 짓다가도, 국가적 대공사 등의 부역(賦役)에 동원되거나 전쟁에 징병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고대의 시가 문학은 여인이 부역에 끌려간 남편을 그리는 내용이 많은데, 이 시는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시 중 하나이다. 이 시의 주체인 여인은 가을 수확철 들판에서 고된 농사일을 하다가, 뛰어노는 메뚜기를 바라보며 생사를 알 길 없는 남편을 떠올린다.
이 시에 이채로운 단어가 등장하는데, 그것은 바로 ‘구(覯)’란 단어이다. 이 단어는 의 에 ‘남녀가 정을 합하니, 만물이 생겨난다(男女覯精 萬物化生)’란 표현에 나오듯, ‘남녀 간의 결합’을 의미하는 단어였다. ‘지금이라도 만나서 자리를 같이한다면, 불안한 내 마음이 가라앉을 텐데…’라는 시구절은 진솔하기 그지없다.
이처럼 고대의 시가 문학들은 매우 진솔하게 감정을 표현하는 부분이 적지 않았는데, 남녀 간의 상열지사(相悅之詞)는 근엄한 주자학적 전통 하에서는 각색이 되어 해석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이 시의 두 번째 장을 살펴보자.
陟彼南山(척피남산) 저 남산에 올라
言采其蕨(언채기궐) 고사리를 캐노라.
未見君子(미견군재) 그이를 보지 못하니
憂心惙惙(우심철철) 근심하는 마음이 간절하노라.
亦旣見止(역기견지) 지금이라도 만나서,
亦旣覯止(역기구지) 지금이라도 자리를 같이하면
我心則說(아심즉열) 내 마음이 기쁠 텐데...
이 시의 제 1장의 무대가 가을 들판이었다면, 제 2장의 무대는 해가 바뀌어 고사리를 캐는 봄철의 산이다. 산을 올라가니, 발돋움을 하고 목을 빼서 이따금씩 멀리 바라보기도 하지만, 해가 바뀌어도 바라는 그이는 돌아오지 않는다. 여인의 마음은 ‘忡忡(충충)’에서 ‘惙惙(철철)’로 더욱 간절해지고, 이에 따라 반가운 재회(再會)를 상상하는 마음도 ‘안도감[降]’에서 ‘기쁨[說]’으로 점증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여인 중 신사임당이 그린 ‘초충도(草蟲圖)’라는 유명한 그림이 있다. 신사임당의 그림 이후, 여인들이 수를 놓는 병풍 등에는 이처럼 ‘풀과 메뚜기, 나비’ 등 초충의 그림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러한 그림의 원류(源流)에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시 중 하나인 이 자리 잡고 있다. 이른바, 화중유시(畵中有詩: 그림 속에 시가 있음)라…
하태형(河泰亨)
뉴욕주립대(빙햄턴) 경제학박사
보아스 투자자문 대표이사
수원대 금융공학대
학원장 등 역임
현재 현대경제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