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한 시니어의 가장 큰 자산은 시간이다. 시간 부자다. 그러나 주어진 시간이 많아도 일상이 무료하다면 고통의 순간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장수도 축복이 아니고 재앙으로 다가온다.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다면 여가를 즐기는 삶으로 바꿔야 한다. 그 방법의 하나로 취미활동을 들 수 있다. 취미가 필요하다는 것은 알지만 실천으로 옮기는 것은 쉽지 않다. 필자는 손쉽게 취미를 계발하는 방법으로 ‘덧칠하기(Micro Adventure)’를 권하고 싶다. ‘덧칠하기’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일상의 습관이나 관심 가진 분야를 발전시키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등산이 취미였던 분이 산삼을 연구해 산을 즐기면서 산삼을 캐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필자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에 수채화를 그렸다. 그 경험을 살려 60세에 사진을 배움으로써 평생 취미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진과 관련한 영역을 확대해 하루를 25시로 산다. 과거의 경험에 덧칠을 했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일을 즐겁게 하면서 용돈도 벌고 사회공헌도 하는, ‘도랑 치고 가재 잡는’ 삶을 즐긴다.
사진은 취미라기보다 일상생활로 바뀌어가고 있어 직업으로 연결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어떤 취미보다 돈이 적게 들면서 새로운 직업으로 만들어갈 수 있다. 특히 돈이 드는 취미에서 돈이 되는 취미를 계발할 필요가 있는 시니어에 꼭 맞는다. 물론 경우에 따라 돈이 많이 들기도 한다. 장비 구매와 사진 촬영지 여행 비용 때문이다. 그러나 늘 휴대하는 스마트폰으로도 충분히 찍을 수 있고 일상에서 사진 소재를 찾을 수도 있어 비용을 적게 들이고도 훌륭한 취미활동을 할 수 있다.
필자는 저렴한 카메라(일반인이 손쉽게 살 수 있는 보급기로 렌즈 포함 50만원 주고 산 중고품을 지금도 쓴다)를 사용하고 요즘엔 스마트폰을 주로 이용한다. 전시회용 작품을 만들거나 취미활동용으로 부족함이 없다. 사진 재능기부와 사진 기술을 전수하는 사회공헌 활동에도 전혀 지장이 없다. 장애인 시설이나 양로원 등에서 사진 촬영 봉사를 하고 실버대학 등에서 어르신들에게 사진 지도를 하며 보람을 느낀다. 사진 촬영이 필요한 곳이면 발걸음을 아끼지 않는다. 혹자는 필자에게 “돈도 안 되는 일 그렇게 힘들여 봉사하느냐?”고 하지만 재능을 쓸 수 있음에 감사한다.
취미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목표를 설정해 공인 사진작가가 된 필자는 이제 사진으로 돈을 버는 직업인이 됐다. 또한 취미활동이 바탕이 되어 KBS1
을 비롯한 여러 방송 프로그램과 SBS 라디오에 출연하며 방송인이 되었다. 동년기자 선임과 명예기자도 사진이 근간이었고 글을 쓰면서 원고료도 받는다.
, , 등 사진과 관련한 책 세 권도 출간했다. 또한 사진 취미생활을 통한 여가생활의 본보기가 되면서 여가설계 강사로도 활발하게 활동하며 강사료를 받는다. 취미에 머무르기만 하면 성장이 없다. 어떠한 취미를 선택하더라도 새로운 목표를 설정해 도전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필자도 처음에는 단순한 취미로 시작했다. 당시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더 좋은 사진을 글에 곁들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고양시 일산동구청에서 무료로 운영되는 사진교실에 참가하게 됐다. 60세의 늦깎이였고 카메라 장비는 소형 카메라 하나였다. 촬영 경험도 많지 않았다. 고급 카메라를 들고 나타나는 동호인들을 볼 때 주눅이 들기도 했으나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형편에 맞는 카메라로 열심히 그리고 꾸준히 촬영을 멈추지 않았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 했듯 공인 사진작가가 되어보자는 욕심이 생겨 사진을 배운 지 3개월 후부터 공모전에 출품하기 시작했다. 잘될 리가 없었다. 28번의 도전 중 절반을 낙선하고 15번 수상해 사진작가 인증을 받았다. 그 후에도 꾸준한 노력을 기울인 결과, 사진을 배운 지 3년이 되던 2013년에 대한민국사진대전(국전)에 입선하고 부산일보 전국사진대전에서도 우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사진작가가 되는 길은 많다. (사)한국사진작가협회가 인정하는 공모전 출품으로 얻어지는 점수가 일정 점수 이상이 되면 정회원으로 가입할 수 있고 사진작가 명함도 만들 수 있다. 사진 전문가가 되면 다양한 직업으로 연결될 수 있다. 전시회를 열어 작품 판매도 할 수 있다. 향후 작품에 대한 가치도 높일 수 있다. 사진 갤러리를 중심으로 하거나 프로필 사진과 가족사진을 촬영해주는 카페 운영, 사진관 운영, 사진 여행단 운영을 할 수 있다. 수요가 많은 사진 강사로 데뷔할 수도 있다.
전문가는 자기 기술을 다른 사람에게 전수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춘 사람이다. 필자는 사진작가 인증에 그치지 않고 계속 공부하고 활동 영역을 넓혀왔다. 사진을 배운 지 벌써 8년째에 접어들었고 찍은 사진도 50만 장에 이른다. 사진을 찍다가 파파라치로 몰려 곤욕을 치르기도 했고 강화도 군부대 옆에서 석양을 촬영하다 주민의 신고로 경찰서에 끌려가 조사를 받기도 했다.
선택한 취미생활을 오래 할 수 있고 제2의 직업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재미있는 분야를 선택해야 한다. 남이 권유하는 취미나 유행하는 취미를 선택하면 중도에 그만두는 경우가 많다. 새로운 분야에 집착하기보다는 평소 관심을 가져왔던 취미가 좋다.
어린 시절에 즐겨 했으나 생업으로 미뤄뒀던 취미를 끄집어내 덧칠하면 평생 취미로 만들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영국의 모험가 제임스 후퍼가 제안한 ‘덧칠하기’다.
필자는 은퇴 후에 수채화를 그리고 싶은 꿈이 있었다. 그 꿈을 덧칠해 사진으로 바꾼 셈이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 3년 정도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에 몰입하다 보면 새로운 길이 열리기도 한다. 필자는 현재에 머무르지 않고 사진 기술과 취미생활 계발을 선도할 ‘청학빛그림학교’를 꿈꾸고 있다.
1972년부터 1979년까지 대한민국을 흔들었던 디바 정미조가 오랜 우회로를 거쳐 다시 우리에게 돌아왔다. ‘개여울’과 ‘휘파람을 부세요’와 같은 다양한 히트곡들이 가수 정미조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자연스럽게 떠오르겠지만, 사실 그녀는 가수로서의 시간보다 더 오랜 시간을 화가로서의 인생 2막을 보냈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인생의 제3막에서 가수로 돌아온 그녀는 그동안 쌓은 세월의 깊이를 유감없이 선보이고 있다. 웅숭깊고 밀도감 있는 호흡을 가지게 된 그녀의 노래와 함께 삶의 궤적을 들여다봤다.
글 김영순 기자kys0701@etoday.co.kr
1972년, ‘개여울’로 데뷔한 정미조는 그 후 7년 동안 대한민국을 휘어잡았던 시대의 디바였다. ‘휘파람을 부세요’, ‘그리운 생각’, ‘아! 사랑아’와 같은 히트곡들로 차트의 정점에서 활동하던 그녀는 1979년이 되자 돌연 가수생활을 접고 프랑스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미술을 공부해 박사 학위까지 받은 그녀는 1993년 한국으로 돌아와 화가이자 미대 교수로서의 삶을 살며 인생 2막을 열었다. 그리고 이제 인생 3막. 다시 가수로 복귀한 그녀가 기자 앞에 앉아 있다. 브라운관에서 볼 수 있었던 젊은 시절의 에너지 넘치던 모습은 이제 온화한 무게감으로 바뀌어 있었다.
“38년 만에 나에게 맞는 옷을 찾았다”
“2015년에 23년간 일했던 교수직에서 은퇴했죠. 마음이 홀가분했어요. 은퇴한 사람들은 흔히 ‘저녁에 집에 가면 뭘 하지?’ 하는데 난 행복했어요.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됐으니까요.”
37년. 정미조가 수원대학교 조형예술학부 서양화과 교수로 있다가 다시 무대로 돌아오는 데 걸린 시간이다. 그 시간 그대로, 그녀는 ‘37년’이라는 제목으로 2016년 자신의 앨범을 내놨다.
“‘내가 정말 할 수 있을까?’ 싶어 걱정됐죠. 그리고 CD로 앨범을 만들어 내놔야 하니 부담감과 책임감이 컸죠. 그런데 이주엽 JNH뮤직 대표님이 정말로 함께 작업해보고 싶은 목소리였다고 응원해주셨고 제가 부르게 될 노래들의 가사도 너무 마음에 들었고요.”
그리고 지난 11월 17일, 그녀는 앨범을 또 발표했다. 이번 앨범의 제목은 ‘젊은 날의 영혼’. 라틴 음악, 팝 재즈, 모던 포크 등 수록된 14곡에는 다양한 음악적 시도가 들어 있다. 그녀는 ‘38년 만에 자신에게 맞는 옷을 찾았다’고 표현했다. 마침 올해는 그녀의 가수 데뷔 45주년이기도 하다.
“이번 앨범에서는 젊은 친구들과 함께했어요. 음악감독은 재즈 기타리스트 정수욱씨가 맡았습니다. 그리고 집시 기타리스트 박주원 씨가 작곡한 노래가 있고요. 박주원씨 어머니가 제 팬인데, 박주원씨가 그런 어머니를 위해서 작곡한 곡이에요. 편곡이 얼마나 좋은지, 기타와 다른 악기 연주자들과의 합이 너무 좋았어요. 그리고 Mnet의 오디션 프로그램 에서 나왔던 제주소년 오연준과는 듀엣으로 손자와 대화하듯 노래를 불렀죠.”
대한민국이 사랑한 목소리
오래전 얘기다. 가수로 데뷔하기 전 정미조는 이화여대 안에서 노래 잘 부르기로 유명한 스타였다. 그러나 학교 안에서만 노래를 부르는 것은 그녀로선 갑갑한 일이었다. 그런데 대학교 4학년 여름방학 때 레코드 회사 사장이 직접 그녀를 찾아왔다. 당연히 그녀의 이름을 건 앨범을 내고 싶다는 제안이었고, 서양화과에서 4년 동안 과 대표를 내리 맡을 정도로 성실한 학생이었던 그녀는 본격적으로 ‘가수를 하느냐, 마느냐’라는 갈림길에서 고민에 빠졌다. 그런 그녀의 고민을 해결한 것은 그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학과장이자 지도교수인 은사의 한마디였다.
“해봐라, 내 나이 되어 그때 한번 해볼걸 하며 후회하지 말고. 너는 공부 잘하니까 일단 가수로 활동하다가 나중에라도 대학원 가서 다시 공부하면 된다.”
지도교수의 한마디, 그리고 그녀의 결심은 적중했다. 세상 밖으로 나온 그녀의 목소리에 대한민국이 사랑에 빠진 것이다.
화가로서 자리매김한 인생 2막
“유학을 떠나서 몽마르트 언덕 8층 건물 꼭대기에서 살았어요. 한국에서 매니저, 운전기사 등 사람들에 둘러싸여 살다가 혼자 지내며 밥까지 스스로 지어 먹어야 해서 너무 힘들었어요. 막 울기도 했고.”
그러나 힘들다고 돌아올 수는 없었다. 한국을 떠날 때 은퇴를 공언했고, 당시 최고의 인기 예능 프로그램이었던 TBC(옛 동양방송) 예능 프로그램 에서 신인가수로 막 데뷔한 최백호 한 명만을 초대가수로 초청한 고별 특집까지 했었다.
“최백호 선생은 거기서 처음 만났어요. 정민섭 선생이 그때 나를 위해 ‘나 여기 있어요’를 써줬는데 그 노래를 중간쯤 불렀을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는 거예요. 내 의지로 떠나는 거라 눈물이 안 나올 줄 알았어요.”
그렇게 했는데 파리까지 가서 다시 돌아올 수는 없었다. 그녀는 물방울 그림으로 유명한 김창렬 작가의 추천으로 파리에 있는 두 개의 국립학교 중 아르데코에 입학했다. 그리고 그 후는 가수가 아닌 재불 화가로서의 삶이었다. 6년 3개월 동안의 박사과정을 완료했고 모나코 전시회에서 상까지 받으면서 성공적인 서양화가로서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1993년부터 수원대학교 교수로 지내면서 화가이자 교육자로서의 인생 2막의 삶을 살았다.
최백호, 손성제, 이주엽과의 인연
“어떤 전시회에 갔을 때 보니 최백호 선생이 자신의 그림 3점을 출품했더라고요. 그 그림들을 보니 너무 좋았어요. 미술계에서는 내가 중견이었으니까, 그림에 대해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죠. 그때부터 다시 최백호 선생과의 교류가 다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교수생활을 한 20년쯤 했을 때, 최백호 선생이 점심을 먹자는 거예요.”
최백호가 정미조를 만난 이유는 간단했다. 다시 가요계로 돌아와 달라는 요청이었다. 그녀는 최백호를 통해 앨범 ‘37년’의 음악감독을 맡은 색소포니스트 손성제, 제작을 맡은 이주엽 JNH뮤직 대표 등 그녀와 함께 작업하게 될 음악계 인사들과도 만날 수 있었다. 그녀의 음악적 성과를 알고 다시 시작될 가능성을 확신했던 그들의 조력을 통해 그녀는 가요계를 떠난 1970년대와는 너무도 다른 환경 속에서 오래 닫혀 있었던 자신의 문을 다시 열었다.
“저는 37년 만의 녹음이라 잠도 못 이뤘죠. 그런데 손성제 교수가 굉장히 속도감 있게 작업을 잘했어요. 어떤 노래는 녹음하자마자 오케이 사인을 했어요. 첫 곡이 가장 좋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죠.”
어렸을 때는 정말 신나게 불렀었구나 싶었다
마침 얼마 전에 나온 아이유의 리메이크 앨범 ‘꽃갈피 둘’에는 정미조의 대표곡인 ‘개여울’이 리메이크되어 실려 있다. 아이유 특유의 여리고 애조가 깃든 곡 해석은 비슷한 나이대의 정미조가 보여줬던 목소리의 힘과 비교하면 묘한 재미가 있다. 아이유가 구사하는 창법은 ‘37년’ 앨범에 실린, 리뉴얼된 ‘개여울’에 더 가깝다. 그런데 막상 정미조는 자신의 인생 1막을 채웠던 가수로서의 엄청난 인기와 삶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했다고 술회했다.
“제 인생 1막은 20대였는데, 한국에 돌아와 그 시절의 모습을 다시 보니 ‘아, 내가 정말 신나게 불렀구나, 젊음의 설익은 패기로 마구 전진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런데 많은 경험이 인생에 녹아들면 그 경험이 바로 소리가 되죠. 옛날의 제 소리가 시원시원해서 듣기 좋았다면 지금은 삶의 서러움, 슬픔이 배어든 소리가 됐어요.”
그녀의 말대로, 지금 그녀의 목소리는 젊었을 적 목소리와는 사뭇 다르다. 깊은 호흡, 긴 감성, 나이 든 이의 여백과 회한이 묻어나는 그녀의 창법은 한때 전설이었으나 오랜 시간을 돌아 다시 무대에 선 그녀의 모습에서 저 저명한 아프로 쿠반 밴드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여성 보컬인 오마라 포르투온도가 떠오르는 것은 전혀 어색하지 않다.
어른의 음악이 사라진 시대, 전설이 돌아오다
인터뷰에 함께 동석했던 이주엽 JNH뮤직 대표의 말대로 지금 한국은 ‘어른의 음악’을 들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어른의 음악에는 인생의 끝자락에 이른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정서가 담겨 있기 마련이다. 7년 동안 우리나라 가요계를 뒤흔들고 사라졌다가 37년 만에 다시 나타난 정미조의 노래에는 그런 마법 같은 순간들이 담겨 있었다.
“이번 앨범은 곡들을 너무 잘 만났고 덕분에 제대로 만들었어요. 그러나 우여곡절이 유난히 많은 앨범이기도 했죠. 예를 들어 믹싱과 마스터링까지 다 됐는데, 들어보니 너무 화려해서 제가 가진 오리지널함이 줄어든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그 시점에서 완전히 새로 고치기도 했어요. 듀엣을 하기로 한 제주 소년 오연준군은 목소리는 아이인데 아이 같지 않은 성숙한 느낌이 있었죠. 그런데 막상 함께 불러보니 처음에는 음역대가 안 맞아서 노래가 제대로 안 나오기도 했어요. 하지만 마지막에 극적으로 노래가 완성됐죠.”
이번 앨범 ‘젊은 날의 영혼’에는 정미조가 작곡한 노래들도 세 곡 들어갔다. ‘오해였어’는 작사와 작곡을, ‘난 가야지’와 ‘비 오는 오후’는 공동 작사·작곡으로 이름을 올렸다. 그녀가 이번 앨범에 갖고 있는 열정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그 열정은 그녀의 인생 3막이 금방 끝날 것 같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듯했다.
“인생을 살아보니 때가 있어요. 수십 년 동안 이 노래들을 위해 시간을 보낸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예전에는 들지 않았던 감정이죠. ‘지금이 내 때가 온 건가?’ 싶어요.”
2017년 7월, 그라피티 전시회가 서울에서 열렸다. ‘얼굴 없는 거리의 화가’로 유명한 영국인 그라피티 작가 뱅크시(Banksy)의 작품을 모은 전이었다. ‘길거리 낙서’, ‘불법 행위’로 보는 시선이 있어 쉽지 않았을 전시회임에도 불구하고 뒤이어 열린 전도 흥행에 성공하며 그라피티의 새로운 가치를 보여줬다. 그라피티 작가들은 분사되는 스프레이를 통해 자유를 표출하며 때론 현대사회의 문제를 해학적 그림으로 표현해 지적한다. 깡통 스프레이는 회색빛의 거리를 화려하게 변신시키고 흥미로운 장소로 탈바꿈시킨다.
전철이나 건축물의 벽면, 교각 등에 스프레이, 페인트를 이용해 그리는 그림인 그라피티는 1960년대 필라델피아 갱단에서 자신들의 구역을 알리는 용도로 활용됐다. 이후 뉴욕으로 퍼져 이름을 공공장소에 불법적으로 남겨 악명과 명성을 동시에 얻을 수 있다는 점에 흥미를 느낀 청년들을 중심으로 유행했다. 그리고 약 5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는 전 세계 거리에서 화려하면서도 현란한 원색의 그림을 쉽게 접할 수 있게 됐다. 또한 짧지 않은 세월 동안 뱅크시(Banksy), 키스 해링(Keith Haring), 셰퍼드 페어리(Shepard Fairey) 등 유명 작가도 배출됐다.
하지만 그라피티의 성지인 뉴욕에서도 그라피티는 여전히 불법이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2015년 지하철역 환기구를 통해 침입해 전동차에 낙서한 외국인 4명에 대해 수배가 내려져 전파를 탄 사건이 있다. 지금도 허가받지 않은 공간에서의 그라피티는 재물손괴죄, 건조물침입죄를 적용해 강력하게 단속하고 있다. 이처럼 그라피티가 공공질서를 어지럽힌다고 보는 부정적인 시각도 있지만 자유롭고 창의적인 그림이 도시를 밝힌다는 긍정적인 시선도 존재한다.
그라피티는 종종 특정한 장소에서 작업되어 주목받지 못하는 장소를 새롭게 조명하고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당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홍대 주위로 작업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사라져 발걸음을 옮겨야만 했다. 그렇게 새로 찾은 곳이 한강과 압구정을 이어주는 압구정나들목이다. 그라피티 작가들 사이에서 ‘토끼굴’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이곳은 한강사업본부가 그라피티 작업을 할 수 있도록 허가한 공간이다. 단 작업은 밤 10시 이후에만 가능하며 정치적, 선정적 이미지를 그려서는 안 된다는 약속을 지켜야 한다.
늦은 밤이 되면 그라피티 작가들이 삼삼오오 모여 벽 앞에 자리를 잡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뒤죽박죽 얽혀 알아보기 힘든 글자체를 사용해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며 그 옆에 이미지를 덧붙이기도 한다. 화살표, 따옴표, 비눗방울 등의 이미지는 마치 글자들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효과를 만들어낸다. 밑그림 위로 뿌려진 스프레이는 하나의 근사한 작품을 탄생시킨다. 압구정나들목을 자주 지나가는 박모(55)씨는 작업 중인 그라피티 작가들의 그림을 신기하게 바라보더니 이내 핸드폰을 꺼내 들고 사진을 찍는다.
“예전에는 색감도 어둡고 뾰족한 이미지만 있어서 날카로운 느낌을 받았어요. 지금은 화려한 색상에 재미있는 캐릭터도 있어 전체적으로 밝은 분위기죠. 그저 삭막하기만 했던 벽에 정기적으로 그림이 바뀌니 신선하고 좋았어요. 도화지에 그리는 그림이 아닌데 어떻게 완성되는 건지 궁금하고 신기했는데 오늘 비로소 궁금증이 풀렸네요(하하).”
알록달록하게 그라피티로 꾸며진 이곳은 자전거 동호회인들 사이에서도 인기다. 김모(25)씨는 벽에 그려진 작품들을 훑어보다 가장 마음에 드는 곳 앞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셔터를 누른다.
“여기서 자주 자전거 동호회 회원끼리 사진을 찍어요. 그라피티의 색감과 자유로운 느낌이 자전거와 잘 어울려 일부러 찾아오기도 하죠. 집주인 입장에선 불쾌할 수도 있겠지만, 노후 주택이나 운영하지 않는 건물을 방치하지 말고 그라피티로 꾸민다면 이곳처럼 주목받을 수 있는 장소로 바뀔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사회적인 제도 안에서 인위적인 방법으로라도 이런 공간이 더 많아지면 좋겠어요.”
SITCH라는 익명으로 활동 중인 한 작가는 “그라피티는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의 끝이라고 생각한다. 보수를 받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욕도 먹는다. 그 와중에 좋게 봐주시는 분들도 있다. 이런 경계에서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게 좋다. 생각했던 것을 스프레이로 뿌려 표출할 수 있고 그런 작품이 다른 사람에게 영감을 주고 공감을 끌어낼 수 있다는 점도 특별하다”고 설명했다.
그라피티 작가 위제트는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표현할 수 있는 범위가 넓기 때문에 신선한 디자인 요소라고 생각한다. 또 뜻밖의 공간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림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다”라고 말했다.
일반적인 전시회라면 작품에 대한 기대감을 안고 다가가지만 그라피티 같은 거리의 예술은 뜻밖의 상황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그라피티 작품 앞에서 만난 김모(51)씨는 “표지판이나 벽, 길거리에 뿌려진 알 수 없는 글자와 그림들은 공공시설을 지저분하게 만들고 분위기와 더해져 사람을 긴장하게 만든다”며 그라피티를 공공시설을 해치는 길거리 낙서라고 표현했다. SITCH는 이러한 부정적인 반응이 익숙한 듯 입을 열었다.
“가끔 작업을 하다 보면 신고가 들어오는 경우가 있어요. ‘냄새 난다’, ‘보기 좋지 않다’, ‘위협적인 분위기를 조성한다’ 등 다양한 이유로 말이죠. 우리나라에 허용된 공간이 별로 없는데 허용된 공간에서만큼은 우리의 작업을 열린 시선으로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작업한 다음 날 흔적도 없이 지워질 수도 있는 그라피티는 독창적인 방법으로 예술의 세계를 전달한다. 최근에는 예술성을 인정받아 전 세계적으로 다양한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선 비주류 문화로 인식되는 면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라피티 작가들은 부정적인 인식과 위험을 감내하면서도 개성이 숨 쉬는 예술을 만들어낸다. 이제부터는 거리를 걸을 때 잘 살펴보자. 어쩌면 오늘 밤 남몰래 그라피티로 꽃단장을 마치고 다음 날 새로운 모습으로 반길지도 모를 테니 말이다.
‘도슨트(docent)’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큐레이터가 기획한 전시작품을 관람객에게 알기 쉽게 설명해주는 전시 해설자다. 관람객이 적극적으로 감상할 수 있도록 관심을 갖게 해주며, 작품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재미있게 즐길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또 미술관, 박물관이라는 장소에 대해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도슨트는 ‘지킴이 역할’도 함께한다. ‘지킴이’란 전시품이 훼손되지 않도록 관리하는 일이다. 미술관에 따라서 전시 해설과 지킴이 역할을 구분 없이 함께하는 곳도 있고, 철저히 분리된 곳도 있다.
‘도슨트’에 도전하다
시니어가 되면 젊었을 때 하던 일들은 웬만하면 정리하고 정신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여유를 가지려는 사람이 많다. 대신 용돈 정도만 벌 수 있는 일거리를 원한다. 많은 사람이, 오랫동안 즐길 수 있고, 비용도 적게 들 만한 취미를 찾기 위해, 여러 교육기관에서 이것저것 배워보지만 잘할 수 있고, 재미도 있고, 흥미를 느낄 수 있는, 본인에게 꼭 맞는 취미를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필자도 그랬다. 서울시어르신취업훈련센터에서 여러 교육을 받아보다가 겨우 만난 것이 ‘도슨트’다.
미술에 관심이 있다면 누구나 가능
전시품을 수집하고 기획해야 하는 큐레이터는 전문지식이 많아야 하지만, 도슨트는 전문지식이 없어도 미술에 관심이 있다면 누구나 교육 과정을 거쳐 도슨트로 활동할 수 있다.
우리나라도 박물관, 미술관, 기념관에는 정기적으로 도슨트를 선발해서 교육을 시키고 자원봉사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자원봉사는 비용을 받고 일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교육도 무료다. 그러므로 도슨트 입문에는 비용이 전혀 들지 않는다. 인터넷에서 박물관이나 미술관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지원 정보를 알 수 있다. 자원봉사활동을 하면서 경험을 하고, 실력과 경력을 쌓은 후 원한다면, 자연스럽게 급료를 받고 일할 수 있는 직업으로 연결될 수도 있다. 현재 유일하게 교육을 시켜 자원봉사가 아닌 급료를 받고 일할 수 있도록 취업 알선을 해주는 곳이 서울시어르신취업훈련센터다.
이곳의 교육 프로그램은 시니어 도슨트로서 취업을 했을 때의 마음가짐, 서양미술사, 한국사, 설명할 원고작성, 직장 상사와 동료들에게 지켜야 할 예의와 관람객들을 대하는 자세 등을 가르친다. 필자도 이곳에서 교육과정을 마친 후, 취업 알선을 해줘서 국립민속박물관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관람객과 공감대 형성이 요령
작품을 전시할 때는 항상 작품 설명을 써둔다. 그런데도 읽는 사람은 아주 극소수다. 관람객은 거의 읽지 않는다. 그래서 작품 설명과 비하인드 스토리를 함께 얘기해주면 즐거워하면서 다른 관람객한테도 꼭 설명해줄 것을 부탁까지 한다. 다른 관람객도 본인처럼 안 읽고 가면, 이렇게 좋은 내용을 알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안타까운 마음에서다.
시니어가 설명을 해주니까 젊은 사람이 설명해주는 것보다 이해가 잘되고 더 크게 감동된다고, 고맙다고, 기뻐하며 갈 때면, 필자도 보람을 느끼고 행복하다. 실제로 관람객들도 필자가 설명하는 것을 볼 때면 참 행복해 보인다고 말하면서 그들도 즐거워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관람객도 행복하고 작품을 설명하는 필자도 행복하고, 이렇게 관람객과 도슨트가 서로 공감대를 형성해나가는 것이 하나의 재미이면서 보람이기도 하다.
도슨트 활동이 가져다준 삶의 변화
도슨트를 하기 전에는,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늘 혼자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박물관에서 도슨트 활동을 하면서 관람객들과 작품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들 만나는 것을 좋아하게 됐다. 필자의 삶의 가장 큰 변화다.
시니어가 하면 시너지 효과 더 좋다
젊은 사람들은 아직 부족한 다양하고 소중한 경험들을 시니어는 갖고 있다. 오랜 세월 차곡차곡 쌓아둔 경험들을 녹여내 도슨트 활동에 덧입힌다면 관람객들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그들이 만족스러워하는 도슨트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관람객들을 통해 알게 되었다.
젊은 사람보다 시니어가 해야 시너지 효과를 더 낼 수 있고, 시니어에게 특히 좋은 취미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아직 취미를 찾지 못한 시니어에게 ‘도슨트 활동’을 취미로 삼아볼 것을 적극 권하고 싶다.
도슨트 Tip
첫째, 설명할 때 긴장하면 관람객과 소통이 안 된다. 편안한 마음으로 친구 또는
가족과 이야기하듯이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설명한다.
둘째, 작품 설명은 핵심만 몇 개 골라서 설명한 후 흥미를 끌 수 있고 의미 있는 소재
중에서 작가나 작품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간략하게 설명한다.
이때 세대별로 공감할 수 있도록 눈높이를 맞춘다.
셋째, 시간 배정이 중요하다. 설명은 풀타임의 80%만 하고, 나머지는 질문을 받는다.
사람의 집중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30분이 넘어가면 지루해한다.
넷째, 과도한 복장과 구두, 액세서리, 헤어스타일은 전시 관람에 방해가 된다.
전시 작품보다 시선이 집중돼서는 안 되기 때문에, 관람객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편안한 복장을 한다.
지난 달 10월에 정책기자단에서 ‘서울 국제항공우주 및 방위산업 전시회 2017’ 행사를 보러 갔다.
성남의 서울공항에서 열린 이 날은 햇볕이 뜨겁지 않아 하늘을 올려다보며 첨단 전투기들의 화려한 곡예비행을 보기에 알맞은 날씨였다.
세계 최첨단 항공기 및 방위산업 기술의 현재와 미래를 한눈에 조망해 볼 수 있는 이 행사는 17일 개막하여 22일까지 6일간 개최되었다.
우리가 참석한 날은 비즈니스 데이로 세계 국방부 장관과 각 군 참모총장 등 초청 외빈과의 활발한 군사외교와 비즈니스 상담이 이루어질 것이라 한다.
서울공항에 입장하니 4개 동으로 커다란 막사 안에 최첨단 무기들이 전시되어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했다.
수많은 국내외의 방산업체에서 자신들의 개발 무기를 치열하게 설명 중이다.
우리나라는 한화와 LIG그룹이 가장 큰 규모로 전시하고 있었고 군소 방위산업체의 꼭 필요한 군수품이 바이어의 발길을 잡았다.
서울 국제 항공우주 및 방위산업 전시회는 96년도 제1회 서울 국제에어쇼로 개최한 이후 2년에 한 번씩 여는 국내 최대의 종합 항공우주 및 방위산업 비즈니스 전문 전시회이다.
국산 생산제품의 수출기회 확대와 선진 해외업체와의 기술 교류를 목적으로 개최되는데 이번 전시회에는 33개국 405업체가 참가하는 역대 최대 규모의 전시회로 기대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축사에서 강한 방위산업 역량을 바탕으로 국가 안보가 지켜질 수 있다며 방위산업 지원을 약속했다.
필자의 작은 소견에도 국방비나 군인을 위한 지원은 충분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북한의 끊임없는 도발에 평화를 지키려면 우리의 국방이 탄탄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전시회장에서 다양하고 많은 무기를 보았다.
미래에는 사람이 직접 싸우지 않고 무기로 조정해 전쟁을 치르게 된다니 미래 전쟁에 대비한 무기 연구도 활발히 진행 중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크고 작은 무기전시품 중에 재난 구조용 착용 로봇이 있었다.
SF영화에서 보았음직 한 로봇으로 사람이 착용 후 50kg의 짐을 지고 민첩한 행동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이 로봇은 전쟁 시 뿐 아니라 재난 상황에서 인명구조를 위해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번 전시회에는 국내의 우수한 항공기와 지상 방산제품 60종 72대가 전시되는데 성능과 국제경쟁력이 입증되어 수출 중인 KT-1 기본 훈련기와 T-50 고등훈련기의 시범비행, 국내기술로 개발한 K-2 전차 K-9 자주포 K-21 장갑차 천마 신궁 천궁 등이 전시되었다.
전시 기간 동안 항공기 시범과 공중 곡예비행을 통해 해외 참관 전문가들에게 우리나라의 항공우주 및 방위산업 제품의 성능을 알릴 계획이었다.
11시 30분 공중 곡예비행이 시작되었다.
굉음을 울리며 날렵한 전투기 한 대가 필자 곁을 스치듯 날아올라 비상했다.
이곳이 실제 전쟁터가 아니니 멋진 비행에 감탄하며 박수를 보내지만 만일 실제 전쟁상황이라면 얼마나 무서울지 가슴이 철렁했다.
평화와 나라를 지키기 위해 헌신하는 장병들과 안보를 위해 훌륭한 무기를 연구하고 생산하는 방위산업체에 고마움이 느껴졌다.
많은 사람들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멋진 비행에 탄성을 질렀다.
다이아몬드 대형으로 나르는 모습이나 여러 모습이 매우 정교해서 얼마나 훈련을 많이 했을지 짐작하게 했다.
대한민국 공군 특수 비행팀 ‘블랙 이글’은 초음속 고등훈련기 T-50B로 구성되어 이번 전시회의 하이라이트였다.
팬서비스하듯 보여준 빨간 하트에 파란 큐피드 화살이 지나는 모습은 모두의 미소와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이날 에어쇼를 지켜본 많은 해외 바이어들은 우리의 기술을 눈여겨보았을 것이고 수출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하고 싶은 말이 매우 많은 사람처럼 보였다. 교과서에서도 풍문으로도 들어본 적 없는 민족의 뿌리와 신화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남자. 탁성에 파장 깊은 목소리는 빠르게 내달렸지만, 여성 방청객이 많았던어느 날의 분위기와 맞지 않았다. 투박하고 투쟁적이었다고나 할까? 속 시원하게 이야기를 끝마치지 못한 남자에게 다가가 시간을 드릴 테니 못다 한 뒷얘기를 해달라고 청했다. 시대의 풍파를 억척스럽게 이겨낸 예술가이자 오랜미래신화미술관장 김봉준(金鳳駿·63)은 한 일도 또 할 일도 많다.
트라우마의 근원을 찾아 헤매다
강원도 원주시 문막읍. 서울에서 자가용으로 두 시간 정도 거리. 찻길을 지나 숲길, 논길, 밭길을 거쳐 다다르면 옛 기억을 찾아 떠나는 곳, 오랜미래신화미술관(이하 신화미술관)이 있다. 김봉준 관장이 이곳에 터를 잡은 지도 24년째다. 서울 토박이 김봉준 관장은 도시 삶의 피로감을 피해 시골로 탈출을 감행(?)했다고 말을 꺼낸다.
“나는 자유롭게 살아왔어요. 직장생활도 해본 적이 없고요. 이 시대가 요구하는 사회 질서에도 익숙하지 않습니다. 불편하고요. 생존하려고 적응하지만, 본질은 그게 아니죠. 그러니 20년 넘게 여기서 살아온 것입니다.”
강원도 산골까지 왜 왔는지에 대해 스스로 자문하다가도 ‘천생 팔자이고 운명’이라는 답에 이른다. 그리고 세월의 흔적과 아픔 또한 신화미술관에 담으며 살아왔다.
“나를 치유하고 거듭나지 않았으면 온전하게 살지 못했을 겁니다. 망가졌겠죠. 죽었거나 정신병자가 됐거나. 신화미술관 건물도 제가 지었어요. 꿈을 이뤄보겠다는 생각에 돈 한 푼 없이 맨땅에서 시작했습니다.”
신화미술관은 김봉준 관장의 안식처이자 낙원이다. 어릴 때부터 폭력으로 인한 트라우마에 시달렸기 때문. 이 상처를 끊어내기 위한 여정의 결과가 신화미술관에 깃들어 있는 셈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많이 맞고 자랐어요. 그게 트라우마가 됐죠. 한국전쟁 직후 세대인데 전쟁으로 인한 폭력 문화가 그대로 계승된 사회였습니다. 군인 출신 아버지에 군대를 경험한 선생이 있는 학교. 체벌이 너무 쉽고 당연한 사회였죠.”
김봉준 관장은 어린 시절 누군가에게 2차 폭력을 가하는 야만적 해소 대신 트라우마를 풀 수 있는 예술을 택했다.
“‘예술가가 되고 싶다’라기보다는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고픈 생각이 더 컸죠. 딴 전공은 생각해본 적 없이 홍대 미대에 진학했습니다.”
하지만 입대한 군대에서도, 심지어 민주화 운동을 할 때도 폭력은 계속됐다.
“같이 운동하는 선배한테도 그런 일을 당했어요. 예술을 하는 입장이니 마음도 여리고 폭력을 당한 이후에 그것을 극복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하는 것으로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다 눈뜬 것이 바로 탈춤이었다. 역동적인 예술에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학교에 동아리를 만들었다.
‘굿’은 풍물 자체이자 문화의 뿌리다
“제가 그때 풍물에 미쳤어요. 홍대 탈춤반을 데리고 1970년대에 우리 가락이 있던 곳을 찾아서 답사를 다녔어요. 전라북도 남원, 진안, 임실이 풍물로 가장 유명해서 찾아갔습니다. 남원 산골에 갔더니 할아버지가 ‘농악’이란 말을 못 알아듣더라고요. 열심히 설명을 해드렸더니 그제야 ‘굿, 우리 굿이 셌지’라고 하셨어요.”
농악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우리 가락을 깎아내려서 부른 말이었다. ‘굿’의 의미에는 무당의 굿만 있는 게 아니었다.
“풍물, 마을 전체를 합쳐서 하는 큰 행사를 대동굿, 별신굿이라 불렀어요. ‘굿 구경 가자’ 하는 것이 예술굿이었고, ‘두레굿하자, 풍장굿하자’ 하는 것은 노동굿이었죠. 노동의 조직만이 아니라. 이 마을의 난리굿이 셌어. 의병굿이 셌어. 이런 말도 해요.”
당시 일제는 조선민속연구를 통해 조선 사람의 조직적인 힘의 원천이 굿에 있다고 보고 이를 없애고자 했다. 현재 우리가 말하는 의병운동도 당시 사람들은 ‘의병굿’으로 불렀으니 굿이라는 말이 지금보다 더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 것이 분명하다.
“민중의 언어는 한자말이 아니잖아요. 그 말을 써왔고 굿이 다 그 말을 포괄했다고요. 동학굿을 난리굿이라고 불렀어요. 동학 때 그냥 갔을 거 같아요? 풍물굿이 같이 갔습니다. 그리고 신앙으로서의 굿이 있단 말이야. 그 공동체에서 내려오던 자기 신앙. 옛날부터 뿌리 신앙 굿이었던 거죠.”
탈춤에 미쳐 있던 시기 자연스럽게 탈에 표현된 그림을 그리기 위해 불화(佛化)를 배우게 됐다.
“옛날 탈을 만들려고 보니까 대학에서 배운 그림 기법으로 안 되는 거야. 가만 보니까 단청 그림하고 비슷해. 양식이 내가 배운 수채화나 유화로는 표현할 수 없겠더라고.”
고민하다 보니 탈에 표현된 느낌이 단청하고 같은 양식이었다. 고대부터 내려오는 그림을 배워야겠다 싶어서 인간문화재인 봉원사의 만봉 스님을 찾아갔다.
“대처승이던 만봉 스님이 단청 장인이었어요. 어떤 절이든 상관없이 주문이 오면 후불탱화를 그려주는 분이셨어요. 인간문화재로 등록된 사람은 배우겠다는 사람을 가르칠 의무가 있어서 한 달에 얼마씩 지원금이 나왔고 저는 무료로 불화를 배웠습니다.”
만봉 스님에게 배운 불화는 고대부터 내려온 화법이었다. 대학교의 동양학과에서도 가르치지 않는 고유의 것. 그렇게 대학 생활 3년 동안 힘을 기울여 배운 불화는 김봉준의 그림과 조각, 글씨에 그대로 배어 여전히 진가를 발휘하고 있다.
유학을 포기하고 신화미술관 문을 열다
서울에서 태어나 줄곧 도시 생활을 했던 김봉준 관장은 탈춤을 계기로 접하게 된 마을 문화와 지역 신앙, 정신에 매료되기에 이른다.
“마을 문화를 공부해야겠다 싶어서 외국 유학을 포기했습니다. 친구들 대개 뉴욕이나 파리로 유학을 가는 거야. 미대 조소(彫塑)학이다 보니 서양을 유학의 성지라고 생각하잖아. 그런데 나는 거꾸로 이리로 온 것이죠. 더 공부해야겠다. 그래서 마을 문화부터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가지 지역 문화 축제를 열고 관여하다 2007년에 문화관광부가 지원하는 지역 문화 만들기 프로젝트에 선정돼 받은 돈으로 신화미술관을 개관했습니다. 2008년 10월에요.”
의문이 생겼다. 지금까지 탈춤으로 시작해 굿에 관한 이야기를 해왔는데 왜 탈춤이 아닌 신화를 선택했는가 하는 점이다.
“신화에는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굉장히 보편적이고 포괄적인 개념이죠. 굿을 뿌리로 한 신화 구조이죠. 신화에는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문화가 있고, 일종의 기도, 음악, 춤, 미술, 모든 것이 있습니다.”
신화미술관 안에는 김봉준 관장이 직접 제작한 다양한 형태의 조각상들이 자리하고 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여신상을 모아놓은 구역이 있고, 건국신화를 비롯해 창세, 토템(동물상), 저승, 도깨비, 마을의 신화를 모아놓은 것이 각각 있다.
“현대 사회는 마을을 무시하지만 아주 중요한 단위입니다. 가족, 마을 문화가 무너진 광장 문화는 의미가 없습니다. 뿌리가 없는데 시민사회 공동체가 이뤄지겠어요? 사람도 세포가 있어야 형성되는데 마을 문화도 일종의 세포입니다.”
암 환자의 의지, 씩씩한 조각상으로
초야에 묻혀 사는 것처럼 보여도 김봉준 관장은 지극히 사회 참여적인 인물이다. 광화문에서 열렸던 촛불 집회에 거의 빠지지 않고 참석했을 뿐만 아니라, 세월호 참사 현장에도 찾아가 유족들을 위로하는 조각상과 판화 등을 제작하기도 했다. 오랜미래신화미술관장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화가로, 탈춤에 빠져 있었던 연출가로, 시민운동가로 살고 있다. 그저 마음이 가고 발길이 닿는 곳에서 어떤 형태로든 행동하고 반응하는 전천후 예술가의 삶이 김봉준 관장의 하루하루에 녹아 있다. 그러다 보니 몸에 병이 든 줄도 모르고 시간을 보내고 말았다.
“부천에서 시민운동을 하다 이곳으로 왔는데 임파선암 3기 말이었어요. 자가진단을 한 것이 잘못이었어요. 위쪽인 줄 알고 위 내시경만 했거든요. 다행히 전이가 안 된 상태였어요. 암 치료받은 지 17년 됐고 아주 씩씩하고 용감하게 살고 있습니다.”
미술관 건물은 아프고 난 다음에 지었다고 했다. 암과 한바탕 결투를 벌인 이후 만든 조각상이라 씩씩하고 힘찬 느낌이라고.
“암에 이기지 못하면 지는 거잖아요. 절망의 시기를 겪고 죽음의 절벽과 언덕을 넘은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블랙리스트 인생이 지금의 나를 만들다
“나는 3번의 블랙리스트를 겪은 거 같아.”
1980년대에는 5·18 포고령 수배자였다. 1년 후 다행히 포고령이 풀려 개과천선하고 살 수 있나 싶었는데 1990년 윤석양 이병이 들고 나온 보안사 민간인 사찰 문건에도 김봉준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지난 정부 9년 동안 그는 예술가 지원 정부 사업에서 제외됐다. 인터뷰 초반 ‘자유롭게 살아왔다’는 말은 알고 보니 당시를 추억하는 씁쓸한 넋두리였다.
“근데 말이지 문화 창조는 비주류에서 나온다고. 지금은 주류에 임박했는데(웃음).”
과거 그는 사회 구성원으로 살 수 없었다. 탈춤을 찾아 방황하고 탈 그림을 그리기 위해 배움의 길을 닦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나 같은 사람은 대학 졸업을 해도 이미 사회에서 계속 찍혀왔기 때문에 좋은 직장을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어요.”
신화미술관 한편에는 그림이 빼곡히 걸려 있다. 동양적 색채가 강한 그림과 광장을 표현한 판화 등 다양하다. 지금의 정권이 아니었다면 걸어놓지도 못했을 거라고 웃어 보인다.
“그런데 촛불 집회 때문에 자신감이 생겼어요. 예전에는 꼭꼭 숨겨두기도 했습니다. 판화도 다양하게 많은데 원하는 사람들에게만 팔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저에게 컬렉터들이 붙고 있어요. 그런 사람들 눈치도 빠른 거 같아요. 춥고 배고플 때 좀 사주지(웃음).”
생업 작가로서의 삶은 계속된다
정말 본의 아니게 전업 작가로 살아온 60여 년의 세월이다. 홍대 미대 출신, 깔끔하고 단정하게 뉴욕의 화랑에서 멋들어진 전시회 여러 차례쯤은 열었을지도 모를 사람. 그러나 많은 시간을 숨어 살았고 민족의 뿌리 문화를 찾아 헤맸으며 지금은 신화와 숨 쉬는 인생을 살고 있다.
“나 그래도 판화도 팔고, 디자인 주문 들어오면 글씨도 써요. 70년대부터 스님으로부터 고법으로 붓을 쓰는 법을 잘 배웠잖아(웃음).”
예술가로서 마음속으로 꿈꾸는 좋은 미래가 어떤 모습인지 물었다.
“과정에서 좋은 미래로 가는 길을 차근차근 한 발 한 발 가는 거겠죠. 내 세대의 징검다리에서 다음 세대의 징검다리로 조금씩 사회를 변화시켜나가야겠죠. 내가 가는 길이 희망이라고 생각해요. 나 또한 예술을 배반하지 않고 지금까지 온 것이 뿌듯합니다. 당당합니다.”
필자는 3년 전에 은퇴를 했다. 은퇴를 몇 년 앞두고 이후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심하게 된 것은 은퇴 준비 없이 살아가는 노인들의 비극적인 삶이 매스컴을 통해 보게 되면서부터다.
필자도 쉼 없이 달려온 직장생활 43년 만에 완전한 자유인이 되었다. 각박한 사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던 깨알 같은 시간들을 뒤로 한 채 텅 빈 세상 속으로 내동댕이쳐진 듯한 허전함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한 집안의 가장으로, 남편으로, 두 아이의 아버지로 허둥대며 살아왔던 시간들을 돌아보니 정녕 자신은 잊어버리고 살아온 지난날이었다.
어린 시절, 고향집 사랑방은 필자의 큰아버님께서 운영하시던 서당(書堂)이었다. 밤이 되면 사랑방에서 천자문 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울려퍼졌다. 틈틈이 서당으로 불러 천자문을 읽고 쓰기를 가르쳐주셨던 큰아버님의 배려로 제법 붓 잡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서예 대가 김상용 선생님께 사사
정년퇴직 후에는 그동안 잊고 살아온 서예를 다시 해보겠다는 희망의 불씨를 가슴속에 품고 있었다. 아마도 어린 시절의 천자문 읽는 소리와 아련한 묵향이 내면에 잠재되어 있었던 것 같다. 퇴직이 몇 년 안 남은 어느 날 우연한 기회에 서예 대가 김상용 선생님을 만나 정식으로 서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비록 늦은 나이에 입문했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연마하던 필자에게 선생님은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지도해주셨고 글쓰기 이전에 마음가짐의 정갈함을 늘 강조했다.
어느 날 오후, 종로3가에 있는 서실(書室)을 찾았다. 일주일에 한 번씩 서예 개인지도를 받는 곳이었다. 필자는 각별히 신경을 써주시는 스승님을 위해 가끔씩 간식을 준비해 찾아가곤 했다. 그날도 간식거리를 준비해 서실을 찾았는데 마침 후배 문하생이 지도를 받고 있었다. 느닷없이 필자가 등장하자 그날의 마지막 수업을 끝내신 선생님께서는 막걸리 한잔 하자며 극구 붙드셨다.
평소에도 선생님과 가끔씩 들르는 종로3가 단골 녹두빈대떡 집에서 스승과 제자가 막걸리 사발을 앞에 놓고 세상 사는 얘기에 푹 빠졌다. 선생님은 값비싼 양주에 진수성찬을 차려준다 해도 이렇게 조촐한 이야깃거리를 안주 삼아 기울이는 막걸리 한 잔이 훨씬 더 행복하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선생님과 호젓한 빈대떡집에 마주 앉아 ‘막걸리 한잔의 행복!’으로 담소삼매경에 빠지다 보니 어린 시절 시린 손 호호 불며 주전자 들고 막걸리 받으러 가던 추억이 떠올랐다. 고사리손에 주전자 들고 고개를 넘던 기억은 아버지와 관련한 소중한 추억 중 하나다.
필자는 서예에 입문하면서 선생님의 지도하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이면서 붓글씨를 배워나갔다. 다음 시간까지 해갈 과제물을 숙제로 받아오는 날이면 자정이 넘는 시간까지 몇 번이고 쓰기를 반복했다. 다음 날, 그중 제일 잘 썼다고 생각되는 한 점을 골라 의기양양하게 서실로 달려가면 선생님은 가차없이 따끔한 지적을 하셨다.
어쩌랴! 다음번 과제물을 받아와 선생님께서 지적했던 부분을 염두에 두고 또다시 붓과 씨름했다. 묵향에 취해 어질어질할 때까지 멈추지 않고 정진했다.
선배 문우들과 함께한 전시회
2010년 초, 우연한 기회에 중국 산둥 성의 동남부에 위치한 린이(臨沂) 시를 여행하게 되었다. 당연히 린이 시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져 있는 왕희지의 고택을 방문했다. 서성(書聖)으로 존경받는 동진의 서예가 왕희지는 지금의 산둥 성 린이 현에서 태어났으며 동한 시대에 시작된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의 실용서체를 예술적인 서체로 완성시킨 인물이다. 서예 공부를 하던 중 돌아보게 된 왕희지의 발자취는 필자를 더욱 분발하도록 했다.
가을 냄새가 물씬 풍기던 2013년 11월의 어느 날, 인사동 모 전시회관에서 그동안 틈틈이 갈고닦았던 서예작품 전시회를 가졌다. 턱없이 부족한 필력이었지만 까마득히 높은 선배 문우들 틈에서 몇 점을 출품하게 되었다. 비록 열심히 했다고는 하지만 경력이 일천한 관계로 선배 문우님들 눈에는 그저 보잘것없는 작품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좀 더 정진하는 계기로 삼고자 겁 없이 전시회에 명함을 내밀었다. 하기야 처음부터 잘 쓴 사람은 없겠지만 공부를 할수록 어렵다는 생각에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을 떠올리며 스스로 부족함을 깨닫고자 해서였다.
쉼 없는 도전정신은 내면의 자아를 새롭게 발견하게 해준다. ‘정년퇴직’은 은퇴자의 무덤이 아니다. 비로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즐기도록 해주는 반전의 기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시니어들이여, 용기를 내어 하고 싶은 일에 도전해보자!”
문방사우(文房四友)란 벼루[硯], 먹[墨], 붓[筆], 종이[紙]를 말한다. 예로부터 선비나 문사(文士)들 곁에는 이 네 가지가 늘 함께 있었다. 벼루에 먹을 갈고 붓에 먹물을 적셔 종이에 글씨를 쓰면 서찰(書札)도 되고 시(詩)도 되고 서화(書畵)도 되고 상소문(上疏文)도 되었다. 보조기구로는 벼루와 먹을 넣어두는 연상(硯箱)이 있고 종이를 말아서 보관하던 지통(紙筒), 붓을 꽂아두는 필통(筆筒)도 있으나 역시 화룡점정(畵龍點睛)은 연적(硯滴)이라 할 수 있다. 토기나 도자기 혹은 놋쇠로 만들어진 연적은 먹을 갈 때 필요한 물을 담아두는 작은 기물이다.
그런데 그 기형이 다채롭고 격이 높아 선비들의 호사(豪奢)가 되기도 했다. 서울이나 지방의 고미술 상점을 지날 때마다 연적에 눈이 쏠려 만져보곤 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서예 수업이 있어서 준비물로 문방사우와 연적을 갖추긴 했다. 학교 앞 문구점에서 조악한 품질의 것들을 팔았으나, 연적은 없어서 컵이나 주전자에 물을 준비해 조금씩 따라 먹을 갈았다. 그래도 열서너 명은 집에서 어른들이 쓰던 사기 연적을 갖고 왔는데 청채(靑彩)의 붕어 모양이 제일 많았다. 나는 형이 쓰던 푸른 문양의 사각형 사기 연적을 갖고 다녔는데, 알고 보니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이 땅에서 만들어 팔던 ‘왜사기’였다.
그들은 우리나라 도자기에 매료되어 그것들을 수집하려고 부산 등지에 현대식 사기 공장을 크게 짓고 밥그릇, 국그릇, 종지, 접시, 요강, 연적들을 만들어 방방곡곡을 누비며 우리의 청자, 백자, 분청자기와 바꿈질을 했다. 그래서 오지의 초가 구석에 있던 간장종지까지 산뜻한(?) 왜사기로 바뀌게 되었다. 시골 장날이면 우리의 민속품이나 도자기들은 바리바리 일본 상인에게 들려 바다 건너로 사라졌고 흔하던 붕어연적도 씨가 마를 정도가 되었다.
나는 향리에 갈 때마다 옛 벗들에게 붕어연적을 탐문했으나 구할 수 없어 안타까웠다. 인사동의 고미술상에 있는 연적들은 희귀하고 예술성이 높은 것들이라 값이 비싸 구입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주말마다 황학동 일대의 벼룩시장, 답십리 고미술 상가를 훑고 다녔지만 옛것을 모방한 현대의 것들뿐, 조선조 말기의 것조차 구하기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대구 출장 중에 골동품점에서 처음 청채 연적을 구입했다. 붕어라기보다는 잉어에 가까웠는데, 구부린 자태며 비늘과 수염까지 정교한 데다 은은하고 맑은 코발트 유약이 일품이고 수구(水口)며 밑 처리도 깔끔해 얼른 지갑을 열었다. 그 뒤로 인사동 도자기 경매장에서 여러 형상의 연적들을 구입했다. 개중에는 중국을 통해 북한에서 흘러온 것들도 있었다. 한 30여 년 수집하다 보니 조선조 중기에서 말기까지의 것이 100여 점 되고, 현대 도예가들에게 부탁해 빚은 연적이 300여 점이나 있다. 언젠가는 소장한 연적으로 작은 전시회를 꾸밀 계획이다.
지금은 물건이 귀해져 값이 만만치 않지만, 내가 연적을 마음에 두고 수집하기 시작할 때는 다른 도자기(항아리, 다완, 주병 등)에 비해 가벼운 편이었다. 팔각(八角) 국화문이나 풀 무늬의 것[사진 1]은 선이 비뚤고 각(角)이 아홉인 것도 있다. 지방 가마에서 이름 없는 도공이 무심히 빚고, 우리 땅에서 나는 탁한 토청(土靑)을 바른 그 소박함이 좋다.
고미술상에는 도자기는 물론 석물(石物), 목물(木物), 서화 등 그 구색이 다양한데 고졸(古拙)한 멋의 책상이나 소반, 반닫이, 목판 따위에 밀려 한 귀퉁이에 박혀 있는 문짝에 관심을 가져볼 일이다.
대부분의 문짝들은 구옥(舊屋)이 헐리면서 수습된 것이기에 그 짜임도 지방 따라 다양하고 목수 솜씨에 따라 품질이 각색이지만, 연대가 깊지 않아 가격이 저렴하다. 20~30cm의 작은 문짝들도 그 짜임이 조밀하고 문살도 가지런해 조형미가 그만이다. 다락방 들창이었거나 고방(庫房)의 환기창으로 소용되었을 문짝 한 쌍을 벽에 걸고 보면, 벽 너머 푸른 하늘이 열릴 것 같은 아련한 환상에 젖는다.
우리나라 문화를 사랑한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는 우리의 목기를 ‘자로 잰 듯 반듯하지 않고 손으로 툭툭 다듬은 것처럼 비뚤고 세련되지는 않지만 균형 잡힌 든든함’이라 칭송했다.
창살 모양에 따라 완자문(卍字門), 아자문(亞字門), 격자문(格子門), 정자문(井字門), 용자문(用字門) 등 그 이름이 다양하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백미는 ‘꽃창살문’이다. 일반 사가(私家)보다는 사찰 문에, 일일이 꽃 모양을 깎아 맞추고 단청으로 장엄(莊嚴)한 문을 바라보면 황홀경에 빠지게 된다. 전북 부안의 ‘내소사(來蘇寺)’ 법당 문의 꽃창살은 1633년에 창건된 법당과 함께 만들어졌다. 긴 세월 비바람에 단청마저 퇴색되었으나, 색을 덧바르지 않고 나무의 속살 그대로를 드러낸 채 속계(俗界)와 선계(禪界)의 통로가 되고 있다. 연꽃, 국화, 모란의 꽃들이 사선으로 혹은 나란히 연결된 채 500년 가까이 침묵의 고태미(古態美)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법당 문의 문창살을 이토록 정교하게 빚어낸 것은 형태와 빛깔 그 자체가 그대로 깨달음의 세계[理事無碍法界]라는 저 화엄(華嚴)의 세계를 시각적으로 강조하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석지현(釋智賢, 1946~) 승려 시인의 말이다.
문짝[사진 2]은 지리산 산록에 거주하며 옛 목기들을 정성스레 재현하고 있는 한 목수의 솜씨다. 1 대 2의 비율로 문틀을 짜놓고, 사선으로 문틀에 꽉 차게 두 종류의 꽃 모양을 조각한 문살을 끼웠다. 뒷면에 창호지를 바를까 하다가 공간의 멋을 즐기려 그냥 서재 책장 옆에 걸어두고 있다.
골동품을 수집하려면 주변의 민속품에 먼저 눈길을 줘보자. 아직은 값이 싼 실패, 골무 등 규방의 것부터 홀대받고 있는 작은 문짝들까지 모으다 보면 5~6년 후엔 값도 많이 오를 것이고 심미안도 높아져 ‘우리 것을 지킨다’는 자긍심이 저절로 우러날 것이다. 청채의 붕어, 해태, 나비 모양 연적도 눈에 띄거든 주저 말고 수집할 일이다.
아침 6시 40분 부산행 무궁화호 열차에 몸을 실었다. 덜컹덜컹 몸이 흔들린다. 바깥 풍경은 오랜만에 선명히 잘도 보인다. 세련되지 않지만 뭔가 여유롭고 따뜻한 느낌이랄까? 한국 예술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부산포 주모(酒母) 이행자(李幸子·71)씨를 만나러 가는 길. 옛 추억으로 젖어들기에 앞서 느릿느릿 기차 여행이 새삼 낭만적이다. 한껏 기대에 부풀어 들어간 부산포. 작은 낙서, 그림 하나, 스치는 공기까지 어느 것 하나 특별하지 않은 것이 없다.
부산의 마지막 주모를 만나다
부산 지하철 1호선 중앙역에서 용두산 공원 방향으로 걸어가는 길은 깨끗하고 단정하다. 신식으로 잘 닦인 거리. 오래된 주점을 찾아 두리번거리다 오른쪽으로 난 작은 골목에 釜山浦(부산포)라고 쓰인 간판이 보인다. 이곳에 우리나라 예술인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아온 주모 이행자씨가 있다. 깡마른 체구에 걸걸한 목소리가 매력적인 이행자씨는 중앙동 바로 옆 동광동에서만 42년째 주모로 살고 있다. 혹자는 이행자씨를 부산의 마지막 주모라고 말한다. 남들 다 떠나갈 때 그 자리를 지키고 앉아 옛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주막은 현재 부산포 하나다. 의미를 모르면 동네 흔하디흔한 주막, 조금만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이면 세상 그 어느 것보다 값진 역사와 예술가의 정이 흐르는 곳, 부산포다.
주막의 분위기는 주모가 잡는다
부산의 중앙동과 남포동 일대는 10여 년 전만 해도 부산의 굵직한 화랑들과 함께 인쇄 골목이 형성돼 있어 문인과 화가들이 넘쳐나는 이른바 예술의 거리였다. 지금은 해운대 일대로 예술 관련 사업이 옮겨가 작가들의 발길이 뜸해진 지 오래다. 외딴섬처럼 덩그러니 남겨진 부산포지만 그 안에는 옛 예술가들의 체취와 발자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낙서 하나하나, 벽에 펜으로 휘갈긴 듯 그린 그림 속 인물은 한국 문단과 화단을 주름잡던 일류 작가군단이다. 매일 문지방이 닳도록 부산포를 오간 문화 예술인만 수백은 될 것 같다. 부산포 주모 이행자씨가 이토록 작가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가 뭘까?
“내 고집대로 한 거지 뭐. (화장) 진하게 하고 나와서 하하 호호 하는 꼴을 내가 못 봐. 그러니까 손님은 없어. 옛날이야 줄 섰지만. 내 성질이 개떡 같아. 손님들도 내쫓아요. 욕하는 사람, 슬리퍼 신고 오는 사람 다 쫓아내. 슬리퍼는 점심에 밥 먹을 때는 괜찮은데 저녁엔 옛날 어르신들 계시고 이라니까. 분위기도 내가 만들어주는 거지. 그냥 손님들이 만드는 게 아니야. 그래서 뺨때기도 때리고 젊을 때는 말 못해. 마대자루 들고 패지, 물바가지로 퍼붓지. 소문이 났어. 좋게 날 리가 없지.”
베테랑 주모의 애틋한 고객 관리(?)는 바로 어르신들을 제대로 알아보고 보살피는 게 전부였다. 이행자씨가 말하는 그 어르신들이란 1900~1920년생 한국 예술계 전설적 인물이 줄을 잇는다. 독립운동가이자 예술인 먼구름 한형석을 비롯해 오제봉, 김정한, 김종식, 오영재, 천재동, 공초 오상순, 하인두, 시인 구상까지 평생을 살아도 만나 뵙지 못할 귀한 인물들을 주모로서 극진히 맞이했고 술동무로 가시는 날까지 정성을 다해 모셨다. 손님을 가려서 받게 된 것도 문화계 원로 선생님을 모시는 일종의 방법이었다.
“손님들이 이상한 행동 하는 꼴을 내가 못 봐. 들어왔는데 뭔가 느낌 이상한 사람이 들어오면 장사 안 한다고 하고, 소주 보여도 소주 없다고 하고. 보면 알지. 매너가 엉망인 사람이 보인다고. 술 먹고 변할 사람들도 보이고.”
그런데 이행자씨에게는 철칙 하나가 있다. 절대 욕은 안 한다.
“내는 고함은 지르는데 욕은 하지 않아. 근데 누가 나더러 욕쟁이 할머니래. 와? 내가 욕하는 거 봤나. 내가 욕하면 쫓아내는데. 욕하는 사람이 나는 제일로 혐오스럽다. 나도 욕할 줄 알거든. 그런데 안 할 뿐이야.”
누부야 누부야 그냥 갈 수 없잖아展
이행자씨는 서른 초반이던 1970년대 말 ‘대구집’으로 문을 열었다. ‘골목집’이란 이름을 지나 1994년 지금의 부산포로 주막 간판을 바꿨지만 주모도 그대로 추억도 그대로다. 그렇다고 마냥 행복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2003년에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몸에 이상신호가 왔다. 일생일대의 위기였다.
“믿고 지냈던 사람에게 보증을 서줬다가 건물이고 가게고 순식간에… 30여 년 동안 차곡차곡 쌓아온 것을 한 번에 다 날렸으니 난 어땠겠어.”
며칠씩 잠도 안 자고 하루 종일 담배만 3갑씩 피웠다.
“1세대 선생님들은 동동주하고 맥주하고 타서 ‘동맥’이라고 하시면서 섞어 드셨다 아이가. 그게 맛이 괜찮아. 30~40대부터 그렇게 술을 먹었는데 일 터지고 한 달 내내 그렇게 마셨어. 돈이고 뭐고 다 귀찮고. 술도 안 받는데 계속 그렇게 먹었어. 결국 몸이 고장 난 기지.”
안색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한 달도 안 돼 치아가 빠지기 시작했다. 위암 초기였다. 그때 이후로 술은 끊었지만 담배는 손에서 떼지 못했다. 그렇게 쓰러진 주모 이행자를 위해 부산 예술인들을 주축으로 대단한 일이 벌어졌다. 판화가 주정이가 주축이 돼 주모 이행자씨를 돕는 특별전을 펼친 것. 그게 바로 ‘누부야 누부야 그냥 갈 수 없잖아展’(2009. 7. 14~8. 31)이었다.
“옛날 1세대 어른들을 내가 잘 모셨어. 부산포를 살려야 한다 그라셔서 살려주신 거지. 대학에 있는 분들도 있지만 대부분 전업 작가들이시고. 정말 십시일반 해서 도와주셨어. 부산비엔날레 운영위원장 하시던 이두식 선생님도 돌아가시기 전에 작품을 내주셨고.”
이 전시회를 통해서 3000만원이 훨씬 넘는 자금이 모였다. 그래서 현재의 부산포 자리로 옮겨 명맥을 다시 이어갈 수 있었다. 새로운 곳으로 이전해 다시 활기차게 생활을 하지만 몸은 성한 곳이 없다. 예전에는 일하는 사람을 뒀지만 지금은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다 주모 이행자씨의 손을 거친다. 이렇게 한 것이 6년째. 손가락에는 류마티스가 왔고 복숭아뼈 양쪽에 물이 차 추석쯤 병원에 가 치료를 받을 생각이다. 위암 정기검진을 받아야 할 시기가 지났는데도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나는 지금 병원에 가면 눕혀서 못 나와. 병원 가면 문 닫아야 해. 그래서 안 간다 아이가. 한 1년 넘었어. 병원에서 전화 오면 ‘괜찮소. 나 아직 빨딱거리고 잘 돌아다니거든’ 이런다(웃음)! 약만 먹고 안 간다.”
젊었을 때부터 그렇게 좋아하던 산도 다리가 좋지 않아 갈 수 없다. 지리산이고 설악산이고 선생님들과 많이 오르고 종주도 했다.
“그 대신에 용두산 공원은 좀 걸어. 시간 있으면 올라가. 이제 아픈 것도 모르겠어. 이러다 병도 친구 삼아서 함께 같이 있다가 같이 죽자 한다(웃음).”
부산포 주모, 문화계 원로와 어깨를 나란히
“그림 작품 같은 거 잘 보시겠어요?”
이 질문에 피식 웃으면서 짧게 대답한다.
“살다 보면 눈에 보이지 뭐. 세월이 40년인데 좀 안 보이겠어?”
문화계 원로에 대한 얘기를 듣다 보니 주막 주모가 아니라 화랑 관장님과의 대화라 해도 믿을 것 같다. 이행자씨도 그런 얘기를 여러 사람에게 들었다. 주모가 아니라고.
“많이 배우지. 좋은 얘기를 많이 듣고 해서 가끔 보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입으로만 떠드는 사람들도 보여. 자기 스스로 공부한 것이 아니라… 시인들한테도 이게 시냐? 편지 썼냐? 그런다(웃음).”
문화계 인사는 물론 방송국, 신문사 등 언론인, 대학 총장, 의사 등등이 주모 이행자씨의 고객이자 친구, 모시는 선생님들이었다.
“여행도 그런 분들이랑 많이 다녔어. 1993년도에 러시아에 갔었는데 그때만 해도 러시아 가는 게 쉽지 않을 때잖아. 근데도 갔었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발레 을 봤는데 정말 너무 잘 봤어. 진짜 값진 인생 살았다. 돈 주고도 못 사는 삶을 살았어. 결혼? 안 해도 돼. 외로워? 뭣 때문에 외롭노?”
결국 이 특별한 주모는 선생님들의 사랑에 부족함을 느끼지 못했고 일평생 결혼은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나는 안 갔어. 그때 당시만 해도 희귀동물 같은 사람이었어. 드레스를 입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 해본 적이 없어.”
행여나 프러포즈를 해오고 연애하자는 자가 있으면 이행자씨한테 걷어차이기 일쑤였다.
“내가 깡패가 됐잖아. 우리 집에 옛날에 왔던 손님들, 어르신들 빼고 내 발로 팔꿈치로 안 차여본 사람이 없다. 어른들 말고는 다 맞았을 거다. 하도 집적거리니까.”
이행자씨는 어떤 누구를 만나는 것보다 매일 찾아오는 어르신과 대화하고 이야기 듣는 그 시간을 기다리고 사랑했다.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대가라는 사람들이랑 대화라도 하려면 내가 얼마나 노력하고 신경 써야겠어. 아닌데도 맞다고 해줘야 하고 달래줘야지. 문인들이 아주 잘 삐진다. 붙어 싸우다 술 먹으면 또 화해하고 그랬다.”
당시에는 거의 가족이었다. 옛날 1세대 어르신들이 한창 부산포에 드나들 때는 젊은 사람들은 들어와 앉을 자리도 없었다.
“그 시절에는 흥이 나서 놀다 누군가 지명하면 무조건 노래를 불러야 했어. 근데 절대로 젓가락 숟가락 못 두드리게 했다. 여기는 그냥 막걸리집 아니라고 절대 못하게 했다. 끝나면 박수치고 흥 나면 소리 안 나게 박수쳤지.”
이렇게 부산포 안을 가득 채우는 작가들이 많았지만 지금처럼 정확하게 돈을 받을 수 없을 때였다. 가난한 시절 라면값도 없던 분들이 많았다.
“대학교수도 있었지만 작품 활동만 하는 사람들도 있잖아. 그래서 그때부터 감자 주고 우거지 주고 그럼 술 마시고 잡숫고 그냥 가셨다. 어른들이라 외상값 장부도 없었다.”
그냥 술만 팔면 될 텐데 스스로 예술가의 가치를 흠뻑 느꼈기에 정성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다르다고 했잖아. 요즘은 택도 없다(웃음). 주는 만큼 받아야지.”
주막이니까 주모로 불러야지
지금도 주모로 부르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이모로 불리는 건 싫다. 누군가 무심코 그렇게 부르면 “내가 느그 이모도 아닌데 왜 그리 부르노!” 하며 부산 사투리가 강하게 터져 나온다.
주모라고 불리는 게 그럼 왜 좋을까?
“옛날에 동동주 팔고 그러던 곳을 주막이라고 했잖아? 어르신들이 있었던 곳. 그러니까 주모지. 원래 여기 세 집이 있었는데 지금은 이거 하나 남았어. 강나루는 시인 마누라가 하는 곳이었는데 거기도 어려울 때 시인들이 시화전도 열어주고 했던 곳이야.”
그렇다고 모두가 주모라고 부를 수 있는 게 아니다. 적어도 부산 사진의 역사라고 불리는 김탁돈(동아대 전 신문방송학과 교수) 정도는 돼야 부를 수 있단다.
“내가 올해 일흔두 살이니까 한 10년 더 살면 될까?”
갑작스러웠다. 아직도 젊고 생생한 주모의 입에서 그리움이 느껴졌다.
“어른들 참 많이 모셨지. 부산 세관장, TBC 사장, 대학 총장, 회장. 안 온 사람이 없어. 근데 이제 다 돌아가셨다. 나도 선생님들 따라갈 때가 얼마 남지 않았네. 지금도 선생님들 모여서 동맥 한잔씩들 하시겠지?”
부산포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에게 물려주고 싶은데 아직 물색 중이라고 했다. 술 팔고 밥 팔면서 예술을 하는 사람이 이 자리를 지켰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정말 부산포를 다 접고 나면 뭘 하고 싶은지 물었다.
“옛날에 건물 있을 때는 시골 들어가 살려고 했는데 그건 안 되겠고. 슬슬 산책하고 살 수 있을까 몰라. 성질이 급해서 뭘 할는지. 뭐 일하면서 살겠지.”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을 우리나라 진경산수(眞景山水)의 시발(始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있는 그대로의 풍경을 관념의 이입(移入) 없이 자연스럽게 펼쳐 보이자’는 화풍은 특히 중국의 관념적이고 과장된 그것에 비해 스케일이 적고 다소 초라해 보일지라도, 우리의 풍광을 소박한 그대로, 진솔하게 그림으로 남기는 데 큰 의의가 있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풍경을 화폭에 정지시켜야 하는 속성상, 실제의 입체 공간을 평면화하자면 화가의 고민이 깊어진다.
평론가나 미술기자들은 ‘오지호(吳之湖, 1905~1982) 이래 우리에게도 매우 친숙해진 인상파풍의 과학적 특성을 철저히 연구, 우리나라 언덕길의 전형적 각도, 전형적 시야, 경상 지방의 낯익은 한국의 땅이 그 살가죽을 부끄럼 없이 다 드러내놓는 겨울을 많이 그리는 작가’로 이원희(李源熙, 1956~)를 으뜸으로 꼽는다. 그의 구도는 웅혼하여 일체의 장식이나 꾸밈이 없다. 거칠고 척박한 산비탈 뙈기밭을 그대로 그려낸다. 봄부터 씨앗을 뿌리고, 김매고, 물 주고 가꾼 농작물들이 나름대로 결실을 맺고, 농부의 손길로 추수되고 난, 빈 밭에 서리가 희끗하다. 이제 이 황토의 밭들은 겨우 내내 찬바람 눈서리에 뒤척이다, 다음 봄 새 씨앗을 심을 때까지 아픈 몸부림을 할 것이다.
이원희 화가는 경북 의성 안평리의, 궁벽한 마을 산비탈에 서서 내려다본 풍경을 눈에 가득 담는다. 야트막한 왼편 언덕을 따라 이어진 황톳길이 작은 밭을 나누어 가며 구릉을 지나 야산으로 이어진다. 계곡이 깊지 못하니 물이 흐를 리 없고 땅 모습이 평평하지 못하니 경사 따라 밭둑을 이루며 대여섯 곳의 밭 자리를 구분 짓는다. 길섶 소나무의 모습을 보니 이곳은 바람받이임에 틀림없다. 가시나무 떨기 몇 그루만 자라는 척박한 곳이지만 농부는 한 삽, 한 삽, 돌을 골라내고 풀뿌리도 솎아내며, 오랜 날들 뙈기밭을 일구었을 터다.
화가는 경북 경산에서 나고 자라며 노상 접했던 풍경이기에 원숙한 필치로 이 현장을 실경으로 그려냈다. 이 작가의 다른 그림에서도 추수 후의 황량한 논밭은 대표적 주제가 되었다. 모교인 계명대학교에서 제자를 가르치되 데생 과정을 혹독하게 검증해 ‘계명대 출신은 스케치 실력이 제일 뛰어나다’는 칭송을 받고 있다.
인물화도 마음까지 그려낸다는 중평이다. 섬세한 극사실의 화필로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의 표준 초상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초상화를 그렸고, 역대 대법원장 두 분, 국회의장 다섯 분의 초상화 또한 이 화백의 작품이다. 대기업 총수를 비롯한 유명 인사들의 초상화도 밀려 있어, 내 아내의 초상을 그려주겠다는 약속은 언제나 지켜지려는지….
이 그림 는 최근 온라인 옥션에서 270만원을 주고 낙찰받았다. 고향의 선산(先山) 가는 길과 얼마나 흡사하던지, 거실 벽 중앙에 바다 그림과 바꾸어 걸고, 해지도록 뙈기밭에서 뛰놀던 유년을 회억하는 달콤한 향수에 젖는다.
김승연(金承淵, 1955~)은 홍익대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 뉴욕 주립대에서 서양화와 판화로 석사학위 취득 후 모교 판화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는 ‘서울의 야경’, ‘거리의 낮 풍경’을 리얼하게 판화로 표현하고 있다. 1970~1980년대의 채색 판화에서 1990년 초부터는 흑색 단색의 동판화 , 시리즈를 제작 발표해왔다. 서울의 야경은 불빛에 갇힌 거리에, 건물들과 차량의 그림자들을 메조틴트(mezzotint) 기법으로 디테일하게 묘사해 보는 이들에게 블랙홀에 빠지는 듯, 꿈꾸는 듯, 환상의 파노라마를 경험하게 한다. ‘사진이 표현할 수 없는 세계를 표현하는 데 성공했다’는 심사평과 함께 1993년 ‘루블리아나 국제 판화 비엔날레’에서 ‘차석상’을 수상하고, 2011년 ‘국제메조틴트 페스티벌’에서도 ‘전통판화상’을 수상하면서 서울 야경이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영박물관에서도 작품을 소장하는 영예를 안았다.
“밤 풍경이 낮의 풍경보다 사실적이고 감성적 느낌이 풍부하고, 불빛 하나하나가 자기의 존재를 알리려는 아우성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는 데 보통 한 달이 걸리는 고행(?)을 작가는 계속해오고 있다.
는 벌써 15년 전에 인사동 어느 화랑에서 60만원을 주고 구입한 작품이다. 판화는 그때나 지금이나 작품의 복제성 때문에 다른 미술품에 비해 가격이 저렴한 편이다. 작가는 한 작품당 대개 10~30여 점씩 판화로 찍는다고 했다. 그러나 전시회에서도 판매되는 작품이 4~5점에 불과해 작품 구상에서 완성까지 두어 달, 틀과 유리를 맞추고 10여 점을 판매해도 500여 만원의 수입이 안 되니 허무한 일이다.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작품들이 같은 것이란 사실이 발견되면, 예술성에 대해 만족하거나 행복해하는 게 아니라, ‘하나를 제외한 나머지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유일한 예술 작품을 향한 환상 속에서 판화의 인식과 보편성이 무시되고 있다”고 작가는 고백한다.
란 작품은 뉴욕의 예스런 건물의 계단에서 기둥과 추녀, 그리고 건물 앞에 선 나무의 그림자까지 한낮의 풍경을 정밀하게 찍어내어 현지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 작가는 우리 일상에 너무나 접하기 쉬운 풍경들을, 그러나 깊은 관찰과 섬세한 손길로 예술성 높은 독특한 작품으로 완성시키고 있다. 하염없이 작품에 눈길을 맞추다 보면, 우리는 작가의 의식 너머 고요한 심연(深淵)에 다다를 수 있지 않을까.
이재준(李載俊) >>
아호 송유재(松由齋). 1950년 경기 화성에서 태어났고 미술품 수집가로 활동 중이다. 중학교 3학년 때 , 을 읽고, 붉은 노을에 젖은 바닷가에서 스케치와 깊은 사색으로 화가의 꿈을 키웠다. 1990년부터 개인 미술관을 세울 꿈으로 미술품을 수집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