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면 시원한 대나무 그늘이 생각난다. 대나무는 그 성질이 굳고 곧아서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좋아했다. 그런데, 이 대나무를 가리켜 ‘차군(此君)’, 즉 ‘이 군자(君子)’라고 해서 우리나라의 경우, 뒤에 대나무 숲이 있는 정자에 차군정(此君亭) 또는 차군헌(此君軒)등 당호(堂號)를 붙여놓고 있다.
그러면 ‘차군(此君)’이란 용어는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중국 동진(東晉) 시대, 서성(書聖)으로 일컬어지는 왕희지(王羲之)란 인물이 등장한다. 왕희지에게는 7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중 이름이 알려진 사람은 모두 5명으로, 현지(玄之) 응지(凝之) 휘지(徽之) 조지(操之) 헌지(獻之)가 그들인데 그중 5남인 왕휘지(王徽之)가 특히나 대나무를 좋아했다. 워낙 특이한 성격이었던 그와 대나무에 대한 일화가 ‘진서(晉書)’에 전해지는데, 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당시 오(吳) 땅에 한 사대부가 좋은 대나무를 가꾼다는 말을 듣고, 휘지가 이를 보러 갔다. 도착해서 죽림 아래 가마에 앉아 감상을 하며 시를 읊조리고 있으니, 주인이 마당을 쓸다가 들어와 앉기를 권했으나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주인이 나중에 출타함에 문을 걸어 잠그니, 비로소 탄식을 하고 자리를 떴다.’
그의 또 다른 일화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한 번은 남이 비워둔 집에 임시로 기거하고 있었는데, 집 주위에 대나무를 심었다. 사람들이, 자신의 집도 아닌데 왜 심느냐 묻자 대답하길, “하루라도 이 군자[此君]를 보지 않고 어찌 견딘단 말인가!”[何可一日無此君邪] 하였다.)’
이 고사는 매우 유명해서, 훗날 대나무를 지칭하는 용어인 ‘차군’이란 단어가 여기서 탄생하였다. 마지막으로, ‘차군’이란 용어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소동파의 시 ‘어잠승녹균헌(於潛僧綠筠軒)’을 소개한다.
可使食無肉(가사식무육)
식사에 고기가 없을 수는 있어도
不可居無竹(불가거무죽)
사는 곳에 대나무는 없을 수 없네.
無肉令人瘦(무육영인수)
고기 없으면 사람을 야위게 하지만
無竹令人俗(무죽영인속)
대나무 없으면 사람을 속되게 한다오.
人瘦尙可肥(인수상가비)
사람이 야위면 살찌울 수 있으나
士俗不可醫(사속불가의)
선비가 속되면 고칠 수 없는 법이라오.
傍人笑此言(방인소차언)
옆 사람 이 말을 듣고 비웃으면서
似高還似癡(사고환사치)
고상한 것 같으나 실은 어리석도다. (대나무도 앞에 두고 고기도 실컷 먹으면 되지 않느냐는 말임)
若對此君仍大嚼(약대차군잉대작)
그러나 대나무 앞에 두고 고기 실컷 먹는다면
世間那有揚州鶴(세간나유양주학)
세상에 어찌 양주학(揚州鶴)이란 말 있었겠는가?
이 시를 해설하자면, 옛날에 손님들이 서로 노닐면서 각자 자신의 소원을 말했는데, 어떤 자는 양주자사(揚州刺史)가 되기를 원하고, 어떤 자는 재물이 많기를 원하고, 또 어떤 자는 신선이 되어 학(鶴)을 타고 하늘에 오르기를 원하였다. 그러자 그중 어떤 자가 말하기를 “나는 허리에 십만 관(貫)의 돈을 차고, 학을 타고서, 양주의 하늘을 오르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그러니 ‘양주학’이란 말은, 양주자사라는 관직과 십만 관의 돈과, 학을 타고 하늘에 오르는 신선이 되겠다는 욕망을 모두 가지려는 것으로, 실현 불가능한 욕심을 나타낸다.
뉴욕 주립대(빙햄튼) 경제학 박사, 보아스 투자자문 대표이사, 수원대 금융공학대학원장 등 역임.
여름이면 시원한 대나무 그늘이 생각난다. 대나무는 그 성질이 굳고 곧아서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좋아했다. 그런데, 이 대나무를 가리켜 ‘차군(此君)’, 즉 ‘이 군자(君子)’라고 해서 우리나라의 경우, 뒤에 대나무 숲이 있는 정자에 차군정(此君亭) 또는 차군헌(此君軒)등 당호(堂號)를 붙여놓고 있다.
그러면 ‘차군(此君)’이란 용어는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중국 동진(東晉) 시대, 서성(書聖)으로 일컬어지는 왕희지(王羲之)란 인물이 등장한다. 왕희지에게는 7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중 이름이 알려진 사람은 모두 5명으로, 현지(玄之) 응지(凝之) 휘지(徽之) 조지(操之) 헌지(獻之)가 그들인데 그중 5남인 왕휘지(王徽之)가 특히나 대나무를 좋아했다. 워낙 특이한 성격이었던 그와 대나무에 대한 일화가 ‘진서(晉書)’에 전해지는데, 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당시 오(吳) 땅에 한 사대부가 좋은 대나무를 가꾼다는 말을 듣고, 휘지가 이를 보러 갔다. 도착해서 죽림 아래 가마에 앉아 감상을 하며 시를 읊조리고 있으니, 주인이 마당을 쓸다가 들어와 앉기를 권했으나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주인이 나중에 출타함에 문을 걸어 잠그니, 비로소 탄식을 하고 자리를 떴다.’
그의 또 다른 일화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한 번은 남이 비워둔 집에 임시로 기거하고 있었는데, 집 주위에 대나무를 심었다. 사람들이, 자신의 집도 아닌데 왜 심느냐 묻자 대답하길, “하루라도 이 군자[此君]를 보지 않고 어찌 견딘단 말인가!”[何可一日無此君邪] 하였다.)’
이 고사는 매우 유명해서, 훗날 대나무를 지칭하는 용어인 ‘차군’이란 단어가 여기서 탄생하였다. 마지막으로, ‘차군’이란 용어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소동파의 시 ‘어잠승녹균헌(於潛僧綠筠軒)’을 소개한다.
可使食無肉(가사식무육)
식사에 고기가 없을 수는 있어도
不可居無竹(불가거무죽)
사는 곳에 대나무는 없을 수 없네.
無肉令人瘦(무육영인수)
고기 없으면 사람을 야위게 하지만
無竹令人俗(무죽영인속)
대나무 없으면 사람을 속되게 한다오.
人瘦尙可肥(인수상가비)
사람이 야위면 살찌울 수 있으나
士俗不可醫(사속불가의)
선비가 속되면 고칠 수 없는 법이라오.
傍人笑此言(방인소차언)
옆 사람 이 말을 듣고 비웃으면서
似高還似癡(사고환사치)
고상한 것 같으나 실은 어리석도다. (대나무도 앞에 두고 고기도 실컷 먹으면 되지 않느냐는 말임)
若對此君仍大嚼(약대차군잉대작)
그러나 대나무 앞에 두고 고기 실컷 먹는다면
世間那有揚州鶴(세간나유양주학)
세상에 어찌 양주학(揚州鶴)이란 말 있었겠는가?
이 시를 해설하자면, 옛날에 손님들이 서로 노닐면서 각자 자신의 소원을 말했는데, 어떤 자는 양주자사(揚州刺史)가 되기를 원하고, 어떤 자는 재물이 많기를 원하고, 또 어떤 자는 신선이 되어 학(鶴)을 타고 하늘에 오르기를 원하였다. 그러자 그중 어떤 자가 말하기를 “나는 허리에 십만 관(貫)의 돈을 차고, 학을 타고서, 양주의 하늘을 오르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그러니 ‘양주학’이란 말은, 양주자사라는 관직과 십만 관의 돈과, 학을 타고 하늘에 오르는 신선이 되겠다는 욕망을 모두 가지려는 것으로, 실현 불가능한 욕심을 나타낸다.
팔순이 넘은 지금에도 쉬지 않고 달리고 있는 대한민국 대표 정신과 의사이자 뇌과학자 이시형(李時炯·81) 박사는 최근 새로운 도서 를 발표하여 또 한 번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르내리고 있다. 또한 문인화 화가로서, 그리고 세로토닌 문화원장으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그의 레이스는 멈출 줄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동시대의 멘토로서 여유있게 좀 느슨하게 사는 그가 품고 있는 삶의 철학과 지혜를 엿본다.
이시형 박사는 처음 라는 책을 만들어 보자는 제안을 출판사로부터 들었을 때를 속된 말로 ‘느낌이 확 왔다’고 표현했다. 1982년, 첫 번째 저서인 로 단숨에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그에게 있어 라는 제목은 자신의 첫 번째 책에 대한 33년 만의 대답처럼 보였다.
잘 산다는 것의 의미 새로 정의해야
“우리나라 사람들은 낯선 사람과의 교류 경험이 적습니다. 그런 데다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이 살고 있는 도시라는 공간 자체가 사람을 위축시키는 힘이 있어요. 지독한 무한경쟁 속에 사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목표지향적이고 밤낮이 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런 환경과 조건들 때문에 합리적인 사람이 아니라 격렬하고 거친 사람이 자연스럽게 될 수밖에 없는 거죠. 속전속결에 한탕주의까지 익숙해지니 원칙을 지킬 수 없는 사회가 만들어진 겁니다. 세월호 사고도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정신과의사로서, 이 박사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너무 과민하게 살다 보니 피해의식이 굉장히 많아졌다고 진단했다. 단지 우연히 쳐다봤을 뿐인데 시비를 걸어 폭행 사고를 일으키는 젊은이, 사방에 깔린 CCTV, 은행을 못 믿어서 옷장 안에 돈을 숨기는 노인들. 이 박사가 바라보는 한국 현실은 이미 병적인 사회다.
“지금 우리 사회는 절대로 건전한 사회가 아닙니다. 이렇게 사람을 과민하게 만드는 사회인 걸요. 그래서 저는 좀 순하게 살자고 말하고 싶은 겁니다. 지는 건 용납이 안 된다, 반드시 이겨야겠다는 생걱은 기본도 지키지 않고 정도를 걸을 수 없게 만듭니다. 요즘 사람들은 손해를 좀 보더라도 정도를 걸으며 원칙대로 살아야 할 필요가 있어요.”
뜨겁고 폼나게 사는 법
어느 샌가 원칙이 사라진 사회. 1934년생으로 올해로 81세를 맞이한 그의 원칙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저녁이 되면 (운전)기사는 집에 보내고 저는 지하철을 타며 다니고 있어요. 기사가 내 스케줄을 못 따라오거든요. 하루에 17시간을 일해야 하니까. 그래도 감기 몸살 앓아본 적 없습니다. 4시 30분에서 5시면 기상합니다. 일어나서 운동은 한 20분 정도 간단하게 하고 그게 부족하다 싶으면 건물 10층까지를 계단으로 올라가죠.”
요즘 이 박사의 일상 중에서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힐리언스 선마을이다. 강원도 홍천군에 위치한 힐리언스 선마을은 자연을 닮은 공간을 만들고자 한 이 박사의 의지가 이뤄진 결실이며 다양한 힐링 프로그램들을 운영하고 있는 중이다. 그는 힐리언스 선마을을 인터뷰 전날에도 다녀왔을 정도로 열성적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이 박사의 일상을 점유하고 있는 또 하나의 요소는 문인화다. 문인화란 먹을 이용해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써서 시와 그림의 조화를 추구하는 그림으로 조선시대 선비와 사대부층에서 즐겨 그려졌다. 그가 문인화를 하게 된 사연은 삶의 어떤 돌발과도 같은 일 때문이었다.
“대전에 갔을 때 노숙자를 한 명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예전에 제가 치료했던 환자였어요. 그는 열 번의 사업을 다 실패하고 가족과도 헤어져 노숙자로 사는 중이었죠. 정말 진실하고 착했는데도 불구하고. 대전에서 돌아오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했던 일들은 모두 그 과정이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결국 되긴 되더라고요. 그런 내가 열 번을 실패한 사람에게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그 아픈 심경을 공감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내가 제일 못하는 걸 해보자고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그림을 배우게 됐어요.”
80 평생 처음 들은 칭찬
이 박사는 미술 시간이면 선생님이 ‘밖으로 나가 공이나 차라’고 할 정도로 그림 실력이 형편없었다. 미술을 하면 틀림없이 실패할 것이라는 자괴감이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함께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교실 뒷벽에 한 번도 그림을 못 붙여본 사람을 20여 명 모았다. 그리고 김양수 화백을 그림 선생으로 모시고 문인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사군자를 그렸어요. 그런데 아무리 재도전해도 난 도저히 못 그려서 포기했습니다. 그래도 그림 모임을 그만두진 못했어요. 내가 하자고 했는데 내가 관둔다고 할 수 없었죠. 그래서 좀 더 그림을 배웠는데, 그러나 그릴 만한 게 산이었어요. 문인화는 글이 필요해요. 그래도 내가 글은 좀 쓰니까 그건 괜찮았고.”
그는 자신의 그림을 그리고 나면 만족하지 못해서 쓰레기통에 버리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림 선생님이 쓰레기통에 버린 그의 그림을 가져가 방 안에 전시해놓고 있는 걸 봤다.
“그림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잘 그린 그림과 좋은 그림이죠. 이 박사님의 그림은 잘 그린 그림은 아니지만 좋은 그림입니다. 그림을 보면 어머니 생각, 친구 생각, 과일 생각 등 생각을 많이 나게 만드니까요.”
80여 년 동안 그림을 못 그리던 사람이 자신이 그린 그림을 통해 들은 최초의 칭찬이었다. 그 이후 이 박사의 삶에는 화가로서의 업이 추가됐다. 경인 미술관, 대웅 아트 스페이스 등에서 5번의 전시회를 가졌고, 요즘은 해외에서도 전시 러브콜을 받는 중이라고 한다.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세상 근심이 다 사라집니다. 사물을 자세하게 들여다보게 되고요. 그림에 들어갈 글을 생각하다 보면 시인이 되기도 합니다. 마음이 아름다워지고 더 창조적인 사람이 되는 것 같아요. 마음까지 편해지는 둔감력을 키우며 세로토닌적 삶을 사는 데 문인화가 도움이 됐어요.”
멋지게 살고 싶다고? 고독력을 키워라
많은 독자들이 이 박사에게 한 질문을 던졌다. ‘둔하게 살면서 폼나게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다들 멋지게 사는 방법을 찾고, 실천하고 있습니다. 특히 요즘에는 싱글들이 많은데 혼자서 멋지게 살 수 있는 법이 중요하죠. 우선 봉사활동을 들고 싶습니다. 봉사활동하는 사람들은 정말 착합니다. 월급이 고작 차비 정도지만 그래도 그 사람들은 남의 삶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치고 있어요. 거기에 즐거움과 보람이 있기 때문이겠죠. 그리고 고독력을 길러야 합니다.”
고독감과 고독력은 다르다. 고독감은 추레하고 권태로운 기분이다. 그러나 이 박사가 말하는 고독력이란 솔리튜드(Solitude)를 의미한다. 바로 ‘혼자 있을 수 있는 힘’을 말한다. 이 박사는 큰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의 운명은 고독력이 있는지 없는지가 결정한다고까지 말했다.
“그리고 사색을 해야죠. 예전에 KBS 방송사 사람에게 퀴즈 프로그램 좀 만들지 말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그건 사색이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아이들을 훈련시키는 건 디지털적인 것이에요. 우리에겐 사색을 위한 아날로그적인 사고가 필요합니다. 아날로그적 사고 위에 디지털이 있어야 완벽해지거든요.”
연애를 하며 사는 행복 레이스
이 박사는 강력하게 주장한다. “혼자 잘 살려면 연애를 하라.”
그러나 이 박사가 말하는 연애란 일반적인 좁은 의미의 연애가 아니라 그보다 더 크고 넓은 저변의 연애였다.
“손을 잡고 호텔 가고 하는 차원이 아니고. 어떻게 보면 지적인 거죠. 멋진 아가씨와 대화하면서 커피 한 잔 하면 얼마나 멋있어요? 그게 저에게는 연애예요.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서로 베푸는 것이야말로 연애라고 봅니다.”
이 박사는 돈은 있지만 베풀 데가 없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베푸는 것 자체가 즐거운 것이며 베푸는 게 곧 연애라는 지론은 신선했다. 그렇다면 이 박사에게 있어 연애의 정의는 소통이 아닐까? 베푸는 것도 상대의 진심을 알아야 베풀 수 있는 것이니까.
“그렇습니다. 그리고 베풀기 위해선 가르치는 게 있어야 해요. 가르친다는 게 별 건 아니에요. 내가 하는 걸 보고 그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만드는 거죠. 젊을 때는 인색해야 한다고 봐요. 하지만 나이가 들면 있는 대로 다 베풀어야 해요.”
나이가 들수록 세상을 진지하게 보게 되다
“다 고맙고 항상 감사하는 기분입니다. 난 항상 사회에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특히 문인화를 시작하고 나니 삶을 더욱 진지하게 보게 됐어요. 그림을 그리다 보면 자세히 보게 되거든요.”
이 박사의 베풂은 사회에 대한 애정에 근거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에게 있어 삶의 자극제는 더 나아지는 우리나라를 지켜보는 것이었다.
“제가 경제하고는 거리가 먼데, 신문 경제면을 잘 봅니다. 그걸 보면 어딘가를 지원하고 무언가를 해내는 우리나라 모습이 보여서 자부심에 기분이 좋아요. ‘삼성이 자기 특허를 나눠줬다’, ‘현대는 협력업체들에게 공평하게 이익을 배분했다’, 등 이런 소식들을 볼 때마다 정말로 기분이 좋습니다.”
그 나이에도 여전히 삶의 기쁨을 누리면서 산다는 축복. 이 박사의 미래가 궁금해졌다.
“베이비부머들을 위해 사업을 해야겠다고 다짐했어요. 경치 좋고 물 좋은 땅을 잡고 집을 짓고서, 베이비부머들에게 직능별로 채용공고를 내는 거예요. 일정한 전세금을 내면 집에 들어올 수 있게 하고, 들어오면 능력에 맞는 일감을 주는 겁니다. 살 집과 월급, 그리고 비슷한 나이의 동료들과 단체 생활을 할 수 있게끔 할 겁니다. 그들의 건강을 위해 가이드북도 마련하고요.”
베이비부머를 위해 집, 건강, 경제 활동을 한 번에 해결해준다는 솔루션. 어떤 야심마저 느껴지는 계획이다. 나이도 한계도 잊은 듯한 뜨거운 삶의 태도. 그것이야말로 혼자 잘 노는 이 박사가 견지하는 원칙이자 삶 그 자체가 아닐까.
그녀에게 인터뷰 요청을 하자 어머니 생각을 하며 3일 동안 고심하며 쓴 A4용지 4장 분량의 원고를 보내왔다. 어머니에 대한 내용이었다. 영락없는 조선시대 어머니의 모습이다. 한 남자를 위해 헌신하는 아내, 시부모님께 효도하는 며느리, 그리고 자애로운 어머니. 그래서 안영의 어머니는 신사임당을 닮았다. 이 글은 안 씨가 보낸 글을 바탕으로 했는데, 기자와의 인터뷰도 더해졌다.
그녀는 지금도 또렷이 기억했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날 밤, 어머니의 숨소리가 더 거칠어진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아침이 되자 철없는 그녀와 자매들은 동구 밖으로 은행을 주우러 갔다. 동구 밖 여러 그루의 은행나무에선 비바람 부는 날이면 은행이 후드득 떨어져 온 동네 사람들이 은행을 줍겠다고 모여들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모두 나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은행을 줍고 있었다. 그 속에 섞여 언니들과 신나게 주운 은행을 한 소쿠리에 채워 돌아오니, 어머니는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곧 사랑채에 계시던 할아버지도 모셔오고, 온 가족이 어머니 주위에 둘러앉았다. 숨이 가빠 어쩔 줄 모르던 어머니는 막내인 그녀와 눈을 맞추며 안쓰러워 하셨다. 그렇게 어머니와 작별을 했다. 전쟁 통에 아버지를 보낸 지 5년 만에 어머니는 아버지를 따라가셨다. 그때 그녀의 나이 16세, 여고 1학년이었다.
◇“모두들 어머니를 보살이라고 불렀어요.”
“한학자였던 할아버지에겐 방문객이 정말 많았어요. 그때마다 모든 상차림은 어머니가 맡았죠. 손님뿐만이 아니었어요. 서울에 있을 때도 늘 고향 친척이 함께 묵었고 광주, 전주에 있을 때도 사촌 형제들이 함께 와서 학교를 다녔으니 언제나 대가족이었죠. 어떤 경우에도 자기를 희생하며 모든 사람에게 친절을 베푼 어머니를 친척들은 ‘보살’이라고 불렀어요.”
어머니의 음식 솜씨와 바느질 솜씨 그리고 바른 품행은 시부모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녀의 시부모(안씨의 조부모)는 존중과 사랑으로 며느리를 지극히 아꼈다. 시아버지는 훗날 며느리의 병상이 깊어지자 온갖 한약을 지어다 손수 약탕관에 달이며 정성을 다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런 사랑을 받는 것도 당연한 것이 안씨가 기억하는 어머니는 집에 오는 손님을 잘 대접해야 한다며 예절을 가르치고 바삐 움직이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시부모의 입장에서는 흐뭇한 미소가 일어나는 건은 당연지사였다.
그러나 안씨의 기억 속에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가부장적인 남편이었다. 막내인 안씨를 끔찍하게 귀여워했지만, 어머니를 생각하면 아버지가 밉다는 안씨다. 아버지는 해방 후 군정 당시 중앙청 인사행정처 총무과장, 전라남도 도청 지방 행정 인사처장, 전주 도청 상공 국장, 초대 전주시장 등을 해 전근을 수도 없이 했다. 때문에 공직자들은 물론 이름 있는 예술인들, 안씨 종친들까지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손님들이 오시면 어머니가 음식을 하셨어요. 손님들은 이 산골 벽지에 어찌 이토록 격식 있는 음식이 나오느냐고 놀란 적도 많아요. 큰 손님이 올 때면 아버지는 기생들도 데려다 가야금을 켜게 하셨는데, 어머니는 그때마다 불평 한마디 없이 온갖 음식을 만들어 밥상을 차리셨어요. 어머니의 그 인내와 음식 솜씨는 제가 평생 살아도 따라가지 못하겠더라고요.”
◇6·25, 아버지를 잃고
할아버지는 꿈자리가 사납다고 했다. 공산군이 집을 차지하고 피난 간 아버지가 어디 숨었냐며 안씨 자매의 목에 칼을 들이밀고 얼마 후의 일이다. 그 고약한 꿈자리가 맞는지 확인하기 하기 위해 칠순이 넘은 할아버지는 괴나리봇짐을 등에 지고 50리를 걸었다. 한달음에 달려간 피난처에 아버지는 보이지 않고 동행했던 오빠가 어제 저녁 아버지가 붙잡혀 갔다면서 벌벌 떨고 있더란다. 마침 동네 아주머니로부터 산을 넘어오다가 시체를 여러 구 봤다는 제보를 받고 할아버지는 오빠를 데리고 산자락을 뒤졌다. 아버지의 몸은 차가웠다. 7월 25일, 전쟁이 난 지 꼭 한 달 만에 아버지는 그렇게 공산군에게 총살당했다.
“할아버지는 오빠와 둘이 아버지의 피 묻은 옷을 그대로 산자락에 묻었다고 해요. 그 사실을 어머니에게만 알리고, 어머니는 오랫동안 감추셨어요. 우리들이 놀랄까 봐 울지도 못하고 슬픔을 삼키셨겠죠. 그때 제 나이 11살, 초등학교 5학년이었어요.”
맥아더 장군이 인천 상륙 작전에 성공했다. 방마다 들어와 있던 공산당 무리도 나갔다. 정부는 동사무소 단위로 공안 위원을 뽑아 공산군 색출에 나섰다. 안씨의 오빠는 공안위원으로 뽑혀 공산군에게 복수할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생각은 달랐다. 복수의 칼날이 시퍼렇게 서 있기는커녕 회의에 참석하는 아들에게 말조심하라고 신신당부했다. 도량이 넓은 어머니였다.
“동네 사람들이 공산군과 합세해 우리에게 모질게 굴었지만 복수는 절대로 안 된다고 하셨어요. 혹여 오빠 말 한마디로 양민증을 못 얻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말이죠. 당시에는 위원 중 한 사람만 거부해도 양민증을 받을 수 없었는데, 그 양민증이 없으면 아무데도 못 가거든요.”
◇신앙과 가족 그리고 문학
“사춘기 소녀 시절 부모가 안 계신다는 상실감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웠어요. 할아버지께서는 걱정이 되셨는지 편지로 항상 ‘바르게 크거라’라고 말씀해 주시곤 했죠. 그래서 매일 어머니께 보내는 편지 형식의 일기를 쓰면서 고독을 달랬어요. 그리고 부모님 이름에 누가 될까 더 열심히 공부하고 더 바르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워 준 것은 문학과 가족, 그리고 신앙이었다. 여고 시절 성당에서 울려오는 종소리에 이끌려 들어간 성당 안. 그 성당 한가운데 맨발로 팔 벌려 서 있는 성모상에서 버선발로 달려와 그녀를 반겨주는 어머니의 모습을 봤다고 했다.
“그 이후에 대학을 졸업하고 천주교에 입교해 하느님을 아버지로,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시고 의지하며 마음의 안정을 얻었어요.”
때로는 헛헛한 마음을 채워주지 못할 때 신앙의 힘으로 버텨낸 그녀였다. 그녀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어머니지만,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할아버지라고 했다. 그녀의 소녀 시절 인성 교육에 올바른 길잡이가 돼 주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부모 없이 커가는 손녀에게 펜을 들어 편지를 썼다. 어머니의 베푸는 삶과 할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은 그녀가 문학소녀로 바르게 성장하는 초석이 됐다.
“제가 25세 때 황순원 선생님께서 등단 추천을 할지 말지 고민을 하셨어요. 그러시더니 집에 가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봐야겠다고 하시더군요. 정말로 저희 할아버지가 계신 광양 집에 오시더니 할아버지의 선비 정신에 매료되셨는지 흔쾌히 추천을 해주시더라고요.”
그 계기로 문학계에 등단한 지 올해로 50년, 천주교에 입교한 지도 50년이다. 등단 이후 수많은 수필과 소설 등의 글을 써 왔다. 특히, 그녀의 장편소설 에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모습이 담겨져있다. 신사임당을 닮은 어머니 말이다. 효도만 잘 가르쳐도 더불어 잘 사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녀다. 그런 확신을 펼쳐 보고자 효도로 극진한 신사임당 가정을 택했다고 한다.
배롱나무는 백일홍(百日紅)나무 또는 목백일홍이라고도 한다. 꽃이 적은 여름철에 백일 동안이나 피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하나의 꽃이 그렇게 오랫동안 피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송이의 꽃이 연속적으로 피고지기 때문에 그렇게 보일 뿐이다. 멕시코가 원산인 초본 백일홍과 구별하기 위해 나무백일홍 혹은 목백일홍이라고 부르며, 배롱나무라는 이름도 백일홍나무에서 배기롱나무를 거쳐서 배롱나무가 된 것이다. 예로부터 ‘열흘 붉은 꽃이 없다(花無十日紅)’ 하여 꽃은 수명이 짧은 것으로 여겼는데, 배롱나무가 이처럼 오랫동안 꽃을 피우는 것이 신기해서 이름 붙인 모양이다. 꽃색이 오랫동안 변하지 않는 천일홍(千日紅)이나 여름부터 늦가을까지 화단을 지키는 만수국(萬壽菊)의 작명동기 또한 이와 비슷한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나라에서는 꽃이 오랫동안 피는 것을 보고 이름을 붙였지만, 중국과 일본에서는 비단결 같이 부드러운 수피를 보고 이름을 붙였다. 일본에서는 나무타기의 명수인 원숭이도 이 나무를 타다가 수피가 매끄러워서 떨어진다 하여 사루스베리(猿滑)라고 부른다. 중국에서는 파양수(?痒樹)라는 이름으로 부르는데, 이는 ‘매끄러운 줄기를 긁어주면 모든 나뭇가지가 흔들리면서 간지럼을 타므로 파양수라 한다’라는 중국 명대의 꽃 백과사전 의 기록에서 연유한 것이다. 충청도의 향명에 ‘간지럼나무’, 제주도의 향명에 ‘저금 타는 낭’ 즉 간지럼 타는 나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배롱나무의 매끈한 수피가 여인의 나신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조선시대 사대부집 안채에는 금기시되었던 나무라고 한다. 절에 가면 흔하게 배롱나무를 볼 수 있는데, 이는 이 나무가 나무껍질을 다 벗어 버리듯 스님들 또한 세속의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수행에 용맹정진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종소명 인디카(indica)는 인도가 원산지임을 나타내지만 실제로는 중국남부가 원산지이며, 자주색의 꽃이 핀다 하여 중국이름은 자미화(紫薇花)이다. 중국 사람들은 자미꽃을 매우 좋아하였다. 특히 양귀비와의 로맨스로 유명한 당 현종은 삼성(三省) 중 자신이 업무를 보던 중서성에 배롱나무를 심고, 황제에 즉위한 해에 중서성의 이름을 자미성으로 고쳤다고 한다. 지금도 중국과 대만 여러 도시의 시화(市花)로 지정될 정도로 사랑을 받고 있다.
한여름에 꽃을 피우는 배롱나무는 추위에 약하기 때문에 소쇄원, 식영정, 명옥헌 등 남부지방의 전통조경공간에서 정원의 화목으로 많이 볼 수 있다. 특히 명옥헌 원림의 연못 주위에는 스물여덟 그루의 붉디붉은 배롱나무가 7월부터 백일 동안 도연명의 무릉도원을 재현한다. 배롱나무의 또 다른 이름인 자미목(紫薇木)은 도교의 선계 중 하나인 자미탄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따라서 배롱꽃 만발한 명옥헌은 조선시대 선비들에게 있어서 선계이자 이상향인 셈이다.
무더운 여름날 속세를 떠나 배롱꽃 만발한 별천지로 떠나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모과나무의 종소명 시넨시스(sinensis)는 중국이 원산인 것을 나타내며, 중국에서는 2,000년 전부터 열매를 약제로 사용했다. 모과나무가 우리나라에서 과수로 식재된 기록으로는 조선시대 광해조 때 허균이 쓴 에 예천에서 생산되는 맛있고 배같이 즙을 많은 과일로 소개되어 있다. 당시의 모과는 맛있는 과일로 소개되어 있지만, 사실 모과는 과일이면서도 과육이 석세포로 되어 있어 생식을 할 수 없어 과일대접을 받지 못 하고 있다. 하지만 모과의 향기만은 어느 과일이나 꽃에 비길 데 없이 좋아서, 예로부터 풍류를 즐기는 선비의 문갑 위에 한자리를 차지하기도 했다. 지금도 모과가 나오는 철이면 승용차 안의 방향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모과를 보고 세 번 놀란다고 한다. 먼저 못 생긴 열매를 보고 한번 놀라고, 그 다음에 향기로운 향에 한번 더 놀라고, 마지막으로 열매의 떫은 맛에 깜짝 놀란다고 한다.
모과란 이름은 중국이름 목과(木瓜)가 발음하기 편한 모과(木瓜)로 변한 것으로, 나무[木]에 참외같은 열매[瓜]가 달린다는 데서 유래된 것이다. 하지만 매끈하게 잘 생긴 참외와는 달리 울퉁불퉁하고 못 생긴 과일로 이름이 나 있다. 그래서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키고, 과일전 망신은 모과가 시킨다'는 말이 생겼고, 못생긴 사람을 가리켜 ‘모과같이 생겼다’라고 한다.
10월에 노랗게 익는 모과는 향기는 좋지만 과육이 딱딱하고 신맛이 강해서 생으로 먹을 수는 없다. 차, 잼, 과일주로 만들어 먹는데 기침과 가래를 삭이는 데는 모과차를 최고로 친다. 이 외에도 감기,천식,토사,곽난,각기 등에 효과가 좋은 민간약제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또 나무의 재질이 붉고 치밀하며 광택이 나기 때문에 고급 가구재로 사용되었다. 모과나무로 만든 장롱을 화류장(樺榴欌)이라 하여, 자단(紫檀), 화류(樺榴) 등으로 만든 진품 화류장의 모조품으로 화류장 구실을 했다. 놀부가 흥부 집에 가서 얻어가는 화초장도 바로 이 모과나무로 만든 장롱이다.
연분홍색의 아름다운 꽃과, 나무가 오래될수록 껍질이 비늘 조각처럼 벗겨지는 수피도 운치가 있기 때문에 예전부터 정자목으로 많이 활용되었다. 청원 연제리의 천연기념물 제522호 모과나무를 비롯하여,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모과나무인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용수리에 있는 수령 1,000년을 헤아리는 노거수 등 보호수로 지정된 것도 20여 그루에 이른다. 이러한 모과나무가 최근에 조경수로 각광을 받기 시작하면서, 조상들이 남겨준 노거수들이 수난을 겪고 있다고 한다. 못 생겨서 비난 받고, 잘 생겨서 수난 받는 모과나무의 불편한 진실이랄까.