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은 참으로 다사다난했던 한 해였다. 아울러 2015년부터 3년간 써온 필자의 한문 산책 역시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그동안 필자의 칼럼을 읽어주신 독자들에게 지면을 빌려 감사를 드리며 한 해를 마무리 짓는 시제를 골라봤다. 한 해를 마무리 짓는 시로서 가장 오래된 작품은 무엇일까? 중국의 가장 오래된 시가(詩歌) 문학을 대표하는 ‘시경(詩經)’에서 세모의 시는 바로 당풍(唐風)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실솔3장(蟋蟀三章)’이다. ‘실솔(蟋蟀)’이란 귀뚜라미를 의미하는데, 3장으로 이루어진 이 시의 제1장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蟋蟀在堂(실솔재당) 귀뚜라미가 마루에 있으니
歲聿其莫(세율기모) 해가 드디어 저물었도다.
今我不樂(금아불락) 이제 우리가 즐거워하지 아니하면
日月其除(일월기제) 해와 달이 (우리를 버리고) 가리라.
無已大康(무이태강) 너무 편안하지 아니한가.
職思其居(직사기거) 자신의 직책을 생각하여
好樂無荒(호락무황) 좋아하고 즐거워함을 지나치지 않음이
良士瞿瞿(양사구구) 어진 선비의 두려워하고 조심함이니라.
귀뚜라미가 마루에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당시 주나라 빈(豳) 지방의 노래였던 ‘빈풍(豳風) 칠월(七月)’을 보면, “七月在野(칠월재야:칠월이 되면 귀뚜라미가 들에 있고), 八月在宇(팔월재우: 팔월이 되면 집 안에 들어오고), 九月在戶(구월재호: 구월이 되면 문 안으로 들어오고), 十月蟋蟀(시월실솔: 시월이 되면 귀뚜라미가), 入我牀下(입아상하: 내 침상 아래로 들어오느니라)”란 표현이 있다. 귀뚜라미가 날이 추워지자 사람들이 거주하는 공간인 집으로 찾아 들어오는 모습으로 한 해가 지나감을 표현한 것인데, 빈풍의 노래들은 하나라의 월력인 하력(夏曆)을 사용한 관계로, 한 해의 마지막 달이 12월이 아닌 10월로 표현되어 있다. 따라서 ‘귀뚜라미가 마루에 있다’는 표현은 하력으로 따지면 9월에서 10월 초, 그리고 주나라 이후 사용된 주력(周曆)에 의하면, 11월에서 12월 초 정도의 시점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시는 한 해의 노고를 돌아보며 즐기되 지나치지 않음을 강조한 시다. 이후 많은 곳에서 인용되었는데, 주로 한 해의 마지막을 나타내는 세모 또는 선비가 스스로를 다지는 마음가짐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다. 예컨대, ‘고시19수(古詩十九首)’ 중 ‘동성고차장(東城高且長)’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四時更變化(사시경변화) 사계절은 변화하기 마련이라지만,
歲暮一何速(세모일하속) 연말이 돌아옴은 어찌 그리 빠른 것인가?
晨風懷苦心(신풍회고심) ‘시경’ 신풍편(晨風篇)에는 버림받은 신하의 괴로움을 나타내고 있고(벼슬 못하는 괴로움),
蟋蟀傷局促(실솔상국촉) ‘시경’ 실솔편(蟋蟀篇)에는 구속되어 살아감[局促]을 상심하는 뜻을 나타내고 있네(벼슬살이하는 괴로움).
한편 조선시대 기대승(奇大升)의 ‘고봉집(高峰集)’ 천상추기근(天上秋期近)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亹亹送流年(미미송류년) 세월이 갈수록 자꾸 흐르는 해를 전송하게 되는구나.
奔走紅塵裡(분주홍진리) 세상 풍진 속에 혼자 분주하니,
空吟蟋蟀篇(공음실솔편) 부질없이 실솔편만 읊조리누나.
3년간 써온 한문 산책을 마감하니 위의 ‘空吟蟋蟀篇’이라는 구절이 마음에 와 닿는다.
2018년 새해 아침이 밝아왔다. 며칠 전부터 신년 첫해의 일출을 보러 어디로 갈까 고심을 했다. 작년에는 첫 날 해맞이를 고향의 백운산 정상으로 올랐는데, 불행하게도 구름이 많이 끼어 떠오르는 해를 볼 수는 없었다. 뭐니 뭐니 해도 일출의 장관은 바다에서 불쑥 솟구치는 역동적인 해의 모습이라는 생각에 여러곳을 생각해 보았지만 올 해는 그냥 송파구 집근처에 있는 올림픽공원에서 가족과 함께 해맞이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송파구 해맞이 행사는 올림픽공원 몽촌토성 망월 봉에서 해마다 열린다.
망월봉은 ‘달맞이 봉’이라는 뜻의 언덕으로, 조선 초기 문인 서거정(徐居正)의 시구(詩句)에도 등장하듯 당시의 선비들이 달맞이를 위해 자주 찾던 곳이다.
올 해는 풍물공연, 희망횃불 길놀이, 모듬북연주, 희망의 노래, 소망의종 타종, 복바구니 터트리기, 해맞이 축가, 부대행사등 다양한 행사로 볼거리도 많고 추억에 남는 해맞이 행사라는 홍보가 있었다.
새벽 여섯시에 일어나 아직은 어둠이 짙게 깔린 거리로 나섰다. 집에서 행사장까지는 걸어서 50여분 정도 걸린다. 택시나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도 있었으나 운동 삼아 집에서부터 걸어가기로 했다.
어둠을 헤치고 아내와 함께 집에서부터 출발하여 열심히 걷다보니 어느새 등에서는 땀이 배어나기 시작했다. 가는 길목 여기저기에서 손에 손을 잡고 가족끼리 행사장으로 가는 모습이 여간 정겨워보이지 않았다.
특히 잠이 채 가시지 않은 어린 아이의 손을 잡고 가는 젊은 아빠들과 올해가 무술년(戊戌年) 황금 개띠해라 그런지 누런색의 예쁜 푸들강아지를 데리고 걸어오는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몽촌토성 입구에 접어드니 어느새 사람들이 꾸역꾸역 몰려들고 있었다. 행사장에 도착해 보니 인산인해…….곳곳마다 떠오르는 첫 해맞이를 하려고 너도나도 앞자리로 이동하는 통에 몸은 덩달아 사람들에 떠밀려가고 있었다.
천막을 치고 봉사자들이 미리 나와 따뜻한 생강차를 준비해 추위를 무릅쓰고 해맞이 행사에 참가하신 분들에게 한 잔씩 나누어 주었다. 생강향이 달달하게 풍기는 따뜻한 차 한 잔을 받아들으니 손으로 전해져 오는 온기가 마음까지 훈훈하게 녹여주었다.
행사 진행자의 우렁찬 목소리와 새해를 축하하는 모듬북 연주가 힘차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중간중간에 쏘아올리는 불꽃 축포의 화려한 섬광이 밝아오는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았다. 뭐니 뭐니 해도 올해의 화두는 건강인 듯 했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고 했으니 건강이 단연 최고의 소망으로 자리 잡은 듯 하다.
2017년에는 필자에게도 많은 시련이 있었다. 어느 날 불쑥, 시니어의 문턱에 들어섰지만, 젊은이 못지않게 왕성한 활동을 하던 필자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이 닥쳐왔다. 회사에서 근무 중에 갑자기 급성 뇌경색이 찾아와 몸과 마음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시간이 갈수록 우울감이 엄습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쯤에는 6개월이라는 긴 시간이 흘러가고 말았다.
기상청에서는 서울지역에서 일출시간을 7시 47분이라고 발표했지만 실제로 일출이 시작된 시간은 8시가 막 지나가는 시간이었다.
꼬끼오 하는 힘찬 닭 울음소리와 함께 봉우리 위로 손톱 같은 해가 불거지더니 그야말로 눈깜짝할 사이에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와~ 하는 탄성이 저절로 울려 퍼졌다. 나도 붉게 떠오르는 무술년(戊戌年) 첫 해를 바라보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우선은 병마를 극복하고 이 시간에 해맞이를 할 수 있음에 무한한 감사의 마음이 우러나왔다. 감사했다. 힘든 시간을 견디어 낸 대가로 이렇게 많은 사람들 속에 섞여 해맞이를 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 아니겠는가? 또 한편으로는 가족들의 건강이었다.
이제는 미국에서 터 잡아 살고 있는 딸네 가족과 아들이 금년 한 해도 변함없이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었다.
행사가 끝나고 내려오는 길목에서 많은 사람들이 떡국을 먹기 위해 길게 줄을 늘어서 있었다. 나도 그 대열에 끼어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이 너무 걸릴 듯하여 “포기할까?” 생각중에 내 차례가 돌아와 낼름 떡국 한 그릇을 받아들었다. 그런데, 오늘 행사중에 최고의 하이라이트는 떡국맛이었다. 시린손 호호 불어가면서 한 숟가락씩 넘기는 떡국의 맛이 어찌 그리도 좋을까?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떡국을 먹었다. 그 많은 사람들 모두에게 떡국을 나누어 주던 봉사자들에게 무한 감사했다. 이렇게 멋진 일출을 보고 새해 소망도 빌었으니 첫 단추는 잘 채워진 듯하다. 금년에는 어깨를 활짝 펴고 당당하게 세상속으로 뛰어들어보자! 그리고 뚜벅뚜벅 나의 길을 걸어가 보련다.
문방사우(文房四友)란 벼루[硯], 먹[墨], 붓[筆], 종이[紙]를 말한다. 예로부터 선비나 문사(文士)들 곁에는 이 네 가지가 늘 함께 있었다. 벼루에 먹을 갈고 붓에 먹물을 적셔 종이에 글씨를 쓰면 서찰(書札)도 되고 시(詩)도 되고 서화(書畵)도 되고 상소문(上疏文)도 되었다. 보조기구로는 벼루와 먹을 넣어두는 연상(硯箱)이 있고 종이를 말아서 보관하던 지통(紙筒), 붓을 꽂아두는 필통(筆筒)도 있으나 역시 화룡점정(畵龍點睛)은 연적(硯滴)이라 할 수 있다. 토기나 도자기 혹은 놋쇠로 만들어진 연적은 먹을 갈 때 필요한 물을 담아두는 작은 기물이다.
그런데 그 기형이 다채롭고 격이 높아 선비들의 호사(豪奢)가 되기도 했다. 서울이나 지방의 고미술 상점을 지날 때마다 연적에 눈이 쏠려 만져보곤 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서예 수업이 있어서 준비물로 문방사우와 연적을 갖추긴 했다. 학교 앞 문구점에서 조악한 품질의 것들을 팔았으나, 연적은 없어서 컵이나 주전자에 물을 준비해 조금씩 따라 먹을 갈았다. 그래도 열서너 명은 집에서 어른들이 쓰던 사기 연적을 갖고 왔는데 청채(靑彩)의 붕어 모양이 제일 많았다. 나는 형이 쓰던 푸른 문양의 사각형 사기 연적을 갖고 다녔는데, 알고 보니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이 땅에서 만들어 팔던 ‘왜사기’였다.
그들은 우리나라 도자기에 매료되어 그것들을 수집하려고 부산 등지에 현대식 사기 공장을 크게 짓고 밥그릇, 국그릇, 종지, 접시, 요강, 연적들을 만들어 방방곡곡을 누비며 우리의 청자, 백자, 분청자기와 바꿈질을 했다. 그래서 오지의 초가 구석에 있던 간장종지까지 산뜻한(?) 왜사기로 바뀌게 되었다. 시골 장날이면 우리의 민속품이나 도자기들은 바리바리 일본 상인에게 들려 바다 건너로 사라졌고 흔하던 붕어연적도 씨가 마를 정도가 되었다.
나는 향리에 갈 때마다 옛 벗들에게 붕어연적을 탐문했으나 구할 수 없어 안타까웠다. 인사동의 고미술상에 있는 연적들은 희귀하고 예술성이 높은 것들이라 값이 비싸 구입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주말마다 황학동 일대의 벼룩시장, 답십리 고미술 상가를 훑고 다녔지만 옛것을 모방한 현대의 것들뿐, 조선조 말기의 것조차 구하기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대구 출장 중에 골동품점에서 처음 청채 연적을 구입했다. 붕어라기보다는 잉어에 가까웠는데, 구부린 자태며 비늘과 수염까지 정교한 데다 은은하고 맑은 코발트 유약이 일품이고 수구(水口)며 밑 처리도 깔끔해 얼른 지갑을 열었다. 그 뒤로 인사동 도자기 경매장에서 여러 형상의 연적들을 구입했다. 개중에는 중국을 통해 북한에서 흘러온 것들도 있었다. 한 30여 년 수집하다 보니 조선조 중기에서 말기까지의 것이 100여 점 되고, 현대 도예가들에게 부탁해 빚은 연적이 300여 점이나 있다. 언젠가는 소장한 연적으로 작은 전시회를 꾸밀 계획이다.
지금은 물건이 귀해져 값이 만만치 않지만, 내가 연적을 마음에 두고 수집하기 시작할 때는 다른 도자기(항아리, 다완, 주병 등)에 비해 가벼운 편이었다. 팔각(八角) 국화문이나 풀 무늬의 것[사진 1]은 선이 비뚤고 각(角)이 아홉인 것도 있다. 지방 가마에서 이름 없는 도공이 무심히 빚고, 우리 땅에서 나는 탁한 토청(土靑)을 바른 그 소박함이 좋다.
고미술상에는 도자기는 물론 석물(石物), 목물(木物), 서화 등 그 구색이 다양한데 고졸(古拙)한 멋의 책상이나 소반, 반닫이, 목판 따위에 밀려 한 귀퉁이에 박혀 있는 문짝에 관심을 가져볼 일이다.
대부분의 문짝들은 구옥(舊屋)이 헐리면서 수습된 것이기에 그 짜임도 지방 따라 다양하고 목수 솜씨에 따라 품질이 각색이지만, 연대가 깊지 않아 가격이 저렴하다. 20~30cm의 작은 문짝들도 그 짜임이 조밀하고 문살도 가지런해 조형미가 그만이다. 다락방 들창이었거나 고방(庫房)의 환기창으로 소용되었을 문짝 한 쌍을 벽에 걸고 보면, 벽 너머 푸른 하늘이 열릴 것 같은 아련한 환상에 젖는다.
우리나라 문화를 사랑한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는 우리의 목기를 ‘자로 잰 듯 반듯하지 않고 손으로 툭툭 다듬은 것처럼 비뚤고 세련되지는 않지만 균형 잡힌 든든함’이라 칭송했다.
창살 모양에 따라 완자문(卍字門), 아자문(亞字門), 격자문(格子門), 정자문(井字門), 용자문(用字門) 등 그 이름이 다양하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백미는 ‘꽃창살문’이다. 일반 사가(私家)보다는 사찰 문에, 일일이 꽃 모양을 깎아 맞추고 단청으로 장엄(莊嚴)한 문을 바라보면 황홀경에 빠지게 된다. 전북 부안의 ‘내소사(來蘇寺)’ 법당 문의 꽃창살은 1633년에 창건된 법당과 함께 만들어졌다. 긴 세월 비바람에 단청마저 퇴색되었으나, 색을 덧바르지 않고 나무의 속살 그대로를 드러낸 채 속계(俗界)와 선계(禪界)의 통로가 되고 있다. 연꽃, 국화, 모란의 꽃들이 사선으로 혹은 나란히 연결된 채 500년 가까이 침묵의 고태미(古態美)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법당 문의 문창살을 이토록 정교하게 빚어낸 것은 형태와 빛깔 그 자체가 그대로 깨달음의 세계[理事無碍法界]라는 저 화엄(華嚴)의 세계를 시각적으로 강조하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석지현(釋智賢, 1946~) 승려 시인의 말이다.
문짝[사진 2]은 지리산 산록에 거주하며 옛 목기들을 정성스레 재현하고 있는 한 목수의 솜씨다. 1 대 2의 비율로 문틀을 짜놓고, 사선으로 문틀에 꽉 차게 두 종류의 꽃 모양을 조각한 문살을 끼웠다. 뒷면에 창호지를 바를까 하다가 공간의 멋을 즐기려 그냥 서재 책장 옆에 걸어두고 있다.
골동품을 수집하려면 주변의 민속품에 먼저 눈길을 줘보자. 아직은 값이 싼 실패, 골무 등 규방의 것부터 홀대받고 있는 작은 문짝들까지 모으다 보면 5~6년 후엔 값도 많이 오를 것이고 심미안도 높아져 ‘우리 것을 지킨다’는 자긍심이 저절로 우러날 것이다. 청채의 붕어, 해태, 나비 모양 연적도 눈에 띄거든 주저 말고 수집할 일이다.
어느 날 인생 이모작을 잘 준비했다는 지인을 만나 얘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의견의 일치를 본 부분이 있었다. 이제 남은 시간엔 하고 싶었던 것을 하고, 좋은 책을 많이 읽어야겠다는 것이었다. 또 죽을 때까지 공부를 멈추면 안 된다는 것. 하기 싫은 일이나 시험을 위해 하던 공부에서 해방되었으니 허락된 시간을 누리자는 생각이었다.
인문학 책을 함께 읽고 나눌 그룹을 찾다가 독서클럽은 아니지만, 글 쓰는 훈련을 하는 그룹이 있어 탐색 겸 백화점 문화센터에 갔다. 보통은 말 잘하는 사람이 글도 잘 쓰지만, 글을 잘 쓰는 사람 모두가 말을 잘하는 것 같지는 않다. 가끔 글은 좋은데 강의는 엉망인, 작가 반열에 오른 분을 만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번엔 잠깐 들어본 강의가 맘에 척 달라붙어서 계속 듣게 되었다. 입을 벌릴 때마다 주옥같은 박식함이 무슨 보석처럼 인생의 경험에 녹아 나오면 수업 내내 행복한 마음으로 강의를 경청하곤 했다. 3개월 12만원 정도의 비용으로 주 1회 1시간 30분씩 듣는 강의였다.
수필을 쓰고 퇴고를 거치며 글쓰기를 연마하는데 인간이 살아가며 경험하는 솔직한 표현들이 좋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애환이 따스함으로 가만가만 스밀 때는 저절로 눈이 감긴다. 게다가 마음에 드는 수필을 외워서 문학회의 ‘연간 행사’로 무대에 올라 낭송하게 되었다. 원하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처음엔 외운다는 것이 큰 부담이었다. 요령은 그냥 반복해서 읽는 수밖에 없다. 어느 단계가 되면 저절로 외워진다. 외우다 보면 작품에 대해 깊이 이해하게 되고 또 독자에게 그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서 노력하게 되는데 이 과정은 좀 힘들어도 얻는 것은 그 이상이다. 좋은 작품을 외우게 되면 글쓰기에도 상당한 도움이 된다. 부수적으로 발성, 호흡에 대해서도 기본 훈련을 하게 되어 발음이 정확해진다.
처음에는 무대에서 느낌을 전달하기가 쉽지 않고, 무대 울렁증이 있는 사람도 있어서 열심히 외웠어도 보통 7분 정도 소요되는 중간에 잊어버리거나 어색해져서 진땀을 흘리기도 하지만 곧 익숙해진다. 한번은 남여 듀엣으로 아포리즘 고전 수필 낭송을 했었다. 조선 인조 때 문신으로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한문 4대가의 한 사람인 ‘신흠’의 아름다운 수필이었다. ‘숨어 사는 선비의 즐거움’으로 한가로움과 풍류를 전하는 내용이었다.
필자와 남자는 함께 호흡과 감정을 조절하며 연습을 여러 번 했다. 작은 몸짓까지도 맞추며 우린 무대 위 완벽한 커플로 탄생할 참이었다. 그는 감청색 양복을, 필자는 양반가의 여인답게 하늘색 모시 저고리와 연청색 모시 치마를 기품 있게 받쳐 입고 한 손에는 부채를 들고 무대에 섰다. 인사도 맵시 나게 연습한 대로 잘했다.
이제 마이크를 숨소리 같은 부담스러운 잡음이 나지 않도록 조절하며 낭창거리는 소리로 낭송을 시작했다. 그와 필자는 주거니 받거니 하며 선비의 멋스러움과 풍류를 살려가며 한껏 분위기를 고조시켜나갔다. 필자의 대사가 끝나고 그가 할 차례가 되었다. 시작을 잘하는가 싶었는데 아뿔싸! 이상하게 같은 대사를 반복하기 시작했다. 두 번쯤 그러더니 소리가 끊겼다. 난감했다. 필자는 그의 대사까지 외우지 못했다. 스토리가 연결되는 글은 잊어먹어도 비슷한 내용으로 이어나갈 수 있지만 이런 수필은 단락이 끊어져 있어 외우기도 어렵고 중간에 잊어버리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할 수도 있다. 20개 정도의 단락을 각자 외우고 있었는데 단락의 시작을 찾아야 꼬이지 않고 술술 나오게 되어 있다. 그는 순간 당황했는지 단락의 처음부터 다시 낭송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끝을 맺었지만 자존심이 상한 것 같았다. 혹시 잊었으면 자연스럽게 다시 시작해도 사람들은 반복이겠거니 생각하기도 한다. 당황하지만 않으면 그럴 일은 별로 없다.
묵독이 아닌 낭독의 문화 즐기기
시는 글이 짧고 은유가 많아 청취자에게 전달이 쉽지 않을 때도 있지만 수필은 작가의 체험에서 나온 글이라 이해가 쉽고 공감이 잘된다. 그 대신 시보다는 외워야 할 분량이 많다는 어려움이 있다. 시와 비교해서 감정을 잘 살리면 즐거운 시간이지만 아니면 지루한 시간이 되기도 쉽다.
작품에 따라 무대 의상이나 헤어스타일, 효과음악을 고르고 표정과 작은 몸짓도 연구하고 무대에 오른다. 작품마다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와 마치 새로운 연인을 만나듯 가슴이 뛰고 활기가 넘친다.
필자는 4년째 기획, 연출, 낭송을 즐겁게 하고 있다. 함께하는 회원(10명)과 1년에 두 번씩 공식무대를 만들고 외부 초청 낭송에도 응한다. 작가의 강연 때 그의 작품을 낭송해 강의를 풍요롭게 하기도 한다. 눈으로만 읽는 것보다 작품에 생명을 불어넣는 효과가 있다.
꼭 문학단체가 아니라도 격조 있는 모임에서 옛 선비들이 시조를 읊듯 시나 수필 낭송을 원할 때도 있다. 종종 감동한 관객이 끝나도 움직이지 않는 경우가 있다. 보람이다. 얼마 전 어떤 문학회 출판기념회에서 초청, 낭송을 했는데 70명 정도 모이는 조촐한 모임이었다. 그 모임 지도교수님의 대표작 낭송이 끝나자 교수님은 벌떡 일어나 젖은 눈으로 다가와 필자에게 악수를 청하며 고맙다, 잘했다, 문우들은 그 작품을 다시 읽어봐야겠다, 그 작품이 이렇게 좋은지 몰랐다고 말했다. 낭송하는 시간은 마치 앞에 앉은 사람이 필자에게 눈을 맞추고 자신의 얘기를 진솔하게 털어놓는 듯하다. 그래서 몰입하면 깊은 내면을 함께 여행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수입은 낭송 작품당 보통 20~30만원을 받는다. 외우는 데 걸리는 시간이나 노력을 생각해서 그리 주시는 것 같다. 필자는 현재 두 개의 작품이 예약되어 있다. 하나는 피천득 기념 강좌에서 선생님의 작품 ‘보스턴 심포니’를 낭송하고, 또 하나는 일현수필문학회 송년회에서 손광성 선생님의 ‘누나의 붓꽃’을 낭송하기로 되어 있다.
미술을 애호하는 의사? 의료활동을 가끔 하는 미술 전문가? 이성낙 가천의과대 명예총장(79)을 지칭할 때 헷갈리는 이름표다. 베체트병 최고의 권위자인 그는 가천의과대 총장 퇴임 이후 일흔의 나이에 미술사 공부를 본격 시작했다. 의학 박사이자 미술사학 박사로서 그는 (사)현대미술관회 회장, (재)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을 지내는 한편, 다양한 매체에 문화 관련 칼럼을 기고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젠 문화인으로서의 명성과 활동이 의료인의 경력을 압도할 정도다.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장
인터뷰를 약속한 날, 그는 최근 한 달여 유럽 미술관 전시회를 혼자 순례하고 왔다며 문화의 향취에 젖은 표정이 역력했다. 사진 촬영을 생각지 못하고 평상복(?) 차림으로 와 어쩌냐고 걱정을 했지만 중절모에 세련된 비즈니스 캐주얼, 적당히 손때 묻은 가죽가방을 멘 차림은 단아한 문화인 그 자체였다.
퇴임 후 미술사 공부를 시작, 박사학위를 받으셨습니다. 취미로 즐기셔도 될 텐데 굳이(?) 박사학위에 도전하신 이유가 있었나요?
“한국 초상화에 나타난 피부병 연구, 이것은 한국에서 저 말고는 할 수 없는 분야란 절박감과 사명감이 있었습니다. ‘내가 그간 모은 자료들을 정리하지 않으면 모두 쓰레기가 된다. 내가 책임지고 반듯한 논문으로 남겨야 국내외로 인용될 것 아닌가’라는 사명감에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지요. 2008년 총장직을 사임하고, 사석에서 ‘초상화에 나타난 피부병 관련 자료가 많은데 어떻게 넘겨줄지 고민 중’이라고 털어놓았습니다. 그때 좌중에 있던 유홍준, 이태호 교수가 ‘대학원에 들어와 연구’를 하라는 조언을 하더군요. 그 말이 제가 평소에 갖고 있던 사명감을 부추겼다고나 할까요.”
그가 피부과 교수로서 초상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64년 뮌헨의과대학 졸업 종강강의 ‘예술작품에 나타난 피부병’을 듣고부터다. 당시 청년 의사 이성낙은 ‘예술을 의학적 시각에서도 접근할 수 있겠구나’ 하고 비로소 눈이 뜨이기 시작했다. 이후 유럽 미술관을 다니며 자료 수집을 하고 틈틈이 공부도 해왔다. 그 열매가 50여 년 만에 맺어진 셈이다.
피부병변을 통해 밝힌 한국 초상화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우리 선비문화의 정직성입니다. 죽기 전 영정에 해당하는 초상화들을 보면 중국, 일본과는 큰 차이가 있는데 바로 정직성입니다. 자료를 본격 수집하기 전엔 우리나라 초상화에는 피부병이 나타나 있지 않은 줄 알았어요. 그런데 막상 관찰해보니 우리나라 초상화의 83%에서 피부병이 확인되어 깜짝 놀랐습니다. 단지 17%만이 정상적인 피부란 이야기인데요. 예컨대 서예가 추사 김정희 선생님은 살짝 곰보였습니다. 이는 전기 등엔 안 나오는 사실이지요. 초상화들을 보면 곰보 자국, 여드름 자국, 다모증 등 실물 그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내시의 초상화는 수염을 그리지 않았지요. 다시 말해 그리는 사람이나 초상화를 요청한 사람이나 담담하게 가식 없이 있는 그대로를 표현하고 그리게 한 것이지요. 피사체가 장바닥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사회의 상위층 양반 그룹이라 지시를 통해 그리지 말라고 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도 담담하게 다 드러내 그리도록 한 것이지요. 조선 선비정신의 진수를 보는 것 같아 희열을 느꼈습니다.”
일흔의 나이에 전혀 다른 분야, 늦깎이 공부에 도전하셨습니다. 취미로 하셨다 해도 녹록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대학원생이나 교수진이 부담스러워하진 않던가요?
“퇴직하고, 2009년에 명지대에서 미술사 석·박사과정을 밟기 시작했지요. 공부도 힘들고, 주위의 눈길도 신경 쓰이긴 했지요. 또 뭘 읽어도 금방 잊어버리고…. 그렇다고 포기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예전에는 한 번 읽었다면 지금은 두세 번 반복해 읽는 노력이 필요할 뿐이지요(하하). 입학 전부터 전직(前職) 명함의 권위에 기대지 않겠다고, 그런 뒷소리를 듣지 않겠다고 단단히 각오했어요. 내 전직이 무엇인지 다 아는데, 불성실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엄청 노력했답니다. 설렁설렁 한다고 할까봐 강의 15분 전에 출석하고, 강의가 끝나면 맨 마지막에 나오는 등 성실한 학생으로서의 책임을 다했습니다. 100퍼센트 출석은 물론이고요. 무엇보다 큰 기쁨은 강의를 통해 그간의 부분적 지식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구슬이 한 줄로 꿰어지는 기쁨에 비유할 수 있어요. 늘 가르치던 입장에서 배우는 입장으로 돌아가 젊은 30대들과 동료가 된 재미도 적지 않았습니다.”
아주대 의대 학장과 가천의과대 총장으로 지내던 시절, 예술·인문·문화학을 정규 강좌로 개설해놓고 의학도들에게 의무적으로 듣도록 하셨습니다. 인문학을 이처럼 앞장서 강조해온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인문학은 공감학입니다. 여유가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제대로 살고 성찰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지요. 공연, 전시회, 책을 보며 우린 사람으로서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돌아보고 경계하게 됩니다. 영국에선 유명 연극배우에게 ‘Sir’라는 칭호를 줍니다. 정치가, 기업인보다 높이 평가하는 거지요. 배우는 황제, 살인자, 거지 등 인간의 다양한 삶을 펼쳐 보이며 다양한 인격을 구현해냅니다. 또 문학 서적을 읽으며 그 안에서 비겁한 사람도 보고, 정의로운 사람도 보고, 용감한 사람도 봅니다. 그들의 갈등을 제3자의 눈으로 보며 경계하고 배울 것이 무엇인지 의식을 갖게 하는 것, 그것 때문에 예술과 인문학이 중요하지요. 생명을 다루는 직업인 의료인에게도 특히 필요한 학문입니다.”
실제로 총장님 삶에서 인문학과 예술이 문제해결의 마스터키로 작용한 적이 있는지요?
“(하하) 네, 제가 독일 유학을 갔을 때입니다. 1950년대 말이니 한국인 유학생이 흔치 않을 때였지요. 기숙사 룸메이트가 저를 노골적으로 무시했습니다. 늦은 가을 기숙사로 들어가는데 룸메이트가 베토벤의 을 듣고 있는 걸 보고 나도 모르게 ‘베토벤!’ 하고 탄성을 질렀지요. 그날 그 말을 들은 친구와 밤새도록 베토벤 얘기를 했어요. 그 전까지는 한 달 동안 서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사이였는데 말이죠. 문화 예술을 통해 서로 소통하고 공감한 덕분이지요.”
인문학은 세대, 국가, 민족을 넘어 소통과 공감의 가교로 자리한다는 설명이었다. 그는 “진정한 교육은 잘난 사람, 있는 사람이 아니라 못난 사람, 없는 사람을 어떻게 일으켜 세우는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명문대 진학률을 평가의 잣대로 삼는 현행 입시체제는 잘못됐다, 사람의 아픔에 연민을 느끼고, 함께 나누고자 하는 인문학적 교육 인식이 필요하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흔히 십년지기(十年知己)라는 말도 있듯이 십 년 이상 알고 지낸 사이를 오래된 인연이라 표현합니다. 총장님을 안 지 저도 십 년 이상 됐는데요. 뵈면 ‘70년지기’ 유치원 친구들과 서로 이름을 부르며 친하게 지내시는 모습이 참 정겹습니다. 인연을 오래 유지하시는 비결이 무엇인가요?
“살아보니 사람에게 복 중의 최고 복은 인복(人福)이더군요. 돌이켜보면 친구, 학교 은사 등 제 주위엔 늘 인간적으로 훌륭하신 분이 많았습니다. 천운이라 생각하며 감사한 마음입니다. 그분들을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떨리고 행복해져요. 이들과의 귀한 인연을 돌이켜보니 공통점은 지속성입니다. 인간관계를 오래 유지하려면 지속적으로 가꿔나가야 합니다. ‘이 사람이 유용하다, 아니다’라는 계산에서 탈피해 순수하게요. 생각에만 그치지 않고 용건이 없어도 안부를 묻고 꾸준히 관심을 표현하는 것, 그것이 나의 우정 유지 방법입니다.”
그는 마르부르크대 의예과에 들어가 처음 만난 독일 친구와 아직까지도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요즘도 일주일에 한 번은 전화를 하고 2014년 박사학위를 받을 때는 부부가 함께 한국까지 일부러 와서 축하를 해주었다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얼마 전에는 신록의 연둣빛에 감탄해 “문득 네가 생각났다”는 메시지와 함께 사진을 보내니 바로 “어디에서든 우리에겐 봄소식이 들려온다”고 답장이 왔단다. 삶의 진정한 행복은 큰 행운이 아니라, 소중한 사람들과의 소소한 일상 나눔에 있다는 고백이었다. 그의 말을 들으며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에 있다’는 말이 떠올랐다.
어른들은 신세대에게 자신들의 풍부한 경험을 나눠주고 싶어 합니다. 신세대는 ‘꼰대의 잔소리’로 거부감부터 표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총장님의 세대 간 소통의 지혜는 어떤 것인지요?
“한마디로 역지사지입니다. 내가 이 말을 들으면 어떤 기분이 들까, 입장을 바꿔 미리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또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되도록 가르치려 들지 않아요. 지나가는 말처럼 사례를 들어 이야기하지요.”
이외에도 이 총장이 잘 쓰는 세대 간 소통 방법은 시사 현안을 갖고 그때그때 간단한 화두를 던지는 것이다. 그는 미술을 전공하는 손녀와도 현안에 관한 미니토론을 카톡으로 소소하게 나누곤 한다. 얼마 전 마네의 그림 를 패러디한 을 국회의원회관에 전시한 것이 문제됐을 때도 “예술에 있어서 역지사지란 무엇인가, 예술가는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 등을 생각해보면 좋겠구나” 하는 식으로 질문을 던지고, 간단히 코멘트를 해주며 손녀와 대화를 했다. 일방적인 주입보다는 사고의 확장을 이끌어내기 위해 인도하는 식의 대화 방식이다.
자제, 제자분들에게 평소 강조하시는 인생의 가치는 무엇인지요.
“첫째도 둘째도 정직입니다. 제가 의미하는 정직은 자기관리를 솔선수범해 실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퇴직할 때 ‘대과(大過) 없이 마쳤다’란 말을 관용어처럼 쓰지 않습니까. 그러나 혼탁한 현실에서 막상 이를 실천하려면 쉽지 않습니다. 부정이 만연한 사회에서 대과 없이 살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거든요. 소극적으로 들리지만 적극적 행동강령이에요. 운도 정직에서 비롯되고, 불운도 정직하지 못한 데서 온 것입니다. 예전에 선현들은 무첨(無添), 즉 선조에게 죄를 더하지 말라는 말을 자주 하셨어요. 욕되게 하지 말라는 뜻이지요. 고리타분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살수록 진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선조, 가족, 자식 앞에 부끄럽지 않고, 그들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고 당당한 삶을 사는 것, 그것 이상이 있을까요. 담담해야 당당할 수 있고 욕심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의 아들이 회사에 갓 입사했을 때 제일 먼저 강조한 것도 돈에 대한 정직이었다. 그것의 구체적 행동강령으로 ‘현금을 수금할 때 당일 보고, 당일 입금’을 실행할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이 총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혹시라도 먼저 입사했다고 친구들에게 밥 살 일 있으면 쩨쩨하게 굴지 말고 아버지 이름 대고 밥 사라’고 자신의 단골식당을 아들과 함께 돌아다니며 일일이 인사시켰다고.
마지막으로 현역 프리랜서로서 ‘인생의 브라보’를 외칠 수 있는 조언을 들려주시겠습니까?
“호기심과 활력을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꾸 힘들다, 어렵다, 귀찮다 생각하면 도태되고 배제돼요. 행동반경이 좁아지면 사고반경, 사람반경도 좁아집니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저는 지인들이 부르면 불원천리, 산 넘고 물 건너 달려가고요. 지하철에선 되도록 자리를 양보받지 않아요. 손잡이를 양손으로 잡고 서 있으면 오히려 균형력 강화에 좋습니다. 휴대폰은 신제품 출시 소식이 나오면 즉시 바꾸는 얼리어답터입니다. 지금 편한 것에 길들여지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노력해야 해요. 아웃 오브 사이트, 아웃 오브 마인드. 눈에 보이지 않으면 잊힙니다. 이런저런 핑계 대지 말고 새로운 공부, 도구, 환경에 도전하세요.”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 소장
연세대학교 졸업. 경영학 박사.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리더십 스토리텔러. 세계일보에서 CEO 인터뷰 전문기자로 활약했다. 세계경영연구원(IGM)과 삼성경제연구소 등에서 강의했다. 저서로는 , , 등이 있다.
동양 문화권인 중국이나 일본 초상화 역시 각기 조선시대 초상화와 비슷하면서도 분명한 차이점을 보여준다. 중국 초상화는 피사체의 복장이 화려한 문양으로 권위를 마음껏 ‘뽐내고’ 있다[사진 1]. 그리고 일본 초상화는 얼핏 간결하고 담백한 아름다움을 보이는 것 같지만 피사체의 의상인 ‘하오리(羽織)’의 양 어깨선이 일직선과 함께 날카로운 각(角)을 형성하고 있다. 더 일본적인 문화 코드라고 할 수 있는 ‘일본도(日本刀)’를 초상화에서 본다[사진 2]. 이는 일본 문화를 ‘국화와 칼’이라는 두 단어로 절묘하게 상징화한 미국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Ruth Benedict, 1887~1948) (1946)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이처럼 중국 초상화에서는 의상의 화려함을 통해 권위를 과장하고, 일본 초상화에서는 날카로운 일직선과 각, 그리고 장도(長刀)로 권위를 강조한다. 즉 중국과 일본의 초상화는 형태와 표현 방법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가식(加飾)이라는 점에서는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조선시대 초상화에서는 가식이나 과장이 배제되어 있다. 란(亂)을 평정한 공을 인정해 조정에서 내린 공신상(功臣像)을 보아도 사뭇 다르다[사진 3].
우리 초상화의 피사체 대부분이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선비들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왜 초상화에서 선비정신의 맥을 짚을 수 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는 바로 우리 문화사의 자랑스러운 큰 획인 정직함의 결정체이며, 조선시대를 관통한 민족혼의 다른 발현(發現)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더욱더 필자는 근래의 부끄럽고 혼탁하기만 한 우리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길잡이로서 ‘조선시대의 선비정신’을 절실한 마음으로 되새겨본다.
>이성낙(李成洛) 현대미술관회 회장
독일 뮌헨의대 졸업(1966), 연세대의대 피부과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가천의과대학교 총장, 가천의과학대학교 명예총장(현), 한국의약평론가회 회장(현), 간송미술재단 이사(현).
전남 진도의 고군면 회동리에서 의신면 모도리까지 2.8km의 바다가 해마다 두 번씩 3월에 사흘, 4월에 나흘간 조수간만의 차(差)와 인력(引力)의 영향으로, 수심이 낮아지고 물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한 시간 동안 폭 40여 미터의 길을 연다. ‘모세의 기적’에 비견되기도 하는데, 열리는 바닷길을 걸으며 갯벌을 체험하는 ‘바닷길 축제’가 올해는 4월 26일부터 29일까지 열린다.
아득한 옛날부터 그랬듯이, 어부는 이때를 놓칠세라 등짐을 잔뜩 지고, 어부의 딸은 봇짐을 머리에 이고 그 길을 가고 있다. 한쪽 바다는 격랑의 물결이 사납다. 두려운 이 길을 건너고 있는 부녀는 불편한 돌길에 두 발을 묻고 있다. 옥주산인 김옥진(沃州山人 金玉振, 1928~2017)의 한국화 은 고향의 어느 봄날의 실경(實景)이다. 진도군 임회면에서 출생, 진도의 옛 이름인 옥주(沃州)에서 옥주산인(沃州山人), 옥산(沃山)을 아호로 취했다. 조선 남종화의 시대를 연 운림산방 소치 허련(小痴 許鍊, 1809~1893)의 아들 미산 허형(米山 許瀅, 1862~1938)에게서 방손(傍孫)의 의재 허백련(毅齋 許百鍊, 1891~1977)이 묵화를 배우고 그를 사사한 옥주산인이 같은 남종화의 길을 걸었다. 또 일제에 의해 타율적으로 만들어진 동양화(東洋畵)라는 명칭을 한국화(韓國畵)로 바꿔야 한다고 주창하고 실천했다.
옥주산인 김옥진
1979년 제28회 국전에서 영예의 초대작가상을 받은 은 전통적인 문인화에서 벗어난 작품으로 진도 앞바다 울돌목(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 격전지)의 소용돌이치는 실경을 파격적으로 표현했다. 옥주는 처음 의재를 뵈올 때도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의 임화(臨畵)를 그려와 펼쳐 보였을 정도로 남달랐다. ‘진도농업실기학교’를 다닌 바 있는 그는 의재를 사사하며 의재 선생이 1947년 광주에 세운 ‘농업고등기술학교’ 교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10여 년간 시서화(詩書畵)뿐 아니라 춘설헌(春雪軒, 의재 허백련 선생이 1956년 차밭 아래에 화실로 사용했던 곳)의 차 재배와 생산 및 다도(茶道)의 보급 등 명실공히 의재의 고고한 선비정신까지 계승했다. 주위의 예술인들은 “큰 바위와 같이 굵직한 인품을 지니고, 다정다감하면서도 안목이 굉장히 예리하다”고 칭한다.
오래전 한 도예가의 작업실에서 코발트와 철화(鐵畵), 진사(辰砂)의 안료를 붓에 찍어 도자화를 그리던 옥주 화백을 만나 뵈었는데, 두어 시간 차를 마시며 안광(眼光)을 빛내 열강하던 ‘개결한 예술인의 품성’을 잊을 수가 없다. 그날 수선화를 그린 소품도 받았는데, 그 순간 1972년 무등산자락 ‘춘설헌’으로 의재 선생을 찾아가 큰 절로 뵈었을 때 따라주셨던 ‘춘설차’의 깊은 향이 맴도는 듯했다.
을 통해 옥주 화백은 ‘스스로 걷고 있는 예도(藝道)를 표현하고자 한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지고(至高)하되 그러나 신산한 그 길이 이 어부가 식솔과 가고 있는 두렵고 불안한 천형(天刑)의 바닷길과 같을 것이다. 발을 삐끗하면 격랑의 물결 속에 매몰될 것이고, 빨리 지나가지 않으면 이 길은 바닷물에 덮일 것이기 때문이다. 친한 수집가에게서 빼앗다시피 해서 갖고 온 이 그림을 펼쳐놓을 때마다 ‘나는 과연 내 길을 바르게 걷고 있나?’ 하고 자성(自省)하게 된다.
우현 송영방
봄기운이 슬며시 산자락 밑 개울의 얼음을 녹이더니, 어느새 낮은 산 양쪽 계곡으로 물이 모여 제법 넓은 내를 이루었다. 개울 위 한쪽에는 좁은 섶다리도 놓였고 두 개울이 만나는 얕은 둔덕에 마른 잡초도 촉촉한 생기로 일어서고, 물가의 버들개지일까 잎끝이 연두의 점을 찍었다. 소나무들이 곧게 자라서 무리를 짓거나 작은 길 둔덕에 즐비하다. 개울 건너 경사가 완만한 조그만 산밭에서는 늙은 촌부가 누런 소에 쟁기 매어 밭갈이 한창이고, 노처는 고개 숙여 씨앗을 묻기에 여념 없다. 쟁기를 지고 왔던 지게와 씨앗을 담아온 종다래끼가 빈 밭의 허전한 구도를 깨고 있다. 한 해의 첫 봄갈이가 시작된 것이다. 먹의 농담만으로 그려진 산봉우리는 가로 그은 옅은 붓질이 겹쳐 유현한 빛을 발하고, 담박(淡泊)한 선으로 단숨에 그려진 개울이며 산밭이며 소나무들까지 소박한 실경을 그대로 표현했다. 여느 풍경화보다 고향의 산자락을 생각나게 해, 온라인 경매에서 낙찰받았다.
를 그린 우현 송영방(牛玄 宋榮邦, 1936~)은 경기 화성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국전에서 특선을 하며 화업의 길로 들어선 분이다. 대학 3학년 중반까지 서양화를 그리다 “물감의 느끼한 기름기가 싫어서 한지에 먹으로 그리는 붓을 잡았다”고 술회했다. 대학 스승 월전 장우성(月田 張遇聖, 1912~2005)과 산정 서세옥(山丁 徐世鈺, 1929~)에게서 문인화의 높은 경지를 사사한 그는 유년기에 한학을 하던 선친에게서 붓 잡기를 익혔고 고향집 벽장, 두껍닫이에 붙은 민화(民畵)를 따라 그려보곤 했다고 회고했다. 신문이나 잡지에 삽화(揷畵)를 그려 용돈을 마련했던 대학 시절에는 하찮게 여기던 삽화의 경지를 심의(心意)의 그림으로 고양(高揚)시켰다는 출판인들의 찬사를 받았으며 삽화를 삽도(揷圖)라 바꾸어 부르기도 했다. 법정(法頂, 1932~2010) 스님 수상집 표지화 등은 지금도 ‘격조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15년 3월 31일부터 6월 28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은 그의 화업을 정리하는 회고전이었다. 오채라 함은 먹의 농(濃), 담(淡), 건(乾), 습(濕), 초(焦)나 흑(黑)을 가리키며 먹색의 풍부한 변화를 의미한다. 그는 불교 재단인 동국대학교에서 교수와 예술대학장으로 정년퇴임을 한 뒤에도 불가의 오묘한 세계를 그리기도 했다. 그의 아호는 12세기 북송 말엽 곽암사원(廓庵師遠, 생몰년대 미상) 선사(禪師)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에서 ‘우(牛)’를 취하고, 노자(老子)의 제1장에 나오는 현지우현, 중묘지문(玄之又玄, 衆妙之門, 멀고 또 그윽하도다! 뭇 묘함이 그 문에서 나오는도다!)에서 ‘현(玄)’을 취했다고 한다.
그는 먹을 풀어 담담한 문인화풍의, 그러나 실경을 농축된 심경으로 진솔하게 나타내고자 노력했다. 그의 많은 그림의 특징은 채색 물감을 극도로 절제하고 있다는 데 있다. 먹만으로 완성했음에도 결코 어둡거나 무겁지 않다. 또 먹의 선이 간결하고 날씬하되 요체(要諦)를 응집시켜 군더더기나 부족함이 없다. “그림을 그릴 때 채색을 피하고 먹을 위주로 그리는데 그 이유는 먹의 오묘함이 어떤 화려한 색보다 그 전달력에 있어 능란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바람은 나의 개성 표현에 있습니다. 자기다운 것을 하기 위해 예술을 덩어리화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화려한 색채의 화초보다는 길섶의 질경이꽃같이 살고 싶습니다.” 한 인터뷰에서 우현이 한 말이다.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 리뷰어.
조선시대 초상화를 보면서 다양한 피부 증상을 확인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럼에도 조선시대 후기의 걸출한 문신으로 영의정을 지낸 당헌 서매수(戇憲 徐邁修, 1731~1818)의 초상화를 보노라면 심한 여드름 자국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피부과학을 전공한 뒤 그동안 수많은 여드름 환자를 진료해온 필자가 보기에도 서매수 초상화에 묘사된 여드름 자국은 생생하기 이를 데 없다.
서매수 초상화를 처음 봤을 때 필자는 조선시대 초상화에서 흔히 관찰되는 천연두 자국인 줄 알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얽은 자국’이 코, 입 그리고 턱 주위에 퍼져 있었다. 요컨대 코를 중심으로 마름모꼴 안에 ‘얽은 자국’이 모여 있었고, 이마와 양 볼에는 상대적으로 증상 밀도가 낮았다. 이는 여드름 병변의 교과서적인 분포를 보여주는 사례였다. 여드름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피부의 기름샘, 즉 피지선(皮脂腺)이 상대적으로 코와 입 주변에 몰려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울러 피사체인 선비가 청소년 시절 겪어야 했을 심리적 고뇌를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어 애잔하기까지 했다.
예나 지금이나 여드름 때문에 겪는 아픔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느 날, 한 지방법원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법원에서 뜬금없이 걸려온 전화라 고개를 갸웃하며 받았다. 그런데 첫마디가 “저는 ○○○의 아비 되는 사람입니다”였다. 잘 기억나지 않는 이름이라 머뭇거리고 있는데, 수화기 저쪽에서 말을 이어왔다. “얼마 전 여드름을 치료해주신 ○○○의 아비입니다.” 그제야 환자의 얼굴이 생각났다.
대학생인 그 환자가 진료실을 찾아왔을 때 필자는 내심 놀랐다. ‘어떻게 얼굴을 이런 상태가 되도록….’ 그 정도로 여드름 병변이 심각했던 것이다. 대학생인 본인에게도 문제가 있지만 이런 상태가 되기까지 방치한 부모의 무관심을 속으로 탓했다.
다행히 적절한 치료를 받으면서 환자의 상태는 예상보다 빠르게 호전되었다. 여드름이 치유되자 우울해 보였던 청년의 얼굴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담당 의사로서도 너무나 기쁜 일이라 자연스레 환자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환자의 부친은 필자에게 “요즘 아들 방에서 노랫소리가 흘러나와서, 너무 기쁜 마음에 고마운 마음을 전하려고 전화를 드렸습니다”라고 말했다. 순간 젊은 학생이 그동안 느꼈을 마음고생이 한층 무겁게 다가왔다. 그 무렵 인천에 사는 한 여학생이 심한 여드름 때문에 고민하다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던 터라 더욱 그랬다.
문득 필자가 전문의 수련 과정을 밟을 때 스승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하찮은 뾰루지 하나가 이마나 볼에 생겨도 힘들어하는 환자가 있다. 의사는 그런 마음을 늘 헤아려야 한다.” 환자의 부친과 통화를 하면서 새삼 스승의 가르침을 한 번 더 마음에 새겼다.
앞서 언급한 초상화의 주인공도 젊은 시절 심한 여드름 때문에 꽤나 마음고생을 했으리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누가 여드름을 ‘청춘의 꽃’이라고 했던가. 이 그럴듯한 말에 숨겨진 심리학적 해석을 차치해도, 그동안 여드름 때문에 필자의 진료실을 찾았던 수많은 환자들의 잔영이 기록영화처럼 뇌리를 스치는 날이다.
이성낙(李成洛) 현대미술관회 회장
독일 뮌헨의대 졸업(1966), 연세대 의대 피부과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가천의과대학교 총장, 가천의과학대학교 명예총장(현), 한국의약평론가회 회장(현), 간송미술재단 이사(현).
조선호텔 앞에서였다. 막 그곳을 통과하던 필자는 좀 이상한 광경을 보았다. 청바지에 티셔츠를 걸친 한 남자가 머리에 갓을 쓰고 있었다. 한 손에 부채를 든 채로 여유 있게 사방을 훑어보고 있었다. 그가 일본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 화가 났다. 조선의 선비가 쓰는 갓을 청바지 위에 함부로 쓰고도 점령군처럼 안하무인이라니. 필자의 눈에선 퍼런 레이저가 발사 되었다.
그도 앳되어 보이는 20대 여성이 갑자기 자기를 노려보니 당황했을 것이다. 그는 피하듯 내 앞에서 사라졌다. 필자의 대학생 시절 이야기다. 식민시절의 열등감에 사로 잡혀 우리에게 돈을 쓰러온 일본인에게 레이저를 발사하며 그것을 애국심으로 착각하는 오류를 범한 것이었다. 그 시절 필자가 집착했던 것은 과거의 상처였고 피해의식이었다. 일제시대, 가난하고 힘없는 나라의 백성이 겪어야 했던 부당한 고통과 무기력함에 화가 났는지도 모른다. 지난 일을 잊지는 말아야겠지만 매몰되어 있어서도 안 되는 것 인데 과잉 대응한 것은 필자의 좁은 시야 때문이었다.
8.15광복절. 침략 당했고 수탈당했던 순간만 이를 갈며 되 뇌일 수는 없다. 왜, 왜, 왜? 라고 질문하며 맞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끼리 뭉쳐서 힘을 키워야하는 이유를 이미 다 알고 있다. 우리 외에 아무도 우리의 영원한 우방은 없으며 자기 나라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 하고 있다는 것을 잊는 건 불행의 시작이다.
조선의 당파가 나라를 망쳤다고 한다. 무력한 왕이 정세 파악을 못해 망쳤다고 한다. 지금은 어떤가? 남북으로 갈려 대치하느라 아까운 돈을 군사적 비용으로 낭비하고 있고 동족상잔의 비극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나라는 연일 통치자와 정치인을 비난하느라 시끄럽다. 어디나 말 많은 사람은 있게 마련이지만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거짓 정치가를 가려내려면 어찌해야 할까?
어린 시절 참 가난했다. 요즘 TV에서 가난한 나라의 굶주림을 볼 때 그 시절의 절망이 떠오른다. 조금 살림이 피었다고 노름으로 패가망신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면 여전히 부지런하고 정직하고 겸손해야 한다. 가난하지만 희망을 가지고 역동적인 삶을 살아가는 청년이 눈앞에 그려진다. 도전과 불굴의 패기로 현재를 만들어 나간 대한민국의 사나이들. 좋은 기운이 넘치는 우리 조국 대한민국이 언제나 청년이기를 바란다.
할아버지께서 생전에 선암이란 이름은 마을 앞까지 배가 들어와서 배를 묶는 바위가 있어서 그렇게 불리었다고 내가 어릴 때 말씀해 주신 기억이 난다. 아마도 오래전에 심한 지각 변동이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바다에서 먼 이곳까지 배가 들어올 수 없기 때문이다. 월출산을 바라보면서 우리 선조께서 4월의 따스한 기온이 내리쬐는 이곳 선영에 자리하고 계시는 모습을 볼 때 마다 마음이 참 편안해짐을 느낀다.
어제 일요일이 시제를 지내는 날이라 오랜만에 시제에 참례하였다. 오전 3시 반에 일어나 준비를 하고 6시 서울을 출발하여 10시쯤 선영에 도착하였다. 증조부모님부터 조부모님 그리고 백부모님 순서로 인사를 드린 후에 시제를 지내고 나서 옛날 조부모님께서 사시던 고가로 돌아오니 자연스럽게 사촌들이 함께 모여 오순도순 이야기하는 기회가 되었다.
시제에 참여하신 집안 당숙과 숙모님, 그리고 형님뻘 되시는 나이든 형님 및 형수님들과 함께 자리하니 객지생활만 하던 나도 고향이란 이런 곳인가 하는 느낌이 든다.
사촌 큰 형님이 양자로 갔으나 같은 집안이라 여전히 시제 준비를 제수씨들과 함께 형수님께서 주로 하신 것 같다. 마침 바로 밑의 사촌 동생이 시골로 귀향하여 옛날 고가를 수리하여 생활하고 있으니 마치 옛 어른들을 뵙던 과거의 일들에 대한 기억이 봄날 새싹 돋아나듯이 생각났다.
건너 방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계시던 곳이었다. 기침을 유달리 많이 하시면서도 족보관련 말씀을 즐겨 해주셨던 할아버지, 만석궁의 딸로 시집와서 고생하시면서 지내셨지만 항상 우아한 모습과 여유를 지니셨으나 동네 아시는 분들에게 부족한 손자 자랑은 부끄러움 없이 꽤 많이 하셨던 우리 할머니가 생각나자 눈시울이 시큰거린다. 그분들의 체취가 갑자기 그리워졌다. 우리 아버지가 효자이셨기에 나도 가끔 그런 흉내를 내려고 해왔다. 사탕을 드리면서 누워 계실 때 책을 읽어드리거나 안마해드리면 즐겨하시던 모습, 소원을 여쭤보고 해결해 드리기 위해 노력하던 기억들이 눈물 속에 아롱거렸다.
우리 선영은 월출산을 마주보며 위치해 있어 산을 좋아하셨던 옛날 선비들의 취향에 꼭 어울리는 것 같다. 공자도 지자요수(知者樂水), 인자요산(仁者樂山)이라 하였으니 선조께서는 물과 산을 함께 좋아하셨던 것 같다. 아마 그분들은 해마다 이때쯤 산 아래서 실시되는 왕인박사 관련 축제행사도 다 지켜보고 계실 것만 같다.
14대 선조께서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하시어 계시다가 귀경 후에도 4형제의 막내아들인 우리 직계 선조인 후(後)자 경(庚)자 할아버지께서 영암의 최 씨 집안의 규수와 결혼하시어 계속 사시면서 일가를 다시 일으키신 곳이다. 연전에 14대 조부께서 사시던 생가와 한석봉 등을 제자로 학문을 가르치던, 그리고 조선시대 이이 율곡과 같은 대학자들과 학문을 논하던 이우당을 방문하였던 생각이 난다. 결과 지금은 반상의 구별이 없어졌지만 지금도 옛 어르신들로부터 이 지역 최고의 가문이라는 칭송을 받는다.
바로 위 형님이셨던 선(先)자 경(庚)자 할아버지는 지금 서울 오금 공원에 영면해 계시고 그 비석은 시울시 문화제 75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 위의 두 분 할아버지 선(先)자 갑(甲)자 와 후(後)자 갑(甲)자 할아버지는 서울 수락산의 선산에 영면해 계신다. 그러고 보니 내가 지금 서울에 정착해서 살고 있는 것은 우연히 아니고 조상님과 함께 하기 위함인 것도 같다. 이름이 비슷하여 족보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두 분은 쌍둥이셨다. 그래서 어쩌면 약간은 의도적으로 우리 직계 할아버지가 결혼하여 멀리 떨어져 살게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내 영혼의 고향은 달이 처음 비추는 곳이라는 바로 월출산의 정기가 서린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