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이 느긋하다. 차 한잔하면서 직장에 매이지 않은 자유로움을 실감한다. 퇴사한 지 일 년. 가끔 지금도 근무하는 꿈을 꾸는데 잠에서 깨면 어떤 게 진짜 나 자신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아마도 정년을 다 못 채우고 그만뒀다는 생각에 사로 잡혀있어서 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런 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틈 없게 내 나름대로 활동과 계획을 만들어 충실히 움직인다. 그중 하나로 며칠 전 동네의 작은 도서관을 가보았다. 직장 다닐 때 출퇴근 하며 그저 눈길만 스치던 그곳, ‘희망마을작은도서관’이다.
‘희망마을작은도서관’이 있는 대전시 유성구 봉명동은 구도심으로 골목이 거미줄처럼 촘촘하다. 봉명(鳳鳴)동은 숲이 많아 부엉이가 찾아와 울던 곳이라고 해서 예로부터 ‘부엉이마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내가 사는 구암동 이웃 동네인 봉명동은 길쭉하게 생긴 유성구 중앙쯤에 있다. 봉명동 주변의 노은동(유성구)과 도안동(서구)이 아파트단지로 개발돼 들어섰지만 봉명동은 옛날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그래도 도서관을 중심으로 유성온천과 유성시외버스터미널, 유성 오일장 등이 어른 걸음으로 10여 분 거리. 개발 더딘 곳이라지만 누구든 접근할 수 있어 도서관이 있기에 딱 적당한 곳이 바로 봉명동이다.
작정하고 도서관을 찾아갔지만 정기휴일이었다. 평소 월요일에 도서관이 쉰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깜박했다. 이왕에 걸음 했으니 도서관 분위기를 살피기로 마음 먹고 두리번거렸다.
돌아보니 도서관 건물 1층은 봉명동 어르신을 위한 경로당이었다. 마침 할머니 한 분이 어린 손주를 업고, 마치 이웃집 놀러 가 듯 안으로 들어갔다. 도서관과 경로당이 어울려 있는 것이 우리 옛 마을에 아이와 노인이 함께 살던 모습과 다르지 않아 보였다.
‘무더위쉼터’라는 팻말이 걸린 경로당 앞에는 ‘누구나 앉을 수 있는 의자’가 있다. 의자에는 부엉이 그림이 그려져 있다. 등허리를 세우고 엉덩이를 깊숙이 넣어 앉아 바닥을 보니 화분이 나란하게 줄지어 서 있다. 테두리 한 귀퉁이가 떨어진 것, 사기 재질로 길쭉하게 키가 큰 것 등, 고만고만한 플라스틱 화분들이 삼대가 같이 사는 대식구처럼 느껴졌다.
‘부엉이 할매 그림나무’라고 쓰인 게시판도 눈이 들어왔다. 나무 그림 위에 부엉이 마을에 사는 할머니들의 ‘자랑’이 목재로 만든 작은 이파리마다 쓰여 있었다.
나는 바느질을 잘한다.
나는 잘 웃는다.
나는 노래를 좋아한다. 기쁠 때 슬플 때 위안이 된다.
나는 노래를 잘한다. 즐겁게 산다. 행복하다.
인생의 후반을 사는 경로당 어르신들이 적어놓은 인생의 단상들. 세상 사는 것에 있어 어떤 것이 중요한지를 단순하고 소박하게 알려주는 것만 같았다. 옷을 지어 입던 시절, 당신 세대에서 바느질을 잘한다는 건 매우 중요했을 것이다. 노래는 시대를 불문하고 기쁨을 더하거나 시름을 덜어주는 치유가 되기도 한다. “노래 부르고 이웃과 즐겁게 지내니 행복하다”는 부엉이 할매의 자랑은 내게 위로와 격려로 다가왔다. 그리 조급해하며 만들어놓은 계획표에 가끔 느슨하게 움직여도 괜찮을 거라고. 오늘 도서관에 왔다가 헛걸음 한 시간도 그 나름대로 의미 있다고 말이다.
평생을 한 직장에서 근무하며 하나의 일에만 매달려 살아온 이들에게 두 번째 삶, 은퇴 후 인생설계는 그저 막막한 일일 뿐이다. “후배들에게 미리미리 준비하라고 잔소리했지만, 정작 회사 밖으로 나오니 눈앞이 캄캄하더라”는 어느 공기업 정년퇴직자의 소감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퇴직 후의 삶을 미리 준비해야 하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제대로 실천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런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최근 자사 임직원의 은퇴 준비, 노후 준비를 돕기 위한 기업들이 늘고 있다. 선명한 미래가 업무의 생산성 향상에 도움이 된다고 믿는 것 아닐까. 이런 기업 중 모범 사례로 꼽히는 포스코를 찾아 인생설계 프로그램이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들여다봤다.
브라보 라이프 디자인. 본지 제호와 비슷해 친숙하게 여겨지는 이 이름은 포스코의 퇴직 후 인생설계 프로그램명이다. 교육 참여는 50세 이상의 포스코 임직원이라면 누구나 신청이 가능하다. 브라보 라이프 디자인은 2001년부터 포스코인재창조원이 운영해온 정년퇴직 예정자 대상의 교육 과정인 ‘그린 라이프 디자인’이 원형이라 할 수 있다. 교육 진행 과정 중 정부의 정년퇴직 연장 정책에 따라 2016년과 2017년에는 정년퇴직자가 발생하지 않게 되면서 프로그램 운영에 변화가 있었다. 이런 변화의 배경에는 ‘준비기간’에 대한 의견도 반영됐다. 교육 시점이 정년퇴직 3개월 전부터 시작되어 인생설계에 제대로 반영하기엔 빠듯했기 때문이다. 그린 라이프 디자인 교육은 2001년부터 2015년까지 약 3000여 명의 직원들이 참여했다.
인재창조원 관계자는 “정년퇴직 예정자를 대상으로 한 그린 라이프 디자인 프로그램이 퇴직이 임박한 이들을 대상으로 실제적으로 필요한 서류 처리나 연금 문제 등에 초점을 맞췄다면, 브라보 라이프 디자인 프로그램은 퇴직 후 생활에 대한 마인드 변화, 방향성 제고와 같은 포괄적인 부분이 중심이 된다”고 설명했다.
미래가 명확해야 근로의식 높아져
올해 브라보 라이프 디자인에 참여 예정 인원은 330명. 포스코의 주된 사업장인 포항과 광양의 임직원 300명과 서울 근무자 30명이 참여한다. 강의에 참여하는 인원만 13명. 포스코인재개발원의 교수 외에 다양한 분야의 사외 강사들이 각 전문 분야의 교육을 담당한다.
포스코인재창조원 김일수 교수는 이 프로그램의 목적을 이렇게 설명한다.
“50대를 넘어선 직원들이 퇴직 후 삶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을 갖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부분 젊은 시절부터 포스코에 몸담아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회사 밖에서의 삶에 겁을 먹을 수 있거든요. 그래서 회사가 나서서 이들의 일과 삶에 대한 생애설계와 퇴직 준비를 지원해 불안감을 해소시키고, 근로의식도 고취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지요. 또 퇴직 후 삶의 방향을 설정함으로써 행복한 인생을 유지할 수 있기를 바라는 부분도 있고요.”
2016년과 2017년 진행된 프로그램에는 총 700여 명의 임직원이 참여했다. 본인의 생애설계에 대한 진단과 자산관리, 생애관리, 건강관리 교육이 중점적으로 이뤄졌고, 관심 분야와 관련한 현장 탐방과 체험 학습도 이뤄졌다. 참여자의 만족도는 꽤 높은 편이어서 자체적으로 조사한 결과 5점 만점에 평균 4.88점의 반응이 나왔다.
브라보 라이프 디자인 프로그램은 올해 변화를 줬다. 초기 프로그램이 1일 8시간 포괄적인 방식으로 진행돼 교육시간 부족, 교육 내용 전문성에 대한 의견이 많았기 때문이다. 올해부터는 직업형 트랙과 자산형 트랙으로 나눠 자신에게 맞는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자산형 트랙의 경우 자산관리는 결국 부부 공동의 이해가 있어야 한다는 점에 착안해 임직원의 배우자도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또 원한다면 두 프로그램 모두 참가할 수 있다. 일반적인 재무관리 교육과 달리 특정 금융상품의 밀어주기가 없다는 점도 참여자들에게 환영받는 이유다.
‘먹고사는 문제’ 이외의 것까지
직업형 트랙은 1인 창업이나 프랜차이즈 창업의 특징과 차이점, 창업 과정에서 극복해야 할 위험 요소, 재취업을 원하는 이들을 위한 구직 목표 설정, 자격증 취득 등과 같은 현실적인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자산형 트랙은 수익형 부동산이나 부동산 경매 또는 공매에 대한 정보, 세금과 관련 법률에 대한 소개, 각종 금융상품이나 상속·증여와 관련한 교육도 실시한다.
또 각 프로그램에선 즐거운 여가를 위한 본인의 여가 유형 진단에서부터 여가 활용 방법과 건강관리를 위해 지켜야 할 사항 등도 함께 소개한다.
프로그램의 구성이 단순히 ‘먹고사는 문제’에 국한되어 있지 않은 것이 흥미로운 부분. 포스코인재창조원 관계자는 이렇게 주제가 넓어진 것에 대해 “직원들의 요구가 있었다”고 설명한다.
임직원들의 관심이 많은 건강과 재무, 인간관계, 여가까지 다양한 주제를 다루는 것은 단순한 재테크 활동뿐만 아니라 정년퇴직 후 품위 있는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욕구를 반영한 것이다.
물론 재취업이나 창업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이나 준비사항에 대한 교육도 진행한다.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작성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개인별로 성격검사와 적성검사도 실시한다. 여기에 직원에게 재취업 장애요인은 없는지 체크한다.
오프라인 교육과 별도로 사이버학습을 사전학습 형태로 진행하는 것도 이 프로그램의 특징 중 하나다. 인생설계, 창업, 귀촌과 같은 커리어 디자인과 재무 디자인, 라이프 디자인을 온라인을 통해 접할 수 있다.
은퇴 대비에 ‘눈치 보기’는 없어
올해 브라보 라이프 디자인 프로그램의 참석률은 전체 대상자의 20% 정도. 은퇴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정년퇴직을 10년 앞둔 임직원까지 대상에 포함되는 것을 고려하면 꽤 높은 편이다.
혹시 회사가 먼저 나서서 ‘퇴직’에 대해 논하는 것이 사측에서 퇴직을 권하는 것처럼 비춰지진 않을지, 또 프로그램 참여가 퇴직 의사를 밝히는 것처럼 여겨지진 않을지 의문을 가졌지만 참가자들은 “사내 분위기를 모르는 상태에서 갖는 의문”이라고 일축한다.
한 프로그램 참석자는 “포스코라는 기업의 특성상 대부분의 직원들이 정년을 채우고 퇴직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기고 정년 때까지는 업무에만 집중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면서 “이런 문화 때문에 정년퇴직 후 생애설계에 대해 논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것이 사내 분위기다”라고 설명했다.
노후의 삶이 점점 길어지고 있다. ‘장수리스크’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준비 없이 맞이하는 긴 노년은 괴로움만 더할 뿐이다. 따라서 나이에 맞는 ‘생애자산관리’가 뒤따라야 하며, 은퇴 직전인 50대뿐만 아니라 30~40대부터 노후필요자산에 대한 적정성 점검과 자산 극대화를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아울러 은퇴 이후에는 노후 기간을 세분화하여 자산의 적정한 인출과 소득의 보완에 신경 써야 한다. 금융업계 전문가들이 꼽은 시니어가 알아야 할 재무 설계 키워드를 은퇴 전·후로 나눠 정리해봤다.
도움말 미래에셋 은퇴연구소, 삼성생명 은퇴연구소, NH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 골든라이프연구센터
PART1. 은퇴 전 시니어 재무 설계 키워드
◇ By 미래에셋 은퇴연구소 김동엽 상무·은퇴교육센터장
#1 '5565'
직장에서 정년퇴직하기 직전 5년부터 퇴직한 뒤 5년에 해당하는 55세부터 65세 사이의 시기를 말한다. 직장생활을 잘 마무리하면서 새로운 인생을 준비하는 시기로 매우 분주한 때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는 인간관계 중심이 회사에서 가정으로 바뀌므로 회사형 인간에서 가정형 인간으로 변화해야 한다. 아울러 노후자금 관리도 돈을 모으는 ‘적립’에서 ‘인출’ 중심으로 변화한다.
#2 임금피크 ≠ 인생피크
정년이 60세로 연장되면서 55세 전후로 임금피크를 실시하는 회사가 늘고 있다. 근무연한이 늘어나면 임금도 상승하는 연공서열방식 임금제도와 달리, 임금피크제를 도입하면 특정 연령부터 임금이 줄어든다. 임금이 줄어들면 덩달아 퇴직급여도 줄기 때문에 대응을 잘해야 한다. 기업에 따라 임금피크에 해당하는 근로자를 대상으로 사전은퇴 교육을 시행하는 곳도 있으니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노후준비를 시작하는 것이 좋다. 임금피크 전후를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따라 인생 후반전이 달라진다. 자칫 이 시기를 무의미하게 보내면 임금피크가 인생피크가 될 수도 있다.
#3 이중부양
은퇴를 앞둔 50대는 자녀부양과 부모봉양이라는 두 가지 짐을 짊어진 경우가 많다. 그나마 현재 50대는 경제가 고도성장할 때 직장에 다니며 부를 축적하고 노후준비도 할 수 있었지만, 그들의 부모 세대는 제대로 된 준비 없이 노후를 맞이했다. 게다가 고도성장의 열기가 식으면서 그들의 자녀 세대 또한 제대로 된 일자리를 얻지 못해 생계를 꾸려가기 힘든 상황이다. 부모봉양과 자녀부양이라는 이중의 짐이 50대 어깨 위에 얹혀 있는 셈이다. 게다가 자신의 노후준비까지 하려면 연금 시스템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공적연금과 퇴직연금을 통해 기초생활비를 만들고, 여기에 개인연금과 주택연금을 더해 기본 생활비를 마련하자.
◇ By 삼성생명 은퇴연구소 조명기 수석연구원
#4 퇴직금을 지켜라
우리나라 남성 근로자의 평균 근속연수는 6.7년으로 OECD 주요국 중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다. 평균 근속연수가 짧으면 이직 때마다 노후자금의 주요 축인 퇴직(연)금을 일시금으로 찾아 다른 용도로 활용해버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노후자금 축적에 큰 위협 요인이 된다. 따라서 이직 시 IRP(개인형 퇴직연금, individual retirement pension) 계좌에 이관된 퇴직금은 절대 다른 용도로 사용하지 말고, 55세 이후 5년 이상 연금으로 받는 것이 좋다. 이 경우, 퇴직금을 노후자금의 목적대로 보존할 수 있으며 퇴직소득세 감면 효과(30%)까지 누릴 수 있음을 기억하자.
#5 자녀 리스크 회피
자녀 지원을 아끼지 않는 우리나라 부모 세대는 오랜 기간 자녀 리스크에 노출된다. 사교육비부터 결혼자금 지원까지, 생애 지출의 상당 부분이 자녀를 위해 쓰인다. 즉 소중한 자녀가 노후준비의 걸림돌이 되는 것. 2016년 삼성생명 은퇴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5년 내 자녀를 출가시킨 부모의 3분의 1은 결혼자금 지원을 위해 노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자산(부채, 퇴직금, 개인연금 등)을 활용했다. 자녀에 대한 무분별한 지원보다는 자녀에게 부담 주지 않는 독립적인 노후를 보내는 것이 결국 자녀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임을 명심하자.
#6 연금라이프 점검
평균수명 증가로 은퇴기가 길어지면서 필요한 노후생활 자금 규모가 점점 커지고 있다. 소득이 사라지는 은퇴기에도 삶의 질 하락 없이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생활에 꼭 필요한 ‘필수생활비’를 확보해두는 것이 핵심이다. 이때 필수생활비는 살아있는 한 꾸준한 소득흐름을 보장하는 연금으로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기본적인 국민연금 이외에 종신연금처럼 죽을 때까지 소득흐름을 보장하는 연금상품이 충분히 갖춰져 있는지 확인해, 필수생활비를 연금으로 충당하는 연금라이프를 누릴 수 있을지 점검해보자.
◇ By NH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 박 진 소장
#7 집, 소유 말고 사용하자
우리나라 사람들의 자산을 보면 다른 나라에 비해 부동산 비중이 절대적으로 높다. 선진국의 경우 가계의 부동산 비중이 약 50%이지만, 우리나라는 70%가 넘는다. 집은 소유하는 개념이 아닌 사용하는 개념으로 바꿔 생각할 필요가 있다. 집을 사용하는 것으로 여기면 무리하게 투자해 집을 사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7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10억짜리 집을 사기 위해 3억을 대출받는 것보다, 5억짜리 집에 살면서 2억을 연금보장형 상품 등으로 넣어두는 편이 낫다. 10억짜리 집을 사면 이자를 내야 하지만, 5억짜리 집에 살면 이자를 받는 셈인데, 이는 매우 큰 차이다. 여기서 나오는 이자를 노후자산에 톡톡히 활용할 수 있다.
#8 자산관리 분배 원칙 '5533'
5: 총자산의 50%를 금융자산으로! 가계의 총자산 내에서 26% 수준에 불과한 금융자산의 비중을 큰 폭으로 늘리자. 노후에 필요한 것은 정기적인 현금흐름이고, 이를 만들어내는 금융자산을 최소 50% 수준까지 확대하는 것이 좋다.
5: 금융자산의 50%를 투자형 자산으로! 저금리 시대를 맞아 금리연동형의 안전형 상품으로는 자산을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없다. 40%를 훌쩍 넘는 예금자산을 줄이고, 20% 수준에 불과한 투자형 자산의 비중을 늘려보자.
3: 투자형 자산의 30% 이상은 해외자산으로! 투자형 자산에 투자할 때는 해외자산의 비중을 늘려 위험을 관리해야 한다. 우리나라 증시는 전 세계 주식시장의 2%도 안 된다. 국내 종목에만 집중투자하기보다는 글로벌 분산투자의 개념에서 해외 종목을 30% 이상으로 늘릴 필요가 있다.
3: 연금자산은 총자산의 30% 이상으로! 100세 시대에 직접적으로 필요한 자산은 결국 연금자산이다. 아무리 많이 잡아야 8% 수준에 불과한 연금자산을 최소 총자산의 30% 이상으로 확대해야 한다.
◇ By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 골든라이프연구센터 황원경 센터장
#9 장기보장자산 마련
장기보장자산 마련을 위한 재무 설계는, 늘어난 노년기에 경제적으로 독립된 노후생활을 고려하는 상황에서 주요 키워드가 될 것이다. 장기보장자산 마련을 위해서는 일정 소득을 제공하는 노후자금기본형성 계획과 인플레이션을 따라가면서 ‘인플레이션+α’의 효과를 창출할 수 있는 자산 확대 계획이 필요하다. 노후자금기본형성을 위해 개인형 IRP, 연금보험 등에 대한 이슈가 중요하며, 노후자금자산 확대를 위해 일정 부분 위험을 감수하는 자산관리 전략의 혼용이 필요하다.
*경제활동기 이후 노후생활기 증가: 1985년 13.4년, 2016년 26.8세.
단순히 ‘노후자산관리’라고 뭉뚱그려 말하기엔 은퇴 이후, 즉
#10 '1세대가구형' 생존전략
가구에 대한 개념 변화와 기대수명의 연장, 부모에 대한 부양의식의 약화, 에이징인플레이스(Aging in Place)의 개념 등으로 은퇴 후 1인가구나 부부가구 증가가 예상된다. 전통적 방식의 2세대 이상 가구 유형(부모-자녀 세대)은 감소할 것이다. 특히 재무 설계의 목적을 설정할 때 1인 또는 부부가구 중심의 노후자금준비 목적이 이뤄지도록 반영해야 한다. 이는 1세대가구 생존을 위한 노후자금준비 목표에 대한 재점검과 자산관리 재조정으로 이어진다.
* 부양의식의 변화: 부모부양 부담에 대해 가족의 책임 2002년 70.7%, 2016년 30.6%.
* Aging in Place: 연령, 소득, 능력 수준에 관계없이 자신이 살던 집과 공동체에서 안전하고 자립적으로 살고자 하는 욕구.
PART2. 은퇴 후 시니어 재무 설계 키워드
◇ By 미래에셋 은퇴연구소 김동엽 상무·은퇴교육센터장
#1 일병식재
100세 시대라고 하지만 수명이 늘어났다고 기뻐할 일만은 아니다. 일본은 75세 이상 고령자 중 30% 이상이 와병 상태에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상황도 크게 다를 것 같지 않다. 나이가 들면 밥보다 약을 더 많이 먹는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늘어난 수명을 병상에서 보내지 않으려면 건강관리에 매진해야 한다. 보통은 아무런 질병이 없을 때 건강을 돌본다는 의미로 ‘무병식재(無病息災)’라는 말이 있지만, 사실 이때는 오히려 자신의 건강을 과신해 별다른 준비를 안 하고 무리하게 된다. 건강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 시기는 은퇴하고 나서 체력이 떨어지고 가벼운 질병을 하나 정도 갖게 됐을 때다. 이때부터라도 건강관리에 힘쓰면 장수할 수 있는데, 이를 두고 ‘일병식재(一病息災)’라 한다.
#2 평생월급
은퇴 후 삶의 시기를 크게 3단계로 나눠 정년퇴직 후 부부가 사망할 때까지 받을 수 있는 ‘평생월급’이 얼마나 되는지 살펴야 한다. 1단계는 정년퇴직 이후부터 국민연금 등 공적연금을 수령할 때까지다. 월급이 끊긴 뒤 공적연금을 받을 때까지의 소득공백기간이 얼마나 되는지, 퇴직금과 모아둔 금융자산으로 매달 얼마의 소득을 낼 수 있는지 점검해본다. 2단계는 공적연금수령 기간이다. 부부가 받는 공적연금으로 기본 생활비를 충당할 수 있는지 확인하고, 부족하다면 주택연금을 받는 방법도 고려한다. 3단계는 독거생활 기간이다. 본인이 먼저 사망했을 때와 그 반대의 경우 소득이 얼마나 되는지 확인해본다. 이런 점검을 통해 퇴직 후 부부가 사망할 때까지 소득이 얼마나 확보되어 있는지 알아보고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며 평생소득을 만들어가야 한다.
#3 딴 지붕 한 가족
자녀들도 나이 든 부모와 함께 살기를 원하지 않지만, 부모도 자녀와 함께 사는 것을 반기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아주 먼 곳에 떨어져 살려고도 하지 않는다. ‘방금 끓인 수프가 식지 않을’ 거리에 떨어져 살면서, 프라이버시는 지키며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부모·자식 관계가 일상화되고 있다. 한 지붕 아래서 얼굴을 맞대고 사는 전통적인 가족관계에서 벗어나, 다른 지붕 아래 살면서 보고 싶을 때만 보는 ‘딴 지붕 한 가족’이 보편화되고 있다.
◇ By 삼성생명 은퇴연구소 조명기 수석연구원
#4 '100세' 보장
민간 건강보험으로 탄탄한 의료비 보장을 해놓은 이가 많다. 그러나 평균수명이 연장돼 100세 시대가 눈앞에 다가오며 과거에 해둔 보장이 불충분해지고 있다. 예를 들어 의료비 보장이 80세까지만 되어 있는 경우다. 특히 고령화 후기로 접어들면 간병비도 늘어난다. 이에 100세까지 보장받을 수 있는 의료비와 간병비 마련이 무엇보다 중요해지고 있다.
#5 '4% 인출' 법칙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로 그동안 저축한 은퇴자산에서 자금을 찾아 써야 하는 은퇴자가 많아지고 있다. 은퇴자에게 가장 큰 고민거리는 평생토록 소득이 고갈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때 한정된 은퇴자산에서 매년 생활비로 인출할 수 있는 금액을 알려주는 법칙이 있다. 일명 ‘4% 법칙’이라고 하는데, 은퇴 직전 자산의 4%를 기준으로 매년 물가상승률을 반영한 금액을 더해 인출하면 평생토록 소득이 고갈될 우려가 없다는 법칙이다. 인출하고 남은 은퇴자산을 어떻게 운용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다소 달라지겠지만 은퇴자의 생활비 인출 범위를 대략적으로 가늠하는 기준으로 활용할 수 있다.
#6 버킷 전략
시니어도 젊은 시절에는 자산운용에 할애할 시간이 많았기 때문에 비교적 적극적인 투자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은퇴 이후엔 투자 실패 시 만회할 시간이 부족해 적극적 자산관리를 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자산관리를 소홀히 했다가는 보유한 자산이 생전에 고갈되는 장수 리스크에 빠지게 된다. 이럴 때 은퇴자산을 인출 시기별로 나누어 각각 달리 관리하는 이른바 ‘버킷 전략’을 활용할 수 있다. 올해 당장 써야 할 자금은 현금성 자산으로, 앞으로 10년 이내에 꺼내 쓸 자금은 각각의 인출 시기까지 운용할 수 있는 상품으로 보유한다. 나머지 자산은 향후 10년 이상 운용 가능하게 되어 더 적극적인 투자관리를 할 수 있다. 이 방법을 버킷 전략이라 하는데 최근 외국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
◇ By NH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 박 진 소장
#7 장수리스크, ‘일’로 대비하자
오래 살게 되는 상황에 대한 리스크가 점점 커지고 있다. 반드시 경제적인 이유가 아니더라도 사회적 관계와 정신건강 측면에서도 ‘일’은 필요하다. 우리나라는 노인 빈곤율이 전 세계 1위이고, 이 중 47%, 즉 둘 중 한 명은 절대빈곤을 겪고 있다. 먹고살기 위해 일해야 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재능기부 등의 일이라도 하면서 지내는 것이 좋다. 물론 이러한 활동이 가계에 도움이 된다면 금상첨화다.
#8 발품을 팔아야 한다
대부분 금융기관에서는 매월 시장의 동향과 좋은 투자 상품 등에 대한 세미나를 개최한다. 퇴직 후 시간이 여유로운 시니어는 이런 프로그램을 직접 찾아다니며 들어보고, 자신이 거래하고 있는 금융기관의 담당 직원에게 관심을 가져볼 만한 상품에 대해 적극적으로 묻고 정보를 얻어 활용해야 한다. 이때 투자 결정을 할 때는 한 사람에게 들은 정보만을 과신해서는 안 된다. 누군가에게 솔깃한 이야기를 들었다면 그 정보를 같은 기관의 다른 직원이나 타 기관 직원에게 반드시 크로스체크하자. 요즘은 스마트폰으로 자신의 투자 종목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때 담당 직원에게 “왜 올랐나요?”, “왜 떨어졌죠?” 등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물어보는 것이 좋다. 그래야 다음에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을 때 스스로 판단하고 대응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 By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 골든라이프연구센터 황원경 센터장
#9 합리적 인출전략
기대수명 연장으로 늘어난 노후생활기, 에이징인플레이스의 확산 등에 따른 새로운 영역의 필요노후자금 등이 발생하면서 합리적 노후자금 인출전략 수립이 중요해졌다. 새로운 자산 증가나 소득 창출이 쉽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에, 현재 보유한 자산으로 여생을 살아가기 위한 인출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인출전략 수립에 앞서 보유자산 진단, 예상되는 자산 유출 진단, 노후 라이프스타일 결정 등의 과제가 선행되어야 인출전략 수립이 제대로 이루어진다.
#10 은퇴 후 기간 세분화
100세 시대라 할 정도로 기대수명이 증가하고, 노후생활기도 늘어나고 있다. 시니어 재무 설계에 대한 접근이 바뀌어야 하는 중요한 이유다. 지금까지는 은퇴 후 기간을 하나의 통으로 보고 재무 설계를 추진해왔으나, 이제는 개인의 자산 현황, 활동성 정도, 인생계획 등이 반영된 기간 세분화가 필요하다. 재무 설계는 이러한 분석 아래 시도해야 하며, 아울러 노후자금 인출전략을 세울 때도 주요 자료로 참고해야 한다.
#11 현금 가능한 고정수입 유동화
은퇴는 고정수입 창출에 큰 변화를 발생시킨다. 근로자의 경우 근로소득이, 사업자의 경우 사업소득이 발생하다가, 은퇴 후에는 초기 연금이나 금융자산의 이자소득 등으로 수입이 창출된다. 이후에는 금융자산, 부동산자산 순으로 유동화하여 수입을 창출하는 경우가 많다. 현재 가구주 연령 60세 이상 가구에서 부동산자산 비중은 80%에 이른다(2016년 3월 통계청 기준). 이를 노후자금으로 유동화하는 과정은 대부분의 가구가 거치게 될 것이다. 자산 감소와 유동화 시기 점검으로 재무 설계 방향을 설정할 필요가 있다.
“퇴직 전 교직에 있을 때부터 한국어 강사를 하고 싶었어요.”
현재 다양한 기관에서 한국어 강사로 활동 중인 이상용(李相庸·64) 씨는 평생 초등학교 교단에서 활동해온 교사 출신. 40여 년간을 넘게 학교에서 근무하다 2015년 8월 정년퇴직했다.
원래 영어를 전공한 데다, 학교 내에서 교감과 교장 등 중책을 맡으면서 다양한 다문화가정을 경험했다. 자연스레 그들과 가까워지면서 한국어가 서툰 외국인이나 다문화가족을 대상으로 한 한국어 교육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퇴직 전부터 온라인 교육과 오프라인 실습에 참여해 한국어교원 자격증 2급을 따놨죠. 아무래도 평생을 학생들 가르치는 일을 해온 터라 유리한 부분이 있었어요.”
퇴직 후 2016년부터는 본격적으로 한국어 강사로 데뷔했다. 법무부에서 시행하는 사회통합프로그램을 통해 영주권을 원하는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국어를 가르쳤다. 주로 한국에서 활동하는 외국인 근로자, 유학생이 많았다.
“지난해 말까지 총 6기 교육에 참여했어요. 평생 만나온 어린 학생들과 달리 나이도 많고 사용하는 모국어도 제각각이었지만 가르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어요. 다들 절실함도 있었고요. 교육 후에는 시험에서 일정 점수 이상을 받아야 해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가르치는 학생도, 과목도, 장소도 달랐지만,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는 여전했던 모양이다. 근무시간에 쫓기는 외국인 근로자의 수업 참여를 위해 고용주를 전화로 설득하기도 했다. 그렇게 맺게 된 사제관계는 4개월 교육기간으로 끝나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메신저를 통해 한국생활의 어려움에 대해 지도하는 멘토 역할을 하고 있다.
또 최근에는 온라인 교육기업 세이글로벌을 통해 전 세계 학생들을 만나고 있다. 그의 한국어 강습 실력은 학생들 사이에서도 평이 좋아, 강사 중에서도 수강신청이 많은 편에 속한다. 이 씨는 걱정과 달리 온라인 수업에 적응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또 한국어에 대한 지식 전달만큼이나 수업에서 올바른 우리 문화를 전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아무래도 수업을 진행하다 보면 해외에서 인기 있는 다양한 한국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게 돼요. 그들에게는 한국어 강사가 한국어뿐만 아니라 한국이라는 나라를 알게 되는 유일한 창구가 되는 것이죠. 이를 통해서 외국인 학생들은 한국의 문화를 이해하게 되고, 동화됩니다.”
그렇다면 좋은 한국어 강사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베테랑 입장에서, 이제 시작하는 한국어 강사에게 어떤 말을 전하고 싶을까. 이 씨는 한국어로 말하고 싶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한국어 수업이라고 해서 다른 수업과 원리가 다르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말할 기회를 만들어주고, 하고 싶어 하는 말을 많이 하도록 입을 열어주는 것이에요. 일방적으로 끌고 나가지 말고 학생 스스로 말하는 것을 터득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해요. 물론 강사 경력이 짧다면 그 과정이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그래도 참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는 한국을 알리는 민간외교관으로서의 자긍심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큰돈을 벌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대한민국을 세계에 소개하는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단순한 언어교육 이상의 효과가 있어요. 그만큼 정확한 정보가 전해지도록 노력하고, 서로를 존중하고 인정하려는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산중에 눈이 내린다. 폭설이다. 천지가 마주 붙어 눈보라에 휘감긴다. 어렵사리 차를 몰아 찾아든 산간 고샅엔 오두막 한 채. 대문도 울도 없다. 사람이 살 만한 최소치의 사이즈를 구현한 이 갸륵한 건물은 원시적이거나 전위적이다. 한눈에 집주인의 의도가 짚이는 집이다. 욕심일랑 산 아래 고이 내려놓고 검박하게 살리라, 그런 내심이 읽힌다. 대한성공회 윤정현 신부(64)의 집이다. 그가 이 산중으로 귀촌한 건 3년 전.
귀촌 초기, 윤 신부는 자그만 중고 컨테이너를 산기슭에 앉혀 거기에 살았다. 그러나 불편이 컸단다. 여름엔 찜통처럼 더웠고, 겨울엔 냉장고처럼 차가워서였다. 그래 용한 꾀를 냈다. 컨테이너 뒷면에 흙벽을 쌓고 지붕을 얹은 두 평 반짜리 골방 하나를 지어 붙였던 것. 말하자면 철제 건조물과 흙집이 한 몸으로 붙은 복합건축이다. 이 흔치 않은 오두막 한 채로 그의 주거는 완성에 도달했다. 더 이상 늘리거나 꾸밀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는 게 아닌가.
집 안으로 들어서자 일종의 절경이 펼쳐진다. 컨테이너 공간은 서재로, 골방은 거실 겸 침실로 쓰는데, 그저 소소한 생활도구들이 놓여 있을 뿐이다. 책과 옷가지들, 다구와 식기, 전기장판과 이불 한 채. 이게 그가 깃들어 사는 집 내부를 이룬 사물의 거의 전부다. 그러니 절경! 단순한 삶을 추구하는 한 사람의 지향과 실천이 완연히 비친다. 자칫 욕망 쪽으로 흘러가는 머리를 쓰는 대신 몸을 주로 써 수행을 닮은 생활을 하자는 게 그의 귀촌 푯대. 쾌활한 언사를 구사하는 이 단구(短軀)의 사제는 흙집을 혼자 지었다. 한 달 여에 걸친 신역으로.
“주변에 널린 돌과 흙을 퍼 나르는 걸로 일에 착수했어요. 비용은 별로 들질 않습디다. 창문과 출입문을 가져오며 고물상에 치른 돈이 36만 원, 장작난로 구입에 30만 원, 시멘트나 각목, 연장, 못을 사는 데 들어간 얼마간의 비용 등, 총 80만 원을 들여 지었어요. 흙집의 탁월한 단열 효과, 그거 참 놀랍더라고요. 초기의 불편이 일거에 해결됐죠. 화장실은 없지만 삽 한 자루 들고 숲으로 들어가면 그만이에요.(웃음) 욕실도 없지만 가끔 읍내 목욕탕엘 가서 때를 벗기죠. 식수는 계곡물을 끌어다 탱크에 받아 쓰고.”
그는 연세대학교 신과대학을 졸업 뒤 성공회대학교 사목신학연구원에서 사제 양성 과정을 밟아 1987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후 여러 곳의 교회에서 사목활동을 했으며, 영국 버밍엄대학교로 유학을 가 신학박사 학위도 받았다. 귀촌 직전까진 청주 수동교회 관할 사제직을 맡았다. 성공회 사제의 정년은 65세. 그는 정년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귀촌을 위한 휴직을 신청했으며, 이것으로 교회의 일은 사실상 마감되었다. 성공회 사제는 은퇴 뒤 자력으로 여생을 꾸려야 한다. 연금이라는 게 없으며, 거처도 제공되지 않기 때문에. 예순 나이에 접어들 즈음 그의 마음은 자연으로 쏠렸다. 이미 손에 쥔 게 별로 없는 삶이었지만 더욱 소박한 쪽으로 생활을 바꾸고 싶었더란다. 해서, 득달같이 나서 귀촌을 단행했다.
욕심과 노여움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면 행복하다
“평생 하느님을 섬기며 살고 있지만 제게는 정신의 스승이 한 분 계십니다. 다석(多夕) 류영모 선생(1981년 작고)이죠. 동서고금의 종교와 철학에 능통했던 다석 선생께선 기독교와 불교, 유교와 도교를 조화하고 상호 보완할 수 있는 웅대한 사상체계를 정립했어요. 저는 다석의 혜안을 빌려 서구 신학적 관점이 아닌 동양 신학적 관점으로 성서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었어요. 종교와 종파와 교리를 뛰어넘어, 모든 인류가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시각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다석 사상을 공부하면서였죠.”
“박사 논문 주제도 다석사상이죠? 다석은 정인보, 이광수와 함께 1940년대 조선의 3대 천재로 통했죠. 오산학교 교장을 지내다 은퇴한 뒤에는 농사를 지으며 제자들을 가르쳤어요. 유 신부님의 귀촌은 다석의 행장에 영향을 받은 선택?”
“삶을 돌아보면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이 항상 저를 이끌었다는 걸 알겠습디다.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그 뭔가의 힘 말이죠. 순리나 무위자연의 흐름일 수도 있겠지. 다석 선생의 가르침 역시 길잡이였죠. 선생께선 농사를 자주 권장했어요. 농사짓는 사람이 예수라는 말도 늘 했어요.”
“농사의 정신을, 땅에 땀을 쏟는 노동의 신성한 가치를 말한 거겠죠?”
“그렇죠. 귀촌을 해 몸을 쓰는 노동을 하며 이거 참 좋구나, 하는 느낌을 자주 경험합니다. 우선은 몸이 건강해져요. 정신도 맑아지고, 영성에 대한 각성도 하게 돼요. 현재 닭과 산양을 치고, 소규모의 농사를 짓지만 향후 영성공동체랄까, 자율공동체로 가꿔나갈 참이에요. 이미 집 둘레의 임야 1만 평을 확보해뒀어요. 저의 뜻에 공감한 산주(山主)께서 좋은 가격에 땅을 넘겨준 덕분이죠.”
“자율공동체엔 어떤 사람들이 모이죠?”
“누구나 다! 내 안의 영성을 일깨울 실천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영성공동체의 뜻에 동감하는 사람이라면 종교와 상관없이 누구든 함께 살아가야죠. 공동체 참여자는 이곳의 너른 산림 한 곳에 농막이나 움집을 짓고, 공동 생산을 해 함께 나누는 생활을 하게 될 겁니다.”
브래드 피트가 열연한 영화 ‘티벳에서의 7년’엔 인상적인 장면이 나온다. 극장을 짓기 위해 땅을 파던 인부들이 지렁이가 나오자 공사를 즉각 중단하고 정성스레 지렁이를 안전한 곳으로 옮겨준다.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을 귀하게 여기는 감성이란 아마도 영성적 에너지일 게다. 생명 모두에 깃든 존귀함을 의식하는 자는 이미 자신 안의 영성을 일깨운 존재일 테지. 그러나 때 묻히지 않고 생존할 방법이 있던가. 살길을 찾기 위해 영혼까지 팔아서야 안 되겠지만, 내 안의 영성을 유리그릇처럼 투명하게 닦는 일은 우리네의 관심사 자체가 못된다. 산야에서, 야생에서 담백한 생활을 지속할 경우엔 문제가 달라지나?
“영성생활이란 피안의 세계로 가자는 게 아닙니다. 욕망이 이끄는 대로 사는 일에서 벗어나 평온한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자는 것, 상생하자는 것, 개인의 자족만이 아니라 사회변혁까지도 실천하며 살아가자는 것, 그런 걸 위해서는 영성 회복이 필요하다 보는 거예요. 모두들 물신주의에 사로잡혀 무한경쟁을 벌이는 세태에서 과연 사람들은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 빈부 양극화만 날로 심해지는 것을…. 저는 말이죠, 적게 가지고 적게 쓰는 쪽으로 마음을 두는 게 훨씬 현명하다고 봐요. 이기심에서 벗어나 타인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키우는 게 행복과 만나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 봐요. 초목들의 동향과 동물들의 삶을 통해 세상에 적용할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야생이란, 일테면 교실 같은 곳이죠.”
세상의 광기와 아귀다툼이 침범 못할 적막한 산중. 거기에 오두막을 짓고 홀로 들어앉았으니 완전한 고립 속에 있는 것 같지만 그의 희망과 실천은 사방으로 활달하게 열려 있다. 에피쿠로스는 인생의 목적을 쾌락 추구에 두었다. 욕망을 채우는 쾌락이 아니라, 욕망을 비우는, 비워서 마음의 고통을 몰아내는, 마침내 평안과 안락의 상태에 접어들어 단순 담박한 생활을 하는 게 에피쿠로스의 ‘쾌락’이다. 윤 신부가 추진하는 공동체란 어쩌면 ‘에피쿠로스 스쿨’이겠지. 육체와 욕망,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에서 벗어난 삶이 행복을 데려다준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인생은 한바탕의 ‘소풍’
집 밖엔 한파가 맵차지만 골방은 훈훈하다. 난로 속에서 관솔 내음을 솔솔 풍기며 타는 소나무 장작불이 열을 뿜어서다. 창문가엔 벚꽃 잎처럼 분분히 내리는 눈 풍경. 집 뒤편 언덕배기 닭장에선 오골계들이 세찬 눈발을 피하고 있고, 산마루에선 산양들이 전설처럼 눈을 흠뻑 뒤집어쓴 채 양양하게 뛰논다. 윤 신부는 닭들에게서 계란을 얻는다. 산양의 젖을 짜 우유 대용으로 먹는다. 자급자족이 그의 목표다. 산 아래 농부들과 물물교환을 통해 부족한 양식은 보충해나갈 계획이다.
“점차 농사 규모를 키우고, 작목 수효도 늘려나갈 작정이에요. 귀촌 3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해야 할 일들이 많아요. 그간에 터를 다듬고, 연못을 만들어 연(蓮)을 심거나 잉어를 넣어 길러왔어요. 이 산림엔 원래 공동묘지가 있었어요. 그걸 용케도 거의 다 이장시켰죠. 무덤이 많아 산 아래 토착민들조차 무섭다며 아예 접근하길 꺼린 땅이었는데, 보시다시피 이젠 달라졌죠. 수시로 드나들며 찬탄합니다.”
“사제란 세상에 빛을 보태는 존재겠죠. 그런데 말이죠, 성직자들은 늘 옳은 얘기, 반듯한 말만 하지만 정작 실천과는 먼 경우가 많다는 게 중론이에요. 동화작가 고(故) 권정생 선생은 본인이 크리스천이었지만 차라리 이 땅에 기독교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더 나은 사회가 됐을 거라는 얘길 했죠.”
“예수님이 가르친 핵심은 간단합니다. 하느님을 네 몸처럼 섬겨라,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요약하면 그 두 가지예요. 그러나 종교인들의 노력이 부족해요. 수행을 일삼는 수도원에서조차 이기심의 충돌이 잦아요.”
성공회 사제에게 결혼은 금기가 아니다. 윤 신부의 처자는 먼 곳에 따로 산다. 아내는 김포에서 미혼모의 자녀들을 돌보는 쉼터를 운영한다. 아내가 곁에 없으니 주야간에 외기러기처럼 외로울 것 같지만, 서로 자유롭게 선택한 길을 존중하며 지내는 것으로 사랑을 확인한다.
“인생이란 한바탕의 소풍이에요. 소풍을 잘 즐기는 나그네의 짐은 가벼워요. 이전의 편리를 다 버린 귀촌생활의 불편이 사실 한둘이 아니지만, 거꾸로 사는 인생 같지만, 자유로운 나그네로 살기 위해선 세태를 거스를 수밖에 없어요. 세태의 물살에 무기력하게 떠밀린 채 비문명적 야생생활을 누리거나 무소유를 실천하기란 불가능하니까.”
“인생은 육십부터라고들 하죠. 이건 맞는 말일까?”
“중생(重生), 즉 영적으로 새 사람이 될 수 있는 계기나 동기부여가 되는 구호이니 썩 긍정적인 명제가 아닐까.”
“돈이나 욕망을 앞세우지 않고서도 행복을 누릴 방도를 슬슬 찾기 시작하는 게 시니어죠. 무소유까지야 어렵겠고, 각자 주어진 현실 여건을 어떻게 활용하는 게 좋다고 보나요?”
“돈·권력·명예를 나만을 위해 쓰지 않고 남도 덩달아 이로운 쪽으로 사용하는 게 좋겠죠. 돈이란 잘 쓰면 사랑이 되고, 권력을 독점하지 않고 나누면 평화의 초석이 되죠. 명예 역시 정의롭게 사용하면 상생의 힘이 될 테고.”
“당신은 사제예요. 천국은 어떤 곳이죠? 사후엔 무엇이 오죠?”
“마음을 비우고 애착과 집착을 다 놓을 수 있다면 죽음이 두려울 리 없겠죠. 모든 하루를 최고의 날로 산다면, 내일 죽어도 진정 여한이 없을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하느님 나라, 천국을 사는 겁니다. 사후? 그건 잘 모르겠어요. 그 누구도 다녀온 사람이 없으니.”
집착도 후회도 슬픔도 없는 인생이라면 이미 성자이겠지. 그에겐 과거도 미래도 없는 것과 같겠지. 그러나 과욕과 과속으로 어긋나기 쉬운 게 오늘 하루. 눈 쏟아지는 하오의 귀로에 어둠살이 내린다. 삶을 돌아보면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이 항상 저를 이끌었다는 걸 알겠습디다.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그 뭔가의 힘 말이죠.
박원식 소설가 >>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천국으로 들어가기 전 두 가지 질문에 대답해야 해. 하나는 인생에서 기쁨을 찾았는가. 또 다른 하나는 당신의 인생이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었는가.” 영화 ‘버킷리스트’ 속 대사다. 인생의 기쁨과 타인을 기쁘게 하는 지점이 같은 사람을 찾자면, 그이가 바로 배우 박인환(朴仁煥·73) 아닐까? 평생 연기를 통해 삶의 즐거움을 찾고, 대중에게 웃음을 선사하니 말이다. 데뷔 후 53년 동안 100편에 달하는 작품에 출연하며 숱한 기쁨을 공유해온 그가 이번엔 버킷리스트 달성을 꿈꾸는 시니어들의 유쾌한 행보를 그린 영화 ‘비밥바룰라’로 노년의 즐거움을 나누고자 한다.
“그래 맞아, 브라보!”
2016년 연극 ‘아버지의 선물’ 출연 당시 짤막한 인터뷰를 통해 인연을 맺은 박인환은 1년여가 흐른 뒤에도 기자의 명함에 적힌 ‘브라보 마이 라이프’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 사이 드라마, 영화, 연극 등 7개 작품에 주·조연으로 활약하며 바쁜 나날을 보낸 그의 미소는 여전히 편안하고 건강해 보였다. 1945년 1월 닭띠 태생인지라 2017 정유년 한 해의 감회가 남다르리라 예상했지만, 그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나이를 의식하는 순간 우울해지기 때문에 오히려 언제부턴가 잊고 지내게 됐다는 것이다.
“내가 벌써 70대야? 옛날 같으면 그냥 늙은이도 아니고 곧 떠날 사람인데, 이렇게 활동해도 되나? 그런데 요즘은 100세 시대잖아요. 내가 인식하는 숫자대로 사는 게 아니기 때문에 아예 나이를 생각하지 않고 있어요. 다행히 배우는 정년퇴직이 없으니,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 활동하려 해요. 흔한 말이지만, 정말이지 무대 위에서 쓰러질 때까지 연기하고 싶습니다.”
삶이 다하는 날까지 연기자로 남고 싶다는 박인환은 그야말로 오로지 연기뿐인 인생을 살아왔다.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 전공, 연기 인생 53년 차, 한눈팔지 않고 묵묵히 배우의 길을 걸어올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그는 ‘연기만 해온 것’이 아닌 ‘연기밖에 할 수 없었다’고 털어놨다.
“제가 장남인데 군대 있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연기를 그만두고 취직하려고 성균관대 경영학과 편입 지원서까지 받아놨는데, 때마침 ‘나병(한센병)은 전염병이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전파하는 공연에 참여할 수 있게 됐어요. 지방 순회공연이라 3개월 돌았더니 제법 돈을 주더라고요. 배우를 해도 괜찮겠다고 다시 마음을 바꿨죠. 그런데 그 뒤로 한 10년간 돈을 못 만졌어요. 친구들은 생계를 위해 다른 길로 전향하기 시작했죠. 그땐 소위 빽만 있으면 취직은 문제없던 시절인데 나는 연줄도 없고, 장사를 하려 해도 밑천이 없으니 다른 일은 꿈도 못 꿨어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연기뿐이었고, 계속하다 보니 지금까지 질기게 살아남은 거죠.”
생계와 생존을 위한 유일한 수단 ‘연기’
스스로 별다른 재능이 없어 연기밖에 못 했다는 그는 연극무대를 떠나 TV 드라마로 적을 옮기면서도 고초를 겪었다. 당시만 해도 연극배우는 예술가, 방송 연기자는 딴따라라는 인식이 강했고 드라마를 찍는다고 하면 돈에 눈이 멀어 무대를 버렸다는 비난을 받기 일쑤였다. 그러나 세 아이의 아버지로 살아야 했기에, 예술가의 사명보다는 가장의 책임이 앞설 수밖에 없었다.
“고상한 말로 포장하고 싶지는 않아요. 사실 밥벌이였어요. 돈을 벌어야 했고, 직업이 배우였고, 일이 곧 연기였죠. 공사장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짐을 들 때도 있고 삽질할 때도 있지만 어쨌든 뭐든 해야 돈이 나오잖아요. 연극이든 드라마든 역할이 도둑이든 경찰이든 가리지 않고 다 해야 했어요. 이런저런 역할을 많이 하다 보니 누군가는 나를 보고 ‘천의 얼굴을 가졌다’며 좋게 이야기하는데, 내겐 생계와 생존을 위한 유일한 선택이었죠. 아마 아내와 둘만 살았다면 견딜만했을 거예요. 그런데 자식이 생기니 도무지 타협이 안 되더라고요. 어른들은 배고파도 참을 수 있지만, 아이들은 당장 우유 먹이고 학교도 보내야 하는데 언제까지 예술 타령하며 작품을 따져 고를 수는 없었어요.”
그동안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이 무엇이었냐는 질문을 준비했지만 이미 답을 들은 것과 다름없었다. 그런데 곰곰 생각하니 이제는 상황이 다르지 않은가? 자녀들도 어엿한 성인이 됐고, 우리 시대 아버지 연기의 대표주자로 다양한 작품에서 러브콜을 받을 텐데 말이다. 앞으로는 원하는 작품을 골라 출연해도 되지 않을까? 질문을 바꿔 물어 보기로 했다.
“배우는 선택받는 직업이에요. 누가 찾아줘야 연기를 하지, 내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동년배 중에 역할이 없어 노는 사람들이 있어요. 돈을 안 받는다고 해도 써주질 않는다고 하더군요. 우리 직업이 겉보기엔 부러울 수 있지만, 그 속에서는 아주 치열하게 움직이고 있거든요. 운동선수와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더 능력 있는 후배들이 계속 나오니 경쟁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죠. 그 와중에 내 나이에 들어오는 역할이 있다는 건 감사한 일이고요. 여전히 선택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스케줄만 맞으면 웬만한 역할은 다 하려고 합니다.(웃음)”
연기 경력 합계 203년, 시니어벤져스의 열정
한때는 농담 삼아 사이코드라마의 괴짜 역할을 해보고 싶다고 말한 적도 있지만, 이제는 욕심 없이 주어진 역할을 제대로 해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미 연기 베테랑인 그이지만 젊은 시절보다 더욱 노력을 기울여야 체면치레는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촬영장에 가면 대개 최고참이죠. 후배들이 많으니 더 조심해야 해요. 어른인데 실수하면 안 되잖아요. 괜히 모범을 보인답시고 뭔가 했다가 주책없어질지 모르니 가급적 조용히 있으려 해요. 작년에 드라마를 하면서 대사를 잘 못 외운 적이 있어요. 한 번 NG를 냈는데, 당황하니까 계속 틀리는 거예요. 후배들이 다 쳐다보는데 망신스럽기도 하고, ‘아, 이제 내가 그만할 때가 됐나?’ 싶은데, 한편으론 다들 속으로 ‘선생님 이제 좀 쉬시지’라는 생각을 할 것 같았어요. 그러니 더더욱 이 난관을 딛고 넘어서야겠더라고요. 1시간 연습할 거 2시간 연습하고, 세 번 볼 거 네 번, 다섯 번씩 봐가면서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대사 외웠습니다.”
후배들이 주를 이루는 현장이 아닌 신구, 임현식, 윤덕용과 함께한 ‘비밥바룰라’ 촬영장은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발걸음할 수 있었다. 척하면 척, 연기 경력 합만 무려 203년인 네 배우의 앙상블은 두말할 것 없이 완벽했고, 촬영을 마치고 곁들이는 소주 한 잔은 소소한 즐거움이 됐다. 특별히 시니어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인 만큼 네 배우가 모여 아이디어 회의를 하고 대본에 변화를 주는 등 중장년 관객과의 공감대 형성을 위해 연기 그 이상의 열정을 보이기도 했다.
“나이 든 사람들도 젊은이가 있을 때나 격식 차리려고 하지, 우리끼리는 서로 별명도 막 부르고 애들처럼 장난도 치고 그래요. 몸은 늙었어도 감성은 어린 시절 그대로 남아 있으니까요. ‘노인은 이럴 것이다’라는 상상보다는 중장년 세대가 공감하는 현실적인 상황과 대사를 표현하고 싶어서 이성재 감독과 미팅을 자주 했어요. 또 우리뿐만 아니라 다양한 시니어를 만나 의견을 들어보라고 조언했죠. 그 덕분에 젊은 관객이라면 모르고 지나칠 수 있는 그들만의 웃음과 감동 포인트를 잘 살려낸 것 같아요. 아마 우리 세대가 본다면 가슴을 툭 하고 건드리는 무언가를 발견하게 될 겁니다.”
하나이자 전부인 나의 버킷리스트
박인환이 연기한 영환은 ‘비밥바룰라’의 다른 세 주인공을 이끌며 ‘친구들과 한집에 살기’, ‘영정사진 같이 찍기’, ‘미팅하기’ 등 그들만의 버킷리스트를 이뤄가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인물이다. 새해도 밝았고, 이번 작품을 계기로 그도 자신만의 버킷리스트를 작성해보지 않았을까 궁금했다.
“딱히 생각해보지는 않았어요. 아내가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죽을 준비를 하는 사람과 안 하는 사람은 천지 차이라고요. 불의의 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날 수 있지만, 어떻게 죽을 것이고, 죽고 나서는 어떻게 할 것인지를 미리 생각하라는 거죠. 반대로 죽기 전에 무엇을 해야겠다고 하는 게 버킷리스트인데, 글쎄요. 떠오르는 게 없네요.(웃음) 그저 내년에 ‘비밥바룰라’가 잘되면 희망찬 한 해를 보낼 수 있을 것 같아요.”
버킷리스트가 없다는 말이 어쩐지 아쉬워 함께 머리를 맞대고 그가 원하는 일과 바라는 것을 생각해보기로 했다. 고민 끝에 완성한 버킷리스트 첫 번째 항목은 바로 ‘‘비밥바룰라’가 흥행해 더 많은 작품에 출연하기’다. 배우로서 특별할 것 없는 진부한 바람일지 모르지만, 인터뷰 내내 가식 없는 정공법을 택했던 그를 보았기에 얼마나 간절하고 묵직한 소망일지 가늠할 수 있었다. 그토록 그가 쉼 없이 많은 작품을 하고 싶은 이유는 무엇일까? 역시 막힘없이 솔직한 답변을 들려줬다.
“이제는 돈 때문이 아니라 불편한 인사치레를 받기 싫어서 작품을 해요. 식당을 가거나 택시를 타면 꼭 사람들이 ‘요새 안 보이시네요?’, ‘어디 아프세요?’ 이런 이야기를 하거든요. 드라마도 나오고 영화도 개봉하는데 내가 안 보인다니… 그런데 정말 쉬고 있으면 아니라는 말도 못 할 거 아녜요. 작년 11월에도 아주 바빴어요. 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는데, 사람이 간사해서 며칠 쉬니까 지겹더라고요. 일을 해야 진정한 휴식의 즐거움을 아는 거지, 매일 쉬는 사람에겐 지루한 일상인 거죠. 연기를 할 때 비로소 내가 살아 있다는 걸 느껴요.”
이제는 아낌없이 즐길 때
결국 버킷리스트 추가 항목은 들을 수 없었지만, 연기를 향한 열정은 단 하나의 바람이 아닌 그의 전부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차차 새로운 항목들을 만들어나가길 바라며, 끝으로 ‘브라보 마이 라이프’ 독자와 ‘비밥바룰라’ 관객들에게 새해 인사를 부탁했다.
“우리 세대 사람들이 뭐든 낭비하는 법이 없어요. 절약 정신이 배어 있죠. 늘 이걸 꼭 사야 해? 저걸 꼭 먹어야 해? 그러면서 돈이 있어도 ‘됐어, 됐어’ 하고, 때론 자식들의 효도도 마다하며 살죠. 그런데 이제는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여유가 있으니 문화생활을 즐겼으면 해요. 그래도 괜찮잖아요. ‘비밥바룰라’ 같은 영화를 보면서 그들의 삶을 통해 자신의 삶을 더 유쾌하고 긍정적으로 그려나가면 좋겠어요. 새해에는 우리 세대가 더욱 즐겁게 잘 살길 바랍니다.”
눈보라 속으로 뛰어들어야 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닦아야만 했으니까. 희망이 보이는가 싶더니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망연자실 고개를 떨어뜨렸지만 초석이 다져졌고 단단한 징검다리가 놓였다. 노력은, 꿈은, 그렇게 현실이 됐다. 한 달여 남은 2018 평창동계올림픽은 ‘삼수(三修) 만에 이뤄낸 쾌거’라고 말한다. 세 번의 도전 동안 수많은 사람의 헌신과 노력, 열정이 없었다면 지금의 올림픽 또한 없을 것이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위해 발 벗고 나섰던 노장을 기억해냈다. 前 강원도국제스포츠지원단장이자 現 아라웰다잉연구회 회장인 박종흔(朴鍾昕·69) 씨. 꿈이 이뤄진 지금,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평창동계올림픽의 백전노장을 만나다
강원도 동해시 천곡동에 있는 한 사무실에서 박종흔 씨를 만났다. 이미 10년도 더 된 올림픽 유치와 관련한 이야기를 들으러 왔다는 기자의 말에 해드릴 대단한 얘기가 없다며 멋쩍게 웃는다. 박종흔 씨는 올림픽 관련 업적 외에도 공직자로서 명망 높고 존경받던 인물. 지금도 지역사회에 공헌하는 삶을 살고 있다.
2009년 강원도청 지방부이사관으로 공직을 내려놓기 전까지 지방과 중앙정부 요직을 비롯해 2014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업무까지 두루 섭렵한 박종흔 씨는 나랏일(?) 전문가였다. 현역 시절 인생을 걸고 몰두했던 일은 단연 ‘올림픽’이었다. 평창동계올림픽 재수 시절인 2004년부터 2007년까지 머릿속에는 오로지 올림픽 유치 생각밖에 없었다.
“2004년도에 국무총리실에서 재난관리과장을 하고 있다가 강원도로 내려와서 받은 첫 보직이 ‘강원도 국제 스포츠위원회 홍보부장’이었어요. 첫 번째 동계올림픽 유치에 실패하고 난 뒤에도 강원도가 재도전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올림픽 유치에 관한 업무를 하는 조직을 유지해야 했습니다.”
국제스포츠위원회가 구성되자마자 올림픽 유치를 위한 준비를 틈틈이 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올림픽 유치 신청 뒤 후보 도시가 되기까지 각 도시 간 보이지 않는 경쟁은 치열하다. 홍보 담당자로서 어깨가 당연히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경쟁 도시와 비교해 최대한 좋은 인상과 올림픽 정신에 입각한 행동을 부각시키고자 했다.
평창동계올림픽을 밝힌 ‘드림프로그램’
국제스포츠위원회 홍보부장을 하면서 단연 보람되고 뿌듯했던 것이 드림프로그램이었다. 올림픽 유치활동을 하는 중 가장 정열적으로 힘을 다하고 관심을 가졌던 프로젝트였다.
“가장 보람 있게 생각하고 있고, 성과가 이번 올림픽에 직접적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드림프로그램입니다. 제가 오기 전부터 기획된 것이었어요. 눈이 내리지 않고 얼음이 얼지 않는 나라의 청소년을 강원도로 초정해 동계스포츠를 체험할 수 있게 해주는 프로그램이었죠. 스노보드도 타고 스키도 가르쳐주고 스케이팅도 가르쳐줬습니다.”
한편으로는 IOC 위원에게 한 표를 호소하겠다는 전략도 깔려 있었다.
“아프리카 지역은 동계올림픽에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에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동기를 주고 싶었습니다. 드림프로그램에 왔던 참가자들을 통해 우리의 뜻을 알리려고 노력했습니다.”
물론 2014년 동계올림픽 유치에는 실패했지만 끊임없이 이어진 드림프로그램은 이번 평창올림픽에서 열매를 거두었다. 2009년 드림프로그램에 참가했던 말레이시아 피겨스케이트 선수 줄리안 지 지에 이(21)는 말레이시아 동계스포츠 선수로는 사상 처음으로 동계올림픽 출전 기회를 얻었다. 박종흔 씨가 한창 활동하던 2005년 참가했던 남아프리가공화국의 전 피겨스케이팅 국가대표 타마라 제이콥스는 2월 초 성화 봉송 주자로 뛸 예정이다. 동계스포츠를 널리 알리고 올림픽정신을 실현한 소중한 프로그램이 시간이 지나 빛을 발하고 있다.
“그땐 정말 용평스키장에서 살았습니다. 드림프로그램에 참여한 아이들과 같이 지내고요. 인솔해온 지도자들에게는 당신네 나라로 돌아가면 평창이 올림픽을 유치할 수 있도록 IOC 위원들에게 말해 달라고 막후활동을 했습니다. 제가 돌아다니면서 다 한 거죠. 지금 생각해도 드림프로그램은 정말 잘된 프로그램입니다.”
겨울 스포츠의 장, 평창으로 오세요!
강원도청에서 홍보부장 업무를 보다가 국제부장직을 맡아 서울로 근무지를 옮겼다. 이번에는 평창이 동계스포츠 경기를 할 수 있는 곳이라는 인상을 전 세계에 심어주는 일이 관건이었다.
“예를 들어서 스노보드 세계 챔피언십 대회를 한다고 하면, 다음 대회를 우리가 유치해오는 것이었어요. 프레젠테이션도 많이 했고 또 큰 대회도 여러 번 강원도에서 유치했습니다. 동계올림픽에는 국제스키연맹, 스케이팅연맹, 바이애슬론 등이 쭉 있잖아요. 산하 연맹들이요. 거기서 다 호응을 또 해줘야 합니다. 대회를 유치하려고 많이 다녔고 유치도 꽤 했어요.”
국제부장에 이어 올림픽 업무를 총괄하는 국제스포츠지원단장이 되면서 밤낮 없이 일에 매달렸다. 홍보부장 때 용평스키장이 집이었다면 이후에는 전 세계가 올림픽 유치를 위한 영업장이었다. 세계를 돌며 평창에 한 표를 호소했고 열정을 쏟았다. 유리하고 좋은 결과를 기대하면서 열심히 뛰었다.
2014년 동계올림픽 개최지 선정을 앞두고 러시아의 소치와 대한민국의 평창이 근소한 차이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때 개최지 결정은 남아메리카의 과테말라에서 이뤄졌다.
“우리나라는 전세기 한 대로 날아갔는데 러시아는 초대형 화물기 7대를 가지고 날아왔어요. 시내 곳곳에다가 공연장 만들고 엄청난 오일 머니를 갖다 부은 거죠.”
뭔가 전세가 밀리는 기운이었지만 우리 측도 표결이 있기 전까지 최선을 다해 발로 뛰고 평창을 알렸다.
“권양숙 여사님이 마침 저희를 도와주셨습니다. 드림프로그램에 참여했던 과테말라의 어린이들을 만나서 미팅도 하고 애써주셨죠. 나름대로 전략을 세웠습니다만 소치를 감당할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4표 차이로 2014년 동계올림픽 개최지를 러시아 소치에 내주고 말았다. 2007년 7월 3일. 뼈아픈 그날이었다.
“평창은 벌써 2차 도전이었고 유치를 확신했었습니다. 일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더 이상 올림픽 업무를 보기가 싫어지더라고요.(웃음)”
쏟았던 정열에 비해서 얻은 게 없었다. 박탈감이 없었다면 세 번째 도전 때도 뭔가 할 수 있지 않았을까 물었다.
“만약 있었으면 조직위원회에서 활동을 했겠죠. 그런데 한 3년 그렇게 하고 나니까 올림픽은 조금…. 다른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요. 정년을 2년 남긴 상황이었거든요. 좀 더 유능하고 젊은 친구들이 새롭게 유치 업무를 맡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올림픽 유치가 물거품으로 돌아간 뒤 박종흔 씨는 올림픽 업무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며 강원도지사였던 김진선 전 지사에게 학교로 보내달라고 청했다. 이후 주문진에 있는 강원도립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2009년 정년퇴직했다. 못다 이룬 평창의 꿈은 후배들에게 넘겨주었고, 올해 마침내 결실의 그날을 맞게된 것이다. 후배들이 선배님으로서 박종흔 씨를 좀 챙기고 있는지 물었다.
“안 그래도 후배한테 우스갯소리로 나를 잊은 게 아니냐며 중요한 행사가 있으면 나를 기억하라고 했더니 알았다 하더라고요.(웃음)”
후배들에 대한 고마움도 잊지 않았다. 그들이 동계올림픽의 꿈을 실현시켰기에 자신의 노고가 헛되지 않았음을 알기 때문이다.
“올림픽 유치 과정 속에서 상당 기간 근무한 것에 새삼 보람을 느낍니다. 이게 끝내 무산됐더라면 우리의 노력도 물밑으로 가라앉았을 거예요. 우리가 못 이룬 일을 후배들이 이뤄낸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죠. 제 나름대로 훗날 기여할 일이 있다면 물론 당연히 해야겠죠.”
박종흔 씨는 지금도 눈이 내리면 ‘이 눈은 설상경기에 좋을 눈이구나, 아니구나’를 생각한다. 오랜 시간 올림픽과 함께했던 삶이 여전히 몸에도 생각에도 배어 있다.
나랏일 전문가, 웰다잉 전문가 되다
평창동계올림픽을 일궈낸 백전노장은 지금 그럼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의 제2인생도 궁금했다. 최근 한창 화제가 되고 있는 ‘웰다잉’에 관한 일을 하고 있다. 마침 기자와 마주한 곳은 현재 회장으로 활동 중인 아라웰다잉연구회의 공간이었다. 은퇴 뒤 인생에 대해 고민하다 인생을 잘 마무리하는 것, 즉 ‘웰다잉’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과거에는 퇴직 공무원이 길가에서 쓰레기를 줍거나 산불 감시, 교통질서 캠페인 같은 단순노동으로 봉사를 했습니다. 물론 그런 것도 필요하죠. 저는 30~40년 공직에 있었던 노하우를 접목해서 전문 재능을 기부하는 것도 상당한 의미가 있다 생각했습니다. 퇴직 무렵 웰다잉에 대한 인식이 조심스럽게 사회에 퍼져나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박종흔 씨는 2013년 웰다잉 전문가로 거듭났다. 그때 당시 *각당복지재단이 강원도의 동해가정법률상담소를 포함, 다섯 군데를 선정해 웰다잉교육전문지도강사양성교육을 실시했다. 이때 16주 교육을 이수한 뒤 웰다잉 지도강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현재는 비영리 민간단체인 아라웰다잉연구회를 만들어 자체적으로 웰다잉 전문가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경로당과 노인복지원을 찾아다니면서 무료로 강의도 하고 봉사도 한다. 예전에는 아름다운 인생 마무리에 관해 주로 다뤘지만 최근에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 관해 집중적으로 교육하고 있다.
혹시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있으신가 물었다. 또 봉사 이야기를 꺼낸다. 평생 공직생활에 국민들 염원을 담아 발에 땀나도록 뛰어온 사람이 지치지도 않나보다.
“퇴직 전부터 악기로 봉사하고 싶어서 한 10년 색소폰을 배워뒀습니다. 그래서 심심치 않게 어르신들을 위해 연주하고 있습니다.”
남을 돕는 것도 좋지만 지금껏 헌신하며 살아온 자신과 더불어 가족과 행복한 인생을 많이 즐기시길 바란다. 2월, 평창 밤하늘에 2018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을 알리는 폭죽이 터지면 손자에게 꼭 말하시라.
“저게 다 할아버지 덕분이었다”고 말이다.
*각당복지재단 1986년 설립된 각당복지재단은 인류애 정신에 입각해 삶과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고 죽음준비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또한 말기환자를 보살피는 호스피스 운동 등을 전개하고 있다.
“학교는 왜 그만두셨어요?”
“8월에 미국에서 있었던 개기일식이 보고 싶어서요.”
정년퇴임 2년여를 앞두고 명예퇴직을 선택한 전 부산과학고등학교 이경훈(李京勳·60) 선생님의 입에서 터져 나온 말이 놀랍고 신선하다. 새 학기가 시작될 무렵, 하산하듯 선생 자리에서 물러났단다. 은퇴를 앞두고 고민이 많았을 텐데 답변 한번 간단하다. 통쾌함도 몰려온다. 걱정 따위는 잊고 내가 즐기는 삶, 내가 소중한 삶을 살아가는 얘기를 들어봤다.
좌우명 ‘놀자’, 백발소년(白髮少年) 이야기
“개기일식 날짜가 딱 여름방학 끝나고 2학기 개학하고 나서였거든요. 어쩔 수가 없었어요. 제 인생 좌우명이 ‘놀자’거든요(웃음).”
개기일식을 이런 것 저런 것 신경 안 쓰고 보고 싶었다고 했다. 날짜도 조금 애매하게 걸려 있었다. 그렇게 과학 선생님으로서의 인생을 마감하고 신나게 개기일식 여행을 준비했다는 이경훈씨. 부산지부장으로 있는 (사)아마추어 천문학회 회원 48명과 함께 미국 아이다호로 개기일식을 보러 다녀왔다.
“이번 개기일식은 2분 16초 동안 진행됐거든요. 이 짧은 시간 동안 알차게 촬영을 하기 위해 두 달 동안 계획을 세웠어요.”
달이 해를 가리는 개기일식이 일어나는 동안 사진과 동영상을 동시에 찍어야 하기 때문에 실제로 기다려왔던 그 순간을 만끽할 만한 여유가 없다.
“개기일식을 볼 때보다 준비할 때가 더 좋아요. 현실로 닥치면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서 계획했던 것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아요.”
하늘을 바라보고 관찰하는 일도 좋지만 새로운 장비를 장만하고 여행을 준비하는 기간이 즐겁다고. 사실 간단하게 ‘개기일식 때문이었다’고 은퇴 이유를 밝히긴 했지만 결정이 어렵지는 않았을까? 현직과 전직의 차이, 정년퇴직으로 누릴 수 있는 금전적 차이가 꽤 크다.
“3월에 학교를 그만뒀어요. 은퇴가 한 2년 반 정도 남아 있었을 때죠. 계속 과학고등학교에서 근무했으면 연봉이 대략 1억이 넘어요. 제가 2년 반을 일찍 그만둬서 명예퇴직수당이 한 5000만원 조금 안 됩니다. 임용과 관련한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다른 건 모르겠고 개기일식이 정말 너무 보고 싶었어요.”
그렇다면 훌쩍 떠나버린 선생님의 빈자리에 대해서 학생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교직에 있던 시절 이경훈씨는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깨나 누렸던 선생님이었다. 친구처럼 함께했던 선생님과의 갑작스런 이별을 학생들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궁금했다.
“학생들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몰랐어요. 그런데 아마 알았을 거예요. 제가 나중에 자유로워지면 뭘 할 거다, 이런 얘기들을 자주 했어요. 과학고등학교 아이들이라 한마디 딱 던져도 눈치를 잘 채거든요. 깜짝 놀랐겠지만 ‘아, 이 선생님 같으면 그래서 은퇴했을 거야’라고 짐작을 했을 겁니다.”
백발의 이경훈씨는 철없는 소년처럼 생글생글 잘도 웃으며 얘기한다. 인생의 좌우명이 ‘놀자’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선택이고 즐거운 소풍 길이었으리라.
사업가 집안에서 선생님을 꿈꾸다
이경훈씨가 만약 선친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다면 부산 지역에서 이름 높은 기업 대표가 돼 있었을지도 모른다. 부모님을 비롯해 친척 대부분이 국제시장에서 철물, 전기와 관련한 사업을 했고 지금도 부산 지역에서 다양한 기업을 거느리고 있는 사업가 집안이다.
“우리 집안과 친척들 중에서 사업을 안 하는 사람은 저 하나밖에 없습니다.”
어렸을 적 이경훈씨는 사업하는 부모님을 보며 자랐다. 선친이 운영하던 사업은 바로 위 누님 내외가 이어받았다고 한다.
“제가 뭘 보고 컸냐면 월말이 되면 직원들에게 급여 챙겨주려고 돈 세는 모습과 부도였어요. 부도나면 집안 여기저기에 빨간 딱지가 붙잖아요. 그걸 보며 사업은 ‘내가 할 일은 아니구나’ 생각했어요. 그때가 중학교 2학년이었습니다. 물론 장사를 했으면 잘했을 거예요. 하기 싫어서 그렇지(웃음).”
사업가가 힘들다고 생각했던 것은 한 번쯤은 찾아오는 ‘고비’ 때문이다. 고비에 대처할 자신이 없어 일찌감치 사업은 내 길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
“그럼 뭘 할까 고민하다 선생님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중학교 올라가서 과학에 대한 흥미도 좀 생겼고요. 선생님이란 직업이 나빠 보이지 않았어요.”
사업도 사업이지만 대단하게 치열한 삶을 살아본 적이 없고 그렇게 사는 것도 싫다고 했다.
“공부를 해본 적이 없어요(웃음). 그냥 교실에만 앉아 있으면 어느 정도 성적이 나오잖아요. 공부를 치열하게 했으면 성적이 더 나왔겠죠. 그럼 인생 진로가 바뀌었을 거고. 만약 그랬으면 대단히 피곤하게 살았을 가능성이 커요.”
공부를 좀 더 잘했다면 사회적 지위는 더 올라갔겠지만 본인이 원하지 않는 삶을 살았을지 모른다. 놀면서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직업을 가진 사회 구성원으로 사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경남고등학교에 응시했다 떨어져서 부산사대 부속 고등학교에 들어갔어요. 중간 정도의 성적을 유지했어요. 고3 때 대학 진학을 결정해야 하는데 아버지가 그러는 거예요. 사업을 이어받으려면 관련되는 학과를 가라고요.”
사범대 지원을 못하고 부산 수산대학교(현 부경대학교) 식품공학과에 진학했다.
“1학기 다니고는 몰래 자퇴했어요. 그리고 한두 달간 입시준비 뒤 부산대학교 사범대학에 합격하고 나서야 부모님께 말씀드렸습니다.”
대학교에서도 자신의 성적과 상황을 받아들이며 진로를 결정했다. 그렇게 전공과목으로 선택한 것이 지구과학교육학과였다.
“내 인생 최고의 선택이 대학교 때 지구과학을 선택한 것입니다.”
지구과학이 천체 사진에 빠져들게 하다
지구과학교육학과에 들어가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천체 사진에 눈을 뜨게 됐다. 본격적으로 뛰어든 계기는 바로 핼리 혜성 때문이었다.
“1986년에 핼리 혜성이 한국에 왔었어요. 모교였던 부산사대 부고에서 교편을 잡고 있으면서 대학원을 다니고 있을 때였어요. 학부생들이랑 같이 핼리 혜성 찍겠다고 다대포도 가고 금정산성도 오르고 그랬죠. 차가 없어서 많은 장비들을 짊어지고 버스 타고 다녔어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천체 사진을 찍었습니다.”
천체 사진을 찍으려면 천체망원경이 필요했다. 중등 교사를 하는 동안 학교와 정부 지원 예산을 적절하게 지원받아 천체망원경을 구입해 학교에 비치했다.
“선생님들이 예산을 잘 안 써요. 돈 세고 계산하는 거 귀찮으니까요. 연말이 되면 다른 과에서 돈을 안 쓰니 돈이 남죠. 그래서 선생님들에게 이번에 안 쓰시면 천체망원경 하나 사겠다고 말하고 장만했습니다.”
연말이 되면 천체망원경 한 세트 사고 카메라도 샀다. 학교를 옮길 때마다 천체망원경을 구입하고 학생들의 천체 동아리 활동을 이끌었다. 지금도 그렇게 만난 제자들과 자주 연락을 하며 지내고 있다.
학교를 그만두고 난 뒤 그는 천체 사진을 찍고 또 천체 사진 찍는 방법 등을 가르치는 일을 한다. 학교 과학 선생님 자리에서는 물러났지만 그때와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과학을 대하고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그렇다면 천체 사진의 매력은 무엇일까?
“대상에 대한 매력이죠. 별에 대한, 우주에 대한. 우선 별을 좋아하지 않으면 천체 사진에 관심이 생길 수가 없죠. 과학 중에서도 아마추어라는 이름으로 다가갈 수 있는 분야가 천문학밖에 없습니다. 과학 이론이나 지식으로 접근하는 게 아니고 미적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천체를 ‘아름답다, 정말 보기 좋구나’ 이렇게 볼 수도 있는 거죠.”
아마추어 천체 사진가들 중에는 천문학적인 과학 지식과는 상관없이 미적 대상으로만 접근하는 사람도 많다. 이경훈씨는 취미로 찍기도 하지만 주로 전문 사진을 찍고 있다. 과학 정보를 얻기 위한 데이터 중심의 천체 사진은 하드디스크에 저장해놓는다. 이렇게 저장된 사진과 영상들은 필요할 때 과학 자료로 쓰인다.
미치지 말고 서서히 중독돼라
“경북 영천에 보현산 천문과학관이라고 있거든요. 바로 그 건너편에 제 개인 천문대를 만들려고 올 초에 땅을 좀 매입했어요. 개인 공간에서 별이나 원 없이 봐야죠.”
천체 사진을 찍는다고 해서 이것이 수익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일종의 인류를 위한 봉사 같은 것. 수익을 생각해 영천에다가 개인 관측지를 만들 생각이다. 전문적으로 별을 관찰할 수 있는 천체 펜션도 생각 중이다.
“별을 보러 온 사람들은 통제된 숙박을 하게 될 겁니다. 먹는 것도 통제를 받고 자는 것도 통제받고요. 별을 보기 위한 게 목적이니까. 와서 먹고 자기 위한 게 목적이 아닌 거죠. 먹고 잘 시간에 별을 봐라, 뭐 이런(웃음).”
펜션 관리를 하는 대신 천체와 관련한 고급 정보를 주고 가이드도 해줄 생각이다. 장비가 없는 사람들한테는 장비도 대여해주고 말이다.
천체 사진이나 천문학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당부할 게 있단다. 갑자기 매료돼 미쳐서 달려들지 않기를 말이다.
“제일 경계하는 게 미치는 거예요. 미치면 빨리 떠나요. 대체로 그래요. 너무 치열하게 하지 마라. 쉬엄쉬엄 여유를 가지라고요. 같이 시작한 사람들 중에 남아 있는 사람이 없거든요.”
2035년 9월 2일 우리 만나자!
“은퇴하고 나니까 남는 건 시간, 모자란 건 돈이에요. 2019년과 2020년 칠레에서 개기일식이 있는데 한 번은 갈 거예요. 2024년에는 미국에서 개기일식이 있습니다.”
한반도에서도 개기일식을 볼 수 있는 날이 있다. 바로 2035년 9월 2일. 제자들을 비롯해 강연회에서 만난 교육생들과 이날 만나자고 이미 약속했다.
“이때 개기일식이 평양을 지나 동해안, 그리고 DMZ박물관을 지나갑니다. 통일이 되면 평양 가서 볼 거고, 안 되면 동해안 DMZ박물관에서 봐야죠. 2004년부터 개기일식 관련 수업을 학생들과 할 때마다 2035년 개기일식 시뮬레이션을 했어요. 그때마다 얘기했죠. 만나자고요.”
물론 제자들이 그 약속을 평생 간직할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2035년이 되면 한국의 개기일식에 관한 뉴스가 나올 테고 제자들의 기억이 봉인 해제되듯 살아날 거라 생각한다.
“2035년 9월 2일 DMZ박물관에서 만나자고 했는데 다들 올 거예요. 근데 당일 출발하면 동해에서 길이 막혀서 못 들어올 거예요. 그래서 저는 적어도 4~5일 전에 캠핑카 타고 가서 천체망원경 몇 대 깔아놓고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때가 되면 제자들이 애기들 데리고 오겠죠?”
이경훈씨가 팔십이 되기 전이니 정정하게 제자들과 해후하지 않을까? 얼마나 많은 제자가 모일까? 사뭇 궁금해진다.
“하루에 한 가지 취미를 즐기면 우울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외국 속담이 있지요. 누구나 현직에 있을 때는 이런저런 이유로 운동을 하거나 취미를 즐기는 기회가 그렇게 많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년퇴직이든 명예퇴직이든, 퇴직 이후 직장 동료나 후배·친구들을 만날 기회가 점점 줄어드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인데, 이런 때일수록 나를 즐겁게 할 수 있는 것들을 스스로 찾아보고 경험해보려고 노력하셨겠지요.
이런 면에서 저를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마도 3년 전의 일일 듯싶네요. 퇴직 후 동네 공원에 운동하러 갔다가 배드민턴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던 중 “허리가 아파서 골프운동을 못하게 되어 파크골프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참 잘한 것 같다”는 동네 형님의 말씀에 귀가 솔깃해져 그분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필자도 어깨가 좋지 않아 골프를 쉬고 있었기에 그분의 소개로 파크골프 운동협회에 가입한 이후 지금까지 즐기고 있습니다.
파크골프(park golf)란 골프와 아주 유사한 운동으로 공원 같은 소규모 녹지공간에서 누구와도 함께 즐길 수 있는 골프게임입니다. 1983년 일본 북해도 마크베츠 강가의 진달래 코스로 7홀의 간이 파크골프장에서 처음 시작되었습니다. 대한민국 파크골프의 시초는 1998년 진주 상락원 6홀을 시작으로, 2004년 서울 여의도에 9홀을 정식 개장한 한강 파크골프장 이래, 파크골프 인구가 빠른 속도로 증가함에 따라 그 수요에 발맞춰 파크골프장이 계속 신설되고 있습니다. 이에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민생활체육회에서는 자치구별로 파크교실을 운영하게 하여 무료교육을 실시해왔습니다. 서울시를 예로 든다면 각 구에서 반상회 등 홍보활동을 통해 교육생을 모집, 약 2~3개월(주 1회 또는 2회), 지정된 장소(여의도 한강 파크골프장, 잠실 파크골프장 등)에서 무료교육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파크골프장은 서울에 5개소를 비롯하여 전국에 총 160여 개소가 산재해 있으며, 9홀을 기준으로 Par 3홀 4개, Par 4홀 4개, Par 5홀 1개로 구성되며, 9홀을 두 번 운동하는 파크골프장이 많이 있으나, 최근 신설되는 파크골프장은 18홀, 27홀, 36홀 규모의 파크골프장으로 변화·발전되고 있습니다.
Par 3홀 규모는 파크골프장의 시설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으나 티샷을 하는 티잉 그라운드로부터 홀컵까지의 거리가 대략 40~60m, Par 4홀은 70~100m, Par 5홀은 110~150m 정도의 거리이며, 페어웨이 폭은 5~10m 정도입니다.
파크골프는 3세대가 함께할 수 있으며 배우기가 쉽고 공을 치기도 쉬우며 비용도 적게 드는 반면에, 운동은 많이 되며 자연과 가까이 할 수 있고 신체에 무리가 거의 없으며 시간이 적게 들어 쉽게 찾아가서 즐길 수 있는 운동이지요.
수년 전 행해진 일본의 어느 대학 연구에 따르면 파크골프 운동의 효과로는, 첫째 스트레스가 해소되고 사랑을 느낄 때 생성되는 다이돌핀이 왕성해지고, 진통효과가 있어서 행복감을 더 많이 느낄 수 있으며, 둘째 온몸의 근육이 강화되어 낙상이나 골절이 예방되고, 잔디 위를 걸음으로써 허리나 무릎의 통증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되고, 셋째 함께함으로써 고독을 해소하는 데 더없이 좋은 운동입니다.
골프운동을 할 때는 운동할 사람과 골프장을 사전에 예약하는 등 신경 쓸 일이 많고 골프장을 찾아 몇 시간씩 이동해야 하고, 운동 후에는 허리도 쑤시고 갈비뼈와 어깨도 아파서 수시로 한의원을 찾아 치료를 해야만 했습니다. 파크골프 운동으로 전환한 이후에는 몸이 아픈 데가 없으며, 운동량은 골프 운동이나 파크골프 운동이나 똑같이 잔디 위를 걸으며 동반자들과 대화를 하며 운동을 하니 골프 운동할 때와 거의 유사합니다.
파크골프에 입문하려면 여러 방면의 길이 있는데 첫째 파크골프 인터넷동호회에 가입하여 동호회원으로 활동하기, 둘째 협회에 가입하여 협회회원으로 활동하기, 셋째 어느 단체에도 가입하지 않고 개인 스스로 활동하기 등이 있습니다. 세상사 모두 장점과 단점이 있듯이 어느 방법을 선택하든 본인이 결정할 사항이지요.
필자의 경우를 소개해드리면 협회에 가입하여 협회비도 내고 협회에서 주관하는 대회(정기월례대회, 연말대회 등) 또는 전국대회(전국에서 개최)에 나가기 위해 협회로부터 도움을 받았습니다. 또한 협회에서 주관하는 각종 자격시험에 응시해 자격을 취득할 수 있고, 일정 자격을 취득한 이후, 강사 또는 심판 자격에 도전하여 자격을 획득한 회원은 강사 또는 대회 심판 요원으로 활동할 수 있습니다. 협회 회원들 간 상호 친목을 도모하며 생활할 수 있는 것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장점입니다.
파크골프와 관련된 단체로서는 (사)대한파크골프협회, 대한파크골프연맹이 있습니다. 필자가 가입한 (사)대한파크골프협회는 2016년 5월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으로부터 ‘통합 대한 체육회 정가맹 단체’로 승인을 받은 단체입니다.
파크골프를 하기 위한 용구와 복장으로서는 파크골프 클럽(채)와 공, 골프 티, 볼마커, 볼 포켓, 모자, 장갑, 골프화, 운동복 등이 필요합니다. 파크골프 클럽은 일반 골프 클럽의 퍼터와 비슷하다 생각하시면 됩니다.
파크골프에 관심이 있으신 분은 가까운 소속 구청 생활체육과와 문화체육관광부 체육정책과에 문의해보시고 그래도 추가적인 정보가 필요하신 분은 (사)전국파크골프연합회 등에 문의하시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숨 가쁘게 근무했던 현직에서 물러나 이제는 취미 하나 정도는 즐기시는 여유와 함께 제2인생을 살아가셔야 우울증 없는, 건강한 삶을 누리시지 않겠어요?
여성이 많은 목공교실에서 오롯이 눈에 띄는 중년 신사가 한 명 있다. 가구 제작에 몰두하는 모습을 얼핏 보면 이미 30년쯤 ‘톱밥만 먹고 살아온’ 장인처럼 보인다. 바로 박규완(朴奎浣·61)씨다.
하지만 그의 진짜 직업은 원자력 전문가. 한국원자력환경공단에서 근무하며 눈앞으로 다가온 퇴직을 준비 중인 엔지니어다. 평생을 원자력 발전소 건설과 관련한 일을 하며 살았고, 국내에서 운영 중인 상당수의 원전은 그의 손을 거쳤다. 정년이 가까워지면서 회사에서 운영하는 퇴직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됐고, 박씨의 선택은 목공예였다.
“나무가 주는 독특한 매력이 있어요. 질감에 향기까지 그 종류도 다양하죠. 한번 작업을 시작하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몰입하는 과정도 무척 행복해요. 사실 그 전부터 집 안의 간단한 인테리어를 위한 목공예는 직접 해왔어요. 하지만 전문적으로 배우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일이니까 제대로 배워보자 싶었죠.”
교육을 통해 그는 도면을 그리는 법, 공구나 장비를 다루는 법도 새로 배웠다. 원전 건설 현장에서 호령하던 그였지만 안전하게 자신만의 가구를 만들기 위해서는 기초가 중요했다.
“안전이 우선이니까요. 일종의 직업병이라고 할까요. 발전소 지을 때도 사고가 나면 가장 먼저 다치는 건 엔지니어 당사자라서 허투루 작업할 수 없었어요. 가구를 만드는 과정도 비슷해요. 원칙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죠.”
그가 목공예를 선택한 또 하나의 이유는 남을 도울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 그간 사회에서 혜택을 받고 살아온 만큼 이제는 재능기부를 통해 사회에 되돌려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나서고 싶다는 게 그의 바람이다.
“최근에 도시 재생이 사회적으로 주목받고 있잖아요. 도시 환경을 개선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분야 중 하나가 바로 목공예입니다. 아직 배우는 단계라 어디까지 힘을 보탤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죠.”
수료 후에는 방과 후 학습을 통해 아이들에게 나무 다루는 법을 가르치거나, 직접 제작한 물품들의 기부도 생각하고 있다. 또 소외계층 가족의 집수리도 그가 해보고 싶은 봉사활동이다.
이 과정에서 기대하는 것 중 하나는 다양한 관점이나 감각을 통해 사고 전환의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다. 그동안의 업무 환경이 아무래도 젊은이들의 미적 감각과는 거리가 멀었던 만큼 고리타분한 기성세대의 관념에서 탈피해보고 싶은 것이 그의 희망이다. 이러한 변화를 위해 그는 목공예뿐만 아니라 캘리그라피나 도시농업도 배우고 있다.
목공예를 시작한 덕분인지 요즘 집에서 인기가 높아졌다고 즐거워한다. 그가 만든 가구에 시집간 딸과 며느리가 반해 주문량이 늘었기 때문이다. 재료값이 만만치 않다며 볼멘소리를 하면서도 이런 반응이 싫지는 않은 눈치다.
“수납장과 탁자를 만들어줬는데 색상이 맘에 든다면서 아주 좋아하더라고요. 겉치레가 아니라 진심으로요. 제품을 써보더니 믿음이 가는지 또 만들어달라고 성화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