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비켜간 듯한 목소리, 과거와 똑같은 외모. 30대 중반처럼 보이지만, 올해 그녀의 나이는 만56세. 믿기지 않는다. 절대 동안의 외모, 청아하면서도 파워풀한 목소리로 ‘난 너에게’, ‘내 사랑을 본 적이 있나요’, ‘환희’ 등을 히트시키며 1980년대를 대표하는 가수로 군림했던 정수라가 바로 그녀다. 작년에 데뷔 35주년을 기념하는 공연을 치르고 올해 초 신곡 ‘업고! 업고!’를 발표한 후 활동 중인 그녀는 11월에 있을 공연을 준비하며 쉼 없이 바쁘게 살고 있었다. 여전한 카리스마와 놀라운 가창력으로 무대를 휘어잡으며 오늘 현재를 철저하게 살아가는 그녀의 인생관, 그리고 가수로서의 삶에 대해 들어봤다.
“‘업고! 업고!’는 ‘업고 신나게 놀면서 우리 기운을 상승시키자’는 의미예요. 원래는 제목을 영어 그대로 ‘Up Go’(유피 고)로 하려 했는데 작사가 이건우 씨가 ‘영어로 하면 너무 아이돌 노래 같아서 우리 세대는 낯설 수 있으니까 한글로 가자’고 해서 그렇게 됐죠.”
정수라의 신곡 ‘업고! 업고!’를 들어보니 EDM(전자음악을 통칭하는 용어)이 가미된 남진의 노래를 정수라가 부르는 듯한 신나는 곡이었다. 정수라의 대표곡들이 워낙 듣는 사람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는 노래가 많기에 그런 이미지와도 부합했다.
“‘업고! 업고!’가 나오기 전에는 발라드곡을 발표했어요. 그런데 발라드보다는 힘찬 노래가 어울린다는 피드백이 오더군요. 물론 그런 반응들만 따라가는 건 아니지만, ‘환희’ 이후에 사람들을 업시킬 수 있는 노래를 만들었죠.”
‘아! 대한민국’으로 최고 인기가수
사실 대중이 아는 정수라는 에너지가 넘치면서도 청아한 창법이 특징인 가수다. 이런 이미지를 만든 노래가 바로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한 번 이상 들어봤을 ‘아! 대한민국’이다. 원래는 타이틀곡도 아니었고 음반에 의무적으로 들어가야 하는 건전가요로 만들어진 노래였다. 그런데 의도치 않게 공전의 히트를 치며 제2의 애국가라는 별명까지 갖게 됐다. 지금도 대학가와 운동 경기장을 가면 자주 듣는다. 젊은 사람들도 이 노래를 부른 가수가 정수라인 걸 알면 놀라면서 신선하게 느끼지 않을까.
“‘아! 대한민국’은 그 시대에 만들어야 했고 불러야 했던 노래일 뿐이었어요. 그런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빵 뜬 거예요.(웃음) 정말 의외였어요. 그래서 정수라는 강하고 씩씩하고, 건전가요에 어울리는 가수라는 인상을 갖게 됐죠. 개인적으론 마음에 안 들어요. 덕분에 쎄 보인다는 말도 듣는데, 저 엄청 여려요.(웃음)”
엄혹한 시대에 숙명처럼 얽혀 슈퍼스타가 된 정수라였지만, 그녀는 자신에게 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아! 대한민국’의 대성공 이후로도 꾸준하게 히트곡을 발표하며 1980년대를 상징하는 가수가 됐다. 또 ‘가요톱10’에서 총 21번 1위를 기록하며 역대 세 번째로 1위를 많이 수상한 가수가 되었다. 1980년대에 우리는 그녀의 노래를 들으며 살았던 것이다.
다른 세대와의 소통도 필요해
정수라는 중학교 3학년 때 연예계 데뷔를 했다. 어렸을 때부터 독특한 목소리를 인정받은 그녀는 일찌감치 광고음악을 통해 대중과 만났다. 학교보다 스튜디오를 더 많이 다녔다는 그 시절, 그녀를 가수의 세계로 이끌어준 사람은 ‘바람이었나’, ‘풀잎 이슬’ 등의 노래를 만들어준 작사가 박건호였다. 그 후로 36년간 연예계에서 활동한 그녀이지만, 젊은이들 위주의 프로그램이 많은 요즘 방송에서는 보기가 쉽지 않다. 혹시 그녀도 대중에게 잊힌다는 위기의식을 갖고 있을까?
“무대 위에 올라가면 못 느껴요. 무대에서 내려와 일반 생활을 할 때, 내 연배들은 나를 알지만 그보다 연하인 사람들이 못 알아볼 때는 조금 느끼긴 하죠. 사실 저는 너무 숨어 있었어요. 예능도 안 하고 토크쇼도 안 하고. 카메라를 의식하는 방송울렁증이 있어서, 그리고 뻔한 게 싫어서 그랬죠. 그런데 요즘은 ‘내가 다른 세대와의 소통에 소홀히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어차피 오래 노래하려면 나를 아는 세대하고만 만날 것이 아니라 모든 세대와 어울릴 수 있는 방법도 찾아봐야 하지 않나?’ 하며 되묻긴 하죠.”
얘기를 좀 하다 보니 그녀에게서 가수는 물론 방송인으로서의 욕심 또한 느껴졌다.
“‘불타는 청춘’에 나온 후에는 저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나를 만난다는 게 얘깃거리가 된 거죠. 자연스럽게 있는 그대로의 저를 보여줄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으면 나가고 싶어요. 요리 예능요? 내가 요리를 못해. 그것보다는 요리를 배워보는 게 좋겠어요.(웃음)”
노래 안 했으면 연기했을 것
예능 얘기를 하다 보니 천생 가수인 그녀가 만약 노래를 안 했다면 어떤 삶을 살았을지 궁금했다. 그녀는 단숨에 ‘연기자’라고 대답했다.
“연기를 하면 다양한 인생을 살 수 있잖아요. 저는 너무 단순해요. 56세이지만 나를 다 못 보여준 거 같아서요. 사람들은 저에 대해 무대 위에서의 파워풀한 느낌만 기억하는 것 같아요. 원래 제 성격은 천방지축이거든요. 이젠 다양한 내면을 드러내고 싶어요”
정수라는 (매니저에게) “너 영화 쪽에 아는 사람 좀 없니?” 하며 웃었다. 요즘 아이돌은 데뷔 전 연기 교육도 기본으로 받는다. 아이돌 가수생활을 발판으로 삼아 향후 연기자로서의 미래까지 염두에 두고 하는 준비다.
“요즘 아이돌, 인정해야죠. 그런 가수들이 성공하는 시대가 된 거예요. 저도 오래 살다 보니 이런 시대를 만나게 된 거고요. 기회가 주어진다면 디제잉하는 친구와 조인해서 EDM을 하고 싶어요. 마돈나처럼, 그리고 인순이 선배가 조PD와 한 것처럼 말이죠. 일단 재밌잖아요.”
멀티플레이어 정수라의 욕심
대화를 나눌수록 그녀가 멀티플레이어 욕심도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문득 가수 권인하가 최근 유튜브에 채널을 열어 독보적인 가창력을 뽐내며 제2의 전성기를 열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요즘에는 노래가 성공하려면 유튜브를 반드시 해야 한다. 가창력 하면 정수라도 결코 뒤지지 않는 가수인데 유튜브를 시도해보면 어떨까?
“유튜브는 와 닿질 않아요. 내가 걸어가는 길이 있는데 굳이 거기에 맞추다가 자칫 잘못하면 마이너스가 될까 걱정되기도 하고요. 일단 게으름 피우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게 중요하죠.”
뜻밖의 보수적인 면모가 보였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녀의 그런 반응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젊었을 때 근거 없는 악성 루머에 오래 시달렸고, 곧 가수 데뷔 40주년이 될 만큼 오래 연예계에서 일했지만 아직도 방송울렁증이 있다. 그런 경험이 있는 그녀에게 무턱대고 불특정 다수에게 자신을 여과 없이 노출하는 유튜브는 당연히 거부감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가수로서의 재능을 생각해봤을 때 유튜브야말로 그녀에게 최적화된 포맷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녀의 향후 행보가 궁금해진다.
하루를 충실하고 행복하게
“젊게 보인다는 것은 저에게는 플러스죠. 필라테스를 6년째 하는 중이에요. ‘내가 힘들 때 뭐하고 있었더라?’ 생각해보니 운동을 하고 있었더라고요.(웃음) 땀 흘리는 게 좋아요”
정수라는 기본적으로 승부근성이 있는 사람이다. 그녀의 노래들이 그렇듯이, 그녀는 지난 몇 년 동안 인생에서 벌어졌던 어려웠던 일들을 하나씩 극복해냈다.
“요즘 몇 년 동안 나 자신에게 ‘정말 대단한 정수라야’ 하며 스스로를 칭찬했어요. 저에게 내일은 없는 날짜이고, 어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간이에요. 그래서 오늘이 가장 중요해요. 최선을 다하는 게 행복한 하루죠. 그리고 나뿐만 아니라 내 노래를 듣고 행복해하는 사람들 얼굴을 보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게 좋아요. 저는 살면서 교만하거나 자만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아무 생각이 없었던 게 문제였죠. 바쁘게 주어진 일만 했고 세상 물정을 몰랐고 꼭두각시처럼 일만 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세상에 치이고 사람에 휘둘려서 힘들었어요. 나이가 드니 나를 잘 챙기면서 하루를 충실하게 보내는 게 가장 행복한 일 같아요.”
아직 내려놓을 때가 아니더라
정수라의 롤 모델은 패티김, 남진, 조용필 등이다. 그들처럼 기억되는 게 그녀의 꿈이다.
“제가 음악적 자질은 그분들에 비해 많이 모자라요. 더 열심히 해야 했어요. 그래서 롱런하려면 공부를 해야겠다 싶은 생각이 들어요. 선배님들이 롱런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으니까요. 나이를 받아들이고, 정말 자연스러움이 묻어나는 멋진 가수로 기억되고 싶어요. 스스로 ‘여기까지가 딱이다’ 할 때가 있을 거예요. 그때 내려놓으려고 해요. 그런데 아직은 아닌 거 같아.(웃음)”
훌훌 털어버리고 살자 하는 그녀에게 요즘은 큰 고민이 없다. 오로지 곧 있을 11월 공연에만 신경 쓰고 있다. 시스템을 제대로 갖추기 위해서 공연 연출을 위한 팀을 선정했고 아이디어와 연출을 더해가며 준비 중이다. 그런 하루하루가 그녀에게는 앞서 말한 행복의 이유들이 된다. 89세 어머니, 언니, 오빠와 사는 그녀에게 힘들지 않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어, 참 철없이, 열심히 살고 있어요.(웃음)”
허공을 보며 꾹꾹 눌러 웃는 그녀를 꼭 안아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박건호 작사가 주제로 열린 ‘가요무대’ 대기실에서의 만남은 짧았지만 여운은 길었다.
무슨 일을 하건, 그 분야의 최고가 돼라! 자주 듣는 얘기다. ‘최고’에겐 갈채가 쏟아진다. 다들 ‘최고’가 되기 위해 질주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영혼을 파는 결탁마저 불사한다. 삶의 눈먼 과속은 대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욕망이라는 총구에서 발사된 열정의 탄환. 이 위험한 물질은 과녁을 맞히고도 좌절한다. ‘최고’가 되고서도 감옥에 끌려가는 사람조차 있지 않던가. 그런데 말이다. 자전거 세계여행가 차백성은 권장한다. “꿈을 좇아 최고가 돼라!”고. 그가 말하는 최고란 뭘까. 자전거 여행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어떤 것일까.
자전거로 세계 여행에 나서는 사람이 많다. 점점 늘고 있다. 주로 청년층이 즐긴다. 차백성도 청년이다. 그의 나이는 68세. 나이가 무슨 상관이랴. 애늙은이도 있지 않던가. 가슴에 시퍼런 청년이 살아 있으면 청년이다. 정열과 패기로, 차백성은 청년 열차에 올라탔다. 그는 프로다. ‘전업 자전거 세계여행가’로 통한다. 직업적으로 자전거 세계여행을 하는 사람은 아마도 그가 유일할 거다. 그의 여행엔 협찬이 붙는단다. 여행서 집필과 강의도 어언 직업화됐다.
자전거로 지구를 누비는 사람이라 근육질의 터프가이를 예상했다. 그러나 마주앉고 보니 아니다. 그저 평범한 외양이다. 맑은 표정으로 보자면 학자풍이다. 여기저기 관절이 결릴 시절이지만 몸짓이 곧고 민첩하다. 육체에도 정신에도 강골이 들어 있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인생의 황혼에 무슨 수로 청년의 새아침을 열었겠나. 그는 바야흐로 진정한 전성기를 맞이했다.
“요즘 최상의 행복을 느끼며 산다. 골든 에이지! 바로 지금이 그렇다. 나에겐 하루도 거르지 않는 세 가지 일과가 있다. 운동, 독서, 글쓰기가 그렇다. 이 셋은 새로운 여행에 나서기 위한 준비 작업이자 일상을 맘껏 즐기는 방식이다.”
나이 들며 사람들은 흔히 습관에 안주한다. 나이 타령이나 하며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낭비한다. 당신처럼 자전거로 세계여행을 즐긴다는 건 상상으로나 가능할 뿐이다.
“늙었다고 자조할수록 퇴보한다. 늙음 안에는 경륜이나 지혜 등 좋은 가치들이 들어 있지 않던가. 역사를 보더라도 60세 이후에 위업을 남긴 사람이 많지 않던가. 나는 늙음이라는 걸 경쟁력으로 생각하며 산다. 이 나이에도 자전거 여행을 계속하는 건, 그 경쟁력의 가치를 믿기 때문이다.”
자동차 여행은 어떤가? 굳이 자전거만을 수단으로 고수하는 이유는?”
“어릴 적에 ‘김찬삼의 세계여행’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특히나 그의 자전거 여행에 동경심을 품었다. 그때 꿈이 생긴 것이지. 나, 어른이 되면 자전거로 세계를 여행할래! 그랬던 소년기의 꿈을 뒤늦게 이룬 셈이다. 김찬삼 선생이야말로 내 인생의 위대한 멘토다.”
김찬삼(1926~2003)은 ‘여행의 신’으로 불렸다. 비(非)문명, 오지, 가난한 사람들을 만난다는 여행 원칙을 끝까지 관철한 인물이다.
“대학 교수였던 아버지의 이른 작고도 어린 나에게 특별한 영향을 미쳤다. 염세주의라는 게 생기기 시작했으니까. 선친은 우주처럼 큰 존재였다.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며 어린 내게 인생은 유한하다는 걸 일찍부터 경험하게 했다. 덕분에 좀 조숙하지 않았을까. 이미 발아한 여행에의 꿈이 아버지를 잃은 뒤로 한층 영글었던 것이다. 내게 꿈이라는 게 없었다면 평생을 방황으로 허비하고 말았겠지.”
날마다 100km씩 달렸다
삶이 부끄러운 건, 꿈을 잃었을 때다. 꿈의 관리에 능란하지 못한 채, 꿈을 배반하고 엉뚱한 행로를 헤맸다는 자각이 찾아들 때다. 차백성에게도 그 자각의 순간이 찾아왔더란다. 2000년, 그의 나이 49세 때였다. 참을 수 없는 삶의 진부함에 소스라쳤던 것 같다. 살아온 날들 전체에 회의를 느꼈다는 게 아닌가. 어라, 나 지금 뭐하는 짓이지? 나여! 이건 나의 삶이 아니지 않은가? 그렇게 자가 심문을 했던 모양이다. 대우건설 임원이었던 그는 마침내 사표를 던졌다. 그리고 수면 아래에 매장된 꿈을 두레박으로 길어 올렸다. 그렇게 자전거 세계여행의 시동이 걸렸다. 첫 여행은 미국 서부 해안 종주. 3000km에 달하는 대장정이었다.
“시애틀에서부터 샌디에이고까지, 태평양을 끼고 이어지는 ‘하이웨이 원’을 달렸다. 하루 평균 100km씩, 한 달에 걸쳐 완주했다. 무사히 여정을 마치고는 감개무량했지. 나도 드디어 자전거 여행가 대열에 올라섰다는 만족감이 컸다. 오래된 꿈을 비로소 이루기 시작했다는 쾌감은 더 컸다.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
체력을 다져 떠났겠지? 하루 100km를 날마다 달렸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지경이다.
“물론 준비기간이 있었다. 미국 종주를 하기 이전에도 자전거를 자주 탔다. 나는 매번 엄청난 준비를 하고 떠난다. ‘고생한 그대여, 다 놓고 훌쩍 떠나라!’ 그런 식의 구호를 불신한다. 준비가 충실하지 않은 여행엔 폐단이 많아서다.”
숙식은 어떻게 해결했나?
“불가피한 경우엔 모텔에 투숙했지만, 거의 캠핑을 했다. 자전거엔 7개쯤의 가방을 매단다. 텐트와 취사도구까지 챙기다 보면 꽤 무거워진다. 30kg 이상 된다. 나의 모든 해외여행이 그런 식이다.”
하룻밤만으로도 온몸이 쑤시는 게 캠핑일 수 있다. 말 못할 불편이 많았겠다. 캠핑을 기본으로 하는 이유는?
“두 가지 이점 때문이다. 하나는 캠핑장을 통해 세계 각국의 여행자들과 한결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점. 또 하나는 경비 세이브! 불편? 별안간 설사 날 때가 가장 난감하다. 화장실을 찾기 어렵더라고.”
칼을 두 자루나 들고 덤비는 강도도 만나게 되는 게 자유여행이다. 사고는 겪지 않았나?
“내겐 완벽주의 성향이 있다. 미리 면밀히 예방하는 것이지. 유럽 여행의 경우엔 집시들을 특히 조심한다. 순식간에 자전거를 훔쳐가기 때문에 자전거를 항상 몸에 붙이고 다닌다. 캠핑할 때도 자전거를 분해해 텐트 안에서 끌어안고 잔다. 미국에선 송아지만 한 개가 공격을 해서 죽는 줄 알았다. 용케 모면했다. 미국 개들이 다들 훈련됐다는 게 퍼뜩 생각나 외쳤다. 싯 다운!(sit down) 그러자 대번에 주저앉던걸. 하하핫. 여행엔 기지가 필요하다.”
가벼운 사고는 여행의 풍미를 더해준다. 일테면, 길을 잃을 경우, 더 흥미진진해질 수 있는 게 아닌가. 길이란 결국 어디로든 이어지니까. 그러나 차백성에게 길을 잃는 식의 얼간이 짓은 용납되지 않는다. 사고율 제로! 노련한 여행자의 기록이 혁혁하다.
자전거는 인류가 발명한 가장 근사한 물건에 속한다. 자동차가 지구덩이를 까맣게 뒤덮은 이 시대까지 사멸하지 않은 그 생명력이라니. 이른바 적정기술의 산물이다. 이 주목할 만한 철 구조물에 인간의 숨결과 피를 부여하는 게 차백성이다. 페달을 밟는 그의 거친 숨결에 자전거도 격동하겠지. 그의 몸통에 흐르는 피가 핸들을 거쳐 바퀴까지 설레어 번질 테지. 사물과 인간의 동체대비, 그 사랑과 안심이 여행을 지속하게 할 것이다.
꿈 없는 욕망의 질주는 방황에 불과
그런데, 고독하지 않을까? 그는 늘 혼자 떠나고 혼자 돌아온다. 하루 종일 말 한마디 없이 페달만 밟는 날도 많다는 게 아닌가.
‘나 홀로 여행’을 수칙으로 삼은 사람에게선 독특한 취향 이상의 자기폐칩이랄까, 뭔가 집요한 나르시시즘이 느껴진다. 외바퀴 자전거처럼 고독하지 않을까? 고행을 자행하나?
“고독. 사실 그게 가장 힘겹다. 그러나 우리네 인생 자체가 고독과의 동행이지 아니한가? 당신 역시 곁에 와이프가 있더라도 외로울 게 아닌가? 고독이란 사귈 만한 벗일 뿐, 나쁜 게 아니다. 자전거 여행은 고독과 동행한다는 점에서 인생과 편차 없이 닮은 것 같다. 인생의 축소판이자, 인생을 관조하게 하는 전망대, 그게 자전거 세계여행이지. 그러고 보면 이건 구도 내지는 탐구여행이겠네.”
차백성은 책벌레에 가깝다. 여행 중에도 자주 책을 읽는다지. 그게 고독을 녹여 친구로 만드는 한 가지 방법인 모양이다. 여권처럼 항상 들고 다니는 책도 있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니코스 카잔차키스 애호가이기도 하다. 일부러 지중해 크레타 섬을 찾아 카잔차키스의 묘를 참배하기도 했다. “나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이는 카잔차키스의 비명(碑銘)으로, 차백성의 가슴에도 화인(火印)처럼 새겨진 것 같다.
자전거는 느리다. 느려서 더 잘 보이고, 더 많이 보인다. 모든 지나갈 수밖에 없는 세상 풍경이 잽싼 발길을 멈추고 천천히 흘러간다. 풍경은 물론 삶의 풍속까지.
세계 각국을 섭렵하는 중에 본 최고의 비경은 어디였나?
“뉴질랜드 남섬 밀포드 사운드의 피오르드였다. 만년설 빙하가 흘러내려 형성된 협곡이다. 숨이 멎는 듯한 경이를 느꼈다. 그런데 비경보다 감동적인 건 사람이다. 내가 자전거를 타고 세계를 돌아다니는 것도, 사람의 비경을 만나기 위해서다.”
미움이 쌓이는 게 인간사이지만, 늘 그리운 건 사람이다. 봄날의 여행처럼 따뜻한 존재. 누구나 그런 사람을 기다린다.
“잊을 수 없는 일화가 있다. 한번은 인가 없는 오지의 어둠 속에서 곤경에 처했다가 어떤 남자의 도움을 받았다. 그는 진정 비범한 인간애로 나를 도왔다. 눈물겨워 감사의 뜻을 전할 수밖에. 그러자 그가 하는 말이 의표를 찔렀다. ‘나에게 고마워할 것 없다. 다음에 너도 남을 도우면 되지 않니?’ 그 한마디는, 이후 내 삶의 푯대가 되었지.”
부인에게 헌신적일 거 같다. 그런데 어쩌자고 20년째 ‘홀로 여행’만 하지?
“아내에겐 동의를 미리 구했다. 각자가 추구하는 삶 존중하기. 이는 현명한 부부애이지 않을까? 나는 오랫동안 꿈을 잃은 채 직장생활을 열심히 했으나 그건 일종의 방황이었다. 비관적으로 산 세월이었지. 쉰 살에 이르러서야 잠에서 깨어나 유예했던 꿈을 실현했다. 그러자 긍정적인 인간으로 변하더군.”
별 꿈 없는 보편적 인생도 얼마든지 어엿할 수 있다. 꿈으로 말하자면, 인생 자체가 한바탕의 꿈이지 않을까?
“꿈이 없는 건 강아지나 시체일 뿐이다. 모든 살아 있는 사람에겐 다 꿈이 있다. 잊었거나, 아직 발견하지 못했을 따름이겠지. 꿈을 찾아야 한다. 무슨 일이건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가장 하고 싶은 일을 꿈으로 삼아 도전하라는 얘기다. 도전했다면 최고가 되어야겠지. 그게 가장 좋은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꿈 없는 욕망의 질주는 방황에 불과하다는 얘기이겠지. 꿈이라는 산소통이 빠져나간 삶은 자아를 질식시킨다는 얘기일 테고.
“자전거 여행의 꿈을 이루자 삶의 시공간이 확장되었다. 한결 농밀한 삶이 가능해졌지. 그게 왜냐면, 가령 한자리에서 90년을 산 사람의 삶과 90년을 여행하며 산 사람의 그것은, 질적으로 너무도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세상은, 비단 여행만이 아니라 뭐든 꿈을 좇아가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다.”
차백성은 자전거 세계여행만을 꿈으로 삼진 않았다.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도 뿌리 깊은 것이었단다. 굴레를 벗어나고픈 그의 유목적 개성이 문예 욕망으로 번진 것 같다. 그리고 마침내 세 권의 여행기를 낸 작가로 변신했다. ‘아메리카 로드’, ‘재팬 로드’, ‘유럽 로드’. 셋 모두 인문학적 내공과 글맛으로 버무려진 가작이다. 이제 그는 글을 쓰지 않고서는 좀이 쑤셔 못 견딘다. 그보다 더 그를 달구는 건 물론 여행 충동이지만.
재즈’ 하면 대개 분위기 좋은 바에서 와인을 곁들이며 듣는 모습을 떠올린다. 황덕호(黃德湖·54) 재즈평론가는 이러한 선입견이 ‘재즈는 어려운 음악’이라는 편견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는 “재즈는 화려한 레스토랑의 만찬보다 시장 골목 외진 식당에서 그날그날의 재료로 말아주는 즉석 국밥에 가깝다”고 설명했다. 개성 있는 연주자들이 즉흥으로 이루는 재즈 앙상블의 매력을 비유한 것이다. 또 애써 격식 갖춘 공간을 찾지 말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황덕호 역시 오랜 시간 자신의 다락방에서 재즈를 즐겼다. 그리고 그보다 더 오래전, 훌륭한 재즈들이 다락방에서 탄생했다.
올해 3월 이사하기 전까지, 황덕호는 다락방이 딸린 후암동 빌라에서 8년여 동안 재즈를 듣고 글을 썼다. 그곳에서 집필한 마지막 책이 바로 ‘다락방 재즈’다. 이제는 예전처럼 다락방은 없지만 어디서든 재즈를 통해 다락방의 감성을 얻는 그다.
“영어로 하면 ‘로프트 재즈’(loft jazz)인데 실제 1970년대부터 쓰인 용어입니다. 당시 뉴욕 맨해튼의 작은 다락방 작업실들에서 실험적인 재즈가 많이 만들어졌거든요. 제가 썼던 다락방과는 다소 의미가 다르지만, 번듯한 환경이 아니더라도 어디서든 들꽃처럼 피어나는 재즈의 특성과 맞닿는 부분이 있죠.”
독자가 책을 어떻게 읽길 바라는지 묻자 그는 “틈틈이 가볍게 읽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재즈 이야기를 낯설고 어렵게 여길 수도 있는 이들을 염두에 둔 답변이었다.
“줄곧 재즈 입문자의 눈높이로 글을 써왔어요. 대중적이거나 애호가가 많은 음악이 아니니까요. 그런데 이번엔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고 책을 냈어요. 때문에 어떤 글은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진지하게 볼 책은 전혀 아니고요. 짤막짤막한 단편 모음이니까 순서에 상관없이 제목 보시고 읽고 싶은 글 위주로 읽으시면 돼요. 독자가 ‘재즈가 들을 만한 음악인가보네? 재미있네?’ 정도의 호감을 갖는다면 더 바랄 게 없습니다.”
자신의 책처럼 쉽게 다가가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는 평소 “음악은 대충 듣는 것”이라 말해왔다. 집안일이나 식사를 하며 즐겨도 만족감을 준다는 데 그 이유가 있었다. 역설적으로 그 음악을 알려면 제대로 집중해 듣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덧붙였다.
“극장에서 다른 일 하지 않고 조용히 영화나 공연을 보는 것처럼, 음악도 30분이든 1시간이든 몰입해서 들어야 비로소 그 실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전까지는 좋아할 수는 있어도 잘 알지는 못하거든요. 가령 우리가 누군가를 두고 ‘그 사람 괜찮아’라고 하는 것과 ‘그 사람 잘 알아’라고 하는 게 다르듯 말이죠. 사람을 알아가려면 많은 얘기를 주고받으며 깊이 헤아려야 하는 것처럼, 음악도 제대로 알려면 많이 듣고 집중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익숙하고도 낯선 최고의 앙상블
그는 책에서 “진정한 재즈 팬이란 방금 탄생한 싱싱한 즉흥연주의 맛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라 일컬었다. 대화를 하면서 상대의 말투와 성격을 파악하듯, 즉흥연주를 통해 연주자의 개성과 매력을 느낄 수 있다는 것. 특히 즉흥연주 앙상블은 연주자 간의 익숙하면서도 낯선 호흡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재즈에서 앙상블은 지휘자가 정교하게 이끄는 합주와는 다릅니다. 모든 음이 기록된 악보에 맞춰 연주하는 것으로 완성도를 따지는 음악이 아니니까요. 재즈 뮤지션들은 악보에 쓰이지 않은 여백을 조화롭게 즉흥적으로 채워나가죠. 솔로에서는 연주자 개인의 개성을 보여줘야 하지만, 앙상블에서는 서로의 개성이 얼마나 어우러지느냐가 관건입니다. 뛰어난 재즈 뮤지션들은 상대의 연주에 귀 기울이고 그에 맞게 자신의 개성을 노련하게 드러내죠. 혼자만 돋보이려고 하다 보면 음악은 무너지고 말아요. 즉 상호 존중이 필요하죠.”
물론 지나친 배려 때문에 각자의 개성까지 잃어버리면 재즈의 맛은 떨어지게 마련이다. 그렇다고 무한대로 개성을 표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연주하는 곡의 화성, 박자 등 지켜야 할 최소한의 것들은 존재한다. 그는 느슨한 틀 안에서 적절히 개성을 발휘하는 것은 숙련된 연주자만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재즈 연주자들의 전성기는 대개 마흔이 넘어 옵니다. 어느 분야이든 자기 스타일을 완성하려면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젊은 시절엔 연주 테크닉만으로도 주목을 받지만, 나이 들어서도 같은 방식을 고수한다면 그건 퇴보라 할 수 있죠. 훌륭한 뮤지션들은 다른 연주자와 상호 작용하는 능력을 키우는 동시에 자신의 개성을 더 견고하게 만듭니다. 재즈 대가들을 보면 오히려 육체적인 힘은 떨어지지만 한 음을 눌러도 자기만의 세계를 딱 펼쳐내죠. 음악만 듣고도 누구의 연주인지 단번에 알아차릴 만큼이요.”
재즈의 즐거움은 재즈 그 자체
슬플 때 위로를 주는 음악이 있는가 하면, 즐거울 때 흥을 더해주는 음악도 있다. 또 젊어서는 별로였던 음악이 나이 들어 좋아지기도 한다. 이렇듯 감상은 자신의 기분이나 처지에 따라 달라진다. 그렇다면 재즈는 어떤 감정과 세대에 어울리는 음악일까?
“사실 재즈는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감정하고는 무관해요. 사람들은 음악을 통해 기분을 전환하고, 그 감정에 빠져들곤 하죠. 그러나 재즈는 음악 그 자체의 논리가 더 중요합니다. 애호가들이 재즈를 통해 느끼는 즐거움은 순전히 음악적인 교감에서 오는 거예요. 애초에 뮤지션들을 위한 음악으로 만들어져 발전했기 때문에 대중음악의 기능과는 거리가 멀죠. 재즈 뮤지션들은 자신이나 청중의 감정을 대변하기보다는 연주 자체의 재미를 전달하는 게 목적이거든요. 기쁘거나 슬프라고 들려주는 건 아니라는 얘기죠. 오히려 그런 점에서 어느 때고 평생 들을 수 있는 음악이 아닐까 싶어요.”
그래서일까? 20여 년을 재즈에 푹 빠져 살면서도 여전히 재즈에 관한 일을 할 때가 가장 즐겁다는 황덕호다. 30대에 시작한 KBS 라디오 ‘재즈수첩’ 진행도 어느덧 올해 20주년을 맞이했다. 재즈 프로그램이 거의 사라진 요즘, 매주 주말 단 2시간이라도 재즈를 들려줄 수 있어 다행이란다. 물론 그의 갈증을 해소하기에는 부족하지만 그나마 재즈 팬들에겐 가뭄 속 단비 같은 시간이다.
“만약 어느 채널에서 록 프로그램이 하나만 있는데, 일주일에 딱 2시간만 진행된다고 쳐봅시다. 그러면 비틀스와 롤링스톤스의 음악을 빠트릴 수 있을까요? 재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대표적인 곡들을 위주로 선곡하고 있습니다. 가급적 주어진 시간 안에 재즈의 명작들을 알려야겠다는 마음이 크죠. 물론 그런 기준으로 음악을 골라도 소스는 무궁무진해요. 시간이 부족해서 그렇지, 아직도 광산에는 금이 가득합니다.(웃음)”
탁월한 기획자였던 스티브 잡스는 훌륭한 예언가이기도 했다. 그가 스마트폰 다음으로 스마트TV를 구상했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일부에선 “컴퓨터와 모바일이 이토록 발달하고 있는데 TV라고? 사람들이 굳이 TV를 찾아보겠어?” 같은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나 그 의문을 비웃듯 그의 생각은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전 세계의 많은 IT 업체들이 향후 매출 성장의 동력으로 삼을 스마트TV 개발 기획과 전략을 제시하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IPTV가 가입자가 이미1400만 명을 넘어서며 새로운 TV 포맷을 통한 전성기를 맞이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생활의 일부가 된 IPTV, 앞으로 어디까지 진화할 것인가?
유료방송의 대명사인 케이블TV가 가입자 수 정체를 겪는 동안 IPTV는 2015년부터 2017년 말까지 무려 300만 명의 가입자를 더하며 가파르게 성장했다. 지난 3월 13일에 발표된 방송통신위원회의 ‘2018 방송시장경쟁상황평가’에 따르면. 2017년 말 기준 IPTV 가입자는 무려 1433만 명에 이른다. 이제 IPTV의 성공은 시대적으로 당연해 보인다.
시대가 선택한 IPTV
IPTV는 셋톱박스를 통해 시청자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콘텐츠를 볼 수 있게 하는 VOD(video on demand) 방식을 기본적인 특징으로 갖고 있다. 이는 과거보다 세밀한 소비자 맞춤형을 지향하는 시대의 필요에 걸맞은 방식이었으며 비디오테이프와 DVD 등의 역할을 대신하게 됐다. 그리고 TV 콘텐츠의 양방향성 시대를 열었다. 이제는 사실상 케이블TV 업체들도 IPTV와 비슷한 서비스를 제공하게 됨으로써 서로의 경계가 점점 사라지고 있는 상황이다.
인간의 생활 패턴을 볼 때 모바일이 개인성을, PC가 업무성을 충족시킨다면 가족 모두를 한자리로 모을 수 있는 TV는 모바일과 PC가 보장할 수 없는 커뮤니티성을 만족시킨다. 이는 가족이라는 개념이 흔들리는 현재에 가족의 가치를 찾아주는 사람들을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또한 IPTV는 셋톱박스를 설치해 화질 강화 및 소비자 맞춤형 편집 콘텐츠를 제공하는 등 TV의 고기능화를 지향함으로써 TV가 가진 홈서비스의 역량을 높였다. 인구 구조의 고연령화로 늘어난 시니어 세대는 모바일과 PC보다는 TV에 친숙함을 느끼기에 IPTV의 충성도 높은 소비자가 될 수 있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요소들이 겹쳐져 IPTV의 성장은 가능했다.
IPTV ‘삼국지’
현재 국내 IPTV 시장은 크게 세 개의 브랜드로 나눌 수 있다. KT의 올레tv, SK브로드밴드의 Btv, LG유플러스의 유플러스tv다. 이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브랜드는 올레tv로 가입자 수가 800만 명을 넘어섰다. 그다음으로 Btv와 유플러스tv가 경쟁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모바일 3사가 그대로 IPTV로도 옮겨온 모양새인데, 이는 IPTV가 인터넷 서비스가 기반이 되어야 가능한 시스템이기에 그렇다. 자연스럽게 모바일 무선망 서비스 연계까지 가능해진 것은 이 때문이다. 다만 모바일 업계 2위인 KT가 IPTV에서는 1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특별해 보인다. KT의 IPTV 역사는 길게는 2004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초창기에는 VOD 서비스만 하다가 2008년에 3사 중 국내 최초로 IPTV 상용 서비스를 시작했고 2010년부터는 군대에 보급하기 시작하면서 업계 선두를 차지할 수 있었다. 단 보급률 차이와는 별개로 콘텐츠의 양이나 메뉴 구성을 볼 때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는 곳은 없이 각 업체들이 상향평준화되어 비슷한 양태가 되고 있다는 의견들이 있다.
현재 IPTV 업계는 다른 업체들과의 차별화를 위해 맹렬한 콘텐츠 확보 전쟁을 벌이는 중이다. 1400만 명이 넘는 소비자의 다양한 취향을 만족시킬 수 있는 다양한 종류의 콘텐츠를 많이 보유하는 것이 매체의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 거대한 시장은 콘텐츠 제작자 입장에서도 매력적이다. 양질의 콘텐츠를 만들어 제공하면 과거에 비해 긴 유통기한으로 지속적인 매출을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 치열해진 콘텐츠 확보 전쟁
그러나 양질의 콘텐츠를 원하는 대로 창출해내는 도깨비방망이는 없다. 한정된 시간과 예산이라는 문제로 발목이 잡히는 경우가 많다. 공급자와 제작자의 이러한 사정은 복잡한 관계를 만들어낸다. 각 업체가 독점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콘텐츠 확보에 주력하면서도 잠재적 경쟁 관계에 있는 상대와 ‘적과의 동거’를 하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세계 최대의 글로벌 스트리밍 기업인 넷플릭스는 막강한 콘텐츠 제작 역량, 엄청난 콘텐츠 수, 충성도 높은 유저들의 보유로 IPTV의 미래를 위협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통신망이나 하드웨어 서비스를 갖지 못해 PC로는 서비스가 가능하지만 TV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넷플릭스는 우선 케이블TV인 딜라이브, 헬로CJ와 콘텐츠 제공 제휴를 맺어 IPTV 업계를 압박하고, 이어서 IPTV 업체인 유플러스tv와도 손을 잡았다. IPTV 후발주자인 유플러스tv 입장에서는 부족한 콘텐츠를 채우고 넷플릭스의 인지도를 가져올 수 있으므로 손해 볼 게 없는 상황이다.
넷플릭스의 국내 방송 시장 장악을 우려하는 지상파 방송사들은 이러한 협력 상황에 반발했다. 지상파 방송사들도 IPTV에 콘텐츠를 제공하고 있기에 넷플릭스의 IPTV 진입은 큰 위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지상파 방송사들은 과거에 넷플릭스에 자사 제작 드라마를 공급한 적이 있으며 올해 하반기에도 공급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으로는 넷플릭스에 대항하는 지상파 공동 콘텐츠 플랫폼을 구축하는 중이다. IPTV 시장에서 적과 동지의 경계가 얼마나 복잡하게 이뤄지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5G, IPTV의 도약을 꿈꾸게 하다
안방이나 거실에서 가장 오랜 시간 TV를 즐기는 50대 이상 중장년층을 위한 서비스도 대폭 업그레이드되고 있다.
LG유플러스의 ‘브라보라이프’, KT의 ‘룰루낭만’, SK브로드밴드의 ‘시니어클럽’은 모두 시니어를 위한 맞춤형 IPTV 서비스로 콘텐츠의 다변화를 통해 건강, 여행, 취미, 제2인생 등 관련 정보를 모아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미디어 서비스의 저변에는 은퇴 후 적극적으로 배움과 즐김을 향유하며 제2인생을 준비하려는 시니어 고객을 확보하겠다는 공략이 숨어 있다.
IPTV는 올해부터 시작되는 이동통신기술 5세대에 속하는 5G 시대를 맞이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이동통신기술이 0G에서부터 시작해 5G까지 오는 동안의 양상에 대해선 다양한 측면을 논할 수 있겠지만, 간단하게 보면 ‘더 빠르게, 더 넓게, 더 다양하게 전파가 가능하게끔’ 확장적이고 고성능적으로 통신이 발전했다고 보면 된다. 현재 그 최전선에 이른 5G 시대는 기존보다 다양한 통신기기 사용을 가능하게 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에 따라 인터넷에 접속만 하면 자신의 데이터를 이용할 수 있는 클라우드 서비스가 더 용이해지고 사회 전방위적으로 적용 가능한 사물인터넷 시대가 열릴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IPTV는 셋톱박스를 더욱 고기능화, 다양화함으로써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 발맞춰 나가고 있다. 기존의 셋톱박스는 유선 케이블 연결로 이뤄졌으나 이제는 무선 셋톱박스로의 이행이 가능해진 상황이다. KT는 AR(augmented reality, 증강현실) 기술을 접목한 ‘AR쇼룸’ ‘나를’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이는 IPTV 셋톱박스와 연동한 모바일 앱으로 홈쇼핑에서 방송하는 상품을 모바일과 TV 화면에 3D로 구현하는 실감형 콘텐츠다. SK는 셋톱박스에 클라우드 기술 적용을 통해 B2C(business to consumer) 통합 서비스를 제공하고 장기적으로는 기존 PC를 클라우드 PC로 대체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LG는 무선으로 IPTV 서비스가 가능한 셋톱박스 일체형 단말기 ‘U+tv 프리’를 출시했으며 구글과의 기술 협업도 진행하고 있다.
IPTV는 단순히 TV 기능의 향상, 콘텐츠 제공을 넘어 5G 시대를 맞아 다양한 디바이스들과의 합종연횡을 통해 산업을 선도하는 경제적 툴로 발전하는 중이다. 현재 가장 실적이 확실하게 나오며 급격히 성장하는 IPTV 시장을 둘러싼 국내외 기업들 간의 ‘왕좌 게임’은 향후 스마트홈 서비스에서 TV가 차지할 가치를 먼저 확보하기 위한 기술 헤게모니 다툼이기도 하다. 이미 1400만 명이라는, 그리고 곧 1500만 명이 될 막대한 숫자로 만들어진 도화지가 있다. 이제 여기에 5G라는 붓이 어떤 그림을 그려낼지 주목할 시점이다.
휴일 오전, 전철 1호선을 타고 종착역인 인천역으로 간다. 한산한 전철 안에서 시간여행자가 되는 상상을 한다. 인천역 앞에 있는 화려한 패루를 통과하면, 1800년대 말 인천 개항 시절의 풍경이 펼쳐지는 상상 말이다. 실제로 패루 너머에 근대건축물이 많이 남아 있다. 그곳에 새겨진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의 시간을 되짚어보면, 나도 모르게 근대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고 만다.
걷기 코스
전철 1호선 인천역▶ 제1패루▶ 차이나타운▶ 선린문(제3패루)▶ 자유공원▶ 제물포구락부▶ 청일조계지 경계계단▶ 인천 중구청(옛 일본영사관)▶ 중구생활사전시관▶ 인천개항박물관(옛 인천일본제1은행)▶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옛 인천일본18은행지점)▶ 신포시장▶ 답동성당▶ 애관극장▶ 싸리재 카페▶ 전철 1호선 동인천역
인천 개항과 함께 형성된 화교 마을
1883년 인천 개항 후 청국인, 일본인, 러시아인, 독일인, 영국인들이 앞다퉈 제물포(지금의 인천항)로 몰려왔다. 항구 일대에는 각국의 조계지가 형성되었다. 최초의 근대식 공원, 극장, 학교, 호텔, 은행과 같은 서양식 근대건축물도 세워졌다.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 철도, 시외전화, 화폐, 구두, 등대, 담배 성냥, 축구, 야구 등 해외 문물도 물밀듯 들어왔다. 이 시절의 흔적이 제물포와 가까웠던 지금의 인천시 중구에 오롯이 남았다. 그 자취를 찾으며 질풍노도 같았던 인천의 근대사를 돌아본다.
출발지인 인천역부터 특별하다. 인천역은 1899년에 개통한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의 시·종착역이었다. 인천역에서 서울 노량진까지 우마차나 수로로는 반나절 이상 걸릴 길을 열차로 한 시간 만에 갔다고 하니, 당시 사람들에게는 신세계나 다름없었겠다.
인천역 광장 맞은편에는 중국 산둥성 웨이하이 시에서 기증한 패루가 화려한 단청을 뽐내며 서 있다. 패루 사이로 차이나타운의 ‘T’자형 대로가 보인다. 차이나타운 골목마다 붉은색으로 치장한 대규모 중식당과 중국 간식 상점, 기념품점이 즐비하다. 인천 차이나타운은 개항 후 중국 산둥성에서 건너온 화교들이 살기 시작한 곳이다. 이때 정착한 화교들이 중국요리점을 열고, 한국인 입맛에 맞는 자장면을 개발했다고 한다. 자장면의 대명사로 불렸던 ‘공화춘’의 우희광 씨는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1983년에 문을 닫은 공화춘은 30년 뒤인 2012년에 ‘짜장면박물관’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 옛날 공화춘의 인기는 신승반점, 만다복, 연경, 중화원 등이 잇고 있다. 차이나타운에서 중국 요리 외에 화덕 호떡인 옹기병과 월병, 홍두병, 공갈빵 같은 중국 전통 간식도 재미 삼아 먹어볼 만하다.
뜨거운 옹기병을 뜯어 먹으며, 차이나타운 중간 지점에 있는 선린문(제3패루)으로 향한다. 3개의 계단을 지나 마지막 계단 위에 우뚝 세워진 선린문은 차이나타운 최고의 포토존이다. 선린문을 통과해 다시 계단을 조금 오르면 자유공원 입구와 만난다. 왼쪽 길에 초한지 벽화 골목이 있고, 오른쪽 길은 자유공원 산책로와 연결된다.
우리가 알아야 할 인천 근대사 이야기
자유공원은 1888년 응봉산에 건립된 국내 최초의 서구식 근대공원이다. 공원 초입에 있는 석정루에 올라 인천 앞바다와 월미도를 조망하고, 한미수교 100주년(1982년)을 기리는 기념탑과 한국전쟁 영웅으로 알려진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둘러본 뒤, 제물포구락부로 이동한다. 제물포구락부는 자유공원과 이어진 계단 중간에 있다. 이곳은 개항 당시 제물포에 거주했던 독일, 미국, 러시아, 일본인들의 사교장이었다. 하얗게 회칠한 외벽과 고풍스러운 홀이 인상적이다. 제물포구락부와 청일조계지 경계 계단도 거리가 가깝다. 이 계단은 일본과 청나라가 각각 조계지를 설정하고, 영역을 구분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계단을 경계로 북성동 쪽은 청나라의 차이나타운이, 신포동 쪽은 일본 건축물이 들어섰다. 계단 양쪽에 세운 석등조차 중국식과 일본식으로 구별돼 있다. 계단 상단의 공자상도 중국 쪽으로 약간 치우쳐 세워졌다. 외국인들이 조선 땅을 땅따먹기하듯 갈라놓은, 어처구니없는 역사의 현장이다.
청일조계지 계단을 내려와 왼쪽, 중구청(옛 일본영사관)으로 가다 보면, 일본 적산가옥과 일본제1은행, 구 일본18은행과 같은 근대건축물이 모여 있는 개항장 거리를 만난다. 차이나타운처럼 이국적인 분위기다. 거리 입구에 있는 중구생활사전시관은 1888년에 개업한 국내 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대불호텔의 외관을 되살려 지은 건물이다. 귀부인이 머물렀을 법한 객실과 1960~70년대 인천 중구의 의식주 생활공간을 실감나게 재현했다. 나무 전봇대가 세워진 골목길과 문방구, 백항아리집(선술집), 극장, 다방, 의상실, 이발소 등 추억을 부르는 풍경이 마냥 반갑다.
전시관 옆 개항박물관은 옛 일본제1은행을 개조한 것이다. 1883년에 건축한 르네상스풍의 석조 건물로서 일본영사관의 금고 역할을 했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들어온 우표와 우편물, 우체통, 전보와 전화기, 경인선 기관차 모형 등을 전시하고 있다. 같은 라인에 있는 근대건축전시관은 일본제18은행 건물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나가사키 상인들이 상해에서 수입한 영국 면직물을 한국에 수출해 큰 이익을 얻자, 인천에 은행 지점을 세운 것이다. 이곳에서 개항장 일대에 현존하는 근대건축물과 소실된 건축물의 모형을 볼 수 있다.
인천과 서울을 연결했던 싸리재 고갯길
개항장 거리를 지나 먹거리 성지인 신포국제시장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신포시장은 인천 개항 이후 형성된 인천 최초의 근대적 상설시장이다. 19세기 말 화교 농민들이 산둥성에서 채소 씨앗을 가져와 키워 시장에 내다 판 것이 신포국제시장의 시초라고 한다. 역사가 깊은 만큼 먹거리도 풍성하다.
쫄면의 탄생지도 신포시장이며, 신포순대, 신포만두의 고향도 이곳이다. 주먹으로 깨 먹는, 단단한 공갈빵과 매콤한 맛을 강조한 신포 닭강정의 인기는 말할 것도 없다. 닭강정을 사려는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골목 안이 새까맣게 보일 정도다.
시장 골목 끝에서 길 하나만 건너면 국내 성당 중 가장 오래된 답동성당과 국내 최초의 극장인 애관극장을 만날 수 있다. ‘보는 것을 사랑한다’는 뜻을 지닌 애관극장은 1895년에 ‘협률사’라는 이름으로 설립됐다. 1920년대부터 애관극장으로 불리며, 복합상영관이 주름 잡는 이 시대에도 꿋꿋하게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시설은 여느 극장과 비슷하고, 상영작도 같다.
흐뭇한 마음으로 애관극장을 구경하고, 동인천역으로 내려가는 고갯길, 싸리재를 걷는다. 옛날에 이 길에 싸리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지금은 낙후한 거리가 되었지만, 1920년대 말부터 70년대까지만 해도 병원, 한약방, 약국, 양화점, 포목점 등이 즐비했던 곳이다. 서울 명동 못지않은 상권을 자랑했다고. 옛날 양복점과 병원 건물과 기록 사진만이 싸리재의 옛 영화를 증명한다.
최근, 뉴트로 열풍에 힘입어 싸리재의 아날로그 정취가 돋보인다. 그 중심에 ‘싸리재’ 카페가 있다. 지은 지 90년 된 목조 카페에서 노부부가 커피를 내린다. 카페 안쪽에는 노부부의 100년 된 한옥 살림집이 있다. 음악에 조예가 깊은 부부는 수집한 축음기로 레코드판 음악을 들려준다. 마침 퀸의 ‘보헤미안랩소디’가 흘러나와 한껏 흥에 젖는다. 바리스타인 박차영 대표에게 메뉴 추천을 부탁하니 자신이 개발한 ‘커피봉봉’과 ‘싸리재’를 권한다. 모든 커피를 모카포트로 내려준다. 쌉싸래한 에스프레소와 달콤한 연유, 촉촉한 생크림의 조화가 감미롭다. 싸리재의 빈티지한 분위기와 포근하게 손님을 맞이하는 노부부가 두고두고 기억날 것 같다. 싸리재 카페에서 동인천역은 멀지 않다. 전철을 타기 전에 송현동 순대 골목이나 화평동 냉면 거리, 동인천 삼치 거리에서 요기를 해도 좋겠다.
주변 명소 & 맛집
신승반점과 명월옥
공화춘은 1983년에 폐업했으나 우희광 씨의 자손들이 공화춘의 손맛을 이어가고 있다. 우희광 씨의 외손녀가 운영하는 신승반점이 그곳. 신승반점의 인기 메뉴는 돼지고기와 채소를 갈아 춘장과 볶은 유니자장면이다. 달지 않으면서 감칠맛 나는 자장 소스와 부들부들한 면발이 입맛을 당긴다. 흰 자장면이 궁금하다면 만다복(032-773-3838)을, 맛있는 짬뽕을 먹고 싶다면 복림원(032-773-8778)을 추천한다. 한식은 신포시장 가는 길목에 있는 백반식당, 명월집이 잘한다. 1966년에 개업한 식당이다. 7000원짜리 백반에 밑반찬만 열 가지. 여기에 곤로 위에서 푹 끓인 돼지김치찌개와 누룽지도 양껏 먹을 수 있다.
신승반점 인천 중구 차이나타운로44번길 31-3, 매일 11:00~21:00
명월옥 인천 중구 신포로23번길 41, 07:30~19:30(일요일 휴무)
송월동 동화마을
송월동 동화마을은 차이나타운과 이어져 있다. 2013년 마을 주거환경개선사업을 통해 세계명작동화를 주제로 마을을 예쁘게 꾸몄다. 입구의 아치문을 통과하면, 알록달록한 동화 속 세상이 펼쳐진다. 골목마다 도로시길, 빨간모자길, 전래동화길 등 테마가 있다. 동화 캐릭터 입체 조형물이 많아 곳곳이 포토존이다. 이 마을이 개항기 때 독일, 일본, 프랑스인들이 살았던 부촌이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인천 중구 자유공원서로37번길 22(연중무휴)
짜장면박물관
1908년 차이나타운에 개업한 중식당, 공화춘의 내부를 개조해 2012년에 개관했다. 전시물을 통해 화교와 자장면의 탄생기, 전성기, 자장라면의 역사 등을 알 수 있다. 1930년대 공화춘 접객실, 1960년대 공화춘 주방을 실제 크기로 재현했다. 졸업식이나 운동회 날에 부모님과 자장면을 먹으러 갔던 추억이 떠오른다. 공화춘 건물은 중국 산둥 지방의 장인이 참여해 중국식으로 지었으며, 2006년에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인천 중구 차이나타운로 56-14, 09:00~18:00(월요일 휴관)
걷기 Tip
❶ 차이나타운은 골목이 많으므로 인천역 앞에 있는 관광안내센터에서 지도를 받아, 갈 곳을 미리 표시해두는 게 좋다. 송월동 동화마을을 코스에 넣는다면, 맨 먼저 들르자.
❷ 신포시장까지만 걷는다면, 수인선 신포역에서 전철을 타면 된다.
❸ 개항박물관, 짜장면박물관, 중부생활사전시관, 근대건축전시관, 한중기념관 등 5개 전시관 통합관람권을 구매하면 입장료를 아낄 수 있다. 통합관람권 어른 3400원. 매달 마지막 수요일 문화의 날에는 입장료 무료.
낡고 늙음이라는 고정 관념을 끊어내고 시니어 모델로 생애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한 두 사람을 만났다. 시니어 모델 최초 서울 패션위크 무대에 오른 소은영(제이액터스·75) 씨와 최근 핫한 모델 김칠두(더쇼프로젝트·64) 씨다. 늦은 데뷔이지만 내공 가득 담아 시니어의 멋과 아름다움을 알리고 있는 두 사람. 그들만의 패션 포인트와 패션 피플로서의 삶을 엿봤다.
인생, 이러니 참 살아볼 만하지 않은가.
최근 SNS를 보다 보면 신인 모델이라는데 하얗게 세어버린 긴 머리와 수염 덥수룩한 사나이가 눈에 띈다. 패션모델 데뷔 1년차 김칠두. 시니어 모델이라기보다는 아주 늦게 데뷔한 신인 모델로 이름을 알리고 있다. 인스타그램 팔로우 16만 명이 훌쩍 넘은 지도 오래. 그의 SNS에 쓰인 젊은 팬들의 댓글을 보면 중후함에서 나오는 특별한 스타일에 대한 칭찬 일색이다.
원래부터 내가 제일 잘나갔다
실제로 얼굴을 마주하면 머리에 ‘잘생겼다’란 네 글자가 박힌다. 환갑이 훌쩍 넘었고 조만간 어르신 교통카드도 나온다는데 멋짐 폭발은 감출 수가 없다. 호피 무늬 아우터에 챙 넓은 중절모, 긴 수염 휘날리며 압구정 거리를 걸으니 런웨이가 따로 없다. 모델 워킹 수업 세 번 만에 2018년 F/W 헤라서울패션위크 키미제이(KIMMY.J) 모델로 섰다는데 어느 별에서 왔는가.
“젊었을 때는 집에서 혼자 포즈 연습 좀 했습니다. 그래서 무대에 서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알아주는 사람이 많더라고요.”
알고 보니 20대 초반 무교동의 한 의상실에서 2년여 일했던 경험이 있다고. 옷에 대한 관심 혹은 옷 잘 입게 된 계기를 물으면 그 시절로 자꾸 거슬러 올라간다고 했다.
“당시 패션 스타일을 배우면서 일했어요. 앙드레 김 선생님이 나오신 국제복장학원도 좀 다녔고요. 그때가 기성 제품이 나오기 시작할 무렵이었습니다. 의상실 경기가 하락세여서 2년만 하고 일을 그만뒀죠. 원래 패션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가정 형편상 복장학원을 더 이상 못 다녔지만 관심은 늘 패션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패션 쪽 일을 그만두고 나니 그 후로 모델에 관심이 생기더군요. 모델 경연대회에 나가서 입상도 했죠. ㈜태창 전속모델로 뽑히기도 했습니다.”
패션모델로 활동할 수 있는 길이 열렸지만 이번에도 그는 꿈을 접어야 했다.
“먹고사는 게 바빴거든요. 그 당시의 모델은 돈 없으면 못하는 직업이었어요. 결혼하고 나서 여유가 생겨서 남대문 커먼플라자에서 여성의류 도매 장사를 했어요. 제가 직접 디자인을 해서요. 그때만 해도 전문모델이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옷 잘 입는 비결 따로 있다
어렸을 때부터 꿈을 품고 있었으니 패션 센스는 자연스레 장착됐을 뿐이다. 옷이건 액세서리건 김칠두 씨가 고르고 찾아서 입었다. 대부분 가정에서 남편 옷 고르는 임무가 아내 몫인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저는 저만의 코디를 합니다. 주로 흰색을 좋아해서 입고 말이죠. 옷 잘 입는 방법은 자기 스스로 감각을 키우는 거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지 않나요? 저는 잡지나 영화를 많이 봐요. 요즘은 인스타그램에도 정보가 많이 올라오니까 눈길이 가는 스타일은 한참 보면서 숙지합니다. 트렌드를 체감하려고요.”
TPO(시간·장소·상황)에 관한 언급도 잊지 않았다.
“상황에 따라 옷을 맞춰 입는 거도 중요하죠. 모델하기 전에 식당을 할 때는 머리도 길고 해서 주로 개량한복을 입고 일했습니다. 고깃집이나 한식당을 주로 해왔으니 분위기를 맞춘 거죠. 지금과 같은 캐주얼은 입기 힘들었어요. 마른 체격을 고려해서 풍성한 옷을 자주 입습니다. 바지는 통은 넓지만 밑이 좁아지는 것을 고릅니다.”
환갑 넘어 패피에 합류하다
그의 패션 화보를 보면 나이가 무색할 정도다. 10대 후반에서 30대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인터넷 쇼핑몰, 여성 잡지 등에서도 그의 이미지를 원한다.
“원래 옷 선택할 때 시니어용, 주니어용 가리지 않아요. 요즘 트렌드에 맞춰서 입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브랜드를 입어보는 게 아니라 제 스타일의 옷들이니 새로울 게 없죠. 화보 촬영 전에 콘셉트 등에 대해 사진작가와 얘기를 나눠요. 또 작가들이 뭘 원하는지 저 스스로 콘셉트를 찾고 빠르게 숙지하려고 합니다. 룩북(화보) 촬영이 너무 좋아요. 힘들지 않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많은데 아직은 좋은 것들뿐입니다.”
‘패완얼’ 김칠두
최근 건강관리를 위해 요가를 시작했다는 김칠두 씨. 먹어도 찌지 않는 체질이기에 특별히 운동을 해본 적은 없단다.
“몸 관리라는 거 안 해봤어요. 소속사 아카데미에 일주일에 두 번 나와서 워킹과 동작 등을 반복해서 연습하고요. 소속사 대표님과 지인들이 요가를 권해서 배우게 됐죠. 제 나이에 피트니스센터에서 무거운 거 드는 거보다 훨씬 좋겠더라고요.”
모델 일과 몸 관리를 하면서 쇼핑도 꾸준히 한다. 평택에서 살다 재작년 말 서울로 이사 오면서 동묘 지역을 선택했다.
“그곳에 옷들이 많잖아요. 제가 워낙 좋아하니까 이사도 그곳으로 했습니다.”
마지막 질문은 바로 이거였다. 스스로 잘생겼다고 생각하는지?
“네.(웃음) 잘생겼다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우리 연배에 나만큼 잘생긴 사람 별로 못 봤어요. 너무 자화자찬했나요?”
그렇다.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다.
낡고 늙음이라는 고정 관념을 끊어내고 시니어 모델로 생애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한 두 사람을 만났다. 시니어 모델 최초 서울 패션위크 무대에 오른 소은영(제이액터스·75) 씨와 최근 핫한 모델 김칠두(더쇼프로젝트·64) 씨다. 늦은 데뷔이지만 내공 가득 담아 시니어의 멋과 아름다움을 알리고 있는 두 사람. 그들만의 패션 포인트와 패션 피플로서의 삶을 엿봤다.
인생, 이러니 참 살아볼 만하지 않은가.
Q. 패션에 관심이 많았나?
처음부터 옷을 잘 입었던 건 아니다. 어렸을 때 동생이 그림을 그렸는데 옆에 있다 보니 색 배합에 관심이 생겼다. 일본에서 들여온 패션 잡지도 오래전부터 봐왔다. 그러다가 옷에 관심이 많아졌다. 친구들이 치마나 바지를 못 입겠다고 하면 수선집에 가지고 가서 새로운 옷으로 만들어 입었다. 집 앞에 나갈 때 그냥 나가는 법이 없다. 어디를 가도 단정하게 챙겨 입고 나간다. 젊은 시절의 옷도 장롱에 그대로 있다. 가끔 입고 나가면 그때처럼 마음이 젊어지는 느낌이다. 시니어 모델로서 늘 당당하게 옷을 입는다.
Q. 모델은 언제부터 시작했나?
일흔두 살에 시작했으니 올해로 4년 차다. 어렸을 때 배우 김지미 씨가 나를 동생같이 예뻐했다. 탤런트가 되고 싶었는데 집안이 엄해서 평생 전업주부로 살았다. 일흔이 넘어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 고민했다. 집에 앉아서 TV 보고, 친구 만나서 밥만 먹을 수는 없어서 나만의 길을 찾아보려고 했다. 탭댄스와 한국무용을 배워봤는데 적성에 맞지 않았다. 인터넷 검색으로 내 나이에 할 만한 활동들을 찾아봤다. 그러다가 시니어 모델 전문 교육기관인 제이액터스를 알게 됐다. 내가 젊은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을까? 초반에 걱정이 좀 됐지만 잘할 자신이 있었다. 정말 열심히 했다. 딱 내 일이다 싶었다. 모델계에 발을 내딛는 순간 내 도전도 시작됐다. 재밌다.
Q. 나만의 원포인트 패션 비법이 있다면?
단연 스카프다. 대형 박스 2개에 스카프가 가득 들어 있다. 셀 수 없이 많다. 옷을 입을 때 스카프를 늘 염두에 두고 스타일링을 한다. 액세서리도 원래 크거나 화려한 것을 안 했는데 도전해보고 있다. 깔끔하고 캐주얼한 옷을 많이 입는다. 남들은 못 입어도 나라면 소화할 수 있는 옷이 좋다. 스카프도 매보면서 말이다. 스카프 하나로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지기도 하니 정말 좋은 패션 아이템이다. 친구들 옷을 가끔 골라주면 친구 남편들이 더 좋아한다. 옷을 고를 때 나이 고려는 안 해봤다. 브랜드도 전혀 신경 안 쓴다. 단돈 1만~2만 원짜리도 내가 입으면 남들이 명품이라고 생각한다.
Q. 시니어 모델 최초 타이틀이 있다던데?
2017년 서울패션위크 박종철 디자이너 무대에 섰다. 시니어 모델로는 최초였다. 시니어 모델의 무대 위 워킹과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하다며 오디션에 붙여주셨다. 다 남자 모델이었고 여자는 나 하나였다. 12cm 킬힐을 신고 런웨이에 설 생각을 하니 앞이 캄캄했다. 청심환을 먹고 겨우 오를 수 있었다. 지금도 계속 무대에 서고 있다.
Q. 체력 관리는 어떻게 하는가?
모델 일을 한다고 해서 급격하게 살을 뺀 적은 없다. 내 생각에 다이어트가 좀 필요하다 싶을 때는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운동한다. 지금까지 살면서 체중이 50kg을 넘어본 적이 없다. 아침에 일어나면 꼭 스트레칭을 하고 한 시간 정도 되는 거리는 무조건 걷는다. 앉았다 일어났다 하면서 하체 근력을 키우는 스쿼트는 아침저녁으로 50번 씩, 하루 100번은 꼭 채운다. 피트니스센터는 성격에 맞지 않아 깨끗하고 좋은 목욕탕을 찾아 일주일에 세 번, 3시간 정도 있다 온다. 물속에서 걷고 스트레칭도 하고 말이다.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서 7시 반에는 꼭 잘 차린 아침식사를 한다. 자기 관리가 철저한 편이다.
Q. 모델로서 도전하고 싶은 스타일은?
시니어 모델 하면 단연 카르멘 델로피체 아닌가. 나는 일흔이 넘었는데도 흰머리가 안 난다. 그녀처럼 해보기 위해 탈색을 했다. 이제 머리를 좀 길러 제대로 스타일링을 해보고 싶다. 국제무대에도 나갈 수 있다면 도전해보고 싶다. 한국을 대표해서 어디든지 가고 싶은 의욕은 많다. 기대나 희망이 없으면 어떻게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나이 핑계는 대고 싶지 않다. 큰 무대에 서보고 싶어 건강관리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이제는 나를 위해 살 시간이다. 내 인생을 어떻게 끝까지 마무리하느냐, 그것이 중요하다.
이토록 유쾌한 웃음과 유머가 자연스럽게, 핑퐁게임하듯 오간 자리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가요계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아이돌’ 조정현, 송시현, 이범학이 이제 중년이 되어 우리들에게 돌아왔다. 그간 노래와 삶과 추억을 공유하며 살아온 이들은 의기투합해 세대를 아우르는 청춘 콘서트를 준비하고 있다. 오십 중반이 됐어도 여전히 맑고 청년다운 기운이 넘실대던 그들과의 인터뷰.
조정현, 송시현, 이범학을 공통적으로 아우르는 표현으로 뭐가 어울릴까. 이들이 활동했던 장르는 정통 포크도 아니고 발라드도 아니고 댄스는 더욱 아니다. 그 모든 것들이 조금씩 섞여 있으면서도 도시적 세련미를 갖고 있다. 듣자마자 바로 와 닿는, 스며들기 좋은 노래들이라고나 할까. 한국 대중가요를 말할 때 컨템포러리로서 분명한 계보를 가진 이들이다.
19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까지 가요계를 사로잡았던 세 명이 최근 뭉쳤다. 함께 콘서트를 열기 위해서다. ‘그 아픔까지 사랑한 거야’로 변진섭과 최성수를 제쳤던 조정현의 목소리로 인터뷰가 시작됐다.
세 가수들의 의기투합
“송시현이 나를 만나고 싶어 했고, 나는 돌파구가 필요했어요. 그래서 만났죠. 보통 음악하는 사람을 보면 자기애가 굉장히 강한데, 대화를 해보니 진실성이 느껴졌어요. 그래, 같이 앨범을 만들어보자 했고 바로 그렇게 결정된 거예요.”
가수 이선희의 지원으로 1987년 ‘꿈결 같은 세상’을 발표하면서 히트 가수가 된 송시현과 조정현의 만남. 그리고 이 둘의 인연에는 1991년에 ‘이별 아닌 이별’을 발표하며 에너지를 태우던 이범학이 있었다.
“정현이 형과는 고교 선후배 사이예요. 시현이 형은 한창 활동할 때 공연장에서 자주 본 사이였고요. 그러다 보니 굉장히 친해졌죠. 셋은 그렇게 잘 알고 있는 관계였어요.”
이범학은 최근 활동을 같이했던 사람들이 다시 만나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그래서 조정현에게 콘서트를 함께하자고 제안을 했다. 문제는 이범학의 계획으로는 세 명이 모여서 하고 싶었는데 나머지 한 명이 섭외가 안 되는 상태였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정현이 형과 시현이 형 두 분이 함께 앨범을 만든다고 해서, ‘잘됐다’ 싶었죠. 올해 이렇게 셋이 함께 앨범을 준비할 수 있어 너무 좋아요.”
더 나은 세상을 꿈꾸게 된 송시현
그동안 많은 세월이 지났다. 청춘의 아이콘처럼 여겨졌던 이들도 이제 50대 중반의 나이가 됐다. 이범학은 20대에는 노래를 아무 생각 없이 불렀던 거 같다고 말했다.
“때로는 올라가고 싶지 않은 무대에도 서고…. 노래에 절실함이 없었던 거 같아요. 지금은 세월이 담기게 됐죠. 그러면서도 정현이 형도 시현이 형도 저도 변하지 않은 게 좋아요. 그렇게 다시 만나게 된 우리들의 케미가, 그동안의 인생 등 많은 걸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송시현은 지금까지 직업란에 가수라고 써본 적이 없다고 고백했다. 의외였다.
“저는 어릴 때부터 지휘자, 작곡자가 꿈이었죠. 그러다 이선희 씨에게 곡을 줬는데 ‘이건 네가 부르니 더 좋다, 음반 한번 내볼래?’ 해서 본의 아니게 가수가 된 거예요.”
시집도 여러 권 낸 송시현의 노래들은 개인의 내밀한 감정을 잘 표현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노래를 부른다기보다는 세상과 사람들과 내 생각을 교감하기 위해서’ 그 시절 활동을 했다고 말한다.
“나이가 들면서 달라진 건 노래의 힘에 대해서 좀 더 큰 확신을 갖게 됐다는 거예요. 우리가 부르는 노래가 사회와 나라와 구성원들을 좀 더 정의롭고 나은 방향으로 데려가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열심히 사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음악을 해야겠다는 마음도 컸죠. 두 사람을 만났으니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노래 없이는 살 수 없었던 이범학
송시현의 고백으로 인터뷰는 그들의 꿈에 대해 묻는 쪽으로 흘러갔다. 이범학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가수가 되고 싶었다고 말했다.
“고2 때부터 밴드를 했고 끊임없이 노래를 만들었죠. 사실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것도 가수가 되기 위해서였어요. 철학이 담긴 가사를 써보고 싶었거든요. 개론부터 낙제를 받긴 했지만.(웃음) 지난 20년 동안 중간에 뮤지컬도 했고요. 모든 목적은 ‘앨범을 내야겠다’였어요. 그러다 본의 아니게 ‘이대팔’을 하게 됐는데….”
‘이대팔’은 록커의 피가 흐르는 이범학이 트로트를 부르겠다며 내놓아 화제가 된 노래다. 2012년의 일이었다. 그는 그 노래에 대해 손사래를 쳤다.
“당시 매니지먼트가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죠. 하면서도 ‘이건 내 길이 도저히 아니다’ 싶었어요. 그래도 노래가 나름 알려져 공연장에 가면 사람들이 불러달라면서 ‘이대팔’ 앙코르를 외쳐요. 그래도 절대 안 불렀어요.(웃음)”
조정현의 꿈은 아이스하키 선수였다고 한다. 중1 때 가수로 바뀌었지만, 그의 아이스하키 선수로서의 경력이 국내 최초의 아이스하키 드라마 ‘아이싱’에 자리를 마련하게 했다.
“‘마지막 승부’를 연출한 PD 장두익 형이 후속편을 준비하면서 저랑 얘기할 일이 있었어요. ‘정현아, 내가 드디어 아이스하키 드라마를 만들 것 같아’ 하더라고요. 아이스하키협회에서는 난리가 났죠. 무조건 도운다고. 저는 주연 장동건을 키우는 선배 역할을 맡게 됐죠. 대사가 많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중간에 작가와 좀 틀어진 일이 있었어요. 그래선지 갈수록 대사가 줄더라고.(웃음)”
조정현, 세월의 아픔을 품다
노래로 정상에 서보고 당대 최고의 PD가 만드는 드라마에서도 비중 있는 역할을 맡았다. 아이돌 연예인으로서 성공적인 삶의 흐름이었던 셈이다. 그랬던 조정현이, 어느 날 우리들 앞에서 사라졌다. 가수생활을 하면서 겪은 안 좋은 일들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너무 상처를 받아서 더 이상 가수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함께 자리한 매니저는 “정현이가 개인적인 문제가 없었으면 립서비스가 아니고 정말 큰 가수가 됐을 것”이라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당시 대형 레코드사와 송사에 휘말렸던 것이다.
“제작사와 소송이 있었습니다. 긴 싸움이다 보니 다른 제작사와 스튜디오에서 못 받아주는 상태가 됐어요. 음악을 포기하고 미국을 갔죠. 그러다 다시 돌아와 2집 앨범 ‘비애’를 냈는데, 성공했어요. 문제는 그 과정에서 대학교 친구와 초등학교 친구 둘을 잃어버려야 했죠. 이 일은 나랑 안 맞는가보다 싶었죠. 그래서 3집은 녹음하고도 안 냈어요.”
속사정을 알고 있는 이범학이 “그 아픔까지 사랑해야죠”라며 조정현의 대표곡으로 농담 반 진담 반 위로를 건넸다. 그러나 조정현은 허공을 보며 “힘들어” 하며 웃었다. 말을 아끼며 헛헛한 웃음을 짓는 표정에서 그가 얼마나 큰 고통 속에서 살아야 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울림과 여운이 있는 3인 콘서트
가수로서, 작곡가로서 대중들과 떨어져 있는 동안 송시현은 그야말로 뮤지컬에 ‘미쳐’ 살았다. 한국적인 뮤지컬 작품을 만들고 싶어 철저하게 기획단계에서부터 한국적인 뮤지컬이 돼야 한다며 그의 천재성을 드러내며 심혈을 기울였다.
“원래는 음악만 하고 싶었어요. 그러나 내 음악을 지키려면 연출을 해야 했던 찢어질 듯한 사연들이 있었어요. 저는 평생 새로운 시도만 해서 가족들의 걱정이 많았어요. 작곡하는 사람이 뮤지컬 연출을 한다는 게 얼마나 큰 모험이에요? 그래도 대학원 가서 연출 공부하고 지금까지 뮤지컬 70편을 만들었죠.”
작곡자로서 송시현의 가장 유명한 노래는 이선희의 ‘추억의 책장을 넘기면’일 것이다. 실제 그의 꿈속에서 나온 스토리와 가사를 그대로 옮겨 적어 완성된 곡이란다. 천재적이라는 말이 맞다. 저작권협회에 등록되어 있는 그의 노래는 무려 4000여 곡이나 된다. 70여 편의 뮤지컬 연출 경력과 그가 만든 수천 곡의 노래를 보면 그의 삶이 음악으로 꽉 차 있음이 느껴진다.
이선희의 히트곡 중 상당수가 그의 작품. 나 항상 그대를, 겨울애상, 사랑이 지는 이 자리, 한바탕 웃음으로, 그리운 나라 등등 자신만의 색을 담은 곡들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선희 씨가 활동을 왕성하게 하면 저작권료가 많이 들어오고 뜸하면 안 들어오고.(웃음) 저를 음악인으로 살게 한 은인이시죠. 그때도 여러 가수에게 곡을 주는 작곡자들이 있었는데, 저는 노래가 자신의 음악세계를 표현하는 것이니 한 시기에는 한 가수에게만 곡을 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이선희 씨가 함께 작업하면서 제 곡을 너무 아껴주셔서 행복했죠.”
“고 대목에 첨언을 하자면” 하고 매니저가 대화 속에 끼어들었다. 이제는 뭔가 약방의 감초 같은 느낌이다.
“작품을 남발하지 않는 것은 아티스트가 받아들이기에 따라서는 좋은 거라고 봐요. 작품을 남발하다 보면 진이 빠지거든요. 에너지 관리가 필요해요. 시현이는 천재적인 작곡가예요. 그런데 그만 뮤지컬을 해서….”
매니저 머릿속은 온통 ‘기승전뮤지컬’이어서 다들 웃음보가 터졌다. 정말 서로를 잘 알아봐주는 사람들이 만난 듯한 느낌이 확 들었다. 이런 즐거운 우정이라면 앞으로의 삶도 행복하지 않을까.
모두 나이가 오십을 넘었고, 그동안 각자의 굴곡도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들에게서는 삶에 찌든 모습이 안 보였다.
“세 명 다 굉장히 맑아요. 다행이고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 맑음으로 그들이 준비하는 콘서트는 어떤 모습이 될지 궁금했다.
“우리가 중년의 나이가 됐잖아요. 우리 다음 세대에 대한 헌사가 필요한 시기가 됐다고 봐요. 우리 2세들도 청년이 되어가는 중이니까요. 이번 공연은 그쪽으로 잡아보자 했죠. 사실 지금 청년 세대가 겪는 상대적 박탈감, 고통 등은 어느 세대이든 다 있었어요. 그러니 우리가 겪은 경험과 노하우를 알려주고, 자녀와 손잡고 온 옛 팬들과 함께하는 자리를 만들어보자고 의기투합했죠. 자녀와 부모 세대의 소통과 공감으로 이어지는 용기와 희망 그리고 응원을 이번 공연 콘셉트로 잡았어요.”
10대 후반에서 20대인 아이들에게 공연을 보여줬을 때 ‘진부하다’는 말을 들으면 안 된다는 게 그들의 다짐이었다. 50대 중견가수들이 보여줄 보편성과 트렌디함이 섞인 공연이라니 기대가 됐다. 어쩌면 그들의 노래가 가진 세련미가 그를 가능하게 하지 않을까. 이런 시도는 후배들에게도 하나의 귀감이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에게 음악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범학은 인생 자체가 음악이었다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여태까지 그것만 위해서 살았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냥 뮤직 이즈 라이프(Music is Life).”
송시현에게 음악은 다양한 향유였다. 그는 음악이 시간이기도 했고 숨 쉬는 것이기도 했고 추억이기도 했다고 말한다.
“갈급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곡을 쓸 때면 그 시대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되는데, 그렇게 그 시대와 함께 보낼 수 있었죠.”
조정현에게 음악은 시간을 버티게 해준 매개체가 아니었을까 하는 물음에 그는 순순히 동의했다. 그는 음악을 떠났다고 말했지만, 노래를 멈춘 적은 없었다.
“요즘은 매일 연습해요. 연습할 때만큼은 저만의 시간에 빠져들어 너무 좋아요.”
서로를 알아보며 무르익는 3인
인터뷰를 마칠 시간이 되니 그들의 요즘 생활과 계획이 궁금했다. 영원한 의리 ‘형님’ 조정현이 먼저 얘기를 꺼냈다.
“가게를 한참 하다 보니까 동업하자는 유혹을 아직도 받아요. 장사는 현실이니까 잘못되면 바로 헤어지기 때문에 심사숙고하는데…. 외국에는 어느 장소를 가도 음악을 들으면서 즐길 수 있는 곳이 있어요. 우리나라에는 왜 없을까요. 그게 안타까워요. 우리나라는 특이한 게, 음악을 감상하는 게 아니라 부르는 문화예요. 그냥 놀면서 즐길 수 있는 그런 뮤직 공간을 만들고 싶어요.”
이범학은 일산에서 해물요리 전문점을 5년째 하고 있다. 요리를 좋아해서 시작했지만 난생처음 해보는 일이다.
“1~2년은 매일 제가 연안부두와 노량진을 왔다 갔다 했죠. 가수로서가 아닌 다른 보람이 있죠. 그리고 그걸로 생활이 되니 가기 싫은 무대 요청이 들어와도 거절이 돼요. 요즘은 가게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아요. 그래서 이제 슬슬 하고 싶은 걸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어요.”
송시현은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여전히 ‘뮤지컬’에 집중하고 있다.
“사실 지금까지 지나친 관심을 받으며 살았는데, 창작자로서 편한 게 아니었어요. 어디를 갔을 때 피아노 쳐 달라고 하면 어떡하지 하면서 내내 불편해지고…. 이제는 굳이 내색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저를 잘 모릅니다. 그게 오히려 자유롭고 편해요.”
왕년에 모두 전성기를 누려봤기에 세 사람은 대중의 시야에서 멀어져가는 것에 일희일비하진 않는다고 말했다. 과거는 과거일 뿐 미화하는 것도 싫다고 했다.
“과거만큼 영화가 올지는 모르겠지만 무대에 안 서는 것도 아니니까요. ‘노래를 이렇게 부르니 옛날보다 사람들이 더 좋아하네’ 같은 작은 걸 하나 깨닫는 것도 너무 행복해요.”
그들은 이제 나이 들었고 그간 굽이굽이 인생의 여러 고초도 겪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은 청년의 모습으로 우리들에게 남아 있다. 세 청춘이 맑은 모습으로 새로운 미래를 얘기할 때, 그 전혀 어색하지 않은 것은 그들의 겸손함 덕분일 것이다. 셋이라서 그 깊이와 울림은 더 커 보였다. 새순이 돋아날 기운과 따뜻한 햇빛이 함께할 그들의 두 번째 청춘에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브라보, 유어 라이프!
오직 ‘건강’, 오직 ‘명예’, 오직 ‘예수’ 등 ‘오직’ 이라는 말 뒤에 올 수 있는 단어는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천차만별로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 오직 ‘사랑’만을 바라봤던 남자의 이야기가 있다.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를 앞두고 로맨스와 더불어 와인 이야기까지 곁들일 수 있는 영화 ‘오직 사랑뿐’을 소개한다.
오직 사랑뿐(A United Kingdom), 2016
장르 드라마, 멜로/로맨스
감독 엠마 아산테
출연 로자먼드 파이크, 데이빗 오예로워 등
영화 ‘오직 사랑뿐’은 베추아날란드(현 보츠와나)의 왕자 세레체 카마와 아프리카 최초 백인 퍼스트레이디가 된 그의 아내 루스의 실화 러브 스토리를 바탕으로 제작됐다. 인종차별정책이 법적으로 공인되던 시대에 영국 보호령이었던 베추아날란드의 왕자가 영국 백인 여성과 결혼한다는 소식은 큰 파장을 일으켰고, 어떻게든 이 둘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영국의 온갖 꼼수에 세레체와 루스의 앞날은 쉽지 않은 고난으로 이어진다. 얼핏 제목만 봐서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극복해낸 두 사람의 이야기 같지만, ‘오직 사랑뿐’은 단순 멜로를 뛰어넘어 인종차별 문제까지 다룬 의미 있는 작품이다.
다시 영화 속으로 돌아가서, 영화 중간 세레체가 영국 총독을 만나는 장면에서 비서가 “6시입니다, 알리스테어 경. 셰리주 하실래요?”라고 말하며 작은 잔에 술을 따라 총독에게 권하는 모습이 나온다. 영화 끝부분에서도 셰리주는 다시 등장한다. 셰리는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낯선 술 이름이지만, 유럽에서는 샴페인만큼 잘 알려져 있는 와인이다. 대표적인 식전주로 특히 영국에서 와인을 좀 아는 척하려면 셰리 정도의 술은 알고 있어야 한다.
스페인 대표 와인 ‘셰리’
한국에 ‘소맥’이 있다면 스페인에는 와인에 브랜디를 섞은 ‘셰리’가 있다. 와인에 주정(주로 브랜디)을 섞어서 알코올 도수를 높인 와인을 포티파이드 와인(Fortified Wine, 강화 와인)이라고 하는데, 포르투갈에서 생산되는 포트(Port)와 스페인에서 생산되는 셰리(Sherry)가 대표적이다. 포트는 적포도가 재료이지만 셰리는 청포도만을 사용해 만든다. 또 발효 중에 브랜디를 넣는 포트와 달리, 발효가 끝난 다음 브랜디를 넣어 잔여 당분이 거의 없다. 셰리가 식전주로 인기가 있는 건 달지 않고(드라이) 뒷맛이 깔끔하기 때문이다. 숙성 방식에 따라 다양한 풍미도 자랑한다.
브랜디를 넣은 강화 와인은 알코올 도수가 17~22%로 일반 와인보다 높아 작은 잔에 조금씩 따라 마신다. 우리가 막걸리를 마실 때 양은으로 만든 막걸리 잔을 찾듯이 셰리와 어울리는 잔도 따로 있다. 셰리는 튤립 모양의 유리잔인 ‘코피타(Copita)’에 4분의 3 정도를 부어 마시는데, 코피타 잔이 없다면 작은 화이트와인 잔으로 대신해도 좋다. 가장 대표적인 셰리 브랜드로는 곤잘레스 비아스(Gonzalez Byass)와 루스토(Lustau)가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와인바나 스페인 음식 전문점 등에서 어렵지 않게 마실 수 있다.
독한 와인 셰리의 영국 진출
셰리는 원래 스페인 남쪽 끝에 있는 안달루시아 지방에 위치한 헤레스 데 라 프론테라(Jerez de la Frontera)에서 생산되는 와인이었다. 헤레스를 프랑스에선 세레스(Xeres)로, 영어론 셰리라고 발음하는데, 셰리 와인 라벨에는 ‘Jerez-Xeres-Sherry’라는 각국의 발음이 함께 표기되어 있다. 셰리가 영국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587년. 영국의 항해사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스페인 카디스 항을 습격하면서부터다. 카디스 항을 공격해 승리를 거둔 드레이크는 셰리 3000통을 빼앗아 영국에 돌아왔는데, 이때 셰리를 맛본 귀족들이 극찬하면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이 시기에 활약했던 영국의 극작가 셰익스피어도 그의 작품 ‘헨리 4세’에서 셰리를 언급하며 남다른 애정을 드러냈다.
“나에게 아들이 1000명 있다면 싱거운 술은 멀리하고 셰리를 즐기라고 가르치겠노라.”
If I had a thousand sons, the first humane principle I would teach them should be, to forswear thin potations and to addict themselves to sack(=sherry). - ‘헨리 4세’ 中
셰리의 제2전성기는 19세기에 찾아왔다. 18세기 영국의 와인 시장을 장악했던 포르투갈이 나폴레옹의 침공을 받아 주춤할 때 셰리는 이 틈을 타 영국 시장을 다시 한 번 파고들었다. 이때부터 스페인의 와인 산업이 크게 성장했고, 오늘날의 셰리를 있게 해준 발판도 마련했다. 영화 ‘오직 사랑뿐’의 시대적 배경이 1948년인 걸 생각하면, 비서가 식전주로 셰리를 권한 건 셰리를 사랑했던 당시 영국인의 모습을 반영한 이유 있는 선택이 아니었을까!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금메달,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은메달, 2004년 아테네올림픽 은메달 그리고 아시아 최초 세계선수권대회 우승이라는 기록의 중심엔 핸드볼 선수 임오경이 있었다. 1990년대 한국 여자핸드볼의 전성기를 이끈 임오경(林五卿·48) 서울시청 여자핸드볼팀 감독을 만났다.
금메달의 밑거름이 된 ‘지옥 훈련’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한국 여자핸드볼팀이 금메달을 딴 직후 여자핸드볼팀의 대대적인 세대교체가 이뤄졌다. 이때 임오경 감독도 국가대표로 합류하게 되면서 태릉선수촌에 입촌했다. 생애 첫 올림픽 무대를 앞두고 부담스럽진 않았냐는 물음에 그는 “부담감보다 긴장감이 더 컸다”며 “오히려 태릉선수촌에서의 ‘지옥 훈련’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답했다.
“눈 감는 것도 두렵고 눈 뜨는 것도 두려웠어요. 눈을 감으면 다음 날 아침이 오고, 눈을 뜨면 하루가 시작되니까요. 그중에서도 매주 한 번씩 불암산을 뛰어 올라가야 하는 산악훈련은 그야말로 공포였어요. 기록을 매번 단축해야 했거든요. 훈련이 끝나면 울면서 태릉 귀신한테 기도했어요. 우리 감독님 제발 좀 데려가라고.(웃음)”
매일 혹독한 훈련이 이어졌지만 동료들과 서로 격려하고 의지하며 견뎌냈다. 해를 거듭할수록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그도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의 메달 가능성을 보게 됐다고 고백했다.
“처음엔 한국이 메달을 딸 거라고 예상하는 분위기도 아니었어요. 올림픽 직전 독일에서 열린 5개국 초청대회에서도 꼴찌를 했으니까요. 저희끼리도 동메달을 목표로 할 정도였죠. 지금 돌이켜보면 노력에 대한 결과이기도 했지만 운도 잘 따라줬던 것 같아요.”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한국이 한 번도 이겨본 적 없는 러시아 팀이 다른 조로 배정되면서 우리 선수들은 순조롭게 준결승까지 갈 수 있었다.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독일과의 경기에선 아슬아슬하게 한 점 차로 이기면서 결승에 올랐다. 그때 한국 팀에게 또 하나의 희소식이 전해졌다. 노르웨이가 러시아를 한 점 차이로 제압하고 결승에 올랐다는 내용이었다.
“러시아가 떨어지고 노르웨이가 결승에 올라갔다는 소식에 저희 선수들 다 뒤로 자빠졌습니다. 예선전에서 노르웨이랑 맞붙었을 때 저희가 큰 점수 차로 이겼거든요. 결승에서도 이길 자신이 있었죠. 그때 ‘아, 3년 동안 지옥 훈련을 견뎌낸 선수들을 위해 하늘이 기회를 주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한국은 결승에서 다시 만난 노르웨이를 28대 21로 누르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3년간의 노력 끝에 일궈낸 쾌거였다.
“선수들이 시상 단상에 올라가면 눈물을 흘리잖아요. 그 눈물엔 기쁨의 의미도 있지만, 그동안 힘들었던 순간이 생각나서 흘리는 눈물도 있어요. 그때 저는 깨달았어요. ‘피나는 훈련이 있었기에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구나. 그렇게 힘들었던 시간들은 결국 나를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과정이었구나’ 하고요.”
일본에서의 새로운 도전
올림픽이 끝나자 그를 스카우트하겠다는 구단의 러브콜이 이어졌다. 그는 일본의 2부 리그 신생 팀인 ‘히로시마 이즈미’를 선택했다. 올림픽에서 메달만 따면 은퇴하겠다고 마음먹었던 그가 핸드볼 강국 유럽 팀의 제안도 뿌리친 채 일본에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이유는 뭘까.
“일본에서 너무 적극적으로 제안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3년 안에 팀을 정상에 올려놓고 유럽에 가자 했는데, 일본에서 14년을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죠.(웃음) 당시 제가 선수들을 직접 스카우트했는데, ‘내가 스카우트했으니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떠나질 못했습니다.”
그는 히로시마 이즈미에서 감독 겸 선수로 14년간 활동하면서 리그 8연패를 포함해 총 27회의 우승을 달성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일본 기자단이 선정하는 인기투표에서 8년 연속 인기상을 받을 정도로 일본의 핸드볼 스타플레이어로도 인정받았다.
“한국에서는 짱구? 이마가 많이 튀어나왔다고 그런 별명이 있었는데 일본에서는 카미사마(かみさま, 신)로 불렸어요. ‘내가 왜 신이야?’라고 물어봤더니 핸드볼을 너무 잘한다고….(웃음) 팬도 엄청 많았어요. 재일교포가 대시도 하고요. 어느 날은 아들이 상사병 걸렸다고 한 번만 만나 달라고 찾아오신 분도 있었어요. 별일 다 겪었죠.”
아쉬움 남는 2004년 아테네올림픽
임오경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을 배경으로 한 ‘우생순’의 실제 주인공이기 때문. 2004년 아테네올림픽은 그에게 유독 아쉬움이 많이 남는 대회다. 한국은 결승에서 만난 덴마크와 연장전에서도 승부를 가르지 못해 결국 페널티 스로로 승부를 결정지었다. 임오경은 두 번째 주자로 나섰다.
“대회를 일주일 정도 남기고 발바닥 부상을 당했어요. 항상 베스트 멤버로 뛰다가 벤치에 앉아 있으니 자존심도 많이 상하고 스스로에게 화가 굉장히 났죠. 페널티 스로를 앞둔 상황에선 부상 때문에 몸도 유연하지 못했고 자신감도 떨어진 상태였어요. 던지고 싶지 않다고 말했는데 제가 무조건 던져야 한다고 하니 어쩔 수가 없었죠.”
그가 던진 슛은 덴마크 골키퍼의 오른쪽 다리에 걸리면서 실패하고 말았다. 여기에 그다음 주자였던 문필희 선수의 슛도 막히면서 최종 스코어 2대 4로 은메달에 머물고 말았다.
“그동안 잘해왔는데 마지막 순간, 그 한 번의 실수로 인해 제 핸드볼 인생에 큰 오점을 남겼다는 생각에 많이 아팠어요. 무엇보다 운동선수는 부상이 없어야 한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죠. 그리고 경기장에서 뛸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벤치에 앉아 있는 선수들의 마음을 좀 더 헤아리게 됐죠.”
그는 2008년 한국으로 돌아와 현재까지 서울시청 여자핸드볼팀 감독을 맡고 있다. 한국 최초 여성 핸드볼팀 지도자라는 점에서 어려움은 없었을까.
“첫해에는 눈물도 많이 흘렸어요. 저희 팀이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 여자 감독이 이끄는 팀이라는 이유로 심판 판정도 이상하게 해서 불리하게 만들고. 심판실에 따라 들어간 적도 많아요. ‘나 오늘부터 서서 볼일 볼 테니 나를 남자라고 생각해 달라’고 말한 적도 있어요. 몇몇 고비를 넘기면서도 조금씩 다가가니 결국은 손을 내밀어주더군요. 근데 처음엔 정말 힘들었어요.”
핸드볼과 함께한 지 30여 년이 넘는 세월, 그는 이제 또 다른 도전을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핸드볼을 시작하면서 선수가 됐고, 선수를 하면서 지도자가 됐고, 대한민국의 애 엄마도 돼봤어요. 여러 가지 도전을 하면서 새로운 시도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더라고요. 그래서 최근엔 또 다른 도전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왕이면 제가 지도자와 선수생활을 모두 해본 사람으로서, 서로를 존중할 수 있는 스포츠 문화를 만드는 데 앞장서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