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기가 오른 탓일 수도 있겠지만 나의 피아노 선제공격이 먹혔다. 임수정이 바로 옆에서 노래하고 내가 피아노 반주를 했다. 이슬 같은 여자 임수정과 참이슬을 마주하고 흥이 돋는 밤을 보냈다.
“무작정 당신이 좋아요~ 이대로 옆에 있어주세요~” 이 노래가 TV에서 흘러나올 때 나는 가사 그대로 무작정 임수정이 좋아 죽었었다. 이 노래가 하루에도 몇 번씩 라디오로 흘러나오던 그녀의 전성기 시절 피가 끓는 청년 이봉규는 마치 그녀가 나에게 옆에 있어 달라고 애타게 원하고 있는 줄 착각하고 입을 헤~ 벌리고 넋을 놓은 적이 많았다.
중년이 되어서도 “임수정은 어디서 뭘 하고 지낼까?” 궁금했다. 그러던 중 몇 년 전에 배철수가 진행하는 ‘콘서트 7080’에 오랜만에 나타난 그녀의 모습을 보곤 깜짝 놀랐다. “아니 어쩜 나이를 먹어도 아직도 이슬 같은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을까?” 오늘 임수정을 만나고는 입이 다물어지질 않는다.
조그만 선술집에서 만나자마자 그녀에게 대뜸 물었다. “아직도 이슬 같은 비결이 뭡니까?” 그녀는 그런 소리를 하도 많이 들어서일까? 담담한 표정으로 “‘참이슬’을 많이 먹어서 그래요”라고 받아치며 소주병을 능숙하게 흔들고 딴다. 정확한 주량은 말하지 않았지만 “남들 마실 만큼은 마신다. 어지간해서 잘 취하지 않는다”고 믿기 힘든 말을 던진다. 의아한 반전에 한량 이봉규도 움찔하고 말았다.
이렇게 시작한 술자리가 2차까지 이어지면서 한바탕 무르익어갈 무렵에서야 눈치를 챘다. 술도 약한 편은 아니지만 정신력이 강해서 절대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질 않는다는 걸. 임수정 같은 아름다운 여인이 술자리에서 흐트러지면 늑대들은 아마 제정신 차리기 힘들 것이다. 어려서부터 약간 틈만 보이면 자신에게 남자들이 달려든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기에 본능적으로 자기방어가 몸에 배어 있다. 특히 술자리에서는 더욱 철저하다. 인터뷰하는 나와의 술자리도 매니저인 그녀의 사촌 동생이 옆자리에 딱 붙어서 경호했다. 매니저가 사촌 동생인 점도 아마 철저한 자기관리의 하나일 것으로 짐작된다.
여전히 매력적인 임수정
이자카야에서 소맥 폭탄주로 한껏 흥이 오른 우리는 2차로 피아노가 있는 라운지로 자리를 옮겼다. 젊은 시절 꿈에 그리던 임수정을 바로 앞에 앉혀놓고 나는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취기 때문에 용기를 냈지만 내심 그녀에게 피아노를 치는 나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평소 TV에서 도발적인 톤으로 윽박지르는 이봉규의 거친 표정을 많이 보아왔던 임수정은 놀란 토끼 눈으로 쳐다보면서 나의 노래를 경청했다. 내친김에 그녀를 무대로 불러냈다.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른 탓일 수도 있겠지만 나의 피아노 선제공격이 먹혔다. 그녀가 바로 옆에서 노래하고 내가 피아노 반주를 했다. 네다섯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던 20여 명의 손님들은 환호했다. 나의 손놀림은 평소보다 더 들떴고 힘이 들어갔다.
가슴은 뿌듯했고 온몸의 마디마디는 ‘연인들의 이야기’ 음절에 따라 춤췄다. 노래가 끝난 후 박수가 터져 나오자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멀리 떨어진 바텐의자에서 슬며시 웃으며 박수 치는 내 아내의 모습이 들어왔다. 인터뷰하면서 나는 임수정에게 내 아내를 소개했고 아내는 인터뷰에 방해되지 않도록 저만치 바텐의자에 앉아 관람하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임수정도 무장해제하고 나와 2차까지 상당히 마실 수 있었고 또 노래까지 부른 것이다. 대중가수가 조그만 라운지에서 노래를 한다는 것은 큰 인심을 쓴 것이나 마찬가지. 나에 대한 배려이기도 하고 거기 오신 손님들에게 엄청난 서비스를 제공한 셈이다. 어쨌거나 그날 밤은 황홀한 밤이었다.
그녀는 왜 갑자기 사라진 걸까?
임수정은 여고 재학 중 미인대회에서 포토제닉상을 수상하면서 모델로 먼저 데뷔했다. 모델 활동을 하면서도 그녀는 가수와 배우를 하고 싶은 꿈이 있었다. 그러던 중 작곡가 계동균을 만나면서 그녀의 인생이 달라졌다. 계동균과 작사가 박건호 두 사람은 임수정의 외모와 음색에 딱 어울리게 남성의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노래를 만드는 데 의기투합했다.
1982년 서라벌레코드에서 발매된 앨범의 타이틀곡 ‘연인들의 이야기’ 연주곡이 그해 방영된 KBS2 드라마 ‘아내’의 OST로 삽입되었는데 발칵 뒤집혔다. 드라마에서 이 노래가 흘러나오자 방송국에 이 노래에 대한 전화와 편지 문의가 빗발쳤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남자와 두 명의 여성이 엮어가는 기구한 스토리가 시청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데 ‘연인들의 이야기’ OST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앨범은 발매 몇 달 만에 30만 장이 넘는, 당시로서는 기록적인 음반 판매 기록을 세웠다. 뒤돌아보면 미처 준비도 안 된 임수정에게 벼락스타의 자리는 쉽지 않았다. 그녀는 이와 관련해서 “한번은 탤런트 강부자 씨가 슬픈 노래인데 왜 웃으면서 노래를 하느냐고 핀잔을 줄 정도로 준비가 안 됐던 시기였다”고 회상했다.
이제 나이를 먹고 지난 시절을 되돌아보니 부끄럽기도 하지만 그런 시절을 겪고 난 후 임수정은 노래나 삶의 철학이 원숙해졌다. “최근에 강부자 씨를 만났더니 노래가 확 달라졌다고 칭찬을 해줬다”며 자신을 스스로 평가했다.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시절, 왜 갑자기 사라졌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다. 당시에는 별의별 소문이 난무했다. 배우 정윤희와 맞먹는 외모의 소유자이고 한창 인기를 누리던 임수정이 갑자기 사라졌기에 호사가들은 소설을 쓰면서 입방아에 올렸다.
그녀가 사라진 이유는 정작 따로 있었다. 당시 임수정에게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이 한꺼번에 밀어닥쳐서 젊은 나이에 감당할 수 없었다. 일종의 현실세계로부터의 도피였다. 30만 장의 앨범이 팔려나간 ‘연인들의 이야기’에 이어 1985년 ‘사슴 여인’이란 곡을 내놓았는데 그 가사가 문제가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나는 밤거리에서 사랑을 먹고 사는 사슴 여인”이라는 가사가 직업여성을 뜻한다며 방송사 심의에 걸려 노래가 전파를 탈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무렵 임수정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여기에 레코드사 이적 문제까지 복잡하게 얽힌 것이 결정타였다.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한꺼번에 몰아닥치면서 여린 성격의 임수정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모든 걸 다 던지고 1989년 미국으로 떠났다. 그녀는 자신의 음악성에 대한 비판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에 대해서도 견디기 힘들었다. “너무 비주얼만 강하고 오디오가 약하지 않느냐?”는 말을 감당하기엔 어린 나이였고 마음의 상처가 깊었다. “고생 끝에 정상의 자리에 올라간 분들은 소중하게 그 자리를 지켜내는데 어느 날 갑자기 정상에 올라가다 보니까 소중함을 잘 몰라서 공백기를 갖게 된 것 같아요”라고 그녀는 나이를 먹은 지금 뒤늦게 밝히고 있다.
제2의 전성기를 꿈꾸고 있다
사실 임수정은 뛰어난 가창력의 소유자는 아니었지만 청순한 목소리와 그녀만의 독특한 비브라토(vibrato)는 상당한 음악적 가치가 있었다.
임수정이 가창력이 없다는 비판은 일종의 어깃장이다. 음악에 정석이 어디 있을까? 어떤 목소리와 창법이 노래를 잘하는 것일까? 수치로 계량화된 것도 없고 그저 당시의 유행과 통론에 치우쳐 마음에 안 든다고 비판하는 군중심리의 일종이다.
임수정의 ‘연인들의 이야기’가 대중에게 엄청난 인기를 끌었으니 그녀의 실력을 인정해줘야 한다. 대중이 선택한 음악이고, 대중이 사랑한 가수다. 거기에다 이슬 같은 청초한 외모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임수정의 매력이다. 음악의 선진국이라는 미국과 유럽에서도 가수의 외모는 아주 중요한 자산으로 여긴다. 심지어 스포츠인과 정치인의 외모도 대중의 사랑을 받는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
임수정은 제2의 전성기를 꿈꾸고 있다.
“솔직히 말하면 추억을 무너트리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20대 때 제 모습을 기억하시는 분들에게 실망을 안겨드릴까봐 많이 망설였지만, 팬들이 ‘감성가수’ 하면 ‘임수정’ 하고 바로 인정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제 꿈이에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다시 노래를 제대로 해보자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힘이 넘쳤고 예쁜 얼굴은 더 상기되었다.
100세 시대다. 팬들도 나이를 먹고 가수도 함께 나이를 먹는다. 70세에 아직도 전 세계 무대에서 매력을 발산하는 ‘올리비아 뉴튼 존’보다 임수정은 열다섯 살이나 어리다. 그녀의 전성기는 이제부터다.
은퇴한 시니어의 가장 큰 자산은 시간이다. 시간 부자다. 그러나 주어진 시간이 많아도 일상이 무료하다면 고통의 순간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장수도 축복이 아니고 재앙으로 다가온다.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다면 여가를 즐기는 삶으로 바꿔야 한다. 그 방법의 하나로 취미활동을 들 수 있다. 취미가 필요하다는 것은 알지만 실천으로 옮기는 것은 쉽지 않다. 필자는 손쉽게 취미를 계발하는 방법으로 ‘덧칠하기(Micro Adventure)’를 권하고 싶다. ‘덧칠하기’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일상의 습관이나 관심 가진 분야를 발전시키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등산이 취미였던 분이 산삼을 연구해 산을 즐기면서 산삼을 캐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필자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에 수채화를 그렸다. 그 경험을 살려 60세에 사진을 배움으로써 평생 취미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진과 관련한 영역을 확대해 하루를 25시로 산다. 과거의 경험에 덧칠을 했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일을 즐겁게 하면서 용돈도 벌고 사회공헌도 하는, ‘도랑 치고 가재 잡는’ 삶을 즐긴다.
사진은 취미라기보다 일상생활로 바뀌어가고 있어 직업으로 연결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어떤 취미보다 돈이 적게 들면서 새로운 직업으로 만들어갈 수 있다. 특히 돈이 드는 취미에서 돈이 되는 취미를 계발할 필요가 있는 시니어에 꼭 맞는다. 물론 경우에 따라 돈이 많이 들기도 한다. 장비 구매와 사진 촬영지 여행 비용 때문이다. 그러나 늘 휴대하는 스마트폰으로도 충분히 찍을 수 있고 일상에서 사진 소재를 찾을 수도 있어 비용을 적게 들이고도 훌륭한 취미활동을 할 수 있다.
필자는 저렴한 카메라(일반인이 손쉽게 살 수 있는 보급기로 렌즈 포함 50만원 주고 산 중고품을 지금도 쓴다)를 사용하고 요즘엔 스마트폰을 주로 이용한다. 전시회용 작품을 만들거나 취미활동용으로 부족함이 없다. 사진 재능기부와 사진 기술을 전수하는 사회공헌 활동에도 전혀 지장이 없다. 장애인 시설이나 양로원 등에서 사진 촬영 봉사를 하고 실버대학 등에서 어르신들에게 사진 지도를 하며 보람을 느낀다. 사진 촬영이 필요한 곳이면 발걸음을 아끼지 않는다. 혹자는 필자에게 “돈도 안 되는 일 그렇게 힘들여 봉사하느냐?”고 하지만 재능을 쓸 수 있음에 감사한다.
취미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목표를 설정해 공인 사진작가가 된 필자는 이제 사진으로 돈을 버는 직업인이 됐다. 또한 취미활동이 바탕이 되어 KBS1
을 비롯한 여러 방송 프로그램과 SBS 라디오에 출연하며 방송인이 되었다. 동년기자 선임과 명예기자도 사진이 근간이었고 글을 쓰면서 원고료도 받는다.
, , 등 사진과 관련한 책 세 권도 출간했다. 또한 사진 취미생활을 통한 여가생활의 본보기가 되면서 여가설계 강사로도 활발하게 활동하며 강사료를 받는다. 취미에 머무르기만 하면 성장이 없다. 어떠한 취미를 선택하더라도 새로운 목표를 설정해 도전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필자도 처음에는 단순한 취미로 시작했다. 당시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더 좋은 사진을 글에 곁들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고양시 일산동구청에서 무료로 운영되는 사진교실에 참가하게 됐다. 60세의 늦깎이였고 카메라 장비는 소형 카메라 하나였다. 촬영 경험도 많지 않았다. 고급 카메라를 들고 나타나는 동호인들을 볼 때 주눅이 들기도 했으나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형편에 맞는 카메라로 열심히 그리고 꾸준히 촬영을 멈추지 않았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 했듯 공인 사진작가가 되어보자는 욕심이 생겨 사진을 배운 지 3개월 후부터 공모전에 출품하기 시작했다. 잘될 리가 없었다. 28번의 도전 중 절반을 낙선하고 15번 수상해 사진작가 인증을 받았다. 그 후에도 꾸준한 노력을 기울인 결과, 사진을 배운 지 3년이 되던 2013년에 대한민국사진대전(국전)에 입선하고 부산일보 전국사진대전에서도 우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사진작가가 되는 길은 많다. (사)한국사진작가협회가 인정하는 공모전 출품으로 얻어지는 점수가 일정 점수 이상이 되면 정회원으로 가입할 수 있고 사진작가 명함도 만들 수 있다. 사진 전문가가 되면 다양한 직업으로 연결될 수 있다. 전시회를 열어 작품 판매도 할 수 있다. 향후 작품에 대한 가치도 높일 수 있다. 사진 갤러리를 중심으로 하거나 프로필 사진과 가족사진을 촬영해주는 카페 운영, 사진관 운영, 사진 여행단 운영을 할 수 있다. 수요가 많은 사진 강사로 데뷔할 수도 있다.
전문가는 자기 기술을 다른 사람에게 전수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춘 사람이다. 필자는 사진작가 인증에 그치지 않고 계속 공부하고 활동 영역을 넓혀왔다. 사진을 배운 지 벌써 8년째에 접어들었고 찍은 사진도 50만 장에 이른다. 사진을 찍다가 파파라치로 몰려 곤욕을 치르기도 했고 강화도 군부대 옆에서 석양을 촬영하다 주민의 신고로 경찰서에 끌려가 조사를 받기도 했다.
선택한 취미생활을 오래 할 수 있고 제2의 직업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재미있는 분야를 선택해야 한다. 남이 권유하는 취미나 유행하는 취미를 선택하면 중도에 그만두는 경우가 많다. 새로운 분야에 집착하기보다는 평소 관심을 가져왔던 취미가 좋다.
어린 시절에 즐겨 했으나 생업으로 미뤄뒀던 취미를 끄집어내 덧칠하면 평생 취미로 만들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영국의 모험가 제임스 후퍼가 제안한 ‘덧칠하기’다.
필자는 은퇴 후에 수채화를 그리고 싶은 꿈이 있었다. 그 꿈을 덧칠해 사진으로 바꾼 셈이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 3년 정도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에 몰입하다 보면 새로운 길이 열리기도 한다. 필자는 현재에 머무르지 않고 사진 기술과 취미생활 계발을 선도할 ‘청학빛그림학교’를 꿈꾸고 있다.
제목만 말해도 그 시대의 풍경이 떠오르는 노래들이 있다. ‘사랑은 창밖의 빗물 같아요’, ‘이별의 끝은 어디인가요’, ‘당신은 어디 있나요’ 등등 발표될 때마다 가요 차트를 점령하며 시대의 유행가로 자리매김한 그 노래들. 특유의 여린 목소리로 그 시절의 애절한 감성을 노래했던 양수경(52)이 무려 27년 만에 단독 콘서트를 열었다. 긴 세월을 넘어 그대로 도착한 듯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그녀는 여전히 꿈을 꾸는 소녀와 삶의 부침을 겪고 거듭난 생활인으로서의 모습을 함께 갖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철두철미한 가수였다. 그녀가 인생 2막을 열면서 발견한 아름다움은 무엇일까. 궁금했다.
가수 양수경의 귀환은 요즘 한창 일어나고 있는 ‘8090’ 가수들의 복귀 붐 속에서도 특별한 느낌을 준다. 작년부터 여러 음악 방송 프로그램에서 무대를 가진 후, 자신의 이름을 걸고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지는 단독 콘서트를 27년 만에 연 것이다. 절대로 쉽지 않은 일이었음이 짐작된다.
후회 없이 할 수 있는 일, 답은 노래였다
“준비하면서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몇 번이나 들었어요. 추억 속에 있는 게 낫지 않을까. 그렇지만 아이들 엄마이기에 나만 생각할 수는 없었어요. 사업을 할까도 생각했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았어요. ‘내가 잘하는 일이 뭘까’, ‘눈감는 날까지 후회 없이 할 수 있는 일이 뭘까’를 무지 많이 고민했죠. 답은 노래였어요.”
양수경은 공연을 앞두고 2014년 일기를 봤다. 공연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써놓은 자신의 글이었다. 그 막연했던 희망이 3년 정도 지나 이제야 이뤄진 셈이다. 그러나 막상 그런 무대가 찾아오니 갈등과 두려움이 올라왔다.
‘이번만 하고 다시는 못하는 것 아닌가, 무대에 섰는데 노래가 잘못 나오지 않을까, 차라리 안 보여주면 망신이라도 안 당할 텐데….’
공연 끝나고 다음 날 아침까지 잠 못 자
“요즘 공연 시장도 안 좋지, 음반업계도 안 좋지. 내 나이에 뭔가 시작한다는 것도 두려웠고. 공연 날 표가 백몇 석이 비었다는 얘기를 듣고 무대를 올라갔어요. 그런데 막상 올라가 보니, 객석이 꽉 차 있었어요. 나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주저앉을 뻔했어요. 그리고 노래를 하고 사람들과 대화를 했는데… 모르겠어. 시작했는데 끝나 있었어요.”
성공이었다. 공연 직전까지 떠올렸던 모든 어둠과 고통을 날려버릴 정도의 성공. 공연 전날 불안감에 잠을 못 잤던 양수경은 공연이 끝나고 정반대의 이유로 그다음 날 아침 여덟 시까지 잠을 못 잤다. 공연을 본 사람들에게서 들은 “다시 또 오고 싶어요”라는 말이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사람들이 울고 웃는 게 상상을 초월했죠. 우리 밴드는 최고의 세션이에요. 최고의 가수들과 해외 공연을 다 해본 사람들이라서 무대에서 설렐 사람들이 아니에요. 그런데 그 친구들이 나처럼 잠이 안 온다면서 전화를 했어요. ‘누나, 이상해. 아직도 안 가셔. 모르겠어. 어떤 힘인지 모르겠는데 아직은 설레’라고.”
세상의 무수한 따스함과 마주하다
양수경은 이번 공연을 기획하고 추진하면서 자신을 도와주는 따뜻한 사람들을 무수히 만났다. 그 만남들은 그녀로 하여금 지난 시간을 후회하게 만드는 계기도 됐다.
“옛날에는 제가 말을 잘 안 했어요. 그게 너무 후회스러웠어요. 좀 어렸을 때 주위 사람들에게 따뜻하게 말하고 사귀면 그게 추억으로 남는 건데 그걸 못한 거죠. 어렸을 때는 너무 가난해서 똑바로 살아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기 때문에 나 자신을 너무 포장했어요. 지금은 내가 풀어놓으니까, 많은 걸 내려놓고 나니까 세상이 따뜻해요. 전보다 가진 것도 없고, 모든 걸 다 잃은 줄 알았는데 여기 이렇게 따뜻한 분들이 계셨어요.”
그녀가 세상의 따뜻함을 깨닫게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 과정은 슬픔과 인고의 세월이기도 했다.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어 인간 양수경은 내비게이션 아니면 어디에도 갈수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자꾸 ‘수호천사’들이 나타나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들이. 뜻밖에 누군가가 나타나 나에게 손을 내밀어줄 거라곤 생각 못해봤어요. 단절된 삶, 이슬에 젖어 산 세월이 참 길었지. 해 뜨는 것도 싫고 해 지는 것도 싫었던 때가. 너무나 많은 배신이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그녀는 사람을 볼 때 눈을 본다고 말했다. 눈은 숨길 수 없다는 게 그녀의 지론이었다. 그리고 그 기준은 자신에게도 해당되었다. 그녀는 힘든 시간에 ‘제 마음에 분한 게 없게 해주세요, 내 눈에 사악한 게 없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그 소원 덕분일까, 그녀의 눈은 30여 년 전처럼 여전히 해맑았다.
“아직도 아픈데, 그 아픔이 사람들에게 전해지지 않으면 좋겠어요. 사람들이 날 보고 울고 웃고 용기를 얻으면 좋겠어요.”
내년 데뷔 30주년 공연도 하고 싶지만…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서 고통을 보지 않고 힘을 얻으면 좋겠다는 말은 철저한 대중가수로서의 양수경을 설명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제2의 인생 또한 첫 번째 인생처럼 가수로서 다시 문을 연 셈이다. 컴백 공연 전에는 조관우의 ‘늪’, 김범수의 ‘약속’을 만든 베테랑 작곡가 하광훈과 손잡고 신곡 ‘애련’을 발표했다. 그것은 과거에만 함몰되지 않는 ‘현역’ 가수로서의 양수경을 증명해주는 의지처럼 보였다.
“지금 리메이크 앨범을 준비하고 있어요. 그런데 참 돈이 많이 들어가더라(웃음). 과거에는 음반을 내면 많은 수입이 들어왔어요. 그런데 지금은 음반이 안 나가요. 그래도 우리 또래 사람들은 CD를 가끔씩 사는데 젊은 사람들은 전혀 그렇지 않죠. 우리의 낭만은 산업에 묻혔어요. 음반이나 예술 하시는 분들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거잖아요. 하지만 시대를 따라가다 보니까 앨범 한 장을 만들면서 생기는 추억이나 낭만이란 게 묻혀서 없어졌어요. 그래도 난 앨범을 만들 거예요.”
그러고 보니 그동안 양수경이 소화한 장르는 굉장히 넓다. 트로트, 발라드, 댄스, 탱고 등등. 자연스럽게 그녀가 어떤 가수가 되길 원하는지 궁금해졌다.
“저는 대중가수예요. 그럼 대중이 좋아할 쉽고 편한 노래를 부르면 되죠. 노래는 안 되면 언제든지 그만둬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내가 노력이라는 걸 잊지 않는 가수면 좋겠고 확실한 내 색깔을 만들어보고 싶어요. 전 분명 이선희, 현미 언니와도 다르니까요.”
비굴하게 살지 말자는 다짐
인터뷰를 하면서 양수경은 그 소녀 같은 이미지와는 달리 직업적으로 완고하고 고집이 센, 흡사 장인에 가까운 의식이 있다는 걸 체감할 수 있었다. 그것이 그녀가 타고난 성정일 것이다. 그리고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굴곡진 삶을 이겨내고 최고의 자리에 설 수 있게 만들었던 힘일지도 모른다.
“가수를 딴따라라고 부르는 게 싫었어요. 그런 시선들이 좋지 않았고, 나라도 똑바로 살아야겠다 싶었죠. 연예인은 우리가 모르는 많은 사람들이 계속 쳐다보는 직업이에요. 그럼 많은 걸 포기해야 해요. 외로운 것도 받아들여야 하고요.”
어렸을 때부터 연예계에 몸을 담아야 했기에 체득해야 했던 그 완고함을 도와줬던 것은 책이었다.
“어렸을 때는 책을 많이 읽었죠. 맨 연애소설만 읽었지(웃음). 특히 시드니 셀던 소설을 즐겨 읽었는데, 사람들은 그 소설에서 연애를 읽지만 잘 읽어보면 가난한 여자가 상류사회로 진출하면서 변화되는 모습이 나와요. 전 그 여자의 성공 과정에 대한 내용을 계속 읽었어요. 그래서 저는 사람들이 인문학 서적만 찾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요. 저는 시드니 셀던 소설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했고,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도 발견했고, 과학, 경제, 예술에 대한 이야기들도 읽었어요.”
소설에서 인생을 배웠다는 신선한 관점. 그렇다면 그녀가 삶을 살면서 이것만은 지켜야 한다고 마음먹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비굴하게는 살지 말자. 누군가 내 눈동자를 봤을 때 무엇을 감추려 하거나 비굴하게 보이지는 말자고 생각하고 있어요.”
우리 나이 아름다움은 눈빛에서 나오는 것
양수경은 화가 날 때면 하늘을 보며 웃는다고 말했다. ‘예쁘게 살기도 힘든데’라는 말이 그녀의 반문이었다. 예쁘게 살고 싶다는 희망은 그녀의 중요한 화두 중 하나였다. 그녀는 여자로서 당당하게 사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고 예쁘게 사는 것 또한 당당한 여성으로서의 삶의 일부였다.
“우리 나이의 아름다움은 눈빛에서 나와요. 그러니 잘 때도 웃으면서 자야 해요. 그건 돈으로도 할 수 없고 시술로도 안 되는 부분이죠.”
그녀는 여성의 삶에서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딱 잘라 대답했다.
“아, 그건 없어. 내가 신데렐라가 돼야 해요. 기다리는 게 아니라 자신이 그만큼 되어야 하는 거예요. 연애? 예전에는 연예인이라서 다 막았지만 지금은 세상이 달라졌어요. 하지만 지금 그런 거 생각할 여유가 없어요. 그리고 내가 타인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아요. 내 스스로 일어나고 싶은 거죠.”
그녀가 여유가 없다고 말한 이유, 바로 내년이 데뷔 30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다른 생각들보다 다음 공연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하는 게 더 급해 보였다.
“이번 콘서트가 끝나고 다른 가수들의 공연을 본 뒤에 ‘난 아직 좋아할 때가 아니다. 다음 공연을 어떻게 할지 그걸 짜야 한다’ 했어요. 3년 전에 생각한 걸 이제야 한 거잖아요. 그래서 공연 다음 날 바로 다음 공연 기획을 짰어요. 물론 아무리 계획을 세워봤자 우리 뜻대로 되는 건 없죠. 꿈과 희망을 가질 수는 있는데 원하는 대로 다 이루어지진 않아요. 그래서 자연의 순리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을 해요.”
“세상이 예뻤으면 좋겠어요”
최근에 양수경은 예능 프로그램인 에 출연했다. 방송은 그녀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대답은 지극히 ‘가수 양수경’다웠다.
“방송? 불러줘야 나가죠. 그런데 방송 욕심보다는 공연 욕심이 더 커요. 그렇다고 방송국에서 절 안 부르는 건 아니에요(웃음). 부르긴 불러요. 하지만 난 대중가수예요. 대중들을 위해 쇼를 하는 가수이고 싶어요.”
가수로서의 삶 외에도 양수경에게는 또 다른 삶에 대한 꿈이 있다.
“혼자 사는 여자들, 싱글맘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요. 여유가 생긴다면 그런 삶을 살고 싶은 거죠.”
양수경 본인은 몰랐을지라도, 그녀를 그리워하는 팬들은 항상 있었다. 그들에게는 남편과 사별하고 세 아이의 엄마로서 그녀가 다시 돌아온 것이 고마운 선물 같았을 것이다. 힘겹게 먼 길을 돌아 자신의 자리로 다시 도착한 그녀는 그 시절 그때처럼 여전히 꿈꾸는 소녀 같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꿈을 꾸면서 살고 싶었어요. 지금도 꿈을 꿔요. 밝고 맑은 세상에서 그렇게 예쁘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누군가를 돕는 것은 스스로를 돕는 것이다’. 취약계층, 사회적 패자들의 자활을 돕고 함께 더불어 사는 사회를 디자인하는 이종수(63) 한국사회투자재단 이사장 겸 임팩트금융 추진위원회 단장, 남들이 ‘문제없다’를 외칠 때 그는 ‘문제 있다’를 외치며 우리 사회의 궁벽한 문제를 드러내고 찾아낸다. 그리고 해결을 도모한다. 철거민촌 소년이 글로벌 금융인을 거쳐 사회운동가가 되기까지의 진솔한 패자부활전 이야기를 들어봤다.
별명이 소셜 디자이너입니다. 왜 그런 별명이 붙었나요.
“패자부활전을 도와주는 사람이라고 할까요? 우리 사회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는 격차와 갈등을 해소하고 지속가능한 사회를 디자인한다고 해서 언론이 붙여준 별명입니다. 빈곤의 사전 예방, 차단을 위해서는 단순히 퍼주기 식의 복지 지원이 아니라 한 사회 생태계 구성이란 전향적-종합적 사고가 필요합니다. 고기를 주기보다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젠 고기 잡는 도구를 빌려주는 것까지 함께 필요합니다. 그리고 어장을 만들고 고기를 잘 잡을 수 있는 환경 조성까지 해야 합니다. 취약 계층 자활도 단순한 지원을 넘어 융자의 시대를 지나 이젠 사회투자의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런 시스템을 디자인하는 게 제 일입니다. 빈곤도 커다란 흐름 속에서 이해해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착한 금융 2.0은 복지 측면에서 개인 대상 직접 자금 지원이었다. 3.0은 사업 지원, 사업 아이디어 사전 자문과 사후 사업 멘토링까지 종합관리 시스템으로 패키지 지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4.0은 투자 생태계 마련, 즉 사회투자 방식으로 사회적 가치를 만들어내는 사회적 기업과 프로젝트를 발굴해 투자하고 이들이 성공할 수 있도록 지원 생태계를 조성하는 것이다. 개인도 종합검진을 미리 하면 중병을 사전에 예방할 수 있다. 이처럼 사회 빈곤, 취약 계층 발생도 사후 대책을 넘어 문제 요인을 사전에 진단, 예방하는 사회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 취지다. 이 이사장은 사회투자금융 활동의 선구자로서 늘 앞장서 각 단계마다 진화를 주도해왔다.
사회투자라는 용어가 아직은 낯선데요. 사회와 투자라는 용어가 얼핏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만.
“사회 문제가 점점 많아지고 있지 않습니까?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막대한 예산을 투입합니다. 그러나 그 예산에 한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현대사회의 문제는 너무 복잡해 주는 복지 방식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많습니다. 많은 사회 문제가 경제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해결 방식도 전통적인 복지에 금융경영 등과 같이 시장적인 방법을 융합해 해결해야 합니다. 사회투자는 재원의 선순환을 이루면서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입니다. 주는 복지를 넘어 구조와 예방의 사회 인프라를 깔아야 합니다. 말하자면 사회간접자본과 같습니다. 다리, 항만 부두 등을 건설하는 데는 당장 비용이 발생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사회적 비용을 줄이고 사회 발전의 근간을 마련하지 않습니까? 사회 문제를 해결하고 취약 계층을 지원하는 대책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의 패자부활을 지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장기적이고 예방적인 차원에서 지속가능하게 문제를 풀어가는 사업에도 투자하는 등 다층적 접근을 해야 합니다.”
사회금융기관은 일반 은행과 어떤 점이 다른가요?
“일반 은행이 돈을 빌려줄 때 수익과 담보를 본다면 사회투자를 지원하는 사회 금융기관들은 그 기업과 프로젝트가 어떤 사회적 가치를 만들어내는가, 그리고 그것을 추진하는 사람과 기업의 철학을 본다는 점에서 다릅니다. 재무적 수치나 성과만이 아니라 사회적 가치, 즉 장애인, 노숙자, 저출산, 고령화, 청년 일자리, 주거 문제, 환경 문제, 자살률 등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하는가를 우선적으로 판단해 투융자를 결정합니다. 돈의 회수 가능성을 본다는 점은 같지요. 공익적 개념이더라도 지속가능하게 사업을 진행하려면 재원의 선순환이 필수이니까요.”
은퇴자들과 매칭 포인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설립한 사회연대은행에서는 시니어브리지라는 프로그램을 수년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은퇴하였거나 은퇴를 앞둔 시니어들이 제2의 인생을 살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교육하고 논의하는 프로그램입니다. 벌써 400명 이상의 시니어들이 교육을 받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전문성을 갖고 사회적 기업에 컨설팅을 하는 등 다양한 경로로 봉사가 가능합니다. 일정 교육을 받고 커뮤니티를 구성,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살다 보면 인생에는 두 가지 가치가 있지 않습니까? 돈을 벌어 재무적 성과를 내는 재무적 가치, 사회적 의미를 두고 봉사하는 사회적 가치. 이 중 나이가 들면서 사회적 가치에 점점 더 무게중심을 두게 되더군요.”
당면한 사회 문제 중 심각한 게 양극화인데요. 많은 사람들이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시대는 끝났다고들 말합니다.
“부모의 가난이 새로운 연좌제가 되고 있는 것이죠. 요즘은 개천의 용을 보기가 힘듭니다. 개천에선 욕만 나오는 세태이지요. 싹수 있는 지렁이들의 신분상승 희망조차 개천 바닥 아래로 봉인돼버린 것입니다. 어느 나라이든 명문대 인재들이 고위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존재해요. 영국의 이튼스쿨 출신, 미국의 아이비리그 출신 등. 우리 사회의 문제는 갈등과 적대감이지요. 리더들이 갈등을 부채질하고 있는 게 문제입니다. 경쟁을 부추기는 교육제도 개선 등 따뜻한 개천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 이사장은 “실업, 저출산, 주거난, 장애인 문제 등이 곪아 터지면 결국 빈곤의 문제로 수렴된다. 이들이 벼랑에서 떨어져 사회적 비용이 더 크게 발생하기 전에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방법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 알랭 드 보통은 이라는 책에서 “가난이 자존심에 미치는 영향은 공동체가 가난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방식에 결정적으로 좌우된다”며 “경제적 능력주의 사고는 가난한 사람을 불운한 게 아니라 실패자로 묘사한다”고 지적한다. 이런 체제에선 “가난이라는 고통에 수치라는 모욕까지 더해지고, 자선-복지-재분배-동정의 필요성은 갈수록 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과연 빈곤을 그들만의 인과응보에 의한 책임으로 볼 것인가.
한 부모가 아이를 서울역으로 데려가 노숙자를 가리키며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는 산교육(?)을 했다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영화의 한 장면으로 다뤄진 적도 있지요.
“가난의 책임을 개인에게 물을 수만은 없습니다. 현대사회는 복잡해서 여러 가지 사회적인 상황이 개인을 빈곤으로 몰아넣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죠. 국민총생산이 성장하는 것만으로는 그 사회가 발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경제 규모가 커지고 국민총생산이 늘어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소외되고 낙오되는 사람들을 보듬고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성장입니다. 이를 위해선 공동체 정신, 커뮤니티 정신이 기본적으로 중요합니다. 피도 눈물도 없이 온통 효율만 강조하는 신자유주의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인간의 얼굴을 한 따뜻한 자본주의가 실현돼야 합니다.”
개인 이야기를 해볼까요. 이사장님도 흙수저 출신의 개천룡이십니다. 어떻게 글로벌 금융인이 되셨는지요?
“사당동 달동네의 철거민촌에서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대학교(서강대 경영학과)에 들어갔어요. 민주화운동을 하다 민청학련사건으로 옥살이를 하게 됐습니다. 이게 빨간 줄이 돼 국내 일반 직장에 취업이 안 되는 겁니다. 신원조회를 하지 않는 외국계 기업 직장을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침 친구가 권해줘서 우연히 응시한 미국 은행 체이스맨해튼은행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참, 인생이란 알 수 없더군요.”
민청학련 경력(?)이 인생의 장애물이자, 도약대, 두 가지 역할을 했군요.
“20대 때 세상의 불공평, 부조리에 대한 분노가 질풍노도 같았어요. 독재 정권에 대한 불만이기도 하고, 제 가난에 대한 불만이기도 하고, 화가 꾹꾹 쌓여 폭발 직전이었지요. 처음엔 독방에 수감됐는데 매일 고함을 치고 벽을 쳤어요. 3개월 후 잡범들과 합방을 하면서 비로소 제 마음속 억눌린 화가 풀리더군요. 그들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보니, 내가 가난이라고 불만을 가졌던 게 사치였던 겁니다. 비교도 안 되게 별별 힘든 사연이 다 있더군요. 그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살자’는 생각을 했지요. 책으로 배운 이론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통해서…. 그 결심으로 대학생활 내내 구로동 공단에서 야학을 열심히 했어요.”
그 후에도 초심을 잘 유지하셨나요. 젊은 시절의 결심은 계속 유지하기가 쉽지 않은 법인데요.
“하하. 웬걸요. 몇 번의 초심 재생 프로젝트가 있었습니다. 레드카펫 깔린 외국 직장에서 고연봉의 좋은 대우 받고, 집에서 일하는 사람이 7명이나 딸린 해외생활을 하면서 ‘그때 그 마음’이 바래버렸어요. 꿈은 이루는 것보다 지키는 게 더 힘들어요. 내 삶은 우연찮게 사건이 ‘사연’을 상기하게 만들어요. ‘내가 이렇게 사는 게 맞나’ 돌아보게 되었지요. 1996년 캄보디아에서 은행을 설립할 때인데요. 가난을 한탄할 틈마저 주지 않는 매정한 세상에 지친 서민들의 우울한 눈동자를 봤어요. 까맣게 잊고 있던, 감옥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얼굴과 예전 결심이 떠오른 겁니다. 내 삶을 돌아보게 됐고 사표를 냈지요. 세상에서 가장 긴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이라고 하지만, 가슴에서 발까지의 결심이 더 힘들더군요. 이후 캄보디아 농촌 빈민을 위한 자활 프로젝트, 인도네시아 농촌 빈민 직업 훈련 프로젝트 등 ‘가슴이 시키는 일’에 연달아 뛰어들었습니다.”
그러나 캄보디아 내전 등 내부 문제 때문에 아쉽게도 끝까지 추진하지 못하고 접어야 했다. 비록 성공하진 못했지만 그에겐 소중한 경험으로 남아 있다. 이때 마이크로크레딧 사업에 영감을 받아 귀국해 사회연대은행을 설립하게 된다. 당시 국내에선 개념조차 없는 때라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한국형 사회연대은행을 기초부터 공부해가며 시작해 실행까지 도맡아서 했다.
세계 최대 보험중개사인 에이온코리아 사장으로 계시다 비정부 시민사회 단체인 사회연대은행 대표로 옮기셨습니다. 개인적으로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요.
“10년간 양다리 기간이 있었습니다. 두 곳이 인근 건물이어서 상호 양해 하에 두 곳의 장(長) 역할을 왔다 갔다 병행했지요. 그러다 사회연대은행 운영이 어려워져 직원 급여도 못 주는 상황에 직면했어요. 3개월 월급 못 줄 땐 가시방석이었어요. 웬만한 직장에서 그랬다면 야단이 났을 텐데, 마이너스통장 쓰면서도 견디는 모습을 보며, 나 혼자 편하게 지내도 되나 갈등이 생기고, 인간적으로 모순 상황을 못 견디겠더라고요. 고민 끝에 에이온에 사표를 냈고 마음이 가는 바를 좇고 나니 편해지더군요. 온전한 헌신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진정한 이익과 불이익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니 결정이 오히려 쉬웠습니다. 버는 거야 옛날과 비교할 수 없게 줄었지만요. 막상 살아보니 상상했던 것보다는 불편하지 않아요. 밥값 내던 시절은 잊고 빈대가 되고, 기사 딸린 승용차를 타는 대신 대중교통 이용하고…. 많이 벌면 많이 쓰고, 조금 벌면 조금 쓰게 되는 게 사람 사는 이치더군요(웃음).”
사표를 쓴 당일에 스페인 산티아고로 직행, 혼자 도보순례를 하셨다면서요.
“모양만 좋은 ‘데코레이션 나’가 아닌 진짜 ‘내 안의 나’를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만나기 힘든 게 나라고 하지 않습니까. 사람이 살면서 꼭 만나야 하는 사람이 나이기도 하고요. 자신만이 답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모습, 사람들 눈에 보이는 나는 내 참모습과 일치하는가. 나 자신과 대화를 나누어보는 시간이었어요.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나에게 지지 말자고 결심했지요.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지?’ 하는 매일의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말씀을 들으니 이사장님의 삶 자체가 끊임없는 패자부활전, 초심 회복전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하, 그런가요. 격렬한 희망과 내려놓기, 그것이 제 나름의 인생 지혜입니다. 격렬한 희망이란 문제를 문제로 보지 않고 긍정적 기회로 볼 수 있는 것, 그것이 나를 일으켜 세웁니다. 하나하나 보면 실패였지만 돌아보니 그게 저수지가 됐어요. 감옥에 들어간 일이나, 젊은 시절의 방황이나 해외 돌아다니면서 은행을 설립한 일이나…. 또 하나는 내려놓기입니다. 돈뿐 아니라 일에 대한 욕심도요.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마음을 내려놓으니 오히려 새로운 기회가 따라오더군요.”
이 이사장은 인터뷰 중 일어나더니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을 펼쳐 한 대목을 나지막한 목소리로 읽어주었다.
내려놓는다는 것은 또 다른 시작을 위한 출발이다. 과거를 지움으로써 현재를, 지금을 버림으로써 미래를 들일 공간을 마련하는 일이다.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내려놓지 않으면 다른 것을 쥘 수 없는 것처럼 비우지 않으면 채울 수 없다. 내려놓음은 익숙함에 찍는 단정한 마침표다. 나를 타성, 관성, 습성에 젖게 했던 세상의 기준과도 이별이다.
그는 자신이 지은 집에서 80대 노부모를 모시고 산다. 소셜 디자이너란 별칭처럼 ‘남이 디자인해준 집’에서 사는 것은 재미없기 때문이란다. 아버님(86)은 시력을 상실하시고, 어머님(85)은 치매이시지만 그는 이 역시도 문제로 보지 않는다. ‘노인의 문제는 곧 자신의 문제이기도 하다. 노인 병환, 공양 문제를 사회적으로 어떻게 풀 것인가, 노인들이 어떻게 존엄한 삶을 살게 할 것인가, 양질의 서비스를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기회로 받아들인단다. 타고난 소셜 디자이너 이종수 이사장의 다음 행보가 궁금하다.
‘행복’이라는 타이틀을 넣어 만든 명함이 많다. 이런 분들은 은퇴 후 제2의 인생을 살면서 남들에게 작은 봉사활동을 하는 분들로 대부분 뾰족한 직업이 없는 사람들이다. ‘행복 전도사’, ‘행복 바이러스’, ‘행복 코치’, ‘행복 아카데미’, ‘당신의 행복을 지켜드립니다’ 대략 이런 종류다. 방문 요양보호원을 운영하는 분인데 이분의 상호는 ‘00 행복 나눔 요양원’이다. 필자가 한마디 했다. ‘기왕이면 통 크게 행복 몽땅 드림 이라고 하지 쩨쩨하게 행복 나눔이라고 합니까?’ 하며 웃은 적이 있다.
누구든지 행복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런데 정말 나는 행복한 사람인가, 명함에 행복을 드린다는 분들은 행복이 남아도는 진짜로 행복한 분일까? 자신 있게 ‘예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라고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모두가 평생을 행복이란 단어에 매달리며 행복을 추구하면서도 왜 행복해지지 못할까?
행복이란 사전적 의미로는 ‘삶에서 기쁨과 만족감을 느껴 흐뭇하다.’라고 한다. 즉 주관적이다. 아무리 비단옷에 고기반찬을 먹고 남들이 우러러 보면서 저분은 참 행복할 것이다. 라고 해도 막상 당사자가 ‘너희들은 모른다, 지금 내속이 얼마나 타 들어가는지.’ 하면서 스스로 불행한 사람이라고 단정하는 사람이 많다.
우리는 많이 가지면 행복에 한발 더 가까이 다가서는 걸로 생각한다. 남들보다 돈이 많고 잘생겼으면 행복할 것이다. 남들보다 건강하고 자식들도 다 잘되어 걱정근심이 없으면 행복할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어 돈이 많아도 더 벌고 싶고 자식이 공부를 잘해도 더 잘하는 아이와 비교를 하면서 만족을 못한다. 몇 백억의 돈이 있으면서도 부정한 방법으로 검은 돈을 받아먹다 들켜 쇠고랑차고 재벌들도 형제간 더 가지려고 소송싸움 하는 걸보면 할 말이 없어진다.
아침에 일어나면 아내에게 아침인사로 ‘잘 잤어?’하고 먼저 물어본다. 쉽고 간단한 질문이다. 아내의 대답은 한결같다. ‘응 잘 잤어.’ 설령 몸이 찌뿌듯해도 ‘아니 잠 잘 못 잤어.’ 하지 않는다. 인사치례이고 잘 잤다고 말하는 것이 서로가 편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사를 할 때 ‘안녕하세요?’하면 ‘예 고맙습니다.’라고 대답하지 ‘아니요. 안녕하지 못해요.’하지 않는다. 긍정적인 질문을 먼저 해야 긍정적인 답을 돌려받는다.
‘자발적 가난’ 이라는 말이 있다. 스스로 가난을 택하는 것이다. 테레사 수녀님이나 성철스님 같은 분들의 삶이다. 이분들은 스스로 가난의 길로 들어서며 남들로부터 추앙을 받고 본인은 행복한 삶을 마쳤다. 나이 들어가면서 욕심을 줄이기로 했다. 이 정도면 잘 사는 것이고 우리아이들도 이만하면 부모한테 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만족스러워지고 행복해진다.
아내와도 가끔씩 행복을 이야기한다. 아직은 건강하고 직업도 있고 게다가 딸, 아들이 모두 결혼해서 손자, 손녀도 있으니 행복하지 않느냐고 서로 물으면 서로 행복하다고 대답을 해준다. 일용할 양식은 풍족하지는 않아도 부족하지 않으면 만족해야 한다. 매사에 이만하면 풍족하고 즐겁고 행복한 삶이라고 자주 말하니 덩달아 행복해진다.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 말라’는 속담을 믿고 포기 할 것은 포기하니 행복하다. 나이 들면서 노욕을 버리는 것이 행복의 지름길이다. 식사 한 끼에 오천 원짜리도 있지만 오십만 원짜리도 있다. 내 마음을 낮추니 오천 원짜리 밥도 감사하고 고맙고 행복하다. 소박한 행복은 느끼는 사람의 몫이다.
김성은이 공연할 때면 어김없이 찾아와 무대 안팎에서 호들갑을 떨면서 “내가 스텔라의 남편이요”라고 외치는 남자가 있다. 바로 그녀의 이탈리아 남편 카를로다. 대기실에서는 이탈리아어로 예쁘다는 의미의 “Bella Bella”를 연발한다. 소프라노 Stella Kim 김성은의 목소리만큼 아름답고 특별한 사랑과 사람을 향한 따뜻한 시선을 들여다봤다.
현재 유럽에서 프리마돈나로 왕성한 활동을 하는 소프라노 Stella Kim의 한국명은 김성은이다. 이탈리아 베로나 아레나극장에서 동양인 최초로 오페라 의 주인공인 질다 역을 멋지게 열연해서 유럽 현지 언론으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스페인 비냐스 국제콩쿠르, 플라시도 도밍고 국제콩쿠르, 이탈리아 토티 달 몬테 국제콩쿠르, 스페인 아라갈 국제콩쿠르 등 유명 국제콩쿠르에서 우승한,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소프라노다.
스페인 황실 신년음악회에서는 플라시도 도밍고와 협연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기도 했다. 얼마 전에는 예술의전당에서 김성은 초청독창회가 음악평론가들과 애호가들의 찬사 속에 끝났다. 음악을 좋아하는 한량 이봉규도 감각적이고 매력적인 독특한 음색을 온몸으로 발산하는 김성은 공연을 놓칠 리가 만무하다. 그날 무대에서 뿜어내는 그녀만의 오묘하면서 섹시한 타고난 천상의 목소리를 접하고는 그녀가 왜 유럽에서 그토록 주목을 받는지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맑고 호소력 넘치는 목소리
나는 그동안 수많은 소프라노 공연을 국내외에서 감상했지만 음악 전문가가 아니라서 그런지 목소리의 차이를 선명하게 느끼지 못했다. 그저 고음의 꾀꼬리처럼 아름다운 소리들이 음색에 따라 각자 조금씩 차이가 있다는 점은 느꼈지만 이렇게 확연한 차이를 느껴보기는 김성은이 처음이다.
대중가요 가수로 말하자면, 전통적인 여가수들과 심수봉 목소리의 차이를 금방 느낄 수 있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재즈 가수로 말하면 루이 암스트롱의 독특한 음색이 다른 재즈 가수들과 확연하게 다른 것처럼, 김성은의 목에서 흐느끼듯 터져 나오는 음색은 가히 독보적이다. 여태껏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은 목소리다. 물론 비전문가로서 음악을 그저 즐기기만 했던 한량 이봉규의 평가이기에 음악평론가들이 내 글을 읽으면 생각이 다를 수는 있겠지만, 그동안 즐겼던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솔직하게 느낀 점이다.
요즘은 문화평론가들이 정치평론을 하고 변호사나 의사들도 너도나도 TV에 나와 정치평론을 해대는 자유로운 세상이기에 나도 이 정도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키다리 아저씨와의 운명적 만남
아름다운 프리마돈나를 사로잡은 사람은 아홉 살 연상의 이탈리아 심리상담사(psychology counselor) 카를로다. 올해로 벌써 결혼 20년 차. 그와의 인연도 오페라가 맺어주었다. 오페라 정극의 주인공을 뽑는 콩쿠르에서 1등(주역)에 뽑혀 이탈리아의 트레비조에서 40일간 생활하게 되었는데 그때 그녀에게 방을 내준 집주인이 카를로다. 당시에는 남자로 보이기보다는 거처할 집을 내준 키다리 아저씨로 고마운 사람이었다. 그 후 약간의 세월이 흘러 다음번 이탈리아 공연 때 만났는데 카를로의 식구들이 따뜻하게 대해줘 강한 인상이 남았다. 인연이 되려니까 하늘도 도왔는지 이탈리아 공연 스케줄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레 만날 기회도 늘어났다. 그렇게 시작된 연애가 4년쯤 무르익어갈 무렵 그녀의 어머니가 이탈리아를 방문했는데 카를로의 인간미에 반해버렸다.
“왜 결혼 안 하냐? 카를로와 결혼하든지, 아니면 지금 깔끔하게 헤어져라!” 하고 압박을 해온 것이 결정적으로 통해 트레비조 대성당에서 1997년 결혼했다. 당시 김성은과 카를로의 결혼은 이탈리아에서 화제였다고 한다.
이탈리아 남자와 동양인 프리마돈나의 결혼은 당시로서는 이탈리아에서도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국제결혼의 장점을 물으니, “국제결혼 이전에 여자와 남자가 만나서 사랑하고 결혼한 것이고, 이탈리아 남자와 한국 여자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다”고 힘주어 말한다.
결혼한 지 20년 됐고 이탈리아에서 생활한 지도 그 이상 되기 때문에 김성은은 국제결혼의 실감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오히려 공연을 위해 가끔 한국에 오면 낯설고 어색할 때가 많단다. 이탈리아에도 고부간의 갈등이 있겠지만 시어머니는 그녀를 아주 사랑하고 예쁘게 봐준다. 외국 며느리라서 봐주는 것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존경받는 오페라 가수가 내 며느리라는 것이 자랑스러워서 그런 것 아닐까.
이탈리아도 점을 많이 본다니 놀랍다. 카를로가 김성은을 만나기 전 브라질 여의사와 사귀고 있을 때 점을 보았는데 점쟁이 왈 “너는 동양 여자랑 결혼한다”고 했단다. 카를로는 그 소리를 듣고 무척 충격을 받았다. 그 후 그 말이 귓가에 계속 맴돌았고 그러던 어느 날 눈앞에 동양 여인 김성은이 나타나 운명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사랑에 눈이 멀어 콩깍지가 씌면 아무거나 마구 갖다 붙이면서 운명론자가 되어버리는 경향은 이탈리아 남자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동양계의 귀하고 아름다운 프리마돈나의 마음을 훔치려고 지어낸 말인지 진실인지는 카를로만이 알 것이다. 카를로의 직업이 심리상담사이기에 합리적인 의심은 들지만 이 정도로 넘어가자!
‘범생’ 남편과의 찰떡궁합
프리마돈나라고 해서 한량 이봉규가 우아한 질문만 하고 보내줄 리가 없다.
“이탈리아 남자들이 바람을 많이 피운다는데…”라는 도발적 말에 그녀는 웃으면서 “내 남편은 삼식이”란다. “하루 세끼를 집에서 먹는 ‘범생이’라서 바람피울 줄도 모를걸요?” 남편을 만나본 적이 없기에 그 말을 믿어야지 어쩌겠나? 김성은이 공연할 때면 어김없이 찾아와 무대 안팎에서 호들갑 떨면서 “내가 스텔라의 남편이요”라고 외친단다. 대기실에 찾아와서는 이탈리아어로 예쁘다는 의미의 “Bella Bella”를 연발한다. 이탈리아에도 팔불출이 있기는 매한가지.
심지어 아내의 노래를 CD로 들을 때도 눈물을 펑펑 쏟는다고 하니 아까 김성은이 한 말을 믿기로 했다. 두 사람은 부부싸움을 할 때도 여느 부부와 다르다고 한다. 김성은이 “너는 왜 코가 삐뚤어졌니?” 하고 남편에게 시비를 걸면 카를로는 “너는 왜 코가 납작하니” 하며 응수한단다.
이탈리아 남자들의 코가 중간에 약간 휘어진 것을 지적하면서 놀리면 한국 여자들의 납작한 코를 얘기하며 맞받아친다고 하니 유치한 사랑싸움의 극치다. 그만큼 다정하다는 것을 자랑하는 말로 들렸다. 결혼생활이 오래되고 느긋해서 그런지 카를로는 10년 전까지만 해도 “여자는 10년 살고 바꿔야 한다”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하더니, 이제는 “뭐든 다 해줄 수 있으니까 제발 이혼만 요구하지 마라!”고 어리광을 핀다고 한다.
그녀는 공연 등으로 집을 비우는 날이 많아도 다 이해해주면서 외조를 해주는 카를로가 늘 고맙다. 이탈리아 남자와 한국 남자의 차이를 묻자 “이탈리아 남자들은 가족 구성원을 소유하려 하지 않는다. 각자의 중요하고 개별적인 사생활을 존중해준다. 그렇게 자유를 얻는 대신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한국 남자들은 권위적이긴 하지만 모든 책임을 감수한다. 간혹 힘들고 귀찮을 때는 한국 남자 같은 스타일에 의지하고픈 마음도 든다”고 솔직히 털어놓는다.
다시 태어나도 이 남자랑?
“다시 태어나도 이탈리아 남자랑 결혼하고 싶냐?”고 물었더니 “한국 남자랑 안 살아봐서 다음 생에는 꼭 한국 남자랑 살아보고 싶다”며 깔깔대고 웃는다. 그런데 그 눈가에 진심이 묻어나온다. 20년 넘게 이탈리아 남자와 외국에서 생활했으니 고국이 그리웠을 것 같다. 또 한국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한국 남자와 살아봤으면 하는 마음도 슬쩍 해봤으리라.
완벽한 결혼생활이 어디 있으랴. 김성은은 지금 행복하기에 다음 생의 바람을 얘기할 수 있는 것 아닐까? 만약 행복하지 않으면 당장 이혼하고 보따리 싸서 한국으로 날아올 것 같은 성격의 소유자임을 한량 이봉규는 간파했다. 승부욕이 강하고 처절한 노력 끝에 유럽에서 성공한 프리마돈나가 되었는데 싫은 결혼을 참으면서 살 김성은이 아니다. 이 말을 뒤집으면 지금 나름대로 만족한 결혼생활과 이탈리아 생활을 즐기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12세의 딸 알레그라의 사진을 보여준다. 기가 막히게 예쁘게 생겼다. 알레그라를 성악가로 키우고 싶은데 엄마를 안 닮아 노래를 못한다며 아쉬워한다. 그런데 펜싱을 배운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딸이 이탈리아 3개 도(道)의 12세 펜싱대회에서 2등을 했단다.
“제2의 김연아를 기대해보라! 얼굴도 예쁘니까 올림픽에서 금메달 따는 순간 세계적인 대스타가 될 것”이라고 부추기니까 좋아서 어쩔 줄 모른다. 프리마돈나 김성은도 별 수 없이 자식바보다. 52세의 소프라노는 대체로 은퇴할 나이이지만 그녀는 오히려 지금이 전성기다. 그 원동력은 가족의 사랑이 아닐까? 그녀는 말을 할 때도 마치 노래하는 것 같다. 고음의 목소리로 흥얼거린다. 인터뷰하는 동안에도 마치 한 편의 아름다운 오페라를 감상하는 느낌이어서 행복했다.
나이가 들수록 더 바빠지는 사람이 있다. 백승우(白承雨·59) 그랜드하얏트 서울 상무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하루 24시간도 부족할 것 같은 백 상무는 자신만의 시간관리로 호텔리어, 사진가, 교수, 궁궐문화역사 해설가, 작가 등 다양한 활동을 즐겁게 하고 있다. 최근 클래식 오케스트라 활동을 하고 싶다며 취미로 콘트라베이스를 배우고 있으며 그에 더해 오디오 수집에도 도전 중이다. 놀라운 것은 이 모든 활동이 단순한 아마추어 수준을 넘어서 프로의 경지로 인정받고 있다는 점. 그가 취미의 고수로 삶의 활력을 얻고 있는 비결을 들어보자.
백승우 그랜드하얏트 서울 상무는 자신의 사진 작업을 ‘취미’라고 부르자 무슨 소리냐고 반문했다. 하긴 그럴 만도 하다. 지난 2016년 7월 파리 ‘La Capital Gallery’ 초청의 사진전 에서 그의 전 작품이 솔드아웃됐다. 뿐만 아니라 2017년 4월에 파리 샹젤리제 ‘The Gallery Boa’ 초청으로 아시아 최초 개인 사진전이, 11월에는 ‘La Capital Gallery’ 특별 초청으로 개인전이 예정되어 있다. 도저히 취미라고 할 수 없는 완전한 프로 작가. 전시할 때마다 작품이 매진될 정도로 그것도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원숙한 작가의 모습이다.
파리 ‘The Gallery Boa’ 초청 아시아 최초 개인 사진전
“파리 샹젤리제나 뉴욕에 초대받는 건 극히 드문 일이죠. 지난번 전시에서 18점을 전시했는데 첫날에 모두 솔드아웃됐습니다. 그리고 계속적으로 탑 갤러리에서 초청 전시가 열리고 있는 중이죠.”
그는 이미 2009년에 ‘The Window 시리즈’를 강남의 일반 상업 갤러리에서 전시한 바 있으며 그때도 대규모로 판매가 이뤄졌다고 한다. 당시 작품은 포스코와 호텔 등지에서 주로 구매가 이뤄졌다고. 그렇다면 사진으로 얻는 수익도 꽤 되겠다 싶어 물었더니 그는 손사래를 쳤다.
“다음 작품 준비하고 카메라 살 정도 들어와요. 제가 기자재비가 많이 들어가는 편이라. 이번 전시는 프랑스 쪽 은행과 정부 기관에서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해요.”
10여 년에 걸친 사진 프로젝트들 진행 중
프로 작가답게 그는 사진 작품의 제작을 특정한 테마를 잡고 장기간에 걸쳐 진행하고 있다.
“‘The Window 시리즈’를 10년, ‘My Korea’ 시리즈를 12년 동안에 걸쳐 만들었습니다. The Window 시리즈를 하면서 두세 가지 전시를 준비 중에 있어요. 당장 6월부터는 유럽의 아트 퍼니처(예술과 가구 디자인을 접목한 개념으로 예술적 디자인이 자연스럽게 가미된 일상 속 가구) 작가와 제 작품을 컬래버한 전시가 1년 동안 잡혀 있습니다. 제 작품의 테마는 나무가 될 거예요.”
그의 말에는 유난히 힘과 자신감이 실려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그가 ‘제대로 한국을 소개하고 싶다’는 생각에 12년 동안 진행한 ‘My Korea’ 사진 작업은 같은 제목의 책 로 정리되어 그에게 작가라는 직함을 하나 더 달아줬다. 텍스트가 모두 영어인 이 책은 반응이 좋아 속편을 발행하기로 했다. 책을 쓰는 작가로서의 성과 또한 성실히 거두고 있는 중이라는 얘기다.
일하는 데서 작품의 소재 찾아
사진작가 외 백 상무의 다채로운 취미활동들을 살펴보자. 그는 교수이기도 하다. 본업인 호텔리어로서의 역량은 대학원과 석·박사 과정에서 호텔경영학과 경제학 등을 가르치는 자리를 마련하게 했다. 또 궁궐문화역사 해설가이기도 하다. 문화재에 관한 사진을 찍으려면 알아야 할 지식이기도 했거니와, 가장 큰 문제는 일반인의 신분으로서는 문화재를 마음대로 찍을 수가 없었다. 그 순간 그는 발상의 전환을 했다.
‘그럼 내가 문화재청 해설가를 하면 자유롭게 드나들면서 작품을 만드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 1년에 걸친 공부 끝에 그는 해설가 자격증을 땄다. 그의 사진 작품 세계가 더욱 점프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이러한 활동은 철저히 호텔리어로서의 본업을 지키면서 진행하고 있다. 그는 일하면서 작품의 소재를 찾는 게 어렵지 않냐는 질문에 전혀 어렵지 않다고 대답했다.
“저는 일하는 데서 사진을 찍을 소재를 찾아요. 그러니까 백 퍼센트 호텔이 배경이죠. 출장 가서 남는 시간에 촬영을 하는 거예요. 주말에 일부러 어딘가를 가서 찍은 적은 없어요. 직장에서 일하는데 시간이 어딨어요?”
60대 이후의 인생은 40대부터 준비하라
마치 물 흐르는 것처럼, 은퇴를 맞이하면서 동시에 제2의 삶을 시작하고 있는 그의 성공에는 거침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닌 법. 그는 자신의 성공이 결코 운이 따라줘서 된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렇게 되기까지 그가 투자해야 했던 시간과 노력은 결코 만만치 않은 것이라는 설명이다.
“은퇴하면 모두 해외여행을 떠나요. 갔다 와서 돈이 떨어지면 자전거 타고 색소폰 불고 산에 가 있어요. 이게 (은퇴 후 삶의) 다예요. 그 세 가지를 하다가 그것들마저 안 되면 근처 친구들과 소주를 마시죠. 그러다 몸이 아프면 집에 있게 되고 가족들과 싸우게 돼요. 결과적으론 남들이 입어본 옷이 멋있으니까 자신도 입어보는데 자기한테 맞지 않는 거죠. 왜 그런가 하면 준비를 안 해서 그래요.”
그는 60대 이후의 인생은 40대부터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제적인 준비를 하면서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여러 가지 시도를 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자전거도 타보고 교육도 받고 사진도 찍고 등산도 하고…. 다양한 걸 하면서 실패를 겪어야 합니다. 실패하다 보면 그중에 자신이 좋아하는 게 걸리게 돼 있어요. 저도 사진을 좋아한 건 아니에요. 그런데 동료였던 일본인 아다치씨가 나보고 일만 한다고 취미를 가지라면서 저에게 카메라를 줬어요. 그러면서 시작된 거죠. 저는 세상에 태어나서 이런 걸 하게 될 줄은 전혀 몰랐어요.”
적어도 10년은 투자해야 고수가 된다
그는 그렇게 해서 자신에게 맞는 게 걸리면 그것에 10년은 투자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그래야 은퇴할 때가 되면 남을 가르치면서 즐기는 게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그게 안 되면 돈만 많이 쓴다는 게 그의 일침이다.
“40대 넘어가면 앞으로 20년은 짧아요. 저는 2007년에 처음으로 개인전을 했어요. 그게 10년 전이죠. 그때부터 했으니까 이제 파리에서 전시도 하는 거지 갑자기 파리에서 전시회를 연다는 게 말이 되나요.”
그는 또한 취미를 익히는 노하우로 전문가를 꼽았다. 자신은 뭔가를 한다고 하면 최고의 고수를 찾아간다는 것이다. 그가 사진을 배울 때는 진동선 광주비엔날레 총감독을 만났다. 두 사람 사이는 나중에 함께 미학 논문을 쓸 정도로 발전하게 됐다.
최고의 전문가에게 배워라
그가 최근에 열중하고 있는 취미 중 하나는 오디오다. 마치 사진을 처음 접했을 때처럼 그는 그냥 시작하면 안 될 거 같아 오디오 책으로 유명한 파워 블로거이자 건축가인 박준씨에게 메일을 보내 오디오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고수라고 불리는 오디오 파일(오디오 마니아를 가리키는 말)들과 3년을 함께 다녔다. 또한 클래식을 배우기 위해 음대 교수들에게 3년 동안 지도를 받기도 했다. 그 결과 이제는 오디오를 들으면 오디오 너머의 악기 위치가 보인다고 한다. 듣는 게 아니라 음악이 보인다고.
그가 요즘 배우고 있는 콘트라베이스도 전문가를 찾는 그의 취미 철학이 적용된 경우다.
“전주에 사진에 관해 5년간 강의할 일이 있었어요. 그때 그룹 중에 한 명이 정형외과 의사였는데 기타를 칠 줄 알았죠. 그가 제게 콘트라베이스가 잘 어울리고 잘할 것 같다고 추천했어요. 그 얘기를 듣고 2년을 고민하다가 바로 악기를 샀죠. 지금 2년 반째 독일 마인츠 국립교향악단 단원에게 개인지도를 받고 있어요. 어려워요(웃음).”
최고의 고수를 만나 학습하고 훈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는 고수를 만난다고 해도 노하우 전수가 잘 안 될 수도 있다는 걸 인정했다. 그래서 그는 고수를 만나면 무엇보다도 정직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에티튜드가 중요해요. 배우는 일에 있어선 학생이 되어야 하는 거죠. 스승이 나보다 어리다고 무시하면 안 됩니다.”
제대로 된 공부로 거듭난 제2의 인생
무엇을 해도 주저하지 않고 정직하게 접근하는 그에게 그렇게 공부하고 배우는 취미의 ‘참맛’이 무엇인지 물어봤다.
“사람은 40대, 50대가 되면 가족, 회사, 미래에 대한 불만이 쌓이죠. 그런데 그것을 작품에 쏟으면 나도 행복해지고 주변도 행복해져요. 저는 평생 카메라를 잡아본 일이 없었어요. 오디오를 들은 일도 없죠. 클래식도 배운 일 없어요. 제가 한 일은 평생 회계학과 호텔경영밖에 없었어요. 그것 외에는 가진 게 없었던 거죠. 그런데 해보니까, 그리고 제대로 공부를 하니까 굉장히 재밌어져요.”
그는 보람이 단순한 감정의 승화를 넘어서 직업 수준으로까지 발전한 몇 안 되는 케이스다. 그래서 그의 도전이 이룬 성과는 그 희귀함에도 불구하고 강한 설득력을 가진다.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자신감 말이다. 그 결과, 그의 미래는 어쩌면 지금까지의 삶보다 훨씬 바빠질지도 모르겠다.
“퇴임 후요? 강의는 계속할 거 같고, 펀드 컨설턴트를 하게 될 것 같아요. 그리고 격주로 궁궐 해설을 하고 사진 작업도 해야죠. 책도 써야 하고 오디오 수집도 해야 하고. 콘트라베이스도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에 들어갈 정도로는 해야겠고. 바빠요(웃음).”
조수경 ㈜글로벌아너스 대표
‘취미생활을 즐기면서 돈도 번다.’ 이보다 더 행복한 직업이 또 있을까? 앙코르 커리어에서는 자기 이해를 바탕으로 자기에게 맞는 일을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취미를 통한 창직이야말로 자기에게 제일 잘 맞는 일을 찾을 수 있는 아주 좋은 방법이다. 필자가 운영했던 연세대, 이화여대, 항공대 중장년 아카데미에서도 취미를 통한 창직이 많이 이루어졌다. 그중 항공대 ‘드론 활용 창업 과정’에서는 드론(drone)을 취미로 좋아하는 시니어분들이 대거 참여했다. 교육 이후 드론과 연계해 창직을 하신 분들이 많았는데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로 일을 가져서 그런지 누구보다도 열정이 넘치는 삶을 살고 계신다. 하지만 무턱대고 취미를 직업으로 삼았다가는 실패하기 십상이다. 취미가 수익까지 가져다주는 성공적인 직업으로 연결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1. 취미와 재능은 별개임을 인식하라
사람들은 흔히 자기가 좋아하는 것과 타고난 재능을 혼동한다. 내가 춤을 좋아한다고 해서 댄서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타고난 재능을 확실히 구분할 수 있어야 돈까지 벌 수 있는 직업을 만들 수 있다.
2. 잘할 수 있는 분야를 찾아라
좋아하면서 자신이 잘할 수 있는 분야를 찾는 것이 취미를 통한 창직의 핵심이다. 좋아하기만 하고 잘할 수 없다면 수익을 창출하기가 어렵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면서도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객관적인 기준을 갖고 제대로 파악하라.
3. 열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지식과 전문성을 갖춰라
취미를 열정적으로 하는 것과 그것을 성공적인 직업으로 바꾸는 데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노래를 취미 삼아 열정적으로 한다고 해서 다 가수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직업이 되기 위해서는 상당한 수준의 지식과 전문성을 갖춰야 한다.
4. 작게 점진적으로 시작하라
창직은 무에서 유를 창조해나가는 것이기에 리스크가 존재한다. 그래서 우선 수익이 있는 다른 일을 하면서 작게 점진적으로 접근하기를 권한다. 필자가 아는 ‘아더’라는 정신과의사 선생님은 탱고를 너무 좋아해 의사로서 일을 하면서 댄스치유학회도 만들고 탱고 강사도 하면서 점진적으로 접근해 현재는 탱고업계에서 자리를 잡았다.
5. 경력과 경험을 최대한 활용하라
시니어의 최고 자산은 수십 년간의 경험과 경력이다. 취미를 통한 창직에서도 최대한 자신의 경험과 경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성공 가능성이 높아진다. 실례로 항공대 ‘드론 활용 창업 과정’의 교육생이었던 드론활용연구회 유진철 대표는 대안학교 교장으로서의 경력을 활용해 자유학기제와 연계해 드론 교육 사업을 하고 있다. 교육시장을 잘 알기에 다른 분들보다 빠른 성공이 엿보인다.
6. 고객을 이해하라
비즈니스에 대한 기본은 나를 필요로 하는 고객을 이해하는 것이다. 취미로 사진을 하던 은퇴자들이 설립한 장애인 전문 사진관 ‘바라봄 사진관’은 언론에 많이 보도되고 크라우드펀딩이 성공하는 등 사업이 번창하고 있다. 장애인인 고객을 잘 이해하고 배려한 것이 성공의 핵심 키다.
7. 시장 공략은 창의적으로 하라
취미를 통해 창직을 하더라도 남들과 똑같이 시장에 접근하면 실패하기 십상이다.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발상의 전환으로 틈새시장을 찾아 공략해야 실패 가능성을 줄일 수 있다. 필자가 진행한 중장년 아카데미 교육생이었던 ‘미벨의 감성 여행 스토리텔러’ 박미종 대표는 은행 지점장까지 지낸 분인데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스토리가 있는 ‘스페인 여행 이야기’를 만들어 사업을 시작, 제2의 인생을 멋지게 살고 있다.
8. 반 박자만 앞서가라
취미를 통한 창직을 제대로 하려면 시대의 흐름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좋아하는 마음에 너무 앞서가면 시장이 형성되기 이전이라 때로는 고객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다. 필자가 드론 활용 창업 과정을 할 때도 한국은 드론시장이 형성되는 초기였기에 이 부분을 강조했다. 창직을 하려면 5년 정도만 앞서가라. 그렇게 반 박자 앞서갈 때 성공 가능성은 더욱 커진다.
9. 커뮤니티를 최대한 활용하라
취미를 통한 창직은 커뮤니티 활동을 열정적으로 하다가 직업으로 발전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동호회는 취미 교류의 장인 동시에 정보 교류의 장이다. 활발히 교류하다 보면 정보도 얻고 그 커뮤니티 사람들이 고객이 되기도 한다. 종종 창직의 기반도 마련된다.
10. 인내하며 실패를 즐겨라
취미를 통한 창직은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다. 어떤 분은 재즈를 너무 좋아해 직장생활을 하면서 수십 년간 투잡으로 공연을 뛰다가 은퇴 후 전업 재즈 가수가 되었다. 이렇게 취미를 통한 창직은 때로는 수십 년이 걸릴 정도로 시간이 많이 필요할 수 있다. 하지만 즐기면서 할 수 있기에 실패해도 계속 시도하다 보면 어느덧 창직의 길로 들어서 있을 것이다.
취미를 통한 창직은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자신감을 갖고 앞으로 나아가보자. Bravo Your Life!
필자가 일하는 건설현장 머리위에는 고가 크레인이 빙빙 돌아가고 발아래는 흉기 같은 철근이 널려 있다. 온통 지뢰밭을 걷는 것처럼 위험물 천지다. 근로자의 안전을 지켜주는 비계(건물을 지을 때 디디고 서도록 철 파이프나 나무 따위를 종횡으로 엮어 다리처럼 걸쳐 놓은 설치물)에 머리고 몸통이고 부닥치는 일들이 수시로 일어난다. 이런 곳에서 일을 하는 나이 먹은 필자를 대단하다고 추켜세우는 친구들도 있지만 과연 제대로 일을 할까하고 의심스런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들도 많다. 그보다 한평생을 손에 물 안 묻히는 화이트칼라로 살다가 온 몸을 연장삼아 일해야 하는 블루칼라 일을 한다는 것에 의심 반 부러움 반의 주위 시선들을 느낀다. 필자는 공과 대학을 나오고 기술사라는 최고의 국가 자격을 갖고 있다. 회사에서도 일찍 간부가 되어 현장일은 제대로 배우거나 하지도 못하고 부하직원을 통솔하는 일만 한평생 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든 일을 입과 머리로만 했지 손과 발은 제대로 쓰지 못했다. 자동차공장에 다니면서 실제 자동차는 만들어보지 못한 꼴이었다. 머리는 많이 써서 유효기간을 지나 노후 되었지만 손발은 아직 신품에 가깝다고 자위하며 혼자 웃는다.
이런 마음가짐이 필자를 스스로 쇠뇌 시켜 현장 일을 해도 남들보다 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다소 엉뚱하고 무모한 자신감은 예전부터 늘 갖고 있었다. 이런 생각 때문에 만약 퇴직하고 제2의 일을 한다면 머리만 쓰는 관리자 일보다는 두뇌로 계산하고 직접 몸으로 부딪치는 노동에 가까운 현장 일이 좋겠다는 생각은 오래전부터 해 왔다. 수명100세 시대에 길게 현역에 남아있으려면 노동자의 다른 이름인 불루칼라가 딱! 이다. 노동자는 몸이 생명이므로 무엇보다 건강해야 한다. 노동자 출신이 회사에서 노동자 몫의 임원을 역임한 후 임기가 끝나자 다시 노동현장으로 복귀하는 모습에 잔잔한 감동을 받은 적도 있다. 노동은 신성한 것이다.
불루칼라의 대부분 업종이 3D 업종이라 하여 열악한 직업이다. 힘들고(difficult), 더럽고(dirty), 위험스러운(dangerous) 일이다. 다른 쪽은 몰라도 필자가 잘 아는 건설현장에서 보면 우리나라 젊은 노동자들은 점점 줄어들고 해외 노동력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다. 조선족이거나 동남아 인력이 없으면 현장이 돌아가지 않을 정도로 많이 변했고 점점 더 그렇게 변하고 있다. 취업난이라 하면서도 노동현장에 오지 않으려는 우리나라 젊은이들을 무조건 탓할 수만 없는 것이 열악한 환경에 비해 보수가 턱없이 낮다는 현실에 있다. 소득 3만 불 시대에 대학을 나온 잘 교육된 젊은이들에게 미래가 불확실한 육체노동의 이런 일을 강요하기에는 솔직히 미안하다. 남들이 기피하는 일을 하면 당연히 돈이라도 많이 주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녀양육에서 해방되고 좀 경제적 여유가 있고 신체 건강한 시니어가 3D 업종에 종사하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많은 퇴직자들이 강사나 컨설턴트를 희망하고 잘 모르는 창업에 뛰어들어 그나마 갖고 있던 돈을 날린다. 노동은 건강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선택된 자리다. 나이 들어 육체노동에 종사할 수 있다는 것이 또 다른 이름의 진짜 엑티브 시니어다.
하는 일의 중요도에 따라 급여가 달라져야 정의로운 사회지만 자녀를 먹이고 입히고 교육을 시켜야하는 책임을 지고 있는 젊은이들에게는 그만한 보수를 줘야한다. 보람되고 가치 있는 일자리를 젊은이들에게 줘야 할 의무는 국가와 사회에 있음에도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회사에 입사하여 연수가 늘고 숙련도에 따른 생산성 증가로 점차 급여가 늘어나는 것도 당연하지만 어느 시점에 도달하면 생산성과 역행하여 오히려 급여가 줄어드는 임금피크제라는 제도를 적용하는 것이 소득재분배 차원에서 공감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퇴직 후 제2의 직업에서는 수입이 적은 것이 당연시 돼야 한다.
요즘의 노동현장은 무조건 힘만 쓰는 동물의 세계가 아니다. 힘든 일은 잘 발달된 기계가 한다. 기계가 하기 어려운 틈새의 힘이 필요한 기술적인 일이 요즘의 노동현장이다. 찾아보면 자신의 체력에 맞는 그렇게 힘들지 않는 노동현장도 많이 있다. 노동현장에서 바짝 엎드려 일을 하다 보니 몸은 피곤해도 우선 마음은 편하다. 입사동기간에 서로 빨리 진급하려고 양 눈에 쌍심지 불을 켜고 경쟁하던 과거의 나를 돌아보며 웃음 짓는다. 살아보니 그렇게 경쟁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과장되고 부장되는 진급의 싸움에서 한발 물러서 있으니 여유롭다. 건강은 머리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몸을 움직이는 것이고 욕심을 줄인 자리에 만족을 끼워 넣으면 행복의 또 다른 이름이 된다.
만화로 보는 패션디자이너 히스토리이다. 에르메스, 루이뷔통, 버버리, 구찌, 페라가모, 샤넬, 크리스찬 디오르 등 26명의 명품 역사에 관한 책이다. 2011년 초판을발행하여 2016년에 무려 22쇄를 기록한 책이다. 패션일러스트인 강민지씨가 글과 그림으로 만든 책이며 루비박스에서 출판했다. 책값이 18,900원으로 다소 비싼 편이나 410쪽의 방대한 분량이라 그럴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만화가 아니었으면 이 계통의 전문가가 아니면 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프랑스처럼 샤넬, 크리스찬 디오르, 루이 뷔통 등 여러 유명 명품을 거느린 나라를 보면 부럽다. 브랜드 매출이 수억 불이다. 브랜드 하나가 어지간한 나라의 섬유 수출 총액을 넘어선다. 그러나 국가적인 자존심도 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섬유왕국’이라는 소리를 오래전부터 들었지만 아직 세계에서 알아주는 명품에서는 미약하다는 점은 아쉬운 일이다. 가까운 일본의 이세이 미야케, 요지 아마모토 등도 있고 중국계 미국인인 베라 왕도 있다.
이 책을 보면 명품 탄생의 조건을 알 수 있다. 명품 브랜드들의 탄생은 창립자들의 어린 시절부터 달랐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재봉 일을 하는 부모 영향을 받았거나 백화점, 부티크에서 일한 경험 등이 작용했다. 패션학교에서 배워 이미 20대부터는 각광을 받았다. 그런데 우리 실정은 패션을 그리 촉망되는 직업으로 보지 않는다. 어릴 때부터 패션을 제대로 배울 환경이 안 되는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이 들어 패션에 입문하면 창의성에서부터 늦다.
명품 브랜드가 되려면 마케팅이 중요하다. 스타 마케팅이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명품들은 연예계 스타들이나 영화, 아카데미 시상식 등에서 스타들이 입었을 때 입소문을 탄다. 그레이스 켈리, 제인 버킨, 오드리 헵번 같은 유명인들이 가방을 들고 나타나면 금방 유명세를 타고 켈리가방, 버킨 가방 등으로 명명되기도 한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덕분에 프라다는 제2의 도약을 하기도 했다. 영화 ‘애수’ 등에서 주연 배우가 입고 나와 더욱 우명해진 버버리 코트는 어지간한 전쟁 영화에 다 나온다. 윈스턴 처칠을 비롯해 오늘날 조지 부시, 빌 클린턴 같은 사람도 입어서 유명하다. 페라가모는 마릴린 몬로가 ‘7년만의 외출’ 영화에서 스커트가 날리는 유명한 장면 덕분에 그때 신었던 구두로 유명해졌다.
명품은 선진국 부유층의 취향에 맞춘 옷이라야 한다. 아니면 유명 스타들이 입어줘야 한다. 길은 많다. 세계 유명 패션학교의 문을 두드리거나 패션 콘테스트 입상 같은 방법도 있다.
명품들은 맞춤복인 오트 쿠튀르 의상을 연상하지만, 명품들의 성장과정을 보면 그렇지도 않다. 말안장엣 시작하여 가방으로 유명해진 에르메스도 있고, 모자부터 시작한 샤넬도 있다. 나중에는 향수까지 카테고리를 넓혔다.
이들 명품 브랜드들은 대부분 가족 경영을 했다. 그래야 특성을 이어가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디자이너를 영입하는 경우도 있다. 명품 브랜드를 여러개 소유한 회사에서 키우는 방법도 있다.
이 책을 보면 명품 브랜드들의 탄생과 성장과정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