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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다 싱글 PART2] 혼자라도 잘 입고(衣), 잘 먹고(食), 잘 사는(住) 방법
- 혼자라서 힘들고, 불편하고, 못 살 것이라는 생각은 이제 그만. 사는 건 혼자이지만, 싱글라이프를 도와주는 다양한 서비스가 당신의 생활에 든든한 지원군이 될 것이다. ◇ CHAPTER 1. 의(衣) 생활 아재 패션 탈피하는 맞춤형 스타일링 서비스 깔끔하고 세련된 옷차림은 화려한 싱글라이프를 더욱 빛나게 해주는 요소다. 홀아비와 중년신사는 셔츠 한 장 차이로도 갈릴 수 있다. 누군가의 손길이 절실하다고 느낀다면, 패션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보는 건 어떨까? 1) 직접 디자인하는 나만의 옷 ‘스트라입스(stripes.co.kr)’ 패션 컨설턴트가 체형, 상황, 피부톤, 얼굴형, 라이프스타일에 적합한 스타일을 제안하는 맞춤형 서비스다. 기성복이 아닌, 자기 몸에 맞춰 결점은 보완하고 매력은 살리는 최적의 핏으로 디자인한 옷을 제작할 수 있다. 넥타이 연출법, 트렌드 컬러, 직업별 코디 등 유익한 패션 정보도 있어 살펴보면 도움이 된다. 싱글족을 위한 추천 셔츠 7종도 판매한다. 2) 쇼핑 걱정 덜어주는 코디박스 ‘유어스타일리스트(yourstylist.co.kr)’ 패션으로 젊은 감각을 뽐내고 싶다면 유어스타일리스트를 이용해보자. 일대일 상담(카카오톡 이용)을 통해 기본 상·하의를 비롯해 신발, 양말, 재킷 등 원하는 스타일을 완성할 수 있다. 제품을 먼저 받아보고 결제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코디 상품이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부담이 없고, 반송이나 교환도 무료로 가능하다. “귀찮은 빨래, 스마트폰만 있으면 괜찮아요!” 세탁물이 많지 않은 1인가구용 미니드럼세탁기와 스타일러(살균·먼지제거·탈취 등 의류관리기)를 찾는 소비자가 늘고 있다. 이런 제품들은 적은 양의 세탁물을 관리하기엔 실용적이지만 이불이나 커튼 등을 세탁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단점. 셔츠 한 장에서부터 침구까지 세탁을 해결주고, 직접 세탁소를 찾는 번거로움을 덜어주는 ‘세탁 서비스 앱’이 주목받고 있다. 세탁물의 종류와 수량을 입력하고 수거 장소와 시간을 정하면 편리하고 빠르게 빨래를 해결할 수 있다. ◇ CHAPTER 2. 식(食) 생활 장보기 걱정 뚝! 서브스크립션 서비스 생수, 쌀, 야채, 과일 등 주기적으로 장을 봐야 하는 식재료가 있다. 혼자 지내다 보니 사려 했다가도 잊어버릴 때도 있고, 자주 장을 보는 것도 번거로운 일이다. 잡지나 우유처럼 주기별로, 원하는 만큼 받아볼 수 있는 서브스크립션(정기배송) 서비스를 이용하면 일일이 챙기지 않아도 냉장고가 텅텅 비는 날은 없을 것이다. 1) 쿠팡 정기배송(www.coupang.com) 라면, 통조림, 반조리·냉동식품, 조미료, 소스 등 즉석·가공식품을 비롯해 생수, 우유, 커피, 탄산음료 등 마실 거리와 시리얼, 과자, 사탕 등 간식 등을 주기적으로 받아볼 수 있다. 건강보조식품이나 다이어트 제품, 잡곡, 견과류, 애완 사료도 주문 가능하다. 월 1회부터, 4개월에 1회까지 주기를 고를 수 있고, 제품 수량도 원하는 만큼 선택할 수 있다. 2) 돌리버리(www.doleivery.co.kr) 수입과일 전문브랜드(Dole)에서 판매하는 과일을 정기적으로 배달해주는 서비스다. 1주에서 4주까지 기간을 설정하고 화~금요일 중 하루를 고르면 된다. 1인가구를 위한 바나나 1송이, 파인애플 1개, 코코넛 1개, 패션프루츠 1팩, 용과 1개 등으로 구성된 싱글박스(1~2인용, 1만9800원)가 있다. 간편하고 맛있게 삼시 세끼 챙기기 배달음식 하면 짜장면, 치킨, 피자 등을 떠올리겠지만 요즘은 1인가구를 위한 건강하고 실속 있는 배달음식 서비스가 늘고 있다. 요리 솜씨가 없는 이들의 걱정을 덜어주고, 매일 같은 반찬이 지겨운 이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기특한 서비스다. 1) 에이엠푸드(www.amfood.co.kr) 매일 새벽 우유를 배달해주듯 아침을 배달해주는 곳이다. 우유처럼 새벽에 서비스가 이뤄지기 때문에 현관문 배송주머니를 통해 전달받는다. 핑거푸드, 다이어트식단, 덮앤밥, 모닝죽 등으로 분류해 미리 짜놓은 한 달 식단대로 제공한다. 원하는 콘셉트를 고르면 신선한 재료로 정성껏 만든 건강 도시락으로 아침을 해결할 수 있다. (월 12만원) 2) 배민프레시(www.baeminfresh.com) 도시락뿐만 아니라 반찬, 국, 빵, 커피, 신선주스까지 정기적으로 배송한다. 저염·친환경·유기농·프리미엄 메뉴가 있어 건강을 염려하는 싱글족의 걱정을 덜어준다. ‘아내의 식탁’ 카테고리를 이용하면 원하는 요리를 직접 만들어볼 수 있다. 레시피와 정량의 재료가 함께 배달돼 요리가 쉽고 편리해진다. 3) 식스레시피(www.6recipe.co.kr) 양을 사더라도 1인분씩 조리하다 보면 재료가 남기 마련. 그렇다고 오래두고 먹기엔 신선도가 떨어지니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다. 식스레시피는 필요한 재료를 1인분에 맞춰 소분해 배달해주는 서비스로 자투리 재료가 생기지 않게 요리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매일 새벽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에서 들여오는 신선한 재료를 사용하고, 화학조미료와 설탕을 사용하지 않는 레시피를 제공한다. ◇ CHAPTER 3. 주(住) 생활 집안일 미루지 말고, 가사도우미 앱을 활용하자 주거 공간이 깨끗하게 정돈돼 있어야 기분도 쾌적하고 생활도 건강해진다. 그러나 혼자 살다 보면 청소하고 정리하는 일이 귀찮아질 때도 있고, 가끔은 혼자 청소하기 버거울 때도 있다. 그럴 땐 가사도우미 앱을 사용해 청소를 부탁하는 것도 방법이다. 안전한 우리 집 지킴이 ‘케이티 홈캠&홈매니저 서비스’ 언제 어디서나 스마트폰을 이용해 집을 관리하고 지킬 수 있는 시스템이다. ‘홈캠’ 서비스를 이용하면 상하좌우로 움직이는 카메라로 집을 실시간으로 감시할 수 있고, 위급 상황이 발생할 경우 케이티텔레캅 직원이 출동하도록 연계돼 있다. ‘홈매니저’는 가스안전기(밸브 자동 잠금 기능), 도어락(실시간 문 열림 상태 확인), 열림 감지기(외부 침입 감지), 플러그(에너지 절감 및 전력량 확인) 등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 extra :: 생활+ 의식주에 포함되지는 않지만 편리하고 즐거운 싱글라이프에 도움이 될 만한 서비스와 콘텐츠를 소개한다. 1) 뷰티 큐레이션 커머스 ‘글로시데이즈(www.glossydays.kr)’ 자신의 피부 타입에 맞춰 뷰티 전문가가 고른 화장품을 정기적으로 받아볼 수 있는 서비스다. 한 달에 한 번씩 받아볼 수 있는 정기배송 박스와 한정된 시즌에 맞춰 구매할 수 있는 스페셜 박스가 있다. 평균 6만원 상당의 화장품 5종을 월 1만6500원에 구입할 수 있다. 매월 15일 옵션을 선택하면 박스가 배달되는데, 이 절차가 번거롭다면 3~12개월 선불권을 이용하면 된다. 2) 싱글라이프 트렌드와 정보를 한눈에 ‘1집(1hows.com)’ 이미 혼자 살고 있거나 혼자 살고 싶은 사람, 또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이들을 위한 사이트다. 플레이스(PLACE), 푸드(FOOD), 리빙(LIVING), 러브(LOVE) 등 싱글에게 유용한 콘텐츠를 살펴볼 수 있다. 3) 생활 심부름 서비스 앱 ‘띵똥’ 배달하지 않는 맛집 음식 배달뿐만 아니라, 마트 또는 편의점 장보기, 퀵서비스, A/S, 각종 관공서 업무, 약국 방문, 선물 배달 등 다양한 생활 심부름을 1만원 내외의 금액으로 대행한다. 365일 24시간 내내 이용 가능하고, 서비스 진행 과정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 2016-10-31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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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초등하교 전학] (14) 수학여행
- 고학년이 되면 수학여행을 간다고 했다. 일광(日光)에 간다는 연락장이 왔다. 거기에는 소풍 갈 때처럼 준비물이 세세하게 정리되어 적혀 있었고, 학부형 중에 몇 명은 아이들 보다 먼저 여행지에 가서 모든 것을 체크해야 한다고 쓰여 있고, 희망자는 신청해 주기를 정중하게 부탁하는 내용이었다. 이웃에게 물어보니 가고 싶으면 신청하라고 격려해 주었다. 우리나라라면 서로 가겠다고 할 수도 있고 외국 사람이 왜 가느냐며 반대할 사람도 있지 않을까 염려가 되었지만 나도 참여해 보기로 맘 먹고 희망자 명단에 써서 보냈다. 당첨이 되었다고 연락이 왔다. 모두 소집해서 서로 인사를 건넬 수 있게 기회를 마련해 줬고 학교에서 우리가 빠짐없이 꼭 해야 할 체크 사항들이 자세히 적힌 종이를 주었다. 우리 반에서는 3명의 엄마가 간다고 전해 들었다. 아이들이 수학여행 가기 전에 잡힌 날짜에 준비물을 잘 정돈해서 가방을 메고 출발을 했다. 모든 것은 무료였다. 도착하자 아이들이 묵을 숙소로 안내를 받았고 내일부터 1박2일 코스로 탐방할 계획을 세세하게 알려주는 설명회가 열렸다. 분위기가 정말 진지했다. 별 것도 아닌 거 같은 것들을 조목조목 따져가며 의견교환을 철저하게 했고, 정말 아이들의 안전에 대한 부모들의 걱정을 반영했다. 그쪽에서도 마찬가지로 부모들이 말하는 것들을 세세하게 적어가며 서로가 의견 일치를 이룰 때 까지 서로의 생각들을 정리하고 교환을 했다. 대강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많은 것을 체험해 가며 배우는 시간이 되었다. 학교 행사에 참여하기를 정말 잘했다는 마음으로 뿌듯해졌다. 일본인들의 자질구레한 생각들을 정리하는 법이라던가 몰상식한 언사나 대답으로 기분을 상하게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에도 놀라웠다. 그리고 몸에 밴 친절은 거기서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잘 났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 그저 상대방의 의견을 열심히 들어주는 태도가 정말 선진국이었다. 큰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없다는 것, 위에 군림하고자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으로 아이들 안전에만 전심전력 하는 마음으로 똘똘 뭉쳐져 있는 자세들이 부러웠다. 어딘가 벽에 못이 하나 나와 있어도 용서가 안 되었다. 산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약간 기울여져 있어도 문제기 되었다. 부모들이 먹어보면서 반찬에도 영양적으로 균형이 잡혀 있는지 맛은 좋은지 체크를 엄하게 했다. 모든 건 아이들이 고대로 와서 할 것이기 때문에 어른이라고 더 좋은 것을 먹는 게 아니었다. 모든 것은 똑같이 아이들이 와서 겪을 것이란 점이 너무나도 좋았다. 안심되고 걱정할 일이 없으며 수학여행을 잘 다녀올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이렇게 체험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준 것에 대해 너무 고마웠다. 아이들은 절대로 편안하고 즐거운 여행이 될 것이란 확신이 섰다. 준비물에 있는 빨래집게 2개는 자기 양말을 본인이 빨아서 널어야 하는 것이고, 여벌로 속옷과 양말을 준비해 오라는 것에도 웃음이 쿡쿡 나오며 즐거웠다. 치약과 칫솔, 쓰레기봉투 2장(1박이니까)과 혹시 안 마른 양말과 갈아입은 속옷을 넣어갈 여분의 봉투 준비에도 고개가 저어졌다. 갔다 온 아이에게 물어보니 전부 자기 양말들을 잘 빨아서 빨래 줄에 다 널었다고... 일광이란 곳은 일기예보와는 전연 상관없이 자주 비가 오는 곳이라며 수학여행에서 얻어 들은 것들과 본 것들 그리고 역사 얘기도 곁들여 들려준다. 좋은 경험들로 기억되기를 바랐다. 세월호 같은 어이없는 사고가 일어날 수 없도록 철저한 안전을 기하는 그들에게 고개를 숙인다.
- 2016-09-19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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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 잘 자기 위한 나만의 비법] 생활습관 점검한다
- 연일 30도가 넘는 무더위가 계속되고 아열대 우림기후를 방불케 하는 요즈음 장마철의 환경에서 밤에 하루의 피곤을 잊고 쾌적하게 잠들수 있다면 그건 선물이다. 밤과 낮은 연속된 시간이고 우리의 몸은 매시간 유기적이기 때문에 밤을 낮과 구분지어 생각할수만은 없을 것 같다. 뿐만아니라 필자는 정신과 육체도 구분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정신과 마음상태가 홀가분하게 정돈 되어 있으면 우리의 몸상태도 가뿐하고 따라서 양질의 수면을 취하기 쉽다는 것은 60년 언저리를 살아왔다면 경험으로 모두 알게 된다. 필자의 경우 잠자기 전 중요한 청결조건은 양치를 비롯한 세수. 손발. 몸샤워가 있다. 그리고 환경적인 조건은 주방. 거실. 방등의 정리를 되도록 미루지 않는 것도 쾌적한 수면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나아가 다음날 움직임에 대한 대비까지 끝내고 잠자리에 든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만약에 불면을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면 생활습관을 이렇게 바꾸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어린아이가 잠을 잘 잘수 있는 조건은 습관과 리듬에 의해서 자동적으로 몸의 상태가 반응을 하지만 어른의 경우는 자신의 마음상태와 환경의 역할이 보다 더 큰비중을 차지하는 것 역시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어쩌면 교과서적인 정답이라고 말할수 있겠으나 필자에게 자신과 주변이 자신의 신경을 괴롭히지 않게 늘 정돈과 정리상태를 유지하는건 생각만큼 쉽지만은 않았다. 숙면의 해결방법은 아마도 이것이 첫 번째일 것 이겠지만 그러나 그래도 요즘같은 기후나 아니면 나에게 버거운일들이 계속되어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일도 있을수 있고 또는 잠 들 시간을 놓쳐버려 시간이 갈수록 눈은 감고 있어도 머릿속은 오만 생각이 꼬리를 무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시계의 숫자가 자신을 더욱 예민하게 만들어 잠은 더욱 멀리 달아나게 된다. 이런 경우에는 가장 하기 싫었던 일을 끄집어 내는 용기가 필요 하다고 믿는다. 용기를 내어 일어나 일에 직면해서 시작하려는 순간부터 몸과 마음은 안락한 잠자리를 탐내기 시작한다. 이 시간 잠을 안자면 잠을 못잘 것 같은 상태가 되어 하품이 나기 시작하면 그때 포근, 시원한 잠자리속으로 들어가면 아마도 아무 도움이 필요없이 잠은 내 친구가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잠이 안들어 초조해지면 자리에서 일어나 일을 찾아내기를 권하고 싶다. 요즘같이 더운밤 필자만의 샤워방법은 먼저 제법 뜨거운 물로 5분정도 샤워를 한 다음 완전히 냉온의 물로 5분에서 10분정도 몸을 완전히 식힌 다음 잠자리에 들면 잠드는 시간까지 몸이 차서 쉽게 잠들 수 있다. 처음부터 냉수나 미지근한 물보다 이게 효과적이다. 한여름에는 폭신한 침대 보다는 차가운 돗자리나 대용품을 메트레스위에 놓아두는것도 방법이겠지만 보다 온도가 낮은 방이나 거실의 바닥을 깨끗이 닦고 요를 사용하는것도 시원한 방법이다. 손이 닿을곳에 약풍 셋팅이 가능한 수면용 작은 선풍기나 부채를 두고 자면 나만의 ‘한여름밤의 꿈’을 꿀 수 있다. 참고로 물은 낮에 충분히 마셔두고 자기전에는 물은 너무 많이 마시지 않는 것 또한 숙면을 위한 팁이다.
- 2016-08-03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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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내! 이렇게 참는다] 차이를 인정하고 배려한다
- 결혼한 지 30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사소한 문제로 부딪힌다. 부부 간에 항상 마음이 일치가 되기는 쉽지 않다. 살아온 환경, 습관, 성격, 남녀 간의 사고방식이 서로 다르기 때문일까. 어떻게 조화시켜 원만한 가정을 만들어 갈까 고민해도 매번 크고 작은 소란이 계속된다. 부부 간의 의견다툼이 심해진 것이 최근에 이혼율이 높아진 원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서로가 자기 입장만 옳다고 주장해서는 해답이 없다. ‘화성에서 온 여자, 금성에서 온 남자’라는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 줄거리는 남자는 화성에서 왔고, 여자는 금성에서 왔는데 서로 마음이 맞아 지구라는 행성으로 거처를 옮긴 이후에 그들은 서로가 다른 행성에서 왔다는 사실을 잊게 되면서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고 때때로 충돌하게 된다는 것이다. 남자는 문제가 생기면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를 원하고 다른 사람이 관여하는 것을 싫어한다. 반면 여자는 문제가 생기면 같이 이야기 하는 중에 푼다. 여자는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단지 들어 주길 원하지만 남자는 성급하게 해결책을 제시하려고 하여 다툼이 생긴다. 남자는 이성적이고, 여자는 감성적이다. 아내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아침형 인간이고, 정리를 하지 않으면 정신이 어지럽다며 시간이 허락될 때마다 주변을 청소하고 정돈하며, 약속을 하면 시간보다 30분 이상 먼저 가서 기다리고,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하고, 금전관계에 철저하다. 이중에 금전 문제에서만 일치하고 다른 면에서는 차이가 난다. 그러니 다툼이 있을 수밖에 없다. 저녁에 늦게 자는 것이나, 주변 정돈을 못하는 것이며, 한꺼번에 여러 일을 벌려 놓고 허둥대는 것과, 약속시간에 꼭 맞추어 가는 것, 빨리 식사하는 것 등에 대해 잔소리를 듣는다. 그만 인정하고 살라고 사정해도 에누리가 없다. 아내에게 빚지고 있는 면이 많다. 결혼하여 지금까지 30년 이상 시집살이를 하고 있고, IMF 이후 조기 퇴직하여 프리랜서로 일하다 보니 고정수입이 없어 아이들 교육과 가정살림을 책임지게 하고 있다. 그 와중에 막내는 첼로 공부한다고 유학까지 가 있으니 통 면목이 없다. 지금까지 고생하고 있는 아내는 필자에게 평강공주이다. 역사상 유명한 공주는 선화공주, 요석공주, 평강공주이다. 그중 평강공주를 제일이라고 생각한다. 바보 온달을 인물로 만들었으니까. 필자는 기꺼이 바보 온달이 되고 싶다. 그래서 자기 소개할 때마다 바보 온달임을 알리고 있다. 얼마 전에 친구들과 문화여행 차 평강공주와 바보 온달의 동상이 있는 아차산성에 갔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최선을 다했다. 아차산성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때까지 평생 평강공주만을 바라보며 한 눈 팔지 않고 살았던 바보 같은 남자 온달과 신분의 차이를 무시하고 가능성만을 보고 결혼하여 온달의 죽음 소식을 듣고 버선 걸음으로 달려 온 평강공주의 사랑 이야기는 감동적이다. 요즘 『화성에서 온 여자, 금성에서 온 남자』를 아내와 같이 읽고 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배려하며 사는 것을 배운다.
- 2016-07-06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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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내! 이렇게 참는다] 서로 잘하는 것 하면 남편은 내편
- 필자는 혼기가 차자 결혼할 여성을 찾았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 많은 여성 가운데 검은 머리가 파 뿌리가 될 때까지 사랑할 사람을 찾는 것이니 그 고통 짐작하고 남을 것이다. 어쨌든 지난한 고민 속에 최종 낙찰한 것이 현재의 배우자다. 결혼 초기에는 이 세상 부러운 것 하나 없이 재미에 푹 빠졌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세상 제일의 보물 중 보물을 얻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결혼 2~3년이 흘러가자 잦은 감정 다툼이 있었다. 다른 가정에서 자라온 문화 차이로 서로를 이해하지 못 하는 경우가 많아 이런 감정 다툼이 생긴 것이다. 그러다 보니 맑은 날, 흐린 날, 천둥 번개 치는 날이 교차했다. 하지만 얼마 지니지 않아 아무것도 아닌 아주 일로 다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됐다. 필자가 남편으로서 먼저 이해해주기로 마음 먹고 조금 언짢게 보이는 행동도 그냥 넘기기로 했다. 그런데 이렇게 자꾸 넘기다 보니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대로 고쳐지기는커녕 그대로고 2세에게도 나쁜 버릇이 고스란히 일상화되어 가는 것이 아닌가? 아내와 자식이 잘못된 같은 행동을 하고 남편만이 정상적인 행동을 해도 다수결 원칙에 따라 필자의 잘못으로 결론 났다. 식사하고 나면 아내는 항상 먹던 그릇은 그대로 둔 채로 양치부터 열심히 하기 시작한다. 식사 후 3분 내, 3분 동안, 하루 3회 333법칙을 철두철미하게 지킨다.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식사하는 동안 치아가 스트레스를 받았으니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에 양치해야 치아가 손상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면 아내는 “당신은 당신 생각대로 해라. 나는 내 식으로 살테니”라고 한다. 어느 날 저녁 식사 후 필자가 설거지 하고 주방을 깨끗하게 정리, 정돈하고 나서 “이런 \식으로 하면 어떻겠냐”고 했더니 “앞으로는 잘하는 사람이 알아서 계속하라”고 한다. 그때 필자 머리에 천둥이 우지끈 쳤다. 바로 필자가 직접 하면 되는 것 아닌가. 그리고 얼마 후 명절에 바로 이런 신전략을 펼쳤다. 음식 만드는 데 보조 역할도 하고, 설거지와 뒷정리도 모두 필자가 마쳤다. 아내의 얼굴에선 웃음이 절로 났다. 이렇게 서로가 잘하는 것을 알아서 같이 하면 티격태격 싸울 일도 없는 것이다. 아내가 신이나서 친구들에게 전화했으나 그렇다고 필자의 위상이 깍인 것도 아니고, 가정에서는 행복의 씨앗이 저절로 뿌려지고 있으니 필자 좋고, 아내 좋은 것 아닌가. 이 세상 남편, 아내들이여 가정에서 서로 잘하는 것 찿아서 합시다. 그러면 가정에서 삭 트는 행복이 활짝 필 것으로 확신합니다.
- 2016-07-05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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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성 남과 금성 녀가 천륜이 되기까지
- 수술실에서 나온 지가 얼마나 되었을까? 몽롱하게 피어나기 시작하는 의식을 느끼며 무거운 눈을 겨우 추켜 올렸다. 뿌옇게 보여오는 세상이 살아 있음을 확인해주었다. 몇 번을 깜빡거리다 다시 눈을 감으려 하자 누군가 볼 따귀를 마구 때렸다. 어렴풋이 정신 차리라는 소리로 들려왔다. 깊게 눈을 감았다가 힘을 내서 희미한 세상을 올려다보았다. 15시간 만에 깨어난 것이었다. 운명적 만남 첫 번째 눈에 들어오는 사람은 자기 얼굴보다 커다란 군인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었다. 까맣게 타올라 알 수 없는 모습이 필자의 두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다시 눈을 감았다. 정신을 가다듬어 곰곰이 생각해보니 지금 공군 훈련소에 있어야 할 사람이 눈앞에 와 있는 것이다. 웬일인가 싶어 순간에 만감이 교차했다. 갑자기 죄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무서워졌다. 옛말에 고무신 거꾸로 신으면 죄받는다는 말이 번개처럼 스쳐갔다. 그때, "이 사람하고 결혼을 해야만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족쇄가 되었다. 다른 어떤 생각도 그 사람과 헤어지면 마치 벼락이라도 맞을 것만 같았다. 필자는 입학하게 된 대학교가 영 마땅치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마지막 날에 늦게나마 막 떠나려는 전철에 올라탔다. 그 안에서 한 남자가 다가와 말을 걸었고, 그 남자는 같은 학교 3학년 선배였다. 그렇게 만난 사람과 캠퍼스 커플이 되었고, 필자가 3학년이 될 즘에야 그 사람은 공군 장교를 선택했다. 군 입대를 하면서 마음에 갈등이 생겼다. 살아온 환경과 성격이 너무나 달라 결혼까지는 자신이 없었다. 긴 세월에 걸쳐 제대할 때까지 그 사람만을 기다리기가 힘들 것 같아, 필자의 의사를 전달했다. 그 사람은 결국 군 입대 원서를 찢어버렸다. 방황의 순간 입대하는 날 새벽 아침에 그 사람 친구들은 스카치테이프를 구해서 너덜너덜 해진 입대 원서를 붙여 주었고, 필자가 비굴한 용서를 빌면서 그는 군 입대를 할 수가 있었다. 6개월 장교 훈련 기간이 있었다. 대학 입학 후 미팅이라고는 한 번도 해본 경험이 없던 필자에게 그 사이로 다른 남자와 만남의 기회가 주어졌다. 드디어 처음으로 그룹 미팅을 하게 되었고 얼마나 설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에도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 남학생들의 소지품으로 뽑기를 하고 일대일로 멋진 한 남자를 만났다. 신비로움과 함께 흥미진진한 대화를 하던 중에 살금살금 배가 아파지기 시작했다. 만남을 방해하는 배를 움켜쥐고 참으려면 더 아파졌다. 모처럼의 기회를 잃고 싶지 않아 억지로라도 웃어가며 꾹 참았다. 식은땀이 줄줄 흘렀고, 끝내는 파트너와 함께 응급실로 실려갔다. 급성 맹장이 터져 복막염으로 대 수술을 하게 된 것이다. 대학 졸업을 하고 그 해 5월 다소곳이 필자는 그 사람 공군 중위와 결혼을 했다. 결혼이 뭔지도 모르고 의무감 만으로 한 것 같기도 했다. 아옹다옹 4년이라는 세월의 교제기간이 있기는 했지만, 성격적 엇갈림은 이미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가 따로 없었다. 그 갈등이나 다툼은 잠시도 멈추지를 않았고 그 사람이나 필자나 똑같이 개성이 강해 늘 요란한 평행선이었다. 한 사람은 무조건 고기를 좋아했고 한 사람은 채식을 즐겨 했다. 필자는 칼국수를 선택하면 그 사람은 설렁탕을 먹자며 칼국수는 입에도 대지를 않았다. 어쩌면 그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 필자는 정리 정돈을 잘하고 아기자기한 편이었으나 그 사람은 정리된 것들을 홀 가닥 뒤집어 놓는다. 한번 외출하고 돌아와 보면 도둑이 들어왔다 간 것처럼 온 집안이 난리가 나있다. 놀란 가슴에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는다. 또한 얄팍한 거짓말을 해서 꼭 필자에게 들키곤 한다. 아무것도 아닌 듯했지만 늘 사소한 것들로 싸움은 끝이 없었다. 그때마다 체념도 하고 포기도 하고 가끔씩은 여행을 하면서 아이들만 의지하며 그렇게 지냈다. 그리고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에는 다시 배움의 만학 도가 되어 학교생활에 몰두하면서 그 고통의 힘겨운 시간들을 버틸 수가 있었다. 남편보다는 천륜 서로가 관심을 갖지 않기로 하고 새로운 것들에 최선을 다하며 갈등의 아픔을 치유해 나갔지만, 남편은 점점 더 함정의 수렁으로 빠져들며 필자를 힘들게만 했다. 저질러진 뒤처리는 모두 필자의 몫으로 고스란히 남아 돌아왔다. 남이 아닌 남편을 외면할 수가 없다면 차라리 자신을 위하여 품어야만 했다. 아이들이 성장을 하고 필자의 품에서 떠나면서 말했다. 엄마 아빠는 우리가 없으면 맨날 싸워서 어떻게 사느냐고 걱정을 했다. 물론 염려가 되는 부분이기도 했지만 결과는 정 반대였다. 나이 먹고 몸은 점점 고장이 나고 자식들은 곁에 없었지만, 결국 남는 것은 두 부부뿐이었다. 세월 속에 힘들고 병들어 의지할 곳 없을 때, 끝내는 두 사람 밖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슬픈 어느 날에 드디어 뼈 속 깊이 체험하게 되었다. 부부 싸움도 젊고 힘이 남아 돌아가니 싸우는 것이었다. 무조건 자기만이 옳다고 주장하니 개성 강한 두 사람은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삶에 지혜가 생겨나고 뭔가 터득해가는 나이가 되어보니 곁에 있어서 참고 살아와준 남편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필자가 숙연해지면서 철이 들고 있었다. 상대를 인정하며 모든 것은 자신으로부터 크라고 마음먹으며 내려놓으니 평화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왜 진작에 풋풋한 젊은 날에는 그런 것들을 인식하지 못 했을 까. 인생 반 고개를 훌쩍 넘어가려 하니 이제야 자신을 성찰하며 깨우치고 알 것만 같다. 그래서 옛말에 인생은 60부터라는 말이 있는 것인가 보다. 결국 인생이란 참아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얻어지는 것, 그것이 자연의 섭리와 순리라는 것을 알게 해주고, 조물주는 극과 극의 사람이 만나 부딪치며 터득하고 참아가면서 그 속에서 인간이 되라고 인연을 맺어 준 것만 같다. 미운 정 고운 정 아쉬움 정까지 다 들어버린, 이제 남편보다는 아이들의 아빠이자 소중한 가족의 가장이 되었다. 이 세상 모든 부모가 미치도록 자신의 아이들을 사랑하듯, 누구보다 가장 가까운 동반자인 그 사람과도 영원히 함께하는 삶의 따뜻한 사랑을 나누어야만 할 것 같다. 가족이라는 위대한 천륜이 되어버린 그 사람을 어찌 남편이라는 말로만 외면한단 말 인가. 이 날까지 함께 함을 깊이 감사하며 곁에 있을 때 더욱 잘해야 하겠다.
- 2016-07-05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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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주 병법 PART2] 문화가 변해도 손주 돌봄은 역시 격려와 인정이 최고
- 장영희 동년기자 bravopress@etoday.co.kr 요즘 ‘손주 얼굴을 보는 값’을 내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만남에 식사값을 내야 하고, 데리고 나온 자녀에게 차비를 쥐어주기도 한다. 이런 시대에 손주의 교육에 참여한다는 것은 감히 그런 마음을 품을 수 없다. 외할머니가 손자를 아기 때부터 다섯 살 때까지 보살폈다. 왕자 기르듯 받들면서 길렀다. 아이를 바라보고 있다가 뭐든지 가져다주었다. 여섯 살 아이를 밥도 먹여 줬다. 외동딸에 손자가 태어났으니 오죽한가. 거기에 아들 내외는 맞벌이를 하니 미안한 마음에 벌벌 떨었다. 나는 못마땅했지만 내가 맡아 키우지를 않으니 손자교육에 간섭하지 않았다. 외할머니가 몸이 안 좋아져 손자를 돌보지 못하게 되었다. 손자에게 말했다. “성범아, 아파트에 동네친구들 있지? 이 사탕 좀 친구들에게 나눠 줄까?” 무슨 좋은 생각이 있을까. 길에서 만나거나 집으로 갖다 주든지 그렇게 해보자고 했더니 쟁반까지 가지고 온다. 냅다 밖으로 나갔다. 강아지도 따라 나선다. 그때 네댓 살 여자아이가 엄마와 걸어온다. 얼른 다가가서 망설이지 않고 반지사탕을 준다. 그런데 손자는 처음 해보는 일이라 내가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일단 처음에 성공을 했다. 그러더니 옆 라인으로 간다. 현관문에서 ‘딩동’ 누르고 뭐라고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힘차게 내려왔다. 이제 두 번째도 성공했다. 이번에는 어린애를 안은 남자군인을 만났다. 이미 탄력이 붙은 손자는 다가가서 “이 사탕을 드리고 싶어요” 웃음까지 띠고 상냥하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현관문을 쾅 닫고 들어간 그 집에서 아이 울음소리가 났다. 왜 울지? 그 집에는 아이가 둘이니. 사탕이 하나밖에 없어서 우는 것은 아닐까. 손자는 금세 알아듣고 다시 문을 두드렸다. 사탕을 주고 보무당당하게 내려온다. 울음소리는 그쳤다. 마치 온 동네를 돌아다니라고 해도 다닐 기세다. 마지막으로 1층을 두드렸다. 손자 이름을 아는 걸로 봐서 아는 집인 듯했다. 그 집안으로 들어오라 하니 신발을 벗고 강아지와 함께 들어선다. 그 집 할머니와 딸과 주고받는 소리가 들린다. “너 혼자 왔니?” 이렇게 묻는 소리가 들리고, “바래다줄까?” 5분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다. 살짝 걱정이 되었지만 밖에서 기다렸다. 드디어 손자는 나왔고, “이야, 우리 범이 최고다. 할머니도 못하는 일을 네가 해냈구나.”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며, 마치 개선장군처럼 집으로 왔다. 아들에게 전화로 이야기했더니 며느리에게 전해졌다. 아들은 “엄마 잘했어요” 며느리는 퇴근해서 하는 말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셨어요?” 입이 쩍 벌어졌다. 손자가 밖에서 놀고 있는데 또래의 아이가 집으로 들어오고 싶어 해서 들어오라고 했다. 그래서 집에서 놀다가 그 집으로 손자는 다시 놀러갔다. 그랬더니 며느리가 퇴근해서 하는 말이 “어머니 그러시면 안 돼요” 이런다. 퇴근길에 돼지고기 한 근을 사서 그 집에 갖다 주고 왔단다. 약속을 해서 가야 하고 불쑥 아이만 보내는 것이 아니란다. ‘내 생각은 그럴 수도 있지’ 인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요즘 문화가 변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우리 손주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알기나 혀’ 이 생각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남의 집을 혼자 방문해서 1시간 정도 머물렀다. 내가 데리고 나올 때 그 집 주인은 “아이가 정리정돈을 잘 하네요” 기분 좋은 소리를 한다. 남의 집에 혼자서 오랫동안 머물다 오는 일도 손자가 처음 해본 일이다. 새가 둥지를 떠나 날기를 연습하는구나 ! 상봉역에서 전철을 타고 춘천역에 내려 놀이방에 도착했다. “우리 집까지 걸어갈까?” 손자에게 의견을 물으니 좋다고 한다. 집까지는 1.5km정도 되는 거리다. “그런데 할머니가 집으로 가는 길을 모르는데 너 혹시 아니?” 그랬더니 앞장을 선다. 고사리 손으로 내 손을 잡고, 혼자서 설명을 한다. 나무가 많은 집이 나오고, 그 다음에 닭을 기르는 집이 있다고 했다. “할머니가 닭 구경하고 싶다” 했더니 조금 기다리라며 닭장 앞에서 수탉이 몇 마리, 모이를 쪼아 먹는다느니 싸움을 한다느니 하며 이야기한다. 빵집에서 손자가 좋아하는 오징어먹물 빵도 샀다. 길을 건너 방앗간에서는 한참 동안이나 기름을 짜는 풍경, 자루에 담긴 고추를 구경했다. 김을 구울 때 바른 들기름을 여기서 샀다고 했다. 통닭집을 지나 손자의 얘기를 들으면서 기웃거리며 왔다. 아침에 놀이방에 갈 때 배웅하는 이가 있어야 된다. 오는 시간에도 마중하는 이가 있어야 한다. 아니면 버스가 그냥 아이를 태우고 놀이방으로 간다. 그래서 오후 4시 버스를 정확하게 기다려야 한다. 잠시 잠이 들거나 하면 일이 커진다. 쓰레기를 버리러 갈 때도 손자가 올 때까지 일부러 기다렸다. 분리수거한 몇 개의 백을 들고 손자에게 말한다. “너 쓰레기장 어디인 줄 아니?” 씽씽카 고리에다 그중 하나를 걸더니 앞장을 선다. 한참을 가야 했다. 며느리가 퇴근해서 왔다. “오늘 범이 일 좀 시켰다”했더니 “어머니 잘하셨어요” 속으로 별일이네 했다. 아이에게 천천히 이야기로 설명하면 된다. 할머니생각은 이런데 어때? PX매점에 갈 때도 할머니가 이것을 사고 싶어. 달팽이크림이 필요해. 너는 뭘 고르고 싶은데. 분명한 의사표현을 하고 이것을 사야 하는 이유를 말한다. 좀 시간이 걸릴지라도. 새로운 과자가 나왔는데 사볼까. 지금 콧물이 나기 때문에 아이스크림을 사지 않아야 된다는 것도 스스로 결정하도록 기다렸다. 아들은 나를 만날 때마다 다른 아이들보다 1년이 늦는다고 조바심쳤다. 내가 3개월 동안 춘천을 다니며 내 교육방법대로 아이와 자연스럽게 지냈다. 며칠 전에 아들이 와서 하는 말. “엄마 이제 범이가 아이들과도 잘 어울리고, 정상이래요.” 결국은 아이가 ‘혼자서도 잘해요’가 되었다. 이런 행동은 내가 두 아들을 길러 봤고, 지금 현재 제 몫을 해내는 어른으로 성장시킨 체험이 있어서다. 문화가 변해도 아이들을 키우는 근본은 스스로 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 2016-06-29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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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어머니]“어머니를 속여 죄송합니다”
- 나른한 봄볕 아래 어머니를 생각하는 조창화(趙昌化·78) 대한언론인회 고문을 만나 담소를 나눴다. 그는 세상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어머니의 값진 추억을 생생하게 그렸다. 흡사 계절마다 살아 돌아오는 장미꽃의 슬픈 아름다움처럼, 어머니의 모습은 그렇게 조 고문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이태인기자 teinny@etoday.co.kr “ 어머니는 자신의 인생을 오직 1남 2녀 세 자식을 위해 헌신하셨죠. 그중에서도 아들인 제게 몰두하셨어요. 그래서 저에게 어머니는 늘 애틋하고 각별한 존재죠. 이렇게 다시 회고하니 늘 혼자였던 어머니 모습에 목이 멥니다.” 조창화 대한언론인회 고문은 어머니 박신행(朴信行) 씨와 함께 찍은 사진 한 장이 없다며 가슴 아파했다. 어머니와 가족의 삶을 풀어내는 그의 목소리에는 그리움과 아쉬움이 보태졌다. 그는 자신이 일곱살이었을 때의 어머니를 떠올렸다. 어머니 나이 마흔을 훌쩍 넘어 낳은 아들이었던 그는 1945년 초, 어머니의 손에 끌려 서른 시간이 넘는 기차 여행 끝에 평안남도 평원군 한천이라는 작은 포구에 닿았다. 그곳은 어머니의 고향이었다. “그 좋은 재산 다 놔두고 몸만 나왔으니 어떻게 하나”라는 어머니의 푸념이 그칠 날이 없었다. 그는 그곳에서 한천소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일제 치하였던지라 다마고(계란) 잇고(1개), 니고(2개)를 먼저 배워야 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면 일본 학교를 다니다 온 두 누이로부터 개인 교습을 받곤 했다. 해방이 된 그 해 8월 하순의 어느 날, 그는 아버지 조이선(趙利善) 씨와 함께 100여 리 떨어진 평양에 간 적이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광장으로 갔는데 연단에서 키 큰 남자 한 명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있었다. 아버지가 “저 사람이 바로 김일성이다”라고 했다. 마치 불길한 전조 같은 기억이었다. 함경도로, 서울로, 그리고 부산으로 소학교 1학년이 끝날 무렵 그의 가족은 트럭에 이삿짐을 싣고 함경남도 신고산이란 곳으로 이사를 했다. 그곳에 땅과 과수원, 광산 등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신고산 인민학교 2학년에 편입했다. 아침마다 소년단 행진곡을 부르며 대열을 갖추어 등교할 때는 신바람이 났다. 그러나 역사의 비극이 그에게 드리우기 시작했다. 어느 날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상한 사람들에게 끌려 나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며칠 후 아버지와 어머니가 안변 감옥에 갇혀 있다는 전갈이 왔다. 죄목은 ‘유산 계급’. 공산당의 ‘숙청’ 작업이 시작된 것이었다. 이 사건이 있고 나서 소년 조창화는 학급 위원 자리에서 내쫓기고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게 됐다. 부당한 처사들 속에서 학교에 나가는 둥 마는 둥 집에서 지내야 했던 그에게 아버지 소식을 갖고 왔다는 한 남자가 “어머니, 아버지는 안변 감옥을 탈출해 이미 월남을 했고, 나는 너희 3남매를 남쪽으로 데려가기 위해 왔다”면서 아버지의 편지를 내밀었다. 3남매는 1948년 8월의 어느 날, 부모님을 만나기 위한 2박 3일 동안의 월남 행군을 시작했다. 행군은 주로 밤에 이루어졌다. 고생 끝에 도착한 동두천에서 오랜만에 부모님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서울에서 아버지의 권유로 공옥소학교라는 사립학교 4학년에 편입했다. 남대문시장 근처, 지금의 상동교회 뒤에 자리 잡은 이 학교는 1학년부터 6학년까지 한 반씩밖에 없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소학교였다. 고된 경험 끝에 부모님과 함께하게 됐다는 것에서 그는 겨우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가혹한 운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시작된 지 2주 남짓 지났을 시점인 1950년 7월 13일, 그의 나이 12세 때 갑작스럽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서울이 온통 인민군으로 뒤덮인 날, 그는 아버지를 모신 영구차에 탄 채 무악재를 넘어 꾸역꾸역 밀려오는 인민군을 헤치고 홍제동으로 향했다. 묘지였던 그곳에서 5일장으로 장사를 치렀다. 그리고 그 후 석 달 동안 방공호에서 살아야 했다. 얼마나 지난 다음일까? 어느 날 국군이 서울로 들어왔고, 그해 12월 하순에 그의 가족들은 다시 짐을 꾸려 부산으로 가는 피난 열차를 탔다. 무려 6일 동안의 거북걸음 끝에 부산역에 도착한 것이 12월 26일 즈음, 어머니와 2녀 1남의 3남매는 사고무친(四顧無親)한 부산역 한 귀퉁이에서 고달픈 피난살이를 시작했다. 홀어머니 슬픔 헤아리지 못한 불효자 “그때 어머니는 겨울 털모자를 팔고, 그 돈으로 쌀을 사고…. 그런데 뭔가를 팔려고 해도 살 사람은 별로 없고…. 그 와중에 아버지를 잃은 어머니의 슬픔이나 아버지의 빈자리를 제가 헤아려 본 적이 있는가 하면…. 그런 기억들 때문에 영화를 보면서 엄청 울 수밖에 없었죠.” 부산에서 학교를 다닌다는 건 상상조차 못했다. 학교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동네 아이들과 사귀던 그는 미군 부대에 들어가 미군의 구두를 닦아주는 ‘슈샤인 보이’를 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요즘의 우리들은 꽁트에서나 볼 수 있는 ‘기브 미 쪼꼬렛’이라는 어설픈 영어 뒤에 숨어 있는 건 시대가 만들어낸 고통이고 절박한 생존의 기술이었다. 조 고문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가 ‘슈샤인 보이’를 하고 다닌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어머니는 “이대로 뒀다가는 애가 큰일나겠다” 싶었다. 더군다나 애지중지 키운 집안의 단 하나뿐인 아들이었다. 어머니가 그를 미군 부대 대신 데려간 곳은 문래동 대선소주공장의 한 귀퉁이였다. 그곳은 미국인들에게 학교를 빼앗긴 성남초등학교 6학년 학생들이 노천 수업을 받는 곳이었다. 이리하여 그의 인생에서 네 번째 초등학교가 시작된다. 졸업이 예정된 6학년 말까지는 한 달 정도 남았을 뿐이었고 다른 아이들은 연합고사를 준비한다고 야단법석인 가운데 그는 친구들의 노트와 책을 빌려 보기에 바빴다. 비록 졸업식에는 참석하지 못했으나 달포 뒤에 성남초등학교 졸업증명서를 받을 수 있었다. 이로써 초등학교 4개를 거친 그의 남행만리(南行萬里)는 부산을 마지막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의대에 안 가 죄송합니다” 1953년, 이제 여드름꽃이 피는 나이가 되는 조 고문은 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가는 대열에 끼여 서울에 올라왔다. 서울고등학교 3학년으로 입학한 그는 당장 다가온 대학 입시 준비로 24시간이 모자랐다. “제가 있던 3학년 4반 담임인 육인수(故육영수 여사의 오라버니) 선생님을 만난 어머니는 ‘창화는 무조건 서울대학교 의대에 가야 하니까 그리 지도해 달라’고 신신당부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의과가 싫어 정치학과에 서류를 제출했고 어머니와 육 선생은 제가 당연히 의대에 넣은 것으로 알고 있었죠.” 서울대 정치학과에 합격한 그는 마치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 서울 등지의 대표 준재들이 모인 형세를 이루는 정치학과 내에 함경도 대표로 자리 잡았다. 1961년에 대학교를 졸업한 뒤에 대한일보 기자로 들어가 국회, 청와대 출입을 시작했다. 1973년, KBS 정치부 차장으로 이직하면서 언론인으로서의 그의 삶은 보다 탄탄해진다. “제가 KBS 부산방송 총국장이었던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나이 53세일 때 아버지와 사별하고, 이후 35년이란 세월을 우리 남매 세 명을 위해 개가하지 않고 홀로 살다가 88세에 세상을 떠나셨죠. 어머니는 아버지와 삶을 같이한 시간보다 홀로 산 시간이 더 길었습니다.” 그는 어머니를 카리스마 있는 여장부로 기억했다. 그의 기억 속의 어머니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라면 막일도 거르지 않았고 늘 당당했다. 나이 들어 출석하는 노인회관에서는 화투도 잘 치고 보스 노릇도 곧잘 했다. 그는 어머니를 인정이 많고 시대를 앞서 갔다고 평했다. 지고는 못사는 성격에 일본어와 중국어도 유창했던 것도 어머니다운 점이었다. 어머니 묘지에 대동강 모래를 뿌리다 어머니가 그리울 때는 언제일까. “다들 비슷하겠지만, 어머니가 보고 싶을 때는 어려울 때, 힘들 때죠. 어머니는 언제나 제 편이셨으니까요. 어떤 일이 있어도, 영원한 제 편이니까요.” 어머니가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땠을지는 미뤄 짐작이 간다. 어머니는 그에게 무한한 사랑을 아낌없이 베풀었다. 하지만 그 사랑에 그는 변변하게 보답 못한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저는 어머니의 임종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날 집에서 전화가 왔는데, 태풍 때문에 비행기가 못 뜨더군요. 그래서 비행기로 못 움직이고, 새마을호를 겨우 타서 6시간 걸려서 집에 도착했죠. 그날 아침에 어머니가 ‘애비는 어디 있냐’고 물으시며 ‘화장실에 좀 가자, 씻고 싶다’고 하셨답니다. 가시면서 저를 찾았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당신의 삶을 묵묵히 보여준 것뿐이지만, 그 모습 자체가 그에게는 80세가 다 된 지금까지 ‘정신적 울림’으로 남아 있었다. “청와대 출입 시절 잊지 못할 일이 한 가지 있지요. 1972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적십자회담 취재단으로 들어가 대동강을 산보하고 그 강변에서 모래를 채취할 수 있는 큰 행운을 얻었어요. 그래서 1985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어머니의 고향 대동강의 모래를 뿌려드릴 수 있었죠.” 여기까지 말한 그는 갑자기 목이 메어왔다. 아버지 묘가 없어진 기억이 나서다. “사실 아버지 묘지를 잃어버렸어요. 부산 피난살이에서 돌아와보니까 홍제동의 묘지 자리를 불도저로 확 밀어버렸더군요. 그래서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아버지 영정만 가지고 합장을 했습니다. 그런데 안 되겠다 싶어서 다시 어머니 유골을 파서 화장을 했어요. 그리고 용인공원묘지에 가로 60cm, 세로 40cm 사이즈의 와합, 즉 눕히는 비석으로 바꿨어요.” 비석에는 배천(白川) 조 씨 가족묘라고 쓰여 있고 뒤에는 사용 수칙을 적었다. ‘여기는 배천 조씨 묘지다, 화장을 해서 묻는다, 직계비속들은 만약 꽉 차면 맨 위부터 그대로 파서 거기에 다시 사용해라.’ 용인공원묘지가 상당히 큰데 그렇게 한 건 그가 처음이다. “한 40구는 들어갈 것 같아요. 내가 죽고, 한 5대까지는 걱정하지 않을 것 같네요.(웃음)” 그는 어렵게 묘지개혁을 했다며 어머니 같은 여장부라면 좋아하실 일이라고 평했다. 그가 요즘 즐겨 말하는 ‘첫째는 남한테 피해 주지 말자이고, 둘째는 정리정돈’이란 말 또한 어머니에게서 배운 습관이다. “요즘 이제 일곱살인 우리 손녀에게 할아버지가 뭐라 말했냐고 집적대면 ‘남 폐 끼치지 마라, 정리정돈이요’하고 냉큼 대답하죠. 그 재미에 삽니다.” 조 고문은 인터뷰 내내 진중하고 묵직하게 어머니 이야기를 하다 손녀 얘기가 나오자 금방 함박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를 향한 추모의 정은 이제 유일한 손녀에 대한 짝사랑이 되어 삶을 비춰주고 있었다. 그에게 손녀는 그의 어머니가 주신 축복의 선물이 아니었을까.
- 2015-06-03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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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 라이프 인터뷰] “죽음을 다루면서 삶을 더 알차게 살게 됐습니다”
- 유재철 씨를 설명할 때는 꼭 붙는 명칭이 있다. 바로 ‘대통령 염장이.’ 최규하 전 대통령, 노무현 전 대통령을 염하고 장례 전반을 진행한 것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전직 대통령들의 장례와 같은 국가적 행사뿐만 아니라 서경보 스님, 정몽헌 회장, 정대 스님, 법장 스님, 법정 스님, 여운계씨와 같은 큰스님들과 유명인사들의 장례도 도맡아서 진행했던 유재철 연화회 대표지만, 시작은 그저 평범한 한 명의 염장이였을 뿐이라고 그는 말한다. 어떻게 해서 그는 염습이라는 쉽지 않은 분야를 자신의 업으로 받아들이고 장인의 소명의식으로 최고 전문가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됐을까? “염습은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도와드리는 일이다. 염을 하는 그 순간만큼은 잡념이 없어지고 몰입하게 된다. 마음과 손이 하나가 되어 생각한 대로 저절로 이루어지는 경지를 느끼는 고귀한 업으로 일한다.” 염습이라는 것 자체에 거부감을 가지는 사람들이 아직 많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것을 직업으로 삼는다는 것에 대해선 더욱 그렇다. 그러나 업의 험상궂은 이미지와는 달리, 유재철 연화회 대표를 처음 봤을 때 느낀 것은 맑고 순하다는 인상이었다. 그의 말속에서 자신이 맡은 일의 가치를 믿고 그 일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이라 느껴졌다. 유 대표가 염장이가 된 것은 우연의 힘, 혹은 우연을 가장한 운명의 힘처럼 보인다. 경기도 광주에 고향이 있는 유 대표는 일찍이 집안 내에서 시행되던 장례에 대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고, 까다롭고 복잡한 상례 또한 낯설지 않았다. 돌아가신 가족들을 위한 염을 진행하곤 했다. 즉 장례 문화에 대해 거부감이 없었으며 염에 대해 일찌감치 익히고 있었던 것이다. 방황 끝에 발견한 ‘대통령 염장이’의 시작 그러나 경험적으로는 익숙했어도 장례를 업으로 삼고자 하는 생각이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녔다. 27살부터 사업을 시작한 그는 아파트 섀시 설치, 방화문 제작, 의류 등 닥치는대로 일을 했다. 그런데 그 어느 사업도 잘 풀리진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전라도 광주에서 능인회라는 장의업을 하고 있던 친구들을 알게 됐습니다. 두 친구들은 불교 청년 운동에 소속된 젊은 사람들이었고 정직한 장의업을 통해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들 일을 도우면서 저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 그들의 성공을 보고 장의업을 배우겠다는 사람은 제법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유 대표처럼 직접 염을 하는 것에 적극적이고 능숙한 사람은 없었다는 것. 유 대표는 이내 친구들의 인정을 받았다. 유 대표가 염을 업으로 하게 된 것은 방황 끝의 선택이었던 것이다. 염을 배우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다 그러나 일단 시작하게 되자 유 대표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실력을 높이기 시작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염을 잘한다는 사람을 만나 배움을 구한 것도 그 증거다. 각 지방마다 각기 다른 지식들이 전수되고 있었고 유 대표는 그 하나하나를 확인하고 맞추며 정돈된 염습 체계를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서른 살 중반에 광주 친구들에게 석달 배워 서울에 장의사를 시작했죠. 3년을 틈나는 대로 전국을 다니며 염하는 걸 배웠어요. 막상 가서 염하는 걸 보면 참고할 수 있는 분도 있었지만 배울 게 없는 분도 있는 등 상황이 여러 가지였어요.” 당시 장의업이나 상조회사들은 서울 밖 지방에서 발달되어 있었으나 시장으로서는 역시 서울이 가장 큰 규모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상조회사들은 지방에 머무르려 하고 있었고 영업 조직만 서울에 올려 놓은 형국이었다. ‘동네 장의사’보다는 뭔가 특색 있는 장의사가 되고 싶어 종로구 견지동 조계사와 제일은행 본점 사이에서 처음 장의사를 시작한 게 그런 이유에서였다. 마침 그때 큰스님들이 많이 돌아가셨고 큰스님 장례를 한 번 치르면 손님이 수천 명씩 왔다. 이런 대규모 5~7일장을 10년 넘게 하면서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동국대 대학원 장례문화학과를 다니기 시작한 것도 스님들과의 인연 덕분이라고 말했다. 모든 것이 도전이었던 최규하 전 대통령의 장례 염장이로서 자신을 쌓아가던 유 대표에게 마침내 삶의 전환점이 왔다. 2005년 동국대학교 대학원의 장례문화학과를 다니며 석사 학위 논문을 쓰던 유 대표는 단체장에 관한 논문 작성에 착수했다. 대통령 관련 자료는 행정자치부에서 관리하고 있었는데 모두 기밀이었다. 결국 유 대표는 김구 선생 자료와 비밀 해제된 육영수 여사의 장례 자료를 입수하여 논문을 준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2006년 10월 22일 최규하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뉴스를 듣고 곧바로 빈소가 차려진 서울대병원을 찾아갔다. 뭔가 자신이 할 일이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석사 논문 때 인연을 맺은 직원을 만나 ‘도와줄 게 없느냐’고 물었더니 ‘마침 잘 왔다’며 최 대통령 장례는 물론 2년 전 돌아가신 영부인 홍기 여사의 이장을 도와 달라고 했다. 최 대통령과 현충원에 합장하기 위해서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현직이었을 때 육영수 여사가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육영수 여사는 큰 문제 없이 현충원에 안장될 수 있었죠. 그러나 최규하 전 대통령의 부인인 홍기 여사는 최 전 대통령보다 2년 먼저 돌아가셔서, 미리 장례를 치르다 보니 현충원이 아니라 원주에 있는 선산에 안장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최규하 전 대통령이 돌아가시면서 홍기 여사를 이장하여 현충원에 함께 합장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 겁니다.” 국장은 행자부에서 담당하는 일이었지만 매뉴얼은 없고 파편적인 자료들만 모아져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유 대표는 5일장을 진행하면서 날밤을 새면서 공부를 하고 그걸 쉼 없이 적용하며 악전고투해야 했다. 갑작스러운 일들 투성이였지만 유 대표는 결국은 해냈다. “당시 최 전 대통령의 종친회도 장례 과정에 참석했었는데, 종친회에서 제안한 명정, 그러니까 관직과 이름을 쓰는 명정 문구를 봤더니 일반 양반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최 전 대통령은 전직 대통령 아닙니까? 좀 더 격이 높아야 한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임금의 명정 문구로 교체할 수 있었죠.” 세 명의 대통령을 모시고, 장례의 최고 전문가가 되다 최 전 대통령의 장례는 유 대표에게도 큰 도움이 됐다. 복사나 촬영을 불허하는 박정희, 윤보선 전 대통령 등의 장례 자료를 눈과 손으로 확인하고 익히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40여 건에 달하는 대통령과 총리의 장례 역사를 공부하여 전체 장례에 대한 지식을 통괄할 수 있게 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에게 장례 전체 일정에 대한 관리가 맡겨졌다. 그는 그때의 지식을 바탕으로 국가장 매뉴얼을 만들었다. “수원성은 건축 기록 덕분에 지금도 지을 수 있을 정도잖아요? 저도 그렇게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이게 지금은 저밖에 없어요. 행안부가 이사를 다니면서 자료가 사라졌다는 얘길 들었거든요.” 지식에 대한 갈망이 만들어낸 이론의 구축과 정리, 그리고 그를 바탕으로 실제로 진행한 커다란 경험들까지, 유 대표가 단숨에 최고 전문가의 자리에 오르게 된 건 우연이 만들어준 다리에 최선을 다한 그 자신의 노력 덕분이었다. 그래서 최 전 대통령의 장례 이후 노무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례 또한 유 대표의 관리 아래에 진행하게 됐다. 워낙 큰 일들이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움직였었기에 정신이 없었지만 국가급 규모의 장례에 대한 경험이 이미 있었던 유 대표로서는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다. 물론 그만큼 사연도 많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노제 때, 행안부에서 노제에 쓸 만장 2000개를 준비해 달라고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우선 대나무를 구하는 게 걱정이었는데, 담양군청에 요청을 했더니 다음 날 트럭에 2000개를 실어서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만장에 쓰일 글씨는 명정을 써주신 동방대학원대학교 정상옥 총장님께 부탁 드려서 교수님들과 재학생들, 총장님 선후배들이 모여서 800장을 만들었고, 조계사 지관스님이 만장을 쓰는 모습이 방송에 나가니 전국의 서예가들이 올라 와서 하루만에 1200장을 써주셨습니다. 그런데 1500개 정도 작업을 끝냈을 때, 발인 전날 오전에 행안부에서 이유는 묻지 말고 대나무가 아니라 PVC로 만장대를 교체하라는 전달을 받았죠. 밤샘해서 겨우 발인 날 새벽에야 완성하여 시청 앞으로 가져 갈 수 있었습니다.” 노태우, 전두환 전 대통령은 국가장이 가능할까? 아직 단체장, 특히 국가장에 대해선 민감한 문제들이 남아있다. 명칭이 제각각인 건 기초적인 문제 중 하나일 뿐이다. 그에 더해 우리네 정치와 역사가 만들어낸 미묘한 사안들이 돌출될 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현재 국가장법을 보면 가족들이 요청하면 국가장을 치를 수 있고, 국가장을 치르면 현충원에 안장될 수 있어요. 그런데 노태우, 전두환 두 전 대통령은 서훈이 취소되어 현충원 안장대상자에서 제외되었어요. 그런데 이분들이 돌아가시고 가족들이 국가장을 요청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리고 국가장을 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까요?” 유 대표는 이어서 국가장이면 국가적인 공식행사인지 약식행사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사람들은 흔히 국가장이면 국가적인 공식행사라고 생각하죠? 그런데 국가적인 공식행사인지, 아니면 약식행사인지를 가르는 건 애국가 제창을 하느냐 마느냐입니다. 문제는 국가장에서 애국가가 나온 적이 없다는 거예요.” 유 대표는 또한 국가장에서 종교 색채를 유지시키는 것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전세계에서 볼 수도 있는 것이 국가장인데 식순에 4대종교 의식을 굳이 보여주는 건 시간적으로 낭비라는 것. 또한 다른 종교인이 봤을 때도 불만이 있을 수 있다는 지적이었다. 장례는 엄연한 문화, ‘제대로 하자’ “우리나라 장례 문화에서 일제 문화 좀 없애고 싶어요. 특히 장례식에서 상주가 완장을 차는 건 일본 쪽 문화예요. 3.1 운동이 고종 황제 국장 치르면서 했잖아요. 그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하얀 옷 입는 거에 거부감 있는 거야 일본인들이. 그래서 머리 자르고 까만 옷 입으라고 했어요. 그게 세련된 것처럼 보이게끔 선전도 했고. 그리고 모두가 까만 옷 입으니까 그 중에서 상주를 구분시킨다고 완장을 차게 한 거예요. 일제 때 했던 걸 왜 아직도 하고 있어요?” 유 대표는 인터뷰 말미로 가며 ‘제대로 하자’는 말을 거듭 했다. 그 말에서는 문화로서의 장례가 그 자체로 권위와 전통을 가질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 절실히 느껴졌다. 그것은 남들은 쉬이 가질 수 없는 극단적으로 드물고 특별한 경험들을 통해 유 대표가 얻게 된 고유한 꿈이자 마땅한 자격이기도 할 것이다.
- 2014-10-17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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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보자도 쉽게 다가가는 정원조성 ④] 정원 디자인시 주의해야 할 점
- 식물이 갖고 있는 색은 크게 잎의 색인 초록색과 줄기의 색인 갈색으로 구분할 수 있다. 초록색은 심리적으로 스트레스와 격한 감정을 차분하게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하고, 갈색은 감정에 대한 억압이나 두려움을 완화시켜준다. 따라서 식물이 사람에게 심리적으로 미치는 영향은 감정의 힐링이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정원을 조성하기 전 단계에 해야 하는 것을 말했었고, 지금부터는 본격적인 정원조성에 대하여 설명하겠다. #정원디자인 - 주의점과 전문가의 도움 정원부지에 대하여 충분히 조사하고 관찰하여 정리하고, 내가 원하는 정원에 대한 상상이 끝났으면 이를 바탕으로 설계를 진행하여야 한다. 물론 설계를 하지 않고 바로 정원조성을 하여도 크게 문제가 없다. 초등학교때 방학이 시작되면 스케치북에 시간표를 작성해서 어머니와 씨름하던 기억이 있다. 항상 그렇듯 시간표는 안 지켜지기 일쑤였지만, 그래도 방학의 기분을 내기에 그보다 더한 것은 없었다. 정원설계도 마찬가지이다. 설계를 안하고 조성을 하여도 무방하다. 다만 자신의 구상을 실제의 설계도로 그리면, 정원이 더 정돈되고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작업도 용이하고 사후관리도 편하기 때문이다. 정원설계가 막연하다고 생각된다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좋다. 정원설계전문가는 의뢰인이 생각하는 정원이미지를 도면에 실체화할 수 있으며, 더 낳은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 또한 시공비용을 계산하고, 시공할 때 의뢰인을 대신하여 설계대로 시공이 되는지 체크하고, 변경된 의뢰인의 요구사항을 즉시 시공에 반영할 수 있도록 대처할 수 있다. 설계비용은 디자이너의 능력과 경험에 따라 다르지만 이 계획에 대하여 노력한 시간과 일수에 따라 계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팁을 주자면 큰 조직일수록 비용이 많이 든다는 것이다. 정원설계시 유의사항은 무수히 많으나 몇 가지로 간추리면 아래와 같다. ① 식물을 심는 정원은 배수가 매우 중요하다. 물을 좋아하는 식물도 있지만 뿌리가 있는 곳이 지하수위보다 낮으면 고사할 확률이 매우 높다. 이 문제는 후에 땅고르기에서 다시 설명하겠다. ② 꽃보다 잎이 더 오래가고 아름답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나무는 잎과 꽃 뿐만 아니라 줄기도 미적인 요소일 수 있으며, 이쁜 수형을 갖고 있는 나무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③ 햇볕을 많이 필요로 하는 시설(텃밭, 잔디밭, 연못, 비닐하우스 등)은 반드시 해가 잘 드는 곳에 위치하여야 한다. (너무 당연하지만 잘 안 지켜지는 내용이기도 하다.) ④ 정원을 한번에 못 만드는 경우에는 안쪽부터 바깥쪽으로 채워가거나 아니면 눈에 보이는 곳부터 조성한다. ⑤ 부지가 작으면 단순하고 과감하게 설계하여야 한다. 너무 많은 내용을 담거나 오밀조밀한 진열은 산만하게 만든다. ⑥ 어떠한 장식물을 설치하다라도 장식물의 배경은 식물이 되어야 볼거리가 풍성해진다. 위의 사항들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점이며, 이외에도 아래와 같은 내용들이 흔히 실수하는 내용이니 유념해야 한다. ① 10년후를 생각하고 정원을 설계하여야 한다. 식물들이 생장하는 속도나 높이는 제각각이다. 그래서 훗일을 생각하지 않고 식재를 하면 화단의 모양이 어수선해지기 때문에 다 자랐을 때의 키를 짐작해서 키가 작은 것은 앞에 심고 큰 것은 뒤에 심어야 한다. 특히 나무는 성목이 되어 키가 훌쩍 크면 창문이나 거실, 잔디밭에 큰 그늘을 드리우는 경우가 있으므로 위치선정에 심사숙고하여야 한다. ② 너무 많은 종류를 심지는 않는다. 너무 많은 종류의 꽃을 심으면, 정원 전체의 리듬감과 조화로움이 깨지므로 욕심을 버리고, 포인트가 되는 곳을 선정하여 집중한다. ③ 땅의 조건을 생각하지 않고 좋아하는 꽃이나 나무를 심지 않는다. 식물마다 자기가 좋아하는 조건이 다르다. 예를 들어 소나무는 극양수(極陽樹)이기 때문에 그늘에 심으면 안되며, 메타세콰이어나 버드나무는 호습성(好濕性) 수목으로서 습지나 지하수위가 높은 곳에 심으면 좋다. 또한 주목이나 동백나무는 그늘에서도 잘 자란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허브식물인 라벤더는 건조하고 척박한 땅에서 잘 자라며, 단오의 상징인 창포나 붓꽃은 습한 곳에서 잘 자란다. 이와 같은 내용을 고려해 정원을 설계하며, 설계는 즉시 시공에 들어갈 수 있도록 되도록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그려야 시공과정에서 생기는 변수를 줄일 수 있다.
- 2014-09-04 08: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