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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천에서 들러 볼 만한 아름다운 숲, 나남수목원
- 숲에 들면 차분해진다. 그리고 푸근하다. 나무 숲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은혜롭다. 더 바랄 것 없이 관대해지기까지 한다. 어제까지만 해도 밀린 숙제 하듯 허둥대며 떠밀려온 시간이었는데 갑자기 느긋하고 풍요해지는 마음이다. 걷기만 해도 지지고 볶던 몸과 마음이 치유되는 듯하다. 차분해지고 감사함이 생겨난다. 숲이 주는 고마움, 풍성하게 누린 날이다. 서울에서 그리 멀리 온 것 같진 않았다. 고갯길을 넘고 간간히 조붓한 길을 주춤주춤 달리기도 했지만 자동차는 어느새 나남수목원 앞에 다달았다. 나남수목원은 한평생 책을 만들며 살아온 사람의 인생을 전해주는 숲이다. 경기도 포천의 산비탈에 '세상에서 가장 큰 책, 나남수목원'이라는 이름으로 자리 잡고 있는 숲에 들었다. 숲으로 걸어 들어가는 길에 수목원의 검둥개가 꼬리를 흔들며 앞장선다. 느릿느릿 두리번거리면서 사진도 찍느라 늦장 부리면 가다가 뒤돌아서 한참씩 멈춰서 기다리기를 반복한다. '일루 와요, 나만 따라오면 된다니까' 하는 표정이다. '알았어, 갈게. 조금만 기다려' 그렇게 수목원의 개와 노닐며 한적한 숲길을 걸었다. 책과 나무의 숲에 살다 ‘나와 남이 어울려 사는 우리’라는 포부를 담고 시작한 나남출판사의 조상호 회장이 2008년부터 일군 나남 수목원. 포천의 왕방산 산자락에 20여만 평의 땅에 만들어낸 숲이다. 이런 숲을 개인이 가꾸다니... 언감생심 부러워할 수조차 없지만 나무를 심고 숲을 가꾸는 일이 생각만 해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란 건 짐작이 된다. 적어도 고된 노동과 긴 시간의 기다림이 필요한 일이 아닌가. 수목원의 아름다움은 역시 아침 무렵이다. 숲 사이로 유난히 도드라지는 빛이 눈부시다. 온누리에 아침빛을 받은 숲의 투명함 또한 참 이쁘다. 숲길에 구절초와 벌개미취가 자연스럽게 무더기를 이루어 피어났고 꽈리꽃의 붉은빛이 선명하다. 산책로 옆으로 5리쯤 된다는 실개천이 촉촉하게 흐른다. 숲길을 걸으면서 와, 좋구나를 연발할 수밖에 없다. 굽이진 산속이다 보니 여타 수목원처럼 주변과 입구에 음식점이나 카페도 없다. 내부에 놀이 공간이나 즐길 시설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 흔한 포토존이나 무슨 촬영지였다는 표지판도 없다. 인위적 기교 없이 수수한 숲은 마냥 자연스럽다. 온전히 숲을 받는 느낌이다. 그저 숲이기만 한 게 이렇게나 고맙구나 싶다. 책 박물관으로 이르는 길의 연못에 푸른 하늘이 풍덩 빠져 있다. 연못 앞에서 세찬 바람에 머리를 날리는 듯한 여자의 조각상이 인상적이다. 짐바브웨이의 조각가 Witness Bonjisi의 A Windy Day라는 작품이라는데 그 풍경 속에서 잘 어울린다. 수목원 중턱쯤에 있는 책 박물관에 오르니 딱 그 자리가 제 자리인양 앉혀져 숲을 내려다본다. 그 모습이 편안하고 멋스럽다. 안이 훤히 보이는 3층 건물에 가을볕이 에워싸고 숲이 둘러있다. 숲지기인 조상호 회장이 나남출판사를 통해서 평생 만들어 낸 책이 담겨있는 곳이다. 그리고 책으로 인연을 맺은 사람들과 공유하는 문화공간이기도 하다. 책 박물관, 이 또한 책의 숲이다. 나남출판사에서 40년간 3500여 권의 책을 펴낸 숲지기 조상호 회장이 직접 심은 나무가 10만여 그루라 했다. 이젠 세상에서 가장 큰 책이라 일컫는 나무를 키우는 일에 파묻혀 있으니 더 할 일이 있을지. 서가 벽면에는 몇 해 전 나남출판 40주년 기념으로 펴낸 조상호 회장의 '숲에 산다' 포스터가 멋지게 붙어 있다. 어차피 이곳에서는 책과 나무 이야기가 오갈 수밖에 없다. 그것만으로도 차고 넘친다. 나남에서 펴낸 책으로는 주로 사회과학 서적이 많았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책으로는 박경리 작가의 '토지'와 '김약국의 딸들' 등이 있다. 2층과 3층에는 이러한 것들을 들여다볼만한 공간이다. 특히 3층에는 책과 인연인 된 사람들이 모여 서가를 채워나갈 예정이라고 한다. 숲과 책에 둘러싸인 날의 행복 북카페는 널찍하고 시원하게 트여서 그저 여유롭다. 한적한 실내엔 군데군데의 책장이 인테리어 몫을 다한다. 세미나룸인 듯한 아늑한 공간도 따로 있어서 의미 있는 모임을 계획할만하다. 북카페 안과 테라스가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다. 데크에 앉아 숲이 뿜어내는 피톤치드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멍 때리기에 최적의 장소다. 1층 북카페에 앉아 바라보는 숲, 눈앞에 꽉 찬 짙푸른 숲이 압도한다. 숲이 주는 힐링, 세상 더 할 말을 잊는다. 숲을 보며 누군가가 말했다. "초록빛에 왜 그리 환호하지?" 그럴 리가, 생생한 자연의 색감만으로 눈앞에 있으니 감동이 아닐지. 가을 색으로 물들면 또 그것으로 미칠 듯 반할 것이다. 나남 수목원 저편의 눈 내린 자작나무 숲의 풍경은 또 어떨지 상상해 보게 된다. 숲을 앞에 두고 보니 철마다 달라지는 나남 숲의 풍경을 가슴 두근거리며 기대할 수밖에 없다는 게 사실이다. 북카페의 직원에게 조회장님에 관해 궁금해 했더니 지금 마침 숲에서 수목 전지작업 중이라고 알려주었다. 직접 나무를 가꾸고 관리하느라 늘 바쁘시다며 숲으로 가면 만날 수 있을 거라면서 연락해보겠다고 한다. 그러더니 벌써 산 능선을 훌쩍 넘어가서 너무 멀리 계시어 만나보기 어렵겠다는 것이다. 괜찮다. 오늘은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숲 속에서 나무를 가꾸는 숲지기의 모습을 멀리서나마 바라보는 일, 전망 좋은 인수전과 자작나무 숲을 지나 언덕을 올라 산을 넘어가 더 많은 숲을 보는 일을 남겨두는 것, 어찌 한두 번으로 숲을 보았다고 할 수 있을까. 여길 다시 올 수 있는 이유를 만들었다. 그냥 숲과 책에 둘러싸인 채, 서늘한 마젠타 빛으로 가득 채운 레몬 블루베리 에이드 한잔 앞에 놓고 나니 세상 더 바랄 게 없다. 감성도 깊어지는 시절이다. 이 계절에 이만한 여행 없다는 생각에 숲을 찾은 자신에게 뿌듯하다. ◎가볼 만 한 곳 1. 술이 익어가는 느린 마을, 산사원 포천에 가면 술 익는 마을 산사원을 빠뜨릴 수 없다. 이 계절의 따사로운 햇볕이 딱 어울리는 곳이다. 두 팔 벌려 안아도 모자랄 커다란 술독 500여 개에 내려앉은 햇살이 이렇게 잘 어울릴 수가. 쏟아지는 볕을 받으며 술이 익어가는 포천 산사원의 세월랑에 들면 느긋하게 계절의 풍류를 즐겨보고 싶은 마음이 불끈 솟는다. 바라만 보아도 마음이 풍성해지는 술독 사이를 걸으며 저만치 한시름 밀어내고 술 향기만으로도 취하고픈 시절이다. 포천의 느린 마을 양조장 배상면주가는 입구에 술박물관이 자리 잡았다. 그곳을 지나 '느린 마을'이라는 문패가 높이 매달린 정원으로 먼저 마음이 간다. 약 4천 평 규모의 산사원에는 이곳의 상징과도 같은 술항아리 행렬들이 맞아주고 있다. 전통주들의 숙성 공간 '세월랑'이다. 한 켠의 풀밭 근처 '줄행랑'에는 그 옛날 술이 만들어지던 모습과 술통을 매달고 배달하던 풍경을 떠올리게 하는 공간이다. 산사원 저편으로 펼쳐진 너른 정원에는 소쇄원의 광풍각을 본뜬 취선각이 마주 보인다. 건너편으로 2층 석조 누각이 멋스러운 우곡루, 바로 옆으로 경주 포석정과 같은 유상곡수가 있으나 코로나19가 방문자의 만고 시름 잊고 취해도 좋을 한나절 풍류를 온통 막아버린다. 그리고 전통술에 빠질 수 없는 부재료 누룩 이야기를 살필 수 있는 부안당. 누룩의 미생물을 이용해서 술의 주원료 쌀과 곡류를 분해해서 알코올을 생성하는 과정. 한 줄기 빛으로 술의 향기와 맛을 내는 부안당의 누룩을 비춘다. 이제 그 과정들을 통해 만들어진 전통술을 빚어낸 우곡 배상면 선생의 양조 철학을 살피고 우리 술의 역사를 풀어낸 박물관에서 술 문화의 면면을 살피는 시간이다. 전통주의 규제가 심했던 일제 강점기 시절 우리 고유의 술을 살리기 위한 그 분만의 노력을 본다. '백번을 시도하고 천 번을 고쳐라' 누룩 왕으로 불리던 배상면 선생의 기록실에서 술을 향한 일생을 볼 수 있는 곳이다. ◎가볼 만 한 곳 2. 허브 마을에서 만난 산타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허브아일랜드 위로 푸른 하늘이 빼꼼하다. 지중해식 건축이 얼핏 이국적이다. 허브 정원, 허브 식물박물관, 허브힐링센터... 무수한 허브 이야기로 가득한 '어쨌든 완전히 허브나라에 들어왔습니다'... 하는 듯하다. 언덕 위 스카이 허브팜에 오르면 핑크 뮬리로 핑크 핑크 하다. 잔털처럼 피어나 너른 산 아래 밭에 함께 모여 뭉쳐있는 핑크빛 물결의 군락들, 핑크 뮬리는 개화기간이 길다. 아직도 산속에 갇힌 듯 조용히 피어나 환하다. 숨차게 올라 땀 식히며 핑크 뮬리에 담뿍 빠져볼 수 있다. 이곳은 허브관광농장으로써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한 것들이 한 울타리 안에서 이루어진다. 볼거리는 물론이고 갖가지 체험과 먹고 자고 사색하고 힐링하는 것까지 모두 해결할 수 있다. 서울을 떠나 멀리 산속으로 들어오니 강원도인가 싶기도 하지만 이곳은 경기도 포천이다. 허브 숲에 드니 심리적으로 온몸이 이완되는 듯한 느낌이다. 바쁜 현대인들에겐 숨통을 트이게 하는 곳이다. 쭉 돌아보고 나오기 전에 허브마을 깊숙이 들어가 보면 숨겨진 듯 나타나는 곳, 거기 산타마을이 있다. 메리 크리스마스~
- 2021-12-02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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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 2막, 꿈이 열어준 철 공예 장인의 삶
- 인사동 골목의 널찍한 지하 1층 공간에 칼, 창, 도끼, 철퇴, 심지어 주사위까지, 철로 만든 다양한 것들이 전시돼 있다. 한국도, 중국도, 일본도 등 동양 도검부터 중세 유럽 배경의 영화에나 나올 법한 창과 칼도 있다. ‘한국의 마지막 칼 장인’, ‘도검 전문가’ 등으로 불리는 한정욱(69) 씨가 운영하는 국내 최대 칼 전시장 ‘나이프 갤러리’의 모습이다.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아야 한다는 격언도, 좋아하는 일이 업이 되면 흥미를 잃게 되니 업으로 삼지 말라는 격언도 있다. 중학교 시절 보이스카우트 활동을 위해 필요했던 작은 칼을 시작으로 50여 년간 칼과 함께한 한 씨다. 2001년 인사동에 나이프 갤러리를 오픈해 취미를 업으로 삼은 지도 20년이 흘렀다.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은 그에게 지난날의 소회와 현재의 감정에 대해 들어봤다. 한번 태어나 한번 사는 인생 “직장생활을 21년 했는데, 해외출장도 다니고 성과도 내고 재밌었어요. 만족스럽게 일을 했어요. 언론사에서 일할 때는 인터넷이 보급되던 시절 인터넷국 국장도 지냈고요. 돈과 만족은 잠깐의 행복을 주지만 그게 오래 가진 않더군요. 언론사에 1년 정도 있어 보니 한번 태어나 한번 사는 인생, 더 늦기 전에 하고 싶던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나이프 갤러리를 오픈하기 전, 한 씨는 만족스러운 직장생활을 했다. 짧은 교사 생활을 했고, 광고대행사에서도 일했다. 광고대행사를 그만둔 후에는 언론사에서 일할 기회도 있었다. 번듯한 직장에서의 안정적인 생활이 주는 행복도 있었다. 하지만 늘 마음 한켠에는 더 뜨거운 것이 자리 잡고 있었다. 더 늦으면 안 되겠다고 느낀 한 씨는 인사동에서 나이프 갤러리를 열어 수집한 칼들을 전시하기 시작했다. 이듬해에는 경기도 양주에 전통 방식으로 쇠를 내리는 제철소 ‘정강원’을 세웠다. 칼이 좋아서 하게 된 일. 지금은 도검뿐 아니라 주방 칼, 주사위까지 철로 다양한 공예품을 만든다. 한 씨는 자신의 일을 ‘작은 제철소를 운영한다’고 표현한다. 일반적인 제철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다른 제철소처럼 철광석으로 철을 만드는 게 아니라 사철로 제련한다는 것. “사철 제련은 세종실록지리지 등 옛 문헌에서부터 숱하게 나오는 전통 제련 방식이에요. 철광석을 녹이면 선철이 나와요. 그런데 선철은 탄소함유량이 높아서 잘 부서져요. 무기로는 못 쓰죠. 반면 사철을 제련하면 탄소함유량이 낮은 강철이 나와요. 선철은 담금질해도 단단해지지 않지만, 강철을 담금질하면 무기가 될 수 있죠.” 사철로 만든 강철은 철광석으로 만든 선철보다 단단하다. 철광석으로 철을 뽑을 때는 1500도 내외의 온도로 가열한다. 반면 사철은 그보다 높은 1800도에서 가열한다. 해변에서 모래를 채취하고, 모래에서 철 성분을 걸러내 더 높은 온도에서 제련해야 하는 만큼 작업은 더 길고 고되다. 철을 뽑아낸 후에는 불에 달궈 두드리는 ‘단조’와 철을 접는 ‘접쇠’라는 과정을 거친다. 철의 불순물을 없애 강도를 높이기 위함이다. 규모 있는 제철소에서는 50여 명 이상이 이 과정에 동원되지만 정강원에서는 한 씨와 직원 몇 명이 소수 인력으로 해낸다. 지난한 주조 과정이지만 수익이 적어 사업성은 떨어진다. “그만두고 싶은 때도 많았습니다. 직원 5명 중 두 명은 제철 일을 하고, 세 명은 외국 물건을 수입해서 판매합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제철에다 쏟아부으며 버티고 있어요. 전통적인 제련 방식을 고수하고 지킨다 해서 누가 상을 주는 것도 아니고 공로를 인정받는 것도 아니에요.”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 “2015년에 인간문화재 심사를 봤어요. 9년을 문화재청이랑 씨름해서 ‘야장’ 항목에 심사를 봤죠. 하루에 꼬박 여덟 시간을 망치질해가며 이틀 동안 심사를 봤습니다. 그런데 계보가 없다는 이유로 심사에서 떨어졌죠. 그때 많이 속상했습니다. 예순넷의 나이에 마지막 시험을 보고 나니 그런 타이틀에는 관심이 없어졌어요. 그래도 누군가는 해야 하니까. 아무도 안 하니까 합니다.” 인정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자 무언가를 만드는 행위 자체에 집중하게 됐다. 망치질 한번이 생각대로 잘 됐을 때, 칼날 형태가 잘 잡혔을 때 기쁨을 느낀다. 결과물이 생각만큼 잘 나오지 않았을 때조차 ‘내 실력으로 이 정도면 됐지’라며 다음 작품을 기약한다. “같은 나이대 친구들은 집에서 쉬면서 손주를 보거나 하는데, 매일 일을 하러 간다는 것 자체가 즐거워요. 이제는 그저 건강하고 밥 잘 먹는 것. 그리고 지금 하는 일로 용돈 벌이가 된다면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뭔가 만들어 낸다는 것 자체가 즐거워서 이 일을 한동안 계속하려고 합니다.” 사람은 철과 닮았다. 뜨겁게 달궈지고 두드려지면서 강인해진다. 철광석보다 뜨거운 온도에서 제련되는 사철처럼, 한 씨의 삶도 남들보다 뜨겁다. 시행착오와 좌절을 겪고 얻은 한 씨의 즐거움은 사철 제련으로 만들어진 철처럼 질기고 강인한 것이지 않을까. “이런 일을 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인생에서 돈이 주는 행복은 평생 가지 않습니다. 누구나 가슴 속에 세속적 가치와 관계없는 꿈 하나 정도는 품고 살아가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 2021-11-25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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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로 시대 그늘 읽어" 양정무 한예종 교수
- ‘미술 대중화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양정무(55) 교수는 서양미술사 연구자인 동시에 친절한 미술 안내자로서 출판과 강연, 방송 등을 통해 대중과 미술의 거리를 좁히고 있다. 신간 ‘벌거벗은 미술관’을 통해서 서양미술사의 민낯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그를 만나 미술의 가치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 신간이 나올 때까지 8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이 책은 비평가로서 소임을 다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책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 이야기’(이하 난처한) 시리즈와 같은 장기 프로젝트를 하면서 잠시 보류하다가 이제야 출간했다. 긴 레이스에서 잠시 숨을 고르는 의미도 있지만, 비평가로서의 근육을 굳지 않게 하려고 썼다. ‘난처한’ 시리즈가 서양미술사의 길잡이라면, 이 책은 서양미술사의 민낯을 다룬다. 미술사로 본 미술의 가치, 박물관과 미술관의 역할, 초상화 속 무표정의 의미 등 늘 고민했던 질문에 대해 스스로 찾은 답을 책으로 풀어냈다. ‘난처한’ 시리즈에서 못 했던 얘기를 쿠키 영상처럼 이 책을 통해 전하고 싶었다.” 미술사를 다룰 때 사상, 시대, 공간 등으로 분류하여 설명하는 책이 많다. 하지만 이 책은 고전 미술, 표정, 박물관과 미술관, 팬데믹 같은 키워드를 통해 미술사를 조명한다. “이 책이 미술을 이해하는 중요한 퍼즐 조각이 됐으면 좋겠다. 결정적인 조각을 맞출수록 퍼즐이 완성에 가까워지듯, 이 책이 미술에 다가서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그래서 미술관에서 볼 수 없는 흥미로운 미술사를 조명하되, 미술의 의미와 역할에 대해 생각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예를 들어 근엄한 표정의 초상화는 당시 지배 세력의 엄중한 권위를 세우기 위한 수단이었고, 박물관은 해외에서 약탈한 보물을 보관한 수장고였다. 결국 미술은 화가의 고유한 개성으로 읽을 수 있지만, 더 넓은 시야로 보면 시대를 담는 그릇이다. 미술을 본다는 것은 시대를 읽는 동시에 줄기처럼 뻗어가는 역사를 읽는 일이다.” 일상을 깨는 상상력의 세계 그는 스스로 성덕(성공한 덕후)이라 불렀다. 그가 미술의 세계에 빠진 것은 어린 시절 우연히 본 백과사전의 삽화 때문이었다. “우리 맘속엔 누구나 하나의 예술가가 살고 있다. 아이들을 보면 자신이 가진 날것의 느낌을 낙서로 보여준다. 나 역시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고, 백과사전의 삽화에 우연히 마음을 빼앗긴 이래 미술 덕후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왔다. 한마디로 하면 성덕이다. 미술과 역사를 좋아해서 미술사학자의 길을 가게 된 것도 있지만, 미술은 일상을 깨는 새로운 세계였다. 달나라를 동경하는 우주비행사의 느낌이라고 할까? 지금까지 내게 미술이란 우주는 새로운 지적 호기심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공간이었다.” 서양미술의 본고장이라 할 수 있는 영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유학을 위해 갔지만, 그에게 그곳은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영국에서 유학할 때 학교 근처의 대영박물관(The British Museum)에 매일 등교 전에 한 번, 하교 후에 한 번은 무조건 들렀다. 집 가는 길에 있던 내셔널갤러리(The National Gallery)는 집에 들어가기 전에 들르는 필수 코스였다. 당시 주재원, 교수, 기자, 유학생 등을 대상으로 공부방을 운영했다. 같이 수업 겸 토론도 하고 박물관이나 소규모 미술관을 다니면서 다각도의 해설을 들려주는 역할을 맡았다. 인기가 나름 좋아서 한국에 못 돌아올 뻔했다.(웃음) 그 경험이 수업이나 강연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 그의 삶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미술이듯,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감염병’이란 키워드다. 팬데믹 이후 미술은 어떻게 변할까? “중세 유럽에서 흑사병으로 대규모 인원이 죽자, 다양한 계층에서 미술을 통한 추모를 기획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현상은 미술의 대중화에 영향을 미쳤다. 팬데믹도 비슷하다. 코로나19 이후 미술에 대한 갈증이 더 커지면서, 미술관을 찾는 수요가 늘었다. 미술을 통한 심리적 위안과 치유의 힘이 다시 평가받고 있다. 이는 예술을 하는 사람의 태도를 더욱 진지하게 만들고, VR을 활용한 비대면 관람이 주된 체험으로 바뀔지도 모른다.” 미술은 비주얼의 언어 또한 비주얼 리터러시(Visual Literacy)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미술은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그리는 장르다. 워낙 직관적인 영역이라, 그것을 언어로 풀면 어렵게 느껴진다. 가령 외국어는 알파벳, 맞춤법, 띄어쓰기 등 여러 가지를 익혀야 비로소 통달할 수 있다. 하나의 언어를 배우는 것은 하나의 세계에 더 다가가는 일이다. 미술도 그 과정은 어렵지만 보는 훈련을 잘한다면 이전과 전혀 다른 세계가 열린다. 잘 체득하면 시각적인 모든 것을 즐길 수 있다. 결국 비주얼 리터러시를 통해 우리는 이미지를 읽을 수 있는 또 다른 눈이 하나 더 생기는 것이다.” 끝으로 그는 미술 입문자를 위한 조언과 더불어 앞으로의 계획을 밝혔다. “전통과 역사에 관심 있는 시니어들이 미술사에도 관심이 많은데, 입문자가 미술을 즐기려면 한 발짝 떨어져 볼 줄 아는 여유도 필요하다. 특히 미술관의 이미지를 무겁게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실 미술관만큼 카페나 문화시설이 잘 갖춰진 곳도 드물다. 미술을 감상하지 않아도 좋으니 미술관을 친숙하게 여기는 것이 중요하다. 개인적으론 이제껏 배우고 익힌 바를 토대로 더 많은 이들과 나누고 싶다. 기회가 된다면 ‘난처한’ 시리즈 번역본을 통해 이제껏 구축해온 관점을 서양인들에게도 들려주고 싶다.” 미술사학자로서 “미술을 통해 삶과 인간에 대해 조금씩 알아간다”라고 했다. 그는 명작의 위대함보다 미술에 담긴 고뇌와 고민, 좌절을 읽으면서 인간과 삶에 대해 배웠다. 결국 미술은 시대의 그늘을 읽는 일인지도 모른다. 좌절은 원동력이 되고, 어두운 그늘은 때론 위안의 공간이 된다. 미술 안내자인 그가 구축하는 미술의 그늘 속에서 더 많은 이들이 쉴 수 있기를 기대하며 마친다.
- 2021-11-18 0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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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인의 빈자리 채우는 것이 우리 일”
- 인터뷰를 위해 다시 만난 것은 3년 만의 일이었다. 처음 김석중(52) 키퍼스코리아 대표가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 소개됐을 때는 지금과 다른 모습이었다. 길게 길러 뒤로 묶은 머리와 유품정리 과정에서 허락을 받아 쓰고 있던 작은 캐리어와 함께 서 있는 모습은 마치 모험을 떠나는 여행가 았다. 하지만 3년이 지난 지금, 그는 국내의 대표적인 유품정리사로 손꼽히는 유명인이 되었다. 유재석과 함께 TV에도 얼굴을 비췄고, 대학 강단에도 섰다. 단정하게 정리된 머리는 이제 그가 양복 차림이 잘 어울리는 사람임을 증명하는 듯했다. 그러나 변치 않은 것도 있다. 유품정리 분야의 사회적 인식을 변화시키기 위해 여전히 도전을 계속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랜만의 만남이었지만 안부보다 더 궁금한 것이 있었다. 최근 ‘유품정리사’라는 직업은 우리에게 다소 친숙해진 듯했다. 넷플릭스 드라마 ‘무브 투 헤븐 : 나는 유품정리사입니다’와 tvN의 예능 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록’(이하 ‘유 퀴즈’) 등을 통해 이 직업이 대중에게 노출되면서 사회적 인식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궁금했다. 그가 이 사업을 국내에 소개했을 때 유품정리 분야는 고독사한 시체 곁의 혈흔을 지우고 사용하던 물건을 처분하는 특수청소라는 인식이 강했다. 특수청소라는 사회적 인식 여전 “‘유 퀴즈’를 통해 소개되긴 했지만, 제 입장에선 많이 아쉬웠어요. 프로그램 특성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겠지만, 감성적인 부분만 부각된 편집이었거든요. 저희가 하는 일에 대한 충분한 소개가 이뤄지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웠죠. 넷플릭스 드라마도 마찬가지예요. 특수청소의 연장선에 있는 직업으로 소개되었으니까요. 갑자기 사망한 사람의 집에 들어가 살았던 흔적을 지우는 청소로 여기는 인식은 아직 여전한 것 같아요.” 실제로 그의 회사를 포털사이트에 기업 등록하는 과정에서도 유사한 일을 겪었다고 한다. ‘키퍼스코리아’를 장례 관련업에 포함시키고 싶었지만, 심사 과정에서 결국 폐기물업으로 등록되었단다. 그로서는 기운 빠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도 그간의 노력이 헛된 것은 아니다.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사회의 변화가 조금씩 이뤄지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 변화의 요인으로 ‘유품에 대한 인식’을 꼽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유품은 불길한 것 혹은 쓰레기라는 인식이 강했어요. 죽은 사람의 물건이니 함께 사라져야 한다는 거죠. 그러나 지금은 인식이 달라졌어요. 유품이 추억이 되기도 하고 재산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의 전환이 이뤄지면서 유품정리업이 한 단계 올라갈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됐어요.” 또 대중의 인식 변화로 ‘사자’(死者)의 물건을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의 본가를 정리한다는 개념이 자리 잡기 시작한 것도 유품정리 분야의 의미 있는 변화로 봤다. “단순히 부동산을 처분하기 위해 물건을 비운다는 개념이 아니라, 부모님을 추모하고 추도한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유품정리사의 역할도 커지고 있어요. 무엇을 남길지, 버릴지 돕는 카운슬링 기능이 강화됐으니까요. 비우는 것이 아니라 빈자리를 채우는 것이 우리 일이 된 셈이죠.” 우리에게 맞는 ‘한국식’ 추모 도입 그는 11년 전 키퍼스코리아를 창업하고 유품정리라는 생소한 분야를 국내에 소개하는 과정에서 사업의 전환점이 된 사건으로 ‘누가 내 유품을 정리할까?’라는 저서 발간을 꼽았다. 본지와의 첫 번째 만남의 계기이기도 하다. “책이 나오고 나서 사회적으로 많은 관심을 받았죠. 학교로 들어가 장례학과에서 강의도 하고요. 하지만 무엇보다 큰 변화는 유품정리라는 서비스 시스템을 되돌아보고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는 거예요. 물리적으로 고인의 물건을 정리하는 것 이외에 법적인 소유권과 관련된 상속, 고인을 기리는 장례와 관련된 것까지 개념을 확장시키고 체계화한 것이 큰 변화라고 할 수 있죠.” 그의 사업은 영감을 받은 NHK 다큐멘터리 ‘천국으로의 이사를 도와드립니다’의 주인공이자 일본 최초의 유품정리 회사 키퍼스 대표 요시다 다이치(吉田太一) 사장을 통해 2010년 시작됐다. 일본의 유품정리 시스템을 그대로 들여오다 보니 당연히 한국과는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일본 특유의 가타미와케(かたみわけ) 문화를 배경으로 한 일본식 유품정리는 물건의 가치나 본질보다는 고인과 관련된 ‘추억’을 정리의 기준으로 삼았다. “이것을 우리만의 시스템으로 변화시켜 한국식 매뉴얼을 만드는 데 10년 걸렸어요. 그 기간 한국에서 노력했던 과정을 일본 키퍼스에서도 오롯이 지켜봤기 때문에, 한국식 유품정리로 변화하고 자리 잡는 것을 응원하고 있죠. 또 일본의 경우 유품정리 업체가 유품의 운송, 폐기처리, 재활용 등 모든 분야에 대한 권한을 허가받고 직접 처리하는 반면, 우리는 각 분야의 전문가에게 연결하고 컨트롤타워 역할만 한다는 것도 차이 나는 부분입니다.” 고인에 대한 추모 방식도 일본과는 다소 다르다. 일본의 경우 유품을 모아 한꺼번에 합동 공양을 드리지만, 김 대표는 집에서 먼저 공양을 드리는 것으로 바꿨다. 한국 정서에 맞게 축문으로 고인에게 인사를 드리고, 유품을 만지는 허락을 구하는 절차를 밟는다. 또 유품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모든 물건에 대한 기록을 만들어 다시 추억을 떠올릴 수 있도록 했다. “이런 변화를 통해 그간 우리에게 안 맞는 것처럼 느껴졌던 옷을 벗어버리고, 우리 몸에 맞는 것을 찾게 되었어요.” 유품정리, 장례지도학과 만나다 사회적 인식이 확대되고 인지도가 높아지면 회사의 몸집을 키우거나 새로운 사업체를 만드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그는 학교로 들어갔다. 기존의 ‘장례지도학’이라는 학문 분야에 유품정리를 접목하려는 시도를 한 것이다. “10년 전 전국의 장례 관련 학과 교수를 대상으로 요시다 다이치 대표의 특강을 진행한 적이 있어요. 이 순회강연을 계기로 각 대학 교수들과 인연을 이어나갔는데, 학교에서 강의 요청이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학교도 나름의 고민을 갖고 있었죠. 장례지도사를 선택해 입학한 학생들이 사회적 편견이나 장례지도사 업무 영역의 한계 때문에 중도 포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거든요. 지금의 업무 범위는 ‘장례식장’을 벗어나기 어려운 상황이어서, 더 나은 새로운 사업적 시도나 변신을 꾀하기 힘든 한계가 있었어요.” 그는 대학의 커리큘럼 자체가 전통 장례에 매몰되어 있는 것을 문제점으로 꼽았다. 적어도 상속법이나 유품의 행정처리를 위한 관련법에 대한 교육이 진행되어야 하고, 사회적인 서비스 요구에 응답하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하는데 부족했다는 것이다. 그가 학교에서 일본의 장례나 죽음 준비에 대한 ‘엔딩 산업’을 한국에 맞게 학문적으로 적용하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유품정리 사회적 관심 중요 그렇다면 앞으로 유품정리 분야는 어떻게 바뀔까. 김 대표는 급격한 증가가 예상되는 사망자 수와 그로 인한 유품의 증가가 한국 사회를 변화시킬 것이라고 내다봤다. “지금도 매년 30만 명 정도의 사망자가 나오고 있어요. 베이비붐 세대가 본격적으로 사망하기 시작하면 그 숫자는 50만을 훌쩍 뛰어넘을 겁니다. 이 세대는 갖고 있는 물건이 많은 사람들이에요. 한국전쟁을 직간접적으로 겪으며 절약이 몸에 밴 세대죠. 이분들이 갖고 있는 물건, 그 물건의 역사적 가치가 동시다발적으로 사라질 겁니다.” 베이비붐 세대 할아버지, 아버지를 통해 일제강점기와 8·15 광복, 한국전쟁 등 우리의 역사와 연관된 수많은 사료가 가보로 전해 내려왔지만, 가치를 제대로 알기 어려운 자녀 세대에 이르러 버려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격동의 시대에 대한 역사적 자료의 보고인데, 아직 그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아요. 일본의 경우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단카이(団塊) 세대의 유품정리를 고고학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이뤄졌죠. 역사적 증언과 증거물 확보를 위한 생전정리도 이뤄지고 있고요. 우리도 이와 같은 사회적 합의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는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의 물건을 정리해두는 생전정리의 필요성이 더욱 대두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오래된 물건의 인기가 올라가고 찾는 이가 많아지고 있어, 고령층이 보유하고 있는 물건의 경제적 가치도 오를 것이란 전망이다. 결국 생전정리가 노년층의 또 다른 자금 확보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환경적으로도 쓰레기를 줄이고 재활용률을 높이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서는 생전정리에 대한 인식도 바뀌어야 한다. “흔히 생전정리라고 하면 죽기 전에 갖고 있는 물건을 처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돌아가실 때까지 사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사후에 어떻게 정리할지 미리 정해놓고 그 우선순위에 맞춰 물건을 정리하는 시기를 결정하는 겁니다.” 생태계 조성 위한 플랫폼 구축 희망 그렇다면 키퍼스코리아의 미래는 무엇일까? 그는 ‘장례·유품정리·상속 플랫폼’이라고 정의하고, 죽음을 준비하고 장례를 치르는 모든 과정에 대한 정보와 서비스를 만날 수 있는 플랫폼을 준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장례·유품정리·상속 분야의 전문가를 한자리에 모을 예정입니다. 한 번의 상담으로 모든 과정에 대한 고민을 해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죠. 일반적인 플랫폼과 다른 점은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저희의 검증을 거친다는 점이에요. 고객이 안심하고 맡길 수 있고, 불필요한 지출을 방지하도록 담합이나 바가지요금이 불가능한 구조를 만들려고 합니다.” 장례·유품정리·상속 생태계가 조성돼 양성화되고 산업적으로 고도화되기를 그는 희망하고 있다. 죽음과 그 과정에 대한 언급 자체가 금기시되고 소수에 의해 음지에서 진행되는 구조로는 발전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장례·유품정리·상속 분야의 산업화가 국가적으로 큰 기여를 할 거라고 믿어요. 많은 일자리를 만들고, 상속과 증여가 활성화되면 세수 확보에도 유리하죠. 환경 측면에서도 일회용품을 줄일 수 있고요. 또 유산을 둘러싼 상속 분쟁이나 가족관계 악화를 방지하고, 고독사 예방도 가능하죠. 새로운 생태계로 변화한다면 소모적인 부분을 생산적으로 바꿀 수 있고, 삶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을 겁니다.”
- 2021-11-16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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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니어 익숙한 명사 다큐 영화가 뜬다
- 요즘 연예인이 아닌 일반인이 주인공인 다큐멘터리 영화가 많이 나오고 있다. 특히 시니어, 우리 인생의 선배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한국의 역사와 밀접한 삶을 살았고, 그들이 살아온 삶의 족적은 우리에게 감동과 희망을 안겨주기 때문일 것. 이에 해당하는 작품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최근 개봉작을 살펴봤다. 왕십리 김종분 감독: 김진열 개봉 : 11월 11일 등급 : 12세 이상 관람가 러닝타임 : 102분 벌써 50년, 서울 행당동 왕십리역 11번 출구 앞에는 노점을 운영하는 김종분 씨가 있다. 김종분 씨는 1991년 노태우 정권 당시 백골단 강경 진압에 목숨을 잃은 고(故) 김귀정 열사의 어머니다. 이번 영화는 김귀정 열사 30주기를 기려 제작됐다. 팔순의 현역 노점상인 김종분 씨는 항상 씩씩해 보이지만, 그 이면에 그는 세상을 떠난 작은 딸을 가슴에 묻은 아픔을 지니고 있다. 이처럼 영화는 김종분 씨의 길 위의 삶, 그리고 어머니의 삶을 조명한다. 또한 김종분 씨를 포함한 가족들과 함께 성균관대학교 동문이 참여해 고인을 향한 그리움과 추모의 마음을 전한다. 노회찬6411 감독 : 민환기 개봉 : 10월 14일 등급 : 12세 이상 관람가 러닝타임 : 127분 '노회찬6411'은 고(故) 노회찬 의원의 삶을 다룬 첫 번째 다큐멘터리로, 그의 3주기를 맞아 명필름에서 제작했다. '6411'은 노 전 의원이 2012년 진보정의당 당 대표 수락 연설에서 '새벽 노동자'의 버스 번호로 언급했던 것이다. 영화는 우리가 몰랐던 노회찬 의원에 대해 보여준다. 대학생 시절 용접공으로 위장 취업했던 노동운동가, 진보 정당 창당으로 사회적 약자들을 대변하는 정치를 펼치고자 했던 정치인 등, 인간 노회찬의 인생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펼쳐진다. 영화는 기대 이상으로 호평받고 있다. 정치인으로서의 노회찬보다는 그가 마음에 품었던 꿈과 인간적인 면모를 조명하는 한편, 그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판단을 관객에게 맡긴 점이 좋은 평가를 이끌었다. 울림의 탄생 감독 : 이정준 개봉 : 10월 21일 등급 : 전체 관람가 러닝타임 : 96분 '울림의 탄생'은 마음을 울리는 단 하나의 소리를 찾기 위해 60년 넘는 세월 동안 북을 만들어 온 임선빈 악기장(경기무형문화재 30호(북 메우기))의 삶과 예술을 조명한 다큐멘터리이다. 6·25 전쟁 중 태어나 고아로 자란 임선빈 악기장은 소아마비에 걸려 다리가 불편했는데, 이곳저곳 전전하며 돈을 구걸하는 삶을 살았다. 그러다가 패거리의 폭력으로 한쪽 청력을 잃게 되고, 북 만들기가 그의 유일한 생존 방법이라는 스승의 가르침에 임선빈 악기장은 60년 넘게 일에 매달렸고, 장인의 위치에 올랐다. 장인은 한쪽 청력마저 잃을 위기에 처하게 되고, 더 늦기 전에 자신만의 북을 남기려 한다. 어린 시절 들은 북소리를 잊지 못한 그는 그것을 재현하고자 23년간 아껴뒀던 나무를 꺼내 들었지만, 쉽지만은 않다. 임선빈 악기장의 옆을 지키는 아들 임동국 전수 교수와의 협업도 눈길을 끈다. 전통을 잇는 일이지만 세대교체를 고민하는 부자(父子)의 모습은 영화의 관전 포인트 중 하나다. 태일이 감독 : 홍준표 개봉 : 12월 1일 등급 : 전체 관람가 러닝타임 : 99분 고(故) 전태일 열사의 이야기는 애니메이션으로 재탄생 됐다. 전태일의 이야기가 영화로 나온 것은 지난 1995년 박광수 감독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이후 두 번째다. '태일이'는 1970년 평화시장, 부당한 노동 환경을 바꾸기 위해 뜨겁게 싸웠던 청년 전태일의 이야기를 그렸다. 홍준표 감독은 애니메이션의 장점을 십분 활용, 보다 따뜻하고 밝은 색채로 이야기를 담아냈다. 전태일과 동년배인 시니어들은 과거를 추억하며 영화를 볼 수 있고, 젊은 세대는 몰랐던 역사를 새롭게 배워갈 것이다. 남녀노소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라는 뜻이다. 홍 감독은 "대중에게 전태일의 최후가 분신으로 각인돼 있으나 열사의 이미지를 강조하기보다 우리 곁에 있는 평범한 청년 전태일을 그리고자 노력했다"면서 "너무 무겁지 않은, 인간적인 측면을 느낄 수 있는 영화라 따뜻함도, 울림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배우 장동윤, 염혜란, 진선규, 박철민, 권해효 등이 목소리 연기로 영화에 힘을 보탰다. 오는 12월 1일 개봉.
- 2021-11-15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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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TX 강릉선 타고 가을 여행, 가 볼 만한 곳은?
- 가을이라 해도 날씨는 여전히 온화하다. 강릉으로 떠나며 날씨를 검색해보았더니 기온이 뚝 떨어질 거라는 예보다. 환절기의 쌀쌀함을 즐길 때는 아닌 것 같아 머플러랑 니트를 주섬주섬 더 담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강릉은 언제나 따스했다. 이전에도 그랬고 이번에도 그랬고, 그곳은 언제나 따스하게 날 맞는다. 아마 앞으로도 또 그럴 것 같은 강릉. 명주동 거리, 강릉의 ‘핫플레이스’이라고 했다. 명주(溟州)는 신라 시대에 강릉을 이르던 지명으로 ‘바다와 가까운 아늑한 땅’이란 뜻이다. 1500년 전의 고도 명주는 예부터 문화·행정의 중심지이던 곳인데 강릉 시청이 옮겨가면서 한물간 구도시가 되어버린 듯했다. 그런데 이젠 달라졌다. 구도심 귀퉁이 마을인 명주동 일대가 요즘의 레트로 바람을 타고 찾아가고 싶은 원도심으로 변신했다. 가을볕 아래 명주동 문화마을 천천히 걷기 강릉 대도호부 관아 건너편에서 시작해 그 주변 동네와 골목 한 바퀴를 느릿느릿 걸으며 시간 여행을 시작한다. 어릴 적 추억도 소환하고, 숨겨진 예쁜 가게를 발견하는 재미가 걷는 내내 이어지는 풍경. 드라마 시대극을 연상케 하는 오래된 주택과 상점들이 옛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시나미 명주. 시나미는 ‘천천히’ 또는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을 뜻하는 강원도 말이다. 산책하듯 천천히 걷다 보면 과거와 현재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공존하는 뉴트로 강릉의 모습이 보인다. 시공을 넘나드는 이 골목에서는 저절로 천천히 걷게 된다. 그게 오히려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벽돌담 모퉁이를 돌면 유년의 뜰에서 늘 보았던 백일홍이 옹기종기 모여서 피어 있다. 반쯤 열린 나무 대문 앞으로 한 무더기씩 뿌리내린 채 꽃을 피워 올린 소박한 식물들이 예쁘다.골목 여행을 하는 이들을 위한 주민들의 자발적 배려다. 저절로 따스함을 얻는다. 낡은 담벼락에 나태주 시인의 시 ‘풀꽃’이 바른 글씨체로 세 줄 적혀 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세월이 느껴지는 담장에 켜켜이 스며 있는 옛이야기를 느끼며 그 길을 걸어간다. 쭉 걷다 보면 빈티지하면서도 멋스러운 건물들이 간간이 눈길을 끈다. 담쟁이덩굴이 뒤덮은 ‘봉봉 방앗간’ 건물은 홍상수 감독의 영화 속 장면으로 더 유명해진 집이다. 근처의 작은 공연장, 박물관, 예술마당, 프리마켓 등의 문화공간에 슬슬 가을 분위기가 덧입혀지는 중이다. 골목길을 걷다 잠깐 앉았다 갈 수 있도록 가게 앞에 의자를 놓은 인심이 더 멋진 풍경을 만든다. 그 의자에 한 번씩 앉아 사진을 담는 여행자들 덕분에 아예 포토존이 되기도 한다. 이제는 찾아가 보고 싶은 ‘인싸들의 강릉 여행지’가 되었고, 곳곳에 젊음의 생기발랄한 에너지도 풍겨난다. 오래된 건물을 현대적 감각으로 새 단장한 소박한 점포들, 골목상권의 소상공인을 여행자와 연결해주고 쇠락한 골목길에 생기를 불어넣으려는 노력도 엿보인다. 신구(新舊)가 공존하는 원도심 거리답게 옛집을 개조한 카페 ‘오월’의 격자무늬 창문 너머로 동네 할머니가 뒷짐 지고 걸어가시던 골목길 풍경 또한 가을볕에 아련하다. 정겨운 가을날이다. 강릉의 구도심을 온몸으로 느끼며 마실 가듯 천천히 느릿느릿 타박타박 걸었던 명주동 골목 나들이다. 강릉 대도호부 관아 명주거리를 벗어나기 전에 건너편 강릉 대도호부 관아(사적 제388호)에 들어가 보는 것도 의미 있다. 골목길을 따라 늘어선 강릉 대도호부 관아는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걸쳐 중앙의 관리들이 강릉에 내려오면 머물던 곳이다. 강릉 임영관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객사문으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안으로 들어가면 전대청이 있는데 '임영관'이라고 쓴 현판 글씨는 공민왕이 낙산사 가는 길에 들러서 쓴 친필이다. 현재 객사문은 이 터의 남측에 국보 제51호로 지정 보존되어 있고, 서측은 임진왜란 이후 경주에 있던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셔다 봉안했던 집경전(集慶殿) 터다. 해설사님의 해박하고 구수한 해설로 역사적 사실이 더욱 흥미롭다. 누구나 원하면 미리 신청해서 해설사님의 안내를 받을 수 있다. 관아 곳곳에 우뚝 선 고목이 되어버린 은행나무는 가을이 한창이었다. 바다 언덕 위에 펼쳐진 예술 세계 이제는 시원한 바다를 보며 예술과 자연, 인간이 공존하는 전시 공간에서 감성을 충전할 때다. 묵은 스트레스도 날려버릴 시간이다. 강릉의 괘방산 자락을 배경으로 등명마을에 자리 잡은 ‘하슬라 아트월드’. 산과 바다와 하늘과 바람과 햇살이 함께하는 아트월드다. 조각가 부부가 힘을 모아 만들고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며 새로움을 선보이고 있는 하슬라 아트월드. 하슬라는 고구려 때 부르던 강릉의 옛 지명이다. 현대 미술관, 아비지 갤러리, 터널 설치미술, 체험학습실, 피노키오 박물관, 마리오네트관 등 볼거리가 한가득이다.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가 터널을 통과하고 고래 뱃속 터널을 지나 지하 계단, 그리고 피노키오 전시관과 마리오네트 전시관까지 감상하는 내내 눈이 즐겁고 동심을 불러일으키는 곳. 발길 닿는 곳마다 포토존이다. 해안 절벽 위에 위치한 야외 조각공원은 예술 정원으로 3만3000평의 드넓은 자연 속에 있다. 어딜 돌아보아도 산과 바다. 이처럼 바다가 아름답게 보이는 곳이 또 어딜지. 이어지는 스카이워크를 통해 다시 한번 자연을 만끽한다.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건강하게 로스팅한 산야초 커피를 마시는 것도 좋다. 문화예술 공간에서 하루나 이틀 쉬고 싶은 이들을 위해 아트월드 안에 호텔도 있다. 설화 속의 월화거리 즐기기 강릉을 떠나기 전 전통시장인 강릉중앙시장에도 잠깐 들러봐야 하지 않을까. 강릉역으로 가는 길에 들른 시장통엔 매스컴을 통해 이미 유명해진 아이스크림호떡과 치즈호떡을 맛보려는 사람들의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맛집들이 즐비하다. 마늘빵과 닭강정 역시 인기여서 사람들이 찾아드는 모습이다. 군것질을 하며 시장 구경을 즐기다 보면 여행은 더욱 흐뭇하다. 중앙시장을 지나 KTX를 타러 가는 길목에 월화거리로 가는 화살표가 있다. 강릉의 새로운 명소로 떠오르고 있는 교동의 ‘월화거리’는 강릉 도심을 지나던 폐철도 부지에 조성된 공원 시설이다. KTX 강릉선 개통으로 강릉 도심 철도가 지하화되면서 옛 지상 철길은 유휴지로 남게 됐다. 강릉시는 기차가 달리지 않게 된 이 공간을 공원화한 것이다. 컨테이너로 이루어진 월화 풍물시장은 기존에 있던 시장을 리모델링해서 만들어졌다. 메밀전병이나 감자떡 등 강원도 토속음식은 물론이고 다양한 간식거리로 옛 분위기를 느끼며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월화거리는 강릉 월화정 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기록에 따르면 신라 시대 화랑 무월과 강릉 지방 토호의 딸 연화는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경주로 돌아간 무월에게서 연락이 없고 연화는 다른 사람과 결혼할 상황에 처한다. 이에 연화는 산책하던 연못의 잉어에게 편지를 전달함으로써 두 사람이 다시 만나 혼인하게 된다는 것이 월화 설화의 주요 내용이다. 사랑의 메신저가 잉어라니. 무월과 연화의 이름에서 따온 월화정이 있는 이곳을 월화거리로 만들어낸 것이다. 걷는 내내 눈길을 끄는 갖가지 구조물이나 꽃 조형물들이 시민들과 여행자들에게 힐링을 선사한다. 강릉역에서 부흥마을까지 걸을 수 있는 길이지만 노선은 각자의 형편에 따라 조절하면 된다. 시장과 월화거리를 지나며 강릉역이 저편으로 보인다. 2017년 12월에 서울 강릉 간 KTX가 개통되면서 114분 만에 강릉에 도착할 수 있어 강릉 당일 여행이 쉬워졌다. 강릉선은 서울역에서 출발하면 청량리-상봉-양평-만종-횡성-둔내-평창-진부-강릉 도착이다. 일상을 벗어나 바다도 보고 하루쯤 나만의 시간을 만들어보고 싶을 때 강릉이 있다.
- 2021-11-12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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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지털 홍수 속, ‘아날로그 맨’도 편리해야 한다
- 넷플릭스를 둘러보다가 오랜만에 한석규, 심은하 주연의 ‘8월의 크리스마스’를 봤다. 작품에서 화 한 번 내지 않을 것 같은 털털한 인상의 주인공 정원은 극 중 두 번 화를 낸다. 이 가운데 두 번째 화를 내는 장면에서 정원은 어떻게 비디오를 틀어야 할지 모르는 아버지에게 화를 낸다. 자신의 죽음에 대비해 아버지에게 비디오 재생 방법을 반복하여 알려주지만 아버지는 이를 어려워했기 때문이다. 어릴 때는 이 장면이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비디오 하나 재생하는 게 뭐 그렇게 어려울까.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정원의 아버지에게 비디오란 지금의 인터넷 뱅킹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하면 조금은 이해가 될 것 같다. 사람들은 조금 더 편한 삶을 위해 스마트폰과 인터넷 뱅킹 등 IT를 활용한 여러 장비와 서비스를 고안했다. 하지만 세상은 오히려 점점 더 복잡해지는 분위기다. 예전 같으면 그냥 은행에 찾아가는 ‘아날로그 맨’이 되어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세상의 변화 앞에 개인은 힘이 없다. 현금 결제가 기본이었던 전통시장은 생존을 위해 제로페이와 카드 기기를 놓기 시작했다. 은행은 눈에 띄게 빠른 속도로 점포를 줄이고 있다. ‘현금 없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한국은행조차 은행 점포의 감소 속도가 너무 빠르다고 제지할 정도다. 필자는 산업 매체에서 이차전지를 주 취재 분야로 삼으며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이차전지 시장조사 업체에서 2년 반의 시간을 보냈다. 이차전지의 쓰임새는 무궁무진하다. 전기자동차 외에도 이제 우리의 분신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휴대전화, 최근 유행하는 무선 이어폰까지 모두 이차전지의 주요 시장이다. 동시에 의구심이 들 때가 있다. 과연 세상의 이로움에 기여하고 있는가? 몇 해 전 스마트폰 제조사들은 환경을 지키겠다며 스마트폰에 포함되어 있던 충전 케이블을 제공하지 않기 시작했다. 덤으로 어느 순간부터는 유선 이어폰까지 제공하지 않고 있다. 단순하게 음악을 듣기 위해 꽂기만 하던 이어폰을 쓸 수는 있다. 아직까지는. 그러나 이것도 사라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기업들은 환경보호를 말하지만 사실은 스마트폰 제품의 제조 비용을 줄이고, 액세서리 구매로 인한 부차적인 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가까운 미래, 스마트폰 제조사들은 무선 충전으로 충전하라며 아예 단자가 없는 제품을 출시할 것이다. 이젠 선택의 여지 없이 유선 이어폰 대신 무선 이어폰을 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은 어떻게 설정해야 할지 몰라 헤맬 것이다. 단순하게 살 권리가 사라지고 있다. 너무 앞선 걱정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앞서 배터리 탈착형 스마트폰의 장점을 강조하다가 슬그머니 일체형 스마트폰을 내놓은 국내 스마트폰 업체들을 떠올려보자. 이제는 배터리를 갈아 끼우는 대신 충전기를 끼워야 한다. 배터리 수명이 다하면 수리센터에 가서 전지를 교체해야 한다. 소비자는 선택권을 박탈당했다. 이런 전례를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드웨어(HW)의 측면에서 해결책을 찾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지금 개인용 IT 단말기, 즉 스마트폰의 HW는 소프트웨어(SW) 측면에서 폭넓은 다양성을 지원한다는 데서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실버폰’이라는 이름의 제품이 따로 나왔던 과거 피처폰 시대와는 또 상황이 달라진 셈이다. 스마트폰 제조 업체들이 기존 스마트폰을 활용한 장년 및 노년층의 접근성을 높인 사용자 인터페이스(UI)와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은 구형 스마트폰을 활용한 아동용 스마트폰 제품에서 이미 활용 중이다. 스마트폰의 UI 외에도 다양한 시스템의 접근성 확보 방법이 필요하다. 가까운 예로 ARS 방문 인증을 볼 수 있다. 현재 2년째 전 세계를 강타 중인 코로나19의 감염 확산을 막기 위한 방법으로 우리는 QR인증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QR 외에도 우리는 ARS 전화 인증 방식을 병행한다. ARS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면 그 전화번호를 목록화하여 기록을 남기는 방식이다. QR 체크를 어려워하는 고령층에게 이는 아날로그식 인증 방법인 셈이다. 아날로그 방식을 이용한 디지털 인증, 어디서 들어본 방법인 것 같다면 정답이다. 바로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합성을 뜻하니 디지로그(Digi+log)다. 스마트폰을 중심으로 장년층 이상의 문화 코드에 알맞은 아날로그 감성의 시스템을 만든다면 장년층이 필요로 하는 첨단 서비스를 보다 편하게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인구가 줄고 고령화 사회가 되어가며 장년층 이상 세대는 앞으로 사회생활을 지속하며 생산 활동과 소비 활동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할 것이다. 이들에게 최적화된 IT 접근성은 곧 첨단 서비스에 대한 소비층의 확대를 의미한다. 앞선 전통시장의 예에서 밝혔듯 이들 역시 생산 활동을 위해, IT 서비스를 사용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중이다. 이들에 대한 IT 접근성 확보는 이제 IT 업계에는 시장 확보, 정부에는 기본권 보장과 같은 의무 사항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30대 초반으로 나온 정원의 세대는 지금쯤 50~60대에 접어들었다. 이들은 이제 비디오 재생 대신 복잡한 액티브엑스를 깔며 인터넷 쇼핑 또는 인터넷 뱅킹을 해야 한다. 최근 들어서는 코로나19 방문인증 및 접종인증을 하며 IT 접근성에 어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정원의 아버지처럼 자녀 세대에 계속해서 부탁하기에도 한계가 있다. 부모에게 최신 기기 사용법을 매일 가르쳐주거나 대신 해줄 수 있는 세대는 1~2인 가구의 증가로 거의 사라졌다. 편리해 ‘보이는’ 세상이 아니라 남녀노소가 ‘편리하게’ IT 기기를 사용할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길 바라본다.
- 2021-11-10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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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인이 지나간 전통 회화의 보루, 의재미술관
- 의재미술관은 광주광역시 무등산 자락에 있다. 광주 사람들의 무등산 애호는 유난하다. 세상에서 가장 듬직하고 후덕한 산으로 친다. 흔히 대찬 줏대와 넘치는 예술적 풍정을 광주의 개성으로 꼽는다. 이는 무등산을 산소처럼 숨 쉬며 살아가는 지역민들에게 은연중 형성된 토착 정서의 산물로 해석되기도 한다. 무등산 하면 한국화가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1891~1977)을 떠올리는 이들도 많다. 그는 무등산 산방에서 30여 년을 살았다. 화가로, 다인(茶人)으로, 농업 교육가로, 실천적 도인으로 인상적인 족적을 남겼다. 의재미술관은 의재의 웅장한 정신과 실천을 톺아볼 수 있는 공간이다. 초가을 잎사귀들이 바람결에 춤춘다. 머잖아 조락할 신세지만 아직은 산목숨이라 기쁘다는 투로. 나무들의 초록 물결 사이로 난 등산로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나무와 등산객이 어우러져 숲을 이루었다. 간혹 의재미술관으로 입장하는 이가 있을 성싶지만 도통 기척이 없다. 미술관에서 노니는 재미가 등산에 못 미칠 게 있나? 그러나 어딜 가나 썰렁하기 십상인 게 미술관이다. 게다가 의재미술관은 없는 듯이 있다. 티 내어 모습을 드러내길 애써 삼갔다. 숨은 듯이 있는 숲속의 미술관이다. 다시 말해 이 미술관은 자연의 일원으로 존재한다. 무등산의 가족이 되기 위해 몸을 낮췄다. 애초 설계가 그랬다. 산보다 돋보이거나, 산색보다 튀거나, 산허리를 갉아먹는 식의 무례를 범하지 않을 설계를 했다. 덕분에 무등산과 좋은 사이로 지낸다. 이런 미술관이 어디 흔하던가? 중견 건축가 조성룡이 설계를 주도했다. 그는 도드라지거나 요란한 건축에 질색한다. 사람의 욕망과 기술이 자연을 타고앉아서는 안 된다는 철칙을 갖고 있다. 미술관은 일직선으로 늘어선 3개의 건물로 구성했다. 전시실이 있는 본관은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지었다. 건물의 생김새는 극히 모던하다. 노출 콘크리트와 강화유리, 목재를 조합해 세련미와 기능성을 구현했다. 기발한 디자인과 미학을 주조로 삼은 건물은 아니다. 언뜻 보면 차라리 요즘에 흔한 건축 유형이다. 그러나 뜯어보면 참신하다. 자연환경에 녹아들어간 조화로움과 생동감을 불어넣은 섬세한 디테일로 품격과 미를 동시에 잡았다. 이런 미덕을 평가받아 개관한 해인 2001년에 한국건축문화대상을 받았다. 의재미술관은 의재를 기리기 위해 문을 연 사립미술관이다. 의재의 종손 허달재 화백이 재단을 만들어 설립을 주도했다. 흥미로운 건 광주시 역시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는 점이다. 공청회를 열어 여론을 수렴하고 막대한 건립 재원까지 협찬했다. 사립미술관 건립에 시가 물심양면으로 거들었다? 드문 경우다. 의재의 삶에 서린 오라가 사후까지 여론을 움직여 미술관을 탄생시켰다. 그림은 물론 덕망과 신망으로 본을 보이고 떠난 이가 의재다. 광주의 ‘큰 어른’으로 똑떨어지는 행장을 남겼다. 다재(多才)와 이타(利他)로 사람들의 마음을 샀다. 광주 사람치고 의재의 됨됨이를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의재는 남종화의 대가다. 보이는 대로 그리는 동양화가 북종화라면, 느끼는 대로 그리는 동양화는 남종화다. 이른바 ‘사의’(寫意)를 표출하는 남종화풍이 성행한 건 18세기 조선 화단의 거두 윤두서, 정선, 조영석 등에 의해서였다. 이후 강세황과 추사에게로 그 맥이 이어졌고, 소치 허련에 이르러 남종화의 토착화가 이루어졌다. 소치의 화풍은 그의 후손인 미산 허형과 남농 허건, 그리고 의재 허백련에게 상속돼 화려한 꽃을 피웠다. 20세기 이후 주로 소치의 혈육들에 의해 남종화의 전통이 계승된 셈이다. “나는 차 한 모금만큼 향기로웠나?” 이제 본관으로 들어선다. 얼마 전 새 단장을 마친 건물 내부는 외부처럼 말끔하다. 벽면과 천장과 기둥은 흰 칠을 입어 환하다. 게다가 병풍처럼 가로로 널따랗게 펼쳐지는 전면 유리창으로 외부의 빛이 물살처럼 솰솰 들이쳐 한층 밝다. 밝기만 하면 무슨 재미? 운치는 무엇으로 돋우나? 유리창을 즐비하게 배치한 이유가 다 있다. 채광은 기본이고 덤으로 차경(借景 : 외부 풍경 끌어들이기) 효과를 거두고 있는 거다. 창 너머 나무들이 토하는 초록과 씽씽한 기세는 그저 본연일 뿐이다. 그런데 그게 창을 통해 들어오는 풍경일 경우엔 맛깔이 다르다. 그림에 맞먹을 흥취를 야기한다. 전시실에서는 ‘문향(聞香); 인연의 향기를 듣다’전이 진행되고 있다.(11월 28일까지) 산수화, 사군자, 화조도, 서예 등 의재의 작품 34점이 걸렸다. 모두 쌍낙관(雙落款 : 그린 이와 받는 이의 이름이 함께 들어간 낙관)이 찍힌 작품들이다. 의재가 지인들에게 그려준 그림들을 모은 전시회라는 얘기다. 현대의 서양화는 전위적이고 도발적인 작풍으로 사람의 굳은 상식을 전복한다. 기상천외한 발상과 쇼로 갈채를 유발한다. 이에 비해 오나가나 산수를 소재로 삼는 동양화는 저만치 홀로 핀 들꽃처럼 얌전하다. 고답적이라 따분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인가, 푸대접이 다반사다. 요즘은 아예 찬밥 신세다. 전통 수묵화를 그리는 이 자체가 드물어도 너무 드물다. 이 점에서 국내 유일의 남종화 전문 미술관인 의재미술관은 전통 회화의 마지막 보루일지도. 의재의 그림에 관해선 토를 달 게 없다. 필치는 능란하며 드러나는 세계는 따뜻해서 아름답다. 별유천지다. 개결하며 유현하다. 나 같은 석두조차 설레게 하는 화풍이다. 의재는 그림에만 정신을 쏟진 않았다. 그를 지배한 이상과 상상은 광활했다. 심중에 ‘삼애’(三愛)를 품고 살았다. 애천(愛天)·애토(愛土)·애가(愛家)를 푯대로 삼았다. 춘설차를 보급, 대중으로 하여금 다선일미(茶禪一味)의 진실을 체험하게 했다. 그 무엇보다 그의 생각과 실천은 항상 일치했다. 농업학교를 세워 농사꾼을 양성하기도 했는데, 그를 찾아온 화가 지망생들은 반드시 농사일을 해야 했다. 이 모든 일을 의재미술관 지척에 있는 자그만 산방 춘설헌에서 도모했다. 세상을 떠나기 전 의재는 “나는 실패한 화가”라 했다. 이런 말도 남겼다. “과연 내 한평생이 춘설차 한 모금만큼이나마 향기로웠던가? 얼굴이 붉어진다.” 말년까지 자신을 거울처럼 들여다봤던 것이다. 도란 대체로 자성(自省)으로 무르익는다. 자성엔 끝이 없다는 걸 깨달은 이를 도인이라 하고.
- 2021-11-05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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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켜켜이 쌓인 추억, 버리지 말고 ‘수선’하세요
- 50대, 60대처럼 삶이 켜켜이 축적되는 나이에는 가진 물건도 그만큼 쌓이기 마련이다. 그중 오래되고 망가졌지만 소중한 기억이 얽혀 버리지 못하는 물건이 있을 터. 이를 다시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새로 탄생시키고, 개성을 살리는 다양한 ‘수선’ 방법이 있다. 책 수선 종이가 다 떨어지고 부식된 책이 있다면 보통 재활용 분리수거함에 버린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책 수선가의 손을 거치면 간직하고 싶은 책을 오래도록 추억하고 보관할 수 있다. ‘재영책수선’은 찢어진 종이를 붙이거나 거뭇거뭇한 자국을 지우고, 표지나 책장을 제작한다. 오랫동안 수집한 만화전집, 유명한 책의 초판본, 낡아 버린 일기장 등 수선 의뢰도 다양하다. 그는 책 수선을 ‘책의 기억을 관찰하고, 파손된 책의 형태와 의미를 수집하는 행위’라고 소개했다. 오래된 것의 진정한 의미를 찾고자 함이다. 킨츠키 선물 받은 커피잔이나 오랫동안 즐겨 사용했던 그릇이 깨졌을 때 킨츠키 기법으로 복원할 수 있다. 옻칠 공예의 일종인 킨츠키는 일본식 도자기 수리 기법이다. 깨진 도자기 조각을 밀가루 풀로 이어 붙인 뒤 깨진 선을 따라 옻을 칠하고 금가루나 은가루를 뿌려 마무리한다. 곳곳에서 킨츠키 기법을 배우는 소규모 클래스도 진행 중이다. 2018년부터 일반인 대상 킨츠키 클래스를 운영한 김수미 작가는 “킨츠키는 단순히 깨어진 것을 이어붙이는 도자기 수선을 뛰어넘어 새로운 아름다움과 가치를 연결하는 공예기법”이라며 “모든 것이 넘쳐나는 과잉의 시대에 새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치유와 회복의 소중한 시간을 경험할 수 있다”고 밝혔다. 다닝 기법 ‘다닝’은 유럽의 전통 의류 수선 기법이다. 수선할 부분 뒷면에 버섯 모양의 다닝 머시룸을 대고 세로 실과 가로 실을 서로 교차시켜 구멍을 메우는 식이다. 감쪽같이 수선하지는 못해도 내가 쓰고 싶은 색은 무엇인지, 바느질을 얼마나 어떤 모양으로 할지 등의 고민을 통해 애착을 더 한다. 망가진 옷은 버리면 그만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찢어진 블라우스, 뒤꿈치 부분이 해진 양말, 소맷부리가 닳은 재킷 등 오래된 의류를 수선하는 작업을 통해 익숙한 듯 새로운 느낌의 옷을 입을 수 있다. 나만의 세월에 개성이 스며드는 것은 덤이다. 순간순간의 기억들이 얽힌 오래된 물건은 새 물건보다 힘이 있다. 또한, 빠르게 많이 소비하기보다 적은 것을 고쳐 쓰면서 오랫동안 소유하려는 움직임은 환경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 이경희 환경정의이사장은 “덜 사고, 나누어 쓰고, 고쳐 입는 문화가 확산돼야 한다”며 “쉽게 버려지는 것들을 가치 있고 사랑받을 수 있는 물건으로 재탄생 시켜 잠재력을 깨닫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전했다.
- 2021-11-02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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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수 이자연, 또 하나의 노래 ‘사부곡’
- 그녀는 일종의 구원이었다. 대학 생활을 시작하면서 여러 모임에 끌려다녔던 시절, 자리에 빈 병이 하나둘씩 늘어나면 신입생은 순서대로 일어나 노래를 한 곡씩 뽑아야 했다. 흥이 나는 노래는 잘 몰랐지만, 평소 즐기는 노래가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렇게 ‘당신의 의미’를 알게 됐다. 그리고 그 인연은 인생의 주요한 길목에서 계속 힘이 되어줬다. 어려서는 이 노래의 주인이 누구인지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가수 이자연을 만나기로 했을 때, 혼란스러웠던 시절 힘이 되어주었던 이 노래에 대한 감사 표시는 하고 싶었다. 그간의 도움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이자연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발견한 한 가지 특징은 바로 ‘가족’에 대한 것이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그 애틋한 마음을 오래 품고 살아서인지, 그녀는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 고마운 사람들을 가족에 비유하기를 즐겼다. 형제애로 다져진 나훈아와의 인연 일본에서 활동할 때 NHK 한국어 프로그램 출연의 계기가 된 재일교포 민단에서 활동하던 언론인을 ‘일본 아버지’라고 부른다. ‘일본 엄마’는 두 분이나 계신다. 4년간이나 이어졌던 일본 생활에 힘이 됐던 사람들이다. 아직 생존해 계신 일본 엄마는 여전히 안부를 챙길 정도다. 또 다른 가족 중에는 가요계의 거목 ‘나훈아’가 있다. 그녀는 “아마 전생에 형제였을 것”이라 표현한다. “1982년 길옥윤 선생님 소개로 한일친선협회 일본 공연에 합류하게 됐어요. 거기서 나훈아 선배님을 처음 알게 되었고요. 무명이었던 제가 두 분께 인정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지요. 나중엔 선배님과 반반씩 나눠 공연할 정도가 됐으니까요. 나훈아 선배님과의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져 많은 빚을 지고 있죠.” 일본 공연이 끝나던 1986년 이자연은 나훈아에게 큰 선물을 받았다. 온 국민이 손뼉 치며 불렀던 그 노래 ‘당신의 의미’다. 애초에 이 곡은 나훈아가 1969년 발표했던 ‘내 당신’이 원곡이다. 개사를 거치고 제목까지 바뀌었으니 ‘감히 나훈아의 곡을 개사했다’는 오해도 받았다. “처음엔 신곡인 줄 알았어요. 나훈아 선배님이 주신 곡이라 이것저것 따질 것 없이 감사한 마음으로 받았죠. 이 곡의 인기가 올라가면서 개사된 곡이라는 걸 나중에야 알았죠. 선배님이 여자 노래로 가사를 바꿨다고 설명해주시더라고요. 많은 분들에게 사랑을 받아서, 나중엔 ‘내가 더 잘 불렀다’고 농을 할 수도 있었어요.” 실제로 나훈아와의 인연은 그녀가 ‘가족’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사나이 눈물’ 역시 나훈아가 불렀던 곡을 다시 받아 발표한 것이고. ‘서울나그네’는 나훈아가 작곡한 다음 날 이자연에게 곡을 소개했다가 주인이 바뀌었다. 그녀는 당시 상황을 “빼앗다시피 졸라 곡을 얻어왔다”고 표현했다. 이자연의 곡 ‘만남과 이별’, ‘백세시대’, ‘친구야’를 만든 작곡가 박성훈도 나훈아를 통해 알게 된 인연이다. “남들은 선배님 얼굴 한 번 보려고 티켓 구하느라 분주하고 암표도 사는데 저는 옆에서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있어 늘 감사해요. 대한가수협회 회장이 되고 나서 인사드리러 갔을 때는 협회 발전기금까지 주셨으니까요. 선배님의 제자로 데뷔 때부터 계속 도움만 받으며 살고 있어요. 선배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열심히 살아요.(웃음)” 잊지 못할 인생의 버팀목, 아버지 그 많은 아빠와 엄마, 오빠와 언니 가운데 지금까지 그녀를 지탱해주는 기둥이 한 사람 있다. 진짜 가족, 바로 아버지다. 그녀가 중학생 신분으로 1973년과 1974년 지역 MBC와 KBS 노래자랑에서 최고상을 연이어 수상하고, 음반 취입까지 이뤄졌을 때 아버지는 한탄했다. 자신의 딸이 딴따라가 돼서도 아니고, 당신이 희망하는 직업을 갖지 않아서도 아니었다. 그저 자식의 재능이 빛나는 분야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이었기에 맘껏 지원해줄 수도, 맘 편히 응원할 수도 없어서 한스러웠다. 반대할 수밖에 없었고, 걱정은 어느 날 현실이 됐다. 성인이 된 이자연의 가수 선언이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 본격적으로 활동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죠. 늘 무대를 꿈꾸던 소녀였으니 제안을 마다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빌었죠. 1년만 하게 해달라고. 그 후에는 진학을 하든 시집을 가든 아버지 뜻에 따르겠다고 설득했어요. 그렇게 1년이라는 시간을 얻어 야간업소를 시작으로 무대를 찾아다녔죠.” 하지만 그 1년이라는 약속은 결국 지켜지지 못했다. 딸은 늘 ‘아버지에게 부끄럽지 않은 딸이 되겠다’며 고집스럽게 맹세를 이어갔지만, 부친의 갑작스런 사망이 상황을 변화시켰다. 이자연은 졸지에 소녀 가장이 됐고, 가수 생활로 동생 네 명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전 아버지의 재능을 물려받았어요. 아버진 소년 시절부터 동네에서 노래 잘하기로 유명했는데, 동네의 열성 팬 중에 외할머니도 있었어요. 그래서 아버지를 점찍어놓고 어머니와 결혼시켰어요.(웃음) 아버지는 재능을 펼쳐볼 기회를 갖지 못했지만, 대신 저를 내보내신 것 같아요. 노래할 때 고음에 다다르면 아버지 목소리가 나와요. 어릴 때 듣던 그 목소리 말이에요.” 꼬마 이자연은 일터에 나가는 아버지를 꼬리처럼 따라다녔다. 그 자리에서 노동요처럼 불렸던 ‘황성옛터’나 ‘번지 없는 주막’을 배웠다. 또 아버지가 좋아하던 ‘새타령’이나 ‘릴리리아’ 같은 민요도 함께 불렀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이 노래들을 사이좋은 부녀는 함께 불렀고, 아버지의 노래가 좋았던 소녀는 가수의 꿈을 키웠다. 이 곡들은 이자연이 자신의 노래가 많지 않던 신인 시절 공연의 레퍼토리로 쓰였다. “콘서트에서 이 곡들을 부를 때는 기타나 아코디언 하나만 놓고 무대를 꾸며요. 조용한 반주 속에 노래하다 보면 하늘에서 아버지가 들어주실 것 같은 기분이 들죠. 그러다 보면 자꾸 눈물도 나고요. 요즘엔 공연 전에 아버지를 향해 ‘파이팅’을 외치며 무대에 오르는 것이 습관이 됐어요.” MZ세대와 동기동창이 되다 “나 학교를 다녀볼까?” 언니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동생은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라에 연이어 국장이 생기며 설 무대가 사라진 언니가 궁핍해졌나 걱정돼서가 아니었다. 네 명의 동생은 가수 언니를 후광 삼아 대학도 나오고 출세를 했는데, 정작 본인은 변함없이 그대로인 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 그러다 늦은 나이지만 배움을 시작하겠다 선언한 것이 고맙고 자랑스러웠다. 자매는 쉬지 않고 눈물을 훔쳤다. 늦은 나이에 배움의 한을 풀기 위해 학교에 들어가는 것은 흔한 일이다. 하지만 학부생부터 차근차근 제대로 절차를 밟아나가는 이는 찾기 힘들다. 이자연은 정공법을 택했다. EBS 교재를 손에 잡고 방송 수업으로 기초부터 공부했다. “처음엔 당연히 어려웠죠. 무슨 얘기인지도 모르고. 기초가 전혀 없었으니까요. 그냥 무작정 반복해서 수업을 듣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어요. 나중엔 선생님 농담까지 외워지더라고요. 쉰 살이 넘자 공부를 제대로 못 한 것이 늘 아버지에게 죄스러웠는데, 학교에 들어가니 맘이 놓이더라고요.” 그렇게 2011년 건국대학교 예술문화대학 예술학부에 합격했다. 이자연의 11학번 동기들은 그 면면이 화려하다. BTS의 진과 배우 이종석이 대표적이다. 선배로는 샤이니의 민호, 배우 고경표가 있다. 이자연은 소속사도 없던 신입생 시절의 모습이 강렬한지 아직도 BTS 진을 ‘석진이’라고 부른다. “처음 학교에 들어갔을 때 신입생 두 사람이 와서 말을 걸어주었어요. 그때 건네준 한마디가 제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그 친구들은 모를 겁니다. 어딘가에서 제 노래를 실컷 불러놓고는 ‘열창했다’며 너스레를 떨 때는 친동생처럼 귀여워요. 아이들이 제게 친근함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어쩌면 제 노래 덕분인지도 모르겠어요. 이렇게 노래가 새로운 인연을 더 깊게 만들어줄 때마다 노래의 힘을 느껴요.” 이후 이자연은 대학원까지 진학해 석사 학위를 받았다. 논문도 그녀답다. ‘TV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대중가요의 특성에 관한 연구 : KBS 를 중심으로’라는 다소 긴 제목의 이 연구는 가요무대에 등장한 곡들을 통해, 시기마다 사랑받은 노래들이 어떤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는지 연구했다. KBS의 도움을 받아 30년이 넘는 기간을 모조리 살폈다. “우리 대중가요는 역사적 큰 사건을 기점으로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한 노래가 많아요. 일제강점기에는 고향을 그리워하고, 한국전쟁 때는 가족을 찾는 식이죠. 역사 속에서 우리 가요가 어떻게 사랑받았는지 보면서 대중가요의 사회적 역할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죠.” 가요계 보살피는 어머니로 최초의 여성 대한가수협회장. 그녀를 장식하는 또 다른 수식어다. 2018년 갑자기 공석이 된 회장직을 선출하기 위해 구성된 비상대책위원회에서 부회장이었던 이자연이 만장일치로 추대됐다. 당시 비대위의 좌장 격이었던 협회 명예회장 남진의 강력한 추천이 있었다. “누가 그러더라고요. 또다시 소녀 가장 생활을 시작하느냐고. 그 얘기를 들으니까 오히려 용기가 생겼어요. 그냥 집에서 내 살림하듯이 꾸려나가면 되겠구나 하는 용기가 나더라고요. 내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더 쉬워졌어요. 그래서 겁 없이 정부 기관부터 시작해 다양한 분야의 분들을 만나러 다녔죠. 그렇게 움직이다 보니 하나둘씩 결과물이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살림 실력이 좋았던 덕일까. 대한가수협회는 창립 64년 만에 지정기부단체로 지정받는다. 협회 후원 확보에 날개를 단 셈이다. 코로나19로 설 곳이 없어진 후배들을 위한 예산 마련에도 힘썼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지원으로 ‘전국민 희망콘서트’, ‘전국 TOP 가요쇼’ 같은 무대를 만들었다. 사라진 무대를 직접 되살린 셈이다. “‘전국민 희망콘서트’는 드라이브스루 형식으로도 진행됐어요. 코로나19 상황에서 팬과 가수가 안전하게 즐길 수 있는 방법이었죠. 300여 대의 차량이 제천 활주로를 가득 메운 가운데 신나는 리듬에 차들이 들썩거리는 모습은 정말 장관이었어요. 반응은 기대 이상으로 폭발적이었죠. 무대가 그리웠던 가수만큼이나 팬들 역시 우리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어요.” 이자연은 지난 9월 대한가수협회 제7대 회장으로 연임이 확정됐다. 그녀의 왕성한 활동이 인정받은 것이다. 이제 그녀의 관심은 협회의 새로운 사업 분야인 역사를 담을 그릇에 집중되어 있다. “얼마 전 이미자 선생님이 이사하시면서 공간 문제로 개인적인 자료를 한 트럭 가까이 버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땅을 쳤어요. 이런 경우를 흔히 봐요. 스타 선배님이 돌아가시면 남겨진 유품은 모두 개인이 소장해버리고, 나중에 공익적인 목적으로 확보하려고 해도 큰돈이 들죠. 협회 차원의 ‘박물관’까지는 아니더라도, 사료들을 확보해놓을 수 있는 자료실 정도는 만들고 싶어요.” 가요계에 대한 그녀의 애정과 걱정은 많은 변화를 이뤄낼 것이다. 이렇듯 확신에 차서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간 그녀가 인생의 과정에서 보여준 많은 결과와 성과가 증명하기 때문이다. 이자연이 좋아하는 가족에 빗대 표현하자면, 이제 그녀는 가요계에서 어머니 역할을 해나가는 중이다. 트로트라는 고질적인 명칭 문제에서부터, 협회 회원 자격 기준 정리, 신인 전통가요 가수가 넘쳐나고 있는 상황에서 원곡 가수의 권리 보호에 관한 문제까지, 그녀의 관심사는 넓고 깊다. 가요계 구석구석 어머니의 마음이 미치고 있다.
- 2021-11-02 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